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설

투견판 4. 동업자들(2) 동업의 조건

fiction-google 2024. 2. 29.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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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택이 입원을 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은 어느 날이었다. 부러지고 찢어졌던 상처가 차츰 나아가자 양구택은 입원실에 처박혀 있는 생활이 지긋지긋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원 기간 동안 걱정이 태산처럼 커져서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이것저것 걱정거리가 아닌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중에 태산이와 동방불패를 배철권 부자에게 맡겨 놓은 일이 가장 마음에 걸렸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배철권은 한때의 권투 후배라고는 하나 생면 부지나 다름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무턱대고 개들의 관리를 맡겼으니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내나 아직은 어린 학생인 아들에게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 그들은 아직 태산이의 존재도 모르고 있었다. 설혹 알았다 해도 아내나 아들이 태산이와 동방불패를 어떻게 다룰 수 있단 말인가?

양구택은 자신이 퇴원할 때까지는 염체불고 하고 배철권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어 더욱 마음을 졸였던 것이다. 그다음 걱정은 돈 문제였다. 중간 정산으로 나온 치료비와 입원비가 입이 딱 벌어지게 많았던 것이다. 수 개월을 십 원 한 장 벌지 못하고 있는 양구택으로서는 그 액수가 엄청난 부담이었다. 개 농장을 그만둔 후 수입이 전연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비상금으로 충당했으나 그 돈마저 병원비로 나가자 이제부터는 생활비 마저 걱정해야 했다. 결국, 양구택의 아내가 식당 일까지 나가기 시작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결국 양구택은 일단은 퇴원을 한 뒤 통원 치료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자니 퇴원 수속과 함께 내야 할 보름치의 입원 치료비가 또한 골치거리였다.

어쨌든 입원비는 아내가 빌리기로 했으니 내일쯤은 퇴원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퇴원을 하면 제일 먼저 배철권에게 맡겨 둔 태산이와 동방불패를 자신의 옛날 개 농장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경비일만도 고될 배철권과 그의 아들인 한열이가 주말 마다 오가는 수고를 덜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동안 매일 점심시간이면 양구택의 병실을 방문했던 한열이는 주말엔 검단에 있는 태산이와 동방불패를 보살펴 왔었다. 양구택은 그런 한열에게 고맙고도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양구택은 일단 자신이 몸을 추스르는 대로 투견 대회를 참가할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돈이 급했던 것이다. 그러자면 반드시 투견 판에 빠삭한 고달수와 박철구의 도움도 받아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한 달 전에 죽은 개들을 처치하고 난 이후 오늘까지 일절 태산이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전화로서나 아니면 어쩌다 면회를 왔을 때도 두 녀석들은 입을 맞춘 듯 태산이에 대한 말은 피하는 눈치였다. 양구택은 그 점이 이상하고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태산이를 갖고 싶어 안달을 하던 녀석들이 이렇듯 조용하다는 자체가 양구택으로서는 이해 불가였던 것이다. 양구택은 고달수와 박철구의 본심을 알아보기로 했다. 양구택은 먼저 박철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내일 퇴원하려고 한다."

"? 십이 주 진단이라며? 이제 겨우 한 달 밖에 안 됐잖아?"

"입원이 십이 주냐? 다 낫기까지가 십이 주지."

"좀 더 있어 보지 그러냐? 그 몸으로 나와 봤자 할 일도 없을 텐데."

"좀이 쑤셔서 그런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이렇게 처박혀 있으니 이젠 입원비는커녕 집구석에 생활비도 없다. 이러고 있는 사이 앞뒤가 꽉 막혔단 말이다. 그러니 나가서 무슨 대책을 세워야지."

"그렇다고 네가 나와 봤자 별 수 있냐? 그 몸으론 개 장사는커녕 닭 장사도 못할 텐데..... 돈 벌기가 쉽지 않을걸?"

"그래서..... 할 수 없이 내 개를 팔려고 한다. 마침 부르는 대로 값을 쳐 주겠다는 작자가 나섰으니...... 그거라도 팔아서..... 다시 일어설 밑천을 만들어야지."

양구택은 박철구가 잘 알아듣도록 똑똑히 그리고 천천히 태산이를 판다는 말을 하며 녀석의 다음 반응을 살폈다.

"? 네 개를 팔아? , , 말 같지 않은 소리 하지 말어. 네가 그 개를 팔 놈이 아니란 건 세상이 다 안다."

"뭐야? 그새 네놈들이 내 개의 존재를 세상에 다 까발렸단 말이냐?"

"까발리다니? 달수나 내가 너 같은 촉샌 줄 아냐?"

"그럼 그렇겠지. 깜짝 놀랐었네. 내 개를 본 사람이라곤 세상에서 달수하고 너, 그리고 배철권과 그 아들 밖에 없단 말이다."

"뭐라고? 가만.... 그럼 너, 조금 전에 네 개를 살 사람이 있다고 했지? 그 사람은 네 개를 보지도 않았는데 부르는 데로 값을 쳐 주겠다고 했단 말 아니냐? 에이, 사깃꾼 같으니라고.... 이젠 거짓말까지 하며 내게 간을 보기냐?"

"거짓말이라니? 네가 알다시피 나는 오늘날까지 약속을 못 지킨 적은 있어도 단 한 마디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그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소리다 마는 지금 당장 거짓말인 게 들통났잖아?"

"내 말 중에 어느 대목이 거짓말이란 말이냐?"

"네 개를 본 사람이 달수하고 나, 그리고 네 권투 후배라는 사람과 그의 아들까지 네 명뿐이라며? 그런데 네 개를 산다는 사람은 누구기에 물건도 안 보고 산단 말이냐? 그 게 거짓말이 아니면 네 말 대로 약속을 못 지킨 거냐?"

", 그 게 거짓말이란 말이지. 하지만 나는 분명히 진실만을 말했다. 내 개를 사겠다는 사람이 그 네 명 가운데 있으니까."

"뭐야? 누가 네 개를 사? 설마, 창고를 지키던 그 경비는 아닐 테고.... 그렇다면.... 달수란 놈이? 에이 설마 그렇기야 하겠냐? 달수하고 나는 네가 먼저 동업을 하자고 나올 때까지 그 개에 대해선 관심을 끊는 척하기로 했단 말이다."

"옳지, 너희 두 놈들이 나 몰래 작전을 짜고 때를 기다렸단 말이지?"

양구택은 드디어 고달수와 박철구가 이제까지 태산이에 대한 언급을 피한 이유를 알아내자 웃음이 나왔다. 투견판에 대해서는 맹탕인 양구택으로서는 어차피 녀석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녀석들이 도움을 공짜로 제공할 리는 없었다. 그러므로 양구택은 이미 고달수와 박철구를 동업자로 끌어들이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전국의 투견판을 훤히 꿰고 있는 녀석들의 도움이 없이는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 한 사업인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마음을 모른 채 녀석들은 순진하게도 동업자로 참가하려고 둘이서 작전을 짰다니 양구택은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게 네 개에 대한 말이 나왔을 때 우리를 순순히 끼워줬으면 왜 이런 유치한 아이디어에 빠져들었겠냐? 그 개 한 마리면 우리 셋이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는데도 넌, 너 혼자 다 해 처먹으려고 욕심을 부렸잖아?"

"아 시끄러워. 난 처음부터 그런 욕심을 부린 적이 없어. 다만 내 개에 관해서는 모든 것을 비밀로 하고 싶었을 뿐이란 말이다."

"좋아,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옛날부터 네 고집대로 밀어붙이는 것이 특기 아니냐? 어쨌든 내일 퇴원을 한다니 집에서라도 몸조리 잘 해라. 끊는다."

", 잠깐, 철구야. 임마.... 어라, 이게 제 마음대로 전화를 탁탁 끊어?"

박철구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자 전연 예상을 못한 행동에 양구택은 약간 놀랐다. 이제까지 삼십 년 동안 박철구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양구택은 어이가 없었으나 이번엔 고달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고달수는 누구와 통화 중이었다.

'박철구 이 자식이 그새 고달수에게 전화를 했구나.'

몇 분 후 다시 전화를 했으나 역시 통화 중이었고 그 뒤의 몇 번도 마찬가지였다. 화가 난 양구택은 전화기를 침대에 던져버렸다.

다음날이었다. 퇴원 수속도 마치기 전에 이미 환자복을 벗어던진 양구택이 침대 모서리에 앉아 그동안 쓰던 빈 그릇과 기타 자잘한 물건들을 챙기는 아내의 뒷모습을 무표정 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그러다 아내의 등을 향해 입을 열었다.

"돈을 구했다니 먼저 원무과에 가서 계산부터 하고 오지 그래?"

"이것만 정리하고요."

"빨리하고 가서 수속부터 밟으라고... 여긴 일 분도 더 있기 싫으니까."

"알았어요. 금방 끝나요."

양구택의 재촉에 그의 아내는 얼른 그릇을 담던 비닐 백을 내려놓고 문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그녀보다 먼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마, 아침 일찍 두 분이 웬일이세요?"

"성질 더러운 놈 돌보시느라 수고가 많습니다. 제수씨."

박철구와 함께 병실을 들어선 고달수가 양구택의 아내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잠깐들 앉아계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 제수씨, 커피를 뽑으러 가신다면 그만두세요. 우린 아직 아침도 안 먹었으니까요."

"저 양반도 아침을 안 먹었어요. 그럼 잘 됐네요. 이따가 같이 식사나 하시지요. 제가 원무과에 저이 퇴원 수속하고 올 때까지 잠시만 계세요."

"원무과요? 그럼 가실 필요 없어요. 우리가 거길 들렸다 오는 길이니까요."

"? 무슨 말씀이세요?"

". 철구하고 내가 남은 입원비를 내고 퇴원해도 좋다는 말을 듣고 오는 길이란 말입니다. , 여기 영수증이요."

고달수의 말에 양구택의 아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편과 그의 친구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고달수와 자신의 아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양구택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더니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렇지. 철구 네가 달수와 담화를 할 줄 알았다. 네놈들이 새벽같이 달려올 줄도 알았고. 내 개를 판다니까 정신들이 번쩍 나지?"

"? 우리가 그래서 온 걸로 생각하냐? 넌 어쩌면 생각이 개 장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 하냐? 친구의 퇴원을 축하하러 온 우리들 정성은 깡그리 무시하고 그렇게 계산적인 발상을 입에 올려야겠냐?"

"좋아, 병원비을 대신 내 줬다니 어쨌든 그 점은 고맙다."

"돈 낸 것만 고맙고 이렇게 달려와 준 건 안 고맙다는 얘기냐?"

", 그놈, 그 말이 그 말이지...... 여하튼 잘들 왔다. 그러지 않아도 너희들과 의논을 할 게 있었거든."

양구택의 말이 끝나자 고달수와 박철구가 서로 마주보며 의미 있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양구택이 의논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뻔했기 때문이다.

양구택의 아내는 출근을 위해 먼저 집으로 가고 세 사람은 병원 앞 기사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메뉴는 제육볶음으로 통일을 한 후 먼저 고달수가 양구택을 향해 선수를 치고 나왔다.

", 이제 솔직하게 말해봐. 어제 네 개를 팔겠다고 철구를 슬쩍 찔러 봤다며? 하지만 그것 자체가 잘못된 거란 걸 알아 둬. 우리가 널 모르냐? 네놈이라면 뱃속까지 훤히 꿰는 우리를 그 따위로 슬슬 간을 보다니? 너 사실대로 말해라. 우리와 의논하려는 건 네 개 때문이지? 아니냐?"

고달수의 말이 끝나자 양구택이 결심이 선 듯 깁스 한 오른팔을 식탁에 탁, 소리 나게 올려놓더니 앞에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실토를 했다.

"네 말 대로 솔직하게 말 하마. 지금 내 형편이 말이 아니다. 이제껏 집에만 있던 마누라가 오죽 급했으면 식당 일을 다니겠냐? 그래서, 이제는 내 개가 싸움을 시작했으니 돈을 벌어야 할 텐데 내가 워낙 투견 판에 대해서는 백지 아니냐? 그러니 나 혼자 멋 모르고 투견 판에 얼쩡대다 잘못해서 조폭 같은 놈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아까운 개를 망칠까 그걸 걱정 했었다. 그래서 내 진작에 너희들과 동업을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그러니까 지난 번에 내 개를 구경시켜 준 것 아니냐?"

"우리도 진작 네 고민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생활도 어려울 만큼 돈에 쪼들리는 건 사실 우리도 몰랐다. 그러면, 네 말대로 우리 서로 솔직하게 의논들 해 보자. 먼저 확실하게 해 둘 일이 있다. 우리 셋이 확실히 동업을 할거냐?"

"그렇다니까. , 동업의 조건과 배분은 따로 의논 헤야지."

"아 좋아, 그런 건 우리 사인데 충분히 의논이 되고도 남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그 문제를 의논 해 보자고. , 철구. 너도 동업에 동의하지?"

"물론이지. 너나 나나 태산이를 본 날부터 그 생각만 하지 않았냐?"

박철구가 고달수가 묻기를 기다린 듯 쉽게 받았다.

"아 그자식, 그 얘긴 왜 하냐? 그 때는 벌써 구택이도 우리와 동업을 생각 했었다는데."

"여하튼 구택이가 잘 생각 한 거야. 그 개라면 우리 셋이 부자가 되고도 남을 테니까 말이다."

"부자가 될지 쪽박을 찰 지는 두고 봐야지. 하지만 이거 하난 분명 해. 내 개를 당할 개는 세상천지에 없다는 것 말이다."

마침 종업원이 세 사람 앞에 밥을 알루미늄 쟁반째 날라다 놓았다. 배가 고팠던 고달수와 박철구는 밥 위에 제육을 얹어 마구 퍼 먹기 시작했다. 양구택도 어설픈 왼손으로 수저를 들었다. 잠시동안 대화가 끊긴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역시 제육볶음은 기사 식당이란 말이야."

배가 고파서였는지 음식이 맛있어서였는지 밥을 다 먹은 고달수가 한 말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양구택은 고달수의 트럭을 타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박철구의 차는 그 뒤를 따랐다. 고달수와 박철구의 부축을 받아 양구택이 집으로 들어서자 아들은 학교로 가고 아내는 일을 하러 가서 집이 썰렁했다.

", 철구, 너 주방으로 가서 커피 좀 타 와라."

양구택이 박철구를 향해 느닷없이 커피 심부름을 시켰다.

"저 자식, 옛날 버릇이 또 나오는군. , 심부름 작작 시켜라. 더구나 네 집에 커피가 어디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고?"

", 커피는 레인지 뒤에 있고 잔은 찻장에 있을 거다."

"저런 빌어먹을 놈. 기어이 나 보고 커피를 타게 하는구나."

"야 인마, 그럼, 이 꼴로 내가 하리?"

양구택은 왼손으로 깁스 한 오른팔을 가리키며 히죽 웃었다. 고달수 역시 두 사람을 보며 킬킬대고 있었다. 양구택의 팔을 본 박철구는 아무 말없이 주방으로 가서 레인지에 불을 켰다. 결국 박철구가 타 온 커피를 앞에 두고 세 사람은 의견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우리 사이에 길고 복잡한 계약이나 약속은 필요 없겠지?"

양구택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친한 친구 사이일수록 더 확실하게 하는 게 낫지 않겠냐?"

박철구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양구택이 벌컥 화를 냈다.

"확실히 할 게 뭐야? 일이든 돈이든 무조건 삼분에 일로 나누면 되는 거지."

"? , 동업을 할 때 그 성질도 함께 투자를 하려는 거냐? 내가 확실하게 해 두 자는 건 바로 네 성격 때문이야. 동업자끼리는 당연히 동등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한데도 넌 동업자인 나를 앞으로도 계속 똘마니로 생각하겠다는 태도 아니냐?"

박철구의 이유 있는 항변에 양구택은 잠시 천정을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자 고달수가 얼른 중간에 끼어들었다.

", 인마. 팔을 다친 구택이가 커피 한 잔 타 오라고 시킨 게 그렇게 억울하냐? 우리와 구택이의 관계는 삼십 년 전 얘기 아니냐? 난 지난날을 다 잊었어. 아니 때로는 그 시절이 그리울 때도 있어. 그런 마당에 넌 언제까지 그런 피해 망상증을 갖고 살래? 이젠 우리 모두 동업자가 됐으니 동등한 입장인데 농담으로 돌리면 될 것 아니냐?"

", 난 다른 조건은 뭐든 너희들 말대로 할 거야. 하지만 구택이 쟤가 날 아직 똘마니로 대하는 것은 싫어. 내 나이가 쉰에 가까운 이 마당에 아직도 똘마니로 생각하는 저놈의 표정을 좀 보라고."

박철구의 말에 천정만 멀뚱히 바라보던 양구택이 갑자기 시선을 두 사람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다, 이제부터는 박철구 너를 완전한 동업자요 같은 사장급으로 대우하겠다. 그러므로 이 순간부터 일체의 심부름이나 농담도 하지 않겠다. 됐냐?"

"진작 그렇게 나왔으면 얼마나 좋아? 좋다, 증인이 있는 곳에서 네가 그렇게 선서를 했으니 믿어 주마. ,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해보자."

양구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음이 풀어진 박철구가 씨익 웃으며 탁자로 바짝 다가 앉았다. 그러자 고달수가 심드렁하게 받았다.

"회의라니? 뭘 또 의논해? 회의는 진작 끝났는데?"

"뭐야? 시작도 안 한 회의가 언제 끝나?"

"우리는 동업을 하기로 했다. 이거면 결론이 다 난 거지 거기다 구질구질한 사족을 붙일 안건이 또 남았냐?"

"그래도 최소한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정도는 말이 오가야지."

", 그건 꼭 회의가 아니래도 이제껏 하던 대로 하면 문제 될 게 없잖아?"

"아니 내 말은.... 언제부터 그 괴물 개를 투견 시합에 내 보내자는 건지는 알자는 거라니까?"

박철구의 말에 이번엔 고달수의 입에서 와락 큰소리가 터졌다.

", 그 자식, 투견 시합도 구택이가 다 나아야 어떻게 해 볼 것 아니냐? 네가 내일 당장 빅게임을 성사 시켰다 해도 도사견의 허리를 와작와작 씹어대는 그 무지막지 한 개는 누가 다룰 건데? 구택이 없이 그 괴물 개가 우리 말을 들어먹겠냐? 그러니 일단 그 개를 구택이네 농장에 옮겨 놓고 저 팔 다리가 낫기를 기다려야지 별 수 있냐? 그리고 투견판에서 수입이 나올 때까지 구택이 생활비는 내가 책임질 테니 그동안 농장에 들어가는 경비는 철구 네가 다 대라. 어떠냐? 싫으냐?"

"농장에 쓰일 경비라야 개 사료에 훈련용 개 몇 마리면 될 텐데 싫고말고 할 게 뭐냐? 네가 서 회장과 계속 거래를 해서 재미를 보니까 생활비를 책임진다고 하는데.... 사실 나도 요즘 B 급이긴 하지만 투견장에서 재미를 좀 보고 있다. 그러니 내 걱정은 마라. 생활비든 농장 경비든 무조건 너하고 반반씩 낼 테다. 그래야 동업자로써 체면도 서지."

"좋아,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서로 좋은 일이지. 그럼 이렇게 하자. 먼저 이번 일요일, 검단으로 가서 개들을 구택이네 농장으로 옮겨 놓고 보자."

"일요일까지 기다릴 게 뭐야? 내일 당장 옮겨버리면 될 텐데?"

박철구와 고달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양구택이 불쑥 끼어들어 볼멘소리를 했다. 그러자 고달수가 손을 바삐 내 저었다.

", 안돼. 금요일 토요일은 내가 바빠서 곤란해. 금요일엔 회장이나 총무가 개를 고르러 오거든. 그러면 그 다음날인 토요일엔 시합에 나가니까 이틀 간은 시간이 없어."

"뭐야? 요즘도 회장이 양 고긴가 말 고긴가로 장난을 치냐?"

박철구가 갑자기 생각난 듯 고달수에게 물었다. 고달수는 조중구와의 관계가 있는지라 가슴이 뜨끔했다. 사실 지난주까지 연속해서 서 회장의 장난 덕을 톡톡히 본 사람은 조중구와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그걸 밝힐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얼른 엉뚱하게 둘러댔다.

"글쎄? 웬일인지 최근엔 그런 짓을 하지 않던데? 아마 무슨 다른 수를 쓰나 보지."

"글쎄.... 나 대신 서회장과 계약을 맺은 동칠이 말을 들어 보니 지난 주에 총무란 작자가 와서 먹고 힘 내라고 시합에 나갈 도사에게 고기를 주더래."

"그래서 그 시합에서 동칠이네 개가 졌데?"

"아니. 그걸 네가 모르면 누가 아냐? 동칠이가 참가한 그 투견장에는 너도 있었잖아?"

", 임마, 견주끼리 말을 나눌 수 없는 규칙을 넌 모르냐? 내 시합하기도 바쁜데 친하지도 않은 동칠이 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 그렇구나. 그런데 말이야. 분명히 고기를 먹은 동칠이네 도사가 이겼다고 하더란 말이야.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되냐?"

"시합이 끝나고 집에 가서도 멀쩡하더란 말이지?"

"물론이지. 나도 그걸 물어봤다니까."

고달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리가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고기를 주었다면 고기 속에 약이 들었을 터인데 그걸 먹고 극렬한 싸움을 하고도 멀쩡하다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날 동칠이 개를 상대했던 개의 주인 말도 들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고달수와 박철구의 대화 내용이 궁금했던 양구택이 끼어들었다.

"시합을 앞둔 개에게 고기를 좀 먹인 게 대수냐? 왜들 그래? 너희들만 알고 나는 몰라도 되는 일이냐?"

", 별일 아니야. 네가 꼭 알아야 할 일 같으면 진작 네게 말했지. 그보다 그 괴물 개를 갖다 두려면 네 농장을 좀 고쳐야 할 것 아니냐?"

"고칠 것 없어. 태산이와 동방불패 것만 남기고 필요 없는 쇠창살은 다 뜯어 고물상에 넘기면 되니까."

"괴물 개 이름이 태산이라더니 그럼 동방불패는 새끼 낳은 그 암캐 이름이냐?"

"물론이지. 그런데 괴물 개가 뭐냐? 우리들 밥줄인 태산이를 보고 괴물이라니? 앞으로 괴물 개라고 하지 말고 이름을 불러. 이름을... ."

"알았다. 한데, , 그 몸으로 개들은 돌볼 수 있겠냐? 그리고 네가 다 나은 담에는 더 바빠질 텐데..... 어차피 개와 농장을 돌볼 사람이 필요치 않겠느냐 말이야."

고달수는 양구택의 상태가 아직은 덩치가 산 만한 태산이를 다루기엔 턱도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관리인을 쓰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양구택은 손부터 내저었다.

"필요 없어. 아니 필요 없다기 보다 당분간은 아무에게도 태산이를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그래. 소문이 나면 귀찮은 일들이 얼마나 많겠냐?"

"그건 그래. 흥행에 성공하려면 깜짝 쇼가 필요하긴 하지. 개 장수인 내가 태산이를 처음 보고 놀라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는데 만약 투견장에 태산이가 들어서면 아마 까무러치는 사람이 수두룩할 게다."   

"그건 달수 말이 맞다. 나도 그놈을 처음 보는 순간 헛것을 본 줄 알았으니까."

고달수와 박철구는 죽은 개를 묻으러 갔다가 태산이를 봤을 때를 상기하듯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웃고 있었다. 동업을 하기로 한 뒤에 비로소 그 개에 대한 공동 소유자로서의 뿌듯함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 그럼 대강 얘기는 다 끝난 거지?"

할 말이 남았으면 하라는 듯 양구택이 두 사람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동업을 하기로 했으면 그걸로 얘기 끝, 아니냐?"

박철구가 고달수를 흉내 내어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그럼 좋다, 내 개는.... 아니, 우리들 개는 일요일 아침에 옮길 거니까 너희들이 날 태우러 여기로 와라. 내가 운전대를 잡으려면 아직 두어 달 더 있어야 할 것 같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너희들이 내 생활비를 보내려면 넉넉하게 보내다오. 마누라가 일을 나가니 집구석이 이 모양인데다 내가 양견장으로 나가 있으려면 밥을 조달해 줄 사람은 마누라 밖에 없잖아?"

"알았다, 아예 일시불로 충분히 보낼 테니 실업자라고 쫄 것 없어. 넌 이미 예비 재벌이니까. 그러니 우리가 보내는 돈에 부담도 갖지 말란 말이야."

"미친 놈 같으니.... 내가 너희들에게 부담 가질 사람이냐? 단 몇 달 신세 지는데 부담은 무슨...."

"허긴 쟤는 학교 다닐 때 삼 년 동안 내 도시락을 뺏어 먹고도 부담을 느끼지 않은 놈이니 말 다 했지. 구택아, 안 그러냐?"

박철구의 항변에 고달수가 킬킬거리며 일어나 현관 문으로 향했다.

", 얘기 끝났으니 우린 이만 갈란다. 농장 일도 밀린 데다 가서 시합에 나갈 개를 골라 놔야 하니까."

", 갈 땐 가더라도 철구가 애써 타 온 커피는 마저 마시고 가야지?"

양구택이 고달수를 따라 일어서는 박철구를 바라보며 짓궂게 커피를 들먹였다. 그러자 예상대로 발끈하는 박철구였다.

"지랄.... 식은 커피 너 혼자 다 마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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