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꽃은 피고지고
1. 언년이, 그리고...
생강나무 꽃이 노오랗게 피어나고 연분홍 진달래가 산기슭을 곱게 수를 놓더니 기어이 봄은 오고야 말았다. 발아래엔 수 없이 많은 풀꽃들이 다투어 피고 함박 나뭇가지 끝엔 하루가 다르게 새잎이 돋았다. 봄 볕은 어디에나 비치고 있었다. 돌 틈 사이로 깽깽이 풀. 동의나물. 쥐오줌풀. 애기똥풀이 저마다 수줍은 얼굴을 살며시 들었다. 먼 산은 온통 연두 빛인데 한 무리 산도화(山桃花)의 분홍빛이 눈길을 끌고 귓가엔 뻐꾸기 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바람이 잠든 산골의 봄은 마냥 졸립기만 한데, 물소리는 옥으로 깎은 목탁을 두들기 듯 쉼 없이 영롱한 소리를 보태고 있었다.
하늘 끝까지 티끌 한 점 없는 봄날의 오후였다. 언년이는 바위에 앉아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봄볕에 아롱거리는 아지랑이 사이로 흰나비 한 쌍이 팔랑팔랑 날아오고 있었다.
'나비......'
마지막으로 나비를 보았던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에서 멀었다. 나비들은 보랏빛 깽깽이 꽃에 앉을 듯하다가 다시 공중에서 엉겨 돌았다. 그리고는 산 아래로 천천히 멀어져 갔다. 먼 산으로 눈을 돌린 언년이의 목구멍에서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꼭 이맘때였지...... 아, 아부지...."
말을 잇지 못 한 언년이가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아, 그 뒤에 모두들 어떻게 되었을까? 아비는 그렇다 하더라도 살아난 사람은 없을까? 모갑이의 발에 채여 언덕 아래로 구른 둘째 도련님은 혹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아, 거칠이 오빠, 당신도 어쩌면 살았을지도 모르겠소, 그때 셋째 도련님을 안고 뛰는 걸 얼핏 보았으니.…'
누가 살았을까? 그동안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곱씹어 생각했던 궁금증이었다. 가마가 뒹굴고 피바람이 일 때, 칼날을 피해 셋째 도련님을 안고 몸을 날리던 남편 거칠이가 언년이의 시야에서 다시 한 번 스치듯 사라졌다.
'제발 부처님 덕에 아씨 마님과 도련님들 만이라도 살아 있게 하소서....'
언년이는 아랫 입술을 질끈 물었다.
'엄마, 난 이렇게 살아 있소, 아비도 딸도 다 잃은 엄마는 지금 어찌 살아가오?'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었다. 평소에 잘 웃지도, 울지도 않던 엄마의 얼굴이 지금은 울고 있었다.
'벌써 일 년이야..... 어제 같은데.....'
그날, 축석고개에서의 살변은 언년이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피멍이 되었고 그날에 본 모든 광경은 머리에 깊이 새겨져 비석(碑石)이 되었다. 태산 같았던 아비 춘보의 죽음은 도저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고 노마님과 큰 댁 마님의 참변은 언년이의 뇌리에서 사라질 줄을 몰랐다. 상전이던 본댁 아씨 마님도 마찬가지였다. 애기씨를 안은 아씨 마님의 가마가 교꾼과 함께 언덕을 구르는 것도 보았다. 아씨 마님과 애기씨는 어찌 됐을까?
언년이가 철들기 전부터 모셔 온 아씨 마님은 주종의 관계를 넘어 착한 언니 같은 분이 아니던가? 아씨 마님의 세 도련님들은 모두 다 언년이가 업어 주었고 막내 애기씨 화일이는 거의 자신의 등에서 크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리고,... 무뚝뚝한 듯 하나 속 깊은 남편 거칠이는 어찌 되었을까? 정말로 그립고 보고 싶었다. 그는 남편이 되기 훨씬 전, 언년이가 아기 때부터 오빠로 의지했던 사람이 아니던가?
'아무리 상것이라 하나 이젠 돌아갈 수도 없는 더럽혀진 몸이니.... 만나도 아무 소용이 없지만, 아이고 부처님, 그때의 그리운 얼굴들을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볼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죽겠습니다.... 아부지. 여보. 도련님, 애기씨, 마님,.... 아, 나으리.'
금강산 유람 길에 들리셨던 나으리의 의젓한 모습과 혼약이 정해진 아가씨였던 마님의 수줍은 모습이 얼핏 스치자 언년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내가 열 살 되던 해였지.…'
언년이의 눈에 다시금 안개가 뿌옇게 끼이더니 이내 눈물이 방울져 발등에 똑똑 떨어졌다.
'모진 게 목숨이라더니.... 백 번 천 번 따라 죽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무슨 낯으로 돌아가? 하지만 그 뒤에 모두들 어떻게 되었는지 멀리서나마 보고 죽고 싶구나. 나는 돌아갈 수 없어. 아니 돌아가지 않을 테야. 하지만.... 정말로 보고 싶구나. 아부지, 여보, 아씨 마님, 도련님..... 모두... 모두.'
'나를 돌아가지 못 하게 만든 모갑이 놈. 그리고 후칠이... 칼 들었던 놈들은 누군지 몰라도 어쨌든 저 두 놈은 내, 죽이고 말리라.'
언년이는 어금니를 물었다. 그동안 미치게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어서 오로지 도망갈 궁리가 더 앞섰던 언년이었다. 그러나 그 뜻은 결국 무산되었다. 몇 번이나 도망을 쳤지만 번번이 다시 잡혀 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놈들을 죽이는 길만 남았다. 언년이는 갈피를 잡지 못하던 마음을 다시 한 번 다잡았다.
'그래, 도망을 칠 수 없다면 이제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테다. 차라리 이 순간부터 나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 맘먹을 테니까. 저 두 놈들을 죽일 때까지 나는 죽은 사람이다. 그래 너희들 마음대로 해 보아라.'
언년이는 입술을 꼭 깨물고 소맷자락을 들어 눈물을 훔친 다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발딱 일어나 코를 패엥 풀었다.
"언니, 모가비가 보자우."
등 뒤에서 월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모가비라는 말에 언년이의 미간에 잠깐 주름이 잡혔다가 금세 펴졌다.
"왜 찾는다는 말은 없구?"
"모르오, 헌데 박거사가 돌아왔나 봅디다."
"그래? 월이 네 서방은 오지 않았니?"
"모르오. 그까짓 서방, 제 아쉬울 때만 서방이지 무슨 서방? 오거나 말거나 알 게 뭐유."
"누구 서방은 별다르냐? 우리가 여염의 살림살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난 그 작자가 죽거나 영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오. 없으니 이렇게나 홀가분 한데 나타나면 낮이나 밤이나 또 덤빌 것 아니요. 난 그 짓이 이젠 몸서리가 처지우."
"출행 나가면 더 할 텐데 그땐 어쩔라고 그러니?"
"글쎄 말이요. 연희(演戱)만이라면 모를까, 거친 머슴 놈들을 생각하니.... 서방에 머슴에... 아이, 이젠 사내의 사 자만 들어도 진저리가 나오."
"죽었다고 생각하면 참아질 거야."
"정말로 칵 죽고만 싶소."
월이를 따라 큰 바위를 지나자 언년이는 저만치 나무 그늘에 앉은 후칠이를 보았다. 처음부터 줄 곳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을 터였다.
'저, 원수.... 저놈만 아니었어도.…'
언년이는 입속으로 후칠이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언년이는 그 당시, 그러니까 축석 고개에서의 참변이 일어나던 그날, 후칠이의 눈에 띄지만 않았어도 오늘날 이런 처지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후칠이가 호들갑을 떨며 모갑이에게 일러바치지만 않았어도... 어쨌든 첫 번 째로 죽이고 싶은 인간이 저놈, 후칠이었다.
"넌 어딜 싸돌아 다니느냐? 다른 년들은 좁쌀 값이라도 벌겠다고 대낮에도 치마를 뒤집어쓰는데.... 네 서방이란 놈은 또 어딜 가서 종일 코빼기도 안 보이고. 내 이것들을 확."
모가비 춘길이가 세모꼴로 눈을 치켜들었다. 그러다 먼 발치에서 언년이의 뒤를 슬금슬금 따라오는 후칠이를 보았다. 춘길이의 입에서 단번에 욕이 쏟아져 나왔다.
"이, 밥 빌어다 죽 쒀 먹고 숯불에 똥이나 구워 처먹을 놈아. 밤낮 계집을 끼고 굴만 파면 거기서 금이 나온다더냐. 은이 나온다더냐? 금 은은 고사하고 엽전 한 푼이라도 건질려면 계집을 밖으로 굴려야 돈이 되지. 네놈이 이 많은 도중 식구를 굶겨 죽이려는 거냐? 에이... 모가지를 뽑아 똥통에 젓을 담글 놈 같으니."
코가 빠져 우두커니 서있는 후칠이의 꼴을 보자. 새삼 부아가 난 춘길이의 손이 단번에 바람을 갈랐다.
'철퍽!'
턱이 돌아간 후칠이가 엉겁결에 코를 감싸니 손가락 사이로 피가 주주륵 흘러내렸다.
"네놈은 애초에 거사질 해 먹을 주제가 못 된다는 것을 내 진작에 알았다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이놈아 설 거사나 황 거사를 보아라. 그놈들은 내가 시키지 않아도 길양식을 벌려고 백주(白晝)에도 제 계집을 업고 나갔지 않느냐? 최 거사까지 제 계집 데리고 산을 내려갔느니라. 한데 네놈은 아직도 저년 하나를 못 다뤄서 도중(徒衆)의 보탬은커녕 오히려 다른 사람이 벌어 온 양식만 축낸단 말이냐? 이놈아 그동안 너희 년 놈이 공으로 먹어 치운 것이 못 되어도 좁쌀 열댓 섬은 될 것이다. 언년이 네년만 해도 그래. 그동안 네년이 도망을 친 것만도 일곱 번이다. 그리고 널 찾겠다고 쓴 돈만 해도 수십 냥이다. 이년아 네년 나이 스물둘이면 이제 시드는 꽃인데 무얼 빼고말고 한 단 말이냐? 이미 버려진 몸뚱이로 네 서방을 찾아가면 누가 열녀문이라도 세워 준다더냐? 어차피 이놈 저놈 밑에 깔린 신세, 도중에 보탬 되는 일을 해야지.... 산 밑 계곡에 한량들 패가 왔다더라. 가거라. 가서 좁쌀 한 됫박 값이라도 벌어 와. 가랭이를 확 찢어 놓기 전에."
후칠이는 머리에 두른 수건을 풀어 코와 입을 감싸 쥐고 마지못한 걸음으로 앞장을 섰다. 그리고는 언년이를 힐끔 돌아보며 턱 짓으로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언년이는 군소리 없이 그 뒤를 따랐다. 다른 때였으면 몇 대를 맞고서야 따라갔을 언년이지만 죽었다고 결심을 하고 난 뒤라 스스럼이 없어졌다. 후칠이가 개울로 내려가 머릿수건을 빨아 피를 닦고 세수를 했다. 그리고는 숙소로 쓰는 갈대로 지은 움막으로 가더니 삿자리 한 장을 말아 어깨에 걸쳤다.
"너는 명색이 서방인 내가 쥐어 터지는데도 눈깔 하나 깜짝 않고 구경만 하기냐?"
앞서 가던 후칠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흥, 맞을 일을 누가 하랬나? 모가비 성질을 하루 이틀 겪었어야 알려라도 주지."
"시끄러워. 나는 그래도 네 사정을 봐서 여직 그냥 두었더니 결국 나만 이지경이 되지 않았냔 말야."
"앞으로는 시키는 일을 싫다 소리 않을 테니 내 생각은 마오."
"엉? 정말이냐?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한다고?"
"그렇소. 대신 내가 싫다는 날엔 옆에 얼씬도 하지 말아. 만약 그랬다간 두 목숨 죽소."
"좋다. 대신 또 튈 생각은 버려라. 모가비 춘길이 하면 팔도의 연희패(演戱牌)들은 다 알아주는 독종 아니냐? 또 연희 패끼리는 다 연계(連繫)가 되어 있단 말이다. 그러니 잡힐 수밖에 없단 말이지. 이제까지 네가 도망을 친 게 몇 번이고 다시 잡혀 온 게 몇 번이냐? 네가 아무리 꿩 새끼 같아도 사흘 내로 잡히고 마는 것은 네가 더 잘 알 게야. 허니 잡혀서 또 매 맞지 말고 이참에 아예 단념하고 하루속히 몸값이나 벌어서 너랑 나랑 이 패를 떠나자꾸나."
"알았소."
"진작 그럴 것이지… 쩝."
후칠이와 언년이가 산 중턱에 이르니 바위 사이로 물이 흐르고 파릇한 숲이 산 밑을 둘렀는데 멍석을 깔기에도 좋은 제법 그럴듯한 계곡이 보였다. 물가에는 시회를 하는지 꽃놀이를 하는지 몇 사람씩 패를 이뤄 술들을 마시고 있었다. 개중에 돈푼이나 있는 양반 패가 불러온 듯 노랑 저고리의 기생도 두어 명 보였다. 그 자리에서는 왁자하게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무릎장단에 맞춰 낭창한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개울 옆에는 주인을 따라온 하인들이 솥을 걸어 불을 때고 한 편은 지고 온 광주리에서 찬합을 내리느라 바빴다.
"저것들은 기생을 데리고 왔으니 틀렸다. 저 위로 가자."
골짜기를 좀 더 올라가자 갓과 도포를 풀어 놓은 늙은이 몇이 봄 볕을 쬐며 삿자리에 누워 자고 있었다. 저만치 나무 밑에는 지게를 받쳐 놓은 아이 종이 앉아서 졸고 있었다. 지게에 얹힌 술병과 빈 그릇으로 보아 술자리가 파하였으나 취기에 깜박 잠들이 들었나 보았다. 후칠이는 좀 더 가보기로 하였다. 반 마장쯤 더 갔을 때였다. 이제 막 피려고 꽃봉오리가 가득한 철쭉 군락 뒤에서 인기척과 함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앞서가던 후칠이가 우뚝 멈추었다. 뒤따르던 언년이도 덩달아 섰다.
"아이 치마는 왜 벗기려고 하오?"
보나 마나 황거사의 짝, 난초의 목소리였다.
"이것아 치마만 들치려고 서른 푼에 닷 푼을 더 낸 줄 아느냐? 몽땅 벗거라."
"흥 그까짓 닷 푼 더 내놓은 걸 가지고 그러오? 그 닷 푼, 나는 구경도 못 했소."
"아까 그 거사 놈에게 준 것이 결국 너에게 준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가시버시가 끼리끼리 아니냔 말이다."
"호호, 가시버시라니? 가시버시가 제 마누라를 내 돌리오?"
"에그 시끄럽다. 치마나 벗어라."
"에잉, 내게도 닷 푼 만 주오, 그럼 시키는 대로 하리다."
"이런 년을 보았나. 그래 좋다. 끝나고 주마."
"측간 갈 때와 올 때가 다르답디다. 지금 주오. 으응?"
"에이... 그년."
이어서 엽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난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호호호, 사내 답소. 그럼 벗지요."
"옳지. 눈 호강이란 말도 있느니라. 아니? 이게 뭐냐? 때 아니냐? 이년아, 물 흔한데 배꼽에 때는 좀 씻고 다니거라. 엥이?"
"산골 물이라 아직은 차오."
"이 년, 말은 잘한다. 여러 말 말고 누어라."
후칠이가 듣고도 못 들은 척 그 옆을 지났다. 언년이도 난초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후칠이의 뒤를 따랐다.
"어디들 가나?"
바위 위에서 난초가 좁쌀 값을 벌고 있는 곳을 빤히 내려다보던 황거사가 후칠이를 향해 히죽 웃고 있었다. 놈은 주막의 중노미 질로 연명하다 봉놋방에 든 연희패를 따라 나선 놈이었다. 중노미 질도 지겨웠지만 연희패의 난초를 보는 순간 한눈에 반했기 때문이었다. 놈은 행중에서 궂은일을 마다 않고 끈질기게 따라다니다가 마침내 모가비의 허락을 받았다. 한데 이놈이 난초와 짝패가 된 후에도 근자에 와서는 은근히 언년이를 엿보는 기색이 역력했던 것이다. 후칠이는 그런 황거사가 싫었다. 그렇다고 대답까지 안 할 수는 없었다.
"저 위의 한량들에게 가네."
"거긴 가 봐야 소용없어. 내가 이미 해우채를 미리 받았거든."
"뭐야? 몇 인데?"
"둘 남았네."
"쯧, 누구 아랫도리가 남아나지 않겠고나. 대낮이면 연희를 팔아야지 몸뚱이를 판단 말인가?"
"이 춘궁기에 누가 그깟 노랫 가락 듣고서 엽전을 내던지나? 그리고, 돈이면 열 놈인들 마달까?"
"모가비가 좋아하겠고나."
"모가비만 좋을라고? 네놈도 내 덕에 목구멍을 채우지 않느냐?"
"빌어 먹을 놈."
후칠이는 그만 맥이 빠져 돌아섰다. 언년이도 말없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힝, 노랫 가락만 재주 인감? 고쟁이 벗는 것도 재주가 있어야 하는 거여."
뒤에서 황거란 놈이 이죽거리고 있었다.
"에그, 모가비에게 아예 턱주가리를 맡겨 놔야 될까부다. 저 빌어먹을 놈이 벌건 대낮부터 저 짓을 할 줄 알았나. 한량 놈들도 마찬가지지 원. 에잉."
"아무 말 마시오, 어찌 보면 황거사가 세상 사는 꾀가 나아 보이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난초를 내놓은 걸 보시오. 황거산들 난초를 내 돌리고 싶겠소? 허고, 춘궁기에 농사철까지 낀 이 때에 누가 노랫가락을 듣고 싶겠소? 저런 한량들이라도 있으니 우리가 굶지 않는 것이요."
"그렇게 소명한 너는 어찌 내 말을 듣지 않았더냐?"
"이제부터 듣겠다고 하지 않았소?"
"진작 그랬어야지. 여태 애를 먹이다가 이제 와서 항복이냐?"
"흥, 끝까지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있었소."
"얼쑤?"
그때쯤, 모가비 춘길은 심부름을 보냈던 박거사를 움막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당진 패라고 했지? 그 패의 모가비가 누군지 알아보았느냐?"
"그것까지는 모르나 일행이 남녀 합이 스물이 넘더랍니다."
"스물이 넘어? 그렇다면 도원이 패가 틀림없겠다. 내 언젠가 당진에서 겨울을 나는 패 중에 그런 패를 본 적이 있지."
"글쎄요. 어쨌든 사람들 말로는 매년 이맘때면 갯가를 따라 한차례 훑는 답니다."
"어디서 들었느냐?"
"선도말 께 입지요."
"그럼 그 패들이 이미 마량포까지 훑었겠고나."
"남행을 하더라니 응당 그랬겠지요."
"쩝, 강경(江景)이 빼고는 가는 곳마다 재미를 보지 못 했으니 이러다 죽도 못 먹어 종당엔 유랑패에 섞이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때가 때니 어쩝니까. 매년 봄이면 이런 거지요 뭐."
"매년 봄이면 네놈은 굶어도 좋다는 소리로 들리는구나."
"허... 그 게.…"
"됐으니 가봐라. 가서 옥녀나 잘 챙겨 줘라. 그래도 그 아이가 한량들 홀리는 재주는 제일이니라."
박거사를 보낸 춘길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벌떡 일어나 움막을 나왔다. 충청도 서천현인 이곳은 너른 논밭은 많아도 높고 장한 산이 드문 편이었다. 주위의 산 이래야 모두 고만고만한 월명산이나 백골산 아니면 봉림산, 천방산이 다였고 그래도 숲이 우거지고 계곡물이 볼만한 곳은 이곳 희라산 밑이 기중 나았다. 그래서 봄 가을이면 가까운 향리의 한량들이나 제법 사는 자제들이 풍류랍시고 즐기러 오는 곳이기도 했다.
산 길을 따라 일 마장쯤을 올라간 춘길은 희라사(熙羅寺)의 요사채(寮舍寨)로 향했다. 요사채라야 다른 절 처럼 심검당(尋劍堂)이니, 적묵당(寂默堂)이니 설선당(說禪堂) 따위가 다 갖춰진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대웅전(大雄殿)이란 현판이 있을 리도 없었고 다만 법당과 스님들이 기거하는 방이 두어 간 있을 뿐이니 실은 암자에 가까운 작은 절인 것이다. 큰 절로 친다면 염화실(拈華室)이라 할 승방 앞에서 춘길이는 헛기침으로 자신의 내방을 알렸다.
"모가비 인가? 들어오너라."
방 안에서 주지인 화옹의 음성이 들렸다. 춘길은 성큼 방으로 들어서서 선 채로 꾸벅 절을 하였다. 그리고는 스스럼없이 화옹을 마주 보고 털썩 앉았다.
"그동안 고맙습니다. "
"그래, 그만 내려가려느냐?"
화옹 스님이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찬찬히 강춘길을 훑었다.
"예, 내일 아침 발행하려구요."
"그래, 어디로 가려느냐?"
"산촌을 백날 다녀 봐야 그렇고 해서 갯가에 가서 뱃놈들을 상대하렸더니 그나마도 다른 패가 먼저 훑었답디다. 그러니 어쩝니까? 이제 북 쪽으로 가보려 합지요. 대사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잘 생각했다. 아무리 춘궁기에 농사철이라지만 그래도 사람 많은 곳이 그나마 연희를 파는 대는 유리할 것이야. 도성에서 강화를 오간다면 더욱 좋겠지. 뱃 사람들에게 부적도 팔 수 있을 터이니."
"예, 그렇지요. 안성을 떠날 때 묘청 스님도 부적을 백여 장 주십디다. 스님 께서도 좀 주우. 양식으로 바꿔 가을에 다시 들리지요."
"그러지 않아도 부탁을 하려 하였지. 절이 작아 시주도 없으니 부처님 공양도 힘겨운 판이거든."
"절간 사정이야 어느 절이나 뻔하지요. 하나 청룡사는 지난 해도 형편이 기중 났습디다. 거기서 스물이 넘는 패가 겨울을 나으니까요."
"지난 겨울엔 묘청으로부터 도움을 좀 받았지. 이 절은 수행하는 중이 적고 객승도 잘 찾지 않으니 차라리 견딜 만 하지만 지금쯤, 양식이 떨어진 절들은 대웅전의 서까래가 무너져도 쳐다볼 새가 없을 것이다."
"그렇습디다. 가는 절마다 탁발하느라 바빠 처마에 거미줄이 걸렸습디다."
"이러다 거미가 주승 노릇을 하게 될 날이 곧 올 게야."
야윈 볼에 빙긋 웃음을 띤 화옹이 검지를 들어 천정 모서리를 가리켰다. 천정에는 공교롭게도 거미 한 마리가 줄로 망을 짜고 있었다.
"사당패도 마찬가지 지요. 세상 살기가 팍팍하니 늘어나느니 사당패라... 이젠 계집 없이 재주만 파는 남사당패까지 생겨 설랑.... 이것들이 우리들 밥그릇을 뺏습디다."
"남사당이 근래에 생긴 것은 아닐지나 재주와 기예가 옛날보다 장해 졌다고 봐야지. 살아남으려니 다른 패보다 뛰어난 볼거리가 있어야 하니 재주를 갈고닦을 수밖에 없지. 전라도 구례와 황해도 구월산에 재간이 특출난 패가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느니라. 참, 너희 패도 색다른 볼거리를 익혀 보지 그러느냐? 연희를 익힌 아이들을 더 늘려서 눈길을 끄는 것도 좋겠고."
"아, 우리가 그럴 겨를이 있습니까? 하루하루가 난감인데? 이젠 사당패도 노래나 춤만으론 힘이 듭디다. 아이들 치마끈을 풀지 않으면 먹고살기도 어렵게 됐단 말이지요."
"세상은 망한 세상이다. 부처님이 바라시는 세상과는 점점 멀어지니 말이다."
"까짓, 아무려면 굶어 죽기야 하겠습니까? 땅가진 양반이 지천인데. 정 안되면 그놈들만 털어먹어도 석삼년은 걱정 없수."
춘길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제껏 주거니 받거니 잘 해오던 화옹 대사가 눈에 광채를 빛내며 버럭 소리를 높였다.
"이놈, 또 죄 없는 목숨을 해칠 생각을 하는 게냐?"
"예?...."
화옹의 눈빛에 질린 춘길이는 그만 찔끔하였다. 평소에는 춘길이를 대함에 있어 손자의 장난을 받아주는 할애비 처럼 너그럽다가도 어떨 때는 개고기 삶아 먹은 행자 다루 듯하는 화옹이었다.
"네 놈은 욕심이 지나쳐 천수를 누리지 못 할 것이니라. 먹을 게 없어 양반 집에 들어가 도둑질을 하는 것이야 누가 뭐라 하겠느냐만 다시는 인명은 해치지 말거라."
"아, 그야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다시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야지. 내일 동자 편에 부적을 보내마. 불사(佛事)에 힘을 보태니 갸륵한 일이다. 이만 가거라."
"그럼, 가을에 뵙지요."
춘길이는 화옹 대사에게 넙죽 엎드려 절을 한 후 재빨리 신발을 발에 꿰었다.
'헛, 옛날의 봄바람 같던 성미는 어디로 보내시고 저렇게 변하셨을꼬? 늙을수록 묘법 스님 처럼 되는 구나.... 엥이.…"
춘길과 화옹이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이 지난 을미(乙未) 년이니 꼭 27년 전이었다. 춘길이는 어릴 때부터 청룡사에서 자랐는데 이는 유랑민이던 부모가 자식을 굶겨 죽이지 않으려 절에다 버렸기 때문이었다. 춘길이 나이가 들어감에 승려로서의 소양을 익히려 행자가 되었는데 청소, 밥 짓기, 불 때기 같은 허드렛일은 잘 했지만 천성이 그래해서 인지 불공이나 좌선은 갑갑하여 참지를 못 하였다. 그러니 글을 배우지도 못 하여 불경을 제대로 외우지도 못 했다. 수 년을 가르치다 인내심이 바닥난 법주(法主 )스님이 차라리 해우소나 깨끗이 하라고 춘길이를 정통(淨桶) 행자로 삼았다. 해우소를 깨끗이 하듯 어지러운 마음도 깨끗이 닦으라는 뜻에서였다. 하지만 이놈은 하라는 해우소 소제는 하지 않고 양지 바른곳에 쭈그려 앉아 먼 산만 바라보았다. 어느 날은 공양간에서 훔친 누룽지를 해우소에 숨어 몰래 먹다 법과 규칙을 담당하던 유나(維那) 스님에게 들키고 말았다. 절의 법이 엄격하기도 했지만 도둑질은 오계(五戒)를 범하는 일이어서 용서가 되지 않았다. 고로, 춘길이는 옷을 벗은 등짝에 회초리를 맞아야 했다. 그것도 계율에 따라 백여덟 대를 맞아야 하는 것이다. 헌데 막 매질을 시작하려는데 승려와 행자를 통솔하는 소임을 지닌 열중(悅衆) 스님이 유나 스님의 소매를 잡고 나선 것이다. 두 스님은 한 스승 아래서 배운 도반이었다.
"저 아이가 그런 짓을 한 것은 내 책임 더 크네. 저 아이의 소양을 알고도 계도치 않은 내 불찰이란 말 일세. 이제껏 살피건대 저 아이의 본성은 부처에게 있지 않네. 허니, 매로 깨우치게 하지는 못 할 것일세. 괜스레 자네의 공력을 소모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만 두세나. 주지 스님께는 내가 말씀 올리겠네."
그때의 유나 스님이 지금 안성 청룡사의 주지 묘법이고 말리던 열중 스님이 바로 희라사의 화옹이었다. 당시 춘길이 나이가 15세였고 화옹의 세속 나이는 35세 일 때였다. 그 후 춘길이는 행자 생활을 접고 나무를 해대는 불목하니 비슷한 신세가 되고 말았었다. 어느 날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사냥꾼이 놓은 올무에 토끼가 걸린 것을 보았다. 그 후 부터 춘길이도 올무로 토끼를 잡아 구워 먹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중도 속도 아닌 놈이 고기 맛까지 알았으니 그까짓 아궁이가 문제인가? 나무는 뒷전이요, 날마다 토끼를 쫓아 다니니 불목하니 짓인들 제대로 하겠는가? 어느 날은 먹다 남은 토끼고기를 사미승(沙彌僧)에게 자랑삼아 보여 주었는데 이를 안 유나 스님인 묘법이 불같이 화를 내었다. 결국 살생을 저지른 죄를 물어 절에서 쫓겨 날 판이었다. 하나 이때도 열중 스님이던 화옹이 대신 나서 죄를 무마해 주었던 것이다.
삼 사 년이 지난 어느 해 춘길이는 절 아래에서 겨울을 나던 사당 패를 따라 사라져버렸다. 사실 춘길이란 이름도 사당패에 든 다음 제멋대로 지은 이름이었다. 사당패를 따라 떠돌아다니다 보니 춘길이는 차츰 제 나름의 식견도 생기고 술수도 늘어나게 되었다. 게다가 본성이 욕심이 많고 포악한 면이 있었다. 그런 그가 신통하게도 우두머리의 소질까지 있어서 행중(行中)의 무리가 굶게 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화적질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사당들과 거사들의 배고픔을 잘 챙기니 춘길이는 서른도 되기 전에 의젓한 제 사당패를 거느리게 된 것이다. 그동안, 웬만한 고을과 절은 다 가 보았고 사찰이 날로 퇴락하는 이유와 중들의 고단한 삶도 직접 보았다. 춘길이의 생각으론 양반 놈들이 문제였다. 어릴 때부터 양반들의 행패는 수없이 보아 온 터였다. 그러나 몸소 느낀 양반의 패해는 더 심했던 것이다. 춘길이는 벼슬이니 양반 타령을 하는 놈들을 무작정 싫어했다. 그리고 절은 춘길이의 고향과 같아서 겨울이 닥치면 어김없이 청룡사나 화옹이 주지로 있는 희라사 밑으로 기어들었다.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와 달리 유교를 건국 이념으로 세운 조선은 곧바로 신돈(辛旽)을 재물 삼아 불교를 탄압했다. 건국과 동시에 절도 중도 괴롭기 짝이 없는 세월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세조 때에 탄압이 잠깐 멈추나 했는데 연산군이 이를 용서치 않았었다. 절을 빼앗고 중을 잡아다 노비로 삼았다. 산짐승 몰 듯, 중 사냥을 한 것이다. 그 후, 조정은 또다시 명종(明宗) 때의 문종 왕후(文定王后)의 비호를 받은 봉은사(奉恩寺) 주지, 보우(普雨)를 끄집어 냈다. 율곡 이이(李珥)가 앞장을 섰다. 불교의 중흥을 꾀한 요승 보우가 유교와 주자학을 신봉하는 조선을 망쳤다는 것이다. 또다시 불교는 주저 앉았다. 전국의 사찰은 신도가 끊기고 신도가 없으니 시주가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중을 그만두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관노가 되거나 변방의 수자리 밖에 없었다. 죽지 못해 사는 중들이었다.
조선에서는 중들만 천대받는 것이 아니었다. 무당이나 괴뢰패, 사당패들도 중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중과 사당패는 동병 상린이었다. 일정한 주거가 없는 사당패는 겨울을 사찰 부근에서 나며 불사를 도왔고 절은 그들에게 일종의 은신처를 제공한 것이다. 또, 절에는 범패, 염불, 법고, 바라 같은 가무희에 뛰어난 재승(才僧)들이 많았는데 사당패나 괴뢰 패들이 그것을 배우고 익혀 나갔다. 그렇게 슬금슬금 두 집단은 역사적 공생관계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조정에서는 왜 보기 싫은 중놈들과 사찰을 몽땅 없애지 않았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절은 으례히 풍광이 수려한 곳에 있게 마련이라 양반 권세가들이 풍류를 즐기기에 좋은 장소요 심신을 달래 줄 좋은 숙박처였다. 그것도 공짜로 말이다. 게다가 중들은 가장 부려 먹기 좋은 노예 집단이었다. 금강산이나 묘향산을 유람할 때에도 힘들여 걸을 필요가 없었다. 그저, 중들이 매는 남여(藍輿) 위에서 산천 경계를 바라보면 그만인 것이다. 물론 이것도 공짜였다. 그리고 중들은 조정에 막중한 부역을 감당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중국에 조공으로 바칠 질 좋은 한지(漢紙)는 모두 이들이 만들어 바쳤다. 이것 역시 모두 공짜였다. 무너진 산성을 수리하는 것도 중들이 했고 염병에 죽은 몰사 죽음도 중들을 시켜 내다 묻었다. 공짜로 부리기만 하면 되었다. 일 한 댓가로 좁쌀 한 줌 받지 못해도 중들은 싫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시키는 일은 무엇이던 했고 살기 위해 탁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 사찰과 중들의 뿌리를 뽑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왜적이 쳐들어 왔을 때에는 그들을 써먹자는 속셈이었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탁월한 활약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조정은 불교를 적당히 주물렀던 것이다.
패랭이 쓰고 행전까지 날렵하게 묶은 춘길이가 박달나무로 깎은 곤봉을 들고 나타났다. 마당에는 북과 장고와 징을 들고 행중에 필요한 솥단지며 바가지, 삿자리 등속을 짊어진 거사들이 나와 있었다. 그들 옆에는 옷 보퉁이를 인 사당들이 제각기 제 짝과 함께 서 있었다. 보퉁이를 인 언년이도 후칠이와 같이 섰다.
"모두들 발행 준비는 되었겠지?"
"곧 끝 날 겁니다."
등짐꾼인 도칠이의 대답이었다.
"곧 끝나다니? 뭘 끝내?"
"아침 동자를 미쳐 못 한 거사가 있어서...."
"뭐라? 어떤 놈이 아직도 밥숟갈을 물고 있단 말이냐?"
"새벽에 도착한 안 거사가 깜박 잠이 들었다 조금 전에 일어난 모양 올시다."
"빌어먹을 놈, 왔으면 나부터 찾아야지 잠을 잔단 말인가? 월이 너는 가서 밥숫갈 놓고 어서 나오라구 해라."
월이는 마지못한 얼굴로 숙소로 쓰던 움막으로 향했다. 한데 움막에 막 닿은 월이가 치마를 휩싸 쥐고 일행을 향해 다시 뛰어오고 있었다. 그리고는 움막을 뒤돌아보며 눈에 독기가 어렸다. 마당에 모여 있던 모가비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단번에 사태를 알아차렸다. 거사들은 실실 웃고 사당들은 혀를 찼다. 화가 난 모가비가 언성을 높였다.
"저런 색에 미친놈을 보았나? 모두가 저 하나 기다리는 줄 뻔히 알면서 아침부터 그 짓을 하려 들어? 야 이놈아 단 이틀 밤을 쉬었다고 네놈 말뚝에 녹이 난다더냐, 쉬가 쓴다더냐? 에라이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구. 안 되겠다. 저놈에게 거사질을 맡겼다간 연희를 놀기도 전에 사당 년은 폐물이 되겠다."
모가비 춘길이는 색에 사족을 못 쓰는 안 거사가 영 못 마땅했다. 그러나 안 거사는 유사시에는 제 몫을 단단히 하는 녀석이었다. 유사시란 다름 아니었다. 연희를 놀지 못해 행중이 곤경에 처했을 때 도둑질이던 강도 질이던 몸을 사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모가비 자신과 손발이 제법 잘 맞는 놈이었다. 사실 안 거사가 이틀 동안 심부름을 다녀온 것도 춘길이 시킨 일을 알아보려고 간 것이었다.
"해 떨어질 때를 기다리려느냐? 도칠이 네가 가서 저놈을 나오라고 해라."
도칠이가 지려 든 지게를 다시 받쳐 놓고 움막으로 가려는데 안 거사란 놈이 먼저 일행을 향해 오고 있었다. 놈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한 번 씩 웃고는 월이 옆에 섰다. 그리고는 월이가 갖고 있던 꽹과리를 받아 들었다.
"저, 저놈 보게. 아예 면상에 개가죽을 덮어썼구나."
다른 사람이었다면 귓쌈을 맞고도 남았을 것이나 춘길이는 안 거사에게 그 소리를 끝으로 말이 없었다.
"올 때는 강갱이에서 웅포를 거쳐 왔으니 갈 때는 충화를 거쳐 부여로 갈 것이니라. 선도는 최 거사와 곱녀가 맡거라."
"부여까지는 백이십 리 길이니 오늘은 아무래도 충화에서 숙소를 정해야 겠습지요?"
최 거사가 모가비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언제는 숙소 없어 잠 못 잤느냐? 가는 데까지 가면 될 것이지, 웬 말이 많으냐?"
말이 많다 보니 자연 늦게 떠나게 되어 첫날은 결국 최 거사의 말대로 되고 말았다. 겨우 60리를 걸어 충화에서 자게 된 것이다. 밤이 되자 춘길이는 안 거사를 조용한 곳으로 불렀다.
"갔던 일은 어찌 되었느냐?"
"틀렸수."
"뭐야? 틀려? 못 갔단 말이냐?"
"갔었지요. 장항포에서 외눈이 대장간을 찾기는 쉽습디다."
"그래서? 노달이가 보내서 왔노란 얘기를 했느냐?"
"얘기나 마나, 외눈이가 숫제 장님이 되었습디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그게 말이우, 장님이 된 그 늙은이를 직접 만나 얘기를 들어보니 기가 막힙디다. 총을 시험하려다 약실이 터져 하나 남은 눈알도 터졌답디다. 허니 눈 한 번 꿈쩍하는 사이에 소경이 된 것이지요. 늙은이 말로는 좋지 못한 쇠인 줄 알면서 돈 욕심을 부렸기 때문이랍디다."
"그럼, 혹시, 만들어둔 총포는 없다더냐?"
"그것도 물어보았었지요. 없다고 합디다. 총은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만들어 주지 않았답니다."
"에잉, 내가 운이 없구나. 내 그것을 꼭 갖고 싶었는데... 쯧쯧."
"조선 팔도에 총 만드는 대장쟁이가 그 늙은이 뿐일라구요."
"모르는 소리 말아. 화승총을 아무나 만드는 줄 아느냐? 군기시의 주철장(鑄鐵匠)이 아닌 다음에사 호미나 벼리던 대장장이가 어찌 총을 만들어? 총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테인데."
기대했던 일이 수포로 돌아가자 춘길이는 더욱 더 총이 갖고 싶었다. 수 년 전만 해도 총포는커녕 제대로 된 환도 한 자루 없이도 부잣집을 잘 털어먹었건만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다. 길가는 나그네를 털어먹자 해도 총포 정도는 보여 줘야 쉽게 말을 듣는 세상인 것이다.
이튿날은 산길 40여 리를 걸어 규암나루에서 금강을 건넜다. 부여로 들어선 것이다. 부여는 대처여서 너른 논밭은 물론 인가도 많고 부자들도 많았다. 하나, 때가 때인지라 논갈고 밭갈기 바쁜 사람들이 장고 소리를 반길 리 없었다. 그것을 아는 춘길이는 인가를 찾지도 않았고 방을 빌리지도 않았다. 괜스레 양반 부스러기들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루를 건너자 말자 모래밭 길을 걸어 부소산 밑에서 밥을 지어먹고 노숙을 하였다. 다음 날은 사뭇 강줄기만 따라 걸으니 차라리 공주까지의 노정이 순탄하였다. 그러나 공주에서 천안으로 가는 길은 이제까지와는 달랐다. 종일토록 꼬불꼬불한 산길 70여 리를 걸어 유전골에 닿으니 봄날 긴긴 해가 저물었다. 천안은 여기서 40 리는 더 가야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유전골은 남북과 서쪽을 잇는 삼거리라 나그네를 위한 제법 큼직한 주막이 있었다. 봉놋방 둘 중에 여사당 여섯을 한 방에 몰아넣고 춘길이는 일곱 거사들과 한방을 차지했다. 좁쌀을 내어 밥을 짓게 하고 사당들이 산길을 걸으며 뜯은 나물을 삶고 무쳐 저녁들을 먹었다. 며칠 만에 노숙이 아닌 방에서 숙식을 하고 보니 모두들 노독이 풀리는 듯 하였다. 밖은 이미 어두웠고 등잔도 없으니 일찍 잠들을 청했다. 한데 막 잠이 들려는데 밖이 소란스러웠다. 그러지 않아도 월이와 같이 있지 못해 안절부절 하던 안 거사가 짜증이 밀려와 문을 벌컥 열었다. 어두운 마당으로 열 댓은 됨직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허나 얼핏 보아도 장고나 북을 맨 것을 보니 그들의 정체를 알만 했다. 안 거사가 쪽 마루로 나섰다.
"어디 패요?"
"어디 패라면 당신이 아우?"
안 거사의 말을 어둠 속에서 누군가 받았다.
"모를 건 또 뭐요? 우린 안성 춘길이 패요."
그러자 뒤에 있던 짧달막한 자가 성큼 다가와 킬킬 거리며 웃는 것이다.
"오, 뻘낚지 잡아먹겠다고 갯가로 간 춘길이가 예서 게게거리고 있단 말이지?"
"우리 모가비를 아는 걸 보니 같은 안성 패인 모양이우?"
"잔말 말고 춘길이더러 성님 마중하라고 전하게."
그 때, 밖에서 주고받는 말들을 진작부터 듣고 있던 춘길이가 가래 뱉 듯 뱉었다.
"저 썩을 놈의 주둥이 하구선. 왔으면 형님에게 문안 인사부터 할 것이지. 웬 지랄이여?"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직 굶어 죽지는 않았고나."
"지랄 말고 들어 오기나 해."
"싫다. 불도 없는 방에 들어가면 네놈들이 모둠 매를 놓으라고?"
"쩝 저놈 때문에 아까운 밀초를 쓰게 생겼군."
춘길이가 자는 거사들을 깨워 부시를 친다 어쩐다 부산을 떨더니 방 밖으로 고개를 빼내었다.
"밤길을 걷는 걸 보니 필시 남의 재물을 털었구나. 옛말에 야반도주에 재미가 들면 손이 귀하다고 했느니. 쯧쯧."
"그러는 너는 백주에 게걸음이라 자식이 없나?"
"밤 이슬 맞는 덕만이 네놈이 걱정돼서 한 말이지. 밤길을 걷는 데는 사유가 있을 터인데? 솔직히 털어놓지그래."
"가만, 그 얘긴 이따 하고 우리 아이들도 갈라서 재워야겠고나."
덕만이가 사당을 갈라 춘길이 패에 끼워 넣으니 두 패의 합이 열둘이라 모로 누어도 좁았고 춘길이가 있는 방은 남자만 열다섯이니 모두 서서 잘 판이었다.
"어이, 춘길이, 차라리 우리는 나가지?"
덕만이가 춘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먼저 밖으로 나섰다. 덕만이 손에는 두자 반 길이의 베로 싼 물건이 쥐어져 있었다. 덕만이가 마당을 지나 삽짝 밖으로 나가니 춘길이도 따라갈밖에 없었다. 주막을 벗어난 덕만이가 물가 바위에 앉자말자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 출행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게로군."
"옳게 봤네. 실은 사흘 전에 보은에서 사람을 죽였네."
"뭐시라?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밤새 도망을 쳐 이틀 반 동안 산길로만 백칠십 리를 걸어 지금 오는 길일세. 거사들만이라면 그깟 거 하루 한나절이면 될 것을 저 사당 년들을 데리고 오자니 아주 혼이 났었네."
"너만 혼이 난 게 아니겠구나. 애들도 사타구니에 가래톳이 생겼겠다. 한데 어쩌다 사람을 해쳤단 말인가?"
"자네도 사람을 죽여 보았잖나? 나도 같은 경우였지. 뭐 죽이고 싶어 죽이겠나?"
"사당 년을 빼 돌렸었나 보군."
"빼 돌리기만 해? 유지 행세하는 주인 놈을 믿구설랑 몹쓸 머슴 놈들이 우리애를 아예 돌림을 놓았다네."
"거사 놈은 무얼 했다나?"
"거사라고 용빼는 재주가 있나? 흠씬 두들겨 맞기나 했지."
"물론 해우채도 안 주었겠고.…"
"해우채 줄 놈들이 돌림을 놔?"
"그렇다고 다짜고짜 쳐들어가 죽이지는 않았겠지?"
"죽일 맘은 애초에 없었지. 하지만 우리 애는 빼 와야 할 것 아닌가? 그 말을 듣자말자 다른 애들을 동구 밖에다 숨긴 다음 거사들을 데리고 갔지."
"그래서?"
"우물쭈물하다 소동이 커지면 낭패 아닌가? 빨리 빼내서 튈 요량으로 방문을 열자 말자 뛰어들어 이놈 저놈 가릴 것 없이 무조건 몽둥이를 휘둘렀지."
"게 중에 재수 없는 놈이 고태골로 갔구나?"
"말 말어. 그러다 한 놈이 박이 터져 뻗어 버리데. 별 수 있나? 사당 년을 치마로 감싸 업고 튈 밖에.... 이놈들이 우리들 숫자에 밀려 직접 쫓지는 못하고 관아에 화적이 들었다고 고변을 한 모양이더라고."
"똥줄 타게 뛰었겠군."
"그런 셈이지."
"정말 쫓아 오던가?"
"쩝, 거, 촌 동네 포졸이라고 우습게 볼 게 아니더군. 날이 밝자 병방 놈과 환도 든 장교 한 놈이 포졸을 몰고 우리를 쫓아 오는데, 가만히 보니 놈들이 웬 놈의 개를 앞 세웠더군. 난 관아에서 도타(逃他) 꾼을 개로 쫓는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도 없을뿐더러 쫓겨보기도 평생 처음일세. 한데 이 개새끼가 우리가 도망가는 방향을 어찌 아는지 우리 뒤를 곧바로 따라오고 있더란 말이지. 원, 세상에 무슨 개가 그런 개가 있는지.... 오직 급했으면 저년들 죄다 버리고 나만 튀려 했다니까."
"그런 개가 있다니.... 별 일이로세. 그래 그런 개를 어떻게 따돌렸나? 가만.... 이거 놈들을 여기까지 달구 온 건 아니겠지?"
"킬킬, 하마 그럴 뻔했지. 하지만 내게는 바로 이 총이 있단 말이지. 마을에서야 총을 쏠 수 있나? 총소리에 마을이 발칵 뒤집힐 텐데. 하나 산에서야 무엇이 두려워 못 쏘겠나? 겨우내 부시 치는 습련까지 한 난데 말이야. 까짓, 앞장선 개가 삼십 보 안에 들기를 기다렸다가 방포를 했지. 그 거리에서 안 맞겠나? 단방에 골로 보냈지. 그랬더니 놈들이 깜짝 놀라 금세 뒤를 향해 줄행랑을 놓더군."
덕만이는 베로 싼 화승총을 춘길이 코앞에 불쑥 내밀었다. 춘길이가 그토록 갖고 싶은 물건이 아닌가?
"이게 그 총 일세."
"이걸 어디서 구했나?"
춘길이가 다급하게 물었다.
"이거? 응, 미안하지만 말해 줄 수 없네. 아차 하면 이 총을 만든 사람이 관에 끌려가 죽을 수도 있거든. 이걸 만들어 준 것만도 고마운데 자칫 은혜를 원수로 갚게 될까 해서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게까지 그래야 하나?"
"좋네. 자넬 믿지. 강화에 가보게. 가서 길상산 아래 곰보를 찾아 내 이름을 대면 무슨 말이 있을 것일세."
"허면 총 값으루 얼마를 줘야 하나?"
"일곱 냥을 주었네. 하지만 문제는 돈이 아닐세. 사람을 봐가며 만들어 주거든."
덕만이의 이 말에 춘길이 킹하고 웃었다.
"걱정 말게. 자네는 되고 나는 안 된다 하겠는가? 그건 그렇고 이제 어디로 가려는가? 나는 포구를 따라 남해를 돌려던 생각을 아예 바꿨네. 그래서 삼개나 송파로 가려 하네."
"자네 마음대로 노정을 바꾸면 되나? 안성서 정한 규약을 어기려는 게야?"
"굶어 죽은 다음에야 규약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래도 삼개나 송파로 간 모가비들은 눈 감아 주지 않을걸?"
"염병 할, 가만 안 있으면 어쩔 거여? 제놈들 지나간 길에서 이삭도 못 줍는단 말인가?"
"왜 내게다 열을 내나? 나도 자네와 같은 처지 아닌가? 경상도를 뽑았다가 막상 문경장도 못 보고 되돌아 선 나 아닌가 말이야."
짧지만 다부진 체구의 덕만이가 한숨과 함께 허리춤에 찔렀던 곰방대를 뽑아 물었다. 이어서 주머니를 끌러 막초를 다져 넣었다. 덕만이가 부시를 쳐 깃에 불을 살리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춘길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희라사의 화옹 스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 것이다. 사당패의 숫자를 늘리느니 다른 패와 합치는 것이 훨씬 유리하지 않겠는가?
"그럼 이러면 어때? 우리 두 패를 하나로 만들어 아예 팔도의 장마당을 따라다니는 것이? 까짓, 장마당 빼고 다른 곳에선 연희를 안 놀면 되잖나?"
"글쎄, 장마당만 따라다니는 패가 없긴 하지만.... 혹 그 지방으로 갔던 패와 장마당에서 서로 만날 수도 있지 않나?"
"아, 그거야 때를 봐 가면서 우리가 양보를 하던지 싸움을 하든지 하면 되지 뭘 걱정인가?"
춘길이의 제안을 들은 덕만이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빨았던 연기를 길게 토했다.
"까짓. 좋아, 그러지."
"하하 잘 생각했네. 정 안 되면 총이나 몇 자루 구해다 화적질이라도 하면 될 것 아닌가?"
"허기야 저 애들 끌고 다니며 먹네 굶네 하는 것보다야 화적질이 낫겠지."
"말이라고.... 표 안 나게 먹고 튀고, 표 안 나게 숨어 살면 누가 우리더러 화적이라 할 텐가? 장마당을 돌며 연희도 놀고 간간이 그 짓을 하면 돈 냥이나마 만져지겠지."
"가만, 그럼 누가 진짜 모가비란 말인가?"
"덕만이 자네가 싫다면 내가 하지."
"헛, 넌 다 좋은데 재물 욕심에 감투 욕심이 문제라.... 모가비는 내가 하겠네."
"쯧, 그러려무나. 대신 양보한 값으루다 그 총은 날 주게."
덕만이가 깜짝 놀라는 시늉으로 총을 등 뒤로 돌렸다.
"미친 놈, 차라리 모가비를 네가 해 먹어라. 사당패를 삶아 먹든 구워 먹든 네 맘대로 하란 말이다."
"너라니? 이제부터 모가비 뒤에 님자를 붙이는 걸 잊지 말어."
"지랄...."
다음 날, 두 패가 함께 길을 떠났는데, 남녀 합이 스물일곱이었다. 이들이 아침부터 길을 줄여 오정이 채 되기 전에 천안을 지나 직산에 닿았다. 한적한 개울가를 찾아 중화를 해 먹으니 사당들은 노독이 나는지 아무 데나 드러누웠다.
"저런 것들을 끌고 다니자니 길이 늦어 큰일이구나. 혹시 보은 현감이 파발을 띄워 한양 가는 각 관아에 알리지 않았을까? 그랬다간 우리가 곱다시 기찰에 걸려들 거 아닌가 말이야?"
"흥, 춘길이 자네도 뱃포가 줄었군. 우리도 그럴 걸 알구서 느릅재를 지날 때 한밭(大田) 쪽으로 도타한 흔적을 남겼네."
"헛, 네게 그런 꾀도 있었구나. 하나 매사는 불여 튼튼이라 했으니 이제부터 큰 길을 피해 멀더라도 돌아가세."
"길 양식도 빠듯한데 하루라도 길을 줄여야지 돌다니?"
"이래서 모가비 감으로는 내가 낫단 말이지. 돌면 그냥 도나? 들리는 동리마다 연희를 팔든 고쟁이를 팔든 벌어먹으면서 가면 될 것 아닌가?"
"딴은 듣고 보니 그럴 듯 한 말이로군."
자꾸 늘어지려는 사당들을 다그쳐 한양으로 가는 대로를 버리고 동북 쪽 안성을 향해 걸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20여 리만 더 가면 안성인데 사당들이 자꾸 뒤로 처지니 할 수없이 그 자리에서 노숙을 하였다. 다음날, 날이 밝기도 전에 조밥을 지어먹은 일행이 안성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마침, 다음 날이 안성 장날이었다. 춘길이와 덕구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하더니 일행을 끌고 비봉산 약수사로 갔다. 비봉산은 높지 않았고 약수사 역시 작은 절이었다. 하나 주지의 배려로 절에서 조금 떨어진 보살의 집 마당을 빌리게 되었다. 두 패는 내일 열 연희 놀이의 손발을 맞추느라 종일 바쁘게 움직였다.
안성(安城)은 대처(大處)여서 장마당의 규모로만 본다면 조선 제일이라 할 만 했다. 그것은 안성의 지리적 여건 때문이었다. 경기도에 속했으면서도 동쪽으로 이천, 서쪽으로 평택, 북쪽으로 용인과 접하며, 남쪽으로는 충청남도 천안, 충청북도 음성, 진천과 경계를 이루어 한마디로 사통팔달의 중앙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사방에서 몰려오는 물화의 종류와 수량은 헤아릴 수없이 많고도 많았다. 논밭 또한 많아서 비교적으로 곡식도 흔한 편이었다. 곡식이 흔하다는 것은 살기도 좀 낫다는 뜻이니 결국 장바닥에도 활기가 돌았다. 안성은 이칠 장이라 이날이 열이레 장이었다. 해가 뜨기도 전에 몰려든 장삿꾼과 도붓꾼이 자리를 펼치자 사려는 사람들도 차츰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장마당 끝에는 우시장이 섰다. 안성의 우시장 역시 팔도에서 알아주는 곳이어서 말뚝에 매인 소만하더라도 3백두에 가까웠다. 춘길이와 덕만이의 연합 사당패는 잡다한 물건이 쌓인 복잡한 장바닥과 우시장 사이의 공터에 멍석을 깔았다. 그리고는 제각기 매무새를 고치고 있었다. 아직은 이른 시각이라 사당이 부르는 노래나 춤을 눈여겨볼 사람이 없을 터였다.
"좀 이른 것 같기도 하고...."
빈 지게에 걸터앉았던 덕만이가 우시장의 소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글쎄? 장꾼들이 장보기가 더 바쁠 테니 좀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러게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잠이라도 좀 더 잘 걸 그랬지?"
"무슨 잠타령인가? 촌놈들 엽랑 끈이나 풀게 만들 궁리나 하지 않구서."
"저년들이 풀어 내겠지."
"안 되겠다. 그냥 앉아 있으면 누가 고린 쇠푼 한 닢 주겠나? 차라리 한 년씩 나와서 노랫가락이라도 뽑는 게 좋겠다. 얘, 월이 네가 먼저 한 가락 뽑거라."
월이가 치맛자락을 여미며 일어나 목을 다듬더니 장고와 북채를 든 거사들을 돌아 보았다. 거사들도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먼저 안 거사의 꽹과리가 먼저 울렸다. 이에 맞춰 월이의 앳된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앞 뜰의 나비는 모란을 찾고
뒷 산의 뻐꾸기는 옛님을 찾는데
우리네 낭군은 날 찾지 않고
가야금 퉁기는 기생만 찾누나.
처음에는 다소 가늘던 월이의 노랫소리가 북과 장고 소리에 묻힐세라 점점 커졌다. 그러자 뒷전에 앉았던 춘화와 옥녀가 나와 장단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월이의 노랫가락이 끝나면 난초가 잇고 난초가 끝나면 곱녀가 이으니 차츰 신명이 오르고 흥이 올랐다. 이에 덕만이 패까지 차례로 나와 춤추며 노래를 부르니 시간이 감에 따라 차차 구경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당이 열둘에 저마다 북, 장고. 꽹과리, 젓대, 징 따위를 끼고 앉은 거사가 열이 넘으니 근래에 보기 드문 규모의 사당패가 아닌가. 언년이도 빠질 수 없어 노래를 한가락 뽑았다. 지난 일 년 동안 매질과 닦달을 받으며 익힌 춤과 노래였다. 그러나 언년이의 소질이 가무에 있지 않았던지 모가비 춘길이의 눈에는 영 시원치 않았다. 그리고 사당이라면 마땅히 사내들의 간을 녹일 웃음이 있어야 하거늘 언년이의 얼굴에서는 그런 것이 전연 없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저년도 재주를 파는 년 인감?"
언년이의 노래가 끝나자 덕만이가 한 말이었다. 덕만이의 이죽거리는 말이 듣기 싫었지만 사실이니 어쩌랴.
"좀 더 가르치면 될 테지."
"힝, 옛말에 될성부른 까마귀는 꾀꼬리 흉내를 낸다 했네. 한데 내가 보기에 저 년은 그냥 갈가마귀일세."
"그럴지도 모르지. 하나 얼굴은 반반하지 않나?"
"어쨌든 저 년은 연희에서 빼는 게 좋겠네."
"허긴 이제는 노래할 아이들이 많이 있으니까."
춘길이는 선선히 덕만이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한 명의 사당이 아쉬웠던 춘길이가 언년이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치려고 애를 쓴 것은 도중의 패거리라면 모를 사람이 없었다. 겨우내 매를 들고 가르쳐 온 것이다. 그러나 언년이는 가무엔 영 소질이 없었던 것이다.
해가 높이 뜰 무렵이 되자. 북과 꽹과리 소리에 끌린 장꾼들이 모여들더니 사당패 놀이에 홀랑 빠진 구경꾼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연희 패들은 더욱 신이 나서 북과 장고를 두드리고 목청을 돋우었다. 한편 노래를 부르며 한편은 어리고 예쁜 사당이 나서 구경꾼 사이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예쁜 사당이 코앞에 사발을 들이대니 마누라에게서 맡아보지 못 한 분냄새에 구경꾼들은 주머니를 끄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당의 사발에는 금세 엽전이 가득 찼다. 그러면 사당은 더욱 교태를 부리며 물러나 춘길 앞에 놓인 바가지에 엽전을 쏟아부었다. 춘길이와 덕만이는 깜짝 놀랐다. 이런 횡재는 이제껏 없던 일이었던 것이다. 다시 한바탕 춤과 노랫가락이 풍물에 맞춰 돌아갔다. 어린 사당이 다시 구경꾼들 사이를 돌았다. 사발에 엽전 떨어지는 소리가 꽹과리 소리만큼이나 요란했다. 금세 사발이 가득해진 사당이 돌아서서 춘길에게 향할 때였다. 갑자기 구경꾼 속에서 어떤 자가 불쑥 나와 사당이 들고 있는 사발을 덥석 움켜잡었다. 놀란 사당이 뺏기지 않으려고 사발을 당겼다. 그러자 사발에 담겼던 엽전들이 쏟아져 땅바닥에 좌르르 굴러 떨어졌다. 어린 사당이 놀라고 당황해서 새된 비명을 질렀다.
"여기 모가비 놈이 누구냐? 어떤 작자기에 남의 판을 차지한단 말이냐?"
낯바닥이 시커먼 그 사내는 멍석 위로 선뜻 올라서더니 다짜고짜 최 거사의 북채를 뺏어 들었다. 그리고는 뺏은 북채로 최거사의 배를 쿡쿡 쑤시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나오라니까. 어떤 놈이여?"
그 자가 누구란 것을 진작에 알아 본 춘길이 지체 없이 앞으로 나섰다.
"이놈, 네놈은 구례 화엄사 아랫 동리에서 놀던 꼭두쇠 먹개란 놈 아니여? 야 이놈아 남녀가 유별하거늘 남사당 놈이 한창 신나게 돌아가는 사당패에 끼어들어 찬물을 뿌리다니?"
"옳아, 이제 보니 네놈은 사당 년 아랫품을 팔아먹고사는 안성패 모가비 춘길이로구먼. 네놈이 내 마당에 기어들었단 말이지?"
"사내 놈들끼리 뭉쳐 다니더니 종래에는 별 미친 소리하고 자빠졌네. 팔도에 널린 게 장마당인데 네 마당 내 마당이 어디 있단 말이냐? 네놈은 네놈대로 판을 벌리면 될 것이지 네놈이야말로 남의 판에 훼방을 놓다니?"
그때 뒷전에 물러나 있던 덕만이가 춘길이를 재치고 앞으로 나섰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일세. 먹갠지 똥갠지 몰라도 말뽄새가 주둥이에 똥이 묻은 건 적실하고나. 자, 네 놈이 뻑시게 나오면 어쩔 것이냐?"
먹개보다 한 뼘이 작은 덕만이가 허리에 양손을 턱 걸치고 먹개 앞에 버티고 섰다. 네가 날 어쩌겠냐는 자세였다. 이쯤 되자 구경꾼들은 바야흐로 새로운 구경거리가 생겼는지라 모든 눈알이 먹개와 덕만이에게 쏠려서 침 넘어가는 소리도 없었다. 먹개가 잠시 멈칫 하는가 싶더니 히죽 웃으며 구경꾼들 뒷 쪽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먹개의 손이 들리는 순간, 손에 손에 몽둥이를 든 자들이 구경꾼들을 헤치며 앞으로 쏟아져 나왔다.
"어라, 이놈들이.…"
상황을 파악한 덕만이가 번개 같이 폴짝 뛰어올라 꼭두쇠란 놈의 면상에 박치기를 꽂아 넣었다. 한데 꼭두쇠 먹개도 전라도 바닥에서 놀던 가락이 있던 놈이었다. 덕만이의 이마가 미쳐 턱에 닿기 전에 펄쩍 뛰어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과녁을 놓친 덕만이가 중심을 잃어서 휘청 두어 걸음 나아가서 멈추었다. 그때, 몽둥이를 든 놈 하나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덕만이의 등줄기를 후려갈겼다. 덕만이는 구경꾼들 앞으로 쏟아지며 풀석 쓰러져 버렸다. 그것을 신호로 먹개의 졸개들이 춘길이네 거사들에게 덤벼들었다. 춘길이네 거사들은 제각기 꽹과리, 징, 장고, 북 등을 들고 있던 몸이라 미쳐 일어서기도 전에 몽둥이찜질을 당할 판이었다. 싸움 구경을 하려던 구경꾼들은 그제서야 혹여 눈먼 몽둥이에 맞을세라 흩어지기에 바빴다. 사당들의 비명 소리와 일단 맞지는 말아야지 싶은 거사들이 급한 대로 들고 있던 악기로 머리를 막았다. 춘길이는 재빨리 갖고 다니던 박달나무로 깎은 곤봉을 꼬나 쥐었다. 그리고는 무지막지한 손놀림으로 곤봉을 휘둘렀다. 그 통에 두어 놈이 머리와 어깨를 맞고 뒹굴었다. 얼추 열 명이 넘는 먹개네 패와 황망 중에도 정신을 차린 춘길이네 거사 몇몇이 본격적인 싸움에 돌입했다. 곤봉을 든 춘길이는 먹개와 마주 섰다.
"에라이 이 죽일 놈아, 너나 나나 어차피 길 위에서 죽을 목숨이 이따위 짓을 하다니. 오늘 네놈을 죽이고 말리라."
춘길이가 독기 어린 눈으로 먹개를 노려 보았다. 먹개도 지지 않고 춘길이를 노려 보았다.
"그러게 사당 년들 아랫 품이나 팔 것이지 풍물은 왜 울리고 지랄인 겨?"
"시끄러워, 이 비역질로 늙을 놈아."
춘길이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곤봉을 휘둘러 먹개의 골통을 내려쳤다. 먹개는 재빨리 몸을 날려 곤봉을 피했다. 한데 피한 곳에 하필 최거사의 북이 놓여있어 하마터면 발에 걸려 넘어질 뻔하였다. 화가 난 먹개가 그 북을 힘껏 차 던졌다. 먹개의 발에 채인 북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대그르르 굴러가기 시작했다. 북은 싸움터를 피해 도망가는 춘길이네 사당들 사이로 구르고 있었다. 한데 도망을 치던 한 사당이 그 북을 잡으려 뛰어갔다. 구르는 북을 쫓아간 사당은 언년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사당패의 재산인 북을 간수하려는 생각이 앞선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굴러가던 북이 갑자기 우뚝 멈추더니 놀란 말 울음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이다. 북만 바라보고 뛰던 언년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한데 앞에는 양반의 행차인 듯 말 두 마리가 있었는데 개중에 한 마리가 제 앞으로 굴러오는 커다란 북에 놀라 앞발을 번쩍 든 것이다. 말이 솟구치자 말 등에 앉았던 사람도 뒤로 떨어질 위기였다. 다행히 말이 더 이상 날뛰지 않고 발을 내리자 말 등의 사람도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고삐를 잡았던 마부는 그사이 혼비백산하였다. 사색이 된 마부가 황망한 몸짓으로 땅에 엎드려 벌벌 떨기 시작했다.
"앗 아버님."
뒤에 따라오던 말 위의 젊은이가 깜짝 놀라 외쳤다. 그리고는 재빨리 말에서 내려 아비가 탄 말 옆에 붙었다.
"아버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한데 백주에 봉변이로구나."
말위의 양반이 춘길이 패와 먹개 패의 싸움판을 부채로 가리키며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나 젊은 양반은 북이 아버님의 말을 놀라게 한 것에 더 화가 나 있었다. 그래서 북과 그 북을 굴린 것으로 보이는 앞의 사당을 번갈아 꼬나보았다.
"네 이 년, 네 감히 양반을 낙마시키려 하다니.... 죽고 싶은 게냐?"
길 옆으로 벗어난 언년이는 고개를 약간 숙일 뿐 말이 없었다.
"이 년, 네년이 정녕 죽고 싶은 게냐? 왜 말이 없어?"
죽을 죄를 지었다고 엎드려 목숨을 빌리라 생각했던 젊은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언년이는 고개를 약간 더 숙였을 뿐 빌지도 엎드리지도 않았다.
젊은이는 무서운 눈으로 언년이를 노려 보았다. 그렇게 양반 행차가 잠시 멈춘 사이에도 춘길이 패와 먹개 패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두 패가 뒤엉겨 정신없이 돌아가는 판인 것이다. 멀찍이 물러난 구경꾼들은 신나는 싸움에 손에 땀을 쥐었다.
"내 저것들을 그냥 두지 못 하겠다. 누가 가서 관아에 알리거라. 적경이 났다고. 내가 그러더라고 일러라."
양반을 따라온 대 여섯의 하인 가운데 몸 가벼운 놈 하나가 재빨리 관아를 향해 뛰었다. 그러자 언년이를 상대하던 젊은이가 다시 말 등에 오르는가 싶더니 말을 채쳐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무리들을 향해 힘껏 고함을 질렀다.
"싸움을 멈추거라. 네 이놈들, 싸움을 멈추란 말이다."
박이 터지고 상투가 뽑히던 양쪽 패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말위에 넓은 갓을 쓴 양반이 덩그라니 앉아 있는지라 일시 기가 식았다.
"이 안성 땅에서 백주에 분란을 일으키다니... 보아하니 사당패로구나. 네놈들은 물고를 당해야 정신들을 차리겠다. 오라를 받을 준비들을 하거라. 그리고 너희들은 저년을 잡아 묶어라. 감히 양반을 낙마 시키려 한 죄를 물으리라."
젊은이가 말머리를 돌리며 언년이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러자 하인들이 덤벼들어 언년이의 팔을 뒤로 꺾어 허리띠로 묶어버렸다.
"어이 덕만이, 관아의 나졸들이 쏟아져 나오기 전에 이쯤에서 빼는 게 어떻겠나?"
"길게 말할 것 없네. 대강 걷어서 튀세."
"얼른 너희들 것만 챙겨서 앞서거라."
춘길이는 거사들에게 사당과 악기를 챙기기를 재촉하였다. 먹개도 마찬가지였다. 꾸물거리다가 관아에 잡혀가는 날이면 치도곤을 맞을 위기인 것이다. 양쪽 패가 다친 사람들을 부축해 도망을 하기에 바빴다. 그러니 연희에 필요한 물품들을 제대로 챙길 수도 없어서 사당들은 기껏 옷 보퉁이나 안았고 거사들은 채도 없는 징이나 북, 장고 따위만 간신히 챙겼을 뿐이었다. 그런데 뒤에 쳐진 사람이 있었다. 언년이의 짝, 후칠이었다. 후칠이는 언년이가 묶이는 것을 보자말자 구경꾼 틈에 끼어 양반 행렬의 동태를 살폈다. 양반들은 춘길이 패와 먹개 패가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가던 길을 따라 천천히 앞으로 말을 몰았다.
"장 부자로군."
"장 부자 한마디면 현감이 꼼짝도 못 한다며?"
"말이라고 하나? 저 양반 당숙이 정 일품 숭록대부일세."
"세도가 하늘을 찌르겠군."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언년이를 데려간 양반이 보통 양반이 아니어서 후칠이는 당장은 어찌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언년이 없이 춘길이네 패를 따라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당 없는 거사 짓을 이미 경험한 후칠이었다. 후칠은 무작정 양반 행렬의 뒤를 쫓았다. 행렬은 우시장을 비켜 남으로 가고 있었다. 인가를 지난 행렬은 논밭이 끝없이 펼쳐진 가운데 길로 접어들었다. 길 좌우에는 논 밭뿐, 초가집 한 채 없었다. 후칠이는 멀찌감치 떨어지기로 했다. 그렇게 두어 각을 따라가니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산 밑에는 커다란 기와집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기와집의 크기는 작은 대궐만 한데 대문 쪽 담장의 길이만도 2백여 보는 되어 보였다.
한편 장 부자의 전갈을 받은 현감은 깜짝 놀란 시늉으로 병방을 불렀다. 장부자가 누구며 어느 령이라고 안 들으랴? 장터에서 난동을 부린 사당패를 잡으라고 병방과 장교를 닦달했다. 이에 병방과 장교는 십여 명의 군졸에게 방망이가 아닌 창을 들려 장마당으로 달려갔다. 왈짜들의 싸움이라기보다 적도로 간주한 것이다. 그러나 장마당으로 달려가보니 놈들은 이미 도타하고 없었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덜렁덜렁 관아로 되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해서, 장꾼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십여 리를 쫓으니 걸음 느린 사당을 이끌고 놈들이 도망을 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장교와 군졸들이 발을 더욱 재게 놀려 놈들을 따라붙었다. 그러자 급해진 거사 놈들이 제 짝과 악기를 내던지고 저만 살려고 죽어라 달리기 시작하니 좇는 자와 쫓기는 자들 사이가 다시 벌어져 버렸다. 사냥개는 재미로 뛰지만 토끼는 제 목숨이 걸렸다는 말이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인 것이다. 결국 포졸들이 잡은 것은 언년이를 뺀 사당 년 열하나와 후칠이를 빼고 부상으로 잘 뛰지 못 한 최거사 뿐이었다. 물론 먹개란 놈과 그 패거리는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놈들은 춘길이와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튄 데다가 재간 많고 발 빠른 남사당패였기 때문이다.
"아버님, 관아에서 전갈이 왔사온 데 장마당에서 싸우던 사당패를 모조리 잡았다 하옵니다. 현감이 아버님의 하회를 기다린다 하온데 어찌 하오면 좋을런지요."
"어찌하다니? 태평한 고을에서 난동을 부린 죄를 물어야지. 백주에 음풍을 퍼뜨린 사당들도 마찬가지야. 모조리 볼기가 터지도록 때려 쫓으라고 전해라."
"예, 그러 하옵지요."
대답을 하고 돌아서는 아들을 바라보던 장부자가 다시 아들을 불렀다.
"얘, 상두야."
"예, 아버님. 다른 분부가 계시온지요?"
상기는 얼른 장부자에게로 돌아서서 고개를 숙였다.
"네가 잡아 온 사당 년은 어찌 되었느냐?"
"일단 광에다 가두어 두었사옵니다만.…"
"내 아까 잠시 보니 고 계집의 태도가 당돌하고도 방자하더구나. 그런 년은 매를 좀 맞아야 하느니.... 하인시켜 볼기를 때려서 내 보내거라."
"예, 그리 합지요."
아버지인 장철기의 앞을 물러난 장상두는 곧바로 자신의 사랑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벼루를 당겨 먹을 간 다음 현감에게 서찰을 썼다. 물론 아비인 장철기의 지시를 적은 것이다. 이어 관아에서 소식을 갖고 왔던 통인에게 서찰을 주어 보냈다.
장철기의 나이 금년 쉰으로 늙지도 젊지도 않았다. 그에겐 석기라는 동생이 있었지만 몹쓸 병에 걸려 온몸이 괴물이 되어 어디론가 사라져 생사가 불명이었다. 그리고 철기 자신은 스물두 살과 열아홉 살의 두 아들을 두었는데 상두가 장남이었다.
장철기의 두 당숙 중에 한 사람은 조선 제일의 부자인 장현(張炫)이고 또 다른 당숙은 나중에 숙종의 희빈이 되는 장옥정의 아버지 장형(張炯)이다. 장철기의 아버지인 장훈(張勳)이 비록 서자 출신이긴 하나, 어쨌든 장철기는 막강한 당숙들을 이용해 나이 서른몇에 한밑천을 움켜쥐었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안성에 전장을 마련하고 내려온 것이었다. 장철기는 재산을 늘리는 이재를 타고난 듯하였다. 안성을 택한 것도 그런 뜻이 있어서였다. 그것은 안성은 삼남에서 한양을 오가는 길목인지라 길목을 지켜서 매점매석을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장철기는 젊은 시절에 많은 사람을 울렸는데 황구만도 그에게 당한 경우였다. 꼭 17년 전, 양화나루에서 가장 성공했던 황구만의 객주를 통째로 삼킨 것이다. 그것도 간단한 술수 한 번으로 말이다. 어쨌든 그 후, 오늘날까지 장철기의 재산은 해마다 불어서 누만금에 달했다.
"이년, 어째서 북을 굴려 말을 놀래켰느냐?"
장상두는 사랑방의 문턱에 팔을 걸치고 꿇어 앉힌 언년이를 내려다보았다. 언년이만 두고 하인들은 다 내 보내고서였다. 왁자하게 매질로 닦달할 사안이 아닌 것이다.
"쇤네가 굴린 게 아닙지요."
"뭐라? 맹랑한 년이로구나. 네가 굴리지 않았다면 말이 왜 놀랐겠느냐?"
"쇤네는 굴러가는 북을 잡으려 했을 뿐입니다."
"결국 굴리지는 않았다? 사당 년이 말은 잘 하누나."
"쇤네는 처음부터 사당이 아니올습니다."
"사당이 아니면? 헛, 그럼 네가 규방의 규수였단 말이냐?"
"규수는 아니나 쇤네는 반가의 규수를 모시던 몸종이었지요."
"점입 가경이로군. 그렇다면 좋다, 네가 모시던 반가의 규수가 뉘 댁 규수였더냐?"
장상두의 물음에 비로소 아차 싶은 언년이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해 보았다. 주인의 이름과 벼슬을 말할 것인가? 말을 하면 주인에게로 돌려보내 줄 것인가? 내가 주인의 이름을 대면 주인이 잘못될 일은 없을까? 어쩌면 이 자리가 사당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언년이는 축석 고개에서의 참변 뒤가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엄마와 남편 거칠이를 비롯한 마님과 도련님들을 단 한 번 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양반끼리이니 어쩌면 주인을 찾아 줄지도 몰랐다.
"이 년 왜 말을 못하느냐? 네 주인이 누구였는지도 모르느냐?"
"말을 하면 주인에게 돌려보내 주시렵니까?"
"헛, 당돌하구나. 먼저 네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서야 결정할 노릇 아니냐?"
"말씀 올립지요. 주인은 전 예조 좌랑이시던 송자 윤자 호자 올습지요."
"송윤호라?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군. 그래 예조 좌랑댁 종년인 네가 사당패에 섞인 연유가 무엇이란 말이냐?"
"그것은...."
언년이는 또 한 번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정황을 말하면 낙향의 연유까지 나올 것인데 과연 큰댁 서방님의 죽음을 말해도 되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막연하나마 언년이가 얼핏 듣기로는 역모 사건과 관련이 있지 싶었던 것이다. 역모를 입에 올려서 좋을 경우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취조를 쉽게 그만 둘 것 같지도 않았다. 한편 주인 댁이나 이 집이나 다 같은 양반이니 서로 사정을 헤아릴 것도 같았다.
"주인댁이 낙향을 하는 길에 포천 못 미쳐 솔모루 어름에서 적경을 당했기 때문 입지요. 그 혼란 중에 사당의 모가비가 쇤네를 끌고 갔소이다."
"허, 적경을 당했다면 인명도 여럿 상했겠구나. 그때 네 주인이 죽었단 말이냐?"
"모르옵니다. 쇤네의 아비가 칼에 맞은 것과 마님들이 탄 가마가 화를 입는 것은 보았으나 나머지는 기억에 없소이다."
"주인이 예조 좌랑 송 아무개라 했더냐? 통 알 수없는 이름이다. 또 다른 아는 사람은 없느냐?"
"주인댁의 큰집 서방님은 사헌부에 계셨습지요."
"헛, 사헌부라? 그래 그 큰서방이란 사람의 이름은 무엇이라 하더냐?"
"같은 송 씨이나 함자는 모르오. 하나 지평 벼슬이셨지요."
"사헌부 지평이라. 그게 언젯 적 얘기란 말이냐?"
"햇수로 삼 년이나 이 년이 조금 넘었지요."
"그래? 알았다."
하인을 불러 다시 가두라는 지시를 내린 상두가 다시 아비의 사랑으로 급히 나섰다.
"아버님, 방금 사당 년을 문초해 보니 주인이 예조 좌랑이던 송 아무개라 하옵니다."
"좌랑이란 양반이 종을 사당에 팔았단 말이냐? 헛 별소리를 다 듣겠고나."
"그런 것이 아니오라 주인이 낙향 길에 적도에게 적경을 당했다 하옵는데, 그때 사당패가 저 년을 데려갔다 하옵니다."
"아니? 그럼? 아침의 그 사당패가 예조 좌랑을 침탈한 적도였단 말이냐?"
"글쎄 올습니다만 어쨌든 사당패가 그 자리에 있었기에 저년을 잡아 간 것이 아니 올지요?"
"네 말이 옳다. 청지기를 불러라. 빨리 관아에 기별을 해서 놈들을 풀어주지 말라고 해야겠다. 하마터면 대적을 놔 줄 뻔하였고나."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저년의 주인인 예조 좌랑의 형이 또한 사헌부의 지평이었다 하더이다. 사헌부라니 어딘가 적경과 연관이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음, 그 말도 근리하고나. 내 언젠가 네게는 칠촌 아재인 희재(張希載)에게서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사헌부의 어떤 놈이 전동 당숙의 뒤를 캐더라는 얘기였느니라. 이게 어쩌면 그 일과 연관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구나."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을 직접 한양으로 보내 자세한 내막을 알아오게 하는 것이 어떨지요?"
"옳은 말이다. 현감에게는 사당패를 방면하지 말고 잡아두도록 지시를 내리거라. 그리고 아이들 중에 승마에 능한 놈을 뽑아라. 내 지금 곧 서찰을 써 줄 테니 한양으로 달려가 전동(典洞) 당숙님께 전하라 일러라. 참, 잊지 말고 선사품도 꼭 챙기거라. 하기야 조선 제일의 부자이신 당숙께서 시골서 보낸 선사품이 눈에 들기나 하겠냐 마는 어쨌든 성의는 보여드려야 하느니라."
"예. 그러겠사옵니다."
장상두는 아비가 써 준 서찰을 승마에 능한 하인을 시켜 급히 한양으로 보냈다. 그리고 안성 현감에게는 잡아둔 사당패를 방면하지 말라는 전갈을 따로 하였다. 여하튼, 언년이가 광에 갇혀 있는 동안 장철기네 하인은 한양 2백5십 리 길을 쉬지 않고 달려갔다가 다음 날 득달같이 돌아왔다. 그리고 장현(張炫)이 보낸 한 통의 서찰을 장철기 앞에 바쳤다. 장철기는 그 서찰을 다 읽은 후에 아들인 장상두에게 밀어 놓았다. 상두는 말없이 서찰을 읽어 나갔다.
"헛, 결국 사헌부의 송수호란 놈은 우리 남인들의 뒤를 캐다가 죽은 것이로구나. 그 동생이란 좌랑 놈도 형이 죽은 원인을 알았을 터이니 낙향을 했을 것이고... 그런데, 이제 세월이 흘러 다 묻히려는 마당에 새삼 일을 만들어 우리에게 이롭겠느냐?"
"그러게나 말입니다. 허니, 이 일을 어찌 처결 하올까요?"
"헛, 처결이랄 것도 없느니라. 다 끝난 일 아니더냐? 사당 년의 말 대로라면 모가비란 놈은 양반을 살상한 흉악한 대적이 아니냐? 그러니 죽여야지. 하나 조정에 장계를 올려서 가라앉은 부스럼을 다시 긁을 일이 무어냐? 그럴 바엔 관아에 갇힌 놈들을 일단 풀어 준 뒤에 쥐도 새도 모르게 모가비 놈만 없애야지. 허고, 네가 잡아 둔 사당 년은 내 보내지 말고 우리 집 종으로 박으면 그만이다. 그러면 어디가서 주둥일 놀리겠느냐?"
"양책(良策)이 옵니다. 아버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한편 안성 관아에 잡혀 있을 것이라 믿는 장철기 부자(夫子)의 생각과 달리 모가비 춘길이와 덕만이는 열한 명의 거사패와 함께 죽자 살자 도망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 사당들과 함께 도망칠 때부터 마전골 쪽인 북쪽 길을 염두에 두고 튀었었다. 그렇게 얼마를 뛰다가 뒤돌아 보니 관군이 뒷꼭지까지 쫓아와 곧바로 창을 내 지를 태세였다. 등짝에 창을 맞기 전에, 잡았던 사당의 손목을 놔 버리고 장고와 북들도 내던졌다. 그리고는 입에 거품을 물고 죽기 살기로 뛰었다. 가진 것을 버리지 않은 사람은 덕만이 뿐이었다. 덕만이는 쫓길 때부터 총을 숨겨 싼 보퉁이를 어깨에 걸쳤던 것이다. 사당들과 악기를 버린 거사들은 몸과 마음이 홀가분해서 씽씽 날 것 같았다. 춘길이와 덕만이, 그리고 열한 명의 거사들은 그런 여세를 몰아 쉬지않고 뛰어서 조비산을 지나 백암 골을 거쳐 이평 골에 닿았을 때는 해가 서산에 걸려 있었다. 쉰 것이라곤 낮에 가정 골에서 물을 마시려고 잠시 쉬었을 뿐, 종일 먹지도 않고 뛴 것은 일생에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평 골에 닿고 보니 모두들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산길 90리를 뛸 동안 좁쌀 한 알 입에 넣은 것이 없다는 사실에 더욱 배가 고파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추포는 면한 것 같다만 이거.... 굶어 죽게 생겼구나."
"이럴 바엔 농가나 덮쳐서 밥이나 뺏어 먹고 튈까 보다."
"이럴 때 보면 덕만이 자네는 참 생각이란 것을 안 하는 사람일세. 쯧쯧.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뱃속이 비면 머리도 덩달아 비는 법 아닌가? 그러니 좋은 생각이 나겠나?"
"아닌 게 아니라 내일도 계속 산길을 걸어야 할 판인데 양식이 걱정이로군."
"자네는 내일이 걱정인가? 지금 당장 이 주린 창자는 어떡하고?"
"좋네, 내가 아침에 챙겨 온 돈이 좀 있으니 이 마을의 촌장을 찾아서 밥을 좀 해 달래야겠네. 그리고 내일부터는 패를 갈라 삼삼오오 흩어지세. 그게 동냥하기도 수월하고 이목도 덜 쏠릴 테니까."
"그렇지. 여기서 광주까지 가려면 80리는 가야 할 게고 광주서 또 송파에 닿으려면 50리는 걸어야지. 산골에서라면 몰라도 대처가 가까운데 계속 뭉쳐서 다닐 수 있나? 그것도 빈손으로 말이야."
"송파에 닿으면 자넨 어쩔 작정인가?"
"이젠 사당패를 해 먹기도 글렀으니 뿔뿔이 흩어저 제 살길을 살던지 아니면 이참에 적굴에라도 들어야지 별 수 있나?"
덕만이의 말을 듣던 춘길이가 여기저기 쓰러져 누운 거사들을 돌아본 후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럴게 아니라, 자네에게 화승총이 있으니 그걸로 적당한 곳에서 한탕 하세나. 그리고 강화로 가서 총포를 더 구한 다음 깊은 산중을 한 곳 차지하면 세상 부러울 게 뭔가 말이야?"
춘길의 말이 끝나자 비스듬히 누웠던 덕만이가 벌떡 몸을 세웠다.
"솔직히 말해서 송파에 닿으면 우리 애들만 데리고 나는 아예 화적질로 나서려 하였네. 자네 말을 들으니 그게 좋겠군. 그렇게 하세."
"그건 뒤의 일이니 나는 일단 두어 놈 데리고 가서 촌장 집을 알아보겠네."
춘길이가 솔선 나서 촌장 집을 찾았다. 이평골의 골은 골짜기여서 골이 아니라 고을을 줄인 말이라 이름대로 지대가 평평하고 논밭이 많았다. 그러나 논밭이 많은 데 비해 가호 수는 적은 편이었다. 물어 찾은 촌장 집은 제법 큰 초가집이었다. 춘길이는 촌장에게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 열 명이 넘는 사람을 보면 얼마나 놀랠지 뻔한 것 아닌가? 우리는 사당패인데 양반의 횡포에 쫓기다 보니 종일을 굶었다. 돈은 드릴 터이니 밥을 좀 해 주십사고. 저녁밥을 다 먹었을 시각이었으나 다행히 촌장은 선선히 부탁을 들어 주었다. 마누라와 며느리를 시켜 부지런히 밥을 한 것이다. 그래서 춘길이와 덕만이를 위시한 열한 명의 거사들은 꿀보다 더 단 보리밥을 먹었다. 이들이 밥을 다 먹었을 때는 이미 날은 어두워 있었다. 춘길이 갖고 있던 주머니를 끄르자 촌장이 손을 들어 말렸다. 배고픈 나그네에게 한 끼 밥을 대접하는 것이 산골 인심인데 아예 그만두라는 것이다. 춘길이는 촌장에게 고개를 숙이고 일행을 데리고 물러났다. 밤이지만 천천히 걸어 마을을 벗어나기로 했다. 마을에서 밤을 셀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아까 촌장이 돈을 받지 않은 것은 우리가 수상한 무리였기 때문일 거야."
"그야 뻔한 것 아닌가? 이런 산골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범도 아니요. 낯선 사람들이 아니냔 말이야?"
춘길이의 말이 옳을 것이라 여긴 덕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춘길에게 낮게 속삭였다.
"지금도 늦지 않았는데 되돌아가 촌장 집을 털어버릴까? 그럼 길양식 걱정 없고 혹시 엽전이라도 챙기면 화승총 사는데도 보테고... 어때?"
"또 똑같은 바보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군. 여기서 이천이 지척일세. 이천 관아에 발고가 들어가면 사방으로 파발이 뛸 텐데 산도 높지 않은 이곳에서 어디로 도망칠 건가? 우리가 안성 관아를 무사히 벗어난 것만 해도 천행일세. 여기다 다시 불을 붙이면 우린 곱다시 몰사 죽음이란 말일세. 알았는가?"
"한 번 해 본 소릴 가지고 괜스레 겁을 주고 지랄인가? 에이, 이게 모두 먹개 그놈 탓이야. 먹갠지 똥갠지 그 새끼를 다시 만나면 그놈은 내게 맡기게. 이 총으루다 아예 뱃대기에 구멍을 내 줄 테니."
마을을 벗어나자 바람 없는 곳을 골라 각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산속의 밤은 늦은 봄이어도 추웠다. 그러나 종일 뛰어다닌 몸들이라 곧 잠에 빠져들었다. 날이 밝자 춘길이는 두세 명씩 조를 짜서 한 사람에 열 푼씩 쥐어준 뒤 차례로 출발을 시켰다. 다시 모일 장소는 송파에서 가까운 째보네 숯막으로 정했다. 째보네 숯막은 봉놋방이 둘이나 딸린 주막으로 도성 부근으로 올 때는 으레히 들리던 곳이었다. 춘길이는 덕만이와 둘이서 가기로 하였다. 길을 떠나려던 덕만이가 불쑥 말하였다.
"자네는 저 아이들을 전부 데리고 가려 하는가? 사당 맛을 아는 거사 놈들이 사내들끼리 산속에서 화적질을 하겠나?"
그것은 춘길이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던 문제였다. 월이와 짝을 이루었던 안 거사란 놈은 분명 색에 주리면 배신을 하고도 남을 놈인 것이다.
"아마도 자네 말이 맞을 것일세. 색이라면 환장한 놈도 있으니까."
"바로 그거네. 나는 믿을만한 한두 놈만 데리고 가려네. 춘길이 자네는 몇쯤 생각하나?"
"나도 한두 놈 외엔 없네. 사당 년을 업으라면 몰라도 화적질할 강단은 없는 놈들 뿐이니."
"나머지는 어쩌지? 따라오겠다면 그것도 큰일 아닌가?"
덕만이의 말에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는 춘길이는 망설이지 않았다.
"송파나 삼개에 가면 분명 안성패가 와 있을 걸세. 동춘이 패도 이때쯤이면 나타날 때아닌가? 그 패에 몰아 주던지 황구네 패에 반씩 붙이면 되네."
"그게 좋겠군. 차라리 식구가 적은 게 홀가분해서 좋구먼."
"괜히 쓸데없이 대적을 만들면 토포 당하기가 십상이지."
"옳은 말일세. 여하튼 강화로 가서 총포부터 구하고 보세나."
안성에 남은 후칠이는 하루하루가 갈수록 똥줄이 타기 시작했다. 잡혀간 언년이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도 없고 그렇다고 좀 보여주십사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리 사람들이 자신을 힐깃거릴 때마다 간이 조마조마하였다. 혹여 관아나 장 부자의 하인들에게 발고를 당해서 잡혀간다면 낭패를 당할 것이었다. 돈이 없으니 밥을 먹을 수가 없는 것도 문제였다. 그렇다면 동냥질을 해야 하는데 막상 그 짓을 해보니 그것도 여의치 않은 일이었다. 밥을 먹었다 쳐도 사실 장 부자 집에서 언년이를 구할 엄두가 나지 않는단 것이 진짜 문제였다. 이렇게 어느 한 가지 시원한 해결책이 없으니 더욱 미칠 노릇이었다. 이제는 모가비도 떠나고 없어서 뒤좇으려 해도 늦었고 언년이를 포기하고 정처 없이 가려 해도 어디로 가야할 지도 막막한 것이다. 그렇게 먹으며 굶으며 열흘을 버티던 후칠이가 결국 결단을 내렸다. 결단이라야 별것 없었다. 그저 야밤에 담을 넘어 언년이를 찾아 업고 튀자는 것이 결단이었다. 어차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할 바엔 죽기 아니면 살기 밖에 길이 없었다. 언년이가 어느 방에 있는 것만 알면 된다. 축석고개에서도 언년이를 업고 잘만 뛰지 않았던가?
밤이 깊어지자 후칠이는 기어이 담을 넘었다. 참으로 대책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일단 어찌해서 담은 넘었으나 그 큰 집 어느 건물에 언년이가 있는지 도대체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러면 얼른 담을 되넘어 도망을 했으면 무사했을 것을 제 딴엔 언년이가 갇혔을 만한 곳을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였다. 작은 짚신이 여러 켤레인 곳만 보면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 언년이가 마중이라도 나오지 않는 이상 언년이를 어찌 찾을 수 있겠는가? 후칠이가 이럴 때쯤에는 언년이는 여종들과 섞여 고단한 몸을 눕혔을 때였다. 그날 어정거리던 후칠이를 발견 한 것은 밤중에 측간을 가던 청지기 김철구였다.
"거기 뉘기여?"
느닷없이 들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 후칠이가 뒤돌아섰다. 그리곤 태연하게 대답했다.
"응, 나여."
"나가 누구여?"
"나가 나지 누구긴 누구여. 그러는 너는 누구여?"
"아니? 이놈이 내가 누군지를 모르다니?"
"내가 누군지 너는 왜 모르는 겨?"
어이가 없어진 청지기가 어둠을 뚫고 곧바로 후칠이에게 다가왔다.
"나를 모르는 놈이 이 집안에 있단 말이냐? 네놈 상판을 봐야겠다."
"보면 알겠니?"
후칠이가 비록 어리석다 하더라도 사당패를 쫓아다닌 세월이 수 삼 년이라 임기응변할 꾀는 있었다. 후칠이는 다가 온 놈 얼굴에 벼락같이 박치기를 날렸다. 그리고는 냅다 뛰어 담벼락을 타고 넘으려 했다. 불시의 일격을 받은 청지기는 정신이 아득한 가운데 이건 보통 일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놈을 놓치면 큰일이었다. 수 일 전에 사당 사건으로 집안이 소란했던 것이다. 벌떡 일어나 담장으로 달려가니 미쳐 넘지 못한 다리 한 짝이 담 이쪽에 있었다. 청지기는 그 다리를 결사적으로 잡고 늘어졌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하인들을 소리쳐 불렀다. 청지기의 외침에 우르르 몰려 온 하인들이 후칠이를 끌어내려 밟아대니 비명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비명 소리를 군호로 이방 저방에서 불이 켜지더니 불 켜진 방에서 하인 하녀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인들 틈에는 언년이도 끼어 있었다. 그 소동을 사랑채의 장철기가 모를 리가 없었다. 작은 사랑채의 장상두는 더 빨리 알았다. 상두가 대강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와보니 하인들이 늘어진 후칠이를 끌어 오고 있었다.
"작은 나으리, 소인이 월담을 한 놈을 잡았사옵니다. 소인이 말입지요."
청지기 김철구는 범인을 잡은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강조하느라 손짓과 몸짓이 마치, 토끼를 처음 물어 온 초짜 배기 사냥개 마냥 부산스럽기 짝이 없었다.
"월장을 했더란 말이냐?"
"예, 소인이 잡았습지요."
"이놈아, 네가 잡은 것은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묻는 것은 저놈이 월장한 연유를 묻는 것이니라."
"그건... 아직 문초를 해 보지 않아 밝히지 못했습지요."
"음, 그렇다면 우선 광에다 집어넣고 빗장을 걸어라. 날이 밝은 다음에 문초를 하겠다."
"예, 분부 받자 옵니다."
상두는 발길을 큰 사랑으로 돌렸다. 아비에게 소동의 시말을 알려야 했던 것이다. 큰 사랑에 이르니 마침 아비인 장철기가 문을 열어 놓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버님, 제가 집안 단속을 잘못한 탓으로 소동이 일었습니다. 죄만 하옵니다."
상두가 마루 곁으로 다가가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장철기는 이마를 약간 찡그릴 뿐 말이 없었다.
"어떤 사내가 월장을 했사온데 차림을 보니 그냥 구메 도적 같지는 않았습니다. 해서, 하인 시켜 광에다 가두어 두라고 했사옵니다."
아들의 말에 장철기는 이미 사태의 전말을 꿴 듯 고개를 끄덕하더니 입을 열었다.
"알았다. 가서 자거라."
"예, 날이 밝는 대로 문초를 해서 월장한 연유를 알아 오겠사옵니다."
"헛, 문초할 것도 없다. 보나마나 사당 년을 찾으러 온 거사 놈일 게다. 사당패란 본시부터 가시버시 놀음에 목숨을 거는 일도 흔하니라."
"아, 그렇사옵니까? 어쨌든 놈에게 버릇은 가르쳐야겠습니다."
"지나치겐 말아라. 집안에 피비린내 나느니라."
"예, 명심하옵지요. 안녕히 주무시오소서."
상두는 아비의 면전에서 물러나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니 내일 하인들 앞에서 취조를 하다 보면 혹여 사헌부의 송 아무개를 습격한 얘기가 나올 수도 있었다. 언년인가 언챙인가 하는 사당 년의 말이 적실하다면 모가비란 놈과 함께 광에 갇힌 놈이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 아닌가? 아비의 말처럼, 역모를 밝히려다 죽은 놈의 얘기가 자꾸만 나와서 좋을 일이 없는 것이다. 어쨌든 갇힌 놈이 사당을 구하려고 온 놈인지를 먼저 알아내는 것이 옳을 듯했다. 상두는 광으로 발길을 돌렸다. 광은 밖으로 빗장이 걸린 위에 두꺼비 같은 자물통이 걸려 있었다.
"안에 있는 놈은 내 말 소리가 들리느냐? 나는 이 집의 작은 주인이니라."
상두가 조용한 목소리로 광문 틈 사이로 먼저 말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안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잠시 뒤에 문짝이 흔들렸다.
"잘 들리오. 한데 작은 주인이 야밤에 왜 날 보자겠소? 거짓말 마오. 청지기의 장난인 걸 내 모를 줄 아오?"
"헛, 그놈, 내가 네놈과 농을 할 여유가 없다. 내일 네놈을 마당에 끌어내어 문초를 할 터인데 그전에 알아야 할 일이 있어 조용히 왔느니라. 바른대로 대답하면 내일 매를 덜 맞을 것이요 거짓을 고하면 아예 물고를 낼 것이야."
"작은 나으리가 적실한 듯 하오니 바른대로 붑지요. 무엇이던 물어봅시오."
"우선 네 이름이 무엇이냐?"
"후칠이 옵니다."
"그래, 너는 어째서 월장을 했느냐?"
"그건... 여기 잡혀온 쇤네의 짝을 찾으려고 왔습지요."
후칠이가 찾는다는 짝이 종으로 박은 언년인 것은 뻔했지만 장상두는 시침을 떼고 다시 물었다.
"네 놈 짝이 어찌 이곳에 있단 말인가?"
"열흘 전 장마당에서 쇤네가 보았으니 압지요."
"무슨 소리. 장마당에서 싸우던 놈들을 모조리 잡았다는 관아의 전갈이 있었는데 네놈은 무슨 재간으로 오라를 면했느냐?"
"그건 작은 나으리께서 쇤네의 짝을 하인 시켜 묶어가실 제 구경꾼 속에 있었습죠."
"그래 좋다, 이제부터 묻는 말에는 대답을 잘 해야 할 것이다. 네놈은 포천 솔모루란 곳에서 양반 행렬을 침탈한 일당이 적실하렸다."
상두의 말이 귓 속을 파고드는 순간 후칠이는 정신이 아득하였다. 아차, 언년이란 년이 먼저 발설을 하였구나 싶은 것이었다. 이어서 관아에 끌려가 처참하게 맞은 후에 목이 잘리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엇, 쉰네가 아니요. 쉰네가 아니오이다. 모가비인 춘길이 짓이지요. 아니 그것도 아니오이다. 우리가 당도했을 때엔 칼 든 놈들이 먼저 선수를 쳐서 행차는 이미 요절이 났었지요. 예, 정말이옵니다. 적실하옵니다. 아이고 나으리."
후칠이는 광문 틈으로 손가락을 내밀며 애절한 소리를 내놓았다.
"칼 든 자들의 소행이었단 말이지? 음, 그렇다면 산적 놈들의 소행이었군."
"애그.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습니다요. 산도적이면 돈 될만한 것을 챙겼을 터인데 물건에는 손도 안 댔었으니 깝쇼."
"뭐라? 그렇다면 원한을 가진 자의 소행이겠구나."
상두의 말에 광 속에서는 잠시 조용하더니 후칠이의 입에서 엉뚱한 소리가 나왔다.
"그 말씀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옵니다. 우리 일행 중 하나가 칼 든 놈을 알고 있었습지요. 이놈도 아마 관아에 잡혀 있을 갭니다. 바로 안 거사라는 놈 올시다. 칼 든 놈들 중에 육촌 형이 있더라 하옵디다. 자기 육촌 형은 대갓댁 호위 무사였다 하옵지요."
후칠의 말을 듣는 순간 상두의 마음은 정해졌다. 아차, 이놈이 너무 많이 알고 있구나. 가문의 안녕과 번영에 방해가 되는 것은 없애고 볼 일이었다. 그러나 당장 그 표시를 낼 상두가 아니었다.
"그렇게 된 일이군. 너는 그때 언년이란 년을 업고 갔구나."
"그랬습지요. 모가비가 업으라기에 업었을 뿐이옵니다. 언년이 말고는 양반 행렬에 손끝 하나 댄 것이 없사옵니다. 양반이 지녔던 엽랑도 모가비가 챙겼지 쇤네는 고린 쇠푼 하나 손 댄 적이 없소이다."
"알았다. 한데 당한 양반이 누구였다더냐?"
"그것까지는 쇤네가 모르옵니다."
"이놈, 거짓이 난당이로구나. 같이 붙어먹는 사당 년이 그것도 네게 말 안 해 주었단 말이냐?"
"아이고 억측의 말씀 올시다. 나으리께서는 언년이란 년을 아직 모르시어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언년이란 년은 주리를 틀어도 제 주인의 얘기를 하지 않는 년이 올시다. 우리 행중의 누구도 제 서방이나 집안 얘기를 들어 본 사람이 없사옵니다. 지독한 년이 옵지요. 그 년이 사당패에 들어와 이제껏 한 일이라고는 꿩 새끼 처럼 도망치고 숨은 것 밖에 없소이다. 참말 올시다. 나으리."
"알았다. 거짓 같지는 않으니 상급으로 내일 몰래 방면을 시켜 주마."
"아이고 황감 하오이다. 허면 상급으루다 언년이를 얹어서 주시겠습지요?"
"내일 보자꾸나."
알 것을 알았고 마음도 정한 장상두가 자신의 사랑으로 돌아가 자리에 편히 누웠다. 밤이 깊어져 축시(丑時1-3시) 쯤 되었을까 후칠이가 갇힌 광으로 살며시 다가가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다가간 사람은 손끝으로 광문을 가볍게 똑똑 두들겼다. 언년이었다. 아까 후칠이가 잡혀갈 때 광의 위치를 눈여겨 보아 둔 것이다. 그 뒤 소동이 가라앉자 잠자리를 빠져나와 굴뚝 뒤에서 다가갈 기회를 엿본 것이다. 그러다 장상두가 광으로 가는것을 보았었다. 몇 번을 두들겨도 인기척이 없자 언년이는 문틈에 입술을 붙여 가만히 후칠이를 불렀다.
"이보시오, 내 말이 안 들리오?"
그제야 깜박 놀란 후칠의 말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엇, 언년인가? 언년이 맞는 거여?"
"시끄럽소, 목소리 낮추시오. 다른 하인이 들으면 둘 다 죽소."
"아, 알았네."
벼락같이 기어서 문짝에 붙은 후칠이가 손끝을 문틈으로 내밀었다.
"잘 들으시오. 아까 이 집 나으리란 자가 무엇을 묻습디까?"
"엉? 네 얘긴 한 것 없다. 그냥 축석 고개에서 네 주인이 당한 얘기를 묻더라."
"거짓말 마오, 내가 하지도 않은 주인 얘기를 저쪽에서 어찌 알고 묻는단 말이요?"
"어? 듣고 보니 그렇구나. 한데 묻는 말에 대답을 못 할 건 또 뭐란 말이냐?"
"그래서 모가비가 행렬을 덮쳤다고 했소?"
"아니지. 네 주인을 해친 것은 우리 패가 아니지 않느냐?"
"그럼 누구라고 했소?"
"우리보다 앞서 칼든 놈들이 도륙을 내더라고 솔직히 말했지."
"잘 했소, 이제 칼든 놈들만 잡으면 될 터이니 말이요."
"흥, 그놈들이 잡히는 것도 길지 않을 것일세. 안 거사의 육촌 형이 바로 그놈들 중 하나였거든."
"뭐요? 그 말이 적실 하오? 정말 안 거사의 육촌 형이 칼잡이였단 말이오?"
"그렇다니까. 내가 안 거사에게 직접들었으니까."
"그럼, 그 말도 이 집 나으리에게 했소?"
"물론이지. 그러니 잡힌다고 하지 않았나."
"아아. 이제 거기는 죽은 목숨이요."
"죽다니 상급으로 내일 방면을 시킨다구 했다. 게다가 너도 함께 말이다."
"에고 그 말을 믿다니.... 어쨋던 내 말을 들으시오. 내일 만약 나와 함께 방면을 시킨다면 모르거니와 혼자 방면이 되거든 부근에서 어정거리지 말고 두 말없이 뛰시요. 그 길 밖에 살 길이 없소. 알아 들었소? 거기를 죽이고 싶은 사람은 바로 나요. 죽여도 내가 죽일 터이니 내가 찾아갈 때까지 제발 살아나 있으시오. 오래 있을 수가 없소. 나는 가오. 내 말 잊지 마시요. 앞만 보고 도망을 치란 말이요."
"헛,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적괴를 알려 준 날 그럴 리가 있느냐?"
한숨을 몰아쉰 언년이가 하녀들이 기거하는 방으로 조용히 숨어들어 누웠다.
아침이 되었다. 상두는 제 아비의 사랑을 찾아 문안을 올린 후에 후칠이와 나누었던 얘기를 내놓았다.
"포천 솔모루의 살변에 대해 사당패 놈들이 의외로 아는 것이 많사옵니다."
"그렇다고 누가 무슨 이유로 저질렀단 것이야 속속들이 알겠느냐?"
"예조 좌랑의 가솔을 밴 놈들 중에 한 놈을 사당패가 알고 있다 하옵니다. 그러니 나중이라도 혹시 그 사실이 밝혀져 조사를 한다면 곤란한 일이 아니 옵니까?"
"알고 있는 놈이 누구누구라더냐?"
"안 거사라는 자와 모가비와 어제 월장을 한 놈입니다."
"모가비와 사당이란 놈은 이미 관아에 잡혀 있을 터, 월장한 놈만 입을 열지 못하게 하면 되겠구나."
"예, 저도 그러하리라 마음먹고 있사옵니다."
"밤에 풀어줘서 없애버리면 될 게다."
두 부자는 간단하게 후칠이의 운명을 끝장 내기로 했다. 그 일은 청지기 김철구에게 맡기기로까지 얘기가 되었다. 하나 그것을 알 리 없는 후칠이는 해가 높이 떴건만 방면하러 오는 사람이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면이 늦어지면 아침밥이라도 줄 것이지 그나마도 없었다. 오정이 되었다. 그제야 후칠이는 뭔가가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상급은 고사하고 물 한 방울 없다는게 말이 되는가? 기다리다 지쳐있는 후칠에게 또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하루 종일 문 틈으로 내다보아도 지나는 하인 하나 없는 것이 더욱 불안했다. 어둠이 짙어지자 문 틈 사이로 희미한 빛이 일렁이더니 광 문 앞에 섰다. 어찌나 반가운지 후칠이가 먼저 문 앞에 다가갔다. 자물통 여는 소리가 들렸다.
"자, 나오너라. 나으리께서 네 놈을 풀어 주라신다."
후칠이는 주위를 재빨리 둘러보았다. 언년이가 없었다. 작은 나으리라는 양반도 없었다. 이거 언년이가 말한 대로 무언가 잘못되는 것이 아닌가 부쩍 의심이 솟았다.
"언년이도 같이 방면하신다고 하시었소. 사당 년 말이요."
"아, 그 사당은 낮에 이미 방면을 시켰다. 아마 밖에서 널 기다릴 게다."
"낮이라니? 사당 혼자만 말이요?"
후칠이가 꼬치 꼬치 캐려고 하는지라 짜증이 솟으려는 청지기가 앞으로 나섰다.
"어따 그놈 말이 많고나. 방면을 시켜 준데도 마다 할 놈일세. 이놈아 싫으면 다시 광 속에서 굶어 뒈지거라. 너희들은 이놈을 다시 광에 처박아라."
"아니요, 아무 말 않겠소. 나 지금 나갈라우. 끽 소리 않고 나간단 말이오."
"이놈 한 번만 더 주둥이를 놀리면 방면이고 뭐고 두들겨 맞을 줄 알아라."
"입을 다물지요. 암요."
대문이 열렸다. 후칠이가 나가자 청지기와 하인들이 따라 나왔다. 언년이의 말대로 되려는가? 후칠이는 이때서야 낌새를 확실히 느꼈다.
"그럼, 잘들 계슈."
후칠이 건성으로 인사를 하고 뒤로 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그랬더니 좌우에 두 놈이 붙어서고 뒤에는 청지기가 따르는 것이었다.
"이 사람 성미가 급하구먼. 우리 작은 나으리께서 언년이가 기다리는 곳까지 안내를 해 주라는 분부를 내리셨다네. 그리고 이건 노잣돈일세."
좌측에 붙은 놈이 주머니 하나를 후칠의 코밑에 들어 보였다. 철커덕 소리만 들어도 제법 무거울 것 같았다.
"이 돈은 언년이가 있는 곳에 가면 주겠네."
후칠이는 세 사람 사이에 끼어 두어 마장을 걸었다. 가는 동안에도 어떻게 튈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후칠이가 어느 장소에 이르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먹은 것도 없는데 갑자기 똥이 마렵소. 잠깐만 기다려 주오. 연초 한 대 필 참이면 되리다."
"어이, 조금만 더 가면 될 텐데 참아 보게나. 저 앞 느티나무에서 기다린단 말일세."
하인 놈이 후칠이의 팔을 잡으며 낮게 을러대었다. 뒤에 섰던 청지기도 나섰다.
"다 와서 말썽을 필려느냐? 똥이고 오줌이고 저기 가서 싸거라. 자 가자."
후칠이가 이미 자신의 운명을 보았는지라 호락호락할 수는 없었다.
"그럼 이 자리에서 싸겠수."
후칠이가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얼른 발끝에 채인 돌멩이를 줏어 들었다.
"어 이 자식 보게. 저기 가서 싸라는데 말을 안 들어?"
"안 되겠다. 얘들아 이놈을 잡아 일으켜라. 구덩이 파놓은 곳까지 끌고가서 없애면 그만이다."
청지기는 이왕 이렇게 된 것 강제로 잡아가서 구덩이에 묻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하나 후칠이를 잘못 본 수작이었다. 후칠이가 쥐고 있던 돌멩이로 옆에 선 놈의 무릎뼈를 벼락같이 찍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며 청지기의 얼굴을 찍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좌측에 선 놈이 눈알도 돌리기 전에 대가리를 내려쳤다. 놈이 기우뚱하는 사이 다시 한 방을 갈기고 왼손은 그놈이 차고 있던 엽전 주머니를 움켜 쥐었다. 그리고 또다시 두어 번 더 정수리를 내려치니 놈은 맥없이 넘어가고 말았다. 얼굴에 한 방을 맞은 청지기는 꼼짝 않는데 처음 무릎을 맞은 놈은 후칠이의 다리를 부둥켜안고 매달려 악을 쓰고 있었다.
"이놈. 네가 무사히 도타할 줄 아느냐? 너 죽고 나 죽자. 이놈."
"흥, 네놈들 수작을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사당 년이 기다린다고? 에이 이놈아."
"주인 나으리들께서 종으로 박은 년을 미쳤다고 다시 내 주겠느냐? 네놈도 오늘 내 손에 죽으리라. 에이이잉."
다리에 붙었던 놈이 앉은 그대로 입을 크게 벌려 후칠이의 허벅지에 이빨을 박고 늘어졌다.
"악."
아픔을 견디지 못한 후칠이가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돌을 들어 놈의 머리통을 마구 내려찍었다. 놈은 담뱃불 들이댄 거머리처럼 금세 뚝 떨어졌다. 후칠이가 아픈 허벅지를 문지르며 내려다보니 축 처진 꼴이 이미 고태골로 간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살인을 하고 보니 나머지도 확실하게 마무리를 하는 것이 나을 듯했다. 설죽은 뱀을 그냥 두고 길을 떠나면 찜찜한 법이니까. 청지기와 엽전을 지녔던 놈에게 몇 대씩을 더 안긴 다음에 돌멩이를 논바닥에 던져 버렸다.
"양반 놈을 믿은 내가 팔 푼이지. 자, 이제 어디로 가지? 이럴 줄 진작 알았으면 언년이 그년을 축석 고개에서 안 업고 왔을 텐데.... 쯥 불쌍한 것."
송파에서 십여 리 떨어진 천마산 아래 외딴곳에 굿당이 있었는데 말이 굿당이지 여느 집과 다르지 않아서 대여섯 간 초가에 울타리 치고 삽작문 단 그렇고 그런 집이었다. 그러나 그 집에 사는 무당과 박수는 여느 사람과는 조금 달랐다. 금화라는 여자와 중필이라는 남자가 그들이었는데 둘은 부부였다. 금화는 금년에 서른다섯이고 중필이는 다섯 살이 더 많았다. 중필이는 본래 강화 사람인데 어릴 적부터 갯가의 짠물을 먹고 자라서 바다나 포구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뱃놈들이나 포구의 왈짜들과 가까이 지내고 술이며 계집에 싸움이 일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이는 자꾸만 많아지는데 왈짜 짓만 하다가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배를 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기잡이 배를 타다가 삼남 지방의 세곡을 싣는 배로 바꾸어 탔다. 수 년이 지나자 삼남을 오가는 물길이 손바닥같이 훤히 보였다. 게다가 강화 부근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걸 아는 선주들은 서로 중필이를 자신들 배의 도사공으로 삼으려고 했었다. 중필이가 성격이 소탈하고 의리를 아는데다 사람을 잘 다루니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어느 해 강화의 고깃배 선주들이 모여 석수어의 풍어를 기원하는 제(祭)를 지내기로 했다. 풍어제를 이끌 무당은 가근방에서 영험하기로 소문난 당구리 할미였고 그녀의 딸 금화가 새끼 무당으로 따라왔다. 포구에다 모든 고깃배를 정박 시키고 색색의 물들인 천을 묶어 배마다 깃대 삼아 꽂았다. 그리고 떡 벌어진 젯상이 차려져 굿이 시작되었다. 괭과리와 징이 울고 칼든 당구리 할미와 금화가 방울을 흔들며 펄쩍 펄쩍 뛰며 춤을 추었다. 강화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모였으니 구경꾼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강화의 심 첨지를 비롯한 교동의 한 부자와 석모도의 권 부자 또한 차례로 나와 절을 하고 재물을 바쳤다. 쌀섬과 무명필이 젯상 앞에 마구 쌓이니 보는 구경꾼들 입에도 침이 고이고 징소리와 꽹과리 소리는 더욱 자지러 지는데 갑자기 새끼 무당 금화가 양 손에 든 방울을 마구 흔들며 구경꾼을 헤치고 어디론가 가는 것이다. 모든 눈이 그 뒤를 따를 것은 뻔한 일이었다. 금화가 다가간 곳은 고깃배가 아닌 세곡선이었다.
그 배는 중필이가 도사공으로 있는 배였는데 고깃배와 떨어진 곳에 정박시킨 것이었다. 금화는 상선의 발판에 올라 뱃전을 잡고 기어올랐다. 바라보던 중필이가 어이가 없어 그녀를 말리려 배를 향해 달려갔다. 배에 올라탄 금화는 선미로 다가가 하늘을 향해 방울을 흔들며 알 수없는 주문을 외치고 있었다. 중필이도 뱃전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때 방울 소리가 뚝 그치는가 싶더니 금화가 바다로 뛰어내렸다. 아니 뛰어내렸다기 보다 무너지 듯 바다로 떨어져 버렸다. 멀리서 바라보던 구경꾼들 입에서 갖가지 비명이 울렸으나 중필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중필이는 선미로 다가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무당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망설일 수도 없던 중필이 서슴없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자맥질로 무당을 찾기 시작했다. 숨이 차서 더 견디지 못 할 정도로 사방을 살피던 중필이 눈에 물결에 일렁이는 흰 치맛자락이 들어왔다. 급히 수면에 떠올라 숨을 삼킨 중필이가 다시 거꾸로 바닷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무당의 허리를 감아쥐고 몸을 솟구쳤다. 그러자 당연히 기절했어야 할 무당이 중필이의 목을 양 팔로 끌어안고 조용히 말을 하는 것이다.
"서방님은 이 배를 타지 마오. 이 배는 내달 초 닷샛 날, 용왕님의 제물이 될 것이오. 다른 배도 타지 마오. 고패(故敗)를 시켜려는 놈들의 계략에 서방님은 매 맞아 죽소."
두 번 째로 어이가 없어진 중필이가 헤엄쳐 나올 생각도 못하고 금화를 안은 채 물 위에 떠 있었다. 그때는 이미 굿판의 구경꾼들이 전부 몰려와 새로운 구경거리에 침을 꼴각 삼키며 두 사람의 행동을 보고 있을 때였다. 사람들은 왜 두 사람이 끌어안고 물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않는지 궁금해하지는 않았다. 다만 좀 더 볼만한 구경거리를 어서 보여 주었으면 했을 뿐이다. 한데 이상한 것은 두 사람 모두 추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것이었다. 때는 정월 보름이라 한강의 얼음으로 서빙고를 채울 때이니 얼마나 춥겠는가? 바닷물은 얼지만 않을 뿐 차기는 강물보다 차서 손끝만 적셔도 뼛속까지 시릴 판인데 저 두 사람은 물속에서 일각이나 서로 부둥키고 있는 것이다. 정신이 돌아온 중필이가 발 헤엄으로 몇 번 물을 차서 구경꾼들 발 밑으로 기어 나왔다. 당구리 할미는 언제 준비한 것인지 젖은 옷자락이 몸에 찰싹 붙은 금화를 치마로 덮어 주었다. 구경꾼들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아쉬움의 한숨을 몰아쉬며 굿 판으로 되돌아갔다.
그 뒤, 금화의 말대로 2월 초 닷새 날 중필이가 탔던 상선이 세곡을 실으러 남쪽으로 가던 중에 울돌목에서 침몰하여 배도 사람도 용왕의 제삿밥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중필이는 죽지 않았다. 금화가 속삭이 듯한 말이 영 찜찜했던 중필이가 중병이 나서 배를 타지 못한다며 도사공 자리를 넘긴 덕이었다. 그 후의 일도 마찬가지였다. 심첨지는 그동안 경강 상인들이 흘린 세곡을 간간이 실어서 재미를 보았는데 새로 뽑은 도사공이란 놈이 양화나루 객주인 놈과 짜고서 그만 고패(故敗)를 저지른 것이다. 결국 빼돌린 곡식을 팔아먹다 들킨 객주인과 도사공은 망나니의 칼날에 피를 묻혔지만 심첨지는 멀쩡한 배 한 척을 잃고 말았었다. 무당 금화의 말 그대로 된 것이다. 이에 소름이 돋은 중필이 앞에 금화가 나타났다.
"영험하신 신령님께서 당신에겐 내가 있어야 하고 내겐 당신이 필요타고 하십디다. 나와 함께 가십시다."
중필이는 두말 않고 금화의 뒤를 따랐다. 당구리 할미는 좋다 싫다 말이 없었다. 반 년쯤 지난 어느날 중필이는 금화에게 물어보았다.
"임자는 그 날 어째서 바다에 빠졌나?"
그러자 금화는 덤덤한 얼굴로 중필이의 목을 그날처럼 끌어안으며 말하였다.
"빠진 게 아니라 내가 뛰어 내렸소."
"어째서. 그 찬 바닷물에 뛰어들었단 말인가?"
"물에 빠지면 날 구하는 남자가 있을 터인데 무엇이 걱정이겠소?"
"내가 그 자리에 없었으면 어쩔라구?"
"당신이 구해 줄 것은 이미 신령님에게 들어 알고 한 일이요."
"그럼, 내가 혼인을 마다 했으면 어쩌려고 했나?"
"나와 혼인하지 않았으면 당신은 지금쯤은 죽고 없을 것이요."
"헛, 그 말은 믿겠네만 어찌 날 택한 것인가?"
"신령님이 생각이 없어 당신을 서방으로 맞으라 했겠소? 미리 알아 무엇할라오?"
처음 몇 년 간은 당구리 할미의 신당이 있는 달곶이(月串)에서 살았는데 중필이를 알던 왈짜와 뱃 놈들이 무시로 신당을 드나들자 금화가 갯가와 뚝 떨어진 천마산 아래에 신당을 새로 세운 것이다. 그것이 얼추 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그동안 금화의 신통력이 더욱 증진해,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금화는 아무에게나 점을 보아주지 않았고 굿을 해주지도 않았다. 언젠가 중필이가 다시 물었다.
"임자의 신통력이면 누만금의 재산을 모을 수 있을 것인데 어째 재물도 사람도 다 몰라라 하는가?"
"재물이 당신을 살리지 않소. 수 년 내로 당신의 액운이 물러갈 것이니 그때를 기다리는 것 뿐이지요."
"헛, 내게서 액운이 물러가면 내가 장원급제를 한단 말인가. 아니면 하늘에서 당상 벼슬이 떨어질 것인가? 기껏해야 왈짜요 박수일 뿐인데 액운이 물러간들 바랄 게 무언가?"
"왈짜도 왈짜 다운 사람을 만나 왈짜 답게 살다 가는 것이 왈짜 다운 생을 사는 것이 아니겠소? 당신은 지금껏 왈짜다운 생을 산 것이 아니지 않소?"
"좋네. 그럼 언제쯤 내가 왈짜 다운 사람을 만나 왈짜답게 살겠는가?"
"기다리지 않아도 곧 올 것이오. 그때는 당신 성미에 맞게 살아 보시오."
"그럼, 그동안 임자는 나를 위해 산 것 이란 말인가? 당신에겐 무슨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무당 다운 생을 기다리지요. 나 역시 당신이 하는 일을 같이 할 것이요."
그 후부터 중필이는 금화를 도와 어쩌다 굿판을 도와주거나 아니면 송파로 나가 장바닥의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술도 마시고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살폈던 것이다. 금화도 그런 일이라면 중필이를 말리지 않았다.
"오늘도 송파에 나가시려오?"
아침밥을 다 먹은 중필이가 숭늉 그릇을 내려놓을 때 금화가 입을 열었다.
"그럴까 싶네만 왜 내가 집에 할 일이라도 있는가?"
"일은 없소. 오늘은 가지 않았으면 싶지만 꼭 가야 할 운수라면 어쩌면 봐 두는 것도 해롭지 않을 것 같소."
"가지 말라면 안 갈 것이네만 뭘 봐 둘게 있다는 건가?"
"오늘 당신이 송파에 가면 춘월이네 술청을 들릴 것 아니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나 대낮부터 술 마실 일이야 있겠나?"
"술 마실 일이 세 차례 생길 것이오. 그때 그놈들 얼굴을 잘 익혀 두시오."
"왜? 나중에 내 돈을 떼어먹을 사람들인가?"
"그것보다 훨씬 중한 일이 생길 것 같아 그러오."
"용한 당신 말이니 그렇게 하겠네. 그런데 무슨 술을 하루에 세 차례나 마실 일도 있나?"
"농으로 듣지 마오. 두 번째 술을 마실 때 어린애 하나를 구하시오. 꼭 구해야 하오."
"술집에 애는 뭐며 물에 빠진 것이라면 몰라도 구하긴 또 뭘 어떻게 구하라는 말인가? 이거야 원, 어떤 일인지 알아야 어째 볼 것 아닌가."
"난들 다 알겠소? 막상 닥치면 어찌 될 것이요."
아침 상을 물리고도 한참을 꾸물거리던 중필이가 거의 오정(午正)이 되어서야 송파로 향했다. 천마산에서 송파 나루까지는 거의 십 리나 되는 거리였다. 그러나 노량으로 걸어도 반 시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송파에 들어선 중필이는 여염집들을 지나 새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갔다. 길 좌우에는 새로 생긴 술집과 객주가 늘어서 있었고 좀 더 내려가 큰 길에 이르자 사람과 마소가 길을 메우고 있었다. 객주 앞에는 바리 짐을 내리고 싣느라 더욱 분주하고 술집 앞에선 손님을 부르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중필이는 혹시 강화의 범털이를 만날 수 있을까 하여 나룻터로 내려가 보려 하였다. 범털이는 어릴 적 친구이자 교동 한부자네 상선의 도사공이었다. 중필이가 상조회의 객주를 지나 문가네 객주에 이를 즈음이었다. 헌 패랭이 쓴 두 사람과 두건을 질끈 묶은 사내 하나가 바뿐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개중에 왼쪽 사내는 일부러 그런 것처럼 중필이의 어깨를 강하게 치고 나갔다. 그런데 그 사내가 먼저 시비를 따지는 것이다. 적반하장이란 이런 경우였다.
패랭이 쓴 사내들은 바로 사당패의 모가비 춘길이와 덕만이었다. 그 것이 어째 된 노릇인가는 다음과 같은 일 때문이었다.
덕만이와 작반(作伴) 하여 떠났던 춘길이는 송파 부근의 째보네 숯막에 도착했다. 봉놋방 앞에 끈 떨어진 짚신이 어지러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거사들은 이미 도착했나 보았다. 두 사람이 삽짝을 들어설 때부터 보고 있던 째보네가 방문을 열고 히죽 웃고 있었다. 그의 아들이 째보여서 째보네가 된 사내의 진짜 이름은 득수였다.
"늦었구먼. 거사들은 어제저녁에 왔네."
"오랜만이요. 째보 아범."
춘길이가 인사를 하자 덕만이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잘 있었소? 날 잊진 않았겠지요?"
"별 소릴 다 듣겠구먼. 환갑도 되기 전에 노망난 줄 아나? 자넬 잊게? 삼년 전 떼 먹힌 자네 패거리 밥 값을 어찌 잊겠나? 오라, 그걸 셈해 주려고 왔구먼."
"하하, 그런 노망은 날 수록 좋은 것인데... 쯧쯧... 아직 노망 날 때가 아닌 모양이요."
"실없는 소리 말고 저 방으로 들어가게. 내 그러지 않아도 자네들에게 할 말이 있네."
"거 할 말이란 게 삼년 전 외상값 달란 얘기만 아니면 다 듣겠수. 그건 그렇고 우린 아직 아침밥도 못 먹었소. 아무거나 있으면 좀 주시오."
"그러지. 보아하니 밤길들을 걸었나 보군."
"짚이 있거든 몇 단 주오. 거사 놈들 짚신짝이 말이 아니구료."
"음, 그것도 넣어줌세."
춘길이와 덕만이는 째보 아범이 지소하는 방으로 들지 않고 곧바로 거사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눕거나 벽에 기댄 거사들은 두 사람을 보자 반색을 하며 일어나 앉았다.
"여기서 꼼짝 말고 이 삼일 만 있거라. 그 이전에 우리가 무슨 수를 생각해 볼 테니까. 짚을 얻어 줄 테니 놀 때 짚신이라도 삼아 놓거라. 한데 안 거사는 왜 보이지 않느냐?"
"아, 그놈은 새벽같이 어딜 가던데요?"
춘길이는 더 이상 쓰다 달다 말이 없이 덕만이와 그 방을 나와서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눈치를 보아하니 저놈들은 우리가 이미 사당패를 그만 둘 걸 아는 것 같단 말이야. 안 거사란 놈이 바람을 잡아 다른 무언가를 꾸미는 것 같어."
"나도 그런 눈치를 챘네.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묻는 놈이 하나도 없잖은가?"
춘길이의 말에 덕만이도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두고 낌새를 살펴 보세나. 어차피 달고 다닐 형편이 아니지 않은가?"
"제놈들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니 저러겠지. 어쨌든 좀 더 두고 보세."
째보 아범이 직접 밥상을 들고 왔다. 두 사람은 부모 죽인 원수에게 달려들 듯 밥상에 달라붙어 밥을 죽여대기 시작했다. 그런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째보 아범이 다시 히죽 웃더니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자네들 얘기는 어제 다 들었네. 들어보니 앞으로 사당패를 거느리긴 글렀더구만. 저 방의 거사 놈들도 소용 없어지긴 마찬가지고. 그러니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할 것일세. 어때? 내 말이 틀렸나?"
"솔직히 말하면 그렇긴 하우."
"그래서 내가 자네들에게 끈을 이어 주려는데..... 어떤가?"
"끈은 누구며, 우리가 할 일은 또 무엇이요?"
"만나보면 알겠지만 내 톡 까놓고 얘기함세. 우리 힘을 합쳐 통 크게 한 번 놀아보세. 원산에서 넘어오는 북어나 북포(北布)를 털잔 말일세. 다른 사람이면 내가 이런 제안은 절대 하지 않네. 내가 자네들을 잘 아니까 이러는 것이지. 자네들이 잘 못 되는 날에는 나까지 목이 성치 않을 짓을 왜 하겠나?"
이게 웬 하늘에서 시루떡 떨어지는 소리인가? 춘길이와 덕만이의 입장에서는 불감청(不敢請)에 고소원(固所願) 아닌가? 어차피 무엇을 털어도 털 판이었고 사실 이리로 온 것도 총을 살 돈을 좀 빌릴까 해서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얼씨구 할 수는 없었다.
"멀쩡한 사내들을 화적을 만들려는 구려."
"왜? 내 안(案)이 마음에 안 드나? 그럼 할 수 없지. 못 들은 걸로 하세. 나도 말 한 적 없네."
"거 참, 성미 급한 것은 여전하시우. 화적질이든 수적질이든 가릴 처지가 아닌 걸 뻔히 알면서 그러오? 하지만 화적질을 잘 하고도 장물아비 잘 못 만나 경친 놈을 여럿 보아서 그러는 거 아니요. 장물 애비가 누군지 알기 전에는 죽어도 못하오."
"하하하, 역시 춘길이 자넨 뒷 끝 살피는 것은 예나 제나 변하지 않았구나. 걱정 말게 장물아비는 바로 나니까. 실은 몇 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수적의 물화를 처분해 주고 있단 말일세. 그렇지 않았다면 이깐 술집으로 목구멍을 여지껏 어찌 메웠겠나?"
"그럼 우리가 그 수적 밑으로 기어 들어가란 말이우? 그건 싫소. 우리끼리 할라오."
"자네가 뭘 잘못 알고 있군. 그 사람은 아무나 받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는 사람일세. 자네들을 보자는 사람은 다른 사람일세. 이른바 물주란 말일세. 화적질에 필요한 자금을 대고 갈라 먹기를 하자는 거지."
"자금이 얼마든 댈 수 있단 말이요?"
"그 사람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야 할 테지만 어쨌든 내가 자네들을 보증섰으니 틀림없네. 어떤가? 해 보려나?"
춘길이는 덕만이를 돌아보았다. 덕만이도 같은 심정으로 춘길을 돌아 보았다. 둘은 눈빛을 마주치며 서로 고개를 까닥했다.
"까짓 좋소이다. 그러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작심들 한 몸이요. 만나 봅시다. 어디 있소?"
"가만, 밥상이나 물리고 천천히 가세. 그 사람은 낮이어도 상관 않네. 참, 한가지 말해둘게 있네. 자네들이 만나려는 사람은 새파란 젊은 일세. 서른이 채 못 되었단 말일세. 그렇다고 얕보아선 안 되네. 그 사람은 말씨와 달리 머리를 쓰는 데는 자네들과 나를 합쳐도 따르지 못 할 것이야. 젊다고 우습게 보다가 당한 사람이 수도 없다네."
"걱정 마시오. 우린 뭐 늙었소? 이제 갓 마흔이면 총각 소리 듣소."
세 사람은 송파장터의 즐비하게 늘어선 객주 가운데 어떤 큼지막한 객주로 들어갔다. 째보 아범을 본 일꾼이 달려와 그들을 작은방으로 인도하였다. 잠시 후에 갓을 쓰고 철 이른 모시 창의를 입은 젊은이가 나타났다. 째보 아비의 말대로 서른이 될까 말까 한 사내였다. 춘길이 먼저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신 굽혔다. 춘길이 일어나자 덕만이도 놀라 벌떡 일어서 허리를 꺾었다. 갓쟁이를 상대하기란 언제나 껄끄러운 것이었다.
"소인, 춘길이라 하옵니다."
"소인은 덕만이 올시다."
두 사람이 먼저 인사를 하자 소개를 하려던 째보 애비는 할 일이 없어질까 급히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
"어젯 밤 말씀드린 사람들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의리와 강단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정은 아실 테니 생략하고 객주인 나으리의 말씀을 따르기로 약조를 하였습니다."
"아, 알았네, 북어와 북포(北布)를 매집(買集) 하는 일이 쉬운 일 만은 아닐 것이나 그렇게 하기로 약조를 하였다니 내가 자금은 대겠네. 내게 사람이 없어 이런 상단을 만들려는 게 아님은 알아두게. 다만 그대들이 팔도의 지리를 잘 알고 세상 물정에 밝을 것을 믿어서 이러는 것이란 말일세. 하루라도 빨리 상단을 꾸려 원산으로 떠나들 가게. 원산에 발을 붙일 객주는 내가 마련 해 줄 테니까. 장사할 자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나 단, 한 가지는 가슴에 새기는 게 좋을 것이야. 첫째는 입조심, 둘째는 배반을 하지 말 것. 만약 이 둘 중 하나라도 어기면 그 순간에 두 사람 목숨을 떨구고 말 것이야. 내게 그럴 힘이 없다면 어찌 이런 일을 꾸미겠나? 그 두 가지만 철저히 지킨다면 나 역시 의리는 지킬 것일세. 그대들이 모아야 할 물화는 금은도 아니요 오로지 북어와 북포뿐이네. 사당패를 끌고 다니던 수완을 이 일에 쓴다면 다들 한밑천 잡을 수 있을 것일세."
입 조심에 배신, 그리고 목숨이란 말을 들을 때는 아무런 느낌이 없더니 한밑천을 잡는다는 대목에는 이제껏 사당패를 끌고 다니며 고생한 생각을 하니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진작 이 길로 나설 것을 십수 년을 헛고생을 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좋습니다. 팔도를 발섭(跋涉) 한 소인들이라 송상이 뚫었다는 철원서 평강 가는 지름길도 환히 꿰고 있으니 물화를 실어 내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지요. 원산으로 가기 전에 몇가지 준비도 해야 하고 아이들 양식과 옷도 몇 벌 있어야겠습니다."
"좋아. 그런 것은 저 사람이 해결할 것이니 염려 말게나. 자 그럼 나는 바쁜 몸이라.... 참, 앞으로 객주 출입은 삼가고 모든 건 째보 애비를 통하게. 눈이 무서운 법이니까."
객주인이 일어나자 세 사람도 재빨리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젊은 사람이 시원시원하구먼. 저 사람 이름은 무엇이며 무엇 하는 사람이오? 객주인이우?"
"아까 그 객주가 그 사람 걸세. 그의 형도 저 윗 쪽에서 객주를 하지. 문일평, 문일도 하면 송파에선 세 손가락에 들지. 저 사람의 아비가 시전 우두머리일세. 줄이 든든하단 말이거든. 내가 소시쩍에 그 댁에서 일했었네."
"그런데, 어째 저 사람 말과 째보 아범의 말이 다르오? 댁은 우리더러 화적질을 하라더니 저 사람은 상단을 꾸리라니 어떤 것이 진짜란 말이요?"
"원 참. 그게 그 소리지. 아까 그 양반 하는 소리 못 들었나? 사람없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
"허긴, 객주를 하는 사람이 설마 사람없어 우릴 쓰겠소? 나도 짐작은 했소. 우릴 화적으로 만들고 자긴 아닌 보살하겠다는 걸 말이요."
"아따. 그까짓 걸 왜 따지나? 우리는 재물만 모으면 되네."
"한데 말이요. 왜 하필 북어에 북포요? 화적이 금은보화를 안 털면 그게 무슨 화적이란 말요?"
"쯧쯧 저 사람에겐 그게 바로 금은보화란 말일세. 시전 있겠다 객주 있겠다 깜쪽같이 팔아먹을 준비가 다 된 사람 아닌가? 누가 의심 할 것인가?"
"그렇구려. 내 어쩐지... 그럼 우린 금은보화를 보고도 털지 말란 말이요?"
"금은 보화를 만나기도 힘들지만 그걸 털어먹고 오래가는 화적은 아직 보질 못했네. 북어나 북포를 털어도 반은 우리 차진대 그깟 금은보화만 보화인가?"
"아, 이제야 눈앞이 환하오. 무슨 소린지 알았단 말이요."
"알았으면 앞으로 입조심이나 하게."
째보 애비의 말이 끝나자 말 한 마디 없던 덕만이가 춘길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자네에겐 화승총이 급한 일이네. 그것부터 부탁을 하고 봐야지?"
"알고 있네, 돈 걱정 없겠다, 까짓 기왕 만들 거 대 여섯 자루 만들까?"
"그렇게 만들어 주지도 않을 걸세. 그리고 두어 자루면 충분하네. 방포 소리만 들어도 기절을 할 테니까. 자네는 호랭이 방귀 소리에 토끼가 까무라치는 걸 못 봤나?"
싱거운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자 째보 애비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어디 가서 탁배기라도 한 잔씩 하려는가?"
"싫소 대낮에 무슨 맛에 술을 먹겠소."
"그럼 얼른 가세. 가서 거사 놈들부터 흩을 생각들을 하게. 사당 따라다니던 놈 중에 쓸만한 놈 못 보았네. 괜히 정에 매여 붙들고 있다간 포도청에 가서 후회하는 법일세."
"나도 그러려 했수. 거, 너무 재촉 마시오."
세 사람이 거사들이 묵고 있는 곳으로 바삐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앞 쪽에서 어떤 사람이 오고 있었는데 춘길이가 그만 그 사람의 어깨를 부딪치고 말았다. 앞사람은 약간 비틀하더니 춘길이를 쓱 훑어 본 후 가던 길을 가려 하였다. 한데 춘길이는 그 사람의 눈길이 기분 나빴다.
"어이 이 봐. 남의 어깨를 쳤으면 미안하다는 얘기는 해야지?"
춘길의 말에 그 사람은 다시 한 번 세 사람을 돌아보더니 다시 발길을 돌렸다. 이에 화가 난 춘길이가 두어 걸음을 좇아가 어깨를 잡았다.
"눈깔에 귀까지 멀었느냐? 왜 그냥 가려 하는 거야?"
이러다 싸움이라도 나면 어쩌나 싶은 째보 애비가 얼른 나서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 하였다. 그리고는 얼른 춘길의 귀에 대고 말하였다.
"참게나. 저 사람을 내가 아네. 강화에서 소문난 왈짜에 주먹이라네. 큰 일을 앞에 두고 이게 무슨 일인가?"
"그러니 더 화가 난단 말이요. 제 놈이 왈짜면 왈짜지 사람치고 사죄도 없잖소?"
째보 애비가 안다는 강화 왈짜란 바로 앞에 말한 박수무당 중필이라는 남자였다. 춘길이 목소리를 줄이지 않았으니 그 사람이 들은 것은 말 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중필이는 이 자리를 피하려고 하였다. 아침에 마누라인 금화가 한 말이 자꾸만 생각 나서 였다. 저런 놈들이라면 애초에 상대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춘길이는 기어이 중필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야, 이놈아. 사내가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하면 그만이지 왜 자꾸만 도망을 치려는 게냐?"
"미안은 그쪽에서 해야 할 말이요. 그만 가 보시요. 긴 말 하기 싫소."
"어라, 저놈 벙어린 줄 알았더니 조선말을 알아 먹네? 그렇다면 딱 한 대만 맞구 가거라."
춘길이 주먹을 쥐어 번개 같이 중필의 얼굴에 한 방 날렸다. 하나 피하는 중필이가 더 빨라서 춘길이의 주먹은 허공을 쳤을 뿐이다. 주먹을 피한 중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되돌아 제 갈 길을 가려 하였다. 그러나 오기가 난 춘길이가 재차 발을 들어 중필이의 어깨를 찍었다. 그러나 그 것 역시 헛수고에 그쳤다. 중필이가 몸을 틀어 발길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춘길이의 사타구니를 차올렸기 때문이다. 춘길이는 단 번에 꼬구라져 두 손으로 낭심을 부여잡고 떼굴떼굴 굴렀다. 이를 본 덕만이가 항상 메고 다니는 화승총 자루를 재빨리 내려 잡았다. 그것을 몽둥이 삼으려는 것이었다. 덕만이가 베로 싼 물건을 거머쥐자 중필이가 또 한 번 발길을 번쩍 차올렸다. 춘길이와 같은 곳을 걷어차인 덕만이는 자신도 모르게 총을 떨구었다. 그리고는 낭심을 싸잡고 땅바닥을 구르지 않을 수 없었다. 고통에 입을 딱 벌린 두 사람을 내려 보던 중필이가 되돌아 섰다.
"잠깐 나 좀 봅시다. 형장 얘기는 들은 바 있소. 이런 일이 생겨 미안하오만 이것도 기이한 인연이라 여기고 우리 같이 술이나 한잔합시다."
"글쎄, 나는 형씨를 본 적이 없수. 그리고 대낮에 술 마실 기분이 아니니 저 사람들 데리고 그냥 갈 길 가시오."
"원 이럴 때 사람 좀 사귀자는데 대장부가 그깟 일로 그러시오. 자 갑시다. 가서 서로 통성명을 하고 나면 아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닐 거외다."
"거 참, 싫다는데 왜 그러오?"
"아, 싸웠으면 원수요. 화해하면 친구란 말도 모르오? 싸우고 원수로 만드느니 화해를 하면 서로 좋지 않소? 자자. 갑시다. 술은 내가 살 테니... 아, 뭘 해? 자네들도 얼른 일어나 가세."
째보 애비의 설래발이에 넘어갔다기 보다 금화의 말이 생각난 중필이가 두 말하지 않고 그러기로 작정을 하였다. 두 사내는 일어서면서도 사타구니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째보 애비가 앞장을 서서 술집으로 향했다. 춘길이와 덕만이가 어기적 거리며 그 뒤를 따랐고 중필이도 따라서 걸었다. 술집은 송파에서도 가장 번화한 삼거리에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집을 춘월이네 술집이라 하였다. 술청에는 낮이어도 술을 마시려는 사람들은 몇이 있었다. 네 사람은 중노미가 안내하는 방에 들었다.
"나는 득수라고 하오. 사람들은 그냥 째보 애비라고들 하지요."
술이 한 순배 돌자 째보 애비가 먼저 수인사를 하였다.
"나는 중필이란 사람이요."
"아, 알고 있습니다. 참, 이 사람들은 사당패의 모가비들로.…"
째보 애비의 말을 끊은 사람은 춘길이였다.
"우리도 입이 있소. 내 이름은 내가 말 하리다. 춘길이라 하우."
"난 덕만이유."
"헛, 아깐 미안 하게 되었소. 하나 본 뜻은 아니었소."
춘길이와 덕만이란 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중필이가 먼저 사과를 했다.
"솔직히 말해서 억지는 내가 부렸수. 아, 그렇다구 사내 싸움에 불알을 터트리면 어쩌우?"
"그러게나 말일세. 나는 아직도 얼얼한 것이 아무래도 호두알이 깨진 모양일세."
춘길이와 덕만이가 교대로 중필이에게 항의 아닌 항의를 하니 옆에 있던 째보 애비가 다시 나섰다.
"자자. 사내들끼리 싸움은 끝나면 그 뿐일세. 다음부터는 친구가 아닌가?"
술이 몇 순배 더 돌고 춘길이도 덕만이도 기분이 풀어져 웃고 농을 하였다. 중필이도 그런 세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며 권하는 잔을 받았다. 잔만 받았을 뿐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화해하자는 자리에서 빼기만 할 수가 없는지라 적당히 마신 척하고 술집 앞에서 그들과 헤어졌다. 중필이는 나루터를 향해 걸었다. 우시장을 지나자 멀리 나루가 보였다. 나루에는 돛을 내린 서너 척의 배가 있었으나 어느 배가 범털이의 배인지 알 수가 없었다. 걸음을 빨리 한 중필이가 나루에 닿아보니 배에서 생선 광주리를 내리느라 배마다 십여 명이 일을 하고 있었다.
"어떤 배가 강화서 온 배인가?"
중필이가 일꾼 하나에게 물었다.
"여기 있는 배가 다 강화 배요."
"헛... 그렇다면 범털이 도사공이 탄 배는 어떤 배요?"
"저 끝 배에 가보시우."
중필이가 돌아서 나루 끄트머리에 매인 배로 다가갔다. 그러자 낯익은 목소리가 배 위에서 흘러나왔다.
"시끄러워. 이놈들아. 어쨌든 내가 돌아올 때까지 한 갓도 내리지 말거라."
목소리와 함께 뱃전으로 나오는 범털이를 본 중필이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허허, 보아하니 이제 온 모양이구나."
"어, 중필이냐? 물때를 맞춘단게 이 모양이다. 오래 기다렸냐?"
"아니, 이제 막 왔어. 그래 이번엔 무얼 실었니?"
"금년 첫 굴비지. 지금부터 조기 철 아니냐. 그걸 굴비로 말린 첫 물이란 말이다."
"나도 알어 이눔아, 나도 강화 사람이란 걸 잊었냐?"
"빌어먹을 놈, 난 네 눔이 떠난지 오래되어 강화를 잊은 줄 알았지."
"칫, 한데 왜 내리지 말라고 했냐? 안 내릴 걸 왜 갖구 온 거야?"
"모르는 소리 말어. 어물 먼저 주고 엽전 구경 못한 사람 강화에 여럿이다. 거래가 되고서도 차일피일 일 삭 씩을 넘겨서 준단 말이다."
"아니? 있는 돈으로 언제 줘도 줄 것을 왜 애를 태워서 준단 말이냐?"
답답하다는 듯 범털이가 눈살을 찌푸려 중필이를 돌아 보았다.
"이런, 너는 상고들이 하는 짓은 깜깜이로구나. 어물 값 오백 냥이면 급변을 놓으면 오오는 이십오라, 이자만 월 스물닷 냥이란 말이다. 일 삭만 미뤘다 주면 스물닷 냥이 공으로 생기는데 그걸 마다 할 객주가 어디 있겠냐?"
"그런 객주는 거래를 하지 않으면 그만 일 테지."
"쯧, 모든 객주가 그러한데 그럼 어물을 썩힌단 말이냐?"
그제야 범털이가 이제껏 거품을 문 연유를 안 중길이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젖었다. 범털이가 앞장을 서서 객주거리로 걸음을 옮겼다. 중필이도 말없이 같이 걸었다.
"지금 송파에서 문을 연 객주 가운데 거래가 끝나는 즉시 대금을 주는 객주는 두 군데 밖에 없어. 문가네 형제 객주와 오회주의 상조회 객주지. 그 외엔 전부 돈 장난들을 한단 말이다. "
"그렇다면 그들 객주와 거래를 하면 되지 않나?"
"헛, 내, 그 소리 나올 줄 알고 있었지."
".........?"
"물주들이야 다들 그들과 거래를 하고 싶지. 하나, 그들은 물화를 골라서 맡는 단 말이야. 물화의 품질이 좋고 거래가 잘 될 것만 가리거든. 그러니 그들 객주는 더욱 거래가 잘 될 것 아니냐? 지금 그 객주는 물화를 미쳐 처분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단 말이다."
"도사공이 배만 잘 부리면 되는 줄 알았더니 요새 도사공은 시절이 다른 모양이지?"
"사실 이런 일은 서기 몫이지 내가 나설 일이 아닌 것은 나도 알아. 그러나, 이달도 돈을 받지 못하면 우리 사공애들 급료는 또 못 받잖나? 잘난 급료래야 매삭 쌀 두 말에 조 서 말인데 그나마 못 받으면 애 키우는 집에선 어쩌란 말이야? 그래서 내가 나선 것이지."
"그래서 지금 어딜 가는거냐?"
"김가 객주에 가서 다짐을 받구서야 어물을 넘길 거야. 오늘 물화는 금년 첫 굴비야. 게다가 알 밴 놈들이지. 이런 걸 또 일 삭 짜리 어음으로 받으면 안 되지."
"그럼 나도 같이 가보지."
"왜? 객주 주인이 네 얼굴만 보면 오줌이라도 지린다더냐?"
"여하튼 나도 구경 좀 하자고."
범털이가 들어간 객주는 마방이 여러 칸이고 초가일망정 집도 서너 채나 되어 규모는 상당히 컸다. 마당에는 일꾼들이 고방의 물건을 실어내고 치부책과 붓을 든 서기가 나가는 물건을 세고 있었다. 범털이는 이곳이 처음이 아닌 듯 객주인이 기거하는 방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댓돌에는 서너 켤레의 짚신과 미투리 한 켤레가 놓였다. 범털이는 큰 기침을 한 번 한 후 곧바로 방문을 열었다. 방안에는 객주인이 상인들과 장부를 앞에 놓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허어, 심부름 아이의 연통도 없이 무작정 내정돌입을 하다니? 뉘이기에 이리 무례하단 말인가?"
들어서는 자의 행색을 일별한 객주인의 가래 돋친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얼굴이 검고 옷차림이 거친 것으로 보아 양반과는 아예 거리가 먼 부류였던 것이다.
"강화 교동에서 물화를 싣고 온 도사공 올시다."
"뭐라? 교동 한 부자네 도사공이란 말인가? 여긴 자네가 올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
"올 자리 못 올 자리가 있소이까? 물화만 잘 전하면 누구든 무슨 상관이 있소?"
"음? 말 뽄세가 심히 듣기 거북하나 틀린 말은 아니로군. 그래 물화를 싣고 왔으면 서로 간에 수량을 확인하고 임치증을 받아 돌아가면 될 일 아닌가? 조용히 차례를 기다리게나."
"그걸 몰라서가 아니요. 이번 물화의 대금은 언제 받을 수 있나 알고 싶어 온 것이요."
"그걸 몰라서 묻는 겐가? 물화의 거래가 언제 될지 점쟁인들 알겠는가?"
"거간이 끝나는 즉시 지불되는가를 묻지 않소?"
"헛, 거, 참으려니 힘이 드는구먼. 사방에서 서로 팔아달라고 물주들이 아우성을 치는 마당에 잘난 어물 몇 짐으로 큰소리를 치다니? 지불 방법이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객주를 찾으면 그 뿐이지. 어디 와서 행패를 부리려는 겐가?"
강화 교동의 물화라면 석수어 일시 분명하였다. 객주인은 날로 더워지는 요즘에 썩기 딱 좋은 어물로 큰소리를 치는 범털이가 가소로웠다.
"다른 곳을 찾아 보게나. 아까운 어물 썩히기 싫으면 말일세. 마침, 우리도 맡은 물화가 많아 처리가 난감일세."
"남의 어물 썩는 것 까지 걱정해 주니 고맙소. 하나 썩을 염려는 없소이다. 굴비 두룸이니 말이요. 그것도 알 밴 놈만 골라서 만든 금년 첫물 올시다."
범털이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객주인은 물론 둘러앉았던 세 사람이 깜짝 놀랐다.
"뭐라? 굴비? 교동에서 벌써 굴비를 냈단 말인가? 열흘은 더 있어야 나온다더니 벌써 나왔단 말이요?"
객주인은 자신이 한 말이 있는지라 말이 없는데 다른 사람이 재빨리 묻는 것이다.
"그렇소. 첫 등 품 올시다."
"수량은 얼마나 되오?"
"우선 이천 갓을 실었소. 참, 다른 객주를 찾아야 하니 소인은 이만 가야겠소."
범털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문을 나섰다. 마루에 걸터앉았던 중필이가 벌떡 일어나 함께 객주를 나섰다.
"방 안에서 하는 얘기를 다 들었다만 이제 어쩌려고 하니?"
"핏 어쩌기는 어째? 널린 게 객주요. 요즘 철엔 굴비가 귀물이란 말이다."
"저 객주인이 똥을 뭉개고 있겠구나."
"그깟 놈 알게 뭐냐? 나는 맞돈 받아 선주에게 갖다 주면 끝이다. 그래야 우리 사공 애들이 사니까 말이다. 가만 길에서 어정댈 게 아니다. 저리로 가서 한잔하자꾸나. 말 좀 했더니 목이 마르구나."
"대낮에?"
"그놈, 우리가 언제 낮 밤 가려 마셨냐? 가자."
범털이가 호기롭게 춘월이네 술집을 들어서는데 저 뒤에서 사람들이 쫓아 오고 있었다.
"거기, 도사공, 잠깐만 기다리시오."
가만 보니 아까 객주인과 마주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중필이와 범털이는 술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가만, 방으로 들게 아니라 저 평상에 앉지?"
두 사람은 평상이 놓인 곳으로 갔다. 늦봄이어서 바깥에 있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가까이 다가간 평상에는 아이 놈 둘이서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두 아이 모두 서너 살쯤이었고 머리 꽁지가 간신히 어깨에 닿을 정도였다. 두 아이는 중필이와 범털이가 평상에 앉거나 말거나 저희들 놀이에 빠져 돌아 보지도 않았다. 그때 중필이는 문득 금화가 말한 아이란 이 아이들을 말하는가 했다. 그러나 분명 한 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두 아이 중에 누굴 구하란 말인가? 중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두 아이를 보고 있는데 중노미란 놈이 쭈루루 달려왔다.
"무엇으루다 올릴깝쇼?"
"술집에 왔으면 술이지."
"안주는 너비아니부터 생두부에 취나물 부침개까지 다 있습지요. 닭을 삶으라시면 그 것도 되옵니다."
"아따 그놈 하구선 우선 술 한 방구리 하고 두부에 간장 쳐서 갖구 오너라."
중노미란 놈이 또 쭈루루 부엌을 향해 달려가는데 아까 김가 객주에 있던 세 사람이 우루루 평상으로 몰려오는 것이다.
"아, 어째서 우릴 좇아 온단 말이요? 김가 객주인과 볼일이 있는 분들이 아니시오?"
범털의 말에 그중 연장자인듯한 작은 갓을 쓴 사람이 나섰다.
"톡 까놓고 얘기하리다. 우린 칠패의 상인들이요. 아까 김가 객주에서 어물을 구하려고 왔었소. 한데 가만히 보니 형장들께는 어음으로 끊어 주고 우리들에겐 맞돈을 받는 모양입디다. 그동안 은근슬쩍 바가지를 씌우는 것은 알고도 그냥 덮은 것은 어물 하나는 끊어지지 않게 구해주는지라 거래를 계속했었소. 헌데 형장들의 기개를 보니 생각이 달라졌소. 앞으로 형장들과 거래를 하고싶소. 어떻소?"
"헛, 솔직한 김에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좋지 않겠소? 굴비가 탐이 나서들 아니요? 지금 칠패에 굴비를 푼다면 아마 이문이 다른 때와 달리 곱절은 남을 것이 아니겠소?"
범털의 말에 세 사람이 허벌쩍 웃더니 뒷통수를 긁는 흉내를 내었다. 그 꼴이 중필이가 보기에도 그리 미운 행동은 아니어서 슬며시 웃음이 나려 하였다.
"거, 알았으면 그냥 넘어가시면 좋았을 것을 계면쩍게 늙은이 욕을 보이시오. 허허."
"좋소이다. 기왕 넘기려 든 것이니 칠패에 팔지요. 대신 맞돈이요. 시세는 작년보다 갓에 닷 푼을 더 받으랍디다."
"알았소. 그래도 양심적이구려. 앞으로 계속 우리와 거래를 해 주오."
그때 술방구리를 안은 중노미와 두부 목판을 든 여자가 평상에 다가 왔다.
"그새 손님이 더 오셨네. 술잔을 더 갖다 드릴 깝쇼?"
"그래라. 여기 세분 술잔뿐 아니라 아예 술과 안주를 더 갖구 오너라."
범털이가 선뜻 세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자 칠패의 상인들도 사양치 않고 평상에 올라앉았다.
"아이고 우리 복덩이 여기 있었네. 참 상구 너는 너희 집에서 월이가 찾으러 왔더라."
두부 목판을 놓다 말고 평상 아래에서 흙장난을 하는 아이를 본 여자가 한 말이었다. 아마 두 아이 중 한 아이의 엄마인 듯 싶었다.
"자, 우리 복덩이 흙장난 그만하고 가서 밥 먹자. 상구 너도."
그 여자가 무어라 하건 아이들은 여전히 흙을 뺏고 뺏기며 놀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럼 조금만 더 놀아라. 아주 조금만이다. 응? 늦으면 할머니 걱정하신단 말이다. 알았지? 복덩아? 가만 상구 너는 지금 가는 게 좋겠다. 너의 집에서 걱정하신다. 자 나와 가자."
그러고는 한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이는 더 놀고 싶어 발버둥을 치건만 아랑곳없었다. 남은 아이는 동무가 잡혀가자 제 엄마를 바라보았다.
"조금만 더 놀다 오너라. 안 오면 다시 와서 잡아갈 테니까."
아이는 고개만 끄덕이고 그냥 제 놀이에 정신이 없었다. 그새 동작 빠른 중노미는 술잔을 갖다 놓고 재빨리 돌아가 다시 술방구리를 갖고 오는 중이었다.
"얘. 공칠아, 아예 부엌에 가서 두부도 갖다 드리려무나. 간장에 파하고 들기름 듬뿍 넣는 거 잊지 말아라."
"그럽지요. 참 복덩이 할머님이 방금 아주머닐 찾으십디다."
"응, 그래 알았다. 복덩아 조금만이다. 조금만 놀다가 오너라."
여자는 안고 있던 아이를 추슬러 부리나케 돌아가고 있었다.
"아 그 여편네 제 새끼는 끔찍하게 생각하는군."
칠패 상인 중에 가장 젊어 보이는 사내가 부엌 쪽을 바라보며 실실 웃었다.
"자, 갖고 온 술이니 마십시다."
"가만, 이 술값은 우리가 내리다. 그리고 물화는 배에서 내릴 것 없이 삼개로 갑시다. 대금은 엽전이든 현물 어음이든 원하시는 것으로 즉시 지불할 것이요."
칠패 상인 중 나이 많은 사람이 한 말이었다.
"좋소이다. 마시고 나서 같이 제 배를 타고 삼개로 가십시다."
평상에 앉은 다섯 사람이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대문간으로 머리에 수건을 동인 십여 명의 장정들이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몽둥이를 비롯해 채찍을 든 놈도 끼어 있었다. 놈들은 술청의 중노미들이 말리고말고 할 사이도 없이 곧바로 중필이와 범털이가 세 상인과 함께 술을 마시는 평상을 향해 달려 들었다.
"모조리 물고를 내어라."
채찍을 든 사내가 소리를 질렀다. 사내의 그 말이 없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몽둥이들이 일제히 평상으로 날아오자 범털이는 대번에 두부 목판을 집어 들어 앞엣 놈의 면상을 후려치고 벌떡 솟구쳐 양 발로 좌우의 놈들의 턱을 날린 다음 마당으로 성큼 내려섰다. 중필이도 술방구리를 번쩍 들어 다가오는 놈의 머리통을 바수니 술 담긴 방구리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중필이도 사뿐히 마당으로 내려서서 주먹을 감아쥐었다. 그런데 허공에서 휙 소리가 나더니 목과 어깨가 화끈했다. 얼핏 손을 목에 대자 손에 피가 묻었다. 또 한 번 공기를 찢는 소리가 나더니 등짝이 뜨끔했다. 그때서야 채찍을 든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중필이는 재빨리 또 하나의 술방구리를 들어 그 사내에게 던지려 하였다. 그러나 그 사내가 더 빨랐다. 채찍이 휙 날아와 팔뚝을 때리는데 쳐들었던 방구리는 맥없이 땅에 떨어져 버렸다. 팔에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채찍을 든 놈이 슬슬 다가오고 있었다. 중필이는 급한 나머지 평상의 한끝은 그놈을 향해 번쩍 들어 엎었다. 한데 평상 밑에는 복덩이라 불리던 아이가 숨어 있었다. 중필이는 아이를 보는 순간 아이가 위험하다고 느꼈다. 싸워야 하는데 이 아이는 어쩔까? 망설이는 중필이에게 또 다시 채찍이 날아왔다. 채찍이 날아오는 순간 피해야 하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러나 본능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아이를 감싸 안게 했다. 채찍은 중필의 등짝에 내려앉았다. 찌르르 아픔이 전해 졌으나 처음 보다 오히려 고통이 적었다. 중필이는 혹여 아이가 채찍에 감길까 가슴에 품었다. 이럴 땐 무엇보다 이 자리를 벗어나고 봐야 하였다. 생각할 것도 없이 벌떡 일어나 채찍을 피해 뒷곁으로 뛰었다. 대문 쪽으로는 놈들이 막고 있으니 뒷곁으로 뛸 수밖에 없었다. 마방이 있는 뒷곁은 낮은 토담을 둘렀는데 중필이는 그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네가 도망을 가면 어디까지 가려느냐?"
채찍을 든 사내가 입을 앙 다물고 쫓아오고 있었다. 도망을 치는 와중에 얼핏 돌아보니 몇 명이 더 붙었다. 범털이와 상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길 없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술집 뒤는 채소 밭이었다. 채소 밭을 지나니 허벅지쯤 자란 보리 밭이 나왔다. 중필이는 아이의 허리를 한 팔로 감아올려 옆구리에 꼈다. 그리고는 달리면서도 아이를 놔 둘 장소를 살폈다. 보리밭 고랑에 숨겨 놓을까? 그러나 형편이 그리 한가하지 않았다. 뒤에 따라오는 채찍 든 놈이 소리소리를 지른 때문이다.
"됐다, 저놈이 제 새끼 챙기는 걸 보니 멀리는 못 간다. 얘들아 더 빨리 뛰어라. 애, 어른 할 것 없다. 모조리 죽여라."
"저놈, 잡아라."
중필이가 워낙 발이 잰 사람이니 망녕이지 보통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맞아 죽었을 터였다. 채찍을 든 놈의 걸음이 느렸던지 중필이의 걸음이 빨랐던지 몰라도 놈들과의 거리가 약간 벌어졌다. 아이만 없다면 저따위 놈들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아이를 바닥에 던질 수도 없었다. 그저 도망을 치는 길 밖에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루가 눈에 들어왔다. 어째서 나루 쪽을 택해서 달렸는지도 모르고 달려온 것이다.
"흐엉, 엄, 엄마아."
어디선가 아이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필이는 그제야 울음소리가 어디서 들리는지 알았다. 놀라 기에 질렸던 아이가 이제야 우나 보았다. 그러나 울음 소리에 마음 아파할 겨를이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채찍 든 사내는 숨을 헐떡이며 다소 느려졌으나 젊은 놈들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토끼몰이 하듯 신이 나서 쫓아오고 있었다. 나루는 가까워지고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자기 짐을 챙기느라 웅성거리고 있었다. 중필이는 일단 사람 많은 곳에 아이를 내려놓고 뒤따라 오는 놈들과 결판을 내리라 마음먹었다.
"누가 이 아이 좀 맡아 주시오."
중필이가 사람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사람들이 소리치며 달려오는 중필이를 보았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몽둥이도 보았다. 사태를 재빨리 짐작한 사람들은 뒷걸음을 쳤다.
"아... 아제.. 아제."
그 순간 아이는 무엇을 보았는지 양손을 허우적거리며 아제를 불렀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서 웬 비쩍 마른 사내 하나가 후다닥 뛰쳐나오더니 중필이가 안고 있는 아이를 뺏으려 하였다.
"보, 복덩아. 네가 여긴 웬일이냐? 다, 당신이 왜 내 조카를.…"
"시끄럽소. 아이부터 받으시오."
재빨리 아이를 건네 준 중필이가 뛰쫓아 오는 놈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놈들이 먼저 중필이의 머리를 노리고 쳐들었던 몽둥이를 내려쳤다. 훌쩍 옆으로 벗어난 중필이가 그 놈의 발목을 걷어찼다. 놈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자 뒤따르던 놈들이 중필이의 좌우로 갈라섰다.
"자, 오너라."
중필이가 놈들을 향해 싱긋 웃음을 보였다. 넘어졌던 놈이 벌떡 일어나 두 놈과 합세했다.
"뭣들 하는 게냐. 그놈을 요절 내지 않구서.'
뒤따라 온 채찍을 든 사내가 호령을 하였다. 그런데 그 모든 광경을 뱃전에 서서 내려다 본 눈들이 있었다. 갓을 쓴 쉰이 넘은 그 사람은 눈매가 가느다랗고 수염도 많지 않았으나 어딘가 위엄이 있어 보였다. 그 옆에는 서른 댓쯤 되는 중갓의 사내로 손에는 환도를 들었다. 눈매가 가느다란 사람이 환도를 든 사내에게 무어라 일렀다. 그러자 환도를 든 사내가 뱃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런데 오종종하게 생긴 작은 사내 하나가 선실을 나오다 그 광경을 보았다. 그러다 무엇을 보았는지 깜짝 놀라 뱃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급히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아니? 복덩이 네가 여길 웬일이냐?"
"아... 아바. 아바."
"오냐, 오냐. 나 여기 있다. 아니 자넨 어찌 복덩일 안고 있는겐가?"
"아, 자형. 나도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수, 저 사람이 복덩이를 안고 있습디다."
비썩 마른 사내가 네 사람을 상대로 마주 선 중필이를 가르켰다. 그때 뱃전에서 뛰어내린 환도 든 사내가 중필이 옆으로 선뜻 다가가더니 앞에 늘어선 놈들을 노려 보았다.
"보아하니 왈짜들이군. 한데 낯이 선 것을 보니 이곳 왈짜가 아니구먼. 너희들은 어디서 온 놈들이냐?"
불시에 나타난 상대가 칼을 들었으니 칼잡이가 분명하고 의젓한 태도로 보아 보통은 넘게 생겨서 다들 약간은 켕겼으나 채찍의 사내만은 예외였다.
"흥, 어디나 텃세를 하는 놈은 있게 마련이지. 네놈이 그 잘난 환도를 믿는 모양이다만 잘못 생각했다. 이걸 견디겠느냐?"
촤악하는 소리와 함께 채찍이 칼잡이의 귓전을 스치며 지나갔다. 칼을 든 사내가 목덜미로 내려앉는 채찍을 칼날 피하 듯 피한 것이다.
"음, 네놈들 소원이 낯선 곳에서 죽고 싶었던 게로군."
스르릉 소리가 나는 순간 칼날이 써늘한 빛을 뿜었다. 방금 헛손질로 채면이 깎인 사내는 다시 채찍을 날릴 기회를 엿보았다. 그 사이 몽둥이 든 사내들과 중필이는 칼과 채찍의 싸움에 눈이 팔려서 싸울 열이 식어버렸다.
"어디가 가려우냐? 어디든 갈겨 주마."
땅에다 채찍을 흩뿌린 사내가 잇사이로 낮게 중얼거렸다.
"네가 치고 싶은 곳을 골라 치려무나."
"그래라."
이번에는 채찍이 옆으로 춤을 추었다. 칼든 사내의 허리께를 노린 것이다.
'촥'
채찍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나는 순간 칼날이 반짝하더니 뱀처럼 휘감아 오던 채찍이 반으로 뚝 잘려 땅에 떨어졌다. 채찍의 사내가 가슴이 철렁해서 멈칫하는 순간 칼 든 사내는 칼등으로 다시 일격을 날렸다. 목덜미를 맞은 사내는 아픔을 느낄 사이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 광경을 보고 기겁한 사람은 몽둥이를 들었던 세 놈이었다. 태산같이 믿고 있던 무적의 채찍이 허무하게 쓰러졌으니 자신들 따위는 칼질 한 번에 셋이 한꺼번에 여섯 동강이 날 것 아닌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몽둥이를 집어던진 세 놈은 죽기 살기로 뛰는 수밖에 없었다.
"뒤쫓지 말고 두어라. 그리고 칼등에 맞은 그놈이 깨어나거든 일의 시말을 알아 보아라."
"네. 회주님."
회주라 불리운 사람은 상조회의 회주 오일중이었고 칼을 든 사람은 주흥식이었다.
"당신이 누구기에 우리 아이를 안고 여기까지 왔소?"
오종종한 사내가 중필이에게 따지 듯 물었다. 오종종한 사내는 송파 객주의 방장인 황구만 이었다. 황구만은 지난겨울 송파로 올 때, 내촌댁을 아내로 맞았던 것이다.
"진작 나도 물어보고 싶은 말이요. 어째서 내 조카를 당신이 데려왔냔 말이요."
비썩 마른 사내도 따지고 들었다. 그 사내는 춘월이의 조카 개동이었다. 군역에서 풀려난 개동이는 춘월이의 수양 딸이 된 내촌댁과 남매가 된 것이다.
"헛, 그건 아이가 다칠까 해서 였소만.…"
"무어요? 이게 대체 무슨 말인 감?"
어찌 된 일인지 도대체 감이 잡히지 않는 듯 황구만이 답답해서 발을 굴렀다.
"아, 자네 누나는 무얼 하구 있기에 애가 없어져도 모르고 있단 말인가?"
"난들 아오? 아, 마침 저기 누나가 오는구려."
"쯧쯧, 이제야 애 없어진 것을 알았나 보군."
"복덩아... 복, 복덩아, 우리 복덩이.…"
미친 사람처럼 앞으로 팔을 휘저으며 달려오는 내촌댁이 여러 사람 가운데 맨 먼저 개동이가 안고 있는 복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고 복덩이. 무탈하구나. 아이고 하눌님 고맙습니다요. 아이고 복덩아."
"엄마."
"오냐 오냐. 괜찮다. 엄마 여기 있다. 얼마나 놀랬니 그래?"
"어쩌다 애가 여기 까지 오게 되었단 말인가? 임자는 애가 없어질 동안 뭘 했구?"
"아이고 말 마시오. 술청에서 싸움이 나설랑... 가만?... 이 사람이군, 이 사람이 평상에 앉았던 손이구려. 이 손 일행이 몽둥이든 사내들과.…"
"가만, 그건 집에 가서 천천히 따지기로 하고 우선 놀란 아이부터 데려가세. 아 무얼 하나? 얼른 아이를 업고 자네가 앞장을 서게. 앗 참, 회주님은 어디 계시나?"
황구만이 개동이와 내촌댁을 싸잡아 집으로 가게 하고 오일중을 찾으니 그는 이미 배에서 내려 주흥식과 함께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황구만은 재빠른 걸음으로 오일중의 뒤를 따랐다.
"회주님 우리 아이로 인해 소동이 나서 죄만 하옵니다."
황구만이 손을 싹싹 비비며 머리를 까닥거렸다. 오일중은 웃는 듯 마는 듯 말이 없는데 주흥식이 뒤를 돌아보며 씽긋 웃었다.
"하하하, 황방장이 죄만할 것이 무엇이요? 소동을 벌인 놈들이 죄만해야지."
"생각하니 그건 그렇구만. 한데 이게 무슨 사단인지 저 사람에게 좀 물어나 보게."
"그러지 않아도 알아보려고 하오. 저기 묶여 오는 저 왈짜를 문초하면 자연히 알게 될 게요. 나는 회주님 모시고 먼저 갈 것이니 황방장은 어서 마나님 있는 곳으로 돌아가시오. 잔소리 듣기 전에 말이요."
"엇, 그도 그렇군. 이거.... 공연히 장가는 들어 가지고 설랑 사람이 영 망했네 그려. 그럼 회주님 이따가 뵙겠사옵니다."
"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오일중을 보며 황구만은 복덩이를 업은 개동이와 내촌댁이 다가올 때까지 길에 서 있었다.
"회주님 모시고 삼개를 다녀오는 동안 아이에게 눈 떼지 말라고 누누이 일렀건만 임자는 내 말을 귓전으로 들었는가? 이게 다 어찌 된 노릇인가? 복덩이가 없어질 동안 자네는 무얼 했나?"
"복덩이가 문가 객주네 상구와 놀고 있기에 그냥 두었댔소. 그러다 손들이 왔을 때 상구를 저희 집에 데려다주고 오니까 그새 소동이 났지 뭐요. 깜짝 놀라 뛰어갔더니 평상은 엎어져 있고 게서 놀던 복덩이는 이미 간 곳이 없습디다. 그러니 내가 제정신이겠소? 미친 듯이 찾는데 중노미란 놈이 그제야 나타나 복덩이를 안은 어떤 사람이 뒷담을 넘었다지 뭐요. 아, 그러니 나도 그 뒤를 따라...."
"그만 두게. 이만하기 다행이지. 애가 다치기라도 했다면 어쩔 뻔했나."
"그러게나 말이요. 참, 지금쯤 복덩이 할머니는 얼마나 애를 태우고 계실꼬...."
"어서 가기나 하자고. 그리고, 이제부터 개동이 너는 술청에 붙어 있어야겠다. 너라도 있어야 내가 마음을 놓겠다."
"그럼 어물 장사는 언제 배우란 말이요?"
"술 파는 것은 장사가 아니란 말이냐?"
"아, 술하고 어물하고 같소?"
"술 안주가 어물이지 별것 있나?"
"난 싫소. 자형이나 술청에 있으시오."
"나는 놀고 있느냐? 객주일에, 회주님 분부 받들기만도 바뿐데.…"
황구만과 개동이의 다툼이 길어지자 보다 못한 내촌댁이 끼어들었다.
"처남 매부 싸움에 복덩이가 웃겠소. 에그 이것이 얼마나 놀랬을꼬? 이 눈물 자국 봐."
"히힛, 놀랐는지는 몰라도 나는 여태 복덩이가 우는 걸 본 적이 없수."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나도 본 일이 없어."
개동이의 말에 황구만이 씽긋 웃으며 말을 보탰다.
오일중은 자신의 객주 사랑방으로 가지 않고 술청으로 발을 디뎠다. 술청엔 싸움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범털이와 세 칠패 상인들은 물론 몽둥이를 들고 설치던 무리도 어디로 가고 없었다. 엎어졌던 평상도 제 자리를 잡았고 부서진 술방구리와 사발 조각도 치워지고 없었다. 그새 중노미들과 하인이 달려들어 말끔히 치운 것이다. 다만 버선발로 마당에 퍼질러 앉아 하눌님 부처님 신령님만 중얼중얼 거리는 춘월이가 있을 뿐인 것이다.
"아이는 무탈하더군. 그만 걱정을 그치게나."
춘월이에게 친히 다가간 오일중이 아이 달래 듯 부드럽게 말을 하였다. 춘월이의 유별난 손자 사랑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일중의 말을 듣는 순간 춘월이의 눈이 번쩍 떠졌다.
"에고, 신령님이 이 늙은 년의 기도를 들으셨구나. 아이고 고맙소이다. 부처님. 하눌님."
평소에 무릎이 아프다던 춘월이가 언제 아팠냐는 듯 벌떡 일어나 대문간으로 달려갔다. 그런 모습에 오일중은 씽긋 미소를 지으며 뒷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를 따른 주흥식은 문간에 서 있었다.
"채찍을 쓰는 솜씨로 보아 저놈은 그냥 왈짜는 아닐 것이다. 싸운 놈들이 누군지 알아내어 전말을 알아보거라."
"네 회주님. 곧 시말을 고하겠습니다."
주흥식이 물러 나와 술청의 시중을 드는 중노미와 목격자의 말을 다 들었다. 그런 다음 사공들에게 끌려온 채찍 든 사내를 다그쳤다.
"너희는 어디서 놀던 왈짜냐?"
"원산의 말뚝이 패요."
"음, 원산에 그런 패가 있다는 소릴 들은 것도 같군."
"힝, 소문을 들었다니 다행이요."
"그 놈 하구선.... 헌데 원산서 놀던 놈이 이곳까진 웬일이냐?"
"우린 쇠장을 따라 조선팔도 어디고 안 가는 곳이 없소. 소같이 큰 거래엔 으레이 돈과 싸움이 따라다니는 것 아니요?"
"그래서? 그걸 털어먹고 산다는 말이로군."
"이거 왜 그러시오? 우린 화적 같은 놈들로부터 전주(錢主)를 지켜주고 댓가를 받을 뿐이지 화적은 아니요."
"그렇다면, 아까 그 사람은 화적이래서 친 것인가?"
"그건 좀 다른 사정이 있소. 건방진 도사공 놈과 칠패 상인을 두들겨 달라는 김가 객주인의 급한 부탁을 받았소. 물론 돈도 받았소. 그래서 친 것이지 다른 감정은 없소."
"음, 일이 그렇게 된 것이로군. 너는 배를 태워 보내주마. 다신 송파에 얼씬을 말아라. 다음번엔 채찍만 반 토막을 내지는 않을 터이니."
주흥식은 사공을 시켜 원산 왈짜를 데려가 강 아래로 가는 배를 태워 보내라 일렀다. 그때서야 황구만과 아이를 업은 개동이가 대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춘월이는 눈물을 질금 거리며 손자를 싸 안았다. 복덩이는 춘월이가 살아가는 유일한 낙이었다.
중필이는 범털이를 찾았으나 어디에도 없자 중노미에게 몇 마디 묻더니 급히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는 중필이를 발견한 주흥식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중필이가 뛰어 들어간 곳은 김가 객주였다. 주흥식은 중필이가 들어간 김가 객주의 마루 쪽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댓돌에는 짚신과 미투리 짝이 몇 켤레 흩어져 있었다. 그때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일은 객주인이 스스로 벌인 것이니 수습도 객주인 스스로 하시오. 그리고 객주인이 그동안 저지른 짓은 밖에다 까발리지는 않겠소. 그러나 또 다른 짓을 꾸미면 이 자복서를 세상에 내어 놓겠소. 알아들었소? 자 다들 일어나지."
주흥식은 얼른 문 밖으로 몸을 피했다. 문이 열리고 중필이와 범털이가 나오는데 그 뒤를 칠패의 상인들이 따라 나오고 있었다. 칠패 상인들도 싸움에 휘말려서 손바닥만한 갓이나마 양태가 부서지고 대우가 찌그러져 영 볼품이 없었다. 개중에 한 상인은 코피가 터졌던지 입가와 소매에 핏자국이 남아 있기도 했다. 주흥식이 그들의 앞에 나섰다.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잠깐 말씀 좀 나눕시다."
"댁은 뉘시오?"
범털이가 주흥식의 차림을 아래 위로 훑어보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중필이가 얼른 나섰다.
"이 분은 아까 채찍 든 자를 제압하신 분이시다."
"한데 무슨 일로 우릴 보자는 것인지요?"
"듣자 하니 상조회의 술청에서 벌어진 일이고 그곳 아이가 관여 된 모양이라 소동의 곡절을 알자는 것이지 별 뜻은 없소."
"좋소. 죄진 것이 없으니 못 할 말 또한 없소이다. 갑시다."
"고맙소. 자. 다들 가시지요."
주흥식이 앞장을 서 춘월이의 술집에 들어서 곧바로 오일중이 기다리는 방으로 모두를 안내했다. 방으로 들어선 사람들은 방 가운데 버티고 앉은 오일중을 보자 태도가 자신도 모르게 공손하게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칠한 듯 자르르 옻칠이 된 갓을 쓰고 마름질이 잘 된 깨끗한 창의 차림에 팔짱을 끼고 고요히 앉은 자세에 위압감이 돌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가느다란 눈매와 제비꼬리 같은 날렵한 수염에 하얀 얼굴은 바로 보기가 거북할 정도였다. 주흥식이 하회를 기다리 듯 그 앞에 꿇어앉았다. 마침 황구만도 들어와 주흥식 옆에 주저앉았다. 주흥식이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들은 바를 말하자 황구만도 중노미와 내촌댁에게서 들은 얘기를 보탰다.
"그것은 싸움판의 얘기지 싸우게 된 내력이 아니지 않느냐?"
오일중이 눈을 들어 황구만을 바라보았다. 찔끔 한 황구만이 급히 아뢰었다.
"그 소종래는 여기 계신 두 분이 전말을 아실 겝니다."
황구만이 눈을 깜박이며 한 손을 들더니 앞에 앉은 중필이와 범털이를 가리켰다. 황구만의 지적을 받은 범털이가 어쩔 수없이 입을 열었다.
"소인은 강화 교동에서 도사공으로 있는 범털이라 하옵니다. 소인이 말씀 올리겠습니다."
"음, 교동이라면 한 부자네 도사공이겠군. 그래 말해 보게."
범털이가 굴비를 싣고 온 얘기부터 김가 객주인의 어음 횡포가 괘씸해 거래를 하지 않고 나온 것과 칠패 상인이 와서 상담을 하던 얘기를 했다. 그러든 중에 몽둥이를 든 낯선 놈들이 뛰어들어 불문곡직으로 사람을 치기에 싸움이 붙었다는 것이다. 중필이도 아이를 안고 뛰게 된 경위를 석명(釋明)을 하였다. 채찍이 아이에게 떨어질 것 같아 감싸 안고 도망을 했다는 얘기였다. 아이만 아니면 그깟 것들은 범털이와 둘이서 다 해치웠을 것이라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칠패 상인도 질세라 김가 객주에서 있었던 얘기와 객주인이 그간 상인을 상대로 장난질 한 것을 주욱 토로하니 앞뒤를 맞춰 본 오일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두 분 말씀을 듣고 보니 우리 아이의 은인이시구려. 그리고 여기 칠패에서 오신 상인 분들은 상도의를 아시는 분이 올시다. 회주님, 이런 분들의 물화는 우리 상조회에서 우선적으로 거래를 해 드려야 겠사옵니다."
말을 마친 황구만이 눈짓을 하니 그 뜻을 알아먹은 오일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니 과연 의기를 아는 남아로군. 나는 본래가 무인(武人)이라 의리와 지조를 소중하게 여기는지라 더욱 남 같지 않네. 그리고 교동의 한 부자는 우리 상조회와 상부상조하는 사이지. 그러니 한 식구나 다름없네. 한데 상조회에는 사나흘 후에 보내마 하던 굴비를 그대들이 먼저 다른 곳으로 싣고 가다니? 이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겠군. 하나, 나는 불문에 부치겠네. 그러니 그대들은 염려 말고 상조회와 스스럼없이 지내기를 바라네. 칠패의 상인 분들은 상도의와 상고가 지켜야 할 덕목을 아는 분들 같으니 이 또한 기뿐 일이오. 아시겠지만 우리 상조회는 오늘날까지 신용 하나로 버티고 있소. 상고가 신용이 없으면 무뢰배 소리를 들을 뿐이요. 세 분은 앞으로 여기 황방장을 찾으시요. 손해가 없으리다."
오일중은 범털이와 중필이가 보통이 넘는 실력을 갖춘 것을 간파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칠패의 상인도 상조회와 거래를 트게 될 것이었다. 결국 범털이와 중필이 그리고 세 사람의 칠패 상인들은 황구만이 대접하는 술을 나눠 마시고 기분 좋게 헤어졌다. 칠패 상인들은 범털이의 배를 타고 삼개로 떠나고 중필이는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한 중필이가 삽짝을 밀치고 들어서니 마침 부엌에서 밥상을 들고 나오는 금화와 마주쳤다.
"헛, 당신이 말한 술 마실 일을 기대했더니 첫 번 째 마신 술은 취할 만큼 마시지도 못 했고 두 번째 술은 취할 새도 없었고 세 번째 마신 술은 취하지도 않는 구먼. 대체 이게 무슨 조화 인가?"
"첫 번째 술을 많이 마셨으면 두 번째 술을 못 마셨을 것이오. 두 번째 술에 취했으면 아이를 구하기 전에 당신 먼저 죽었을 것 아니요? 세 번째 술은 늦게라도 취할 것인데 무슨 걱정이란 말이요? 긴 소리 말고 들어가 밥이나 드시오."
금화는 밥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직 할 말이 남은 중필이가 방으로 따라와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 만난 사람이 한 둘이 아니거늘 수많은 사람 중에 봐 두란 얼굴은 어떤 얼굴이란 말인가?"
"호두알에 금간 사람이 여럿이란 말이요?"
"음, 알았네. 그럼, 아이 위험한 것은 알면서 서방이 이 꼴이 난 것은 알지 못하니 그 게 아는 것인가?"
중필이는 채찍에 맞아 터진 팔과 등 쪽을 가리켰다.
"그깟 살피듬 좀 벗겨졌다고 당신이 죽을 사람이요?"
"막상 아이는 위험해 보이지도 않더구만 헛짚은 것일세."
"당신이 감싸 안지 않았으면 그 아이가 어찌 살았겠소. 납추가 정수리에 떨어집디다."
"본 듯이 용하군. 그 아이가 하늘 같은 서방보다 중한 아이란 말인가?"
"그 아이가 하늘 같은 서방을 살릴 날이 있으니 구해야지요."
"헛, 그 어린 것이 언제 자라 날 구한단 말인가?"
"꼭 십 년 뒤에 다시 만날 것이요."
"십 년 뒤에 내가 죽을 병이 걸리면 그 아이가 의원이 되어 날 살린단 말인가?"
"양반의 손에 죽게 될 당신을 살릴 것이요."
"그렇다면 꼭 십 년 뒤에 만날 필요가 있나? 언제든지 가서 만나면 될 것을?"
"그 아인 조만간 떠날 것이요."
"솔가 해서 이사라도 간단 말인가?"
"그 아이 혼자 떠나게 될 것이요."
"뭐라? 그 어린 것 혼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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