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대폭발
"그래, 정일이와 덕출이가 떠날 때, 노자는 넉넉히 내렸는가?"
"아, 예. 나으리, 엽전으로다 열 냥씩 주었습니다. 그거면 두어 달은 지낼 만할 겝니다."
왜국 역관 신지남 보다 하루 먼저 동래로 떠난 곽정일과 덕출이가 객지에서 고생할 것이 마음이 쓰인 송수호가 애둘러 노비(路費) 걱정을 하였다. 쌀이 한 석에 두 냥이니 열 냥씩이면 도중 노비로 넉넉하겠으니 그나마 다행이리라. 먼 길을 가면서 무거운 쌀이나 무명을 지고 가지 않는 것은 엽전이라 불리는 상평통보 덕분이었다. 지난 해인 무오(戊午1678) 년 봄 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상평통보가 도성 안에서만 쓰이기 시작하더니, 경기도로 충청도로 빠르게 퍼져나가서 금년부터는 조선 팔도 어디서나 엽전을 받아 주었다. 엽전은 같은 가치로 따져보면, 쌀이나 무명보다 부피가 적고 가벼운 데다 썩지도 않으니 갖고 다니거나 감추기 좋은 재산이기도 하였다. 혹자는 엽전이 무거워서 틀렸다고 시비를 하는데, 엽전이 무거운 것은 엽전이 많은 부자들이 걱정할 노릇이요, 땡전 한푼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거울 만큼 엽전이 많다면 오죽 좋겠는가? 그리고, 엽전이 무겁네 마네 하는 것은, 환장하게 술이 그리운 놈에게 막걸리는 배가 불러 틀렸어,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이럴 때 한복만이 살아 있어 함께 동래로 내려보냈으면 얼마나 좋겠나? 한복만이 하는 일을 정일이와 덕출이도 보고 배울 좋은 기회인데... 허, 복만이가 간지도 한 달이 되었군."
한복만의 이름을 듣는 순간 박일주는 한복만이 죽던 날이 떠올라 두 눈을 감았다. 참으로 원통하고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박일주는 한복만을 죽일 수 있는 솜씨를 지닌 살수들이 누구인지 꼭 만나보고 싶었다. 그리고 죽던 살던 놈들과 일전을 벌여 한복만의 원수를 갚고 싶었다.
"지난번 청국에 성절사로 갔던 역관을 알아보라고 했을 터인데? 알아보았는가?"
잠깐 상념에 잡혀 있던 박일주가 송수호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아, 예, 나리. 장진우였습니다. 장진우는 이번에 은자가 흘러들어간 청국 역관 장진영의 동생 입지요. 그리고 지난번 장진우가 들여온 백사는 삼백 동이라 하더이다."
"음 그렇다면 삼백 동 모두 동래 왜관으로 내려갔겠군."
"아닙니다. 지난달에 왜와 거래할 백사 이백 동만 내려갔습니다. 삼남으로 나가는 조운선에 실었답니다. 남은 백 동은 장진우가 사무역으로 들여온 것이온데 이것의 행방은 아직 모르옵니다."
"허, 이제야 대강 얼개를 알겠구나. 신지남의 은자는 백사 값으로 장진우에게로 간 것이 틀림없군. 장진우는 다시 그 은자를 이번에 청국으로 가는 제 형에게 넘겼을 것이고..."
"예? 그럼, 백사 백 동은 신지남의 수중으로 갔다는 말씀 오이까? 신지남이 그 많은 걸 내일 가지고 가진 않을 테지요? 아차, 이것도 지난달에 이미 뱃편으로 내려보냈겠군요. 지난달이면 우리가 허견의 뒤를 쫓느라 신지남이는 미처 생각을 못할 때아니었습니까?"
"그렇겠지.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네. 그것보다 은자(銀子)의 본래 주인인 장현이 저토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쓴 까닭이 더 궁금하구먼."
"이제부터 허견과 장현의 관계를 캐 볼까요? "
"아닐세. 복평군에서부터 허견이나 홍치상이, 그리고 장현까지 알만큼은 알았네. 그들이 무엇을 노리는지 얼추 알 것 같으니 이제부터는 물증과 확증을 손에 넣어야 해. 한 가지는 정일이와 덕출이가 동래에서 돌아오면 바로 알 수 있네. 나머지는 나대로 짐작하는 바가 있으니, 자네는 다른 것을 좀 알아봐 주게."
"나으리께서 말씀만 하시면 무엇인들 못 알아 오겠습니까. 하명하시지요."
"자네 재작년에 원주의 염초도회소로 내려간 군기시의 판관 김원준이라고 아는가?"
"김 판관이라면 성격 괴팍하기로 소문난 분 아니십니까. 하지만, 성함은 알아도 뵈온 적이 없습니다."
"얼굴을 몰라도 괜찮네. 그 사람의 집이 세검정 어디라고 들었는데, 김 판관의 집은 그곳 사람들에게 물으면 찾을 수 있을 걸세. 듣기로는 노모가 계집종 아이 하나 데리고 혼자 계신다고 들었네. 자네가 사시는 형편도 살필 겸, 근래에 김 판관이 왔다간 적이 있는지, 왔었다면 무슨 일로 왔었는지, 그걸 소상히 알아오게. 이 일이 별일 아닌 것 같아도 아주 중차대한 일이 될 수도 있으니 그리 알게."
"창의문 밖에 있는 세검정이라면 죽은 한복만의 집이 있는 곳 아닙니까? 그곳은 여러 번 가 보아서 잘 아옵니다. 보름 전에도 나으리께서 내리신 돈을 한복만의 집에 전했습니다."
"이런, 내 정신 보게. 세검정에 한복만이 집이 있다는 걸 번연히 알고 있었건만 어찌 생각을 못 했을까? 어쨌든 잘 되었네. 먼저 한복만의 집에 가서 김 판관의 집을 물어보면 될 터이니까."
"아, 예, 그러면 되겠군요."
며칠 후였다. 송수호의 동생, 송윤호가 예조의 일을 마치고 퇴청을 하였다. 관복을 평복으로 갈아입으려고 안채에 들어서니 아내가 나와 반겼다. 아이들도 모두 나와 인사를 하는데 다섯 살 막내딸을 번쩍 안아 든 송윤호가 볼에 입을 맞추니 수염이 싫은 아이는 바둥거리며 얼굴을 이리저리 피하였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아내는 실눈으로 웃음을 머금었다. 송윤호의 아내는 혼인한 지 9년이 흘렀건만 사 남매를 생산하고도 여전히 예뻤다. 아내는 금년에 스물여덟 살로 활짝 핀 꽃 같았다. 풍성한 몸매와 복스럽고 덕성스러운 얼굴을 보면, 꽃 중에도 모란처럼 은은하게 아름다웠다.
"오늘이 안국방에 가신다는 날이라 퇴청을 빨리하신 건가요? 나으리?"
"음, 오늘이 스무여드레 아니요? 오늘 보자셨으니 찾아뵈어야지요. 참, 두일(斗逸)이 너는 요즘 무엇을 배우느냐?"
옆에서 조용히 서 있던 아들에게 아비의 느닷없는 질문이 떨어지자 장남인 두일이는 미쳐 대답을 못하는데 옆에 있던 차남인 수일(殊逸)이가 재빨리 형을 대신하였다.
"형은 소학과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읽구요, 저는 거기다 격몽요결(擊蒙要訣)도 함께 보고 있습니다."
"헛, 형보다 제가 낫다는 말로 들리누나. 빨리 많이 보는 것보다, 늦더라도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아서, 쌓은 것이 무너지지도, 함부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게 좋은 공부법이니라."
"예, 아버님."
동생에게 대답을 뺏긴 두일이는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으니 그 모습을 본 송윤호는 아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공부란 서두른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야. 네 나이 이제 열 살이요, 수일이는 아홉 살 아니냐? 네 나이엔 천자문과 소학으로 차근차근 기초를 다지는 것이 으뜸일 것이야. 알았느냐?"
".... 예. 아버님."
아비가 두 형만 상대하여 말을 하고 자기에게는 아는 척을 하지 않아 속이 상한 일곱 살짜리 보일(甫逸)이란 놈이 화가 나서 아비가 들으라고 투덜대었다.
"나도 천자문을 아는데... 나는 천자문을 바로도 거꾸로도 다 욀 수 있는데...."
셋째가 하는 말을 들은 송윤호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허허, 천자문을 거꾸로부터 외울 수 있다면 보일이가 가장 올바른 공부를 하였구나. 그래. 두일이와 수일이도 한 가지를 하더라도 보일이 처럼 하거라."
".........예."
"예."
보일이란 놈이 입이 쩍 벌어져 어깨를 으쓱하였다. 평복으로 갈아입은 송윤호가 형의 집으로 가려고 안방을 나섰다. 그러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거칠이가 급히 달려가더니 부엌에다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나으리 가시네. 아, 뭘 해? 빨리 내오지 않고."
"지금 나가요. 다 되면 어련히 나갈려구... 시끄럽게 소리는 왜 지른담?"
"빨리빨리 하지 않고 꾸물대니까 그러지."
"엄맘마? 누가 꾸물대? 자기는 손끝 하나 꼼짝 않구서? "
"저 쫑알대는 것 좀 보아. 이리 줘."
이름이 거칠이라 말은 거치나 내외의 금슬은 더없이 좋았다. 금년에 스물일곱의 거칠이와 갖 스물의 언년이는 재작년에 혼인을 하였는데,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서인지 처녀 총각 때와 마찬가지로 무람없는 말로 티격태격하였다. 거칠이와 언년이 부부가 티격태격하는 광경을 미소로 바라보던 송윤호가 마루에 있는 아내를 돌아보았다. 아내 역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안주가 될 만한 몇 가지와 어머님이 드실 반찬을 조금 만들었어요. 입에 맞으셔야 할 터인데...."
"입에 맞지 않을 리가 있겠소? 임자 솜씨라면 흙을 퍼다 만들어도 맛있게 드실 분들이니 걱정 마오. 허허."
"저이 말씀 하시는 것 좀 보아, 흙으로야 어찌..."
"그렇다는 말이지. 허허, 다녀오리다."
지게를 짊어진 거칠이가 앞서 대문을 나서니 송윤호도 성큼 뒤를 따랐다. 송윤호가 춘보나 거칠이의 빠른 걸음을 익히 아는지라, 놈의 뒤꿈치만 바라보고 부지런히 걸으니 소맷자락이 펄럭이고 사람들이 쳐다보아서 채신머리없는 걸음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누가 본다고 하여 팔자걸음으로 휘적거릴 송윤호가 아니어서 집에서 안국방까지 얼추 시오리 길을 파발마보다 빨리 도달하였다. 저녁을 먹은 후에 사랑에서 형제는 술상을 마주하였다.
"제사나 차례 지낼 때 말고는 이렇게 너와 술상을 마주하는 것이 처음이지 아마? "
"허, 참, 형님도, 제 혼인 전날 둘이서 술상을 받은 적이 있지 않습니까."
"핫 하하,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그게 벌써 십년 전 일이로구나."
"앞으로는 이런 자리를 자주 갖게 되겠지요."
"못난 형이라 그동안 너와 이런 술상 한번 마주하지 못하였다. 미안하구나."
"원, 형님도... 이제껏 년년이 흉황이었는데 그럴 경황이 있었나요? 술상은커녕 남이 먹는 밥상도 구경하기 힘든 시절이었지요."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동안 너나 나나 힘들게 지금껏 버텨왔구나."
"저보다 형님께서 고생이 많으셨지요. 아무리 인명은 재천이라지만 형님은 그동안 못 볼 일도 겪으셨구요."
송윤호는 형의 잔에다 술을 따르며 정미(丁未) 년 돌림병으로 잃은 조카들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아이들을 앞세운 형의 마음이 어떠하리란 것을 자신이 부모가 된 지금에서야 더욱 가슴 아프게 느꼈다.
"글쎄다. 자식을 먼저 보낸다는 것은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절망과 고통일 게야. 차라리 지옥불에 들어앉는 것이 고통이 덜 하겠지."
동생을 바라보는 송수호의 눈에 얼핏 안개가 끼었다.
"저도 자식이 생기고야 형님의 심정을 조금은 알게 되었지요. 아무튼 그동안 잘 견뎌 오셨습니다. 한잔하시지요."
"그래. 너도 잔을 들 거라. 그런데 이거, 안주가 푸짐해서 좋긴 하다만 제수씨에게 미안한 노릇이구나."
"헛, 자주도 아니고 생전 처음인데 미안이라뇨? 당치 않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그런 게 아니야. 매번 어머님 찬을 만들어 보내기가 쉬운 일은 아닐 터인데, 아무튼 한결같은 사람이야."
"허허, 설마 제 집사람 칭찬하려고 저를 보자신 것은 아닐 테지요? 십 년 동안 없던 술자리를 마련했을 때야 분명히 무슨 긴한 말씀이 계시겠지요. 그만하시고 솔직히 말씀을 꺼내시지요."
비번 날이니 그냥 술이나 한잔하자던 그날부터 이미 눈치를 채고 있던 송윤호였다. 아하, 무슨 일이 있구나 싶었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술도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며 얘기를 옆으로 끌고 가는 눈치가 번연히 보이는 것이다. 송수호가 말없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잠깐 동안 고개를 숙여 방바닥을 보는 듯하더니 불현듯 입을 떼었다.
"네가 옳게 보았다. 내 너에게 꼭 했으면 하는 말이 있었으나, 네게 부질없는 근심만 생기게 할까 싶어 참아 왔었다."
"아니, 형님댁에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아니야. 집에야 무슨 일이 있겠니. 요즈음 들어 내 마음이 좀 심란해서 그런다."
"형님이 하시는 일 때문인가요?"
"글쎄다.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아서 나 자신도 잘 모르겠구나."
"예? 잘 모르다니요? 매사가 분명한 형님께서 무슨 말씀이 그렇습니까?"
"글쎄 말이다. 근래에 생긴 버릇이구나. 지난날을 생각하면 살아온 세월이 모두 부질없는 한낱 꿈같고, 앞날을 생각하니 그 또한 막연하게 불안하니 나도 이해할 수가 없구나. 내가 네게 하릴없이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것도 생각하면 우습다마는 네가 알다시피 언제 내가 네게 이런 얘기를 한 번이라도 하더냐? 허허."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형님은 이제까지 옳은 일만 해 오신 분인데 지난날이 부질없다니요? 그리고, 앞날이야 예전에 비한다면 확 트인 탄탄대로를 걷는 것 같을 터인데 무슨 걱정을 하십니까? 게다가 어머님 아직 강녕하시고 형수님 안녕하신데다, 집안의 장손인 원일(源逸) 이까지 잘 자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뜻이 아니란 걸 너도 잘 알면서 그러느냐. 가정사나 내 하는 일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예감(豫感)이야. 발밑에 끝없는 허방이 깔린 듯하고 막연한 불안감이 자꾸만 밀려오는구나. 여하튼 내가 네게 꼭 하고 싶은 말은 이런 말이 아니고.... 기회가 있을 때 너에게 부탁의 말을 하려는 거다."
"형님이 오늘따라 좀 이상한 말씀만 하시는데, 아, 말씀하세요. 형님 부탁이라면 제 목숨인들 아까울게 있을라구요. 아, 말씀해 보세요."
술은 청주(淸酒)요 안주는 각종 전과 포와 찌개였으나 두 사람이 술보다 말에 취해서 찌개는 다 식어버리고 전은 굳었다.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던 송수호가 젓가락으로 먹지도 않을 생선전을 괜히 들었다 놓았다. 송윤호도 분위기를 눅게 해보려고 괜스레 술병을 들어, 이미 가득 차 있는 제 술잔에 술을 따르는 척하다가 상위에 소리 나게 놓았다. 젓가락을 가만히 상 위에 놓은 송수호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해야 할 말이라면 해야겠지. 할 말이란 다름이 아니다. 앞으로 내게 무슨 일이야 있겠냐마는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어머님과 원일이 모자를 책임져 줬으면 하는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만약의 사태를 말하는 것이니 심각하게는 생각하지 말아다오."
"그런 말씀을 하지 않더래도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집안이 불궤(不軌)에 휘말리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이야 있겠습니까?"
"고맙구나. 이젠 안심하고 소신껏 살아갈 테니 너는 걱정하지 말아라. 이제까지의 근심은 모두 예감이었을 뿐이니까."
형이 오늘따라 이제껏 없던 술상에, 안 하던 말을 하니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평소에는 형의 말이 치밀하고 분명했건만 지금은 꼭 해야 할 말은 빼고, 당연한 가족 부탁으로 얼버무리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형이 말 못할 난관에 걸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꼬치꼬치 캐 물어봐야 시원스런 대답이 나올 형도 아닌지라 송윤호는 입을 닫기로 하였다. 형제가 더 이상 별말이 없으니 술자리는 흐지부지 재미없이 끝나버렸다. 다음날 송윤호가 예조의 사무실 격인 행랑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 밖에서 누가 찾는다고 서리가 알려주는 것이다. 행랑 밖에 나와보니 누군지 뒷짐을 지고 금호문을 향해 뒤돌아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송윤호의 인기척에 돌아서는 사람은 다름 아닌 형의 친구, 홍문관 교리 김민세였다.
"아, 미수(微琇) 형님이셨군요."
"하하, 치우(痴愚), 오랫만일세 그려."
치우는 송윤호의 자(字)로, 어리석기 짝이 없다는 뜻이라, 많고 많은 글자(字) 중에 하필 왜 그런 자를 골랐느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송윤호는 <어리석은 바보가 골라서 그렇소>하고 대답을 하곤 하였다..
"형님께서 어쩐 일로 저를 다 찾으셨는지요?"
"아니네. 승정원에 볼일이 있어 금호문으로 들어오다 보니 자네 생각이 나서 잠시 들렸네. 괘념치 말게나."
"아, 예. 미수 형님과는 그동안 너무 적조(積阻) 했습니다. 제가 찾아봬야 했는데 죄만 하옵니다."
"아, 그 무슨 소린가, 무심했던 건 나도 마찬가지지. 하나, 자네 형과는 이따금씩 만나네. 그 사람은 무슨 공무가 그리 바쁜지 언제나 분주하더군. 요즘도 그런가?"
"왜 아니겠습니까? 언제나 바쁘시지요."
"허허, 그 사람 참, 한데, 근래에 아준이가 자네에게 삼복(三福) 이야기를 안 턴가?"
삼복이라면 복창군(福昌君) 삼 형제를 말 함이다.
"글쎄요. 들은 바가 없습니다."
"그래? 그럼 허견이 얘기도 없었겠군? "
"예. 제게 그런 말을 할 형이 아니니까요."
"그럼 자네가 아준이를 만나거든 삼복과 허견을 주시해야 한다고 꼭 좀 전해주게. 요즘 서로 바빠서 통 만날 수가 있어야 말이지..."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김민세가 가고 난 후에 송윤호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홍문관 교리인 김민세가 굳이 나를 만나 별로 긴치 않아 보이는 삼복이나 허견이의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삼복과 허견이 세인(世人)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언제 적부터인가 말이다. 그동안 그들의 비리가 한두 가지가 아닐진대 누구의 발고(發告)가 있었다면 의금부나 사헌부에서 진작에 조사를 마쳤을 것이었다. 이제 새삼 낡은 소문에 불과한 얘기를 내게 전하는 김 교리의 진짜 속셈은 무엇일까? 형과 함께 어릴 적부터 같은 스승에게 글을 배운 김 교리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워낙 남인과 서인의 권력 다툼이 심한 요즈음의 낌새로서는 좋지 못한 훈수가 아닌가? 그날 저녁 퇴청을 하여 집으로 가던 송윤호가 발길을 돌려 형의 집으로 향하였다. 딱히 김 교리의 말을 전하려는 것보다 어제의 술자리에서 형의 우울한 모습을 본 후에 계속 마음이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로든 형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송윤호가 대문을 들어서니 환갑을 넘겨 허리가 구부정한 노복(老僕) 말득이가 코를 땅에 끌며 반기었다.
"잘 있었는가? 어제 왔을 때는 보이지 않더구만, 어디 몸이나 편치 않은가 걱정하였느니."
"아이쿠, 작은 서방님은 어리실 때부터 쉰 네에게 황공한 말씀만 하시더니 여전하시옵니다. 큰 서방님께 오선 안채에 계시오니 어서 드시지요."
안채로 앞서가는 말득이를 바라보는 송윤호는 어릴적에 팽이를 깎아주던 젊은 말득이가 떠올라 삼십 년 세월이 언제 지나가버렸는지 지금 이 순간에서야 알았다. 안방에서는 이른 저녁을 먹고 있었다. 모두들 반기는데 앉으려다 보니 한쪽에는 조카를 눕혀 놓았다.
"어라, 이놈은 또 자네 그려. 올 때마다 잠만 자니 뛰어노는 걸 볼 수가 있나?"
"저, 작은 아비란 사람, 말하는 것 좀 봐. 일곱 달 된 애가 뛰어놀다니? 이제 겨우 기기 시작했는걸. 그저께 처음으로 조금 기었느니라. 얼마나 장한고.."
어미인 한 씨는 손자 얘기가 나오자 눈가에 잔주름을 모아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새삼 손자를 돌아보느라 숟가락을 놓았다. 형도 형수도 그런 어미와 애기를 바라보느라 밥 먹는 것도 잊을 지경이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송 씨 집안 모두에게 그만큼 귀한 종손인 것이다. 송윤호도 밥상에 끼어앉아 같이 저녁을 먹었다. 사랑으로 나온 얼마 후에, 지나는 말로 김민세가 한 얘기를 형에게 꺼내보았다. 그리고는 형의 동태를 살펴보는데 의외로 송수호는 쾌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수가 그런 소리를 하더란 말이냐? 허허, 내가 그 친구를 잘못 봤던지 그 친구가 나를 잘못 보았구나. 이렇게 되면 생각이 더욱 복잡해지는걸?"
"언듯 저도 그런 생각을 했었지요. 허견이란 인물은 외입질로 장안에 호가 난 작자 아닙니까? 세상이 다 아는 일을 애들 장난하듯 형님께 전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요?"
송윤호의 물음에 대답은 하지 않고 송수호는 등잔에 불을 붙이려고 부시를 치더니 불씨를 살리려고 부싯깃에 입을 대고 호호 부는 것이다. 곧이어 까무룩 한 불빛이 방안을 밝히더니 잇따라 들기름 타는 냄새가 은은하였다. 송윤호는 작심하고 단도직입으로 먼저 말을 꺼내었다.
"형님, 어제 형님이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 보았는데, 형님과 나는 형제이니 동체(同體) 아닙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형제가 합신 전력(合身全力)으로 헤쳐나갈 뿐이지요. 어찌 감추어 득(得) 될 일이 있겠습니까. 형님이 그러시니 섭섭합디다."
"그것은 너의 오해다. 내가 잘못되었을 때, 너라도 무사해야 그나마 집안이 보전되는 것 아니겠느냐? 그래서 네게 부탁한 것이지 딴 뜻은 없느니라."
"둥우리가 떨어진다면 알인들 성하겠습니까? 형님이 잘못되고서야 집안이 어찌 보존되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리고 아니할 말로 형님이 무슨 역모를 꾸미는 것도 아닐진대 집안이 박살 날 일이야 있을라구요."
역모라는 말에 송수호가 정색을 하더니 동생을 바라보았다. 송윤호 또한 긴장한 얼굴로 형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송수호 역시 마음을 굳힌 듯 선선히 입을 떼었다.
"휘(諱) 해야 할 말을 너는 예사로 하는구나. 그러나, 네 말도 옳은 말이다. 그래, 좋다. 네게 다 얘기하마.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내가 잘못 생각하는 점이 있으면 네 의견을 말해다오. 어쩌면 내게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를 일이니."
송수호는 동생에게 허견의 비리를 조사하던 중 예상과 달리 복평군과 장현으로 발을 넓히는 놈의 뒤를 밟다가 한복만이 당한 것을 이야기하였다. 그와 함께 알게 된 은자의 출처와 행방을 알고 보니 더욱 사건이 복잡해져서 허견이나 홍치상의 비리나 날강도 같은 짓은 한낮 눈가림에 불과하고 오히려 명백한 역모의 기미를 포착했음과, 허견이 운반한 은자가 일본 역관 신지남의 손에 들어간 점과 청국 역관 장진영의 손에 들어간 것까지 말을 하였다.
"네가 일 전에 갖다 준 진하사 명부에 짐작대로 장진영의 이름이 있더니 어제 청나라 사신단에 그놈이 끼어갔다더구나. 그놈이 무역 은이라 둘러대고 들여올 물건이 무엇이겠느냐? 이번엔 백사가 아닐 것이야."
"형님 말씀을 듣고 보니 역시 역모 건이군요. 형님은 그들의 역모가 어떻게 얽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처음에는 허견이 장현과 유혁연, 그리고 복선군 형제를 가까이 하기에 부쩍 의심을 하였으나, 한복만이 죽고 난 후에, 놈의 인물됨을 몇 번 시험해보니 그놈은 남의 심부름이나 할 놈이지 역모를 주도할 인물은 아니었어. 그다음 생각한 것이 장현인데, 장현이라면 장안의 거부요 종 1품 숭록대부가 아닌가? 집안이 명문이요 부러울게 없는 장현이 역모가 분명한 일에 은자를 내어놓은 것은 어찌 보면 어불성설 아니겠느냐? 그래서 더 캐어본 결과, 부자들이 흔히 하는 숫법으로 자신과 가문의 안전에 투자를 한 것이지, 불궤에 가담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자였어. 자신의 안전을 위해, 같은 역관끼리 돈거래를 했을 뿐인 것처럼 은자를 제공한 것 아니겠느냐."
"잠깐만요, 장현이 일은 어쩌면 형님 말씀이 맞을지 모릅니다. 장현의 딸이 이미 오래전에 궁녀로 박혀있고, 또 몇 년 전엔 종질녀를 궁녀로 박았다 하더군요. 한데 궁에서 흘러나온 소문에 따르면 종질녀인 옥정인가 하는 궁녀가 절색이랍디다. 나이는 금년에 스물이고요. 이런 미인을 왜 궁녀로 박아 젊은 임금 옆에다 둘까요? 아마, 이것도 형님이 말한 투자가 아닐까요?"
"그런 것 같구나. 아무리 명문거족이라 하더라도 무슨 일에 연루만 되면 하루아침에 박살이 나서 처자식은 남의 집 종이되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장현이라고 왜 조심에 조심을 하지 않겠느냐?"
"그럼 복선군과 유혁연 대장만 남습니까?"
"누가 왕으로 추대를 하여주면 모를까 복선군이나 그의 형제들이 직접 역모에 가담이야 하겠느냐? 그러나 그들도 유혹을 이길 만한 인물들이 못 되는 것 같더라. 선대(先代)의 예를 보아도 군(君)이 반정을 도모하는 무리의 추대로 임금이 된 예도 있지 않으냐. 그래서 그런지 군이란 항상 그런 유혹이 따르게 마련이라 삼복도 언젠가는 덫에 치일 것이나 아직은 아니야. 유혁연은 훈련대장이라 그에 딸린 군사가 8백이나 되니 거사에 제일 먼저 끌어들이고 싶은 인물이지. 하지만, 그는 고집 센 무반(武班) 아니냐? 게다가, 남인이 집권하고 있는 이 마당에 남인인 그가 미치지 않고서야 역당에 들겠느냐? 그러니 그도 아니지 않겠느냐?"
"그렇게 따지면 역모는 없는 것 아닙니까? 형님은 무엇을 보고 역모라 하시는지요?"
"너, 박일주를 알지? 몇 해 전에 너와 김화길에 동행했던..."
"아, 알지요. 검을 잘 쓰던 그 사람 아닙니까?"
"그래, 그 사람이 며칠을 조사한 것을 오늘 내게 일러주었느니라. 내 여기서 단서를 얻었느니라. 너도 들어보려무나."
이제 막 새롭게 이야기를 막 시작하려는데 송수호의 처가 손수 술상을 내어왔다.
"형수님이 제 마음을 어찌면 이렇게 잘 아시고... 아이고.. 고맙습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술상을 받아든 송윤호가 너스레를 떨었다. 술상을 건넨 형수는 치맛자락에 조심스레 손을 감싸며 사뭇 미안한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이, 술상이래야 새로운 안주도 없는걸요. 어제 드시다만 전 부침과 술이에요. 그래도 두 분이 출출할 때 입가심은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어서들 드세요."
"아, 그럼요. 감지덕지하며 잘 먹겠습니다. 형수님."
두 사람이 어제 마시지 못한 술을 오늘 다시 마시게 되었다. 먼저 잔을 받은 송수호가 조심스레 술잔을 비우더니 잔을 동생에게 건네었다.
"술맛이 괜찮구나. 자, 너도 한잔 받아라."
"그러지요. 아, 잔이 넘칩니다."
시원스레 잔을 비운 송윤호가 다시 형에게 술을 따루었다. 그리고는 권커니 잣커니 술이 두 어순배 돌자 송수호의 목소리에 약간의 힘이 실리었다.
"아까 박일주 이야기를 하다 말았지?"
"예, 그랬었지요."
"박일주 얘기를 하기 전에 김경준이란 사람을 먼저 얘기해야 네가 이해하기 좋을 게다. 김경준이라고 나와 과거를 같은 해에 치른 군기시의 판관으로 있던 동과(同科)가 있느니라. 그 사람이…"
"아, 예. 그 사람이라면 조정의 관원이라면 모를 사람이 있겠습니까? 지난해에 군기시에 불이 나서 원주 염초도회소로 좌천된 그분 말씀이지요? 성질이 괴악하다고들 하던데 사실인가요?"
"허허. 너도 잘 알고 있구나. 하나 성질이 괴악하다는 소문은 잘못이지 싶다. 다만 어릴 적부터 가정이 몹시 불우하여 성격이 좀 남달라 보일 뿐이지. 장원을 할 정도의 문장을 지닌 그 사람은 내가 보기엔 누구보다 뜻이 깊은 사람이니라. 이번에 박일주를 시켜 이 사람이 한양의 집에 왔었는지를 알아보라 하였느니라. 역관 신지남이 사사로이 동래로 몰래 내려가는 것을 보고 짚이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지. 내 생각대로 둘이 연관이 있다면 김경준이 반드시 한양으로 와야 할 일이 있거든. 이것은, 신지남이 갖고 올 물목이 짐작이 가는지라 염초도회소에 있는 김경준이 자연 생각난 것인데, 과연 신지남과 김경준이 관계가 있음을 박일주의 보고를 듣고 확실하게 알았느니라."
"얘기가 복잡하군요. 그래 김경준 그 사람이 한양에 왔었답니까?"
"내가 생각이 짧았던 거야. 한양에 얼굴을 드러낼 사람이 아니었지. 한양의 노모에게 매달 시량(柴糧)을 갖다 주는 심부름꾼이, 야밤에 몰래 허견의 집을 들어가더라는구나. 서찰을 주고받았겠지. 그리고는 사람을 만나고 다니더니 그들을 원주로 데려갔다고 하더군."
"누구를요? 데려간 사람 말입니다."
"바로 그게 수상한 일이야. 데려간 세 사람 모두가 한결같이 군기시에서 화약을 만들던 약장(藥匠) 들인데, 잘못을 저질러 쫓겨 난 사람과 나이가 많아 그만둔 사람들이니 말이다. 약장이 필요하면 군기시에 요청만 하면 몇 명이던 갖다 쓸 터인데 왜 몰래 그런 사람들을 데려갔겠느냐?"
"아, 유황(硫黃)이군요. 신 아무개란 역관이 유황을 밀무역하기 위해 동래로 간 것이 틀림없겠습니다. 그것으로 화약을..."
"옳게 보았다. 유황은 곧장 원주로 갈 것이고 김경준이 약장과 함께 몰래 염초를 만들며 기다리겠지. 그럼 신지남이에게 유황을 사 오게 한 사람은 누구겠느냐? 장현의 은자를 허견이 신지남에게 전했는데, 그들은 역모를 꾸밀 사람이 못되고 더구나 화약이 필요한 사람들이 아니지 않느냐?"
"형님은 이번 사건에서 장현을 제외를 하시나, 저는 달리 봅니다. 장현이 독단적으로는 역모를 꾸밀 이유는 희박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유력한 인물이 어르고 달랜다면 들을 인물입니다. 그 또한 보신책(保身策) 일 테니까요."
"음, 네 말을 들으니 그럴 듯도 싶구나. 그러나, 거부 장현이 승복할 만한 힘을 가진 사람이고 역심을 품을 만큼 통이 큰 사람이 과연 있을까? 영상이라면 늙고 자기주장이 없는 사람인데? 그의 서자 허견은 개망나니 일 뿐이고... 역모라면 서인인 송시열 추종자들이 일으켜야 말이 될 터인데, 이거야 원.... 남인 가운덴 그럴듯한 인물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아닙니다. 한 사람 있습니다. 이번 일의 주모자는 틀림없이 우찬성 윤휴대감 입니다."
송윤호의 청천벽력 같은 말에 송수호가 펄쩍 뛰다시피 놀랐다. 차마 인정하기 어렵고 발설하기 주저되던 이름이 동생의 입을 통해 나온 것이다. 윤휴(尹鑴)가 누구인가? 예송논쟁에서 서인 송시열을 선봉에서 공격하여 결국 지금까지 남인의 세상을 만든 장본인 아닌가? 게다가 수년간 송수호가 직속상관으로 모셨던 사헌부의 대사헌이었다. 선왕 때부터 북벌(北伐)을 주장한 과격파로 알려졌으나 번번이 그의 주장이 묵살되어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윤휴에게 역모의 기미를 느낀 것은 허견이 부지런히 복평군의 집을 드나들 때인데, 그럴 때마다 윤휴가 밤중에 안국방 영상의 집에 나타나는 것이다. 송수호의 집이 마침 영상의 집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지금의 이 집이라,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으나 박일주의 보고에 의하면, 허견의 움직임은 항상 윤휴의 방문일 다음날이었다. 허견이 윤휴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것이다. 그때부터 윤휴의 뒤를 박일주가 맡아 샅샅이 뒤지다가 엉뚱하게도, 윤휴의 소실 집 고방(庫房)에 다섯 문의 화포(火砲)가 볏섬 속에 감추어진 것을 알았었다. 겁 많은 윤휴의 소실이, 제 오라비에게 화포를 두어도 탈이 없을지 물었는데, 하필 이놈이 박일주의 손에 걸린 것이다. 윤휴가 영상인 허적의 집을 드나든지 두어 달 후에 장현의 집에서 은자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여 그 돈 심부름으로 허견 이란 놈이 더욱 바빠졌었다. 윤휴가 허견을 앞세워 사람들을 조종하고 준비하는 낌새를 포착한 후에도 송수호는 일체 누구에게 발설하지 않고 사태를 관망하며 물증이 나오기만을 기다려 온 것이다. 이럴 때, 동생인 송윤호가 윤휴를 지목하니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어찌 알았느냐?"
미간에 주름을 지은 송수호가 동생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왜 이러십니까? 형님도 이미 알고 있는 눈친데요."
"어찌 알았느냐고 묻지 않느냐? 무엇을 근거로 그런 추측을…"
"추측이 아니라 적실합니다. 제가 우찬성을 지목한 것은 형님의 말씀을 듣다가 생각이 난 것이지 평소에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래 말해보거라. 내가 무슨 말을 했을 때 생각이 났단 말이냐?"
"형님이 말한 인물들을 낱낱이 훑어보아도 겁이 많거나 능력이 안 되니, 역모를 할 만한 인물이 없잖습니까? 그리고 서인들이라면 송시열 추종자들인데, 그들은 오직 집권을 위해 환국(換局)만 노릴 뿐인데, 이미 집권하고 있는 남인들이 역모를 꾀할 리가 없는 일이지요. 남인이면서 불궤를 도모할 만한 인물이라면 북벌을 생각하는 우찬성 밖에 없는데, 확실하게 역모라고 단정할 일이 며칠 전에 있었습니다."
"내가 모르는 일이냐?"
"저도 오늘 아침에 들었으니 형님은 모르실 테지요. 궁궐 내에서 은밀히 새어 나오는 얘기들이니까요. 금상이 우찬성을 극히 싫어하신다 합니다. 우상인 김석주(金錫胄) 대감이 금상의 모후(母后)와 사촌지간 아닙니까? 헌데 우찬성이 사사건건 김석주대감의 일에 반대를 하니 금상이 벼르고 있었나 보더군요. 한데, 숙직을 섰던 친구에게 들으니, 바로 어젯밤, 우찬성이 독대(獨對)를 청해 도체찰사(都體察使) 자리를 차지하려고 상감이 의중에 두고 있는 김대감을 비난했답니다. 상감께서 또 한번 진노하신가 보더군요. 좋다는 벼슬을 다 해 본 우찬성이 왜 그깟 도체찰사 자리에 목숨을 걸까요? 그건 바로, 절실히 병력이 필요하다는 뜻이겠지요. 틀림없이 금상을 밀어내려고 반정(反正)을 꾀하는 것일 겝니다. 환국으로 서인들이 정권을 잡아도 자신은 끝이요, 가만히 있어도 왕의 미움으로 언제 목숨이 달아날지 모를 사람이 바로 우찬성 아닙니까? 그러니 더구나 병권(兵權)을 손에 넣어야지요."
"네 말이 맞다. 상감께서 우찬성을 꺼리는 것이야 알고 있었다. 나도 9할까지는 윤 대감의 역모를 짐작했었다만 나머지 1할의 물증이 필요했었는데 네 말을 듣고 보니 모든 일이 명약관화(明若觀火) 하구나. 대저 사대부들이란 무슨 일을 할라치면 명분을 찾는데 삼 년이요, 동지를 모으는데 삼 년, 마지막에 계획을 세우는 또 삼 년을 보내는 법이다. 그러다 보면 그사이 반드시 배신자가 생기는 전례가 허다하였지. 세조조(世祖朝) 때의 김질(金礩)이 좋은 예가 아니겠느냐. 그래서 우찬성은 거꾸로 하기로 한 것이 틀림없구나."
"그렇지요. 그래서 일당백의 소수 인원으로 먼저 조정을 뒤엎고, 자기를 미워하는 금상을 복평군이나 복선군으로 바꾼 뒤에 병력이 가장 많은 도체찰사부 소속인 이천(伊川) 둔군(屯軍)에게 화포와 조총으로 무장을 시켜, 삼번(三藩)의 난이 끝나지 않은 청나라를 치자는 것이지요. 그러지 않고서야 도체찰사 자리가 왜 필요합니까? 우찬성의 바람은 오로지 북벌이니까요."
"그렇다면 화약이 많이 필요할 것이고 조총은... 가만, 조총이라면 군기시에도 있을 터, 소실 집에 있는 화포는... 역시 거사일에 필요하겠구나."
"그럴 겝니다. 역모는 단 몇 명이 해치울 것이고, 그러자면 강력한 무기가 필요하겠지요. 원주의 김경준인가 하는 분도 남인이니 그래서 윤 대감에게 포섭이 되었나 봅니다. 그러기에 화약을 밀조(密造) 하겠지요?"
"글쎄다. 그럴 사람은 아닌 것으로 안다만 사람의 일은 모르는 것이니 장담은 못 하겠구나. 우찬성은 아마 홍수의 변(紅袖之變)으로 상감의 미움을 받고서 바로 역심을 품었을 게야. 그러기에 이렇게 준비가 다 된 것 아니겠느냐?"
홍수(紅袖)란 글자 그대로 '붉은 옷소매'란 뜻이니 옷소매 끝동에 자주색 물을 들인 젊은 나인을 상징하는 호칭인데, 이 나인들을 복창군과 복평군이 간통하여 애를 낳았다고 고발을 한 일이 있었다. 이 일로 조정이 또 한바탕 난리를 치루었는데, 이 사건은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이 일으킨 것으로 서로의 이해관계가 복잡하여 얘기가 길어지니 각설하고, 그때, 윤휴가 금상을 향해 대비를 조관(照管) 하라고 직설로 퍼부은 적이 있었다. 대비란 곧, 금상의 모후인 명성왕후이니, 쉽게 말해서, 네 애미를 잘 살펴서 관리를 제대로 하라는 뜻이니, 윤휴의 이 말은 사실 패륜을 넘은 망발의 소리였다. 금상이 그때부터 윤휴를 극도로 미워하였던 것이다.
"반정이 적실할진대 너는 거사 일은 언제쯤이라 생각하느냐?"
"준비가 거의 다 되었고 화약 제조가 끝나면 곧이 아니겠습니까?"
"청국에서 들여올 무기를 기다리지는 않겠느냐?"
"이제까지의 역모와는 사뭇 다릅니다. 어중이떠중이는 다 배제할테니 반정에 쓰일 무기래야 많이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다만 화포의 쓰임이 꺼리는데 우찬성의 소실 집에 있는 화포가 다섯 문 이랬지요?"
"그랬지. 박일주가 몰래 확인하였다니 사실일 테지."
"화포로 대궐을 박살 낼 것은 아닐 터이고... 저라면 사대문(四大門)에 하나씩 갖다 놓고 바로 앞에서 쏘겠습니다만..."
"성동격서(聲東擊西) 하려는 계책이냐?"
"허허.. 이를테면 그렇지요. 어영청(御營廳) 군사들이 화포 소리에 놀라 사대문으로 쏠리는 틈을 타서 대궐로 쳐들어가야겠지요."
"얘, 그건 하책이다. 그러려면 군사가 5백은 필요할 것이다. 상책은 궁궐 안에서 호응할 인물을 심어두었다가 불시에 소리 소문 없이 임금의 침전(寢殿)으로 치고 들어가는 것이야. 소수로 다수를 제압하려면 벼락같은 기습 밖에 없지 않으냐?"
"이번의 역모는 당연히 그럴 겁니다. 우찬성이라면 능히 필요한 만큼 사람들을 포섭(包攝) 해 놓았을 것입니다. 화포는 최후 수단이겠지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천하의 꾀 주머니인 장현을 끌어들인 것만 보아도 그렇지. 만약 모른 척 그대로 둔다면 이번 반정은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다. 물론 사헌부에서 가만히 두겠느냐마는..."
"아직 윗 분들에게 알리지 않았습니까?"
"아직은 아니야. 동래로 내려간 수하들이 올라오면 물증이 확보될 터이니 그때 일망타진해야겠지."
형제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밤이 깊었다. 송윤호는 형의 집에서 자고 아침밥도 같이 먹었다. 어차피 송윤호는 어제 그대로의 관복 차림이었으니 자연히 등청도 같이하게 되어 형제가 나란히 대문을 나섰다.
"참, 미수 그분이 형님에게 무슨 의도로 삼복 얘기를 전하라고 했을까요?"
"너는 몰랐느냐? 미수 그 사람이 우의정의 조카뻘이 되느니라. 허니, 미수 그 친구는 모사꾼인 우의정의 말 심부름을 한 것 아니겠느냐? 우의정이 가장 꺼리는 인물이 복창군이야. 금상의 외척인 그의 눈에는 복창군이야말로 꼭 왕위를 노리는 것만 같거든."
"그렇군요. 우의정이 있었군요. 형님, 형님이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은 어쩌면 우의정 김석주 대감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그도 우리 같은 서인이고 사헌부의 이 집의(李執義) 영감과 동사(同事)하는 데도 말이냐? 오히려 윤휴의 역모를 깨부술 적임자가 아니겠느냐?"
"글쎄요, 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만, 그가, 워낙 머리가 비상하고 깨알 같은 수완을 지닌 책사(策士) 아니겠습니까? 그런 인물은 우직한 사람보다 오히려 믿을 바가 못 되지요. 형님께서도 생각이 계시겠지만 조심하십시오."
"네 말도 일리가 있구나. 염려 마라. 조심할 터이니..."
큰길로 나서자 길이 갈리게 되었다. 송윤호는 동궐(東闕)이 있는 오른쪽 길로 가고 송수호는 사헌부가 있는 서쪽으로 향하였다. 적선방에 닿아 사헌부의 지붕 용마루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뒤에서 벽제소리가 들리었다. 얼핏 길 옆으로 비켜선 송수호가 고개를 숙이며 슬쩍 바라보니 다름 아닌 집의(執義) 이헌조였다. 남여에 탄 이헌조도 송수호를 본 듯 남여를 잠시 세우게 하더니 빙긋 웃음을 띠었다.
"영감, 등청하시옵니까?"
"송지평, 저녁에 퇴청하는 길로 거기서 만나세."
"예, 그리 합지요."
이헌조가 말한 거기란 물론 소실 홍화의 집을 말함이다. 저녁이 되어 퇴청을 한 송수호가 부지런히 집으로 향하였다. 평복으로 갈아입은 송수호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종루 뒷골목의 홍화네 집에 닿아보니 이미 이헌조가 와 있었다. 술상이 들어온 후에 송수호는 자신이 조사한 모든 것을 보고하였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이헌조가 윤휴가 역모의 괴수라는 말에 눈을 치켜뜨고 술상을 탕하고 쳤다.
"아하, 큰일이로고, 얼마 전까지 우리 사헌부의 수장이었던 윤 대감이 역모의 수괴라니. 이렇게 되면 우리가 몸담은 사헌부는 무사하겠는가? 이거 야단일세그려."
"영감, 그래도 사실이니 윗전에 고해야겠지요. 그러나 확실히 하려면 동래에서 올라오는 물종(物種)이 유황이라는 것이 밝혀진 후에 해야 합니다."
"알았네.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우상과 의론을 하겠네. 처음부터 우상이 내게 부탁한 일들이니 말일세. 아무튼 아끼던 수하까지 잃은 자네가 고생이 많았네."
"한데 말씀 올시다. 우상은 믿어도 될까요?"
"거, 무슨 소리. 같은 동당(同黨) 아닌가? 믿고말고가 어디 있나? 종묘사직을 위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믿어야지."
이헌조가 우상 김석주를 믿는 마음은 사직의 안녕(安寧)과 직결되는 것 같아서 송수호는 입을 닫았다. 그 후, 단풍이 곱던 가을도 깊어, 한양을 둘러싼 산들은 차츰 어두운 색조(色調)로 바뀌고 육조(六曹) 넓은 길에는 흙먼지가 날리었다. 기미(己未1679) 년이 저물어가건만 백성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다. 지난여름에 가뭄이 워낙 극심하여 추수할 것이 별로 없었던 탓이었다. 겨울이 닥치면 굶어죽어나갈 백성이 또 얼마나 될지를 생각하면 우울하였다. 그동안 윤휴의 역모 건에서 일단 손을 놓은 송수호가, 동래로 내려보낸 곽일주와 덕출이를 기다린 지난 두 달이, 20년 만큼이나 길게 느껴지던 것이다. 어느 날이었다. 밤이 깊어 축시초(丑時初)쯤 되었을 때 송수호의 집 대문을 가만히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행랑이 대문과 가깝건만 늙은 노복 말득이는 가는 귀가 먹어 듣지 못하였는데 오히려 사랑채에서 자던 송수호가 그 소리를 듣고 대문으로 다가갔다. 생각대로 박일주였다. 박일주가 곽정일과 덕칠이를 데려온 것이다. 송수호는 얼른 그들을 사랑으로 들게 하여 등잔에 불을 붙였다. 대강의 인사가 끝나자 송수호가 성급히 물었다.
"유황이더냐?"
"예, 나으리"
곽정일의 대답도 빨랐다.
"얼마나 되던가?"
"그게.. 겨우 말짐으로 두 바리 올습니다."
"음, 말 한 마리가 백근 정도 실을 터이니 두 바리면 2백 근은 되겠구나. 유황 2백 근이 작은 물량이 아니야. 염초와 섞으면 모르긴 해도 서너 배는 될 터이지. 일주 자네 생각은 어떤가?"
"예, 그 이상도 될 것이나 저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유황의 밀무역이 이번 처음이 아니라 하더이다. 그러니 이미 화약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겠지요. 그러니 보통 일이 아닙니다. 시일도 촉박하구요. 빨리 윗전에 알려 뿌리를 뽑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네.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윗전에 알릴 수없네. 유황도 화약도 우리들의 추측뿐이고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깊이 감추어두었을 터인데 감춘 곳을 모르지 않는가? 내일 자네들은 등청을 하지 말고 길 떠날 준비들 하게. 모레 새벽에 파루(罷漏)가 치면 숭례문에서 만나 같이 원주로 가세."
"예, 나으리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길은 제가 아오니 앞장서겠습니다. 그럼 저희들은 물러갑지요."
아침에 등청을 한 송수호가 보름의 말미를 줄 것을 이헌조에게 부탁을 하였다. 이헌조 또한 확실한 물증이 필요한 사안이라 선선히 노자까지 듬뿍 챙겨 주었다. 일찍 집으로 온 송수호가 길 떠날 준비를 해달라고 안채에 이르고, 사당에 나아가 조상에게 길을 떠나는 것을 고하였다. 그리고는 어미에게도 내일 사헌부의 일로 길을 떠나니 보름은 걸릴 것이라는 말씀을 올리는데, 노모가 웬 먹물 묻힌 바늘 묶음을 내어 놓는 것이었다.
"길 떠나기 전에 장손 원일이에게 이걸로 한 번만 뜨고 가거라. 너희들 형제도 너의 아비가 먼 길을 떠날 때 둘 다 귓불에다 표식을 떳느니라."
"윤호 귀에 점이 있는 것은 압니다만 애 에미의 말로는 제 왼쪽 귓불도 점이 있다더군요. 그럼 이 점이 아버님께서 찍으신 건가 보군요."
그날따라 노모가 무슨 생각으로 송수호로 하여금, 손자의 귓불에다 문신점(文身點)을 찍게 하였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송수호는 노모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 안고 있는 아이의 왼쪽 귓불을 뒤집어 바늘로 재빨리 두어 번 꼭꼭 찌르고야 말았다.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고 아이의 엄마는 애처로워 따라 눈물을 글썽이는데, 송수호도 마음이 짠하여 얼른 사랑으로 나오고 말았다. 이튿날 새벽에 파루도 치기 전에 길을 나서 숭례문에 닿을 동안 몇 번의 기찰이 있었지만 사헌부의 패찰이 있는지라 무사통과하였다. 이미 와서 기다리던 박일주 일행과 함께 문이 열리자말자 출발하여 줄창 6백 리가 넘는 길을 며칠을 걸어 원주에 도착하였다. 헌데, 박일주는 한양에서 원주까지의 길만 알뿐 도회소가 있는 주천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할 수없이 원주 역참의 찰방에게 길을 물어 다시 산골짝 길을 따라 오륙십 리를 걸으니 사방 팔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좁은 분지가 나왔다. 찰방의 말대로 여기서 길은 갈라져 동남쪽 길은 제천 가는 길이요 동북으로 가는 길이 도회소가 있는 길인 것이다. 송수호 일행은 난처하였다. 도회소까지 가자니 산골이라 벌써 해가 산을 넘었고, 이곳에서 자고 내일 떠나자니 도통 집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는데 덕출이가 손을 들어 가리키는 곳에 한줄기 연기가 솟아올랐다. 얼싸 반가운 송수호 일행이 바쁜 걸음으로 반 마장쯤 가보니, 으슥한 외딴곳에, 산골 집 치고는 제법 커다란 디귿자의 초가집이 있었다. 가운데방 댓돌에는 어지럽게 짚신짝이 놓였으나 내다보는 사람 하나 없었다. 그때, 부엌문이 덜컥 열리더니 웬 노파가 나오다가 일행을 보고 깜짝 놀라 쇳소리를 지르며 물바가지를 떨구었다. 놀라긴 송수호도 마찬가지였으나, 방에 있던 사람들이 더 놀란 것 같았다.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대여섯 개의 상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이럴 땐 송수호의 수하들이 빨랐다. 약속이라도 한 듯, 어느새 송수호를 에워싸고 칼들을 빼들고 있는 것이다. 칼을 본 상투잡이들은 아까보다 더 놀라서 꼼짝을 못하고, 부엌 할멈은 벌벌 기어 다시 부엌으로 숨었다. 그때였다. 상투잡이를 헤치고 얼굴을 내민 사람이 송수호를 보더니 깜짝 놀라는 것이다.
"앗, 송지평, 아준(雅峻)이 아닌가? 이게 웬일인가?"'
"아니? 김판관 아닌가? 장원랑을 여기서 보다니 의외 천만일세."
두 사람은 선 듯 다가가 손을 맞잡았다. 김경준을 여기서 만날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김경준 또한 이런 곳에서 송수호를 만나리라고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이곳은 김경준이 약장들과 함께 화약을 밀조하는 장소였다. 탕건도 없이 망건만 동인 김경준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어디로 보아도 양반이나 종 5품의 판관을 지낸 나으리의 티는 없었다. 햇볕에 검게 탄 얼굴에 눈빛만 칼날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맞잡은 손을 놓을 줄 모르던 김경준이 송수호에게 자기의 방으로 안내하였다. 그리곤 사람을 시켜 빨리 저녁밥을 지어올리라고 지시를 하는 것이다. 김경준의 방에는 허름한 옷가지만 두어 점 횃대에 걸렸을 뿐 사방을 둘러보아도 책 한 권 없었다. 일꾼들에게 박일주 일행이 쓸 방과 군불 지필 것까지 꼼꼼히 챙긴 김경준이 방에 들어와 송수호의 앞에 털썩 앉았다.
"아준이, 자네, 나 때문에 왔지?"
김경준이 군소리 빼고 바로 찌르고 들어왔다. 이럴 때는 길게 빙빙 돌려 말할 수도 없는 노릇임을 잘 아는 송수호도 간단하게 대답을 하였다.
"맞네. 자넬 만나자고 왔네."
"유황을 쫓아왔구먼?"
"그랬지. 하나 유황보다 자네의 의향을 알고자 온 것일세."
"역모를 할 위인인가 알아보려고?"
"이미 역모는 밝혀진 일일세."
"그럼 발고를 하면 끝날 일 아닌가?"
"자네가 정녕 우찬성이 꾀하는 역모에 가담을 했단 말인가?"
"우찬성? 우찬성이라면 윤휴 말인가?"
우찬성이라는 말에 김경준이 고개를 갸웃하는 듯하더니 눈에 의혹의 빛을 띄웠다. 그리고는 비웃 듯 입꼬리가 한쪽으로 올라가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우찬성이 역심을 품고 반정을 이르키려는 정황이 이미 다 밝혀졌다네."
"허허. 먼 길에 피곤하고 시장할 테니 우선 밥이라도 먹고나서 얘기하세."
김경준이 하던 얘기를 끊고 벌떡 일어나 나가는 것이다. 무언가 덮으려고 얼버무리는 행동 같아서 송수호도 고개를 갸웃하였다. 밖으로 나간 김경준은 한참이 지나도 오지를 않고 상투잡이 하나가 불붙은 관솔 가지를 들고 와 코클에 넣더니 이어 목판을 들고 왔다. 목판 위에는 조밥이 담긴 사발과 산나물이 담긴 바가지에, 나무 숟가락 하나가 다였다. 보아하니 밥상도 그릇도 없음이 틀림없었다. 시장하던 참이라 그나마 달게 먹고 나니 먹은 사발에 숭융을 갖다 주었다. 밤은 깊어가고 코클 불빛만 어둠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데 김경준은 오지를 않는 것이다. 방바닥이 절절 끓을 정도로 더워서 노독에 지친 송수호가 스르르 무너져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선뜻한 기운에 잠이 깬 송수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내가 잠을 깨웠군. 날이 밝긴 이르니 더 자게. 밖엔 첫눈이 오네."
"뭐라? 눈이 내린단 말인가?"
"음, 눈발이 바치네. 자네 아침에 한양으로 올라가게나. 눈에 길이 막히면 진퇴가 불능이네. 그만 자세나. 나도 눈을 좀 붙여야겠네."
송수호가 뭐라 댓구도 하기 전에, 나는 잘 테니 말 붙이지 말라는 듯 기척이 없는 김경준이었다. 송수호가 다시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였다. 한번 깬 뒤라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서 이리저리 뒤척이는데 어둠 속에서 불쑥 김경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아준이, 내 여동생 일, 고맙네."
"..!..............."
"알고 있네. 사돈이 서찰을 보내왔었네."
"..................."
"자넨 걸 알고 있네, 관찰사에게 보낸 자네의 서찰이 있지 않은가."
"..................."
"아무튼 고맙네. 자네에게 큰 신세를 졌어."
"그만 자세나."
아침에 일어나 보니 김경준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밖으로 나와보니 희끗희끗한 눈발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나으리 이제 어찌할까요? 눈이 더 오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성큼 다가온 박일주가 어쩔 거냐고 묻는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게. 미진한 일이 남았으니까."
아침밥을 다 먹도록 김경준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젯밤, 우찬성 윤휴가 역모의 수괴라는 말에 보인 그의 반응이 영 찜찜한 것이었다. 말을 들어 보아야만 하였다.
"나으리, 저쪽으로 좀 오시랍니다."
상투잡이 하나가 굽신 하더니 손을 들어 가리키는 곳은 따로 지어진 허름한 고방이었다. 송수호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문을 들어섰다. 박일주가 그림자처럼 따라가 바깓을 지켜 섰다. 안은 어둡기 짝이 없는데 희끗한 형체가 김경준이었다.
"왔는가. 여기 앉게나. 내 자네에게 일러 줄 말이 있네."
김경준이 가리키는 곳에 앉아서 사방을 얼핏 둘러보니 작은 곡식 자루 같은 것이 곳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자네가 보고 있는 것이 바로 화약이네. 모두 2천여 근 되지. 이거면 천 명의 조총수를 무장시킬 수 있을 것일세. 지난 일 년간 화약을 만들려고 내가 있던 군기시의 약장들을 끌어들였다네. 조총과 화포도 준비가 되어있네."
"그건 중요한 얘기가 아니네. 자네가 왜 윤휴의 역모에 가담을 했는지 나는 그것이 궁금할 뿐이야."
"허, 이 사람 어제부터 자꾸 우찬성 윤휴가 수괴라 하는데, 자네, 크게 잘못 알고 있네. 내 말을 잘 들어보게. 이렇게 된 이상, 어차피 참수를 당할 내가 자네에게 거짓말은 않을 것이야. 윤휴가 역모를 꾸미는 것으로 만든 놈이 바로 김석주일세. 허적도 윤휴도 김석주의 계략에 말렸단 말일세. 남인을 이용해 남인을 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인 걸 자넨 여태 몰랐나?"
"무엇? 우상이? 이보게 사실인가?"
송수호는 떨어지는 맷돌에 머리를 맞은 듯, 까무러치게 놀라는 것이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김경준이 말을 이었다.
"김석주가 누구인가? 머리가 비상한 사람 아닌가. 서인인 그가 우리 남인을 공깃돌 갖고 놀듯 한 것일세. 그의 계획은 남인을 쓸어버리는 것이네. 거부 장현을 구워삶아 남인들에게 거사 자금을 주어 역모를 이르키도록 만든 것이 바로 김석주란 말일세. 제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엮은 것이지. 역모를 가장해 윤휴는 물론, 영상인 허적부터 복평군 형제까지 다 죽일걸세. 피바람이 불겠지. 어쩌면 자네가 역모의 수괴가 윤휴라고 믿고 있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르겠네. 만약 자네가 김석주의 음모인 걸 알았다면, 김석주 역시 자네를 살려두지 않았겠지."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환히 잘 알고 있는 자네는 왜 역모에 가담했는가?"
"나는 원한을 풀어보려던 것이지 애초부터 김석주의 계략을 돕자는 생각은 없었네. 역모가 일어나면 허적과 그의 서자 놈부터 죽여 없애려 하였지. 군기시에 불을 질러 나를 이리로 끌어 내린 놈이 허견이 그놈인 걸 알았으니까. 허견을 죽인 다음, 곧장 김석주를 화약에 묻어 폭사시키려고 하였네. 왜냐고? 허견이 혼자 군기시에 불을 지를 꾀를 낸 줄아나? 허견이 김석주의 꾀에 놀아난 것일세. 그다음에는 어쩔 거냐고 왜 묻지를 않나? 그 다음에는, 역도들과 함께 화포로 궁궐을 깨 부수고 임금을 끌어내어 쳐 죽이려 하였네. 외척에 놀아나는 어리석은 그런 왕은 죽어야지. 그러나 내가 생각지 못한 것이 있었네. 김석주는 역모가 정말 일어나도록 두지 않는다는 것이야. 어젯밤 자네가 윤휴의 얘기를 할 때 불현듯 깨달았지. 자네 혹시 윗사람에게 윤휴가 수괴라고 말을 하였나?"
김경준의 한마디 한마디가 역모보다 더 무서운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반박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모두 옳은 소리였으니까. 그제야 송수호는 이헌조에게 모든 것을 보고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차, 집의 영감이 김석주의 하수인이었던 것을 잊었었네. 이거 어쩌면 김석주가 벌써 손을 썼는지도 모르겠는걸."
공교롭게도, 송수호의 말이 떨어지자 말자 밖에서 기다리던 박일주가 문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나으리, 웬 말탄 군사가 다가옵니다. 수십 명 올시다."
"뭐야? 기병이? 이게 무슨 일인가?"
벌떡 일어나 나가려는 송수호의 팔을 김경준이 잡았다.
"늦었네. 보나 마나 김석주가 보낸 군사가 틀림없네. 자넨 빨리 뒷 골짜기로 빠져나가게. 이렇게 되면 복수고 뭐고 만사가 끝난 걸세. 놈들은 내가 막을 테니 그사이 도망치게. 이 사람 아준이, 자네는 살아야 하네. 뛰라니까."
벽에 걸어두었던 조총과 쇠뿔 화약통을 재빨리 움켜쥔 김경준이 밖으로 뛰쳐나가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수하들을 두고 갈 수도 없어, 송수호는 우선 군사들의 정체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김경준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오니 눈발은 그 사이 앞이 보이지 않토록 쏟아지는데, 말발굽 소리에 초가집이 와르르 흔들리는 것이다. 순식간에 집 앞을 막은 기병의 수는, 적어도 스물은 넘어 보이는데, 좁은 골짜기라 말들이 다 벌려서지 못하고 겹겹이 북적대었다. 그런데 군복 사이에 손바닥만 한 갓을 쓰고 흰옷을 입은 자가 말등에 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놈은 어제 본, 원주 역참의 찰방이었다. 이곳의 지리를 잘 아는 이놈이 군사를 이리로 안내한 것이리라.
"역도들은 모두 나와 오라를 받으라."
말을 채쳐 무리에서 한 걸음 앞선 놈이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다. 그러자 송수호가 선 듯 앞으로 나아가 마주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사헌부 지평이니라. 너희들은 어디 군사이기에 역도 운운하느냐?"
그러자 구슬 끈 상모에 꿩 깃을 꽂은 종사관 복색이, 채찍을 앞으로 뻗으며 다시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다, 오라를 받지 않는 역도는 모두 주살(誅殺) 하라는 어명이 계셨느니라. 오라를 받겠느냐? 어쩔 것이냐?"
"나으리 이상합니다. 역모라면 의금부도사가 왔을 텐데 도사가 안 보입니다. 허고 저 종사관 복장은 우포청(右捕廳) 것 올시다."
뒤에 있던 박일주가 송수호를 일깨워주었다. 그러고 보니 때때 소매에 홍철릭 입은 도사(都事)가 보이지 않았다. 역모 건으로 온 것이 아님이 적실하였다. 송수호가 김경준을 돌아보니 불붙은 화승(火繩)을 조총에 끼우던 김경준이 이를 뿌드득 갈아붙였다.
"내, 그럴 줄 알았지. 김석주가 자네도 함께 죽이라고 시킨 것이 분명하구만. 그냥 잡으러 온 것이 아닐세. 살수(殺手)들을 보내 우릴 몰살시키려는 거네. 자, 더 이상 시간이 없네. 뒷 골짜기로 뛰게. 여기는 내가 막을 터이니. 여보게 제발 뛰게."
"그러시지오, 나으리. 우리가 감당할 사이에 피신하십시오."
박일주가 칼을 움켜잡으며 송수호를 뒤로 밀어내었다. 보다 못한 덕출이가 송수호의 소매를 끌어당기며 뒷걸음질을 하였다. 그사이 상투잡이들도 손에 손에 조총들을 들었는데 심지에는 이미 불이 붙었다. 화약을 다루는 자들이 총을 못 쏘랴? 군졸을 향해 상투잡이들이 조총을 겨냥하였다.
"역도들이 손에 무기를 잡았다. 모두들 도륙을 내어라아.."
종사관 복색이 큰 소리로 길게 꼬리를 끌며 호령을 하자, 앞선 기병들이 말을 그대로 치고 나오며 장창을 내 지르는 것이다.
"꽝!"
골짜기가 떠나가도록 큰 방포 소리가 나더니 창을 내 지르던 기병 한 놈이 안장 뒤로 벌렁 나가 떨어져버렸다. 김경준이 쏜 것이었다. 이어서 우당탕탕 천지가 떠나가는 방포 소리가 잇따르더니 눈 깜빡할 사이에 대여섯 명의 기병이 말에서 떨어졌다. 쏟아지는 눈과 함께 자욱한 연기가 앞을 가리고, 총소리에 놀란 말들까지 미쳐날뛰는데 선봉이 조총에 무너지는 것을 본 뒷줄의 기병이 주춤 물러서는 기색이었다. 말 위에서는 조총의 과녁이 되기 쉽다는 걸 간파한 종사관이 또 한번 큰소리를 질렀다.
"물러서지 마라, 말에서 내려 저놈들이 재장전 하기 전에 산적을 꿰어라아.."
뒷산을 타고 오르는 송수호가 뒤를 돌아보니 널브러진 시체를 넘어, 창을 든 십여 명의 군사가 박일주와 김경준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다. 상투잡이들이 일시에 방포를 하였는지라, 화약과 연환을 쟁이는 것도 동시에 하니 그 사이에 틈이 생긴 것이었다. 군사들이 일제히 악 소리를 지르며 창을 쑤시며 들어왔다. 박일주가 앞서 들어오는 창대를 한 손으로 잡아당기며 칼로 군졸의 목을 후리니 단번에 피가 공중으로 흩뿌려지며 목이 뒹굴었다. 곽정일과 덕출이도 들어오는 창대를 후려치며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데, 화약을 재어 막 들고 쏘려 든 상투잡이 둘이 일시에 창에 꿰여 피를 쏟았다. 김경준이 다시 장전한 총으로 방금 상투잡이를 찌르고 창을 빼는 놈의 머릿통을 향해 방포를 하였다. 그리고는 냅다 뛰어 뒤로 물러나서 재빨리 다시 화약을 재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멈추지 않고 장창으로 찔러들어오는 군사는 열 명이 넘어서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상투잡이들은 거의 동시에 가슴이나 배를 마구 꿰여 죽어나가 자빠지는 것이다. 수에 압도도 되지만 이쪽의 칼에 비해 월등히 긴 창으로 전진 후퇴를 배운 법식 대로 펼치니, 박일주는 물론이고 곽정일과 덕출이도 진땀이 날 지경으로 몰리는 것이었다.
"악."
짧은 비명과 함께 허벅지를 찔린 곽정일이 창대를 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덕출이가 곽정일을 도와주려 하나 그도 창을 막기가 급박하여 어쩔 줄 모르는데 김경준의 총이 발사되어 곽정일을 찌른 놈이 꺼꾸러졌다. 뒷산의 송수호는 도망갈 것도 잊은 채 급박하게 돌아가는 싸움에 간을 졸이며 바라보았다. 이쪽은 상투잡이들이 모조리 죽어서 남은 사람은 김경준과 박일주, 덕출이였고 곽정일은 한쪽 다리에 창대가 그대로 꽂혀 있는데, 군사의 숫자는 얼추 십여 명이였다. 놈들이 다시 열을 맞추어 전진을 시작하는 듯하더니 개중에 하나가 번개같이 튀어나와 곽정일의 가슴을 꿰고 말았다. 그 광경에 놀란 송수호가 도망을 포기하고 눈비탈을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박일주와 덕출이가 뒤로 밀리기 시작하였으나 이를 악물고 칼을 마구 흩뿌리며 발악을 하니 군사들도 조심조심 둘을 에워싸기만 할 뿐 함부로 접근을 못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뒤에 있던 김경준이 조총에서 심지를 나꿔 뽑아 들더니 그대로 고방을 향해 뛰기 시작하였다.
"저쪽이다아. 저놈이 수괴다. 일대는 저놈을 쫓아라아."
종사관이 소리쳐 군사들을 김경준이 뛰는 쪽으로 돌렸다. 박일주 쪽에 덤비는 놈은 셋이었다. 그래도 사태는 이쪽이 불리했다. 박일주가 소리쳤다.
"덕출이 뛰어."
박일주와 덕출이가 집 옆으로 번개같이 뛰어오는 것이 송수호의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뒤에서 따라오던 덕출이가 무엇에 걸려 넘어지는 것과 동시에 등에 창을 맞고 말았다. 그 광경을 본 송수호가 허겁지겁 마주 달려오는데, 박일주도 앞에서 오는 송수호를 보았다. 송수호가 김경준이 들어간 고방 가까이 왔을 때였다. 김경준을 뒤따라온 군사 대여섯이 닫힌 고방의 문을 발길질하기 시작했다. 빗장이 와지끈 부러지며 문이 왈칵 열리는 순간, 종사관도 군졸들도 입을 벌렸다. 화약 더미 위에 올라앉아, 불붙은 심지를 화약 가루에 들이대는 김경준의 기괴(奇怪) 한 모습을 본 것이다. 순간, 하늘이 깨지고 산이 무너지는 굉음이 울렸다. 주위의 모든 것이 공중으로 분해되어 날아오르고, 흙 먼지가 사방으로 튀어서 온 산천의 흰 눈이 누렇게 되었다. 고방 앞의 종사관과 군사들은 산산조각으로 흔적도 없이 날아가고, 박일주와 함께, 덤벼들던 군사들도 다 날아가 버렸다. 고방에서 삼십여 보나 떨어져 있던 송수호 역시, 폭풍에 가랑잎 날리 듯 날아가, 부서진 초가집 더미에 처박혀 버렸다. 산 사람이라고는 멀리서 네댓 필씩 말고삐를 잡아 쥐고 있던 군졸 둘과, 원주역참 찰방이었다. 그러나 그 엄청난 굉음에 놀란 말들이 다시 군졸을 박차고 제멋대로 날뛰며 도망을 쳐버렸다. 찰방은 간이 떨어져 그대로 주저앉아 있고, 그나마 살아난 군졸 두 놈이 주춤주춤 폭발의 현장으로 다가가니 피는 사방에 튀어있고, 잘린 손발과 살점이, 쌓이는 눈 위에 여기저기 마구 흩어져 있었다.
"살려 주오. 살, 살려주시오."
두 놈의 눈이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부엌 문짝에 깔린 노파가 피투성이로 정신이 들어 기어 나오는 것이었다. 두 놈이 눈을 마주쳤다. 한 놈이 땅에 떨어진 창을 들어 그대로 노파의 목을 꿰어버렸다. 그런데 세상에는 기적 같은 일도 어쩌다 있는지 박일주가 살아 있었다. 그것도 고방과 가까이 있어서 폭음과 함께 그대로 날아갔는데 많이 쌓이지도 않은 눈에 처박히고도 살아난 것이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박일주는 머릿속이 온통 휑해서 왼쪽 귀에서 피가 흘러 턱수염을 타고 흐르는 것도 모른 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늘에서는 그치지 않고 눈이 내리고 무너진 집터에서는 연기와 함께 불길이 솟았다. 부엌 자리의 아궁이에서 시작된 불이었다. 연기와 눈이 섞여 흐릿한 가운데 군졸 두 놈이 이리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반사적으로 손에 쥘 만한 무기를 돌아보다가 부러진 창날을 거머쥐었다. 두 놈 중에 한 놈이 장창을 쥐고 있는데 아직 박일주를 보지 못한 듯 이리저리 무엇을 찾는 것 같았다. 박일주가 한달음에 달려가 창날로 한 놈의 옆구리를 쑤시고 또 한 놈은 발로 낭심을 걷어차서 거꾸려뜨려, 뺏은 창으로 뱃구레를 차례로 맞창을 내었다. 귀에서 쉴 새 없이 피가 흐르는데, 창을 짚고 사방을 훑어보던 박일주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나서 송수호를 찾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여기저기 눈덮인 더그레 자락만 얼핏설핏 보일 뿐, 옥색 도포자락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불꽃과 연기가 피어오르는 무너진 집터 위에, 무엇인가 엎드려 꿈틀대는 물체를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옷차림이 틀림없는 송수호였다.
"나으리!"
박일주는 황급히 송수호의 허리를 안고 그곳을 벗어났다. 그리고 눈밭에 가만히 뉘었다. 순간, 박일주가 흠칫 한발을 물러났다.
"앗."
가슴이 뜨끔함과 동시에 목구멍 밖으로 새지 않는 비명에 어금니를 물었다. 분명히 송수호인데, 얼굴이 불에 타 너무나 처참하였던 것이다. 송수호가 무의식중에서도 불타는 고통으로 꿈틀대었다. 불에 탄 얼굴의 오른쪽 반은 더욱 심해서 귀와 광대뼈와 입술의 형체가 뭉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아직 목숨은 붙어 있었다. 큰일이었다. 이대로 찬 눈밭에 두었다가는 얼마 못 갈 것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박일주가 달리기 시작하였다. 말(馬)이다. 군사들이 타고 온 말이 있는 것이다. 수십 필이던 말이 전부 어디로 도망을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말을 찾아 좁은 산길을 따라가던 박일주가 멀리 눈보라 사이에 몇 필의 말이 서성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말 꽁무니를 이리저리 쫓는 사람이 있었다. 흰색 옷에 갓을 보니 군사를 인도했던 찰방이었다. 역참(驛站)의 찰방이라 말타기에는 이력이 난 이놈도 도망가려면 말이 필요했던 것이다. 뿌두득 어금니가 부러지게 이를 사려문 박일주가 맨손으로 달려들었다. 놈의 멱살을 쥘 것도 없이 그대로 면상을 주먹으로 치기 시작하였다. 넘어진 놈을 가슴에 올라타고 멈추지 않고 계속 얼굴을 강타하니, 이미 찰방은 숨이 끊겨 열명 길로 들어섰건만, 이성을 잃은 박일주는 멈출 줄을 몰랐다. 얼마나 지났을까? 숨이 찬 박일주가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니 자신이 보기에도 정말 참혹했다. 따지고 보면 군사를 인도한 찰방이야 무슨 큰 잘못이 있으랴만 군사를 데려왔다는 것만으로도 박일주에겐 죽일 놈이요 원수였던 것이다. 박일주가 피 묻은 주먹을 눈으로 문지르고, 말에게 다가가 살살 어르다가 마침내 말고삐를 잡았다. 그런데, 참으로 귀신이 울고 갈 일이 생겼다. 송수호를 눕혀놓은 곳으로 말을 끌고 가보니 있어야 할 송수호가 그 자리에 없는 것이다. 박일주가 미친 듯이 눈밭을 헤치며 더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어디에도 송수호는 없었다. 정신이 아득해진 박일주가 골짜기가 떠나가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다.
ㅡ나으리이이. 어디 계십니까, 나으리이.ㅡ
ㅡ정일아아아, 덕출아아ㅡ
ㅡ으아아아아아아ㅡ
그러나 박일주의 쉰 목소리는 끝없이 내리는 눈발에 감겨 떨어지고, 수십 명의 생명이 혼백(魂魄)으로 흩뿌려진 산골짜기엔, 무심한 눈송이가 땅 위의 비극을 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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