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이다. 마누라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방금 화장실을 다녀온 양구택이 침대로 옮겨 앉기도 전에 전화기가 먼저 요란한 소리로 울었다. 양구택은 휠체어에 그대로 앉은 채 폴더를 열었다. 박철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 죽은 개들은 다 처치를 했다. 그리고 네 개도 봤고."
"그래? 날 대신해줘서 고맙다."
"그런데.... 네 개 말이다. 그 태산이라는 개."
"말해."
"그거 내게 팔라면 네가 안 팔겠지?"
"팔아? 왜? 내가 팔겠다면 네가 사게?"
"네가 지금 농담이 아니라면 나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용의는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네가 돌지 않았다면 나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용의가 있다."
"음, 내가 예상한 답이어서 욕은 않겠다. 대신 말이다. 이건 내 진정이 담긴 말이니까 너도 진정으로 들어라."
"뭔데 아침부터 사설이 이리 길어? 너 혹시 컨테이너 밖에 있는 개장을 들여다보고 그딴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지가 아니고...... 맞지?"
"엇, 너 어떻게 내 마음을 그렇게 꿰뚫고 있냐?"
박철구와의 대화가 결국 새끼 괴물 개에 이르자 양구택은 새삼 짜증이 나려 했다. 두 시간 전, 똑같은 내용의 전화를 이미 받은 바 있기 때문이다. 밤새 팔과 다리가 아파 잠 못 이루다가 새벽에서야 간신히 선잠이 든 양구택을 깨운 전화였던 것이다. 전화를 건 사람은 고달수였고 전화를 건 목적도 괴물 강아지를 양도하라는 것이었다.
"꿰뚫긴 개뿔, 학습 효과지. 네놈보다 먼저 전화한 놈이 있었단 말이다."
"뭐야? 달수가 선수를 쳤단 말이지?"
"선수고 나발이고, 친구의 불행을 틈타 자신의 행복을 노리는 네놈들과는 앞으로 말을 섞지 않을란다. 하니까.... 전화 끊어."
"어, 엇. 야, 기다려. 친구지간에 농담을 못하면 누구랑 하냐? 그건 어디까지나 농담이야. 농담. 아직 눈도 안 뜬 강아지가 커서 어떻게 될 줄 알고 탐을 내겠냐? 안 그래?"
"내 개를 보고 나니까 네놈의 도사나 롯드 와일러는 개벼룩 정도밖에 안 되는 걸 알겠지? 그래서 내 개가 갑자기 움직이는 돈뭉치로 보이지? 그러니까 네놈들이 교대로 나를 어르고 달래서 그 개들을 접수하시겠다 이 말 아니냐?"
"한 마디로 그건 오해다. 그런 오해를 하는 걸 보니 그동안 네가 다쳐서 못 움직이니 강박증과 피해 망상증이 한꺼번에 널 방문했나보다. 네가 알다시피 달수나 내가 널 배신 때릴 사람이냐? 강아지를 들먹인 건 그저 욕심에.... 그래 너, 견물생심이란 말 알지? 바로 견물생심 때문이지 다른 속셈은 전혀 없다. 구택아, 삼십 년 전의 우정을 제발 믿어 다오."
박철구의 끝없는 변명에 양구택은 슬그머니 웃음이 나서 이쯤에서 왕년의 보스로써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기로 했다.
"삼십 년 전? 물론 개장수 아들이라고 놀리던 교장 아들을 때려 집단 퇴학을 당한 우리 삼총사의 우정은 아직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못내 아쉬운 것은 그때 네가 한 박자만 늦게 주먹이 나갔으면 퇴학이란 최악의 사태는 오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막말로 고등학교 졸업장만 있었어도 나는 개장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뭐 나 때문에 졸업장이 없어? 그 성질에 내가 안 때렸어도 네놈이 가만히 있었을 놈이냐? 그리고 뭐? 졸업장? 졸업장이 있었으면 개장사 대신 소장수를 하려 했었냐? 언제는 조상 대대로 이어온 빛나는 가문 어쩌고 하더니, 이제 와서 개 장수로 보낸 세월이 아깝단 말이냐?"
"그런 건 아니지만 졸업장만 있었어도 지금쯤 그놈 반만큼은 성공했을 거란 말이다."
"누구? 교장 아들 준표 말이냐? 그깟 프랜차이즈 사장이 무슨 출세라고 그게 그렇게 부럽냐?"
"모르는 소리 하고 있네. 꼬꼬댁 치킨이라면 전국에 가맹점이 수백 갠데 그게 출세가 아니란 말이냐? 황준표 그놈은 이젠 제벌의 반열에 올랐다고 봐야 한다고."
"아, 물론 돈은 벌었겠지. 하지만 지난번 영석이 말을 들으니 그놈이 요즘 경마에 빠져 숱하게 까먹고 있다더라. 그러니 몇 년만 기다리면 너도 그놈을 따라잡을 수 있을 거니까 때 이른 낙담은 하지 말아."
"아니 이 자식이 잘 나가다가.... 몇 년 후에 그놈이 거지가 되면 그때 나도 동급으로 따라잡으란 말이냐?"
"말을 왜 그렇게만 듣냐? 네겐 괴물 개가 있으니 몇 년 후면 너도 제벌은 못 돼도 준 제벌은 될 수 있다는 말인데.... 거 아침부터 까칠하게 나올래?"
"참, 내 개 얘기를 하던 중이었지? 이거 엉뚱한 얘기로 나갈 뻔했군. 달수한테도 얘기했지만 네가 본 그 강아지는 내 권투 후배의 아들에게 주기로 이미 약속을 했다. 어제 너희들이 만났다는 경비 아들인데 그 아이가 아니었으면 내 개가 투견 판에 데뷔도 못해보고 네 도사들에게 물려죽을 뻔했잖아? 그러니까 너도 우정에 기스 나기 전에 그 강아지에 대해선 입도 뻥긋 말어. 알았지."
"이거 어째, 나를 빼고 이미 달수하고 얘기가 다 됐다는 말처럼 들린다?"
"뺀다고 네가 순순히 빠져 줄 놈이냐? 진짜 끊어. 누어야겠어."
박철구와 통화를 하는 사이 마누라는 그새 어디로 뺐는지 보이지 않았다. 전화기를 집어던진 양구택이 한손으로 간신히 침대에 올랐다. 양구택이 한손으로 간신히 침대에 올라 뒤로 벌렁 누워 잠을 청했다. 새벽잠을 못 잔 보충을 하려는 것이다.
양구택이 눈을 다시 떴을 때는 맞은 편 환자들이 식판을 끼고 점심 밥들을 먹고 있었다. 그러자 양구택의 마누라가 배달 된 전복죽을 차려냈다. 그때 마침, 한열이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아니? 한열이 아니냐? 지금 학교도 점심시간이냐? 오늘 치료는 다 했니?"
"아뇨. 아직이요. 이거 우리 엄마가 만드신 거예요. 녹두 죽이래요. 아까 학교로 갖고 오셨더라고요."
"어, 이거 번번히 신세만 지는구나. 네 아버지께 태산일 맡긴 것만 해도 미안한 판인데 말이다. 어쨌든 잘 먹으마. 여보 그건 당신이 먹고 이것부터 주구려."
양구택은 한열의 성의를 봐서 전복죽을 뒤로 미루고 녹두죽에 숟가락을 꽂았다.
"그럼, 천천히 드세요. 저는 처치실로 가 봐야 해요."
"학교와 병원이 워낙 가까워 네가 자주 와서 나야 좋기는 하다만.... 참 어젯밤 너의 아버지와 통화했다. 태산이도 동방불패도 다 건강하다더라."
"그러지 않아도 토요일에 가보려고 해요. 태산이 상처도 살필 겸 해서요."
"그 놈도 너 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저도 보고 싶은걸요?"
병실을 나온 한열이 처치 실을 들러 학교로 돌아갔다. 학교는 길녀 병원에서 십 분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나지 않은 교실은 아이들이 모여 자신이 본 영화의 줄거리를 침을 튀기며 설명하고 있었다.
"치료 끝났냐?"
아이들 틈에 있던 기동이가 한열을 발견하곤 재빨리 다가왔다.
"어, 이제부턴 삼일에 한 번 오라더라."
"야, 그래도 그게 어디냐? 도사에게 물리고도 그 정도로 끝나다니 말이야. 게다가 싸움 개였다며?"
"내가 덜 물린 건 양씨라는 분이 삽으로 막아주어 서지."
"그럼 그 사람이 입원했다는 그 사람이냐?"
"음, 치료를 오래 해야 한 데나 봐. 한데 준석인 어딜 갔냐?"
"힛, 제 말하니까 저기 오네."
교실을 들어선 준석이는 아이들이 모여 떠드는 곳을 힐긋 바라본 후 재빨리 한열에게로 다가왔다.
"야, 아직 점심 안 먹었지? 이거 먹어라."
준석은 말과 함께 등 뒤로 돌렸던 손을 한열에게 내밀었다.
"웬 빵이냐?"
"점심으로 매점에서 빵 먹고 오는 길이다. 이건 너 주려고 산 거고."
"용돈이 또 생긴 모양이구나."
"생겼지. 그것도 이만 원이나."
"뭐 이만 원? 설날도 아닌데?"
"우리 할아버지께 황소개구리를 잡아다 드리면 한 마리에 천 원씩 주신단 말이야."
"지난 번에 잡던 그 개구리?"
"바로 그거지. 그게 우리 할아버지는 보약이래. 그걸 끓여서 설렁탕처럼 드시더라고."
준석이는 자신의 코앞에 설렁탕이라도 있는 듯 퍼먹는 흉내를 냈다. 그 걸 본 한열은 둘로 쪼갠 빵 반 쪽을 기동이에게 내밀며 다시 물었다.
"그래? 그럼 그걸 잡으려면 승기천으로 가야겠구나."
"그 부근이지. 아 참 그때 죽은 닭을 싣고 가던 트랙터를 본 적 있지? 바로 그 근천데.... 그곳 비닐하우스 안에서 개를 키우나 봐. 개들이 엄청 짖더라고. 그래서 승학산에서 죽은 그 형들이 생각나서 겁이 더럭 나더라니까."
"그래? 우리가 갔을 때는 못 봤잖아?"
"못 봤지. 그동안 누가 개 농장을 옮겨왔나 봐."
"개구리 잡으러 또 가니?"
"응, 이 번 토요일에 가려고... 너도 갈래?"
"난 토요일엔 우리 아버지에게 가 봐야 해."
"참, 그렇겠구나. 검단이랬지?"
때마침 스피커에서 오후수업을 알리는 음악이 짧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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