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송파 나루
상제벌 물가에서 급히 배를 저어 두물머리를 벗어난 사람은 송파 사람 문일평이었다. 애초에 갈길이 바빴던 그는 밧줄을 풀자말자 뱃전을 밀고 훌쩍 뛰어올랐다. 이때 아이는 바를 던진 바로 그 판장 바닥에 있었건만 문일평이 알리가 없었다. 문일평은 어두운 바닥을 더듬어 상앗대를 찾아들고 배를 깊은 곳으로 띠웠다. 배가 둥실 뜨자 얼른 선미로 다가가 노를 쥐고 뱃머리 넘어 물길을 살폈다. 열하루라 하나 구름에 가린 달빛은 강바닥과 땅바닥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문일평은 눈을 크게 뜨고 배가 나아갈 방향을 살폈다. 차차 어둠에 눈이 익자 산세와 물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장 선수를 틀어 하류로 방향을 잡았다. 한데 이물 쪽 낮은 판장 너머에 눈길을 끄는 희끗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작은 보따리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누가 겉옷을 벗어던져 놓은 것 같기도 했다. 문일평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지만 두물머리 코빼기가 얼마 남지 않은 곳이어서 노를 놓고 뱃머리로 다가가기가 여의치 않았다. 두물머리를 벗어난다 해도 강 가운데 족자 섬이 있고 섬을 비켜나면 일 마장도 못가 또 쇠말곶이 버티고 있어 언제 배가 바위에 부딧칠지 모를 노릇이었다. 게다가 쇠말곶을 휘돌아 이어지는 물길은 사뭇 가팔라서 와부까지 30여 리는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했다. 일단 두물머리는 벗어나고 볼 일이었다. 문일평은 급히 노를 저어 배를 강 가운데로 몰아넣었다. 코앞에 길게 족자 섬이 누워 있었다. 섬을 끼고 다시 일 마장쯤 나아가자 이어 쇠말의 모래톱이 희끄무레 보였다. 문일평은 부지런히 노를 저어 얼른 그곳을 벗어났다. 모래톱을 지나 쇠말산 비석골 어름에 이르자 물길이 빨라 지기 시작했다. 문일평은 재빨리 노를 키 삼아 물길을 타기 시작했다. 강은 거듭된 가뭄으로 예년의 반 정도였으나 그래도 강심의 유속은 빨랐다. 십여 리는 내려왔어도 송파까지 가려면 60여 리를 더 가야하니 유속이 좀 더 빠른 강심이 유리할 터였다. 문일평은 배가 강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모로 세운 노에 힘을 실었다. 문일평은 마음이 조급했다. 예정대로라면 낮에 도착했어야 했던 것인데 지금은 삼경이 지나고 있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뱃머리에 있는 물건에 자꾸만 눈이 갔다. 그러나 아직은 노를 놓을 수 없었다. 산천은 불빛 한 점 없었다. 간혹 구름 사이의 달빛을 받은 강은 때론 번들거리고 물길이 빠른 곳엔 은린(銀鱗)이 되어 번쩍였다. 좌우의 검은 산 그림자가 병풍을 세운 듯한 사이로 배는 빠르게 떠 내리고 있었다. 얼마쯤의 시각이 흘렀을까, 급류의 끝을 지났는지 배의 속력이 서서히 느려지더니 흔들림마저 없어졌다. 문일평은 노를 뽑아 뱃전에 걸친 후 선수 쪽으로 다가갔다. 처음부터 궁금하던 판장 밑의 물건을 확인해 보려는 것이다.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 먼저, 몸을 굽혀 어둠 속의 물건을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문일평은 흠칫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니, 물러나려다 판장에 걸려 좁은 뱃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이거, 어떤 놈이 죽은 애를....'
'이걸 어째?'
뱃전을 짚고 벌떡 일어난 문일평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마음을 다잡아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강에다 던져버릴 참이었다. 그런데 아이의 한쪽 다리를 드는 순간 다른 쪽 다리가 꿈틀하더니 손을 툭 건드렸다. 문일평은 처음보다 더 놀라 얼른 바닥에 아이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아픔을 느낀 아이가 쉰 목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는소리도 크지 않았고 울음도 금세 그쳤다.
'빌어먹을.... 이걸 어쩌지?'
문일평은 난감했다. 죽었다면 차라리 간단했을 것을 산 것을 물에 던지기는 좀 찜찜한 노릇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다시 아이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크기나 무게로 보아 돌은 지난 것 같았다. 울음을 그친 아이는 몸을 가볍게 떨고 있었다.
'상제벌 뉘 집 애일까? 하필 왜 여기다 버렸단 말인가?'
'아차, 그럴지도.'
그 순간 문일평은 어째서 아이가 이 배에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낮에 상제벌에서 일어난 소동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강뚝에 매어 둔 장 첨지네 암소에게 밟힌 낯선 걸인의 불행은 온 마을이 다 알았다. 며칠을 굶었는지 피골이 상접한 거지가 암소의 젖을 훔쳐 먹으려다 되려 당했다고 했다. 그러나 문일평은 지금의 상황으로 보아 그 걸인이 소에 밟힌 것은 자신의 배를 채우려던 것이 아니라 이 아이의 젖을 구하려던 거라 믿었다. 아무리 배가 고프기로서니 어른이 소젖을 훔쳐 먹었단 소리는 오늘날까지 듣지 못한 것이다. 의원도 없는 동네라 소에 밟힌 걸인은 장 첨지네 빈 헛간에 던져두었다니 지금쯤 죽었을지도 몰랐다. 허면, 그게 벌써 어제 낮에 일어난 일이니 그렇다면 이 아이는 언제부터 굶었을지 짐작도 못할 일이 아닌가? 이 아이 역시 움직임이 신통치 않은 걸로 보아 오래갈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생하다가 죽느니 차라리 미리 저승으로 곱게 보내는 것이 나을 듯도 싶었다. 그러나 문일평 자신도 고만고만한 아이를 둔 처지여서 산 것을 물에다 선뜻 처넣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쩔까 망설이는 사이, 키도 없는데다 노도 젓지 않아 방향을 잡지 못한 배가 한차례 빙그르르 돌았다. 제정신이 든 문일평은 아이를 바닥에 눕힌 다음 노를 끼워 선두를 하류로 향했다. 그리고 천천히 노를 젓기 시작했다. 이곳의 강폭은 상류에 댈 바가 아니게 넓고 물 흐름이 완만해 노를 젓지 않으면 속력이 나지 않았다. 노를 젓는 동안에도 문일평은 아이를 어쩔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다. 한동안 바람 한 점 없는 강상에 삐걱대는 노젓는 소리가 고요한 여름밤에 퍼졌다. 어느덧 아차산이 코앞이었다. 이제 곧 광나루 지나 송파에 닿을 것이다. 그때 아차산 맞은편인 구암사 쪽에서 붉그레한 빛이 껌벅거리며 흔들렸다. 그쪽엔 집도 주막도 없는 곳이었다. 빛이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문일평의 배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그 빛은 뱃머리에 매단 등에서 비치는 것이었고 엄청 빠른 속도였다. 보나 마나 노 젓는 소리를 듣고 다가오는 기찰선일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등불 뒤에 검은 더그레 자락이 보이더니 뱃머리에 한쪽 발을 걸친 놈이 방망이를 쑥 내밀며 소리쳤다.
"웬 놈이관데 야밤에 도강을 하느냐?"
불빛에 비친 놈의 복색을 보니 붉은 술을 매단 전립에 불그죽죽한 허리띠를 맨 장교였다. 장교 뒤에는 노를 쥐고 앉은 두 명 졸개의 벙거지 쓴 뒷꼭지가 보였다.
"도강이 아니요."
"뭐라? 도강이 아니다? 그럼, 이 야심한 밤에 뱃놀이를 나왔단 말이냐?"
"나, 송파 여각 문일평이요."
"뭐라고? 송파 여각?"
사실, 장교는 문일평의 배에 닿자말자 그가 지난봄에 송파에서 여각을 새로 시작한 사람인 것을 알아보았었다. 하나, 나루의 책임자인 도승(渡丞)은 물론, 자신에게 여태 쓴 막걸리 값 한 푼 없던 문일평이 괴씸했던 것이다. 순간 문일평도 그런 낌새를 느꼈다.
"허, 이보우, 군관 나으리. 우린 아주 모르는 사이도 아닐 것인데 왜 이러나?"
"음? 그러고 보니 알 것도 같구먼. 송파에서 제일 크다는 여각의 주인이시군. 그래 주인께선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이 밤에 용왕님께 빌러 나오셨수?"
자신이 누군지 알면서도 계속 어긋장을 놓는 장교란 놈이 괘씸해서 문일평은 좀 세게 나가기로 했다. 상제벌에 웅크린 전 포도청 종사관 오일중을 팔기로 한 것이다. 오일중은 십여 년을 우포청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한양의 살주계를 무너뜨린 매서운 인물이었다. 살주계(殺主契)란 글자 그대로 주인을 죽이자고 맹약한 고관 댁 종들의 모임이었다. 사실 이 계가 생겨나기는 백 년도 더 된 성종(成宗) 시절인데 세월과 함께 간간이 발생하던 살인이 지난 경신 대기근 때에는 극에 달해서 사흘 도리로 전 현직을 막론한 고관들이 종의 손에 죽어갔다. 계원들과 함께 주인을 죽인 종은 도타하거나 잡혀 죽으면서도 배후를 부는 법이 없었다. 평소에 내로라하던 도성 안 명문거족들은 공포에 떨었다. 자연히 조정에서도 대책을 강구하게끔 되자 좌우 포도청에서 인정받던 오일중이 뽑혔다. 오일중이 밤낮으로 놈들의 전모를 파고들어 윗대가리를 잡아죽여서 결국 살주계는 흩어져 와해되고 말았다. 그러나 살주계가 완전히 뿌리가 뽑힌 것은 아니어서 이후에도 검계와 손을 잡고 줄기차게 주인을 살해하며 저항하게 된다. 그러나 그건 나중의 일이니 넘어가자. 지난 3월이었다. 포도 대장이던 신여철이 총융사에 제수되어 그날로 병부를 받아 자리를 옮기니 남인계의 줄을 탔던 오일중은 입장이 난처했다. 그날 신여철과 함께 입궐했던 공조판서 유혁연은 해임되었다가 얼마 후 사약을 받았다. 그도 남인이었다. 오일중이 눈치를 보아하니 남인이 하나둘 떨려나고 서인이 득세를 하고 있었다. 오일중은 한미(寒微)한 집안에서 눈치 하나로 종 5품의 종사관까지 올라온 인물이라 사태를 보는 눈 또한 밝았다. 이제까지의 경험과 판세로 보아 남인들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진작에 알아챘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까지 상관으로 모시던 신여철을 따라 총융사로 가지 않았다. 물론 신여철도 도둑 잡는 일이라면 모를까 서인의 세상이 될 이 마당에 남인 계인 오일중을 굳이 데려갈 마음이 없었다. 오일중은 본향(本鄕)인 양근으로 물러나 추이를 관망하기로 했다. 결국 오일중의 예상이 맞았다. 남인의 몰락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남인의 몰락은 이미 지난 해인 기미(己未1679) 년 말에 예고되어 있었다. 이제까지 잘 나가던 우찬성 윤휴가 왕의 눈 밖에 벗어난 것이 시초였다. 부체찰사로 거론되던 김석주를 윤휴가 나서 불가하다고 결사반대를 하자 왕이 노한 것이다. 천하의 꾀보 김석주는 왕의 외척이니 가득이나 밉게보고 있던 남인인 윤휴를 왕이 그냥 둘 리가 없었다. 이어서 이조판서 이원정을 삭탈관직하는 것을 시작으로 좌의정 민희, 우의정 오시수가 떨려나고 윤휴 또한 극변으로 귀양을 갔다. 지난 4월에는 결국 애비의 위세를 믿고 날뛰던 허견이 역모죄로 군기시 앞에서 사지가 찟기는 거열형에 처해졌다. 게다가 같이 역모로 몰린 복선군은 교형(絞刑)에 처하고 복창군 이정은 사사(賜死), 막내 복평군 이연은 원방에 위리안치되었다. 뿐이랴, 유악(帷幄) 사건으로 지탄을 받던 허적이 결국엔 서자 견의 역모 건으로 사사되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남인들의 목이 떨어지는 피바람이 예상되던 것이다. 오일중은 한양과 가까워 소식이 빠르고 진퇴가 용이한 용담으로 자리를 옮겼다. 북한강과 남한강의 두 물이 서로 만나는 두물머리인 상제벌을 새로운 근거지로 삼은 것이다. 그런 다음, 포청에서 떨려나 생계가 막연하던 포교들을 슬금슬금 불러 모아 수하로 삼았다. 남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상조회(相助會)라는 경강상인들의 조합을 구성했다. 그리고는 강변의 왈자들을 하나하나 손아귀에 넣었다. 시중의 객주와 무뢰배들 중에 오일중에게 항거하려는 자는 없었다. 오일중의 욕을 하던 삼개나루 왈자들의 두령 황개가 강변에 목이 잘린 채 뒹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누구의 짓인지 대강 알고 있었지만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포청에서도 오일중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경강의 객주들이나 무뢰배들은 평소에도 그를 호랑이보다 무서워했었지만 근자에는 그를 염라대왕으로 여겨 받들었다. 그가 최근 들어 슬슬 세력을 넓히며 객주와 여각들의 중개인으로 그의 수하를 박기 시작했다.
"그깟 용왕에게 빌어서 무얼 하게? 실은 상제벌 오회주님을 만나 뵙고 오는 길일세. 그래야 송파 나루도 무탈할 것 아닌가?"
"뭐요? 오회주님을? 그래, 회주님은 강녕하십디까?"
"연세에 비해 젊은 놈 뺨치기 딱 좋으시더군."
"그래 가셨던 일은 잘 되시었수?"
"잘 되었으니 새벽같이 달려오는 것 아니겠나?"
"이젠 여각이 불일 듯 일어나겠수. 그때는 우리도 덕택에 입다심 좀 합시다."
"헛, 그때까지 기다릴 것 있나? 옛 네. 새벽 참에 해정이라도 하게들."
여각 주인인 자신을 가볍게 여기는 장교 놈이 미웠지만 어차피 송파에서 장사를 해 먹자면 좋은 얼굴로 지내는 것이 나은지라 문일평은 선뜻 엽전 두 꿰미를 건넸다.
"웬 걸 이렇게까지?"
그러지 않아도 술값을 울궈 낼 참이었는데 미리 알아서 주는 데다 예상보다 곱절이 넘으니 흡족한 장교가 껄껄 웃으며 문일평에게 군례를 절커덕 붙였다. 그러다 문일평 발밑의 보따리에 눈이 간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뱃머리의 등불을 벗겨 뱃바닥의 아이에게 들이댔다.
"이키, 이거 뭐요? 애 송장 아니우?"
애를 숨기는 걸 깜박한 문일평이 아차 했을 땐 이미 늦었다. 그래서 얼른 발을 빼기로 했다.
"송장이면 차라리 다행이게? 물에다 던지면 되니까. 하나, 이거 웬 놈이 내 뱃전에다 산 애를 버리고 갔네. 나도 애를 키우는 입장이라 산목숨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네만 이걸 어쩌면 좋겠나?"
"흉년이라 애 버리는 놈이 어디 한 둘이래야 말이지요. 우리도 강에 떠내려오는 애 송장은 하루에도 몇 구씩 보지요. 눈 딱 감고 버리시우. 못 본 척할 테니."
"그건 송장이라 그렇다 쳐도 이건 산목숨 아닌가?"
"아, 산 놈이 죽으면 송장이지 별 수 있수? 그럼 송장이 되면 그때 버리시우."
"허, 이걸 어쩌나. 집에 데려갔다간 마누라에게 쫓겨 날 테구."
"허긴 그렇기두 할 거유. 첩에서 난 제 새끼라도 요즘 같은 흉년에 집안에 들일 팔푼이가 있겠수? 아마 쫓겨나기 전에 미친놈 취급부터 받을 게유."
"그러니 말일세. 그러니 이걸 어쩌지?"
그때, 줄곧 두 사람의 오가는 말만 듣던 두 놈의 노꾼 중에 한 놈이 불쑥 나섰다.
"내가 여각 주인 나으리의 어려움을 덜어 드리겠수."
"뭐야? 자네가? 나 대신 죽여주겠다고?"
"에이 설마 그런 짓이야 하겠수? 천벌을 받을 일이지요. 마침 애를 원하는 집이 있어 그럽지요. 그 대신 나으리께선.... 히힛."
"이놈 보게? 탁배기가 쳐 먹고 싶으면 고이 사달랠 일이지. 자기 자식도 굶겨 죽이는 이 흉년에 애를 원하는 집이 어디 있단 말이냐?"
노나 저을 것이지 촐싹대고 나서는 졸개에게 장교가 눈알을 부라리며 딱딱거렸다. 그러나 지금의 문일평에겐 구원의 목소리였다.
"가만, 그래만 준다면 내가 자네에게 신발차로다 반 냥을 줌세."
"예? 아, 나으리 그럽지요. 그러고 말굽쇼."
혹시 문일평이 말을 바꿀까 겁을 내 듯 졸개가 뱃전을 당겨 아이를 얼른 안아 들었다.
"자, 짚신 값이네."
문일평은 엽낭을 끌러 반 꿰미 정도의 돈을 꺼내 졸개의 무릎에 던져 주었다. 그 꼴을 본 장교는 문일평에게 받은 돈을 혼자 먹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눈을 감아주기로 맘먹었다.
"그럼 수고들 하시게. 나는 가네."
"그러시우. 허고 담부터 우리 애들 만나거든 모른 척은 마시우."
"여부가 있나? 나도 이제부턴 자네들 신세를 부지런히 지게 될 걸세. 하핫."
기찰선이 먼저 문일평의 배를 밀어 방향을 돌리더니 노를 젓기 시작했다. 이를 본 문일평도 노를 저으니 두 배는 순식간에 멀어져 기찰선의 등불이 반딧불만큼이나 작게 보였다. 나루가 가까워질수록 물 흐름도 느려서 문일평은 더욱 부지런히 노를 저어야 했다. 이윽고 배는 송파 나루의 모랫바닥에 닿았다.
사실 송파 나루에 배가 제대로 들락거리고 장삿꾼이 꼬이기 시작한 것이 불과 사오 년 전부터였다. 송파는 본래 경기 지경인 광주로 오가는 길목으로 세종조 이래로 근 이백 년을 삼전 나루를 이용했던 것을 병자호란 후에 청에 굴복해 세운 삼전도 비(碑)가 보기 싫어 두어 마장 옆으로 나루터를 옮긴 것이다. 어쨌든 송파는 나루로서의 조건이 좋았다. 남쪽 언덕 아래 완만한 물길은 배를 대기 좋았고 수심도 깊은 편이라 세곡선이나 조운선 같은 큰 배도 닻을 내릴 만 하였다. 그러나 나루를 열고도 수 년이 지나도록 삼전 나루만큼 사람들이 꼬이지 않았다. 기존의 삼전 나루에 비해 주막이나 여각의 숫자가 적었고 장시도 크게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수 년 전부터 송상이 철원에서 평강 길을 통해 원산까지 새 길을 개척해서 북어를 싣고 솔모루를 거쳐 송파에다 짐을 풀기 시작하자 조금씩 장시로서의 꼴이 잡히기 시작했다. 무명이나 곡식을 팔고 북어를 사려고 사방에서 송파로 장삿꾼이 몰려온 것이다. 송상이 북어를 도성 안 육의전으로 곧바로 가져가지 않고 송파에 내리는 것은 송상대로의 계산이 있어서였다. 북어를 종루께 있는 어물전에 넘기려면 시전의 실임(實任)이란 자가 턱없이 물건값을 후려쳐 죽을 고생을 하며 갖고 온 것을 거의 공으로 먹으려 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군관에서 시전의 무뢰배까지 죄다 북어에 눈독을 들이고 술값을 울궈 먹었다. 사실 북어는 시전에 넘기지 않아도 펼쳐만 놓으면 불티나게 팔리는 물목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도성 안 아무 데서나 난장을 벌려 팔 수도 없으니 송상이 봤을 때는 금난전권이 미치지 않는 송파가 적격인 장소였다. 일단 북어를 송파로 갖고 오기만 하면 삼남으로 무한정 팔 수도 있고 숭례문 밖 칠패에서도 서로 사려고 덤볐다. 또한 근래에 새로 생긴 서소문 밖의 외어물전에서도 북어를 사러 송파로 왔다. 한 마디로 송파는 사통팔달의 장소였다. 이렇듯 송상의 물건이 도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니 내 어물전에서는 북어는커녕 노가리 한 마리 구경할 수가 없게 되었다. 어물전에서도 할 수없이 송상에게 제값으로 북어를 매입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송파가 송상으로 인해 장시가 열리니 차차 다른 물종들도 장날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 팔도의 다른 시장도 마찬가지지만 송파가 좀 더 활기를 띠게 된 원인은 엽전이 제대로 쓰이고부터였다. 상평통보가 쓰인지 불과 이삼 년만에 물물 교환의 불편이 사라진 것이다. 전국의 장시나 송파의 쇠전거리가 흥청이기 시작한 것도 솔직히 말하면 엽전의 위력이었다. 엽전이 나오기 전에는 소를 한 마리 사려면 그 값으로 쌀이나 무명으로 대신해야 했다. 그러나 무슨 수로 그 무거운 것을 들고 다니겠는가? 송파의 쇠전 마당도 송상의 쇠 살주가 한수 이북에서 몰고 온 소가 태반이었다. 송파 나루는 엽전과 함께 번성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송파나루에 관선이 뜨기 시작하고 수어청(守禦廳) 소속의 진군(津軍)과 도승(渡丞)이 파견된 것 역시 근자에 생긴 일이었다. 도승은 송파 나루와 함께 광나루와 삼전 나루도 관할 지역으로 삼았다.
밧줄을 끌어 배를 모래톱에 올린 문일평이 언덕 위 주막을 지날 쯤 날이 밝으려는지 하늘엔 희미한 빛이 돌았다. 문일평은 쇠전 거리를 지나 장마당으로 들어섰다. 곳곳에서 집을 짓느라 길가에 목재가 쌓였고 부지런한 바침술집에선 술을 거르는지 불빛과 함께 잘 익은 술 냄새가 풍겨 왔다. 주막과 객주가 들어서고 갖가지 장삿꾼들이 꼬이자 바침술집 또한 제 철을 만난 듯했다. 송파 장시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커질 것이었다.
'두고 봐라. 내 반드시 이곳을 손아귀에 넣고 말 테니.'
시전 상인의 집안에서 장사하는 것만 보고 자란 문일평은 진작 송파의 앞날을 본 사람이었다. 아니 그보다 문일평의 아버지 문기수의 예상이 맞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문일평의 아버지 문기수 역시 대대로 시전 상인의 집에 태어나 현재 육의전 어물전 수령위(首領位)에 오른 인물이었다. 본래 육의전은 국초(國初)에 한양으로 천도(遷都) 할 당시에 같이 생긴 것이어서 역사가 오래였다. 그러나 조정의 비호를 받아 가며 수백 년을 잘 해 먹던 육의전 각 전(廛)이 지난 호란(胡亂) 이 후 눈에 띄게 사람들의 발길이 뜸 해지기 시작했다. 도성 안의 가호(家戶) 수는 난리 전보다 오히려 수천 채가 늘었건만 장사는 예전만 못한 것이었다. 육의전에서는 특권인 금난전권을 강화하고 도성 안에서 난전을 벌리는 잡살뱅이 까지 단속을 했지만 수익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각 전의 대행수들이 모여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원인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금난전권으로 난전을 벌리지 못한 일반 장삿꾼들과 경강 상인들이 칠패와 경강 나루마다 장시를 따로 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상평통보가 통용되자 값싼 자잘한 물건이 장바닥에 더욱 많이 쏟아져 나와 구경하는 재미로 장마다 사람들이 넘치는 것이다. 사람들은 거간이 중간에 붙어 흥정을 하는 육의전보다 장삿꾼과 직접 흥정을 하여 값을 깎을 수 있는 장시를 좋아했다. 육의전이 흥하던 시대도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문기수는 이런 시대의 흐름을 재빨리 간파한 사람이었다. 그는 세 아들 중 둘째인 일평을 새로 떠오르는 송파로 보내 여각을 열어 중간에서 물건을 확보하게 했다. 우선 자신의 어물전에서 팔 북어를 선점하는 것이 급했다. 그러나 북어를 갖고 온 송상은 문일평의 여각에 물건을 맡기지 않았다. 송상 자신들의 객주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문일평이 누구인가를 알고부터는 그에게 북어를 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문기수와 문일평이 송상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나라에 바치는 세수가 엄청난 데다 송상은 이미 저희들끼리 똘똘 뭉쳐 팔도의 장시를 장악한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이럴 땐 누구보다 오일중의 도움이 필요했다. 문기수는 아들인 일평에게 봉서를 주어 전 포도청 종사관 오일중을 찾아가라 일렀다. 상제벌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면서 경강의 무뢰배를 손아귀에 넣은 오일중의 위력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도성에 북어를 독점해 푼다면 한밑천 쥐는 건 명약관화한 일이고, 장차는 원산포까지 손을 뻗어서 아예 그곳 명태를 도거리로 차지할 수도 있으리라.'
어금니에 힘을 주고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던 문일평이 디귿 자 집의 커다란 첫 번째 대문을 두드렸다. 비록 초가일망정 열간 방이 둘이요 큼직한 마방이 딸린 번듯한 여각이었다. 아직 일어난 하인 놈이 없는지 집안이 괴괴했다. 짜증이 난 문일평이 부서질 듯 대문을 두들기자 창고 옆에 붙은 봉당의 지겟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짚신짝을 끌며 나타난 맹보 애비가 대문의 빗장을 재꼈다. 문일평은 맹보 애비가 열어주기도 전에 먼저 대문을 벌컥 열며 역정을 냈다.
"닭이 몇 회나 울었는데 아직도 쳐 바빠져 잤단 말이냐?"
"그런 게 아니옵고... ."
"뭐가 그런 게 아니야? 빌어먹기 딱 좋은 놈 같으니라구. 에잉."
나이로만 친다면 아재비 벌은 되련만 나이로 주인이나 벼슬을 하는 게 아닌지라 맹보 애비는 찍 소리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나 없는 사이 맡은 물건이 있느냐?"
"없습지요."
"쯧쯧.... 대답이 좋다. 그럼 본가에서 사람이 왔었느냐?"
"예, 나으리. 어제 낮에 본댁에서 추서사가 왔었습지요."
"엥이, 그럴 줄 알았다. 내가 늦었구나. 그래서?"
"예? 그래서라니요?"
"그래서 뭐라 했느냔 말이다."
"그거야 쉔네가 알 수 없습지요. 윤서기가 추서사를 맞았으니 깝쇼."
"헛, 알았다. 허고 너는 날이 밝는 데로 이 봉서를 본가에 좀 전하고 와야겠다. 꼭 수령위 (首領位) 나으리께 전해야지 다른 사람에게 보이면 안 된다. 알았느냐?"
"예, 나으리."
"허고, 기왕 늦은 것, 나는 내일쯤 간다 일러라. 나루가 열리는 즉시 두뭇개로 건너가거라. 두뭇개로 가면 해 안에 갔다 올 수 있을 게야."
"그럼입쇼. 두물개로 가는 배를 타기만 한다면 숯골로 질러갈 수 있으니 삼개에 비할 바가 아닙지요. 해 안에 돌아오고 말굽쇼."
"그리고 요즘 굴비 한 갓이 얼마쯤인지 어물전 시세도 알아 오너라."
"예, 나으리."
하늘엔 그사이 별이 사라지고 멀리 검단산 너머에 붉은빛이 돌았다. 밤을 새운 문일평은 여각의 뒷채에 붙은 살림집으로 돌아가며 길게 하품을 토했다.
그 시간에 기찰선 군졸 개동이는 광나루 초소에 돌아와 있었다. 개동이가 품에 안은 아이를 들여다보니 어두울 땐 몰랐는데 몸이 바짝 여위었고 목이 가는 것이 어째 오래갈 것 같지 않았다.
"그거 어디 사람 구실하겠나? 잘못했다간 탁배기 한 사발 값에 송장 묻게 생겼네."
같은 노잡이 산돌이가 아이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뒤 딱한 듯 중얼거렸다.
"그러게나 말일세. 얼른 교대꾼들이 와야 어찌해 볼 텐데 난처하네."
"아까 군관님 말씀대로 지금이라도 슬그머니 물에 집어넣지 그러나?"
"허, 여각 주인에게 그러지 않기루 말하는 걸 자네도 듣지 않았나?"
"헛, 그 약조를 정말 지킬 셈인가?"
"교대만 하면 당장이라도 배를 얻어 타구 가 볼 텐데 말이야."
"밤섬 산다는 자네 고모한테 말인가?"
"그럼, 거기만 가면 죽이든 미음이든 애 하나 먹는 건 문제없네."
"글쎄 그래서 살아만 난다면 다행한 일이나 어째 그때까지 못갈 것 같구먼."
유시(酉時)는 되어야 교대 군사가 나타날 터이라 개동이는 애가 탔다. 그때 숯막으로 갔던 장교가 초소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 애 새끼 아무래도 오래 못 갈 것 같으니 내다 버리거라."
"예? 아무거라도 멕이기만 하면 살 것 같은데요?"
"그럼 네 마음대로 해라. 죽이던 살리던."
"교대꾼이 오는 대로 밤섬에 데려가 뭐라도 멕여 봅지요."
"교대꾼? 급한 놈이 교대꾼 기다릴 것 있나? 내가 눈감아주면 되는 거지. 아, 마침 저기 신탄을 실은 배가 내려오는군. 저 배를 타고 가거라."
"포교 나으리 고맙습니다. 그럼..,"
아이를 안은 개동이가 부리나케 물가로 달려나가 한 손을 휘두르며 배를 불렀다. 그러나 장작과 섶을 잔뜩 실은 그 배의 사공은 못 들은 듯했다. 그걸 본 산돌이가 한달음에 달려와 잽싸게 기찰선에 오르며 개동이에게 외쳤다.
"어서 타라고. 저 배까지 데려다줄 테니."
옳지 이제 됐다 싶은 개동이가 훌쩍 뱃전에 올라 아이를 사타구니에 끼고 같이 노를 잡았다. 둘이 동시에 노를 저으니 본래부터 날렵하기로 소문난 기찰선이라 순식간에 신탄선을 따라붙었다.
"이보우. 사공. 내가 오를 때까지 노질을 멈추슈."
신새벽부터 벙거지들이 나타나 다짜고짜 배에 오른다니 잘못도 없는 사공이 가슴이 뜨끔해 노를 멈추었다. 하나 신탄선의 뱃전이 기찰선보다 높아 아이를 안은 개동이로선 오르기가 힘들었다. 이를 본 산돌이가 신탄선의 뱃전을 당기자 개동이도 기찰선의 뱃머리를 딛고 간신히 다리를 올렸다.
"고맙네, 내 갔다 와서 탁배기 한 잔 사겠네."
"잔말 말고 어서 가기나 하라구."
개동이가 뱃전에 오른 걸 본 사공이 다시 노를 저으니 잠시 방향을 잃었던 배가 하류를 향해 순조롭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개동이가 사공이 하는 양을 물끄러미 보다가 불쑥 물었다.
"이 보시우, 사공. 어디서 오는 길이우?"
"용담 원두골에서 오는 길이지요."
"거기는 신탄이 흔한가 보우."
"웬걸입쇼, 나무는 강 건너 청암산에서 납지요."
"사공이 나무꾼 노릇도 한단 말이우?"
"아닙지요. 나무는 청암산 밑의 불당골 나무꾼들이 하고 싣는 것만 우리가 맡습지요."
"가만, 조금 전 사공이 사는 데가 용담이랬소?"
돼지털벙거지에 더그레 자락이 꼬질꼬질한 군졸이 어울리지 않게 아이까지 안은지라 아까부터 괴이한 생각을 하던 사공이었다. 그런데다, 군졸이 새삼 자신의 사는 곳을 묻자 더욱 찜찜한 생각이 들어 얼굴을 찌푸렸다.
"하오만, 왜 그러시우?"
"아, 별일 아니우, 용담이라니까 상제벌 오회주님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우."
"오 회주님이야 우리께와 가까이 사시지요. 어제도 온 마을에 소동이 났을 때 멀리서 잠깐 뵈었는 걸입쇼."
"소동이라니? 회주님이 나오실 만큼 마을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는 게유?"
사공은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듯 강을 향해 코를 핑 풀더니 손가락을 노에다 쓱 문지르며 빙긋 웃었다.
"왜 웃으슈? 내가 못 물을 걸 물었수?"
"아니오, 어제 일을 생각하니 우스워서 그랬지요."
"그래서 내가 묻지 않았수. 도대체 무슨 소동이 있었냐구?"
"그게 말입지요.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는 더구나 없는 일이었지요. 어제 낮에 웬 유랑 거지가 우리께 나타나설랑 장 첨지네 새끼 난 암소 젖을 빨아먹으려다 그만 소에 밟혔지요. 아, 생각을 해 보시우. 다 큰 어른이 배가 고프기로 암소 배 밑으로 기어드는 꼴을 말이지요. 우습지 않습니까? 허나 웃을 수도 없는 노릇이 소에 밟힌 걸인이 눈알이 터지고 소 뿔에 허벅지가 산적으로 꿰였습지요. 걸인은 죽는다고 소리소리 지르고 암소는 콧김을 뿜으며 날뛰고 송아지까지 움매 움매 울어대니 온 동네가 소란할 수밖에 없었습죠."
"에이 설마, 아무리 배가 고프기로 어른이 소 젖을 빨아먹는단 말이우?"
"허허, 중도 사흘을 굶으면 지나가는 황소 부랄만 봐도 침을 삼킨다 잖소?"
"그래서 그 걸인은 죽었수?"
"다행히 목숨은 붙어서 장 첨지네 헛간에 두었다고 합디다만 의원도 없는 마당에 제놈이 죽지 살겠습니까?"
"그럼 그 북새통에 아이 잃은 집도 있겠수 그려."
"예? 아이라니요? 아일 잃었다는 집은 없는뎁쇼? 헌데 그 애는 웬 앱니까?"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든 개동이가 얼른 둘러대었다.
"이 애 말이우? 아파서 의원을 찾아가는 길이우."
사공의 말을 듣고 보니 아이는 그 동네에서 버린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를 여각 객주의 배에 버린 것은 그 걸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니, 행여 죽어간다는 걸인이 나아서 아이를 수소문하고 다니면 곤란한 일이었다. 개동이는 아이를 안고 장작더미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지금 밤섬으로 가고 있는 자신이 잘하는 일인지를 따져 보았다.
밤섬은 오래전부터 고려적부터의 천출 백성들과 배를 만드는 배 목수들이 모여들어 만든 마을이었다. 그러다가 경신 대기근 이후엔 주낙을 업으로 삼는 어부와 삼개에서 새우젓 장사를 하는 사람들까지 모여들었다. 다른 곳은 연이은 흉년으로 굶어 죽어 나갈 때에도 밤섬은 삼개와 워낙 가까워 새우젓 독만 지고 다녀도 굶어죽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강가이다 보니 물고기 또한 흔했다. 사람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옹기종기 오십여 호의 집이 모인 밤섬은 땅도 비옥해 채소가 잘 되었다. 사람들은 푸성귀를 길러 도성 안으로 갖다 팔았다. 개동이네 고모는 조선장 부근에 살고 있었다. 그의 고모는 쉰이 넘은 퇴기 출신으로 술장사를 하며 살았다. 술장사라 하나 번듯한 주막도 아니요 잡곡으로 밀주를 담구어 배 짓는 목수들을 상대로 알음알음 파는 거였다. 그래도 그의 고모는 젊었을 적의 고왔던 얼굴이 주름 밑에 약간은 남아있고 손님을 후리는 솜씨도 여전해서 목수들과 사공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덕분에 개동의 고모, 늙은 춘월이는 몇 해 사이에 제법 포실하게 살림을 이룬 데다 근래엔 작은 배를 사서 새우젓 장사꾼과 동업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춘월이 나이 쉰을 넘기자 갑자기 산다는 게 허무하고 외로운 마음이 들어 자식이 있었으면 거기라도 마음을 붙일 터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젊어서 없던 자식이 쉰이 넘은 나이에 생길 리 만무라 언젠가 수어청 군졸로 있는 조카가 들렸을 때 어디서 애라도 하나 얻었으면 하는 말을 했었다. 그때 고모인 춘월의 말을 잊지 않고 새겨두었던 개동이 새벽에 얻은 아이를 안고 지금 가는 것이다. 개동이 탄 나무 실은 배는 삼밭 나루에서 삼개까지 물길 40리를 쉬지 않고 노를 저은 관계로 아침 먹을 시각쯤에 삼개 나루에 당도했다. 개동이는 행색이 군졸인지라 삼개에서 주낙배를 공짜로 빌려 타고 한마장 거리의 밤섬에 내리니 아침부터 햇살이 따갑게 비쳤다. 혹시나 해서 아이를 내려다보니 입술이 바싹 매말라 있고 눈꺼플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개동이는 한달음에 고모네 집으로 달려가 열린 삽짝을 통해 안방 앞에 섰다.
"고모님, 나 왔수. 개동이요."
그러나 방 안에선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웬일인가 해서 쪽마루 밑을 보니 짚신 짝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개동이의 목소리를 들은 하녀 내촌댁이 삽짝 옆 측간에서 고개를 비죽 내밀었다 얼른 거두는 것이 보였다.
"내촌댁, 우리 고모 어디 가셨수?"
측간에 앉은 내촌댁도 대답이 없긴 매 한 가지였다. 무료해진 개동이 쪽마루에 엉덩이 반쪽을 걸치고 앉아 혹시 고모가 오나 삽짝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삽짝 밖 멀리에 채소 밭에 거름을 뿌리는 농부만 보일 뿐 고모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치마끈을 여미며 내촌댁이 측간에서 나와 개동이에게 다가왔다. 아까 측간에서 내다볼 때부터 개동이 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애고, 애 아니요? 웬 애요?"
"웬 애라니? 내 애유."
"원, 서른이 가깝도록 장가도 못 가고 늙는 주제에 애라니? 애는 개나 소나 아무나 낳나?"
"뭐요? 이거 나보다 나이 몇 살 더 많은 대접으로다 막말을 하지 않으니 날 우습게 보는구려. 그러는 내촌댁은 둘씩이나 낳았다는 잘난 애새끼들은 다 어디로 보내고 혼자란 말이유?"
"뭐? 뭐라고? 말이면 다 말인 줄 아는감? 그러지 않아도 애새끼들 생각에 복장이 미어지는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다니. 에이, 말을 섞은 내 잘못이지, 그만 두시요."
흉년에 유랑민으로 떠돌다 어린 아들 둘을 굶겨 죽이고 흘러 흘러 춘월이 집에서 부엌데기로 연명하는 내촌댁이었다.
"허, 시비는 내촌댁이 먼저 시작하구선 끝내기도 혼자서 먼저 하는구랴? 그러게 남 장가 못 간 얘기는 뭣하러 먼저 꺼내느냔 말이유."
"아무리 그렇드래도 자식 잃은 사람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한 총각은 잘한 건가?"
"알았수. 내 길게 시비할 마음 없수. 미안하우. 우리 고모 어디 갔수?"
"새벽에 삼개로 건너갔소. 새우젓 장사하는 정서방이 셈이 바르지 못하다고 배를 다른 사람에게 준다고 합디다."
"허, 그럼 언제나 오나. 애가 급한데... ."
개동이 아이를 추슬러 안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내촌댁도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아이는 먹지 못해 새들새들한 가운데 밤새 강모기에 뜯겨 얼굴은 물론, 온몸이 성한 곳이 없이 상처 투성이었다.
"애게게, 이 아이가 언제부터 이런 거요?"
"그, 글쎄요. 새벽에 처음 볼 때부터 이랬수."
"총각, 아이 이리 주오. 잘못하면 죽이게 생겼소."
내촌댁이 아이의 숨소리도 들어보고 이마도 만져보더니 탄식해 마지않았다.
"열이 없는 걸 보니 굶어서 이 지경이오. 세상에 아무리 나랏님마져 굶는 흉년이라지만 이런 입 하나 먹일 게 없어 굶겨 죽이는 세상이니, 이 세상이 바로 지옥 아니요? 쯧쯧."
그러고는 아이를 다시 개동이에게 주더니 부엌으로 달려가 불씨를 살려 부지런히 쌀을 일어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한 내촌댁이 연방 몽당빗자루로 아궁이에 부채질을 했다. 마침내 죽이 끓기 시작하자 더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그것을 조리에 대강 걸러 미음을 만들었다. 내촌댁이 입바람을 불어 식힌 미음을 물렸으나 아이는 스스로 먹지 못했다. 그러자 아이의 입을 벌리고 목구멍으로 미음을 한 방울씩 흘려 넣었다. 그렇게 한두 숟가락이 흘러 들어가자 어느 순간 아이가 입술을 오물오물 움직이며 받아먹기 시작했다.
"먹는다. 애가 받아 먹어."
"그러게나 말이요."
옆에서 마음을 졸이던 개동이와 내촌댁은 일시에 환호했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입안에 들어온 미음을 삼켰다. 얼마 후 아이는 먹을 만큼 먹었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감았던 눈을 떠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다.
"엄마나, 얘 눈 좀 보오, 세상에 이렇게 고운 눈이...."
아이의 눈을 보는 순간 내촌댁의 가슴이 철렁했다. 아이의 눈이 어찌나 맑고 깊은지 보고 있자니 한없이 빨려 드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세상에는 샛별 같은 눈도 있고 호랑이 같은 눈도 있다지만 이 아이의 눈은 별에도 달에도 비교할 수가 없었다. 보는 순간 그냥 빠져드는 것이다.
"그 놈 눈 잘 생겼네. 계집애라면 여러 놈 죽이게 생겼수."
아이의 눈을 들여다본 개동이의 촌평이었다.
"잘 생긴 게 뭐요. 보는 내가 오금이 다 저려오는구먼. 내 여태껏 이런 눈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소. 월궁항아인들 이런 눈을 가졌겠소?"
"항아란 누구를 말하는 게유?"
"난들 아오? 달 속에 있다니까 총각이 직접 가보면 알 것 아니오?"
"원 내촌댁도 농담도 잘 하우. 그건 그렇고 애도 여태 굶었지만 나도 아침을 굶었수. 뭐 좀 요깃거리가 없을까?"
"참 그렇겠소. 잠시 기다리오. 아침밥은 먹고 없으나 미음을 거르고 남은 무거리가 있으니까. 우선 그걸로 허기나 면하시오."
아이를 건넨 내촌댁이 부엌으로 들어가 죽 찌끼를 담은 사발에 소금에 절인 푸성귀를 얹은 목판을 들고 나왔다. 개동이는 배가 고프던 차라 그나마 감지덕지하며 반겼다. 개동이 푸성귀까지 다 먹고 상을 물렸을 때 삽짝 안으로 고모인 춘월이가 들어서고 있었다.
"아, 고모. 삼개에 건너가셨다더니 이제 오우?"
개동이는 마루에서 일어나 머리를 까딱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너, 개동이 아니냐? 어인 일이냐? 아비가 또 아픈 게로구나."
"아니요. 아빈 그저 그만하우."
"그럼, 어찌 이렇게 일찍 왔다는 게야?"
개동이는 대답 대신 아이를 안고 부엌으로 물러난 내촌댁을 가리켰다. 춘월이의 눈길이 개동이의 손끝을 따랐다.
"응? 저 여편네가 안고 있는 게 뭐냐? 저거 어린애 아니냐?"
"왜 아니우. 고모 갖다 드릴라구 새벽 참에 떠났지요."
"뭐야? 내가 언제 어린애 갖다 달래든?"
"허, 환갑 전에 벌써 노망이 나셨수? 일전에 나보구 애 말을 하지 않았수?"
"아, 그거야 적적한 마음을 네게 들어냈을 뿐이지, 다 늙은 내가 새삼 이 나이에 귀찮게 애가 다 뭐란 말이냐?"
"좌우간 보구 말씀하시우. 애가 눈이 시원스럽고 살만 좀 붙으면 귀공자 같겠습디다."
"에라. 치워라, 귀공자고 뭐고 다 귀찮다."
"그래도 한 번 보구나 말씀하시우. 여게, 내촌댁, 애 이리 갖고 오시우."
아이를 안고 있던 내촌댁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부엌에서 나와 춘월이 앞에 섰다. 그 꼴을 본 춘월이 발칵 성을 내었다.
"아, 저리 치우지 못 해? 계집애라면 키워서 노랫가락 가르치는 재미라도 있지 저걸 키워 어쩌라는 거야?"
"그럼, 저 앤 어쩌우?"
"뭘 어쩌긴 어째? 얻어 온 데다 다시 갖다 주던지 강에 버리면 되지."
"엥이 고모님도, 강에 버리다니, 명색이 사람이 그 짓을 어찌하우?"
"뭐? 명색이 사람? 그럼 네 애비란 사람은 짐승이래서 좁쌀 두 말에 어린 날 기생집에다 팔아먹었다더냐?"
"그, 그거야 아비가 아니라 할애비가 그랬다지 않으셨수?"
"시끄러워, 그때 내 나이 아홉 살이었으니 니 애비는 열다섯 살이야. 열다섯이나 쳐 먹고도 여동생이 색주가에 팔려가는데 말리지도 않았어."
고모가 신세한탄을 다시 시작하려는 조짐이 보이자 개동이는 기가 막혔다. 혼자 사는 고모를 생각해서 애를 갖다 주러 왔다가 애는 고사하고 새삼 사십 년이 지난 묵은 얘기를 또다시 들을 판이었다. 이럴 땐 자리를 빨리 뜨는 것이 상책일 터였다. 그러나 아이가 문제였다. 저걸 다시 가져가서 어쩐단 말인가? 그런데 눈치를 보아하니 아침부터 덥기가 한낮 같은데도 아이를 품에 꼭 끌어안은 내촌댁의 태도가 혹시 애를 뺏길까 겁을 내는 것 같았다. 개동이 짐작하는 바가 있어 마루에서 벌떡 일어나 마당으로 내려섰다.
"나 그만 가겠수. 내촌댁, 그 아이 주시우."
"애고, 총각이 이 애를 가져가 어쩔라고 그러우? 내가 키우게 그냥 가우."
"싫다는 고모 옆에 애를 둘 수 있수? 고모 말씀대루 강에다 던져버리는 게 낫지."
"뭐요? 강에? 그러면 용왕님이 퍽도 기뻐하시겠소. 아마, 기뻐서 총각뿐 아니라 나까지 천벌을 내리리다. 나는 그리 못하오."
정말로 용왕에게 아이를 뺏길까 겁을 낸 내촌댁이 주춤주춤 부엌으로 가려 하자 춘월이가 눈에 쌍심지를 돋구어 소리를 질렀다.
"지금 저 여편네가 뭐 하자는 게야? 이거 봐. 내촌댁. 혼자 입도 건사를 못하는 주제에 애까지 딸려 어쩌겠다는 게야? 아, 빨리 못 줘?"
"나도 내 한몸 주체 못하는 건 알아요. 허나 차라리 나가서 다시 빌어먹으면 먹었지 이 얘는 못 내놔요. 마님, 일은 더 열심히 할 테니까 얘를 내가 키우게 해 주세요. 굶겨서 자식 둘을 저세상으로 보낸 에미 심정을 이해하시구 제발. 예?"
"저 뻔뻔한 인간을 봤나. 빌어먹으며 다니는 걸 데려다 굶지 않게 만들어 놓으니까 뭐? 이젠 애까지 공으로 멕여 달래네그려. 그럴려면 차라리 애 데리고 길바닥으로 다시 나가. 나가서 빌어먹던 굶어 죽던 멋대로 하라고, 내 알 바 아니니까. 흥."
옆에서 두 사람이 다투는 걸 보던 개동이 중재에 나섰다.
"애 날 주시우. 강에 버린다는 말은 거짓이우. 차라리 내가 키우겠수."
"얼시구나, 잘들 논다. 남의집살이하는 것이 군 입을 키운다니까 이젠 총각 놈까지 애를 키운다네. 야, 이놈아, 넌 네 아비와는 좀 다른 줄 알았더니 오줄 없기는 매한가지구나. 그러니 네가 여태 장가를 못 가는 것이니라."
"원 고모님도, 장가는 뭐가 있어야 가는 거지. 불알 두 쪽만으로 가우?"
"그러니까 내가 진작 말했지? 내게 와서 새우젓 장사나 하라고. 그럼 나도 의지가 되고 너는 돈 벌어 장가도 가고 얼마나 좋으냔 말이다."
"아. 군역이 끝나야 어째 볼 것 아니우? 허지만 아직두 열 삭이 넘게 남았수."
"가만, 지금이라도 군포를 바치면 역을 면해 주려나?"
"아, 미쳤수? 이태씩이나 노꾼으로 발발 기며 군역을 살았는데 그깐 열 삭을 더 못 참아 군포를 낸단 말이우? 그런데 낼 군포가 있으면 좁쌀로 바꿔 먹겠수."
"허긴 그렇구나. 허지만 새우젓 배를 남을 빌려주니까 자꾸 말썽을 이르키잖냐."
"왜? 정서방 그 사람이 무슨 말썽을 부렸수?"
"그 엉큼한 놈이 제가 처먹은 술값을 자꾸만 새우젓 값에다 얼버무리니 그딴 셈법이 어딨니? 지금이라도 배를 네가 맡아 줬으면 딱 좋겠는데 말이다. 엥이."
"그러면 나도 좋겠수. 아, 참, 고모, 나는 이만 갈라우."
여태 얘기를 잘 나누다가 갑자기 개동이 돌아가겠다고 하자 춘월이가 약간 놀란 얼굴이 되었다.
"뭐야? 간다고? 얘, 그럼 잠깐 기다려라."
춘월이 반쯤 뒤돌아서서 치마를 들치고 엽낭을 꺼내더니 돈 꿰미를 꺼냈다.
"삼개로 건너가거든 이걸루다 석수어 두어 갓 사다가 걸어놓고 네 아비 반찬해 드려라. 미운 오래비라도 아픈 사람을 어쩌겠니. 옜다."
"원 고모님두, 반찬 없어 밥 못 먹수? 밥 없어 밥 못 먹지. 석수어 보다 이걸루 좁쌀을 살 테유, 아무튼 고맙수. 나는 가우."
개동이는 춘월이가 미쳐 남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휭하니 삽짝 밖으로 내 달았다.
"어, 얘. 개동아. 개동... 원 저 성질머리하고는.... 쯧쯧, 아 참, 애는 어째? 야, 개동아-아."
춘월이 부르는 소리를 들은 척 만 척 개동이는 주낙배를 묶어놓은 나루로 부리나케 달려가버렸다. 삽짝 밖까지 따라가던 춘월이가 닭 쫓던 강아지가 되어 발길을 돌렸다. 삽짝을 들어서니 내촌댁이 아까 그대로 아이를 끌어안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꼴을 본 춘월이 새삼 화가 나 내촌댁의 아래위를 째려보다가 큰소리를 질렀다.
"나가라니까, 나가서 빌어먹는다면서 왜 안 나가고 섰어?"
".............."
"나가란 말이 안 들리는 건가? 내 집에서 어서 나가라니까. 올 때도 빈손이었으니 그냥 나가기만 하면 되는 걸 왜 그러구 섰냐고?"
춘월이가 화가 나서 삽짝 밖과 내촌댁의 얼굴을 번갈아 가리키며 삿대질을 해대건만 내촌댁은 아이를 안고 죽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춘월이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한번 나간 댔으면 나가야지 그런다고 대강 무사타첩으로 넘어가리란 생각은 말어."
치맛자락을 휩싸 쥐고 눈을 가늘게 치켜 뜬 춘월이를 바라보던 내촌댁이 슬그머니 마루로 다가가 아이를 내려놓고 고개를 숙여 절하는 흉내를 내었다.
"마님이 그리하시면 할 수 없군요. 마님, 그동안 갈 곳 없는 이 몸을 거두어주어 고마웠어요.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는 슬금 슬금 삽짝 밖으로 나서는 것이다.
"아니 저 여편네 보아. 애는 갖고 가야지. 이 봐, 내촌댁, 이 아이를 갖고 가라니까?"
그러자 내촌댁이 천천히 돌아서 덤덤한 표정으로 춘월의 말을 받았다.
"네? 애라니요? 아. 애는 마님 네 조카가 갖고 왔지 내가 낳은 내 앱니까요?"
"뭐야? 그럼 이걸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전들 압니까? 아까 말씀하신 대로 마님이 용왕님께 진상하시면 되잖겠어요?"
그러고는 다시 삽짝을 향해 슬금슬금 걸어 나가니 춘월이 기가 막혔다.
"저 앙큼한 여편네 술수 쓰는 것 좀 봐. 좋아, 내가 한발 접고 말지. 애는 내촌댁이 기르든지 말든지 몰라라 하지. 하지만 술 손님이 왔을 때 애 울음소리만 들렸다간 그 날로 둘 다 쫒겨 날 줄 알어. 알았어?"
"아, 그야 여부가 있습니까? 네 그럽지요. 그러고 말구요."
마루 위의 아이를 번개처럼 나꿔 챈 내촌댁이 부엌으로 사라졌다. 춘월이는 어이가 없었으나 마음을 눙치기로 했다. 말이 그렇지 바지런하기 짝이 없는 내촌댁을 내 보내면 술청은 당장 문을 닫아야 할 판이었다. 술 담그랴 모주 거르랴 그 많은 부엌 일을 어찌하며 술 시중은 또 누가 든단 말인가?
"쯧쯧, 제 새끼도 다 굶겨 죽인 여편네가 남의 애를 왜 저렇게 탐을 낼꼬?"
동이 트기 직전에 잠이 들었던 문일평은 낮닭이 길게 목을 빼는 점심께에야 일어났다. 사랑에서 나와 안채로 간 문일평이 안방문을 열었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다 깜박 잠이 들었던 마누라가 문소리에 부스스 일어났다.
"언제 오셨수? 지금 오시는 길 이유?"
"헛, 서방이 언제 왔는지도 모르고 잠만 자면 제일인가? 새벽 참에 와서 사랑에서 자고 있었건만 아침에 드려다 보지도 않았던 게로군."
"그럼 월이란 년은 아침에 왜 내게 알리지 않았지? 이년 밖에 있습디까?"
"내가 그걸 어찌 알어? 잔말 말고 밥이나 좀 차려오구랴."
"참, 아침밥도 못 드셨겠소."
자는 아이를 두고 밖으로 나간 문일평의 처가 월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대답 소리는 없었다. 약이 오른 문일평의 처가 손수 밥을 하는지 부엌에서 솥뚜껑 여닫는 소리가 요란했다. 문일평의 처는 육의전 가운데 포전을 하는 강대길의 딸이었다. 강대길은 시전 상인으로 삼베 하나로 부를 쌓은 인물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아쉬운 것없이 자란 문일평의 처가 부엌 일에 능숙할 리가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밥을 들일 기미가 없자 기다리기에 짜증이 난 문일평이 부엌 쪽을 향해 일렀다.
"밥이 되던 죽이 되던 서기방에 있을 터이니 다 되면 알리시오."
문일평이 여각 서기방으로 오니 댓돌에 신발이 여러 켤레였다. 큰 기침을 한 문일평이 문을 여니 서기 윤필서와 거간 배종개가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나오셨는지요. 그러지 않아도 방금 이분들이 오셔서 연락을 드리러 가려던 참입니다. 참, 인사들 하십시오. 주인 나으리십니다."
"나으리, 인사 올립니다. 마개출이라 하옵니다."
"소인은 황구만이 옵니다."
한눈에 봐도 마개출이란 자는 광대뼈가 솟은 얼굴에 키가 껑충한 것이 주먹깨나 쓰게 생겼다. 반면에 황구만은 키도 작고 몸피도 왜소한데 오종종한 얼굴에 쥐 같은 눈알을 연신 굴리며 깝죽대는 꼴이 천상 거간꾼 같았다. 문일평은 서기가 앉았던 자리에 털썩 앉으며 자신을 황구만이라 말한 자를 바라보았다.
"가만, 자네는 안면이 있는 것 같은데, 어디서 보았는지 통 생각이 안 나는군."
"아, 그러실 겝니다. 소인은 나으리의 장인이신 부령위댁 포전 바로 옆에 있는 이가 포전에서 거간 일을 했습죠. 네."
"아, 그랬군, 어쩐지 내 어디선가 본 듯했네. 헌데 나한테 웬일들인가?"
키 큰자가 나섰다.
"회주님이 보내서 왔지요."
"뭐라? 어제 뵈었을 때는 며칠 기다리라 시더니 이렇게나 빨리?"
"기왕 돕기로 결정을 했다면 하루라도 빨리 도와드리라는 분부셨습니다."
"나야 그러면 좋지. 아무리 처음 하는 업종이라 해도 그렇지, 여각을 연지 석 달이 넘도록 겉보리 삼백여 섬을 맡아 본 것이 다니 이러다 어느 천년에 여각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해보겠나?"
그러자 황구만이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나섰다.
"삼밭 여각을 단골로 삼은 물주들이 아직 이곳을 생소하게 생각해서지요. 허지만 그 여각들도 머지않아 이곳으로 옮길 터이니 차차 형편이 나아지겠습죠."
"차차? 차차란 언제를 두고 하는 말인가? 그리고 객주와 여각들이 여기로 옮겨 온대도 그쪽 단골이던 물주가 내게 올 턱이 없잖은가?"
"그래서 회두님이 저희들을 보낸 것입지요. 이 사람과 제가 그리 되도록 힘을 써 보일 터이니 두고 보시지요."
"그렇습니다. 당장 오늘부터 물주를 물색해 보겠습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손을 싹싹 비비고 고개를 까닥대며 입을 놀리는 황구만은 그렇다 쳐도 마개출이란 자까지 나서 큰소리를 치자 문일평은 일단 두고 보자는 심사가 되었다.
"글쎄, 자네들이 그리 말한다면 무슨 수가 있기에 그럴 테니 두고 보겠네."
"지난 달 삼개 나루에서 제일 크다는 변가네 여각이 물주가 끊겨 문을 닫은 사실은 알고 계시지요?"
"글쎄, 소문엔 물주가 끊긴 게 아니라 변가가 병이 나서 그만두었다더군."
"그게 그겁지요. 저희들이 물주들을 다른 여각으로 옮겼으니 변가가 생병이 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뭐라? 그 게 자네들 짓이란 말인가?"
"우린 다만 물주들을 옮겼을 뿐 여각이 문을 닫은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죠."
그제야 문일평은 채신머리 없이 깝죽대기만 하는 황구만이 우습게 볼 인물이 아닌 걸 알았다. 허기야 오회주가 황구만의 능력을 모르고 보냈을 리가 없었다.
"음, 어쨌든 이제부터 여각이 되고 안 되고는 자네들 손에 달렸네. 단 물주를 끌어들이되 함경도에서 나는 베를 갖고 오는 상인과 원산 말뚝이를 갖고 오는 상인을 우선적으로 끌어들이게. 삼남의 곡식도 좋고 모시나 죽세품도 좋지만 북어와 삼베는 거간보다 우선 내가 필요하니 오는 데로 모조리 매집할 걸세."
"한 여름인 지금, 도중에 비를 맞으면 다 썩어버릴 북태를 송상들이 싣고 오겠습니까?"
"어물전에서 자란 내가 그걸 모르겠나? 지금을 말하는 게 아닐세. 북어 라면 송상이 아니더라도 무조건 잡으라는 말이지. 허고 안동포만 하더라도 남에서 오는 길이 삼밭을 먼저 거치게 되어 있어 우리가 그만큼 불리하다는 걸세. 그러니 그 두 물종에 더 치중하란 말일세. 알겠는가?"
"예. 알긴 합니다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고를 여지가 없으니 우선은 무슨 물종이던 여각을 채우고 볼 일 올시다."
"그 말도 내 말과 다르지 않네. 하나 장사란 신용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게나."
문일평이 일어나 밖으로 나오자 마침 안채에서 월이가 돌아 나오고 있었다.
"나으리 밥이 다 되었습니다."
"그래? 아까 넌 어디 있었느냐? 마님이 찾는 것 같던데?"
"쉔네는 강으로 빨래를 하러 갔었지요."
"그럼 말을 하고 갈 것이지."
"아, 쉔네가 안방에 계신 마님께 고했습지요. 마님, 저 빨래갑니다구요. 그랬더니 안에서 아무 말씀이 없으시기에 다시 한 번 큰소리로 마님, 저 빨래…."
"그만, 그만 되었으니 넌 가서 일 보거라."
문일평은 월이의 사설이 길어 질 것을 염려해 한발 먼저 안채로 향했다. 방안에는 보리를 약간 섞은 이밥에, 찐 굴비와 나물을 위시한 대여섯 가지의 반찬이 놓인 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려진 밥상을 마주한 문일평이 수저를 들자 아내가 붙어 앉아 알맞게 쩌진 굴비를 손으로 찢어 수저에 올려 주었다.
"굴비가 아직 좀 남았소?"
"두어 마리 밖에 없어요. 아무래도 내일은 맹보 아비를 보내 몇 갓 갖고 오랄까 봐요."
"새벽에 갔다오라고 내가 이미 일렀소. 한데 값을 알아오랬지, 갖고오란 말은 잊었구려."
"어마, 그럼 어째? 당신은 굴비 없인 밥을 못 드시잖우?"
"꼭 그런 건 아니라도 굴비가 있으면 좋기야 하지."
"굴비 실은 배는 왜 여기로 오지 않는 거죠? 송파가 그렇게나 사통팔달 한 곳이라더니... 여기서는 삼남 지방으로 가기도 쉽다지 않으셨어요?"
"삼남뿐이요? 원주나 강릉 가기도 수월하지. 그래서 남보다 빨리 여기다 여각을 낸 것이오. 앞으로 굴비 걱정은 마시오. 이제부터는 굴비뿐만 아니라 서해서 나는 어물은 모조리 이곳을 통하게 될 테니까. 그렇게 되면 내지 상인들은 아마 내게나 와야 굴비 구경이라도 하게 될게요".
"그러자면 송상보다두 경상이 뛰어들어 하루라도 빨리 번듯한 장시가 열려야겠지요."
"역시 시전 상인의 딸다운 말이요. 하하."
문일평이 시장하던 차라 밥을 달게 먹고 다시 여각으로 나왔다. 방에는 배종개는 어디 가고 윤필서 혼자 무엇을 쓰고 있었다.
"맡은 물화가 아무것도 없는데 무얼 쓸 게 있단 말이냐?"
"아, 예. 마방을 늘릴 때 쓸 목재의 수량과 지불한 노임을 맞춰봅지요."
"그래? 헌데 어제 추서사가 왔었다면서?"
"예. 가셨던 일이 어찌되었나 궁금해서 와 봤다더군입쇼."
"헛, 일이 되면 내가 오죽 알아서 알리지 않으리. 헌데 다들 어디로 간 게야?"
"아까 왔던 거간꾼들은 모르옵고 종개는 혹시나 해서 삼밭 나루에 나갔습니다."
"혹시나? 혹시나 삼전 나루에 떡고물이라도 떨어졌나 보러 갔단 말이냐?"
문일평은 서기방에서 나오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커다란 여각을 지어놓고서도 물주를 끌어들이지 못하다니? 오죽하면 내 거간인 종개까지 물주를 찾아 나선단 말인가? 대문을 나선 문일평이 내친 김에 이미 몇 년 전부터 있던 객주와 지금 송상이 짓고 있는 객주를 둘러보기로 했다. 송파의 윗 쪽은 십여 년 전부터 조금씩 집과 주막이 늘어나 지금은 얼추 백여 채나 되는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개중에 술청과 봉놋방을 갖춘 주막이 둘이요 송상의 객주 말고도 두 곳이 더 있었다. 문일평은 뒷짐을 지고 느린 걸음으로 좌우를 돌아보았다. 새벽에 술을 거르든 술도가는 이미 오늘 장사가 끝났는지 문이 닫혔다. 장날도 아닌 데다 더운 날씨 탓에 길에는 오가는 사람도 없었다. 문일평은 좀 더 윗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가네 객주 앞에는 두 아이놈이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고누를 두고 있었다. 각자 등 뒤에 나귀를 세워 놓은 것으로 보아 객주로 들어간 주인을 기다리는 것인 듯했다.
'유가 놈이 또 한 건 물었나 보군.'
문일평은 입이 썼다. 경강 포구의 상인들을 상대로 어물을 매입해 내 외 어물전에 공급하는 일이라면 누구보다 자신이 있건만 지방에서 올라오는 갖가지 물건의 주인을 끌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물주 역시 마찬가지여서 단골로 다니던 여각이나 객주를 바꾸는 자체가 어려운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박가네 객주 마당에는 하인들이 쌓인 곡식 섬 앞에서 부지런히 손들을 놀리고 있었다. 무엇을 하는지 호기심이 생긴 문일평이 조금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곡식 섬에서는 겉보리가 줄줄 새고 있었다. 하인들이 하는 일은 쥐가 갉아 구멍이 난 곡심 섬을 짚으로 꿰매는 일이었다.
'보리를 추수한 것이 언젠데 아직도 거래를 못한 모양 아닌가? 쯧쯧.'
문일평은 다시 송상이 짓고 있는 객주로 가 보았다. 한눈에도 이미 봉놋방은 다 지어졌고 창고 역시 기둥과 서까래는 다 올려진 상태였다. 마당에는 마방의 벽에 바를 진흙을 밟느라 아예 웃통은 벗고 고의를 잔뜩 걷어 올린 일꾼들이 땀들을 흘리고 있었다. 문일평은 짓고 있는 송상의 객주가 자신의 여각 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에 놀랐다. 물건과 사람이 들어갈 봉노의 크기만 해도 어림잡아 서른 간을 되리라 싶은 것이다. 기존에 쓰고 있던 봉노까지 합한다면 쉰 간은 될 터였다. 게다가 마방도 커서 말 서른 필은 세우리라 싶었다. 객주 치고는 이제껏 어디에서도 본 일이 없는 규모였다.
'이놈들은 송파의 무얼보구 이렇게 물력을 아끼지 않고 크게 놀까?'
이익이 있는 곳에 송상이 있다는 말처럼 이재에 밝은 송상이었다. 그런 송상이 이렇듯 크게 역사를 벌리는 것은 송파가 팔도에서 손꼽히는 장시가 될 징조였다. 문일평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마음으로 오던 길로 돌아섰다.
'이곳에서 돈이 되는 물건은 북태와 농우다. 농우는 어차피 내겐 생소하고 버거우니 생각을 접더라도 북태만큼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잡아야 할 터인데... 방법이 없을까?'
문일평은 집으로 돌아가는 사이에도 북태를 손에 넣을 궁리에 골몰했다. 굴비와 북태를 맞바꾸었으면 좋으련만 송상들 역시 연평도 앞바다에서 무진장 잡히는 조기가 있었다. 그리고 산란철에 잡은 알밴 조기로 영광굴비보다 더 나은 상품을 만들어 팔도 장시에 팔러 다니지 않는가.
'결국 무명과 솜 밖에 없는데... 아니면 조정의 힘을 끌어들이던지.…'
그러나 두 가지 다 문제가 있었다. 무명은 북쪽에서는 생산이 되지 않아 상품으로서의 가치는 높으나 남쪽에서도 목화를 재배하는 곳이 많지 않아 물량 확보가 어려웠다. 그리고 무명옷이 따뜻하고 부드러워 좋긴 하나 솜으로 실을 자아 베틀에서 짜는 공정이 삼베 짜기 보다 훨씬 복잡했다. 그러므로 무명의 값이 삼베보다 훨씬 비싸서 일반 백성은 아무나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었다. 그러니 팔리지 않을 무명을 받고 잘 팔리는 북어를 내어 줄 송상이겠는가? 그렇다고 조정의 권력자를 동원해 송상의 북어 매집을 막을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송상이 이제껏 왕실에 감당해 온 세역이 막대했던 것이다. 게다가 청탁을 하려면 세도가에게 먼저 엄청난 돈을 먹여야 할 것이었다. 그러면 남는 것은 고사하고 아차 하면 망할 짓일 터였다.
'결국 또 오회주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단 말인가?'
생각에 잠긴 문일평이 그만 집과 여각을 몇 걸음 지나쳐버렸다. 다시 돌아서려던 문일평이 생각을 바꿔 나루터까지 가보기로 했다. 집에 들어간들 속 시원한 일이 기다릴 리가 없는 것이다. 여각에서 나루까지의 길은 장마당 윗 쪽에 비해 공터에 가까울 정도로 집이 몇 채 되지 않았다. 소고삐를 매는 말뚝이 어지럽게 박힌 우시장을 지나 강이 보이는 언덕에 두 채의 주막이 있었다. 주막이래야 여염집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왼쪽 주막이 좀 더 컸으나 엉성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수수깡 울타리를 친 초가집에 용수를 씌운 장대만 덜렁 삽짝 기둥에 묶여 있을 뿐이었다. 문일평이 그 주막을 지날 때였다. 왼쪽 주막 안에서 큰소리가 들렸다.
"이놈들, 썩 꺼지지 못 해? 아, 꺼지라는 말이 안 들리느냐?"
그냥 지나가려던 문일평이 목소리가 영 낯설지 않아 슬그머니 소리가 난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디귿자집 안마당에서 나온 소리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문일평은 좀 더 다가가 울타리 사이에 눈을 붙였다. 마당에는 세 명의 장정을 마주한 두 사람이 있었는데 큰소리친 자는 문일평의 여각에 왔던 마개출이었다. 정주간에는 주모와 하녀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고 중노미란 놈 역시 술독 뒤에서 머리만 내놓고 있었다.
"이놈들이 죽고 싶어 환장들을 했구나. 송파 저잣거리는 이미 임자가 있단 말이다. 그러니 다들 가랄 밖에? 좋은 말로 할 때 어서들 꺼져. 여긴 안 돼."
"흥, 별소리 다 듣겠수. 송파가 노형네 문중에서 조상 대대로 도거리를 했단 말이요? 어째서 우리가 여기서 지내면 안 된다는 게요?"
마개출과 마주한 세 사람 중에 가장 연장자인 듯싶은 사내였다. 연장자라 해도 서른 안팎으로 나머지 두 사람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날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마개출 뒤에 붙어 서 있는 황구만은 사태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슬금슬금 뒤 쪽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세 사내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슬슬 간격을 넓혔다.
"송파가 무주공산인 줄 알았더니 먼저 온 들개가 있다는 말이군. 어이 노형. 같은 처지에 같이 벌어먹고 사는 게 어떻겠수?"
"여긴 너희 같은 아이들이 노는 곳이 아니니 꺼지는 게 좋단 말이다."
"그렇게 나온다면 할 수 없군. 우리도 여길 찍었으니 쉽게 물러나진 않을 것이야."
"허 이놈들 보게? 꺼지랬더니 오히려 나를 치겠단 말이지? 좋다 오너라."
마개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 놈이 일시에 주먹과 발이 바람을 일으켰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마개출이 뒤로 한 걸음 빼며 태껸의 자세를 잡았다. 헛주먹에 헛발질을 한 세 놈이 다시 마개출의 급소를 노리고 제각기 팔다리를 휘두르며 짓쳐들었다. 이번에도 마개출은 성큼 뒤로 물러나더니 학춤을 추듯 한 다리를 들고 건들거렸다. 그 틈을 타 한 놈이 재빨리 마개출의 허리께에 발길질을 했다. 헌데 놈의 발길이 허리에 닿기 전에 들고 있던 마개출의 왼발이 먼저 뻗었다. 놈은 한 쪽 다리를 든 공격 자세 그대로 마개출의 발에 턱이 돌아가 버렸다. 뿐만 아니었다. 마개출의 뻗었던 왼발이 땅에 닿는 순간 오른쪽 다리가 휙 하며 공중에서 다시 돌았다. 그 발등에 또 한놈이 목덜미를 맞고 휘까닥 쓰러졌다. 정말 순식간이란 문자 그대로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막 주먹을 뻗으려 든 가장 연장자인 남은 놈이 어이가 없는 얼굴로 마개출을 쳐다보았다. 싸워 볼 틈도 없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인 것이다. 놈은 들었던 주먹을 내리는 대신 재빨리 허릿춤에서 비수를 꺼내 들었다.
"왈짜가 서로 주먹질하기는 예사이나 칼질을 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는 걸 모르느냐? 없던 일로 할 테니 칼은 집어넣거라."
"잔말 말고 다시 한 번 그 잘난 발재간을 보여다오."
"흐헛, 그깟 비수 한 자루에 기고만장이군."
"그깟 발목쟁이 하나로 큰소리치는 네놈은 어떻고."
"뭐라? 에잇."
왼발로 중심을 잡고 오른발을 가볍게 흔들고 있던 마개출이 번개같이 칼을 쥔 놈의 손목을 향해 발을 뻗었다. 그러나 비수를 든 사내도 빨라서 발이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공중에다 칼을 획 그었다.
"엇."
마개출이 뻗었던 발을 급히 거두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날이 끊긴 짚신은 날아가고 맨발인 발등에서 피가 솟구쳐 올랐다. 굵은 핏줄이 베었는지 피가 멈추지 않고 뻗자 마개출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저만치 물러났던 황구만이 놀라 쪼로록 달려왔다. 행전을 풀어 황구만에게 건넨 마개출이 비수를 든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놈, 칼질 솜씨가 예삿내기가 아니구나. 어디서 놀던 누구냐?"
"강 아랫녘에서 놀던 억만이라 하우. 송파에 가면 배곯지 않는다기에 왔더니 임자가 텃세를 하는구려."
"강 아랫녘이면 혹시 천수네 패거리냐?"
"왜 아니겠수. 천수 두령이 이곳으로 이사를 했으면 하우. 그래서 선발로 왔더니 댁이 시비를 하는구랴. 헌데 아까부터 계속 말을 꺾는데 싸래기 죽만 처먹고 살았수?"
"뭐라? 시비는 네놈들이 먼저 걸지 않았느냐? 허고, 내 나이 너 보다 열 살은 윌 게다. 허니 반말을 한들 뭐가 어떻단 말이냐?"
"힝, 나이로 윗대가리 노릇을 한다면 금년에 백 살된 우리 증조 할애비가 임금이겠수."
억만이라는 사내가 비수를 쥔 손을 까닥대며 마개출을 내려다보는 사이 널브러졌던 두 놈도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들이 상황을 알아채고 벌떡 일어나 비수를 든 사내 옆에 모여 섰다. 급한 김에 마개출의 상처에 마른 흙을 뿌려 행전으로 묶은 황구만이 앞에 선 세 사내에게 질려 다시 뒤로 쪼르르 물러났다. 세 놈이 다시 눈길을 주고받더니 칼 쥔 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마개출을 향해 두놈이 와락 덤벼들었다. 마개출이 엉겁결에 다친 발을 딛고 일어나려다 중심을 잃고 기우뚱 쓰러지려 했다. 그 틈을 타 두 놈이 좌우에서 마개출의 어깨를 눌러 주저 앉혔다. 비수를 든 놈이 한 쪽 무릎을 꿇고 마개출의 상투를 뒤로 재키며 이죽거렸다.
"이제부터 송파는 천수 두령 것이니 노형은 가서 염라대왕하고 노시우."
"건방진 놈들이군. 이러고도 네놈들이 무사할 줄... 헉, 어... 어.…"
마개출은 말을 끝내지 못하고 명치에 칼을 맞았다. 억만이가 다시 칼날을 깊이 박았다 빼자 두 놈 역시 팔을 놓아버렸다. 마개출은 피를 쏟으며 땅바닥에 처박혔다. 그 광경을 본 황구만이 화들짝 놀라 도망을 치려했다. 그러나 삽짝 쪽은 사내들이 막아선 상태인지라 울타리의 수수깡을 와작 헤치고 재빨리 머리를 디밀었다. 참으로 빠른 판단에 빠른 동작이었다. 황구만은 찌그러진 갓을 머리 뒷꼭지에 붙인 채 쏜살같이 강변을 향해 뛰었다. 그 사이 정작 놀란 사람은 문일평이었다. 울타리 틈 사이로 사태를 관망하던 문일평은 마개출이 칼을 맞는 순간 자신도 칼을 맞은 듯 입에서 헉하는 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울타리 밖으로 튀어나온 황구만이 강변을 향해 뛰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제야 놈들에게 들키면 자신 역시 불리하리라는 생각이 미쳤다. 문일평은 황급히 울타리에서 물러나 길로 나섰다. 그리고는 황구만의 뒤를 따라 강변으로 죽어라 하고 걸음을 옮겼다. 강변이 집으로 가기보다는 훨씬 가까운 데다 나루에는 오가는 사람들과 군졸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문일평은 걸음을 빨리하면서도 뒤꼭지가 켕겨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살변을 일으킨 세 놈은 누구 하나 황구만을 쫓아 삽짝 밖으로 고개조차 내밀지 않았다. 나루에는 마침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문일평은 황구만이 창대를 짚은 군졸 앞에서 손짓 발짓으로 살변을 고하는 모습을 보았다. 문일평은 배를 향해 다가갔다. 한낮의 더운 시각이라 내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한데 뒤에서 누가 소매를 끌었다. 가슴이 철렁해서 돌아보니 생각지도 않던 막냇동생이었다.
"아니? 형님, 형님이 여긴 웬일로 나오셨는지요? 설마 이 아우의 마중을 나오시지는 않았을 터인데요."
"엉? 네가 여긴 웬일이냐?"
"원, 형님두, 내가 여기 오면 안 될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버님 심부름도 할 겸 마침 맹보 애비 왔을 때 길라잡이 해서 와 본 것이지요."
"어쨌든 잘 왔다마는 잠깐 기다려라."
문일평이 다시 뒤로 눈길을 돌리니 그사이 황구만은 군졸과 함께 냉큼 배 위로 뛰어들고 있었다. 사람이 다 내리자 노를 거둔 사공이 배에서 내리려다가 황구만과 군졸이 뛰어 올라오자 심기가 몹시 상했다.
"사공, 다시 배를 띄우게, 아 , 어서."
"이런 니미랄, 배도 좀 쉬어야지. 애 새끼 낳구 태(胎)도 빠지기 전에 또 올라탄단 말인가?"
"이보우 사공, 오죽 급하면 북통 위에 엎드릴까? 살변이 났단 말이우, 살변, 칼 든 놈들이 곧 뒤를 쫓아 올 텐데 그때 가서도 태 타령을 할 거요?"
"엉? 살변이라니 어디서 말이요?"
"저기 주막에서... 어, 저놈들이 이리로 오네?"
황구만이 가리키는 쪽을 보니 정말 세 놈이 어슬렁거리며 강변을 향해 오고 있었다. 놀란 사공이 노를 다시 놋좆에 끼운 다음 황급히 삿대를 찾아 쥐었다. 문일평도 황구만이 가르키는 쪽을 보았다.
"얘, 일도야, 얼른 다시 배에 올라라. 어서."
"예? 방금 내린 배를 다시 오르라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란 말씀입니까? 형님, 이건 좀 섭한 말씀이 올시다."
이 소리 저 소리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는 문일평이 무조건 아우의 등을 밀어 함께 배에 올랐다. 눈치 없기는 맹보 애비도 마찬가지여서 주인이 배에 오르자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아기뚱하게 서 있었다.
"맹보 애비 너도 죽기 싫으면 어서 올라라."
사공이 삿대로 물밑을 찔러 밀자 배는 둥실 물가를 떠났다.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던 세 놈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맹보 애비는 안 탈 거냐?"
그제야 사태를 깨달은 맹보 애비가 등짐을 진 채 허겁지겁 물에 뛰어들어 뱃전을 잡았다. 문일평과 문일도가 맹보 애비를 끌어올리자말자 사공이 노질을 시작했다.
"어이 사공, 배를 멈추시오. 배를 멈추라니까."
배와 한결 가까워진 세 놈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들과는 반대로 방금 배에서 내려 송파 장마당으로 향하던 사람들이 찔끔해서 모두 제자리에 섰다. 그러나 그들은 그깟 장꾼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배를 향해 뛸 뿐이었다.
"배를 세워라, 안 세우면 사공은 죽을 줄 알아라."
"저런 미친놈들을 봤나? 배를 세우면 죽일 거면서 안 세우면 죽인다네."
강물에 가래침을 탁 뱉은 사공이 느릿하게 노를 저으며 강가에서 갖은 욕을 퍼붓는 세 놈을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아니. 형님, 저놈들은 누굽니까? 저놈들이 누구 관대 형수와 조카까지 버리고 형님이 도타를 해야 한단 말입니까?"
"헛, 저놈들이 조금 전, 우리 여각에 새로 온 거간을 죽였느니라. 내가 보고 있는 새 말이다. 아 참, 죽은 사람과 같이 온 거간이 이 사람이다."
문일평은 얼굴이 노랗게 떠 뱃바닥에 쪼그려 앉은 황구만을 가리켰다. 창을 들었던 군졸 놈은 뱃머리에 걸터앉아 강 건너 둔초에다 눈을 박고 있었다.
"저 자들이 형님도 죽이려 했단 말입니까?"
"나도 목격자이니 저놈들이 죽이려 않겠느냐?"
"헛, 그렇다면 목격자도 아닌 나는 무엇 때문에 배에 태웠습니까?"
"어허, 말이 많구나. 미친 놈의 눈에 뵈는 게 있겠느냐? 피하고 봐야지.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느니라."
"그 말씀은 아버님이 늘상 하시는 말씀 아닙니까?"
"헛, 일일이 따지려 내게 왔느냐? 참, 맹보 애비가 갖고 간 서신은 아버님이 보셨느냐?"
"보셨으니 절 보내셨지요."
"그래서?"
"그래서라니요?"
"아버님이 무어라 하시더냐 말이다."
"아무 말씀 없으셨지요."
"전하는 말씀이 아무것도 없단 말이냐?"
"말씀은 없으셨고 형님께 보이라는 것은 있었습니다."
"무엇이냐?"
"요런 거지요."
일도가 엄지와 검지를 말아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더니 문일평의 코앞에 불쑥 내밀었다. 문일평은 살인사건을 목격한 것과 형세가 다급해 쫓기는 일을 잠시 잊고 멍하니 일도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무엇이냐?"
"저야 모르지요. 서신에 다른 글자는 없고 이런 것만 두 개 그려져 있었다니까요. 그래서 아버님 회신도 이거라고 하더군요."
"그래? 오회주의 서신에 동그라미가 두 개더란 말이지?"
"그렇다니까요. 형님은 이 아우의 말은 믿지 않기루다 작정하셨습니까?"
"허, 그럴 리가 있느냐? 네 말은 무조건 믿으니 걱정 말아라."
"그러게나 말입니다. 헌데 강을 건너서 어디로 가실 작정이신지요?"
"응? 급한 김에 피하고 볼 요량으로 그 생각은 미쳐 못했다. 하지만 건너가면 나루의 책임자인 도승에게 적환을 알려야겠지."
문일평이 동생인 문일도와 말 같지도 않은 일로 노닥거리는 사이 배는 강심을 넘어서 낙천정(樂天亭) 아래 백사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배가 물가에 닿기도 전에 언덕 위의 둔초(屯哨)에서 군졸 한 놈이 부리나케 물가로 달려왔다.
"어이 이 사람아, 웬일로 이렇게 빨리 돌아오는가?"
군졸은 뱃사공에게 묻는데 사공은 말이 없고 뱃머리에 있던 창든 군졸이 그제야 살았다는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말 말게. 강 건너에 살변이 났다네."
"뭐? 살변? 그럼 어서 도승이나 장교에게 알려야지. 헌데 자네는 왜 건너왔나?"
"칼 든 놈들이 셋인데 나보구 잡으란 말인가?"
"어쨌든 일단 적경을 알리고 보세."
군졸이 다시 둔초를 향해 부지런히 뛰어가더니 잠시 후에 장교와 창을 든 두어 명의 졸개가 나타났다. 군관은 열흘 전에 이곳의 둔초장으로 새로 온 인물이었다. 그는 본래 남한산성 군사의 교련관이었으나 술만 먹으면 부하들을 두들겨 좌천된 것이다.
"어디서 난 살변이냐? 목격자가 있느냐?"
문일평 일행을 둘러보며 심드릉한 얼굴로 군관이 물었다. 그러자 배를 타고 온 군졸이 나서 황구만과 문일평을 가리켰다.
"군관 나으리, 이 사람들이 본 모양 올시다."
"음, 그래? 이보슈. 살변이 어디서 났다는 거요? 본 대로 소상히 얘기해 보슈."
그러자 노랗게 뜬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서 있던 황구만이 결심을 한 듯 소매를 떨치고 장교 앞으로 나왔다.
"군관 나으리. 나는 상제벌 오 회주댁에서 거행하는 사람이오. 조용히 말 좀 나눕시다."
오회주란 말이 즉시 효력을 발생했는지 아니면 혹시 탁배기 값이라도 생길까 해서인지 장교는 황구만이 이끄는 대로 몇 걸음 따라갔다. 두 사람이 한동안 쑤군대더니. 이어 군졸을 시켜 둔초의 사공과 남은 군졸들을 모조리 불러오게 하였다. 잠시 후 세 명의 사공과 세 명의 군졸이 오자 장교가 큰 소리로 기찰선을 끌어내라 일렀다. 사공과 군졸이 우르르 몰려가 기찰선을 물 위에 띄웠다. 그사이 황구만이 문일평에게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건 포도청에서는 나 몰라라 할 일이나 오 회주님에겐 큰일이니 만사 재치고 상제벌로 가서 알려야 합니다. 객주 주인장은 저 군관이 강을 건네 줄 겝니다. 걱정 말고 가십시오. 허고 여각 일은 일간 소식이 갈 겝니다."
황구만은 제 할 말만 남기고 냉큼 기찰선에 몸을 실었다. 장교의 명을 받은 사공 둘이 배에 올라 노를 잡으니 기찰선은 날렵한 생김대로 상류를 향해 물살을 갈랐다.
"사공은 배를 돌려라. 자, 너희들은 병장기를 챙겨 배에 올라라. 그리고 당신들도 배에 오르시오. 살범이 있다면 잡으면 될 게고 도타하고 없다면 살인 현장은 조사를 해야지."
장교가 기세좋게 배에 오르자 나머지 사람들도 우르르 배에 올랐다. 둔초에 있던 뱃사공이 이제까지의 사공을 도와 둘이서 배를 젓자 배는 한결 가볍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뱃전에서 바라보니 아까의 왈패들은 보이지 않았다. 강을 건넌 후 송파 모랫바닥에 배가 얹히자 장교를 선두로 모조리 백사장에 내려섰다. 장교는 합이 다섯인 군졸을 앞세워 보무도 당당하게 주막으로 향했다. 문일평은 일도와 등짐 진 맹보 애비와 함께 약간 뒤처져 그들의 뒤를 따랐다.
"가만, 맹보 애비 네 등에 진 건 무어야?"
"아, 이건 굴비 옵죠. 본댁 대마님이 주시던 걸입쇼?"
"어, 그래? 마침 굴비가 떨어졌다던데 잘 갖고 왔다. 그럼 넌 짐이 무거울 테니 곧바로 집으로 가거라."
무거운 짐을 진 맹보 애비의 사정을 봐 주려는 듯 문일평이 곧장 집으로 가라 일렀다. 헌데, 맹보 애비 본인은 실쭉한 표정을 지으며 코를 핑 풀어 던졌다.
"구경거리 귀한 촌 동네에서 살변 구경하기가 그리 쉽운갑쇼? 쉔네도 송장 구경을 하고 가야 오늘 밤 잠이 오겠는 댑쇼."
맹보 애비의 말에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문 문일평이 장교의 꽁무니를 좇아 주막이 보이는 곳까지 와보니 주모와 하녀는 물론이고 중노미란 놈과 옆집 주막 사람들까지 모조리 길바닥에 나와 웅성거리고 있었다. 눈뜨고 죽은 마개출이 무서워 도망을 나온 것이다.
"살인을 한 무리는 어디로 갔느냐?'"
장교가 묻건만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할 수 없다는 듯 중노미가 나섰다.
"멀리서 보니 저 아래 우둘목 뽕밭에서 배를 끌어내 아랫강으로 내려가던 걸입쇼?"
"뭐라? 아, 이놈들이 나루를 피하려 배를 숨겨 두었단 말이군. 헛. 그렇다면 포청에 알려 각 나루에 기찰을 더욱 엄하게 해야겠군."
장교가 주막 마당으로 들어가 군졸을 시켜 그새 파리가 왕왕대는 시체를 돌렸다 엎었다를 몇 번 하더니 볼일이 다 끝났는지 주모를 불러 술상을 보라 일렀다. 시체는 땡볕에 둔 채 중노미가 들고 온 술상을 처마 밑 그늘에서 장교와 군졸들이 얼려 몇 잔씩 들이켰다. 그리고는 다섯 군졸이 덤벼들어 두 개의 창대에 새끼줄을 대강 얽은 위에 마개출의 시체를 올려 묶었다. 그리고는 네 놈이 제각각 창대 끝부분을 들더니 마당 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을 헤치고 삽짝을 나섰다. 물론 술값은 송장을 치워준 값이라는 것을 서로 알고 있는지라 줄 사람도 받을 사람도 시종 개의치 않았다. 문일평이 동생과 맹보 애비를 데리고 문 밖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형님, 저들이 도타한 살범들을 잡을 수 있을까요?"
"글쎄, 난들 알겠느냐 마는 이렇게 되면 내가 애써 오회주를 만나고 온 보람이 없구나. 오회주가 일껏 보낸 자가 하루도 안 돼 변을 당하다니 원."
"그러게나 말입니다. 허면 오회주가 보낸 서찰의 동그라미 두개는 뭘 뜻 할까요?"
"그건 아마. 알았으니 돈을 보내란 말이 아니겠느냐? 오늘 당장 사람들을 내게 보낸 것만 봐도 그런 것 같구나. 허긴 오자말자 죽었다만.…"
"형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 듯 합니다. 동그라미 하나는 알았다는 뜻이고 하나는 엽전 모양이니 돈이란 말씀은 근리합니다만 왜 문자를 두고 그림을 그렸을까요?"
"그거야 간단하지. 문서를 남겨 증거로 만들지 않겠단 뜻이고 당사자들끼리만 알고 다른 사람이 봐도 무슨 소린지 모르게 하려고 그랬겠지."
"그것도 그럴듯한 말씀이군요. 그럼 아버님이 형님에게 전한 동그라미는 알았으니 그리 알라는 뜻이겠군요."
"일간 오회주에게 돈을 실어 보내실 게다."
"송파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곳입니까?"
"글쎄, 그동안 내가 살펴 본 바로는 조선팔도에서 가장 큰 장시가 될 것 같다."
"형님이 그렇게 보셨다면 그렇게 되겠지요. 그럼 저도 여기다 객주나 여각을 내렵니다."
"그렇게만 되면 우리 둘이서 송파의 반은 먹을 수 있을 게야."
"좋습니다. 내일 아버님과 상의해서 저도 송파로 오지요."
"그럼 하루바삐 집 지을 재목부터 구해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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