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이어서 4교시를 끝으로 수업을 마친 한열은 교문을 나섰다. 이제는 전자오락실이 늘어선 골목의 지름길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버스를 타고 다닐 형편도 아니었다. 집안 사정으로 보아 교통비도 큰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한열이는 지금까지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한 적이 몇 번 없었다. 한열은 큰길을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그러다 지름길을 버리고 큰길로만 가려니 너무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없이 또 다른 지름길인 주택가와 아파트를 가로질러 승학산을 향해 걸었다. 승학산은 학교와 집 중간에 위치한 공원 같은 산이다. 산만 넘으면 집은 멀지 않았다. 한열은 성큼 산길로 들어서서 걸음을 빨리했다.
높지 않은 산이어서 20분이면 산을 넘을 수 있었다. 산 정상에 이를 즈음 한열은 나무 뒤로 무엇인가 지나는 것을 얼핏 본 것 같았다. 확실치는 않으나 분명히 사람은 아니었다. 확실하게 보았으면 그만일 텐데 얼핏 본 물체라 좀 찜찜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그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나뭇가지 사이로 커다란 검은 개 두 마리가 어슬렁거리는 게 보였다.
'개였구나.'
한열은 안도했다. 그리고는 다시 걸었다.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엇? 그러고 보니 목줄이 없잖아? 그것도 두 마리….'
왈칵 겁이 난 한열이 뒤를 돌아보았다. 개들은 여전히 서성거리며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개들의 눈이 좀 이상했다. 촛점이 없는 트릿한 눈빛에 녹색에 가까운 눈이었다. 자세히 보니 이상한 것은 또 있었다. 아래턱으로 침이 줄줄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섬찟한 생각이 한열의 머리와 가슴을 파고들었다.
"헉."
아무도 없는 산에서 저 두 놈이 달려든다면? 보나 마나 죽은 목숨이다. 그것도 처절하게. 한열은 뒷꼭지가 쭈뼜거리는 것을 꽉 참고 한발 한발 뒤로 가만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눈은 개들에게서 떼지 않았다. 아니, 뗄 수가 없었다. 슬금슬금 물러나던 한열이 재빨리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 볼 여유도 없었다.
정신없이 달린 뒤 산 아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돌아 볼 여유도 생겼다. 다행히 개들이 따라오는 기색은 없었다. 그런데 아래쪽에서 할머니 둘이 산으로 오르고 있었다. 운동을 하려는 것일 터였다.
'이상한 개가 있다고 알려드려야 하나?'
순간적으로 마음의 갈등이 일었지만 한열은 그냥 외면하기로 했다. 산 어딘가에 주인이 있는 개일 지도 모르는데 호들갑을 떨 일이 아니란 생각이었다. 한열은 할머니들을 지나쳐 그냥 집으로 향했다. 신경을 긁는 대문 소리는 여전했다. 음산한 집 안의 공기도 변함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진 한열은 차라리 마음이 놓였다.
"아버지, 학교에 다녀왔습니다."
인삿말과 함께 방문을 열었다. 헌데 방안이 썰렁했다.
'어? 어딜 나가셨나? 아, 어딜 나가셨나 보구나.'
방문을 닫은 한열은 자신의 방인 옆방으로 가려는데 부엌문이 열렸다.
"일찍 오는구나."
"아니? 엄마? 오늘 일 안 가셨어요?"
이 시간에 엄마가 집에 있는 것은 의외였다.
"오늘은 밤 반이야. 이따 아홉 시에 가서 내일 아침이 돼야 퇴근할 거다."
"아버지 어디 가셨어요?"
"글쎄다. 일자릴 알아본다고 용역업체 사장인 차 씨를 만나러 간다고 하더라만.... 그 게 어디 쉽겠니? 몸이 그런데.... 어쨌든 큰일이다."
"요즘 들어 더 심해지시는 것 같아요."
"그러게 말이다. 몸이라도 성해야 할 텐데.…"
한숨을 내쉬는 엄마의 얼굴 역시 건강한 얼굴이 아니어서 한열의 마음이 무거웠다. 불규칙한 아버지의 수입으로 어쩔 수없이 냉동식품 공장에서 고생하시는 엄마였다.
"들어가거라. 내 시장엘 다녀 오마. 두부 넣고 돼지고기 찌개를 할 거야."
"저녁 때가 되려면 멀었는데요? 천천히 다녀오세요."
대문을 나서는 엄마를 배웅한 한열은 방으로 들어와 책가방을 던지 듯 내려놓았다. 그리고 안방으로 건너가 테레비를 켠 다음 아버지처럼 벌렁 누웠다.
TV에서는 기자가 누군가와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화면 뒤로 개장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수의사 같았다. 헌데 수의사의 표정이 좋지 않고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리모컨으로 볼륨을 좀 높였다.
"여기가 바로 사고 현장인 동물 병원입니다. 에... 사고 당시의 상황을 좀 말씀해 주시죠."
"당시에 저는 수술을 하느라 수술실에 있었습니다. 헌데, 밖에서 비명 소리가 들리고 개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위급한 수술 중이라 금방 나가 볼 수가 없었죠. 그러다 엄청난 비명소리와 개들이 짖는 소리가 났습니다. 깜짝 놀라 밖을 내다보니 쓰러진 사람이 보이고 개들이 밖으로 튀어나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진료실로 나왔을 때는 이미 직원 두 명과 그 개의 주인인 듯한 사람이 변을 당했더군요."
"아니? 그럼 사망자 가운데 개 주인도 있었단 말입니까?"
"예. 아마 제가 수술실에 있는 사이 그 개들을 데리고 진료를 받으러 왔었나 봅니다."
"왜 주인까지 공격했을 까요? 혹시 그 개들이 무슨 병이 있어서일까요?"
"광견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주인을 무는 개가 있을 리가 없거든요."
"광견병이요? 미친개로 의심이 든단 말이죠?"
"정황으로 보나 증세로 봐서는 거의 확실합니다. 그러나 검사를 해 봐야 명확한 병명이 나오겠죠. 일단 채취된 시료는 경찰을 통해 실험실로 보냈습니다."
"보셨다는 개는 무슨 종류였나요?"
"롯드와일러였죠."
기자와 의사의 인터뷰가 진행되는 중에 롯드 와일러라는 개 사진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검은색에 발이 누런 커다란 개였다. 그렇게 생긴 개 두 마리가 동물병원 직원과 주인을 물어 세 명의 사상자를 냈다는 것이다.
한열은 그 개를 본 순간 조금 전 산에서 본 두 마리의 개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설마 뉴스에 나오는 개가 그 개일 리가 없으므로 채널을 돌리고 말았다. 재방송되는 개그 프로를 보기 위해서였다. 개그 프로가 끝났을 때는 여섯 시가 다 되어서였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한열의 엄마가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느라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문 소리를 못 들었는데 언제 오셨어요?"
부엌으로 다가가자 구수한 돼지고기 특유의 냄새가 나서 한열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밥 다 되었는데 네 아빠는 왜 오시지 않냐? 모처럼 고기로 찌개까지 끓였는데.…"
"곧 오시겠지요. 내가 나가 볼게요."
"그럴 것 없다. 오실 때 되면 오시겠지."
"아니요, 슬슬 나가보죠 뭐."
대문 밖으로 나온 한열은 공터를 지나 버스 정류소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아직 문학산 바로 밑인 이곳까지는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서 길 좌우에는 거의 채소밭이었다. 그 채소밭이 끝나는 지점쯤에 이르렀을 때였다. 밭고랑 사이에 누런 개 한 마리가 쓰러져 있는것이 눈에 띄었다. 깜짝 놀란 한열은 제자리에 우뚝 서서 돌아설 것인지 지나칠 것인지를 망설였다.
한편 저 개가 죽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열은 있는 용기를 총동원하여 잠시 동안 개를 바라보았다.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네 발이 모두 비스듬히 공중을 향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다면 죽은 것이 분명했다. 헌데 그 개의 크기나 털 색갈이 어쩌면 옆집 개가 아닌가 했으나 알 수가 없었다.
한열은 재빨리 그 개의 사체를 지나쳤다. 그리고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정류장으로 향했다. 정류장 앞 부동산 중개소 앞에는 서너 명의 노인들이 모여 앉아 장기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장기를 두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옆집 현기네 할아버지였다. 한열이는 조금 전에 본 개가 혹시 현기네 개라면 알려 주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기 할아버지, 집으로 가는 밭고랑에 누렁이가 죽은 것 같던데요?"
현기 할아버지는 힐긋 한열이를 올려다보더니 모를 소리라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한열이가 말한 내용을 깨달았는지 깜짝 놀라는 얼굴이었다.
"뭐? 우리 누렁이가? 어디서 말이냐? 누렁이가 확실 하더냐?"
"글쎄요. 누렁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어요. 하지만 크기나 색깔이 누렁이 같아서요."
"아이고, 또 목줄이 풀렸었나 보다. 나 이만 가네."
현기 할아버지가 일어나 신발을 찾는 사이 나머지 노인들이 따라서 일어섰다.
"같이들 가보세. 자네 집 개라면 제법 큼지막하지 않나?"
"에끼 이 사람들 남은 애가 타서 죽겠는데 된장 바를 생각부터 하는군."
"그것도 오래 두면 못 쓰는 법일세."
노인들은 집 쪽을 향해 바쁜 걸음으로 몰려갔다. 한열이는 그 개가 현기네 개가 아니길 바랐다. 이제 겨우 일곱 살인 현기가 몹시 좋아하는 개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열은 노인들이 앉았던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 동네는 시의 외각이어서 버스의 종점이기도 했다. 한열이가 앉아있는 정류장 다음이 버스의 차고지인 셈이다. 십여 분의 간격으로 버스들이 들어오고 나갔으나 한열이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다시 한대의 버스가 다가와 문을 열었다. 역시 아버지는 없었고 내리는 승객도 한 명뿐이었다.
'정말로 일자리를 찾으신 걸까? 이렇게 늦게까지 안 오실 분이 아닌데?'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젊고 건강한 사람들도 취직이 어렵다는데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노동판 말고는 없을 것이었다. 이럴 때 내가 최소한 고등학교라도 졸업한 나이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한열은 생각했다.
'아니 지금 이 나이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잘 찾아보면 어쩌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지금의 성적으로는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인문계는 꿈도 못 꿀 것 같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 학교를 그만둬 버릴까?'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이 또 한대의 버스가 섰다가 지나갔다.
"한열이 아니냐? 날 마중 나왔냐?"
"아, 아버지. 지금 오세요?"
"뭣하러 이까지 나오냐? 내가 또 술이 취해 집을 못 찾을까 봐 나왔냐?"
"아니요, 아버지랑 저녁을 같이 먹으려고요."
"그래? 너희 엄마가 오늘부터 밤 반이라더니 저녁을 지어 놓았나 보구나."
한열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다른 때보다 밝은 듯하여 눈치를 보니 오늘은 술을 마신 것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양손에는 검은 봉지까지 들고 있었다.
"이리 주세요. 제가 들죠."
"그래라. 이건 삼겹살이고 이건 내가 마실 소주다."
"예? 웬일로 삼겹살을 다 사셨어요? 뭐 좋은 일이 있으신 거예요?"
"하하하, 그렇다. 나 취직했다. 노가다가 아니라 현장의 자재를 지키는 경비로 취직했단 말이다."
"그래요? 정말 잘 된 일이네요. 위험한 일이 아니어서 더 좋구요."
"노가다가 일당은 세지. 그러나 일이 있다가 없다가 하니 늘 불안하긴 했지. 하지만 경비 일은 일 년 열두 달 있는 것 아니냐? 이젠 걱정 말아라. 곧 생활도 안정이 될 게다."
배철권은 기분 좋은 목소리로 한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한열은 조금 전에 하던 생각을 잊고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목의 채소밭에 이르자 아까 죽어 있던 누렁이는 없었다. 현기 할아버지와 동네 노인들이 가져 간 것이 틀림없을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현기네 집 뒤 쪽에서 연기가 솟아 오르고 있었다. 이어서 개털을 태우는 노랑 내음이 코 끝에 스쳤다.
"어? 이게 무슨 냄새지? 누가 개를 끄슬리나?"
배철권이 연기가 나는 곳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까 현기네 개가 죽었던 데요?"
"그래? 누렁이란 놈이 말이지?"
"예. 제가 발견해서 현기네 할아버지에게 말씀드렸죠."
"그 놈이 갑자기 왜 죽었나? 누가 쥐약을 놓았나 보다."
"글쎄요, 그러고 보면 오늘 낮에 승학산에서 검은 개 두 마리를 봤는데 좀 이상하던데요? 약을 먹었는지 침을 줄줄 흘렸거든요."
"그래? 그런 개를 보면 얼른 그 자리를 피해라. 광견병에 걸린 개에 물리면 큰일 난다더라."
집이 가까울수록 개 털 타는 냄새는 더 지독해서 코를 막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현기네 집 쪽을 애써 외면하며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늦었네요? 어서들 들어가요. 상 들여갈 테니까."
부엌에서 고개를 내민 엄마의 말에 배철권은 웃으며 아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취직이 되신 걸 아내가 모르고 있는 것이 숨겨진 즐거움이란 웃음이었다.
"엄마, 이거요. 아버지께서 사 오셨어요."
"이게 뭐냐?"
"삼겹살이래요."
"에구, 돼지고기 찌개가 있는데 무엇 하러 또 사오셨수?"
"많으면 좋죠 뭐."
한열이 재빨리 아버지를 대신했다. 방으로 들자 곧이어 엄마가 밥상을 들였다.
"당신 좋은 일 있어요? 삼겹살을 다 사 오게?"
어쩌면 남편의 취직을 느낌으로 아시는 듯한 아내의 물음이었다. 그러나 배철권은 무표정한 얼굴로 찌개 냄비에 숟가락을 가져갈 뿐이었다.
"이거, 돼지고기 찌개로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삼겹살은 괜히 사 왔군."
"엉뚱한 말 말아요. 당신 취직됐군요?"
다 알고 있다는 아내의 자신 있는 말투였다. 그제야 배철권이 풀썩 웃었다.
"엄마, 아버지 취직하셨데요. 현장의 경비직이요."
"뭐? 여보 정말이에요?"
엄마의 표정이 밝아보였다. 아버지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모레, 월요일부터 출근이요. 경비 일이라 힘은 들지 않을 거야."
"잘 됐네요. 공사판에 가시면 늘 불안했거든요."
"일당으로 따지면 공사판 보다 못하지."
"일당을 따질게 아니에요. 고정된 수입이 중요한 거라고요."
"그거야 그렇지만.... 가만, 내가 사온 소주 어쨋냐? 이런 날 한잔해야지."
"이젠 술도 줄여요. 몸 생각도 하면서 마시라구요."
"알았어. 줄여보도록 노력은 해 보지."
엄마는 술에 대해서 더 이상의 말이 없었다. 하긴, 평소에도 아버지가 술을 마시는 것에 잔소리를 심하게 하는 것을 한열은 보지 못 했다. 술뿐 아니라 다른 일에도 별로 말이 없는 엄마였으니까.
"찌개가 맛있네요."
"네 엄마가 찌개는 잘 하잖냐. 술안주로도 딱 이구나."
어느새 밥 한 그릇을 다 비운 한열이 찌개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엄마는 한열의 빈 밥그릇을 들고일어났다. 밥을 푸러 부엌으로 나가려는 것이다.
"아, 주세요. 제가 갖고 올게요."
한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밥그릇을 받아 부엌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오니 아직도 개 털이 타는 노린내가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현기네 집 쪽을 바라보니 연기는 보이지 않았다. 한열은 부엌에서 밥을 퍼서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니 아버지가 테레비를 보고 있었다.
"어, 저거 요 앞에 있는 승학산 아니냐?"
눈길은 테레비 화면에 두고 막 소주잔을 기울이려던 배철권이 문득 잔을 멈추었다. 한열은 얼른 방바닥에 앉아 화면을 바라보았다. 헬리콥터에서 찍은 듯 화면에는 산 전체와 승학산을 둘러싼 동네가 보였다.
"어, 그런 것 같은 데요? 무슨 일이죠?"
"글쎄 조금 전에 뭐라고 그러던데 잘 못 들었다."
"그 산 아래에 사는 노인 두 분이 산에 가셨다 개에게 물려 변을 당했데요."
한열이 엄마가 보았나 보았다. 한열은 승학산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는 순간 산 아래에서 만난 두 할머니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침을 흘리던 검은 개들의 녹색 눈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이 본 그분들이 당하신 것은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때 배철권이 정색을 하고 한열이를 바라보았다.
"가만, 네가 아까 말한 곳이 승학산 아니냐? 약 먹은 개를 봤다는 곳 말이다."
"맞아요. 검은 개 두 마리가 침을 흘리고 있었거든요."
한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엄마가 리모컨을 찾으시더니 얼른 테레비를 꺼버렸다.
"밥 먹을 때 하필 끔찍한 걸 보여주다니. 저런 건 가능한 보지 말아라."
"아, 뉴스는 뉴스일 뿐일 걸 가지고 괜히 야단일세. 어쨋든 한열이 너는 당분간 승학산을 넘어 다니지 말아라. 재수 없으면 당한다."
"그래도 그리로 다니는 길이 가장 빠르거든요."
"빠르다고 잽만 날리면 쓰냐? 간혹 묵직한 훅도 퍼부어야지."
"에이 거기서 잽과 훅이 왜 나와요?"
"가까운 길로만 다니면 먼 길에는 무슨 건물이 있는지 평생 모를 거란 말이지. 안 그러냐?"
배철권은 일상의 일이나 사물에 여차하면 권투를 대입해 말하길 좋아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권투와 같아서 강약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사랑이 주제인 연속극을 보다가도 저렇게 잽만 톡톡 날리다가는 저 여자가 언제 넘어오겠냐? 잽을 쳤으면 훅이나 아퍼컷이 따라 줘야 넘어올 것 아니냐는 식이었다.
"네 아빠 말이 꼭 맞는 건 아니다만 굳이 사람이 상했다는 산으로 다닐 건 없다. 한열이 너는 사람 많은 큰길로 다녀라."
"예, 알았어요."
한열은 엄마의 말에 가볍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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