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설

송원일 서장(序章) 6.흉년

fiction-google 2024. 5. 7.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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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흉년

나라가 생긴 이래 어느 때고 한 번이라도 순우 순풍(順雨順風)에 풍년이 들어 만 백성이 배불리 먹은 해는 없었지만 그래도 현종(顯宗) 11년과 12년의 소위 경신 대기근 같은 때는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경술, 신해 두 해 만이 아니고 현종 임금이 등극하던 을해(乙亥) 년부터 승하한 갑인(甲寅) 년까지 내리 십오 년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흉년으로 인한 기근이 팔도를 휩쓴 것이다. 참으로 불행한 임금이었다. 아버지 효종의 뒤를 이어 18세에 왕위에 올랐는데 그 해 봄부터 기근이 시작되더니 개국이래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흉년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때를 같이하여 부왕의 승하(昇遐)로 벌어진 예송논쟁으로 신하들은 끝없는 설전을 하고 있었다. 논쟁의 시작은 다름 아니었다. 부왕이 승하하자 부왕의 서모(庶母) 인 자의대비(慈懿大妃)는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나 하는 문제였다. 솔직한 얘기로 이런 문제는 일 년을 입거나 백 년을 입거나 왕가의 종친들이 알아서 하게 두면 되는 것이다. 한데, 이런 어이없는 문제로 서로 세력을 확보하려는 신하들은 남인과 서인으로 갈라 죽기 살기로 서로 싸웠다. 명분은 유교 경전의 해석 차이였지만 이들의 눈에는 자기네들 벼슬과 가문만 존재할 뿐 왕도 백성도 없었다. 가뜩이나 아비를 잃어 슬픈 왕은 신하들의 싸움과 하늘의 변괴(變怪)에 당황하였다. 즉위하자마자 가뭄이 시작되더니 영 호남에 기근과 전염병이 퍼져 숱한 백성이 죽었다. 해가 더 할수록 흉년과 전염병도 심해서 제위 십 년간 각 도에서 올리는 장계에 전염병으로 죽었다는 백성 수는 헤아릴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가축도 예외가 아니어서 사복시(司僕寺)에서 기르던 말도 수십 필이 죽고 팔도에 있는 소들도 마구 쓰러져 소의 종자가 끊길 판이었다. 소가 없으니 농사는 더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흉황도 다음 해와 그 다음 해인 경술, 신해년에 비하면 약과였다. 경술년에 충청도에서 시작된 전염병이 평안도에서 경상도를 휩쓴 다음 제주까지 번졌다. 설상가상으로 꽃 피고 새가 울어야 할 봄날에 우박이 쏟아지고 눈과 비가 마구 섞여 내리더니 어떤 곳은 서리까지 내려 돋아나는 싹들을 주저 앉히었다. 여름으로 접어들자 평양(平壤)에서는 주먹 같은 우박이 쏟아져 어린애가 맞아 즉사하고 토끼, 노루, 꿩들이 맞아서 숱하게 죽었다. 그러니 논밭에 남아날 작물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북쪽이 그러할 때 남쪽인 경상도 전라도는 비 한 방울 오지 않아 논밭이 다 타들어갔다. 그러다가 이번엔 태풍이 불어 초가지붕은 다 날아가고 기와집도 기와가 핑핑 날았다. 태풍은 폭우와 같이 오게 마련이라 밤낮으로 비가 쏟아져 마을 전체가 물에 쓸려간 곳도 있었다. 비가 그치자 남은 작물은 병충해의 창궐로 곡식 한 톨 거둘 것이 없었다. 한 해에 냉해, 한 해(旱害), 수해, 풍해에 충해까지 덮치니 살아날 방도가 없었다. 이 중에 한 두 가지만 닥쳐도 쑥대밭이 되어 흉년일 터인데 하늘에서 내리는 오재(五災)에 덤으로 사람 전염병에 가축 전염병까지 얹었으니 인간 세상이 꼭 지옥과도 같은 것이었다. 언제 죽을지 모를 공포가 사람들 사이에 파고들었다. 하지만 역()으로, 이 지경에 이르면 공포는 오히려 인간을 흉폭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의 눈빛에 핏발이 서고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본능이 행동을 부추기었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어져서 남의 논밭에 이삭이라도 보이면 너도나도 들어가서 훑어 먹었다. 무리를 지어 주인을 묶거나 두드려 패서 먹을 것을 움키고 소고 말이고 닭이고 심지어, , 뱀까지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것이다. 겨울이 되자 그동안 죽지않고 살아있는 사람은 그나마 힘이 성한 축들이라 누가 삼베옷만 걸쳐도 뺏어 입고 무덤을 파고 시체를 들어내어 염의(殮衣)를 벗기는 것은 보통이었다. 극도의 굶주림이 염치와 양심까지 먹어치웠는지 옆에서 마누라가 죽어 자빠져도, 자식이 숨이 끊어지며 애비를 애타게 바라봐도 빈 죽사발이 있으면 그것을 먼저 핥았다. 그런데 인간의 여러 본능 가운데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것은 색욕(色慾)이었다.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에서 보았듯이 침략자들이란 항상 색() 고픈 것들이라 부녀자를 겁탈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굶주림으로 눈이 뒤집힌 무리들이 어쩌자고 죽도 밥도 아닌 여자로 허기를 채우려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좁쌀이라도 남아 있을만한 집이면 떼거지로 몰려가 주인을 패고 식량을 약탈하고 부녀자는 겁탈하였다. 부녀자인들 볼만한 몸뚱이겠는가? 너나 나나 못 먹어 엉치뼈가 솟고 얼굴은 해골만 남았는데도 덤비고 보는 것이었다.

이렇듯 조선 팔도가 생지옥 같은데 궁가의 군()이니 공주 옹주들과 정승이니 판서들은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승 판서의 높은 양반들은 나라에서 주는 녹(祿)이 넉넉한 데다 조상 전래의 전장(田莊)이 있고 왕가의 자손들은 그들이 가진 어마어마한 논밭에다 염전(鹽田)에서 나오는 소출까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굶는 백성을 위해 쌀 한 톨 내놓지 않았다. 십 몇 년의 재위 동안 신하들에게 휘둘려 아무것도 못하던 29세의 임금이 이때만은 참지 못하고 각료들을 질타(叱咤) 하였다. 모든 대소 신료들은 백성들을 구할 방도를 마련하라는 추상같은 어명을 내린 것이다. 이어서 잔치에 소를 잡은 왕가의 대성군을 죄를 물어 귀양을 보내었다. 그것을 본 신하들은 당장 모든 관리들의 녹봉을 삭감하여 2만여 석의 진휼미(賑恤米)를 마련하였다. 임금도 어영미 5천 석을 풀고 왕실에 들어오는 모든 공물을 구휼미로 돌리니 이래저래 35천여석이 모였다. 하여, 선혜청, 한성부, 훈련원에 구휼소를 차리니 첫날에는 백성들이 긴가민가하여 6천여명이 와서 먹더니 다음날에는 만 명이 넘고 그 다음날부터는 구름같이 모여들어 죽()을 미쳐 끓여 댈 수가 없었다. 성밖의 백성들은 멀어서 오지도 못하고 굶어 죽어가니 삼강(三江)에 거주하는 백성만이라도 구제하려고 용산과 홍제원에도 구휼소를 차렸다. 하루 두 차례 주는 멀건 죽을 타먹기 위해 그나마 차례를 놓칠세라 업고 끌고 기어 오는 꼴은 차마 못 볼 광경이었다.     

송윤호가 경술 3월에 혼인을 하여 이듬해인 신해년 정월에 득남을 하였다. 혼인 후 만 일 년도 되지 않아 얻은 경사였다. 양쪽 집안이 모두 기뻐하는 가운데 장인 허참봉이 제일 기뻐하였다. 허참봉은 지난해 가을에 추수를 보려고 춘보를 데리고 김화로 내려갔었는데, 막상 내려가 보니 말이 아니었다. 해마다 다른 고장보다는 하늘의 피해가 덜한 곳이건만 냉해가 워낙 심해 소출이 반으로 줄었던 것이다. 그나마 추수한 곡식을 행여 굶주린 유랑민이 덮칠까 하여 그걸 지키려고 밤낮으로 소작인들과 장정들을 동원하였다. 차라리 날이 추워져 눈으로 길이 끊기면 피해를 면할까 해서 눈을 기다리다 보니 막상 허참봉도 한양 길이 막혀 그곳에서 겨울을 난 것이었다. 결국 송윤호가 아들을 낳아 거칠이가 눈길을 헤치고 내려가 소식을 알리자 얼마나 기뻤던지 눈에 빠지며 넘어지며 달려온 것이다. 삼 칠일이 지나고도 며칠 뒤에 외손자를 보러 온 허참봉이 사위를 보고 웃으며 말하였다.

"나는 혼인한 지 삼십 년이 넘도록 아들을 못 보았건만 자네는 한 해도 안되어 아들을 보았네그려? 아무튼 자네가 애썼네. 허허."

"제가 애쓴 게 뭐 있을라구요."

"아니? 자네가 애쓰지 않았다면 누가 애를 썼다는 말인가? 설마 내 딸이 샛서방을 봤다는 말은 아니겠지?"

애 낳느라 애를 쓰고 고생한 것은 당신 딸이지 내가 아니라는 겸사(謙辭)의 말이 이상하게 꼬인 것이었다.

", 장인어른께선 농담의 말씀을 다 하십니다."

"옛 말에 이 농사 저 농사해도 자식농사가 첫째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자식농사를 위해 밤낮으로 애쓴 자네가 대견해서 한 말이네. 허허."

"그렇다고 주경 야경(晝耕夜耕)한 것은 아니옵니다."

"그렇다면, 일발필중(一發必中) 했단 말이지? 역시 내 사위일세. 핫하하."

장인과 사위가 무람없이 주고받으니 세상에 드문 옹서(翁壻) 지간이었다. 또한 그만큼 서로를 믿고 좋아하였던 것이다. 그때 마침 송수호가 조카를 보러 들리었다. 뒤이어 어머니 한씨와 송윤호의 형수가 와서 산모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니 먼저 와 있던 친정어머니가 분주히 사돈을 맞이하였다. 송윤호의 사랑에서 송수호와 허참봉이 인사를 나눈 다음 얘기를 나누는데 장계(狀啓)가 사방에서 올라와 어전에 쌓인다는 데에 이르렀다. 송수호가 입을 떼었다.

"쌓인 장계의 거의가 굶고 얼어 죽은 백성 수가 어디서는 몇이요 하는 것 뿐이라니 금년도 무사하리라는 보장이 없음이지요. 정월도 지나 2월로 들어섰는데 함경도도 아닌 경상도에서 얼어 죽다니요. 한파 뒤에는 또 무엇이 오려는지 알 수가 없으니...이거야, ."     

"경상도 뿐만 아닌 것 같소이다. 읍에서 2십 리 떨어진 내 농토는 높은 산이 사방을 막아 풍해가 적고 또한 산에서 흐르는 물이 사철 일정하여 한 발(旱魃)이나 수해가 적소이다. 게다가 인적이 드문 곳이니 전염병과 충해도 적지요. 다만 산골이라 냉해를 걱정 했었는데 바로 지난해에 냉해를 입었지요. 천여 석 나오든 땅에서 소출이 반으로 줄어 벼 5백 석이 나왔소이다. 관아에 일 할을 바치고 이 중에 반은 소작인 몫이라 2백여 석이 나의 것인데 소작인인들 그것을 나누어 일 년을 버티겠소이까? 해서, 1백여 석을 그들에게 다시 나누어 주었지요. 작인(作人)이 살아남아야 내가 있을 것 아니오이까? 남은 1백여 석도 유랑하는 무리들의 손에 들어갈까 온 겨울을 그곳에서 보냈지요. 한양에 살고부터 생각찮던 이런 문제가 생기는구려. 마음 같아서는 남은 백여 석마저도 굶주린 이들에게 주고 싶었지만 그리되면 나부터 유랑민이 될 처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겠으니 어쩌면 좋으리까?"

"김화가 여기서 몇 리나 될까요?"

"아마 350리쯤 될 거외다."

"짐을 진다면 대 엿새는 걸릴 것 같군요."

"허허, 물길이 좋아 배로 옮길 수만 있다면 태가(駄價)도 얼마 들지 않으련만 김화는 예로부터 물길이 좋지 않지요. 가까운 임진강은 큰 배도 드나들건만 막상 임진강과 이어진 김화의 한여울(漢灘)은 바닥이 얕고 강 폭은 좁아 물살이 빠르니 쌀섬을    실을 만큼 큰 배를 띄울 수가 없소이다. 그러니 천상 육로뿐인데 이게 또한 만만치가 않소이다 그려."

"장인 어른, 벼 한 석을 한양으로 사람이 져 나른다면 태가는 얼마나 들까요?"

옆에 있던 송윤호가 불쑥 물었다.

"바로 그게 만만치 않다는 말일쎄. 소나 말이라면 좌우 잔등에 벼 한석 씩을 싣겠으나 사람은 장정이라도 한 석을지고 하루 5십 리 길이 빠듯할 걸세. 그러나 이런 흉년에 소가 어디 있으며 있대도 수 십 필을 어디서 얻겠나? 천상 사람이 져 날라야겠는데 이게 또 문제란 말일세. 벼 한석을 지고 한양으로 왔다가 돌아가려면 오고 가고 열흘이 넘는 길인데 삯으로 벼 한석은 줘야할 것 아닌가? 그럴 바엔 차라리 내가 밥은 김화로 가서 먹고 잠은 한양 와서 자는 것이 이득 아니겠나? 허허허."

허참봉은 자기가 말해 놓고도 어이가 없는지 헛 웃음을 지으나 듣는 송수호 형제로서는 이럴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들이 원망스러웠다. 팔도가 참혹한 기근으로 시달리는 이때에도 굶지 않고 사는 것은 사실 허참봉이 대어주는 양곡이 아니었으면 송수호의 말직 요미(料米)로는 어려운 일인 것이다. 지난 가을만 해도 춘보와 거칠이 부자는 무명을 지고 노새와 나귀에는 쌀을 실어 나르기를 세 행비나 했었다. 유랑민이 무서워 낮에는 산에서 잠을 자고 순전히 밤길로만 다니었던 것이다. 이나마 춘보와 거칠이 부자가 아니었다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워낙 길눈이 밝고 걸음을 잘 걷는 춘보와 힘이 장사인 막개와 그의 아들인 거칠이가 또한 대담하고 재빨랐던 것이다. 이들은 김화에서 한양까지 짐을 지고 노새와 나귀를 몰면서도 사흘이면 닿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 번 행보에 기껏 쌀 두 석을 옮길 뿐인데 굶어 눈이 뒤집힌 유랑민과 그즈음 부쩍 늘어난 산적을 언제까지 재수 좋게 피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볏섬보다 무명이 나았었다. 무명 스무 필을 지고 오면 쌀 네 석과 맞먹으니 벼로 치면 8석을 혼자 지고 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쌀을 무명으로 바꾸려 해도 김화 읍내의 바닥이 좁아 무명이 그리 많지 않은 데다 한양으로 갖고 온 무명은 무명대로 가치가 쌀보다 못했다. 한양에는 무명이 흔할 뿐 아니라 이런 흉황에 헐벗고는 살아도 먹지 않고는 못 사는 법이니 무명을 주고받는 쌀의 양이 날로 줄어드는 것이다.

"좌우간, 이런 사단(事端)을 풀지 못하면 내 땅을 가진 보람이 어디에 있겠소? 아니 그렇소이까? 사돈."

허참봉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송수호가 답답한 심정이 되어 한숨을 쉬었다.

"듣고 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희들이 미쳐 생각 못한 일이기도 하구요. 왕가의 친족들이 하삼도(下三道)에 많은 땅을 갖고자 하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그려. 허긴 삼남의 곡식도 조운선(漕運船)이 닿지 않은 곳은 참으로 난처하긴 합니다마는... 실인 즉, 농사도 농사지만 한양과 통하는 길이 문제이군요. 일전에 청국에 사신으로 따라갔던 관원의 말을 들으니 청국에는 마차가 길을 메우고 사람들은 수레를 끌어 한 번에 많은 짐을 싣고 다닌다고 하더이다. 말 두필이 끄는 쌍마차에 곡식을 스무 석이나 싣더라니 참으로 부러운 얘기지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말 두필이 스무 석이면 우리의 다섯 배이데 허허... 하여튼 산이던 들이던 길만 좋다면 조선에서도 우마차를 만들 터인데 지금은 마차가 있데도 길이 좁고 험해 쓰지 못할 거외다. 길이라도 좋아서 이런 흉황에 피해가 덜한 지방의 곡식을 실어다 굶어 죽는 지방에 갖다 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겠소이까."

"굶어 죽는 사람은 도성 안보다 역시 도성 밖의 양민이 많습니다만 구휼미도 이제는 바닥이 나서 구휼소를 절반으로 줄였지요. 이제부터 봄철이니 춘궁기가 겹쳐 양식 떨어지는 집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을 터이니 작은 벼슬아치라도 제가 참 부끄럽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나랏님도 어쩌지 못하는 일이 올시다. 그저 이럴 때 길만 좋았더라면 있는 쌀 실어다 구휼미로 선뜻 내놓았으면 속이라도 시원할 터인데,... 에이... ."

"그러시다면 장인께서 김화 현감에게 구휼미로 내놓으시면 될 일이 아닙니까? 굳이 장인께서 손수 쌀을 한양으로 끌어 옮길 이유라도 있으시온지요?"

허참봉이 송윤호의 물음에 대답은 아니하고 앞에 앉은 송수호를 보고 엉뚱한 것을 물었다.

"사돈께서 사헌부에 감찰 벼슬을 하시니 한가지 물어보겠소이다. 유사 이래로 이런 기근(飢饉)이 없었다지요? 불쌍한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는 이 기근에도 시골 토호의 소출을 노리는 지방 수령(守令)이 있을까요?"

이야기의 줄기가 갑자기 옆으로 흐르는 것이어서 송수호가 미쳐 대답을 못하고 있다가 며칠 전의 일이 생각나서 대답하였다.

"사람 사는 곳에서는 항상 있어 온 일이고 지금도 그런 수령 방백은 있습니다. 달 포 전에 진천 현감이 구휼미 명목으로 토호들로부터 쌀을 걷어 착복한 사실이 사헌부에 발고가 되었지요. 조사를 해보니 사실일 뿐만 아니라 그 쌀이 진천 현감의 이종 형인 공조 참의(工曹參議) 김두관의 집으로 간 것이 며칠 전 규찰(糾察)에 걸렸지요. 이 번에 그도 함께 탄핵을 했습니다. ()께서 진노하셨다니 무사치 못할 겝니다."

허참봉은 사위인 송윤호를 바라보며 <자네도 들었지?>하는 표정을 지으며 빙긋이 웃었다.

"굶는 사람은 한양 땅 도성 밖에 있는데 김화 현감에게 갖다 바치면 현감은 무슨 재주가 있어서 한양으로 쌀을 운반하겠나? 현감이 먼저 먹고 말겠지. 이보게, 사위, 부자가 왜 부자인 줄 아는가?"

여기까지 말을 해놓고 장죽에다 담배를 재우더니 부시를 치는 것이었다. 부싯깃이 눅눅해서인지 불이 잘 붙지 않자 그 걸 보던 송윤호가 다른 부싯깃을 꺼내어 손바닥으로 싹싹 비벼서 장인에게 내밀었다. 허참봉이 사위가 주는 부싯깃을 받아 부시를 치니 쉽게 불이 붙었다. 영월초를 꿀물에 적셔 곱게 썬 살담배 연기가 달큰하여 냄새가 끌리었다. 몇 모금을 맛나게 빨던 허참봉이 왜 대답이 없느냐고 눈으로 사위에게 물으니 사위는 장인이 내뿜는 연기만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는 것이다. 할 수없다는 듯 이번엔 송수호를 바라보았다. 사돈은 아느냐고 다시 눈으로 묻건만 사돈은 재물에 관해서는 더 모르는 사람이었다. 할 수없이 부자 되는 비결을 내가 알려준다는 듯 허참봉이 답을 내놓았다.

"내 손에 들어온 것을 뺏기지 않으려고 남보다 더 힘을 쏟는 사람이 부자일세. 농사를 짓는 대로 다 뺏기고서야 무슨 부자인가? 만석 부자라도 다 뺏기고 나면 굶어죽기 딱 알맞지. 김화 현감도 마찬가지로 탐욕스럽네. 사헌부에 계시는 사돈 앞에서 할 얘기는 아니나 모든 지방 수령이 다 그러하네. 그 자리에 있을 때 한몫을 떼 놔야 하거든. 이제는 내가 왜 김화 현감에게 직접 구휼미로 바치지 않는지 알걸세."

"그렇다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지난해의 소출을 구휼미로 다 내놓으신다면 다 뺏기는 거나 진배없는 것 아닙니까? 장인어른께서는 어쩌시구요?"

"허허, 부자가 왜 부자인가 다시 말하게 하는군. 부자는 다 뺏긴 듯해도 어딘가에 남겨놓은 것이 있는 사람이 부자일세."

"?"

송윤호로서는 모를 소리였다. 동생보다 고지식한 송수호로서는 더욱 모를 소리였다. 얘기에 정신이 팔려 미시(未時)에 든 것도 몰랐나 보았다.    방문이 열리더니 춘보와 거칠이가 점심상을 들고 왔다. 친정부모와 시아주버니 내외가 왔다고 아끼던 밀가루로 칼국수를 한 것이다.

"사위네 집에 자주와야 겠군. 귀한 별미 국수를 다 먹어보고... 허허."

"하루 두끼 먹기도 힘든 세상에 점심이라니... 이거 이래도 되는건지...."

"장인 어른도 자주 오시고 형님도 자주자주 오세요. 그래야 저도 덕분에 점심이란 걸 먹어보지요. 허허허."       

장인과 형이 다녀간 며칠 후였다. 이월 중순이라 아직은 바람이 차지만 햇살은 그런대로 따스해서 송윤호는 겨우내 닫혔던 사랑방의 문을 열고 햇볕을 쪼이었다. 송윤호가 눈을 지그시 감고 이마에 닿는 간지러운 햇살과 더불어 아련히 졸고 있는데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나서 눈을 떴다. 지게를 진 거칠이가 대문을 들어서는데 쌀섬인 듯 했다. 저쪽 안채에서 쪼르르 달려온 언년이가 거칠이에게 큰 소리로 말을 하였다.

"거칠이 오빠, 왜 이제야 와? 저녁때가 다 되었는데."

", 거칠이 소리는 뻬라니까, 그냥 오빠라고만 하란 말이야. 쪼끄만게... 에이."

", 거칠이 오빠가 내 진짜 오빠야? 나이 더 먹은 대접을 해줘도 저런다니까."

", 그만두고 부엌으로 가서 노덕이 할매보고 쌀을 보리로 바꿀 데가 없나 물어나봐. 이 쌀은 우선 마루에 올려 둘 테니까."

"이리로 오기 전에 종루 시겟전에 들려오지 그랬어?"

"이건 쪼그만한 게 말도 많어. 넌 지난번에 쌀 한 석 갖다 주고 바꿔온 보리 못 봤냐? 그 죽일 놈들이 날 얕보구서 쌀 한 석을 보리 열 닷 말로 쳐주는데 또 가라구? , 이젠 명찰방 나으리 댁에도 쌀이 얼마 안 남았더라. 담부터는 가야 없을 텐데 이젠 어쩌냐? 너랑 나랑은 선혜청에 가서 죽이라도 타 먹는다지만 나리 댁 식구들은 무엇을 드리냔 말이다?"

"명찰방에 쌀 없단 말이 정말이야? 그럼 우리 아버지하고 거칠이 오빠가 김화에서 가져오면 되잖아. , , 그런 걱정만 하니 장가를 못 가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언년이가 고개를 돌려 날름 혀를 내밀어 보이고는 돌아서기 무섭게 냅다 부엌으로 뛰었다. 도망을 치는 언년이를 따라 거칠이도 뒤따라 뛰는 것이었다.

", , . 언년아, 아씨 마님께는 말씀 올리지 마라. 걱정하신다."

둘이 티걱 거리는 것을 처음부터 본 송윤호는 그들과의 거리가 제법 되는지라 큰소리는 알아듣고 어떤 소리는 잘 못 알아 들었다. 그러나 언년이가 거칠이에게 한 말은 다 알아들었으므로 이해는 다 되었다. 특히 언년이가 한<명찰방에 쌀 없단 말이 정말이야?>이 말이 머리에 찡하고 들어오더니 계속 그 말이 머릿속에서 맴을 돌다가 입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이렇게 맥놓고 있을 수 없는 문제가 닥친 것이다. 가까운 목멱산(木覓山)과 흰 구름을 멍하게 바라보던 송윤호가 벌떡 일어나 의관을 갖추더니 미투리를 찾아 신었다. 그리고는 장인 허참봉의 집으로 향했다. 집을 나서면 바로 숭례문(崇禮門)으로 통하는 넓은 길이 있건만 막상 명찰방 끄트머리의 북창(北倉) 길을 질러가려면 길이 좁았다. 게다가 골목의 좌우로 줄줄이 늘어선 초가집들의 처마가 낮아서 갓이 걸릴 지경이라 송윤호는 매 번 길이 넓은 대평방 쪽으로 돌아서 다니었다. 그러나 걸음은 곱으로 걷는 것이다. 허참봉이 사는 곳은 기와집이 여러 채 모인 동네이고 길이 넓은 데다 초가집 동네보다 약간 높아서 숭례문과 칠패가 가까이 보였다. 대문에 이르러 문을 가볍게 두드리자 마른 나뭇가지를 부엌으로 가져가던 춘보가 얼른 문을 열고 인사를 하였다.

"아이고, 서방님 오셨습니까."

", 어른 계시지?"   

무료해서인지 허참봉이 지게문을 한 짝만 열어두고 문지방에다 팔꿈치를 궤어 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대문을 들어서는 사위를 보았다.

"장인 어른, 그간 무탈(無頉) 하시지요?"

"어서 오게나. 무탈은 하나, 한양에 사노라니 무한(無限) 하게 무료(無聊) 하네그려."

허참봉은 방석을 가리켜 사위에게 자리를 권하며 자신도 보료에 풀썩 주저앉아서 장죽을 쥐더니 연초 쌈지를 장죽으로 끌어당겼다.

"무료하시면 춘보를 대동하시고 성 밖의 서강이나 마포나루로 가시어 바람이라도 쐬시지요. 때는 좀 이르나 목멱산에 오르시면 사방을 둘러보실 수도 있구요."

"에이, 늙은이가 자칫 찬바람에 고뿔이라도 걸리면 아까운 약 값 드네. , 이럴 때 그때 그 사주쟁이가 있었으면 심심치는 않으련만, 참 이름이 윤 뭐랬는데 잊었군. 외자였는데?"

"윤근이란 사주쟁이 말씀하시는 겁니까?"

"옳지. 맞네, 윤근이였어. 참 귀신같이 맞추더니만..."

"그렇게 잘 맞추었다니 말씀입니다만... 장인어른께서 한양으로 이사할 것도 윤근이 그때 말을 했었습니까?"

"이르다 뿐인가? 이제 와 말이네만 자네 처인 연지가 혼인한 다음 해 정월에 득남한다는 풀이도 그때 벌써 했었다네. 참 지나고 보니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었어."

"거 참 이상합니다."

"? 뭐가 이상하단 말인가."

"그렇지 않습니까. 사주 하나로 앞 날을 그렇게 잘 안다면 김화의 볏섬을 어찌하면 한양으로 옮길 수 있는지도 말했을 것 아니겠습니까?"

"옮길 방도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볏섬은 누가 어쩐다 하는 것을 아는 것일세. 사주팔자에 이미 볏섬을 옮길 사람이 정해져 있다는 말이야."

"그렇다면 장인어른이 곡식으로 근심하실 것도 사주에 나왔을 터인데 그 곡식을 누가 옮길지도 나왔을 것 아닙니까?"

"큰 근심한다고만 나왔지 내가 옮긴다는 말은 없었네."

"장인 어른의 사주에도 없고 더구나 제 사주에는 있지 않으니 천상 김화의 볏섬은 갖다 먹기 틀린 것이로군요."

"춘보 내려보내면 몇 석이야 차지가 되겠지."

"허허, 그러고 보면 사주란 이리 보면 맞되 저리 보면 역시 믿을 만한 것이 못되나 봅니다."

"무슨 소리, 내가 본 건 다 맞았네. 단지 자네의 사주가 아리송하다지 않던가."

"그러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장인어른의 사주가 다 맞는다면 이럴 때 볏섬이 어찌 된다고 딱 부러지게 나와야지 어찌된다는 것은 없고 근심만 하신다니 말이 안 되는 풀이가 아닙니까? 여차직하면 한 해의 농사가 날아갈 중대사에 말입니다."

허참봉이 물고 있던 장죽에서 담뱃진 끓는 소리가 찌르르하고 났다. 댓통을 놋쇠 재떨이에 대고 땅땅 치는 소리에 짜증이 섞이었다. 생각만 해도 울화가 치미는 노릇이 아닌가. 이런 흉황에 내 곡식 내가 갖다 먹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물론 몰래 몇 섬이야 갖고 올 수 있겠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고 가까울때 말이지 수 백리 밖에 있는 데다 유랑민과 산도적을 열에 하나라도 만나면 그 길이 황천길이 되고말 터인 것이다.

"이 것은 인력으로 되지 않는 노릇일세. 내 사주가 한양에서 살 팔자라고 했다면 무슨 방도가 생기기에 한양서 살겠지. 여보게 자네도 너무 노심초사할 것 없네. 아직 무명 짐이 남았고 그도 안되면 땅문서만 팔아도 십 년은 사네. 허허허."

"이럴 때에는 사주고 인력이고 따질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장인어른. 제가 한 번 나서보면 어떨까요?"

"? 나서다니? 자네가 나서서 그곳 볏섬을 한양으로 실어 오겠다는 겐가?"

". 되든 안되든 앉아있는 것보다야 낫겠지요. 허락만 해주시면 내일이라도 내려가렵니다."

"무슨 방도라도 있는가?"

"방도가 있을 리 없지요. 우선 내려가서 무슨 방도든 취해 보려구요."

사위가 나서겠다고 하니 혹 무슨 묘책이라도 있나 하였더니 <방도가 있을 리 없지요>라는 대답에 그만 허참봉은 낙심천만이었다. 그러나 이럴 때 방구석에서 선비랍시고 공자왈 맹자왈 하는 것보다 방도야 있든 없든 간에 온 식구를 위해 선뜻 나서는 사위가 믿음직하고 대견해 보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하던 허참봉이 장죽을 찾아 들고 다시 재떨이를 땅땅 힘주어 내리쳤다.

"좋네. 자네가 그리 결심을 했다면 내려가 보게. 그 대신 나를 데려가야겠네. 내가 간다고 자네에게 불편은 없을 것일세. 이번 행보에는 자네가 장수(將帥)요 나는 졸()이네. 그러니 나는 자네 심부름이나 하고 내 주장은 않을 테니 걱정 말게. 방에 앉아 있자니 무료하고 좀이 쑤셔서 그러네. 여보게, 사위, 그것도 안되겠는가? , 좀 봐 주게그려."

이튿날, 춘보와 거칠이에게 길 떠날 채비를 하라 일렀다. 춘보는 마구간에 매어있던 나귀와 노새의 굽을 갈고 길양식과 아직은 쌀쌀한 날씨라 두터운 옷도 챙겼다. 저녁이 되자 형이 퇴청할 시각에 맞추어 송윤호는 안국방으로 향했다. 형과 마주 앉은 송윤호가 내일 일찍 볏섬을 가지러 김화로 내려간다는 말을 하였다. 형인 송수호도 허참봉과 똑같은 것을 물었고 대답도 같을 수밖에 없었다.

"방도는 있느냐?"

"방도가 있을 리 없지요. 우선 내려가서 무슨 방도든 취해 보려구요."

"지난번 사돈 말씀에 김화에 백여 석 정도가 있다 셨지? 그걸 무슨 수로 갖고 오겠나? 두 번에 나른데도 쉰 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니 내려가서 방도를 구해야지요. 짐꾼이 없으면 소작인이던 절에 있는 중이던 하여간 갖고 올 수 있는 만큼 갖고 오지요."

"볏섬을 갖고 와 봐야 품삯으로 다 들어가고 남는 것도 없다던데 굳이 한양으로 끌고 올게 아니라 그곳에서 무명이나 은자로 바꾸면 어떠냐?"

"그렇게만 된다면 더 이상 좋을 수도 없겠지요. 하나, 장인이 그걸 모르겠습니까? 김화 좁은 바닥에 무슨 무명이 그렇게 많겠습니까. 있데도 말을 들으니 장인이 이미 김화 무명은 다 걷었나 보던데요. 더구나 은자를 지닐만 한 부자가 어디 있기나 하나요? 설사 그런 부자가 있다면 부자도 쌀이 남아돌겠지요."

"... 그렇기도 하겠다."

"그래서 우선 김화로 내려가 방도를 찾으려는 겁니다. 앉아서 생각해봐야 별 뾰족한 수가 없더군요."

"꼭 가야 한다면 내가 사람 하나를 네게 딸려주마. 요즘 금천, 평산, 서흥에서 적당(敵黨)들이 들끓는가 보더라. 다른 곳이라고 없겠느냐. 여하간, 이 사람은 내가 믿고 부리는 사람인데 검()을 잘 쓰는 사헌부의 관원이니라."

", 공무도 아닌데 관원을 어찌 씁니까?"

"김화 현감을 만날 일이 있다면 관원이 낫겠지. 내일 윗 분에게 말씀드리고 그 사람을 데려올 테니 네가 출발을 약간 늦추거라."   

송윤호가 형의 말을 들어보니 해롭지 않은 일이라, 그러마 하고 안채로 가서 어머니와 형수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미동 송윤호의 집에서 허참봉을 비롯하여 모두들 기다리는데 진시(辰時)가 되어도 형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다 오늘 떠나기는 틀렸나 보다 하는데 열어둔 대문으로 송수호가 들어서는 것이다. 뒤에 갓을 쓴 사람이 따라오는데 나이는 스물 대 여섯으로 보였다. 손에는 삼베로 감싼 기다란 것이 쥐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형이 말한 검일 것이다. 허참봉과 인사를 하고 송윤호에게 데리고 온 사람을 소개하였다. 박일주라고 자기를 소개한 사람이 늦어진 사유까지 말하고 보니 자꾸 늦어질 것같아 송윤호가 먼저 길을 나섰다. 다 같이 길을 걷다가 다동(茶洞)의 모교(毛橋) 어름에서 길이 갈리어 송수호는 사헌부가 있는 적성방 쪽으로 가고 나머지 일행은 곧장 흥인문으로 향하였다. 허참봉이 탄 나귀가 길을 잘 걷는 데다 모두들 무거운 짐이 없어서 걸음들이 빨랐다. 그러나 종일 쉬지 않고 걸었건만 늦게 길을 떠난 터라 도봉산도 못가 해가 지려 하였다. 다락원에서 하룻밤을 지내려던 일행이 할 수없이 민가의 토방을 빌려 집에서 싸 온 주먹밥으로 저녁을 대신하였다. 다음 날은 일찍 밥을 지어먹고 서둘러 길을 떠나 축석 고개를 넘어 잠시 쉰 다음 솔모루까지 길을 내쳐 걸었다. 아침부터 90리를 걸은 셈이다. 하루에 2백 리를 걷는 춘보에게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행보 이건만 송윤호로서는 힘든 하루였다. 허참봉도 나귀 위에서 흔들리고 시달리느라 힘이든 얼굴인데 춘보는 물론이요 거칠이와 박일주도 멀쩡하였다. 용수 올린 주막을 찾아 일행이 들어가니 먼저 온 여러 사람들이 북적대였다. 소매 없는 저고리에 등거리를 껴입고 머리에는 패랭이를 쓴 것으로 보아 모두들 먼길 걷는 장사치들이 분명하였다. 말에서 짐을 내리는 놈, 말을 마구간으로 끌고 가는 놈, 마루에서 떠드는 놈들이 어림잡아 스무 명은 되어 보였다. 바쁘게 돌아치던 중노미가 그제서야 송윤호 일행을 보았는지 허참봉 앞으로 쭈르르 달려왔다. 제 눈에도 허참봉이 가장 연장자이고 수염만 보아도 양반의 틀이 기중 나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거처할 방이 있느냐?"

"아이고 나으리, 방이야 많습죠. 큰 방이 셋이라 서른 명은 잘 수 있사옵니다... 마는, 저기 송상들이 이미 방 셋을 다 쓰기루 했습지요. 사람 스물둘에 짐이 한방 가득이라 나으리 주무실 방이 없는 뎁쇼."

"허어, 낭패로군. 근방에 다른 주막은 있느냐?"

"있기는 하오나 그 집은 단칸방에 술만 파는 문자 그대로 술 주자 주막입지요"

그때 뒤에 있던 박일주가 선뜻 앞으로 나섰다.

"보자 하니 이놈이 양반 앞에서 문자로 쓸까스르지를 않나? 네 이놈 죽고 싶어 환장을 했느냐? 양반이 거처로 쓰겠다면 예 하면 될 노릇이지 잔말이 많구나. 네놈 상대할 생각 없으니 송상이라는 행수를 오라 하여라."

중노미란 놈이 가만 보아하니 한 손에 든 것은 비록 헝겊에 싸였으나 칼이 분명하고 게다가 뒤에 선 젊은 양반의 큰 갓이나 도포가 찜찜하긴 하였다. 꼴이 아무래도 양반 동티가 날 것만 같아서 꾸벅 절을 하고 곧바로 송상 행수에게로 쭈루루 달려갔다. 잠시 후, 답삭 부리 수염에 어깨가 떡 벌어진 자가 중노미 뒤를 따라왔다. 중노미란 놈이 박일주 앞에 이르자 눈치를 힐깃보더니 부리나케 되돌아 가는 것이었다.

"송상 행수 천수돌이라 하옵니다. 어인 일로 소인을 찾으시온지요?”

", 잠깐 나 좀 보세."

박일주가 천수돌이란 행수를 한 켠으로 데리고 가서 몇 마디 하는 것 같더니 행수란 자가 꾸벅 절을 하고 돌아서는 것이었다. 행수가 동패에게 가더니 손짓을 섞어 뭐라고 하였다. 한참이 지나고 패랭이 하나가 허참봉에게 하정배를 깍듯이 올리더니 앞장서서 일행을 방으로 인도하였다. 춘보와 거칠이는 중노미를 따라 마구간으로 나귀와 노새를 끌고 가고 세 사람은 방으로 들었다. 방을 들어서니 길다란 봉놋방을 반으로 갈라 가운데는 짐과 곡식 자루를 천정까지 가득 쌓아놓았다. 방을 반으로 쪼개어 한 쪽은 저희 상단 패거리와 짐이 차지하고 한쪽은 송윤호 일행이 쓰라는 것이다. 그나마 자리가 넉넉한 듯해서 허참봉이 의관을 벗어 말코지에 걸더니 자리를 잡고 누웠다.

"장인 어른, () 하시더라도 저녁밥을 드시고 누으시지요."

송윤호가 일변 목침을 장인의 머리에 고이며 말하였다.

"곤해서가 아닐세. 곧 일어날 터이니 걱정 말게. 아직 자네에게 폐단을 줄 나이는 아니지 않나. 허허."

박일주는 괴나리봇짐만 벗어두고 칼을 쥔 채 어디로 나가고 잠시 뒤에 춘보와 거칠이가 함지박처럼 벌어진 질그릇에다 물을 떠다 바쳤다. 허참봉과 송윤호는 버선을 벗고 발을 씻었다. 송상 패거리들은 방과 마루에서 밥들을 먹느라 시끌벅적한데 박일주가 밥상을 하인들에게 들려오고 있었다.

밤이 되자 허참봉은 코를 골고 박일주도 눈을 감은 것 같았다. 자려던 송윤호의 귀에 방 가운데 쌓인 짐 저쪽에서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적당들만 아니면 송도의 안식구와 애들을 보고 갔으면 딱 좋겠는데 이거야 원 안 가보던 길이라 고생이 많겠구만. 에이 빌어먹을 놈들."

"그러게나 말일세. 나도 철원에서 평강 길은 초행일세. 신계 ,곡산 길이나 토산, 이천 평강길로만 다녔지. 한데 철원에서 평강 가는 길이 그렇게 험하다며?"

"난들 아나. 나도 털 나고 처음인데. 길도 제대로 없다더구만. 허지만 행수님 말로는 길은 험해도 그 길만 뚫으면 송도에서 토산을 지나 평강 가는 길보다 엄청 가깝다더군."

"그거야 그렇겠지. 하나, 그러고 보면, 이 쌀과 면포를 원산 북태와 바꾼 후에도 문젤세. 평산, 신계 길이 산도적으로 막혔다니 그 길로야 어찌 송도로 가겠나? 천상 한양에다 북태를 풀고 나서 송도로 갈 테지. 허 그러고 보니 나도 마누라 안아본 지 오래네그려."

"할 수없지 어쩌겠나. 이런 기근에 굶어죽지 않고 처자식 멕여 살리는 게 어딘가? 길이야 행수님이 오죽 알아서 하실라구?"

"자네 말이 맞네. 그만 자세. 자야 또 새벽길을 걷지."   

짐짝 넘어 상인이 하는 얘기를 듣던 송윤호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가만히 누운 채 어둠 속에다 눈을 박고 생각에 잠기었다. 이튿날 날이 밝기도 전인 인시(寅時) 무렵부터 부시럭대던 송상들이 새벽밥을 먹느라 분주하였다. 송윤호가 먼저 일어나 혼자 밖으로 나오니 중노미와 같이 자던 거칠이가 벌써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잘 된 노릇이라 송상 행수를 찾아 오라 일렀더니 잠시 뒤에 답삭 부리 수염의 행수가 트림을 하며 나타나는 것이다. 송윤호는 웃는 낯으로 다가가 무슨 일로 그러니 잠시 시간을 내어 주기를 청하니 무슨 일인가 하여 행수도 선뜻 허락하였다. 어제 저녁의 칼 쥔 양반보다 한결 부드러운 양반이 아닌가 말이다. 잠시만 이라던 양반이 오랫동안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어 물으니 대답을 안 할 수도 없어 대답을 하다 보니 웬 걸 송상에게도 해롭지 않은 질문이 많았다. 젊은 양반의 제안이 솔깃한 데다 양반 체모를 버리고 장사치인 자신을 상대해 주는 것은 더욱 황송한 일이라 시간이 갈수록 예, 예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고 머리는 연신 땅으로 향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끝나서 일행에게 돌아가 보니 이미 길 떠날 채비를 진작 마치고 행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행수는 서둘러 송상을 휘몰아 길을 떠났다.

"아니 자네는 길 떠날 채비 안 하고 어디 갔었는가? 밥부터 자시게. 우린 기다릴 수없어 먼저 먹었네."

"잘 하시었습니다. 우리도 송상 뒤를 따르지요."

"그런데 말일세, 이제 와 얘기지만 저 송상이란 장사치들이 어딜 가기에 이 길을 가는 걸까? 이 길 끝이야 철원이 끝인데 뭘 팔고 살게 있다고... 허허.”

"원산으로 간다더군요."

"뭐라고? 원산을? , 그렇다면 길을 잘 못 들었네. 원산이라면 다락원에서 연천을 바라고 가야 하네. 가만... 그러고 보면 팔도를 메주 밟 듯하는 송상이 그 길을 모를리도 없고... 자네가 잘 못 들은 건 아닌가?"

"그럴 리가 있습니까. 평산, 신계에 적굴이 새로 생겨 금천, 토산 길을 가려다 신계에서 토산으로 또 지름길이 있으니 그것도 피할 겸 새 길을 하나 더 내자는 속셈 때문이지요."

"그러니 더욱 연천 쪽으로 가야지. 연천을 지나면 곧 월정인데 그곳이 평강과 가장 가까운 길이란 말일세. 왜 빠른 길 두고 돌아서 가는가?"

"산적도 아니고 유랑민도 아닌 무리가 마차산 밑에다 움막 백여 채를 세우고 연천 길을 막고 있어 그 길마저 쓸모가 없나 봅디다.”

", 흉황이 원수일세. 멀쩡한 백성들이 화적이 되다니..."

송윤호 일행이 송상의 뒤를 따라 부지런히 걸었으나 한참을 걸어도 그들을 만나지 못하였다. 솔모루에서 포천 현까지는 50리가 채 안되는 거리라 오정도 되기 전에 닿았다. 이대로 길을 떠나면 주막도 양문이나 가야 있으니 아예 밥을 먹고 가기로 하여 베를 주고 밥을 해달라 하였다. 베와 바꿀 곡식이 없다는 말에 할 수없이 쌀을 꺼내 밥을 해 먹었다. 그리고는 다시 부지런히 걸어 저녁에는 양문에 있는 주막에 닿았으나 송상은 없었다. 주막집 주인에게 물으니 송상은 와서 다리쉼만 하고 곧 떠났는데 오늘은 운천 봉운사(峯雲寺)에서 묵는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보부상들 걸음 잘 걷는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어찌 한결같이 춘보 저놈 같을꼬? 운천이 여기서 40리니 하루에 말짐과 더불어 백오십 리를 걷겠구나."

"장인 어른 먼 길에 곤하시지요? 내일부터는 걸음을 천천히 하겠습니다."

주막의 봉로방이라 하나 다른 객이 없어 송윤호 일행만 편히 쉬고 다음 날부터는 노량으로 걸으니 자연 젊은 박일주가 말 상대가 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가게 되었다. 박일주는 생김새는 우락부락한 편이나 막상 말을 하고 보니 아는 것이 많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따지고 보니 송윤호가 세 살이 위에다 윗질 양반이라 하여 하게를 하였다. 박일주는 사헌부의 관원이긴 하나 진짜 양반과는 사정이 달라서 훈공을 세워도 정칠품 이상으로 오를 수 없는 소유(所由) 벼슬이었다. 다시 말해서 소유 벼슬은 사로(仕路)에는 나아갈 수 있으나 정승 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신분인데 쉽게 말해서 양반과 중인 사이의 어정쩡한 양반인 것이다.

"형님 말씀으로는 자네가 검을 잘 쓴다 하더군. 검은 뭐며 도()는 뭔가? 둘 다 칼이 아닌가? 검이 더 긴 칼인가?"

"아닙니다. 도는 외날 칼을 말하옵고 검은 양날 칼입니다. 이걸 보십시오."

박일주가 휘릭하고 감겼던 베를 풀더니 어느새 반 쯤 뽑힌 칼날이 나타났다. 칼은 양 날이 예리하게 빛이 났다. 다시 칼을 처음처럼 배로 싸면서 말은 계속하였다.

"또 한가지 다른 점은 도는 칼 몸이 약간 휘었고 검은 곧지요. 조선에서는 도를 많이 쓰고 대국에서는 검을 많이 쓰는 것도 다릅니다."

", 그렇다면 도는 베기 좋고 검은 찌르기 좋게 한 것이로군."

"아니? 어찌 아셨습니까? 정말 그러합니다."

"이치가 그렇지 않은가? 휜 것은 칼날 지나기 좋으라고 휘였을 게고 곧은 것은 찌를 때 힘을 칼끝에 모으기 좋으라고 곧게 한 것일 테지."

"하하하. 말씀하시는 것이 흡사 검도를 연마하신 분 같습니다."

송윤호와 박일주가 하는 이야기를 줄곧 듣고 있던 나귀 위의 허참봉이 뒤를 돌아보며 한마디 하였다.

" 허허, 삼국지연의(演義) 같네. 내 귀엔 공자님 말씀보다 칼싸움 얘기가 엿에 꿀 바른 듯하니 계속들 하게."

그날은 70리를 걸어 영평 마을에 주막을 정하였다. 영평은 한 여울이 마을 옆으로 흘러 농사지을 땅이 넓고 철원 길과 김화 길이 갈라지는 곳이라 주막에도 길손이 여럿이었다. 주막에 봉놋방이 둘이 있으나 방이 크지를 않아 대여섯 명이 눕기도 빠듯하였다. 다른 방도 마찬가지여서 그쪽 일행 가운데 비장(裨將)이란 양반이 송윤호가 있는 방으로 오고 춘보와 거칠이가 그 방으로 건너갔다. 비장이란 위인이 헛 기침을 한 번하고 방을 들어서다가 도포짜리가 셋이나 있는데 기가 죽었다. 주춤거리며 다가앉아 송윤호 일행에게 자신을 소개하는데 김화 현감의 비장 최 아무개라 하였다. 김화라는 말에 자연 허참봉이 나섰다.

"나도 김화에 사는 백성이오이다. 현감께서도 무량하신지요?"

", 무사하시지요, 한데, 김화를 언제 떠나셨다가 회향(回鄕) 하시는지요."

"달포쯤 되었소이다만 어찌 물으시오?"

"그렇다면 김화읍치의 사정을 모르시고 가시는 게 적실하군요."   

"아니? 김화에 무슨 변고가 생겼단 말이오?"

"말씀이 아닙니다. 이십 여일 전쯤인가 네댓 명의 유랑민이 보이더니 보름쯤 되자 슬금슬금 모여든 수가 백이 넘었습니다. 지금은 삼 백이 넘을 것 같습니다. 이들이 관아 앞에 모여들어 밥을 달라 죽을 달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습니다."

"그래, 그러는 그들을 현감이 보고만 있었단 말이요? 관아 창고에 구휼미가 있을 터이고 그도 없다면 환곡(還穀)이라도 있을 거 아니요?"

"구휼미라고 십여 석 있는 걸 누구 코에 붙입니까? 진작에 죽을 쑤어 나눠 주었지요. 더 줄 것이 없다니까 이제는 낮에는 민가에 흩어져 빌어먹고 밤이면 관아에 몰려들어 행패를 부리니 곧 무슨 일이라도 터질 판세올습지요."

"허어 어! 이것 참, 우리 고을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변괴는 변괴로세. 이 곳만 해도 다른 지방보다 흉황이 덜하다는 것이 알려진 게로군. 이걸 어쩌나? 쯧쯧."

옆에서 듣고만 있던 박일주가 그제서야 최 비장이란 자를 상대하여 마주하였다.

"현감의 처지가 참으로 난감이겠소. 한데, 비장은 그런 곤경에 처한 현감을 두고 어딜 가시는 길이요?"

박일주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뜨끔한 비장이 되려 물었다.

"그 건 왜 묻소이까?"

"비장이라면 육방(六房)과 달리 현감이 부임할 때 따라온 사람이 분명한데 곤궁에 빠진 현감을 두고 먼 길을 떠나니 하는 말이요."

박일주가 하는 말투나 하는 몸짓이 보통 사람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와락 든 최 비장이 혹시 어사나 감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무로 가는 길이니 더 묻지 마시지요."

"공무라면 현감에게 닥친 이 급박한 상황을 알리러 가는 길일 터인데 파발(擺撥)을 띄우지 않고 한양까지 굼뱅이 걸음을 하겠다는 심사는 또 뭐요?"

찔끔해 진 최 비장의 얼굴이 이그러졌다. 생각했던 대로 어사나 감찰이 분명한 것이다. 이 말도 저 말도 못하여 진땀이 날 판인데 그제서야 박일주가 사헌부의 관원임을 말하고 패찰을 보여주었다. 패찰에 사헌부 관원의 신분 대신 욕이 써 있다 해도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올 처지가 아닌 최 비장이 깜박 죽어서 박일주가 묻는대로 공손히 대답하였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유랑민이 모여들자 관아를 부술까 겁이 난 현감이 두 번이나 조정에 장계를 띄워 유랑민의 유입을 알렸습니다. 구휼미가 떨어졌으니 진휼(賑恤) 할 방도를 내려달라고도 하였지요. 그런데 위에서 비답(批答)이 없으니 낭패 아닙니까? 낙담한 현감이 사직상소를 올렸는데 그 또한 비답을 못 받으니 현감이 저를 시켜 이조참판에게 직접 사직할 뜻을 전하라고 하니 어쩝니까? 가야지요. 참판 대감의 천거로 김화 현감이 되신 분이거든요."

듣고 있던 모두가 혀를 찰 지경이었다. 평소에는 거드름을 피우며 백성들을 내려다보던 현감이 유랑민이 겁이나 사직과 동시에 도망갈 생각만 하니 될 노릇이 없는 것이다.

"지난 달 함경도 길주(吉州)에서 난민들이 떼를 지어 관아로 쳐들어가 관곡을 탈취한 일이 있었지요. 그렇다고 난민이 함부로 관아를 넘보지는 않소이다. 그들은 배고픈 난민이지 역도(逆徒)가 아니오이다. 그러니 현감이 그들을 다독이고 한편으로는 부자를 찾아 구휼미를 걷어 그들을 먹인 다음 다른 지방으로 가도록 해야지요. 최 비장은 한양으로 갈 것이 아니라 김화로 나와 같이 다시 가야겠소. 그곳의 형편을 보고 나서 조치를 취합시다."

이치에 딱 맞는 말을 하는 박일주에게 따질 수가 없게 된 최비장이 다음날 송윤호 일행을 따라왔던 길을 쉬지 않고 8십 여리를 걸으니 김화와 평강으로 가는 갈라진 길에 닿았다. 송상들은 곧장 평강 길인 북으로 향했을 것이었다. 김화는 갈라진 길에서 3십 리 가량 더 가야 했다. 십 리쯤 가다 보니 해가 저물고 어두워지는데 한여울을 따라 군데군데 모닥불이 피워져 있고 불가에는 사람들이 보였다. 움막도 여러 채가 길게 늘어서 있어 어림잡아도 쉰 채도 넘어 보였다. 송윤호 일행이 김화 관아에 닿고 보니 한밤중이었다. 나귀 위에서 종일을 시달리던 허참봉이 촌보도 뗄 수없을 정도로 노독이 나서 박일주와 같이 최 비장의 거처에서 자기로 하고 다른 사람들은 내친 걸음이라 집까지 가기로 하였다. 거의 해시(亥時)가 되어 허참봉의 집에 닿아 춘보가 대문을 두드리니 처음은 조용하다가 춘보와 거칠이의 목소리를 알아듣고서야 막개가 달려 나왔다. 어둠 속에서도 송윤호를 알아본 막개가 고꾸라지 듯 절을 하였다. 그동안 거칠이 아비인 막개 부부가 집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성님, 집이 멀쩡한 걸보니 유랑민들이 여기는 오지 않았나 보우?"

관솔에 불을 붙이던 막개가 아들이 반가워 춘보의 물음은 듣지 못하고 아들에게 되려 물었다.

"서방님 모시고 오면서 혹 유랑하는 것들의 행패는 없었느냐?"

"언년이 아부지하고 지가 있는데 어디다 행티를 부리겠어요?"

"그 놈 큰소리는 여전하네. 이놈아 우리 마을은 그놈들 땜시 낱알은 다 감춰놓고 시래기에 밀기울죽으로 연명하고 있느니라. 다행히 가호(家戶) 수가 적은 데다 읍에서 한참 떨어진 외진 곳이라 아직까진 그놈들 낯짝을 못 봤다만 그래도 우리들은 굴뚝에 연기 안 나게 있는 조심을 다 떨고 있단 말이다."

한밤중에 또 한번 소란이 벌어저 종일 굶은 일행을 위해 밥을 지으랴 방에다 불 지피랴 하다가 첫 닭이 울 무렵에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종일을 길에서보낸    송수호가 곤하여 해가 중천이 되어 일어났다. 춘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거칠이 부자가 거름을 밭으로 져다 나르고 있었다. 늦은 아침을 먹은 송윤호가 관아에 가보려고 집을 나서니 멀리 밭에서 거름을 쏟아붓던 거칠이란 놈이 지게를 내던지고 부리나케 달려오는 것이었다. 김화읍에 닿아 관아 쪽을 보니 무슨일인지 수 백명은 됨직한 유랑민들이 새카맣게 몰려 있었다. 그 때 동헌으로 들어가는 문을 메우고 몰려든 유랑민 앞에 수건을 머리에 동인 중갓쟁이와 상투잡이를 상대로 박일주가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 보려던 송윤호가 유랑민에게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주고받는 듯하더니 상투잡이가 오른손을 번쩍 들고 패거리에게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계신 사헌부의 나리께서 우리의 요구에 힘을 쓰시겠다 하니 오늘 하루 더 말미를 주기로 했소. 현감의 말은 이미 어그러졌으니 마지막으로 이 분의 말을 믿어봅시다. , 다들 흩어져 먹을 걸 찾으러 갑시다아."

무슨 기대를 했다가 실망을 하는지 우우하는 소리와 함께 차츰 무리가 흩어졌다. 무리가 다 흩어질 때까지 박일주는 아문(衙門) 앞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송윤호가 다가가자 인사를 꾸벅하더니 헐숙청(歇宿廳)으로 송윤호를 안내하였다. 방에는 허참봉이 장죽을 물고 있다가 들어서는 사위를 보더니 빙긋이 웃는 것이다. 송윤호가 인사를 하고 앉자 허참봉이 박일주를 보고 어찌 되었는가 하고 물었다.

", 어르신 말씀대로 일단은 그 양을 맞추어보마라고 말은 했사오나 내일까지 백 석이 과연 걷힐까요."

"철원엔 천 석 부자가 여덟이고, 김화엔 나 하나요. 칠 팔백 석하는 부자가 하나 있기는 하나 금년에는 너나 나나 남은 곡식이 별루 없을 게요. 반타작에 소작인과 또 반타작이면 뭐가 남았겠소?"

"철원으로 가라고 말을 했더니 어이가 없는지 그놈들이 웃더이다."

박일주가 무거운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 허참봉이 그 모습을 보더니 역시 가라앉은 소리로 말을 했다.

"그랬을 거웨다. 넓은 철원 알곡 밭을 두고 좁은 이곳까지 왔을 때야 오죽들 해서 왔겠소. 이쪽은 지난해 반 타작이라도 했지만 그쪽은 바람받이 지세(地勢)인데다 폭우로 벼가 몽땅 주저앉았으니 그 많은 소작인에 딸린 식구들이 몇이겠소? 아마    모두들 난민이 되고 말았을 거요. 그들은 적도가 아닌 농투성이들이요. 어찌하던 살려서 농사를 짓게 해야지요. 하니 토성 사는 칠 백석 정 부자에게 3십 석을 걷어오게 하면 나머지는 내가 내리다. 내가 백 석을 다 내면 좋으련만 나도 먹고살아야 그들 틈에 끼지 않을 거 아니오이까."

"지금 동헌에 나가 현감에게 건의를 하지요. 정부자에게 나졸을 보내라구요."

송윤호가 허참봉이 하는 말을 듣자니 7십 석을 떼어 유랑민에게 구휼미로 주려는 것이라 자기의 생각한 바와 다르게 일이 돌아가서 불안하였다. 그래서 박일주가 현감을 만나러 나간 사이에 허참봉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면 겨우 3십 여석이 남게 되는군요. 그걸로 일 년 양식이 되겠습니까? 정말 다 털어주어도 괜찮을지요?"

"오늘 아침에 현감을 만나보니 유랑민이란 것들이 점점 꾀가 나서 화적들처럼    뭉쳐서 다닌다네. 한양과 달리 구휼청도 없으니 얻어 먹어야하는데 백성 모두가 굶는 판에 어디서 그 많은 입이 얻어먹겠나. 천상 부자를 털어먹고 관가의 창고를 노리는 수밖에 없으니 이건 난민도 아니요 화적도 아닌 것들이 되고 말았다지. 관아에 비축된 구휼미는 진작에 바닥이 났고 환곡이 몇 십 석이 있으나 나라의 것이라 안 된다니 어쩌겠는가? 그놈들이 쌀로 쉰 석, 벼로는 백 석을 길양식으로 내놓으면 봄도 되고 했으니 고향으로 가서 농사를 짓겠다는 데야 할 말이 있나? 현감에게는 내가 얼마를 내겠다는 말을 안 했네. 하나 내가 일흔 석을 내려네. 그러면 현감은 사직하지 않아서 좋은 데다 골치 아픈 유민 쫓아서 좋고, 나야말로 좋은 일을 하면, 좋은 일이 또 생길 테니, 좋은 일 아닌가? 아무튼 벼 일흔 석으로 이 고을이 화평해진다면 싸게 멕힌 거겠지? 안 그런가?”

고을은 화평해 질지 모르나 화평했던 송윤호의 마음에 먹구름이 끼었다. 생각했던 것이 완전 수포로 돌아갈 판이었다. 그러나 장인이 좋아서 한 일을 두고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박일주를 관아에 남겨두고 허참봉과 집으로 향하면서도 송윤호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송상과 약속한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솔모루 주막에서 자던 날 밤에 짐짝 저편에서 송상들이 하는 얘기를 들은 송윤호가 다음 날 새벽에 송상 행수를 만난 것은 간밤에 들은 말이 적실한가 해서였다. 처음엔 행수란 자에게 원산으로 쌀과 무명을 가지고 가느냐고 물었었다. 그렇다는 대답에 쌀과 무명은 어디서 싣고 오느냐고 물었더니 행수란 자가 송윤호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왜 묻느냐고 되려 묻는 것이었다. 송윤호가 웃는 얼굴로 김화에 볏섬이 있는 것을 말하였더니 깜짝 놀라는 것이다. 원래 송상은 송도나 연안에서 나는 쌀을 싣고 신평 길로 다녔는데 근래에 도적이 길을 막아 철원에서 평강을 지나 추가령을 넘는 길을 택했다고 말하였었다. 만약 김화에서 쌀을 실을 수만 있다면 김화는 한양과 원산의 중간이니 태가가 절반으로 줄 뿐 아니라 열흘 길이 닷새로 줄어들어 이익도 배가 되는 것이다. 팔도가 흉황에 시달리는 이때에 쌀을 싣고 가서 원산에다 풀기만 하면 그야말로 불티가 날릴 것이었다. 가득이나 벼농사가 되지 않는 북쪽에서는 쌀이 곧 보물 아닌가? 이번에 송상이 처음 가는 길을 택한 데다 쌀짐이 무거운지라 말 열 필에 쌀 한 석씩을 싣고 사람들은 무명과 목화솜을 등짐으로 지었다. 그래봐야 쌀 열 석이니, 한양에서 원산까지 근 열흘을 사람과 말이 먹고자는 것을 빼고나면, 쌀로서는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원산도 흉황이긴 마찬가지여서, 원산의 어부들과 장사치들은 송상이 갖고 오는 쌀에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적굴(賊窟)이 송도 길을 막아 곡식 값이 날로 오르는 요즈음 같으면, 쌀 한석이면 잘 말린 북어를 말 두필에 잔뜩 실을 수 있고 그 북어는 한양에 가면 또 곱절의 이익이 나는 것이다. 바로 이럴 때, 송윤호가 행수란 자를 만나 쌀 이야기를 하니 행수 입에서 예, 예 소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데 이제는 어쩌면 좋을지 송윤호는 난감하였다. 애초에 볏섬을 한양으로 옮기기 위해서 송윤호가 나섰는데, 사위가 장수(將帥)요 자신은 졸()이라던 장인이 장수의 육도삼략(六韜三略)을 단칼에 짓뭉개버린 것이다. 당장 열흘 후에 김화에 오기로한 송상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송윤호는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쉬었다.

"대장부가 어연 한숨인가?"

한발 앞을 걷던 허참봉이 귀도 밝게 한숨소리를 들었나 보았다.

", 아무 일도 아닙니다. 잠깐 딴 생각을 하다가..."

"주책없는 장인이 남은 볏섬 다 내놓아서 그러지? 내 알고 있네. 허나 걱정말게. 설마 우리 모두 유랑민이 되기야 하겠는가?"

"그러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유랑민에게 죽을 쑤어 먹이는 건 봤어도 엄포로 곡식을 강탈하는 유랑민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이옵고, 거기에 휘둘리는 현감도 처음인지라, 이것저것 생각하니 한숨 나오는 일뿐입니다."

"자네는 젊어 그리 생각할지 모르나 나는 그들을 여러 번 보고 겪어도 보았다네. 난민이 먹을 것 찾아 이리저리 흘러 다니면 유랑민이지 별것 있나? 또 농민은 농사가 폐() 하면 난민이 될 수밖에 더 있는가? 그들은 난민이 된 농민일세. 나라에서 그들을 적도(賊徒) 보 듯하는 것은 큰 잘못이지. 죽을 주면 하루만 살지만 쌀을 주면 땅을 일구네. 어느 쪽이 근리(近利) 한가?”

장인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금쪽같아서 뼈에라도 새겨서 가보로 물려주고도 싶으나 지금으로서는 그런 금쪽보다는 벼 백섬이 훨씬 나을 터였다. 집에 당도하니 모처럼 사람 사는 것 같았다. 마을의 작인들이 지주 나으리가 오셨다고 숨겨두었던 먹을 것을 갖고 오고 막개 아내는 콩을 갈아 두부까지 만든 것이다. 허 참봉이 없는 동안 허 참봉네 곳간을 지킨 마을 청장년들이 모두 모였다. 이들과 함께 먹으며 금년 농사 이야기도 하고 모두들 오랜만에 배를 불렸다. 실없어진 송윤호의 마음은 아랑곳 없이 또 하루가 가서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벼 백석을 유랑민에게 주기로 한 날인 것이다. 거칠이를 앞세워 관아에 다다르니 어제와는 사뭇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관아 이문(衙門) 앞에는 마당을 반을 갈라, 좌측에는 어제와 같은 차림의 난민이 수백 명이 모여있고 그 오른쪽에는 어제까지 보이지 않던 마을 주민이 새카맣게 모였는데 모두들 몽둥이에 쇠스랑까지 들고 있었다. 주민의 수로 보아 김화 관내의 모든 동리의 청장년이 다 모인 듯했던 것이다. 얼핏 보아도 사정을 알 만했다. 그간 한 달 가까이 수백 명이 모든 동리를 다니며 밥 달라 죽 달라 동냥질에 곡식 도둑질까지 하니 이들의 행패에 진절머리가 나서 들고일어난 것이리라. 송윤호와 허참봉이 그들 사이를 지나가며 보니 난민들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아침에 죽도 못 먹었는지 밤에 잠을 못 잤는지 부녀자들은 길에 앉거나 누워있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이때 앞장서서 가던 허참봉이 몇 마디 말로 거칠이를 집으로 돌려보내었다. 관아의 앞으로 가니 아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문틈으로 밖의 동정을 살피던 나졸 하나가 허참봉을 보고 문을 열어주더니 부리나케 다시 닫았다. 동헌에는 현감이 나와 앉아 있고 이속(吏屬)들이 좌우에 벌려 서있는 가운데 박일주가 어제의 중갓쟁이와 맨 상투잡이를 상대로 현감이 보는 가운데 마주서 있었고 한쪽에는 첨지(僉知) 니 동지(同知) 니 하는 이 고을의 유지들인 듯한 갓쟁이들이 십 여명 모여 있었다. 보나 마나 그들이 밖의 마을 장정들을 끌고 온 것이리라. 이 사람 저 사람의 눈치를 보아하니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현감에게 현신(現身)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송윤호와 허참봉이 망설이는데 박일주가 굵은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정부자 집을 턴 것은 분명히 네놈들 가운데 있을 터, 거짓말이 난당이로구나. 양곡을 겁탈한 것만도 참형을 면치 못할 죄이건만 뭐라? 백석을 채워달라?"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소이까? 정부자네 집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지 않소이까? 시생이 보증컨대 그런 일은.."   

그때였다. 간신히 위엄을 갖추어 좌정하고 있던 현감이, 손에 쥔 등채가 부러져라 의자의 팔걸이를 내려치며 소리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아니? 저놈이 방금 시생이라 했겠다? 네 이노오옴! 시생이라니? 얼자(孼子) 주제에 시생이라니? 네놈이 시생을 찾으며 양반을 기롱(譏弄) 하느냐? 죽고싶어 환장을 하지 않고서야 시생이란 말이 나온단 말이냐? 이놈!    얼른 소인을 게워내지 않고 무얼 하느냐. 에에이잉, 죽일 놈."

박일주가 현감을 대신하여 그들과 적당히 타협을 하여 고을 밖으로 몰아낼 수를 쓰고 있건만 현감은 양반의 체통에 목숨을 건 듯했다. 말의 중간이 끊긴 박일주도 기운이 빠져 입을 닫았다. 송윤호가 보기에 중갓을 쓴 자나 상투 바람인 자나 수염도 갖 나기 시작한 나이로, 기껏해야 스물 네댓일 터인데, 둘 다 눈빛이 날카롭고 굽힘이 없어 전혀 굶은 난민 같지 않았다.

"좋소이다. 우리들이 둘 다 비록 서자이긴 하나 경서(經書)를 대강이라도 읽었고 무과(武科)로 입신할 생각으로 검()도 흉내는 낼 정도 올시다. 그러나 벼슬도 못하고 농사도 짓지 못하는 서출이라 난민이 되었소이다. 현감은 소인 같은 서자를 두지 않았소이까? 없다면 혹시라도 서자는 만들지 말기 바라오이다."

둘 중에 중갓을 쓴 자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또박또박 말을 하니 현감은 안색이 새파래져서 더욱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사헌부의 관원인 박일주가 있고 이 고을 부자인 허 참봉과 유지들이 모인 데다 말만 들어도 오금이 저려오는 사헌부 감찰의 동생이라는 자가 보고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오늘은 일이 되느라 자신이 관할하는 모든 고을의 장정들이 손에 손에 몽둥이를 들고 문 앞에 모여 있기까지 하니 다시 힘이 솟는 것 같아 현감의 목소리에 뻐가 들었다.

", 저놈, 누가 저놈의 입을 짓찧어라. 저놈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와 감히 관장을 능멸하고 있고나. 형방은 무얼 하고 있느냐? 저놈을 엎치지 않코?”

지목을 받은 형방이 한걸음 나서기는 했으나 안 팍의 형세가 영 이롭지 못한 형편인 걸 아는지라 굽도 절도 못하고 우두망찰하였다. 현감의 말을 무시한 박일주가 다시 그들을 상대로 한걸음 나왔다.

"좋다. 듣자 하니 무과에 응시할 정도의 검술을 익혔다니 둘 중에 누가 나와겨뤄 너희가 이기면 백 석을 채워주마. 대신 내가 이기면 한 석도 못 가져갈 줄 알아라. 자 어떠냐? 그래도 해 볼테냐?"

"포도청이라면 모를까 사헌부에서도 칼이 필요 하오이까? 좋소이다. 서로 삼 합으로 겨룹시다. 어떻소이까?"

"삼합이면 충분하다는 말이냐? 대단한 자신감이군. 좋다. 하나, 검은 목검으로 하지. 죽이긴 싫으니까."

"맘대로 하시지요. 목검으로도 벨려면 얼마든지 벨 수 있을 테니까."

병방이 군노를 시켜 군사 조련용의 목검 두 개를 가지고 오라 하였다. 길길이 날뛰던 현감이 서로 칼부림을 한다는 말에 그만 입을 다물고 사태를 관망하는데 박일주와 중갓쟁이가 칼을 들고 마주 섰다. 그러자 좌우에 벌려 섰던 이방과 형방, 병방 할 것 없이 주르르 뒤로 물러나서 자리를 넓히는 것이었다.

"나는 박일주라는 사람이다. 이름이라도 알자."

"저 친구는 덕출이고 소생은 곽정일이라 하오이다."

"그래? 그럼 시작하지."

곽정일이라고한 자가 먼저 양 발을 어깨넓이만큼 벌리더니 비스듬히 비켜서서 두 손을 모아 칼자루를 잡고 칼끝을 내리었다. 박일주가 그러는 상대를 보더니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목검을 하늘을 향하여 수직으로 곧게 들었다. 그것을 본 곽정일은 자세를 바꿔 목검을 허리께에서 수평으로하고 몸은 아까보다 더 트는 것이었다. 박일주는 공격 자세를 취하고 곽정일은 처음엔 수비 자세를 취하다가 공격과 수비를 다 하는 자세로 바꾼 것이다. 박일주가 보기엔 곽정일이란 자가 제법 세법을 연마한 듯 보였다.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며 꼼짝을 하지 않던 두 사람이 일순간에 똑같이 앞으로 발을 떼며 목검을 휘둘렀다. 박일주는 상대의 어깨를 노리며 가슴으로 칼날이 흐르게 후렸고 곽정일은 박일주의 허리를 노리고 수평으로 흘린 것이었다. 서로의 칼이 어깨와 허리를 파고드는 그 찰나의 순간에 곽정일이 허리를 후리던 칼을 세워 박일주의 칼 날을 막았다. 만약 순간의 판단이 느려 박일주의 칼을 막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어깨뼈는 박살이 났으리라. 빠르고 정확하게 자신의 칼날을 받아내는 곽정일을 보고 박일주도 놀란 듯했다.

"놀랍군. 평수세(平守勢)에서 입지세(立指勢)로 돌아서는 품새가 그렇게 빠르다니."

"칭찬으로 듣겠소이다 마는 이미 한 수는 쓰셨습니다. 계속하시지요."

"허허 그러지."

그때였다. 막 자세를 잡으려는 박일주의 머리를 노린 곽정일의 기습적인 공격이 눈앞에 떨어진 것이다. 생각 밖의 공격에 저도 모르게 휘청 몸이 옆으로 기울며 어깨를 스치고 지나는 칼날을 느꼈다. 섬뜩한 기운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만만한 상대가 결코 아니었다.

"너도 아까운 한 수를 써버렸구나."

"두 수나 남았수다."

"그렇겠지."

박일주가 호흡을 가다듬고 어깨 높이에서 칼을 세워 공격의 순간을 노리는데 곽정일은 한 번의 공격이 빗나가자 일도 필살의 마음가짐으로 이번 한 수로 끝내리라 마음을 먹었다. 박일주가 어깨 높이로 칼을 치켜들자 곽정일도 같은 자세를 취하고 상대의 눈빛을 읽고 있었다. 박일주의 자세로 보아 자신의 상체를 노림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박일주의 눈빛이 먼저 반짝하였다고 느끼는 순간 곽정일은 몸을 땅에 누운 듯 뒤로 젖히며 오른손으로 옮겨 잡은 칼을 휘둘렀다. 와신평지세(臥身平地勢)라는 숫법이었다. 가슴께를 노리는 박일주의 칼날을 피하는 동시에 상대의 발목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긋는 순간에 아차! 칼날이 허전한 느낌이 듦과 동시에 명치가 화끈하더니 숨이 콱 막히었다. 어느새 박일주가 땅을 차고 뛰어오르며 목검을 거꾸로 세워 곽정일의 명치를 찍은 것이다. 박일주가 공격할 듯 움직이자 곽정일이 눈빛에 속아서 먼저 공격을 한 때문이었다. 숨을 죽이고 바라보던 현감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탄성을 지르며 환호하였다. 특히 현감은 자신이 검으로 싸우는 듯 등채를 허공에 휘둘러 대며 신명을 내어 소리치는 것이다.

"봐라, 저놈, 저거 큰소리 땅땅 치더니 꼴좋다. 오늘 저놈이 범을 만났느니라. 하하하하."

땅에 쓰러진 곽정일을 박일주와 덕출이가 부축하여 앉히었다. 덕출이가 곽정일의 등을 쓸고 두드려 혈이 돌게 하니 기가 일시 막혀 푸르던 얼굴이 조금 화색이 돌았다. 정신이 돌아온 곽정일이 자세를 고쳐 꿇어앉았다. 그리고는 박일주에게 넙죽 절을 하는 것이다.

"졌소이다. 처분을 바랍니다."

"아니다. 그만하면 나보다 낫다. 어디서 배운 솜씨인지 정말 아깝구나."

"나으리. 나와도 한번 겨루어 주십시오, 우리가 진 것은 인정하오나 이대로 끝낸다면 밖의 수많은 난민들은 길양식이 없어 집에 돌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다들 우리가 곡식을 얻어 나오기만 기다릴 터인데 빈손으로 어찌 나갑니까. 소인도 검이라면 자신 있으니 죽기를 각오하고 한번 겨루어 보렵니다. 그러니 부디 한 번만..."

덕출이가 박일주를 향해 간곡한 어조로 말을 하는 것이었다. 현감이 그 말을 듣더니 박일주의 솜씨를 믿어서인지 기가 더 살아나서 목청을 높였다.

"박공(朴公)은 저놈의 손모가지를 난짝 분질러 주시오, 제가 먼저 죽기를 자청하니 죽여도 싸지만 그동안 저놈들이 고을에 끼친 행패로 보아 손모가지 정도는 잘라야 내 속이 시원하겠소."

박일주는 어느새 박공이 되어 있었다. 송윤호가 가만히 보니 참 한심한 양반도 많고 한심한 벼슬살이도 많아서 이런 어이없는 수령(守令)도 있구나 싶었다. 이때 한편에 서서 조용히 삼국지연의를 감상하던 허참봉이 앞으로 나오더니 동헌 앞의 댓돌에 서서 현신을 올리었다.

"시생 허참봉 사또께 문안 늦어 죄만 하오이다."

", 아문에 들어설 때부터 보았는데 새삼 인사가 다 무어요. 됐으니 쌀을 주던 떡을 주던 허참봉이 알아서 저놈들이나 얼른 고을 밖으로 내쳐주시구려."

", 사또가 그리 분부하시니 따를 수밖에 없겠습니다. 이보시게 박소유. 내가 저들에게 벼 백석 모두를 내겠소. 허니, 모두들 우리 집으로 들 가세. 사아또ㅡ오, 그럼 이만 물러 나오니 이제부터는 베개를 높이 베도록 하시지요."

현감이 듣자 하니 허참봉이 안 내놓아도 될 벼 백석을 모두를 낸다니 한마디를 안 할 수가 없는데 이것들이 관장인 자기에겐 작별 인사랍시고 대강대강 허리를 굽히는 흉내만 내더니 허참봉을 따라 주르르 썰물같이 빠져나가니 할 말을 놓치고 말았다. 칼싸움에 지면 볏섬도 못 받기로 한 것 아니었나 말이다. 허참봉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관아를 나오자 기다리다 지친 난민과 고을 사람들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각 고을의 첨지와 동지라는 갓쟁이들이 바빠졌다. 자기 동리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일일이 보고 들은 것을 토해 놓아야 하였기 때문이다. 고을 사람들은 난민들이 허참봉의 곡식을 받자말자 각자 고향으로 흩어진다는 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난민은 난민대로 길양식을 받기로 했다는 곽정일의 말에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이 고을 사람들은 자기 곡식 안 내서 좋은 데다 원수 같은 유랑민 없어지니 좋고 난민들은 누구의 것이든 곡식 얻어 좋은 것이다. 술렁이던 고을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하고 곧이어 수백 명의 난민이 허참봉의 뒤를 따라오는데 그들의 꼴이 또한 말이 아니었다. 남부여대(男負女戴)라는 말 그대로 남자들은 솥단지에 돗자리와 망태를 지고 여자들은 이불 보따리나 허접한 자루를 머리에 이었다. 아이까지 있는 여자들은 업고 끌고 해야 하니 그 고통이 배가 되었다. 그런 그들을 본 송윤호는 장인인 허참봉이 새삼 우러러 보였다. 고을의 관장인 현감도 아까워 내놓지 않는 곡식을 선뜻 다 내놓은 것이다. 남아도는 곡식도 아니요 식구들이 먹어야 할 곡식을 더 급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일까? 무리들의 맨 앞장에서 여유롭게 걷고 있는 허참봉을 뒤따르는 송윤호는 여러모로 착잡한 심정이었다. 힘없는 무리의 행렬이라 오정이 지나서야 마을에 닿았다. 그런데 허참봉의 집에 가까워 지자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있다가 막상 난민들이 몰려오자 일제히 흩어져 각자의 집으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곽정일과 덕출이가 손을 들어 난민의 행렬을 멈추게 한 후 무슨 일이냐는 듯 허참봉에게 다가왔다.

"참봉 나으리, 이 마을의 인사법이 괴이하군요. 준비한 몽둥이라도 가지러 가나 봅니다. 같은 사람끼리 이래도 되오이까?"

"허허, 몽둥이라니 당치 않네. , 저길 보게."

집으로 뛰어들었던 마을 사람들이 이번엔 일제히 몰려오는데 손에 손에 든 것은 몽둥이가 아니라 함지박이나 동이나 항아리를 들었고 심지어 떼 낸 솥을 그대로 맞잡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온 동네 사람이 온갖 그릇을 있는 대로 다 들고 나온 듯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굶주린 사람들은 눈보다 코가 먼저 알았다. 난민들의 흐릿했던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기 시작하고 아이들이 일제히 아우성을 치는 것이다. 집집마다 들고온 것은 시래기와 된장을 넣어 끓인 쌀죽이었다. 허 참봉네 큰 솥에도 막개 부부가 끓인 죽을 동이마다 질그릇마다 다 퍼내었다. 허 참봉네 마당은 물론이요 동네의 길이 막힐 정도로 모두들 퍼질러 앉아서 죽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허참봉이 관아 앞에서 거칠이를 먼저 보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난민의 우두머리 격인 곽정일과 덕출이는 크게 감격해 마지않았다. 박일주 또한 이번 일로 느끼는 바가 많았는지 시종 말이 없었다. 죽 한 그릇을 난민과 같이 달게 먹고난 허참봉이 창고를 가리키며 곽정일에게 말을 하였다.

"다들 먹었으면 저 안에 있는 것을 가져가게. 백 여석은 될 것일세. 더 주고 싶어도 그게 다 라네."

"고마운 말씀이나 금년 농사에 종자할 볍씨는 남겨야 할 것 아닙니까? 일흔 석만 나누어 갖고 서른 석은 남겨 드리겠습니다."

"허허, 지주(地主)는 도적이라던데 와주(窩主)가 도적 걱정하는 꼴일세그려. 허허."

"나으리의 은혜를 모두들 잊지 않을 겁니다."

볏 섬을 풀어 곡식을 나누느라 한참을 북적대던 난민이 얼마 후 썰물 빠지 듯 마을 밖으로 빠지기 시작하였다. 아까부터 곽정일과 덕출이를 호젓한 곳으로 데리고 갔던 박일주가 그들을 데리고 오더니 송윤호에게 새삼 인사를 시켰다. 송윤호도 엉겁결에 마주하여 인사를 주고받았다.

"한양으로 돌아갈 때 이들을 데리고 가려 합니다. 사헌부에는 이런 사람들이 꼭 필요하니 윗분들께 이들을 적극 쓰도록 하려구요. 어떻게든 잡고 싶은 사람들이라 서리(書吏)나 저와 같은 직으로 밀어보지요. 문무(文武)가 있으니 잡과(雜科)를 보면 될 터이지요."

"잘 생각했네. 모르는 내가 봐도 참으로 아까운 재주를 지녔더구만서도 시절을 잘 못 만난 것일세. 형님과 의논해 보게. 길이 있겠지."

". 그리 합지요, 허고, 이곳의 일이 뜻밖에 빨리 끝난 듯하니 저는 이 사람들과 내일 한양으로 올라가지요. , 다른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참으로 나로 인해 고생이 많았네. 나는 천천히 올라갈 터이니 형님께 그리 전해 주게나."

이튿날 박일주와 곽정일, 덕출이를 따라 거칠이도 쌀자루와 명주(明紬)를 실은 노새를 몰고 떠났다. 삼월 초순이라 멀고 가까운 산에는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고 논두렁에는 아지랑이가 가물거리는 봄이오니 모두들 논 밭으로 나와 일들을 하였다. 작년 같은 하늘의 조화는 부디 없기를 바라면서 한 해 농사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박일주가 떠난 후 송윤호와 허참봉은 소작인들이 논밭에서 일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거나 춘보와 막개가 소를 몰아 밭을 가는 것을 구경할 뿐 별일 없이 며칠이 지나갔다. 그러나 말은 안 해도 송상과 약속한 날이 점점 가까워지자 송윤호의 마음은 점점 더 타들어 가는 것이었다. 이 일을 어찌 해결할 것인가? 갖은 머리를 쥐어짜도 방법이 없어서 식언(食言)에 대한 송상 행수의 질타를 각오하였다. 일반 상민이라면 욕 한자락으로 끝날 일이언만 양반의 체모에 식언이란 가당치 않은 노릇이나 어쩌겠는가? 장인이 없애버린 볏 섬을 도로 물어 내라고는 할 수없는 노릇 아닌가? 송윤호는 체념을 하고 하루하루를    보내었다. 그러나 송상이 온다는 전 날 저녁이 되자 저녁밥이 목구멍에 넘어가지를 않는 것이다. 밥상을 마주하여 앉은 허참봉이 사위에게 물었다.

"어디가 아픈가? 며칠 전부터 안색이 병자 같으니 어연 일인가? 아니면 그새 처자가 그리운가? 말을 해보게나."

"그럴 리가요. 별일 아니 오니 염려 놓으시지요."

"별 일 아니라는 그 일을 말해보라는 말일세."

", 무슨 말씀이 듣고 싶으신지요? 좋습니다. 속 시원히 말씀드립지요."

송윤호가 그 사이 답답하던 사연을 일장 풀어놓았다. 솔모루에서 송상과 한 약속에서부터 장인이 볏 섬을 다 날려 당장 내일 장사치에 불과한 송상에게 당할 봉욕까지, 숨도 안 쉬고 털어놓고 보니 속은 시원 하나, 결국 볏 섬은 없으니 말이 끝난 뒤는 더 허전하였다. 혹시 사위가 아픈 것은 아닌가 하여 걱정스러운 얼굴로 듣고 있던 허참봉이 빙긋 웃음을 짓더니 숟가락을 소리 나게 밥상에 내려놓았다.

"역시 윤근일세. 윤근이 귀신이야."

"? 윤근이 제가 봉욕을 당할 것도 미리 장인어른께 말씀을 드렸단 말인지요?”

“아, 참으로 놀랍구먼. 이렇게 귀신같이 맞추다니... 여보게 사위, 걱정일랑 말고 밥부터 먹게. 그리고 나서 나와 같이 가볼 데가 있네."

"예에에?"

밥상을 치우러 온 춘보에게 뭐라고 말을 하더니 허 참봉이 앞장서서 방을 나섰다. 그 사이에 춘보는 촛불을 준비하여 집 뒤의 사당(祠堂)으로 가는 것이었다. 사당으로 들어선 허 참봉이 사대(四代) 조상의 위패 앞에 선절을 한 다음 손수 위패를 치우더니 춘보에게 제단의 판자를 들라고 하였다. 판자 밑에 촛불이 비치자 송윤호는 기절할 듯 놀랐다. 겉으로는 위패를 모신 제단이 건만 밑에는 명주와 무명이 가득 차 있었다. 본래대로 판자를 덮은 춘보가 허참봉과 사당 밖으로 나가니    송윤호는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사당 뒤 산 밑으로 가더니 나뭇단을 들어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판자문을 당기니 검은 동굴이 나타났다. 춘보가 재빨리 촛불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 굴속을 비추는데 얼핏 봐도 곡식 섬인데 굴안이 가득하였다. 허참봉이 돌아서서 사랑으로 향하였다. 사랑에 마주 앉은 송윤호는 귀신에 홀린 듯 말이 없고 허참봉도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장죽에 담배를 재워 묵묵히 연기만 피워 올리던 허참봉이 입을 열었다.

"내가 언젠가 부자가 왜 부자인지를 말한 적이 있을 걸세. 내 조부 되시는 분이 저 토굴을 춘보의 애비가 젊었을 적에 파게 하셨다네. 이 굴을 아는 사람은 다 저세상으로 가고 이젠 나와 춘보 말고는 없네. 막개나 거칠이도 모르지, 조부 적부터 3백 석을 비축을 해 오는데 해마다 추수철이면 새 곡식으로 바꿔주네. 매년 가을이면 춘보가 혼자 하는 일이지. 자네는 지난번에 내가 백 석을 난민에게 털어주니 걱정을 했을 것이나 부자가 그만한 것은 베풀어야 부자일세. 부자란 다 뺏긴 듯해도 남아 있는 게 있는 사람이 부자라고 말했지? 하고, 내가 곡식을 난민에게 주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들이 있을 터인데 그때는 송상이고 볏 섬이고가 있겠나? 백 석을 줘도 양심이 있어 서른 석을 남겨두고 가는 그들을 보게. 이제는 알겠는가? 세상 살아가는 이치를 말일세."

송윤호로서는 도무지 알 수없는 장인이었다. 온다던 날을 이틀을 넘겨 들이닥친 송상이 삼백 석 볏섬과 이백 여필의 무명을 보고 놀란 것은 당연하였다. 벼와 무명을 그들에게 넘기고 임치증(任置證)을 받았다. 행수가 임의로 처결하기에는 액수가 너무 큰 것이어서 한양에 나와있는 송상의 대행수(大行首)에게 가기로 한 것이다. 감쪽같이 본래대로 감춘 굴이지만 송상답게 조심하느라 굴을 지킬 몇 명을 남기고, 북어를 실은 말과 등짐을 진 상단이 송윤호와 허참봉과 함께 한양 길을 떠났다. 길을 걸으며 허참봉이 말하였다.

"윤근의 사주풀이에는 분명히 사위가 내 근심을 없앤다 했거늘, 사실 그동안 숨겨 놓은 벼 삼백 석을 자네가 무슨 재주로 옮기나 나 역시 하루하루 궁금하고도 걱정이더니 역시 윤근이요 역시 자네일세. 이렇듯 일순간에 해결이 나다니."

"아니? 제가 언제 삼백 석을 옮기겠다고 했나요? 백 석이랬지요."

"백 석을 옮길 재주가 있으면 삼백 석이라고 못 옮기겠는가? 내가 백 석을 난민들에게 내놓으려 한 것은 사위의 그런 재주를 윤근의 사주풀이에서 이미 알았기 때문일세."

"그럼 장인어른의 사주에 볏섬을 제가 옮긴다고 나왔었단 말씀입니까? 그때는 혼인 전이 아닙니까?"

"자네 이름은 없었지. 하나 분명히 사위되는 사람이 내 근심을 없앤다 했었네. 그러니 윤근의 말이 딱 맞았지. 자네가 내 사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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