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떠나는 배
"이것들은 아직도 방구석에서 뒹굴고 있겠지?"
"그렇겠지. 안성에서 쫓긴 후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지 않은가?"
"그건 그래."
춘길이와 덕만이는 째보 아범의 숯막에 닿자말자 거사들이 머무는 봉노로 다가가 방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나 잠을 자리라는 생각과 달리 거사들은 이마를 맞대고 무언가를 숙덕거리고 있었다. 더구나 새벽에 나갔다던 안 거사가 그들을 상대로 설득을 하고 있는 눈치였다. 거사들은 일제히 마루에 선 춘길이에게 눈길을 돌렸다. 춘길이는 방안으로 발을 디디자말자 버럭 고함을 질렀다.
"한여름 소부랄 늘어지 듯 팔자가 한껏 늘어졌구나. 이놈들아 할 일이 없으면 밥값으루 쓰러진 울타리라도 손을 봐 줄 것이지 이렇게 마냥 쳐 자빠져 있단 말이냐?"
한데, 평소였으면 죽은 듯 오금이 저린 흉내를 내야 옳을 놈들이 어쩐 일인지 춘길이의 말을 대시근하게 여기는 표정이었다. 이에 부아가 난 춘길이가 다시 목청을 높였다.
"어라? 이놈들 보게? 눈길이 어째 찌러기가 뜸배질 할 틈을 노리는 것 같지 않은가? 보아하니 그새 사당 년들이 보고 싶어 환장을 한 게로군."
"그걸 아는 걸 보니 용하시우."
고개를 뻣뻣하게 세운 안 거사가 춘길이를 향해 이죽거렸다.
"뭐라? 사당을 잃으면 안거사 네놈이 제일 먼저 실성할 것은 내 이미 알고 있었느니라. 좋다. 눈치를 보아하니 네놈들이 무슨 꿍꿍이를 모의 한 것 같으니 이참에 확실하게 일을 매듭짓자."
"우리도 그러길 원하고 있던 참이 유."
춘길이와 덕만이는 차라리 잘 되었다는 심정으로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사당패는 안성에서 이미 결단이 났으니 그걸 다시 모으기는 사실 난감한 일이다. 그것은 너희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십수 년을 사당패를 이끌어 온 나나 옆에 있는 덕만이 역시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해서, 며칠 내로 당도할 동춘이 패나 황구 패에 너희들을 넣어주려고 한 것이다. 일단 그들 패에 섞여 도성과 경기지방을 다니다 보면 그 사이 안성 관아에 잡혀 있는 사당들이 방면이 될 것 아니냐? 그러면 너희들끼리 따로 패를 짜든지 아니면 사당을 데리고 아예 그들 패가 되든지 하면 될 것이다. 내 생각이 어떠냐? 그렇게들 할 것인가?"
"고양이 쥐 생각하듯 하는 말씀 마시우. 우리들을 내치려는 모가비 속내를 이미 알고 있수다. 이평골에서 두 사람이 하는 얘기를 들었단 말이오. 허니 우린 우리 살 궁리를 해야 할 것 아니요? 동춘 패나 황구 패를 따라가라는 모가비 말이 우습기 짝이 없수. 사당 년이 없으면 내 패에서도 짐꾼 밖에 안 되는데 하물며 남의 패에서 사당 없이 지내라는 말이 우습지 않수?"
"그렇게 앞뒤를 딱 맞춰 말을 하는 걸 보니 이미 너희들 살 궁리는 해 놓았다는 얘기로구나. 그렇다면 오히려 쉽게 얘기가 끝났구나. 너희들 좋을 대로 해라. 각자 알아서 안 거사를 따를 자는 그쪽에 붙으면 되겠고나."
"이미 작정들이 되어 있으니 걱정 마슈."
춘길이와 덕만이는 두말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리고는 째보 아범의 방으로 들었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째보 아범이 히죽 웃었다.
"그러지 않아도 기분이 더러운데 왜 웃고 야단이오?"
춘길이가 털썩 자리에 앉으며 시빗조로 말했다. 그러자 째보 아범이 다시 히죽 웃었다.
"모가비 체면에 놈들에게 면박을 당했을 터이니 웃지 않을 수 있나?"
"육조 앞에다 돗자리를 까시우. 한몫 잡으리다."
"어떤가? 아침에 내가 뭐라 하던가? 놈들의 눈치가 뻔하다고 했지?"
덕만이도 질세라 한마디를 보탰다.
"아닌 게 아니라 자네 말 대로군."
"어차피 흩어버릴 참이었는데 잘 된 것 아닌가?"
째보 아범의 말이었다.
"안 거사 저놈이 맘에 걸려서 그러우. 저놈은 앞으로도 우리 일에 방해가 될 것 같단 말이요. 반드시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요."
"그러면 내가 저놈을 이 총으로 없애 버릴까?"
춘길의 말에 덕만이가 다시 나섰다. 덕만이는 정말로 총을 쏠 것처럼 등에 매었던 화승총을 내렸다.
"헛, 냅뜨는 자네 꼴이 꼭 망아지로세."
"자네가 찜찜하다니 해 본 소리지. 저깐놈 없애는 거야 여반장이지. 정말 우리를 방해할 낌새면 언제든 없애면 그만이지 앞서 걱정할 게 무언가?"
덕만이의 말에 째보 아범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 말이 맞네. 해치우는 건 언제라도 할 수 있네. 그보다 우리 일을 의논하는 것이 급한 일이네."
"가만, 저놈들이 밖으로 나오는 것 같소."
춘길이가 방문 틈 사이로 내다보니 안 거사를 선두로 놈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오더니 삽짝을 나서고 있었다. 춘길이가 속으로 등짝을 헤아려보니 모두 여덟 명이었다.
"저놈들이 대체 무얼 하려는 걸까?"
덕만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자 째보 아범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받았다.
"무얼 하긴 무얼 해? 송파로 나가 짐꾼 노릇이라도 하면서 무슨 기회를 노리던지 작당을 해서 도적질이라도 하려는 거겠지."
"가만, 삽짝을 나선 놈은 모두 여덟이었네. 그렇다면 두 놈이 남았단 얘기 아닌가? 안 거사를 따라가지 않은 놈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뭐야? 두 놈이 남았어?"
춘길의 말에 덕만이가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갔다. 궁금하긴 춘길이도 마찬가지여서 덕만이 뒤를 따라가 보았다.
"엉? 말봉이 아니냐? 너는 어째서 저놈들을 따라가지 않았느냐?"
덕만이가 묻건만 말봉이란 놈은 고개를 외로 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춘길이도 방안을 삐끔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자신이 가장 믿고 있던 도칠이가 쭈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헛, 역시 도칠이 네가 나를 버리지 않았구나. 그러지 않아도 너는 내가 데려가려 했는데 잘 되었다. 하하하."
"춘길이 자네가 말하던 놈이란 말인가? 거참, 나 역시 말봉이 저놈만은 데려가고 싶었던 놈일세."
덕만이가 말을 하는 사이에 춘길이는 이미 방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도칠이 네가 들은 대로 말해봐라. 안 거사란 놈이 무슨 말로 거사 놈들을 데려갔느냐?"
"그게.... 오늘 아침에 나루에서 자기 육촌형이 있는 곳을 알아냈다 합디다. 또 그 형이란 사람이 무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허풍을 떨더군요. 그러니 앞으로 밥 걱정은 말라면서 일단 자기를 따라가자고 하던뎁쇼?"
"음, 나도 언젠가 들은 적이 있지. 육촌 형이란 자가 무슨 대감댁 칼잡이로 있다지? 한데, 너는 왜 따르지 않았느냐?"
"힝, 그놈은 색에 미친놈 아니유? 그놈은 사당을 그러모아 모가비가 되어보는 것이 소원인 놈이유. 내 이제껏 도중의 짐꾼 노릇을 해 왔는데 그놈을 따라가 뒤치다꺼리를 또 하란 말이우? 그럴 바엔 화적패에 들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겠수."
도칠이의 말이 곧 춘길이가 듣고 싶은 말이었다. 덕만이는 말봉이를 상대로 물었다.
"넌 왜 남았느냐?"
"모가비 허락도 없이 어찌 내 맘대로 하오?"
말봉이가 하는 말 역시 덕만이가 바라는 대답이었다.
"알았다. 잘했다. 쉬고들 있거라. 이제 곧 우리들이 할 일이 있느니라."
춘길이와 덕만이는 봉노를 나와 다시 째보 아범과 마주 앉았다.
"저놈들은 우리가 믿을 만하다고 여기던 놈이요. 허니 내일 일찍 저 아이들을 데리고 강화로 갈까 하오. 원산으로 떠나기 전에 우선 화승총을 몇 자루 구해야겠단 말이요. 우리들은 싸움이 나면 물고 뜯는 재간 밖에 없으니 총이 꼭 필요하오."
"그러게나. 어차피 남의 물건을 털어먹자면 무장은 해야겠지. 화승총 서너 자루면 창을 든 벙거지 스물 정도는 문제없을 테니까. 한데 강화에 총포를 녹이는 야장(冶匠)이 있단 소리는 금시초문인데 적실한 소식인가?"
"헛, 이 총이 바로 그 야장이 만든 것이오. 그 사람은 본래 전라도 부안(扶安) 사람인데 그곳 변산의 화적들에게 총을 만들어주다 들킨 모양입디다. 마침 포교가 닿기 전에 알려준 사람이 있어 배를 타고 강화로 도망을 쳤다지요. 그게 불과 몇 달 전 일이오. 이 총은 그 사람이 부안에 있을 때 만든 것이오. 작년에 그쪽으로 연희를 갔을 때 누구의 소개로 부탁을 했던 것이지요. 그가 강화 길상산 아래에 있다는 소식도 그래서 아는 거요. 요즘도 총을 만드는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대장간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어쩌면 한두 자루쯤은 구할 수 있을 게요."
"글쎄, 총을 만들다 죽을 뻔한 사람이 또 그 짓을 하겠는가?"
째보 아범이 고개를 외로 꼬며 의문을 나타냈다.
"까짓 안 만들겠다면 겁박이라도 해야지 별 수 있소? 관아에 고변을 하겠다고 하면 말을 듣고도 남을 테니 염려 마시오. 우리도 생사가 걸린 문제니 말이요. 그것보다는 총값에 노자를 얹어 길 떠날 때 좀 주구려."
"알았네. 자금은 얼마라도 댈 사람이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 내일 떠날 때 줌세."
"자금 얘기가 나왔으니 얘기요 만, 한 가지만 물어볼 테니 째보 아범도 솔직하게 말해 주시우."
"엉? 새삼 무슨 말을 듣자는 겐가?"
째보 아범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춘길이를 뻔히 쳐다보았다.
"내 나이 사십에 모가비로 보낸 세월이 십수 년이요. 세상 물정을 알만큼은 알고 있단 말이요."
"허허, 서로 알고 지낸지 일이 년인가? 머리 말은 빼고 속말만 하게나."
"좋소, 이번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뜻이 다른데 있는 것 같단 말이요. 문가네 객주인만 해도 그렇소. 우리에게 일을 시키고 자기는 아닌 보살로 덕을 본다고 해도 정도가 있는 것 아니겠소? 시전 도령위의 아들이요 돈 많은 물상객주의 주인이 무엇이 아쉬워 그런 위험한 장난을 하겠소? 들통이 나면 저나 나나 모가지가 성치 않을 텐데 말이요. 애초에 장삿꾼도 화적도 아닌 우리들에게 상단을 꾸려서 원산으로 가라니 그게 될 말이요? 우리는 끽해야 사당패의 모가비 아니요? 그런 우리를 무엇을 믿고 그런 일을 맡긴단 말이요? 더구나 우리에겐 그런 일을 치를 패거리도 없지 않소? 또 그걸 모르지 않을 째보 아범 아니요? 이게 앞뒤가 들어맞는 얘기요? 이거 뭔가 이상한 것 아니요?"
"헛, 나는 또 무슨 소리라고. 자네 말대로 그 사람이 그걸 몰라서 자금을 대겠나? 지금 도성의 시전이 예전과 달리 형편없네. 성 안에서 난전을 금하니 성 밖이 오히려 장시가 커지기 때문일세. 다른 건 그만두고 어물전만을 봐도 북어가 나는 곳은 원산뿐인데 그걸 도거리 하려는 장삿꾼은 셀 수 없을 만큼 많단 말이지. 이제껏 송상들이 독점하던 북어와 북포를 돈 많은 물주나 권문세가들까지 덤빈단 말일세. 근자엔 경상이 또 그걸 노리는 것 같단 말이지. 경상은 돈과 권력뿐 아니라 결속력이 엄청난 상고들일세. 다른 곳은 몰라도 경상이 덤비면 북어는 끝장일세. 자, 이만하면 무슨 소린지 알겠나?"
째보 아범의 말이 끝나고도 춘길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덕만이 역시 무엇을 생각하는지 천정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자 다시 째보 아범이 말을 이었다.
"가득이나 시전이 형편없는데 경상이 나서 북어를 도거리 해버리면 어물전은 그야말로 끝장 아닌가? 지금도 송상이 솔모루에 북어를 쌓아놓고 값을 조종하는데 경상까지 덤벼보게나. 도성 안에는 북어를 구경도 못할 것 아닌가? 그래서 이번 일은 어물전 수령위가 나를 불러 계책을 꾸민 것일세. 객주인 문일도는 아비의 분부만 따를 뿐이란 말일세."
"헛,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이 째보 아범의 계략이란 말이요?"
"자네가 그렇게 나오니 나도 톡 까놓고 얘기하겠네. 이 마당에 무얼 숨기겠나? 나는 사실 도적의 수괴일세. 서른이 넘는 졸개의 밥줄을 맡고 있단 말일세. 한데 내 나이 쉰을 넘기니 그놈들을 다루기엔 힘이 딸리더구만. 이 일을 꾸민 건 오래전 일세. 그러든 차에 자네들이 사당을 못하게 된 것을 알고 내가 급히 일을 만든 것일세. 십수 년 봐 온 자네들을 내가 모르겠나? 자네들이 우리 아이들을 맡아 주게. 그래서 원산을 오가는 길목에 숨었다가 경상이 매집해 가는 북어만을 골라 중간에서 가로채란 말일세. 그 뒤의 일은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자네들은 일을 해치우고 번개같이 숨기만 하면 된다네. 어떤가? 솔직한 말을 듣고 나니 이제 속이 시원한가?"
"그럼, 당신이 장물아비란 말도 거짓이구려?"
"아니지. 우리 패가 훔친 어물은 이제껏 내가 나서 처분을 해 왔으니 거짓은 아닐세."
"허면 탈취한 북어는 어물전에다 넘긴단 말이요?"
"북어 배때기에 임자 이름이 써 있던가? 못 넘길 건 또 뭔가?"
"허긴 그러우."
"어떤가? 아직도 미진한 구석이 있나?"
"없소."
"그렇다면 두말 없이 내 말대로 하는 거지?"
"여부가 있소. 이렇게 되면 준비를 더욱 단단히 해야겠소. 참, 째보 아범 패엔 화승총이 없소?"
"한 자루가 있긴 하나 화약과 연환이 없으니 있으나 마나 일세. 하지만 총 없이도 여태 실패는 별로 없었네. 주로 밤중에 상인들이 묵는 주막을 벼락같이 덮쳤거든."
"요즘엔 장삿꾼들도 돔방총 한두 자루씩 갖고 있다 합디다."
"그러니까 벼락같이 덮쳐야 한단 말일세. 화승에 불을 붙이기 전에 말이야."
"우리는 그런 짓은 안 할 거요. 길몫에 엎드려서 총을 쏘는 게 낫소. 한두 놈 꺼꾸러뜨리면 다들 도망가기 바쁠 것 아니요? 그럼 내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먹을 수 있소."
"힘꼴이나 쓰는 자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세상이 변하긴 변했군. 자네는 곤봉을 잘 쓰잖나?"
"힝, 내 곤봉이 총을 이기려면 단병접전을 해야 하는데 그게 벌써 세불리 하단 말이요."
"그건 그렇지."
"어쨌든 내일 아침에 떠날 테니 그리 아시우."
"알았네."
며칠 후였다.
아랫강으로부터 스물 댓 명의 승객을 실은 배 한 척이 송파 나루에 닿았다. 그 배는 쉰 석 짜리로 마소나 큰 짐바리를 싣기보다는 소소한 물건과 사람을 태우고 다녔다. 승객은 거의가 뜨내기 장삿꾼들이거나 송파 장을 보러 가는 사람들이었다. 사공이 뱃전에서 뭍으로 발판을 걸치자 각자 짐을 챙겨 든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중에 춘길이 패에서 월이의 거사 노릇을 하던 안 거사가 섞여 있었다. 안 거사 뒤에는 키가 껑충한 사내 둘이 함께 배에서 내릴 채비를 하고 있었다. 두 사내는 각자 베로 둘둘 만 막대를 들었는데 눈매가 날카로운 것이 칼잡이가 분명했다. 안 거사가 먼저 발판을 딛고 내렸다.
"성님, 내리시우."
사내들은 안 거사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뱃전에서 뭍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뭍까지의 거리가 열자가 넘는 거리였다.
"여기가 송파란 말이냐? 거 듣기로는 엄청 붐비는 곳이라더니 이거야 허허벌판이 아니냐?"
"원 성님도, 여긴 나루터니 그럴 밖에요. 저 위로 올라가면 아마 성님도 놀라실 거요."
"글쎄, 여하튼 앞장 서거라."
"그러지요."
안 거사는 사내들의 앞장을 서서 객주가 늘어선 장터로 향했다.
두 칼잡이 중 한명은 안 거사의 육촌형인 안도칠이었고 함께 온 자는 무질이란 자였다. 이들은 항상 같이 다녔는데 칼질을 하거나 싸움이 붙었을 때는 손발이 절로 맞았기 때문이었다. 두 놈은 칼질을 업으로 삼는 무뢰배로 사헌부 송수호의 수하였던 한복만도 이들의 손에 죽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송윤호의 가슴을 무너지게 만든 장본인들이었다. 축석고개에서 사건이 벌어지던 그날, 춘보를 베고 가마에 탔던 송윤호의 자당과 형수를 죽인 자들이 바로 이놈들인 것이다. 칼질을 피해 낭떠러지로 뛰어내렸던 막내아들 보일이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형님을 대신할 장손 원일이까지 행방불명이 된 것도 이놈들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오늘날까지 송윤호에게 죽음과도 같은 삶을 살게 한 놈들인 것이다.
이놈들은 지난해 봄까지만 해도 장현(張炫)의 호위무사로 부러울게 없는 몸이었다. 헐숙청에 들어앉아 빈둥거리다 주인이 나들이를 하면 가마의 앞뒤로 따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다 간혹 시키는 대로 칼질을 몇 번 하고 나면 밥에 술에 푸짐하게 용채까지 내리니 색주가에 드러누워 세월을 보내면 되었던 것이다. 하나, 지난해 경신환국이 일어나자 놈들 역시 초상집 개 꼴이 되고 말았다. 주인인 장현이 서인들의 탄핵으로 조카인 도체찰사부 군관이던 장천익(張天翼)과 함께 유배형에 처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대역죄인으로 처형된 복선군 이남(李柟)과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과 가깝게 지냈다는 죄목이었다. 금부도사가 장현을 잡으러 왔을 당시, 안도칠은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세라 짝패인 무질이와 함께 잽싸게 담을 넘었다. 그러나 밖으로 나와보니 돈 한 푼 없는 빈 몸이라 갈만한 곳도 없었다. 칼잡이 일을 다시 하자고 해도 시국이 어수선한 이때에 자신들을 불러 줄 권력자도 없었다. 칼 쓰는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니 천상 왈짜들과 어울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생활도 쉽지 않았다. 자나 깨나 주먹다짐이나 하고 공술이나 마실 뿐 색주가에 갈만한 엽전 한 푼 들어오지를 않았던 것이다. 편한 잠자리도 없고 깨끗한 의복도 없었다. 그러니 갓은 커녕 패랭이조차 새로 장만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말이 좋아 왈짜지 사실은 집 없는 개들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여러 달을 어렵게 살고 있던 지난해 말, 귀양으로 끝장이 난 줄 알았던 장현이 풀려나 사역원에 복직까지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리저리 알아보니 사실이었다. 그러나 칼잡이 안도칠과 무질이는 장현을 찾아갈 수가 없었다. 소위 호위무사라는 것들이 목숨이 아까워 주인을 버리고 담을 넘었으니 무슨 염치로 다시 담 안으로 기어들 것인가?
아무런 장래가 보이지 않자 두 놈은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목이 좋은 산길을 차지하여 화적질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단 있고 재주 있는 졸개를 모을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성 밖으로 나와 삼개 나루에서 기회를 노렸다. 삼개는 마침 땅개패가 상조회에게 결단이 나서 주인 없는 무주공산이어서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지난달이었다. 그러든 차에 육촌 동생인 안도팔이 거사 놈들을 이끌고 자신이 있는 곳을 찾아 온 것이다. 안 거사의 생각도 화적질에 있었으므로 놈들과 죽이 맞았다. 게다가 팔도의 지리에 훤한 안 거사는 안도칠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화적질을 해 먹자면 도타할 길에 밝은 것이 첫째였기 때문이다. 안도칠은 안 거사를 따라온 사당들의 호구를 위해 임시로 나루의 짐꾼 임방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 안도칠과 무질이 그리고 안 거사가 머리를 맞대고 공론을 하였다. 어차피 화적으로 나서기로 한 몸이니 어디 한 곳을 털어서 뜨자는 것이다. 그러자면 부피가 큰 물화를 털기보다는 엽전이 좋을 것이었다. 돈이 있을 곳은 뻔했다. 객주였다. 만약 삼개 객주를 턴다면 천상 배를 타는 길 밖에 없으니 갈 곳이 없었다. 강원도 이천이나 평강을 소굴로 삼으려 마음먹고 있는데 삼개에서는 무리였다. 그래서 나온 꾀가 송파의 객주를 터는 것이었다. 송파라면 고덕산 아래에서 아차산 쪽으로 도강을 하면 둔초의 눈길도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안도칠과 무질이는 안 거사를 앞세워 송파의 지리와 객주를 물색하기 위해 서둘러 배를 탄 것이다.
장삿꾼들과 함께 내린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시전 도령위 문기수의 큰아들 문일재의 어물전에서 서사로 있는 추석양이었다. 추서사 역시 문일평 형제의 객주를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추서사가 문일평의 객주에 들어서자 마침 나귀 여물을 삶고 있던 맹보 아범이 눈에 띄었다.
"맹보 아범, 잘 있었나?"
"아이고, 이게 누구시요? 추서사가 여긴 웬일이시요?"
"헛, 내가 못 올 곳을 왔나?"
"그게 아니라 하도 오랜만이라 그러오."
"하긴 지난해 여름에 오고 처음이군. 나으리 계신가?"
"그럼입쇼. 서기방에 계시지요."
"알았네. 일 보게."
추서사는 문일평이 있다는 서사실로 성큼성큼 다가가 댓돌 아래에서 큰 기침을 한 후 자신의 내방을 알렸다.
"나으리, 소인 추서사 옵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안에서 문이 열리더니 거간꾼 배종개가 고개를 내밀었다. 추서사를 본 배종개가 반가운 얼굴로 마루로 나섰다.
"아이고 추서사가 오셨구려."
"잘 있었나?"
"나으리 본댁에서 추서사가 오셨습니다."
배종개의 안내를 받은 추서사가 방안에 들자 장책을 들여다 보던 문일평이 고개를 들었다. 한데, 영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추서사는 문일평을 향해 단정히 고개를 숙였다.
"나으리 무슨 언잖으신 일이라도 있사온지요?"
"음 아무것도 아닐세. 한데 방자를 띄우면 될 일을 자네가 직접 웬일인가?"
"수령위 어른의 심부름을 왔습죠."
"그래? 그새 별일 없으렸다?"
"그럼입쇼. 가내 무고 합지요."
"그래, 아버님께서 내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게로군."
"예. 두 형제분께서 잠깐 들리라는 분부셨습니다. 여기 서찰을 갖고 왔습지요."
추서사는 소매 속에서 서찰을 꺼내 문일평 앞에다 놓았다. 그것을 집어 든 문일평은 한눈에 주욱 읽은 후에 맹보 아범을 부르게 했다. 그리고는 분부를 내렸다.
"너, 가서 작은 나으리 좀 오라고 해라."
"지금 곧 오시라 하오리까?"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게냐?"
맹보 아범이 달려나가고 한참 후에 문일도가 나타났다. 문일평의 객주와 문일도의 객주는 거리상으로 백여 보 밖에 되지 않았다.
"먼 곳도 아닌데 무엇하다 이제야 오는 게야?"
문일평은 늦게 나타난 동생을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문일도는 본가의 추서사가 왔다는 맹보 아범의 전갈로 이미 대강의 눈치는 채고 있었다.
"원 형님두, 물주와 상담 중에 내 볼일 있다고 훌쩍 일어설 수야 있습니까?"
"무슨 물종 인지는 몰라도 서사를 두었다 무어에 쓰려느냐?"
"곶감을 맡기려는 물주지요. 허니까 서사도 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니 별 수 있습니까. 내가 나설 수밖에요."
"뭐야? 곶감이라고? 설날이 다가오는 것도 아니고 햇과실 나올 철이 다 되었는데 갑자기 무슨 곶감이란 말이냐?"
"곶감으로 수정과만 만든답니까? 아직 오얏 나올 때도 아니고 작년 배(梨)는 물렀을 테니 주전부리로야 아직은 곶감이 제격이지요."
"얘, 그것을 맡으려거든 모전(毛廛)에 물량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슬쩍 염탐을 해 본 뒤에 맡아라. 물량이 너무 많으면 거래할 곳이 모전 말고는 없다."
"그깟 곶감 백 동을 거래를 못해 썩히겠수? 그것보다 무엇 때문에 보자 셨습니까?"
"아 참, 추서사가 아버님의 서찰을 갖고 왔다. 일간 다녀가란 말씀이시다."
"그래요? 아마 어물 매입 때문이겠지요."
형이 내미는 서찰을 대강 읽어 본 문일도가 고개를 갸웃하며 추서사를 바라보았다.
"어물 말씀이 없구려. 손자가 보고 싶어 어머니께서 아버님을 조르셨나 봅니다. 상구를 꼭 데려 오란 말씀인 걸 보면 말입니다. 어쨌든 나도 준비를 하지요."
다음날 아침 문일평 일가가 성내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갓 쓰고 창의 떨쳐입은 문일평이 같은 차림의 동생 문일도와 함께 앞을 나섰다. 그 뒤를 오랜만에 시댁과 친정 나들이를 하게 된 문일평의 아내가 시집올 때 입었던 노랑 저고리에 쓰개치마를 두르고 종종걸음을 하였다. 그 뒤로 상구를 업은 월이가 부지런히 뒤를 쫓고 양가의 선사품이 든 고리짝을 짊어진 맹보 아범이 아그작 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추서사와 짐을 진 문일도네 하인이 맨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모두 여덟이나 되는 일행이 길게 열을 지어 장마당을 따라 나루로 향하니 보기에 제법 호기로웠다. 우시장을 지나 나루가 가까워 지자 뒤에 따라오던 추서사가 부지런히 앞으로 나섰다.
"추서사, 그렇게 서두를 것 없네. 배 거간이 나루에 나와 있을 것이야."
"아, 예. 그렇다면 배 거간이 이미 두뭇개로 가는 배를 알아 놓았겠군요."
"그러라고 보냈으니 그랬겠지."
문일평 일행이 강변으로 나와보니 수 십 척의 배가 나루에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배들은 저마다 각종 물화를 내리느라 사람과 물건으로 뒤엉켜 혼잡스러웠다. 추서사는 사람들 사이에 있을 배종개를 찾아 눈알을 바삐 움직였다.
"추서사. 여기요."
추서사를 먼저 본 배종개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 이 배가 두뭇개로 가오?"
"물화를 실으러 가는 배라고 하오."
"음, 저기 나으리 오시는군."
문일평 일행이 다가오자 배종개는 얼른 배에 올랐다. 배는 중선으로 선미를 뭍으로 하여 발판을 걸쳐 놓았다. 하나, 배의 높이가 한길이 넘어서 발판의 경사도 심한 편이었다. 그러자 젊은 문일도가 발판을 딛고 성큼 배로 올라갔다. 다음은 문일평의 부축을 받은 그의 아내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뱃전에 올라섰다.
"월이야, 애를 내려놓거라. 그리고 너 먼저 올라와서 아이를 받으려무나."
문일평의 아내가 월이를 향해 말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삼개로 가는 배를 찾던 안 거사가 월이라는 소리에 고개를 획 돌렸다. 월이는 안 거사의 짝인 사당의 이름이었다. 가득이나 색에 주린 놈이 수년간 붙어 다니던 월이의 이름을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길이 그 쪽으로 쏠렸던 것이다. 월이를 본 안 거사는 또 한 번 놀랐다. 자신의 짝이던 월이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생각은 춘정(春情)을 불러왔다. 안 거사는 배를 타려는 월이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막 발판을 디디려는 월이의 팔을 덥썩 잡으며 한 손은 은근슬쩍 허리를 감았다.
"아이고 물에 떨어질라. 처자, 발 조심하시우."
갑자기 낯모르는 사내가 허리를 안자 깜짝 놀란 월이가 입을 딱 벌리고 미쳐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제자리에 섰다. 그러다가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악,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아니? 저, 저자가?"
그 광경에 분개한 추서사가 발을 굴렀다. 안 거사는 그제야 한 발 물러섰다.
'철퍼덕.'
옆에 있던 문일평이 안거사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이런 실성한 놈을 보았나? 백주에 부녀자를 희롱하려 들다니? 이놈, 죽고 싶은 게냐?"
"어? 사람을 치네?"
호되게 뺨을 맞은 안 거사가 눈을 치켜 문일평을 노려 보았다. 그런 눈길에 더 화가 난 문일평이 다시 손을 버쩍 들었다. 그때였다. 치켜든 문일평의 손목을 누가 탁 움켜잡는 것이다. 문일평은 자신의 손목을 잡은 자를 돌아 보았다. 패랭이에 키가 껑충한 자였다.
"그만 하시오. 저 사람이 설마 부녀자를 희롱하려 했겠소?"
안 거사와 함께 송파의 객주들을 둘러보려 온 안도칠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육촌 동생인 안도팔의 잘못이 컸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수습할 필요가 있었다. 한데, 문일평의 눈으로 보면 패랭이 쓴 이 자도 못 마땅하긴 마찬가지였다. 패랭이를 썼으면 천것이 분명할진대 하오 말을 하니 기분이 썩 나뿐 것이다.
"이거, 놓아라. 저런 놈은 포청에 끌려가 태질을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릴 놈이야."
그러자 안도칠은 손에 힘을 주며 문일평의 귀에다 낮게 을렀다.
"양반 행세를 하려거든 옥관자라도 붙이고 하거라. 끽해야 대모(玳瑁) 관자인 놈이 누구에게 해라 말이냐?"
순간 어이가 없어진 문일평이 얼굴이 허옇게 변해서 할 말을 잊었다. 문일평의 팔목을 놓은 안도칠은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안 거사도 문일평을 죽일 듯 노려보더니 월이를 흘깃 돌아 본 후 사라졌다. 월이는 얼른 발판을 딛고 뱃전으로 뛰어올랐다. 그러자 추서사가 문일평의 아들 상구를 뱃전에 올려 주었다.
"형님, 어서 올라 오시오."
우두커니 선 형이 왜 그러고 있는지를 모르는 문일도의 재촉이었다. 추서사가 소매를 잡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문일평이 배로 올라섰다. 맹보가 뒤를 따랐다.
"음, 봉변이구나."
문일평이 신음과 같은 혼잣말을 뱉었다.
"무엇이 말이요. 형님?"
"아니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도사공이 배에 오르자 다른 사공들이 뱃전에 걸쳤던 발판을 걷었다. 사공 둘이 힘을 합쳐 장대로 뭍을 밀어내자 잠시 후 배는 물 위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노 젓는 소리가 삐걱거리더니 배가 강의 가운데로 들어서 속력이 빨라지고 있었다. 문일평은 그때까지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진골 양반은 아니지만 조상 대대로 나라로부터 가계 세습권과 거래 독점권을 부여받아 국역에 막대한 공을 세워 온 집안인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유푼각전(有分各廛)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자란 문일평이었다. 한데, 조금 전의 패랭이 쓴 자로부터 받은 모욕감을 떨칠 수가 없던 것이다.
"아까부터 형님의 얼굴이 심상치 않습니다. 말을 해 보세요. 혹시 뱃전에서 일어난 작은 소동 탓입니까?"
"별 것 아니래도 그러는구나. 옥 관자가 아닌 사람이 양반 행세를 한다는 소릴 들어 그런다. 어찌 보면 별것 아닌 소리에 불과하나 대대로 상인 집안인 내게는 수모 아니냐? 이럴 줄 알았으면 조정에 바칠 돈으로 벼슬이라도 사 둘 걸 그랬나보다."
그제야 형이 왜 그런 뚱한 얼굴인 것을 안 문일도는 큰 소리로 웃음을 날렸다.
"하하하, 참 형님 답지 못하십니다. 아, 그깟 쌍놈의 말을 들어 무엇합니까? 형님이 말씀하시는 그 벼슬이 언제까지 가는 세상입니까? 지난 해만해도 그렇지요. 죽거나 유배를 간 조정 대신들 모두가 우리가 준 뇌물을 받고 시전의 뒷배를 봐주던 자들 아닙니까? 가문 좋고 벼슬 좋던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땅 속에 있거나 저 땅 끝에 있습니다. 그러나 뇌물을 준 우리는 세상이 바뀌어도 끄떡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깟 패랭이 말에 일희 일비할 이유가 없지요."
"내가 그걸 몰라서 하는 소리냐? 듣지 않은 것만 못해서 그러지."
문일평은 이후로도 말이 없었다. 그러나 배는 흐르는 강물을 따라 잘 흘러가고 있었다. 송파에서 두뭇개까지는 불과 20여 리의 거리이나 강안(江岸)의 경치는 말할 수없이 좋았다. 두뭇개가 가까워지자 몽구정(夢九亭)이 보이더니 멀리 황화정(皇華亭)도 보였다.
"거, 참. 아무리 봐도 경치 하난 기가 막히게 좋단 말이야. 아니 그렇습니까? 형님?"
입을 다물고 있는 형의 눈치를 살피며 문일도가 너스레를 떨었다.
"얘, 내 기색을 살필 것 없다. 내릴 준비나 해라."
"형님의 기분이 풀어지셨으니 다행입니다. 하하."
배가 닿자, 문일평의 일행은 모두 땅 위로 내려섰다. 이어서 맹보 아범의 인도로 숫골을 지나 독서당고개를 향해 나아갔다. 두뭇개에서 문일평의 본가가 있는 연희방(延禧坊) 까지는 불과 십여 리에 불과해서 그의 아내가 나귀를 타지 않아도 될만한 거리였다. 문일평 일행이 독서당고개를 거의 다 넘어갈 무렵이었다. 앞장섰던 맹보 아범이 무엇을 보았는지 우뚝 섰다. 이상히 여긴 문일평이 앞길을 보니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한적한 산길에서 수십 명의 사람을 만난 문일평 일행이 모두 놀라서 제자리에 섰다. 여기서 멀지 않은 버티고개에선 대낮에도 산도적의 출몰이 빈번했기에 모두들 겁이 더럭 난 것이다. 한데, 가까이 다가온 그들의 복장을 보니 무당이 아니면 연희패 같았다. 왜냐하면 앞장선 남자들은 북이나 징, 또는 장고들을 매었고 뒤에 따르는 여자들은 붉고 푸른 소매의 저고리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남녀 합해 십 오륙 명이나 되었다.
"어디로 굿을 하러들 가시는가?"
맹보 아범이 기중 늙어뵈는 징잡이에게 말을 걸었다.
"송파 천마산 밑으로 금화 만신님의 신기(神氣)를 받으러 가오."
"보아하니 신당 사는 무당들 같으데 무당이 새삼 신기는 왜 얻는단 게요?"
늙은 박수의 대답에 다시 토를 다는 맹보 아범이었다.
"거참, 벼슬이면 조정 대신들이 모두 똑같은 벼슬이오? 영의정도 있고 현감도 있는 게지. 하물며 우리에겐 그 만신님이 임금과도 같단 말이요."
말을 마친 늙은 박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일평 일행을 지나쳤다. 맹보 아범은 그런 무당 패의 꽁무니를 멍하니 바라보고 섰다.
"천마산 아래에 용한 만신이 있단 얘기는 들었다만 같은 무당들끼리에도 품계가 있단 소리는 금시초문이로구나."
멀어지는 무당 일행에서 눈을 뗀 문일평이 앞 선 동생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참, 지난해 단옷날에 상조회의 황가 객주에서 큰 굿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번 단옷날에도 굿을 할 모양이지요?"
"허허, 그때는 그들이 다 생각이 있어 한 굿이니라."
"예? 굿하는데 무슨 생각하고 말 것이 있단 말입니까?"
"객주를 차려만 놓으면 물화가 마구 밀려오느냐? 나를 보아라. 객주를 차려 놓고도 거의 반년 동안 고방이 비어있었지 않느냐? 그래서 상조회의 힘을 빌렸었지. 그러나 황가 객주는 차리자말자 물화가 밀물처럼 밀려 들어 왔단말이다. 이게 다 그 사람들이 머리를 쓴 거란다. 굿을 핑계로 물주들을 초대해서 접대를 하고 시끄럽게 북과 징을 울려 사방에 광고를 한 결과란 말이다. 보나 마나 이번 단오에는 굿을 더 크게 할 게다."
문일평의 말을 듣던 동생 문일도가 갑자기 두 손바닥을 딱하고 마주쳤다.
"옳지, 그렇다면 우리 형제는 이번 단오에 다른 걸로 눈길을 끕시다. 오강(五江)의 물주들을 불러 접대를 하는 한편 남사당패를 끌여들여 한바탕 연희를 놀게 하자는 말입니다. 아, 말이야 바른 말로 굿거리 보다야 줄타기나 어릿광대 놀음이 훨씬 볼만하지 않습니까? 어때요? 형님?"
"음, 좋은 생각이다마는 그러려면 행료(行料)가 만만치 않을 것 아니냐?"
"그럼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사당 놀이야 어차피 집 안에서 할 수는 없는 것이니 송파 네거리에서 하지요. 그러면 송파에 있는 모든 객주가 덕을 볼 것 아닙니까? 그러니...."
"얘,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 다른 객주인들의 돈을 걷자는 말 아니냐?"
"바로 그것이지요. 송파가 다른 곳보다 번성하려면 경강의 객주뿐 아니라 도성 안에도 소문이 크게 나야 합니다. 그래야 팔도에서 으뜸가는 장마당이 될 거구요. 허니까 이번엔 우리가 통 크게 한 번 저질러 버리지요?"
"글쎄 나는 찬성이다만 아버님과 형님에게 물어보고 결정하자구나."
"에이, 아버님은 몰라도 큰형님에겐 물어볼 것도 없어요. 보나 마나 반대일게 뻔하잖아요? 말이 났으니 말이지 큰형님은 상고로서는 통이 너무 작아요."
"시끄럽다. 그건 실수를 하지 않으려는 형님의 성격 때문이야. 매사는 불여 튼튼이 왜 나쁜 것이냐? 아무튼 가서 의론을 한 다음 정할 일이니라."
문일평은 맏이인 문일재를 옹호하고 나섰다. 사실 일도의 말처럼 형인 일재는 답답하리만큼 매사가 신중한 인물이었다. 문일평 형제가 노닥거리며 걷는 사이 고개를 넘어 평탄한 길로 들어서자 곧 명철방(明哲坊)에 닿았다. 일행은 내친 김에 연희방을 향해 관우(關羽)의 영정을 모신 성제묘(聖帝廟) 옆길로 사뭇 나아가기로 했다.
그 시간에 안 거사와 두 칼잡이가 탄 배는 삼개 나루에 닻을 내렸다. 나루에는 강화나 제물포에서 올라온 수십 척의 배들이 줄을 이었고 뭍에서는 각종 물건을 내리고 싣느라 분주했다. 개중에는 돛대에 검은 헝겊을 매단 배도 한 척 있었는데 그 배는 상조회의 배였다. 배 위에는 몸집이 뚱뚱한 노탁우가 뒷짐을 지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탁우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방인근이 젊은 포교출신의 회원들을 닦달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거 봐, 박 포교. 소금이 떨어졌으면 진작에 내게 말을 했어야지 이제 와 그런 말을 하면 어쩌겠다는 게야? 저 많은 어물을 다 썩히게 생기지 않았느냔 말이야. 하, 이걸 어째?"
화가 난 방인근의 고함 소리에 노탁우가 한길이 넘는 뱃전에서 땅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칼 솜씨만큼이나 가볍고 날렵한 동작이었다.
"어찌 이리 소란한가?"
"부 회주님, 고방에 소금이 한 됫박도 없답니다. 이걸 어쩝니까? 이러다 저 어물이 다 상하고 말 겁니다. 그러지 않아도 시전 어 염전(魚鹽廛)에서 값을 올리려고 소금을 풀지를 않아서 돈이 있어도 살 곳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럼, 자네가 아이들 두엇 데리고 지금 당장 어염 객주로 달려가게. 어제 소금 배가 들어왔으니 물주가 아직 거기 있을 게야. 가서 상조회의 이름을 대고 협조를 구하게. 제놈도 상조회를 무시하진 못할 것이야. 대신 웃돈을 얹어 주게. 그 소금마저 시전으로 넘어가기 전에 어서 떠나게. 보나 마나 저걸 그대로 어물전에 넘기고자 하면 놈들이 낌새를 채고서 값을 후려칠 것일세."
"과연 그러합니다. 그대로 이행합지요."
방인근이 젊은 회원들을 이끌고 사람들을 헤치며 달려 나아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안도칠이 가래를 돋우어 바닥에 탁 뱉었다.
"저것들만 아니면 망태라는 놈이 해 먹든 대동계라는 것을 다시 만들어 편히 살 수 있을 것인데. 엥이."
"자네가 참게나. 땅개뿐만 아니라 장안의 깍정이 두목들이 모두 상조회에게 목이 달아났다는 소문을 듣지 않았나. 겉으로는 저희들끼리 싸우다 그랬다지만 알만한 왈짜들은 모두 알고서 몸을 사리지 않던가 말일세."
"아, 그러니까 우리도 다른 곳을 물색하자는 것 아닌가? 무질이 자네 눈에는 송파가 어떻던가?"
"물은 외려 이곳보다 나아 보이더구만. 하지만, 그곳에도 상조회가 발을 뻗었다니 우리가 해 먹을 수 있는 게 있어야지?"
"허긴 객주와 술청은 물론 뱃짐을 부리는 임방까지 새로 만들었다니 파고들 틈이 없지. 성질대로라면 놈들과 일전을 불사하고 싶지만 노탁우나 저기 달려가는 방인근은 우포청 시절부터 알아주던 실력이니 섣불리 어쩌지도 못하겠고....."
"그러니까 계획대로 돈 많은 다른 객주를 털어서 물 건너로 튀자고. 북쪽이 그나마 지대도 험준해서 길손이나 부상(富商)을 털어먹기가 좋을 것이네."
"이참에 그렇게 하기로 아예 못을 박지. 턴 돈으로 산채를 세우면 될 테니까. 참, 도팔이 네 생각은 어떠냐?"
안도칠이 말없이 걸어가는 안 거사를 보고 물었다. 안 거사는 송파에서 문일평에게 뺨을 맞은 후부터 이마에 내 천자를 그리고 통 말이 없었던 것이다. 안 거사는 줄곳 다른 생각에 잠겨 있어서 안도칠이 하는 말을 듣지 못했다.
"야, 도팔아."
안도칠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툭 치자 안 거사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느냐? 송파의 그 계집 생각이냐?"
"그렇소, 뺨을 맞고 나니 분해서 견딜 수가 없구려. 내 이참에 그놈의 집구석을 박살 낼 궁리를 하던 참이요."
"솔직히 말해 네가 먼저 맞을 짓을 한 것 아니냐? 그런데 무슨 앙심을 품는단 말이냐? 그리고 그가 어디 사는 누군지 알아야 분풀이를 할 것 아니냐?"
"나는 아오, 내 뺨을 친 놈과 같이 있던 자가 문가 객주에 있는 거간 놈입디다. 어제 송파에서 세 손가락에 든다는 객주를 돌아보았소. 가장 잘 되는 한 곳은 상조회의 황가 객주였고 두 곳이 문가 형제의 객줍디다. 한데, 그 객주의 거간이란 놈이 바로 거기 있더란 말이요. 그러니 내 뺨을 때린 놈이 큰 문가가 아니고 누구겠소?"
"오라, 일이 그렇게 돌아가는구나. 그렇다면 아예 큰 문가네 객주를 털면 되겠구나."
안 거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안도칠이 빙긋 웃었다. 그러자 무질이도 한마디를 보탰다.
"돈도 먹고 분풀이도 하겠단 말이지? 허헛, 도랑치고 가제 잡기로군. 좋네. 문가네가 돈이 많다면 그렇게 하기로 하지. 언제쯤이 좋을까?"
"서두를 일이 아닐세. 염탐도 해야 하고 들이칠 궁리도 해야 할 것이야. 게다가 털고 나서 도강을 하려면 배도 준비를 해야지."
"그래야겠지."
안도칠과 무질이 그리고 안 거사가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무쇠막(水鐵里)으로 걸음을 옮겼다. 임시 거처로 삼고 있는 바탕우물집 숯막으로 가려는 것이다. 그런데 저 멀리 와우산 아랫쪽 강변에서 북과 장고를 앞세운 한 떼의 사당이 올라오고 있었다. 안 거사가 선듯 앞으로 나서서 바라보니 같은 안성 사당패인 동춘이 패였다. 안거사가 모가비인 동춘이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오랫만이유, 모가비 성님."
"엥? 너, 춘길이네 거사 아니냐? 지금 춘길이는 어디 있느냐?"
"며칠 전까지는 송파 째보 아범 숯막에 있었소만 지금은 나도 모르오."
"모르다니? 사당 년들이 없어 아예 작파(作破)를 한 게로구나."
"뭐요? 우리 패에 사당 없는 것은 어찌 알았소?"
"이놈아, 우리도 귀가 있으니 들어서 알지. 춘길이와 덕만이가 안성 관아에 쫓겼다는 것도 다 알고 있단 말이다."
동춘이가 안 거사와 말을 하는 사이에 도칠이와 무질이가 다가왔다.
"성님은 먼저 들어가시유. 나는 이 모가비 성님과 예기를 더 하다가 가겠수."
"네가 데리고 온 거사 놈들이 일하는 곳에도 가 보거라. 그리고 힘들어도 당분간만 참으라고 해라."
"예, 그러지 않아도 그러려고 하우."
안도칠과 무질이는 안 거사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저만큼 걸어가고 있었다. 안 거사는 다시 모가비에게 바싹 다가가 힐긋힐긋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
"저, 혹시 관아에 잡혀 간 사당 년들이 방면되었단 소식은 없습디까?"
삼개를 향해 다시 발을 떼려던 동춘이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하였다.
"아니? 네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네놈들 때문에 다른 패도 안성장은 구경도 못하게 되었는데 사당이 어째?"
"아따, 모가비 성님도 딱하시요오. 그게 어디 내 탓이오? 춘길이와 덕만이가 저지른 일이지요."
"작파를 했다고 모가비 이름을 막 불러도 되는 거냐?"
"이 모가비 저 모가비 헷갈리니 그렇지요."
"까짓 것, 네 마음대로 불러라. 한데 작파를 한 거사들은 무얼 해 먹고 사느냐? 혹여 우리 패에 묻어갈 요량은 아니겠지?"
"춘길이 모가비는 그런 생각을 했나 봅디다만 우리 생각은 다른 곳에 있수. 조금 전 그 사람이 내 육촌 형이요. 그 형이 우리 애들을 객주에 한두 명씩 임시로 박아주었지요."
"춘길이나 덕만이가 다시 사당패를 꾸리려면 한참 걸릴 게다. 그럴 바엔 객주에 자리를 잡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참, 삼개에 연희를 하려고 왔소?"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다. 길양식이 간당 간당 하니까."
"안성에서 언제 떠났기에 그러우?"
"달포 동안 남도를 돌았으나 재미를 못 보아서 올라오는 길에 안성을 다시 들렸었지. 안성은 사흘 전에 떠나서 어제 양화에서 잤느니라."
"그럼 양화에서 뱃놈들에게 사당이라도 빌려주지 그랬소?"
"빌려주었으니 오늘 아침밥을 먹었지."
"삼개에서 판을 걷으면 어디로 가시려고 하우?"
"송파 장이 날로 커진다니 그리로 가볼까 한다."
"잘 되었수. 나도 송파에 볼 일이 있는데 동행하게 해주오."
"네 밥값은 네가 내면 누가 마다하겠느냐?"
"아따 인심 사납게 그러시오? 내가 그냥 놀러 가는 것이 아니란 말이요."
"보아하니 건수가 있는 게로군."
"그렇소."
"그렇다면 까짓, 우리 패에 잠시 끼워주기로 하지."
"원, 모가비 성님의 눈치가 보통이 아니구려."
"우리가 언제 사당패만 가지고 밥을 먹은 적이 있나?"
안 거사와 동춘패 모가비가 몇 마디 수작을 주고받다가 서로 대강 뜻이 통했다. 그날 오정이 지나 삼개나루의 도승에게 곰뱅이를 튼 동춘이 패가 객주와 숯막이 늘어선 앞길에 판을 벌렸다. 먼저 돗자리 위에 거사들이 늘어앉아 각기 갖고 있던 악기를 불고 두들기기 시작하자 술꾼과 장꾼들이 슬슬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에 신이 난 거사들이 더욱 흥겨운 가락을 뽑아내자 기다렸던 사당이 앞으로 나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노래가 끝나면 다음 사당이 이어받기를 계속하니 간들어진 노랫가락에 마음이 녹은 구경꾼들은 엽낭을 끌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모가비 동춘이가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다.
"역시 촌구석 열흘을 도는 것보다 대처에서 하루를 버는 것이 낫구나."
"이제 아셨수? 여기가 이러니 송파는 어떻겠수? 며칠만 놀면 한철 양식은 문제없을 거유. 그럼, 나는 이만 갈라우. 내일 아침에 나루로 나오겠수."
동춘패를 뒤에 두고 안 거사는 부지런히 육촌형이 묵는 바탕우물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탕우물집은 본래 숯막이어서 서너 개의 방이 있었다. 안도칠은 기중 뒷방을 얻어 밥까지 부쳐먹고 있었다. 안 거사가 도착하니 안도칠과 무질이가 마침 점심밥을 먹으려 든 차였다. 안 거사는 스스로 부엌으로 가서 제 밥그릇을 들고 왔다.
"성님, 아까 그 사당패와 예기가 되었수. 내일 송파로 같이 가기로 했단 말이요."
"너 혼자 가도 되겠느냐?"
"어려울 것이 무어요? 그놈의 객주에 몇 사람이 살고 누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면 될 것 아니요?"
"낮에는 몇 명이 있고 밤에는 몇인지도 알아야 하고 문일평이 낮과 밤에 기거하는 곳도 알아야지. 뿐만 아니라 하인들 중에 힘깨나 쓰는 자도 알아 놓는 것이 좋으니라."
안도칠이 입에 넣으려 든 숟가락을 멈추며 무질이를 돌아보았다. 내가 빠뜨린 것이 있으면 네가 말해보라는 표정이었다.
"혹여 누가 소리를 치면 도우러 올 자가 누구며, 거리는 어느 정도 인지도 알아두면 좋겠지."
무질이의 말이 끝나자 그제야 안도칠은 고개를 끄덕이며 숟가락을 물었다.
"거 참, 간단하게 생각했더니 화적질하기도 힘드는구려."
"산길도 아니고 동리 한복판에서 벌리는 일이 그리 쉽겠느냐? 잡혀서 포청에 끌려가지 않으려면 치밀하게 준비를 해야지. 어쨌든 네가 그것만 알아오면 나머지는 우리가 맡을 테니 걱정 말아라."
한편 연희방의 문기수네 집에 아비와 아들 삼 형제가 둘러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화제는 예상대로 날로 시들어가는 시전에 관한 것이었다.
"시전이 이렇게 나가다가는 필시 내가 우려했던 대로 되고 말 것이다."
시전의 폐단을 열거하던 문기수가 결론을 내리듯 한숨을 쉬었다.
"유비가 제갈량(諸葛亮)만 믿고 있듯 금난전권만 틀어쥐고 있으면 저절로 물건이 팔릴 줄 아는 도중(都中)이 더 문제지요."
막네 일도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거들었다. 그러자 이제껏 말 한마디 없던 큰형 일재가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 저었다.
"금난전권이 어떻단 말이냐? 난전을 막지 않으면 우리 같은 시전 상인들이 견디겠느냐? 그리고 너는 아버님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아버님이 도령위이신 걸 모르냔 말이다."
"아, 큰형님이 화를 내실 일이 아닙니다. 저는 있는 폐단을 지적했을 뿐이니까요. 말이 났을 제 말이지 없는 사람이 짚신 한 짝을 팔려고 해도 그 잘난 금난을 들먹이며 뺏으니 누가 물건을 만들려고 하겠으며 누가 도성 안에서 상거래를 하려 하겠느냐는 말이지요."
"그렇다고 잡살뱅이를 그대로 두면 너도나도 다 장사를 하려고 나설 것 아니냐? 그런 그들이 국역(國役)을 지느냐?"
"아이고, 큰형님과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장사에 대한 생각의 뿌리가 큰형인 문일재와 완전히 다른 문일도 였다. 누구든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서 사고팔아야 돈이 돌아가고 그 돈이 또 다른 물건을 만들어 더 많은 돈이 돌아간다는 것이 문일도의 생각이었다. 아비인 문기수도 막내아들의 생각과 같았다. 그래서 세 자식 중에 막내를 상인으로서는 가장 대성할 자식으로 본 것이다.
"여러 소리 할 것 없느니라. 현금(現今)에 이르러 조선팔도의 장시가 크게 요동치는 것은 사실이고 그러한 사실만큼 앞으로 도성의 시전은 머지않아 몰락의 길을 걸을 것이다. 가문을 이어 시전 상인이 되어야 할 너희 둘을 송파로 보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니 객주 하나로 만족하지 말고 송상의 최만기나 경상의 이명길이 같은 상단을 만들어 볼 궁리를 하여라."
아비의 말이 끝나자 이제껏 가만있던 문일평이 입을 떼었다.
"좋으신 말씀이나 송상이나 경상과 같은 자본을 쌓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경상만 하드라도 현재 5백 석 이상을 싣는 배가 2백 척이 넘는다 합니다. 지금도 조정에 줄을 대어 삼남의 세곡을 도거리로 실어 나르지 않습니까?"
아비의 말대로 되고 싶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문일평으로서는 지금의 객주를 만든 것만도 나름 대견한 일이었다.
"누가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냐? 물화의 거간에 목을 메지 말고 보부상을 직접 꾸려서 물건을 팔도에 뿌리란 말이다. 보부상이 늘어나면 남이 한 개 팔 동안 너는 열 개를 팔 것 아니냔 말이다."
"아버님, 그것이 평소에 제가 갖고 있던 생각이옵니다. 그래서 약간의 조치도 취해 놓았구요. 상단이 짜이는 데로 곧 원산에 방(房)을 설치하여 북어 매집에 힘을 기울일 것입니다."
막내 일도가 재빨리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런 막내가 대견한지 아비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막내는 아비가 지시한 일이 잘 되고 있다는 뜻을 완곡히 알린 것이다. 춘길이와 덕만이에게 자금을 대기로 한 것은 막내와 아비만 알뿐 두 형들에겐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막내의 말대로 되려면 우선 객주부터 더 탄탄히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문가 객주라면 어떤 물주라도 물화를 맡기고 싶도록 해야겠지요. 그래서 우리 객주의 어음이라면 팔도 어디서든 기꺼이 받을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네 말도 맞는 말이다. 그리되려면 우선 송파장이 팔도에서 가장 물화가 많이 돌아가는 곳이어야 할 것이다."
"어차피 송파는 그리 될 것입니다. 도성과 팔도가 가장 잘 연결되는 곳이 송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일도와 제가 이번 단옷날에 송파장에서 한바탕 연희판을 벌일 생각입니다. 연(鳶)을 띄우려면 바람이 있어야 하듯 송파에 바람을 불어 넣으면 더욱 번성할 테니까요."
"음, 그건 잘 생각한 일이다. 기왕 볼거리를 만들려면 성대하게 해라. 그래야 돈을 쓴 보람이 날 테니까. 한데, 연희 패는 구했느냐?"
"내일 송파로 가는 즉시 방자들을 띄우려고요. 지금쯤이면 파시(波市)를 쫓아 강화나 제물포에 와 있는 광대패가 여럿일 것이니 단오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원래 송파에 연희 패를 불러오자고 먼저 의론을 낸 사람은 동생인 문일도였으나 지금은 문일평이 아비에게 더 열을 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연희 패에게 지불할 행료는 송파의 모든 객주에게 골고루 걷으면 되겠구나."
"그러지 않아도 그렇게 하기로 일도와 의논이 되었습니다."
아비의 말에 즉각 문일평이 대답하였다. 역시 상인 집안다운 셈법을 각자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튿날 안거사는 동춘이 패에 붙어서 송파로 가는 배를 탔다. 송파에 닿자 모가비는 연희의 허가를 얻으러 진별장(津別將)을 찾아가고 안거사는 느린 걸음으로 장마당 쪽으로 올라갔다. 안 거사는 문가 객주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물건을 들이는 것을 보고 자신도 일꾼 인양 슬그머니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슬금슬금 객주의 구조와 인원을 헤아려 보았다. 객주는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물화를 쌓아두는 고방도 열 개나 되었고 장책을 들고 있는 서사도 오륙 명이나 되었다. 마당 한켠에는 마방이 줄지어 있었고 따라온 하인이나 물주가 묵는 방도 여럿이었다. 그중 가운데 방으로 서사가 드나드는 것을 보니 행수가 묵는 방인듯 보였다. 보나 마나 큰 문가는 행수에게 이곳을 맡기고 자신이 기거하는 곳은 따로 있는 듯 하였다. 안거사는 들어 올 때와 마찬가지로 슬그머니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상조회의 황가 객주와의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를 따져 보았다. 안 거사의 걸음으로 쉰 걸음쯤 되었다. 너무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거사는 며칠을 두고 좀 더 살피기로 했다. 그는 쇠전거리로 발길을 돌렸다. 동춘이 패가 우시장에서 연희를 놀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날 오정 때쯤 문일평 일행은 송파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말자 아랫사람들에게 연희 패를 알아보라 일렀다. 그리고는 서사를 시켜 객주 입구에 진서와 언문으로 방(榜)을 써 붙이게 했다. 물론 단옷날 연희가 벌어지리란 내용이었다. 문일도의 객주도 마찬가지의 방이 붙었다. 그런데 삼개로 노탁우를 모시러 갔던 황구만이 문일평의 객주를 지나오다가 그 방을 보았다. 같이 오던 노탁우 역시 방을 읽어내려 갔다. 읽기를 마친 노탁우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헛, 시절이 이렇듯 빨리 변하는 세상을 내가 살고 있다니 기가 막히군."
"예? 저 글에 혹여 잘못된 곳이 있으신지요?"
황구만이 노탁우의 한숨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려 물었다.
"장사가 힘이 들긴 드나 보군. 저건 필시 자기의 객주를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수작 아닌가? 이런 건 옛적에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 아닌가 말이야."
노탁우가 한숨을 쉰 연유를 안 황구만의 오종종한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원래가 장사와는 워낙 거리가 멀었던 노탁우가 그나마 요즘 들어 상고의 이치를 많이 깨친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저렇게 해서라도 객주가 더 흥하기만 한다면 백 번이라도 해얍지요. 상조회만 하더라도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한바탕 굿을 준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참, 그러고 보니 그렇군. 그 굿도 사실 상조회 객주와 술청을 여러 사람의 눈에 띄게 하려던 것이었지."
"그렇습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빠르게 따라잡으려면 남이 하지 않는 생각을 해야 합지요."
"일리가 있는 말일세."
두 사람이 주고받으며 오일중이 기거하는 사삿집으로 향했다. 오일중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객주나 술청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객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초가집을 마련하여 홀로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삽짝을 들어서니 댓돌에 갓신이 놓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에 노탁우가 큰 기침으로 내방을 알린 다음 마루로 올라섰다.
"회주님, 저 노탁우 올시다."
"들어 오게나."
기다린 듯 즉시 오일중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탁우와 황구만이 방으로 들어섰다.
"그간 무량하오신지요?"
"무량 하기 보다는 무료했다고 해야 옳겠지. 앉게들."
"예, 한데 무료하시다 함은 무슨 말씀이신지요?"
노탁우와 황구만은 동시에 오일중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마주 앉았다.
"아닐세, 그것보다 우선 자네에게 물어볼 것이 있네. 지금까지 우리 상조회에 들어온 포교는 몇 명이나 되나?"
"예? 갑자기 그건 왜 하문하오시는지요?"
"음, 지난번 삼개 객주의 소동으로 내 그동안 생각이 많았네. 해서, 내가 생각했던 바를 자네들과 의론을 해 보고자 해서 일세."
"예. 그러시군요. 포교는 현재 쉰두 명이옵고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는 이것을 보시면 되옵니다."
노탁우는 말을 하는 한편으로 소매 속을 더듬어 한 권의 작은 서첩(書帖)을 꺼내 오일중 앞에 밀어 놓았다. 그러나 오일중은 서첩을 집지 않고 노탁우와 황구만에게 눈길을 주었다.
"쉰 둘이라.... 생각보다는 적은 숫자로군."
"적다니요? 재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서른 명을 먹여 살리기도 벅찼었습지요."
"그랬었지. 허나 지금은 그때보다는 다소 여유가 생기지 않았는가?"
"그때에 비하면 여유가 한참 남아돌긴 합니다."
"그동안 애들 썼네. 다 자네들 덕분일세."
"저야 한 일이 있습니까? 여기 있는 황방장이 안(案)을 내고 부지런히 뛴 덕이지요."
노탁우가 황구만을 돌아보며 한 말이었다. 그러자 황구만은 황급히 손을 내 저으며 고개까지 흔들었다.
"아니오이다. 소인이 한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오이다. 우리 상조회가 클 수 있었던 것은 회주님의 결단력으로 이루어진 것 입지요. 저는 다만 두 분의 심부름만 한 것이오이다. 네."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며 손을 내 젓는 황구만의 말을 듣던 오일중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장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상조회에 자네가 끼친 공로는 내가 알고 있으니 됐네. 허고, 내가 회원으로 등재된 숫자가 적다 함은 다름이 아닐세. 이쯤에서 우리 상조회는 또 한 번 도약을 했으면 하는 생각 때문일세. 이를테면 경상이나 송상 같은 상단으로 말일세."
노탁우는 전혀 뜻밖의 일이었든 지라 오일중의 의중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황구만은 진작 생각해 두었던 것처럼 입을 열었다.
"옳으신 말씀이 옵니다. 기왕 장사를 시작했으면 대상 부고로 한번 일어서 볼만 합지요. 어중간한 상고는 뺏기기 십상이나 팔도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상고는 나라에서도 어쩌지 못하지요. 송상이나 경상을 보시옵소서. 그들은 이미 조정에서도 손을 대지 못하옵니다. 게다가 경상의 경우는 더욱더 커져서 이제는 시전에 버금갈 부를 쌓았습니다. 근자에는 손을 대지 않는 물목이 없사옵니다. 수백 척의 세곡선을 가진 그들이 미곡(米穀)과 장목(長木)을 독점 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어염과 북어의 매집까지 나서려 합지요. 그것마저 그들의 수중에 들면 우리 상조회가 설자리는 더욱 좁아질 것이옵니다. 그러지 않아도 회주님께 언제 말씀을 여쭈어보려던 참이었사 옵니다."
오일중은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는 황구만의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황방장의 생각도 그러하다면 쉽게 의논이 되겠구먼. 이보게 노부장."
부 회주라는 직함 대신 부장이라고 부르는 말에 노탁우는 흠칫 놀랐다. 오일중이 포도부장이던 자신을 그렇게 부른 것은 포도청을 그만둔 이후 몇 번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분위기로 봐서 그만큼 친밀감을 나타내는 호칭도 없을 것이었다.
"예, 회주님."
"앞으로는 포교 출신들 가운데 밥벌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좌우 포도청을 따지지 말고 다 받아주게. 나이도 따지지 말게. 포교 출신이면 무예는 다들 한가락씩 지녔을 테니 장사로 먹고 살 각오만 있으면 되네. 그래야 자신의 가솔이나 상조회에 보탬이 되는 것일세. 술고래나 노름을 좋아하는 것들만 빼고 오겠다는 자는 다 받아주게. 그러면 계속 삼개로 보내 장사를 가르친 다음 상단을 꾸리면 될 것이야."
"하나, 옛적에 떨려 난 포교들 가운데는 폐인이 된 자가 많습니다."
"그럴 게야. 그짓마저 그만두면 금세 패인 되기 알맞지."
"실로 그러합니다. 어쨌든 힘써 모아 봅지요."
"회원의 수가 늘어나면 거래할 물화도 지금보다 훨씬 많아질 것 아닌가? 안 그런가 황방장?"
지적을 받은 황구만이 오종종한 얼굴에 웃음을 띠며 눈을 반짝였다.
"송파에도 몇 곳 가가(假家)를 내어 방매(放賣)를 하는 한편 보부상을 꾸려 팔도에 물화를 팔면 될 것이 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늬 상고들의 도가(都家) 노릇을 하는 것이 유리하옵니다. 그들의 손을 빌려 우리의 물화를 파는 셈이니까요."
"과연 옳은 말이로다. 내 자네에게 또 한 수 배웠구나."
황구만의 말에 노탁우가 먼저 무릎을 탁 치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무사(武士)인 노탁우가 미쳐 생각도 못한 것을 황구만이 깨우쳐 준 때문이다.
"그러면 삼개는 방인근에게 맡기고 노부장 자네는 당분간 나와 함께 지내며 일이 되는 것을 점검하도록 하게나."
"예, 그리 합지요."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지. 황방장은 뭐 다른 할 말은 없는가?"
의논이 끝났음을 알리는 오일중의 말이었다. 그러자 할 말이 남았다는 듯 황구만이 선뜻 입을 떼었다.
"한 가지만 더 말씀 올립니다. 오다가 보니 문가 객주가 방(榜)을 붙였삽는데 단옷날 남사당과 광대패를 불러 송파 장마당에서 큰 연희를 베푼다고 하옵니다. 이는 분명 우리 상조회가 작년 단옷날 굿을 하여 널리 알린 것을 흉내를 내는 것이옵니다. 허니 이참에 우리가 선수를 처서 이곳 객주 주인들을 모아 합동으로 더 성대한 굿판을 벌이는 것이 어떠하올지요? 먼저 송파나루의 무탈을 빌고 지신을 밟고 달래서 송파가 더 번창하게 해 달라는 것이니 객주인들이 마다하지 않을 것이 옵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일일세. 굿이란 어찌 보면 미신(迷信)이라 내칠 것만도 아니지 않는가? 앞날을 모르는 게 인생이라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한 것이지 어차피 매년 하기로 한 것이니 그렇게 하게. 참, 단오가 며칠이나 남았나?"
"예, 오늘이 4월 스무 이틀이니 열 사흘이 남았군요."
"시일이 촉박하겠군. 객주인을 모으는 것은 황방장이 하고 그들을 설득하는 것은 노부장이 하면 되겠군."
"그렇게 하겠습니다."
잠시 후 황구만은 오일중의 방을 나와 자신의 객주로 향했다. 그리고는 서사를 시켜 방을 쓰게 하였다. 방의 내용은 물론 단옷날의 큰 굿을 알리는 것으로 순 언문(諺文)으로만 썼다. 같은 것을 여러 장을 쓰게 한 황구만이 일꾼들을 시켜 장마당 곳곳에 붙이게 하였다. 그런데 방을 붙이러 하인들이 대문을 나서기도 전에 한 떼의 사람들이 징과 꽹과리를 왕창 두들기며 황구만의 객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깜짝 놀란 황구만이 방문을 열고 나와보니 열댓 명의 무당들인지라 또 한 번 놀랐다. 아직 기별도 안 했는데 어찌 알고 몰려든 것이란 말인가? 게다가 자세히 보니 작년 단옷날 불러왔던 그 무당 패였다.
"아니? 자네들은 무쇠막 복개당(福介堂) 근처의 무당들 아닌가? 오라,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굿판을 벌이나 알아보러 온 게로군."
황구만의 말에 작년에 굿을 주관하던 천금(賤今)이라는 늙은 무당이 앞으로 나왔다.
"그냥 객주만 하겠다면 우리들로 족할 것이요. 하나, 상단을 만들어 경상이나 송상처럼 되려는 생각을 한다면 우리로선 어림없는 노릇이오. 나라에서도 어쩌지 못할 대상 부고를 우리 따위 새끼 무당이 어찌 감당하오? 그러니, 금년은 사양하겠소."
늙은 무당의 말을 듣는 순간 황구만은 그만 염통이 찌릿함을 느꼈다. 아무리 귀신과 노는 것이 무당이라지만 조금 전 노탁우와 함께 오회주의 방에서 나눈 얘기를 어찌 저 무당이 알고 있단 말인가? 황구만은 정신을 차리려는 것처럼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는 차에 역시 시끄러운 소리를 따라온 노탁우가 황구만이 그러고 있는 꼴을 보았다.
"자네 왜 그러나? 무슨 일인가?"
"아니 옵니다. 우연히 나온 얘기에 잠시 혼미했습지요."
"허, 그러지 않아도 무당이 필요한 시점에 이렇게들 알아서 왔으니 용하구먼."
노탁우는 감탄의 말과 함께 늘어선 무격(巫覡)들의 면면을 차례로 훑어 보았다. 그러자 아까 그 늙은 무당이 또 한마디를 하였다.
"칼 쓰는 데는 날렵한 양반이 생각은 무디구려. 포도청에 득실거리는 젊은 포교들을 두고 하필 옛날에 떨려난 포교만 그러모으려 하오? 지금의 포도청 포교들도 가솔만 책임져 준다면 서로 오려고 난리를 칠 것이오. 어차피 급료도 없는 포교 보다야 상조회 상인이 백번 나은 업(業)이 아니냔 말이요?"
"엉? 뭐라 했느냐? 떨려난 포교라니? 그 말을 누구.... 누구에게서....?"
노탁우 역시 입이 벌어져 할 말을 미쳐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 제정신으로 돌아온 황구만이 늙은 무당을 바라보았다.
"과연 군왕신(君王神)을 모시는 영험한 무녀로군. 한데, 그리 용한 자네가 어째서 새끼무당이라는 갠가? 늙어서 힘에 부치는가?"
"흥, 늙었어도 아직은 굿판에만 들어서면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뛸 수 있소. 하나, 오강(五江) 물길 속의 용왕을 달래자면 우리 만신님의 힘을 빌려야 한단 말이요."
"뭐라? 자네 위에 무당이 또 있단 말인가?"
"만신님에 비하면 우리는 그야말로 새끼 무당 밖에 안 되오."
"그 만신이란 무당은 어디 살며 몇 살이나 먹었는가?"
"가까운 천마산 아래 큰무당 있다는 얘기를 못 들었다니 그야말로 등하불명이구랴."
천금이란 늙은 무당의 말에 잠시 넋이 나갔던 노탁우도 제정신을 차렸다.
"이보게 황방장. 더 들어 볼 것도 없네. 저 늙은이가 저리 용한데 만신이란 큰무당은 얼마나 용하겠나. 만신이란 무당을 부르기로 하지."
노탁우의 말에 황구만이 미쳐 대답도 하기 전에 천금이란 무당이 먼저 입을 열었다.
"흥, 내가 용한 것이 아니요. 이제까지 내가 한 말은 모두 우리 만신님이 미리 내게 일러 준 말이요. 허고 만신님 말씀이 송파 땅에 돈 기운을 불어넣으려면 금년에는 가근방의 모든 무당을 불러야 한답디다. 그러니 우리는 단오 전날에 다시 오겠소. 알았으면 이만 우린 가오."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징과 꽹과리를 한바탕 두들기던 무당패가 썰물처럼 마당을 빠져 나가니 모여 섰든 수십 명의 포교와 일꾼들 그리고 물주와 하인들이 영문을 몰라 벙벙한 얼굴로 서로를 돌아 보았다. 어쨌던 노탁우와 황구만이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특히 노탁우는 더욱 놀라서 당장에 오일중에게로 달려가 보고 들은 대로 고하였다. 그러자 오일중은 담담한 얼굴로 말하였다.
"귀신이 있어서가 아닐 것이야. 동서고금을 살펴보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통달한 사람이 종종 있었지. 천마산 아래의 만신이란 무당이 또한 그러해서 송파의 앞날과 우리를 손금 보듯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게지."
이틀 후였다. 동춘이 패에 붙어 있던 안 거사가 멀리서 문가 객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까지는 객주의 구조와 드나드는 사람을 살폈으니 오늘은 문일평의 사처 집을 감시할 생각이었다. 문일평의 집은 객주와 붙어 있었고 밖에서 보았을 때 토담을 두른 열 칸 정도의 초가집이었다. 하지만 아침에 객주로 나가는 문일평을 본 후 오정 때까지 드나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점심때 문일평이 들렸다 다시 나간 것 말고는 출입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다. 멀리 언덕 위에 앉아 종일 문일평의 집만을 내려다보고 있던 안 거사가 짜증이 나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드나드는 사람이 없다면 까짓 한밤중에 사처만 확실히 덮친다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안 거사는 천천히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드니 문일평의 집에서 아이를 업은 웬 여자가 삽짝 밖으로 나와 잠시 서성이더니 다시 들어가는 것이다. 멀어서 자세히 보지는 못 했으나 옷 모양이나 행동으로 보아 며칠 전 뱃전에서 자신이 허리를 안아 본 월이라는 그 처자 같았다. 그러니 그때처럼 주인집 아이를 업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대목에서 안 거사의 머리에 좋은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안 거사는 입가에 느물느물한 웃음을 물고 천천히 우시장으로 향했다. 우시장에서는 연속 사흘을 연희를 놀고 있었다. 언제나 소 숫자의 두 배가 넘는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이 우시장이라 동춘이 패의 연희와 사당의 벌이가 연일 좋았던 것이다. 안 거사는 모가비 동춘이를 찾아가 말하였다.
"성님, 나는 이 길로 삼개로 돌아 갈라오."
"알아 볼 건 다 알아보았단 말이냐?"
"그렇수. 성님은 어쩔라우? 단옷날에 이곳으로 돌아오실 라오?"
"그럼 와야지. 그러지 않아도 문가 객주에 연희를 놀기로 언약을 받았다. 남사당과 꼭두쇠들도 부른다는데 우리 안성 사당패가 빠질 수 있느냐?"
"그때쯤 황구 패도 끼였으면 좋겠수. 황구 패도 안성을 더듬어 올라올 것 아니오?"
"그 놈. 또 안성 관아에 잡혀간 사당 년을 생각하는구나."
"왜 아니겠수. 그놈의 정이 탈이오. 삼 년을 업고 다닌 사당이라 쉬이 잊혀지질 않소."
"어쨌던 너도 단옷날에 다시 보자꾸나. 우리는 그사이 강화 파시나 훑고 오련다."
동춘이와 헤어진 안 거사는 나루로 내려와 삼개로 가는 배를 탔다. 안거사는 삼개에 내리자 곧장 무쇠막으로 향했다. 저녁때가 다 되었으니 안도칠과 무질이는 이미 바탕우물집에 와 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안도칠은 뒷방에 와 있었다.
"성님, 나 왔수."
"뭐 하다 이제야 나타나는 게야? 사흘씩이나 알아볼 것이 있더란 말이냐?"
"아, 잡혀서 포청에 끌려가지 않으려면 치밀하게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 성님 아니요? 그래서 샅샅이 알아오느라 늦은 걸 가지고 탓을 하면 어쩌우?"
"거 발끈하는 성질은 여전하고나. 그래 알아 본 결과가 무엇이냐?"
"거, 객주를 힘으로 쳐들어가기는 어렵겠습디다. 생각보다 객주에 기거하는 놈들이 많더란 말이요. 행수에 서사에 하인에 물주까지, 여하튼 우리만 가지고는 안 될 일이오. 게다가 상조회의 객주와는 불과 오십여 보 밖에 안 됩디다."
안되는 이유를 손가락을 꼽아가며 설파하는 안 거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안도칠의 얼굴이 이그러지기 시작했다. 잔뜩 기대를 하고 있던 머릿속 엽전이 좌르륵 쏟아지는 느낌이 든 것이다.
"결국 문가 객주를 털면 안 되는 연유만 잔뜩 알아 왔구나. 그럼 어떤 곳을 털면 좋을지는 안 알아보았느냐?"
"알아보나 마나 그야 문가객주가 아니겠소?"
"뭐라? 네가 지금 이 형을 놀리느냐?"
"참, 성님도... 문가객주를 힘으로 털면 안 된다고 했지 꾀로 털면 안 된다고 하지는 않았잖수?"
"그건 또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냐?"
"그게 말이요, 성님. 내게 기가 막히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단 말이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이번 일은 칼도 주먹도 필요 없소. 힘쓸 것도 없고 위험할 것도 없는 일이란 말이요."
궁금증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안도칠이 안 거사를 노려 보았다. 참고 참아서 들어는 보되 만약 시답잖은 안을 낸다면 단번에 주먹을 내 질러버릴 마음까지 먹었다.
"그래 그 기가 막힌 생각을 말해 보려무나."
"납치요."
"엉? 납치? 누굴 말이냐? 문가를 말이냐? 아니 여자도 아닌 문가를 잡아다 어디다 쓴단 말이냐?"
"성님 말대로 그깟 문가를 잡아다 무얼 하겠소. 그 아들을 잡아와야지요."
"무어라? 문가의 아들 말이냐? 몇 살이나 먹은 애냐?"
"서너 살 되어 보입디다. 그 애만 잡아 놓으면 문가는 아마 눈이 뒤집힐게요. 그러면 우리가 요구하는 돈이 얼마든 아까운 생각이 들겠소? 그러니 우리가 무거운 돈을 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오. 장소만 정해주면 돈을 제 스스로 운반해서 우리가 원하는 곳까지 갖다 줄 테니 말이요. 어떻수? 우리는 손가락 하나 꼼짝 않고 몇 백냥 먹는 수가 아니요? 이보다 안전하고 쉬운 돈벌이가 어디 있겠소?"
안 거사의 말이 끝나자 안도칠은 생각이 복잡해져서 한동안 꼼짝을 않았고 오히려 비스듬히 누웠던 무질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수도 있었구나. 한밤중에 칼 들고 쳐들어가 손발 묶어 재갈 물리고 어쩌고 하다가 혹여 이웃에 알려지면 칼질은 피하지 못할 터..... 어이 도칠이, 자네 동생 말이 백 번 옳은 말일세. 그렇게 해보자고."
새로운 엽전 구덩이를 발견한 무질이가 선뜻 안 거사의 안에 동의하고 나섰다. 그제서야 안도칠도 그 수가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질만 돈벌이가 되는 것이 아니었구나. 목숨을 걸고 칼질을 해 왔건만 먹고 자는 것만 편했었지 언제 한번 목돈을 쥐어나 보았던가? 좋아, 그렇게 해 보자구."
"허면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누구와 있더냐?"
무질이가 관심을 가지고 적극 덤비는 눈치였다. 그제야 안 거사는 느긋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려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요. 이런 일에는 힘보다 꾀로 해야 하는 법이니 앞뒤가 딱 떨어지게 손발이 맞아야 하우. 그러니 먼저 일할 사람을 뽑아야 하우."
"우리 말고도 필요한 사람이 더 있어야 한단 말이냐?"
안도칠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렇지요. 대낮에 우리가 아이를 안고 튈 수는 없지 않소? 밤에도 마찬가지요. 화적질하듯 담을 넘어가 아이를 뺏고 인명을 결단 내면 돈은 누가 내우?"
"그러니 네게 묻는 게 아니냐? 그래 언제쯤 실행하면 좋겠느냐?"
"내가 아까 배를 타고 오면서 생각해 둔 것이 있으니 성님들은 그저 내 말대로만 하우."
"일이 틀림만 없다면 네 말을 듣고 말고지."
드디어 안 거사가 안도칠과 무질이와 동급이 되는 순간이었다.
"거사는 단옷날 하는 것이 여러모로 안전하고 일이 쉽소. 단옷날 송파엔 무당과 박수들이 모여 대굿을 벌린답디다. 그리고 남사당과 꼭두쇠가 모두 모여 쇠전 마당이 법석을 떨 것이오. 그러면 사람들의 눈길은 온통 볼거리에 쏠릴 것 아니요? 아무튼 그날의 송파는 인산인해에 소란하기 그지없을 테니 그 틈을 타 아이를 고리짝에 담아 나올 것이요. 대낮에 그것도 장마당에서 고리짝을 지고 가는 것을 의심할 사람이 어디 있겠수? 그러니 태연히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면 될 것이요."
"그럼 사람은 누구를 쓰느냐?"
"참, 성님두 딱하시오. 내가 거사 놈들을 그냥 데려왔겠소? 그놈들은 수년을 같이 지내서 속속들이 다 아는 놈들인데다 손발도 대강 맞으니 습련만 좀 하면 될 것 아니겠소?"
"그렇겠다. 단옷날까지 며칠이나 남았지?"
"아직 열 하루가 남았으니 그동안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오."
그때쯤, 춘길이와 덕만이는 강화 길상산 아래의 탕개네 대장간에 와 있었다. 탕개는 예순이 가까운 노인으로 홀홀단신 외톨이었다. 변산 부안에서 이곳으로 쫓겨 온 후 호구지책으로 차린 것이 또 대장간이었다. 아는 것이 쇠를 다루는 것 밖에 없기도 했지만 마침 대장쟁이가 죽어 내놓은 대장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말이 대장간이지 풀무간에서부터 모든 연장이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탕개는 풀무간을 새로 만들고 연장을 고치고 다듬고 나서야 간신히 호미나 낫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논은 있어도 밭이 별로 없는 강화이고 보니 호미 같은 농기구는 잘 팔리지 않았다. 그래서 만들기 시작한 것이 고기잡이배에 쓰는 닻이나 갈고리였다. 젊었을 적에 전라 좌수영에서 쇠를 녹여 화포를 만드는 야장(冶匠)이었든 지라 배에서 쓰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화승총을 만들다 이곳으로 쫓긴 이후엔 더 이상 총은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사흘 전 덕만이가 춘길이란 자와 함께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게다가 졸개로 보이는 두 놈을 달고서 였다. 덕만이란 놈은 년 전에 만들어 준 총을 내 보이며 서너 자루의 총을 더 만들어 내라고 하였다. 물론 목숨이 걸린 일이기에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덕만이와 춘길이란 자가 합동으로 탕개를 겁박하기 시작했다. 관아에 발고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틀의 실갱이 끝에 탕개가 항복을 하였다. 그래서 오늘 아침부터 풀무간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데리고 온 졸개들이 탕개를 도와 풍구질과 매질을 하기로 하였다. 단 석 자루만 만들되 값을 스물 닷 냥으로 정했다. 스물 닷 냥이면 쌀이 여덟 석이 넘었다. 어차피 혼자 몸이니 여차하면 대처로 가서 살 궁리를 한 것이다.
"이보게 덕만이, 총을 제대로 만들자면 한 자루를 만드는데 보름이 걸리네. 낮에는 남의 눈이 있으니 밤에만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일세."
"그러면 너무 늦소. 석 자루든 넉 자루든 열흘 안에 끝내야 하우."
"정신 없는 소리일세. 열흘이면 한 자루도 힘드네."
"그럼 낮에도 일을 하면 될 것 아니오?"
"남의 눈은 어쩌고?"
"이런 산 밑에 닻이나 갈고리를 만들러 오는 사람이 일 년에 몇이나 된다고 그러오? 혹여 누가 오더라도 크지도 않은 총신이야 풀무간에 던져 감추면 그만 아니요?"
덕만의 말에 탕개는 잠시 생각하더니 결심을 굳힌 듯하였다.
"좋네. 이런 찜찜한 일은 나도 길게 끌고 싶지 않네. 그러면 저 아이들뿐 아니라 자네들도 나를 도와야겠네. 우선 거푸집을 만들 흙을 곱게 채질해야겠네."
"잘 생각하셨소. 낮이나 밤이나 시킬 일이 있으면 시키시요. 우리가 일을 했다고 해서 총값을 깍지는 않으리다."
"헛, 빨리 만들어 주는 속행비(速行費)를 내라 할 참이었네."
탕개는 일을 서둘러 시작했다. 졸개인 말봉이와 도칠이는 탕개가 시키는 대로 흙을 채치고 채친 흙에 재를 섞고 있었다. 그 사이 탕개는 곧은 오동나무 가지를 구해 다듬었다. 점심때가 되어 밥을 먹는 자리에서였다.
"총은 내가 만들 줄 알지만 화약까지는 만들지 못하네. 자네들에게 화약과 연환은 충분한가?"
춘길이와 덕만이에게 탕개가 불쑥 물었다.
"우리에게 그런 여분(餘分)이 있을 리가 없지요. 내 총만 하더라도 십여 발 쏠 것 밖에 없소."
"허어, 그렇다면 총을 다 만들어 봐야 지겟작대기나 다름이 없겠군."
"그럼, 화약을 구할 데는 없겠소?"
"돈만 많이 준다면 혹여 구해 줄 놈이 있을지도 모르지."
탕개의 말에 춘길이와 덕만이의 눈이 번쩍 떠졌다. 화약을 구하기가 총을 구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왜냐하면 화약의 제조법은 알 수도 없지만 안다 하더라도 유황과 염초를 구하기가 지난(至難) 한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화약을 구할 수만 있다면 돈이 문제인가? 어차피 문일도의 돈이 아닌가? 그러지 않아도 혹시 화약을 구할 수 있을까 싶어 돈은 넉넉히 얻어 온 것이다.
"어디가면 구할 수가 있겠소? 당장 달려 가리다."
춘길이가 먼저 나섰다. 총이 몹시 갖고 싶던 춘길이었다. 춘길이가 곤봉을 잘 써서 그것으로 팔도를 다니며 접전도 여러 차례 치러 보았지만 아무래도 총보다는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보통 사람은 빈 총만 들이대도 벌벌 떨며 가진 것을 곱게 내놓았다. 화약도 연환도 쟁이지 않았고 심지어 화승에 불을 붙이지도 않은 빈 총인데도 말이다. 하나, 곤봉은 꼭 맞아서 골통이 터져야 무서운 줄 아는 것이다. 지난해 축석고개의 양반 놈도 이마를 맞고 돌아서서 도망을 치려다 뒷통수까지 맞고서야 쓰러졌던 것이다.
"어디요? 아, 말을 해 보우."
춘길이가 다시 닦달했다. 그런 춘길을 향해 어쩔 수 없다는 듯 탕개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바로는 이곳 강화에 진(鎭)이 다섯에, 보(堡)가 일곱이요 돈대(墩臺)가 쉰셋이나 된단 말일세. 내가 보와 돈대를 거론하는 연유가 무엇 때문인지 알겠는가? 이 많은 돈대를 지키자면 화포는 또 얼마나 많겠는가? 화포가 많으면 당연히 화약도 많겠지? 물론 화약은 엄중한 감시가 있어 밖으로 빼돌리기는 힘드네. 창고의 화약을 빼내다 걸리면 참형(斬刑)인데 누가 경솔한 짓을 하겠나? 하나, 매 삭 마다 화포의 습련을 한다네. 그러면 정해진 화약이 나올 것 아닌가? 그럴 때 은근슬쩍 화약을 빼 돌리는 자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네."
"아니? 모가지에 철판을 덧댄 자가 그런 짓을 한단 말이요? 화약을 빼돌리면 참형이라지 않았소?"
"그랬지. 그러나, 만약 화약 한 근이 들어가는 화포에 한두 돈쯤을 뺀다고 탄환이 안 나가겠는가?"
"옳아, 화포를 쏠 때마다 화약의 양을 줄이는구려. 그걸 조금씩 모았다가 팔아먹는 것이고...."
"그렇지. 하지만 그것도 졸개들에겐 그림의 떡일세. 장교나 화포의 교련관 정도는 되어야 술값이라도 생기는 것이라네."
"화약을 지닌 자를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겠소?"
"그거야 난들 알 수가 없지. 하나, 보(堡)나 돈대가 있는 마을이면 숯막도 끼여 있게 마련 아닌가? 그런 숯막을 찾아가면 흘러나오는 소리가 있을 테지."
"그렇겠소. 총을 만들 동안 나는 그런 곳을 더듬어 봐야 겠구려."
춘길이는 제 말대로 그날 저녁부터 매일을 강화의 곳곳에 흩어진 보와 돈대 부근의 숯막을 얼쩡거렸다. 그러다 어느 날 늙은 관노와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지나는 말로 슬쩍 물었더니 취중 자랑으로 그런 곳을 안다는 것이다. 이에 춘길이는 술을 더 권하고 환심을 사서 기어이 듣고 싶은 대답을 들었다. 대모산 아래 숯막 주인에게 가 보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춘길은 대모산을 향해 길을 나섰다. 십여 리를 가다 보니 그 넓은 벌판이 온통 논뿐이었다. 물이 찰랑거리는 논에는 한 뼘 가량의 모가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논이 끝나는 곳에 이르니 수로(水路)가 나타났다. 그리고 수로 건너에는 대모산이 멀지 않았다. 그러나 주위에 인가가 없으니 배도 있을 리가 없어서 해안가 언덕 위에 보이는 덕진진(德津鎭) 쪽으로 걸었다. 덕진진으로 가려 해도 수로가 가로막히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수로 건너엔 서너 척의 거룻배가 있었고 배 위에는 마침 사공이 보였다. 춘길이는 손을 흔들며 사공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춘길이의 악쓰는 소리를 들었는지 사공이 고개를 들더니 배가 천천히 이리로 향하고 있었다.
"거 참, 어째서 이쪽엔 배가 없단 말이요."
다가온 거룻배에 냉큼 뛰어오르며 춘길이 한 말이었다. 그러자 사공은 춘길이의 행색을 샅샅이 훑어 보더니 입에 물었던 곰방대를 뱃전에 탁탁 털었다. 그리고는 노를 슬금슬금 저어 배를 돌리더니 수로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나룻터도 아닌 곳에서 나룻배를 찾는 걸 보니 강화 사람이 아니로군."
"잘 보았소. 나는 사당패의 모가비로 파시를 따라다니는 길이요."
"비린내 나는 엽전을 좋아하는 패로구려. 그래, 곰뱅이 틀 곳은 찾았소?"
"이제부터 알아봐야지요. 저 대모산 아래에다 판을 벌리면 어부나 진군들이 좀 모여들겠소?"
"힝, 어부라면 교동도나 석모도로 가야지 여기는 육지를 오가는 사공 셋 뿐이요. 허고 진군이래야 다섯인데 그나마 밤이면 둘만 수직을 서오. 허니 다른 곳을 알아보는 게 나을 게요."
"헛, 듣기완 다르군. 대모산 아래 숯막에는 어부와 진군으로 북적인다고 하더구만, 쯧."
"대모산 아래 곰보네 숯막을 말하는 모양이요만 거기서 북적대는 건 모두 투전꾼들이요. 나도 어젯밤 두 냥을 잃었소."
"헛, 두 냥이면 쌀이 일곱 말이구려. 하룻 밤에 보름 품삯을 날렸구려."
"까짓, 잃을 때가 있으면...."
"딸 때도 있다는 말을 하려는게요?"
"어찌 그리 잘 아오? 다 왔구려. 도선비는 열푼이요."
끽해야 한 마장 반도 안되는 수로를 건너오는데 선가(船價)가 열 푼이나 한다니 춘길이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불과 두 마장도 안되는 거리를 삼개에서 사십 리가 넘는 송파까지 가는 뱃삯을 받는단 말이요?"
"싫으면 다시 건너다 주겠소. 하지만, 데려다 주는 삯도 내야 할게요."
"원 이거야말로 눈뜨고 코 떼이는 꼴이군. 좋소 내가 바쁘니 그냥 내리다."
춘길이가 엽낭을 끌러보니 여섯 푼 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옆구리에 둘렀던 전대(錢臺)를 내려 꿰미에서 몇 닢을 빼내어서 열 푼을 맞춰 주었다. 그 모습을 옅 보는 사공 놈의 눈알이 희번덕 했다.
"고맙소, 투전판에서 따면 반은 돌려 주리다."
"헛, 노름 밑천을 만들고 있었구려."
배에서 내린 춘길은 덕진진 아래를 지나 대모산으로 나아갔다.
'쌍판하며 눈길이 화적 놈 찜 쩌먹게 생긴 사공 놈이로구나.'
방금 본 사공 놈의 눈길이 찜찜하기 그지없었으나 경솔히 전대를 끌른 자신의 잘못도 있는지라 애써 눙치기로 하였다. 지나는 노인에게 곰보네 숯막을 물어 찾아간 곳은 여념 집이나 다름없는 초가집이었다. 춘길이 인기척을 내며 마당으로 들어서니 낮이어서 인지 댓돌에 짚신도 없었다. 주인을 불러보았으나 내다보는 사람이 없어서 춘길이는 쪽마루에 걸터앉아 주인을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후에 짚단을 잔뜩 얹은 지게를 진 사람이 나타났다. 춘길이가 보매 얼굴이 곰보라 그가 주인임을 알았다.
"허허, 대낮에 술손님이 오셨구려."
"아, 그보다 다른 것을 좀 여쭈고자 왔소."
".........."
곰보는 춘길이의 대답은 귓등으로 들은 듯 지게를 벗어 짚단을 부엌으로 가져다 쌓고 있었다. 춘길은 자신의 말에 대꾸가 없는 곰보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무를 때지 않고 짚단을 때나 보오."
"이곳은 너른 논뿐이라 가근방에는 나무를 할 데가 없소."
"아, 그렇구려."
"한데, 술집에 술이 아니면 무슨 일로 왔소?"
"그게 실은... 여기는 우리 둘 뿐이요?"
"그렇소. 맘 편히 얘기를 해 보시오."
짚단을 다 나르고 지게까지 치운 곰보가 마루에 엉덩이를 걸쳤다. 춘길이도 서슴없이 그 옆에 앉았다.
"단도직입으로 말하리다. 나는 사당패 모가비요. 팔도를 다니다 보니 세상이 변해서 칼보다 나은 것이 필요합디다. 두어 근 구할 수 없겠소?"
곰보는 놀래는 빛도 없이 춘길이의 머리 꼭대기에서 짚신까지 지긋이 노려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화약을 말하려는 것이면 잘못 찾으셨소. 화약을 팔고 사는 사람은 모두 참형이오. 세상에 목이 떨어지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형장(兄丈)이 판다는 게 아니라 혹여 구할 데나 있을까 해서 그런 거요."
"글쎄올시다. 화약 말고 연환(鉛丸)이라면 혹, 구처할 데가 있지 싶소만.…"
"물론 연환도 있어야겠지요. 어디서 구하오?"
"연환은 화약이 아니니 얼마를 사고팔든 상관없소. 얼마나 필요하오?"
"글쎄, 얼마나 필요할지 확실히 모르겠소."
"쯧쯧, 사슴과 노루를 구별하지 못하는 포수구려. 화약 한 근으로 일흔 발을 쏠 수 있으니 두어 근이면 연환도 일백 사오십 개가 들 것 아니요?"
"그렇다고 연환만 살 수도 없으니 이걸 어쩌지?"
"별 걱정을 다하오. 연환 값만 제대로 내면 연환을 밀어내는 가루쯤이야 거저 줄 것이요."
춘길이가 흠칫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곰보는 그제야 느긋한 웃음을 웃는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 이것저것 살펴보느라 시각을 끌었소. 이제 보니 동무도 그 길로 나서려는 것이 틀림없구려. 강화에 들리는 사당패마다 형편이 말이 아닙디다. 그래, 화약이 필요하면 총은 있다는 얘기 구려. 몇 자루나 되오?"
"서너 자루 되오."
"그럼 우선 화약 두 근하고 연환 백오십 개면 될게요. 그것만 가지면 토포꾼과 접전을 벌이지 않는 한 이삼 년은 쓸 수 있을 테니까. 떨어지면 또 오시오."
"값은 얼마면 되겠소?"
"화약 두근에 여섯 냥에 연환 백오십 개면 넉 냥이니 합이 꼭 열 냥이요."
"좋소, 언제 오리까?"
"준비를 해야 하니 며칠 기다리시오. 오늘이 스무 엿새니 내달 초 이틀이면 되겠소. 하나, 위험한 물건이라 내가 오래가지고 있을 수가 없소. 틀림없는 날짜와 시각을 딱 맞춰 얼른 주고받고 끝내야 하오."
"좋소, 넉넉잡아 초 사흘로 합시다."
"초 사흘 술시(戌時)로 정합시다. 그때면 진(鎭)의 감시도 없고 어두워 남의 눈에도 띄지 않을 테니까. 참, 거래가 끝나면 어디로 가려 하오? 설마 강화 안에서 꾸물거릴 생각은 마시오. 얼른 육지로 빠져나가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난 거래를 못하오."
"걱정 마시오. 곧장 육지로 빠질 것이오. 참. 육지로 건너는 배 한 척만 알아봐 주오."
"그럽시다. 내가 잘 아는 사공이 있으니 그건 걱정 마시오."
곰보의 숯막을 나선 춘길은 왔던 길로 가고 싶지 않았다. 덕진진 아래 수로에 있을 눈길 사나운 사공 놈을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춘길은 무작정 수로를 거슬러 서쪽으로 걸었다. 그러다 마을 사람에게 길을 묻기를 여러 번을 하여 정족산 전등사(傳燈寺) 밑 동리로 해서 거의 삼십 리 길을 걸어 길상산으로 돌아왔다. 탕개네 대장간에 닿아보니 쇠를 달구어 쇳물로 녹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말봉이와 도칠이가 윗통을 벗어던지고 교대로 풍구질을 하고 있었다. 춘길이와 덕만이도 할 일을 찾아 숯과 나무를 날랐다. 그렇게 낮과 밤을 새우고 나니 쇳물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탕개는 재빨리 거푸집을 만들어 나갔다. 총신 세 개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개의 거푸집이 필요했다. 제대로 된 총신을 골라 쓰려면 그 방법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에 쇳물을 부었다. 이젠 식기를 기다리면 되었다. 며칠 밤을 세운 일행은 오랜만에 편히 누웠다. 탕개가 마을로 가서 술을 받아 왔다. 모두들 둘러앉아 막걸리 잔을 돌렸다.
"총이 되려면 얼마나 더 있어야 하오?"
"총신이 식으면 기중 나은 것을 골라야지. 겉은 멀쩡해도 쇳속이 빈 것이 있거든. 그런 것은 화약이 조금만 더 들어가도 총이 폭발하고 마네. 조선의 포수들이 그래서 외눈배기가 많은 걸세."
"헛, 애꾸가 된단 말이요?"
"화승이 닿는 곳이 눈언저리가 아닌가? 총이 터지지 않더라도 화약이 지나치면 애꾸눈 되기가 십상이지."
"저 총신만 있으면 나머지는 쉬운 일만 남았잖소? 그런데 오래 걸릴 일이 무어요?"
"방아틀도 있어야 하지 않나? 그리고 나무를 깎아 총신을 잡아주지 않으면 그게 무슨 총 인가? 승자총통(勝字銃筒)이지. 승자총통은 이미 왜란 때 화승총에 밀려서 못 볼 꼴을 많이 봤었지. 해서 근자엔 쓰지를 않네."
"그래도 어려운 고비는 넘긴 듯하니 좀 더 날짜를 당깁시다. 내달 초사흗날 화약을 받기로 했단 말이요."
"까짓 그래보지. 대신 톱질이나 자귀질을 도와주게나."
"그거야 어려울게 무어요. 그러지요."
춘길이 덕만이, 그리고 두 졸개가 탕개를 도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애쓴 덕에 마지막 총에 나무로 만든 손잡이를 달았다. 그리고는 총신과 나무 손잡이에 기름을 먹였다. 기름에 닦인 총은 반질반질 윤이 나서 보기에도 좋았다. 게다가 계획대로 초 사흘이 되는 날 일을 끝냈기에 더욱 좋았다. 춘길이는 졸개들이 지고 온 고리짝에서 스물다섯 꿰미를 꺼내 탕개에게 주었다. 총은 덕만이의 졸개 만봉이의 고리짝에 넣고 남은 돈은 도칠이의 고리짝으로 옮겨 담았다. 그리고는 저녁을 일찍 먹은 후 덕만이와 함께 졸개들을 딸려 탕개의 대장간을 나섰다. 길은 며칠 전처럼 길상산 뒷길로 잡아서 전등사를 끼고 수로의 상류로 걸었다. 대모산에 이르자 이미 밤중이었다. 하늘을 보니 얼추 해시(亥時)에 가까운 듯했다. 네 사람은 곰보네 숯막으로 향했다. 숯막에 닿자 문 밖에다 세 사람을 세워둔 춘길이가 혼자 마당을 들어섰다. 댓돌 위엔 신발들이 어지러이 놓였으나 주인인 곰보는 보이지 않았다. 방안에는 투전을 노는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헛기침을 몇 번 하자 방문이 열리더니 곰보가 내다보았다. 춘길이를 본 곰보가 재빨리 마루로 나와 짚신을 꿰어 신었다. 그런데 방안을 얼핏 보니 낯이 익은 얼굴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며칠 전 선가로 열 푼을 받아먹은 그 사내였다.
"이리로 오시오."
곰보는 서둘러 뒷곁으로 춘길이를 데려 갔다.
"돈은 갖고 왔소?"
"밖에 일행이 갖고 있소."
"일행이라니? 그런 얘긴 없었잖소?"
"나까지 넷이요. 지난번, 거룻배를 보니 열은 타겠습디다."
"이런, 그럼 일행과 잠시만 있으시오. 내 사공에게 네 사람이란 얘기를 하고 오리다."
곰보는 춘길이가 뭐라고 하기 전에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얼마가 지난 후에 두 명의 사내와 함께 나왔다. 곰보 뒤를 따르는 두 사내를 자세히 보니 기중 한 사내는 분명 수로에서의 그놈이었다. 보아하니 그놈이 곰보가 잘 안다든 그 사공인 듯하였다. 이어서 곰보가 춘길이 일행에게로 다가오더니 다짜고짜로 말하였다.
"승객이 넷이면 썰물 때라 혼자서는 노를 젓지 못하오. 이 둘을 따라 가시오. 허고 내게 줄 돈은 이 자리에서 주시오."
춘길이는 도칠이가 지고 있는 고리짝을 내리게 하여 그 속에서 열 꿰미를 꺼내 주었다.
"됐소. 썰물이 다 하기 전에 얼른 육지로 건너시오. 이보게 멍게, 이 사람들을 데리고 어서 떠나게. 덕포진 아래 대곶 쯤이 좋을 것일세."
"알았수. 들어가 투전판이나 살피슈. 자 다들 따라들 오슈."
멍게라는 그 사공 놈이 배가 묶인 덕진진 아래 샛강으로 춘길이 일행을 몰아가기 시작했다. 수로까지 두 마장 반 정도의 거리를 일각이 채 되기 전에 닿았으니 숨이 찰 지경이었다. 사공 놈과 또 한 사내가 배에 뛰어오르자 춘길이 일행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멍개는 말뚝에 묶었던 줄을 풀고 삿대로 배를 밀어냈다. 수로 밑으로는 곧바로 바다여서 두 사내는 이물에 마주 서서 쌍노를 젓기 시작하였다. 선두 쪽의 가롯대에는 춘길이와 덕만이가 앉았고 가운데는 말봉이와 도칠이가 자기들이 내려놓은 고리짝 위에 앉아 있었다. 칠흑 같지는 않아도 방금 떠난 덕진진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운 밤이었다. 고요한 어둠 속에 삐걱대는 노젓는 소리가 신경을 거슬렸다. 그러자 멍게란 놈이 바닷물을 한 바가지 푸더니 그것을 노좆에다 부어버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삐걱 소리가 멈추었다. 썰물의 물 흐름이 점점 빨라지는 듯하자 두 사공은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었다. 그러다 육지와 섬의 중간쯤에 이르자 두 사공 놈이 노를 놓더니 말봉이와 도칠이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나 선두의 가롯대에 앉아 육지를 바라보든 춘길이와 덕만이는 등 뒤의 일을 알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어억 하는 소리와 동시에 무엇이 바다로 풍덩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춘길이가 뒤돌아 보니 억하는 비명을 듣기도 전에 이번엔 도칠이가 칼에 찔려 떨어지고 있었다. 말봉이는 이미 보이지도 않았다. 이에 덕만이는 반사적으로 등에 매었던 화승총을 내렸다. 하지만 언제 화약과 연환을 쟁이며 심지에 불을 댕길 여유가 있겠는가? 덕만이는 총대를 거꾸로 거머 쥘 수밖에 없었다. 춘길이도 허리춤에서 얼른 곤봉을 꺼내 들었다.
"뒈지기 싫으면 여기서 뛰어내려 육지로 헤엄을 치거라. 그건 봐 주겠다. 반항하면 이 칼을 맞고 썰물을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멍게란 놈이 한발 더 다가서며 낮게 을렀다. 옆엣 놈도 손에 쥔 칼을 슬슬 흔들며 다가왔다.
"이놈, 네놈은 사공이 아니라 수적이란 것을 내 진작 알아봤다. 쌍판에 수적이라고 쓰였더구나."
"시끄럽다. 이 고리짝들은 우리에게 맡기고 어서 저승으로 가거라."
멍게는 고리짝을 성큼 넘어서 춘길이에게로 선뜻 다가섰다. 또 다른 놈도 덕만이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물때 바뀌기 전에 어서 가거라. 에잇."
멍게가 춘길이의 배를 노리고 팔을 쭉 뻗었다. 춘길이는 엉겁결에 뒤로 물러나려다 가롯대에 걸려 뒤로 벌렁 넘어져 버렸다. 잽싸게 일어난 춘길이가 가롯대로 다가온 멍게의 면상을 향해 곤봉을 휘둘렀다. 깜짝 놀란 멍게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헌데 멍게 옆에는 또 다른 사공에 밀린 덕만이가 있었다. 어두운 중에도 덕만이가 보니 서로 방향만 다를 뿐 멍게와 나란히 선 꼴이었다. 하나, 춘길이에게 정신이 집중된 멍게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이었다. 알았다면 덕만이에게 먼저 칼을 휘둘렀을 것이었다. 더 볼 것 없는 덕만이가 거꾸로 든 총대로 옆에 선 멍게의 뒷통수를 모질게 내려쳤다. 컥인지 끽인지 괴상한 짧은 비명과 함께 멍게가 춘길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이에 놀란 또 다른 사공놈이 이판 사판의 심정으로 덕만이를 향해 칼을 휘저으며 달려들었다. 덕만이는 총을 들어 눈앞까지 다가온 놈의 팔목을 작신 두들겨 버렸다. 놈이 칼을 떨어뜨리며 한 손으로 팔목을 거머쥐려는 찰라, 덕만이는 또 한번 총대를 휘둘렀다. 놈은 비명도 없이 뱃바닥에 엎어졌다.
"이제 보니 자네 총은 몽둥이로서 십상일세. 같은 총이래두 화약 값도 들지 않으니 얼마나 좋아?"
"지금 그런 농이 나오나? 이것들이 우리가 돈 가진 것을 어찌 알고 덤볐단 말인가?"
"짐작이 가네. 내 불찰일세. 며칠 전 이놈이 내 전대를 보았네. 거기다 숯막의 곰보 놈과 이놈들이 서로 짠 걸세."
"이거 우리 아이들 불쌍해 어쩌나?"
"아깝구먼 살았으면 우리에겐 큰 힘이 될 놈이었는데."
"인명은 재천이라니 할 수 없는 노릇이지. 어쩌려나? 이것들을 바다로 던져야겠지?"
"말이라고 하나. 기왕 보낼 것이면 확실하게 해서 보내세.'
"그러지 뭐, 썰물 때니까 아침이면 배도 송장도 어디론가 흘러가고 없겠지."
두 사람은 쓰러진 두 사공 놈의 머리를 총대와 곤봉으로 여러 차례 더 두들겨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선미로 다가가 노를 잡았다.
"노는 좀 저을 줄 아는가?"
"사당패 모가비가 못하는 것이 무언가?"
"허긴…."
춘길이와 덕만이는 물살에 지지 않으려 결사적으로 노를 저어 간신히 대곶(大串) 뻘밭에 배를 댔다. 그리고 고리짝을 내려 짊어진 후 배를 밀어 물결에 띄웠다. 배는 빠른 속도로 육지와 멀어져 갔다. 춘길이가 갈 길을 걱정하였다.
"어디로 해서 가지?"
"육로로는 못 가네. 가는 곳마다 샛강과 수로가 길을 막아 갈 수가 없단 말이야."
"그럼 양촌으로 빠져서 배를 타기로 하지. 어쩌면 삼개나 송파로 가는 배를 얻어 탈 수도 있을 게야."
"양촌까지는 삼십 리밖에 되지 않으니 그렇게 하세."
두 사람은 밤길을 걷기로 하였다. 살인을 하고 난 뒤라 강화 바닥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 얼마간은 좁은 길이라도 있던 것이 대곶을 벗어나자 그나마 길이 없었다. 대신 희미한 별빛 아래에 보이는 것은 언덕 하나 보이지 않는 텅 빈 벌판뿐이었다. 그러나 막상 앞으로 나가니 길은 길이되 논둑길로 이어진 좁은 길이어서 미끄러지고 자빠지기 일쑤였다.
"이보게 춘길이 내 언젠가 양촌을 가 본 적이 있네만 이 길이 아닌 것 같어."
"밤길에 바쁜 몸이 이길 저길 따질 땐가? 모로 가도 한강 줄기에 닿기만 하면 되지."
"그거야 그렇지만 이거 고생이 말이 아니군."
"그래도 여긴 평지 아닌가? 걷기는 산길보다 나은데 무슨 불평인가?"
"홰라도 밝히면 넘어지지는 않을 터인데.…"
"살인하고 도타하는 놈이 초헌(軺軒)을 타려는 꼴일세."
어두운 밤길을 허위단심 양촌만 바라고 나아가니 논밭 사이에 몇 채의 집이 희미하게 보였다. 때는 한밤중이라 사방이 괴괴한데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마장쯤 더 가자 논이 끝나고 한강이 나타났다. 그러나 때가 축시(丑時) 어름이라 아직 밀물이 되려면 한 시진은 더 있어야 했다. 허기야 지금이 밀물 때라하드라도 이 깊은 밤중에 배가 다닐 리가 만무였다. 결국 두 사람은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침이 되어도 윗강으로 오르는 배는 없었다. 왜냐하면 또다시 썰물이 시작된 때문이다. 아침도 굶은 데다 남의 눈이 두려운 두 사람은 갈대밭에 숨어 있다가 그날 오정이 지나서야 삼개로 가는 옹기장수의 배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춘길이와 덕만이가 탄 배가 물길 칠십 리를 거슬러 삼개에 닿은 것은 결국 어두워질 무렵이었다. 송파까지 가려던 두 사람은 어쩔 수없이 숯막의 봉로를 찾아 그날을 보내야 했다.
그날 낮에 남한산성의 남문을 향해 바삐 올라오는 사람이 있었다. 남문이 가까워지자 그 사람은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허리를 굽혀 깊은 숨을 토했다. 막바지 산길 오릿 길이 가팔라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바로 원일이의 행방을 쫓고 있는 송윤호였다. 한숨을 돌린 송윤호는 남문의 좌우에 벌려선 포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창대를 꼬나잡은 포졸 중 하나가 송윤호를 먼저 알아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힝, 또 왔구려. 백 번을 온대도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 하지 않았소?"
"미안한 일이나 한 번만 더 알아보아 주오. 지난해 여름과 가을 사이에 광나루에서 도승을 보필했던 장교가 여기 산성에 있다는 말을 새로 들어서 그러오."
"거참 꽤나 귀찮은 사람이구먼. 일이 삭마다 갈리는 나루터 장교를 무슨 수로 다 알아본단 말이요? 지난번에도 똑같은 일로 허탕을 쳤으면 이번엔 사람 이름이라도 대야 할 것 아니냔 말이요."
"그러면 산돌이란 포졸을 아는 장교가 있는지만 알아봐 주오."
"산돌이고 물돌이고 장교가 포졸을 어찌 다 알겠소?"
"그 때쯤 광나루 둔초에 있던 포졸이라니 어쩌면 아는 장교가 있을 것이오. 산돌이를 아는 장교를 만나보려는 것이요."
"성문을 지키고 있는 몸이라 알아봐 줄 수가 없소."
송윤호는 미리 준비한 엽전 반 꿰미를 포졸의 옆구리 쪽으로 슬쩍 내밀었다.
"어, 이게 뭐요? 어째 이러오?"
"적지만 받아주시오. 내겐 생사가 달린 것만큼 절박한 일이어서 그러오."
"어, 이러면 곤란한데. 잠시만 기다리시오. 대신 번을 설 놈을 데려 오리다."
창대를 성벽에 세워둔 포졸이 성문 안쪽으로 사라지더니 곧 못 보던 포졸이 나왔다. 새로 온 포졸은 성벽에 세워진 창대를 잡더니 제법 근엄한 표정으로 문 앞에 버티고 섰다. 아까의 포졸은 성 안으로 들어간지 거의 한 시진(時辰)이 지나서야 나타났는데 웬 붉은 술 달린 벙거지를 쓴 자와 함께였다.
"이 사람 올시다. 장교님."
"헛. 당신이 날 찾는 사람이오?"
"혹시 지난여름 광나루 둔초장을 하셨습니까?"
"그렇소만 어째 묻소?"
"듣자니 산돌이란 사람이 그 때 그 둔소에 있었다는 얘기를 들어서 그러오."
"산돌이를 찾는다면 이미 늦었소. 그놈은 지난해 나룻터를 폐할 때쯤 술에 취해 물에 빠져 죽었으니 말이요."
"아, 그걸 아시니 거기 계시던 분이 적실하구려. 혹시 그때 광나루 어디에서 버려진 아이를 보신 적이 있으시오?"
송윤호는 앞에선 장교의 대답 한마디에 모든 운명이 담긴것 처럼 진지하게 물었다. 허나 송윤호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장교는 콧방귀를 날렸다.
"컹, 원 별 시답지 않은 일로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 했구먼. 이거 보우. 지난해 그 흉년에 버려진 아이가 한둘이었겠소? 일일이 내가 어찌 다 기억한단 말이요?"
"듣자니 산돌이란 포졸이 돌 지난 아이가 뱃전에 버려진 걸 보았다기에 그러오. 해서 장교 분께서 혹시 같이 보셨나 해서 물어 본 것이지요."
"뱃전에? 돌 지난 아이라? 오라. 본 것도 같소. 하나, 그 아이는 산돌이가 아니라 아마 개동이가 데려갔었지."
"예에? 그랬단 말이지요. 개동이란 사람이 어디로 데려 간 것은 모르시오?"
"섶 나무를 실은 신탄선을 타고 갔으니 삼개 나루나 양화 나루 밖에 더 있소?"
"아아. 그렇겠소이다. 이젠 됐소이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없소."
송윤호는 급히 허릿춤에 둘렀던 전대를 풀어 엽전 한 꿰미를 꺼내 장교의 손에 쥐여주었다. 생각 밖의 큰 돈에 놀란 장교가 돈값으로 한마디를 보탰다.
"참, 그때, 개동이가 밤섬 고모 네로 간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소."
"옛? 밤섬?"
그 순간 송윤호는 기가 탁 막혔다. 밤섬이라니? 꿈에도 생각 못한 장소였다. 바로 코앞에 원일이가 있었단 말인가? 그토록 잊지 못하든 원일이를 앞에다 두고 삼개에서 한 해를 보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던 것이다. 지난겨울 여주에서부터 양근까지 원일이의 행방을 쫓아 얼마나 헤매었던가? 비록 두물머리에서 행방을 놓쳐서 수 삭(朔)을 허비했지만 그 사이 삼개와 광나루를 오간 것은 열 차례가 넘었다. 그러나 그동안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왜냐하면 광나루의 둔초장과 포졸이 수시로 바뀌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우연히 술 주정이 심하던 장교를 기억하는 숯막 주인을 만났었다. 지난여름 마신 외상 술값을 받지도 못했는데 산성으로 되돌아갔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어쨌든 이제는 확실히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워낙 좁은 밤섬이라 집이라야 육십여 호 밖에 되지 않으니 집집마다 찾아가 보면 개중에 분명 원일이가 있을 것이었다. 송윤호는 장교와 포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뒤돌아섰다. 삼개로 어서 가야 했다. 내일이 단오이니 거칠이와 만나기로 한 날이다. 송윤호는 원일이를 찾아 거칠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 거칠이도 언년이를 찾았다는 소식을 들고 오면 좋으련만. 산성을 내려가는 송윤호의 발걸음은 올 때와는 사뭇 다르게 가볍기 그지없었다.
'밤섬 누구네 집에 있을까? 신탄 장수의 집일까? 배목수의 집일까? 아, 얼마나 컸을까?'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내려가면서도 송윤호의 생각은 그치지 않았다. 산길을 벗어나 숯내에 이르자 길은 평탄해서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지난 정월 보름날 그 소동에 원일이는 무사했을까?'
송윤호는 밤섬이 불타던 날을 생각하니 새삼 걱정이 앞섰다. 끔찍한 광경이었던 것이다. 그날 밤섬의 하늘은 온통 붉어서 둔지산 뒤쪽으로 걸어오던 송윤호와 거칠이 눈에도 보였었다. 게다가 밤섬을 오가는 수많은 유랑민들의 약탈을 보았지 않은가? 생각과 걱정으로 가득 찬 송윤호가 숯내를 벗어나 나루로 향할 때였다. 우시장 쪽에서 누가 자꾸만 자신을 부르는 것만 같아서 좌우를 둘러보는데 뒤에서 누가 급히 뛰어오고 있었다. 송윤호가 뒤돌아 보니 모르는 젊은이였다.
"나를 불렀는가?"
"예, 나으리, 저기 저 우리 행수님이 나으리를 모셔 오라십니다."
"뭐라? 행수? 행수라면 송상의 피행수란 말인가?"
"아니 옵니다. 쇠전의 최행수 입지요."
"오라. 최행수. 그래 너희 행수는 어디 계시느냐?"
"저기 오시네요."
젊은이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정말로 최행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송윤호가 웃는 얼굴로 먼저 다가갔다.
"최행수가 아니요? 오랜만이요."
"나으리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강녕이라니 당치 않소. 그래 최행수도 그간 무고 하오?"
"그럼입쇼. 가만... 길에서 이러실게 아니라 저희 송방으로 가시지요."
"아니요. 갈 길이 바쁜지라 가 보아야 하오."
"이미 저녁때입니다. 지금 삼개로 가는 배가 때맞추어 있지도 않으려니와 밤중에 내리신들 볼일을 보실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삼개나루야 넘어지면 코 닿을 곳이라 내일 아침 일찍 가시면 될 것입니다. 허니 저와 함께 가시지요."
호의로 청하는 최행수의 청을 매정하게 뿌리치기도 어려우니와 지금 삼개로 간대도 실은 밤중에 밤섬의 한집 한집을 이잡듯 뒤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송윤호는 최행수를 따라 송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우시장에는 전날과 달리 소 한 마리 눈에 보이지 않고 몇 사람이 기둥 같은 것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소를 묶어두는 말뚝도 모조리 뽑혀 한 곳에 쌓여 있었다.
"아니? 쇠전을 옮기려 하오? 어째 소도 말뚝도 보이질 않소?"
"하하, 그런 게 아니오라 내일이 단오라 이곳에서 꼭두 패와 사당이 모여 큰 연희를 한다고 합니다. 송파에선 이곳 마당이 가장 넓기 때문 입지요."
"옳아, 단오놀이를 하려는 게로구려."
"가근방의 무당 박수가 다 모이고 남사당패와 꼭두패가 가면 놀이까지 한다니 장히 볼만 하겠습지요."
"허허, 송파의 앞날을 생각하면 잘하는 일이요."
"그래서 송상에서도 이번 참에 황소 한 마리를 내 놓았습지요."
"잘 하시었소."
송윤호는 최행수가 이끄는 대로 쇠전 송방에서 저녁밥을 먹은 후 그날을 보냈다. 이튿날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길을 나서려고 최행수를 찾으니 이미 나가고 없었다. 인사는 하고 가야겠기에 쇠전 마당으로 가다가 보니 울긋불긋 물감을 들인 옷을 입은 사당패와 꼭두패가 갖가지 악기를 앞세워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세우든 기둥은 밧줄 타기인 어름을 놀기 위한 것인가 보았다. 최행수를 만나지 못한 송윤호는 할 수없이 배를 타기 위해 나루터로 향했다. 원일이를 생각하면 일각이나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이다. 나루에도 꽃갓을 쓴 무당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도 방금 닻을 내린 배에서 무당 복색의 사람들이 내리는 걸 보면 성대한 굿판을 준비하려는 것 같았다. 송윤호는 많은 배들 가운데 삼개로 가는 배를 찾아 헤매야 했다. 그러다 요행이 삼개로 새우젓을 사러 가는 배를 타게 되었다. 배를 타고 가는 사이에도 원일이를 보게 될 순간을 생각하니 가슴이 울렁거리고 조바심으로 입술이 메말랐다. 삼개까지 불과 사십여 리의 거리가 무척이나 멀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행히 물결을 따라 내려가는 배인지라 오정이 되기 훨씬 전에 삼개에 닿았다. 뭍으로 뛰어내린 송윤호가 밤섬으로 가는 주낙배를 찾으니 두어 척의 배가 물가에 매였으되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배 곁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데 밤섬 쪽에서 작은 배가 송윤호를 향해 오고 있었다. 점점 가까이 오는 배를 보니 못 보던 사람 곁에 거칠이와 동이가 보이고 개중에 덕구란 놈이 손을 휘젓고 있는 것이다. 깜짝 놀란 송윤호가 어인 영문인지 몰라 눈을 크게뜨고 있는 사이에 배가 뭍에 닿았다. 재빨리 덕구와 거칠이가 내리자 노를 잡았던 동이도 얼른 일어났다. 못 보던 젊은이도 함께 내렸다.
"나으리 그간 강녕하시었는지요."
거칠이가 고리짝을 벗어던지며 땅에 엎드렸다. 그러자 송윤호가 황급히 거칠이를 일으켰다. 그리고 절을 하려는 동이와 덕구에게 손을 흔들어 말렸다.
"많은 눈이 있으니 여기서 이러지 말아라. 너도 어서 일어나거라."
"본댁에는 무탈하옵고 때맞춰 모내기도...."
"아. 그건 나중에 듣기로 하자. 내 원일이가 있는 곳을 알아냈다."
"예엣? 크 큰댁 도련님이 계신 곳 말씀이옵니까?"
"그렇다. 내 지금 그리로 가려고 배를 찾던 중이다."
"어디로 가시려 하시는지요?"
"밤섬이다. 원일이가 여태 밤섬에 있었던 것을 몰랐단 말이다."
"예에? 밤섬 누구네 집이란 말입니까?"
"그것까지는 모른다. 해서 집집마다 찾아 볼 참이니라."
송윤호의 말이 끝나자 옆에 있던 동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송윤호를 바라보았다.
"나으리 말씀이 적실하다면 짐작 가는 일이 있사옵니다만...."
"엉? 짐작 가는 일이라니? 그게 무어냐?"
"지난해 춘월이란 퇴기 술집에 못 보던 아이를 키우고 있더란 말을 할애비에게서 들은 바 있습니다. 그 후에 오가며 몇 번 그 아이를 본 적도 있사온데 키가 아마 요만 했습지요. 서너 살 되어 보이더이다."
동이는 아이의 키 높이 만큼 손바닥을 들었다. 송윤호와 거칠이가 깜짝 놀랐다.
"허면 그 집엔 그때까지 아이가 없던 집이었느냐?"
"춘월이는 늙었고 그 집 부엌데기는 홀로 밤섬으로 흘러든 유랑민인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니 아이가 있을 리 없습지요."
"혹여 밤섬의 다른 집에 못 보던 어린아이가 있단 소문은 들은 적이 있느냐?"
"밤섬 좁은 바닥에 그런 일이 있다면 소문이 돌았겠습지요. 춘월이네 말고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이가 원일이가 적실하고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서 배를 내어라."
송윤호는 마음이 바빠 먼저 배에 오르려 하였다. 그러자 동이란 놈이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니? 왜 그러고들 섰느냐? 배를 타야지."
"나으리 춘월이네는 지난겨울 상조회 황방장과 함께 송파로 이사를 갔습지요. 지난번 환약을 만들던 밤섬의 그 빈집이 춘월이네 집이었사옵니다."
"뭐라? 송파? 상조회 황구만 방장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차라리 이 길로 송파로 가옵시지요."
송윤호는 또 한번 기가 막혀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눈보라가 몹시 치던 그날 황구만과 아이 업은 여인이 함께 배를 타던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아이의 머리 위로 보자기를 덮어 준 것도 기억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원일이었다니?
"가자, 이제는 확실히 찾을 수 있다. 상조회의 황방장이 어디로 가겠느냐? 이제 원일이를 찾는 일만 남았구나."
곧이어 송윤호와 거칠이, 동이, 덕구뿐 아니라 석수까지 모두 나서 송파로 가는 배를 수소문했다. 마침 송파로 가는 배가 있었다. 일행은 서둘러 배에 올랐다. 배 위에는 이미 열댓 명의 승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배는 물가를 떠나 돛을 올리고 있었다. 송윤호는 거칠이가 내려놓은 고리짝에 걸터앉았다. 송윤호의 머릿 속은 원일이를 잃고 헤맨 그동안의 일들이 꿈만 같았다. 그리고 축석고개에서부터 유랑민을 좇아 헤맨 그 많은 고난의 시간들이 이제는 하나도 힘들게 생각되지 않았다. 송윤호는 배가 나아가는 송파 쪽을 바라보았다. 갑판에는 여러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그중에 두 사람은 자신처럼 고리짝에 걸터앉아 있었다. 서풍을 안은 돛이 부풀어 오르자 배는 살 같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시각이었다. 안 거사가 지난번 망을 보던 언덕 위에서 거사들을 모아놓고 다시 한 번 다짐을 두고 있었다.
"더 볼 것도 없단 말이다. 이제까지 습련 한대로 내가 준보 너에게 군호를 하면 셋이서 아이를 재갈 물려 고리짝에 담고선 사람 많은 나루로 뛰란 말이다. 광나루로 가는 나룻배 앞에 뻐덩니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태연하게 그 배를 타고서 지난번 말한 장소에 숨어 있기만 하면 된단 말이다. 준보가 나루를 무사히 건너는 것을 보면 뻐덩니가 내게 와 알릴 거니까. 그러면 만사가 끝나는 거란 말이다. 뒷일은 사태를 봐가며 여기 있는 바우와 그때그때 알아서 할 것이니까. 자 준비되었으면 다들 내려가자."
언덕을 내려온 거사들은 거리의 많은 사람들에게 섞여 구경꾼 행세를 하고 있었다. 송파에는 구경거리가 세 곳으로 갈라져 있었다. 한 패는 나루터에서 용왕제를 올리는 무당 패를 보려는 사람들이고 한 패는 쇠전에서 벌리는 어름과 꼭두쇠 놀음에 빠진 무리였다. 나머지 한 패는 노랑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은 사당을 앞세워 징과 꽹과리를 두들기며 풍물을 잡으며 돌아다니는 동춘이 패를 따라다니는 패였다. 동춘이 패는 객주가 늘어선 삼거리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미쳐 쇠전 마당이나 나루로 가지 못한 사람들이 내다보며 아이들도 줄줄이 따라다녔다. 간드러진 날라리 소리를 앞세운 징과 꽹과리 소리가 자지러 지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많이 모였다.
"얘, 복덩아, 혼자서 왜 나왔니? 어서 엄마에게 가거라. 어섯."
아이가 황구만의 뒤를 따라 나오고 있었다. 그러자 되돌아선 황구만이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발을 굴러 복덩이를 쫓으려 했다.
"들어가라니까. 어허, 이 여편네는 또 무얼 하는게야. 이놈. 어서 들어가래두."
그러자 아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삽짝 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황구만은 삽짝을 다시 한번 돌아본 뒤 객주인들이 기다리는 문일평의 객주로 향했다. 그런데 황구만이 저만치 가는 것을 울타리 사이로 가만히 내다보던 아이가 사람들 사이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는 그 옆에 붙은 문일평의 사처로 뛰어 들어갔다. 문일평의 아들 상구와 놀기 위해서였다. 아이는 상구가 있는 방에다 상구야 상구야 하고 혀 짧은 소리로 몇 번을 불러 보았으나 대답이 없자 발길을 돌렸다. 그때 동춘이 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일평의 집 앞까지 왔다. 동춘이 패에 끼어 힐긋거리던 안 거사의 눈이 번쩍 떠졌다. 풍물 소리에 놀란 아이가 나오려다 말고 삽짝에 붙어선 것을 본 것이다. 안 거사는 옆에서 따라오던 준보의 옆구리를 쥐어박으며 아이 쪽으로 턱을 내 밀었다. 그러자 준보와 두 거사가 번개처럼 아이의 입을 막아 삽짝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와 함께 나머지 거사들이 구경꾼인 척 그 앞을 막아섰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어서 가거라. 우리는 좀 더 동정을 살피다가 도칠이 성님에게로 갈 테니."
안 거사의 말이 끝나자 고리짝을 짊어진 거사의 뒤를 두 놈이 부지런히 따랐다. 우시장이 가까워 지자 그곳엔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고리짝을 진 준보는 빠른 걸음으로 나루로 나아갔다. 나루터도 마찬가지여서 굿 구경에 빠진 사람들이 모래알 만큼 많았다. 북과 징이 끊임없이 울리고 넓게 둘러싼 사람들 사이로 간간이 무당이 길길이 뛰는 모습도 보였다. 준보는 광나루로 오가는 나룻배 앞에 뻐덩니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배냐?"
"그래. 어서들 타게 자네들이 떠나는 것을 봐야 내가 가서 알리지."
준보를 비롯한 다섯 명은 서둘러 나룻배에 올랐다. 하나 배 위에는 그들 외에 사공도 승객도 없었다. 이런 성대한 굿판을 언제 다시 볼 수 있겠나 싶은 사공과 승객이 사람들 틈에 박혔기 때문이다.
"어이. 뻐덩니. 사공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어라?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있었는데... 굿구경에 빠졌나?"
"핫 이거 낭패 아닌가? 이러다 언제 강을 건넌단 말인가?"
준보가 낭패 한 얼굴로 있을 때 나룻배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굿판이 시끄럽다 못해 귀가 멍멍한데 갑자기 북과 징 소리가 딱 그쳤다. 그 순간 둘러선 사람들이 쫙 갈라지며 그 사이로 붉은 갓에 붉은 전복을 차려입은 만신이 가운데로 나오더니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만신의 현란한 칼놀림에 넋이 빠져들었다.
그럴 때 안 거사는 준보가 강을 건넜다는 전갈이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고리짝에 든 아이가 강을 건너야 문일평에게 언문으로 쓴 겁박 서찰을 던져 넣을 것이기 때문이다. 초조해진 안 거사가 연신 나루 쪽과 문일평의 집을 번갈아 돌아 보았다. 한데 그 순간 아이의 손을 잡은 월이라던 하녀가 삽작을 나서는 것을 보았다. 월이는 좌우를 돌아보고 있었다. 안거사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저 월이가 데리고 있는 아이가 보나 마나 지난번 나루터에서 본 문일평의 아이일 것이다. 그렇다면 고리짝에 담아 간 아이는 누구란 말인가?
"에이, 도련님 틀렸소. 아까 그 소린 복덩이가 아니었던가 보오. 아이고 우리 도련님 심심해서 어쩌나? 그만 들어갑시다. 대신 쉰내가 같이 놀아줄 테니."
월이가 집으로 들어가자 안 거사는 그제야 어디가 잘못된 것을 알았다.
"너, 빨리 나루로 달려가거라. 이거 엉뚱한 애를 잡았구나. 다행히 나룻배가 뜨지 않았으면 준보를 다시 불러라."
"고리짝은 어쩌라고 할까?"
"이 마당에 고리짝이 문젠가? 고리짝은 그대로 두고 어서 오기나 하란 말이야."
"알았네."
거사 한 놈이 죽어라고 나루터를 향해 달려갔다.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가고 보니 막상 나룻배에 아무도 없었다.
'아차, 이 배가 아니구나. 그새 나룻배가 떠났구나. 그럼, 뻐덩니도 함께 갔단 말인가?'
실망을 한 거사 놈이 숨을 고르며 굿판을 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강을 건넌 줄 알았던 준보 일행이 뻐덩니와 함께 만신의 칼춤에 홀랑 빠져 있었던 것이다. 거사 놈은 쫓아가 준보의 소매를 와락 당겼다.
"이것들 봐. 미쳤어? 이러고 있게? 아이가 바뀌었네. 어서들 돌아가세."
"뭐야? 아이가 바뀌다니? 아니 똑똑한 척하는 안 거사가 어쩌다 그런 실수를 한단 말인가? 허면 저 고리짝과 아이는 어쩌라던가?"
"버리고 자네들만 오라더군."
"엉? 고리짝, 배는 그대로 있는데 고리짝이 그새 없어졌네그려?"
놀란 준보가 나룻배를 가리키자 나머지 거사들도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나룻배 위에 올려둔 고리짝이 보이지 않았다. 그새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귀신이 곡을 할 일이군 방금 전까지 있었는데…."
"차라리 잘 된 일 아닌가? 어서 가기나 하세."
여섯 명의 거사는 왔던 길을 되돌아 부지런히 달음박질을 하였다.
그때쯤, 송윤호가 탄 배는 중랑 내에 가까웠다. 곧이어 응봉산이 보이고 중랑 내가 흘러들자 배가 좌우로 일렁였다. 멀리 송파 쪽에서 꽹과리 소리와 징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 오기 시작하더니 배가 가까워질수록 요란하기 그지없었다. 나루에는 수백, 아니 수천 명의 구경꾼들 사이로 꿩깃에 꽃 갓을 쓴 십여 명의 무당들이 작은 쌍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붉은 전복의 무당이 큰칼을 휘두르며 빙빙 돌아가니 햇빛에 번쩍이는 칼날이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듯 하였다. 송윤호가 탄 배가 무당패와 좀 떨어진 물가에 닿았다. 사공이 뭍으로 판자를 걸치자 바닥에 앉았던 사람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송윤호도 일어섰다. 그런데 배 가운데 고리짝에 걸터앉았던 두 사내 중 한 명이 배에서 내리려고 송윤호 쪽으로 다가왔다. 송윤호가 무심코 그 사내를 바라보다가 염통이 바늘에 찔린 듯 흠칫 놀랐다. 훌쩍 큰 키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건들거리는 듯 다가오는 그 자세가 꿈에도 잊지 못하든 그놈이었다. 축석 고개에서의 그날 사당패 차림의 무리들 속에서 자신을 향해 선 듯 다가와 곤봉을 휘두른 바로 그놈이었던 것이다. 송윤호는 그놈의 허리춤에 먼저 눈이 갔다. 저고리 아래 쇠좆매를 닮은 곤봉이 얼핏 보였다. 그놈이 적실했다. 송윤호는 가슴이 저리고 떨려 왔다. 이놈 때문에 송 씨 가문이 박살이 난 것 아닌가? 이 일을 어디에서 어떻게 해야 이놈이 그때의 그놈 임을 밝힐 것인가? 워낙 갑작스런 일이라 송윤호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놈과 또 한 명은 배를 내려 저만치 가고 있었다.
"나으리, 어서 내리시옵소서."
덕구가 송윤호를 재촉하고 나섰다. 정신이 깜박한 송윤호가 그제야 허둥지둥 배에서 내렸다. 앞에 가는 저놈도 문제지만 만사 제쳐 놓고 우선 원일이를 찾아놓고 봐야 했다. 송윤호는 서둘러 앞선 두 놈의 뒤를 따라 객주 거리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때 송윤호가 타고 왔던 배 옆에서 닻을 올린 배 한 척이 고요히 물가를 떠나고 있었다. 그러나 송윤호가 그 사실을 알리가 만무였다.
"아니? 송 의원 아니요? 여긴 어연 일로 오셨소?"
앞서가는 놈과 원일이를 만날 생각이 뒤죽박죽이어서 허공을 걷듯 하는 송윤호를 불러 세운 사람은 다름 아닌 노탁우였다.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사람을 만난 송윤호가 놀란 얼굴로 노탁우를 돌아보았다. 한데 노탁우 옆에는 갓을 쓴 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이런 곳에서 부 회주님을 뵈오니 반갑습니다."
송윤호는 노탁우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였다.
"아, 그보다 여기 계신 우리 회주님을 먼저 소개하지요. 회주님 이분이 송 의원이옵니다."
"오호, 시생은 오일중이라 하오이다. 일전에 송파 객주에 오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송윤호이오다. 그동안 상조회에 입은 은혜가 크오이다."
"별말씀을. 북어 오천 쾌는 우리 상조회에 여러모로 유용하게 쓰였습지요. 고맙다는 인사가 늦었소이다."
"입은 은혜에 비하면 별것 아니올시다."
"허허 나룻터를 둘러보려 했더니 그만 두어야겠소이다. 자.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저희 객주로 가시지요."
"아, 아니오이다. 회주님은 나루를 둘러보시고 오십시오. 시생도 조금 후에 상조회의 객주로 갈 것이오이다."
"아니? 상조회에 무슨 볼일이 있으시오?"
"사적인 일이오이다. 황방장을 잠시 만나보려 함이지요."
"오,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시생도 곧 뒤를 따를 것이오이다."
마음이 바뿐 송윤호가 오일중과 노탁우와 헤어져 곧바로 삼거리로 향했다. 바로 그 시각에 안 거사는 방금 돌아온 거사들과 사람들 사이에 섞여 문일평의 객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옆에 섰던 준보가 안 거사에게 급히 속삭였다.
"저길 보게. 모가비들일세."
안 거사가 고개를 빼고 돌아보니 방금 배에서 내린 춘길이와 덕만이가 문가 객주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안 거사를 비롯한 거사 놈들은 얼른 사람들 뒤로 숨었다. 문가 객주를 지난 두 모가비는 사람들을 헤치고 윗길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보나 마나 째보 애비네 숯막으로 갈 것이었다.
"저놈들이 어딜 갔다 오는 걸까? 하마터면 나루터에서 마주칠뻔했군."
"그러게 말이야. 저것들 등에 맨 고리짝이 제법 무거워 보이는데?"
"그건 그렇고 아이는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차라리 우리가 안방으로 치고 들어가는 것이 빠르지 않을까?"
"허긴 여자들뿐이라면 내정돌입을 못할 것도 없지. 아이는 고리짝이 없으니 보자기에 싸서 업으면 될까?"
"그건 아무래도 이목을 끌기 쉬우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너희들이 무시로 전으로 가서 고리짝을 사던지 훔쳐서라도 구해오는 게 낫겠다."
안 거사의 말이 기중 가장 그럴듯해서 서너 명의 거사가 장마당 무시로 전으로 달려갔다.
그때 앞장을 선 거칠이의 뒤를 쫓아 송윤호 일행이 황가 객주로 들어섰다. 마당을 들어서니 북적거려야 할 객주가 썰렁했다. 마침 고방에서 한 놈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황방장 있소?"
거칠이가 물었다.
"안 계시오. 옆집으로 가 보우."
"옆집이라니?"
"춘월이네 술청 말이요. 방장님이 거기 계실지 모르오."
송윤호와 거칠이는 급히 객주를 나와서 옆집으로 들어갔다. 그곳도 마찬가지로 술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다만 집을 지키는지 마루에 중노미 놈이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혹 황방장 이곳에 왔소?"
거칠이가 묻는 말에 중노미란 놈이 벌떡 일어나더니 손을 내 저었다.
"가득이나 연희 구경도 못하고 있는데 황방장을 왜 여기 와서 찾소? 객주로 가보우."
"좋네 그러면 이 집에 있다는 아이를 좀 만나보려 하니 안방에 통기를 해 주게."
"아이는 또 왜 찾소? 이 댁 아이가 댁들의 할애비요?"
중노미 놈의 말에 거칠이가 화가 났다. 자연히 큰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송윤호가 급히 제지하려 했지만 늦었다.
"저놈 말버릇 보게나. 네 이놈. 맞아봐야 정신이 들겠느냐?"
거칠이의 큰 소리에 안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춘월이로 짐작되는 중늙은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누가 이리 큰소리를 치는 게야? 시끄러운 품이 상조회가 무엇 하는 곳인지 모르는 객인가 보군."
춘월이의 말에 송윤호가 선 듯 앞으로 나섰다.
"소란을 피워 미안하오. 지난여름에 이 집으로 들어온 아이가 있다기에 한 번만 보려고 왔소. 비례인 줄 아오만 아이를 한 번 보여 주구려."
송윤호가 내뱉는 아이라는 말에 무언가 가슴을 콱 막는 느낌이 든 춘월이가 말은 못하고 손만 내 저으며 문을 탁 닫아버렸다. 영문을 모른 송윤호는 부녀자를 상대로 더 시비를 가리는 것도 무안한 노릇이라 황방장을 찾아 물어보리라 마음먹었다. 송윤호 일행이 돌아서는 사이에 대문을 들어선 웬 여자가 안방으로 다가가 묻는 것이다. 그 여자는 내촌댁이었다.
"어머니, 복덩이 아직 안 왔습니까?"
그러자 안방문이 다시 활짝 열렸다.
"뭐라고? 복덩이는 네가 데려 간 것이 아니냐?"
"예? 제가 아니라 아까 그 사람을 따라 나가는 것을 보았는데요?"
"뭐야? 나는 네가 구경을 시켜주려 데려간 줄 알았지."
바로 그때 황구만이 몇 명의 객주인들과 함께 술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개중엔 문일평도 끼어 있었다. 황구만이 객주인들에게 술을 대접하려던 것이다. 황구만은 마당에 송윤호가 거칠이와 함께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제 자리에 우뚝 섰다.
"아이고, 오셨구려. 한데 데려간 복덩이는 어디 있소?"
내촌댁이 놀란 소리로 물었다.
"엥? 아까 문안으로 쫓았는데 임자가 못 보다니? 나는 여태 이분들과 함께 있었네."
무슨 소리냐는 듯 옆 사람들을 가리키는 황구만의 작은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아이고. 이걸 어쩌나. 아니, 가만. 혹시 상구에게 놀러 갔을지도 모르오. 내 얼른 갔다 오리다."
"가만, 같이 갑시다."
내촌댁이 쏜살같이 삽작을 나서자 황구만이 또한 잽싸게 뒤를 쫓았다. 문일평이 또한 저희 집과 관계된 일이라 후다닥 그 뒤를 따랐다. 그러자 송윤호는 자신도 모르게 문일평을 따르고 있었다. 문일평의 집은 워낙 가까워서 내촌댁은 벌써 삽짝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문일평이 급히 그 뒤를 따랐다. 황구만과 송윤호는 남의 안방까지 따라갈 수가 없어 문 밖에 섰다. 곧이어 얼굴이 허옇게 질린 내촌댁이 나오고 있었다.
"상구는 있소만 복덩이는 오지 않았다 하오. 아이고 이걸 어쩌나. 이걸...."
"앗 임자. 이거 왜 이러나? 정신 차리게나."
내촌댁이 스르르 무너지자 황구만이 급히 부축을 하였다. 그 사이 고리짝을 술청에다 벗어둔 거칠이와 동이 그리고 덕구, 석수 모두가 달려와 송윤호 옆에 붙어 섰다.
"이거 안 되겠다. 아무래도 원일이가 연희 패에 홀려 혼자 구경을 갔나 보다. 거칠이와 동이는 이 사람과 함께 쇠전 마당을 찾아 보아라. 어린아이가 있으면 무조건 점부터 살펴보거라. 덕구야 너는 나와 함께 나룻터로 가자꾸나. 자 어서들 가거라."
거칠이와 동이, 그리고 석수가 우시장 쪽으로 달려갔다. 송윤호는 덕구와 함께 나루를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이 사람아, 정신 차리게. 자, 어서 집으로 가보세. 혹여 집 어디엔가 혼자 놀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나?"
황구만의 말이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되어 내촌댁은 간신히 일어나 춘월이가 기다리는 술청을 향했다. 그런데 길 저쪽에서 웬 사내가 급히 다가오더니 황구만에게 스치듯 말을 흘리는 것이다.
"아까보니 웬 사내 둘이 저 문안에서 고리짝에 무얼 담아 황급히 저 산 쪽으로 갑디다."
놀란 황구만이 그 사내를 쳐다보려는데 사내는 벌써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그 사내는 안 거사였다. 안 거사가 가만히 보니 아까 잘못 잡은 아이는 황가 객주의 아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문가에게 복수는 못 했을망정 황가의 아들이라도 잡아 돈을 우려내고 볼 일이었다. 황 가라고 자식이 귀하지 않겠는가? 돈이 될 것은 틀림없었다. 안 거사는 같이 있던 거사들을 나루터로 급히 돌려보내 아이를 다시 찾게 했다. 문가 객주의 아들은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터였다. 안 거사는 황구만의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임기응변으로 황구만에게 얼른 미운 춘길이와 덕만이를 지목한 것이다. 놀란 황구만이 내촌댁을 부축해 술청 마루에 던지듯 내려놓고 다시 삽짝을 나서 윗길로 뛰기 시작했다. 황구만이 내 달리는 것을 본 사람은 나루 쪽에서 술청으로 다가오던 개동이었다.
"어, 자형. 어디 가오? 자형. 어라? 뭐가 저리 급할까?"
개동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술청에 들어서니 마루에는 내촌댁과 춘월이가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아니? 왜들 이러고들 계시우?"
"이놈아. 너는 여태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나는 게냐?"
춘월이 개동에게 힘없는 소리로 원망을 늘어놓았다.
"헛. 고모님두.... 어제 낮에 칠패로 자형 심부름 간다고 말하지 않았수?"
"이놈아 칠 패고 팔 패고 복덩이가 없어졌단 말이다."
"아니? 복덩이가 없어지다니? 이게 무슨 소리요? 가만 그럼 자형이...."
불에 덴듯 놀란 개동이가 후다닥 황구만이 사라진 쪽으로 뭐가 빠지게 달리기 시작했다. 동춘이 사당패가 동네의 끝에서 다시 돌아오고 있었지만 개동이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복덩이를 잃으면 자신은 물론 고모도, 내촌댁도 그리고 이제 막 아이에게 정을 붙이기 시작한 황구만도 아무런 희망의 끈이 사라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덩이가 없으면 모두가 남남이 아닌가? 사실 그간 복덩이 하나로 얽혀든 가족 관계였던 것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산길이 차차 험해지려는데 마침내 황구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개동이는 죽자고 뛴 끝에 간신히 황구만을 따라잡았다.
"허억, 자, 자형. 지금 누구를 쫓고 있는 거유?"
"고리짝을 짊어진 자들이라 하더라. 이 길이 틀림없어."
"고리짝이라니요? 거기 복덩이가 들었단 말이유?"
"그렇다니까. 본 사람이 일러 주었으니 적실하겠지. 빨리 좇아야 해."
"고리짝에 복덩이를? 이 죽일 놈들을 그냥...."
"어서 가기나 하자. 얼마 못 갔을 것이다."
몸 가벼운 황구만이 앞장을 서서 좁은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비쩍 마른 개동이도 가볍긴 마찬가지여서 달리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두 사람이 부지런히 서너 마장을 좇아가니 드디어 패랭이 쓰고 고리짝 진 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야 이놈들아. 게 섰거라. 고리짝을 내려놓으란 말이다."
황구만이 걸음을 늦추지 않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앞서가던 자들이 힐긋 뒤를 돌아보더니 냅다 뛰기 시작하였다. 황구만과 개동이가 열이 올라 죽자고 뒤를 쫓았다. 그러나 걸음이라면 팔도를 누비던 사당패를 따를 수가 없었다. 차츰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십 리쯤 더 달렸을까? 앞서던 자들이 뒤를 힐긋 돌아보더니 제 자리에 우뚝 섰다. 그들은 안 거사가 지목한 춘길이와 덕만이 였다.
"소문 빠르구먼. 그새 변복 포교가 따라붙다니.…"
"강화에서 계속 우릴 추적했거나 현감이 장계를 띄운 게지."
"이거 째보네를 훨씬 지나쳤잖은가?"
"그렇다고 저것들을 째보 네로 끌고 갈 수야 없지 않은가?"
"까짓 귀찮은데 없애 버리지? 이참에 새로 만든 총, 시사(試射)도 할 겸. 어때?"
"좋네, 산중에 총소리가 대순가? 춘길이 자네가 시사를 해 보게. 쏠 줄은 아나?"
"누굴 어찌 보는 게야?"
덕만이가 자신이 지고 있던 고리짝을 내려서 총 한 자루를 꺼내 춘길에게 건넸다.
"옛 네, 자넨 아직 쇠뿔 통을 구하지 못했으니 화약과 연환은 내걸 쓰게."
춘길이는 덕만이가 건네주는 쇠뿔 화약통을 기울여 화약을 총구에 쏟아 넣었다. 그 뒤에 한지로 싼 연환을 넣고 막대로 힘껏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부시를 쳐 불을 붙인 화승을 격침에 꽂았다. 빠른 솜씨는 아니어도 영 서툰 솜씨는 아니어서 덕만이도 은근히 놀랄 지경이었다.
"접시에 화약을 조금 뿌려야지."
"아차, 그걸 빼 먹었군."
덕만이의 지적에 춘길이가 재빨리 쇠뿔통을 기울였다.
"저기 저놈들이 나타나는군."
덕만이의 말에 춘길이가 총을 들고 앞을 바라보았다. 두 놈이 앞뒤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춘길이는 화승총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삼십 보 안에 들면 쏘게나. 그전에 쏘면 빗나가기 십상일세."
"정말 죽여 버릴까?"
춘길이가 덕만이를 흘깃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죽일 것까지야 있나. 총소리만 들어도 오줌을 지리며 달아들 날 게야. 허기야 내가 쏜다면 저놈 작은 갓 쯤은 떨굴 수도 있는데....."
"그거야 나도 할 수 있지. 보려나?"
'쾅.'
덕만이가 뭐라 미쳐 대답할 사이도 없이 춘길이가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산속에서 울려 퍼지는 총소리는 생각보다 커서 잠시 귀가 먹먹하였다. 그보다 춘길이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앞서 쫓던 황구만의 작은 몸이 뒤로 발랑 넘어졌다. 바로 뒤에서 따라가던 개동이가 깜짝 놀라 내려다보니 황구만의 이마에서 피가 쿨렁쿨렁 새어 나오고 있었다. 황구만의 갓을 맞히려 든 춘길이가 조준이 서툴러 그 아래를 맞혀버린 것이다. 개동이는 급한 나머지 손바닥으로 황구만의 이마를 눌러 막았다. 그러면서 총을 쏜 놈들을 보니 내렸던 고리짝을 다시 짊어지려 하였다. 그것을 본 개동이는 갑자기 무서운 것도 없어지고 무서워할 경황도 없었다. 개동이는 놈들을 향해 달려 나가며 소리를 질렀다.
"이놈들아, 아이는 내려놓고 가거라."
고리짝을 막 짊어진 두 놈이 서로 마주 보다가 다시 개동이에게 눈길을 돌렸다.
"뭐야? 아이라니? 아이를 왜 우리에게서 찾는단 말이냐?"
"내 조카를 내놓으란 말이다. 그 고리짝 안에 있는 걸 알고 있단 말이다."
어디서 생긴 용기인지 개동이는 덕만이가 방금 짊어진 고리짝을 잡으려 하였다. 그러자 덕만이가 재빨리 주먹을 들어 개동이의 얼굴을 갈겨버렸다.
"이런, 포교가 아니라 미친 놈이었구만. 이놈아, 네놈 조카를 우리가 무엇 하러 잡아간단 말이냐?"
"고리짝을 내려 보면 알것 아니냐?"
개동이가 울먹이듯 맞은 턱을 감싸며 고리짝을 가리켰다.
"이보게, 우리가 잘못 보듯 이놈도 우릴 잘못 본 모양일세. 고리짝을 보여주세."
"헛, 참. 진작 말했으면 저놈도 죽지 않았을 것 아닌가?"
춘길이와 덕만이가 포교로 오인해 죽인 죗값으로 고리짝을 내려 뚜껑을 열어 보였다. 한 고리짝에는 총과 무슨 자루가 들었고 또 한 고리짝에는 엽전 꿰미가 들었을 뿐 아이는 없었다.
"자, 보았느냐? 죽은 놈은 갈 길 바쁜 우리를 막은 값이라 치거라. 아니면 너도 죽던지."
고리짝만 열면 복덩이가 있을 것으로 믿고 있던 개동이의 심정은 참담하게 무너져 내렸다. 망연자실한 개동이가 우두커니 서 있는 동안 춘길이와 덕만이는 제 갈 길을 가 버렸다. 얼마가 지나서야 정신이 돌아 온 개동이가 죽은 황구만에게 다가가 보니 기가 탁 막혔다. 황구만 곁에 털썩 주저앉은 개동이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얼마를 그러고 있던 개동이는 황구만을 일으켜 등에 업었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를 내려가니 산 아래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연희 구경을 나갔던 객주의 서사와 하인들이 소식을 듣고 손에 손에 몽둥이를 들고 달려온 것이다. 그들은 개동이가 업고 있는 사람이 황방장인 것을 알고 입이 딱 벌어졌다. 결국 죽은 황구만을 객주로 들고 온 것은 저녁때가 다 되어서였다.
그때쯤 나루터의 굿판을 미친 듯 헤매던 송윤호는 허탈감으로 심신이 무너져 모래 바닥에 주저 앉아 있었다. 눈에 핏발이 서서 앞이 뿌옇게 보이도록 사람들 사이를 누볏건만 원일이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이번만은 원일이가 틀림없는데 어째서 이런 변괴가 또 생긴단 말인가? 도깨비에 홀린 듯 송윤호는 망연자실 말이 없었다.
"나으리, 몇몇 아이는 보았사오나 도련님만한 아이는 쇠전 마당에는 없더이다."
거칠이가 헐레벌떡 달려와 아뢰었다.
"여기도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새 원일이가 돌아왔는지도 모르니 어서 객주로 가 보자꾸나."
거칠이와 덕구가 앞장을 서서 뛰기 시작하자 송윤호도 뛰기 시작했다. 동이와 석수는 송윤호를 호위하듯 뒤를 따라 뛰었다. 송윤호 일행이 객주로 들어서는 순간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황구만의 죽음으로 객주가 크게 술렁이고 있었던 것이다. 오일중과 노탁우는 상황을 파악하려고 개동이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새 술청에서 달려온 내촌댁은 거적에 덮혀진 황구만의 시신을 보는 순간 까무러쳐 버렸다. 황구만의 죽음도 그러했지만 그보다 복덩이를 찾지 못한 것을 직감한 때문이다. 결국 바닥에 주저앉은 춘월이와 기절한 내촌댁은 황급히 술청으로 다시 들려 갔다. 개동이의 설명으로 산 쪽에도 아이가 없었다는 것을 안 송윤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망연히 어두워지는 하늘만 바라보았다. 이렇게 되면 그 아이가 원일이라는 사실마저 확인할 길이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원일이었는지 아닌지 자세히 물어볼 분위기도 아니었다. 잠시 후 송윤호는 객주를 나섰다. 거칠이와 동이 그리고 덕구도 말없이 뒤를 따랐다.
"아아, 원일이의 운명이 어찌 이리 가혹하단 말인가? 하나, 내,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 흔적을 찾아내고야 말 것이니라. 가자.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겠다."
"나으리. 잠깐 기다리소서. 저희는 술청에 잠시 들려야겠습니다. 짐을 갖고 와얍지요."
송윤호가 짐 없는 석수와 문 밖에 서 있는 동안 거칠이와 동이, 덕구는 고리짝을 가지러 춘월이의 술청으로 들어갔다. 그 넓은 술집에 등잔불을 켠 방은 하나 밖에 없었다. 세 사람이 마루에 쌓아둔 고리짝을 찾아 막 짊어지려는데 불 켜진 방에서 춘월이가 나오고 있었다.
"거기 하님들 보게나. 내가 댁의 주인을 좀 뵙고 싶네."
"우리 나으리를 말이요?"
"그렇네. 내 그 양반에게 할 말이 있어 그런다네. 주인은 어디 계신가?"
"밖에 계시요. 잠깐 기다리시오."
재빠른 덕구가 얼른 문 밖을 나와 송윤호에게 춘월이 한 말을 전했다.
"나를 보자 하더란 말이지?"
"그러 하옵니다."
혹여 춘월에게 물어보면 원일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와락 들었다. 송윤호는 덕구의 뒤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들어가 춘월이 앞에 섰다. 때를 같이 하여 고모와 내촌댁이 걱정이 된 개동이가 돌아와 춘월이 옆에 같이 섰다.
"나를 보자 시었소?"
"예. 여기 좀 앉으시지요."
송윤호는 춘월이 권하는 대로 마루에 걸터앉았다. 개동이도 우물쭈물 그 옆에 주저앉았다. 개동이는 고모와 송윤호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황망한 일을 당하시어 얼마나 상심이 크시오."
먼저 송윤호가 상을 당한 춘월을 위로했다.
"그보다 낮에 나으리께서 아이를 찾으신다고 하셨는데 찾으시는 아이가 나으리의 자제이 오이까?"
"우리 집안 장손인 내 조카를 찾소."
"아까 듣자니 지난 여름이라 셨지요?"
"그러하오. 잃어버린 것은 지난해 봄이나 소식을 들은 것이 지난여름이요."
"그렇다면 때는 거의 맞소만 조카인 것을 알아볼 증빙은 있사온지?"
"그 아이의 몸 어딘가에 푸른 점이 있소."
송윤호의 말을 들은 개동이는 깜짝 놀랐고 춘월이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귓볼이오. 여기 나와 똑같은 곳에 있었소."
송윤호는 자신의 왼 쪽 귀를 가르켰다.
"아 아, 그러면 그 아이는 나으리가 찾는 아이가 적실합니다."
"억? 정말이요? 정말 그 아이의 귓볼에 점이 있었소?"
송윤호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묻는 사이 춘월이는 일어나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는 잠시 뒤에 곱게 접은 어린애 저고리를 갖고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그 아이가 올 때 입었던 것이지요. 그동안 내가 간수하고 있었지요. 그 아이를 끔찍이 위하는 내 수양딸이 천을 덧대 더 크게 만들었을 뿐 옷은 그 옷이오. 정성을 들여 지은 흔적이 역력합디다. 혹시 이 옷깃에 수를 놓은 글자를 아시는지요?"
"글쎄 올시다. 돌이 약간 지난 무렵이었으니 혹시 돌 옷이 아닌지 모르겠소. 하나 돌 옷이었다면 옷깃에 목숨 수자를 새겼을 것이오. 그 옷은 아이의 할미인 우리 모친이 지으신 것이오. 우리 아이들 옷도 똑같이 모친이 수를 놓으셨지요."
"아아. 더 이상 확인할 필요가 없구려. 그 아이요. 나으리가 찾는 아이가 그 아이요. 내 어쩐지 처음부터 양반의 씨 같습디다. 이 일을 어쩌나 얘, 개동아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 정들자 이별이라더니 이제는 찾아도 내 손주가 되기는 틀린 노릇이 아니냐? 허기야 박복한 내 팔자에 그런 손자가 애초에 가당치 않은 욕심이었지."
"헛 고모는 그런 말씀 마시유. 내가 처음 데려왔을 때는 그 애 꼴이 죽기 직전이 아니었수? 그런 걸 살려서 키워 놓으니 이제 와 조카라구? 에끼 여보슈. 그 아이가 없으면 여러 목숨이 죽소. 나는 평생 장가를 못 갈지언정 그 아이를 찾고 말겠소. 암 찾고말고."
개동이는 황구만의 죽음을 본 순간부터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양반인 친 숙부가 찾는 조카를 굳이 자신의 조카인냥 착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의 아이던 간에 지금의 현실은 아이의 실종이 더 큰 문제였다. 송윤호는 개동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빛이 좀 더 밝은 곳으로 옮겨 필낭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종이에 몇 자를 적어 춘월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 아이의 이름과 생시와 집안 내력이오. 혹여 아이를 찾거든 그 아이에게 꼭 알려 주기 바라오. 아이가 누구의 손에서 자라든 짐승이 아닌 다음에야 자신의 성과 근본은 알고 커야 하지 않겠소?"
억장이 무너진 송윤호는 말없이 춘월이 집을 나섰다. 눈에 불을 켜듯 찾아도 없다면 원일이는 이미 송파에 없다고 봐야 했다. 도대체 또 누가 원일이를 데려갔단 말인가? 송윤호는 거칠이와 동이 덕구 그리고 석수를 데리고 나루터로 위에 있는 주막으로 향했다. 그곳 봉로에서 자고 내일 갈 곳을 정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주막의 봉로 앞에는 십여 켤레의 짚신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이미 봉로에 사람이 꽉 찬 것이다. 할 수 없이 다른 주막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방 안에서 갑자기 큰소리가 새어 나왔다.
"도팔이 네놈이 일을 다 망치고 선 무얼 또 해? 뭐? 다른 객주? 아 시끄러워. 이미 소문이 나서 집단속이 심할 텐데 무슨 헛소리냐? 엥이. 진작 내게 맡겼으면 이런 일이 있었겠느냐?"
소리를 지른 사람은 다름 아닌 안도칠이었으나 송윤호가 알 리가 없었다. 송윤호는 어디든 빨리 드러눕고 싶을 뿐이었다. 그만큼 오늘 하루가 심신을 지치게 한 것이다. 다른 주막의 봉로로 찾아든 송윤호는 목침을 베고 길게 누웠다. 동이는 덕구와 함께 늦은 저녁밥을 짓기 시작했다. 얼마 후 밥을 퍼 왔다. 송윤호는 입안이 칼칼했으나 아랫사람들을 생각해 억지로 몇 술을 떴다. 그리고는 어두운 강가로 나가 검은 물결을 바라보았다. 아, 원일이가 간 방향은 어느 쪽일까? 이제는 어디로 가야 흔적을 찾을 것인가? 어느새 거칠이가 송윤호의 뒷곁에 서 있었다. 송윤호가 뚜벅 물었다.
"언년이의 소식도 듣지 못했느냐?"
"죽었나 보옵니다. 만나는 사당패마다 다 물어보았지만 모른다 하여이다."
"같이 온 석수라는 젊은이는 믿을만한 사람이냐?"
"예. 겪어보니 신실한 사람이 옵디다."
"그래. 그렇다면 다들 장삿길로 다시 나서 보기로 하자. 원일이와 언년이를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혹여 영영 못 찾으면 너희들이라도 면천을 하고 돈을 벌어 잘 살아야 할 것이다. 내 반드시 그리될 것이라 믿는다."
그 시각, 천마산 아래 중필이는 금화와 마주 앉아 있었다.
"낮에 말이네, 떠나는 배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짠하더구만."
느닷없이 중필이가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마음 짠할 일이 꽤나 없구려."
"정든 사람과 떼어 놓는 것이 그럼 임자 마음엔 아무렇지도 않단 말인가?"
"정이 들었다고 닭이 봉의 새끼를 언제까지 품고 있겠소?"
"그럼, 그 봉의 새끼를 왜 하필 그 먼 강경(江景)이 가는 배에 태우라고 했나?"
"좋은 스승을 만나기가 어디 쉬운 일이오?"
"그것도 신령님이 시킨 일이란 말인가?"
"타고난 운명도 점 하나에 달라지오. 나는 그저 운명에 점 하나만 찍었을 뿐이요."
"신령님 몰래 한 일이란 말인가?"
"신령님이 모르시는 인생사는 없소. 다만 모른 척할 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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