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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원일 제1장 유전(流轉) 4.박일주

4. 박일주 오일중이 애초에 끈 떨어진 포교들을 불러 모았던 것은 그들의 딱한 사정을 조금이라도 도와주려는 의도였다. 자신 역시 수년간을 포도청 포교로 지내봐서 그들의 배고픔과 고충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본래 포도청의 포교란 종사관 바로 밑의 종 6품인 포도부장을 일컷는 말이었다. 그러나 막상 포도청에    몸담고 있는 그들은 포도부장과는 별개로 겸록부장(兼祿部長)이나 무료부장(無料部將)을 포교라 통칭했다. 그런데 매달 녹미(祿米)가 얼마씩이라도 나오는 겸록부장과는 달리 무료부장은 실상은 품계도 녹미도 없었다. 본래 포교란 게 보기엔 그럴듯해서 붉은 술 달린 전립을 보란 듯이 쓰고 붉으죽죽한 허리끈과 오랏줄을 척 차고 나서면 죄 없는 사람도 찔끔하게 마련이라 제법 위엄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

오늘의 소설 2024.05.10

송원일 제1장 유전(流轉) 3.송파 나루

3. 송파 나루상제벌 물가에서 급히 배를 저어 두물머리를 벗어난 사람은 송파 사람 문일평이었다. 애초에 갈길이 바빴던 그는 밧줄을 풀자말자 뱃전을 밀고 훌쩍 뛰어올랐다. 이때 아이는 바를 던진 바로 그 판장 바닥에 있었건만 문일평이 알리가 없었다. 문일평은 어두운 바닥을 더듬어 상앗대를 찾아들고 배를 깊은 곳으로 띠웠다. 배가 둥실 뜨자 얼른 선미로 다가가 노를 쥐고 뱃머리 넘어 물길을 살폈다. 열하루라 하나 구름에 가린 달빛은 강바닥과 땅바닥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문일평은 눈을 크게 뜨고 배가 나아갈 방향을 살폈다. 차차 어둠에 눈이 익자 산세와 물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장 선수를 틀어 하류로 방향을 잡았다. 한데 이물 쪽 낮은 판장 너머에 눈길을 끄는 희끗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오늘의 소설 2024.05.09

송원일 제1장 유전(流轉) 2.유랑민들

2. 유랑민들광릉(光陵)의 이곡 골짜기는 숲이 우거지고 터가 넓어 이십여 채의 움막을 짓기에 넉넉하였다. 좌우가 산이요 오솔길이 또한 여러 갈래라 동서남북 어디라도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유랑민들이 이곳에다 움막을 지은 것은 지난가을이었다. 이곳은 외진 골짜기인데다, 동북으로는 포천현이 가깝고 서북 쪽에는 양주가 역시 가까운데 남으로는 다락원이 지척에 있었다. 그림으로 그린다면 삼각형의 중앙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러니 흩어져 동냥을 하기도 좋고 뭉쳐서 약탈을 하기도 좋을 뿐 아니라 여차하면 튀기도 좋은 곳이었다. 유랑민들은 이곳에서 아무 탈 없이 겨울을 넘긴 것이다. 이곳에 유랑민이 모여 있는 것을 관에서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동안 유랑민들의 행패가 그리 심하지 않았고 관아가 나서서..

오늘의 소설 2024.05.09

송원일 제1장 유전(流轉) 1.박살난 가문

제1장,유전(流轉)1. 박살난 가문"어서 오시오, 우상.""대감, 그간 강녕하셨는지요.""허허 우상의 염려 지덕(念慮之德)에 아직은 견딜만 하오이다 그려."인경(人定)이 울리고도 한참이 지난 깊은 밤, 전동(典洞) 장현의 집에 김석주가 찾아들었다. 이미 전갈이 있었던 듯 으슥한 별실에는 팔뚝같이 굵은 청국산 황초가 불빛을 일렁이며 잘 차려진 술상을 비추고 있었다. "이리로 앉으시지요 우상.""아, 천만의 말씀 올시다, 대감."장현이 상석을 권하는 척하자 황급히 손을 내젓는 김석주였다."손님이신 우상이 이리로 앉는 것이 옳을 것인즉, 사양치 마시오. 허허.""허어,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엄연하거늘 거 무슨 말씀 이오이까."이때 장현의 나이 예순일곱이요, 김석주는 마흔다섯 살이었다. 결국 장현이 마지못한 듯..

오늘의 소설 2024.05.08

송원일 서장(序章) 9.대폭발

9. 대폭발"그래, 정일이와 덕출이가 떠날 때, 노자는 넉넉히 내렸는가?""아, 예. 나으리, 엽전으로다 열 냥씩 주었습니다. 그거면 두어 달은 지낼 만할    겝니다."왜국 역관 신지남 보다 하루 먼저 동래로 떠난 곽정일과 덕출이가 객지에서 고생할 것이 마음이 쓰인 송수호가 애둘러 노비(路費) 걱정을 하였다. 쌀이 한 석에 두 냥이니 열 냥씩이면 도중 노비로 넉넉하겠으니 그나마 다행이리라. 먼 길을 가면서 무거운 쌀이나 무명을 지고 가지 않는 것은 엽전이라 불리는 상평통보 덕분이었다. 지난 해인 무오(戊午1678) 년 봄 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상평통보가 도성 안에서만 쓰이기 시작하더니, 경기도로 충청도로 빠르게 퍼져나가서 금년부터는 조선 팔도 어디서나 엽전을 받아 주었다. 엽전은 같은 가치로 따져보면,..

오늘의 소설 2024.05.08

송원일 서장(序章) 8.사헌부

8. 사헌부그로부터 3년이 지난 무오(戊午1678) 년, 승문원의 판교(判校)이던 정 3품의 황우진이 정2품 예조판서로 승품(陞品) 되어갈 적에, 문장 좋고 활달한 송윤호도 예조로 데리고 갔는데, 그때 송윤호의 품계도 올라 정 6품의 좌랑(佐郞)이 되었다. 예조에서 송윤호가 새로 맡아보게 된 일은 주로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과거시험이라는 것이 예조에서 독단으로 행하는 것이 아닌 만큼, 승지(承旨)들을 통해 왕명을 받는 것에서부터 육조(六曹)의 관원들은 물론이요, 심지어, 길일(吉日)을 가리기 위해 관상감의 관원들까지 두루 만나고 다녀야 하였다. 그러다 보니    송윤호의 서글서글한 성격이 사람들 사이에 알려져 육조에서부터, 홍문관, 예문관, 승문원 할 것 없이 가까이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이해..

오늘의 소설 2024.05.08

송원일 서장(序章) 7.과거 시험

7. 과거 시험팔도가 기근에 신음하던 신해년에 허참봉과 송윤호 형제는 그 해를 무사히 넘겼으나 나락 한 톨 없는 백성들은 숱하게 죽어나갔다. 도성 밖은 물론이려니와 임금이 사는 도성 안에서 굶어죽은 송장이 시구문(屍口門)을 가득 메웠고 그나마 내다 버릴 힘이 없어 방치되거나 가족이 몰살하여 임자 없는 송장 또한 수천 구(軀)여서 승병(僧兵)들을 동원하여 도성 밖에다 한꺼번에 파묻고 말았다. 다음 해의 봄이 되자 죽은 사람은 죽고 산 사람은 또 살아야 하겠기에 논밭을 갈아엎고 씨앗을 뿌리니 다행히도 임자 년인 그해 가을에는 하늘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평년작은 되었다. 다음 해도 그 다음해 도 경신양년(庚辛兩年) 같지는 않아서 굶어 죽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재위 기간 내내 천재지변과 기근으로 백성들이 죽으..

오늘의 소설 2024.05.08

송원일 서장(序章) 6.흉년

6. 흉년나라가 생긴 이래 어느 때고 한 번이라도 순우 순풍(順雨順風)에 풍년이 들어 만 백성이 배불리 먹은 해는 없었지만 그래도 현종(顯宗) 11년과 12년의 소위 경신 대기근 같은 때는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경술, 신해 두 해 만이 아니고 현종 임금이 등극하던 을해(乙亥) 년부터 승하한 갑인(甲寅) 년까지 내리 십오 년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흉년으로 인한 기근이 팔도를 휩쓴 것이다. 참으로 불행한 임금이었다. 아버지 효종의 뒤를 이어 18세에 왕위에 올랐는데 그 해 봄부터 기근이 시작되더니 개국이래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흉년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때를 같이하여 부왕의 승하(昇遐)로 벌어진 예송논쟁으로 신하들은 끝없는 설전을 하고 있었다. 논쟁의 시작은 다름 아니었다. 부왕이 승하하자 부왕의..

오늘의 소설 2024.05.07

송원일 서장(序章) 5. 송윤호

5. 송윤호"어머니, 편히 주무셨는지요?"                                                                                                                                                                                        "음, 잘 잤네. 어젯 밤엔 늦었나 보더구나.""네, 동료들과 술을 한잔하느라고 늦었습니다""그래 잘했다. 그 사람들도 고생이 많을 게야."어미 한 씨가 송수호가 건네는 인사를 받는 한편, 자고 있는 손자에게 눈을 돌리며 한껏 웃음을 머금었다. "아이고 이 녀석은 먹고자고 먹고자고 잘도 자는구나"자는 아이의 포대기를 여미는 손길이 그렇게 애..

오늘의 소설 2024.05.07

송원일 서장(序章) 4.다짐

4. 다짐"그래 뭐가 좀 나오던가?"미리 와 기다리던 송수호에게 앉으라는 손짓과 함께 이헌조가 한 말이다. 낮에 관청에서 눈짓을 한 것은 바로 이헌조의 소실이 사는 이곳에서 만나자는 둘만의 신호였다. 기생을 소실로 들여 앉혀 종종 사헌부 관원들과 밀담을 나누는 장소로 쓰였는데 종루 뒤의 술집 골목에 있어 남의 눈을 피하기도 좋았다. "예, 영감(令監) 거의 도달한 것 같습니다."돈의 출처를 알아냈단 말인가?""그 뿐 아니옵고 그 돈이 흘러든 곳도 알아냈습니다.""뭐라고? 돈의 향방(向方)까지 알아냈단 말이지?"생각 밖의 말에 이헌조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무릎을 탁 쳤다."됐네, 그동안 노고가 많았네. 이제 우상 대감을 만나는 일만 남았군.""영감, 아니 되오이다.""안되다니?    돈이 나온 곳과 그 돈이..

오늘의 소설 20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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