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설

송원일 제1장 유전(流轉) 10.장삿길

fiction-google 2024. 5. 13.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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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장삿길

신유(辛酉) 년이 저물고 임술(壬戌1682) 년을 맞이하는 설날. 이번 설은 어느 해 설날 보다 혹독하게 매서운 추위가 닥쳤다. 오강엔 두꺼운 얼음이 얼고 삼개 나루 기슭의 까치집 보다 못한 움막들은 삭풍에 띠지붕이 날아간 곳도 많았다. 게다가 지난 동지 때부터 얼기 시작한 강이어서 뱃길이 끊긴 것도 그 무렵이라 배에서 내리는 등짐에 목을 매던 움막 사람들은 그 일마저 없으니 굶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굶어죽거나 얼어 죽을 지경에 이른 사람들은 한 줌의 곡식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자들은 살길을 찾아 동냥아치로 떠나거나 깍정이 패에 들기도 하고 때로는 도적질을 위해 뭉친 패도 있었다. 그럴 힘도 강단(剛斷)도 없는 사람들은 얼어붙은 강을 오가는 마소의 잔등에 실린 신탄(薪炭)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혹시나 해서 밤섬으로 모여들었다. 어쩌면, 도성 안으로 신탄을 져 나르는 일거리라도 있을까 해서였다.



밤섬에는 다섯 명의 신탄 장수가 있었는데 대부분 그 곳 토박이들이었다. 게다가 그들 모두는 희성(稀姓)인 마(), (), (), (), () 등의 성씨 가운데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 밖의 성씨는 밤섬에 주저앉고 싶어도 사흘도 못 가, 그들에게 치여 쫓겨났다. 이들, 희성이 이곳에 모여 사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고,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밤섬은 고려적만 하드라도 죄인의 유배지로 쓰일 만큼 외지고 살기가 팍팍한 호두알만 한 고도(孤島)에 불과했다. 그러다 이조가 들어서 한양으로 천도하니 삼개 나루가 생기고 삼남의 세곡선이 드나들자, 밤섬은 자연히 그들 배를 수리하는 곳이 되었다. 뱃 사람과 목수와 일꾼이 꼬이니 어차피 성내에 살지 못하는 천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들은 두 가지 부류였다. 첫째는, 고려 적 개경에서부터 화척이던 백정이나, 양수척(楊水尺)이라 불리던 고리쟁이들이었다. 둘째는, 죽어도 이조에 동화되기 싫었던 고려의 왕씨(王氏) 후손들이 간혹 성을 바꿔 천민 속에 섞인 경우였다. 위에 열거한 성씨가 그런 사람들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밤섬에 들어온 이들은, 좋은 솜씨로 배를 짓고, 고리를 만들고, 소를 잡아 생계를 이었다. 그러다 임란(壬亂) 이후 선조(宣祖) 임금이 소의 도축은 성균관 주위의 반촌(泮村)만 하도록 허가를 하니 밤섬 백정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길을 택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여름에는 물고기를 잡거나 막일이요, 겨울에는 땔감을 성안에 파는 일이었다. 그러다, 전후에 인구가 부쩍 늘어서 먹고 살 양식뿐 아니라 땔감도 절대 부족하게 되니 덩달아 밤섬도 바빠진 것이다. 4만 호()에서 밥 짓고 구들을 덮이려니 땔감이 태부족할밖에 없는 것이다. 성 안에선 가까운 목멱산은 물론 멀리 도봉산까지 금송(禁松)의 령이 떨어져 땔감을 구할 곳이 없었다. 기껏해야 북으로는 흥인문(興仁門)을 통해 불땀은 좋으나 헤프기 짝이 없는 섶 나무나 조금 들어오고, 서쪽으로는 돈의문(敦義門)을 통해서 덕양과 고양에서 오는 삭정이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들로는 한양의 그 많은 집들과 왕실의 땔감으로서는 턱도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동 쪽의 한강 물길을 따라 내려오는 강원도의 통나무와 숯이 그것을 대신했고 남쪽에서 과천 쪽에서 올라오는 잡목이 동작 나루에 쌓였던 것이다. 동작 나루에 쌓였던 신탄이 장안으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길은 만리 고개를 넘는 길이었다. 그러나 만리 고개가 릿 수로는 오릿 길에 불과하나 재가 재법 가팔라 빈 몸이라면 모를까, 장작을 잔뜩 실은 마소들이나 지갯짐을 지고 넘으려면 혀를 빼 물어야 했다. 그럴바엔 약간은 돌아가더라도 삼개에서 공덕리와 청파를 통해 숭례문(崇禮門)으로 드는 것이 한결 편했다.

날이 갈수록 신탄이 많이 필요하니 그 것은 한 두 사람으로 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해서, 겨울이면 육백여 명의 섬사람들 가운데 옛부터 배를 짓던 목수들 말고는 밤섬에 살고 있는 희성들 거의가 다섯 사람의 신탄 장사 밑에서 밥들을 먹었다. 추울 수록 잘 팔리는 것이 땔감인데다 한강에 얼음만 얼면 신탄을 삼개로 운반하는 일은 쉬웠다. 그 후 언젠가부터 잔등에 태산처럼 장작을 싣고 두껍게 언 강을 건너가는 마소의 행렬은 볼만한 광경이 되었다.



", , 거칠이 성 아니우?"

움막이 빽빽이 들어선 언덕 길은 오르다 말고 동이가 앞서가는 사람을 불렀다. 그러나 무엇이 바쁜지 앞사람은 동이가 하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 거칠이 성."

그제야 앞사람이 동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동이냐?"

의외라는 얼굴로 거칠이가 동이에게 다가왔다.

"이렇게 일찍 성은 어딜 다녀오는 길이유?"

", 덕구에게 다녀오는 길이다. 간 밤의 추위에 탈이 없었는지 궁금해서....."

", 그랬수? 허긴, 간밤에 추위가 굉장했지. 그래 그놈은 탈이 없습디까?"

"말 말아. 얼어 죽지 않으려고 불가에 쪼그려 밤을 샜다더라. 내가 형편이 여의하면 그놈을 데려오고 싶다만 나으리를 뫼신 나 또한 남의 객주에 의탁한 몸이니.... 이거 원."

거칠이가 탄식을 하니 동이 역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덕구는 할애비가 죽은 후에도 그 움막 그 자리에서 겨울을 나려 고집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혹여 할애비를 해친 깍정이들이 움막에 다시 나타날 것에 대비해서 항상 날카로운 쇠꼬챙이를 숨기고 다녔다.

"그럼, 먹는 것은 어떠우? 동냥으로 제 입은 메꿀 수 있답디까?"

동이가 거칠이의 어두운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글쎄, 제 먹을 것도 없는 세상인데, 동냥인들 제대로 되겠니? 말은 안 해도 굶기를 죽 먹듯 할 게다. 헌데, 너는 이른 시각에 어딜 가는 길이냐?"

"아이고 내 정신. , 성님 만나러 가는 길이유."

"? ? 네게 무슨 일이 생겼냐?"

"에이 그럴 일 없수. , 성님과 의논할 일이 좀 있수."

"의논이라니? 내 게 무슨 의논하고 말고 할 꾀와 힘이 있다고?"

"성님은 요즘 무슨 일은 하오? 나으리도 모신다면서 무슨 일로 호구를 하느냔 말요?"

"그 게, 그 게 사실 애매한 일이다. 객주의 일을 도와 고방도 치우고 도성 안으로 심부름도 다니지만 그 게 어디 일거리라고 할 수 있겠니? 순전히 객식구로 얹혀지내는 꼴이라 사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을 견디고 있다."   

"듣고 보니 그렇겠수. 요즘 세상에 두 사람을 앉혀 놓고 공밥을 먹일 위인들이 어디 있수? 그런데도 상조회가 그러는 걸 보면 성님네 나으리께서 왕년에 한자리하셨나 보우."

"?"

거칠이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는 동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수? 그러지 않고서야 그 야박한 장삿꾼들이 주종(主從)을 않혀놓고 흔연대접을 하겠수?"

", 그건 아니고.... 우리 나으리 께서 의술을 아시고 게다가 상고(商賈)의 이치 또한 밝으신 분이라 그들이 아쉬워 잡고 있는 것일 테지. 너도 알다시피 상조회의 객주엔 모조리 포교 출신 아니냐? 그들이 장사를 알겠니? 그러니 우리 나으리가 그들에게 훈장님 노릇을 좀 하시는 편이지."     

"어려운 얘긴 난 모르겠수. , 그 얘기를 하려 든 게 아니우. 나으리께선 그렇다 쳐도, 성은 할 일이 없는 듯 하니 나 하고 같이 일합시다 그려."

"같이? 무슨 일인데?"

동이가 무슨 비밀이라도 까발리는 것처럼 거칠이 앞으로 한 발을 다가왔다.

"나무 장사요. 밤섬에 태산처럼 쌓인 신탄을 못 봤수? 그 걸 도성 안으로다 팔러 다니잔 말이우. 잘 하면 한겨울 장사에 엽전께나 만져 볼 거유. 어떻수? 해 볼 만한 일거리 아니겠수?"

", 그것도 밑천이 있어야 하고... 게다가 들으니 그 장사는 밤섬 본토백이만 할 수 있다던데 무슨 수로 한단 말이냐?"

", 형님이 알긴 제대로 아셨수. 하나, 내가 누구유? 밤섬 본토백이 석 씨(石氏) 아니유? 석동이."

"동이 네가 석 씨라? , 너도 성()이 있단 말이냐?"

"이거 왜 이러시우? 벼슬이 없어 그렇지 쌍 것이라고 성까지 없겠수?"

"허허, 그런 성씨라도 있어야 나무 장사를 한다니, 그만하면 쌍놈의 성씨가 갓 떨어진 양반의 벼슬보다는 낫다. 하나, 넌 잉어를 건져 한 겨울을 난다고 하지 않았냐?"

"이제까진 그랬지요. 헌데 그 게 말이우. 우리 할애비의 사촌이 매년 겨울이면 나무 장사를 했는데 이젠 늙어서 굴신을 못하우. 게다가 장사를 대신할 아들도 없수. 해서, 그 걸 내게 넘겨주려 하우. 할애비도 해롭지 않은 일이라고 해 보랍디다. 헌데 기왕 할 거면 세차게 해얄 텐데.... 혼자서 하기에는 힘에 부치는 일이란 말이우. 어떻수? 성님이 날 좀 도와주면 안 되겠수?"

"나는 밤섬 토백이도 아닌데?"

"가만, 성님은 성씨가 무어요? 하님이래도 성은 있을 것 아니요?"

"그딴 게 있을 턱이 있나? 우리 아비도 할애비도 성이 있단 얘긴 못 들었다."

"까짓 성님도 성을 하나 가지시우, 족보 딸린 양반 성씨를 갖자는 것도 아닌데 어떠우?"

", 싫다. 그 딴 건 나중에 면천을 한 다음에 가져도 늦지 않을 테니."

"같이 신탄 장수로 나서려면 그 게 나을 것 같아 하는 말이유."

"글쎄, 솔깃은 하다마는 그런 일이라면 내 마음대로 할 일이 아니니 우리 나으리께 여쭈어 보아야겠구나. 여하튼 날 생각해 주어 고맙구나. , 덕구를 데리고 다니면 어떻겠냐? 그 아이도 이제 열다섯 아니냐? 그만하면 장정 버금갈 힘이 있을 게다."

"가만..... 성님 말씀 듣고 보니 그도 그럴듯한 말씀이구려. 내 일간 그 아일 찾아보지요."

"그렇게만 되면 내가 한시름 놓겠다. 어쨌든 나도 틈 나는 대로 널 힘껏 도우마."

"나으리께 잘 좀 여쭈어 보우. 형님이랑 덕구랑 셋이 하면 얼마나 좋겠수."

"그래보긴 하겠다만 장담은 못 한다. 나으리 찾으시기 전에 나는 이만 가 봐야겠다."

"그러시유. 형님 잘 가우. 나도 할애비가 찾기 전에 가야 하우."

동이와 헤어져 언덕을 넘은 거칠이가 곧바로 객주를 향해 달려갔다. 황구만이 떠난 이후 객주에는 상조회의 부 회주인 노탁우가 십여 명의 전직 포교들과 함께 꾸려가고 있었다. 십여 명 가운데 일곱 명은 며칠 전 새로 온 사람들로 장사를 배우는 중이라 객주에 잘 머물지 않았다. 방장은 황구만과 자리를 바꾼 송파에 있던 방인근이었고 전부터 있던 기형도가 부방장 격이었다. 객주의 안방을 차지한 노탁우는 물화가 들든 말든 방인근에게 맡기고 관여치 않았다. 그리고는 종일 송윤호와 화로를 마주하고 이런저런 얘기로 소일하였다.

"나으리 거칠입니다. 진지는 드셨는지요?"

송윤호가 머무는 방문 앞에서 거칠이가 가만히 여쭈었다. 그러자 방문이 덜컥 열리며 송윤호가 얼굴을 내밀었다.

"넌 아침부터 어디를 다녀오는 길이냐?"

". 둔지산 아래께에 다녀 왔습지요. 덕구라는 아이가 어쩌고 있는지 보려 굽쇼."

", 할아비 잃은 그 아이 말이구나. 그래 간밤 추위에 무사하더냐?"

", 아직은 탈이 없는 듯 하옵니다."

"아직이라니? 형편이 극히 어렵더냐?"

". 움막도 허술 한데다 먹는 것도 시원찮아 뵈니, 그냥 두면 겨울을 무사히 넘기기 어려워 보이옵니다."

", 그래? 그러면 어쩌면 좋겠느냐? 우리의 처지가 이러하니 말이다. 영민하게 보이는 아이던데.…"

송윤호는 탄식을 하며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나으리, 심려 마시오소서. 조금 전, 같이 일하던 동이란 놈을 만났는데 오늘내일 덕구를    데려갈 것입니다."

"동이라면 지난번 네가 말한 밤섬 주낙꾼 아니냐? 그 사람이 아일 데려다 어쩔려구?"

", 그 친구가 이제부터는 신탄 장수로 나선다 하옵니다. 그러니 덕구와 함께 하려나 보옵지요. 덕구도 열다섯 살이 된다니 반 장정 몫은 할 거 아니 옵니까?"

"그렇겠구나. 잘 된 일이다. 그 아이라면 잘 해낼 것이야. 지난번 제 할애비 일을 보니 심지가 굳은 녀석이 더구나. 헌데, 신탄 장사라 했느냐?"

". 밤섬에 지금 산처럼 쌓인 게 전부 신탄이 아니 옵니까?"

"나도 보았느니라. , 신탄 장사라.... . 너도 어서 조반을 먹도록 해라."

". 나으리께서도 어서 문을 닫으시지요. 바람이 차옵니다."

거칠이가 부엌을 향해 돌아섰다. 그동안 많은 식구들의 밥을 해 대던 늙은 할미가 힘에 부치자 노탁우의 명에 의해서 가난한 젊은 과부 아낙네를 하나 더 들였었다. 거칠이가 부엌에 다가가자 마침 구정물을 버리러 나오든 그 과부와 하마터면 부딪칠 뻔하였다.

"에그,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면 어쩌오?"

"? 미 미안 하오. 조반을 좀 먹으려고...."

"미안이고 뭐고, 밥이 없소. 밥때를 놓치고 어딜 다니오?"

"뭐요? 밥이 없다니? 남겨 둔 것이 조금도 없소?"

"많은 식구들 사정 알아서 일일이 다 챙길 수가 있겠소? 에그 비키시오. 팔 아프오."

짜증 섞인 과부의 말에 머쓱해진 거칠이가 한 곁으로 비켜났다. 밥이 없다니 별 수 없었다. 그러나, 종일을 굶을 생각을 하니 뱃속이 더 허전 한 것이다.

', 이리저리 굶는 게 내 팔자려나 보다. 제길.'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부엌에서 들었는지 돌아서는 거칠이를 할멈이 불러 세웠다.

"쯧쯧, , 저놈의 여편네.... 여게, 이거라도 먹게나. 장정이 아침부터 굶어서야 어찌 힘을 쓰누? 쯧쯧."

밖으로 나온 할멈의 손에는 어른 주먹만 한 누룽지가 쥐어져 있었다.

"? 고맙수. 이거면 요기가 되고도 남겠소."

"고맙긴, 그동안 이 늙은이가 고마웠지. 하고많은 사람들이 제각끔 밥타령만 하기에 바빴지, 어디, 부엌에 장작이라도 날라다 준 사람이 하님 말고 있었남?"

", 그거야 노느니 염불이라고..... 그까짓 게 무슨 일이라고.…"

"그렇지 않아. 놀면 놀았지 다 들 내 일이 아니면 누구나 못 본 척하기 마련이라오."

그때, 뒤곁에 구정물을 버리고 오던 과부댁이 거칠이의 손에 쥐어진 누룽지를 보았다.

"아아니? 그것 누룽지 아니오? 할멈이 줍디까?"

"그렇소만 어째 그러오?"

"그건 내가 챙겨 둔 것인데.... 할멈, 저걸 저 하님을 주면 어쩌오?"

과부댁이 할멈을 향해 눈을 샐쭉 흘기자 할멈 또한 눈에 흰자를 들어냈다.

"? 아침도 못 먹은 사람에게 주면 안 될 일이라도 있나?"

", 그건 내가 쓸데가 있어 챙겨 둔 것이라니까요."

"? 쓸데? 누가 모를 줄 아나? 이따가 기서방(寄書房) 손에 쥐여주고 싶어서 그러는걸?"

할멈이 부 방장인 기형도를 입에 올리자 화들짝 놀란 과부댁이 부엌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할멈의 등에다 대고 새된 소리를 종알 거리는 것이었다.

"아이고, 누가 들으면 과부가 총각이라도 홀린단 소리 하겠네. 내가 언제 부방장에게 누룽지를 주었다 합디까? 할멈은 괜히 애먼 사람을 잡소? 할멈이 봤소?"

", 그걸 꼭 봐야 아나? 과부 홀애비, 두 년놈의 눈 빛만 봐도 알 일이지."

평생을 기생집 부엌데기로 늙은 할멈이 끌끌 혀를 찼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사이에 거칠이는 누룽지를 먹어야 할지 말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손에서 그냥 놓아버리고 싶은 누룽지였다.

"어서 들게나. 까짓, 저 여편네 말 들을 것 없네. , 물이 있어야 넘어가지. 기다리게. 마침 뜨거운 숭늉이 있네."

할멈이 부엌으로 들어가 숭늉 사발을 들고 왔다. 거칠이 고마운 마음으로 선 채로 숭늉을 불어가며 누룽지를 다 먹었다.

"고맙수. 배가 부르오."

거칠이가 고맙단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하고 일거리를 찾아 고방으로 향했다. 마침, 고방에는 여러 전직 포교들이 등짐을 꾸리느라 분주했다.

"포교 나으리들께서 오늘은 무엇을 팔러 가십니까요?"

고방을 들어서며 거칠이가 웃음 띤 얼굴로 여러 포교들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가까이 있던 점박이 권철후가 거칠의 어깨를 툭 치며 되받았다.

"이런 놈을 보았나? 포교라고 하지 말래도 자꾸 헛소리를 지꺼리누나. 이놈아 우리는 이제 포교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옵죠. 헌데 입에 익어 설랑...."

"시끄럽다. 그럴 바엔 우리 나이가 너보다 많으니 성님들이라고 부르거라."

권철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등짐의 바를 추스르든 김진국이 가래를 돋구었다.

", 성님이라니? 저놈이 종놈인 걸 몰라서 하는 소린가? 자네는 종놈과 호형호제하려는가? 나는 성님 소리 듣기 싫으니 자네나 동생 삼게나."

"맞아, 나도 싫네."

"나도...."

몇 사람이 김진국의 말에 동조하며 거칠이를 바라보았다. 머쓱 해진 거칠이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 누군가 고방으로 들어오는 빛을 막아선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순간을 망설이는 듯하더니 고방으로 한 발을 들이며 물었다.

"싫다니, 모두들 뭐가 싫다는 게야? 술이 싫다는 겐가. 계집이 싫다는 겐가?"

"아니? 형님이 여긴 웬일이십니까? 이번에 회주님 곁으로 가시지 않았습니까?"

들어선 사람이 주흥식 임을 알아 본 권철후가 허리를 숙여 절을 꾸뻑하였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모두 주흥식에게 고개들을 숙였다. 포도청에 있을 때에도 가장 서열이 높았고 그가 오일중 회주의 오른팔이었던 것을 다들 알기 때문이었다.

"하핫. 너희들이 잘 하고 있나 회주님이 보고 오라시더라."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다른 볼일이시겠지요."

"하하하. 김진국이 잘 보았군. 역시 오랏줄을 가장 늦게 놓은 눈이라 다르구만. 내 사실은 곰보네 투전방에서 밤을 새웠다네."     

"? 투전 방이라굽쇼? 우리는 그 흔한 연초도 못 태우게 하시고 술까지 절제 하라던 회주님이신데 아니, 형님께선 그래도 괜찮은 겝니까?"

"하하하, 그럴 일이 좀 있네. 담에 얘기해 주지."

쾌활하게 웃는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 거칠이가 고개를 숙여 반가움을 표했다.

"나으리, 오랜만입니다. 지난여름, 어물 짐을 지던 소인을 알아보시겠는지요?"

주흥식이 새삼 거칠이의 아래위를 찬찬히 훑었다.

"옳아. 너 꺽정이 사촌, 그놈이구나. 헌데 네가 여기 있다니 뜻밖이구나."

"어쩌다 그리 되었습지요."

"가만 너, 이름이 뭐였더라? 그렇지, 거칠이랬지. 내 그때 널 잊지 않겠다고도 했겠다?"     

", 그랬습지요."

"반갑구나. , 자네들 아까 이 사람을 두고 좋으니 싫으니 한 것인가?"

주흥식의 돌연한 물음에 모두들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주흥식이 다시 입을 열었다."

", 밖에서 다 들었네. 헌데, 종도 미물 아닌 사람일세. 그러니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런 말들을 해선 아니되네. 엽전(葉錢)은 반상(班常)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회주님 말씀을 못 들었나? 그 말은 들은 사람들이 반상을 구분하며 장사를 하려는가? 이제, 우리는 장삿길로 나선 사람들 아닌가? 장삿꾼이면 이미 사천(四賤)에 떨어진 몸인데 새삼 무슨 반상이 있어 싫고 좋고 한단 말인가? 더구나 내 일찍이 이 사람 보매 힘이 장사에, 나름대로 의리가 있는 사람인 걸 알았네. 그리고, 보아하니 이 사람도 이 객주에 의탁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한 솥 밥을 먹는 처지 아닌가 말이야. 한솥밥을 먹는 식구끼리 그러면 되겠나?"

말을 마친 주흥식이 여러 사람들을 돌아보자 권철후가 앞으로 나섰다.

"하하하, 형님 말씀이 만 번 지당합니다. 이 사람들아, 내가 뭐라든가? 그냥 편하게 형님 동생 하자고 했잖아? ,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로 우리 역시 반쪽 양반이라고 그동안 얼마나 괄시를 받고 살았는가? 그런 우리가 누굴 또 괄시 한단 말인가? 이제 곧 세상이 변해서 돈이 벼슬이요, 양반인 세상이 오고 있잖은가 말이야."

"쯧쯧, 저 친구 이미 부가옹이 다 된 듯한 말투일세.…"

김진국이 빈정거리자 권철후가 더욱 힘을 주어 한마디를 보탰다.

"행여, 그런 세월이 오지 않으면 까짓, 나는 되 땅(淸國)으로 건너 가려네."

"권 포교 말이 옳은 말일 지 몰라. 청국에서는 백정도 천시를 하지 않는다더군."

등짐을 다 묶고 무게를 가늠하든 원 포교의 말이었다. 그러자 김진국도 손을 탁, 털며 싱긋 웃었다.

", 좋네. 까짓, 어차피 벗어던진 인생이긴 마찬가지인데.... , 거칠아, 이제부터는 날, 성님이라 부르거라. 핫하하."

김진국이 주흥식 앞에서 시원스레 승복(承服)을 하니 나머지 포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한데 방장인 방인근(方仁根)은 어딜 갔나? 그러고 보니 부 방장도 없구먼. , 아무리 뱃짐 없는 객주에 겨울 파리를 날린다지만 이거야 원, 아니, 이 친구들 다 어디 간 거야?"

주흥식이 옆에 있는 김진국에게 하는 말을 권철후가 나섰다.

", 방장님은 부 회주님 방에 계실 겝니다. 새벽부터 시전에서 상공원(上公員)이 왔거든요. 허고 부방장은 나룻터 김가 객주에 어음을 다지러 갔지요."

"기형도는 그렇다 치고.... 상공원이라니? 무슨 일로?"

"글쎄요. 허나, 뻔한 것 아닙니까. 또 북어 때문이겠지요. 송상이 갖고 있는 북어를 못 뺏어 안달이 난 놈들 아니겠습니까?"

", 송상이 쉽게 내놓겠나? 우리도 그나마 3천 쾌를 구하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형님도 어서 부 회주님 방으로 가 보시지요."

"그러지. 자네들은 오늘도 북어를 팔러 가려는가?"

"그럼입쇼. 며칠 다녀보니 다른 물종보다는 역시 북어가 쉽게 팔립디다. 하하."

"그 사이 장사 솜씨가 좀 늘긴 늘었나 보군. 못 팔겠다는 소리가 없는 걸 보면. 어쨌든 부지런히들 팔아 보게나. 처자식 먹여 살리자면 그 길밖에 더 있나? , 다음에 봅세. 가만, 거칠이 너는 장사를 안 나가느냐?"

"쉔네에겐 아직 그런 하명이 없었습니다."

"그래?"

주흥식이 고방을 나와 노탁우가 머무는 방으로 향하는데 마침 시전의 상공인이라는 자가 마루에서 댓돌로 내려서고 있었다. 그 자는 솜을 두둑이 두고 지은 두루마기에 중갓을 쓰고 있었다. 상공인이라면 대행수 아래에서 거행하는 중간 정도의 지위이나 이자는 공인(貢人) 임을 앞세워 제법 점잔을 빼는 듯 느릿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그럼, 시생은 물러갑니다. ."

"일간 도령위께 기별이 갈 것이오. 허허. 살펴 가시구려."

부 회주인 노탁우를 대신해 마루로 나선 방인근이 상공인을 배웅하고 있었다. 주흥식은 미투리를 벗고 선 듯 마루로 올라서 방인근의 옆구리를 슬쩍 건드렸다.

"이번엔 무슨 일인가?"

", 뻔한 일 아닌가? 북어지...."

", 역시 북어가 도성 안팎에서 천세가 나는구먼...."

"그러게나 말일세. 헌데 자네 이른 시각에 여긴 어인 일인가?"

"? 내가 일찍 오면 안 될 일이라도 있나?"

", 사람하고는....."

"자네, 고방엘 가 보게. 짐들을 다 꾸린 것 같더구먼."

", 그러려 든 참일세. 어서 들어가 보게."

주흥식이 방으로 들어와 아랫목에 앉은 노탁우에게 너푼 절을 올렸다.

"부 회주님께선 그새 강녕하십니까?"

", 자넨가? 어서 오게나, 헌데 강녕이라니? 이제 내 나이 쉰하나인데 늙은이 같은 문안 인사받기엔 이르지 않나? 헌데 무슨 급한 볼일이 있는 겐가? 지금 송파에서 오는 길인가?"

"아니 옵니다. 급한 일도 없고 송파에서 오늘 떠난 것도 아니 올시다."

"그래? 그렇다면 밖에 저 아이들 때문이겠군. 이 번에 맡긴 아이들이 어찌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왔다면 걱정 말게. 이젠 제법 장사하는 재미를 아는 것 같으니 말일세."

"소인이 보기도 그렇게 보이옵디다만, 그도 아니 올시다."

"그래? 그렇다면 회주님 말씀을 전하러 왔겠구먼."

"죄송하오나 그도 아니 옵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어째 온 건가?"

노탁우가 우둥퉁한 얼굴에 가득 채웠던 웃음을 거두고 정색을 하며 물었다.

"실은..... 회주님 명으로다 칠패(七牌)의 대갈장군을 만나고 오는 길 입지요."

"옳지, 칠패가 근자에 점점 성해지니 이참에 상조회가 그곳에다 직접 물화를 대실 모양이로군."

"그렇습지요. 육의전에 대는 것보다 이문이 곱절입지요."

"진작에 그랬어야 하는데 수령위 문기수의 돈을 먹는 통에 이제껏 어물전 좋은 일만 시키지 않았었나?"

"그렇습지요. 그래서 소인이 어제 대갈장군과 머리를 맞대었습지요."   

"그래, 일은 잘 되었나?"

", 이제부터는 내외어물전 보다 칠패로 가는 어물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이제사 칠패 건이 마무리가 되었군. 자네가 수고 했네."

"제가 수고랄 게 뭐 있나요. 이게 다, 황구만의 머리에서 나온 일인 걸입쇼."

"그렇겠지. 아무튼, 황구만이 장사의 묘리엔 능한 사람이야."

"그럼입쇼. 하하하."

주흥식이 쾌활하게 웃음을 터트리자 노탁우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다 갑자기 정색을 하고 주흥식을 뻔히 쳐다보았다.

"아니, 부 회주님께서 제 얼굴은 왜 그리 보시는지요?"

", 생각해 보니 그 일은 이미 지난달에 마무리가 되지 않았나? 허고 어제는 어디서 잤기에 이렇게 이른 시각에 나타났는가? , 이실직고하는 게 좋을 게야."

"실인즉, 어젯밤 곰보네 투전방에서 지샜습지요. 회주님의 명령이 계시어 투전방에서 여러 놈을 붙잡고 무엇을 좀 알아보았습죠."

"무엇을?"

"망태 패거리 말입니다."

"망태라? 그가 누군가?"

"아니? 망태 패거리가 나룻터 주막에서 투전방을 열었다는 소식을 못 들으셨습니까?"

", 그놈이 망태인가? 그 일이라면 방인근에게서 얼핏 들었었지. 하지만 우리는 그놈이 무얼 하건 두고 보기로 하지 않았나? 헌데 투전방에서 무엇을 하기에 회주님께서 관심을 가지 신단 말인가?"

"그게.... 망태란 놈이 투전으로 이곳 삼개의 신탄 장삿꾼들 돈을 다 옭아 먹으려 한다는 소문이 들어와서 입죠. 회주님께서 몹시 언잖아 하시고 계십니다."

", 그놈들이 투전방을 차렸을 때야 어디 신탄 장사만 노렸겠나? 이곳 객주는 물론 투전방 소식 듣고 사방천지에서 노름꾼이 몰릴 테고 돈푼이나 거머쥔 장삿꾼들이 죄다 몰려들 텐데 그놈이 그걸 마다하겠나?"

"그렇겠습지요. 하나, 망태란 놈은 죽은 마 포교의 손에 혼뜨금이 나서 한동안 보이지 않더니 상조회가 상고로 돌아섰다는 소문이 나자 다시 슬금슬금 나타나 삼개를 본거지로 삼으려나 봅지요. 대동계는 얼음이 얼어 못 해 먹으니 투전판을 벌여보겠다는 수작 아니겠습니까? 그리되면 이곳 상인들의 주머니가 다 털릴 터이니 우리 장사인들 되겠습니까? 뿐이 옵니까? 이제 곧, 포도청에서도 눈독을 들일 텐데 그리되면 우리들에겐 이롭지 못한 형세 입지요. 회주님께서는 그 점을 염려하시어 이참에 망태 패거리를 아예 없애실 의향인 것 같사옵니다."

", 방인근이 이르는 말을 내가 소홀히 들었구나. 놈들이 아랫 강에서 놀던 억만이 패와 합쳤더라는 말을 내가 들었건만 내가 그 걸 흘려 들었단 말일세. 이거, 큰일 아닌가? 어쩌면 놈들의 세력이 와해되기 전보다 아마 더 커졌을 것일세."

"회주님께서 우선 그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 만 알아오라 셨습니다. 소인이 보고를 드리면 이제 곧 무슨 조치가 있으시겠지요."

"그러시겠지. 허나 무혈(無血)로 쫒았으면 좋을 터인데.... 피를 흘려서야 상조회에 도움이 되겠나?"

"그야 그렇겠습지요 마는 그놈들도 이번엔 일전을 불사할 터인데 일이 쉽게 풀리겠습니까? 우리의 앞날에 방해가 될 양이면 아예 싹을 자르니만 못할 것이 옵니다."

"옳은 말이나.... 지난 번 강화의 천수패가 생각 나서 일세. 신중(愼重) 할 일이네."



그 시간에 송윤호는 댓돌에 내려서 삽짝문을 향하고 있었다. 고방에서는 전직 포교들이 그날 팔 어물 짐을 지고 줄줄이 나오고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다 팔고들오게. 못 팔고 오는 사람은 부 회주님의 낙점이 없을 터, 그리되면 언제까지나 이곳을 벗어나지 못 할 것이야."

방인근이 그들의 등 뒤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허허, 방장 말씀이 아니라도 저 사람들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다 팔고 들 올 겝니다."

", 송 의원이시오? 아직 성치 않은 몸이실 터인데 어딜 가시오? 바람이 사뭇 차오이다."

"허허, 병이랄 것도 없는 몸이었으니 진작 기력은 회복이 되었소이다. 갑갑해서 강변엘 나가보려 합니다."

"그러시다면 조심히 다녀오시지요."

송윤호가 삽작을 나서 몇 걸음을 옮겼을 때 뒤에서 거칠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으리 이 추운 날에 어딜 가시 옵니까."

", 네가 갖고 온 솜옷을 입었는데 추울 리가 있느냐? 내 답답해서 강변에 나가는 길이니라."

"그럼 소인이 모십지요."

"너는 고방에 일이 없느냐?"

"갔다 와서 마저 합지요. 일도 일 같지 않은 일이옵니다."

"그래도 남의 일을 봐 주려면 성심껏 해야 하느니."

"아옵니다. 헌데.... 나으리, 쉔네도 어물 장사를 했으면 합니다. 강이 얼고 도선(渡船)도 끊겼으니 이곳에만 있어서는 큰댁 도련님 소식을 알아낼 수가 있어얍죠? 이럴 바엔 겨울 동안이나마 등짐을 지고 사방을 다니며 찾아보고 싶사옵니다."

송윤호는 말이 없이 걸음을 옮겼다. 거칠이 그 뒤를 따랐다. 잠시 뒤에 송윤호가 가만히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나라고 왜 진작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느냐? 허나 사람이란 염치가 있어야 사람이니라. 우리가 일삭(一朔)이나 이곳에 의탁을 했으니 그 보답을 하고 떠나는 것이 도리인데 지금 가진 것이 아무 곳도 없으니 그 도리조차 못해서 이러고 있느니라. 허나, 생각해 둔 바가 있으니 걱정 말거라. 객주에 작은 보탬이라도 하고 떠나려 한다. 그러니 너도 조금만 참고 있거라."

"나으리의 의중이 그러시다면 쉔네는 그대로 따릅지요."

송윤호는 언덕의 움막들을 지나 강변에 닿도록 아무 말이 없었다. 강은 강추위에 두껍게 얼어서 마소가 충분히 다닐만했다. 마침 장작을 실은 소가 느릿느릿 얼음 위를 걸어오고 있었다. 송윤호가 자세히 보니 소의 발에는 짚으로 삼은 신발이 신겨 있었고 빙판에는 모래가 흩뿌려져 있었다. 아마 마소가 미끄러워 넘어질까 해서였을 것이다.

"옛부터 밤섬의 신탄은 유명짜 했느니라. 저 다락같이 쌓인 나무들을 보아라. 저 땔감들이 아니면 도성 안에서는 무엇으로 밥을 짓겠느냐?"

"나으리, 이참에 밤섬을 돌아보시지 않겠사옵니까?"

"밤섬을? 오냐 기왕 나온 것, 그러자꾸나. 내 이제껏 밤섬에 가 본 적이 없었느니라."

모래가 뿌려진 얼음판 위를 주종(主從)이 쉽게 건넜다. 강 건너서 보든 밤섬은 엎드린 소 잔등 만 하게 보였었는데 와서 보니 제법 큰 섬이었다. 뿐만 아니라 동남 쪽과 서북 쪽 좌우로 바위로 된 언덕과 그 아래 넓은 채마 밭과 도선장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송윤호는 아득히 먼 강 아랫녘을 바라보았다. 드넓은 얼음 벌판이 햇빛에 반짝이고 난지도 부근의 산들은 선경과도 같았다. 밤섬의 철 지난 먼 밭 자리에는 두루미들이 내려앉아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그리고 강기슭과 초가집 옆에는 장작과 섶 나무가 산처럼 높이 쌓였는데 대강 세어도 얼추 스물은 넘어 보였다.

"나으리, 강 건너서 보던 것 보다 장작더미가 엄청 나옵니다. 이 많은 나무들이 다 어디서 왔을까요?"

"그러게나 말이다. 강을 따라 내려왔겠지만 매년 이렇게 많은 나무가 베어지고서야 어찌 조선의 산들이 헐벗지 않으리. 아마 백 년 이내에 조선의 산은 모조리 민둥산이 되고 말게다. 쯧쯧."

"설마 그렇기야 하겠사옵니까? 우리께 김화만 하드라도 산에 나무가 꽉 찼사옵니다."

", 심지는 않고 베기만 하는 세태(世態)이니 김화의 산 인들 오래가겠느냐?"

"나으리 저쪽에 사람들이 모여 있사옵니다."

"그렇구나. , 장작을 싣고 있나 보구나."

가까이 가 보니 한 쪽에선 도끼로 통나무를 쪼개어 장작을 만들고 다른 쪽에서는 소 잔등에 장작을 싣느라 십여 명이 북적대고 있었다. 장작을 싣고 있는 소만해도 십여 마리나 되었다.

", 깜보 너는 일을 하다 말고 또 어딜 가는 게야?"

", 똥이 급하우. 금세 싸고 올 테니 걱정 마시우."

", 저놈, 주둥이 놀리는 것 하구서는. 남들은 먹은 게 없어 사흘에 한 번 싸기도 힘들 건만 어찌 된 게 저놈은 하루에도 똥을 열댓 번을 싸 재끼니.... ."

이마를 싸맨 수건 위로 맨 상투가 덩그러니 솟은 키 큰 사내가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깜보를 노려 보았다. 그러자 어떤 작자가, 모두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하루에 열댓 번이면 그게 설사지 어디 똥 인감?"

"뭐야? 설사는 똥이 아닌감?"

그 말에 여러 사람들이 들썩하게 웃었다. 송윤호는 그들을 지나 초가집이 늘어선 곳으로 향했다. 그때 앞 쪽의 초가집에서 어떤 젊은이가 삽작을 나서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앞선 송윤호 보다 뒤따라 오던 거칠이를 먼저 보았는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거칠이 형 아니우? 그새 결심했단 말이우? 잘 됐수. 그러지 않아도 내 지금 덕구 놈을 데리러 가는 길이요."

", 동이구나. 네 집이 여기냐?"

거칠이가 동이를 향해 반갑게 웃었다.

"그렇소. 여기가 내 집이오. 가만 이 분은? 아이고 의원 나으리 아닙니까?"

", 거칠이가 말하든 동이라는 젊은이로군."

", 그렇습지요. 거칠이 형을 찾아 식전에 객주에 갔었습지요."

"거칠이를? 그래, 무슨 일로?"

"그보다, 의원 나으리, 길에서 이러실 게 아니라 누추하지만 잠깐이라도 소인의 집으로 드시지요."

"아니, 괜찮다."

"아니 옵니다. 추운 날씨에 그럴 수는 없습지요. 어서 드소서."

동이가 제 집으로 뛰어들어 제 할애비를 불렀다. 그러자 지겟문이 열리더니 늙은이가 고개를 내밀고 가래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커억, 넌 금세 나가더니 또 웬일로 소란이냐?"

"손님이 오셨수. 의원님과 동무 거칠이 형이 왔단 말이우."

노인은 동이의 뒤에 선 사람을 보더니 흐린 눈으로 송윤호의 옷차림을 천천히 훑었다. 그러다 송윤호가 맨 머리일망정 긴 소매에 솜 넣은 두루마기 차림임을 알았다.

"아이고 이 누추한 곳을.... 어서 드시지요."

동이의 권에 마지못해 들어선 송윤호가 짚신을 벗고 노인의 방에 들어섰다. 노인의 방은 천정도 얕은데다 어둡기까지 했다. 게다가 연초에 쩔은 매케한 냄새에 메주 냄새에 노인 냄새까지 보태니 송윤호는 골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땔감이 흔해선지 낮인데도 방바닥은 뜨뜻하여 좋았다.

"이를 어쩌나.... 귀한 손이 오시어도 집안에 대접할 만한 것이 없사옵니다."

노인이 머리를 주억 거리며 미안한 뜻을 나타내자 송윤호가 손을 휘저어 노인을 만류했다.

"천만의 말씀이요, 대접받고자 온 길이 아니니 노인장께선 그런 말씀 마시오."

"밖에 있는 저놈이 제 손자이온데 수 년 전에 부모를 잃었습지요. 그 뒤에 쉰내가 저놈을 돌보다가 근자에 이르러 저놈이 되려 쉰네의 뒤치다꺼리를 하니 딱한 일 입지요."

"그 것이 사람 사는 이치 아니겠소. 그래 노인장은 이곳 태생이시오?"

대접할 것을 걱정하는 노인이 딱해서 송윤호가 얼른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럼입쇼. 수 대째 이 자리에 살아오고 있사옵니다. 우리 석가(石哥)성을 가진 이들이 이 섬에 십여 호 됩지요."

"석 씨의 집성촌인가 봅니다 그려."

"웬걸입쇼, 석가 말고도 마가, 인가, 선가, 피가들이 있습지요."

", 그 성씨의 사람들은 대체 무엇으로 생계를 잇소?"

"몇몇 성씨는 배 목수질로 사옵고 나머지는 배가 닿으면 새우젓 독을 나르기도 하고 그물질이나 막일로 사옵지요. 그러다 찬 바람이 불면 보시다시피 죄다 나뭇단에 목줄을 거옵니다. 얼음이 얼면 잉어를 잡아 팔던 손자 놈도 이번 겨울엔 나무 장사로 나서게 되었습지요."   

"그러하오? 허긴, 이곳이 아니면 도성 안에 제대로 된 장작 다발을 들일 길이 없긴 하오. 허허."

"그럼입쇼. 나랏님이 계신 궁궐에도 여기께 나무가 들어 갑지요."

그때, 송윤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에서 동이란 놈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새 둘이서 무슨 얘기들을 나눈 듯 했다.

"의원 나으리, 쉔네가 감히 청 여쭙니다. 거칠이 성님을 나무 장사로 나서게 해 주시옵소서. 쉔네와 짝패를 이뤄 다니고 싶사오이다."

의외의 말에 송윤호가 잠시 말이 없었다.

"거칠이를? 허나, 그건 아니 될 일이다. 우리는 이곳에 오래 머물지 못할 사람들이니라. 허니 어쩌겠는가? 다른 사람을 찾아보게나."

"? 그럼 삼개를 뜨신단 말이옵니까? 이 엄동에 말이옵니다."

동이의 놀람과 실망이 섞인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 그럴 사정이 있느니. 어쨌든 안 되었네."

송윤호는 그만 일어나기로 했다.   

"노인장 덕분에 잠시나마 몸을 녹였으니 고맙소. 이만 또 가 보아야겠소."

"에그, 금세 일어서시다니 쉔네가 송구하옵니다."

"노인장께서 송구할 일이 아니오. 급작하게 닥친 내가 면구할 일이지요."

방문을 나선 송윤호의 뒤를 거칠이가 따르니, 동이도 함께 나섰다. 노인은 삽짝 밖에 나와 배웅을 하였다.

", 추운데 왜 나오셨소. 어서 들어 가시오."

송윤호의 손짓에 노인은 연방 고개를 숙이면서도 그가 양반인지 상놈인지 새삼 헷갈렸다. 말씨는 점잖되,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으니 양반이랄 수도 없고 소매 달린 긴 두루마기를 입었으니 상놈도 아닌 것이었다. 아무튼 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으로 들었다.

"덕구에게 가려면 동이 너는 저쪽으로 가야겠구나."

"이렇게 되면 덕구를 동생 삼아 데리고 다니는 수밖에 없구려. 의원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성님도 잘 가우."

덕구와 헤어진 송윤호가 다시 강을 건너 강변을 거닐다가 왔던 길을 버리고 얕은 언덕을 넘어 객주와 술집이 있는 작은 동네로 들어섰다. 그곳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술집을 드나들고 있었다. 객주 역시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이곳은 객주 자리가 아니냐? 헌데 추운 날씨에도 사람들이 제법 붐비누나?"

"여기가 새우젓 객주임은 쉔네가 잘 아옵지요. 쉔네가 여기로 독을 날랐습지요. 헌데 이상 합니다. 새우젓 철이 끝난지 언제인데.... 보아하니 아무런 짐도 들락거리지 않굽쇼."

"그렇구나. 어제 방인근 방장이 저희 부 회주에게 이르는 것을 들었니라. 여기가 투전방이 되었다는 객주구나."

송윤호의 말대로였다. 새우젓을 맡아 이문을 남기던 객주들이 강이 얼어붙자 재빨리 노름방을 여는 왈짜들 편에 붙은 것이다.

"어서 가자꾸나. 투전이라니.... 예전에는 보지 못한 놀음이니라."

"? 예전에 없었다면 투전이란 게 근래에 생긴 놀음이옵니까?"

"그렇니라. 내가 어릴 때에 놀음이란 윷이나 쌍륙, 아니면 곤을 누며 놀았지. 어른들도 마찬가지라 장기나 바둑, 또는 골패라는 걸 했지. 내 생각이다만, 투전은 상평통보가 나오고서야 널리 퍼진 것일 게다. 그전에야 무슨 돈이 있어 내기를 했겠느냐? 무명이나 쌀로 내기가 제대로 되겠느냐?"

송윤호의 말이 옳았다. 투전이란 본래 서양을 말발굽으로 짓밟을 때, 몽골 병사들이 서양의 카드 놀음을 들여온 것이 최초였다. 그 놀음이 후에 중화인의 입맛에 맞게 명대(明代)의 마조(馬弔)와 섞였고 종래엔 여진 땅으로 건너가 현금의 투전이 완성되었다고 봐야 옳다. 그래서 원나라나 명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여진의 투전은 애초에는 40장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투전도 처음에는 40장이었고 여진 글씨로 패의 끗발이 적혀 있는 것이다. 사람, 물고기, , , 노루, , 토끼, 말 등의 그림이 그려진 것은 한참 뒤인 숙종 말년의 일이다. 지금이 숙종 초이니 아직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확실하게 해둘 일이 있다. 투전이 조선에 들어온 시기에 대해서 사람마다 다르고 추측도 여러 갈래이나 개중에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이 역관 장현(張炫)이 숭정(崇禎, 1628~1644) 말년에 들여왔다는 것이다. 숭정 말년이면 병자호란이 나고도 오륙 년 뒤다. 하나 그것은 모르는 소리다. 투전은 병자호란 훨씬 전에 이미 평안도와 함경도 국경에서 수자리를 사는 병사들 사이에서 성행하고 있었던 때문이다.

이는 광해군 시절 사르후 전투(1619)에 참가했다가 여진에게 포로가 된 정명수(鄭命壽)가 되 땅에 남아 그들과 어울리며 배운 것이었다. , 혹자는 그가 사르흐 전투 이후, 인조 7(1629), 강홍립을 따라 또다시 부차 전투(富車戰鬪)에 참가한 것으로 묘사하는데 이도 잘못된 말이다. 왜냐하면 정명수는 정묘호란(1627) 때 이미 청군의 길잡이로 내려온 전력(前歷)이 있기 때문이다. 정명수는 알다시피 조선이 생긴 이래, 아니 단군(檀君)이래 최대의 매국노로써,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장수의 통역을 맡아 조선의 왕과 조정 대신들을 개떡처럼 주무르던 놈이 아닌가? 바로 그 놈이 정묘년(1627)에 제놈의 고향인 평안도 은산으로 보란 듯 금의 환향했을 때 같이 놀던 어릴 적 천출(賤出) 동무들에게 배워 준 것이 바로 투전이다. 그러니 장현이 맨 처음 들여왔단 소리는 손자가 할애비를 낳았단 소리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 투전이 국경 지대에 퍼지더니 수자리의 따분함을 이길 좋은 놀이가 된 병졸들이 열렬히 즐기게끔 되었다. 그 후, 투전은 조선 팔도에 슬금슬금 퍼져나가서 현금(現今)에는 한양의 중인(中人)들을 중심으로 별감과 상인, 무뢰배의 구별이 없을 정도로 성행하고 있었다. 후일의 얘기지만 영, 정조(, 正祖) 때에 이르면 위로는 당상 벼슬부터 아래로는 머슴과 종에 이르기까지 조선 팔도가 돌려 태기에 몸살을 앓을 지경에 이른다. 오죽하면 임금이 투전의 패해에 대해 옥음(玉音)을 높이셨다고 실록에 적었을까? 여담이지만 조선 말기에는 왕가의 후손과 당상관 아무개도 투전의 고수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어쨌든, 숙종 말쯤에는 투전의 놀이 방법도 눈부시게 발전하여 406080장 짜리도 생기고 규칙도 지방마다 달라지게 되는 것은 후일의 일이다. 투전이 이렇듯 사람의 혼을 빼 놓은 것은 송윤호가 말한 데로 엽전의 출현이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큰 판은 황소가, 작은 판은 닭이, 엽전으로 변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야 환장하지 않을 인간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요행수나 내기를 좋아하기로 청국과 왜국까지 소문난 조선인들 아닌가. 근래에 새로 생긴 돌려 태기나 동동이에 너나 없이 목숨들을 걸고 덤벼드는 이유가 여기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날 저녁이었다. 저녁을 먹은 송윤호가 노탁우의 방으로 불리어 갔다. 노탁우가 예의 그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송윤호를 맞았다.

"송 의원 어서 오시오. 석식은 드시었소?"

"()가 아닙니다만 오늘도 부 회주님의 호의에 힘입어 무위도식(無爲盜食)을 했습니다 그려."

"하하, 무위도식이라니 천부당한 말씀 올시다. 재담으로 듣겠소이다."

"사실 제 한 몸도 아니고 주종이 이렇듯 패를 끼치고 있으니 바늘방석이 올시다."

"송 의원 께서는 아무 걱정 말고 머무르고 싶은 만큼 머무시지요. 회주님의 간곡한 부탁의 말씀도 계셨습니다."

", 일면식 없던 사람을 이렇듯 대접해 주시니 면구하고 송구한 일입니다."

", , 그런 말은 서로 접기로 하시지요. , 낮에 밤섬엘 가 보셨다구요?"

서로 간에 끝없는 겸양(謙讓)의 말을 자르 듯 노탁우가 화제를 돌렸다.

", 아침에 잠깐 가 보았지요."

"강 건너에서 보던 것과 풍광이 어떠합디까?"

"풍광 보다 산처럼 쌓인 신탄에 놀랐지요. 과연 그만한 양이 있기에 그 많은 도성의 가가호호가 불을 지피겠더군요."

"하하하, 그 많은 신탄을 만약 돈으로 따진다면 얼마나 될까요?"

"그것까지야 따져 보질 않아서 모를 노릇이나 얼핏 보아 수 천 냥은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쌀 한섬이 석 냥이니 수 천 냥이면 어마어마한 거금이지요."

"들으니 밤섬엔 희성들이 모여 살고 또한 그들이 신탄을 도맡아 판다니 돈도 그들에게 풀리겠지요."

"사실 그래서 문제 올시다. 돈의 액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지요. 근자에 신탄의 거래가 더욱 많아지니 그걸 노리는 패가 생길 수밖에요."

노탁우가 점점 희미해지는 등잔의 심지를 귀이개로 돋우며 얼굴을 돌렸다. 밝아진 불빛에 노탁우의 얼굴빛은 오히려 아까보다 어두워 보였다.

"그걸 노리는 무리가 있단 말입니까? 어떤 왈짜 패거리가 수 백의 목숨이 달린 그 돈을 노린단 말입니까?"

"왜 없겠소이까? 세도가 청지기들은 예부터 주인보다 횡포가 심한 법이고 시중 별감이 왈짜와 통한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노릇 아닙니까?"

"그래도 그렇지. 설마 그런 일이야 있겠습니까?"

"글쎄올시다. 저 역시 그랬으면 합니다만, 그런 풍문이 우리 상조회에 이미 들어왔으니 생판 없는 일은 아닐 겝니다 그려. 허허."

", 밤섬에 갔다 오는 길에 보니 저쪽 삼개 객주 자리가 투전판으로 변했습디다 그려. 도대체 투전이 무엇이관데 이렇듯 날이 갈수록 성한 지 모를 노릇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 그 일이라면 어제도 오늘도 들은 바가 있소이다. 놈들은 아마 신탄 장수들의 돈을 노리는 모양입디다."

"허어, 거 큰일 올시다. 순진한 신탄 장수들이 그들의 손에 당하겠군요?"

"그건 송 의원이 잘못 아시는 것 입니다. 대대로 신탄 장수로 살아온 그들이 순진하지 만은 않지요. 순진만 해서야 그 들의 장사가 지속이 되었겠소이까?"

노탁우는 되려 송윤호의 말이 더 순진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벼슬을 버리고 양반을 버린 척해도 역시 책상물림의 생각은 어쩔 수 없구나. 밑바닥 저잣거리에서 살아보지 않았다는 말이겠지. 쯧쯧.'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물화의 흐름을 짚어내는 송윤호의 식견에 수차례 탄복을 한 바가 있었다. 게다가 이제껏 그와 얘기를 나누어 보았지만 그의 생각과 깊이는 가늠키 어려울 만 하던 것이다. 어쨌든 포도청 일이라면 남에게 지지 않겠으나 장삿길은 어둡기 짝이 없으니 송윤호에게 좀 더 얻을 게 있으리라 여기는 노탁우였다.

"부 회주님, 소인 기형도 옵니다."

방문 밖에서 들리는 말이었다. 이어 문이 열리더니 부 방장인 기형도가 노탁우와 송윤호 둘 중 누구에게인지 모를 절을 꾸벅 하였다.

", 모두들 석식은 들었는가?"

노탁우가 그답게 느긋한 말씨를 내놓았다.

", 모두들 부 회주님의 낙점을 기다리고 있습지요."

"그래? 그렇다면 건너 가 봐야지, 송 의원 같이 가시지요. 좋은 말씀도 좀 해 주시구요."

"허허, 장삿꾼이 물건을 팔았으면 그것이 곧 장사를 깨우친 것인데 무슨 사족(蛇足)이 필요하겠습니까. 허허."

"겸양의 말씀 올시다. , , 가시지요."

세 사람이 전직 포교요 현직이 도부상인 그들이 기다리는 방으로 세 사람이 들어서니 방인근을 비롯한 여덟 명이 벌떡 일어나 일제히 목례를 하였다. 그들의 일사불란한 행동에는 여전히 포교 시절의 습관이 있어서 노탁우도 얼결에 군례로 답레를 하였다.

"아차, 나도 모르게 또 버릇이 나왔구나. 이러니 흥정을 하다가도 옛 적 버릇이 나와 오랏줄을 찾지 않겠나?"

노탁우의 실없는 말에 모두들 웃었다. 노탁우와 송윤호가 자리에 앉자 우르르 맞은편에 모여 앉았다.

"그래, 오늘은 물건을 어디로 가서 풀었나?"

노탁우가 입은 웃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농을 하 듯 물었다. 분위기를 눅게 하려는 배려였다.

"버티고개 넘어로 갔었답니다."

노탁우는 오늘 장사를 나갔던 사람들에게 물었는데 종일 객주에서 빈둥거린 방인근이 대답을 가로채자 이마에 주름을 만들었다.

"누가 자네에게 물었단 말인가?"

"버티 고개를 넘자말자 둘로 패를 나눠 소인의 패는 왕십리 촌가를 돌았습지요."

방인근의 무색함을 덮어 주려는 듯 권철후가 재빨리 대답을 하였다. 김진국의 대답도 연 이었다.

"소인의 패는 광희문(光熙門) 밖의 무당촌을 훑었사옵니다."

"그래서 갖고 갔던 북어는 다들 팔았는가?"

"그게, 무당촌으로 갔던 패는 사정이 나으나 소인의 패는 지고 나간 열 쾌 가운데 절반 밖에는 팔지 못 하였사옵니다."

"? 어째서? 이제껏 잘 해 오다가 왜 못 팔았단 말인가?"

장사를 나갔던 일곱 명은 코가 빠져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권철후가 다시 나섰다.

"촌 동리에 어디 돈들이 있어얍지요. 그나마 판 것도 곡식으로 대신 받았사옵니다."

", 성 안과 바깥의 살림살이가 이토록 다르니 원, 그놈의 금난전권만 없어도 도성 안에다 풀면 단번에 부자가 되련만... 에이 쯧쯧. 송 의원, 이럴 땐 어디로 가면 팔리겠소이까?"

노탁우의 탄식에 송윤호가 할 수없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져, 장사란 물건이 꼭 필요한 사람을 찾으라 했습니다. 꼭 필요한 물건이면 빚을 내서라도 살 것이요,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그냥 준대도 반갑지 않겠지요. 중놈에게 참빗이 필요한 물건이겠습니까마는 아녀자들에게는 귀한 물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빗이라면 촌가 보다는 기방(妓房)에 가면 더 잘 팔릴 것이오이다."

"허허 그렇겠구려."

노탁우가 맥없이 웃는데 김진국이 시빗조로 송윤호의 말을 걸고 나섰다.

"말은 쉬우나 장사가 어디 말처럼 쉽소이까? 세상에 북어가 필요 없다는 사람을 여태 본 적이 없소. 헌데 왜 안 팔린단 말이우?"

"그 것은 여러분이 오늘 간 곳은 시전과 칠패가 멀지 않기 때문일 겝니다. 필요하면 언제나 살 수가 있는 거리니 아쉽지 않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를 가면 쉽게 팔겠소?"

"병자 년 이후 성벽을 의지한 사대문 밖의 가호 수가 부쩍 늘었음을 다들 아실 게요. 그들은 시전은 엄두가 안 나서 못 가고 칠패는 멀어서 못 가나 다들 북어 귀한 줄을 알 겝니다. 또한 그들도 입이 있으니 싸고 맛 좋은 북어를 먹고 싶지 않을 리가 없소이다. 그런 곳으로 돌면 장사가 될 것이오. 그리고 향교나 문중의 종손 집을 수소문해 두면 년중(年中) 팔기가 쉬우리다."

송윤호의 말에 다들 그렇기도 하겠구나 하는 마음인데 또 다시 김진국이 나섰다.

"송 의원 말인즉슨 옳은 말씀 같긴 한데 어찌 좀 미진 하오. 성을 의지해 지은 집들이래야 유랑민들이 몰려와 지은 집들이 태반인데 그들에게 무슨 돈이 있겠소?"

"아무리 돈이 없어도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것을 보면 무슨 일을 해도 했기에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살지 않았겠소? 그런 사람들이라고 북어 한 쾌 사 먹을 돈조차 없겠소?"

"좋소이다. 그 말도 그럴듯 하니 믿겠소이다. 허나 향교나 종손의 집은 알아 또 무엇 하오?"

김진국의 끈질긴 질문에 질력이 나려는 송윤호의 심중을 읽은 듯이 노탁우가 빙긋 웃으며 무릎을 쳤다.

", 그건 내가 알 것 같고나. 향교나 문중의 장손은 사흘돌이로 시제(時祭), 기제(忌祭), 차례(茶禮), 묘제(墓祭), 이제(爾祭) 등으로 사시사철 제례(祭禮)가 끊이질 않을 것이니 북어는 물론 다른 물종도 다 팔 수가 있겠고나. 송 의원, 맞았소이까?"

"허허, 과연 부 회주님 다우시군요. 금난(禁亂)이 있어 도성 안에다 팔지 못할 바엔 그 길이 좋은 방편이 되겠지요."

"송 의원 께선 그렇게 상도(商道)에 밝고 이재(理財)에 밝으시니 마음만 먹으면 조선 제일의 부가옹이 되는 건 따 놓은 당상이겠소이다."

김진국의 끝 모를 빈정거림이 이어지자 오히려 노탁우의 인내가 바닥이 났나 보았다.

"자네는 어찌 사람이 까스라기 인가? 장사를 배우는 마당에 한마디 말씀에도 감흡을 해야 옳지. 자네의 태도는 흡사 자로(子路)는 가만히 있는데 자사(子思)가 나서 공자(孔子)에게 따지는 꼴 아닌가 말이야."

자사는 공급(孔伋)의 자()로 그는 공자의 손자이다. 노탁우의 말인즉, 수제자인 자로는 말이 없는데 감히 손자 놈이 할애비에게 따진다는 말이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다만 의원이라는 분이 의술보다는 상술이 뛰어나신 것 같아서 해 본 말씀 입죠."

"그래? 그럼 송 의원이 말씀은 잘하되 실제로는 이재(利財)를 취하지 못 하실 거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내기를 해 보면 어떻겠나?"

"내기라굽쇼? .... 좋사옵니다. 무엇을 파는 내기를 할깝쇼?"

김진국이 송윤호의 콧대를 꺾겠다는 승부욕이 앞서 선뜻 노탁우의 말에 찬동하고 나섰다.

"송 의원, 이왕 말이 이렇게 나왔으니 저 사람들을 이끌어 가르친다 여기시고 한 수 배움을 주시면 어떻겠소? 허나, 마음이 내키시지 않으면 그뿐이니 괘념치 마시오."

방인근을 비롯한 기형도와 일곱 명의 초짜 장삿꾼들의 흥미가 가득한 눈을 바라보니 송윤호는 싫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데, 노탁우 역시 은근히 바라는 얼굴이었다.

"좋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그동안의 후의를 갚을 길이 없었는데 잘 된 일입니다. 작은 보답이라도 하지요."

"후의라니 당치 않습니다. 헌데 장사를 하려면 물목을 정해야 할 터, 무엇이 좋겠소이까?"

"어차피 장사란 사는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을 파는 것이니, 물목은 각자가 알아서 가장 잘 팔리고 돈이 될 만한 것을 고르기로 합시다."

"그것이 좋겠소이다."

"옳아. 각자 잘 팔릴 물건으로 해야 내기가 되지."

"자네 말이 맞네."

"그렇겠군."

송윤호의 말에 모두들 공감하는 눈치인 가운데 노탁우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그야 그렇지요. 자신이 이길 수 있는 물종을 선택함이 옳겠지요."

이에 송윤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 물종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여러 백성에게 유용하게 쓰일 물건이라야 하고 사술(詐術)이 석여서는 안 되겠지요."

"당연히 그리해야지요. 그럼 언제가 좋겠소이까?"

"제게는 사나흘 정도의 여유는 주셔야 겠소이다."

"그러시지요. 나흘의 말미를 드리지요. 나흘 후면 열 이틀 날이군요. , 다들 들었겠다? 내기는 나흘 후 아침부터 일세. 이제 속이 시원들 한가?"

"우리 쪽에선 누가 나선단 말입니까?"

"글쎄... 그거야, 서로들 의논을 해서 정할 일이겠지."

노탁우의 말을 송윤호가 선뜻 나서 대답을 대신 했다.

", 그건 , 이렇게 하지요. 저는 거칠이만 데리고 나설 것이니 그쪽은 일곱 사람 모두가 나서도록 하시지요. 그리고 여러분은 나흘을 기다릴 것 없이 먼저 내일부터 장사를 하시오. 그러면 저는 다음 날인 열 이틀부터 나흘간 장사를 하고 보름날 들어올 터이니까요. 서로 간의 손익(損益)의 셈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으리다."

", 근리(近理) 한 말이요. 좋소이다. 그리합시다."

노탁우는 송윤호의 말대로 하기로 하였는데 김진국이 입맛을 쩍 다시며 다시 나섰다.

"송 의원께선 두 사람으로 우리 일곱 사람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시는 모양이구려. 그러다 지면 그 망신을 다 어쩌시려오?"

"허허, 지지 않을 터이니 걱정 마오."

노탁우와 송윤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방문을 나섰다.



이튿날 송윤호는 장사 밑천으로 노탁우에게 닷 냥을 빌려 거칠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 지금, 이 약방문을 들고 구리개(銅峴)를 좀 다녀오도록 해라. 장악원(掌樂院) 뒤 언덕길에 약방이 늘어선 것을 언젠가 너도 보았을 테지? 도가(都家)를 찾아서 이대로만 달라고 해라. 수량은 적어 놓았느니라. 나는 그동안 꿀과 소나무 뿌리를 구해 볼 터이니."

"꿀이라면 고방의 항아리에 있는 것을 보았사옵니다. 방장님에게 좀 얻으시지요. 헌데, 나으리 께서 괭이질을 어찌 하시겠사옵니까? 쉔네가 얼른 다녀와서 캡지요."

"별 소리를 다 하는구나. 양반을 버린지 오래라지 않더냐? 이제 곧 그보다 더한 장삿길로 나설 각오까지 된 터에 무엇을 가리리. 걱정 말고 어서 다녀오너라. 지게를 지고 가야 할 것이야. 아마, 닷 냥어치면 한짐이 넘을 게다. , 올 때는 이 객주로 오지 말고 언덕 뒤의 우리 움막으로 오너라. 이곳 사람들이 알아 좋을 일이 없느니라."

거칠이를 보낸 후 송윤호는 괭이를 빌려 소나무 뿌리를 캐러 둔지산으로 향했다. 산으로 가는 가까운 길이 나룻터 객주가 모인 곳이라 그곳을 지나는데 마침 목자가 불량해 보이는 작자들이 객주에서 몰려나오고 있었다. 송윤호는 그들의 손에 들려 나오는 사람을 보았다. 축 늘어져 팔 다리가 들려 나오는 사람은 얼굴과 옷이 죄다 피투성이였다.

"빌어먹을 놈, 다 털렸으면 조용히 갈 일이지. 행패가 웬 말인가 말이야. 얘들아 그놈을 아예 언 똥통에다 처박아 버려라."

문에 버티고 서서 큰소리를 지르는 사내의 손에는 짧은 곤봉이 들려 있었다. 송윤호는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 언덕길로 다시 올라섰다. 소나무는 흔했다. 산에 오르기 전에도    많았던 것이다. 송윤호는 서툰 괭이질로 힘겹게 몇 뿌리를 캐었다.



", 이것을 끓이고 졸여야 할 터인데 객주에서는 안 되겠고.... 움막에서 하자니 끓일 솥이 없고, 어디서 하면 좋겠느냐?"

구리개에서 약재를 짊어지고 돌아온 거칠이에게 송윤호가 묻는 말이었다. 거칠이가 사 온 약재는 수 십 가지였다.

"나으리 그런 일이라면 동이네가 어떨지요? 동이에게 쉔네가 가서 부탁해 보겠사옵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밤섬으로 내 달린 거칠이가 보리밥 한 솥 지을 때쯤에 돌아와 아뢰었다.

"나으리, 일이 되려는지 동이네 할애비가 이웃의 빈 집을 지소(指所) 해 주었사옵니다. 춘월이라는 퇴기가 살던 집이라는데 살펴보니 방과 부엌은 쓸만하더이다. 헌데, 솥이 없사옵니다. 허나 동이가 큰 솥을 구해보겠다 했사오니 심려 마소서."

"잘 되었구나. 그렇다면 어서 가기로 하자. 끓이고 조려서 환()을 지으려면 바삐 서둘러도 시각이 모자랄 것이다."

즉시 밤섬으로 건너 간 송윤호는 방에다 약재를 처방대로 갈라놓았다. 그 사이에 부엌에서는 거칠이와 동이가 솥을 걸고 물을 끓이느라 바삐 움직였다. 그리고 아침나절 동이를 따라 왔던 덕구란 놈이 송윤호를 보더니 신이 나서 땔감을 줏어다 나르고 있었다.

두 사람이 밤잠을 설쳐가며 꼬박 나흘을 애쓴 끝에 환약과 고약을 만들었다. 환약과 고약의 제조법은 평생을 벼슬에 한을 두었던 송윤호의 아버지 송시백이, 호구지책으로 의서를 파고들어서 이룩한 비법이었다. 송윤호는 모든 것이 준비되자 거칠이와 함께 짐을 지고 노탁우의 객주로 돌아왔다. 객주에는 나흘 전에 장사를 나갔던 일곱 명이 이미 돌아와 산가지를 놓아가며 얼마를 팔고 얼마가 남았는지 손익의 셈에 골몰하고 있었다. 손윤호와 거칠이가 짐을 마루에 벗어두고 방에 들자 노탁우가 방인근과 함께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나타났다.

"송 의원께선 무슨 물종을 마련하시느라 통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소? 마루의 저 짐이 내일부터 팔 물건인가 본데.... , 궁금하기 그지없구려. 설마 인삼에 녹용은 아니겠지요."

"허허, 인삼 녹용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일반 백성들이야 인삼 녹용을 먹기는커녕, 평생 구경이나 하겠소이까? 저것은 돈이 없어 의원에게 가 볼, () 조차 내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환약 올시다. 값도 눅어서 약 한 쌈지에 좁쌀 두 홉 값밖에 되지 않지요."

송윤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인근과 기형도는 물론 다른 사람까지 슬그머니 외면을 하더니 일제히 킥킥 웃거나 서로를 쳐다보며 입꼬리가 씰룩였다. 노탁우 역시 의외의 물건을 선택한 송윤호를 보고 눈이 둥그레졌다. 장사 밑천이라고 달랑, 닷 냥을 빌려 갈 때 <그깟 돈으로 무슨 장사를 한단 말인가>하고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헌데 약 값이란게 겨우, 좁쌀 두 홉이라니 엽전으로 치면 한 푼이 채 되지 않는 액수 아닌가? 그 걸 도대체 몇 쌈지를 팔아야 북어 한 쾌를 파는 것과 같단 말인가? 노탁우는 머릿속으로 얼핏 셈을 따져보았다. 그제야 방인근 이하 모든 녀석들이 웃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란 걸 알았다.

", 밑천이 단돈 닷 냥에, 다 팔아야 얼마나 남겠소이까? 허고, 그 약이란 것이 먹어 배가 부른 것도 아닐뿐더러 북어나 굴비처럼 일반 백성에게 그리 긴하게 쓰일 것 같지 않구려. 허나 스스로 정한 물목이니 어쩌겠소이까. 어쨌든 잘 팔아 보시구려."

노탁우는 송윤호를 향해 딱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부 회주님, 소인들은 나흘 동안 북어 이 백열 쾌와 굴비 쉰 두름을 팔았사옵니다."

", 그만, 셈은 송 의원의 장사가 끝나는 날, 서로 무릎맞춤을 할 것이니 그만 두게."

노탁우를 비롯한 객주의 모든 사람들이 송윤호를 비웃는 눈으로 보건만 정작 본인은 말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띠우고 좌중을 천천히 돌아 보는 것이다.

송윤호와 거칠이는 이튿 날인 정월 열 이튿날에 매서운 북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장삿길을 떠났다. 하필 그들이 장사를 떠난 날이 이번 겨울 들어 가장 혹독하게 추운 날씨였다. 송윤호는 도성을 피해 용산 쪽으로 길을 잡았다. 그러자니 자연 둔지산 아랫길로 나아갈밖에 없었다. 산 아래는 곧바로 강이어서 막힌 곳 없는 강바람은 매섭게 두 사람의 옷깃을 파고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눈발도 희끗희끗 날리기 시작하니 바람과 맞서며 걷는 길이라 고개를 푹 숙이고 손은 소매에 찔러 넣었다. 그러자 거칠이의 목 맨 목소리가 바람에 섞여 허공을 날았다.

"이 추위에 나으리께서 등짐까지 지시니, 쉔네가 송구하여 죽고만 싶사옵니다. 부디 나으리의 짐을 쉔네에게 올려 주시지요?"

그러나 송윤호는 눈을 부릅뜨고 앞을 바라고 나아갈 뿐이었다. 뒤따르던 거칠이가 송윤호의 등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나으리, 제발 나으리의 짐을.…"

"어허!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듣겠느냐? 나는 이미 양반을 버린 몸이요, 이젠 사천(四賤) 끝자락인 장사치 일 뿐이라지 않더냐? 장사치인 내가 등짐을 지지 못 한다니 될 말이냐?"

"쉔네도 아오나 나으리의 고초가.…"

"어허, 그만하거라. 허고, 그동안 내 생각이 짧은 데다 너무 안일했느니라. 원일이나 언년이가 언젠가는 삼개 나루에 꼭 나타나리란 그 생각이 애초에 잘못된 것이었어. 이렇게 발품을 들여 좀 더 세차게 찾을 궁리가 모자랐단 말이다. 그러니 이제라도 먼저 찾아 나서려는 것이야. 그렇다고 무작정 길을 나서면 굶어 죽기가 십상 아니냐? 이번 장삿길은 그것을 시험하는 길이니라. 장사를 하며 곳곳을 누빈다면 설마 찾기 전에 먼저 굶어 죽기야 하겠느냐? 허고, 팔도의 장시를 따라 우리가 원일이와 언년이를 찾기도 하려니와 그들이 또한 우리를 보게 되지 않겠느냐? 어쨌든 이번 길에 송파의 피행수(皮行首)를 만나 보려 하느니. 얘기가 잘 되면 상조회의 신세는 단번에 갚을 수 있을 게다. 그들이 원하는 북어를 내가 나서 주선을 하려는 것이니라. 상조회의 신세를 갚는 대로 우리는 원일이와 언년이를 찾으러 다시 떠나자꾸나. 그리고, 만약 찾지 못하면..... 그때는 길에서 죽을 뿐이니라. 알았느냐?"

두 사람은 서빙고가 보이는 언덕배기에 올라섰다. 언덕 위의 바람은 더욱 매서운 기세로 불어오고 있었다. 얼굴을 할퀴는 매운바람 탓일까? 고개를 숙이고 송윤호의 뒤를 따르는 거칠이의 굳은 뺨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같은 날, 동이와 덕구가 소 잔등에 장작을 싣고 있을 때, 두 명의 상투 잡이를 대동한 웬 사내가 나타났다. 그 사내는 솜 두른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에는 옻칠이 번지르르한 중갓을 쓰고 있었다.

"네가 여기 장작더미의 주인이냐?"

갓 쓴 사내의 물음에 선뜻 대답을 못 하고 있는데 손자가 일하는 모습을 보러 나왔던 덕구 할애비가 굽신 허리를 굽히며 나섰다.

"저 아이는 쉰네의 손자 올습니다만, 무슨 일이시온지요?"

", 그래? 그럼 늙은이가 저 장작의 주인이겠구나. 나는 왕가에서 거행하는 사람이니라. 오늘부터 네가 공주 마마 댁에 장작을 들이거라."

왕가! 공주 마마라니! 사내의 말이 하도 놀라워서 동이의 할애비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되었다. 동이나 덕구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여서 말 한 마디 못하고 섰다.

"어허어! 이놈들 보게? 늙은 것이나 젊은 것들이 어째, 입이 얼었느냐? 왜 예-에 하는 소리가 없어?"

중갓의 사내가 수염이라도 뽑을 듯 큰소리를 내니 동이 할애비가 깜짝 제정신이 들었다. 동이 역시 정신이 번쩍 돌아와 사내의 턱 밑에다 황급히 고했다.

", 아니 올습니다. 마마 댁이라 시니 하마 놀라서 입죠. 허나 오늘은 연화방(蓮花坊)으로 가기로 약조가 되어 있는지라....."

"뭣이라? 연화방? 연화방의 누구네 집이관데 안 된다는 게야?"

"그게... 홍문관 수찬(修撰) 나으리 댁이오이다."

홍문관 수찬이라면 정 6품의 벼슬 아닌가? 이에 중갓의 사내는 코를 풀 듯 킁 하고 웃었다.

"이놈아 그깟 수찬 따위의 벼슬이 무어 대단하기에 그러느냐? 수찬 아니라 당상관인들 금상(今上)의 고모이신 숙안 마마에 대겠느냐? 여러 말 필요 없으니 이 짐바리부터 나르되, 소와 사람이 열 행비를 하거라. 집은 찾기 쉬울 게다. 북촌 안국방, 아무에게 물어도 알 것이니."

"그건... 약조는 약조인지라... 오늘은 아니 되겠사옵고 내일부터.…"

철썩!

순간, 사내의 손바닥이 동이의 뺨에 내려앉았다. 동이의 머리가 휙 돌아갈 정도였다.

"이놈이 아직 정신을 못 차리구선... 쌍것들은 어째 하나같이 맞고서야 말을 듣는단 말인가? 이놈아 오늘 제대로 혼뜨금이 나 보려느냐? 얘들아 무얼 하고 있느냐? 이놈을 작신 밟아 주지 않구서."

사내가 저희들을 불러 주기를 기다린 듯 뒤에 벌려 섰던 두 놈이 동이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동이 할애비가 깜짝 놀라 고꾸라지 듯 사내의 발아래 엎드렸다.

"아앗, 나으리, 알았소이다. 알았사오니 쇤네의 손자 놈은 제발 그냥 두시옵시요."

"그래? , 오래 산 늙은 것이 그래도 세상 무서운 것은 아는구나. 얘들아 물러나렸다."

사내의 뺨 한대에 입안이 터진 동이가 피 섞인 침을 뱉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면 졸지에 송장이 되는 수가 있느니라. 알아서 행하거라."

사내는 동이에게 나직이 을러댄 후,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놈들을 바라보는 동이의 눈에 분노의 빛이 어렸다. 옆에 있던 덕구도 주먹을 부르쥐고 그들을 노려 보고 있었다.

", , 저걸.…"

"참아라. 이놈아 참아, 양반 댁 개가 범보다 무서운 법이니라. 양반에게 맞아 죽은 네 애비를 생각해 보란 말이다. 후유.... 이놈의 세상 어서 망해야 하건만...."

동이의 뺨을 때린 사내는 허견(許堅)과 함께 팔도를 누비며 재물을 뜯으러 다니던 홍치상(洪致祥)의 청지기 박달수였다. 이놈이 한창 잘 나갈 때에는 당상관 같은 기세로 세도를 부렸건만 근래에 와서는 목에 힘이 많이 빠져 있었다. 그것은 이놈이 그동안 홍치상의 심부름을 다니며 은근슬쩍 재물을 빼 돌린 것이 탄로가 나고부터이다. 게다가 해주 사는 홍참의 집 과부 며느리를 보쌈으로 빼내렸던 것이 해주 감사의 장계로 밝혀지면서 홍치상까지 진땀을 빼게 만든 것이다. 이에 화가 난 홍치상이 박달수를 엎어 매를 친 후 청지기 소임을 거두어 버렸다. 졸지에 끈 떨어진 연이요 이빨 빠진 개 꼴이 된 것이다. 게다가 지난해에는 그나마 믿고 있던 허견이 역모의 죄로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사지가 찢어지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본 후에는 그만 자라 목이 되었던 것이다.

놈이 그래도 왕가의 청지기로 놀던 가락이 있어 장안의 대감댁 청지기들과 이리저리 사귀더니 급기야 검계(劍契)와 선이 닿았다. 검계는 장안의 왈짜나 다리 밑 깍정이 패까지도 연계가 있는 조직이라 놈의 발은 자연히 넓어질 수밖에 없었다. 허나 뭐니 뭐니 해도 세도가와의 끈이 있어야 큰소리를 칠 수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소가 언덕을 비비 듯 놈은 다시 홍치상을 찾아가 머리를 조아렸다. 마침 홍치상도 박달수만한 심복도 없던 차라 일단 청지기 자리는 주었다. 그러나 더 두고 볼 참이었다. 그 눈치를 챈 박달수가 납신 몸을 낮추어 근신하며 주인댁의 일을 착실히 실행했다. 주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규방의 일부터 부엌의 땔감까지 모든 것을 주인의 돈은 한 푼도 들이지 않고 살림을 꾸려나간 것이다. 끈이 이어지자 재물 좋아하는 놈의 버릇이 다시 도졌다. 이번엔 밤섬의 신탄을 공짜로 먹을 궁리를 한 것이다. 신탄이 우습게 보여도 한 겨울 동안의 수입이 기천 냥에 달한 것을 안 것이다. 박달수는 밤섬에서 나와 노름방으로 변한 객주를 찾아 들었다.

"너희 두령 있느냐?"

박달수가 망태의 졸개에게 물었다. 그러자 미쳐 졸개가 대답할 사이도 없이 방문이 열리더니 망태가 선뜻 마루로 나서는 것이다.

"성님 오셨수? 여긴 사람이 많아 재미적으니 저리로 갑시다. 너는 억만이를 찾아서 지금 내가 좀 보잔다고 전하거라."

망태는 졸개에게 지시를 내린 후 술집으로 박달수를 인도했다. 그리고는 제 집처럼 큰 방을 차지하고 앉았다. 밖은 깡 추위가 콧물을 얼리건만 방 안은 구들이 절절 끓고 있었다.

"내 성님 앞이니 톡 까놓고 얘기 하겠수. 어제 얘기 한 대로만 해주. 그러면 나도 뒷탈 나지 않게 신탄을 성님께 넘기도록 수를 써 볼 테니. 어떻수? 오늘은 결단을 내리시우."

"그게 말은 쉬워도 너나 나나 위험한 놀음이란 말이다. 내 아무리 신탄이 갖고 싶어도 상조회를 건드리는 건 반드시 뒷 탈이 날 노릇 아니냐?"

"헛 참, 그러니까 이참에 놈들의 날개를 딱 부러뜨리자 이 말이요. 성님이 검계 아이들 몇 명만 붙여 주면 문젯거리가 없다니까 그러시네."

"내 들으니 네가 강 아래의 억만이 패와 손을 잡았다던데 그 패만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은 게야?"

"그 패가 지금은 사실 보잘 것 없수. 본래 억만이 그놈은 강화의 천수 패를 몰아내고 수적질을 해 먹으려 든 건데 그 사달이 난 후부터 강화 유수가 엄명을 내려 바다에 사후선(伺候船)을 띠운답디다. 허니 웬만한 무장(武裝)으로야 수적질이 가당키나 하오? 그래서 방향을 바꿔 오일중이 해먹는 상조회를 없애고 제놈이 꿰 차려는 것이지요."

"그러는 너는 얻는 게 없는데 왜 이렇게 설치느냐?"

", , 왜 얻는 게 없수? 놈들만 없어지면 삼개와 송파뿐 아니라 오강을 휘어잡을 판인데? 그전에 먼저 상조회 놈들 때문에 없어진 대동계를 다시 만들 테유."

망태가 늘어놓는 말을 듣던 박달수가 어찌 찜찜한 구석이 있었지만 우선은 먹기에 곶감이 달더라고 도성 안으로 신탄을 독점해서 팔 생각을 하니 사실 입맛은 당겼다.

'나 자신은 망태를 도와주고 밤섬을 얻고, 망태는 나를 도와주고 삼개 나루를 되찾는다? 억만이 패는 망태와 나를 도와 상조회를 깨부수고 그 자리를 차지 하고, 망태와 나는 억수 패를 이용해 이쪽의 희생을 줄이겠단 말이지? , 이걸 어쩌지?'

박달수가 머릿속으로 산술이 복잡해서 방문이 열리는 것도 몰랐다.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처음 보는 자로 비썩 마른 몸매에 키가 껑충한 자였다.

", 억만이 어서 오게. 성님 이 동무가 바로 억만이유. 억만이는 인사 올리게. 이쪽은 내가 성님으로 여기는 박달수라는 분이여."

"억만이라 하우, 성님의 성명 삼자는 들어 본 것도 같수."

"반가 우이. 도성 안으로 놀러 올 일이 있거든 북촌 숙안 마마 댁을 찾게나. 술이라면 취하도록 대접할 테니. 하하.…"

"성님, 억만이 이 동무가 칼질에는 일가견이 있지요. 나도 어디 가서 매를 맞고 다니진 않았는데 상조회의 마개출이에게 그만 패했지 뭐유? 내 그 때부터 상조회라면 이를 갈지요. 헌데 이 동무가 송파에서 그 마가란 놈을 요절을 내 버렸답니다. 내 그 소리를 듣고 어찌나 속이 시원했는지 모르오."

"상조회원을 이미 요절 낸 이력이 있단 말이지? 이거 이리 되면 서로의 원한에 괜스리 내가 끼어드는 게 아닌가 모르겠다."

", 성님이나 나나 왈짜로 호가 났으면 죽고 사는 것이야 하늘이 정할 일 아니우? 성님도 어서 양단 간에 결정을 내리시우."

망태가 물러 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침내 박달수도 용단을 내렸다.

"좋다, 역모가 아닌 바엔 우리 나으리께서 일을 무사 타첩으로 만들어 주실 게다. 허나 그걸 믿고 너무 많은 인명을 해쳐서는 아니 된다는 것도 알아 둬. 만약 어전에라도 전해지는 날이면 네놈이나 나나 성치 못할 것이니까."

"알았수. 신탄 장수들은 투전으로 옭아설랑 홀랑 털어버릴 테니까. 그 뒤는 성님이 감당하시우. 우린 거기까지요."

"알았다. 나는 생각해 둔 것이 있으니 너도 빈틈 없이 해야 할 것이다."     

         

송윤호와 거칠이는 그날 40여 리를 추위와 싸우며 걸어서 겨우 흥인문께에 닿았다. 오는 길에도 작은 동리라도 보이면 거칠이가 환약을 팔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외쳤다.

"설사와 복통에 이만한 약이 없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배탈이나 설사를 할 적에 이 환약 몇 알이면 단 번에 그칠 것이오. , 약 이름은 천지환(天地丸)이요."

그러나 추위 때문인지 사람들은 내다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아니면 첩약(貼藥)에 길든 사람들이 환약을 몰라서일 수도 있었다. 그도 아니라면 급한 것은 밥이지, 약이 아닌지도 몰랐다. 어쨌든 이런 식이라면 내기에 지는 것은 물론이요, 나흘 동안 밥 한끼 먹을 돈도 벌지 못 할 거였다. 송윤호는 성문 밖에서 동묘(東廟)까지 자신이 나서 약의 효능을 가르치기로 했다.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닌 것이다. 그가 첫 번째 집에 들렀다.

"주인장 계시오? 지나가던 약장수가 신통한 약을 팔고자 들렸소. 이 약은 천지환이요. 추운 날 찬 음식을 먹었거나 냉방에 잠이 들어 배탈이 난 사람에겐 직 방으로 듣는 약이오. 탕제로 먹지 않아도 되는 환약이오. 만약 지금 배탈이 난 사람이 있거든 즉방에 효험을 볼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밤중에 급환을 당해도 의원에게 갈 수 없는 사람은 미리 사 두면 좋을 것이요. 값도 눅기 짝이 없소. 한 쌈에 단 돈 한 푼 이요."

하나, 송윤호의 간곡한 설명에도 내다보는 이는 없었다. 송윤호는 다음 집과 또 그다음 집으로 똑같은 말을 수 없이 되풀이해야 했다. 어느덧 겨울의 짧은 해는 무심하게 긴 그림자를 만드는데 약을 찾는 이는 하나 없는 것이다. 그러다, 십여 곳의 집을 더 더듬고 나서야 어느 집의 방문이 열렸다. 맨 상투에 잠을 설쳤는지 부스스한 꼴이 스산스럽게 생긴 사내였다.

"방금 말한 약이 탕재가 아니란 말이오? 탕재가 아닌 약에 무슨 효험을 기대하겠소? 정말로 약값이 한 푼이랬소? 좋소. 그 약이 그쪽이 말한 대로 그렇게 신통하다면 한 번 써 봅시다. 우리 아비가 벌써 대 여섯 째 설사가 멈추지 않으신다 하오. 어서 그 약 이리 주오."

"더운 물과 함께 드시오. 잠깐 환자를 좀 볼 수 있겠소?"

"의원 이시오? 헌데 의원을 댈 만한 돈은 없소. 그러니 약만 주오."

"의원이 아니니 돈 걱정은 마시오. 거칠아 짐을 벗고 마루에서 잠시 기다리거라."

송윤호는 짚신을 벗고 환자가 누운 방 안으로 들었다. 저녁때여서인지 방안은 매우 어두웠다.

"후유, 밖에서 하는 소리를 들었소. 그리 용하다는 약을 좀 먹어 봅시다."

아랫목으로 짐작되는 곳에 누운 환자의 어눌한 말씨가 들렸다. 송윤호는 환자에게 다가가 손목을 잡아 진맥을 살폈다. 한참이 지난 후 송윤호가 말했다.

"평소에 위와 오장이 약해 밥을 잘 삭이지 못하는 체질이오. 노인은 질긴 시래기나 거친 음식은 상극이요."

", 어찌 아시었소? 용한 의원이구려. 내 젊어서부터 밥을 잘 새기지 못했다오. , 그럼 어쩌면 낫겠소? 아니, 어서 약을 주구려."

"노인은 약을 들기 전에 먼저 침으로 오장이 잘 움직이게 한 다음 이 약을 드시는게 좋겠소."

침이란 말에 처음 방문을 열었던 아들이란 자가 놀라 송윤호의 소매를 잡았다.

"어허, 침을 쓴대도 돈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소? 집 안에 엽전이라곤 닷 푼이 다란 말이요."

"괜찮소. 내가 돈을 바라고 이러는 게 아니요. 가서 더운물이나 떠 오시오."

송윤호는 침낭을 풀어 노인의 명치와 배에 몇 대의 침을 꽂았다. 일각을 기다린 후 침을 뽑은 송윤호가 더운 물과 함께 장일환 다섯 알을 먹게 했다. 그런지 반각도 되기 전에 노인의 입에서 트림이 올라오더니 급히 칙간으로 가는 것이다.

"아니? 설사가 멈춘다더니 아비의 형세가 더 다급하신 것 같으니 웬일이요?"

시빗거리를 찾은 것처럼 아들이란 자가 송윤호를 향해 흰자위를 들어냈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설사는 멈출게요. 설사란 음식을 넘기지 않으면 저절로 그치는 것이오만 설사를 계속했다면 댁의 부친이 아마 음식을 보면 참지 못 하는 성미인가 보오."

", 그 말은 바로 맞는 말이요. 우리 아비가 그런 점은 있지요."

칙간을 다녀온 노인이 헛기침을 하며 누웠던 아랫목에 바로 앉았다.

"거 신통하고 방통하오. 칙간에 앉아서도 얼마 나오지 않고 그칩디다. 우선 뱃속이 편하기 그지없소. 참으로 용한 의원에 용한 약이오."

갑자기 노인과 아들의 태도가 달라지더니 그날 저녁, 부엌의 며느리를 들볶아 기어이 송윤호와 거칠에게 저녁밥을 대접했다. 뿐만 아니었다. 날이 저물었으니 노인의 방에서 자고 가라고 붙들었다. 돈은 없어도 인정은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튿날 새벽에 송윤호는 일찍 노인의 집을 떠났다. 없는 살림인 것이 뻔한 마당에 조반까지 얻어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으리, 어제 같아서는 장사 도중의 행비(行費)나마 될 것 같지 않사옵니다. 집집마다 들리는 것도 여간 시각이 지체되는 일이 아니 굽쇼."

"허허, 나도 그걸 느꼈느니라. 허나 너무 걱정 말거라. 오늘은 다행히 어제 보다 날이 눅으니 동묘에서 청계를 따라 주변 동리를 돌 것이야. 그런 다음 등빙으로 강을 건너 오늘 내로 송파를 숙소로 할 것이니라. 내일은 종일 송파장에서 팔려고 한다."

"나으리, 아무리 송파에 사람들이 몰린다지만 이 많은 약을 다 팔 수 있겠사옵니까? 내일이면 열 나흘 아니 옵니까? 오늘 내일에 다 팔아야 보름에 삼개로 갈 것 아니 옵니까?"   

"어제 느낀 것은 약의 효험을 사람들이 모르거나 믿지 않으려는 것 같더구나. 그래서 이제부터는 방법을 바꾸려 한다. 어쨌든 우리의 승부처는 송파니라. 한집 한집 찾기보다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한 번에 약의 효험을 들려주면 입의 수고로움도 줄 것이니.…"

"헌데 나으리, 내일이 송파 장날이라 하더이까?"

"허허, 너는 여태 몰랐느냐? 다른 곳과 달리 송파는 정해진 장날이 없느니라. 조선 팔도의 장시 거의가 5일 장이지만 매일 장이 서는 곳은 송파가 유일무이(唯一無二) 하느니라."

"지난해 가을에 삼개 나루에서 만난 송상을 따라 본댁에 갔을 때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팔도에 장()2백여 개라 하더이다. 나으리, 그 말이 적실한 것일 깝쇼?"

"왜 그리 안 되겠느냐? 장마당이란 본래 흉년이 들거나 난리가 난 뒤에 더 번성하는 것이니라. 생각해 보려무나. 흉년과 난리로 굶어 죽게 되었다면 짚신이라도 만들어 팔아야 하고 먹을 것을 사기 위해서는 소를 팔고 닭도 팔아야 할 것 아니냐? 그러려면 팔 장소가 있어야 하겠지? 그래서 생긴 것이 장마당인데... 이젠 엽전까지 널리 쓰이고 있으니, 장마당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밖에 더 있느냐?"

오늘도 바람은 간간이 불었으나 추위는 어제보다는 훨씬 덜해서 좋았다. 송윤호와 거칠이는 동묘 어름에서 길을 바꿔 계천(淸溪川)을 따라 곳곳의 집들을 찾아다니며 약을 팔았다. 그러나, 어제와 별 차이가 없는 날이었다. 열두 푼어치를 판 것이 다였던 것이다. 두 사람은 서둘러 계천의 둔덕을 올라 중랑천을 거처 광나루로 향했다. 광나루를 통해 등빙으로 강을 건너려는 것이다. 한데, 얼어붙은 강 위로 한 떼의 인마가 오고 있었다.

"나으리,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패랭이를 쓴 사람들 같사오니 혹, 송상이 아닐런 지요?"

", 그렇구나. 어서 가서 저들을 만나 보자꾸나."

걸음을 재촉해 가까이 다가가자 송상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들도 송윤호를 본듯 하였다. 개중에 말고삐를 잡고 선두를 섰던 답삭불이가 먼저 거칠이를 알아보았다.

", 김화의 좌랑댁 하님 아닌가?"

"왜 아니겠소. 댁들을 이곳에서 만나니 반갑기 짝이 없소."

거칠이와 선두 잡이가 말을 나누니 자연 뒤따르던 인마가 제 자리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뒷 쪽에서 물미장(勿尾杖)을 짚은 사내가 시적시적 앞으로 걸어 나왔다.

"선두가 서다니? 무슨 일이냐? 어라? 자네는 거칠이 아닌가? 아앗. 나으리 아니신지요? 나으리께서 여길? 소인이 눈이 멀어 죄만 하옵니다."

물미장의 사내는 언제 봐도 늠름하게 생긴 송상 행수 피천득이었다.

"피행수, 다시 만나 반가우이. 내 그러지 않아도 피행수를 만나려 했었더니 하마터면 길이 어긋날 뻔하였네 그려."

"송도로 회정하는 길이 옵지요. 헌데 나으리께서 등짐을 지시다니... 이는 필경 사연이 있으시겠습지요?"

"그러하네. 가만,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잠깐이면 되네."

송윤호가 피천득과 잠시 얘기를 나누는 사이 거칠이는 아는 얼굴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기 바빴다.

"설이 지난 이 추운 엄동에도 장사를 다닌단 말이오? 게다가 해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거칠이가 선두를 섰던 답삭불이에게 물었다.

"사흘 전에 마지막 물화를 싣고 왔었다네.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봄에나 다시 올 걸세.    허고, 늦은 시각이래도 괜찮네. 아랫강을 따라가다가 노들 나룻께서 숙소를 정할 것일세."

"송상들은 설 전에 장사를 그만둔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 하는 말이었소."

"다른 물화를 갖고 다니는 부상들은 다들 그러 하지만 천세가 나는 북어야 다르지. 때를 골라 팔 수야 있나? 없어서 못파는 걸?"

"그렇긴 하겠소."

그 사이 얘기가 끝났는지 피천득이 돌아섰다. 그러다 괴춤에서 작은 골패 짝 같은 때묻은 나뭇조각을 송윤호에게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 이것은 송상들끼리의 신표(信標) 옵니다. 송파로 가시면 쇠살쭈 최행수를 찾아 이것을 보이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것을 알아서 나으리를 도와 드릴 것이옵니다. 허고 나으리가 하신 말씀을 소인이 그대로 따를 터이니, 부디 나으리 하시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비 옵니다."

"그래 준다니 고맙기 그지없네."

"송상으로 봐서도 해롭지 않은 일이오니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먼 길 무탈하게 회정하시게들."

"나으리, 소인, 이만 작별 인사 올립니다."

피천득이 송윤호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이니 열댓 명의 패랭이들이 일제히 절을 하였다. 그리고는 말을 몰고 길을 떠나는 것이었다.    송윤호는 그들과 헤어져 강을 건너 송파에 닿았다. 아직 서산에는 해가 노루 꼬리만큼 남아 있어서 송파 객점은 찾기 쉬웠다. 객점은 송윤호가 재작년에 보았던 객주 자리가 아니었다. 쇠살쭈 출신의 최행수는 다른 행수와 달리 송상 가운데 소()만 거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객점은 백여 칸의 외양간이 딸린 집이었고 또한 우시장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송윤호가 객점을 들어서니 외양간을 돌보던 젊은 놈 하나가 다가오더니 눈을 치켜뜨고 한 손을 내 저으며 나가라는 시늉을 했다.

"여긴 보부상의 객주가 아니요. 가설랑, 다른 곳을 알아보우."

"허어, 바로 알고 찾아온 길이네."

"바로구 꺼구로구 간에 당신들 재울 방도 없소. 가시오. ."

"피행수가 이리로 지소한 일 일세. 최행수 계시는가?"

"? 그렇다면 진작 그렇게 말씀하실 일이지...."

젊은 놈이 그제야 일이 이상하다 싶었는지 언행이 심히 부드러웠다. 젊은 놈을 따라 안채에 들자 저녁밥을 짓는 냄새가 구수하게 퍼지고 있었다. 젊은 놈이 최행수의 방에 가서 무어라 나직히 아뢰니 문이 열리고 나이 지긋한 중 늙은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날 찾는다고 들었소. 어찌 찾소?"

수염이 제법 그럴듯한 최행수가 곰방대를 입에 물며 문지방에 한 팔을 걸치고 물었다. 송윤호는 소매에서 나뭇조각을 꺼내 쪽마루에 내려놓았다.

"피행수가 이걸 최행수라는 분에게 전하라 했소."

나뭇조각을 집어 글자를 들여다보던 최행수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나뭇조각에는 하늘 천()자가 앞뒤로 새겨져 있었다.

"소인이 최봉출 올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최행수의 갑작스런 행동에 오히려 송윤호가 놀랄 지경이 되었다.

"아니, 최행수께선 갑자기 무슨 일이오? 이러지 마시오."

"아니오이다. 이는 우리 송상들의 암구호 올시다. 이 신표를 지닌 객()을 극진히 대접하라는 뜻이니 피행수가 오죽 잘 알아서 이 신표를 보냈겠사옵니까. 보나 마나 존귀한 분일 터이지요."

"존귀하다니? , 아니요. 보다시피 나는 등짐장수로써 최행수의 도움을 받았으면 하는 사람일 뿐이요."

"무슨 일이든 말씀만 하시지요. 소인이 거행하겠나이다."

"다름이 아니요. 약을 팔며 사람을 찾으려 하오. 최행수께서 날 좀 도와 주시오."

"필경 그럴 연유가 있으시겠지요. 자세한 말씀은 잠시 후에 듣겠사옵니다. 일단 건너방으로 드시지요. 석식을 곧 올리도록 지시하겠습니다."

다시 젊은 놈을 따라 디귿자의 끝 방에 든 송윤호와 거칠이는 짐을 벗고 다리를 뻗었다. 그러자 비로소 피로가 몰려오는 것이었다. 잠시 후 저녁밥이 들어와 그지 없이 달게 먹었다. 상을 물리기 무섭게 최행수가 송윤호의 방에 들어와 얘기를 시작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최행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송윤호의 말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얘기가 끝난 후 송윤호는 열 자 정도의 무명을 얻고 붓과 벼루를 빌렸다. 그리고 무명을 펼쳐 놓고 언문(諺文)으로 큼직하게 수십 자를 적었다.

다음 날인 열 나흘이었다. 최행수를 따라 우시장으로 나간 송윤호와 거칠이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말로만 듣던 송파의 우시장의 크기에 우선 놀란 것이다. 말뚝에 묶인 소의 숫자만 하드라도 어림잡아 삼백 마리는 넘어 보였다.

"나으리 시골 우시장만 본 쉔네로서는 기가 막힐 일이옵니다."

"나 역시 다를 바가 없구나. 말 만 들었더니 이거야 원... 최행수, 여기에 송상의 소는 몇 마리나 되오?"

"백여 마리 됩지요. 허고, 우리 송상의 소는 거의가 평안도와 함경도 북방소여서 크기도 한수(漢水) 이남의 소보다 훨씬 크옵지요."

"농사철도 아닌 정월에 이렇게 많은 소가 거래가 되는 연유는 무엇이요?"

"논밭 갈기도 바뿐 농사철에 누가 귀한 소를 팔겠사오니까? 지금부터 춘궁기가 시작되니 목구멍을 메우려 눈물을 머금고 파는 것이지요. 사는 사람은 값이 눅을 때 사려는 사람들과 성균관 반인(泮人) 들이옵지요. 반인은 소를 잡아 팔아먹고 사는 사람들 입지요."

우시장엔 소만 많은 것이 아니고 사고파는 사람도 많아서 흥정하는 소리로 시끌 벅적 하였다. 송윤호는 우시장 옆의 공터에 약짐을 풀어 놓았다. 그리고 어제 언문으로 써 둔 무명 천을 기다란 장대 둘에다 묶어 거칠이와 함께 세웠다. 글의 내용은 대강 이랬다.

<설사. 복통. 체하거나 토사곽란에 천지환 장일환. 종기에 전가고약. 효험 보장.>

그러나 온통 소를 살피고 흥정하느라 정신들이 없어서 송윤호가 애써 내 건 글을 보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설령 본데도 언문이나마 아는 백성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거나 말거나 송윤호는 목도 풀 겸, 무료한 생각도 털어버릴 겸 약의 효험에 대해 중얼중얼 외워 나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우시장 가운데서 우왁 하는 함성이 터지더니 놀란 사람들이 벌떼처럼 이리저리 밀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송윤호가 그쪽을 보는 사이, 갑자기 고삐가 끊어진 황소 두 마리가 사람들을 헤집고 나와 머리를 맞대고 콧김을 허옇게 뿜었다. 아마도 소들 중에 암내가 난 암소가 있어, 두 수컷이 쟁탈전을 벌이는 것일 터였다. 그런데 두 마리 다 북방 소라 크기가 작은 산만 한데 싸우는 기세 또한 엄청나서 누가 감히 접근을 못할 지경이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은 순식간에 두 마리의 싸움 소를 둘러쌌다. 그리고는 어느새 신이 나서 응원을 하고 있었다. 자고로 사람 싸움이던 소 싸움이던 싸움 구경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 아닌가?

"누렁이가 힘이 더 나은 것 같지?"

"모르는 소리, 저 칡소 뿔을 보게나. 뿔 하나가 우리 여편네 허벅지 보다 굵은 걸?"

사람들은 손에 땀이 나도록 재미가 있을지나 그놈의 소들이 자꾸만 약을 벌려 놓은 공터로 울끈 불끈 다가오자, 조바심이 난 거칠이가 어쩔 줄을 몰라 쩔쩔매었다. 소들이 더 다가오면 혹여 주인인 송윤호가 다칠까 해서 였다.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미친 것처럼 머리를 휘두르던 놈 중에 칡소가 후다닥 꽁무니를 빼며 달아나기를 하필 송윤호 쪽이었다. 깜짝 놀란 거칠이가 송윤호를 막아서서 얼결에 칡소의 뿔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송윤호는 그제야 사태를 알아차리고 옆으로 물러났다. 거칠이가 뒤로 주르르 밀렸다. 그러다 간신히 발을 땅에 버티고 힘을 쓰기 시작했다. 칡소도 뒷발을 버티고 대가리를 낯 추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칡소와 거칠이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사람들은 구름같이 모여들어 이 대결을 바라보며 손에 땀을 쥐었다. 칡소가 머리를 낯추려다 안 되자 위로 뜨려고 눈을 희번덕 거렸다. 그러나 거칠이는 잡은 소 뿔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그러자 칡소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방향을 바꾸려 하였다. 뿔을 잡은 거칠이를 떼어 놓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힘이라면 세상 누구에게도 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거칠이가 그 수에 손을 놓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끙 소리와 함께 소뿔을 옆으로 제껴 황소의 목을 꺾으려 들었다. 거칠이의 이마에 힘줄이 불끈 솟더니 소대가리가 차츰 옆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함성이 갑자기 사라지고 믿지 못 할 광경에 두 눈을 꽂았다. 소의 눈알이 위로 치켜져 퉁방울같이 튀어나왔다. 다시 한번 거칠이가 끙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칡소의 목이 서서히 옆으로 꺽기더니 급기야 몸통이 뒤틀리며 쿵 하고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와아 하는 사람들의 함성이 하늘을 갈랐다.

"이키 저, , 저것이 대체 어디서 나는 힘인가?"

"하늘이 낸 장사로세."

"꺽정이가 울고 가겠고나."

입 달린 사람들이 제각각 한마디씩 하는 사이 거칠이는 소의 뿔을 놓고 일어나 송윤호의 곁으로 갔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치여 쓰러지려는 장대를 바로 세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제야 무명 천에 쓰여진 글을 보았다. 개중에 언문을 아는 자가 있어 큰소리로 읽어 나갔다.

"설사. 복통. 체하거나 토사곽란에 천지환 장일환. 종기에 전가고약. 효험 보장이라.... 이거 약을 파는가보네. ... 의원이 지은 탕재는 봤어도 환약이나 고약은 처음 일세."

사람들이 이리저리 떠들자 그러지 않아도 할 말을 외우던 송윤호가 뱃심 좋게 군중 앞으로 썩 나섰다. 그러자 거칠이도 약봉지를 한줌 들고 주인 옆에 섰다.

"방금 태산 같은 칡소를 쓰러트린 이 사람은 김화에서도 소문난 장사 올시다. 또한 이번 길에 같이 나선 동행 올시다. , 본인은 이번에 뜻한 바 있어 가전(家傳)의 비법으로 지은 약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하오니 잠시 귀를 기울여 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세상에 병 안 나는 사람은 없고 그 병이 정해진 날에 나는 법 또한 없습니다. 여러분은 물론 연세든 부모와 어린 자식이 한밤중에 병이 나면 얼마나 속이 타겠습니까? 바로 그럴 때 이 약이 있으면 단번에 효험을 볼 수 있소이다. 의원은 멀고 이 환약은 가까우니 급할 때는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는 약이오. 이 천지환은 음식을 잘못 먹어 체하거나 설사할 때 좋고, 이 장일환은 토사곽란은 물론 먹은 밥이 잘 내려가도록 돕는 약이 오이다. 특히, 이 고약은 머리의 두창이든 등에 난 등창이던 어떤 종기라도 뿌리를 뽑을 것이오. 작은 병에 사주팔자 탓할 필요 없소이다. 약 없어 죽을 팔자를 이 약으로 살려보시오들. 효험은 직방이요. 값도 헐하오. 천지환이나 장일환은 다섯 알 든 한 쌈에 단돈 한 푼이며 고약은 열 푼이요. 환약은 더운물과 함께 먹고 고약은 팥알만큼만 떼서 종기에 붙이면 그만 올시다. 자 내 얘기는 끝났소이다. 살 사람은 앞으로 나오시오."

송윤호의 일장 연설이 끝나자 맨 먼저 나온 사람이 바로 쇠살쭈 최행수였다.

"나부터 주오. 늙은 우리 부모님이 속 탈이 가시질 않던 차요. 효험도 빠르고 값도 눅으니 금상첨화란 문자가 딱이구려. 두고두고 쓰게 아예 열 쌈을 주오."

최행수를 이어 송파 객주의 소몰이들이 서로 달라고 난리가 났다. 그러자 앞 쪽 사람들이 먼저 주머니를 끌러 엽전을 꺼내드니 뒤에 둘러서서 구경을 하던 모든 사람들도 서로 사려고 아우성들이었다. 송윤호와 거칠이는 돈을 받고 약을 주느라 정신이 홀랑 달아날 지경이었다. 결국 약은 연초 두어 대 태울 동안에 다 팔려 버렸다. 대 성공이었다. 송윤호와 거칠이는 약을 넣었던 고리짝에 엽전을 쓸어 담아 객점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이 엽전을 꿰미 지어보니 서른 닷 냥 하고도 스무 푼이 남았다. 닷 냥을 밑천 삼은 장사가 서른 닷 냥이 된 것이다. 송윤호는 약 값이 한 푼이라고 우습게 본 상조회의 포교들을 생각했다. 그날 밤, 객점에서 또다시 한 밤을 묵은 송윤호가 일어나 보니 거칠이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소세를 하러 마당에 내려선 송윤호를 본 거칠이가 쭈루루 달려와 더운물 함지박을 갖다 놓았다.

"어디 갔었느냐? 더 팔 것도 없으니 최행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곧 떠나자꾸나."

"최행수는 벌써 쇠전 마당으로 나갔습지요. 쉰내는 밥값의 반이나마 하려고 외양간을 치우고 있사옵니다."

"음 내 생각이 짧았구나. 너는 어서 하던 일을 하거라."

소세를 마친 송윤호가 하인이 들이는 밥상을 받아 아침밥을 먹었다.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얼마나 지났는지 거칠이가 들어왔다.

"밥은 먹었느냐?"

"그럼입쇼. 쇠몰이 덕쇠와 같이 먹었사옵니다."

"삼개로 가려면 한나절은 걸리겠지?"

"여기서 곧바로 용산을 바라고 강을 건넌다면 그렇겠습지요."

"그렇다면 아직 시간이 남으니 너는 잠시 기다리거라. 송파 윗 거리에 상조회 객주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니라. 오 회주라는 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오마. 황구만인가 하는 방장도 만나 볼 겸 해서니라."

"그렇다면 쉰내가 모십지요. 어차피 거기 들렸다 곧바로 최행수에게 작별을 고할 것 아니오이까?"

"그건 그렇다만... 그래 기왕 떠나서 여기를 다시 올 일은 없지."

돈 궤를 짊어진 거칠이와 송윤호가 상조회가 하는 객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우시장 주변과 달리 술집과 객주들이 더 즐비했고 초가집들이 빽빽이 들어 찼다. 그리고 오가는 사람들도 많고 장삿꾼도 역시 많았다. 사람들 사이로 아이들은 손에 손에 꺾은 싸리 가지를 쥐고 무리를 지어 다녔다. 오늘이 보름이라 밤이 되면 쥐불놀이를 할 심산인 모양이었다.

", 저 사람이 어제 황소를 맨손으로 쓰러트린 그 사람이다."

"어 맞네. 고약 장수랑 어딜 가는군."

길 가던 사람들이 수군대며 두 사람의 뒤를 따르니 웬일인가 하여 궁금한 사람들이 더 모여서 어느새 구경꾼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한데, 마침 길을 나서던 황구만이 그 광경을 보고 다가왔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황구만이 사람들 사이로 가운데 사람을 바라보았다. 순간 황구만은 깜짝 놀랐다. 그리곤 잽싸게 줄행랑을 놓아 춘월이가 하는 객주 겸 주막으로 달려 들어갔다.

"내촌댁,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게. 아뭇 소리 말고 어서 복덩이를 데리고 뒷방에 꼭꼭 숨어 있게."

"어째 그리 숨이 넘어 가오? 허고, 복덩이를 왜? 도대체 왜 그러오?"

"시끄럽소. 시간이 없다니까. 내가 다시 올 때까지 혹여 방에서 나올 생각 말고. 어서."

복덩이를 안은 내촌댁을 등을 밀어 뒷방으로 몰아넣은 황구만이 다시 길로 나섰다. 그 사이 사람들에게 물어 찾은 객주 겸 주막을 향해 송윤호가 오고 있었다. 황구만이 즉시 송윤호의 앞에 나섰다.

"아니? 이게 뉘신가? 송 의원 아니시오? 반갑소이다. 가만 여긴 술집이라 시끄러우니 저리로 갑시다."

송윤호가 제대로 인사를 하기도 전에 서둘러 다른 객주로 인도하는 황구만이었다.

"여태 삼개의 객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소이다. 해서 오 회주라는 분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드리고 떠나려고 왔지요."

"아 그러시오? 헌데 이 일을 어쩌나? 회주께선 급한 용무로 두물머리로 돌아가시었소."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걸 알리 없는 송윤호는 난처하였다.

"그럼 이곳에 안 계시단 말씀이요? 어허 이를 어쩌나."

"인사는 내가 대신 전할 터이니 떠나시지요. 여기까지 오셨는데 오늘 좀 바빠서 이거... 비례인 줄 아오나 여기서 작별하십시다."

황구만은 일각이라도 빨리 송윤호를 떠나보내려고 매정하게 먼저 일어섰다. 송윤호는 그런 황구만에게 어이가 없었지만 무어라 더 할 말도 없어서 대강 인사를 나누고 우시장으로 향했다. 최행수의 호의에 감사한 말을 전한 송윤호가 다시 중랑천으로 들어선 때는 정오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같은 날 그 시간에 밤섬 동이의 집에서는 늙은이 가래 섞인 소리가 방문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대체 왕가가 무엇이고 양반이 무엇이 관데 내 손자를 이 지경으로 만든 단 말이냐?"

"그만 두오. 내 어쩐지 처음부터 찜찜합디다."

"그래도 그렇지. 돈을 달랬지 매를 달랬느냐?"

동이의 볼기짝은 흡사 수십 마리의 먹구렁이가 엉켜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같이 갔던 덕구도 볼을 쥐어 박혀 입안이 터져 있었다.

"볼기짝에 피 칠갑을 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구나. 그래 이젠 어쩔 테냐? 열 행비를 더 하랬다니 그러고야 어디 신탄 장사를 계속할 수나 있겠느냐?"

"지금도 이미 밑천을 반 넘어 날렸는데 열 번을 더 주고서야 무슨 재간으로 다시 하우? 그나마 그것도 남의 밑천 아니우?"

"이 할애비의 사촌이니 남은 아니다만 그래도 셈은 해얄 텐데...."

"내 이놈의 새끼들을 그냥... 아구구 볼기야."

동이와 덕구가 연 닷새 동안을 홍치상의 집에 장작을 날랐다. 그것도 오전에 한 행비 오후에 또 한 행비를 했으니 왕복 얼추 4십 리 길을 열 번을 오간 것이다. 소 잔등에 실은 장작은 물론이고 동이와 덕구까지 지게질을 했으니 장작은 홍치상의 담벼락에 그득히 쌓였던 것이다. 약속한 열 행비를 채우자 박달수에게 나뭇 값을 달라고 했다. 한데, 뒤뜰로 데려가 하인들 시켜 돈 대신 흠씬 매를 내린 것이다.

"나는 괜찮소. 헌데 이놈 덕구가 뭔 죄로 얻어맞아야 하오? 할애비가 자꾸만 참으라 하니 참소만 이제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소. 할애비도 날 말리지 마시우."

"이놈아, 양반 동티에 애먼 남의 집 대가 끊어지는 법이다. 니 애비를 보라지 않더냐? 그걸 못 참아 그 꼴이 난 거란 말이다."

"그래도 이건 너무한 처사 아니우. 남은 신탄도 공으로 다 먹으려 드니 말이우. 들으니 박달수가 강 건너 투전판에서 산답디다. 내 오늘 밤 이놈을 가만두지 않을 테요."

"가만 두지 않으면? 네놈이 그 많은 왈짜들을 어찌하겠다는 게야?"

"수가 있겠지요. 두고 보우."

때를 놓칠세라, 부어오르는 뺨을 손으로 감싸고 있던 덕구란 놈이 끼어들었다.

"어찌 돌아가나 오늘 밤, 내가 가서 망을 볼 테유. 박달수가 혼자 있을 때를 노리면 되는 수가 있수. 성님은 가만 누워 있으슈."

"시끄럽다. 너는 이제 겨우 열다섯 살 아니냐? 그런 소리 말거라."

"열 다섯이 적은 나이유? 어차피 객주나 술집에선 내가 거렁뱅이인 줄 다 아니까 얼쩡거려도 의심은 안 할 게유."   

저녁이 되자 덕구는 슬그머니 집을 나와 곧바로 강을 건너 투전방으로 향했다.



"성님, 이거 일이 수상하오. 지금 곰보네 투전방에 주 포교가 와 있답니다."

"주 포교? 포도청 놈들이 돈 냄새를 맡았나 보군. 엽전 서너 꿰미 쥐어서 보내게나."

"그게 아니옵고... 주 포교라고... 지금은 상조회에 있는 놈이지요."

"? 그런 놈이 무엇 때문에?"

박달수는 누웠던 몸을 단번에 일으켜 세우며 망태를 바라보았다.

"아이들 말로는 수 일 전에도 한 번 왔다 간 적이 있다 합디다. 이거 우리가 오늘 밤에 하려든 일이 들통 난 게 아닌지 모르겠소."

"그럴리가 없다. 검계가 그렇게 어수룩하게 일을 처리 할 것 같으냐? 망태 너는 어서 신탄 장수들을 털 궁리나 하여라. 시간이 없느니라. 그런데 온다던 놈들은 여직 소식도 없는 게야?"

"곧 올 게유. 낮에 기별을 했으니까 말이오."

망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침 소리가 나더니 억만이가 방으로 썩 들어섰다. 뒤를 이어 오간 수문의 깍정이 두목 땅개와 널다리 밑 깍정이 패의 왕초 소대가리가 차례로 들어섰다.

"다들 앉어. 앉으라구. 헌데 준비는 되었겠지?"

박달수가 네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먼저 땅개가 나섰다.

"우리야 이미 준비가 되었지요."

"쓸만한 애들이냐?"

"독한 놈들로 골라서 뽑았지요."

"애들은 다 어디다 묻었나?"

", 걱정 마시우, 언덕 위에 빈 움막이 널렸습디다. 거기다 몰아 넣어 놨지요."

"너는?"

박달수가 턱을 앞으로 밀며 소대가리를 가르켰다. 헌데 소대가리는 눈등에 주름을 짓더니 오히려 박달수에게 이죽거리는 것이다.

"내게 쌀 닷 섬 값을 준다는 춘동이 성님은 어디가고 댁이 나를 부리는 듯한 말씨요? 내 비록 널다리에서 썩고 있지만 댁의 말을 들을 놈이 아니란 말요."

"뭐라? , 그놈, 큰소리 땅땅 치는 걸 보니 춘동이란 놈이 사람을 잘 못 골라 보냈고나. 이놈아 내가 누군지 듣지도 못했느냐?"

박달수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러자 땅개가 소대가리에게 낮게 을렀다.

"정신줄 놓았소? 저분이 바로 북촌 박달수란 분이시오. 춘동이 성님도 저분의 지시를 받는 단 말이요. 성님은 그 성미가 탈이요. 이 일이 어디 삼년 전 성님이 내 뺨 때리듯 쉬운 줄 알았소?"

땅개가 떠먹이 듯 일러주니 그제야 사태를 짐작한 소대가리가 굽신 머리를 숙였다.

"죄만 하우. 미련한 놈이니 용서하우."

", 그놈, 혼자서 제멋대로 놀고 있구나. 호랑이가 궁하면 개미 굴을 핥더라고 내가 일시 궁기(窮氣)가 들어 이 짓을 하고 있으니 개미가 범의 불알을 무는 격이 아니냐?"

박달수는 화가 나려 하였다. 그러나 꾹 참고 이번엔 억만이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박달수가 미쳐 물어 보기도 전에 억만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투전방에다 꽂아 놨수. 수는 적지만 연장을 다루는 일엔 빠질 놈들이 아니우."

"좋다. 일은 술시(戌時)에 시작한다. 망태 너는 그 시간까지 신탄 장수들의 돈을 다 뽑아먹고 내가 써 준 위탁서(委託書)에 지장을 찍도록 하란 말이다. 알았느냐?"

"알았소, , 아까 말한 곰보네 주 포교란 놈은 어쩌면 좋겠수?"

"가만..... , 지금 너희들이 가서 그놈을 난짝 들어다 저 아래 사공막으로 데려오너라. 상조회의 동태를 문초한 다음 얼음에 구멍을 뚫어 집어넣어버릴 것이니."

"그럴 것 없이 아예 지금 해 치우리다. 성님은 방에 편히 계시우."

억만이와 땅개와 소대가리가 함께 뒷 방을 나와 천천히 곰보네로 향했다. 객주 부엌 아궁이에 불을 때 주며 연방 밖의 동정을 살피던 덕구가 망태가 나가는 것을 보았다. 덕구는 그들과 거리를 두고 뒤를 따랐다. 놈들이 곰보네 객주로 들어가고 있었다. 덕구는 얼른 수숫대 사이로 눈길을 박았다. 땅개가 주인인 곰보를 불러내어 몇 마디 나누더니 끝 방으로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을 하고 있었다. 이어서 문을 벌컥 열고 놈들이 일제히 뛰어들었다. 네 명이 달려들었으니 중과부적이었을 것이다. 몇 번 투덕이는 소리가 나더니 한 놈이 아갈잡이를 한 웬 사내를 업고 나왔다. 그리고는 업은 놈을 에워싸고 바람처럼 삽짝을 나서는 것이다. 덕구는 재빨리 모퉁이에 숨었다가 곧바로 그들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놈들은 강변으로 가고 있었다. 사공막으로 들어서는 놈들의 뒤를 따라간 덕구는 뒷 곁으로 돌아가 귀를 기울였다.

"빌어 먹을 놈. 상조회 포교 출신이면 장사나 해 먹고 살 것이지 남의 밥그릇은 왜 넘보고 지랄들 인가 말이야. 이놈이 주흥식이라는 놈이 맞는 거요?"

"맞네, 그놈 얼굴은 내가 잘 알지. 내가 마 포교를 죽이기 전에 사실은 이놈을 노렸었거든. 이렇게 된 바엔 아예 지금 상조회로 쳐들어가는 게 어떻겠나?"

억만이가 늘어진 주흥식을 발로 툭툭 건드려 보았다.

"박달수 성님 말을 못 들었수? 술시에 치기로 한 것 말이요."

"까짓 그러지. 이르나 늦으나 신명 떨음은 할 테니까."

"상조회 놈들이 눈치채기 전에 얼른 한 칼 먹여 얼음 구멍에 넣읍시다."

"구멍 뚫을 도끼는 갖고 왔나?"

이제껏 말이 없던 망태가 땅개를 향해 물었다.

"아차, 그걸 잊었군. 내 얼른 갔다 오지요."

땅개가 잽싸게 사공 막을 벗어나 곰보 네로 달려갔다. 뒤곁에 숨어서 그들의 말을 듣던 덕구의 마음이 조급하였다. 상조회 객주라면 언덕 넘어 송 의원과 거칠이 아재가 머무는 곳이 아닌가? 덕구는 땅개가 어디쯤 갔는지 살펴보았다. 어둠 탓인지 보이지 않았다. 덕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상조회 객주가 있는 언덕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끼를 들고 되돌아오던 땅개가 덕구를 보았다. 그러나 뒤를 쫓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어졌다고 느낀 땅개는 얼른 사공막으로 달렸다.

"파리가 붙은 걸 몰랐소. 웬 놈이 우리들을 지켜보고 튀었단 말이요."

"뭐라고? 그렇게 되면 놈들이 먼저 쳐들어 올 것 아니냐? 안 되겠다. 저놈은 갔다 와서 처리하기로 하고 어서들 가서 애들 몰고 움막에 모여라. 나는 박달수 성님과 의논을 해서 너희에게 기별을 할 테니. 어서들 가거라."

망태는 사공 막을 나와 박달수가 기다리는 객주로 부지런히 걸음을 놓았다.

"성님 일이 틀어지게 생겼수. 첩자가 또 한 놈 있는 걸 몰랐수. 놈이 상조회 객주 쪽으로 뛰어갔으니 어쩌면 좋겠소?"

"뭣이라? 이놈들 무슨 일을 그리 해? 허고, 이왕 들킨 거면 이판 사판 아니냐? 먼저 치고 봐야지 우물쭈물이 웬 말이냐? 앉아서 당하고 싶으냐? 놈들이 맥 놓고 있을 때 기습을 하면 충분히 때려잡을 수가 있다. 악착같은 깍정이들이라면 할 수 있단 말이다. 어서 애들을 휘몰아 상조회를 쳐라. 뒷일은 내가 감당할 테니까."

망태는 움막으로 향하는 땅개 패를 좇아가 상조회를 치라고 명령을 내렸다. 땅개와 소대가리는 제각기 움막에 묻어 둔 깍정이들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억만이 패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시간에 덕구는 객주에 닿았다.

"넌 누구냐?"

부엌을 기웃거리던 기형도가 덕구를 발견하고 물었다. 기형도는 부엌의 젊은 과부댁이 어서 설거지가 끝나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중이었다.

"큰일 났소. 지금 주흥식이라는 사람이 망태 패에 끌려갔소."

"뭐야? 본색을 들켰나 보군, 이거 큰일이로구나."

기형도는 포교들이 있는 방문을 열며 소리쳤다.

"까마귀 털 빠졌다. 나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장기를 챙겨 든 전직 포교들이 쏟아져 나왔다. 기형도는 그새 노탁우의 방문 앞에 와 있었다.

"부 회주님 주흥식이 털이 빠졌답니다. 화급 올시다."

뚱뚱한 노탁우에게 어떻게 그런 날렵함이 있었는지 방문을 박차고 나선 그의 손에는 어느새 그가 아끼는 환도가 쥐어져 있었다. 그 뒤를 따라 나온 방인근의 손에도 짧은 예도(銳刀)가 들려 있었다. 마당으로 나온 노탁우는 기다리는 포교들을 둘러보았다.

"가자."

앞장을 서려던 기형도는 그제야 빈 손인 걸 알았다. 그는 선뜻 고방으로 달려가 어물 갈고리를 손에 들었다.

"소인이 주 포교와 정찰을 했으니 앞장을 서겠습니다."

"그러게. 어서들 가자."

", 너는 따라오지 말고 어서 집으로 가거라. 알려주어 고맙다."

기형도는 삽짝 곁에 붙어선 덕구의 어깨를 다독여 주고 후다닥 뛰어나갔다. 그 뒤를 십여 명의 포교들이 따라 뛰었다. 기형도가 포교들의 앞장을 서서 언덕을 막 넘었을 때였다. 밝은 달빛 아래에 한 떼의 무리들이 이쪽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웬 놈들이냐?"

기형도가 기세 좋게 한 걸음 나아갔다. 그러나 그 무리들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선두가 그대로 다가오더니 불현 듯 기형도의 머리를 노리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기형도 역시 전직이 한가락 하던 포교 출신이었다. 얼핏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그러자 방망이는 어깨 옆으로 스치며 아래로 흘러버렸다. 동시에 기형도는 손에 쥐었던 갈고리를 들어 놈의 면상을 콱 찍었다. 놈은 갈고리에 얼굴이 찍혔어도 쓰러지지 않았다. 기형도는 발을 들어 그놈의 배를 걷어차며 갈고리를 뽑았다. 그제야 놈은 풀썩 쓰러졌다. 놈이 쓰러지자 뒤에 섰던 놈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것을 본 노탁우가 칼을 뽑는가 싶더니 번개같이 좌우로 그어버렸다. 결과는 참혹했다. 앞에서 몽둥이를 든 놈들 셋이 처들었던 팔도 내려 보기 전에 똑같이 허리가 잘려 무너져 내렸으니 말이다. 노탁우의 칼질을 신호로 방인근과 김진국이 칼을 빼내어 휘두르기 시작하자 나머지 포교들은 육모 방망이로 춤을 추니 박이 터져 죽는 놈이 여럿이었다. 깍정이 무리들 가운데는 왕년에는 수표 다리 밑에서 거들먹거리다 지난해 오간 수문으로 쫓겨 난 땅게도 있었고 널다리(匡矯)의 터줏대감 소대가리도 있었다. 놈들은 잔인함과 깡다구만으로 그 바닥에서 상대가 없었다. 그러나 십수 년 간 조련 받은 포교의 칼날을 어찌 피하랴?    허무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었다.

"가자."

다시 노탁우가 낮게 말했다. 언덕을 내려가 모래 밭에 이르렀을 때였다. 대 여섯 명의 사내들이 슬금 슬금 다가와 앞을 막고 섰다.

"뭐냐? 누구기에 앞 길을 막는 거냐?"

기형도가 한발을 나서며 물었다.

"올커니, 상조회 패거리들이로구나. 아직 숫자가 줄지 않은 걸 보니 아직 깍정이들을 못 만났나 보구나. 네 놈들이 주흥식을 구하려 간다면 늦었느니라."

"? 주흥식을 해쳤느냐?"

"언젠가 마개출이는 내가 확실하게 손봐 준 적이 있지. 주흥식도 곧 그리 될 것이다."

"마 포교를 죽인 놈이 너로구나. 잘 되었다. 여봐라, 방인근만 남고 나머지는 어서 가서 주 포교를 구하라. 이놈은 내 칼 맛을 보여 줄 것이니."

"!"   

앞장을 선 기형도를 따라 포교들은 일제히 사공막으로 달려갔다.

", 주먹 잘 쓴다던 마개출도 형편없더구만 꼴랑 둘이서 우리를 감당할 것이냐?"

억만이는 제 수하 놈들과 함께 깍정이 패와 합류를 하러 가던 참에 포교들을 먼저 만난 것이다. 억만이는 깍정이들이 이미 요절이 나서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억만이는 비수를 뽑아들고 자신의 장기인 허공 긋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자 덤벼라."

"방인근은 저놈들을 맡으라. 마 포교의 원수는 내가 갚아 줄 것이니."

"놀고 자빠졌네. 그러다 네놈이 죽으면 누가 네놈 원수를 갚아 줄 것이냐?"

노탁우는 비천세(飛天勢)의 자세로 칼끝을 땅에 내리고 고요히 섰다. 정월 대보름 달 밝은 밤에 달집을 태우는지 쥐불놀이를 하는지 밤섬도 불빛이 밝아서 노탁우의 뚱뚱한 몸매가 모래밭에 박힌 미륵불처럼 잘 보였다.

"에잇."

억만이가 몸을 낮추는 것과 동시에 노탁우의 아랫배를 파고들며 칼을 그었다. 그러나 그었다는 마음뿐이었다. 억만이는 칼을 다 긋지 못하고 사타구니에서 얼굴까지 노탁우의 칼날이 지나가 버렸다. 제비가 허공을 날아 오르 듯 노탁우의 칼날이 하늘로 날았기 때문이다. 억만이의 배에서 내장이 쏟아져 역한 냄새를 물씬 풍겼다. 깜짝 놀란 네 명의 졸개들은 미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방인근의 칼날에 목들이 베였다.

"가자."

노탁우의 몸이 춤을 추 듯 둥실 거리며 달려 나갔다. 사공막 앞에는 벌써 임치상이 주흥식을 업고 나오고 기형도와 김진국은 투전방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주흥식은 어떠하느냐?"

"무사합니다. 의식도 돌아왔습니다."

"됐다. 너 먼저 김진하와 함께 객주로 돌아가거라. 우리도 얼른 끝내고 돌아갈 터이니."

노탁우는 곧바로 투전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까보다 밤섬의 불빛이 엄청 밝았다. 잠시 뒤돌아보니 그 사이에도 불길은 점점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다.

"밤섬에 불이 난 것이 적실하다. 하나, 우리 일은 어서 끝내고 보자."

노탁우는 투전방으로 돌진했다. 그러나 투전방 어디에도 와주라던 박달수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포교들은 번개같이 그 방으로 몰렸다. 횃불을 든 포교가 놈에게 다가 갔다. 그러자 놈은 자꾸만 고개를 돌렸다. 한데 놈이 숨은 곳이 헌 이불을 씌운 커다란 항아리 뒤였다. 권철후가 이불 조각을 확 재꼈다. 횃불에 비친 항아리 속에는 놀랍게도 엽전이 가득했다. 투전 판을 벌려 긁은 돈이었다.

"오라 이놈이 수전노(守錢奴)였구나. 돈을 지키느라 도망을 못 간 것이야."

노탁우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뱉었다.

"저놈이 아까부터 고개를 외로 꼬는 것이 수상하다. 놈의 낯바닥을 비춰 보거라."

김진국이 놈의 상투를 잡고 뒤로 꺾었다.

", 이놈은 마 포교에게 쫒겨 났던 망태 아니냐? 부 회주님 이놈이 바로 대동계를 만들어 없는 사람들의 피를 빨던 망태란 놈이올시다."

"그래? 그렇다면 주흥식을 보내려던 곳으로 보내 주거라."

노탁우가 차갑게 뱉었다. 노탁우의 명령 일하에 망태는 댓 명의 포교들에게 잡혀 사공막으로 끌려갔다. 마침 땅개가 갖다 둔 도끼가 있어 구멍을 뚫어 곧바로 집어넣으니 망태는 죽으면서도 원망할 곳이 없다는 것을 원망하며 죽을 수밖에 없었다.

죽은 망태가 원망을 못한 것은 돈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가 죽기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깍정이패의 땅개와 소대가리에게 상조회를 치라는 박달수의 명을 전한 후, 혼자서 투전방으로 돌아갔다. 투전 방에서는 이미 계획대로 두 놈의 신탄 장수의 돈을 다 털어냈다. 다음은 현물인 밤섬의 신탄을 걸게 하는 것도 성공을 하였다. 다시 투전 패가 돌고 결과는 불문가지(不問可知)였다. 두 신탄 장수는 거지가 된 것이다. 그런데 두 신탄 장수가 흥분이 가신 다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속은 것 같은데 물증을 잡지 못했다. 또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천례(賤隷)의 성씨로 이만큼 일어서기란 조선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을 이루었는데, 저 많은 신탄을 다 뺏기게 생겼으니.... 가솔들은 또 어쩔 것인가? 생각할수록 억울한 일이었다. 망태가 돌아 왔을 때가 바로 이때였다.

", 여기다, 지장들 찍어."

망태가 준비했던 양도서를 내밀었다.

"..................."

"어라? 버티겠다? 버틸 걸 버텨야지 우리가 강제로 뺏는 것도 아닌데 버티면 그 신탄이 다시 너희들 것이 된다더냐?"

망태가 내민 양도서를 바라보던 신탄 장수 하나가 종이를 나꿔 채더니 좍좍 찢어버렸다.

"? 이놈들 봐라? 이걸 찢어?"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 나가려 하였다. 그러자 망태가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얘들아, 여기 손님들 나가신다. 손들 좀 봐 주어라."

단번에 네 댓 놈이 달려오더니 두 신탄 장수를 엎어 놓고 작신 밟아 대는데 마치 설죽은 뱀 대가리 밟 듯하였다. 그러니 결국 다시 쓴 양도서에 지장이고 족장이고 찍으라는 대로 다 찍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벌벌 기다시피 서로 의지하며 밤섬으로 돌아 왔다. 두 사람의 꼴을 본 식솔들이 대성통곡을 하니 좁은 섬이라 모든 이웃이 알았다. 소식을 들은 동이의 할애비도 모습을 들어냈다. 전 재산인 신탄 더미를 뺏긴 두 사람은 강을 건너오며 서로 맹서한 일을 저질렀다. 각자 자신들의 장작더미에 불을 지른 것이다. 동이의 할애비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다 뺏길 장작이었다. 손자가 나서기 전에 먼저 불을 질렀다. 불길은 빠르게 타 올랐다. 불은 강 건너 박달수의 눈에도 잘 보였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뺏기기 싫어서 불을 지르는구나. 오냐 좋다. 이놈들을 내 손으로 다 죽여주마."

박달수는 망태의 졸개 하나를 거느리고 굵직한 몽둥이를 찾아 들었다. 그리고는 강을 건너 불길 가까이 다가갔다. 밤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지옥불에 든 듯 아우성을 치며 울고불고 날뛰고 다녔다. 박달수가 이리저리 돌아 보니 생각대로 낮에 매를 쳐 보낸 동이란 놈의 할애비가 횃불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다. 박달수는 단숨에 달려가 늙은 이의 머리를 몽둥이로 내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늙은이의 허리가 단번에 꺾였다. 박이 쪼개져 즉사한 것이다. 박달수는 다시 횃불 든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저쪽에서 횃불이 어른 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박달수가 그쪽으로 걸어 갔다. 순간 목덜미가 뜨끔하여 손을 대려는데 다시 옆구리에 찌릿한 기운이 전해졌다. 박달수는 옆을 돌아 보았다. 이제껏 따라오던 졸개가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갑자기 텅 비는 것 같았다. 순간 자신의 생명도 끝인 걸 느꼈다. 실제로 그걸로 끝이었다. 박달수를 쇠꼬챙이로 찌른 덕구는 이미 종적을 감추었다. 상조회의 객주에서 돌아온 덕구가 운 좋게 박달수를 본 것이다. 불길은 이제 가까운 초가집으로 번졌다. 바람을 받은 불길은 밤섬 전체를 태우려 들었다. 동이는 할애비를 찾아 나섰다. 사람들 사이로 무작정 찾아 헤메다 끔찍하게 죽은 할애비를 보았다. 동이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언젠가는 반드시 모조리 죽여 줄 테다. 이 양반 놈들아 아."

치솟는 불길을 바라보며 동이는 발악하 듯 소리를 질렀다. 동이를 찾던 덕구가 말없이 옆에 와 섰다.

", 원수의 반은 내가 갚았수."

"네가 나를 좀 도와다오, 할애비를 화장해야겠다."

동이와 덕구가 마주든 할애비를 불속에 던졌다. 동이 할애비는 불속으로 사라졌다.



"불길이 밤섬을 다 태우겠군."

객주로 돌아오는 길에 노탁우가 혀를 차며 한 말이었다.

"부 회주님, 저길 보십시오. 밤섬으로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가는군요."

"보고 있느니. 아마 움막의 유랑민들 일 것일세."

"추워서 불을 쬐러 가는 것은 아닐 테고 무엇을 하러 저렇게 몰려갈까요?"

"저 혼란 중에 혹여 먹을 것이 있나 해서겠지."

"저러다 건질 게 없으면 화적으로 돌변할까 걱정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저들에게 염치나 예의를 바랄 수도 없는 것 아니겠나."

움막이 있는 언덕을 넘어 객주에 도착한 포교들은 지체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임치상이 업어 온 주흥식이 누워 있었다. 주흥식은 몰매를 맞아 온 몸이 멍이 들어 있었다.

송윤호와 거칠이가 서빙고를 지나 둔지산 아래에 당도했을 때는 밤섬의 불길은 많이 사그러 들어서 은빛 같은 달빛이 제 모습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반 시진 전까지만 해도 강 건너 간뎃말에서 본 하늘은 흡사 둔지산에 황혼이 내려앉은 듯했던 것이다. 송윤호는 걸음을 빨리해 나루터로 가 보았다. 나루터에는 밤섬에서 건너오는 사람들이 수도 없었다. 자세히 보니 움막에 사는 유랑민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솥에서부터 바가지, 소쿠리 등의 갖가지 물건이 들려 있었다. 반은 약탈이었을 것이었다.

"나으리 아무래도 밤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적실 하옵니다. 동이와 덕구가 걱정이오니 얼른 객주로 달려가 짐을 내려놓고 오겠습니다."

"가만, 그럴 것 없다. 그 짐을 벗어 두고 어서 건너가 보거라."

"아니 옵니다. 나으리께서 추우신데 쉔네를 기다리실 수는 없사옵니다."

"어허, 어서 짐을 벗어라. 내가 지고 가마."

", 아니 되옵니다."

"또 이러는구나. 나로 하여금 다시 말하게 하려 하느냐?"

"아니 옵니다. 분부 받잡지요. 나으리 유랑민을 피해 저리로 돌아가시옵소서."

"그래야 할 것 같구나. 걱정 말거라."

송윤호는 거칠이가 벗어주는 고리짝을 짊어졌다. 엽전 서른 닷냥이 이럿 듯 무거우니 백 냥이면 황소의 허리가 부러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열푼(十文) 짜리와 한 냥(一兩) 짜리를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며 언덕을 넘었다. 객주에 닿으니 칠흑같이 어두운 가운데 한 방에만 등불이 밝혀져 있었다. 송윤호는 자신이 쓰던 어두운 방을 찾아 들었다. 송윤호는 등불을 켜지 않고 손을 더듬어 목침을 찾은 후 드러누웠다. 사람 없는 방이라 불을 때지 않아서 냉골이었다. 이불도 없으니 잠이 들 것 같지 않았다. 다시 일어나 앉았다. 지금이라도 밖에 나가 불을 지필 것인가를 망설이는데 밖에서 인기척과 함께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송 의원 오시었소? 아직 주무시지 않으면 잠깐 나와 보시오."

기형도의 목소리였다. 송윤호는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역시 달빛 아래 기형도가 서 있었다.

"조금 전에 방문여닿는 소리를 들었지요. 미안한 일이나 주 포교를 좀 봐 주시오. 많이 상한 듯 하오."

"아니? 어디가 어떻게 상했소? 가만... 가서 좀 봅시다."

주흥식의 몸을 살펴 본 송윤호는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전신에 멍이 들었으니 밀타승(密陀僧)이라도 개어 붙이면 좋으련만 지금으로서는 구할 수도 없는 물건인 것이다. 그렇다고 침을 놓을 병도 아니요, 창상(創傷)이 아니니 싸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두면 어혈(瘀血)이 생길 것인데 지금으로선 약이 없으니 큰 일이요."

"그래도 혹시 무슨 방도가 없겠소? 고방에 있는 것 중에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하시오."

"우선 간장 종지가 두어 개 있으면 갖다 주시오. 급한 대로 어혈을 뽑아야 겠소. 그런 다음 치자가 있다면 달여 마시고 메밀가루를 꿀과 함께 섞어 붙이면 소염(消炎)에 어혈을 막을 것이요만 혹시 치자가 있소?"

"글쎄요, 꿀과 메밀은 있으나 치자를 본 기억은 없소이다."

기형도가 실망스런 답변을 하자 자려고 누웠던 김진국이 벌떡 일어났다.

"치자가 왜 없을라고? 지난번 부 회주님 생신 때 부침개가 노랗더구만, 치자가 아니고야 그런 색이 나겠습니까? 부엌 어딘가에 있겠지요."

"옳아, 그렇구먼. 가만 부엌 할멈을 깨워야 할까 부다."

기형도는 성급히 방문을 열고 나가고 있었다.

"기왕이면 젊은 과부댁을 깨우시우."

김진규가 짖굿게 웃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소? 내가 알기에는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들 무예가 뛰어나신 분들이니 다툼으로 인한 것은 아닐 터이고.... 혹 밤섬에 인명을 구하러 갔다가 그리 된 것은 아니요?"

송윤호가 주흥식의 피멍을 다시 살피며 김진규에게 물었다.

", 우리 형님의 무예는 우리들 가운데 제일이시오. 그리고 밤섬에 불이 난 것은 보았소만 우리가 간들 무엇을 할 수 있다고 갔겠소."

"그러시군요. 오는 길에 보니 밤섬에서 움막 사람들이 새카맣게 몰려다니기에 혹여 그들과 밤섬 사람들 간에 충돌을 진무하러 가신 줄 알았소."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저 유랑민이 나라의 골칫거리는 틀림없어요. 혼란의 틈새를 어찌 그리 잘 아는지 훔치고 뺏는 것은 약과요 살인도 서슴지 않습디다."

"? 밤섬에서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요?"

김진국이 유랑민의 약탈을 입에 올리자 송윤호는 축석고개에서의 일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밤섬 얘기가 아니요. 재 작년인가 내가 우포청에서 폐장(牌將)을 하고 있을 때인데 솔모루란 곳에서 그런 일이 있었지요. 유랑민이 낙향하는 양반의 행차를 덮쳤는데 아, 이놈들이 눈깔이 뒤집혔는지 가마 속의 피 묻은 양반의 저고리까지 걷어 갔다 합디다. , 참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송연(悚然) 합니다."

김진규의 얘기를 다 들을 것도 없이 갑자기 송윤호의 관자놀이가 화끈하더니 정수리까지 뜨끔하여 깜박 정신을 잃을 뻔하였다. 이게 무슨 소린가? 여기 앉은 김진국이란 사내가 그 현장을 보았다니? 재빨리 정신을 수습한 송윤호가 잠깐 메마른 입술을 적신 다음 냉정을 찾았다.

"? 그때 그 곳엘 갔었단 말이요? 이것 참 묘한 우연이구려. 그때 그 행차에 외가의 친척이 변을 당했었지요. 들으니 정말로 참혹한 정경입디다."

", 그 일로다 송 의원 외척이 희생이 되셨다니 안 되었소."

", 그 뒤에 약탈을 한 유랑민들은 다 잡아들였던가요?"

"그것들을 잡아 무엇 하겠소? 가득이나 배고픈 놈들을 앉혀 놓고 공 밥을 멕일 일이 뭐란 말이요? 모조리 때려죽였지요."

"? 남김없이 말이요?"

"들으니 몇몇은 살아서 도망을 친 모양입디다만 거의 죽었다고 봐야겠지요."

"그렇겠습니다. 발 빠른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게 마련이니까요."

"그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구려. 내가 그때 기마병을 거느리고 유랑민의 은거지(隱居地)를 들이쳤을 때 한 놈이 솔밭으로 구르는 것을 보았소. 하나, 남은 놈들을 처리하느라 놓치고 말았지요. 그놈 참 재빠른 것이 꼭 꿩 새끼 같습디다."   

"그 당시 기마군 패장을 하셨다니 잘 아시겠소. 그 현장에 아이는 없습디까?"

"없었소, 유랑민이 되면 아이들이 가장 먼저 굶어 죽으니 아이 딸린 유랑민은 보기 드물지요. 솔모루에서 죽은 유랑민들 가운데 어린아이는 없었소. . 이건 나중 일이오만 여주 관아에서 어전에 장계를 올리고 우포청에도 서신을 보냈는데 솔모루에서 양반 행차를 습격했던 놈들이 그곳까지 도망을 왔다고 누가 발고를 한 모양입디다. 그래서 놈들을 찾아 모조리 박살 냈다는 내용이라 합디다. 사로잡은 것은 여인 둘과 아이가 둘이었다지요 아마."

"아이라니요? 몇 살이나 된 아이요?"

"여인이건 아이건 모조리 여주 관아의 관노로 박았다니 간난 아기는 아닐 것 아니요?"

"? 그들이 여주 관아의 관노로 있단 말씀이요?"

"왜 그러오? 송의원?"

", 아니요. 죽지 않은 유랑민도 있다기에 놀란 것 뿐이요."

"어쨌든 유랑민이 적도(賊徒)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란 말이요."

때마침 기형도가 방으로 들어서며 간장 종지 두 개와 실에 꿴 치자 열매를 자랑스레 들어 보였다. 송윤호는 우선 간장 종지를 등잔불에 살짝 달궈 부항을 뜨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치자를 우리고 메밀가루와 꿀을 갖고 오라고 하여 그것들을 함께 섞어 반죽을 하였다. 그 반죽을 부항을 뜬 자리에 붙이고 헝겊을 동였다. 그리고 치잣물을 달여 먹였다. 이 모든 것을 하는 데는 두 시진이 걸려서 인시 (寅時)가 넘어서 끝이 났다.

"고맙소 송 의원."

심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신음 소리 한 번 없던 주흥식이 문득 말했다.

"천만의 말씀이오. 내가 할 일을 한 것뿐이요. 다른 상처와 달리 이런 환부는 참는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소이다. 날이 밝으면 약방문을 내어 탕약을 들면 한결 나을 것이오.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소. 어떻게 든 잠을 청해 보시오."

이날 밤 송윤호는 날이 새도록 주흥식의 곁을 지켰다. 날이 밝도록 거칠이가 오는 기미는 없었다. 앉아서 날을 밝히면서도 생각은 온통 여주 관아에 가 있었다. 관비로 박혔다는 여인들이나 관노로 박힌 아이는 혹시 원일이의 행방을 알고 있을까? 여주로 온 유랑민 중에 과연 어린애를 데리고 있던 사람이 있었을까? 있었다면 그 아이가 정말로 원일이 였을까? 아니면 유랑민의 아이였을까? 좀이 쑤셔 견딜 수 없었다. 날이 밝으면 떠나야지. 날아 어서 밝아라. 송윤호는 입속으로 이 말을 수없이 되뇌며 밤을 새웠다.

날이 밝자 송윤호는 자신의 방으로 와 봇짐에서 필랑을 꺼내 서찰을 한 통 쓴 다음 약방문을 적었다. 적은 약방문을 가지고 주흥식에게 가니 모든 포교들이 깨어 있었다. 게다가 주흥식의 상태가 궁금했던 노탁우까지 와 있었다. 송윤호는 약방문을 노탁우 앞으로 밀어 놓았다.

"이것이면 될 듯 하오이다."

"밤새 송 의원이 고생이 많았다 들었소이다. 주흥식을 돌보아 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소."

"별 말씀 올시다."

"이 약방문은 발 빠른 권 군이 들고 갔다 오게."

"사흘 치의 탕약이니 하루에 두 번 달여 드시오. 저 반죽과 탕약이면 사 나흘이면 일어 나리다."

"고맙소이다. , 어제는 다들 경황이 없어 물어보질 못 했구려. 장사 말이웨다. 장삿길이 순조로우셨소이까?"

", , 염려 지덕에 팔긴 다 팔았지요."

", 그래요? 그래 얼마를 팔아 얼마를 남기셨소?"

노탁우가 의외라는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니 한방 가득한 초짜 장삿꾼들의 눈과 귀가 송윤호에게 쏠려 있었다.

"워낙 밑천이 적었던 지라 생각보다는 적게 팔았습니다."

"어허, 내가 보기에도 장사 밑천 치고는 적다 싶었소만.…"

노탁우의 말에 포교들이 실실 웃기 시작하더니 기어이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도 있었다. 송윤호는 소매 속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 방바닥에 펼쳐 놓았다. 자리에 누운 주흥식은 아프기도 하려니와 이 사람들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도 몰랐다. 그는 이 내기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여기 닷 냥어치로 약을 만든 수량과 판 수량이 적혀 있습니다. 제 나름으로 셈을 해 본 바로는 판 액수가 총 서른닷 냥 하고도 스무 푼이 더군요."

"? 뭐요? 다섯 냥으로 서른 닷 냥을 만들었단 말이웨까?"

"그러 합니다. 더 있었으면 더 팔 수 있었을 것이요."

둘러앉은 초짜 장삿꾼들은 입을 다물지 못 했다. 기어이 따지기 좋아하는 김진국이 나섰다.

"상도의란 말이 왜 있겠소? 닷 냥으로 서른 닷 냥이면 지나친 폭리가 아니요?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그래도 되는 거요?"

"서른 닷 냥만 놓고 보면 분명 폭리지요. 하지만 내가 판 약은 한 쌈에 단 한 푼이요. 한 푼이면 제일 적은 돈이오. 보리 개떡도 한 개에 두 푼이요. 게다가 의원의 돈 안 드는 침 한대 맞는 데도 반 냥은 내야 할 것요. 반면에 한 푼으로 아픈 배를 고친다면 그보다 일반 백성들에게 이로운 약이 어디 있겠소? 이것이 폭리라면 한 푼 밑으로 얼마를 받으면 폭리가 아니겠소?"

시비를 건 김진국은 물론이요 노탁우와 그 외의 포졸들은 할 말을 찾으려고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며 애를 써도 허사였다.

아침밥을 먹은 후에야 거칠이가 돌아왔다. 거칠이 뒤에는 동이와 덕구가 서 있었다.     

"동이 할애비가 돌아가셨사옵니다. 그래서 동이네서 같이 있었사온데 신탄은 다 불타 없어지고 지금 관에서 포교와 군사들이 몰려와 난리가 났사옵니다. 투전방에서 살변이 나고 밤섬에서도 살변이 났사옵니다. 헌데 오다가 보니 뒤 언덕 움막 앞에도 시체가 즐비 하옵디다. 이게 웬 변인지 모르겠사오니다 나으리."

"너희들은 나를 따라 잠시 방으로 들어 오너라."

송윤호는 동이와 덕구를 불러 앉혔다. 거칠이도 그 옆에 앉았다.

"너희들은 아무 말 말고 나를 따라가자. 살변이 왜 났는지는 포도청에서 조사를 할 것이나 자칫 조사에 휘말려 다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살변이 진정되면 다시 오면 될 것이다."

"어디를 가시려 하시는지요?"

"내가 급히 알아볼 일이 있어 여주로 가려 한다. 너희들을 두고 가려니 근심이 되어 그런다. 같이 가려느냐?"

"쉔네들을 거두어만 주신다면 어디든 거칠이 성님과 함께 목숨을 걸고 나으리를 따릅지요. 덕구 너는 어떠냐?"

"내가 성보다 먼저 나으리를 만났수."

"이놈의 말 버릇.…"

", 버릇을 어쩌우?"

송윤호는 열 냥씩 싸서 거칠이와 동이 그리고 덕구의 보따리에 넣게 했다. 그리고 닷 냥을 들고 노탁우를 찾아갔다. 노탁우는 여러 포교와 이제껏 머리를 맞대고 무슨 회의를 했었는데 이제야 끝났나 보았다.

"아이들 말로는 밤섬과 투전방, 그리고 요 넘어 움막 앞에도 살변이 났다고 합디다. 갑자기 웬 변괸지 알 수가 없군요."

", 조금 전 우리 아이들이 현장에 가서 포교를 만나보고 왔습니다. 듣자 하니 오간 수문 깍정이 패와 널다리 패 그리고 삼개의 왈짜패가 서로 싸움을 벌이다 서로 간에 인명이 많이 상한 모양입디다. 송 의원은 심려 마시지요. 왈짜들의 흔한 세력 다툼이야 하루 이틀 된 것이 아니오이다."

", . 그러했군요. , 여기 빌렸던 돈입니다. 허고 저에게 베푼 후의를 보답하고자 이번 장삿길에서 송상을 만났소이다. 그동안 보아하니 북어의 매집에 어려움이 있으신 것 같아서 제가 한번 나서 본 것이 올시다. 다행히 송상과는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라 쉽게 결말을 보았습니다. 송상의 북어를 상조회에게 넘겨 드리고자 하오. 여기 오천 쾌의 매매를 약속한 증서오이다".

노탁우의 놀란 눈이 송윤호의 전신을 훑었다. 노탁우 뿐 아니었다. 누웠던 주흥식이 그 소리에 고개를 들 만큼 다들 놀란 것이다. 누구보다 김진국이 가장 놀랐다. 후줄근한 옷차림에 맨 상투를 튼 송 의원이 그런 힘이 있었다니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아니? 오천 쾌라니? 삼천 쾌를 양도 받는 데도 갖은 애를 먹었는데... 이거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소이다."

"송상 솔모루점에 가시면 되리다. 저는 갑자기 무엇을 좀 알아볼 일이 있어 어딜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그동안 후의에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도 안녕히 계십시요."

다들 일이 어떻게 되어 송 의원이 이렇듯 갑자기 떠나게 된 것인지 짐작도 하기 전에 송윤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다.

"아니, 아니 송 의원. 이거, 이렇게 빨리 작별을 하다니? .…"



거칠이와 동이 그리고 덕구가 나란히 앞장을 서고 송윤호는 뒤에서 부지런히 걸으니 오정이 조금 지났을 무렵에는 대모산 밑에 닿았다. 용산 둔지산 아래의 덕구가 살던 움막 앞에서 등빙을 하여 우면산을 바라고 걸은 것이다. 여주라면 재 작년 원주의 염초도회소를 찾아갈 제 한 번 가 본 길이기에 지름길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지난번처럼 고불산을 넘어갈 것이니 차라리 이 동리에서 밥을 지어먹고 가자꾸나. 여기서 고불산이 삼십 리 밖에 안 될 것이다."

"그러하옵니다. 천천히 가도 해 안에 갈 수 있사옵니다."

네 사람은 인가를 찾아가 사정을 말한 후 돈을 주고 밥을 지어먹었다. 그리고 잠시 쉰 후 곧바로 걸으니 겨울의 짧은 해는 금세 저물어 막상 고불산에 이르니 어두워지고 있었다. 농가를 찾아가 사정을 하니 불을 지피지 않은 방 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짚을 얻어다 깔고 밤새 떨며 아침을 맞았다. 신세를 지는 김에 돈을 주고 아침까지 지어먹었다. 떨리던 몸에 더운 밥이 들어가니 살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고불산 앞에 오니 지난번처럼 산을 넘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할 수없이 산 옆으로 길게 이어진 계곡을 따라 걸으니 구절양장의 길이 험하기까지 하여 광주까지 질러가면 채 2십 리가 안될 길을 오정이 가까워서야 닿았다. 다행히 광주 경안 내 일대는 논이 많은 동리라 인심이 그리 야박치 않아서 밥을 지어먹고 길양식도 살 수 있었다. 다음부터는 그리 험하지 않은 길을 따라 이천을 지나 여주까지 백오십 리길을 이틀 만에 걸었다. 삼개에서 여주까지 오는 동안 동이와 덕구는 거칠이와 더욱 스스럼이 없어졌을 뿐 아니라 추운 날씨에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 거칠이 역시 상전인 송윤호와 둘이 다닐 때보다 한결 편한 듯 셋이서 잘 어울렸던 것이다.

여주에 닿은 그날은 농가의 방을 빌려 자고 이튿날 아침밥을 먹자 말자 송윤호는 여주 관아를 찾아갔다. 거칠이와 동이, 덕구는 좀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송윤호가 관아의 아문에서 이방을 찾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나타난 이방은 송윤호의 옷차림을 일별(一瞥) 하더니 같잖다는 표정을 짓고 섰다.

"날 보잔 사람이 자넨가?"

"그렇소."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나?"

"바쁜지는 내가 모르겠소."

"내가라니? 소인을 게워 올리는 것이 옳거늘, 내가라니?"

"내가 보니 당신은 사람을 외관으로 판단하는 것 같구려."

"아니 이놈이 아침부터 뉘게 시비를 가리려 덤비는 것인가?"

"백성을 어여삐 여기시는 목민관을 뵈려 하였더니 너무 하구려."

"? 다른 사람이 보면 암행어사가 출두한 품세로구나."

"사정이 있어 의관을 갖추지 못했소. 이방이 날 상대 않겠다면 사또를 좀 뵐 수 있겠소?"

"이놈이 누굴 놀리느냐? 사또께선 아직 기침도 않으셨다."

"그럼 사또께 이 서찰은 좀 전해 주시겠소?"

"그 서찰이란 게 언문으로 휘갈겨 쓴 것이라면 그만두거라. 사또께선 그런 언문은 모르신다. 진서로 썼느냐?"

"여기 있소."

"여기서 기다려. 허나 십중 팔구 툇짜일 게다."

이방이란 놈이 아문으로 들어가자말자 거렁뱅이 같은 놈의 서찰을 슬쩍 펴 보았다. 차림새는 형편없으나 의젓한 품으로 봐서 어쩌면 정말 암행어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서찰의 첫 머리가 전 예조 좌랑 송 아무개가 현감을 알현하고자 하나 사정상 의관을 갖추지 못한 고로 서찰로 대신한다는 글을 시작으로 유려한 문체와 미끈한 서체로 현감에게 무엇을 부탁한다고 쓰여 있었다. 눈알이 뜨금해 진 이방이 서찰을 다 읽자말자 관아의 수노(首奴)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서찰에 적힌 사건 때문에 노비로 박힌 두 관비(官婢)와 두 관노(官奴)를 불러오라 일렀다. 노비가 오자 수노를 시켜 아문 앞에 있는 사람에게 인도하되 차림이 허술해도 공대를 깍듯이 해서 보내라고 못을 박은 후 서찰은 밑씻개로 써 버렸다. 그 서찰이 사또에게 전해지면 자신에게 손을 홀대한 죄를 물을 것이 자명하고 문전박대로 따돌리면 혹시 저 자가 또다시 와서 행패를 부린다면 당연히 사또가 알게 될 것이었다. 그럴 바엔 아예 사또 모르게 일을 처리하면 그뿐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비록 전자(前字)가 붙긴 했지만 예조 좌랑이면 현감과 품계가 같지 않은가?     

"이 아이들을 보자고 한 분이시오?"

"그렇네."

송윤호는 관청 일이 이렇게 신속한데 놀랄 지경이었다. 기침도 하지 않은 사또가 꿈에서 서찰을 읽었나 싶게 빠른 공무 처리였던 것이다.

"너희들은 물으시는 대로 거짓 없이 고하고 들어오너라."

수노가 물러가자 젊은 여자 둘은 고개를 외로 꼬고 섰고 열 살이 넘은 놈 둘은 호기심이 담긴 눈길로 힐끔 거렸다. 송윤호는 그들을 담벼락 양지바른 곳으로 데려갔다.

"나는 사람을 찾으러 다니는 사람이니라. 아는 대로 바른대로 말해주면 너희들은 나의 은인이 될 것이다. 우선 묻겠다. 너희들은 솔모루에서 온 사람들이냐?"

송윤호가 묻건만 여자들이나 아이들이나 말없이 땅바닥만 들여다보고 섰다.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내 말이 맞구나. 됐다. 고맙다. 너희들이 이곳으로 올 때 돌쟁이 어린아이를 안은 사람과 같이 왔느냐?"

이 말에는 두 아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 있었단 말이지. 그 아이를 안은 사람은 여자였느냐?"

"."

작은 남자아이가 재빨리 대답을 하였다."

"오호, 그래? 네가 똑똑히 보았던 모양이구나. 그럼 그 아이가 그 여자의 아이였느냐?"

"아니요. 줏어 온 아이요."

이번엔 큰 놈이 지지 않으려고 큰 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오호라, 그랬었구나. 그렇다면 그 아이를 어디서 줏었단 말이냐?"

"줏은 게 아니라 죽은 사람에게 빼내 왔답디다."

이번에도 큰놈이 대답을 하였다.

", 그랬구나. 그럼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건 모르겠소."

"모른다? 그럼 그 아이를 처음 데려올 때 본 사람은 있느냐?"

"쉔네가 봤습죠."

두 여자 중 조금 더 젊어 보이는 여자였다.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하지요. 봄이었지요. 축석고개란 곳에서 양반 행차가 있었는데 그걸 덮치라고 향도가 우리들을 고개로 내 몰았지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 이미 참변을 당했습디다. 사람들이 많이 죽어 있었지요. 그런데 가마 안에서 애기 우는소리가 나니까 판덕이 마누라가 가마 속을 뒤져 그 아이를 안고 왔지요. 그날 밤에 노새를 잡아 구워 먹고 있는데 판덕이란 사람이 아이를 버리라고 소리소리를 치는 걸 보았지요. 쉰네는 거기까지만 보았지요."

"본대로 얘기해주어 고맙네, 정말 고마워."

"쉔네는 더 많이 아는데요?"

큰놈이 입에 침을 튀기며 눈을 빛냈다.

", 네가? 그래 어떻게 안단 말이냐?"

"판덕이 아재하고 판덕이 아지매랑 우리 엄마 아비랑 다 함께 여주로 왔으니 알지요. 애 이름은 개똥이라 합디다. 판덕이 아재가 그 아이를 멕여 살리느라고 애를 먹었지요. 어른들 얘기를 들어보니 그 아이는 양반의 씨라 합디다."

", , 그래? 그래서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느냐?"

"우리 아비와 엄마는 포졸들에게 맞아 죽었소, 나는 발길에 채여 잡혔소."

"그럼 그 판덕이란 사람은 어찌 되었느냐?"

그런데 이 대목에 이르자 이제껏 말 한마디 없던 여자 하나가 냉큼 말을 받았다.

"다들 죽었소, 우리 넷만 남기고 육모 방맹이에 죄다 맞아 죽고 말았소. 허나 두 사람이 살았소. 날 데리고 다니던 노달구라는 향도 놈과 이 아이가 말하는 판덕이란 사람이오. 후에 포졸들 얘기를 들어보니 노달구는 북 쪽으로 도망을 갔고 판덕이란 사람은 아이를 안고 여강을 건너 신륵사 쪽으로 도망갔다 합디다."

송윤호는 그만 그 자리에 스스르 주저앉았다. 아니 무너져 내린 것이다. 놀란 거칠이가 쫓아 오고 동이와 덕구가 황급히 다가왔다.

"후유."

잠시 후 송윤호가 깊은 숨을 뱉으며 일어나 네 사람의 관노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었다.

"그 아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 준 너희들의 은혜를 잊지 않으마. 고맙고도 고맙다. 잘들 있거라."

송윤호는 허공에 뜨려는 발을 주체 못하고 비틀 거리며 그 자리를 떠났다. 거칠이가 그런 송윤호를 부축했다. 동이는 또 다른 팔을 잡았다. 잠시 후 송윤호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결연히 말했다.

"됐다. 희망이 있다. 이제는 확실히 원일이를 찾을 희망이 있어. , 기어이 찾고 말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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