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흔적을 찾아서
송윤호는 이를 사려 물고 생각에 잠겼다.
'살아 있는 것을 확인했으니 꼭 찾게 될 것이다. 하지만, 원일이가 저 강을 건너 간 것이 거의 반 년 전의 일이라니 지금 뒤를 따른데도 당장 만날 수는 없을 터이다. 흔적을 따라가려면 여러날, 아니, 어쩌면 여러 달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호구지책을 마련하며 해야 한다.'
송윤호는 무일푼에 아무런 대책 없이 길을 떠났던 지난해를 생각했다. 길에서 굶어죽지 않은 것이 천행일 정도로 고생이 막심했던 것이다. 그리고 배가 고프면 구걸을 하느라 아까운 시간을 다 뺏겨야 하고 제대로 추적을 할 수도 없었다. 때로는 밥을 얻기 위해 인가를 찾아 헤매다 보면 엉뚱한 길로 들어설 때가 많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거칠이를 비롯한 동이와 덕구까지 모두 입이 넷이었다.
"소원하던 장손의 생사를 알았으니 이제는 찾을 수 있다. 그러니 이 추위에 더 이상 길에서 떨 일은 없느니라. 이렇게 하기로 하자. 우선 농가의 헛간이라도 빌려 당분간 추위가 물러가기를 기다리자꾸나. 기다리는 동안 천지환과 고약을 만들자. 그것만 있으면 길에서 굶는 일은 더 없을 것이다."
"지난 번 송파장처럼만 팔린다면 큰 돈을 벌겠습지요."
"병자를 상대로 큰 돈을 벌 생각은 말아라."
"예, 나으리."
"좀 외딴곳이면 좋으련만.…"
"차라리 움막을 하나 세우면 어떨까요?"
"언 땅에 움막을 어떻게 세운단 말이냐? 농가의 헛간을 빌리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럼 그럽지요."
"너희들 생각은 어떠하느냐?"
송윤호는 동이와 덕구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동이는 두 손을 내 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구, 소인들이 무얼 아옵니까? 나으리 의향대로 따를 뿐입지요."
"내 너희들이 앞으로 살아갈 방도를 생각한 바가 있어 그런다. 거칠이와 함께 앞으로 너희들은 장삿길로 나서거라.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느니라. 앞으로는 돈이 벼슬 못지않은 세월이 올 것이다."
"천지에 일가친척이 없는 저희들을 거두어 주신 것만도 감지덕지 올습니다. 나으리의 의향대로 따를 뿐이오니 말씀만 하소서."
"내 말을 따르겠다니 고맙구나. 그럼 저 산 아래로 가서 농가를 찾아보기로 하자."
송윤호는 남서 쪽에 솟은 북성산을 가리키며 앞장을 섰다. 산이 있는곳 까지는 오 리가 조금 넘는 거리였다. 산 밑은 산을 깎아 만든 비탈밭과 약간의 논이 있었고 초가집이 십여 채 있었다. 송윤호는 개중에 가까운 집으로 향했다. 거칠이가 먼저 반쯤 열린 삽짝으로 다가 갔다.
"주인 있소? 뉘 없소?"
거칠이는 마당 안으로 한 발을 내딛으며 주인을 불렀다. 그러나 대답을 기다리기 전에 무언가 집 안이 썰렁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마당이 휑댕그레 할 뿐 아니라 방문의 종이도 찟겨 있었다. 사람이 산다면 이 추위에 방문이 저럴 리가 없었다. 보나 마나 빈 집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인 듯 하옵니다."
"내가 가 보겠수."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덕구란 놈이 뛰어가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방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없수. 아무도 없단 말이요. 귀신이 사는 집인가 보우. 우리가 씁시다."
덕구가 히죽히죽 웃음을 흘렸다. 일이 되려니 공으로 집이 생긴 것 같아서였다.
"거 이상하구나. 집 꼴을 보아하니 여러 달 동안 비여 있던 것 같은데...."
거칠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자, 다른 집을 찾아가 사정을 알아보자꾸나."
송윤호는 발길을 돌려 다음 집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거칠이가 먼저 삽짝으로 다가갔다. 거칠이는 주인을 부르기 전에 먼저 집 꼴을 살폈다.
"이 집은 사람이 사는 듯 하옵니다. 주인을 불러 봅지요."
"그러거라."
"주인 계시오? 뉘 없소?"
처음 부를 때는 조용하던 문이 두 번 째로 부르는 소리에 열렸다. 머리가 하얗게 쉔 할미였다. 삽짝을 밀고 들어서는 거칠이를 본 할미는 놀란 눈으로 입을 벌렸다.
"뉘, 뉘시기에 남의 삽짝을 막 밀고 들어오우?"
"아, 놀라지 말우. 우리는 헛간을 빌리려 든 길손들이요. 헌데 저기 저 집은 비었습디다. 보아하니 이사를 간 것 같지도 않던데 사람은 없으니 웬 일이요?"
거칠이는 노파가 놀라지 않게 차분하게 말했다. 늙은이는 그제야 약간 안심이 되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집 사람들은 모두 죽었소. 지난해에 웬 두억시니 같은 놈이 한밤중에 나타나 그 집 사람을 도륙을 내었소, 그 집뿐만 아니요. 이곳 삼밭골 아홉 집 중에 세 집이 그놈 손에 결단이 났소. 그러니 이제는 낯선 사람만 보면 누구든 기절을 하오."
"헛, 한 놈 손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당했단 말이요? 이 동네에는 젊은 남정네도 없단 말이요?"
"있은들 환도 든 놈을 어찌 이기겠소?"
"촌 동리인 이곳에서 사람까지 헤치면서 털어갈 게 무어란 말이요?"
"이런 촌구석에서 뺏어갈 게 무어가 있겠소? 여기는 논밭이 적어 산에서 약초나 캐다가 팔아먹고 사는 동리요. 허니 약초 판 몇 푼의 돈이 다지요."
"약초라.... 나으리, 어쩌면 나으리께서 필요한 약초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옵니다."
거칠이는 약초라는 노파의 말이 반가웠던 모양인지 얼른 송윤호를 돌아보았다. 송윤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탄식해 마지않았다.
"해치지 않고도 빼앗을 수 있을 터인데 어찌 사람들을 그 지경으로 만든단 말이요?"
"마실을 갔다가 살아난 사람 말을 들으니 관아에 발고를 못하게 모조리 죽이더랍니다. 저 끝 집에서는 밥을 빨리 안 준다고 다 죽였다지요. 에이 야차 같은 놈."
노파의 치가 떨리는 음성에 송윤호는 무엇이 생각난 듯했다.
"그것이 지난해 언제쯤이었소?"
"한창 더운 여름께였소. 그놈이 바로 여기를 조사하러 왔던 포교가 쫓던 유랑민이랍디다. 관아에서 애고 어른이고 다 잡았는데 여강을 건너 간 놈과 윗강으로 내뺀 놈은 놓쳤답디다. 개중에 윗강으로 갔던 놈이 밤에 여기로 온 것이 틀림 없답디다."
송윤호는 가슴이 뜨끔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원일이와 관련된 얘기를 들은 것이다.
'음, 강을 건넌 건 원일이를 안은 판덕이란 사내일 것이고 이곳에서 살인을 한 자는 노달구란 자가 틀림없겠구나.'
송윤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러자 뒤에 있던 동이가 불쑥 물었다.
"이 동리에 촌장은 없소?"
"우리 집 영감이 촌장이었소만 그 일이 있고 얼마 후에 죽었소. 평소에 황달이 심했었는데 손쓸 새도 없이 갑디다."
"그럼 우리가 이 동리에 당분간 있으면 안 되겠소?"
"빈집이 많으니 그거야 어떻겠소만 댁들은 무얼 하는 분들이요? 보아하니 양식 자루도 없는데 무얼 해서 먹고 사느냔 말이오?"
그러자 다시 거칠이가 노파의 말을 받았다.
"우리는 팔도를 떠도는 행상인데 마침 팔 물건이 다 떨어져 여기서 다시 만들어서 떠나려 하는 것이요."
"여기서도 만들 수 있단 말이요? 무슨 물종인데 여기서 만들 수 있단 말이요?"
"약이지요. 배가 아프거나 종기가 난 데는 직방으로 듣는 약이란 말이요."
"아, 의원이시오? 의원이면 진작에 좀 오실 걸 그랬소. 우리 영감 진맥이나 한번 잡혀 보고 죽게 말이요. 우리도 약초로 먹고살지만 병자를 고치는 재주는 없으니 어쩌겠소? 어쨌든 아무 집이나 골라잡으시요. 집집마다 솥과 사발이 다 있을 테니 사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으리다. 대신 핏자국은 씻어야 할 게요."
"고맙소. 허면 세 집 중 제일 큰 솥이 걸린 집이 어디요?"
"그야 쇠여물을 쑤는 솥이 걸린 맹구네 집이지요."
"맹구네는 또 어디요?"
"골 안쪽 끝집이요. 방도 그 집이 제일 넓지요."
"그럼 거기서 당분간 머물다 가리다."
송윤호를 비롯한 네 명이 끝 집을 향해 걸었다. 한데, 어떤 집 마당에서 도끼질을 하던 사람이 송윤호 일행을 보자 부리나케 삽짝을 닫아 걸었다. 낯선 사람을 보고 놀란 것인 것이다. 그런 모습이 우스운지 덕구란 놈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원 저렇게 겁이 많아서야 노루 방귀에도 놀라겠소."
"그러게 말이다. 우리를 도깨비 보듯 하는구나. 하하."
동이도 덕구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그러자 거칠이가 그들을 나무랐다.
"그만들 둬라. 이웃에 살던 사람들이 하룻밤에 도륙이 났는데 무섭지 않겠냐? 저들은 아마 밤이 되어도 잠을 못 잘 것이다."
"네 말이 맞다. 순박한 사람들을 그렇게 해치는 놈이 있다니.... 쯧."
송윤호가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의 일가가 축석고개에서 습격을 당할 때 노달구란 놈이 여자 유랑민까지 내 몰더라는 여주 관비의 말이 생각난 것이다. 그렇게 잔인한 놈이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송윤호는 몹시 분했다.
"오, 집은 온전하옵니다. 나으리."
집을 둘러 본 거칠이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이와 덕구도 방문을 열어보고 부엌도 살피며 돌아다녔다.
"거칠이 성, 그놈이 식구들을 저 골방에다 몰아넣고 일을 낸 모양이요. 거기만 피 칠갑이요."
"무섭더라도 너희 둘이서 바닥을 긁어내고 벽에다 흙칠을 좀 하려무나."
"무섭다니요? 그까짓 게 무어가 무섭단 말이요? 내가 무서울게 있겠소?"
동이의 말이 떨어지자 덕구가 금세 뒤를 이었다.
"힝, 세상에서 내가 무서워하는 건 단 하나요. 배고픈 것. 그것 빼곤 무서울 게 없습디다."
덕구는 괭이를 찾으러 헛간으로 달려갔다.
"나으리, 날씨가 차옵니다. 아궁이에 불부터 넣어야겠습니다."
"저녁을 지을 겸 그래야 겠다. 참 내일 날이 밝거든 아까 그 노파를 찾아가서 양식을 좀 구처 하도록 해라. 돈을 주면 얼마간이라도 구할 수 있을 게다."
"그럽지요. 여기서 못 구하면 여주장에라도 나갑지요."
거칠이가 샘에서 물을 길어 솥과 그릇의 먼지를 닦는 한편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다행히 방구들은 멀쩡하여 연기 한 점 나지 않고 더워지기 시작하였다. 네 사람은 그날 저녁 실로 오랜만에 뜨뜻한 구들에서 밥을 먹고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자 거칠이를 대신해 동이가 밥을 지었다. 덕구가 상을 받아 부엌을 나서려는데 삽짝 밖에서 웬 상투잡이가 삐끔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뭐요? 무슨 일로 왔소?"
덕구는 방으로 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상투잡이를 향해 물었다. 그러나 상투잡이는 말을 못하고 삐죽이 집 안을 살필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덕구는 밥상을 쪽마루에 놓고 방문을 열었다.
"나으리, 아침밥 이오이다."
"음, 다들 들어오라고 해라."
붓을 들어 무언가를 쓰고 있던 송윤호가 고개를 들다가 삽짝 밖의 상투잡이를 보았다.
"저 사람은 웬 사람이냐?"
"물어도 대답이 없으니 알 수가 없습지요."
"허, 한 사람이 아니로구나."
"예? 상투잡이 하나던 데요?"
덕구가 뒤를 돌아본즉 그 새 상투가 몇 개나 늘어 있었다. 분명 동네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 어제 본 노파가 상투잡이들을 헤치고 나타났다.
"지내기가 어떠우? 여러 삭 불을 때지 않은 구들인데 불은 잘 들입디까?"
노파가 마당으로 들어서자 상투잡이들도 주춤주춤 뒤를 따라 들어섰다. 뒷마당에서 땔감을 묶어서 나오든 거칠이가 눈이 둥그레졌다.
"촌장 댁 할멈이구려. 어쩐 일로 모두들 몰려왔소?"
"낯선 사람들이 이리로 몰려가더란 말을 듣고 내가 이들을 안심시키려고 데리고 왔소. 자라에 놀란 가슴이 솥뚜껑에 더 놀랜다 잖소."
"헛, 놀라긴 되려 내가 놀랬소. 아침부터 몰려오니 말이요."
"자, 동리 사람들은 보시오. 내가 말한 대로 의원이 여기서 약을 지으려고 온 것이니 놀랠 것 없소. 장정이 네 사람이나 왔으니 우리로서는 외려 든든한 일 아니요? 오, 저 사람이 의원이시오."
노파가 상투잡이들을 안심을 시키려고 밖을 내다보는 송윤호를 가리켰다. 송윤호가 할 수없이 쪽마루로 나섰다.
"약을 지을 동안이나마 동리의 신세를 지게 되었소이다. 약초를 구하는 대로 약을 지어 떠날 것이니 안심들 하기 바라오. 참, 여주 장날이 언제요?"
"오 십장이니 내일이 스무날 장날이지요."
상투잡이 가운데 하나가 재빨리 대답을 했다. 경계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인 걸 알았던 것이다. 대답할 기회를 놓친 노파가 나섰다.
"여주장이 크기는 하오만 무엇을 사려고 묻는 게요?"
"양식도 조금 사야겠고 혹여 약초가 거래되면 사려고 하오."
송윤호의 말에 반색한 노파가 상투잡이들을 돌아보며 성긴 이를 들어내며 웃었다.
"그거라면 장마당까지 갈 것도 없소. 양식은 우리게도 있고 더구나 약초라면 팔고 남은 게 있소. 만약 찾는 약초가 없다면 물목만 말하오. 그럼 우리가 구해다 드릴 테니.... 마침 여기 있는 바우 애비가 여주 건재상과 거래를 하는 사람이요."
"내가 잘 아는 건재상이 있으니 못 구할 약재는 없으리다."
바우 애비란 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서자 송윤호는 쓰고 있던 종이를 밖으로 내밀었다. 덕구가 그것을 받아 바우 애비에게 주었다.
"거기에 쓰인 약재가 있었으면 하오. 수량도 적은 대로요."
종이를 받아든 바우 애비가 한참을 이리저리 뜯어 보더니 다시 덕구에게 돌려주었다.
"왜그러오? 적혀 있는 약재가 없소?"
"그것이 아니라 진서를 알지 못해 그러오. 언문으로 적어주면 무슨 약재든 구해다 드리리다."
그제야 사정을 알게 된 송윤호가 미안한 마음과 함께 부끄러움마저 들었다. 진서를 알 리 없는 산골 농부들에게 잘난 채 한 꼴이 된 것이다.
"아, 미안하게 되었소. 잠시만 기다리시구려. 아니 그럴게 아니라 모두들 방으로 드시구려. 날이 사뭇 춥질 않소?"
"아니요, 아직 식전인 것 같은데 그럴 수는 없지요. 얼른 구할 약재만 적어주시구려."
"정 그렇다면 잠시만 기다리시오."
송윤호가 붓을 들어 재빨리 약재의 이름과 수량을 적었다.
"이대로라면 약재 값이 얼마나 들겠소?"
바우 애비가 송윤호가 쓴 약재와 수량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건재상에서 다 구할 수 있는 약재 올시다. 우리에게도 좀 있구요. 헌데 물량이 생각보다 많구려. 대강 일곱 냥 정도는 들 것 같소."
"좋소이다. 지금 선 돈을 치르리까?"
"아니오. 물건도 없이 어찌 돈 먼저 받겠소? 물건을 갖고 와서 받도록 하지요."
"그럼, 그럽시다. 언제쯤 갖고 올 수 있겠소?"
"이틀은 걸리리다. 그리고 이 정도의 양은 나 혼자 갖고 올 수는 없소이다. 여기 장정이 여럿이니 누가 좀 도와 주시오."
"그럽시다. 마련이 되는대로 부르시요. 우리가 도울 테니."
일이 되려고 쉽게 얘기가 끝이 났다. 노파와 상투잡이들이 물러난 뒤 모두들 식어버린 밥을 먹었다. 밥을 먹은 후 모두들 달려들어 소여물을 삶는 솥을 닦고 땔감을 준비하느라 종일을 바삐 움직였다. 한 편 거칠이는 양식으로 노파의 집에서 좁쌀 서 말을 사 왔다. 반찬을 걱정하던 동이가 장독을 열어보니 된장이 남아 있었다. 칼 맞아 죽은 집이라 꺼림칙하여 동리 사람들이 손을 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날 저녁 바우 애비가 왔다. 물건을 구해 놓았으니 내일 가져오면 된다는 것이다. 다음날 거칠이와 동이는 지게를 빌려 바우 애비와 함께 여주 읍내로 갔다.
"건재상 주인의 말로 미루어 복통과 설사의 처방에든 약재 같습디다. 이 많은 약재를 탕제로 쓸 것 같지도 않고.... 허, 참 알 수가 없구려."
물건을 내려놓으며 바우 애비가 한 말이었다.
"건재상에게 줘야 할 돈이 닷 냥 올시다. 그리고 마을에서 걷은 약초 값이 반 냥 남짓이요."
"일곱 냥이 든다더니 어찌 그리 헐하게 사셨소?"
"건재상이 설마 내게 감투야 씌우겠소? 허고 마을에서 걷은 것도 팔고 남은 것들이니 어찌 값을 다 받겠소? 반냥으로 대강 나누어 주고 말지요."
"그럴 수야 있소? 여기 여섯 냥 드리리다. 바우 아범도 신발차는 있어야 할 것 아니요?"
"원, 벼룩이 낯짝도 낯짝이오? 신발차를 받을 만큼 일을 한 것이 없소."
"그래도 받아 두오. 바우 아범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풀렸으니 말이요."
송윤호는 사양하는 바우 아범에게 결국 여섯 냥을 쥐여주었다. 이로써 삼개를 떠날 때 서른 냥이던 노자가 이제 열여섯 냥으로 줄었다. 그러나 며칠 먹을 양식이 있고 환약을 만들 재료가 갗추어지니 모두들 희망이 생기는 듯하였다.
그날부터 모두들 팔을 걷어붙이고 일을 시작하였다. 송윤호는 조제별로 약초를 가리고 덕구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거칠이는 물을 길었다. 동이는 나뭇단을 나르는 한편 송윤호가 시키는 대로 약재를 솥에다 갖다 넣었다. 그리고는 밤 낮을 교대로 불을 지키며 날밤을 세웠다.
약이 졸아들어 덩이가 지면 모두들 달려들어 환을 만들고 다시 약을 끓이기를 계속했다. 약재가 많아서인지 고약까지 다 만들었을 때는 이레가 지나 있었다. 방바닥은 환약을 말리느라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네 사람은 살변이 났던 방을 치워 거기서 잘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부터 한지를 잘라 환약과 고약을 싸기 시작했다. 그 일도 만만치 않았다. 수량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일을 하는 동안 바우 아비를 비롯한 동리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와 약을 만드는 것을 보기도 하고 개떡을 쪄서 갖고 오기도 했다. 특히 노파는 심심하고 무료하던 차에 잘 되었다는 듯 아궁이 앞에서 불 때기를 자청하고 나서기도 했다. 그래서 일이 모두 끝났을 즈음엔 동리 사람들과 스스럼이 없었다. 특히 덕구는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려 그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정월 말이었다. 그동안 만든 환약과 고약을 유지로 싸서 네 개의 고리짝에 나누어 담았다. 고리짝들은 빈집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송윤호는 천지환과 고약을 싸서 동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자, 다들 잘 듣거라. 내일 아침에 길을 떠날 것이니라. 나는 여강을 건너 신륵사 쪽으로 길을 잡으려 한다. 거칠이 너는 동이와 덕구를 데리고 이천 쪽으로 길을 잡아라. 그 길을 가되 용인 수원 과천 등지의 장날을 따라 경기 지경을 돌아라. 겨울이라 사당이 있으려나 모르겠지만 만약 사당패를 만나거든 가만히 언년이를 아는 사당이 있나 물어 보아라. 사당패끼리는 서로 통하는 법이니 자기 패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을 게다. 약은 언년이를 찾는 수단이지 돈을 벌자는 것이 아니니 한 패라도 더 사당패를 찾아보아라."
"그럼 나으리와는 헤어져야 한단 말씀 오니까?"
"날이 풀릴 때까지도 언년이를 찾지 못하면 김화로 가거라. 가서 네 아비의 농사를 잠시 거들어라. 모내기를 끝내고 다시 장바닥을 훑으면 될 것이다. 언년이를 찾던 못 찾던 오월 단옷날까지 삼개로 오너라. 나도 그때는 상조회에 가 있을 것이니라."
"그럼 저희들은 거칠이 성님과 계속 같이 있을까요?"
동이가 걱정스런 얼굴로 송윤호를 바라보았다.
"물론이니라. 항상 같이 행동하거라. 너희들은 아직 장사가 무엇인지 잘 모를 것이니 거칠이를 따라 약을 팔면서 한편 장바닥이 돌아가는 이치를 보고 깨닫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다른 장사를 시작할 테니까. 약은 잠시 동안의 호구지책일 뿐 약으로는 돈을 벌지도 못하고 벌어서도 안 되느니라."
"그래도 다른 것보다 잘 팔린다면 그것이.…"
"기왕 장삿길로 들어설 바엔 거상이 될 생각을 해야지 어찌 사나이 일생을 병자를 상대로 약이나 팔 생각을 한단 말이냐?"
송윤호는 큰 소리로 동이의 말을 사정없이 잘라버렸다.
"장사란 남는 곳에서 모자란 곳으로 옮기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백성이 싸고 흔히 쓸 수 있게 하는 일이 곧 장사니라. 작은 이익에 연연해 거짓과 속임수를 쓰면 그 장사꾼이 신용을 얻겠느냐?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이런 기회도 흔치 않으니 장사를 보고 배워라."
"예."
"덕구는 눈치가 빨라 배우는 것도 빠를 것이니 더욱 눈여겨 살피도록 해라."
"예. 나으리."
"남은 돈이 열여섯 냥이 옵니다. 나으리께서 지니고 가시지요."
"너희들도 급한 일이 생길 것이다. 그럴 때 쓰도록 해라."
"아니오이다. 쉔네들은 이 약이 있는 한 굶을 일은 없을 것이오니 나으리께서 지니 소서."
"나 역시 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이것만이라도 넣어두소서."
거칠은 다섯 꿰미의 엽전을 송윤호의 전대에 넣었다. 송윤호는 그것은 마다하지 않았다. 끝까지 받지 않으면 거칠이나 동이가 어떻게 그 돈을 쓰겠는가?
이튿날 아침을 든든히 먹은 네 사람이 마을을 나서니 몇 집 남지 않은 동리 사람 모두가 나와 그들을 전송하였다.
"약을 다 팔면 이곳으로 다시 오시오. 집은 비워둘 터이니. 꼭 오시오."
노파의 간곡한 부탁이었다. 마을을 벗어나자말자 서로 헤어져야 했다. 송윤호는 신륵사가 있는 동북 쪽으로 가야 하고 거칠이는 곧장 서쪽으로 가야 이천이었다.
"나으리 옥체 보존하소서."
거칠이가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송윤호에게 작별 인사를 올렸다. 동이와 덕구도 헤어짐이 못내 서운한 듯 눈물이 맺혔다.
"어딜 가든 몸이 성해야 하느니라. 부디 몸조심들 하고 싸움은 피하거라. 그럼 단옷날에 만나자꾸나. 잘들 가거라."
"나으리 꼭 뜻을 이루소서."
"그래 너도 언년이를 꼭 찾아야 하느니...."
송윤호는 얼른 돌아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한참을 걸어가서 잠시 뒤를 돌아보니 그들은 아직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송윤호는 고리짝을 한번 추스른 후 서둘러 여강을 향해 걸었다. 여강까지는 거의 십 릿길이었다. 송윤호는 여강의 얼음 두께를 눈여겨 살폈다. 겨우내 지독한 추위가 이어져서인지 아직은 얼음이 단단해 보였다. 신륵사가 마주 보이는 곳이 강폭이 좁아 보였다. 송윤호는 조심스레 얼음 위를 걸어 가운데로 향했다. 한데, 강심에 가까워지자 그곳은 얼음이 없었다. 그곳은 여울이어서 얼음이 얼지 않았던 것이다. 할 수 없이 뒤로 돌아선 송윤호는 좀 더 아래의 넓은 곳을 택해 다시 건너기 시작했다. 강 가운데쯤에 이르자 얼음이 찌직 하고 울었다. 그리고 발밑에서 금이 주욱 생겨서 겁이 덜컥 났다. 마음이 급한 송윤호는 보폭을 빨리하여 종종걸음을 하였다. 다행히 강심을 벗어나자 더 이상의 금은 생기지 않았다. 송윤호는 무사히 여강을 얼음 위로 건넌 것이다. 아마 열흘만 더 있으면 얼음이 녹기 시작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륵사는 강가와 가까웠다. 반 마장 쯤 올라가자 경내가 나왔다. 경내 왼쪽에 누각이 있고 그 뒤를 돌아드니 금당이 나왔다. 한데, 금당 앞에 용과 구름을 조각한 석탑이 있었다. 보기에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 조각이었다. 송윤호는 잠시 그 석탑의 조각에 눈길을 주었다. 보면 볼수록 소박하고 간결한 멋이 깃든 조각이었다. 그러는 사이 선방에서 어떤 중이 나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비룡을 새긴 탑을 처음 보시나 봅니다."
갑자기 들려오는 말에 송윤호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젊은 중이 두 손을 모아 합장의 예를 하고 있었다. 송윤호도 얼른 합장으로 예를 올렸다.
"보살께서 보고 계신 석탑은 신라 때의 것이 올시다. 탑신에 비룡을 새긴 것은 매우 희귀한 일이지요."
"비룡뿐 아니라 구름무늬와 물결무늬도 아름답군요. 소박한 탑신에 간략한 새김이 더욱 좋습니다."
"하하, 보살께서 보시는 눈의 비범함을 알겠습니다."
"그런데 탑만으로 보면 오랜 고찰 같은데 대웅전을 비롯한 모든 건물이 어제 세운 듯 새롭군요."
"하하 새 절이니 그러할 밖에요. 이 절은 임진 병자 양란(兩亂)에 불타서 폐사(廢寺)가 되었다가 꼭 십 년 전에 계헌(戒軒) 선사가 중건하셨지요."
"아 그랬군요."
"헌데 보살께선 차림으로 보면 장사치인데 말씨나 안목으로 보아서는 천인이 아니니 이상한 일이오이다. 고리짝을 지고 비룡문(飛龍紋)을 감상하는 보살이라니요?"
"제가 주제넘는 짓을 하고 말았군요."
"주제 넘을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사연이 있을 터이지요."
"실은 아이를 찾으러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지난해 이 길로 도타한 유랑민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유랑민이 우리 집 장손을 데리고 있습니다."
"아, 그 일이라면 가 근방 사람들이 다 아는 일입니다. 남의 집 묘를 파헤친 유랑민들이 죽거나 다 잡혔는데 한 명이 이쪽으로 건너왔다는 말을 들었소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아이를 데리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 올시다."
"그럼 이 절 뒤로 가면 어디 오이까?"
"저 뒷산이 봉미산(鳳尾山)이 지요. 그 옆의 금당 내를 따라 40여 리를 올라가면 서쪽으로 양근 가는 길이 있지요."
"아 여기서도 양근으로 빠지는 길이 있군요."
"금당 내를 따라가는 동안은 평탄하나 석불을 거쳐 갈지산과 독골산을 넘어가려면 구절 양장(九折羊腸)이라 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을 겝니다."
"스님의 말씀 감흡하오. 어쟀든 이 길로 간 것은 분명한 일이니 그대로 뒤를 따를 밖에요. 그럼 이만 물러갑니다."
"보살의 장손이 무사하길 기원하겠소이다."
중과 작별한 송윤호가 신륵사 경내를 지나 뒷 산길로 올랐다. 산 위에서 소로를 따라 동으로 몇 마장을 가니 냇물이 흐르고 드넓은 논밭이 펼쳐졌다.
'저 냇물이 아까 그중이 말하든 금당 내로구나.'
냇물을 따라 내려가면 다시 여강이니 판덕이란 사내가 그리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에 송윤호는 북쪽으로 가기로 했다. 한데, 금당 내를 따라 한참을 가도 빈 논밭만 있을 뿐 인가가 없었다. 얼마를 더 가니 저 멀리 낮은 산 아래 몇 채의 집이 보였다. 송윤호는 아이를 안은 판덕이란 사내의 처지가 되어 생각하기로 했다.
'논밭이 끝나는 위로는 인가가 보이지 않으니 어쩌면 여기서 구걸을 했을 수도 있다. 만약 여기서 구걸을 했다면 틀림없이 이 길로 갔을 터....'
송윤호는 얼어붙은 내를 건너 넓은 논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맨 먼저 보이는 집으로 향했다. 그 집은 울타리 손질이 잘 되어 제법 포실해 보였다. 송윤호는 닫힌 삽짝 너머로 주인을 불렀다.
"계시오? 주인 계시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게문이 반쯤 열리더니 상투 튼 늙은이가 삐끔 내다보았다.
"뉘시오?"
"말씀 좀 물어보려 하오."
"거기서 물어보구려."
"헛, 인심이 사납구려."
"인심이 밥을 먹여주오?"
"좋소이다. 지난해 여름, 아이를 안은 걸인이 이곳을 들린 적이 있소?"
송윤호의 말에 늙은이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카 악하고 가래를 돋우어 마당에 뱉었다.
"없소.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 다른데 가서 알아보오."
그리고는 방문을 탁 닫아버렸다. 좋은 말로 해도 될 것을 참으로 무례하고 기분 나쁜 늙은 이였다. 송윤호는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막 발길을 돌리려는데 부엌에서 웬 아낙이 제빨리 나와 삽짝에 붙어 섰다. 그리고는 작은 소리로 재빨리 말을 하였다.
"그런 사람이 왔었어요. 아이를 데리구요. 아이가 굶어 맥이 없었지요. 쉔네가 젖을 물려주었어요. 그 아이의 눈이 어쩌면 그렇게 예쁜지.... 지금도 생각이 난답니다."
송윤호는 꿈결인 냥 아낙의 말에 취했다. 원일이가 틀림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생각대로 결국 판덕이란 사내는 이곳을 들렸었다.
"고맙소. 고맙소."
송윤호는 고맙다는 말 이외는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돌아서는 송윤호의 발걸음이 허공을 밟은 듯 허둥거렸다.
'이 길로 갔다면 양근 쪽으로 갔을 터인데 또 어디에 흔적을 남겼을까?'
생각에 잠긴 송윤호가 사십여 리를 걸어 일신골에 닿은 것은 오정이 훨씬 지나서였다. 정월의 끝이라 하나 춥기는 섣달 추위와 같았다. 송윤호는 염치불구하고 어떤 농가를 찾아들었다.
"양근을 가려는 나그네이나 날은 춥고 해는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러니 아무 데나 좀 제워주오."
밖을 내다본 젊은 사람이 송윤호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다시 방문을 닫았다.
"해도 떨어지기 전에 재워달라는 과객의 염치는 어디다가 맡겼소? 이십 리만 더 가면 지평골이요. 주막이 있는 곳이니 그리로 가오."
조금 일찍 왔더라면 주막이 있다는 지평골까지 내쳐 가련만 짧은 겨울 해를 생각하면 그도 어려울 것이었다. 송윤호는 다시 한번 사정을 하였다.
"거절 한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나 초행길이라 길이 서툴러 그러오."
"아무리 서투른 길이라도 눈앞에 보이는 길도 못 따라 간단 말이요?"
"헛, 좋소. 그럼 하나만 물어봅시다. 지난해 여름 두어 살 먹은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걸인을 보았소?"
"별 걸 다 묻는구려. 못 본 내가 어찌 알겠소?"
송윤호는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두 산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잘 곳이 없을 바엔 주막이 있다는 지평골로 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해가 얼마나 남았는지 하늘을 올려다 본 송윤호가 달음질에 가까운 걸음을 걸으니 추위도 한결 덜했다. 그러나 길은 험했다. 처음 오 리 남짓 평탄하던 길이 산길로 접어들며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신륵사 중의 말대로 구절양장의 길이었다. 마른 환약이라 그리 무겁지 않던 고리짝이 차츰 무겁게 느껴졌다. 다시 한번 하늘을 바라본 송윤호는 숫제 뛰기 시작했다. 해가 바야흐로 서산에 걸려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산길 십 리는 평지의 삼십 리 걷는 것만큼 힘이 드는 법이다. 오 리쯤 더 가자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러고도 산길 십 리를 더 걷고서야 지평골에 닿았다. 대여섯 집들이 어둠에 묻혀 있었다. 송윤호는 길가의 집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느집이 주막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삽짝이나 지붕에 삭아빠진 용수일망정 올려 둔 집이 없던 것이다. 그런데 삽짝을 닫지 않고 젖혀둔 집이 있었다. 송윤호는 그 집 안으로 들어가 주인을 불렀다. 어두운 방 안에서 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주인이시오?"
"왔으면 봉로에 들어가 자면 될 것을 무슨 볼일로 깨우시오?"
"아, 주막이 맞구려. 헌데 아직 잘 시각은 아닌 듯 하오."
"헛, 짧은 겨울 해에 저녁밥 먹었으면 자야지 관솔 아깝게 불을 켠단 말이요?"
"그러면 저녁밥을 먹을 수 있겠소?"
"술을 팔지 밥은 팔지 않소. 길양식이 있으면 해 드시오. 솥과 나무는 봉로간에 있소."
"돈을 낼 테니 양식을 좀 파시요."
"헛, 양식을 쌓아놓고 있는 주막이 몇이나 되겠소? 없소."
송윤호는 주인의 얘기가 끝나는 것과 함께 저녁밥을 먹을 희망도 끝장인 것을 알았다. 아침을 먹은 이후 물 한 모금 마신 것이 없는 몸이라 더욱 맥이 빠졌다. 어쩔 수없이 봉로에 들었다. 인기척으로 보아 선객이 있는 모양이었다. 송윤호는 먼저 온 사람이 깨지 않토록 방문가에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구들은 뜨뜻하였다.
"길양식이 떨어진 과객인가 봅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온 의외의 말에 송윤호는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밖에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소. 종일 산길을 걸은 몸으로 굶고서야 어찌 잠이 오겠소?"
말씨로 미루어 나이가 든 사람 같았다.
"마음이 급해 미쳐 길양식을 챙기지 못했지요. 산길이 이렇게 험한 것도 몰랐구요."
"이곳이 초행길인가 봅니다."
"그렇습니다."
"가만... 불을 좀 켜야 할까 보오."
그 사람이 무엇을 찾는지 한참을 부스럭대더니 부시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부시를 칠 때마다 번쩍이는 불똥이 눈에 부셨다. 몇 번 더 부시를 치더니 깃을 불어 지촉(脂燭)에 불을 댕겼다. 그러자 금세 방안이 환해지며 쩔은 쇠기름 냄세가 코를 찔렀다.
"오, 아까운 지촉을 무엇 하러 켜시오?"
"해가 짧아 그렇지, 사실 초저녁 아니오? 잠이 들긴 이르지요."
송윤호는 자신의 일로 선객이 잠을 깬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사람은 쉰이 약간 넘어 보이는 중늙은이로 맨 상투였고 벗어 둔 봇짐과 패랭이로 보아 도붓장수 같았다. 그 사람은 봇짐을 끌어당겨 시겟자루를 꺼내더니 송윤호 앞에 밀어 놓았다.
"좁쌀이 좀 남았소. 이걸로 밥을 해서 드시오."
"아니? 무슨 말씀을.... 남의 양식을 내가 어찌 축낸단 말이요. 그만 두시요."
"그럴 것 없소. 나는 먹었으니 배고픈 사람이 드시오."
"이건 내일 아침밥을 드실 것 아니요?"
"당장 급한 사람도 있는데 내일은 또 어찌 되겠지요. 사양하지 말고 어서 밥이나 지으시오."
결국 배가 등 가죽에 붙은 송윤호가 체면 불고하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조밥을 지었다. 밥이라고는 하나 죽에 가까운 밥이었다. 이제까지 거칠이가 해 주던 밥을 먹어 온 송윤호라 솜씨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어쨋든 반찬 없는 뜨거운 밥을 불어가며 맛있게 먹었다.
"덕분에 배를 불렸으나 염치가 없습니다."
"집 떠나면 누구나 마찬가지지요. 배를 곯은 건 나도 수없이 겪었던 일이 올시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송윤호라 합니다."
"양근이 고향인 김만구라 합지요. 본래는 농투성이나 지금은 떠돌이 행상으로 호구를 합니다."
"행상이라면 어떤 물종을 파시는지요?"
"팔기는 이런 지촉을 주로 팔지요. 양반 댁에서 많이 찾으니까요. 또 한 가지는 다리(髢)올시다. 월자(月子)라고도 하는 여자들 머리카락 말입니다."
"다리는 아오만 그것을 판단 말이요?"
"팔기보다는 사러 다닌다고 봐야겠지요. 가난한 집에서 더러 나오거든요."
"방물 장수 아낙들이 다리를 사러 다닌단 말은 들었소만...."
"꼭 그렇지마는 않습디다. 아낙네가 잘라준 달비를 넘기는 것은 거의가 남정네지요."
"그건 그렇겠소. 장도 남정네가 보러 다니니 말이요."
"고리짝을 보아하니 댁도 도붓꾼인가 봅니다?"
불을 밝힐 때부터 송윤호의 행색에 관심을 갖던 중늙은이가 새삼 고리짝을 돌아보았다.
"예. 약을 팔러 다니지요."
"약을 판단 말이요? 의원인가 보구려. 그래, 무슨 병에 좋은 약이오?"
약이란 말에 더욱 호기심이 생긴 듯 김만구라는 중늙은이가 조금 다가 앉았다.
"급체나 소화불량에 아주 효험이 있는 약 올시다. 종기에 붙이는 고약도 팔구요."
"오라. 그럼 탕약은 아닐 테니 환약이겠구려. 송 의원이 손수 만든 것이오?"
"그러합니다."
"그럼 나부터 먹어야겠소. 요사이 통 밥을 삭히지 못하니 말이요."
"아, 그렇다면 한번 드셔 보시오."
송윤호는 고리짝을 열어 천지환 서너 쌈을 김만구 손에 쥐어주었다.
"더운 물과 함께 들면 더욱 좋소이다. 가만, 솥에 숭늉이 남았을 것이요."
밥값을 하느라 송윤호가 선뜻 밖으로 나가 숭늉까지 떠 주었다. 김만구가 약을 입에 털어 넣고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그리고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렇게 씹어 먹으면 뱃속에서 더 빨리 효험이 나질 않겠소?"
"글쎄요. 허허."
아까운 지촉이 닳는 소리가 빠지직 빠지직 들리자 김만구는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송윤호도 몸을 눕혔다. 몸은 무거운데 잠은 오지 않았다. 원일이에게 젖을 물렸다는 아낙이 생각나서였다. 젊은 아낙이 그 집 딸인지 며느리인지는 몰라도 못된 늙은이에 비하면 선녀처럼 마음이 고운 여인이었다. 덕분에 원일이가 기운을 차렸다니 말이다. 자,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하나? 언제까지 이렇게 뒤만 좇아야 하나? 그렇지마는 아닐 것이다. 판덕이란 사내가 언제까지 아이와 함께 떠돌이로 지넬 수는 없을 것이다. 찾는다. 암 찾고 말 것이다.
"자오? 잠이 들었소?"
송윤호가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마음이 분주한데 어둠 속에서 김만구의 말소리가 들렸다.
"아니오. 잠이 쉬 들지 않는 구려."
"고단하면 쉬 잠이 들지만 몹시 고단하면 되려 잠이 오지 않는 법이오. 나 역시 십 년 동안 여러 번 겪어 본 일이요."
"행상으로 나선지 십 년이나 된단 말입니까?"
"그렇소. 금년 들어 십일 년 째요. 하나. 이제 이 짓도 그만 두어야 할까 보오."
"그동안 모은 돈으로 논밭이라도 사 두셨나 봅니다."
"논밭은커녕 있는 논밭도 다 팔아먹었소이다. 그동안 외동딸을 찾아 팔도를 헤매느라 논밭을 다 팔았지요. 그래서 장사를 시작했었는데 이젠 이마저 틀린 노릇 같습디다."
김만구가 딸을 찾아 헤맨다는 말에 송윤호는 놀란 마음이 되었다. 자신과 어쩌면 같은 처지인지 몰랐다.
"딸을 찾다니요? 그 연세에 딸이라면 딸의 나이도 적지 않을 터인데요?"
"십 일 년 전에 열다섯이었으니 지금은 스물여섯일 테지요."
"아니? 열다섯이나 된 딸을 잃다니요?"
어둠 속의 김만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긴 한숨을 쉬었다.
"흐유. 생각하기도 싫소만... 동리에 들어왔던 사당패가 꼬여 간 것이오. 아니 어쩌면 딸년이 그것들을 따라갔는지도 모르겠소. 어쨌든 그 아일 찾으려고 팔도의 사당들을 다 뒤지고 다녔소. 허나 어느 사당패에서도 찾지를 못했소. 이번에도 음성(陰城) 미타사(彌陀寺)에서 겨울을 나는 사당패가 새로 생겼다기에 거길 다녀 오는 길이오. 별 기대는 안 했지만 헛다리를 짚느라 꼬박 열흘이 걸렸소."
누웠던 송윤호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십 년 동안 팔도의 사당을 다 뒤져도 못 찾았단 말이요? 아니, 조선 천지에 사당이 몇 패나 되기에 십 년 씩 찾는단 말이요?"
"사당패는 십 년 전에도 수십 패는 되었지요. 그러나 근래에는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아졌소. 그 패들이 겨울을 나는 절만해도 팔도에 깔렸습디다. 우선 경기도 안성의 청룡사가 제일 많고, 황해도 문화 구월산의 패엽사, 경상도 하동의 쌍계사, 전라도 강진에 있는 정수사, 경남 남해의 화방사가 다 그런 곳입디다. 뿐만 아니요. 영남 하동 목골이며, 전라도 함열의 성불암, 창평의 대주암, 담양, 옥천, 당진, 정읍, 동막(同福), 함평의 월량사가 모두 사당패들의 의지처(依支處)요. 또 그런 절들 아랫 동리는 죄다 사당골이란 동리더란 말이요. 그러니 딸년이 어느 패에 박혀 있는지 어찌 알 수 있겠소? 허기야 이제 와 찾았다 해도 선뜻 따라나설 딸년도 아니겠지만 말이요. 그래도 한 번은 보고 죽었으면 했는데.... 후유."
김만구의 넋두리에 가슴이 메이는 송윤호였다. 언년이는 그럼 어찌 찾는단 말인가? 거칠이가 언년이를 찾아 팔도를 헤맬 생각을 하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원일이를 데려간 유랑민도 사당패처럼 팔도를 헤맨다면? 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너무 어린 탓에 뿌리도 모르는 원일이는 세월이 감에 따라 어떻게 변할 것인가? 그러면 나는 원일이가 바로 앞에서 온대도 모르고 지나칠 것 아닌가? 송윤호는 좌절감에 또 한번 속이 끓어올랐다.
"열다섯 처녀가 스물여섯 아낙이 되었다고 하나 그래도 찾기만 한다면 서로 얼굴은 알아볼 것 아니요? 허나 나는 돌이 갖 지난 아이를 잃었으니 빨리 찾지 않으면 영영 얼굴을 몰라보게 될까 걱정이요."
"뭐요? 그쪽도 사람을 찾는단 말이요?"
김만구의 놀란 소리가 어둠을 헤치고 건너왔다.
"그렇소. 장손인 조카를 잃었소. 유랑하는 걸인이 데려간 것과 이 길을 따라 간 것까지는 밝혔소만 더 이상은 모르니 답답하기 그지없소이다."
"그게 언제 적 일이오?"
"지난해 삼월이니 거의 일 년이 되어가오."
"거 참 어쩌면 우리 처지가 이렇듯 똑같소? 내가 딸을 진작 찾지 못한 것도 처음에 우왕좌왕하느라 세월을 보냈기 때문이요. 우리 마을에 들어왔던 사당패가 어떤 패였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첫 번째였거늘 세월이 지난 후에야 그걸 느꼈으니 그때는 이미 늦었지요. 처음부터 차분하게 살폈으면 찾았을 것을 무턱대고 사방을 돌아다니기만 했으니 찾아지겠소? 댁 네는 부디 차근차근 뒤를 캐면서 따르시오. 그리고 사람을 찾는 데는 세월은 약이 아니라 독이라오. 하루라도 빨리 찾아야 하오."
송윤호는 김만구의 마지막 말에 가슴이 저렸다. 원일이를 찾는데는 세월이 약이 아니라 정말 독이 될 것이었다. 송윤호에게는 이래저래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이튿날 김만구와 송윤호가 작반하여 길을 떠났다. 두 사람 다 아침밥을 굶은 채였다.
"나 때문에 아침밥을 못 드셨구려."
"십 리만 가면 너른 논밭이 있는 다문 골이요. 거기서 양식을 구해 밥을 먹읍시다."
앞장을 선 김만구가 한 말이었다. 송윤호가 마다할 리 없었다.
"그러지요. 양식은 제가 사겠습니다."
"아무려나 합시다. 여기서 양근까지야 40여 리이니 나야 집에 다 온 것인데 아무려면 어떻겠소?"
김만구의 말대로 십 리를 채 못 가서 너른 논밭이 나왔다. 그리고 집도 여러 채였다. 김만구는 기중 큰 집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더니 주인을 찾아 무어라 얘기하니 잠시 후 서되는 됨직한 쌀을 내놓았다. 송윤호가 얼른 다가가 엽랑을 끌렀다. 그러자 김만구가 먼저 주인에게 엽전을 건네고 좁쌀 자루에 쌀을 받아 넣었다. 그러고는 다시 앞장을 서서 걷더니 작은 초가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쌀은 돈과 바꾸어 주되 밥은 지어줄 수 없다 합디다. 조금 산다 싶은 집은 인심이 사나운 법이지요."
"꼭 그렇기야 하겠소만 대체로 그렇긴 합디다."
"십 년을 길에서 보내보니 인심을 알겠습디다."
결국 김만구가 들어선 집에서 밥을 지어주어 두 사람이 배를 불렸다. 배가 부르니 길을 걷는 것도 수월하여 오정 때 양근에 닿았다.
"여기서는 길이 네 갈레요. 북으로는 포천으로 통하는 길이고 서쪽은 광나루요. 동북쪽은 홍천 길이고 남으로는 여주요, 아이를 데려갔다는 걸인이 다시 여주로 갔을 리는 없고 험한 홍천 길로 가지도 않았을 것이오. 그러면 포천 쪽과 한양 쪽이 남는데 험하기로 치면 포천 길이 홍천 길 보다 더 험하오. 어쨌든 여기 양근에서 걸인의 흔적을 찾은 다음에 결정하는 것이 좋을 듯싶소."
"고맙소이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차차 알아보고 움직이도록 하지요."
"자, 이건 남은 길양식이오. 나는 집에 다 왔으니 필요가 없소. 받으시오."
"아니요. 내게도 돈이 좀 있으니 걱정 마오."
"어허, 일단 받으시오. 허고 잘 곳이 없으면 우리 집으로 오시오. 우리 집은 양근섬 바로 앞이니 찾기가 쉬울게요."
김만구는 그 말을 남기고 시적시적 걸어가 버렸다. 송윤호는 당분간 이곳 양근에서 판덕이의 행적을 찾기로 했다. 그러자면 집집마다 약을 팔며 다녀야 할 것이었다.
한편, 송윤호와 헤어진 거칠이 일행은 그날 오정께에 이천에 닿았다. 그러나 장날이 아니었다. 지나는 사람에게 물으니 이천은 어제가 장날이었고 모레가 용인에 장이 선다고 하였다. 용인은 70리 길이라 가다가 날이 저물면 큰일이라 이천서 자고 내일 일찍 떠나기로 의논이 되었다. 그러자니 저녁이 될 때까지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집집마다 다니며 약을 팔아보기로 했다. 약을 팔아 본 경험이 없는 동이와 덕구에게도 요령을 가르칠 겸 거칠이가 앞장을 섰다.
"무슨 장사를 하던 우선 뱃심이 있어야 겠더라. 사든 안 사든 일단 내 할 말은 다 하고 봐야 한단 말이다. 모깃소리로 앵앵거려봐야 거들떠보지도 않으니까."
"알았수. 성님이 하는 걸 봐서 우리도 따라 할 테니 염려 놓으슈."
동이가 자신이 있다는 듯 덕구를 돌아보았다. 덕구는 오히려 동이를 보며 싱긋 웃었다.
"뱃심으로 말하면 나를 따를 사람이 어디 있수? 밥 동냥들 해 보셨수? 뱃심이 없으면 굶어 죽어야 하는 게 동냥질 아니오? 염체를 차리면 누가 밥을 주오?"
"덕구 말이 맞다. 나도 처음에는 쑥스럽기가 새색시 같더라만 우리 나으리께서 나서시는 데야 나 따위가 못할 일이 무언가 싶더라. 그러니 당장에 뱃심이 생기더구나."
"의원 나으리가 약을 파는 게 어때서 그러오?"
동이가 거칠이의 말을 걸고 나섰다. 거칠이가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그럴 분이 아니니 그렇지."
"그럼 의원이 아니란 말이요?"
"헛, 참. 지금은 의원을 하시나 그보다 훨씬 높으신 분이란 말이다."
"그럼 양반 세족(勢族)이란 말이요?"
"왜? 우리 나으리께서 양반이면 안 따르겠단 말이냐?"
"내가 양반 싫어하는 걸 성님도 아시지 않소?"
"우리 나으리께서는 반상을 가리시지 않는다. 이제껏 보고도 모르느냐?"
"나으리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걸 보았으니 따르는 것이지요. 헌데 양반이면서 어찌 천민 행세를 하신단 말이요?"
"사실은 나으리께서도 양반을 안 좋게 여기신다."
"같은 양반을 싫어 한단 말이요?"
"그런데는 그럴만한 연유가 있다. 차차 알게 될 것이니 그렇게만 알고들 있거라."
동이의 끝없는 물음을 끊으려고 거칠이는 인가를 향해 더 빨리 걸었다. 동리에 들어서자 거칠이는 서슴없이 첫 번째 초가집 앞에 섰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그동안 외워둔 말을 시작했다.
"주인장 계시오? 지나가던 약장수가 신통한 약을 팔고자 들렸소. 이 약은 천지환이요. 추운 날 찬 음식을 먹었거나 냉방에 잠이 들어 배탈이 난 사람에겐 직방으로 듣는 약이오. 탕제로 먹지 않아도 되는 환약이오. 만약 지금 배탈이 난 사람이 있거든 즉 방에 효험을 볼 것이오. 밤중에 급환을 당해도 의원에게 갈 수 없는 사람은 미리 사 두면 좋을 것이요. 값도 눅기 짝이 없소. 한 쌈에 단 돈 한 푼 이요."
그러자 신통하게도 방문이 열리더니 한 사내가 신을 거꾸로 끌고 삽짝을 열었다.
"방금 찬 음식에 탈 난 것을 고친다고 했소? 그렇다면 얼른 그 약을 주시요."
"여기 있소. 반드시 더운물과 함께 드시도록 하오. 그러면 효험이 빠를 것이요."
"잠시 기다리시오. 돈을 갖고 나올 터이니... 참 얼마라 하였소?"
"한 쌈에 단돈 한 푼이요."
"그럼, 두어 쌈, 아니 다섯 쌈을 주오."
주인 사내가 다시 들어가 돈을 갖고 나왔다.
"이 동리가 몇 집이나 되오?"
"저 안골까지 치면 얼추 쉰 가구는 되리다."
"고맙소. 병자가 빨리 쾌차하기 바라오."
그 집을 뒤로하고 돌아선 거칠이는 내친김에 차례차례 모든 집을 찾아갔다. 뒤를 따르는 동이와 덕구는 거칠이의 연설을 똑같이 외우기에 바빴다. 골 안쪽 마지막 집을 방문하고 나니 어느덧 저녁이었다.
"모두 얼마치나 판 거유?"
덕구가 궁금한 듯 물었다.
"글쎄, 서른 쌈은 판 것 같구나."
"서른 쌈이면 서른 푼 아니요? 그것 괜찮은 장사구려?"
"글쎄다. 이렇게만 판다면 굶고 다니진 않겠지."
"장마당이면 더 잘 팔릴 테니 어서 용인으로 갑시다."
동이도 신이 나는 목소리였다.
"밤길을 걷자는 말이냐? 싫다. 어느 집에 숙소를 정해 밥부터 해 먹고 보자."
"추운데 밤길은 나도 싫우."
"하하, 나도 그냥 해 본 소리요."
세 사람은 그날 그 동리의 한 집에서 밥을 지어먹고 머슴방에 끼어 잠을 잤다. 이튿날 아침밥을 먹자말자 길을 나선 일행은 용인으로 향했다. 모두들 걸음을 잘 걷는지라 70리를 걸었건만 아직 해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천에서 했던 것처럼 동리를 돌며 약을 팔아보기로 했다.
"이번엔 동이 네가 한번 해보려무나."
"난 담에 하겠수. 덕구 네가 해봐라."
"하라면 못 할 것 같수? 오면서 아제가 하던 말도 다 외웠는데.…"
"외우는 건 나도 다 외웠다. 다만 네가 뱃심이 있다니 그걸 보고 싶어 그런다."
"괜히 그러지 마시우. 뱃심이 없어 못 한다구하면 누가 놀릴까 봐 그러우?"
"어쨌든 네가 먼저 하는 걸 보구 나도 할 테다."
"좋수. 싫컷 보구 잘 따라나 하우."
덕구가 동이에게 뱃심을 보일 양으로 어떤 집 앞에 섰다. 그리고 목청을 돋우었다.
"주인장 계시오? 지나가던 약장수가 신통한 약을 팔고자 들렸소. 이 약은 천지환이요. 추운 날 찬 음식을 먹었거나 냉방에 잠이 들어 배탈이 난 사람에겐 직방으로 듣는 약이오. 탕제로 먹지 않아도 되는 환약이오. 만약 지금 배탈이 난 사람이 있거든 즉방에 효험을 볼 것이오. 밤중에 급환을 당해도 의원에게 갈 수 없는 사람은 미리 사 두면 좋을 것이요. 값도 눅기 짝이 없소. 한 쌈에 단 돈 한 푼 이요."
거칠이와 동이는 동시에 입을 딱 벌렸다. 그 집의 방문이 열리고 안 열리고는 둘째였다. 덕구가 거칠이가 말한 그대로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늘어놓았던 것이다. 게다가 방문까지 열려서 천지환 두 쌈을 팔았다.
"잘 봤수? 다음은 동이성 차례유."
덕구가 으스대며 동이의 등을 밀었다. 동이는 할 수없이 다음 집으로 다가갔다.
"주인장 계시오? 지나가던 약장수가 신통한 약을 팔고자 들렸소. 이 약은 천지환이요. 배 아플 때 먹으면 즉방으로 낫소이다. 이 약은 급할 때 먹기 좋은 환약이오. 밤중에 배가 아픈데 언제 의원을 찾고 탕제를 끓이겠소? 지금 아프지 않더라도 미리 사두면 안심이 될 것이오. 값도 엄청 눅어서 천지환 한 쌈에 한 푼만 받소. 자, 사시오."
"동이 성이 하는 말은 아제가 하는 말과 다르지 않소? 나처럼 똑같아야지 그게 뭐요?"
"시끄럽다. 그래도 해야 할 말은 다 들어 있지 않냐?"
동이가 성심껏 외쳤지만 끝내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거칠이는 동이의 등을 두드리며 웃었다.
"네 말이 맞다. 어쨌던 할 말은 다 한 것이다. 다른 집으로 또 가보자."
다른 집도 마찬가지였다. 동이와 덕구가 교대로 외쳤지만 그날은 전날 보다 못해서 열 푼어치 밖에 팔지 못했다. 세 사람은 서둘러 주막을 찾았다. 그러나 내일이 장날이어서 봉놋방은 장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할 수없이 다른 주막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장바닥과 가까운 주막은 예외가 없었다. 결국 읍치의 초입에 자리 잡은 주막으로 들었다. 다행히 봉놋방은 절절 끓었고 자리도 널널 했다. 한 사람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리짝을 벗어던진 덕구가 좁쌀을 털어 밥을 지었다. 주막의 바가지를 빌려 밥을 퍼 방으로 들여왔다. 점심을 먹지 못했던 세 사람이 맨밥을 먹기 시작했다. 헌데 아까부터 사발을 엎었다 재꼈다를 반복하던 사내가 세사람이 밥먹는 모습을 멀거니 보고 있었다. 분명 저녁밥을 먹지 못한 눈치였다. 신경이 쓰인 거칠이가 그 사람을 향해 말을 건넸다.
"저녁밥을 먹지 않았으면 밥은 넉넉하니 같이 먹읍시다."
거칠이의 말에 그 사내는 계면쩍은 얼굴을 보이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말씀은 고맙소. 나는 괜찮으니 어서들 드시오."
"허, 같이 먹어도 될 터인데 그러오?"
"아니요. 괜찮소."
그 사내는 그런대로 준수하게 생긴 얼굴에 허우대도 보통은 되었다. 돌아앉은 사내는 계속 빈 사발을 방바닥에 엎는 동작을 하고 있었다.
다음 날이다. 사방에서 몰려든 장꾼들이 소내(牛川) 옆 넓은 터에 몰려들었다. 갖가지 물건을 팔려는 사람과 사려는 사람들이 북적대니 요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용인장도 송파장과 마찬가지로 근래에 급속하게 번성하고 있었다. 용인이야말로 사통팔달의 요처요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인 데다 물산이 풍부한 곳이기 때문이다. 장바닥에 늘어놓은 물종만 하더라도 갓, 망건, 연초, 당목 모시부터 북어나 명란, 굴비 같은 어물류와 각종 곡식에 목기 빗, 솥, 막사발, 약재 등 없는 게 없을 정도였다. 거칠이 일행도 한 켠에 자리를 잡았다. 고리짝에서 환약을 한 움큼 꺼내 쥔 거칠이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에 여기들 보시오. 이 약은 천지환이라는 약이오. 체하거나 배탈, 설사에는 즉방으로 효험이 있는 약이요. 추운 날 찬 음식을 먹었거나 냉방에 잠이 들어 배탈이 난 사람에겐 직방으로 듣는 약이란 말이오. 탕제로 먹지 않아도 되는 환약이오. 만약 지금 배탈이 난 사람이 있거든 즉 방에 효험을 볼 것이요. 값도 헐하오. 한 쌈에 단돈 한 푼이요. 돈이 없어 의원에게 갈 수 없는 사람은 미리 사 두면 좋을 것이요. 종기가 나서 고생하는 병자를 위해 고약도 갖고 왔소. 자아, 환약은 한 푼, 고약은 열 푼이요. 사시오. 사."
큰 소리로 신명 나게 떠드는 거칠이의 목소리에 비해 약을 사자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자 덕구란 놈이 나서 어제 했던 말을 늘어놓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동이도 열이 나서 큰소리로 약의 효험에 대해 일장 연설을 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칠이는 물론이요 동이와 덕구의 실망이 컸다.
"이거 이상하구나. 사람들이 모이질 않네. 무슨 수가 없을까?"
"그러게나 말이우. 공짜로 준다고 소리를 질러 볼까?"
"그러다 정말로 달려들면 어쩌려고?"
"답답해서 해 본 소리를 정말로 달려 드오?"
제각기 한마디씩 했지만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약을 팔고 있는 옆자리에 누가 작은 짚방석을 턱 갖다 놓았다. 세 사람이 돌아보니 어제 봉놋방에서 함께 지낸 그 사내였다. 그 사내는 짚방석 위에다 사발을 엎어 놓더니 말없이 두 손을 활짝 펴서 머리 위로 쳐들었다. 그리고 빈손을 지나는 사람을 향해 좌우로 흔들었다. 아마도 빈손임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왼손은 주먹을 쥐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주먹 쥔 왼손에서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왼손 주먹에서 붉은 헝겊이 줄줄 딸려 나오는 것이다. 붉은 헝겊은 당기는 대로 계속 나왔다. 그러자 이번엔 검지를 왼손 아래에 넣더니 푸른색 헝겊을 주욱 당겨 내었다. 푸른 헝겊도 끝없이 나왔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내는 왼손을 활짝 폈다. 역시 빈손바닥이었다. 구경을 하던 몇 사람이 깜짝 놀란 듯 와아하는 함성을 질렀다. 거칠이와 동이, 덕구까지 약을 팔아야 하는 것도 잠시 잊었다.
이번에는 사내가 집개 손으로 허공을 휙 낚아채더니 무언가를 꿀꺽 삼켰다. 사내는 맛있는 것을 먹는 듯 입을 우물거렸다. 그러다 입에서 무언가를 또 당겨 내기 시작했다. 붉은색 실이었다. 실은 마치 거미 꽁무니에서 거미줄이 나오 듯 끝없이 이어져 나왔다. 사내는 두 손으로 실을 당기기 시작했다. 붉은색에 이어 푸른색 실이 이어졌다. 푸른색 실도 끝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사내가 입을 딱 벌렸다. 입안에는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틈에 구경꾼은 더욱 몰려들었다. 구경꾼들은 놀란 환호성을 질렀다. 환호성과 박수 소리에 이끌린 구경꾼은 점점 많아졌다. 사내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많은 구경꾼을 모은 것이다.
사내는 다시 빈손바닥을 허공에 흔들어 보였다. 이번엔 짚방석에 두었던 사발을 집어 들었다. 어제 봉놋방에서 엎었다 재꼈다를 거듭하던 그 사발이었다. 거칠이와 동이, 그리고 덕구는 궁금증으로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사내는 사람들을 향해 사발의 안팎을 이리저리 보여 주었다. 분명히 빈 사발임을 보여 준 것이다. 그런 다음 사발을 왼손 바닥에 놓더니 엽전 한 닢을 딸랑 소리가 나게 넣었다. 어느새 구름같이 모인 사람들은 호기심에 넋이 나갔다. 사내는 다시 한번 오른 손바닥을 보여주더니 사발에 뚜껑처럼 덮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짚방석에 탁 소리가 나게 엎었다. 수많은 눈동자가 사발에 쏠렸다. 사내는 엎어진 사발을 그대로 천천히 들어 올렸다. 한데, 분명 엽전 한 닢이 들어갔던 사발인데 방석 위에는 두 개의 엽전이 있었다. 다시 사람들이 와아하고 함성을 질렀다. 이번에는 바닥에 있던 그 두 개의 엽전이 사발 속으로 찰가당 하고 들어갔다. 다시 손바닥을 들어 보인 후 사발을 덮었다가 곧바로 짚방석에 탁 엎었다. 사내가 천천히 사발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어느새 엽전은 네 개가 되어 있었다. 또다시 두 배로 불어난 것이다. 사람들이 눈이 동그래져 침을 꼴깍 삼켰다.
"저것 보게. 저렇게 쉽게 돈을 벌다니? 한 닢이 금세 네 닢이 되었네 그려."
"그러게나 말일세. 저렇게 열 번만 하면 도대체 얼마가 생기는 건가?"
"화수분이 따로 없구먼."
"아이고 저 사발, 나나 줬으면...."
"도깨비 사발이로군."
입 가진 자는 모조리 한마디씩 하는데 정작 사내는 말이 없었다. 다시 사내가 사발을 들었다. 그때, 웬 왈짜 같은 놈이 구경꾼을 헤치고 앞으로 나왔다.
"이거 보시오. 당신이 가진 엽전이 수상하오. 엽전을 딱 붙여 뒀다가 속임수를 쓰는 것 같단 말이요."
왈짜의 말에 사내가 싱긋 웃더니 엽전을 들어 눈앞에 보여주었다.
"이거 믿을 수가 있나? 가만, 이 돈으로 해 보슈. 내 돈으로 말이요. 그럼 믿으리다. 어떻소 여러분들?"
왈짜는 둘러선 구경꾼들을 향해 대답을 끌어냈다. 사람들이 새로운 구경거리를 놓칠 리가 없었다. 와아 하는 함성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내는 할 수 없는 듯 왈짜의 돈을 받아 땡그랑하고 사발에 넣었다. 그리고는 손바닥을 펴 보여 준 다음 사발에 덮어 그대로 엎었다. 사발을 들자 당연히 두 개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신이나서 함성을 질렀고 사내는 똑같은 동작으로 단번에 네 닢의 동전을 만들었다.
"네 닢을 넣고 다시 해 보시오."
왈짜가 사내에게 이죽거리듯 을렀다. 그러자 이제껏 말이 없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만하겠소."
"한 번만 더 해보라니까 그러네. 누굴 핫바지로 보시나? 누굴 속이려고.…"
"마술이란 원래가 그런 것이오. 그냥 재미로 보아주었으면 하오."
"딱 한 번이요. 한 번만 더 해보라구."
구경꾼들은 당연히 사내가 또다시 돈을 만드는 것을 보고 싶어 했다. 마지 못한 사내가 네 닢의 엽전을 사발에 짜르릉 담았다. 그리고 조금 전과 같은 동작을 취한 다음 사발을 탁 엎었다. 사발을 들자 방석 위에는 배로 불어난 엽전 여덟 닢이 놓여 있었다. 그러자 지켜보던 왈짜가 그 돈을 덥석 집더니 돌아서 가려 하였다.
"이보시오, 그 돈을 다 가져가면 어떡하오?"
사내가 왈짜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그 왈짜가 휙 돌아섰다.
"내 돈 내가 가져가는데 웬 잔말이 많아?"
"어째서 그게 다 당신 돈이란 말이요? 당신은 한 푼을 내놓지 않았소?"
"이런 망할 작자를 봤나? 네가 빌려 간 내 집 소가 새끼를 낳으면 그 송아지가 네 꺼란 말이냐? 내 돈으로 불린 돈이 어째서 네 것이란 말이냐?"
"뭐라고? 이런 나뿐 놈 같으니라고."
"뭐야? 이놈이 아직 내가 누군지 모르는군. 얘들아, 뭐 하냐?"
왈짜가 구경꾼 쪽을 돌아보자말자 기다린 듯 깍다귀 같은 놈 서넛이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로 사내를 치기 시작하였다. 구경꾼들은 또 다른 구경거리에 신이 났다. 처음에는 제법 반격을 하던 사내가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매를 견디지 못하고 주져 앉았다. 그 광경에 지켜보든 동이가 분이 나서 싸움판에 뛰어들었다. 동이는 삼개 나루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 치는 숫법부터가 달랐다. 손과 발을 번개같이 움직여 깍다귀들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놈들은 바람처럼 구경꾼 사이로 빠져 달아나버렸다. 거칠이가 나설 것도 없는 싸움이었다. 동이는 사내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러나 사내는 어디를 맞았는지 꼼짝을 못했다. 그때였다.
"동이 성, 고리짝, 우리 고리짝이 없소."
덕구가 놀란 소리를 질렀다. 거칠이가 돌아보니 조금 전까지 있던 고리짝 세 짝이 모두 없어졌다. 고리짝이 없어진 줄도 모르고 사내의 마술 구경에 빠졌던 것이다. 고리짝에는 약뿐만 아니라 열 냥이 넘는 돈이 들어 있었다. 그러니 약도 돈도 다 잃은 셈이었다. 깜짝 놀란 거칠이가 구경꾼들을 헤치고 나섰다. 그러자 구경꾼 틈에서 열 살쯤 돼 보이는 아이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는 것이다.
"엉? 네가 보았느냐? 어디로 가더냐?"
거칠이가 어린애에게 급히 물었다.
"저 집 뒤로 돌아가던데요?"
"옳지, 알았다."
거칠이는 아이놈이 가리키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 뒤를 덕구가 바삐 좇았다. 집 뒤는 좁은 골목이었다. 거칠이는 골목길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좌우의 집들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러나 놈들이 어느 집으로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제, 여기 같소."
어느새 다가온 덕구가 거칠이의 소매를 당겼다.
"어디 말이냐?"
"저 집 댓돌에 신발짝이 흩어져 있지 않소? 급한 놈이 아니면 어떤 놈이 저따위로 짚신 짝을 팽개친단 말이요?"
"그렇겠다. 너는 여기 있거라. 내가 가 보마."
거칠이가 방 앞으로 가만히 다가가 동정을 살폈다. 그러자 안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빌어먹을, 방물이라도 든 줄 알았더니 죄다 환약일세. 에잉."
"그래도 열 냥이 어디냐? 쌀이 두 섬이 넘는다. 이만하면 횡재나 마찬가지다."
"마술하던 놈 돈 여덟 푼도 있잖수?"
"이놈아 내 돈 한 푼을 빼면 겨우 일곱 푼 아니냐?"
더 들을 것도 없었다. 화들짝 방문을 열며 들어선 거칠이가 먼저 잡힌 놈부터 벽에다 패대기를 쳐버렸다. 연이어 다음 놈도 뒷고대를 잡아 집어던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문을 벗어나려던 왈짜의 상투를 움켜 손바닥으로 낯짝을 후려쳤다. 그러자 단번에 코와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대낮에 화적질을 하다니 이놈들 맛 좀 보거라."
거칠이가 다시 손바닥을 번쩍 들었다.
"아이고 장사 나으리 살려 주시오. 먹은 것 토해 놓겠소. 제발 치지만 말아주오."
왈짜가 입이 터져 바람 새는 소리를 급히 내놓았다. 덕구가 재빨리 들어와 쏟아진 약들을 쓸어 모았다. 그리고 왈짜의 전대를 벗겨 풀어 헤쳤다.
"아제, 열한 냥이 다 있수."
"그럼 동이에게 이리로 오라구 해라. 고리짝과 약을 챙겨야지."
"그러지요. 그놈은 어쩌실 라우?"
"이놈은 버릇을 좀 고쳐 줄 테다. 이놈, 이번엔 주먹맛을 뵈주랴?"
거칠이가 왈짜의 상투를 움켜쥔 채 마당으로 나왔다.
"아이고, 이 코피 터진 것 좀 보시우. 여기다 또 때리겠단 말이유? 이만 놔주슈."
"내가 네놈들의 간악한 속을 모를 줄 아느냐? 급하면 죽는 소리를 하다가 풀려나면 뒤를 노리는 짓을 말이다. 허니 너는 이참에 아예 맞아 죽는 것이 좋겠다."
"원 벼락 맞을 소릴 다 하시우. 나도 사내 자식이요, 그딴 짓을 하지 않소. 제발 상투만이라도 놔 주오."
"상투를 놔 주면 쥐새끼같이 빠져나가려고? 그럴 바엔 차라리 상투는 빼 두고 가거라."
거칠이가 왈짜의 상투를 번쩍 쳐들었다. 천하 장사인 거칠이가 상투를 들었으니 왈짜는 당연히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꼴이 되었다. 급해진 왈짜가 두 손으로 거칠이의 손을 풀려고 버둥거렸다.
"아악 이러다 내 모가지까지 뽑히겠소. 제발 놔 주오. 성님으로 모시겠소."
"너 같은 동생을 두어 무엇하게?"
"이래도 쓸모가 있는 몸이요. 성님의 약은 내가 나서서 다 팔아 드리겠수."
"일 없다. 약은 천천히 팔아도 된다."
"그럼 어떡하면 나를 놔 주겠소?"
"그냥 놔 주마. 내 뒤를 노리든 말건 그것도 네 맘대로 해라. 대신 두 번의 용서는 없을 것이다."
"아이고 성님 고맙수."
거칠이는 잡았던 왈짜의 상투를 놓아 주었다. 왈짜는 상투를 부여잡고 한동안 쩔쩔매더니 거칠이에게 넙죽 큰 절을 하였다.
"동생으로 생각하건 말건 나는 성님 동생 할라우."
"헛, 그놈, 이러면 내가 미안해 지지 않느냐?"
"그러게 미안할 짓을 왜 하셨수?"
"허허, 번죽을 보니 그동안 절간에 새우젓께나 팔아먹었겠구나."
"새우젓 뿐이우? 낙지에 개고기까지 끼워 팔았수."
"허허, 비위를 보니 장돌림은 해먹겠다."
동이와 덕구가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덕구가 고리짝을 가지러 방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개구리처럼 뻗었던 깍다귀 둘이 서로 부축을 하며 방을 나서고 있었다.
"이놈들아, 성님께 절 올리거라."
왈짜의 호통에 두 깍다귀가 엎어지 듯 거칠에게 절을 하였다.
"헛, 나까지 화적패를 만들려 하는구나."
"화적 패라니요? 큰일 날 말씀 마오. 우린 그저 장마당에서 장세나 뜯어먹는 깍다귀들이요."
"장세로 남의 고리짝을 통으로 들어먹는단 말이냐?"
"여기서야 날 모르는 장사꾼 없고 관아엔 내가 모르는 아전이 없수. 그러니 장사를 하려면 먼저 내게 알려야 하는 걸 모르셨수?"
"별 시답잖은 소리를 다 듣는구나. 내 물건 내가 파는데 왜 네놈에게 헌신을 한단 말이냐?"
"그럼 나는 무얼 먹고 살란 말이요? 저승엘 잡혀가도 차사의 신발차는 주는 법이유."
"네놈이 날 위해 얼마나 뛰어다녔기에 신발이 닳았단 말이냐?"
"아, 먼저 받고 나중에라도 뛸 수있는 것 아니우?"
"나는 싫다. 네가 먼저 뛰고 나중에 받거라."
"성님이 그럴 것 같아서 고리짝부터 잡았지요."
"장세로 약이 든 고리짝 셋을 먹는단 말이냐?"
"약인 걸 진작 알았으면 뭣하러 가져 갔겠수? 길 옆에 쌓였기에 황하 장수의 것인가 했지요. 그래서 마술쟁이에게 시비를 걸어 그쪽으로 눈들을 돌려 설랑.…"
"가만, 마술쟁이, 그 사람은 아직 일어나지 못 하더냐?"
그제서야 뭇매를 맞던 사내가 생각난 거칠이가 동이를 돌아보았다.
"어딜 잘못 맞은 모양입디다. 꼼짝을 못하우."
"저런, 급소를 맞은 모양이구나. 봉놋방에라도 데려다 눕히는 게 좋겠다."
거칠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왈짜가 나섰다.
"그럴 것 없수. 우리 아이들 때문에 그렇게 되었으니 이 집에 데려다 눕힙시다. 보잘 것 없는 집이나 이 집은 내 집이요."
"그렇다면 먼 주막 보다 여기가 낫겠다. 가서 내가 업고 오마. 너는 덕구와 함께 고리짝이나 챙겨 두어라."
밖으로 나간 거칠이가 골목을 나와 장마당으로 가보니 마술하던 사내가 여전히 자신의 짚방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내게 업히시오?"
사내에게 등을 돌려 대며 거칠이 말했다.
"괜찮소. 좀 있으면 낫겠지요."
"아직 바람이 차오. 길에서 이럴 것 없이 구들에 잠시 누워 쉬시오."
싫다는 사내를 거칠이가 애써 업었다. 그리고 왈짜의 집으로 데려가 눕혔다.
"나무 값은 내가 낼 테니 구들이나 뜨끈하게 덥혀라."
거칠이가 왈짜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왈짜가 힝 하고 웃었다.
"원 벼락 맞을 소릴 다 하우. 나무가 없으면 울타리라도 뜯어 땔 테니 걱정 마시우."
왈짜가 졸개들을 시켜 아궁이에 불을 지피더니 화해를 한답시고 장마당으로 나가 술이며 장떡을 사와 늘어놓았다.
"다시 한 번 성님께 용서를 빌겠수."
막걸리 사발을 들이밀며 왈짜가 거칠이에게 고개를 숙였다.
"대낮에 무슨 술이냐? 허고, 그 소리는 저 사람에게나 해라."
손사래를 치며 거칠이가 아랫목에 누운 마술쟁이를 가리켰다.
"아따, 목구멍에 말뚝이 박혔수? 대낮엔 술도 못 마시게? 그러지 말고 한 잔만 받으시우. 참 나는 딱쇠라고 하우. 성님 성함은 어찌 되시우?"
"성함이랄 것도 없다. 그냥 거칠이라고 한다."
"내 어쩐지.... 성님 손사래가 거칠긴 합디다."
"금년에 몇이냐?"
"나이 말이우? 스물셋이지요."
"가만, 스물셋이면 동이와 같은 나이구나. 동이 너도 금년에 스물셋 아니냐?"
"나이만 같으면 무엇 하우. 저놈 때문에 팔아야 할 약은 마수걸이도 못 했는데."
동이가 약이 든 고리짝을 짊어지고 나사며 딱쇠라는 왈짜를 흘겨보았다.
"그래서? 약을 팔러 나가려는 거냐?"
"파장이 되려면 아직 멀었으니 나가 볼 밖에요. 덕구와 다녀올 테니 성님은 그냥 계슈."
"가만있거라. 그렇다면 같이 가자꾸나."
거칠이가 일어서 나갈 조짐을 보이자 딱쇠란 놈이 벌떡 일어나 동이와 덕구의 앞을 막았다.
"나가더라도 기왕 마련한 화해술은 한잔하고 나가야지. 사람이 어찌 그리 꽁한가?"
"뭐라? 꽁하다고? 네놈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쉰 쌈은 팔았을게다."
동이가 딱쇠의 아래위를 훑으며 눈을 부릅떴다.
"나이가 같다고 호 놈을 하는 네놈이 꽁하지 안 단 말이냐?"
"얼씨구, 이놈이 아직 정신을 덜 차렸구나."
동이가 떡쇠의 멱살을 잡자 떡쇠도 지고 싶은 마음이 없는지 얼굴을 붉히며 동이의 멱살을 맞잡았다.
"그만들 해라. 멱살을 놓고 말로 하란 말이다."
거칠이가 두 사람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딱쇠와 동이의 입에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아악 성님, 애매한 나는 왜 잡소? 이거 놓아주오. 팔 부러지겠소."
동이가 엄살을 떨며 소리쳤다.
"나부터 놔 주오. 아이고. 나 죽네."
딱쇠는 단번에 열이 식어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동이도 슬그머니 고리짝을 내려놓았다.
"딱쇠가 이렇듯 사화를 하는 마당에 잘나지도 못한 내가 술잔을 마다한 잘못이 크다. 허니 이제라도 서로 화해를 하고 나서 우리 갈 길을 가자꾸나."
딱쇠가 재빨리 술잔을 들어 거칠에게 권했다. 거칠이는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내게는 안 권하는 거냐?"
동이가 딱쇠에게 눈을 부라렸다.
"아, 그놈, 나이도 같은 놈이 형님 대접을 받으려는 것 좀 보게?"
딱쇠도 지지 않고 맞받았다.
"그러다 또 맞잡이 하겠구나. 서로에게 잔을 채우면 될 것 아니냐?"
"성님 말씀이 옳소. 딱쇠랬지? 나는 동이다. 내 술 먼저 받거라."
"힝, 내가 산 술로 네가 선심을 쓰는구나. 좋다 받으마."
둘이 수작을 나누며 술잔을 주고받으니 거칠이와 덕구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구들에 드러누웠던 마술쟁이 사내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매 맞고 누워 있는 나는 아예 안중에 없단 말이요?"
거칠이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돌아보자 그 사내는 낑낑대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애쓰고 있었다. 덕구가 얼른 그 사내를 부축해 앉혔다.
"일어나도 괜찮겠소?"
덕구가 사내에게 물었다.
"그까짓 솜 주먹에 몇 대 맞은 걸로 언제까지 누워 있겠나?"
"뭐요? 그럼 이제까지 꾀병이었단 말이요?"
덕구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사내를 멀뚱히 들여다보았다.
"누가 꾀병 이랬나? 사흘을 내리 굶어서 시시한 놈들에게 매를 맞았다는 말이지."
사내의 말에 모두들 눈이 커졌다.
"어째서 사흘 씩이나 굶었단 말이요?"
"누군 굶고 싶어 굶었겠나? 돈이 없으니 굶을밖에...."
"마술 할 때 그 돈은 뭐요?"
"그 종잣돈마저 써 버리면 마술은 어떻게 하나?"
"헛, 그럼 내가 갖고 간 그 돈이 마술에 쓰이는 종잣돈이란 말이요?"
딱쇠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네 놈 같은 어거지꾼은 처음 보았다. 스물셋이면 나보다 한참 어린놈이 남의 바가지를 깨다니.... 내가 굶지만 않았어도 네놈은 성치 못했을 것이다."
"환갑 늙은이 같은 소리 말고 장떡이라도 좀 드시우. 그런 담에 한판 붙어 봅시다."
"그러자꾸나. 우선 뭣 좀 먹어야겠다. 체면을 차리려다 이 꼴이 났으니 말이다."
"가만, 그렇다면 아예 밥이라도 지어먹읍시다. 이걸루야 어디 허기나 면하겠수?"
딱쇠가 방 밖의 졸개를 불러 밥을 지으라 이른 한편 그 사내에게도 막걸리 사발을 안겼다. 사내는 두 말없이 잔을 받았다.
"누워서 들어보니 모두들 화해를 한 것 같던데 그렇다면 나도 사내니 네게 유감을 갖지 않으마. 내 이름은 석수다. 나이는 스물아홉이고."
"그럼 나보다 여섯 살 이나 더 먹었단 말이요?"
아차하면 석수까지도 성님이라 불러야 할 판이라 딱쇠가 못마땅한 눈길로 사내를 흘겨보았다.
"그것참, 딱쇠는 동이와 동갑이라더니 당신은 또 나와 동갑이구려."
거칠의 말에 석수는 계면쩍은 얼굴로 양팔을 들었다 놓으며 풀석 웃었다.
"어제 그쪽이 저녁밥을 권할 때 염치 불고하고 먹었으면 이 꼴은 면했을 걸 그랬소."
"어쩐지 시장해 보입디다."
두 사람 말에 딱쇠가 다시 끼어들었다.
"동이와 나는 너나들이를 하는데 성님들은 동갑끼리 어찌 서로 공대를 한단 말이요?"
"딱쇠 말이 맞는 듯 하오. 우리 서로 말을 놓는 것이 어떻겠소?"
"그럴까? 좋네, 자네도 말을 놓게나."
딱쇠가 너스레를 풀며 권하는 술과 밥을 먹은 거칠이 일행이 다시 약을 팔기 위해 각자 고리짝을 짊어졌다. 그러자 석수도 같이 따라 일어나섰다.
"아니 몸도 시원치 않은 사람이 어딜 나서나? 밥값이 없으면 몇 끼는 우리가 먹여 줄 테니 뜨끈한 구들에 몸이나 지지게."
"밥을 먹었더니 거뜬하네. 그리고 저 딱쇠란 놈이 남은 돈을 모조리 쓸어 갔으니 몇 푼이라도 벌어야지."
"거참, 그깟 돈 일곱 푼을 먹고 화적 소리 듣게 생겼구려. 그 돈 여기 있소."
딱쇠가 발끈해서 괴춤에서 일곱 푼을 꺼내어 석수 앞에 내밀었다.
"일 없다. 조금 전에 먹은 밥값으로 쳐라. 나는 또 벌면 된다."
"나도 일 없소. 아니면 이 돈을 사발에다 넣고 열 배로 새끼를 치시우. 그럼 그 돈은 받을 테니.…"
"저런 도적 놈을 봤나?"
둘이서 다투는 모습에 거칠이가 껄껄 웃으며 방문을 나서니 동이와 덕구도 따라나섰다. 그런데 뒤따르던 덕구가 짚신을 꿰려는 거칠이의 소매를 당겼다.
"아제, 우리가 아무리 악을 써도 모이지 않던 사람들이 저 사람의 마술을 보려고 구름처럼 모이지 않았소? 그러니, 저 사람이 마술로 구경꾼을 모으면 그때 우리가 약을 팔면 어떻겠수?"
"응?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미쳐 거칠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동이가 먼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저 사람은 우리 좋은 일만 시키고 뭐란 말이냐?"
"구경 값으로 던져주는 돈이 기껏 얼마나 되겠수? 차라리 그 돈은 약을 팔아서 주면 서로가 좋지 않겠수?"
거칠이 생각에도 그럴듯한 말이라 가던 걸음을 멈추고 석수를 기다렸다.
"이보게 석수, 이 아이들 말로는 자네와 한패가 되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고 하네. 자네는 마술로 구경꾼을 끌어모으고 우리는 약을 판단 말일세."
석수가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듯한 말일세. 일단 구경꾼이 있어야 무슨 장사든 할 수 있을 테니까."
"어떤가? 우리와 함께 하려나?"
"나쁠 거야 없지. 그렇게 해보세. 혼자 다니기도 질력이 나던 참이니까."
장마당으로 나선 일행이 다시 자리를 잡아 고리짝에서 약을 꺼냈다. 먼저 석수가 나와 두 팔을 들어 손바닥을 활짝 펼쳐 보였다.
"어? 아까 도깨비 사발로 엽전을 만들던 그 사람이로군."
"그렇군. 이번엔 무엇을 보여 주려나?"
맞은편의 연초 장수와 삼베 장수가 호기심에 일 손을 놓고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슬금슬금 모여들기 시작하자 석수는 허릿춤에서 작은 보자기 하나를 꺼냈다. 꺼낸 보자기를 둘러선 사람들에게 펼쳐 보인 다음 갑자기 왼손으로 허공에서 무언가를 확 낚아챘다. 낚아 챈 주먹을 또다시 여러 사람들에게 보인 다음 그 주먹 위에 보자기를 덮었다. 사람들은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여 보자기에 모든 눈길이 쏠렸다. 석수는 보자기로 덮은 주먹을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보자기를 휙 벗겼다. 그러나 보자기 밑에는 여전히 주먹 쥔 왼손뿐이었다. 무언가를 잔뜩 기대했던 사람들은 실망과 원망이 섞인 탄식이 쏟아졌다.
"에이.... 저게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그러게나 말일세. 이젠 밑천이 떨어진 모양일세."
"누굴 놀리나? 뭐야?"
그때 석수가 빙긋이 웃으며 주먹 쥔 손을 서서히 펼쳤다. 그러자 손바닥 위에는 누런 계란이 놓여 있었다.
"엇, 닭알 일세? 저게 어디서 나왔지?"
"분명 아까는 빈손이었는데?"
"저 보자기에 싸뒀던 건 아닐까?"
사람들이 제마다 떠드는 사이 석수는 다시 그 보자기를 달걀이 있는 왼손 위에 덮었다. 그리고 번개같이 그 보자기를 홱 쳐들었다.
"엇, 새다. 알에서 새가 나왔어."
"뭐? 저, 정말 새로구나."
어느새 달걀이 새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석수가 그 새를 공중에 휙 던지자 새는 날개를 펼쳐 호르륵 날아가 버렸다. 사람들은 발을 구르며 환호했다.
"놀랍구먼, 없던 닭알이 생기질 않나 닭알이 새가 되어 날아가질 않나. 이거야 원...."
"보자기에 숨겨 뒀던게 틀림 없다니까...."
"어, 그러고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 소리를 석수가 들었다. 석수는 성큼 다가가 보자기를 그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받은 사람이 보자기를 이리 저리 살피다가 아예 두 손으로 주무르고 싹싹 비벼대기 시작했다. 그래도 별 이상한 것이 없자 무료한 얼굴로 석수에게 보자기를 돌려주었다. 이에, 석수는 아까처럼 왼손으로 허공을 움켜쥐고 그 위에 보자기를 덮었다 휙 쳐들었다. 역시 계란이 놓여 있었다. 이미 예상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가볍게 웅성거렸다.
"이제 보자기를 덮었다 재끼면 새가 되어 날아갈 테지.…"
"그렇겠지. 조금 전에도 그랬잖나?"
그 소리가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석수가 이번엔 그냥 계란을 공중에 휙 던져 올렸다.
"에구, 저거, 떨어지면... 엇?"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순간, 달걀은 어느새 새로 변해 날았던 것이다.
"에그, 닭알이 공중에서 새로 변해버렸네그려."
"그것 참 살다보니 별 일을 다 보는군."
사람들은 처음 보는 신기한 마술에 침을 삼키며 석수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석수는 두 손바닥을 펼치며 구경꾼들에게 한발 다가갔다. 그리고 큰소리로 말을 했다.
"제 마술이 신기하다고 하시나 더 신기하고 영험한 것이 있으니 여러분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잠시 들어보신 후에 다시 제가 하는 마술을 보시기 바라오."
석수가 말을 마치며 뒤로 물러나기도 전에 약봉지를 쥔 거칠이가 선뜻 나섰다.
"이 약으로 말씀드리면 체했거나 찬 음식에 배탈이 났을 때 먹는 천지환이란 약이오. 급체나 설사엔 직방으로 낫는 약이오. 한 번 생각들을 해 보시요. 한밤중에 어린 자식이 배가 아파 떼굴떼굴 구를 때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요? 의원을 데리러 가는 것이오? 데리러 간다고 의원이 빨리나 오오? 동리마다 의원이 있기나 하오? 있다 칩시다. 허면 의원이 한두 푼에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있소? 설혹 의원을 불렀다고 칩시다. 진맥을 마친 의원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첩약을 지어주면 그것을 가지고 또 집으로 돌아와 약탕관에 약을 넣고 끌여야지요? 또 그것을 삼베 주머니에 넣어 짜고 어쩌고 해야 하지요? 아, 그러다 어느 천년에 약을 먹여 보겠소? 아이는 아파 숨이 넘어가는데 언제 그 짓을 하고 있느냔 말이요? 또, 늙은 부모님께서 저녁을 드신 것이 탈이 나서 배를 움켜 쥐시는데 자식인 여러분이 해 드릴 수 있는 게 무어요? 마음만 바빴지 할 일이 없지 않소? 자, 바로 그럴 때 여러분을 단번에 효자로 만들어 주는 약이 바로 이 천지환이란 약이오. 약탕관에 넣어 끓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곧바로 입에 털어 넣기만 하면 되오이다. 그러면 단번에 효험을 볼 것이요. 이렇게 좋은 약이 한쌈에 단돈 한 푼이라면 믿어지오? 자, 오늘은 더도 말고 딱 백 봉지만 팔 것이요."
아침에는 약의 효험만을 말하던 거칠이가 이번엔 어린아이와 늙은 부모님을 끌어들여 일장 연설을 했다. 그리고 의원의 행태를 비꼬아 환약의 잇점을 알린 것이다. 게다가 팔 수량까지 딱 정해버리니 그것이 다 팔려버리면 좋은 아비나 착한 효자가 될 기회를 영영 놓칠까 겁을 낸 사람들이 아우성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여기, 나부터 주오."
"밀지 마라, 내가 먼저다."
"아니요. 내가 먼저요."
"자 내 돈부터 빨리 받으시오."
거칠이가 미쳐 돈과 약을 주고받지 못하자 동이와 덕구가 재빨리 나서고 석수도 얼른 약을 움켜쥐었다.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내 돈 쓰기가 이렇게 힘든 줄은 여태 몰랐다>고 했을까.
"자, 오늘 팔 약은 다 팔았소."
거칠이가 빈손을 들어 보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동이와 덕구도 머리를 흔들었다.
"약이 남아 있지 않단 말이요? 아니면 있어도 안 판단 말이요?"
"어째서 팔지 않는단 말이요?"
"그 약이 꼭 필요한 사람이오. 제발 두어 봉지만 파시오."
미쳐 약을 사지 못한 사람들이 거칠이에게 매달렸다.
"좋소, 스무 봉지만 더 팔겠소. 오늘은 이것이 진짜 마지막이요."
덕구가 한 움큼의 약을 가져오자 너도나도 엽전을 내밀기에 바빴다. 그 사이에 석수가 거칠이의 소매를 끌고 나가더니 둘이서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그런 후 석수는 어디론가 갔다가 잠시 후에 나타났다. 석수가 다시 구경꾼들 앞에 섰다.
"자, 약을 사신 여러분을 위한 오늘의 마지막 마술 올시다. 제 두 손을 봐 주시오. 빈손이지요? 분명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지요?"
석수는 구경꾼들의 대답을 유도했다. 그러자 구경꾼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그렇소."
"맞소."
빈손을 맞잡은 석수가 갑자기 하늘을 향해 물을 뿌리 듯 무엇을 확 뿌렸다. 그러자 하늘에서 작고 흰 것이 마구 떨어졌다. 엉겁결에 그것을 받거나 땅에서 주운 사람들이 와아 하고 함성을 질렀다. 토막 난 좁쌀 엿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엿을 줍기에 바빴다. 석수는 다시 한 번 공중에다 빈손을 들어 올렸다. 다시 엿 토막이 마구 떨어져 내렸다.
"여러분, 이로써 오늘 마술은 끝이요."
놀란 것은 구경꾼 만이 아니었다. 동이와 덕구는 물론 아까부터 뒤에서 보고 있던 딱쇠와 그의 졸개들이 모두 입이 벌어져 있었다. 조금 전 석수의 설명을 들은 거칠이만 예외였을 뿐이었다.
"자, 성님들 내 집으로 갑시다. 주막 보다야 낫지 않겠수?"
딱쇠가 거칠이와 석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네 신세를 또 지란 말이냐?"
"그럼 낮도 밤도 아닌 이 시각에 주막 봉로에 들겠수?"
그도 옳은 말이라 모두들 고리짝을 챙겨 딱쇠의 집으로 향했다.
"어째서 약을 다 팔지 않으셨수?"
방에 들어서자말자 딱쇠가 거칠이에게 물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
"아니? 무슨 장사든 한시바삐 팔려야 돈이 되는 것 아니요? 헌데 성님은 무슨 배짱으로 약을 다 팔지 않겠단 말이요?"
"약을 다 팔면 그 돈으로 술이나 마시자는 게냐? 우리는 아직 가야 할 장마당이 많이 남았느니라."
"아니? 그럼 장마당 구경하려고 약장수로 나섰단 말이요?"
"헛, 그놈, 그게 아니라 우리는 장사의 묘리를 익히려고 나왔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람을 찾으러 다니는 길이다."
"뭐요? 애초부터 장삿꾼이 아니란 말요? 그렇다면 찾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요?"
"사당패에 알아볼 사람이 있느니라."
"사당패요? 사당패라면 아직 움직일 철이 아니질 않소?"
"그거야 알지. 이제 곧 날이 풀릴 테니 그때까지 약을 팔면서 다닐 작정이다."
"오라, 그때까지 팔 약이니 다 팔려도 곤란하단 말이구려?"
"옳게 봤다."
"헌데 찾는 이가 누구요? 성님 색시요?"
딱쇠의 계속된 물음에 대답을 못한 거칠이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생겼다. 그리고 입은 굳게 다물어지고 눈길이 허공의 어느 곳에 딱 멎었다. 딱쇠는 거칠이의 표정에 겁이 더럭 나서 얼른 입을 닫고 외면을 하였다. 그런데 돌연 거칠이가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다. 이름은 언년이라 한다. 혹여 이곳을 지나는 사당패에서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거든 너는 어디 패인지만 알아내거라. 내 언젠가 네게 다시 들리마."
"성님께 이런 소리 해도 될지 모르겠소만.... 사당패를 따라갔다면 찾지 마시오. 돌아와도 여염 살림은 살지 못하오. 내가 그것을 이미 겪어 본 바요."
"뭐라? 네가 겪다니?"
"그렇소. 우리 아비 살았을 때 나를 장가를 들였지요. 내가 열여덟 살 때지요. 헌데 이 년이 사당패를 따라가 버렸소. 어쩌다 찾긴 했소만 금세 다시 도망을 쳐 버렸소."
"언년이는 경우가 다르다. 사당패가 강제로 업어갔으니까.... 허나, 찾아서 다시 살자는 것보다 어쩌면 그 사람을 고향에 꼭 데려다주고 싶어 그런다. 죽은 장인을 생각해도 그렇지만 주인 나으리와 마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그 길 밖에 없느니라. 그 사람 역시 마님과 아기씨가 있는 고향으로 얼마나 돌아가고 싶겠느냐?"
"알았소. 내 힘써 알아보리다. 그리고 그들이 간 곳이나 겨울을 나는 곳을 알아 두지요."
"이것도 너와 나의 인연이라 생각한다면 꼭 그렇게 해주기 바란다."
두 사람의 대화를 동이와 덕구는 물론 석수도 말없이 듣고 있을 뿐이었다.
이튿날이었다. 딱쇠가 제 딴엔 대접을 한답시고 아침밥을 걸게 차려서 모두들 배가 부르도록 먹었다. 거칠이 일행이 길을 나서자 딱쇠가 섭섭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성님들 잘 가슈. 동이 너도 잘 가거라. 덕구도...."
"잘 있거라.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러길 빌겠수."
딱쇠와 작별을 한 거칠이 일행은 수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수원은 용인에서 불과 45리에 불과한 거리라 노량으로 걸어도 해 떨어지기 전에 닿고도 남을 것이었다. 가는 길도 비교적 평탄해서 걷기에도 좋았다. 동이와 덕구가 앞장을 서고 거칠이와 석수가 뒤를 따랐다. 용인 지경을 벗어날 무렵이었다.
"딱쇠란 놈이 그만하면 꽤나 무던한 편이지?"
석수가 문득 입을 땠다.
"그런 것 같더군. 악소 패와 어울리긴 어쩐지 아까운 녀석이란 생각도 들고.…"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네."
"헌데 석수 자네에게 어제부터 궁금한 게 있었네."
"내게 말인가? 뭐가 궁금하단 말인가?"
"음, 다름이 아닐세. 어제 자네가 사흘을 굶었다지 않았나? 헌데 가만히 보니 돈이 떨어져 굶은 것 같지는 않더구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굶었단 말인가?"
거칠이의 물음에 석수는 잠시 망서리다 결국 입을 열었다.
"그 얘기를 듣고 싶은가? 좋네. 말하지. 내 고향은 안성일세. 하지만 열네 살 때부터 만포라는 곳에서 살았었네. 저 북쪽 압록강 가에 있는 마을이지. 반 마장 가량의 강을 건너면 곧바로 되 땅이니 조선의 끝인 셈이지."
"안성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네만 만포라는 곳은 몇 리나 되나?"
"글쎄 모르긴 해도 천오백 리는 넘을 걸세. 가는 데만 일 삭은 걸리니까."
"그럼 그 먼 곳엘 어린 나이에 왜 갔단 말인가? 집안이 이사를 간 건가?"
"그러니 내 얘기를 들어 보게나."
"음, 그러지."
석수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얘기를 하기 전에 우리 주인집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네. 그래야 내가 왜 그 먼 곳으로 갔었는지 알 수 있으니까 말일세. 우리 주인은 역관을 하다가 본향인 안성으로 물러난 사람일세. 그러나 그의 아들은 한양에 남아 역시 역관을 하고 있었지. 헌데 후에 안 일이지만 아들인 역관이 지난 정미년에 사절단을 따라 청나라로 갔었다네. 15년 전이지."
"자네 주인이 아니고 그 아들이 말인가?"
"그렇지. 우리 주인이 늙어서 역관 직을 아들에게 넘겼을 때지."
"그래서? 계속하게나."
"그때 청나라의 무슨 황제가 당시 내 나이와 같은 14살이 되자 정식으로 황제가 되었다더군. 그래서 조선에서는 그걸 경하하는 사신을 보냈다고 하더군. 아무튼 주인의 아들은 그 사절단을 따라갔다가 무사히 돌아왔다네. 헌데 어찌 된 셈인지 돌아오자말자 갑자기 금부에 잡혀들어가더니 곤장을 맞고 귀양을 가게 되었네."
"아니 무슨 일로 말인가?"
"나야 어린 나이에 알 리가 있나? 더구나 한양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헌데 말일세, 귀양이 결정되자 우리 주인 나으리가 나를 한양엘 데려가더니 귀양가는 아들을 따라가서 수발을 들라는 것이었네. 주인의 지엄한 분부를 어쩌겠나? 따를 수밖에...."
"아니 자네 아비나 어미는 무얼 하고 어린 자네란 말인가?"
"내겐 애초부터 아비가 없었네. 그러니 나는 아비가 누군지는 모르고 컸네. 그런데 한양으로 가기 전날 노비인 어미가 내게 그러더군. 나으리를 극진히 모시라고.…"
"알만 하네."
"귀양지로 가는 길에 고생한 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네. 여하튼 만포에 닿고 보니 겨울이더군. 그곳은 안성과 달리 정말 춥더구만. 여름 홑적삼만 입은 내가 얼어 죽지 않은 것은 순전히 운이었네. 어느 날 강가에 물을 길러 갔다가 얼음판에 넘어진 말을 일으키려 애쓰는 사람을 보았네. 그래서 나도 다가가 말 등에 실린 짐을 함께 풀어 내렸지. 그런 다음 말갈기를 들어 말을 세우는데 힘을 보탰네. 말이 일어서자 짐을 다시 실은 그 사람이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갑자기 자기가 걸쳤던 털옷을 벗어 주더군. 그제야 그 사람을 자세히 보았지. 그러고 보니 옷차림이나 말씨가 조선 사람 같지 않더군. 어쨌든 추워 죽을 지경이라 옷을 받았네. 그 뒤에도 그 사람을 종종 보았었네. 사람들 말로는 강을 넘나들며 조선에서 털 가죽이나 인삼을 사 가는 청국 사람이라더군."
"북쪽은 춥다고들 하던데 도대체 얼마나 춥던가?"
"털 가죽 옷을 입고도 불을 쬐고 싶을 정도였다면 알쪼 아닌가? 동짓달인 그때 이미 압록강은 말이 백 마리라도 건널 만큼 얼음이 두껍게 얼었으니까."
"음, 그 동네는 추위도 일찍 닥치나 보군."
"8월 중순이면 서리가 내린다네."
"참, 얘기가 끊겼군, 입을 닫고 있을 테니 계속하게."
석수가 먼 하늘을 올려보다가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그러는 사이 뒤에서 들려오는 석수의 얘기가 궁금한 동이와 덕구의 걸음걸이가 늘어졌다. 석수의 다음 얘기가 궁금했던 것이다.
"만포에서 보낸 첫해의 추위는 아직 잊지 못하네. 강이 하도 두껍게 얼어 얼음을 깨지 못해 물을 길어다 먹지 못 했으니까."
"아니, 그럼 물을 안 먹고살았단 말인가?"
"물 안 먹고 사람이 어찌 사나? 얼음을 녹여 먹었지."
"그렇군. 아차 내가 또 쓸데없는 말로 자네 말을 막았군."
"추위도 추위지만 나으리의 병이 문제였지. 한양에서 맞은 곤장의 장독이 그때까지 낫지 않았거든. 약도 없지 거기다 드시는 것도 부실하고 거동을 못하니 늘 속병이 떠나질 않았네. 그때 자네의 환약이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여하튼 그 첫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나으리가 세상을 떠났네. 숨을 거두시기 며칠 전에 날 붙잡고 얘기를 하더군. 내가 네 아비라고.... 그리고 귀양을 오게 된 내력을 말해 주더구만. 당시 어렸던 내가 그 사연을 다 알아들은 건 아니지만 대략은 알아들었네. 사신의 통변으로 따라갔던 나으리가 청나라 엽전을 수입해 왔는데 그 수량을 속여 착복했다는 상소 때문이라더군. 물론 엽전을 수입한 것은 조정에서 시킨 것이니 죄 될 것이 없으나 몰래 착복을 했다는 대목이 문제였지. 알고 보니 그 상소는 장철기란 자와 장현이란 자가 올렸다네. 장철기는 당시에 안성에다 전장을 마련하여 낙향한지 몇 년 안된 놈인데 그의 당숙이 조정의 권력자인 장현이라더군. 당숙을 믿고 장철기란 놈이 저희 패가 들여온 엽전의 절반을 떼먹고 나으리께 뒤집어 씌운 걸세. 여하튼 그날 나으리는 내게 종에서 풀어준다는 봉서를 하나 주더구먼. 그리고 안성에 가지 말고 만포에서 양민으로 뿌리를 내리라고 당부를 하시더군."
"그렇다면 거기서 양민으로 살지 뭣하러 내려와 장마당를 떠도나?"
"그건... 세월이 갈수록 에미도 보고 싶고 고향이라고 와보고 싶더군,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그래서 온 건 아닐세. 다른 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네."
"헛, 이 동무가 점점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그럼 무슨 다른 일로 온 것인가?"
"까짓 것 다 말하지. 나으리를 묻고 봄이 되었네. 이집 저 집 다니며 나무를 해주고 밥을 얻어먹든 나는 이웃의 노인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네. 그 노인은 약초꾼인데 주로 산삼만을 캐러 다녔네. 그래서 깊고 험한 곳만 골라서 다니더군. 나는 산에서 사는 것이 마음이 편해서 좋았네. 캐서 모은 산삼은 강 건너 청국 상인에게 넘겼네. 언젠가 내게 털옷을 준 그 사람 말일세. 한해 두해 살다 보니 그 청국인과도 친해지고 할 일 없는 겨울이면 아예 강을 건너가 그의 집에서 살다시피 했네. 왜냐고? 그가 보여주는 마술에 내가 그만 푹 빠졌거든. 그 청국인이 하는 마술은 귀신이 탄복할 정도였네. 내가 하는 마술은 모두 그에게서 배운 것일세. 어쨌든 몇 해가 지나자 자연히 산삼도 눈에 띄고 어떤 곳에 삼이 있는지도 알게 되었네. 강계를 중심으로 사방 수백여 리를 다녀 보았네. 기중 낭림 골짜기에 삼이 많더군. 첩첩산중이란 바로 그런 곳을 말한 것일세. 이거 얘기가 옆길로 빠지려 하는군."
"괜찮네 하고 싶은 얘기는 다 하게. 수원에 닿으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내겐 산삼을 판 돈으로 산 엉성한 초가집이 한 채 있었네. 어느 날, 너무 늙어 삼 캐기를 그만둔 노인이 내게 장가를 들라고 하더군. 그래서 우연찮게 산골 처녀에게 장가를 들게 되었네. 삼년 전이니 내가 스물여섯 살이고 색시는 열여덟이었지. 장가들고 얼마 후에 삼을 찾아 다시 산으로 들어갔네. 그때도 낭림 골에 들어갔었지. 다행히 일 삭도 안 되어 삼을 서너 뿌리 캤네. 더 캐고 싶은 욕심을 접고 산을 내려왔지. 헌데 집에는 색시가 없었네. 산골 친정으로 달려갔지. 허나 거기서도 모르는 눈치더군. 그래서 혹시나 해서 강 건너 청국인 마을에도 가보고 사방으로 찾아다니다 친정 동리의 총각 놈 하나도 없어진 걸 알았네. 보나 마나 두 년놈이 야반도주를 한 것일 테지. 환장을 하겠더군. 색시가 죽도록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배신감 때문이었네. 어두운 밤에 홀로 누웠다가도 년놈이 괘씸해 벌떡 일어나기를 수 백 번이었네. 찾아서 반드시 죽여버리고 싶었네. 허나 간 곳을 알아야지?"
"결국 못 알아냈나?"
아내를 찾는다는 석수의 말에 가슴이 무거워진 거칠이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사람 사는 것이 어쩌면 이리도 비슷한가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못 찾았네. 한 일 년을 찾다가 제풀에 지쳐 그만두었지. 그런데 지난봄에 그 년놈들의 소식을 들었다네. 사내놈이 사람을 사서 양쪽 집에다 소식을 전한 것일세. 그 심부름꾼을 족쳐서 그들이 사는 곳을 알아냈네. 헌데 그들이 산다는 곳이 어딘지 알겠나? 원산이었네."
"원산? 말뚝이가 나는 원산 말인가?"
"그래, 만포에서 천리나 떨어진 곳이지. 그렇게 멀리 도망을 갔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지. 지금 생각해도 그것들이 어떻게 그곳까지 갔나 모르겠네. 왜냐하면 그곳엘 가려면 강계에서 낭림산맥을 넘거나 순천에서 언진산맥을 넘어야 하는데 총을 가진 포수도 겁내는 그 험한 길을 그것들이 어떻게 갔겠나? 이는 필시 송도까지 가서 평강으로 해서 추가령을 넘었을 테지. 그러자니 그게 또 만만한 길인가? 험한 산길에 이골이 난 나도 죽을 고생을 하며 원산엘 닿았네."
"자네가 원산까지 찾아갔단 말인가?"
거칠이가 참지 못하고 석수에게 물었다. 동이와 덕구도 귀를 바짝 세웠다.
"그랬었지."
"그래, 그들이 있는 곳을 찾았나?"
"찾았지. 가서 보니 년놈들은 고깃배가 들어오는 선창에서 일을 하더구먼. 사내는 어물 광주리를 나르고 여자는 고기의 배를 가르고 있더군. 헌데 말일세. 여자 옆에는 두어 살은 돼 보이는 아이가 있었네. 여자가 광주리에 앉혀 놓은 그 아이를 보고 웃으니 아이가 까르르 웃더군. 그러자 마침 광주리를 내려놓던 사내도 쭈그리고 앉아 같이 웃데그려. 숨어서 보던 나는 그만 슬그머니 돌아섰네. 그 둘은 나와 혼인 전부터 좋아했던 것이 분명했네. 오히려 내가 그들 사이에 끼어든 것이란 말일세. 서로 얼마나 좋아했으면 천 리 밖으로 도망을 했을까? 그 뒤에 나는 만포로 돌아가지 않았네. 만포야 어차피 타향 아닌가? 그 길로 애미가 있는 안성엘 가 봤지. 십 년이 넘은 세월에 애미도 죽었고 나으리의 아비인 주인 영감님도 죽고 없더군. 그 영감의 손자인 작은 나으리만 남았는데 집 꼴을 보니 가세가 많이 기운 것 같더구만. 그래서 그런지 안성으로 올라오는 물건을 사고파는 중도아짓을 하더군. 따지고 보면 그 사람은 배다른 나의 형이나 그것까지야 어찌 따지겠나? 밥술이나 먹던 역관 집안이 장철기의 상소 한 장에 녹아난 것일세. 그곳에도 있을 곳이 못되니 떠날 수밖에. 그래서 오늘날까지 사방을 떠도는 중일세. 내 얘기는 여기서 끝일세."
갑자기 석수의 얘기가 끝나버리니 뭔가를 기대했던 거칠이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동이와 덕구를 돌아 보았다. 무슨 재미있는 마술 얘기나 이어질까 싶던 동이와 덕구는 더 실망한 얼굴이었다.
"아니 이 사람아. 그렇게 얘기를 끝내면 어쩌나? 아직 사흘을 굶은 연유는 말하지 않았잖은가?"
"그렇군. 허나 그건 들어서 기분 좋은 얘기가 아닐세. 그러니 그만 두세나."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우린 괜찮으니 어서 해보게나."
"헛, 참, 들어서 좋을 것이 없다니까."
"좋고 나쁘고는 듣는 우리가 따질 것이니 자네는 기왕 꺼낸 얘기나 계속하게."
"할 수 없군. 그럼 말하지. 진천장을 따라갔다가 다음은 음성장엘 들렸네. 그게 닷새 전일세. 음성에서 자고 용인으로 가려고 길을 나섰는데 시오 쯤 갔을 때였네. 길가에 웬 사람이 서 있었네. 산중 고갯길이었다면 산도적을 염려했을 것이나 그곳은 마을과는 좀 떨어진 곳이긴 해도 산속도 아니고 고갯길도 아니었네. 그 사람을 본 나는 그저 길을 가다가 잠깐 쉬고 있으려니 했지. 헌데 그 사람이 지나가는 내 봇짐을 탁 낚아채더니 그대로 줄행랑을 놓대 그려."
"저런 날치기를 당했구만."
"날치긴 지 날도둑놈인지 몰라도 그 봇짐 속에 내 노잣돈이 들었으니 그걸 잃으면 당장 굶을 판이라 뒤를 쫓았지. 야, 그놈 잘 뛰데. 나도 험한 산길에 길든 사람이라 걷고 뛰는 데는 누구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그놈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더군."
"그래서 놓쳤단 말인가?"
"차라리 놓치고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때는 이리저리 가슴이 답답할 때인데 노잣돈까지 뺏기니 부화가 나서 표창을 빼 들었지."
"뭐? 표창이라고? 던지는 작은 창처럼 생긴 것 말인가?"
"그렇네. 이게 바로 표창일세."
석수는 품에서 한 자루의 표창을 꺼내 거칠이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자 동이와 덕구도 가던 발길을 돌려 석수의 손에 들린 표창을 들여다보았다.
"묘하게 생겼군."
"비수처럼 생겼네요."
거칠이와 동이가 한마디씩 하였다. 그러자 덕구가 허릿춤에 감춰 다니던 쇠꼬챙이를 꺼내 석수에게 보여 주었다.
"이거랑 비슷하게 생겼소. 아니 내 것 보담은 좀 크구려."
"그래, 비슷해도 네 건 가벼워서 멀리 날아가지 않는다. 이건 십여 보 안에서 던지면 산돼지도 죽일 수가 있지."
"엉? 정말이오? 표창이랬수? 던지는 법을 내게도 좀 배워주."
덕구가 눈을 빛내며 석수에게 매달렸다.
"그렇게 하지. 나도 배운 것이니까."
"표창 던지기는 또 누구에게 배웠나?"
표창에 관심이 있었는지 거칠이가 석수와 덕구를 돌아보았다.
"마술을 배워준 청국인에게서 였네. 그 사람은 표창도 잘 던졌네. 비싼 산삼을 거래하다 보면 자기 몸 하나는 지킬 재간은 있어야 하거든. 나 역시 산길과 밤길이 무섭지 않은 것은 표창을 익히고 나서 일세. 범이 건 승냥이 건 이거 두어 개만 박히면 끝일 테니 말일세."
"그렇다면 자네가 이 표창으로 봇짐을 채간 사내를 죽였나?"
"분 김에 표창을 빼 들었지만 맞으면 죽거나 다칠 거란 생각이 들더구만. 그래서 길에 있는 돌멩이를 줒어 그놈에게 던졌네."
"음, 잘했군 보따리만 찾으면 그만일 것을 사람까지 상하게 할 건 없지."
"나도 그 생각으루다 돌멩이로 바꿨지. 그런데 돌멩이에 맞은 놈이 픽 쓰러지기에 가 봤더니 입술이 퍼렇게 되어 죽어 있데그려. 전혀 생각 밖의 사태에 놀란 내가 보따리고 뭐고 다 버리고 도망을 하다시피 그곳을 벗어났네. 걸음도 잘 안 걸리더군. 꼬박 사흘을 걸어 용인의 주막에 닿았지. 자네들이 온 그날일세. 사흘 동안 한 끼도 먹지 못했지. 돈도 없었지만 설혹 있다 해도 먹히지 않았을 거네. 내 보따리를 채간 그놈도 어느집 가장일 것 아닌가?"
"그 놈이 재수가 없었던 걸세. 죽을 놈은 자다가도 죽는 법일세. 자네 잘못은 없네."
"그래도 그놈에게 아내나 아이가 있을 생각을 하면 지금도 기분이 좋질 않네."
"그야 그렇지만 어쩌나. 이미 벌어진 일이니...."
거칠이는 석수를 위로하며 갈마 고개를 넘었다. 수원에 닿으려면 아직 반은 더 가야 했다.
한편 양근에 닿은 송윤호는 원일이와 판덕이라는 사내의 행적을 찾아서 약을 지고 동리마다 다니기 시작하였다. 양근(陽根)은 지난 무신(戊申1668) 년에 군(郡)이 되었을 정도로 논밭이 많고 가호 수도 많은 곳이었다. 그러므로 여주를 떠나 산길로 며칠을 고생한 판덕이라면 어린 원일이를 위해서라도 며칠은 동냥을 하기 위해 양근에서 머물렀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이를 안은 걸인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송윤호는 마을의 끝인 검은내부터 차례로 약을 지고 돌아다녔다. 그리고는 약을 파는 한편 아이를 안고 다니던 걸인을 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첫 번째 동리에서는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다. 두 번째는 아랫말(下公山)이었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공산이(公山), 신골(白洞), 잰 말(上坪), 돌다리(石橋)를 다 훑었다. 마지막 남은 곳은 양근의 서쪽 끝자락인 역말(梧濱)만 남았다. 그러나 어떤 집에서도 판덕이를 보았다는 곳은 없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집과 사람들을 만나 물어보았지만 양근에서 보낸 닷새가 허사로 끝이 났다. 여기서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인지가 막막해지는 것이다. 송윤호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날은 저물어가고 더 갈 곳도 없었다. 그러다 멀지 안은 곳에 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저 섬이 양근 섬이로구나. 그렇다면 김만구라는 사람이 산다는 집이 저쯤이겠군.'
송윤호는 양근섬 앞에 있다던 김만구의 집을 찾아갔다. 마침 지촉을 만들 쇠기름을 손질하던 김만구가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시오. 송 의원. 헌데 그동안 어느 동리엘 다녔기에 한 번도 오질 않았소?"
"좌장(座長)과 헤어진 그날부터 꼬박 닷새를 이곳 양근에서 보냈습니다."
"헛, 양근이 촌이라 하나 은근히 넓은 동리이니 가가호호를 모두 방문하려면 닷새는 족히 걸렸겠소."
혼자 사는 김만구라 송윤호를 대접하려고 손수 밥 짓고 나물 무쳐 엉성한 밥상을 차렸다. 두 사람이 저녁을 먹고 나니 벌써 밖은 컴컴했다. 그러자 김만구는 지촉으로 불을 밝혔다. 좁은 방 안은 금세 환하게 밝아졌다.
"아까운 지촉을 쓰실 것까지 있겠습니까?"
"허허, 어차피 불이 있어야 지촉을 만드니 지촉이 아니면 무엇으로 지촉을 만들겠소? 허고, 팔지 못할 것을 쓰는 것이니 걱정 마시오."
김만구는 지촉을 만들려는지 빈 밥상과 쇠기름이 담긴 소쿠리를 갖다 놓았다. 그리고는 잘라놓은 한지를 밥상 위에 놓고 쇠기름을 얇게 펴 놓더니 가운데다 굵은 실을 놓았다.
"오, 지촉은 이렇게 만드는 것이구려."
옆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던 송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만구는 쇠기름을 싼 한지를 둥글게 말더니 양 손바닥으로 만들어진 지촉을 매끄럽게 문질렀다.
"쓰는 것만 알았지 이제껏 어떻게 만드는지 몰랐었소."
"지촉을 쓰셨다면 가세가 요족했거나 혹여 반가(班家)의 지체 오이까?"
"원 천만의 말씀이오. 약 장수인 것을 잘 아시질 않소?"
"집안의 장손을 잃은 후에 시작한 업이 약장수 일 테지요."
"이제 와서 전이나 후를 따질 일이 아닙니다. 그저 떠돌이 약장수로 봐주오."
"좋소이다. 설마 인간사의 설음이 반상에 따라 다르겠소?"
"그러합니다. 누구나 당하고서야 느끼는 것이 인생살이 겠지요."
김만구는 말을 하는 사이에도 쉼 없이 쇠기름을 비벼 지촉을 만들었다. 만들어진 지촉은 싸리로 엮은 네모난 상자에 차곡차곡 담았다.
"이것을 다 만들면 다시 행상을 나갈 것이요?"
"아니오. 이것은 한양 양반가에서 맞춘 것이요. 내일 조카 놈이 가지러 올 거이요."
김만구가 송윤호이 물음에 대답을 하는 사이에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작은 아배, 작은 아배 계시우?"
목소리의 임자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챈 김만구가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머리를 땋은 총각 놈이 들어서는데 나이는 제법 들어 보였다.
"아니? 호철이 아니냐? 내일 온다던 녀석이 웬일로 오늘 오느냐? 게다가 이 밤중에?"
"내일 광주로 넘어가는 동무들이 있걸랑요. 어차피 지초를 갖다 줄 것이니 이참에 같이 갔다 오려고요. 혼자 가기 싫던 차에 잘 됐지요."
"이놈아. 그렇다고 미쳐 다 만들지도 못했는데 들이닥치면 어쩌느냐?"
"아, 그럼 지가 도와 드리지요. 이까짓 거 백 자루 만드는 게 무엇 그렇게 어렵습니까?"
"이놈아, 만들기만 하면 다 라더냐? 정성껏 만들어야지. 언젠가처럼 탈을 잡혔다간 지촉값은 커녕 매만 맞을 것이다."
"아, 그때야 그 양반 놈이 공으로 먹자고 작정을 했으니 당했지요. 공으로 먹자고 덤비는 놈을 어떻게 당합니까? 그런 양반 놈들은 단매에 쳐 죽여야 하오."
"이놈, 여기 손님 계신데 말이 심하구나. 어서 용서합시오라고 아뢰거라."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없는 얘기를 한 것도 아닌데 무슨 용서를 빌란 말입니까?"
"아하, 이놈이 그래도 말을 안 듣는구나. 어서 하래두."
호철이란 총각 놈이 입을 빼물고 송윤호를 내려 깐 눈길을 치켜 바라보았다. 표정을 보니 사과는커녕 오히려 사과를 받고 싶은 것 같았다. 이에 송윤호가 얼른 나섰다.
"원 천만의 말씀이오. 저 총각의 말이 틀린 데가 없소. 내가 본 양반의 행태도 거의 그러 합디다. 총각은 사과할 말을 한 적이 없네."
송윤호의 말이 지극히 마음에 든 총각 놈의 입가에 비시시 웃음이 흘렀다.
"손님이 뉘신지 모르나 어찌 내 마음을 그리 잘 아시우? 손님도 양반에게 호되게 당한 적이 있나 봅니다. 하하."
"헌데 저녁밥은 먹었느냐? 두물머리에서 언제 떠났기에 밤중에 왔느냐?"
"발길에 익은 길 몇십 리야 문제 될 것 없지요. 허고 이른 저녁을 먹고 떠났으니 걱정 마시우. 어쨌든 초나 빨리 만듭시다."
호철이란 놈도 지초는 여러 번 만들어 본 솜씨였다. 종이 위에 쇠기름을 펴고 실을 놓고 말아가는 손동작이 빠르고도 정확했다.
"허허, 좌장보다 조카 분의 솜씨가 더 나아 보이오."
송윤호의 칭찬에 총각 놈은 신이 나서 더욱 손이 빨라졌다.
"그러고 보면 소란 짐승은 버릴 부분이 없는 것 같소이다. 고기는 물론이요. 가죽에 기름까지 쓰이니 말이요."
자신만 하는 일이 없으니 무료해진 송윤호가 두 사람을 향해 말하였다.
"그런 셈이지요. 가죽에 기름은 말할 것도 없고 발톱에 쇠뿔까지 아교로 만드니까요."
"듣고 보니 그렇구려. 아교는 쇠뿔을 고아 만든다지요?"
이때 송윤호와 김만구의 말을 듣던 총각 놈이 풀썩 웃었다. 그러자 김만구가 조카를 돌아보며 눈총을 쏘았다.
"아니, 이놈아. 손님과 작은 애비가 하는 말이 그리 우스우냐?"
"누가 두 분 얘기가 우습답디까? 나는 나대로 우스운 일이 있어 웃지요."
"그 우스운 얘기가 어떤 것이기에 손님 말씀 끝나기 무섭게 웃었단 말이냐?"
"아, 작은 아비가 먼저 소뿔 얘기를 하지 않으셨소?"
"그런데? 그게 뭐가 우스운 말이냐?"
"아, 쇠뿔이란 말을 들으니 지난여름에 두물머리에서 소뿔에 받혀 병신 된 걸인이 생각나서지요. 작은 아비는 못 들었습니까? 소뿔에 허벅지가 꿰인 유랑 거지 말입니다."
"응? 어, 들은 것도 같다. 소젓을 빨아먹으려다 그랬다지?"
그 순간 송윤호는 무언가 뜨끔하게 전해오는 것이 있었다.
"가만 소뿔에 받힌 걸인이 있었단 말인가? 지난여름에 일어난 일이고?"
"정말 그랬다니까요. 어떤 걸인이 장 첨지네 새끼 난 암소의 젖을 먹으려다 소 발굽에 채여 눈알이 터지고 뿔에 허벅지가 꿰였단 말이요."
"그렇다면 그 걸인은 어디서 온 사람인가?"
"내가 아오? 허나 아랫강에서 오려면 배를 타야 했을 텐데 걸인을 누가 태워주겠소? 그러니 천상 이곳 양근 쪽에서 갔겠지요?"
송윤호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지난가을 둔지산 아래 덕구의 움막에 들렸을 때 옆 움막의 걸인이 역시 한 쪽 눈이 없었고 다리가 부러진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 걸인이 데리고 있는 아이는 없었던가?"
"아이요? 그런 소린 못 들었소. 나중이라도 본 사람이 없었소."
"그럼, 그 걸인은 어떻게 되었나? 의원에게 보였는가? 아니면 죽었는가?"
"죽다니요? 의원은커녕 약 한 첩 쓰지않았는 데도 거의 나았다 합디다."
"그럴 수가? 다 나아서 제발로 걸어나갔단 말인가?"
"병자 수발에 지긋 지긋해 진 장 첨지가 걸인이 좀 낫자 하인 시켜 아랫강으로 신탄선에 태워 보내버렸답디다. 헌데 손님은 왜 그리 꼬치꼬치 캐묻소?"
송윤호가 정색을 하고 하나하나 물으니 그제야 이상한 생각이 든 총각놈이 되묻고 나섰다. 그러자 말없이 지초를 만들기에 여념이 없던 김만구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소. 송 의원의 조카를 데리고 간 것이 어쩌면 소뿔에 꿰인 그 걸인일 것 같은 생각이 드오. 지난여름이란 것도 맞고 두물머리라면 이곳 양근에서 가는 길은 강기슭을 따라가는 오직 한 길뿐이니 말이요."
"그러나 아이가 없었다니 이게 무슨 조화일 까요?"
"어쨌든 그 걸인이 이곳까지 온 것을 확인했다지 않았소? 그러니 이제 그 걸인이 갈 곳은 두물머리 쪽이 아니요? 아이는 또 두물머리에 가서 행적을 찾으면 될 것 같소."
"옳으신 말씀이오. 어쩌면 동냥을 얻지 못한 그 걸인이 아이에게 주려고 소젓을 짜려다 변을 당한 것일 수도 있지요. 내일 당장 그곳으로 달려가 행적을 더듬어 보지요. 고맙게도 총각 덕분에 끈을 아주 놓치지 않아 다행이요."
"내일 아침 나와 함께 갑시다. 나도 내일까지는 성안으로 지촉을 전해주어야 하니까요."
"그러세."
그날 밤 송윤호가 잠을 설치다가 새벽이 거의 다 되어서야 잠깐 눈을 붙였다. 그리고 김만구가 해 주는 밥을 다 같이 먹었다. 송윤호는 김만구와 아쉬운 작별을 한 후 총각 놈과 함께 두물머리로 향했다. 가는 길은 폭이 좁은 데다 험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호철이란 놈은 지촉이 든 상자를 메고도 잘도 걸었다. 송윤호는 호철이의 발뒤꿈치만 보고 부지런히 따라 걸었다. 사뭇 강가의 기슭으로 난 길은 갈수록 폭이 좁고 험했다. 그렇게 삼십여 리를 가자 골짜기에 집이 서너 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맨 앞집의 방문을 열고 나오던 사람이 지나는 호철이를 불러 세웠다.
"네 작은 아비 집에 갔다 오느냐?"
"그렇수, 아제는 요즘 투전을 안 하우?"
"집구석에 우환이 있어 못 갔다. 내 그러지 않아도 내일쯤 상제벌로 놀음을 하러 가려고 한다."
"그럼 내일 봅시다. 잘 가슈. 앗 참, 아제 말좀 물읍시다."
송윤호가 다시 걸으려는데 무엇 때문인지 호철이란 놈이 급히 조금 전 그 사내를 불렀다.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사내가 다시 돌아보았다.
"혹시 지난여름쯤에 말이요, 이 앞을 지나는 어린아이를 안은 거지를 본 적 있수?"
"거지라니? 거지가 와 봤자 뭘 얻을 게 있어야 오지? 못 봤네."
"거참 이상하네. 양근에서 두물머리로 가려면 이 길 밖에 없는데...."
"응? 가만있거라. 작년 여름이라 그랬나? 글쎄 여름인지 가을인지는 확실치 않네만 그런 걸인이 있었네. 돌이 좀 지나 보이는 아이를 안은 걸인이 밥을 달라고 왔었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송윤호가 그 사내의 코앞으로 다가섰다.
"그, 그래서 그 걸인이 어디로 갑디까?"
"아니 댁이 그 걸인의 형이요? 어찌 이러오?"
"미안하오, 나는 걸인과 함께 있던 그 아이를 찾는 사람이요."
"그거야 내가 어찌 알았겠소? 내 집에 밥을 얻으러 왔기에 십 리만 더 가면 큰 동리가 있으니 그리로 가라고 쫒았지요."
"아, 이리로 지나갔었구나. 말해주어 고맙소."
송윤호는 원일이의 뒤를 곧 따를 것이란 생각이 들자 힘이 절로 났다. 아직 십여 리가 남았지만 이미 마음은 두물머리에 가 있었다. 그러다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이곳까지는 원일이를 데리고 있는 판덕이란 사내가 지나간 것은 확실하다. 허면, 왜 두물머리에서는 원일이를 보았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일까?'
그 문제는 또 두물머리에 가보면 단서가 잡힐 터였다. 송윤호는 꼬리를 무는 생각과 함께 호철이의 뒤를 부지런히 따랐다. 두물머리에 닿고 보니 채 오정이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호철이와 헤어진 송윤호는 맨 먼저 장 첨지가 사는집을 찾았다. 그러나 장 첨지와 그의 하인들의 대답에는 송윤호가 알고 있는 이상은 알아낼 것이 없었다. 그 누구도 원일이는 애초에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장 첨지의 집을 물러 나온 송윤호는 장 첨지네 암소가 묶였던 장소를 물어 찾아갔다. 강과는 불과 오십여보 떨어진 낮은 언덕이었다. 송윤호는 만약 원일이를 위해 젖을 짜려던 판덕이라면 아이는 어디다 두고 소에게 다가갔을까를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럴만한 장소가 어디쯤인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이를 안심하고 둘 만한 장소가 없었다. 걸음을 못 걷는 아이라면 아무 곳에 두어도 괜찮으나 걸음이 서툰 아이를 두기에는 길도 좁고 아래는 곧바로 강이니 위험했다. 그렇다고 먼 곳에 두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 강가의 평평한 모래톱에 두었을까? 그도 아닐 것이다. 바로 곁이 강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디가 좋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보이지 않았다. 송윤호는 다시 낙심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판덕이가 취한 행동에 원일이를 연결시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물며 두물머리 사람들마저 원일이를 보지 못했다면 더 이상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는 노릇이었다.
이럴 시각에 둔지산 아래에 있던 판덕이란 사내를 찾는 것이 더 급했다. 그를 찾아 자초 지종을 들어보면 명약 관화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덕이란 사내를 본 것이 지난가을이니 지금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것은 어쩌면 덕구가 알지 않을까? 그것도 아닐 것이다. 덕구의 할애비가 죽던 날 깍정이들과 함께 판덕이란 사내도 없어졌다고 했으니까. 어쨋던 두물머리에 알아볼 것이 없으니 판덕이를 찾는 것이 나을 것이었다.
송윤호는 다시 장 첨지 집을 찾아가 머슴들과 함께 하룻밤을 묵었다. 그리고는 광주부로 넘어가 송파로 가기 위해 건너편 분원 골로 땔감을 실으러 가는 배를 얻어탔다. 여강을 건널 때 이미 얼음이 녹기 시작하더니 열흘이 채 못된 사이 이곳에도 배를 띄울 정도로 얼음이 녹아 있었다. 그러나 강변 쪽은 아직 녹지 않았고 강심에는 큰 얼음덩어리가 떠 있어 배가 광나루나 삼개까지 가려면 며칠 더 있어야 할 터였다. 배가 십여 리를 나아가자 송윤호는 사공에게 열 푼을 건네주고 검단산 아래에 내려 달라고 부탁을 했다. 돈을 챙긴 사공은 두말 없이 산 아래까지 데려다주었다.
송윤호는 강기슭으로 난 노루 길을 따라 20여 리를 걸어 광주 향교 아래에 닿았다. 그리고서도 이성산 골짜기를 따라 송파까지 점심도 굶으며 걸었다. 산길 70리를 걷고 보니 막상 송파에 닿았을 때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송윤호는 강변에 있는 주막의 봉놋방에 발을 들이자말자 고리짝을 내려놓았다. 어깨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저녁 밥까지 생략하고 일찍 자리에 누운 송윤호가 다음날 눈을 떴을 때는 거의 오정에 가까웠다. 고리짝을 챙겨 밖으로 나온 송윤호는 먼저 나루로 달려갔다. 강에는 커다란 얼음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얼음만으로 보면 아직은 배가 다니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송윤호의 생각과 달리 물가에는 여러 척의 중선이 닻을 내리고 있었다. 개중에 절반은 오백 석도 실을 것 같은 크기였다.
"아래 강으로 가는 배는 없소?"
송윤호가 막 닻을 걷으려는 사공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사공이 피식 웃었다.
"왜 웃소?"
"눈 앞에 두고 물으니 웃을 수밖에 더 있소?"
"그럼, 이 배가 아랫 강으로 가는 배요?"
"족집게로 맞췄소."
"그럼 나를 좀 태워주오."
"뱃삯이 있으면 타시요."
"그러리다. 얼마를 내야 하오?"
"삼패(三牌) 년 배타는 값만큼만 내시요."
"삼패가 무엇이요?"
"그 배는 안 타봤소?"
"안 타봤소."
"아랫 강으로 가는 배를 물을 때 내 진작 알아봤소. 여기 있는 배들은 삼백 석 이상의 배들인데 이 큰 배들이 더 위로야 어찌 가겠소? 아랫 강 말고는 갈 데가 없는 배를 두고 아랫강 가는 배를 찾다니... 그래서 웃었소만 어쨌든 타시오."
그러나 배가 막 떠나려던 참이라 발판은 이미 걷혀버리고 없었다. 어쩔 수없이 고리짝을 먼저 올리고 송윤호도 뱃전을 붙잡고 간신히 올랐다. 오르고 보니 배 안에는 이미 열댓 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갓 쓴 양반은 없고 죄다 패랭이를 썼거나 수건으로 이마를 동인 상민이나 장사치들이었다. 송윤호는 사공이 달라는 대로 열 푼을 주고 그들 곁에 껴 앉았다. 사공이 삿대로 힘차게 강바닥을 찌르자 배가 물 위로 스르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이에 두 명의 노꾼이 노를 저어 배가 갈 방향을 잡자 또 다른 두 명의 사공은 용총줄을 당겨 돛을 올렸다. 처음 송윤호와 수작을 하던 사공이 아딧줄을 잡더니 맷방석에 털썩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송윤호를 향해 말을 걸었다.
"보아하니 장사를 시작한 지 오래지 않은 것 같소."
삼개에 닿으면 판덕이의 흔적을 어디부터 찾아야 할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송윤호가 사공이 하는 말을 미쳐 알아듣지 못했다.
"이거 보오, 뱃놈 말은 장사꾼이 알아듣지 못한단 말이요? 왜 대답이 없소?"
송윤호는 그제야 자신에게 하는 말인 것을 알았다.
"아, 미안하게 되었소. 내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몰랐소. 무어라 셨소?"
"초짜 장삿꾼이 적실 하구려. 그래 무얼 팔러 다니는 거요?"
"예, 약을 팔지요."
"약이라면? 당신이 직접 만든 거요?"
"그러하오."
"어쩐지 책상물림 냄새가 나더니 역시 의원으로 떨어진 집안이구려?"
"떨어지고말고 할 것도 없는 집안이요."
"그래, 무슨 약을 파오?"
"급체나 설사가 났을 때 먹는 약이요."
한데, 송윤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 앉았던 패랭이 쓴 자가 금세 말을 받았다.
"그런 약 말고 혹 애 서는 약은 없소?"
"..........?"
"아, 애 생기는 약 말이요. 그런 약이 있으면 큰 돈을 벌겠습디다."
송윤호는 그제야 패랭이 쓴 자의 말을 알아들었다.
"허허, 그런 약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만 아직은 보지 못했소."
송윤호가 헛웃음을 웃으니 말한 패랭이도 따라 웃었다. 그러자 사공이 다시 나섰다.
"거듭된 흉년에 있는 애도 몰래 버리는 세상에 돈 들여 애새끼를 만들려는 집구석은 대체 어떤 집이란 말인가?"
사공의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패랭이가 받았다.
"아, 그건 사공이 모르는 소리요. 내가 지난달에 안성엘 갔다가 들은 얘기요. 그런 약이 있으면 삼백 냥을 내겠다는 집이 있단 말을 들었소."
"힝, 돈이 남아돌아가는 집이거나 나이는 먹어가는데 장손이 급한 집일 것이요."
"아니요. 그 사람은 안성의 중도아로 그리 큰 부자는 아니랍디다."
"그래서 세상이 고르지 못한 것이오. 언젠가 내 처남의 얘기를 들으니 돌 지난 말라비틀어진 아이를 남의 뱃전에 버리고 간 놈이 있었답디다. 먹일 것은 없고 죽일 수도 없으니 부모 된 마음에 어디든 실려가서 살았으면 해서겠지만 그런 놈이 있는 마당에 삼백 냥을 들여 애를 갖겠다니 원...."
사공의 말을 듣던 송윤호가 속으로 깜짝 놀랐다. 배에 던져진 돌 지난 아이라니?
"돌 지난 아이라니? 그게 언제 일이오?"
"왜 그러오? 애를 버린 사람이 혹 당신이요?"
"아니요. 아이를 찾아다니는 사람이오. 배에 버려졌다는 그때가 언제쯤인지 혹여 아시면 말해 주오."
"글쎄 그게 언제인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한 가지는 적실하오. 그 말을 들은 것은 처남이 죽기 전이란 거요. 허니 지난해 여름이나 가을이겠지요."
"예? 당신 처남이 죽었단 말이요? 그럼 처남은 언제 죽었소?"
"헛, 꽤나 꼬치꼬치 캐묻는구려. 좋소, 내 처남은 지난 초겨울에 죽었소."
"그럼 처남이 직접 뱃전에 버린 아이를 보았답디까?"
"보았기에 내게 그런 얘기를 했을 것 아니요?"
"혹시 본 곳이 어디인지 들으셨소?"
"아 그야, 처남이 나루에서 번을 섰으니 나루에서 보지 않았겠소?"
"나루라면 어느 나루요?"
"광나루에서 십여 삭 있었지요."
"혹시 처남의 이름을 알려 줄 수 있소?"
"산돌이요, 헌데 죽은 사람의 이름은 알아 무엇 할라우?"
"지나치게 캐물어 미안하오. 아이를 찾아다니다 보니 공연히 마음이 바빠서 그랬으니 관용하시오."
"거, 참, 장사하랴 애 찾으랴 초짜배기 장삿꾼이 할 짓이 아니구려. 쯧쯧."
송윤호는 두 눈을 감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두물머리에서 판덕이가 소젖을 짜러 갈 때 어쩌면 모래톱 위에 끌어 올려진 배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판덕이가 양근에서부터 먹지를 못했다면 원일이는 어쩌면 기진한 상태였을 것이 아닌가? 그래서 뱃전에 아이를 뉘이고 젓을 짜러 갔다면? 아, 그랬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원일이를 본 사람이 없었던 것이로구나. 나 역시 두물머리에서는 배를 보지 못해 그런 생각을 못 했었구나. 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 일인 것을.... 이렇게 되면 우선 광나루로 다시 가야 할 것 같구나.'
송윤호는 배가 삼개에 닿을 때까지 말이 없었다. 배에서 내린 송윤호는 자신의 움막이 있던 언덕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또다시 삼개로 돌아온 것이다.
"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구나. 그러나 거칠이와 만나기로 한 오월 단오날 까지 어떻게든 원일이를 찾고야 말 것이다."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강에는 얼음이 녹아 큰 배들이 다니기 시작하고 삼개 나루도 다시 사람들로 북적일 것이었다. 송윤호도 바쁜 봄을 맞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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