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5월, 비가 내리던 밤이었다. 안양에서 인천으로 이어지는 왕복 2차선의 낡은 포장도로에서 트럭끼리 정면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당시 한 트럭에는 식용 개가 잔뜩 실려 있었다. 이 사고로 운전자들은 모두 즉사했고 충돌 시에 흩어진 개장 안에도 죽은 개가 많았다. 그리고 문이 열린 채 속이 텅 빈 개장도 있었으나 사고 처리반 누구도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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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열은 수업이 끝나자 곧바로 교문을 나섰다. 그리고는 길을 건너 전자오락실이 밀집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 길은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어서 한열이 늘 다니던 코스였다.
"어이, 너. 이리 와."
낯선 소리에 한열은 좌우를 돌아보았다. 저쪽 골목에 몇 명의 양아치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요?"
가슴이 뜨끔해진 배한열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짜샤. 너 말고 여기 누가 있어?"
개중에 여드름이 잔뜩 난 놈이 침을 찍 뱉으며 히죽 웃었다.
"야, 너, 저 학교 다니지?"
"................ 예."
"몇 학년이야?"
"3학년인데요…."
"그 새끼 중학생 치곤 한 덩치 하는데?"
다리를 가볍게 떨던 다른 녀석이 끼어들었다.
"너 돈 가진 것 좀 있냐?"
한열을 불러 세웠던 놈이 본론을 꺼냈다. 전혀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지만 한열이로서는 이런 양아치들의 시비는 언제나 겁이 났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놈들이 자신을 부르는 순간 머리가 쭈뺏하며 심장이 두근거리고 다리가 절로 꼬였다. 게다가 오줌이 마렵기까지 했다.
한열은 어릴 때부터 겁쟁이란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한열은 겁쟁이란 말이 그렇게 싫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바로 이런 경우를 당할 때면 한열의 가슴은 어김없이 철렁하니 겁쟁이란 소리를 들어도 사실 할 말은 없었다.
동네마다 차고 넘치는 것이 전자오락실과 비디오 대여점이고 그런 곳엔 으레 이런 양아치들이 모이게 마련이다. 놈들은 언제나 만만해 보이는 애들을 골라 돈을 뜯어냈다.
그러나 이 길이 집으로 가는 제일 빠른 길이었으므로 포기를 하기는 싫었다. 결국 오늘은 놈들의 눈에 걸려든 것이다. 일진이 좋지 못한 날이었다.
"짜식 왜 대답이 없어? 돈 가진 거 있어 없어?"
".........없는데요."
"뭐? 없어? 너 뒤져서 십 원이라도 나오면 죽는다?"
머리에 무스를 잔뜩 바른 또 다른 놈이 겁을 주며 한열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처음 한열이를 불렀던 여드름쟁이가 무스 머리를 제치고 앞으로 나왔다.
"바로 섯. 어라? 차렷 하란 말이야. 짜샤."
"아무 것도 없는데요. 정말 돈이 없다고요."
순간 여드름쟁이의 주먹이 한열의 배에 꽂혔다.
"헉!"
일순간에 숨이 콱 막힌 한열은 배를 감싸고 신음을 토했다.
"꼭 맞아야 말을 듣지?"
겁이 더럭 난 한열은 배를 부여잡은 채 다음에 나올 놈의 행동을 주시했다.
"야, 여기서 그럴게 아니라 저 골목으로 데려가는 게 어때?"
무스를 바른 놈이 골목을 가리켰다.
"그러지, 너 오늘 이 형님들 주먹맛 좀 봐야 쓰겠다."
여드름이 한열의 목덜미를 무지막지하게 잡아끌었다. 그 순간 한열이가 여드름이 잡은 손을 힘껏 뿌리치며 앞으로 냅다 뛰었다.
"어? 저 새끼 튄다. 잡아, 잡으라고."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한 여드름이 소리를 질렀다. 한열은 책가방을 옆구리에 낀 채 죽어라 앞만 보며 달렸다. 얼핏 뒤를 돌아 보니 세 놈이 부리나케 따라오고 있었다. 한열은 있는 힘을 다해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큰 길로 나가기 전에 잡아. 잡아야 돼."
무스를 바른 놈이 한열의 뒤를 바짝 따르며 소리를 질렀다. 이러다 자칫 잡힐 것 같은 생각이 든 한열은 큰길을 포기하고 가까운 초등학교 앞으로 달려갔다. 그곳엔 문방구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무작정 한 문구점으로 뛰어들었다. 진작부터 창밖을 보고 있던 문구점 아저씨는 이미 사태를 짐작한 듯 귀찮은 표정으로 계속 혀만 찰뿐이었다.
"아저씨 잠깐만 여기 있을게요. 저 형들이...."
"말세여 말세. 에이.…"
아저씨는 한열의 얼굴을 힐긋거리며 연신 밖을 살폈다. 혹시 자신에게 피해가 있을까 몸을 사리는 눈치였다. 잠시 후, 차마 문방구 안까지는 따라 들어오지 못하고 서성이던 양아치들이 발길을 돌렸다. 한열은 비로소 숨을 돌렸다.
'내일부터 이 길은 포기해야겠구나.'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문구점을 나서자 한열은 곧바로 큰길로 나가 집으로 향했다. 큰길을 따라가면 학교에서 집까지는 거의 한 시간 거리였다. 지름길로 왔으면 15분은 절약이 되었을 것이었다.
한열의 집은 시내와는 많이 떨어진 산 아래에 있었다. 몇 년 전 만 해도 논과 밭뿐이던 곳이 최근에는 집들이 늘고 곳곳에 아파트 공사로 먼지가 날렸다. 한열은 공사장과는 멀리 떨어진 자기 집으로 향했다. 삐딱하게 쓰러지려는 블럭 담장에 둘러싸인 집이었다.
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삭을 대로 삭은 돌쩌귀가 녹슨 비명을 질렀다. 슬레이트로 지붕을 올린 낡은 집은 햇볕조차 들지 않아 어딘가 음산한 분위기가 돌았다. 마당 가운데 수돗가에는 세숫대야가 나뒹굴고 뒷 켵 변소에서 나오는 악취가 집안을 맴돌았다. 한열이는 변소로 다가가 참았던 오줌을 누었다. 드럼통을 묻어 만든 변소여서 오줌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스산하게 들렸다.
"학교에 다녀왔습니다."
아버지의 방문을 열었다. 대낮인데도 방안은 어두웠다. 한열이 아버지 배철권은 오늘도 벽에다 등을 기대고 멍하니 테레비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이제 왔냐? "
대답을 하는 아버지의 발 밑에는 소주 병이 두어 개 뒹굴고 있었다. 보나 마나 깡소주로 점심을 대신했을 것이다. 소주병 옆에는 신문지와 비디오테이프 몇 개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식사를 하셔야지 소주가 뭐예요? 몸도 안 좋으신데.…"
"내 몸이 어때서? 이젠 다 나았다."
"술만 드시면서 어떻게 나아요?"
"그 녀석.... 난 괜찮데두 그러네. 내일부터는 일을 나갈 수 있단 말이다."
벽에 기댔던 몸을 일으킨 배철권은 아들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어서 주먹을 쥐어 천정으로 향해 어퍼컷을 날리기까지 했다.
"자, 봐라. 이 근육을... 아직은 널 먹여 살릴 힘이 있단 말이다."
"그래도 조심은 하셔야죠."
"걱정 말어. 내겐 술이 약이야."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난 배철권은 한열을 향해 스파링 하듯 가벼운 잽을 날리는 모션을 취했다. 그리고는 연속된 잽을 재빨리 한열의 얼굴을 향해 날렸다.
"어떠냐? 아직 전성기 때의 내가 남아 있지?"
단지 몸만 놓고 본다면 아닌게 아니라 배철권의 몸은 건장해 보였다. 오랜 권투선수 생활로 다져진 몸에 수년을 노동판에서 보낸 배철권의 근육은 어찌 보면 갈색의 차돌 같았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한열이 아버지 배철권의 몸은 문제가 있었다. 프로 선수 시절 크고 작은 부상과 대미지로 머리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무언가를 깜박 잊어버리는 증상이었다. 사실 배철권에게 그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벌써 오래전이었다. 처음에는 일 년에 한두 번이던 것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잦아진 것이다. 병원의 최종 진단으로 당연히 권투 선수로서의 생명은 끝이 났다. 105 전 91승 14패, 52 KO 승의 전적만 남긴 채였다. 선수 시절에도 힘들었던 가족의 생계가 은퇴 후에는 그야말로 막연했다. 아내와 아들 하나를 먹여 살릴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건장한 체격이 있어 노동판에 뛰어들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오늘날까지 잘 버텨 온 것이다.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치매기가 문제였다. 발단은 신경세포 손상에 의한 치매 초기 증상이었다.
공사장에서 깜빡 깜박 정신이 나가서 위험한 순간을 몇 번이나 맞았다. 공사장에서도 쫒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또 다른 공사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우울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한열아."
방 밖으로 나서려는 한열이를 아버지가 불러 세웠다.
"예?"
"저 비디오 갖다 줄 날짜가 언제인지 모르겠구나. 네가 좀 갖다 줘라."
"그러지요. 어, 이건 아직 날짜가 남았는데요?"
"그래? 그걸 언제 빌려 왔더라? 아무튼 그거 재미없다. 무슨 놈의 영화가 죽은 놈들이 어정어정 걸어 다니다 끝나더라."
"그래도 이건 좀비 영화로서는 제법 유명한 건데요?"
"유명하면 뭐 하냐? 재미가 있어야지."
"여하튼 제가 보고 나서 갖다 줄게요."
배철권은 권투 영화 이외의 영화는 별 흥미를 못 느꼈다. 액션 영화가 아니면 주로 권투 영화를 봤는데 그중에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바로 록키였다. 록키 원과 투는 아마 스무 번도 넘게 보았을 것이다.
아버지와 달리 한열이 즐겨보는 영화는 공포영화였다. 한열은 폭력이나 공포스러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속이 시원했다. 자신이 그 폭력과 공포를 뒤에서 조종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영화는 자신이 겁이 많다는 사실을 잊게 해 주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폭력이나 공포 영화는 한열에게 카타르시스와 같은 역할을 하는지도 몰랐다.
이튿날, 등교를 위해 집을 나선 한열은 빠른 지름길을 두고 멀리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어제의 그 양아치들을 만나지 않기 위해서였다. 학교에 도착해 교실로 들어서니 반 아이들은 아침부터 좀비 얘기로 시끄러웠다.
"좀비를 완전히 죽이려면 불로 태우는 수밖에 없다니까 그러네."
부반장인 명수가 확신에 가득찬 어조로 말했다.
"머리에다 총을 쏴도 죽더구만."
동진이가 이의를 달았다.
"야, 머리에 총을 쏘면 뇌가 사방으로 튀잖아? 징그럽게...."
명수는 동진이의 말을 반박하며 손을 저어 뇌가 튀는 장면을 연출했다.
"좀비에게 물리면 무조건 좀비가 되는 거냐?"
"당연하지. 왜 너도 물려보고 싶냐?"
"야, 그렇게 느려터진 좀비에게 내가 왜 물리냐? 냅다 튀면 될걸."
"맞아, 좀비의 약점은 느리다는 거야, 그리고 머리만 공격하면 된다고."
동진이의 말이 끝나자 한열의 짝 기동이가 끼어들었다.
"뭐 좀비가 느리다고? 웃기고 있네. 무슨 영화에선가 좀비가 된 개는 총알처럼 뛰어서 사람에게 덤벼들더라."
"야, 그건 개잖아?"
"그럼, 좀비가 되면 개도 느려진단 말이야?"
"글쎄 그렇지 않을까?"
요즈음엔 좀비 영화가 유행인가 보았다. 아이들이 제각기 떠드는 말을 듣던 한열은 어젯밤에 본 좀비 영화가 떠올랐다. 그러다 아버지의 병세와 우울한 집안 분위기를 생각했다. 침울한 집 분위기만 본다면 한열이네 집이야말로 좀비가 사는 집과 다를 바 없었다.
날로 무기력해지는 아버지의 어두운 그림자와 늘 피로에 지친 엄마였다. 그 그늘 아래에서 자란 한열이 역시 일찌감치 자신감을 상실한 상태인 것이다. 이럴 때 집안을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한열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 발 벗고 나설 용기마저 없는 것에 화가 났다. 점점 최악으로 치닫는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최선의 다 하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왜 겁이 많은 걸까? 아버지 말씀처럼 권투를 배워 볼 걸 그랬나?"
그러나 권투를 배운다고 없는 용기가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 오늘도 당장 하굣길의 양아치가 걱정되었다.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사실 성적도 바닥을 헤매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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