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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소설 120

송원일 제 2장 꽃은 피고지고 2.떠나는 배

2. 떠나는 배 "이것들은 아직도 방구석에서 뒹굴고 있겠지?""그렇겠지. 안성에서 쫓긴 후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지 않은가?"    "그건 그래."춘길이와 덕만이는 째보 아범의 숯막에 닿자말자 거사들이 머무는 봉노로 다가가 방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나 잠을 자리라는 생각과 달리 거사들은 이마를 맞대고 무언가를 숙덕거리고 있었다. 더구나 새벽에 나갔다던 안 거사가 그들을 상대로 설득을 하고 있는 눈치였다. 거사들은 일제히 마루에 선 춘길이에게 눈길을 돌렸다. 춘길이는 방안으로 발을 디디자말자 버럭 고함을 질렀다. "한여름 소부랄 늘어지 듯 팔자가 한껏 늘어졌구나. 이놈들아 할 일이 없으면 밥값으루 쓰러진 울타리라도 손을 봐 줄 것이지 이렇게 마냥 쳐 자빠져 있단 말이냐?"한데, 평소였으면 죽은 듯 오금이..

오늘의 소설 2024.05.15

송원일 제 2장 꽃은 피고지고 1.언년이, 그리고...

제 2장, 꽃은 피고지고1. 언년이, 그리고...생강나무 꽃이 노오랗게 피어나고 연분홍 진달래가 산기슭을 곱게 수를 놓더니 기어이 봄은 오고야 말았다. 발아래엔 수 없이 많은 풀꽃들이 다투어 피고 함박 나뭇가지 끝엔 하루가 다르게 새잎이 돋았다. 봄 볕은 어디에나 비치고 있었다. 돌 틈 사이로 깽깽이 풀. 동의나물. 쥐오줌풀. 애기똥풀이 저마다 수줍은 얼굴을 살며시 들었다. 먼 산은 온통 연두 빛인데 한 무리 산도화(山桃花)의 분홍빛이 눈길을 끌고 귓가엔 뻐꾸기 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바람이 잠든 산골의 봄은 마냥 졸립기만 한데, 물소리는 옥으로 깎은 목탁을 두들기 듯 쉼 없이 영롱한 소리를 보태고 있었다. 하늘 끝까지 티끌 한 점 없는 봄날의 오후였다. 언년이는 바위에 앉아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고..

오늘의 소설 2024.05.15

송원일 제1장 유전(流轉) 11.흔적을 찾아서

11. 흔적을 찾아서송윤호는 이를 사려 물고 생각에 잠겼다. '살아 있는 것을 확인했으니 꼭 찾게 될 것이다. 하지만, 원일이가 저 강을 건너 간 것이 거의 반 년 전의 일이라니 지금 뒤를 따른데도 당장 만날 수는 없을 터이다. 흔적을 따라가려면 여러날, 아니, 어쩌면 여러 달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호구지책을 마련하며 해야 한다.'송윤호는 무일푼에 아무런 대책 없이 길을 떠났던 지난해를 생각했다. 길에서 굶어죽지 않은 것이 천행일 정도로 고생이 막심했던 것이다. 그리고 배가 고프면 구걸을 하느라 아까운 시간을 다 뺏겨야 하고 제대로 추적을 할 수도 없었다. 때로는 밥을 얻기 위해 인가를 찾아 헤매다 보면 엉뚱한 길로 들어설 때가 많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거칠이를 비..

오늘의 소설 2024.05.14

송원일 제1장 유전(流轉) 10.장삿길

10. 장삿길신유(辛酉) 년이 저물고 임술(壬戌1682) 년을 맞이하는 설날. 이번 설은 어느 해 설날 보다 혹독하게 매서운 추위가 닥쳤다. 오강엔 두꺼운 얼음이 얼고 삼개 나루 기슭의 까치집 보다 못한 움막들은 삭풍에 띠지붕이 날아간 곳도 많았다. 게다가 지난 동지 때부터 얼기 시작한 강이어서 뱃길이 끊긴 것도 그 무렵이라 배에서 내리는 등짐에 목을 매던 움막 사람들은 그 일마저 없으니 굶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굶어죽거나 얼어 죽을 지경에 이른 사람들은 한 줌의 곡식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자들은 살길을 찾아 동냥아치로 떠나거나 깍정이 패에 들기도 하고 때로는 도적질을 위해 뭉친 패도 있었다. 그럴 힘도 강단(剛斷)도 없는 사람들은 얼어붙은 강을 오가는 마소의 잔등에..

오늘의 소설 2024.05.13

송원일 제1장 유전(流轉) 9.절망 속의 희망

9. 절망 속의 희망"이놈 봐라?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 하구설랑.... 뭐? 안 하겠다?""아, 안 한다는 게 아니라, 그런 일을 내가 할 수 있으려나 하는 마음에....""이런 병신하고는.... 그 말이 그 말 아니냐? 너 오늘 죽어 봐라.""아, 그 게 아니라니까요. 에구."변명을 미쳐 꺼내기도 전에 수구리는 판덕이가 짚고 있던 지팡이부터 걷어차버렸다. 그러자 한 쪽 다리가 부실하던 판덕이는 단번에 한 쪽으로 철퍼덕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쓰러진 몸뚱이에 발길질이 시작되었다."에고고, 나 죽네. 아고 아고, 부 두령님, 하겠소, 하겠다고요.""이놈아, 맞을 때면 늘 하는 그 소리는 이제는 더 듣지 않겠다. 아예 네놈 명줄을 끊어 줄 테니 그동안 처먹은 밥값이라 생각하고 원망은 하지 마라.""부 두..

오늘의 소설 2024.05.13

송원일 제1장 유전(流轉) 8.스치는 만남

8. 스치는 만남현란한 색채를 뽐내던 단풍도 한차례의 서리에 빛을 잃더니 곧바로 겨울의 문턱으로 접어들었다. 막힌 곳 없이 터진 강물 위로 찬바람이 마구 몰려드는 삼개나루는 그래서 더욱 추웠다. 고인 물에는 벌써 살얼음이 얼고 겨우살이 준비가 안된 사람들의 발걸음은 더욱 바빴다. 삼개에는 사람만 바쁜 것이 아니었다. 오강(五江)이 얼어붙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실어 나르려는 세곡선과 신탄선들은 더욱 분주하고 바빴다. 연평 바다에서 잡은 어물을 실은 배들 역시 수로가 막히기 전에 한 행비라도 더하려는 듯 줄을 이어 오르내렸다. 경강의 수로가 얼면 모든 어물은 재물포를 거쳐 육로로 날라야 하니 태가도 비싸려니와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루에는 많은 사람들이 새벽부터 어물 실은 배가 닿기..

오늘의 소설 2024.05.12

송원일 제1장 유전(流轉) 7.삼개 나루

7. 삼개 나루"의원님, 계시우? 의원님 계시면 제발 우리 손자 놈 좀 봐주시우."송윤호가 머무는 움막에 아이를 안은 노파가 찾아온 것은 거칠이가 아침밥을 하려고 막 옹기솥에 불을 지피고 있을 때였다. "여기가 용한 의원이 있다는 곳이 아니요? 의원님 계시우?"노파가 다시 한번 애절한 목소리로 거칠에게 물었다. 보름 전 새우젓 독에 머리를 다친 사공을 치료한 후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수많은 환자가 움막을 찾아왔었다. 그러나 송윤호는 의원이 아니라는 말로 그들을 모두 돌려보낼 뿐이었다. 그런데도 아침부터 또 의원을 찾으니 거칠은 난감했다. 그러나 거절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여긴 의원이 아니요. 의원을 가려면 조개우물(蛤井) 옆의 허의원을 찾아가시오."거절의 뜻으로 조개우물로 가기를 권하자 노파는 서글픔..

오늘의 소설 2024.05.12

송원일 제1장 유전(流轉) 6.황구만

6. 황구만추석이 지나고 얼마 후 추분(秋分)에 이르자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물 위에 떠있는 조그만 밤섬에도 가을의 입김이 불어와 새벽이면 물 안개가 자욱했다. 춘월이네 마당가에는 맨드라미 꽃이 피어 있었는데, 그 꽃들 역시 서리가 오기 전에 여름을 향한 마지막 단심(丹心)을 보여주려는 듯이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흡사 닭벼슬같이 생긴 붉은 그 꽃 위에 같은 색의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앉았다. 한번 앉은 잠자리는 햇살을 즐기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본 한 아이가 주춤주춤 잠자리에 다가가고 있었다. 아이는 벌거벗은 몸에 맨발이었고 걸음을 걷는 모양새나 크기로 볼 때 돌을 넘기고도 몇 달은 더 된 것 같았다. 아이가 제 딴엔 조심스레 꽃으로 다가가더니 잠자리를 덥썩 움켜잡았다...

오늘의 소설 2024.05.11

송원일 제1장 유전(流轉) 5.오일중

5. 오일중그날 밤이었다. 오일중과 노탁우가 마주 앉았다. "분부하신 데로 일을 마쳤습니다."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돌아온 사람답게 노탁우의 우둥퉁한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다. 반면 오일중은 시종이 여의하게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몇이나 되던가?""남자 열하나에 여자 넷이 었습지요." "천수는 확인했는가?""놈들을 베기 전에 천수가 맞는지 확인을 했습니다.""음, 밝은 대낮에 기습을 하리란 생각은 못했을 테니 일이 쉬웠겠군.""그러하옵니다. 배에서 내리자 말자 득달 같이 움막을 치고 들어가 베어 재끼니, 달아나고말고 할 사이도 없었습지요. 천수는 낮잠을 자다가 죽었고 부두령이란 곰보는 술을 마시는 놈을 베어 죽였습니다. 나머지 졸개들은 줄줄이 끌어내 천수와 곰보를 확인 시킨 뒤 찔러서 두엄 구덩이에 밀어 넣..

오늘의 소설 2024.05.11

송원일 제1장 유전(流轉) 4.박일주

4. 박일주 오일중이 애초에 끈 떨어진 포교들을 불러 모았던 것은 그들의 딱한 사정을 조금이라도 도와주려는 의도였다. 자신 역시 수년간을 포도청 포교로 지내봐서 그들의 배고픔과 고충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본래 포도청의 포교란 종사관 바로 밑의 종 6품인 포도부장을 일컷는 말이었다. 그러나 막상 포도청에    몸담고 있는 그들은 포도부장과는 별개로 겸록부장(兼祿部長)이나 무료부장(無料部將)을 포교라 통칭했다. 그런데 매달 녹미(祿米)가 얼마씩이라도 나오는 겸록부장과는 달리 무료부장은 실상은 품계도 녹미도 없었다. 본래 포교란 게 보기엔 그럴듯해서 붉은 술 달린 전립을 보란 듯이 쓰고 붉으죽죽한 허리끈과 오랏줄을 척 차고 나서면 죄 없는 사람도 찔끔하게 마련이라 제법 위엄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

오늘의 소설 2024.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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