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삼개 나루
"의원님, 계시우? 의원님 계시면 제발 우리 손자 놈 좀 봐주시우."
송윤호가 머무는 움막에 아이를 안은 노파가 찾아온 것은 거칠이가 아침밥을 하려고 막 옹기솥에 불을 지피고 있을 때였다.
"여기가 용한 의원이 있다는 곳이 아니요? 의원님 계시우?"
노파가 다시 한번 애절한 목소리로 거칠에게 물었다. 보름 전 새우젓 독에 머리를 다친 사공을 치료한 후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수많은 환자가 움막을 찾아왔었다. 그러나 송윤호는 의원이 아니라는 말로 그들을 모두 돌려보낼 뿐이었다. 그런데도 아침부터 또 의원을 찾으니 거칠은 난감했다. 그러나 거절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긴 의원이 아니요. 의원을 가려면 조개우물(蛤井) 옆의 허의원을 찾아가시오."
거절의 뜻으로 조개우물로 가기를 권하자 노파는 서글픔과 원망이 섞인 눈으로 거칠이를 노려보았다.
"조개우물 옆에 허의원 있는 걸 누가 모르오? 거긴 숨이 넘어가는 병자도 맞돈 없으면 받아주질 않는데 땡전 한 닢 없는 우리 같은 사람이야 가나마나 아니겠소?"
빨리 밥을 지어먹고 새우젓독을 나르러 가야 하는 거칠이로서는 노파를 돌려보내는 것 이상의 방법이 없었다.
"어쨌든 여기서는 의원 보는 이가 없으니 돌아가시오."
그러자 갑자기 노파는 아이를 안은 채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넋두리 섞인 울음을 토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원통해라. 흉년에, 역병에, 아들딸 다 죽이고, 하나 남은 손자마저 죽이고 마는구나. 아이고 절통해라, 돈이 원수로다. 눈뜨고 우리 손자 죽이네."
"아니, 이게 무슨 행패요?"
거칠이가 어쩔 줄 몰라 움막과 노파를 번갈아 볼 때였다. 움막의 거적이 들쳐지며 송윤호가 나왔다. 송윤호는 노파가 안고 있는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두 살이 될까 말까 한 아이였다. 송윤호는 얼핏 조카 원일이를 떠올렸다.
"이 아이 어디가 아픈 게요?"
송윤호가 묻는 말에 약사여래를 만난 듯 화들짝 놀란 노파가 말보다 빠르게 아이의 아랫도리를 감싼 베조각을 해쳤다. 아이의 엉덩이 한 쪽이 박덩이 같이 부어 있었다. 이미 곪을 대로 곪은 종기는 곧 터질 듯 고름이 가득 찼다. 아이는 할미의 손에 축 늘어져 있었다. 이렇게 곪을 동안 아이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지 알 만했다.
"종기로군, 이렇듯 농익을 동안 그냥두었으니 아이가 얼마나 힘들어했겠소? 며칠간 열이 심했을 게요."
"아이고 몇 밤을 온몸이 펄펄 끓었습지요."
"찬물로 몸을 식혀 주었소?"
"그럼입쇼. 사흘 동안 눈 한번 붙이지 못하고 물수건을 갈아댔사옵니다."
"잘했소. 곪은 것을 터트려 고름을 빼고 볼 일이니 일단 아이를 움막으로 옮기겠소."
송윤호는 아이를 옮긴 후 움막에 빛이 들어오도록 거적을 활짝 젖혔다. 그리고는 바가지에 물을 퍼서 손을 씻고 거칠이를 시켜 그 바가지를 받쳐 들게 했다.
"화농한 고름은 짜내면 될 것이나 그 후가 더 문제다. 하지만 일단은 고름을 제거하는 일이 먼저니 어쩔 수 없구나."
"고름을 짠 후에는 어찌해야 하는지요?"
"환부에 바를 약이 있어야 하느니. 고름만 짜 낸다고 다 낫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한데, 내겐 아무런 약재도 없지 않으냐."
"그럼, 고름을 짜낸다 해도 소용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고름을 그냥 둘 수는 없는 일 아니냐? 지체할 수 없으니 시작하자구나."
아이를 안아 무릎에 엎은 송윤호가 피침(鈹鍼)을 들어 환부를 터트렸다. 거칠이가 들고 있는 바가지로 고름이 줄줄 쏟아져 나오니 문 밖의 노파의 입에서 아구구 하는 소리까지 절로 쏟아졌다. 고름이 거의 다 나왔을 무렵, 마저 짜낼 요량으로 송윤호가 환부에 힘을 주자 아픔을 느낀 아이가 소스라치게 울기 시작했다. 아이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에 가까운 움막에서 비죽비죽 머리통이 솟아 이쪽을 바라보았다.
"허, 우는소리를 들어보니 아직은 견딜만한 힘이 남았고나. 이 보우 할멈, 약보다 밥이 먼저이니 이따 집에 가면 아이에게 죽이라도 멕이구려."
"예, 의원 나리, 쉰네는 굶어도 이놈만은 어떻게든 굶기지 않사옵니다."
"그리고 환부의 천을 갈 때는 반드시 삶아서 말린 헝겊을 써야하오. 이 병은 깨끗하지 않으면 곪았던 곳이 다시 곪소."
거칠이가 바가지를 비우러 간 동안 송윤호는 밖으로 나가 움막 주위에 흔한 명아주 잎을 몇 개 뜯었다. 그리곤, 그걸 비벼 아이의 환부에 댄 후 자신의 머리수건을 풀어 엉덩이를 감싸듯 묶었다.
"아까 얘기한 대로 집에 가면 이 수건도 반드시 삶아서 말린 헝겊으로 바꾸시요."
"예, 그럽지요."
"내일 낮에 아일 데리고 다시 한번 들리시오. 환부에 붙일 약을 마련할 터이니."
송윤호가 건네는 아이를 받아 든 노파가 수없이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물러나자 거칠이가 바가지를 씻어 왔다.
"밥이 되었으면 너 먼저 먹어라."
"나으리 먼저 드시지요?"
"아니다. 너 먼저 먹고 가 보거라. 나는 이따가 산엘 좀 다녀와야겠다."
"예? 산엘 가시다니요? 무슨 일 때문이옵니까? 소인이 대신 가면 안 되는 일이옵니까?"
"아니다, 가까운 둔지산에 쓸만한 약초가 있나 가보려는 거다."
"나으리, 나으리께서 몸소 약초를 캐신다니 안 될 말씀이옵니다. 쉔네에게 모아둔 돈이 한 냥 반이 있으니 처방전을 써 주시면 쉰네가 구리개로 달려가.…"
"됐다. 그럴 일이 아니니라. 허고 이왕 양반을 버린 바엔 못 할 일이 무엇이냐?"
"이곳 움막 사람들 중에도 종기 난 사람이 흔하옵니다."
"가난한 자일수록 종기가 흔한 것은 집 안팎이 모두 더러운 데다 몸을 자주 씻지 않아서인데 아까 그 아이는 삿자리 가시에 찔린 것을 그냥 두었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고름을 짰으면 더 깨끗하게 해야 하는데 노파가 손자만 위할 뿐 그것까지야 알겠느냐? 그대로 두면 보나 마나 또 탈이 나고야 말 것이다. 다시 탈이나면 낫는다는 장담하기 어려우니라. 그러니 기왕 봐 줄 바엔 정성을 다해 낫도록 도와야 할 것이니라."
"그러시다 또 병자들이 몰릴까 겁이 나옵니다."
"어쩌겠느냐? 어디 있는지 모를 원일이가 혹시라도 저런 지경을 당하고 있다 생각하니 차마 거절을 못하겠더구나. 허고, 내 작은 재주나마 돈 없어 의원을 찾지 못하는 저런 아이에게 쓰일 수 있다면 그도 좋은 일이겠지."
"그러시다면 다녀오소서. 나루터는 쉔네가 일하는 틈틈이 눈여겨볼 것이옵니다."
"도선(渡船)이 들고 나는 것을 눈여겨 보되 사당패가 아니더라도 일행이 많거나 아까 그만한 아이가 보이면 지체 말고 달려가 보거라."
"예, 그러합지요."
거칠이 나루로 나간 후 송윤호는 행전을 묶고 신들메를 고쳐서 거칠이가 틈틈이 엮어놓은 칡 망태를 들고 나섰다. 삼개에서 바라보는 둔지산(屯芝山)은 오 리가 조금 넘는 거리에 있었고 가는 길 또한 험하지 않으니 오르기는 좋았다. 산은 이미 단풍이 물들어 갖가지 색의 잎들이 눈을 어지럽혔다. 송윤호는 잡목과 넝쿨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걷는 사이에도 풀들을 유심히 살펴, 필요한 약초가 보이면 정성을 기울여 뿌리나 열매를 캐고 따 넣었다. 한 곳에 이르자 유난히 새빨갛게 물든 화살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가을을 가장 빨리 알리는 나무였다. 송윤호는 화살나무 가지를 작은 손칼로 잘라 망태를 채웠다. 껍질을 말려 가루로 내면 상처가 난 곳에 효험이 있고 줄기를 삶아 마시면 혈행에 좋은 약초였다. 게다가 엉컹퀴 뿌리와 창출 그 밖에 목향, 황단, 석검 등을 알맞게 섞어 종기가 난 환부에 붙이면 특효가 있는 것이다. 엉겅퀴는 집 주위 어디서나 흔하니 산을 내려가서 캐면 될 터였다. 망태가 가득 차자 송윤호는 산꼭대기로 향했다. 문득 자신이 밟고 있는 이 산이 삼백여 년 전 목은(牧隱)이 올랐었다는 글을 본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목은 이색(李穡)은 이 산을 오른 후 시를 한편 남겼는데 ‘용산이 한강수를 베개 삼았는데, 푸른 솔은 산에 가득하고 마을에는 뽕나무 무성하네’라고 했었다. 송윤호는 그 글귀를 읍조리며 천천히 발길을 산 정상으로 옮겼다. 산을 다 오른 송윤호는 어깨에 메었던 망태를 바닥에 내린 후 팔을 벌려 크게 숨을 들이켰다. 역시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한강변은 수려했다. 비록 목은이 말했던 푸른 솔은 그리 많지 않았고 아랫 마을에 뽕나무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지만 발아래 한강수는 은빛 비단을 펼쳐놓은 듯 수려하고 강 건너 풍광과 어우러지니 장엄하기까지 했다. 거기에 더해 오만가지 색의 단풍이 온 산을 물들이니 송윤호는 불현듯 십여 년 전에 본 풍악산의 단풍까지 떠올랐다. 그리고 그 무렵 과장에서 써 올린 금강사계부의 추(秋) 편이 떠올라 감개가 무량했다. 게다가 둔지산은 멀리 목멱산과 구불구불 맥이 이어져 흡사 엎드린 용이 한강수를 마시는 형상이어서 자신이 용을 탄 격이었다. 송윤호는 눈앞에 펼쳐진 한강과 목멱산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있자니 차차 가슴이 두근거리고 절로 흥이 솟기 시작했다.
'발아래 한강수는 도도히 흐르고 멀리서 목멱산이 손짓으로 나를 부르니 이 풍광을 어이 가슴에만 담고 있으리.'
송윤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절로 시흥이 솟아서 시상이 떠오르자 곧바로 첫 구절의 첫 자(字)를 무슨 자로 시작할까를 궁리했다. 송윤호는 다시 한번 산과 강을 바라보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발아래 놓인 망태에 눈길이 미쳤다. 그 순간 송윤호는 발등에 뜨거운 물을 쏟은 듯 깜짝 놀랐다. 이어서 가슴에 무엇이 쿵 내려앉았다. 지금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이제껏 원일이의 그림자도 찾지 못한 이 마당에 옛 버릇인 양반의 글 장난이 다시 나오다니? 눈가에 뿌연 안개가 서린 송윤호는 심한 자괴감에 몸을 떨었다.
'이게 무슨 꼴인가? 온 가족을 그 꼴로 만든 내가.…'
'정녕 한심하구나. 그새 잊었는가?'
"이런 정신으로 무엇을 이룬단 말인가?"
"어머님, 형수님........ 보일아......... 아, 형님....."
송윤호는 발밑의 모난 돌덩이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바위 위에 자신의 왼손 새끼손가락을 올린 다음 서슴없이 내리쳤다.
"악."
짓눌린 비명이 잇 사이에 물렸다. 끊어진 손가락 마디가 도마뱀 꼬리처럼 팔짝였다. 극심한 통증이 팔을 따라 찌르르 머리끝에 몰리자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송윤호는 하늘을 우르렀다. 손끝에서 피가 뚝뚝 흘렀으나 개의치 않았다. 전신을 난자 당한 어머니와 형수가 눈앞에 어른 거렸다.
"천지 신명이 있다면 들으시라. 나 송윤호는 내게 한 맹세조차 잊어버렸다. 진정 맹세하노니, 원일이를 찾기 전까지는 절대로 안일에 젖지 않을 것이고 쾌락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내 생의 목적은 오로지 형님의 후사를 찾는데 있고 내게 남은 약간의 재주는 오로지 힘없는 이들을 위해 쓸 뿐이다. 내게서 다시는 옛 버릇이 나오지 않게 도와주시되 만약 이런 나의 의지가 흔들린다면 천지신명은 나에게 죽음의 벌을 내리시라."
송윤호는 입술을 깨물고 저고리 고름을 떼어 손을 동였다. 그리고는 묵묵히 산을 내려왔다. 움막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통을 무릅쓰고 엉겅퀴도 두어 뿌리 캐고 야생 토란 잎도 두어 닢 뜯었다. 움막에 돌아와보니 상처에서 배어 나온 피로 싸맨 곳이 온통 피범벅이었다. 지혈이 급했다. 송윤호는 침통을 열어 침과 함께 넣어 둔 바늘을 찾아 들었다. 이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두어 올 뽑아 바늘에 꿰었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고 상처를 꿰매기 시작했다. 상처를 꿰매는 이 방법은 누구보다 의약에 박식했던 선친으로부터 배운 방법이었다. 송윤호는 이런 치료 방법을 쓰는 의원은 이제껏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러나 선친의 경험으로는 심한 상처를 가장 빨리 그리고 탈 없이 낫게 하는 방법이라 했던 것이다. 꿰맨 자리는 화살나무껍질을 칼로 긁어 상처에 올리고 찢은 행전으로 묶었다. 송윤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고 참았던 고통이 비로소 한숨이 되어 흘렀다. 일이 끝났으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아침에 왔던 노파 손자의 상처를 돌보려면 약이 필요했던 것이다. 송윤호는 화살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엉겅퀴 뿌리를 잘게 쪼게어 그늘에 넣어 놓았다. 그리고는 강가로 나가 피 묻은 옷고름을 빨고 매끈한 돌을 찾아 조금 상류로 향했다. 돌은 약재를 가루로 빻을 때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온통 백사장이어서 찾고자 하는 돌이 없었다. 강에는 사시사철 드나드는 소금배와 함께 비린내 섞인 접쩌름한 냄새를 물씬 풍기는 새우젓 배가 서너 척 매여 있었다. 그리고 뭍과 배를 발판으로 연결해 소금과 새우젓독을 나르는 일꾼들이 줄줄이 열을 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아침부터 한낮인 지금까지 계속 배가 드나들어서 일꾼들 역시 제대로 쉴 참이 없는 듯했다. 송윤호는 인부들 사이에 거칠이가 있나 둘러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아마 새우젓 독을 객주의 고방으로 져나르는 일을 하나 보았다. 상류를 향해 조금 더 오르자 나루터가 나왔다. 나루의 넓은 백사장에는 양화도로 가는 거룻배를 타려는 사람들과 아랫강으로 내려가는 빈 세곡선을 얻어 타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송윤호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다니며 아이를 업거나 걸린 여인이 있을까 바삐 눈을 굴렸다. 그러나 젊은 사람은 죽장수 아낙네 말고는 여인이라고는 배를 기다리는 늙은이 둘 뿐이고 아이도 원일이 만한 애는 보이지 않았다.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로 장삿꾼들이 갖가지 물건을 갖고 다니며 팔고 있었다. 한켠에선 떡장수와 죽장수가 줄지어 앉았는데 수수죽을 쑤어다 파는 사람도 있었고 나물죽 동이를 앞에 놓고 오가는 사람을 애타게 바라보는 노인도 있었다. 흉년 탓인지 역시 죽장사가 많았다. 죽장수 중에도 나물을 듬뿍 넣고 된장을 푼 피죽 장사가 가장 많은 것 같았다. 떡장수는 기장에 차조를 약간 섞은 기장떡 장수가 여럿이나 값이 싸서 언제나 흔하던 송기떡은 웬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봄에서 여름까지는 소나무 껍질이 잘 벗겨지는 계절이라 낫 한 자루만 가지면 송기떡을 만들 수 있었다. 허나 가을이 되자 송기를 벗기기가 힘이 드니 그럴 힘이 있는 사람은 차라리 새우젓 독을 나르는 품팔이가 나았던 것이다. 대신 값싼 송기떡 장수의 자리는 밀기울이나 보리 등겨를 뭉쳐 찐 개떡 장수가 차지했다. 배가 들어올 동안 요기를 하려는 듯 많은 사람들이 피죽 그릇에 코를 박고 있었다. 이런 피죽 장수도 지난 십여 년 간에 생긴 것으로 송윤호가 어렸을 적에는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지난 경신 양 년의 혹독한 기근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살아남은 사람들의 호구지책으로 마련한 꾀가 피죽 장사였다. 피 죽은 값이 헐하고도 양이 많아서 지닌 돈이 적은 사람들을 꾈 수 있었던 것이다. 피죽장수 뿐 아니라 사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팔도의 모든 장시와 나루에 장삿꾼이 늘고 사람들의 이동이 이렇듯 많아진 것 자체가 불과 십여 년 전부터 였지 그전까지는 이렇지 않았다. 물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백성들의 이동이 있긴 했으나 극히 일부 지방뿐이었고 팔도의 백성들이 본격적으로 뒤섞인 것은 대기근으로 인해 수많은 유랑민들이 먹을 것을 찾아 타향으로 떠돈 때문이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가도 경작할 땅이 없어 도성 부근을 떠돌던 유랑민들이 살아남기 위해 시작한 것이 바로 자잘한 각종 장사였다. 도성 안에서는 금난전권이 있어 장사 자체가 불가하니 사대문 밖으로 나와야 했고 사람 많은 곳을 찾다 보니 자연 나루와 장시 밖에 없었다. 밑천이 짧은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장사는 피를 훓거나 한 됫박의 서숙에다 지천인 나물을 뜯어 넣어 열 배 스무 배로 불린 죽을 파는 것이 다였다. 또 그 죽을 사먹는 사람 역시 가난하기 그지없으니 피죽 밖에 먹을 게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죽 값으로 받을 수 있는 엽전이 자리 잡지 않았다면 죽장사 그 자체도 사실 불가능했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피죽을 사 먹는 자가 죽 값으로 쌀을 줄 리가 없으니 무명 자투리나 저포를 받아야 하는데 죽을 동이 채 준들 무명으로 두어 자 밖에 더 받겠는가? 그럼 한 사발 값으론 헝겊 한오리도 되지 않으니 그걸 받아 어디다 쓴단 말인가? 그러니 무슨 물건을 팔겠으며 거래가 어떻게 이루어지겠는가? 애초에 거래 자체가 안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한마디로 최소 액수의 엽전이 없다면 아예 소소한 물건은 거래가 되질 않는 것이다. 다행히 수 년 전부터 엽전이 조선팔도에 완전히 뿌리를 내려서 그 편리함에 눈 뜬 백성들이 그것을 좇아 울고 웃기 시작했다. 결국 아조(我朝)가 들어선 2백 80여 년 이래 처음으로 무명이나 쓸모없는 저포(苧布)를 물리치고 엽전이 위력을 발휘한 때가 현금(現今: 숙종 초)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땅에 상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엽전이 안정적으로 쓰이기 시작하고부터 인 것이다. 또한 그것이 불과 몇 년 전부터라는 말이다. 단군 이래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백성들의 살림살이에 혁명적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대기근이 끝난 몇 년 사이에 백성들의 재산 가치에 대한 생각도 달라져서 감추기 힘들고 썩기 쉽고 뺏기기 쉬운 곡식보다 감추기 쉽고 썩지 않는 엽전이 낫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흉년이래도 돈만 있으면 식량을 살 수 있고 식량이 있으면 식구들을 굶겨 죽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사람들은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돈과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돈과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이던 장시에 들고 나와 팔았다. 소쿠리던 짚신이던 팔 수만 있다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만들고, 잡고, 기르고, 캐기 시작했다. 갑자기 장삿길로 나서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났다. 돈이란 좋은 것이었다. 삼개나루 역시 단 몇 년 사이에 오늘과 같이 번창한 것이다. 사오 년 전까지만 해도 기껏 세곡이나 소금, 새우젓, 아니면 신탄(薪炭)을 실은 배가 닿아 그것을 싣고 내리는 인부들이 전부였으나 근래의 삼개는 그때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우선 배에 실려오는 크고 작은 물종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따라서 싣고 내리는 인부들과 그것을 사고 팔려는 사람들의 숫자 또한 늘 수밖에 없었다. 각종 곡식과 어염은 기본이고 죽세품과 연초, 장죽, 목기, 약재, 오지그릇 등 그밖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물건들이 삼개를 통해 도성으로 들어가거나 팔도로 흩어졌다. 게다가 한양성 안에 인구가 늘자 양식으로 쓸 곡식의 수요도 늘어서 삼남의 곡식을 실어오는 조운선뿐 아니라 육로로 들어오는 곡식도 많았다. 그래서 시흥을 거쳐오는 삼남의 곡식이 양화도를 통해 삼개로 건너오는 날이면 물건과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어 흡사 빗물 스민 개미굴 같았다.
"나으리, 산엘 가신다더니 여긴 웬일이신지요."
일을 하면서도 오가는 사람들을 눈여겨보고 있던 거칠이가 저쪽에서 송윤호를 발견하고 쭈루륵 달려와 앞에 섰다.
"산엔 이미 갔다 왔느니라."
"그럼, 어딜 또 가시 옵니까? 아니? 나으리 저, 손..... 다치셨사옵니까?"
"아니다, 괜찮다. 장도(粧刀)에 조금 베었니라."
"나으리, 시장하시지 않사옵니까?"
"조반을 든든히 먹었는데 배가 고플 리가 있느냐? 가서 일 보거라, 내가 둘러보니 이 사람들 중엔 우리가 찾는 사람은 없는 것 같구나."
"쉔내도 계속 보고 있사옵니다. 오늘 일은 거의 끝났사오나, 이따 유시(酉時17-19시)에 마지막 배가 떠나는 걸 보고 들어가려 하옵니다."
"그러거라, 나는 저 윗녘, 여울에 약 절구로 쓸 강돌을 줒으러 가는 길이다."
"그럼 나으리, 다녀오서소."
송윤호는 사람들 사이로 빠져 강 윗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강변을 따라 한참을 올라도 모래밭뿐이어서 마춤한 돌이 눈에 띄이질 않았다. 기껏 있다는 돌은 너무 크거나 자갈뿐이라 좀 더 올라가 보기로 했다. 그렇게 발아래에만 눈길을 주며 걷다가 차츰 매끈한 강돌이 많아지는 곳에 이르러 고개를 들어보니 아침에 왔던 둔지산 아래였다. 한데, 산 위에서는 보이지 않던 아랫 기슭에 까치집보다 엉성한 움막이 서너 채 세워져 있었다. 아마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유랑민의 움막일 것이었다. 송윤호는 다시 관심사인 마춤한 돌을 찾기에 정신이 팔렸다. 그러나 그 많은 돌 중에 쓸만한 것을 찾기가 어려웠다. 옳거니 싶어 다가가 들어보면 엉뚱한 모양이기 쉬웠다. 그러다 마침내 마음에 꼭 맞는 절구의 공이에 해당하는 윗돌을 주웠다. 이제는 오목한 아랫돌을 찾아야 했다. 송윤호의 눈길이 온통 바닥에 쏠려 있을 때였다.
"거기서 무얼 찾소?"
깜짝 놀란 송윤호가 뒤돌아보니 한눈에도 상거지인 애도 어른도 아닌 놈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키나 목소리로 가늠컨대 열서넛 쯤 되는 놈이었다.
"녀석, 인기척이라도 할 것이지. 놀랐구나."
"그래서 인기척을 내느라 내가 묻지 않았소?"
"허허, 그게 인기척이라? 그래, 무엇이 궁금했느냐?"
"못 들었소? 거기서 무얼 찾느라 두리번거리고 섰느냐 말이요."
"아, 그게 그리 궁금했느냐? 돌을 찾는다."
"내 눈엔 온통 돌 뿐인 돌밭에서 돌을 찾는다니 혹시 실성한 사람이 아니요?"
송윤호는 녀석을 다시 바라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아래 검댕이 묻어 새카만 얼굴과, 넝마나 다름없는 삼베옷 밖으로 삐쳐 나온 손발은 까마귀와 사돈을 맺을 판이었다. 다만 호기심과 장난기 어린 두 눈만은 빛을 발해서 제법 총명해 보이기까지 했다.
"허허, 돌이라고 다 같은 돌이겠느냐? 나는 절구로 쓸만한 돌을 찾고 있느니라."
"절굿 돌을 무엇하려고 찾소?"
"녀석, 정말 알고 싶은 것도 많구나. 절구에 약초를 빻으려고 하느니라."
"엥? 그럼 당신이 의원이란 말이요?"
"꼭 의원만 약을 쓰느냐? 아픈 사람에 맞는 약이 무엇인지 알면 누구나 쓰는 것이지."
"그러니까 그걸 알면 의원 아니요?"
"허, 듣고 보니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맞을지가 다 무어요. 내 말이 꼭 들어맞는 거지."
녀석의 말에 송윤호는 빙긋이 웃으며 다시 눈길을 돌 찾기에 돌렸다. 한참 동안 몇 번을 주웠다 버리기를 반복하는데 다시 아이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모양이면 어떻소? 내가 보기엔 오묵해서 어쩌면 절구같이 생겼구만...."
송윤호가 아이의 손에 들린 돌을 보니 제법 그럴듯한지라 일단 건네 받았다. 그리곤 이리저리 살펴보니 크기나 모양이 제대로 마춤하였다. 게다가 먼저 주운 윗돌과 짝이 꼭 맞기까지 하니 신통할 지경인 것이다.
"거참, 어쩌면 이리 알맞은 돌을 찾았느냐? 허허, 네가 공을 세웠구나. 고맙다."
"고맙단 말을 물리는 대신 다른 부탁을 들어주면 안 되겠소?"
"엉? 내가 지금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그건 곤란하구나."
"돈을 달란 얘기가 아니니 지레짐작은 마우. 의원이라니 우리 할아비가 무슨 병인지나 한번 봐 주셨으면 해서 그러오."
"뭐라? 너의 할아비가 어디가 아프다고 하시더냐?"
"그걸 알면 내가 의원을 하겠소. 밤낮 기침만 하니 난들 알 수가 있소?"
"어디 계시느냐? 내 한번 보마. 허나 낫는다는 기대는 말거라."
"나도 그런 기대는 하지 않소. 답답해서 그러지. 언젠가 하도 답답해서 조개우물 동리의 허의원에게 갔더니 무슨 병인지는 말하지 않고 무조건 약을 먹어야 나으니 약 값으로 우선 두 냥을 갖고 오랍디다. 하지만 우리께 그만한 돈이 어디 있소?"
녀석이 움막 쪽으로 먼저 앞장을 서니 송윤호도 그 뒤를 따랐다. 산 아래에 붙여지은 움막은 모두 세 채였다. 녀석이 그중 한 움막의 거적을 들치자 안에서 가래 섞인 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 기침 소리는 마치 목구멍에 끈끈한 엿물이 엉겨 혀를 끌어당기듯 괴로운 소리였다. 녀석이 거적을 들치고 먼저 들어가더니 송윤호를 불렀다.
"들어 오시오. 이거 움막이 어두운데 괜찮겠소?"
움막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기도 전에 송윤호의 코 끝으로 지린내와 퀴퀴한 냄새가 물씬 스며들었다. 게다가 자신이 입구를 막고 서 있으니 움막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송윤호는 움막 안으로 들어가 노인이 누운 옆에 가 앉았다.
"할아비, 의원이 왔소. 조개우물 허 의원 보다 열배 더 용한 의원이 왔단 말이요."
놈이 제 할애비를 부축해 일으키며 너스레를 떨었다.
"네가.. 네가 무슨 도... 도오온 커 컥."
"무슨 돈이 있어 의원을 불렀느냐 그 말 아니요? 할아비는 걱정을 마시요오. 이 의원은 병을 다 낫우면 돈을 받는답니다. 그러니 돈 받을 욕심에 할애비 병을 꼭 낫우고야 말 것 아니요?"
"그 그런 의, 헉, 허..."
"그런 의원이 어디 있느냐구요? 아, 여기 있지 않소. 의원님, 어서 진맥부터 좀 짚어 보시요. 할아비 팔 좀 내미시오."
놈이 제 혼자 북 치고 장고 치니 송윤호는 어이가 없어 가만히 있다가 진맥은 안 짚고 노인의 안색을 먼저 살폈다. 그 사이 어둠에 눈이 익고 밖에서 빛이 들어와 사물이 한결 잘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병색이 짙었다. 송윤호는 노인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었다.
"노인장의 올해 연치가 어찌 되오?"
"금년이 갑(甲)이 올 시다. 커억.…"
"기침이 처음 시작된 것이 얼마나 되오?"
"오래전부터 였소. 십 년쯤 되었을 터이니...."
"해소(咳嗽)요. 맥을 짚어보니 다른 곳은 괜찮은 듯하오. 다만 잘 먹지를 못해 기력이 쇠했소. 먹고 힘을 내서 밖에 나가 맑은 기운을 가슴으로 빨아들이는 것이 좋소이다."
"그럼, 병이 나을까요?"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득 담긴 노인의 눈이 송윤호의 입을 바라보았다. 거짓말이라도 낫는다는 말이 의원의 입에서 나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낫지 않소."
"뭐? 뭐라 셨소?"
기대 밖의 말에 노인이 놀라 물었다.
"맑은 공기만으로는 낫지 않는단 말이요. 하나, 우선 움막을 깨끗이 하고 이 안에 먼지가 나지 않아야 기침이 멎소이다. 이 병은 먼지나 그을음이 적이요. 먼지 속에서는 아무리 용한 약을 먹어도 낫지를 않소. 깨끗한 공기가 우선이오. 그리고 돈 드는 약 말고도 해소에 좋은 약이 있으니 그걸 부지런히 드시면 효험을 볼 것이요."
"돈 안 드는 약초가 있단 말이요? 그게 무어요?"
옆에서 지켜만 보던 아이놈이 송윤호의 말에 반색을 하며 나섰다.
"구하자고 하면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나 비싼 약 못지않게 효험이 있는 것이니라."
"글쎄 그러니까 그게 무어란 말이요."
"은행과 더덕이니라. 은행잎을 삶아서 먹으면 혈행이 좋아지며 해소에 도움이 되느니. 또 은행알은 쪄서 껍질을 벗긴 후 말려 가루로 만들어 조석으로 한술씩 먹으면 특히 효과가 있느니라. 도라지나 더덕은 옛부터 천식에 써 온 것이니 더 말할 것도 없지."
"그 두 가지는 지금이라도 구할 수 있소."
"그래, 마침 은행이 익어 떨어질 계절이고 더덕 또한 잎이 떨어져 약효가 좋을 때이니 네가 구할 수가 있겠구나. 노인장, 효손을 잘 두셨소이다. 허허, 나는 이만 가오."
"고맙기 그지없소. 세상 누구 하나 들여다보지 않는 곳을.... 허헉.…"
노인이 아까와는 달리 약간의 희망 어린 표정으로 약간 앞으로 고개를 숙였다. 한데, 송윤호가 움막 밖으로 나오자 옆 움막에서 웬 사내의 어눌한 목소리가 들렸다.
"의원 나으리, 그쪽만 봐주지 말고 소인도 좀 봐 주오."
"음? 이 움막에도 병자가 있느냐?"
갑작스러운 말소리에 놀란 송윤호가 아이놈을 돌아보며 물었다.
"병잔지 아닌지는 모르겠소."
"모르다니? 바로 옆 움막 사람을 모른단 말이냐?"
"모르오. 어제 아침 땔감 배에 실려온 걸 깍정이 애들이 줒어다 놨소."
"깍정이라니? 도성 안 계천(溪川)이나 오간수 다리 밑에 있는 그런 깍쟁이 말이냐?"
"눈치가 어쩌면 거기서 쫓겨난 놈들 같습디다. 대여섯 놈 되지요. 어쨌든 제놈들 목구멍도 못 채우는 것들이 저 병신까지 줒어다 놓고 공밥을 멕이는 이유는 나도 모르겠소."
"어디가 아프기에 봐 달라겠지. 어디가 아픈지 어디 한번 물어나 보자."
송윤호가 헛기침을 하며 거적을 들치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병자가 한 쪽 다리를 끌며 문 앞까지 기어 나왔다. 송윤호가 보매 그 병자라는 사내는 왼쪽 눈이 움푹 들어간 애꾸였고 왼쪽 다리가 이상한 모양으로 뒤틀려 있었다.
"그래, 어디가 어떻게 아프시오?"
송윤호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사내는 자신의 고의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려서 송윤호의 물음을 대신했다. 사내의 허벅지는 커다란 상처가 거의 아물어 딱쟁이가 진 것 말고는 멀쩡했다. 그러나 무릎이 약간 뒤틀리고 꺾어진 것 같았다. 송윤호는 그 무릎을 손과 눈으로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허, 무릎 바로 위가 부러졌었구려. 헌데 부러진 것을 바로 잇질 못 해 뼈가 어그러지게 붙었소. 뼈란 처음에 바로 맞춰 붙여야 하는데, 쯧, 이젠 틀린 일이요."
"그럼 이 다리는 영영 병신이 되오?"
사내의 한 쪽 밖에 없는 눈알이 절망에 젖었다. 그리고 눈알이 없어 움푹 들어간 왼쪽 눈 자리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어라? 눈알도 없는 눈이 우네? 키킥."
송윤호의 등 뒤에서 삐죽 고개를 디밀어 구경하던 아이놈이 웃음을 터트렸다.
"쓰기 나름이요. 약간 절름거리겠지만 걸음은 걸을 수 있을 게요."
"한 쪽 눈알은 없어도 괜찮소이다. 하지만 나는 걸음을 못 걸으면 아니 되오이다."
"좀 더 낫거든 부지런히 걸음 걷는 조련을 하오. 그럼 한결 잘 걸을 게요. 나는 가오."
송윤호는 더 볼 것이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절굿 돌을 다시 집어 들고 움막을 떠났다. 아이놈이 송윤호의 뒤를 따라왔다.
"저 사람이 저렇게 된 것은 다쳤을 당시에 제대로 된 의원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니라. 없는 사람은 탈이 나도 의원에게 보일 수도 없으니 참으로 원통한 일이다."
"힝, 저 사람은 덜 불쌍하오. 쇠뿔에 받혀서 저 꼴이 났답디다. 보나 마나 소를 훔치려다 되려 소에게 당한 것이 아니고 무어겠소?"
"그래도 저렇게 상한 것은 안 된 일이지. 헌데 용하게 의원도 없이 나은 것 같더구나."
"우리 할아비도 약 없이 좀 나았으면 좋겠소."
"약도 약이지만 네 할아비는 음식이 먼저니라. 참 무얼 해 먹고 사느냐?"
"동냥으로 먹고살지요. 이따금 훔치기도 하우."
"뭐라? 도적질을 한단 말이냐?"
"훔쳐서라도 먹고살아야지 그럼 어쩌겠소?"
"음, 그건 그렇고 네 이름이 무어냐?"
"덕구요. 큰 덕자에 아홉 구자라 합디다."
"네가 글을 아느냐?"
"알리가 있소? 할아비가 그렇다니까 그런 줄 아는 거지."
"네 할아비는 글을 안다는 소리구나."
"아는 게 다 뭐요? 십 년 전까진 서당 훈도 셨소."
"음? 그래? 헌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
"나도 잘은 모르오. 하나, 삼 년 전에 아비가 죽을 때 장철기가 원수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으니 아마 그 사람 때문인가 싶은데 할아비한테 물어도 가르쳐주지 않습디다."
"음, 이만 들어가 보거라. 내 어쩌다 들리마."
"고맙소. 할아비가 의원님 덕택에 소원 푼 셈이요."
송윤호가 덕구와 헤어진 얼마 후, 나루 가까이 와보니 양화도로 건너는 마지막 거룻배가 떠난 뒤여서 백사장이 썰렁했다. 장삿꾼들 중에 짐 가벼운 장삿꾼들은 이미 떠났고 미쳐 죽을 다 팔지 못한 노인 몇이 죽동이에 매달려 있었다. 바깥마당에는 아까 보지 못한 말들이 여러 필 매여 있었다. 마침 거칠이가 객주의 삽짝을 나서는 것을 보았다. 헌데 거칠이 혼자가 아니었다. 대여섯 명의 장정들과 함께였다. 송윤호가 그들을 살펴보니 패랭이에 행전치고 허리 질끈 묶은 보부상들이었다. 송상이 틀림없었다.
"나으리, 뜻밖에 여기서 송상을 만났사옵니다. 조금 전 양화도를 건너 왔습지요."
송윤호가 그들을 바라보매 단번에 눈에 익은 사람 셋을 보았다. 지난겨울, 형을 찾아 원주로 갔을 때 길을 안내한 임술이와 무동이였다. 그리고 송파에서 행수 천수돌이 불러 인사시킨 피천득이었다. 피천득은 그때 나 지금이나 듬직하고 의젓해서 정이가는 인물이라 얼굴을 보는 순간 반가웠다.
"허허, 예서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다니. 그래 그동안 무탈했었나?"
"아이고 좌랑 나으리, 소인 문안드리옵니다."
"소인들도 문안 올리옵니다."
피천득이 모래 바닥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하자 임술이와 무동이는 물론 나머지도 황급히 백사장에 코를 박고 엎드렸다.
"아, 이러지들 말게. 이러다 다른 사람들이 보네. 어서 일어들 나게."
"저 거칠이 동무에게 일말의 사연은 들었사옵니다. 소인들이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던 마다하지 않겠사옵니다."
"고마운 말일세. 하나, 내 집안의 일이니 괘념치 말게. 헌데 여긴 어쩐 일인가?"
송윤호는 피천득의 진정 어린 말이 고맙긴 하나 자신의 일로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아서 얼른 말꼬리를 틀었다.
"예, 소인들은 송파에 있던 북어를 싣고 평택과 안성 장시에 넘기고 오는 길입지요."
"허, 그러자면 길에서 여러 날을 보냈겠군, 그럼 송도 집엔 언제 가는가?"
"북어 값으로 받은 무명과 솜을 도성 안 시전에 넘기면 다음엔 나으리의 본가에 들러 나락을 실어 나를까 합니다. 눈이 날리기 전에 한 행비라도 더 해얍지요. 그러자면 송도엔 섣달에나 가게 되겠습지요."
"아, 그렇겠군, 가만, 김화로 간다니 말인데, 얘, 거칠아, 너도 이참에 동무들 따라 집으로 가거라. 가서 네 아비를 도와주어라."
"예? 그럼 나으리 수발은 어쩝니까요? 쉰네는 안 가도 되옵니다."
"내 걱정은 말거라. 매년 가던 네가 가지 않으면 모두들 걱정들을 할 것이고 또 네가 가면 그곳 일도 한결 수월할 것 아니냐. 지금 당장 가거라."
주인의 말을 듣고서도 걱정스런 표정으로 거칠이는 말이 없는데 옆에 있던 피천득이 송윤호의 말을 받았다.
"그러게나. 이제 곧 추위가 닥칠 것 아닌가? 본가의 일이 끝난 후에 나으리의 의복을 갖다 드리면 두 번 걸음이 한 번으로 줄 테고 말일세."
피천득의 말에 거칠이는 그렇구나 하는 표정이나 송윤호의 얼굴은 오히려 굳었다.
"일이 끝나면 빈손으로 곧장 오면 그뿐, 아무것도 가져올 필요가 없다. 알았느냐?"
"........예에.…"
주인의 눈치를 살핀 거칠이는 대답을 않을 수 없었다. 송윤호가 피천득에게 눈길을 돌렸다.
"피행수, 지금 떠나려나?"
"예, 나으리, 날이 저물어도 오늘 내로 다락원까지 가야합니다."
"뭐라? 얼마 있지 않아 해가 질 터인데 칠십여 리 길을 갈 수 있는가?"
"우리 송상이 걸음 잘 걷는 것은 나으리께서도 아시지 않사옵니까. 허고 저 거칠이 동무는 오히려 소인들보다 더 잘 걷사옵디다."
"헛, 그건 그럴 걸세. 허나 걸음이라면 역시 춘보였지."
춘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린 순간 송윤호는 마음이 언짢았다.
"어서 가게. 자 거칠이 너도."
송윤호의 재촉에 거칠이가 허리를 깊이 숙여 절을 하자 송상들도 따라 허리를 꺾었다. 그리고는 말머리를 되돌려 도성 쪽을 향해 떠나기 시작했다. 한동안 잘 가던 행렬 중에 문득 거칠이가 송윤호를 향해 되돌아오고 있었다.
"나으리 잊을 뻔했사옵니다. 움막 끝자리에 그동안 모은 한 냥 반을 묻어두었사옵니다. 나으리, 때 거르지 마시옵고 꼭 진지를 드시오소서."
빠르게 말을 마친 거칠이 다시 한번 허리를 굽히고 송상의 뒤를 쫓았다. 송상을 따라가는 거칠이의 뒷꼭지를 눈길에서 놓치지 않던 송윤호가 이윽고 돌아서 움막으로 향했다. 송상 일행이 강 언덕을 넘어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윤호는 입을 굳게 다물고 발아래 모래만 보고 걸었다. 두일이와 수일이, 막내딸 화일이, 그리고 아내 연지가 보고 싶었다. 송윤호는 애써 생각을 털어내려는 듯 머리를 저었다.
'원일이를 찾을 때까지, 그때까지는 서로가 참아야 한다. 언제가 되든.'
움막으로 돌아온 송윤호는 절구를 시험할 겸 화살나무와 엉겅퀴 뿌리를 찧어서 다시 그늘에 널어놓았다. 송윤호는 움막 바닥에 주저앉았다. 샅자리도 아닌 섶을 깐 바닥이 고르지 못해 몹시 배겼으나 개의치 않았다. 아침부터 지금껏 쉬지 않고 움직이다 보니 이제서야 피로가 몰려와 자리에 눕고만 싶었다. 그러나 누우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송윤호는 문기둥에 기대어 강건너 양화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원일이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해야 찾을 수 있을까? 송윤호의 귀에는 강 건너 저 편에서 원일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제까지 대강의 행방도 모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송윤호는 그동안 수십 번도 더 했던 원일이의 행방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일이를 데려간 것은 유랑민일 수밖에 없다. 가마꾼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칼 든 자들 둘은 사당패의 팔매질에 쫓겨 달아났고, 그 사당패는 또 유랑민에게 쫓겨 언년이를 데려갔으니, 가마 속에 있던 원일이가 없어진 것은 유랑민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곡 골짜기에 숨었던 유랑민 쉰 명이 관군에게 박살이 날 때 광릉숲으로 달아난 패 말고는 거의 궤멸을 당했었다. 그러나, 포천 현감의 말로는 시체를 수습할 때, 그 안에 원일이 만한 애는 없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내가 뒤를 따랐던 광릉으로 달아난 유랑패 밖에 없으니 그 숫자는 불과 칠팔 명이 아닌가? 후에 들은 얘기로는 그들도 양평을 거쳐 여주까지 도망쳤다가 결국 여주 관아 군사에게 쫓기다 죽었다 했다. 그때도 그 속에서 아이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제 쉰여 명의 유랑민이 다 죽고 여주서 도망친 한두 명만 남았을 터이니 원일이는 이들 중 누가 데리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여주 관군에게 쫓기는 유랑민이 아이까지 데리고 어디로 갔을까? 만약 내가 그들이라면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이 안전할까? 산골 마을에 숨어들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산골에 간들 당장 먹고 살 것이 없고 금세 소문이 날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몸을 숨기기엔 사람 많은 한양 부근이 제격이 아니겠나? 먹는 것만 해도 그렇다. 시골 어딜 가나 흉년인 마당에 동냥인들 쉽겠는가? 얻어먹어도 사람 많은 곳이 나을 터이니 원일이를 데려간 유랑민도 반드시 도성 부근에 나타날 것이다. 여기 삼개는 남북을 거치는 요처요, 많은 사람과 물자가 모이는 곳이니 분명히 나타나고야 말리라. 벌써 가을이라 금년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원일이가 더 자라기 전에 찾아야 할 텐데. 더 크면 귓볼의 문신 말고는 얼굴도 달라질 것 아닌가? 아, 진정 무슨 방도가 없는 것인가?'
"에헴."
느닷없는 헛기침 소리에 놀란 송윤호가 설핏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문 앞에 웬 갓쟁이가 해를 등지고 서 있었다. 송윤호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뉘시오?"
"음, 그대가 근래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의원인가?"
송윤호가 앞에 버티고 선 사람을 대강 훑어보니 챙이 제법 넓은 갓에 무명 창의를 입은 늙은이였다. 한데, 구슬 끈 없는 갓에 쇠뿔 관자요 입고 있는 창의 역시 낡아빠져 후줄그레한 것이 양반이되 벼슬은 못한 양반 일시 분명했다. 늙은이 뒤에는 하인인 듯한 젊은 놈이 따라와 먼 산을 보고 있었다.
"뉘에게서 듣고 오신지는 모르나 시생은 의원이 아니오이다."
"뭐라? 의원이 아니다? 허고, 시생이라니? 그대가 반가에 속하는가?"
송윤호는 아차 했으나 이미 뱉어진 말이었다. 시생이 입에 익은 탓이었다. 송윤호는 재빨리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아, 그것은 오래전 일이고 지금은 신세가 피곤한 몰락한 가문 올시다. 말씨는 워낙 입에 익은지라 쉽게 고쳐지지 않아 그러니 유학께서 해량하시지요."
말을 마친 송윤호는 다시 한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음, 젊은이가 잘못을 쉽게 인정하는 태도가 싫지가 않구먼. 허고 몰락했다 하나 양반은 양반인 바 그 근본이야 어찌 상것이 되겠는가? 죽은 곰에게도 웅담이 있고 썩어도 준치라는 말도 있지 아니한가."
"소생에게 하시는 말씀이면 영락(零落)이 극에 달한 처지로 과분한 말씀 올시다."
"아닐세, 영락한 양반일지언정 언제 다시 영화가 찾아올지 모르는 법일세. 말이 났으니 말이지 우리 집안 역시 쇠락하긴 마찬가지일세. 벌써 삼대 째 등과를 못했으니까. 허나 나는 내 손자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네. 개중에 한 녀석만 등과를 하면 가문이 다시 한번 떨쳐 일어날 것 아닌가?"
송윤호는 갓쟁이 노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가난이 몸 곳곳에 배어 있었다. 양반 타령에 더 말려들고 싶지 않은 송윤호가 말을 돌리기로 했다.
"헌데, 유학께서 소생을 찾으신 연유가 무엇이 온 지?"
"아, 참. 나는 언덕 넘어 사는 윤초시일세. 우리집 저 종놈 말이 천하의 명의가 이곳에 있다기에 내 한번 와 본 것일세."
"헛, 천하의 명의라니요? 전혀 터무니없는 헛소문 올시다. 내 이제껏 종기난 아이의 고름을 빼 준 것 말고는 누구에게 침 한 대 놓은 적이 없으니 말입니다. 허황된 소문에 예까지 오시느라 기력만 소모하셨으니 대신 소생이 사죄를 드립지요."
"아닐세, 어차피 이곳은 운치를 상완하러 자주 오던 곳이네. 헌데 막상 의원이 산다는 곳을 보니 의외 천만 하게도 내가 눈여겨보던 자리라 더욱 더 들리고 싶었네."
"예? 제가 있는 움막을 눈여겨보시다니요? 무슨 말씀이시온지?"
이건 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려는 것일까? 송윤호는 윤초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삼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움막 자리에는 높은 흙집이 있었네. 내가 어렸을 때도 이미 있던 집이니 아주 오래된 집이었지. 우리 조부의 말씀으로는 그 집이 바로 토정(土亭)이 지은 것이라 시더군. 그 집 자리가 바로 이 자리일세."
"예? 토정 이지함 선생이 여기 사셨단 말씀 오이까?"
"그렇지. 이상한 우연일세. 알다시피 토정 선생이 한때 이곳에 사시며 없는 사람들을 위해 많은 힘을 쏟으신 분 아닌가?"
"그랬었지요. 토정 유고를 읽은 적이 있사온데 참으로 뛰어난 재주를 타고나신 분이더군요. 헐벗은 백성을 위해 만년을 보내신 분이라 소생도 흠모하고 있습니다."
"토정 유고를 봤다니 자네의 가문과 학문을 미루어 짐작하겠네. 내 이제 말이지만 수십 년을 과거에 매달려 젊음을 다 보내고 나니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없더구먼. 해서 십여 년 전부터 의서를 보고 익히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네. 토정 같은 구민(救民)은 못하나마 내 의술로 가난한 백성에게 쓰였으면 해서일세. 한데, 막상 천한 그들에게 다가가기가 수월치가 않더구먼. 그들도 내가 양반임을 알아 찾지도 않고. 이제 자네를 보니 느끼는 바가 있구만. 우선 갓을 버리고 양반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말일세."
"토정께서도 구리 솥을 쓰고 삼베옷을 걸쳐 백성들 속에 섞였었지요. 초시께서 진정 그런 마음이 있으시면 토정의 뒤를 따르면 그뿐일 것이오이다."
"그게, 말은 쉬우나 자네의 입에 익은 양반 말씨처럼 잘 고쳐지지를 않는단 말일세. 이러다 배운 의술마저 한 번 쓰지 못하고 가게 생겼으니 딱한 노릇 아닌가?"
송윤호는 윤초시의 말에 더 할 말이 없었다. 등과를 못하니 차라리 삼개나루에 버글대는 불쌍한 백성을 위해 구제의 손길을 뻗혔었다는 묘갈명(墓碣銘)이라도 남기려는 것일까? 토정 흉내를 내어서라도 후손들에게 양반의 흔적을 남겨야만 하는가? 송윤호는 양반을 쉬이 버리지 못하는 윤초시가 참으로 딱해 보였다.
"소생 역시 의약의 묘리는 터득했으나 의원으로 나선 적은 없는 몸이로소이다. 허나 작금에 삼개나루에 와보니 참으로 딱한 병자가 수두룩하더이다. 해서 그들을 모두 손을 봐주고 싶으나 가진 건 침통 밖에 없으니 어찌 손을 쓸 수 있겠소이까? 초시께서 그들 병자를 돌보시려면 먼저 약제부터 구할 방도를 취해야 할 것이로소이다.
"허, 나 역시 그런 여력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그렇다면 눈을 번히 뜨고도 아는 병을 고치지 못하실 터라 참 딱한 일이지요."
"무슨 방도를 생각해야겠네. 참, 젊은이 성씨가 어찌 되는가?"
"송씨 올시다. 그냥 송유학이라 부르시지요."
"송유학이라, 알았네. 나는 기왕 나선 길이니 강변이나 소요하다 들어가야겠네."
"그러시지요."
늙은 윤초시가 종놈을 대동하고 강변으로 내려가자 송윤호는 비로소 배가 몹시 고품을 느꼈다. 사실은 아침도 먹지 않았던 것이다. 송윤호는 움막에 달아 지은 아궁이에서 옹기솥을 들어 움막 안으로 갖다 놓았다. 이어 소금과 나무 숟가락을 들고 솥뚜껑을 열었다. 헌데 작은 솥 안에 노란 조밥이 숟갈 자국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음?'
아침에 거칠이란 놈이 밥을 먹지 않고 일을 나갔음이 적실했다. 주인보다 먼저 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송윤호의 가슴은 또 한번 무너졌다.
'내가 생각이 짧았구나. 먼저 들라고 했을 때 먹는 흉내라도 낼 것을......'
'종일을 굶고 일을 한데다 먼 길을 걷고 있는 지금은 얼마나 배가 고플까.'
'아, 나는 어째서 늘상 이 모양이란 말인가?'
송윤호는 하염없이 솥 안의 조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시각에 밤섬 춘월이네 삽짝에 황구만이 들어섰다. 부엌 쪽을 힐긋 돌아보니 내촌댁이 아궁이에 쭈그리고 앉아 불씨를 찾느라 불당그래로 재를 끌어내고 있었다. 황구만은 슬금슬금 부엌으로 다가갔다. 아궁이에 눈을 박고 있던 내촌댁은 황구만이 다가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옆에서 내촌댁이 하는 일을 들여다보던 복덩이가 황구만을 먼저 발견했다. 아이는 내촌댁에 바짝 붙으며 어이, 어이 하며 내촌댁의 저고리를 잡아당겼다.
"아이구, 우리 복덩이 배가 고픈 게로구나. 조금만 기다리거라. 이제 곧 밥해주마."
아이는 한 손으로 황구만을 가르키고 있건만 내촌댁은 그래도 알지 못했다. 그러자 황구만이 부엌에다 얼굴을 디밀어 아이를 향해 싱글벙글 웃으며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아이는 더욱 내촌댁에게 달라붙었다.
"애고, 불에 덴다. 저리 가 서있.... 어멋. 놀래라. 저, 저 사람 좀 봐. 에고, 어째 나타날 때마다 사람을 놀라게 하오? 허고, 남정네가 왜 자꾸 남의 부엌을 기웃거리오?"
"누가 놀라랬나? 난 그저 저 아이에게 볼일이 있어 부엌을 찾았을 뿐일세."
"흥, 우리 복덩이에게 무슨 볼일이 있단 말이요? 또 잠자리를 잡아 주려는 게요?"
"그깟 잠자리 자꾸 잡아 뭐 하나? 더 좋은 게 있는데."
"우리 복덩이에게 더 좋다니? 도대체 그게 뭐요?"
"히힛, 바로 요거지."
황구만은 소매 속으로 넣었다 뺀 손을 얼른 주먹으로 만들어 불쑥 내밀었다. 그리곤 싱글거리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이는 경계를 하듯 내촌댁의 뒤에 찰싹 붙어 서며 호기심 어린 눈길은 황구만의 주먹에 두었다.
"주먹 속에 봉의 새끼라도 감췄소? 어째 복덩이 애만 태우고 있소?"
"내가 보기엔 저 아이가 봉의 새끼 같은데 또 무슨 봉황 타령인가? 이 손에 든 건 봉추(鳳雛)가 좋아하는 바로 요걸세."
황구만이 펼친 손바닥엔 엿이 한 토막 놓여 있었다.
"아니? 이 흉년에 어느 누가 엿을 고았단 말이요. 게다가 이건 쌀 엿 아니요?"
"하핫, 이건 육의전 대행수 손녀가 시가(媤家)에 갖고 온 이바지 음식일세. 어물전 도령위(都領位) 댁에 불려갔더니 이걸 자랑삼아 상에 올렸지 뭔가? 나야 단것을 별루로 치지만 갑자기 저 아이가 생각나 소매 속에 두어 토막을 넣었지. 옛다 마저 먹어라."
황구만이 소매 속에 남은 엿 토막을 마저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에그, 고맙소. 그러지 않아도 조밥 밖에 먹일 게 없어 별궁리를 다 했더니 어찌 내 마음을 그리 잘 알았소?"
"내촌댁 마음이야 내가 어찌 알겠는가? 허나 아이를 싸고도는 내촌댁의 마음씨는 보기에 좋더구만. 아, 팔 떨어지겠다. 봉추야, 어서 와서 가져가거라."
"봉추가 뭐요? 얘 이름은 봉추가 아니라 복덩이요. 복덩이."
"그야 자네 마음이지. 자네는 자네 마음대로 부르게나. 나는 내 마음대로 부를 테니."
"별소리 다 듣겠소. 이름을 서로 엇갈려 부르면 어쩌자는 게요? 헌데 이번엔 누굴 만나러 왔소? 정말 복덩이에게 엿 줄라고 일부로 왔소?"
"겸사겸사 왔지. 헌데 춘월이는 또 어딜 갔는가?"
"아니요. 방에 계시오. 오늘은 웬종일 복덩이를 봐 주셨소. 가보오 계실 터이니."
황구만은 부엌에서 물러나 춘월이 방의 댓돌 위에 신발을 본 후 마루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짧게 헛기침을 몇 번 했다. 하나, 방 안이 조용했다. 황구만은 방문을 톡톡 두드리며 다시 헛기침을 했다.
"이보게 춘월이 방에 있나?"
황구만의 말이 있고 잠시 후에 방문이 열리더니 춘월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이고 황 주인이 온 것도 모르고 그새 깜박 졸았나 보오."
"저녁 때가 다 되었는데 지금 잠을 자면 긴긴밤을 뜬눈으로 지새려는가?"
"아이고 말 마오. 다 늙어 애 볼 게 아닙디다. 종일 복덩이 놈 재롱을 보다 보니 몸살이 날 지경이오. 이젠 나도 늙었나 보오."
"그래서 옛말에, 애 하나 보느니 노망난 늙은이 열을 보는 게 쉽다는 말이 있지 않나? 자고로 옛말 틀리는 걸 나는 본 적이 없네."
"나는 그런 옛말을 들어 본 적이 없소."
"하하. 눈치챘구먼. 참, 생각 좀 해 봤나?"
"송파 말이요? 그러지 않아도 내 며칠 전에 송파엘 다녀왔소."
"그래서?"
황구만은 춘월의 눈치를 얼른 살펴보았다. 싫은 기색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내 생전 송파라는 댈 가본 것도 처음이오만 거길 가보고 깜짝 놀랐소. 객주나 여각 때문이 아니요. 사람 때문이요. 어쩌면 사람들이 그리 많소? 아무리 장날이라도 그렇지, 동서남북에서 몰린 사람들이 오뉴월 죽은 쥐 배떼기에 쉬 끓듯 합디다. 그리고 객주나 여염집도 어쩌면 그리 많소? 여태 삼개나루에만 사람들이 많은 줄 안 내가 바보요. 어차피 장사를 할 바엔 그런 데서 해야지요. 황 주인이 말한 술청은 해볼 만 하겠습디다."
"그럼, 승락이구만?"
"승낙하고 말고가 없소. 허나, 술청이 다 되려면 아직 멀었습디다?"
"눈이 오기 전에 완공을 보려고 서두르긴 하네만 두고 봐야지. 어쨌든 자네가 맡아서 크게 한번 떨쳐보게. 까짓것 이젠 자네나 나나 겁날 것 없는 몸 아닌가?"
"참, 사람들 말을 들으니 황 주인이 하는 객주가 요즘 물주들로 넘쳐난답디다 그려."
"뭘, 변가가 몸이 아파 그만 둔 걸 인수했더니 변가네 단골이 내게로 넘어와서 그럴 뿐이네. 어쨌든 양화나루 시절보다는 나으이."
볼일이 끝난 황구만이 마루에서 엉덩일 떼어 발딱 일어났다.
"아니? 벌써 가시려오? 기다렸다 조밥이나마 먹고 가오."
"아닐세. 가서 할 일이 남았네. 그럼 잘 있게."
"잘 가시오."
마당에 내려선 황구만이 부엌에 머리를 디밀었다.
"네촌댁 잘 있게. 나 건너 가네."
"어구, 남이 보면 이별이 서러운 가시버시로 보겠소. 얼른 가시오."
"헛, 그렇게 보려면 보라고 하지. 이거 구더기 무서워 인사나 하겠나?"
"어쨌든 엿은 고맙소."
그때 마루에서 그 광경을 보던 춘월이가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황 주인이 내 핑계로 내촌댁을 보러왔었구려. 이참에 내가 중매를 설 테니 아예 두 사람이 짝을 맺는 것이 어떻겠소?"
"못할 것도 없지만 나는 싫네. 그러다 또 먼저 보내라고? 헛, 이젠 정말로 가네."
황구만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젭싼 발걸음을 놓으니 부엌에서 나와 한마디 더 하려던 내촌댁이 닭 쫒던 개가 되었다. 헌데 내촌댁을 따라나온 복덩이가 두 손에 하나씩 쥐고 있던 엿을 든 채 춘월이에게로 어정거리며 다가가는 것이다. 그리고는 춘월이에게 한 손을 내밀며 어, 어 하는 소리를 내었다. 아이가 쥔 것을 보니 엿이라 춘월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엉? 이게 엿 아니냐? 이 귀한 게 어디서 났느냐?"
"아까 그 황 뭐라는 사람이 복덩이 주라고 갖고 왔사옵니다."
"허면, 얘가 왜 날 주는 건가? 아, 오늘 내가 같이 놀아주었다고 그러나 보구나. 그놈 마음 쓰는 것도 보통 애들과는 다르고나. 어떤 애고 이런 건 뺏기지도 않으려 할 것인데..... 아이고, 이 녀석은 참 여러 가지로 늙은 년 마음을 뺏는구나. 쯧."
아이의 어깨를 다독이는 춘월의 눈길이 부드러웠다. 아이는 어, 어, 하며 계속 춘월의 입에다 엿을 디밀었다.
"오냐, 오냐. 할미는 되었으니 너나 먹어라."
"아이고 우리 복덩이 나는 달래도 주지 않더니 마님께는 드리네."
그러지 않아도 복덩이가 들어 온 날부터 오늘날까지 마음이 편치 못했던 내촌댁이었다. 무엇을 하든 눈치가 보였던 것이다. 밥 먹이는 게 눈에 뜨일까, 혹여 아이가 울어 주인에게 밉보일까 계속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그러다 지난번에 복덩이의 눈을 들여다본 후부터 주인의 태도가 조금씩 부드러워져서 오늘은 자청해서 종일 아이를 봐주었다. 내촌댁은 춘월이가 복덩이를 예뻐하니 기쁘고 안심이 되어 흐뭇하였다.
그 시간에 발 빠른 황구만은 벌써 배 있는 곳까지 거의 다 왔다. 황구만이 타고 왔던 배의 사공은 다른 배의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황구만이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사람은 바로 자신을 구해 준 동이였다.
"하하, 이게 누군가? 생명의 은인이신 동이 아닌가?"
"엉? 개헤엄도 못치던 사람이구려."
"하하, 그런 셈이지."
"방금 저 성님으로부터 변가객주를 샀다는 사람 얘길 들었는데 그럼 그 사람이 당신인가 보구려."
동이가 이제까지 얘기를 나누던 사공을 가리키며 새삼 황구만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왜 아니겠나. 그 객주 주인이 바로 날세."
"객주 주인이 여긴 뭣하러 건너오셨소?"
"헛, 볼일이 있으니 건너왔지. 참 자네 우리 객주에 와서 일을 하지 않으려나?"
"싫소."
"뭐라? 새우젓 독을 나르는 것보다 객주 일이 쉬운 걸 몰라서 그러는가? 다른 이들은 써달라고 목을 뺀단 말일세."
"그럼 그 사람들 쓰시오. 어쨌든 나는 싫소. 남에게 얽매이는 게 싫단 말이요."
"헛 참, 별일이로세. 가만, 지금 고기잡이 가는 길인가?"
"보면 모르오? 주낙을 놓으러 가는 길이요."
"무슨 고기를 잡나? 혹 웅어가 나오거든 내게 기별을 하게, 웅어라면 내가 다 살 테니."
"헛, 웅어 맛은 알아도 웅어 나는 철은 모르는 구려. 봄철에 나는 웅어를 가을에 찾으면 어떡하오? 그리고 웅어는 주낙이 아니라 그물이나 어살(魚箭)로 잡소."
"하하, 그런가? 그럼 요즘은 무슨 고기가 잡히나?"
"장어나 메기지요. 웅어와는 또 다른 맛이 나는 데다 사철 잡히는 고기라 좋소."
"그런가? 엥이, 그래도 나는 웅어를 제일로 치는 사람일세."
"임금님 진상품만 좋아하니 입은 양반이구랴."
"입만 양반이면 무엇 하나? 족보가 양반이래야지. 어쨌든 얼음이 얼면 뱃길도 끊길 테니 일거리 없으면 그땐 내게 들리게나."
"그럽시다. 생각해주어 고맙소."
황구만은 사공을 재촉해 배를 띄웠다. 황구만은 지난번 사고 이후엔 절대로 작은 배는 타지 않았다. 사공이 젓는 배에 몸을 맡긴 황구만은 어제저녁 어물전의 도령위 문두수에게 불려갔던 일을 생각했다. 문두수는 송파 객주 문일평의 아비 문기수의 사촌 형으로 늙어 이름뿐인 대행수를 대신해 백여 곳 어물전을 쥐고 흔드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육의전 행수와도 사돈을 맺어서 어물전에서는 그가 실질적인 대행수 노릇을 했다. 그런 그가 자신이 거느린 어물전에서 하찮은 거간이던 객주 주인 황구만을 부른 것이다. 그러나 옛날 같았으면 깜짝 놀라고도 남았을 황구만이 도령위의 부름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자신이 상조회에 속한 것을 알고 부른 것임을 간파한 것이다. 황구만은 오회주나 노부장이 아닌 자신을 부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는 그 이유를 대략 짐작했다. 지난 추석에 오일중이 밀어준 굴비로 막대한 이익을 내고 보니 또 다른 욕심이 생긴 것일 터였다. 문두수 앞에서도 황구만의 태도는 당당했다. 예법에 맞춰 어물전 도령위에 대한 인사를 했을 뿐 지나치게 몸을 굽신거리지 않은 것이다. 본래 얼굴이 오종종하고 풍신이 가벼운 황구만이 어울리지 않게 꼿꼿하게 앉은 모습을 당자인 도령위는 어떻게 보았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런 그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
"그래, 객주는 잘 되는가?"
문두수는 처음부터 황구만에게 '되느냐'가 아니라 '되는가'로 하게 말로 시작했다.
"예, 삼개가 워낙 도성과 가깝고 사통팔달한 곳이라 물동량이 많아서이지요."
"허허, 아무리 물량이 많아도 삼개에 여각과 객주가 합이 열한 곳이라 하던데, 그 많은 객주 중에 열 곳은 파리를 날린다니 황주인의 수완이 남달라서겠지. 아니 그런가?"
"그렇지만도 않사옵니다. 소인은 어물과 잡곡에 우선을 두기에 쌀을 비롯한 나머지 물종은 죄다 다른 여각으로 보냅지요. 그래야 그들도 먹고 살 것 아니겠습니까? 가능한 다 같이 벌어먹어야지 소인 혼자서 부자가 된들 무엇에 쓰겠사옵니까?"
"어물 얘기가 났을제 말이지만, 강화에 무슨 일이 있는가?"
"무슨 말씀이시온지?"
"지난 번 굴비만 해도 다락같이 올리던 굴비 값을 상조회가 끼어들자 반값이 되더니 요즘 올라오는 어물들도 매년 올리던 값을 올리지 않으니 말일세. 강화의 부자들이 돈 욕심이 사라진 것인가? 아니면 상조회가 무슨 조화를 부리려는 건가 알 수가 없네."
"굴비 값이야 강화의 어물 주인들의 결정이지 상조회가 간여한 것은 아니올시다. 상조회는 물건을 확보하고 거간만 할 뿐 사실 그럴 힘도 없습지요. 허니 상조회가 무슨 조화를 부릴 수 있겠사옵니까."
"음, 그렇단 말이지?"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문두수는 독상을 받아놓고도 음식에 젓가락질 한 번 없는 황구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행이 몹시 가볍고 거간을 할 때에는 손짓이 요란하고 몹시 말이 많다고 들은 황구만이 듣기와는 영 다른 것이다. 지난번 굴비가 도성 안으로 들어오지 않아 값이 천정부지로 뛰었을 제 어물전 모든 공원이 나서 조사를 했었다. 조사 결과 강화의 심첨지와 교동 한부자, 석모도의 권부자가 서로 짜고 값을 올린 것도 알았다. 그 뒤 어물전 상공원들이 수차례 심첨지를 찾아 굴비를 풀 것을 종용했으나 허사였다. 그러던 굴비가 거짓말처럼 어물전에 쏟아진 것은 상조회의 오일중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아냈었다. 헌데도 황구만은 상조회를 감싸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두수는 황구만에 대한 시험을 일찌감치 포기했다. 사실 문두수는 지난번 추석 때 굴비로 톡톡히 재미를 본 후 돌아오는 설에는 북어로 다시 한 번 크게 놀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물전이 항상 값을 후려쳐 거의 공으로 먹으려 드는데 질려서 송상은 근래에는 도성 안으로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권력을 동원해 그들의 물건을 뺏을 수도 없으니 북어는 잡아야겠고 잡을 길은 없어 고민이 깊었던 것이다. 결국 대안은 굴비처럼 오일중에게 부탁하는 일이었다. 경강 십여 곳 나루와 수백의 왈짜들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오일중이라면 송상의 북어를 지난 번 굴비처럼 쉽게 어물전으로 돌리리라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다른 고민도 있었다. 지난 굴비 값에서 보듯이 오일중이 눈에 환히 보이는 이익을 마다하고 물량 전체를 웃돈 한 푼 얹지 않고 어물전에 넘긴 것이 못내 찜찜했던 것이다. 이 일은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일 터이나 놈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것이다. 그런 마당에 다시 북어의 매점매석을 부탁한다는 것은 우선 입에 단 곶감 먹고 뒤가 찢어지는 어리석은 짓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생각한 것이 어물전에서 한솥밥을 먹던 황구만에게 큼직한 미끼를 던져 대강의 그림자라도 탐지해 내려한 것이다. 한데, 말하는 것을 보니 시작부터 애초에 그른 것을 알았다. 하늘 같은 도령위인 자신을 상대로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자세와 말씨가 이미 황구만은 상조회의 골심 회원이었다. 문두수는 준비했던 마지막 승부수를 띄워보기로 했다.
"폐일언하겠네. 단도직입으로 말하지. 상조회를 움직이든 자네의 그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든 송상이 매집해 둔 북어를 좀 끌어다 주게. 그럼 내 자네를 어물전 별임령위(別任領位)로 삼겠네. 아니지, 그렇게 되면 대공을 세우는 것이니 차지령위(次知領位)로 올려줌세 그리고 거기에 걸맞은 전(廛)도 한 곳 내줄 것이네. 이건 헛 말이 아닐세. 문기로 작성하라면 당장 해 줌세. 어떤가?"
황구만이 문두수의 말에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본래 육의전이란 조정에서도 함부로 손을 보지 못하는 소위 궁 외(宮外)의 궁이라 모든 전은 저희들만의 세습(世襲)이었다. 다시 말해 육의전 자체가 처음부터 문중끼리 똘똘 뭉쳐서 할아비 다음엔 아들이 아들 다음엔 손자가 대대로 해 먹었던 것이다. 그도 아니면, 형제 자매나 최소한 외가 쪽에라도 그들과 친족 관계가 있어야 해먹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명예직이라 해도 차지령위라면 어물전에서는 상당한 지위에 속해서 보통 상인들은 처다도 못 볼 자리였다. 그 자리를 주겠다니 황구만이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불시에 제안을 해서인가? 그렇다면 돌아가 천천히 생각을 해보게. 내가 한 말은 빈말이 아닐세. 또한 자네가 차지령위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네. 오히려 자네가 그 자리에 앉는다면 우리 어물전에 새로운 바람이 불 것이라 생각하네. 사실 육의전 전부가 그렇지만 특히 어물전은 예전만 못한 것은 자네도 알 것일세. 그러나, 이십만 명이나 사는 도성 안에서 오로지 우리만이 어물을 공급하니 땅 짚고 헤엄치기 아닌가? 물량만 확보되면 다시 크게 일어날 것이야."
황구만은 문두수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머릿속은 부지런히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자신이 어물전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던 문두수가 사돈도 아닌 자신을 친척의 반열에 올리지 못해 애를 쓰는 꼴이 가소로웠다. 그래서 문두수의 제안을 수락하고말고 보다 웃음이 자꾸 나오려 하였다.
"도령위께서 그토록 말씀하시니 소인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오나 이는 제 일신에도 중차대한 문제라 신중을 기해야 겠사오니 며칠 말미를 주시지요."
"아 그러게나. 북어를 끌어오는 일도 급하긴 하나 자네에게도 대안을 마련할 말미는 있어야겠지. 열흘 안으로만 통보를 하게나."
"예, 열흘 안에 가부를 알립지요."
"허허, 잘 생각하게. 이것도 자네에겐 기회일세. 자자, 얘기 끝났으니 들게나."
문두수는 술상을 가리키며 황구만이 들기를 권했다.
"아니 옵니다. 소인은 술을 하지 못하오니 이것만 취하겠사옵니다."
황구만은 상에 놓인 몇 가지 음식 중 엿 두 토막을 집어 소매에 넣었다.
"아, 술을 마시지 않는 걸 몰랐네. 그렇다면 그걸 다 싸 줄 테니 가지고 가게나."
"아니 옵니다. 갑자기 이걸 좋아할 아이가 생각나서 집은 것이옵니다. 그럼."
황구만은 가볍게 절을 하고 그 자리를 물러 나왔었다.
"다 왔는뎁쇼? 내리시지요."
깜박 생각에 젖었던 황구만이 화들짝 놀라 배에서 내렸다.
"아, 나으리, 두 푼을 주시고 가셔얍죠."
"아차, 내 그냥 갈 뻔했군, 옛네. 서 푼일세."
"아이고 고맙습니다 나으리. 다녀 가시오서소."
생각 밖의 한 푼에 기분이 좋아진 사공이 허리를 굽혔다. 황구만은 재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객주로 향했다. 아직 해가 서너 뼘 남았건만 나루는 한산하였다. 오늘 일을 끝낸 거룻배도 돛을 내리고 빈 독을 싣던 새우젓 배도 떠나고 없었다. 서녘에 비낀 해가 강물에 반사되어 붉고 누른 빛의 물결이 비늘처럼 반짝이고 재수 좋게 때 꺼리를 마련한 움막들에선 저녁을 짖느라 곳곳에서 연기가 실처럼 피워 올랐다. 황구만이 언덕에 가까이 왔을 때 어떤 움막 앞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궁금증이 생긴 황구만이 그들 사이로 머리를 디밀었다.
"약이 없소. 약이 없는데 진맥을 짚은들 무슨 병이 낫겠소? 그러니 제발 돌아들 가시오."
말하는 사람을 자세히 보니 지난번 자신이 물에 빠졌을 때 사공을 살려낸 거지 같은 의원이었다. 황구만은 단번에 사태를 파악했다. 보나 마나 용한 의원이 있단 소문에 사방에서 돈 없는 병자들이 몰려든 것일 거였다. 송윤호는 막무가내인 그들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아, 약 없는 줄은 우리들도 알고 있소. 그러니께 침이라도 한 방 찔러 달란 말이요."
"허, 침으로 나을 병이 몇 가지나 되겠소? 여러분 대부분이 침 따위를 맞아서 나을 병자는 없소이다. 그리고 이병 저병 침으로 다 낫게 한다는 말은 천하의 엉터리요. 부러진 뼈에 침이 무슨 소용이며 썩은 이빨에 침이 가당키나 하겠소? 굶어 생긴 병을 침으로 어찌 고친단 말이요? 그런 병은 우선 밥을 먹어야 하고 또 병에 맞는 약을 먹어야 낫는 것이요. 허나 내겐 약이 없소. 약이 없는 의원이야 있으나 마나란 말이요."
"시끄럽소. 내 낮에 둔지산 아래 사는 아이 놈으로부터 십 년 묵은 제 할애비 해소 병을 단숨에 고쳤다는 말을 들었소. 돈 한 닢 들이지 않고 말이요. 여기 우리 아비도 해소요. 얼른 좀 낫게 해주오."
"나는 등창이요. 종기를 침으로 고쳤단 말을 들었소. 나도 좀 고쳐주오."
한두 사람이 목청을 높이자 떠나가는 마지막 나룻배를 부르듯 사방에서 송윤호를 향해 서로 고쳐내라고 소리소리를 지르니 구경하는 황구만까지 귀청이 먹먹하였다. 황구만은 떼로 몰려든 빚쟁이에 당하 듯하는 송윤호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염치나 예의 따위는 아예 없이 제 아픈 곳만 나으면 그만이라는 태도였다. 그리고 만약 송윤호가 제 병을 고쳐주지 않으면 사람이건 움막이건 다 때려 부술 태세였다. 황구만은 어쩌면 저 의원은 애초에 새우젓 독에 맞은 사공을 구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 뒤에서 황구만을 밀치고 사람들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골이 난 황구만이 밀친 사람을 보니 그 사람의 갓이 자기 갓보다 열 배는 커 보였다. 황구만은 급기야 화를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나간 늙은 양반이 두 손을 번쩍 들어 모인 사람들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코까지 벌렁거렸다. 어느 틈에 양반 옆에는 곰같은 종놈이 붙어 섰다. 사람들은 그가 양반 자세가 보통 아닌 언덕 넘어 윤 초시인 것을 알아보았다. 그러자 이제껏 바락바락 제 병 자랑에 여념이 없던 사람들이 찬물을 맞은 꿩 새끼가 되어 입들을 닫았다.
"내 뒤에서 가만히 들어보니 참으로 염치없는 작자들이로군. 너희들은 조개우물 허 의원에게는 끽소리 한마디 못하면서 돈 한 닢 받지 않고 네놈들을 도우려는 송 의원에게 어찌 이럴 수 있느냐? 진맥이란 무슨 병인지 알아만 낼 뿐이니 결국은 약이 있어야 고치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냐? 처방전만 쥐면 병이 낫느냐? 진맥을 짚어 처방전을 써주면 네놈들이 약 지을 돈이 있느냐 말이다. 약이 없어 못 고친다는 송 의원을 어찌 그리 핍박하는 게냐? 네놈들이 약재를 사라고 송 의원에게 돈을 냈느냐, 아니면 약초를 구해다 바쳤느냐? 뭐라? 침? 이놈들아 침으로 이 세상 병이 다 낫는다면 구리개 약장수들은 진작에 다 굶어죽었을 것 아니냐? 해소에 침을 찔러 달라니 침을 어디다 찌르란 말이냐? 네놈 콧등에 찔러달란 말이냐? 아니면 네놈 항문에다 찌르란 말이냐? 침만 찌르면 다 낫느냐? 어찌 그리 보채느냐? 세상에는 용하다는 약을 써도 죽는 자가 흔하거늘 네놈들은 무엇을 믿고 침을 찔러라 진맥을 해라 소동이냐? 좋다, 돈이 없어 조개우물 허 의원을 찾지 못할 바엔 내일부터 병자나 그 가족이 돈 대신 산에 가서 약초를 캐 오너라. 당귀든 도라지던 삽주든 각자 아는 약초를 캐오면 진맥을 해서 갖고온 약초로 약을 지어주겠다. 그러지 않고는 절대 고쳐주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 사람이거늘 제 힘은 안 들이고 생짜로 제 병만 고치려 드니 그것을 어찌 사람이라 하리. 내일부터 나도 여기서 송 의원과 함께 진맥을 하고 시침도 할 테니 돌아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약초를 캐서 병을 고치라 알려라. 자, 돌아들 가거라. 어서 돌아들 가라는데도. 헛."
맥빠진 사람들이 돌아서고 있었다. 황구만은 서둘러 그들에게서 빠져나와 언덕을 넘었다. 언덕을 넘자 수백 호에 달하는 집들의 굴뚝에서 피워 오른 연기로 하늘이 뿌였게 보였다. 그 사이로 자신이 맡은 커다란 객주가 눈에 들어왔다. 객주 뒤 쪽 곳곳에 새로 집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삼개나루 하나에 이렇듯 많은 집들이 목을 매고 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황구만은 언덕에 선 채 한참 동안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차지령위? 흥, 오회주에게 부탁할 일을 내게다 하는 속셈을 모를 줄 알았나 보지? 일단 북어를 끌어다 놓고 보겠다는 수작이렸다. 제놈들 일가친척 사이에 나를 끼워줄 테니 오회주를 배신하고 나오라고? 헛, 나보고 오리떼 속에 든 닭 꼴이 되란 소리가 아닌가?'
황구만은 객주를 향해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해가 지려는지 문득 햇빛이 사라졌다. 황구만은 더욱 걸음을 빨리했다.
"방장님, 이제 오시우?"
며칠 전 오일중이 보낸 부방장 격인 기형도 포교였다.
"음, 나 없는 새 별일 없었는가?"
"별일이 있을 일이 무엇 있소?"
"혹 회주님에게서 전언이 있었나 해서지."
"전언은 없고 대신 회주님이 보낸 건달들이 와 있소."
"건달이라니?"
"포교를 그만두면 건달이지 별 수 있소?"
"음, 장사를 배워보겠다는 사람들이란 말이지? 그래 몇 명인가?"
"일곱 이유. 고방 옆 봉놋방에 쓸어 넣었지요."
"옛기 이사람, 쓸어 넣다니... 그래 저녁들은 먹었나?"
"웬 걸이요. 부엌 할미가 너무 나이가 많아 힘에 부치나 봅디다. 허니, 젊은 여편네를 하나 붙여주는 게 어떠우?"
"힝, 젊은 여편네를 들이면 자네가 맨 먼저 꿰 찰 심산인 걸 내 모를 줄 아나?"
"에이 방장님도, 아무나 꿰차면 대수요? 급한 놈이 먼저지."
"시끄럽네. 자네 누이가 있으면 먼저 들이게."
"이제 보니 홀아비인 방장님 장가가 급한가 보구려. 히힛."
황구만은 기형도에게 저녁을 재촉하라 이르고 포교들이 있다는 봉놋방의 방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포교들이 제멋대로 누워 있었다. 그들은 방문을 연 사람이 황구만인 걸 알고 모두 부시시 일어나 앉았다.
"오, 오느라고 수고들 했네. 허, 거의 다 아는 얼굴들이군."
"안녕 하시우. 회주님이 보내서 오긴 했으나 어째 나는 장사가 맞을 것 같지 않아 걱정이오. 잘 좀 배워주시우."
상조회 포교 출신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임동추란 자였다.
"배우는 거야 어렵지 않으니 일단 밥이란 놈을 포도청에 잡아넣고 보세나. 이제부턴 목구멍이 포도청 아닌가? 하하."
"허긴 그 말도 맞소. 포도청을 그만두니 목구멍이 제일 무섭습디다."
"옳은 말일세. 허나 앞으로는 목구멍도 무섭지만 돈이란 놈이 얼마나 무서운가도 보게 될걸세. 이곳 삼개나루는 돈이 춤을 추는 곳일세. 잡는 사람이 임자거든. 돈이면 염라대왕도 부릴 수 있단 말일세."
황구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른 포교 하나가 나섰다.
"염라 대왕보다 나는 그 돈으로 양반을 살 수 있으면 좋겠소."
얼굴은 아나 이름이 미쳐 생각나지 않는 자였다. 황구만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 상조회원 대부분이 오일중이 있던 좌포청 포교였으나 유일하게 우포청에 있던 도신우란 포교였다.
"그깟 양반 족보를 가져서 무엇하려고 양반 타령인가?"
황구만은 양반을 사겠다는 도신우가 못마땅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돈보다 양반이 나은 걸 내가 봤기 때문이요."
"뭐라? 굶어도 족보란 말인가?"
"허, 그게 아니요. 육의전에 내 팔촌 형뻘 되는 이가 있었는데 누만금은 아니래도 논밭이 그들먹하게 많은 사람이었소. 그 사람이 만년을 시골에서 지내려고 땅이 있는 안성으로 내려갔지요. 그런데 내려간지 반 년 만에 양반 손에 죽고 말았지 뭐요. 양반 놈이 서원과 짜고 팔촌 형을 향풍(鄕風)을 문란하게 했다는 엉뚱한 모함을 해서 훼가 출향(毁家黜鄕)을 당했지요. 화가 난 그 형이 양반을 찾아가 따졌더니 중인이 양반에게 대들었다고 관아에 끌고 가서 매를 맞히니 장독으로 보름을 못 넘기고 죽고 말았소. 물론 땅은 양반 놈이 먹었지요. 이러니 돈보다 양반이 낫지 않겠소?"
"가만, 조금 전에 자네 삼종 형이 내려간 시골이 안성 이랬나?"
황구만이 생각난 바가 있어 도신우에게 물었다.
"그랬소만 어째 그러오?"
"그 양반이란 자가 누군지 혹시 아는가 해서 일세."
"헛, 그자는 안성에서도 알아주는 부자인데 설마 모르겠소? 지금 장안의 거부 장현의 종질 장철기요."
황구만은 숨을 멈추었다. 십 년 전 자신을 파멸로 이끈 원수 놈의 이름을 들었기 때문이다. 황구만은 굳은 표정으로 방문을 닫았다.
'내 이놈을 없앨 수 있다면 내 목숨이라도 내놓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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