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였다.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 조중구에게 고달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러지 않아도 베팅액을 올리기 위해 낮에 은행에 들려 공탁금을 넉넉히 넣어 놓은 조중구였다. 지난주에도 본전 빼고 6천만 원을 땄던 것이다. 물론 고달수의 정보를 이용한 승리였다. 고로 고달수에게 2천만 원을 보냈었다.
"이번 경기는 내일 한답니다."
"연락 받았습니다. 지난번 거기서 한다지요?"
"그런가 봅니다. 내 개는 풍산개 두 마리가 나갑니다. 그리고 총무가 왔었는데 고기는 분명히 먹이지 않았소."
"상대 개는 무슨 종이랍디까?"
"그건 말을 하지 않았지요. 하나, 그걸 알아 무엇하겠소? 요는, 내 개에게 약을 먹이지 않았단 것이 중요한 것 아니겠소?"
"하긴 그렇지요. 잘 알았습니다."
다른 직원들과 섞여 연구실 문을 나서든 조중구는 저쪽 복도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도금동을 발견했다. 몇 주만에 보는 도금동이었다. 그동안 도금동은 집안 문제로 바빴고 조중구는 투견장을 찾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퇴근 시간에 맞춰 온다고 왔는데 아차 했으면 못 볼 뻔했구나."
"전화를 하지 그랬냐? 그래 이제 좀 시간이 나냐?"
"억지로라도 시간을 만들지 않으면 정말로 시간을 낼 수가 없더군."
"그건 그래. 참, 어디 가서 한 잔 해야지? 내 차가 가까우니 내차로 가자."
"그러지, 동우는 요즘도 공장에 붙어있데냐?"
"말 마라. 그 자식 아니었으면 이 번 공사비가 이십 퍼센트가 더 들어 갈 뻔했다더라."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도면과 실제 설치된 라인의 부품 숫자가 다른 걸 동우가 공사 내역서에서 발견했데. 그래서 시공사를 상대로 고소를 했다더라."
"하하하, 동우가 사장 아들인 것만 알았지 그 방면에 일류 엔지니어인 건 몰랐던 게로군. 게다가 그 자식은 경마든 일이든 빠지면 무섭게 몰입을 하는 놈 아니냐?"
"그러게 말이야. 얼렁뚱땅 좀 먹어보려 든 시공사는 이참에 혼이 좀 나겠지."
주차장에 닿은 조중구가 먼저 운전석에 올라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어디로 갈래?"
조중구가 안전띠를 당기는 도금동을 향해 물었다.
"어디든 조용한 대로 가자. 술 보다 얘기를 하고 싶으니까."
"왜? 집안일 때문이냐?"
"그것도 있고 이것저것... ."
"보나 마나 네 동생이 문제로군."
"을동이 그놈이 말을 안 들어."
"헛 을동이가 말을 안 듣게도 됐지. 걔는 애초부터 경영학을 한 목적이 너희 아버지를 대신하려던 것 아니었냐?"
"하지만 집안의 장남인 내가 있는데 MBA 하나로 서열을 뒤엎겠단 말이냐?"
"제 생각엔 회사는 전문 경영가가 맡아야 한다는 거겠지."
"야, 그 소린 제발 그만둬. 그러지 않아도 그 자식이 앵무새처럼 그 소리만 무한 반복을 해대고 있단 말이야."
"이거 잘못하면 회사의 운명이 이상한 스토리로 엮이게 생겼다. 그리되면 일구월심으로 실장 자리를 바라보던 나는 뭐가 되냐? 이거 안 되겠다.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서기 전에 너나 나나 무슨 수를 생각해야겠다."
"뭐? 수? 무슨 수를 쓴단 말이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생각을 해 봐야지."
그제야 조중구는 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차를 앞으로 몰아 정문을 빠져나왔다. 잠시 후, 차는 도산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조중구가 잠시 말이 없자 도금동이 옆으로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너 동우 말 들으니 지난주에도 왕창 땄다며?"
"왕창은 무슨.... 운이 따라서 베팅 한 쪽이 이겼을 뿐이야."
"일 억이 왕창이 아니란 말이냐? 네 이 년 치 월급인데?"
"그게 몽땅 딴 돈이야? 베팅 한 종잣돈 사 천은 생각 안 하냐고?"
"그렇군.... 하지만 육 천도 크지."
"오늘따라 너답지 않게 웬 돈타령이 심하냐? 나는 돈 좀 따면 안 되냐?"
"안 될 거야 없지만 너처럼 연속해서 맞히기가 그리 쉬운 일이냐? 그러니 혹시 나 모르는 비결이 있나 해서 지."
도금동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백미러로 조중구의 표정을 슬쩍 슬쩍 훔쳐보며 말을 이었다.
"너 언젠가 경마에 대해 말할 때 내게 확률 어쩌고 한 적이 있지? 바로 그 확률이란 게 투견장에도 있디?"
"그 개들의 전적을 체크한 적도 없는데 겉모양만 보고 어떻게 확률을 따지냐? 그냥 대충 그날의 감이 오는 쪽에 콱 찍는 거지."
"그런데도 연속해서 맞힌단 말이야?"
"맞혔다고 해야 이제 네 번 가서 다섯 게임 맞혔다. 베팅에 실패한 것도 두세 게임이 있단 말이야. 한데도 너나 동우는 맞힌 것만 자꾸 말하냐?"
"그 게 바로 도박의 생리 아니겠냐? 딴 것만 좋고 잃은 건 생각하기 싫은 그런 것 말이야."
"어쨌든 베팅에 성공해서 돈이 좀 생기니 집안도 한결 기름이 도는 것은 사실이다. 그 돈으로 우리 아버지 병원비도 해결했고 현구란 놈 신혼 집도 마련해 줬으니까."
"가만, 네 아버지 병원비라니? 너의 아버지가 어디 편찮으시냐?"
"지 지난주에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그래? 그럼 그때 내게 왜 알리지 않았냐?"
"가뜩이나 골치 아픈 네게 알려서 좋을 일이 뭐냐?"
"그래도 그렇지. 앞으로 그런 일은 서로 알고 지내자고."
"알았다. 참 회사 내의 소문을 듣자니 너의 아버지 건강이 더 나빠지셨다며?"
"그래서 내가 이러고 있지 않냐? 노인네의 건강이 여기서 더 나빠지기 전에 확답을 받아야 하는 데 전혀 반응이 없으시니 말이다."
"그래?"
"아, 바로 이럴 때 신약이라도 하나 개발되어서 내 숨통을 탁 틔워주면 얼마나 좋으냔 말이다. 너희 연구실엔 아직 아무런 꺼리가 없지?"
"지난번 안양 시험소 사건 이후엔 오히려 몸들을 사리는 눈치다."
이번엔 조중구가 백미러를 통해 도금동의 표정을 힐금 힐금 바라보았다. 그동안 자동차는 강남 을지병원 교차로를 우회하여 논현로를 타고 있었다.
"야, 술 한잔 마시는데 지금 어디까지 가는 거냐?"
무심히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던 도금동이 밝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같은 날은 술 보다 밥이나 먹는 게 낫지 싶어서 밥집에 가고 있잖냐."
"이 동네는 맨, 인형 공장 밖에 없는 데 그럴듯한 식당이 어디 있냐?"
도금동이 말하는 인형 공장이란 성형외과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 동네에는 정말로 많은 수의 성형외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교차로를 지나 압구정역까지는 일 킬로가 채 못 되는 거리가 온통 성형외과를 알리는 네온간판 뿐이었다.
"바로 그 바비 인형 공장 사장들이 자주 찾는 집이 바로 저기 있지. 지난주에 실장님이 한턱 내신다기에 따라서 와 봤더니 내 입에 딱이더라. 너도 맛을 보고 평가를 해라."
"네 입에 딱이면 내 입엔 딱 질색이란 말 아니냐?"
"네가 질색하는 음식도 있었냐? 토룡탕까지 먹는 놈이...."
"그건 약이라니까 죽지 못해 먹었지. 설마 맛으로 먹었겠냐?"
"다왔다. 좌우간 맛을 보고 말해."
"뭐야? 북경오리 식당이군."
주차도 하기 전에 창밖으로 간판을 올려다 본 도금동이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도널드 덕으로 만든 것은 아니니까 안심해."
"그야 그렇겠지. 입맛이야 인종을 가리려고? 뉴욕에도 베이징 덕이 성업 중이더라. 그러니 이제 곧 도널드 덕도 저 꼴이 날 걸?"
"일본은 스시로 미국에 진출하고 중국은 오리로 태평양을 건넜는데 우린 무슨 음식으로 미국에 상륙해 보냐?"
"글쎄.... 불고기? 비빔밥 정돌까?"
"그보다 하루빨리 그들에게도 보신탕의 맛을 알게 해야 해."
"미친 놈 소리 듣고 싶으냐?"
"그 게 미친 소리냐? 역사적으로 개고기를 먹지 않은 민족은 없어. 그런데 개고기 요리만큼은 우리처럼 깊고 풍부한 맛을 내는 나라는 없단 말이야."
조중구의 끝없는 보신탕 선전이 이어지자 도금동이 운전석을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그 음식이 바로 보신탕이다 이 말이군, 헛, 이젠 숫제 개싸움에서 개고기 예찬자로 진화를 거듭하는구나."
"너 그새 잊었냐? 보신탕 맛을 처음 내게 알려 준 건 너야. 대학 이학 년 때였지. 여름방학을 이용해 학비를 벌려고 하루 세 탕씩 과외를 뛰다가 내가 빈혈로 쓰러졌을 때 네가 사 준 것이 바로 보신탕이잖아?"
"글쎄... 보신탕은 모르겠고... 너 그때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누웠던 건 기억한다."
"지금 생각하면 네게 고마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
"미친 놈 소릴 진짜 듣고 싶은 게로군. 친구 사이에 고마운 게 다 뭐냐?"
"넌 언제나 잊을 수 있는 위치지만 난 그렇지 않잖아."
북경오리 집이 있는 건물 뒤의 주차장은 저녁 시간이라 만 차였다. 조중구는 주차할 자리를 찾아 천천히 차를 후진시켜 세웠다.
"차들이 많은 걸 보니 일단 맛은 보증이 될 것 같구나."
차에서 내린 도금동이 좌우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조중구의 차가 주차한 곳 옆에는 서너 대의 검은색의 그랜저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차들은 한결같이 짙은 색으로 선팅을 해서 안이 보이지 않았다. 조중구가 내리며 보니 웬 검은 양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하나둘 기어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조직폭력배들이 분명해 보였다.
조중구와 도금동이 현관으로 들어서자 제복을 입은 아가씨가 식당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북경오리 식당은 6층이었고 넓은 홀은 이미 만 석이었다. 두 사람이 식당을 들어서자 지배인인 듯한 사내가 다가오더니 그들을 구석진 자리로 안내했다. 지배인이 사라지자 뒤이어 메뉴판을 든 아가씨가 나타났다. 조중구는 도금동의 의견을 물은 뒤 음식을 주문 했다.
"이 식당 장사가 되는군."
도금동이 실내를 천천히 둘러 본 후 뚜벅 말했다.
"워낙 유명한 메뉴를 하니까 그럴 거야. 게다가 주방장과 조리사들은 중국 현지인들이래."
"그래? 하긴 한중 수교 후에 그런 곳이 많아졌더라."
"그건 그렇고, 네 동생 일에 이사회의 의견은 대체로 어떤 것 같아?"
"그야, 나도 이사지만 남의 집안일에 선뜻 나서긴 뭣하니까 너도 나도 눈치만 보고 있지 뭐야? 하니까, 그들은 그들대로 보신책을 강구하느라 우리 아버지 병세와 내 눈치를 살피는 동시에 동생 놈에게도 촉각을 세우겠지."
"그들이 그러는 건 나도 충분히 이해한다. 나부터라도 오너가 바뀌면 앞길이 달라지지 않냔 말이다."
"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나를 믿어라. 내 어떤 일이 있어도 을동이에게 오너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테니까."
"이사회도 이사회지만 문제는 주주들에게 있지 않냐?"
"당연하지. 그래서 몇몇 주주들과 접촉하고 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밥 한 끼 같이 먹었다고 금세 오냐 네 편이 되어주마 할 사람들이 어디 있겠냐? 그냥 그들과 눈도장을 찍었단 말이지."
도금동은 조중구를 어이없는 얼굴로 건너다보았다.
"눈도장 갖구는 부족해. 최대 주주도 만나 봤냐?"
"그게 말이다. 최근에 최대 주주가 바뀐단 풍문이 돌더라. 아직 회사에 공식으로 등록이 되지 않아 그가 누군지 나도 모르고 있다."
"그럼 사람을 풀어서 빨리 알아봐.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서 좀 더 연구를 해서 공략을 해. 네 동생이 선수치기 전에 네가 그 사람과 더 친해두라고."
"야, MBA식 이론만 앞세우는 놈이 그런 액션까지 취하겠냐?"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MBA 출신이니 그런 건 더 잘 알지. 일이 이렇게까지 됐다는 건 이미 을동이 쪽에도 브레인이 있다는 것 아니겠냐?"
"브레인이라면? 이사들 가운데 있단 말이야?"
"아까 말한 보신책을 강구하는 사람들 중에 눈치 빠르고 머리 좋은 어떤 놈이 붙었겠지."
"그 말은 즉, 나보다 을동이가 차기 사장이 될 확률이 높다고 본다는 뜻 아니냐?"
"냉정하게 생각하면 사실 내 생각도 그렇다."
조중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금동의 눈빛이 갑자기 흔들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친구인 조중구 마저 회사의 다음 오너로 을동이를 유력한 후보로 보고 있다니? 그렇다면 조중구도 이미 을동이 편에 섰단 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다만 연구실 안의 분위기를 전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도금동은 애써 침착성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다.
"뭐야? 중구 너 마저냐?"
"그렇게 브루투스를 바라보듯 볼 것까진 없어. 난 부루투스는 아니니까. 다만 내 추측일 뿐이야."
"추측? 무엇을 근거로 그런 추측을 한단 말이냐?"
"그렇잖아? 이럴 경우, 눈치를 보기 전에 이미 장남인 네게 우르르 몰려와야 할 이사들이 중간에서 관망만 하지 않냐? 그리고, 차남인 네 동생이 무얼 믿고 저렇게 자신의 주장을 펴겠냐? 이건 주주 총회에서도 통과가 되리라 믿는 구석이 있다는 얘기 아니냐? 게다가.... 이게 가장 중요한데... 네가 아직 너의 아버지로부터 낙점을 못 받고 있잖냐?"
도금동은 갑자기 가래가 목구멍을 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중구가 말한 어느 한 가지도 반론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도금동이 조중구를 향해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웬 사람이 그들의 식탁으로 성큼 다가오더니 조중구를 향해 반갑다는 듯 말을 건네는 것이다.
"역시 조 박사님이 맞군요."
"아니? 총무님 아니십니까?"
그는 조중구가 주말마다 가는 투견 동호회의 총무 겸 심판인 황백구였다.
"하하, 회장님이 먼저 알아보시고 절 보내셨습니다."
황백구는 손으로 저쪽 창가에 앉은 백발의 서 회장을 가리키며 웃었다. 조중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서 회장 쪽에서도 한 손을 들어 답례를 보내며 한편으로는 지배인에게 무슨 주문을 하는 듯했다.
"회장님과 함께 오셨군요. 실례지만 황 총무님과 서 회장님은 무슨 관계이신지요?"
"그냥 회장과 총무의 관계라고만 아시면 됩니다. 오늘 회장님이 제게 물어볼 말이 있다 하시기에 따라왔을 뿐이니까요."
"아, 그러시군요. 실례했습니다. 워낙 의외의 일이라...."
"별말씀을..... 아직 음식이 나오지 않은 모양이니 실례가 아니라면 저쪽 테이블로 가시지요. 회장님께서 두 분을 뵙고싶어 하시니까요."
황 총무는 도금동과 조중구를 향해 연방 웃는 얼굴로 서 회장과의 합석을 권유했다. 조중구는 의향을 묻는 듯 도금동에게 손바닥을 뒤집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도금동 역시 말없이 눈을 끔벅했다. 까짓것 그렇게 하자는 뜻이었다.
"그러지요. 자, 가시지요."
조중구와 도금동은 황 총무의 뒤를 따라 서 회장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곳엔 서 회장 말고도 나이가 마흔은 되어 보이는 또 한 사람이 함께 있었다. 그 사람은 얼핏 보기엔 서 회장을 닮은 듯했으나 번들거리는 눈빛이 영 거북스럽고 못마땅했다.
"어서 오시오. 조 박사. 첫눈에 조 박사인 것을 내가 알아봤소이다."
"여기서 회장님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여기는 제 친굽니다."
조중구는 도금동을 서 회장에게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도금동입니다."
"오, 알고 있소. 언젠가 신동우 회원을 따라 두 분이 함께 구경을 오신 적이 있지요?"
"오, 그걸 기억하십니까?"
"허헛, 그날, 세 친구가 나란히 있는 것이 보기 좋았기 때문 아니겠소? 참, 여긴 내 아들 올시다. 너도 이분들과 인사를 하도록 해라."
서 회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들이란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먼저 조중구를 향해 불쑥 손을 내밀었다. 깜짝 놀란 조중구도 얼른 손을 맞잡았다.
"나, 서유석이요."
"조중굽니다."
서유석이란 사내는 조중구의 손을 잡아 건성으로 두어 번 흔든 후 그 손을 재빨리 거두어 다시 도금동에게로 뻗었다.
"서유석이요."
"아, 예. 도금동이라 합니다."
사내는 자신의 이름을 말한 후 상대의 이름 따위엔 관심이 없는 듯 도금동의 손을 대강 흔든 뒤 잽싸게 엉덩이를 의자에 내려놓았다. 도금동은 어이가 없었으나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때마침 종업원들이 줄을 지어 요리 쟁반을 나르기 시작했다. 서 회장을 비롯한 다섯 사람 앞에는 각자가 주문한 요리가 놓여졌다. 식탁에 둘러 앉은 모든 사람들은 잠시동안 먹느라 대화가 끊겼다. 접시가 반 쯤 비었을 때였다.
"이 집 오리 요리는 언제 먹어도 일품이지요. 특히 이 매운 소스를 곁들여 먹으면 매콤하고 톡 쏘는 맛이 뒤끝에 남아서 좋아요. 하핫."
대화를 다시 시작한 서 회장이 오리고기 밑에 깔린 채소를 젓가락으로 집어내며 만족한 듯 웃었다.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오리 요리는 분명히 기름진 음식인데 전혀 기름지다는 느낌이 없거든요."
조중구가 서 회장의 말을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서 회장은 만족한 웃음으로 옆자리의 아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너도 한마디 하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서유석은 바삐 움직이던 젓가락을 접시에 열십자로 포개더니 조중구와 도금동에게 예의 그 번들거리는 눈빛을 마주했다.
"글쎄요. 오리 요리는 확실히 맛이 있어요.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것 보다는 보신탕에 더 높은 점수를 주는 사람입니다. 보신탕이야말로 깊은 맛과 진한 맛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진짜 음식이지요. 특히 그 껍질 맛은 예술이니까요. 허헛."
"옳으신 말씀입니다. 보신탕은 맛도 맛이지만 글자 그대로 보신을 위한 음식이라, 고단백의 열량이 높은 식품이지요. 저도 좋아합니다."
이번에도 조중구는 서유석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나섰다.
"무슨 박사신지는 몰라도 역시 박사가 다르시군요. 그러고 보니 아까 총무의 말을 들으니 조 박사가 베팅에도 박사라 하시던데 따로 투견을 공부하신 적이 있습니까?"
"공부라뇨? 원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베팅이라야 순전히 둘 중 하나에 거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운이 절반이지요."
"허헛, 어쨌든 신입 회원이라 시던 데 계속 승승장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전국의 순수 투견 동호인들을 위해 새로 대형 투견장을 설치하려고 합니다. 완성이 되면 따로 연락을 드릴 테니 두 분도 꼭 참석해 주십시오."
"아, 그러십니까? 그러면 그 투견장은 이동하지 않고 한 곳에서 계속하는 고정 투견장이겠군요."
"그렇지요. 그곳은 넓어서 수백 명은 너끈히 수용할 수 있습니다. 하핫."
"예? 수백 명이요? 그렇게 넓은 곳이 있다니 그곳이 어딥니까?"
"검단 쪽이지요. 주위엔 집들이 없어서 민폐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곳이지요. 참, 조박사는 베팅을 할 때마다 돈을 따는 데, 도 상무는 어째서 회원이 되질 않소?"
서유석은 도금동을 향해 예의 그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냈다. 도금동은 가능한 한 그 눈길을 피하고 싶었다.
"요즘, 시간이 없어서지요. 하지만 언젠가 저도 게임을 보러 갈 겁니다."
"어이, 황 총무. 도상무는 입회의 조건이 충족이 되고도 남겠지? 어때?"
접시를 거의 다 비워가던 황 총무가 서유석의 느닷 없는 질문에 목이 막힐 뻔했는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한동안 대답을 못하다가 급히 말을 뱉었다.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사장님."
"도 상무 같은 사람이 회원이 되어야 동호회도 발전하고 특히나 판이 커지는 거요. 나는 이번 기회에 전국 최대의 판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그러니 도 상무도 어서 입회를 하시오. 하핫."
말을 마친 서유석은 음식이 식을세라 빠른 동작으로 남은 오리 가슴살을 입으로 쓸어 넣다시피 했다. 그런 모습을 본 도금동은 비위가 상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때 마침 서 회장이 그런 도금동과 눈이 마주쳤다.
"도 군이라 셨소? 이거 내 아들 보다 더 젊어 보이니 말을 놓으려는데 괜찮겠소?"
"아, 물론입니다. 편히 말씀하시지요."
서 회장의 말에 약간은 당황한 도금동이 급히 승복했다.
"사실 도 군에 관해서는 나도 대강은 알고 있네. 아, 물론 어떤 목적이 있어 개인의 신상을 조사한 것은 아니네. 이번에 투자할 회사의 동향을 파악하려다 보니 자연히 알게 된 것이지. 알고 보니 도 군은 동의당 도신우 사장의 장남이더군."
느릿하게 뱉어내는 서 회장의 말에 도금동은 가슴이 뜨끔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조금 전 서유석이 자신이 말하지도 않은 상무의 직함을 붙일 때 어쩐지 이상하긴 했었다. 그런데 서 회장까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단 말인가? 이거야말로 전연 예상 밖의 일이었다.
서 회장이란 이 자가 동의당과 무슨 연관이 있어 자신의 뒤까지 캐냈단 말인가? 투자 운운하는 것을 보니 주주는 틀림없어 보이는 데 대주주의 한 사람인가? 도금동은 그동안 대주주들의 신상에 너무 무심했던 자신을 원망했다. 회사의 지분이 얼마 없는 자신으로서는 아버지의 지분을 물려받는다 해도 대주주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회장님께서 잘 봐 주십시오."
도금동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 회장을 향해 새삼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아 아, 아직은 아니요. 동의당에 대해서 알아 본 다음에 정식으로 투자를 하려 든 참이니까. 조사가 마무리되면 아마 동의당의 최대 주주가 바뀌게 될 걸세. 하핫?"
도금동은 다시 한번 가슴이 뜨끔했다. 서 회장이 동의당의 최대 주주가 된다고? 최대 주주가 바뀔 것이라던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도금동이 알고 있는 지금까지의 최대 주주는 전일권이라는 사채업자였다. 그렇다면 전일권의 주식을 서 회장이 몽땅 인수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언제 그만큼 주식을 사 모으겠는가?
"뜻밖의 말씀입니다. 회장님께서 저희 회사의 최대 주주가 되신다면 저야 당연히 기쁜 일이지요.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부탁이라.... 글쎄, 부탁이라면 오히려 내가 해야 할 것 같네. 앞으로 누가 내게 더 많은 수익을 내게 해 줄 것인가를 봐야겠지만.... 하핫."
서 회장의 말에 도금동은 비로소 이미 후계자를 둘러싼 집안의 일이 밖으로 샌 것을 알았다. 동생과의 승계 싸움이 외부로 다 알려진 것이 틀림없었다. 도금동은 차라리 이렇게 된 마당에 최대 주주가 될지도 모르는 서 회장과의 친분을 쌓아두자는 심사가 되었다.
"회장님의 선택이 탁월하십니다. 사실 동의당의 앞 길은 밝습니다. 여기 있는 조 박사가 속한 연구실에서 끊임없이 신약을 연구 중이니까요."
"오호라, 신약을 연구 중이라.... 그중에 가장 획기적인 신약은 무엇인가?"
서 회장은 조중구에게로 눈길을 돌려 물었다.
"그건 출시 전까지는 절대적 기밀 사항이라.... 죄송합니다."
"아, 죄송할 것까지야. 기밀은 지켜야지. 암, 지켜야 하고말고. 하지만 약간의 힌트는 줄 수 있지 않나?"
"일개 월급쟁이인 저로서는 뭐라 말씀을 못 드립니다. 대신 여기 있는 도 상무에게 들으시지요."
조중구는 서 회장의 말을 받자 도금동에게로 시선을 돌려 얼른 공을 떠 넘겼다. 그러자 도금동이 할 수없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나라 삼백만 명 예비 수험생들을 위한 일종의 각성제지요. 부작용이 전연 없는 천연 성분이고요. 이 약을 먹으면 집중력이 배가 됩니다. 그러니 온 정신력이 공부에 몰입될 것 아닙니까?"
"아. 그거 굉장한 약이군. 우리나라만큼 진학률이 높고 교육열 또한 극성인 나라가 없으니 그런 약이 나오기만 하면 대박이 나겠군."
도금동의 말에 서 회장은 얼굴 가득 웃음을 만들어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서 회장의 아들인 서유석이 다 먹은 접시를 옆으로 밀며 선뜻 나섰다.
"아버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 부터도 대학을 가고 싶어 갔습니까? 요즘은 대학을 나오지 않고는 중간 보스 자리도 차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지요. 그러니 학원비나 과외비로 쓰이는 돈이 국가적으로 볼 때, 어마어마할 겁니다. 바로 이럴 때 그런 약이 나오면 대박도 그런 대박이 없겠지요. 한데.... 도 상무. 그 말이 사실이오?"
무슨 장황한 이론을 펼칠 것 같던 서유석이 갑자기 도금동을 향해 신약의 출현이 사실인지를 물었다. 도금동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서유석을 빤히 건너다보았다. 그러자 서유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말이 사실이면 제약업계의 일대 변동이 일어날 일 아니겠소? 우리 아버님께서 자금을 총동원해서 동의당에 투자를 하려 하는 만큼 그것이 사실이길 바라서요. 어떻소? 신약의 출현이 사실이오?"
"흠, 약이 완성단계인 건 여기 있는 조중구 박사가 보장할 겁니다."
"오, 그래요? 그럼 조 박사께 묻겠소. 도 상무의 말이 사실이오?"
서유석의 집요한 물음에 무어라 할 말이 없는 조중구였다. 조중구로선 서유석의 그런 물음에 대답할 아무런 이유와 의무는 없었다. 그러나 눈치를 보아하니 도금동이 아까부터 서 회장의 환심을 사려하는 것이 감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능한 한 좋게 나가기로 했다.
"사실입니다. 거의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지요. 물론 오랜 임상 실험이 남아있습니다만 워낙 안정적인 물질로 이루어져 테스트도 무난히 통과할 걸로 보고 있지요."
조중구가 말을 마치자 서 회장이 먼저 가볍게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오, 그건 듣던 중 가장 반가운 소리군, 내가 투자 적기를 만난 것 같으니 말이야. 허헛."
"아버님 미리 축하드립니다."
서유석이 벌떡 일어나 똘마니가 두목에게 하듯 절도 있게 고개를 탁 꺾었다. 서 회장은 그런 아들을 바라보며 입가에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한편으론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그러자 지배인이 먼저 달려와 서 회장 곁에 섰다.
"다 먹었으니 후식을 내 오라고."
"예, 회장님."
지배인이 물러나자마자 종업원들이 몰려와 순식간에 테이블을 처음처럼 깨끗하게 정돈하고 물러났다. 물러났던 종업원이 이번엔 후식을 날라왔다. 처음 음식을 주문할 때 고른 메뉴 대로 서 회장 앞에는 시럽에 담근 하얀 리치가 놓였고 서유석은 꿀 바른 튀긴 사과였다. 황 총무와 도금동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이고 조중구는 쵸코렛 크림이었다.
"아, 이것만 봐도 보신탕이 한 수 위란 걸 알수 있어요. 보신탕을 먹고 나서 인삼주를 딱 한잔하면 입안이 깨끗한 데 이건 단맛이 남아설랑.... 에이, 나는 이것보다 차라리 슈납스를 한 잔 해야겠구나."
서유석은 종업원을 불러 슈납스를 주문 한 뒤 갖고 온 술을 입에 홀랑 털어 넣었다. 식사가 끝나자 서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지배인을 비롯한 테이블을 담당했던 종업원들이 몰려왔다. 서 회장은 지갑을 열어 종업원들에게 골고루 팁을 쥐여준 후 먼저 자리를 떳다. 그 사이에 황 총무는 계산을 하기 위해 카운터로 가고 있었다. 조중구도 급히 카운터로 다가갔다.
"아, 계산은 회장님이 하시기로 했으니 박사님은 그냥 가십시오."
황 총무가 지갑을 꺼내는 조중구를 급히 만류했다.
"아니. 그래도 그럴 수야 없지요."
조중구가 카운터에 카드를 내 밀며 오히려 황 총무를 말리려 할 때였다. 뒤에서 서유석이 나타나 조중구의 어깨를 툭 쳤다.
"계산은 황 총무에게 맡기고 같이 나갑시다."
서유석은 조중구의 등을 밀며 도금동과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일 층으로 내려오니 현관 앞에 서 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유석이 현관에 나서자 주차장에 있던 세 대의 검은색의 그렌저가 일제히 시동을 걸어 현관 쪽으로 다가왔다.
"회장님 오늘 폐가 많았습니다. 저흰 이만...."
조중구가 인사를 하며 물러날 뜻을 비추자 서 회장은 손을 내밀어 인사를 대신했다.
"내일 또 만날 것인데 인사는 무슨.... 참, 조 박사. 장소는 알고 있는가?"
"예, 연락을 받았습니다. 지난번과 같은 곳이더군요."
"시간은 여덟시요. 그리고, 이참에 도 상무도 회원으로 들어오게나. 그럼 자주 얼굴을 볼 수 있지 않겠나?"
"예. 저도 그려려고 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서유석도 처음처럼 건성으로 조중구와 도금동의 손을 대강 잡은 후 졸개가 기다리는 자신의 차로 향했다. 그러자 서 회장이 아들을 불러 세웠다.
"얘. 유석아, 넌 내 차에 타라. 네게 할 말이 있으니까."
"예? 그럼 제 차는 뒤를 따르라 해야겠군요."
도금동과 조중구는 그들이 타고 온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서 회장이 탄 차와 그 뒤를 따르는 두 대의 검은 그렌저가 먼저 떠나고 있었다.
"동우의 말을 들으니 서 회장의 아들이 강남에서 나이트를 몇 곳 운영한다더니 바로 저 사람인가 봐. 이름이 뭐랬더라?"
"아마 서유석 이랬지?"
조중구의 말에 도금동이 재빨리 받았다. 서 회장이 동의당의 최대 주주가 된다니? 도금동으로선 서 회장과의 만남은 뜻밖의 수확이라는 생각을 했다.
"저 서 회장이란 자가 동의당의 최대 주주가 된다면 네게는 차라리 잘 된 것 아니냐? 주주들을 설득하려 일일이 찾아다닐 것도 없고 말이야."
"글쎄 어쩌면 이건 내게는 다행한 일인지도 모르겠다만 저 자도 호락호락할 것 같지는 않아 보이잖아?"
"그럴지도 모르지. 저 자가 지금 투견 판에서 하고 있는 일을 보면 숫법이 악랄하니까?"
"뭐? 투견 판? 악랄하다니? 뭐가?"
"아, 아니야. 서 회장이 아닐지도 몰라."
도금동의 물음에 그제서야 말이 헛나온 것을 느낀 조중구는 황급히 그 말을 덮으려 했다.
"야, 말을 확실히 해. 너만 알지 말고."
"아무 일도 아니라니까..... 서 회장의 베팅 성공률이 턱없이 높아서 해 본 소리야."
"미친 놈, 사돈 남말 하네. 그럼, 네 베팅 성공률은 낮으냐?"
"허긴...."
주차장을 빠져나온 조중구는 성형 공장의 네온 불빛이 찬란한 거리로 나서자 악셀을 밟아 속력을 높였다. 조중구는 내일의 투견 시합을 생각했다. 고달수의 두 마리의 진돗개들과 맞설 견종이 무엇일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보나 마나 고달수의 진돗개가 이기는 게임인데 그까짓 것 알아 무엇 하나 싶기도 했다. 조중구의 머릿속은 차츰 돈뭉치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같은 시간에, 앞뒤로 졸개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서 회장이 탄 차는 강남 을지병원 교차로를 관통하여 역삼역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서 회장과 서유석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고 황백구 총무는 앞자리의 조수석에 타고 있었다. 서 회장은 차가 출발할 때부터 줄곧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 제게 하실 말씀이 있다 셨잖습니까?"
침묵에 쌓인 차 안의 공기에 질린 듯 서유석이 먼저 입을 땠다.
"으 음? 오 그래. 그보다 먼저 저 황 총무에게 먼저 물어봐야겠다. 백구야, 알아보란 일은 어떻게 되었냐?"
"예, 사람을 풀어 알아본 결과 조중구와 고달수는 연결고리 자체가 아예 없었습니다. 그러니 지난번 박철구와 고달수와의 관계와는 달리 전연 무관한 사입니다."
"음, 나도 그럴 거라 생각은 했지. 조중구는 이제까지 연구실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보고도 있었지. 그렇다면 몇 번의 베팅이 성공한 것은 전적으로 운이 따라 준 결과였군."
서 회장은 황백구가 조사한 내용이 맞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주사위 같이 변수가 여럿이라면 몰라도 둘 중의 하나를 맞히는 게임에선 연속으로 맞히는 운도 때로는 있는 법이다. 둘이 아니라 셋 중 하나를 선택하는 가위 바위 보 조차 연속해서 열댓 번을 이기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아버지, 고달수란 개 공급 업자도 찜찜하시면 확 바꾸시지 그러세요?"
서유석의 말에 서 회장은 말이 없는 대신 조수석에 앉은 황백구가 나섰다.
"그건 좀 곤란합니다. 사장님. 서울 경기 일대에 고달수만큼 투견장의 생리를 꿰고 있는 자가 없걸랑요. 그리고 고달수는 전국의 개 농장주들을 알고 있어서 무슨 개든 말만 하면 조달을 해 줍니다. 게다가 도사만 기르는 사람들과 달리 그는 진돗개와 풍산개를 다량을 보유하고 있어서 우리 입맛에 맞는 개를 갖다 쓸 수 있어요. 또... 이제까지 거래를 했지만 말썽이 한 번도 없는 유일한 업자고요."
서유석은 황백구가 말하는 사이 백미러로 그를 빤히 쳐다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어이, 황백구. 네가 고달수의 변호인이야? 아니면 대변인이냐?"
"그, 그게 아니라, 사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사장님."
"뭐? 사실? 이게.…"
"그만해라, 백구 말이 옳다."
서유석이 손을 들어 황백구의 뒤통수를 치려는 데 서 회장의 말이 먼저 나왔다.
"투견 업계에서 고달수만 한 놈이 없다. 황백구 너는 앞으로도 그 자에겐 개값을 후하게 쳐 주도록 해라. 언젠가는 그놈을 크게 한 번 써먹을 때가 올 것이니라."
"예, 회장님."
"내일 시합에 나갈 개들에겐 확실한 조처를 했겠지?"
"예, 회장님. 도사 대 도사의 첫 번째 경기는 무조건 A 쪽에 베팅을 하십시오. 두 번째의 아키타와 고달수의 진돗개 시합은 진돗개 쪽이 이길 겁니다."
"아니야, 내일은 지는 쪽에다 베팅을 할 거야."
"예? 지는 쪽이라뇨? 무슨 말씀이신지.....?"
"밀었다 당겼다 해야지 어떻게 계속 따기만 하나? 다른 사람은 눈이 없고 뇌가 없는 줄 아냐? 헛다리를 짚기도 해야 인간인 게야."
"아..... 네...."
서 회장의 말에 그제야 감을 잡은 황백구가 꼬리를 내리고 입을 닫았다.
"그리고 내일까지는 지난번 그 장소에서 하되 다음 주엔 구로의 서 사장의 서비스 공장에서 하도록 주선을 해. 서 사장에겐 내가 전화를 해 둘 테니까. 비닐하우스라니 이거야 원 조용해서 좋긴 한데 품격이 떨어져서 말이야. 회원들의 체면도 살려가면서 운영을 해야지."
"옛, 회장님."
말을 마친 서 회장이 손을 주머니에 넣어 한 장의 명함을 꺼내 옆자리의 아들에게 건네 주었다. 서유석은 받은 명함이 누구의 것인지 보려고 눈을 부릅떴지만 실내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이거 누구 명함입니까?"
"희망 금융의 전일권이다."
"사채업자 전일권이오?"
"그렇다."
"그런데요? 그 자가 양도를 안 하겠데요?"
"그 사람을 설득하는 중인데 자꾸만 그 가족들이 반대한다는 핑계를 대는구나."
"아하. 알겠습니다. 이 명함으로 가족 관계를 밝혀 적당하게 손들을 봐 주지요."
"심하게는 말아라. 전일권은 정 관계에 줄이 든든한 인물이니까."
"요즘 정관계에 줄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개새끼도 몇 다리만 거치면 대통령까지 연줄이 닿는 세상인데요? 염려 마세요. 수일 내로 아버지께 전일권이 스스로 찾아갈 겁니다."
"그리 돼야지. 그리되면 검단의 땅을 사려고 타진해 오는 사람이 몇 있으니 그 땅을 팔아 이 기회에 동의당 주식으로 바꿔타야 해. 어차피 아파트를 짖지 못할 땅이라면 빨리 현금화하는 것이 낫지 않으냐."
"하기는 아파트 부지로선 시내와 너무 떨어진 데다 주변에 인프라가 너무 없어요. 바닷가와도 지나치게 가까워서 해풍도 심하고 말입니다. 아파트를 짖지 않은 것은 잘 결정하신 겁니다."
"그러나, 누가 봐도 공장 부지로선 조건이 최고 아니냐? 다들 전기와 물만 끌어오면 다른 조건은 만점에 가깝다고들 하더라. 지난번에 대도 그룹에서 골프장을 만들고 싶으니 그 땅을 팔라고 하더라. 하지만 토지를 나누어 공장부지로 팔면 열 배를 더 받을 땅을 미치지 않고서야 골프장 부지로 넘기겠느냐?"
"그건 그렇습니다. 한데 그 땅을 팔면 전일권의 주식을 몽땅 인수할 자금은 됩니까?"
"삼분의 일 정도지. 나머지는 갖고 있는 타 회사 주식들을 매각하고 그래도 모자라면 역삼동 빌딩을 팔려고 한다."
"역삼동 빌딩은 좀 아까운 데요? 그럴 바엔 빌딩 값만큼 은행돈을 좀 쓰시지요?"
"아서라. 백오십억이면 한 달 이자가 얼마냐.... 은행 놈들 배를 불려주려고?"
"참, 지금의 투견장에서 수익이 얼마나 나오고 계십니까?"
서유석이 갑자기 화제를 투견으로 돌리자 서 회장은 조수석의 황백구의 뒤통수를 한 번 쳐다 본 후 빙긋이 웃는 얼굴이 되었다.
"그게 말이다. 남들은 투견이라고 우습게 보지만..... 그게 실은 짭짤한 수입이다. 너, 카바레 한 곳에서 나오는 한 달 순수익이 얼마나 되냐?"
"예? 계산을 안 해봐서 잘은 모르지만 이것저것 다 빼도 한....이 삼 억은 나오겠지요"
"거 봐라. 수십 명이 덤벼들어 매일 밤 전쟁을 치루 듯, 한 달 내내 난리를 쳐서 버는 돈이 삼억이라니? 거기에 비해 투견장은 백구하고 내가 한 달에 네 번, 서너 시간만 운영하고 베팅만 잘하면 삼억은 문제가 없어. 땅 짚고 헤엄치기란 말이다. 물론 베팅이 백 퍼센트 성공하려면 요령도 좀 부려야 하지만 말이다."
"예? 제 예상보다 수익이 훨씬 많군요?"
"그래서 아예 이참에 판을 좀 더 키워 볼 생각이다."
"그래서 검단 창고에다 투견장을 만들라 하셨군요."
"회원을 늘리고 베팅액을 왕창 올리면 보나 마나 도박사들로 대성황을 이룰 것이다. 더도 말고 금년 겨울까지만 하면 그깟 빌딩은 단번에 다시 사들일 수 있을 것이다."
"당국에서 도박 혐의로 조사를 나올 텐데요?"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니? 솔직히 말해 너나 나나 검경이 무서웠으면 어떻게 오늘날이 있었겠느냐? 경찰만 해도 그래, 현찰이 일 원도 없는 현장을 덮치고서야 무슨 근거로 도박판이라고 판단을 하겠냐? 그게 법정에서 통할 말이냐? 겉으로 봐서 우리 투견장은 순수하게 투견 동호인들의 친목 모임에 불과하단 말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버지께선 갑자기 왜 동의당 주식에 관심이 생기셨는지요? 전 무엇보다 그게 제일 궁금합니다. 땅과 건물을 다 처분해서라도 동의당 주식을 사시려는 진짜 의도가 무엇입니까?"
"허허.... 그런 의문을 품다니...... 좋은 질문이다. 조직의 운영도 어떤 의미에선 경영학의 범주에 속하겠지? 아니, 당연히 경영의 묘가 발휘되지 않고는 조직이 존속을 못하지. 주먹만으로 어떻게 조직을 운영하겠나 말이다."
"조직과 동의당이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전일권이 갖고 있는 동의당 주식이 십칠 퍼센트라고 하더라. 엄청난 액수이기는 하지. 하지만 동의당 사장인 도신우가 갖고 있는 주식도 그 정도 밖에 안 돼. 그리고 그 가족들이 나눠 갖고 있는 것이 십 프로가 채 안 되고....."
"아, 아버지. 이제 알겠습니다. 요즘, 도신우 사장의 건강이 수상하니 사후에.... 자식들이 유산으로 그 주식을 쪼개 가질 때.... 바로 그 순간을 노리시겠다는 말씀이군요."
"바로 그거다. 머리가 재빨리 돌아가는구나. 내가 이래서 널 대학까지 마치라고 닦달을 했느니. 우리라고 언제까지나 약간은 지저분한 이런 사업만 해야 하느냐? 그래서.... 내 손자 대만은 정상적 기업을 이끌기를 바라서 이런 수를 생각한 것이다."
"역시 전 아버지를 못 따라갑니다."
"동의당에선 지금 아까 본 도금동과 그의 동생인 경영학을 전공한 도을동이란 자가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 중이다. 아까 도금동이 신약이 곧 나온다고 했었지? 글쎄 그것도 내 생각에는 자신이 차기의 자리를 굳히려고 과대광고를 하는 것일 게다. 신약을 자신의 공로로 만들려는 수작이지."
"거기까지 생각하셨다니 놀랐습니다."
"내가 없으면 너도 그런 것이 환히 보일게다."
말을 마친 서 회장은 차가 출발할 때와 마찬가지로 말없이 창밖의 흐르는 네온 불빛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잠시 후 앞자리의 황백구 총무가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회장님, 댁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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