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설

송원일 서장(序章) 8.사헌부

fiction-google 2024. 5. 8.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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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사헌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무오(戊午1678) , 승문원의 판교(判校)이던 정 3품의 황우진이 정2품 예조판서로 승품(陞品) 되어갈 적에, 문장 좋고 활달한 송윤호도 예조로 데리고 갔는데, 그때 송윤호의 품계도 올라 정 6품의 좌랑(佐郞)이 되었다. 예조에서 송윤호가 새로 맡아보게 된 일은 주로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과거시험이라는 것이 예조에서 독단으로 행하는 것이 아닌 만큼, 승지(承旨)들을 통해 왕명을 받는 것에서부터 육조(六曹)의 관원들은 물론이요, 심지어, 길일(吉日)을 가리기 위해 관상감의 관원들까지 두루 만나고 다녀야 하였다. 그러다 보니    송윤호의 서글서글한 성격이 사람들 사이에 알려져 육조에서부터, 홍문관, 예문관, 승문원 할 것 없이 가까이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해에는 형인 송수호도 벼슬이 정 5품의 지평(持平)으로 올랐는데, 감찰에서 지평이 되기까지 9년이 걸린 것이다. 그동안 벼슬이 오르지 못한 것은 사실, 송수호의 성품과 처세 탓도 있었다. 예나 제나 승진을 하려면 상관에게 적당히 아첨도 하고 뇌물도 먹여야 하건만, 송수호는 반대였다. 남과 타협을 모르는 곧이 곧 대로의 성품에다, 아첨을 모르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니, 권모술수와 검은 거래로 한 세상을 살아가는 높으신 분들에게는, 송수호는 같은 편에게조차 어쩌면 위험인물이었던 것이다. 벼슬이 높아질수록 뇌물 먹기를 좋아해서, 논이든 밭이든, 엽전이던, 남의 것을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고 보는 그들을, 이슬과 오동나무 열매만 먹고 산다는 송수호란 놈이 자신의 뒷조사를 하고 다닌다면 곤란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송수호는 집이 찢어지게 가난 함에도 자신을 위해 땡전 한 푼 거두는 법이 없었다. 그만큼 송수호의 청렴은 이미 삼사(三司)에 널리 알려진 일이라, 그를 가까이 두어 알뜰히 챙겨 줄 윗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청환직으로 이름 높은 사헌부에서도 그러할진대 다른 부서의 관원들이 보는 송수호는 오죽했겠는가? 게다가 사헌부의 최고 수장인 대사헌이 남인의 대표로 꼽히는 윤휴(尹鑴)였으니 긴 말이 필요 없을 터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높으신 분들이 볼 때, 송수호의 좋은 점도 있었기에 이때까지 감찰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헌부의 귀감이 되고도 남을 그의 깨끗한 성품과 치밀한 일솜씨였다. 누구를 시켜봐도 송수호만큼 깨끗히 일을 마무리하는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뿐만아니라, 일을 할 때는 냉정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다정해서, 그가 하는 언동은 모두 진실되다는 것을 아래 윗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송수호의 밑에서 일하는 부하들은 한결같이 그를 믿고 따랐다.

송수호의 인간 됨과 능력을 제대로 본 사람은 따로 있었다. 지난 몇 년간 같이 일해 본 집의(執義) 이헌조였다. 사실은, 이 사람도 송수호와 다를 바가 없는 인물이었다. 이헌조는 정 4품인 장령(掌令) 직을 7년이나 한 인물로, 고지식하기가 송곳 같아서 임금이 임명한 관원을 사헌부 내에서 동의 여부를 결정할 때 혼자서 세 번이나 부표(否票)를 던진 인물이었다. 뒷조사를 하여 본 결과 부적절한 인물이라는 게 이유였다. 그렇다고 임금이 직접 뽑은 관원을 세 번 씩이나 반대를 하니 품계가 오를리가 만무였던 것이다. 이헌조가 사헌부의 관원이 아니고 다른 부의 관원이었다면 임금의 미움을 받아, 백 번도 더 파직에다 귀양을 갔을 테지만, 관원의 자격을 심사하는 것이 그의 직분이니 어찌하겠는가? 이러한 이헌조가 이번에 품계가 오른 것이다. 이헌조의 위로는 대사헌이 있고, 아래로는 두 명의 장령과 두 명의 지평, 그리고, 여러 명의 감찰이 있지만, 대사헌은 사헌부의 수장이라는 명색뿐이고, 사헌부의 모든 일은 집의인 그가 실질적인 책임자였다. 송수호가 이제서야 제대로 된 윗사람을 만난 것이다.

정월 중순이라 아직은 몹시 추운 날, 송수호가 등청하여보니 모든 이속(吏屬) 들과 소유(所由)들이 나와 눈을 쓸고 있었다. 평소라면 군졸 몇이서 종일하던 일을 수십 명이 북새통을 이루니 의아하여 누구에게 물으려는데 저쪽에서 한복만이 성큼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대장님, 안녕하시옵니까?"

대장(臺長)이란 본래 사헌부의 장령과 지평을 이르는 별칭(別稱)이나, 송수호가 지평이 되자 한복만은 자신들을 이끄는 대장(隊長)이라는 의미도 포함해서 말한 것이다.

"무슨 일이 있는가? 왜 이리 난리들인가?"

"!, 나으리께선 아직 모르시겠군요. 대사헌 대감이 갈렸다 하옵니다. 윤 대감이 가시고, 오늘 새 대헌(大憲)이 오신다고 하더이다."

"그게 무슨 소린가? 하룻밤 사이에 수장이 바뀌다니?"

"소인으로서는 알 수 없습죠. 얼른 다시청(茶時廳)으로 가 보시지요."

", 알았네. 이거야 원."

다시청이란 간담회를 하거나 쉬는 곳이기도 하지만, 본 회의를 하기 전에 안건을 미리 의론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장령 김동화와 어순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들어서는 송수호를 보더니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시게. 송지평."

"왔는가. 소식은 들었겠지?"

송수호는 우선 두 사람에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하였다. 장령은 정 4품으로 송수호의 윗 품계이니 상하의 구별이 엄하기로 소문난 사헌부에서는 위계질서에 따라 반드시 예로써 상관을 마주하고 행동을 해야 했다.

"두 분 나으리 안녕하신지요?"

"대헌이 갈린단 소리를 자네도 들었는가?"

김동화가 성급히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다시 물었다.

", . 방금 밖에서 들었습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요?'

"영문이고 뭐고가 없네. 대헌 대감은 우찬성(右贊成)으로 가시고 오늘 새로 이조에서 참판(參判)으로 계시던 분이 오신다네."

"이조 참판이라면.... 배호(裵鎬) 대감이시겠군요. 영상 대감의 추천이 있었던 게지요? 한데, 하룻밤 사이에 인사가 이루어지다니 별일입니다."

"하룻밤 사이가 아닐세. 승지(承旨)로 있는 친구에게 들으니 며칠 전에 벌써 상감께서 작정하신 일이라더군. 물론 영상과 대사간이 뒤에서 밀었겠지만..."

어순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지평 허묵이었다. 그는 송수호와 같은 품계이나 지평이 된 것은 일 년 전이라 송수호보다 선임이었다. 그런데, 대과에 급제한 것은 송수호보다 삼 년이 늦으니 어찌 보면 후임인데 이는 허묵이 영상의 종질(從姪)인지라 승진이 송수호보다 빠른 탓이었다. 허묵이 어순재와 김동화를 향해 깊이 머리와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두 사람이 건성으로 인사를 받는 듯 마는 듯하다가 그 중에 김동화가 허묵에게 한마디 하였다.

"소문을 들으니 자네 육촌 형은 요즘 바빠서 영일(寧日)이 없다더군. 허허."

"....송구한 말씀이오나, 육촌이란 당치 않는 말씀인 줄로 아옵니다."

"거 무슨 소리인가? 허견이 자네의 육촌이 아니면 오촌 당숙이란 말인가?"

"적서(嫡庶)의 구별이 엄연한 터에..."

"허견과 사사로이 만나서도 적서를 따졌는가? 내가 볼 때는 허 씨 문중에서도 견을 서자로 취급하지 않는 걸로 보이네. 그러니 그 자가 장안을 휩쓸고 다니며 갖은 야료를 부리는 것 아니겠나?"

"이제 곧 영상이신 당숙께서 무슨 조치를 하시겠습지요. 명색이 사헌부 관원인 저야 견을 두남둘 일을 하겠습니까? "

"당연한 소리일세. 그 자를 두남두고서야 어찌 사헌부의 관원이길 바라겠나? 이제부터는 허견의 악행을 자네가 밝혀내야 할 터인데."

"? , 제가 말씀이옵니까?"

허견이 남의 재물을 뺏거나 남의 계집을 후리고 다니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만큼, 허묵에게는 창피스러운 일이라, 죽어도 육촌형제로 인정을 하고 싶지 않은 노릇이었다. 그런데도 장령 김동화가 자신에게 허견의 비리와 악행을 캐라고 하니 놀랄밖에 없는 것이다. 놀라서 눈이 동그래지는 허묵이 딱했던지 옆에 있던 어순재가 김동화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허허, 이 사람, , 허지평 놀라는 것 좀 보게나. 자네의 농이 정말인 줄 알고 있지 않나?"

"그러게나 말일세. 나는 저 사람이 농과 진담 정도는 가릴 줄 알았지, 허 씨 집안에 저렇 듯 순진한 사람이 있는 줄 오늘에사 알았네그려. 허허허."

김동화의 말이 칭찬인지 욕인지 비꼬는 것인지, 아니면 세 가지다 일 것이나 허묵은 다만 농이었다는 말에, 비로소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이때, 문이 열리더니 집의 이헌조가 등청을 하였다. 모두들 서둘러 옷깃을 여미고 손을 모아 이헌조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는 어순재가 한발 앞으로 나와 모두를 대신하여 인사를 하였다.

"영감, 나오셨습니까."

이헌조는 네 사람을 다시 한 번 보더니 빙긋 웃으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의 표정으로 보아 대사헌이 갈린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모두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하더니 입을 여는 것이다.

"나만 알고 있는 줄 알았더니, 다들 알고 있는 게로구먼. 지금 궐()에서 상감마마를 뵙고 오는 길이네. 자세한 얘기는 차차하기로 하고 우선 새로 대헌으로 오시는 배호 대감을 맞아 허지평 자네가 제좌청(齊座廳)에다 자리를 마련하라 이르게. 송지평은 감찰들이 다 등청을 하였는지 살펴서 그들도 참석케 하고, 김장령은 서리(書吏)들을 다그쳐 장부를 챙기도록 하게. , 어장령은 나 좀 보세."

이헌조의 지시에 네 사람은 맡은 곳으로 향하였다. 송수호도 감찰들이 모여있는 사경실(査鏡室)로 걸음을 옮겼다. 많은 사람들이 비질을 한지라 마당의 눈은 거의 다 치워지고 있었다. 한복만이 빗자루를 든 채 재빨리 다가왔다.

"나으리, 대헌으로 오시는 분이 누구라 하더이까?"

", 이조참판 하시던 분이 오신다더군."

"? 이조참판 배호 대감 말씀입니까? , 하필이면 그분이 오실까요?"

", 그분이 오시면 안 될 일이라도 있나?"

"그런 건 아니지만... , 나리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지난해 그분의 자제 혼사 말입니다. 그때 일로 사람들 사이에선 평판이 좋지 않습지요."

"그만하게. 그 일이라면 나도 알고 있네. 내가 아는 일을 윗 분들이라고 모르시겠나? 헌데도 사헌부의 대헌으로 오신다면, 그 일은 흠이 되지 않음일세. 차후로 말을 삼가게."

", 나으리, 명심 합지요."

지난해의 일이다. 이조참판 배호에게는 바보 아들이 있었다. 바보도 그런 바보가 없어서 밥도 제 손으로 먹을 줄 모르고 똥오줌도 가릴 줄 모르는 천치였다. 그런 바보 아들이라도, 스무 살을 넘기자 부모 된 마음에, 혼인을 시켜 손자라도 보았으면 하는 욕심이 생겼다. 그러나 욕심뿐이지 누가 그런 바보에게 반가(班家)의 귀한 딸을 주려는 부모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내로라하는 양반 가문에, 기생이나 천출 소생을 며느리로 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마음만 더욱 초조할 뿐인데, 어느 날 매파(媒婆)가 명색이 양반 집안이라는 처녀를 물색해 온 것이다. 고려적 신숭겸의 후손에서 갈라진 산평 신씨(申氏), 인물도 예쁜 열일곱 처녀이나 다만, 가난하기 짝이 없는 집안의 여식이라 하였다. 양반이냐 아니냐가 문제이지 가난이 무슨 문제가 될 것인가? 어찌나 반가운지 그날로 사람을 보내어 처녀의 아비를 불렀다. 불려 온 처녀의 아비는 매파의 말보다 더욱 가난했던지 궁상이 극에 달하였다. 양테가 찌그러진 갓과, 좀이 먹어 올이 풀어진 망건과, 몇 대를 내려 물려 입었는지 수십 군데를 기워 입은 도포를 보니 눈물겨운 바가 있었다.    어쨌거나 처녀의 아비와 말을 하여 본 즉, 신랑 될 사람이 약간 모자라는 줄만 알았지 똥 오줌도 가리지 못하는 바보인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솔직하고 정직한 중매쟁이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아들의 상태를 매파가 있는 대로 말하지 않은 걸 아는 배호도 굳이 털어놓을 이유가 없어, 어물어물 넘기며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녀의 아비인 신유학(申儒學)의 몰골을 본 배호가 먼저, 딸을 주기만 하면 논밭을 뚝 떼어주겠다는 약조로 선수를 치고 나선 것이다. 신유학은 한마디로 낙백한 가문의, 낙백한 선비로, 딸을 팔아 생계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나, 차마 한 재산 달라는 소리는 못하고 미관 말직이나마 아들의 벼슬을 원했다. 배 참판으로서야, 마다할 이유가 없는 일이라, 논밭에 벼슬까지 얹어 흥정이 되었다. 그런데, 일이 너무 쉽게 풀려서일까? 곧바로 날을 잡아 혼례를 치른 것까지는 좋으나, 혼인한 이튿날, 새색시가 말코지에 치마끈으로 목을 매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시집을 왔다가, 신랑을 보는 순간, 아비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앞으로의 세상살이가 고될 것을 미리 느꼈기 때문일까, 하여튼, 알 수없는 절망과 배신감이 그녀를 죽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배호의 바보 아들 혼사는 그렇게 어이없는 비극으로 끝을 맺었지만, 한동안 괜한 욕심이 아까운 한 목숨을 죽였다고 이웃에서 말들이 많았다. 처자의 죽음으로 배대감도 난감했지만 막상 진짜로 낭패를 본 사람은 처자의 아비인 신유학이었다. 참판 댁과 사돈을 맺은 데다, 이제 곧, 지긋지긋한 가난도 물러갈 터, 바야흐로 목에서 어깨로 스멀스멀 힘이 들어가려는 순간에, 딸이 죽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발 밑이 와르르 무너지는 꼴을 당한 것이다. 게다가, 병이 나서 죽은 것도 아니고 자살이라, 오히려 배 대감 볼 낯이 없는데 어찌 아들의 벼슬까지 바랄 수 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배 대감 쪽에서 먼저, 장례는 치루어 주되 그 이외의 일은 없던 것으로 한다는 말을 전해왔다. 게 잡으려다 게도 구럭도 다 잃은 신유학이, 곯은 배에 창피까지 더하여,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였다. 그러나, 멀리 외가에서 공부하던 아들에게 유서를 남겨놓고 죽어서, 아들인 신일규는 불쌍한 여동생이 왜 죽었는지도 알았고 그런 바보에게 딸을 주려 한 아비의 심정도 알았다. 논이니 밭이니 잘난 벼슬을 미끼로 멀쩡한 반가의 규수를, 그따위 바보 천치와 짝을 지우려 한 배 참판을 그는 용서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배 참판의 몰염치한 욕심이 아비와 동생을 죽인 것이다.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지만 아비가 죽은 후라도 약속을 지켰다면 모르되, 논밭은커녕, 동생이 죽자말자 약조했던 벼슬마저 취소한 것도 괘씸해서, 그때부터, 신일규는 배호에게 이빨을 빠드득 갈았다.

송수호가 사경실의 문을 열자 십여 명의 감찰이 모두 일어나 인사를 건네었다. 마주 답례를 하는 송수호의 앞으로 박일주가 한걸음 다가왔다.

"나으리 어쩐 걸음이신지요? "

", 대사헌 대감이 새로 오시는 것은 다들 알 터이니, 모두들 제좌청에 모이도록 하게. 허고, 모두들 모인 김에 한마디 하겠는데, 각자 지금 맡고 있는 일은 잠시 중단하고 새로운 지시를 기다려야 할 것이야. 어차피 수장이 바뀌면 일이 향하는 곳도 달라질 테니까. 집의 영감의 지시를 새로 받아, 오늘 내로 다시 알려줄 터이니 그리들 알게."

돌아서 나오는 송수호의 뒤를 박일주가 따라왔다. 한복만이 밖에서 기다리다가 박일주의 뒤에 붙으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곽정일이 송수호에게 인사를 올리더니 또한 뒤를 따랐다.

"왜들 따라오는가? 내게 할 말이라도 있다는 겐가? "

송수호가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 돌아서 걸음을 멈추었건만 모두들 입을 떼지 않았다. 일행을 한 번 둘러 본 송수호가 다시 발길을 돌리려는데 저쪽에서 덕출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무슨 작정들을 했나 보군. 덕출이까지 모인 것을 보니..."

", , 나으리. 작정까지는 아니옵고 덕출이가 나으리께 부탁을 하려는데 입이 열리지 않는다고 하기에 저희들이 나선 길입지요."

그제서야 박일주가 일행을 대신하여 나서는 것이다. 무슨 일이냐는 듯 송수호는 둘러선 면면을 살펴보았다.

"덕출이가? 그래, 무슨 일로 부탁을 하려는 것인가? 들어나 보고 나서 결정하기로 하지. 좋네. 일주 자네가 대신 말해보게나."

", 다름 아니오라, 덕출이도 소유로 박혀서 저희들과 같이 일을 하고 싶다 합니다. 덕출이는 워낙이 붓보다 칼을 좋아하는 줄은 나으리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거야 나도 잘 아는 바이지만, 저 사람들을 보게. 저 사람들은 서리(書吏)가 되고 싶어도 글이 짧아 되지 못하는데, 덕출이 자네는 편한 자리를 버리고 험한 자리로 가고 싶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진정으로 소유가 되고 싶은가?"

쌓였던 눈을 다 쓸고 웅기중기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여러 명의 소유들을 가리키며 잘 못 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가 묻건만, 우직한 생김새와 달리 감성적인 성격의 덕출이가 입술만 깨물고 말이 없자 송수호는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청으로 향하였다. 다시청 앞에 이른 송수호가 네 사람을 잠시 기다리게 한 후에,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오래지 않아 다시 나왔다. 네 사람은 재빨리 송수호의 주위에 모이더니 박일주가 모두를 대신하여 묻는 것이다.

"나리, 어찌 되었는지요? 집의 영감님께서 허락하시더이까? "

"말씀은 드렸네만, 모두들 일신이 편한 곳으로 가려고 아등바등하는 세상에, 참으로 별종이라 하시더군. 허허."

", 덕출이 소원대로 되었군. 한데 이것도 감축한다고 해야 하나 모르겠네그려."

곽정일이 덕출이의 어깨를 치며 기뻐하였다. 둘은 철원과 김화의 유랑민일 때부터 생사를 같이한 사이였기에 남보다 끈끈한 우정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박 감찰 자네가 이 세 사람을 보살피고 아껴서 조심히 행동하도록 다독이게. 복만이, 정일이, 덕출이는 박 감찰을 형처럼 믿고 따르도록 하고. 알았는가?"

새로 대사헌이 된 배호는 남인 중에서도 청남(淸南)에 속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점으로 보면 탁남(濁南)인 허적의 천거(薦擧)를 받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청남이란, 정치를 개혁하자는 파인데, 쉽게 말하면, 자의 대비의 복제(服制) 문제로 삼년 전에 귀양을 간 송시열을 죽이자는 쪽을 말함이다. 반대로, 허적이 속한 탁남이란, 일부러 죽일 것까지야 있느냐 하는 쪽이라 청남과는 뜻이 달랐다. 같은 청남인 윤휴가 앉았던 대사헌 자리를 그대로 물려받은 배호는 탁남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청남의 세력을 넓히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왕의 신임을 받을만한 일을 해야 했으니, 그가 노리고 있는 사람은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은 효종과 현종, 그리고 금상인 숙종까지, 삼대에 걸쳐 주자학(朱子學)으로 괴롭혀 온 주자의 귀신이었다. 임금도 지긋지긋해 하는 송시열을 어떻게든 죽여 없앨 꼬투리를 잡기 위해, 송시열의 배소인 경상도 장기(長鬐)에 사람을 보내 동태를 파악하고 언행을 조사하라고 이헌조에게 일렀다. 이헌조는 송시열과 같은 서인이긴 하나, 송시열은 산당(山黨)이요, 이헌조는 대대로 도성 안에 사는 한당(漢黨)이라 배호의 지시를 선선히 따라, 장령 김동화에게 조사를 맡기었다. 그 무렵, 송수호는 숙안 공주의 아들인 홍치상의 뒤를 캐고 있었는데, 이는, 황해도 부자의 논을 공갈로 뺏었다는 고변이 있어서였다. 집의 이헌조의 지시를 받은 송수호는 다시 감찰인 박일주에게 황해도로 가서 조사할 것을 지시하였다.

해주는 감영(監營)이 있는 대처(大處), 황해도에서는 가장 백성이 많고 부자가 많았다. 해주의 부자들은 선단(船團)을 거느린 선주와 농토를 가진 지주(地主)로 나뉘는데, 모두들 옛날부터 상리에 밝기로 이름이 났었다. 태곳적부터 있는 커다란 항구에는 사시사철 수백 척의 크고 작은 고깃배가 가득하고 해창(海倉)에는 조운선이 쉴 새 없이 들락거렸다. 특히, 강령 앞바다와 연평도에서 잡히는 조기는 조선팔도가 알아주는 특산이라, 해마다 조기가 나는 철이면, 산처럼 쌓인 조기에 소금을 뿌려 굴비로 엮느라 선창은 개미 소굴 처럼 북적 거렸다. 이때를 맞추어, 송상과 경상, 유상이 임시 객점을 열고 수백 명의 상단 일꾼들을 부려, 마소에 짐바리를 싣고 내리니, 그 소란스러움은 한마디로 북새통이란 말 자체였다. 게다가 상단끼리 서로 굴비를 독점하려고 싸움질까지 할라치면, 선창은 조기철이 끝날 때까지 말 그대로 전쟁터요, 난장판이었다. 그러나 조기철이 아닌 평소에도 해주는, 재령, 사리원을 거쳐 평양으로 가는 길못이라 오가는 길손이 많았다. 거기다가, 해주는 쌀이 많이 나는 고장이었다. 해주에서 벽성까지 백여 리에 이르는 너른 벌판은, 벌판 전체가 뻘밭을 메워 만든 논인데,    논을 만드느라 사방에서 삯일꾼들까지 꾀어들었다. 이곳은, 다른 지방의 논 만드는 방법과는 사뭇 달라서,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덜한 곳이나 갈대로 뒤덮힌 얕은 뻘밭에 논둑을 쌓아, 어떻게든, 물길만 끌어대어 염분을 없애면 논이 되는 곳이었다. 그런 곳을 토호(土豪)나 세력 있는 집안이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이미 고려적부터 해오던 이곳의 논 만들기가 임진, 병자년의 난리와 수십 년의 기근으로 주춤하다가 이즈음 다시 불이 붙어서, 왕가의 세력 있는 자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눈독만 들일 뿐이지 실제로 자신의 재력이나 하인을 풀어 논을 만드는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보다 세도가 약한 부자나 양반이 논을 만들었다는 소리가 들리면, 슬그머니 사람을 보내어 공갈을 치거나, 무슨 구실을 붙여서라도 그들 스스로 논을 바치게끔 만드는 재주를 부리는 것이었다. 해주 감영에서 십여 리 떨어진 선녀골에 사는 조부자가 숙안 공주의 아들인 홍치상에게 그렇게 당한 사람이었다. 조부자는 본래 배천(白川) 사람으로 그곳이 관향이었다. 아비였던 조진사의 아비가 배천에서 형제들과 분가하여 터를 잡은 곳이 해주라, 조부자도 해주에서 태어나 그 또한 진사가 되었다. 조부자의 아비는 생전에 개펄을 일구어 논 만들기를 게을리하지 않아서 오백석 지기는 하였는데, 아비가 죽자, 아들 조부자가 이어받아 논을 일구니, 이십여 년 후에는 천 석 부자란 소문이 났었다. 조부자는 경신 대기근 이후에는 더욱 논 만들기에 공을 들여서 십여 결()의 논을 새로 만들었다. 한 결에서 30여 석이 나오는 상등전(上等田) 삼백 석 논이었다. 이 논을 만들기 위해 몇 년 동안 퍼부운 무명과 쌀도 쌀이지만, 조부자가 들인 공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논은 물이 있어야 논의 구실을 하는 것이라, 집과 논을 수백 번을 오가며 물길을 찾았고, 그 물길을 논으로 돌리는데 숱한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 놓은 논을 제대로 한번 소출도 내어 보지 못하고 홍치상에게 뺏긴 것은 지난해 가을이었다. 어찌 알았는지 조부자가 논을 새로 만든 것을 안 홍치상이 해주로 사람을 보내었다. 해주에 온 놈은 홍치상네 청지기인데, 글 줄이나마 읽은 서얼 출신의 겉이 멀끔한 외입장이 건달이었다. 본래 대감집 하인은 작은 대감 노릇을 하려 하고, 대감집 개새끼는 개호주라는 스라소니도 무서워하지 않는 법이라, 건달 청지기 박달수(朴達秀) 역시, 제가 홍치상인 양 세도가 당당하고 거만하였다. 이놈은 제 주제를 일찍 알아서, 서얼이 행세하지 못하는 세상인 것을 한탄하기 전에, 권력에 붙어 일신을 편히 지낼 방도를 재빨리 찾았던 것이다. 홍치상 네 청지기가 된다는 것은 어설픈 벼슬아치보다 훨씬 나은 장사였다. 벼슬이 없어도 세도를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재물이 많은 사람이나 벼슬을 사려는 사람, 예쁜 처녀나 쓸만한 과부가 있는 집을 알아내어 일러바치면, 홍치상은 참는 법이 없는 인물이라 반드시 그것을 뺏어야 직성이 풀리었다. 그러면 그 심부름 또한 박달수 자신에게 맡겨지기 마련이라, 부자에게 공갈과 겁을 주어 뺏은 재물 가운데, 몰래 자기 몫은 떼고 올려 보내면 끝이었다. 때로는 인물 좋은 처녀나 과부도 한양으로 올려 보내기 전에, 제 몫을 챙길 때가 많으니 더욱 좋았던 것이다. 이런 청지기를 몇 년만 더 하면 늙어 죽을 때까지 부가옹으로 편히 지낼 재물을 모을 수 있을 것이었다. 건달 청지기 박달수가 해주로 내려와 염탐꾼 졸개 몇 놈을 풀어 조부자의 약점을 캐기 시작하였다. 이틀도 되기 전에 졸개들이 쓸만한 정보를 물어왔는데, 그것은 조부자에게 첩실(妾室)이 있다는 것이었다. 기생 출신의 첩실은 해주 읍치(邑治)에 따로 사는데 나이는 스물일곱으로 인물이 반반하기로 소문이 짜하였다. 이를 안 박달수가 조부자의 첩실인 소홍에게 하인을 시켜 인삼 두 뿌리를 선사품으로 보내었다. 조진사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 보내는 것이라는 말과 함께였다. 소홍이는 조부자가 오면 주리라 하고 받았는데, 얼마가 지나도 조부자가 콧배기도 보이지 않자, 섭섭하고 괘씸한 생각이들어 인삼을 냉큼 자신이 먹고 말았다. 사실 조부자는 애타게 첩실을 찾을 나이도 지난 데다, 첩실을 둔 것이 들통이나고 부터 본처에게 꼼짝을 못하고 잡혀 있었다. 소홍에게 다음에 온 선사품은 사슴포(鹿脯)와 송도의 유명한 아락주였다. 아락주는 소주(燒酒)인데, 몽골족이 개경으로 쳐들어 왔을 때 그들이 처음 만든 증류주로 그 후 송도의 명주가 되었다. 기생 출신이 아락주 맛을 모르랴? 생각할 것도 없이, 외롭고 적적한 밤에 홀로 앉아 사슴포를 안주로 홀짝홀짝, 한 병을 다 마시고 말았다. 이 후에, 하루가 멀다 하고 들어온 선물의 물목을 보면, 곶감, 약과, 꿀떡, 인절미, 시루떡, 수수엿, 호박엿, 찹쌀엿, 생강엿, 솔송주, 매실주와 그 밖에 소소한 군것질거리와 각종 술과 육포였다. 그러더니 좀 더 통이 커져서 옥지환을 보내고 은비녀와 비단을 보내는 것이었다. 평소에도 워낙 군것질을 좋아하여 떡이니 곶감이니 엿은 들어오는 대로 야금야금 다 먹었지만 옥지환에 은비녀와 비단이 들어오자 약간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제까지 별 탈이 없었기에, 이것도 조부자에게는 말하지 않으면 그만이라, 슬쩍 뒤로 빼돌려 감추어 놓았다. 소홍은 나이 많은 늙은이의 첩실이 되어 하루하루가 심심하고 외롭던 차에,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들을 어쩌면 그렇게 잘 알고 보내는지, 날마다 아기자기한 선물이 들어오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비단이나 패물 같은 큰 선물도 이제는 배짱이 생겨서, 앞뒤 가릴 것 없이 들어오는 대로 팔아서, 좋은 옷도 해 입고 보니, 그것 또한,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신명 나는 나날이었다. 바로 이럴 즈음, 하인이 선물 고리짝을 가지고 또 나타났다. 그동안 낯이 익은 하인이라 마루에 걸터앉게 하는 한편, 보기도 전에 침부터 꼴깍 삼키며 고리짝을 열던 소홍이, 속에 있던 조그만 애기 옷을 집어 들고 눈이 똥그래져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고리짝 속에는 패물도 주전부리감도 없었다. 아무리 뒤져보아도 돌쟁이나 입을 옷뿐이요, 게다가 갑사(甲紗)에 금박 물린 애기 복건(幅巾)까지 있으니, 조부자에게 어린 손자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한 소홍이가 하인을 돌아보았다.

"아니? 이게 무어야? 이건 돌쟁이가 입을 애기 옷이잖아? 이걸 누가 입으라고 보냈담?"

곰방대에 막초를쟁여 넣고 있던 하인 놈이 당연하다는 듯이 히죽 웃었다.

"에이, 우리 나리께서 다 알고 보내신 것 올시다. 이달 스무 날이 이 댁 도련님의 돌날인 걸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요?"   

"도련님이라니? 우리 집에 애가 어디 있다고 도련님인가?"

", 그야 조 진사댁 아드님이니 도련님일 수밖에요? "

"별 소리를 다 듣겠네. 환갑 진갑 다 지난 늙은이에게 무슨 돌쟁이 아들이 있다는 말인가? 장가들 손자가 있다면 모를까... 쯧쯧."

"늙은이? 아니? 그럼, 이 댁이 지난봄에 한양서 이사 온 한양 조 씨, 조진사 댁이 아니었단 말인 갑쇼? "

"뭬야? 한양서 이사를 와? 본가가 선녀골이란 소리를 들었는데?"

"아이쿠, 이거 큰일 났군, 뭔가 탈이 나도 단단히 났구나. 이 댁이 정말 한양의 젊은 조진사댁이 아닌 것이 적실하다면 이 몸은 이제 죽었구나."

마루에서 벌떡 일어나 마당으로 내려온 놈이, 곰방대를 휘두르며 방방 뛰더니 제 상투를 쥐어뜯으며 대문 밖으로 쏜살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소홍이는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이 못내 깨으름직하여 앉지도 서지도 못하였다. 사람을 잘못 알아 물건이 잘못 전해진 것이 분명한데, 만약, 아니, 만약이 아니라 보나 마나 이제까지 받은 것을 모두 돌려 달라고 할 것인데, 다락에 감추어 둔 패물 두어 개와 은비녀 한 개만 남아있을 뿐, 모조리 먹고 마시고, 팔아서 옷을 해 입고 말았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소홍이 혼자서 고시랑 고시랑거릴 때, 밖이 수선스러웠다. 내다보니 아까 왔던 하인이 다른 하인 둘과 함께 마당을 건너오고, 하인 뒤에 갓을 쓴 멀끔한 양반 행색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마치 밖에서 기다린 듯 빨리 들이닥쳤건만, 그딴 걸 따져볼 정신이 없는 소홍이라, 낭패 한 표정으로 망연자실하여 마루에서 꼼짝을 못하였다.

"나으리, 이 집이올시다. 어찌할깝쇼?"

심부름하던 하인 놈이 앞에 나서니, 뒤에 서 있던 양반 짜리가 소홍이를 아래 위로 한참을 훑어보더니, 마음이 동() 했는지 점잖게 입을 떼는 것이다.

"어찌하다니? 몰라서 묻는 게냐? 잘못 온 물건이니 그대로 '내어주십사' 하여 가지고 돌아가면 그만이지, 잔말이 많으냐? "

"마님, 들으셨지요? 이 댁에 온 물건이 아니 오니 그만 내어주시면 좋겠습죠."

갑자기 울고 싶은 심정이 된 소홍이는 속대로 한다면 '다 먹어치우고 아무것도 없소' 하고 배짱을 부리고 싶으나, 마음뿐이지 입은 열리지를 않고,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도, 뒤에서 자신을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양반 짜리에게 눈이 가는 것이었다. 소홍이 입만 오물거리며 말을 못하다가 겨우 입 밖에 낸다는 소리가 기어들어가는 모깃소리였다.

"그것이.... 그것이...."

"나으리, 저 마님의 옷이 새 옷인 걸로 보아 아무래도 물목이 빌 것 같사오니, 물건을 처분한 곳을 알아내는 것이 빠르겠습니다. 어찌할깝쇼?"

"그리하도록 해라. 허고, 저년을 앞 세우면 처분한 곳을 지소할 것이니 데리고 가거라."

양반 갓에 소매 넓은 도포를 빼어 입은 가짜 양반 박달수가 손가락을 뻗어 부엌에서 고개만 빼죽 내민 어린 동자치 년을 가리키니, 하인 한 놈이 선 듯 다가가 아이의 손목을 냉큼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박달수만 남기고 우르르 대문 밖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박달수가 느릿느릿 댓돌에 올라서더니 마루에 엉덩이를 걸치었다. 소홍은 아까부터 그 자리에서 꼼짝을 못하고 서있다가, 박달수가 마루에 걸터앉자 그때야 정신이 나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여보시오, 보아하니 받은 물건이 많이 없어진 것 같소, 하지만, 사람을 잘못 알고 보낸 내 잘못도 있으니 여러 말 않겠소, 남은 물건이나 내어놓으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 좋을 거요."

남은 것만 돌려달라는 젊은 양반의 은근한 말에 뛰든 가슴이 그나마 진정되는 듯하여 안도의 한숨을 쉬던 소홍이, 숨겨놓은 패물을 가지러 안방으로 들어갔다. 소홍이 다락문을 열고 문턱에 한 발을 올려 서서 어두운 구석을 더듬는 중에, 인기척에 흠칫하여 돌아보니, 어느새 뒤따라 들어온 박달수가 뒤에서 더운 입김을 뿜으며 자신의 허리를 와락 껴안는 것이다. 소홍은 다락 문턱에 올라섰던 터라, 밑에 있던 박달수의 품에 난짝 안긴 꼴이 되어, 허공에 뜬 발을 바둥거리며 뿌리치 듯 박달수의 가슴을 밀쳐보지만, 사실 힘껏 미는 것도 아니어서, 박달수는 한 손으로 소홍의 허리를 휘감고, 한 손은 아래위를 느물느물 더듬으니, 연놈이 처음부터 죽이 잘 맞는 것이었다. 두 년놈이 무슨 짓을 어떻게 했는지는 더 이상은 안 보아서 모를 노릇이나, 그날 이 후, 소홍이는 박달수가 시키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던 하게 된 것만은 분명한 일이었다.

이틀 후의 일이다. 조부자는 아들이 둘인데 큰 아들은 조부자와 같이 선녀골에서 살았고, 작은 아들은 분가하여 해주읍에 살고 있었다. 그런 작은 아들 집으로 소홍이네 동자치가 무슨 봉투를 들고 왔다. 동자치가 내 미는 봉투를 열어보니, 영락없는 어음 쪽이었다. ()으로 길게 반이 잘린 종이쪽이 다시 옆으로 잘린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온전한 어음의 사분 지 일의 크기이나, 송상에서 발행한 은 삼백 량(銀三百兩)이란 글은 알아볼 만 하였다. 뜻하지 않은 거금의 어음 쪽에 아들놈이 화들짝 놀랐다. 이게 무슨 일인가? 어음의 반쪽은 송상에게 있을 터이니, 반쪽을 가진 아비의 첩실이 자신을 믿지 못하여, 반의 반쪽만 보이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쨌든, 액수가 워낙 거금이라, 놀란 조부자의 작은 아들, 조치우가, 이것이 웬 것이냐고 황급히 동자치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작은 서방님을 빨리 모셔오라고만 했다는 동자치의 말에 의관을 대강 챙겨서 부리나케 소홍의 집에 닿았다. (동자치의 뒤를 따랐다.) 부잣집 아들들이 으레히 그렇듯 조치우도 하는 일 없이 주야장천 기생집을 들락거리는 게 일이었다. 그러다 돈은 떨어지고 아비에게서 돈 나올 구멍은 보이지 않아 한숨만 나올 때, 아비의 첩이 어음 쪽을 갖고 있으니    이것은 보나 마나 소홍이가 자신의 아비에게서 알궈 낸 것일 터이라, 더욱 눈이 번쩍 뜨이던 것이다. 아비의 첩을 잘 구슬리면, 어찌 돈을 좀 얻어 쓸 기미가 보일까 하여 단숨에 달려와서, 어음의 소종래를 물었다. 그랬더니, 소홍은, 그런 건 묻지 말라며 어음의 다른 반쪽은 저녁때에 갖고 오기로 했으니, 어음을 은자로 바꿔다 주면 은자 백 냥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백 냥씩이나? 아이고, 이게 웬 횡재인가 싶은 조치우는 이것저것 따질 것도 없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는 기다리기 심심하다고 갖다 주는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며 몇 시각을 기다렸다. 술이 들어가자, 거추장스러운 갓과 도포를 벗어버리고 편히앉아 소홍을 상대로 본격적으로 마시는데 어스름한 저녁때쯤, 삐걱하고 대문 여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옆집 할멈이 왔는지, 큰 소리로 소홍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함께 앉아있던 소홍이가 새된 소리를 지르며 방문을 박차고 미친 듯이 튀어나가는 것이었다.

"사람 살려. 저놈, 저놈이... 저 몹쓸놈이..."

소홍이는 어느새 저고리를 풀어 헤치고 치마를 반쯤 걷어쥐고 있었다.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가운데, 옆집 할멈의 뒤에 있던 박달수가, 데리고 온 하인들을 호령하여 당장에 조치우를 잡아내었다. 술이 취해 마당으로 끌려나온 조치우는 의관도 없는 맨 상투에 하인 놈의 발길질에 입술이 터져 저고리 앞자락에 피가 흥건하였다. 이렇게 되고 보면, 박달수가 노린 것은 이미 성공한 것이다. 박달수는 한양에서 알던 조진사를 찾으려고 옆집 할멈에게 물으니, 이 집에 가서 물으면 안다고 하여 왔다가 소홍의 비명소리에 조치우를 엎친 것이고, 소홍이는 조치우가 말하는 어음이란 본 적이 없다고 딱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오히려 술을 마시고 와서 아비의 첩실을 덮치는 추잡한 수작을 부렸으니, 강상(綱常)을 어지럽힌 죄가 참수(斬首)로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 게 아니라고 조치우가 아무리 변명을 늘어놓아도 옆집 할멈을 비롯한 증인이 뚜렷한 것이다. 다음 순서로, 박달수는 왕실인 익평위(益平尉) 댁에서 나온 사람으로 이런 패덕과 삼강이 무너지는 꼴을 두고 볼 수 없다고 조부자를 위협하였다. 박달수란 놈이 영롱한 수완을 발휘하여, 당장에라도 한양 의금부로 파발을 띄울 듯, 해주 감영에 고할 듯, 만사를 무사타첩으로 해 줄 듯, 많이 해 본 솜씨를 보이니 어리석지 않은 조부자가 당장에 항복을 하였다. 놈들의 땅뺏기 놀음이 뻔한 마당에, 길게 뻗대다가 잘못하면 아들도 잡고, 배천 조씨 집안도 박살이 날 판이라, 어쩔 수없이 새로 만든 아까운 삼백 석짜리 논을 바치고 말았던 것이다.

송수호의 지시를 받은 박일주가 곽정일과 함께 해주로 내려와 조사를 한 결과가 바로, 조부자가 지난가을에 홍치상네 청지기에게 논을 뺏긴 사연이었다. 그러나 그 사연은 고변장(告變狀)에 불과한 것이어서 박일주는 조부자의 아들인 조치우와 직접 대면을 하려고 그의 집을 수소문하였다. 양반 복장의 박일주가 치부책을 든 서사 차림의 곽정일을 거느리고 조치우의 집을 찾으니, 그는 수척한 얼굴로 객을 맞이하였다. 사랑에 마주 앉아 사헌부의 관원임을 밝히고 서로 통성명을 한 후에 일이 벌어진 전말(顚末)을 들어보니, 소문대로, 어수룩한 소홍이나 조치우가 당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시생은 그 일이 있고 나서 폐인이 다 되었소이다. 어찌나 분하고 괘씸한지 잠을 깊이 자질 못하오이다. 문중에서는 패륜아로, 이웃에서는 광인 취급이니 어찌 살겠소이까. 그런데, 나를 이 꼴로 만든 박달수란 작자가 지금 해주 바닥에 또 내려왔다고 합디다. 이번엔 누굴 등쳐먹으려는지 몰라도, 내 이놈을 그냥... 아이구, 속 터져."   

"박달수가 해주에 있다는 말이 적실하오?"

"이 마당에 처한 내가 설마 거짓을 고하리까? 본가의 종놈이 어제, 생선을 사러 왔다가 포구에서 그놈을 봤다고 합디다. 부친을 찾아 들락거리던 그놈을, 종놈도 눈이 있는데 몰라보겠소이까? 종놈이 굳이 이곳에 들려 알려준 것이니 틀림없소이다."

"알았소. 우리가 간 다음에라도 행여, 우리를 만난 사실은 발설치 마시오. , 가친이 박달수에게 봉변을 당한 일은 아무도 모를 터인데, 사헌부에다 익명의 고변장을 올린 사람은 도대체 누구요?"

"사실, 의금부나 사헌부에 고발을 하고 싶은 사람은 바로 시생이었지요. 허나 뒤에 올 보복이 겁이 나 못 했는데, 친구인 이선달이 시생의 억울함을 알고 고변을 대신하였다고 하더이다."

"해주 바닥에 이미 조부자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디다. 술은 가리지 않되 친구는 가려서 사귀라 하였소. 배천 조문(趙門)이라면 나름대로 명문인데, 조진사의 자제로써 자중하시오. 이만 가오."     

조치우의 집을 나선 박일주와 곽정일이 그 길로 해주의 포구를 뒤지고 다녔다. 박달수라면 홍치상과 함께, 한양에서도 갖은 못된 짓을 한 자(), 진작부터 얼굴을 알고 있었다. 이월 초의 바닷가는 찬바람과 함께 희끗희끗한 눈발이 날려 몹시 추운데, 고깃배가 들어올 때가 아니어서인지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나으리, 이런 날씨에 놈이 움직이겠습니까? 어디 뜨끈한 기생방에서 술이나 푸고 있겠지요."

"모르는 소리. 홍치상이, 청지기 박달수란 놈을 믿거라 하는 것은, 그래도 그놈이 밥값을 제대로 하기 때문일세. 대낮부터 술을 마실 놈이 아니야. 삼킬 만한 배가 있나 살필게고, 배 임자가 누군지도 알아내려고 이곳을 자주 들릴 게야."

눈송이가 목덜미를 파고들어 부르르 진저리를 친 곽정일이, 그만 가자는 어조로 말을 하였으나, 박일주는 못 들은 듯 더욱 사방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선창을 두번이나 훑었건만, 놈의 그림자는 보지 못하고 코 끝과 입술만 퍼렇게 얼고 말았다.

"놈이 일을 마치고 갔나 보네. 저녁에 읍내 기생집을 훑기로 하고 우선 저 주막에서 몸이라도 녹이세."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귀때기가 제대로 붙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붕에 올려놓은 용수는 날아갔는지 안 보이고, 장대 끝에 주()라 쓰인 베조각만 바람에 찢어질 듯 펄럭이는 주막집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역시 해주 포구의 주막답게 넓은 술청과 방도 여럿이었다. 그러나, 추운 날씨 탓인지 한 방의 댓돌에만 갓신과 미투리 짝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주모 대신 부엌에서 뛰어나온 중노미에게, 뜨끈한 국물이 그립던 곽정일이 국밥을 시키자, 박일주가 술과 고기도 갖고 오라 하였다. 절절 끓는 방에서 둘이 뜨끈한 국밥을 정신없이 퍼 넣고 있는데, 옆방에서 갑자기 큰소리가 나기 시작하였다.

"뭐라? 이놈! 뭐라 했느냐? 못해? 정녕 네놈 입에서 못한다는 말이 나왔겠다? 이놈이 부마댁 청지기를 하더니 눈깔에 뵈는 게 없나 보구나. 이놈아, 내가 누구냐? 일인 지하요 만인지상이라는 영상 대감의 아들이다, 이놈! 그리고 네놈의 상전인 홍군과는 이마를 맞대고 산다는 것을 알고도 남을 놈이... 그깟 과부 하나 업어오는 일에 체통이 있지, 내가 직접 나서란 말이냐? 뭐라? 못해? 말을 해 보아라. 이 육시를 할 놈."

깜짝 놀란 박일주와 곽정일이 숟가락을 입에 문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생각도 못한 장소에서, 생각도 못한 인물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허견이었다. 옆방에서 허견이 박달수를 호령하고 있는 것이다. 이놈들도 추위에 쫓겨 들어왔음이 틀림없었다. 숟가락을 가만히 내려 놓은 둘이 벽에 귀를 가까이하였다.

"() 부자가 네놈 공갈에 넘어가서 삼백 석 쌀을 실어, 배까지 홍군에게 바친 줄 아느냐? 오 부자는 병자년 척화삼학사(斥和三學士) 중 한 분인 오달제의 조카니라. 그런 명문의 후손이 네놈이 무서워 한 재산을 내어 놓았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나서 흥정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 배가 한양으로 뜰 수 있었겠느냐? 말해 보아라, 이놈."

"그야... 나으리의 힘이 아니었으면 어림없었다는 것은 소인도 잘 알고 있사옵니다마는... 그래도... 황참판 며느리는 그 오라비가 성질 고약하기로 소문난 군기시의.."

".. 이놈이, 영상 대감 무서운 줄도 모르는 놈이, 그 깐 군기시의 종 5품 판관(判官)이 무서워 혼자 된 계집 하나를 못 후린단 말이냐? 그리고..."

흥분한 목소리로 큰소리를 내던 허견이, 그리고에서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군기시에 불을 냈던 그, 판관 하던 김원준이란 놈이, 지난달 원주 염초도회소로 쫓겨 난 걸 모르느냐? 군기시가 무엇 하는 곳이냐? 어리석지 않다는 네놈 생각에도, 군기시에 불이 우연히 났다고 생각하느냐? 허고, 그런 엄청난 일을 일으킨 판관 놈을, 귀양은커녕 원주로 내려보낸 것이 누구며, 왜 하필, 그놈을 살려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이놈아, 너도 생각을 좀 하면서 살아라."

"그야... 나으리의 힘을 믿으니 이제까지 시키시는 일은 마다않고 했습죠. 나으리께서 김판관만 막아주겠다는 약조만 하신다면... 제가 수단껏 해다 바칩지요."

"걱정하지 말아라. 이번 일만 잘 되면, 아니 계획한 바가 제대로만 되면 네놈도 서얼이니, 고을 사또 한자리는 떼어 줄 것이니라."

"며칠간 말미를 주시지요. 뒷 탈이 없게 하려면 졸개들을 풀어 황참의의 약점을 잡아야 일이 쉽습죠."

허견의 말에 힘을 얻었는지 박달수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 네게 열흘 말미를 주마. 나도 오부자를 옭아 넣는데 석 달이 걸렸고, 그 때, 궐녀의 소문을 같이 들었으니 결국 석 달이나 기다린 셈이다. 내 이번에 이 년을 품지 못한다면 해주 바닥을 뜨지 않으리라. , 너는 궐녀를 본 적이 있느냐? "

"웬걸입쇼. 양반 댁 아녀자가 얼굴 바닥을 보이기나 하옵니까? 소문뿐이지만 절색은 절색이라 하여이다."

"절색이래도 스물넷이면 한물 간 데다 다섯 살 난 아이가 있다니 큰 흠이지. 허나 임자가 없는 절색 가인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 하여튼 무슨 수를 쓰든, 네가 알아서 열흘 후에는 꼭 대령을 하여라."

    허견과 박달수가 하는 말을 낱낱이 들은 박일주와 곽정일이, 머리끝이 쭈삣하게 놀라서 가만히 문을 열고 신발은 꿰어찬 다음, 중노미에게 열 자짜리 무명을 내어주고는, 엉덩이에 불이 붙은 듯 주막을 나왔다.

"이거 보통 대어를 건진 것이 아닐세그려. 이렇게 하세. 이놈들이 지금 하려는 일을 보니 보통 일이 아니야. 자네는 지금이라도 한양으로 올라가게. 가서 송지평 나으리께 아뢰게. 그러면 무슨 조치를 취하시던지, 아니면, 자네에게 지시가 있을 걸세. 지시를 받는 데로 부리나케 되돌아오게. 날짜가 촉박하니, 나으리께 말씀드려 역마를 얻으면 한결 빠를 테니 그리하도록 하게."

"아무래도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바로 떠납지요."

"그러게 그 사이 나는 박달수가 말하던 황참의가 누구인지 알아볼 테니까. 자네는 들은 고대로 소상히 말씀드려야 하네. 어서 떠나게나."

이튿날, 박일주가 황참의 댁을 물어물어 찾아가 보니, 황참의는 십 년 전, 선왕인 현종 9년에 당상인 참의 벼슬을 하다가 송시열을 모함했다는 죄명으로 귀양을 갔던 황선홍이었다. 그 후에 황선홍은 서인들의 미움을 얻어 고신(告身)을 뺏긴 채, 낙향을 하였으나 아들은 한양에서 그대로 벼슬을 살았는데, 공조 좌랑(工曹佐郞)이던 아들, 황두수가 삼 년 전에 병으로 죽어서, 며느리와 손자가 해주로 내려온 것이다. 며느리는 한양에 있을 때에도 인물이 보통이 아니어서 절세미인 소리를 들었었는데, 그녀의 아비는 일찍 죽었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오빠의 손에서 자랐다. 그녀의 오빠는 성격이 괴팍하기로 소문난 김원준이었는데, 병오년 식년시에서 장원 급제를 한 수재였다.

박일주는 그날부터 황선홍의 집에 드나드는 박달수를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하루 또는 이틀에 한번 씩, 황선홍의 대문을 드나들던 박달수가 여드레가 되던 날, 가마를 가지고 나타났다. 가마와 가마꾼을 대문 밖에 세워두고 들어갔던 박달수가 한참 후에 다시 나오는데, 혼자였다. 일이 틀어져 과부 며느리를 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놈이 대문을 뒤돌아 보며 육두문자를 섞어 욕을 해 대더니 가마를 휘몰아 사라지는 것이다. 하인이 대문을 닫으려는데 박일주가 선 듯 들어섰다. 당황하는 하인에게 사헌부의 관원이 주인 뵙기를 청한다고 하였더니, 허둥지둥 달려가서 그대로 고하였다. 황선홍은 얼이 나간 듯한 얼굴로 박일주를 맞이하였다. 서로 인사를 건넨 후에 박일주가 사헌부의 관원임을 새삼 확인하더니 입을 떼는 것이다.

"세상에 말로만 듣던 허견의 횡포를 이 늙은이가 겪고 있소이다. 자식을 앞세운 것만도 하늘이 무너지는 내게, 손자가 딸린 며느리를 내어놓으라니, 하늘 아래 이런 법도가 어디에 있겠소? 아무리 고신을 뺏겨, 가세가 허물어진 양반이래도 이럴 수는 없는데, 이러고도 이 나라가 유학이 성하다 하겠소이까?"

"길게 말씀하시지 않아도 허견과 조금 전에 왔다 간 박달수란 놈의 행적을 낱낱이 알고 있습니다. 참의 어른께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댁의 며느님을 무슨 구실을 대고 모셔간다 하더이까? 그것만 알면 방도를 세울 수가 있으니 안심하시고 말씀을 해 주시지요."

", 고신도 없는 마당에 참의란 당치 않소. 허고, 이렇게 사헌부에서도 알고 오셨으니 꺼릴 말이 아닌 것 같소이다. 숙안 공주마마의 청지기 구실이라는 박 아무개란 놈이, 처음에는 며느리를 영상 댁 자제의 후처로 달랍디다. 영상이라면 허 대감이고 그 아들이라면 서자 밖에 없으니 허견이 아니겠소이까? 내가 그놈을 아는데 그 걸 말이냐고 쫓았지요. 몇 번을 와서 이런 소리 저런 말로 눙을 치더니, 오늘은 선왕 때인 지난 무신(戊申) 년에 뺏긴 참의 벼슬하던 내 고신을 돌려받게 해 주겠노라 흥정을 합디다. 하지만, 아무리 벼슬이 좋아도 그렇지, 손자 딸린 며느리를 팔아 고신을 돌려받는다면, 그게 사람이 할 짓이겠소?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더니,... ..그놈이 하는 말이....... . ............ 좋소, 말 하리다. 어차피 내가 죽어야 끝 날 일이오. 여기서 무슨 수모가 더해질 수 있으리까? 그놈이 하는 말이.. 밤마다 며느리를 끼고 자는 걸 누가 모를 줄 아느냐고, 소문이 나야 며느리를 내어 놓겠느냐고, 공갈을 칩디다. 길에서 난장을 맞는 수모를 견디래도 견디겠소이다마는, 그런 헛소문이라도 나면, 어찌 견딜 수 있겠소? 이러니 내가 더 살기를 바라겠소? 사대부를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는 법이거늘... 이제부터 나는 죽는 목숨이요."

"고정하시지요. 내일모레까지 그놈이 별 수를 다 쓸 것이나, 참의 어른께서는 흔들리지 말고 이틀만 더 참고 계시지요. 모레 저녁녘에 뵙지요."

그날 저녁, 박달수의 뒤를 박일주가 밟고 있었다. 놈이 큼직한 초가집이 즐비한 골목으로 들어서기에 박일주도 놈의 뒤를 따랐다. 그곳은 좌우 어느 집 할 것 없이 주기가 걸렸고, 붉은색 헝겊을 매단 기생집도 여럿이었는데, 놈이 들어선 곳은 기중에도 제일 번듯해 뵈는 기생집이었다. 아직 초저녁이 건만 마루 끝 처마에는 홍등을 내다 걸었고, 줄을 고르는지 가야금 소리가 띵똥 거리는 것이다. 놈을 뒤따라 기생집을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망설이던 박일주가 배에 힘을 주고 호기롭게 삽짝을 들어섰다. 중노미란 놈이 주르르 달려오더니 굽신하고 절을 하고는 혼자 온 것이 이상한 지 문 쪽을 돌아보았다. 박일주는 양반 차림답게 부채로 왼손바닥을 탁, 친 다음, 같잖다는 얼굴로 놈을 내려다보며 말을 하였다.

"내일 지체 높은 양반님네들이 모일 장소를 미리 보러 왔느니라. 오늘은 기생이 필요 없으니 들이지 말고, 술맛과 안주가 그럴듯한 지 알아볼 참이니 한 상 잘 차려 들이거라. 알아 들었느냐?"

중노미란 놈이 코가 빠져, 설설거리며 부엌으로 사라지자, 댓돌에 갓신과 미투리 짝이 놓인 곳을 찾아, 옆 방에 슬며시 들어가 앉았다. 그리고는 벽에 기대어 옆방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허견과 박달수가 간혹 무슨 말을 하며 술잔을 상에 탕, 놓는 소리가 나긴 하는데, 말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 허견의 목소리가 높아지는데 화가 나는지 가래 끓는 소리였다.

"홍가 놈이 고신을 돌려 준대도 싫다 하더란 말이냐? 수단이 영롱하다는 네놈이 무슨 일을 그따위로 하는 게야? 홍가 놈은 이미 끈 떨어진 연이요, 과부 년은 살 맞은 까투리 아니냐? 헌데도 그 걸 하나 못 물어온단 말이냐? 그래서? 그래서 이제 어떤 수가 남았느냐? , 말을 해라 말을 해. 속 터진다."

"내일 밤, 자시(子時)에 졸개들과 업어 오기로 했습죠.    제가 거하는 소홍이네 집 안방에 이미 신방은 차려 놓았습지요."

"거 봐라, 이놈아 애초에 불문곡직하고 업어 오라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뒷 탈이 없으려면 어쩌구 하면서 그 알량한 대가리를 쓴 결과가, 결국 내 말을 듣는 것 아니냐? 이놈아 외입이라면 내가 네 머리 꼭대기에 있느니라. 진작 업어왔으면 그새 손자를 봐도 셋은 봤겠다. 내일이 마지막이니라. 네놈도 끈이 떨어지지 않으려면 알아서 하거라. 에이잉, 이놈, 기생 년이나 들이거라. 술이나 제대로 마셔보자꾸나."

홍참의집 며느리 보쌈을 내일 밤 자시에 한다는 말에, 박일주가 지금쯤 곽정일이 왔는지 궁금하기 그지없으나, 들어온 술상을 물릴 수 없어 혼자서 자작을 하였다. 얼마 후, 기생집을 나선 박일주는 나는 듯이 주막으로 달려갔으나 곽정일은 오지 않아서 불 꺼진 썰렁한 빈방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튿날, 날이밝자 박일주는 초조하였다. 해주에서 한양까지 오백 리가 넘으니 닷새는 걸릴 것이요, 대책을 세우려면 하루 이틀이 또 지날 것이니, 되돌아 올 때 역마를 탄다해도 이 삼일 소요되리라. 그리되면 까투리는 날아가고, 포수는 꽝이 아닌가? 어쩌면 좋을까 궁리에 궁리를 하느라 아침밥 한 그릇을 붙들고 점심때까지 먹을 판인데, 삽짝 밖, 저쪽에서 곽정일이 뛰어 오고 있는 것이다. 어찌나 반가운지 숟가락을 내던진 박일주가 마주 삽짝을 나섰다. 한데 곽정일 혼자가 아니었다. 곽정일 뒤에 덕출이가 보이고, 덕출이 뒤에 한복만이 웃으며 나타나는 것이다. 또 그 뒤에는 생각지 못한 송수호가 입을 굳게 다물고 다가오고 있었다. 박일주가 깜짝 놀라 황급히 다가가 인사를 하였다.

"나으리, 이거야,... 나으리 웬 걸음이신지요?"

"그동안 혼자 고생이 많았겠네. 자네 얘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어서 왔네. , 들어가서 얘기들 나누세."

"한데, 말을 타고 오신 것이 아니오이까?"

"승마 법을 배우지 못한 내 탓일세. 허고, 해주라면 말보다야 배가 빠르고 편하지 않겠나. 배는 밤낮을 가리지 않으니 말일세. 삼개에서 마침 해주로 세곡을 실으려 떠나는 세곡선이 있기에 타고 왔네. 하루 조금 더 걸리더군."

중노미를 재촉하여 부산하게 늦은 아침밥을 먹은 송수호 일행이, 방문을 꼭 닫고 이제까지의 일 들을 주고받은 다음 대책을 숙의하였다. 그러고는 모두들 드러누워 코를 골아가며 푸짐하게 낮잠을 잤다. 간 밤에 실컷 자고 난 박일주만 바삐 어디론가를 돌아다니다가, 저녁에 일행들이 일어나자 웬 하인 놈 하나를 데리고 나타났다. 저녁밥을 든든히 먹은 일행이 괴나리봇짐에서 두자 길이의 짧은 환도를 꺼내 들고, 술시(戌時)를 기다렸다가, 송수호의 지시대로 박일주와 덕출이가 홍참의 집으로 먼저 출발을 하였다. 한복만과 곽정일은 박일주가 데리고 온 조부자 집 하인과 함께 소홍이의 집으로 향하였다. 송수호는 주막에 홀로 남았다.

"저기, 저기요."

자시가 가까울 무렵, 어둠 속에서 박달수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던 박일주 앞에 희끗한 무리가 나타났다. 덕출이가 먼저 발견하여 놈들을 가리키니, 박일주가 덕출이의 옆구리를 찔렀다.

", 조용, 나도 보았네. 몇 명인가?"

", 모두 다섯 명 올시다."

"놈들이 담을 넘기 전에 해치우세. , 한 놈이 담을 넘었군, 나가세."

박일주와 덕출이가 그들에게 다가가자, 또 한 놈이 담을 넘으려다 주춤 하였다. 박일주가 큰 소리를 지르며 놈들에게 뛰어들었다.

"네 이놈들, 화적 놈들이 무슨 개수작을 부리려 나타났느냐?"

", 이건 뭐냐? "

모두 맨 상투에 수건만 동여서 누가 누군지 모르는데, 그중 한 놈이 박일주의 앞에 나서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막대기를 든 놈은 그놈 하나뿐인데 막대기에서 스르릉 하고 칼이 나오는 것이다. 덕출이는 담을 넘어간 놈을 찾아 그도 담을 넘었다. 그러나 놈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덕출이는 오기 전에 서로 약속한 대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불이야, 불이 났다. 불이야아"

덕출이가 홍참판집을 향해 목청껏 불이야 소리를 지르며 담장 밖으로 넘어오니, 밖에는 이미 박일주의 뽑지도 않은 칼집에 맞아 널부러진 네 놈이 신음을 쏟으며 뒹굴고 있었다. 아까 칼을 지녔던 놈은 어디를 맞았는지 죽은 듯 조용하였다. 홍참판네 집에 불이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저쪽 담 모퉁이로 아까 담을 넘어갔던 놈이 후다닥 담을 되넘어오는 것을 덕칠이가 한달음에 달려가, 칼집 채로 목덜미를 후려쳐버렸다. 놈도 짹짹 소리 없이 잠이 들었다.

소홍이의 집을 아는 조부자네 하인을 앞세워 그녀의 집으로 갔던 한복만과 곽정일은 하인을 돌려보낸 다음, 안팎의 동정을 살피다가 자시쯤에 슬그머니 담을 넘었다. 이 집은 소홍이가 살던 집인데, 박달수가 해주에 내려오면 기생을 부르거나 여염집 과부를 후릴 때 쓰는 집으로, 소홍이는 지난해에 박달수를 따라 한양에 가서 색주가를 차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안방에는 지금 허견 이란 놈이, 따뜻하고 야들야들한 밤참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한복만이 검은 두건을 꺼내어 얼굴을 가리고 곽정일은 밧줄을 들고 망을 보았다. 은은한 촛불이 켜진 안방을 한복만이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비단 금침 위에서 이제나저제나 하고 밤참을 기다리던 허견이 쥐고 있던 물건을 덜렁, 떨어뜨리며 입을 쩍 벌리었다. 깊은 밤중에, 칼을 든 검은 복면을 보고도 주절주절 말이 많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멀거니 복면을 바라보는 허견의 어깨에 퍽, 하는 강한 타격이 들어갔지만 얼이 쑥 빠지고 혼백(魂魄)이 간 곳을 모르는 놈은, 아픈 줄도 모르고 기절을 하였다. 두 사람은 허견을 밧줄로 묶어 이불을 뒤집어 쒸운 뒤 안방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샅샅이 뒤져도 찾는 물건이 나오지 않자, 사랑방으로 옮겨 뒤지니 서탁 밑에서 손바닥만한 치부책이 나왔다. 촛불 아래 몇 장을 넘겨 보던 한복만이 씩하고 웃으며 곽정일에게 넘기었다. 그러나 곽정일은 보지도 않고 소매 속에 집어넣었다. 둘은 송수호가 기다리는 주막으로 향하였다. 주막에는 일을 끝내고 돌아온 박일주와 덕출이가 송수호에게 경과를 보고하고 있었다.

"그래서 박달수란 놈의 팔꿈치를 바수어버렸습니다. 한 팔은 영원히 못 쓰겠지요. 그놈이 칼을 제대로 쓰는 놈 같았으면 명줄을 끊어 놓았을 터인데...."

"제가 자초한 일이니 할 수없는 일이지. 복만이 자네 쪽은 어떤가? 찾았는가?"

", 나으리. 이보게 드리게."

곽정일이 내 놓은 치부책을 호롱불을 가까이하여 들여다본 송수호가 박일주에게 치부책을 넘겨 주며 밝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되었네. 이제 다 끝난 것 같네. 생각대로 박달수란 놈이 이제까지 해먹은 것을 적바리해 놓은 치부책이 있었군. 오늘 일은 홍치상이나 허견이 입을 열 수 없을 게야."

"박달수란 놈이 자칫하면 제 놈도 위험할 문기를 왜 적어 놓았을까요?"

박일주가 못내 궁금한 표정으로 송수호의 입을 바라보았다.

"허허, 다람쥐란 놈이 제가 감춘 도토리도 찾지 못할 때가 있지. 하도 여러군데에 감추어 놓았거던. 박달수란 놈이 그 짝이라, 제 상전의 비리도 손아귀에 쥐고 있을 겸해서 제가 떼먹은 걸 헷갈려 실언할까 봐 두려웠던 게야."

"놈들이 홍참의를 더 이상 욕보이는 일은 없겠습지요?"

"그 일로 내일 내가 관찰사를 만나보려 하였으나, 내가 나서면 저희들 일이 틀어진 것이 나 때문이라는 게 드러날 터, 아까 자네들 없을 때 써 둔 글이 있으니, 박 감찰 자네가 감영에 갖다 주고 오게나. 두어 달 전에 이미 형조판서 남구만(南九萬) 대감이 홍참의의 고신을 돌려 줄 것을 상()께 아뢰었었는데 상께서도 송시열이 죄를 지어 귀양을 간 뒤라, 그리하라는 어명이 계셨다고 들었네. 허견이란 놈이 그걸 어찌 알고 계집 흥정에 써먹다니... 허허, 제가 무슨 힘이 있어 남의 고신을 돌려주고말고 한단 말인가? 관찰사에게도 홍참의의 고신이 돌려진다고 썼으니, 홍참의를 감영으로 불러 위로할 것이야. 그리되면 놈들도 어쩔 수 없을 터이지, 허고, 여기 있는 누구도 김원준 얘기는 일절 하지 말도록 하게. 군기시 화재는 확실한 물증이 없는 한, 자칫 우리가 당하기 쉬운 사안일세. 그것보다, 이제부터 허견이 그놈을 좀 더 살펴야 할 것 같아. 집의(執義) 영감의 하명도 있었지만, 어쩐지 나도 그런 생각이 드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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