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황구만
추석이 지나고 얼마 후 추분(秋分)에 이르자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물 위에 떠있는 조그만 밤섬에도 가을의 입김이 불어와 새벽이면 물 안개가 자욱했다. 춘월이네 마당가에는 맨드라미 꽃이 피어 있었는데, 그 꽃들 역시 서리가 오기 전에 여름을 향한 마지막 단심(丹心)을 보여주려는 듯이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흡사 닭벼슬같이 생긴 붉은 그 꽃 위에 같은 색의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앉았다. 한번 앉은 잠자리는 햇살을 즐기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본 한 아이가 주춤주춤 잠자리에 다가가고 있었다. 아이는 벌거벗은 몸에 맨발이었고 걸음을 걷는 모양새나 크기로 볼 때 돌을 넘기고도 몇 달은 더 된 것 같았다. 아이가 제 딴엔 조심스레 꽃으로 다가가더니 잠자리를 덥썩 움켜잡았다. 하나, 머리통 전체가 눈알인 잠자리가 그 낌새를 모를 리 없어서 아이의 손이 닿기 전에 먼저 사르륵 날아 올랐다. 아이의 눈도 잠자리를 따라 날아올랐다. 공중을 한 바퀴 돈 잠자리가 아이의 약을 올리려는 듯 이번엔 울타리 싸리끝에 살짝 붙었다. 손길에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앉은 잠자리를 망연히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에 아쉬움과 실망이 묻었다. 그러다 아이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마루에서 바느질에 여념이 없는 내촌댁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내촌댁의 치마꼬리를 잡아당기면서 한 손으로는 울타리 쪽을 가리켰다. 아까부터 바느질하는 사이사이 힐긋힐긋 돌아보아서 아이가 잠자리 잡기에 실패하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던 내촌댁이 혀를 끌끌 찼다.
"아이고, 저놈의 잠자리, 우리 복덩이 손에 좀 잡혀 줄 것이지, 우리 복덩이 애만 태우네. 오냐, 저놈은 이 애미가 잡아주마."
그러지 않아도 보고 있는 내내 은근히 조바심이 나던 내촌댁이 바느질거리를 놓고 발딱 일어나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발끝으로 살금살금 울타리를 향해 다가갔다. 잠자리는 싸리끝 그 자리에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내촌댁이 잠자리 꼬리를 노리고 달팽이 촉수 뻗 듯 천천히 손을 뻗어서 재빨리 엄지와 검지를 오므렸다. 하지만 잠자리는 간발의 차이로 손가락을 빠져나가 공중으로 날았다.
"아뿔싸."
날아가는 잠자리와 아이를 번갈아 보던 내촌댁이 머쓱함과 애석한 마음이 들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이 망할 놈의 잠자리 같으니라고, 복덩아 저놈하고 놀지 말고 누룽지 갖다 줄 테니 그거나 먹어라. 망할 놈의 잠자리. 저리 가거라. 훠이 훠이."
잽싸게 부엌으로 내달은 내촌댁이 뭉친 누룽지를 가져다 아이의 손에 들려주었다. 그러나 아이는 날아간 잠자리에 마음을 뺏겨 누룽지를 손에 쥔 채 빈 하늘만 바라보고 섰다. 그 모습이 또 안쓰러운 내촌댁이 아이를 번쩍 안고 등을 토닥였다.
"잊거라. 그깟 잠자리 잡아서 무얼 하니? 이 애미가 나중에 더 큰 참새를 잡아주마."
그때 삽짝을 들어서던 춘월이가 그 소리를 들었다.
"뭘 잡아? 이번엔 누굴 또 잡아와서 공밥을 먹이겠다는 게야?"
"원 마님두, 참새를 잡아주마 한 소리를 황소로 알아들으셨나 보네요."
"참새 입이라고 무시하겠다는 겐가? 그놈들이 논바닥에 한번 내려앉아보지? 나락 한섬 없어지는 건 금세야. 금세."
"그런 일은 더 이상 없을 테니 안심하시어요."
춘월이가 복덩이 얘기를 꺼내기 전에 내촌댁이 미리 항복을 하고 난 다음 바느질감을 집으러 마루로 다가갔다.
"이건 뭐야?"
한발 먼저 마루에 올라선 춘월이가 내촌댁이 하다 만 바느질감을 쳐들었다.
"복덩이 몸에 옷이 너무 작은 데다 찬바람도 불어서 헝겊을 덧대고 있습지요."
"헝겁이 어디서 나서?"
"뒷집 도목수네 빨래를 몇 번 삶아주고 안주인이 입던 헌 치마를 하나 얻었습죠. 잘하면 얘 고의도 만들 것 같은데 해 봐야 알겠습죠."
"이 여편네 좀 보아. 내게 말하면 그깟 헌 치마 하나 내주지 않을까 싶어 온 이웃에 내 야박함을 알리고 다닌단 말인감?"
"그럴 리가 있사옵니까? 이 흉년에 애를 걷우어주신 마님의 심덕에 다들 입에 침이 마르고 남음이 있습지요. 뒷집 도목수네 안주인도 아이를 보더니 마님이 얼마나 걷어 멕였으면 이렇게 살이 올랐냐구 놀라시던걸요?"
"이 여편네 또 간사한 술수로 나를 속이려 하는군. 뒷집 여편네 심통 사나운 건 온 섬사람이 다 아는데 퍽도 남 칭찬을 했겠다."
콧방귀를 뀐 춘월이 아이의 옷을 이리저리 뒤져보다가 옷자락 끝에 놓은 수(繡)를 보았다. 검은색 실로 조그만하게 놓인 글자는 정성이 배여 있었다.
"아니? 이건 수(壽) 자가 아닌가? 이게 정녕 이 아이가 올 때부터 입고 있던 옷인가?"
"네? 왜 그러시는지요? 뭐가 잘못됐사옵니까?"
내촌댁은 눈이 동그래서 옷과 아이를 번갈아보는 춘월이를 이상한 듯 바라보았다.
"이게 이 아이의 옷이 맞다면 이 아인 분명 양반의 씨란 소릴세."
"예? 양반이라니요? 그 글자가 양반이라는 글자 올습니까?"
"참, 나. 양반이라는 글자가 아니라 이 글은 목숨 수자 수짜란 말이야. 양반의 자식이 아니고서야 상것이 이런 진서를 알기나 하나? 허고 안다손 쳐도 제 새끼 옷에 이런 걸 새겼다간 양반 손에 맞아죽기 알맞을 짓을 누가 하겠나?"
"예? 더욱 모를 말씀이네요. 그러는 마님은 어찌 글을 알아보시옵니까?"
"이놈의 여편네, 날 무시하네? 내 아무리 천 것이래도 기생 수업 오년 동안 천자문은 떼었으니, 그것은 양반을 상대하려면 약간의 먹물은 먹어야 하기 때문이야."
"아이고 그러면 이 일을 어쩝지요? 허나 설마 아이의 부모가 살았다면 얘가 이곳까지 왔겠사옵니까? 그 옷을 이리 주옵소서. 얼른 태워버리게요."
"이 아이가 내촌댁과 인연이 아니라면 옷을 태운다고 될 일인가? 그 반대로 인연이라면 누가 자네와 아이를 갈라놓겠나?"
"어쨌든 그 옷은 입히지 않겠사옵니다. 오늘 밤을 새우더라도 새로 한 벌을 지어야겠사옵니다."
"그러든지 말든지. 장사에 등한시만 않는다면 나도 치마 한자락을 내주지."
"아이고 부처님, 고맙사옵니다."
"또, 그놈의 아첨을..... 쯧쯧."
본 바탕이 모질지 못한 춘월이가 방으로 들어가 고리짝을 열어 기생 때 입던 오래된 치마 하나를 내촌댁에게 건네었다. 치마를 받아든 내촌댁의 입이 벌어졌다. 치마가 부드러운 무명이었던 것이다. 치마로 벌거벗은 복덩이의 몸을 감싸 안은 내촌댁이 춘월이를 향해 아이와 함께 몸을 구부리며 입을 열었다.
"복덩아, 마님께 옷감을 주시어 감읍하옵니다 하고 인사를 해야지. 옳지 우리 복덩이 인사도 잘하네."
"혼자서 북 치고 장고 치려니 바쁘군. 가만, 나를 바라보는 이 녀석의 눈이 예쁘구먼. 잠깐 여기 내려놓게. 얘 얼굴 좀 보게."
"그럽지요. 쉔네도 우리 복덩이 눈에 빠져서 헤어나질 못하지 뭡니까요."
내촌댁이 내려놓은 복덩이를 치마 채 두 손으로 감싸잡은 춘월이가 가만히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이는 멈칫멈칫 내촌댁을 돌아보면서도 춘월이를 피하지는 않았다.
"아이고, 내 못 살아. 이놈 눈이 내 애간장을 다 녹이는구나. 아니? 세상에나 이런 눈을 가진 애는, 아니, 어른이고 애고 간에 본적도 들은 적도 없네. 내 어쩌다 이 아이가 내 집에 온 지 일 삭이 지나도록 이 눈을 보지 못했을꼬?"
"아이고 마님, 이제야 첫날 쉔네가 이앨 내놓지 않으려던 사단을 아셨습지요?"
"이 아이 눈만으로도 상것의 새끼는 아닌 것을 알겠고나. 어쨌든 내촌댁이 이 아이를 잘 기르도록 하게. 욕심 같아서는 내가 맡아 기르련만 늙은 내 욕심이지. 아, 그놈 눈이 여러 사람 잡겠구나."
그날 내촌댁은 제 말대로 낮과 밤을 새워 복덩이의 옷을 지어 입혔다. 아이는 바뀐 환경에 놀라 울지도 웃지도 않던 처음보다는 한결 머뭇거림이 적어지고 내촌댁이 가는 곳을 잘 따라다녔다. 내촌댁이 그동안 그만큼 아이를 끔찍이 싸고 돈 덕택이었다. 앙상하던 몸뚱이에 모기 자국투성이던 얼굴도 수없이 씻기고 매만져 제법 훤했고 새 옷까지 입히고 보니 보기에도 좋았다. 그러나 외마디 소리라도 짧은 말이라도 할 때가 된 아이가 맘마라는 말도 하지 않아서 내촌댁은 은근히 걱정이었다. 해서 어느 날은 벙어리나 귀먹어린가 해서 아이를 부엌에 데리고 들어가 돌려세운 다음 가마솥의 뚜껑을 들었다 놓았다. 깜짝 놀란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울먹이자 그도 아닌 것을 알았다. 그 뒤에는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병신이 아닌 한 언제고 말은 배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점심때가 지나자 내촌댁은 어둠과 함께 올 술손님을 위해 안주를 만들 준비를 서둘렀다. 아이를 데리고 텃밭에 나가 서리가 내리기 전의 마지막 호박과 호박잎을 따고 순무를 뽑아 다듬어 놓았다. 그리고는 우물가에 쭈그리고 앉아 호박닢으로 아침에 사다 놓은 병어를 문질러 손질을 하고 있었다. 복덩이는 잠자리가 공중에 날아다니자 혹시나 하고 마당가의 맨드라미 주위를 아장거리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날씨가 서늘해서인지 잠자리의 날갯짓이 어제보다 눈에 띄게 느렸다. 많은 잠자리들이 울타리 싸리끝에 앉아 있었다. 복덩이가 생선 손질에 바쁜 내촌댁에게 다가가 울타리를 가리켰다.
"에그, 새 옷에 비린내 묻힐라. 저기 가서 놀아라."
내촌댁은 손을 휘져어 아이를 막았다. 그러자 아이는 손가락으로 울타리를 가리킨 채 내촌댁을 바라보며 어이어이 하는 소리를 내었다.
"아이고 우리 복덩이 잠자리 잡아달라는 말이로구나. 암, 잡아주지. 난 영 말을 않을 줄 알았더니 잠자리 잡아달란 말을 다 하다니. 에그 기특해라."
내촌댁은 비린내 나는 손을 호박잎으로 쓱쓱 문지르고 울타리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리고 한 마리를 노리고 슬그머니 손을 뻗어 꼬리를 답싹 잡아채려는 순간 울타리 사이로 웬 갓 쓴 머리가 불쑥 나타났다.
"에구머니."
내촌댁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뒤에서 잠자리 잡아주기를 기다리던 복덩이가 내촌댁의 뒷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두 번 째로 놀란 내촌댁이 얼른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아이는 아랫 입술을 빼물고 비죽비죽 울려고 하였다. 그 꼴을 본 내촌댁이 왈칵 성이 나서 삽짝 밖으로 내달으려는데 갓 쓴 사람이 스스로 삽짝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얼른 행색을 살펴보니 겨우 무릎을 가릴 길이의 중치막에 머리에 올려진 갓이 손바닥만 하였다. 양반이 못 되는 중인인 것이다. 옳다꾸나 하고 내촌댁이 팔을 걷었다.
"이거 보시우. 누구 낙태시킬 일이 있소? 그렇게 두상을 불쑥 내밀면 어쩌자는 게요? 덕분에 우리 애 놀란 것 좀 보시오. 이게 어른이 할 짓이오?"
하나, 작고 오종종한 얼굴의 갓쟁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생글거리며 아이에게 다가와 뒷짐지었던 손을 쓱 내밀었다. 그 손에는 언제 잡았는지 날개 잡힌 잠자리가 있었다. 그러나 아이가 낯가림을 해서 내촌댁 뒤로 슬그머니 돌아갔다. 그러자 갓쟁이는 어르듯 다시 다가가 아이가 잡을 수 있도록 날개 쪽을 가만히 내밀었다. 한손은 내촌댁의 치마를 움킨 아이는 갓쟁이를 한번 올려다 본 후 머뭇머뭇 손을 내밀어 잠자리를 받아 쥐었다.
"이키, 이놈 눈 봐라? 거참, 눈 한 번 시원하고 나야."
아이를 다루는 갓쟁이의 행동이 영 밉상이 아닌 데다 아이의 칭찬까지 덤으로 듣고 보니 한바탕하려던 내촌댁의 마음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이 아이가 임자 아이인가?"
"그렇소. 보면 모르오?"
"보니까 더욱 모를 노릇이라 묻는 것이 아닌가?"
"뭐요? 우리 복덩이가 날 닮지 않았단 게요?"
"아니지. 임자도 그리 숭없이 생기진 않았지만 눈만 본다면 봉황과 참새란 말이지."
"보자 보자 하니 아녀자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구려. 그 잘난 갓을 믿고 내가 혼잣 몸이라고 시뿌게 보는 모양이오만 이래 뵈도 나도 양민이요. 종년이 아니란 말이요."
"엥? 누가 뭐랬나? 허고 임자가 혼잣 몸이란 것도 방금 임자가 말을 해서 알았지 나야 여기 처음 온 사람이 어찌 알겠나? 더구나 양민인지 천민인지 누가 물어나 봤나?"
갓쟁이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말이 맞는지라 내촌댁이 아차 했다. 복덩이와 닮지 않았다는 말이 나올까 미리 갓쟁이의 입을 막으려고 한 소리가 오히려 속만 보인 꼴이었다. 내촌댁은 끽소리 없이 우물가의 생선을 바가지에 쓸어 담아 복덩이를 업고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예의 그 갓쟁이가 부엌까지 따라와 머리를 디밀었다.
"사람이 왔으면 어찌 왔는지 물어나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어째 남정네가 체신 없이 남의 부엌에 머리를 디밀구 야단이오? 그래, 무슨 일로 오셨소?"
"혹시 춘월 네가 어디쯤인지 아는가?"
"흥, 업은 아이 삼년 찾는다더니 댁이 그짝이구려. 여기가 그 집이요."
"이런 제길, 그럼 진작 그렇다고 할 것이지."
"언제 물어나 보셨소?"
"참, 그렇군, 헌데 춘월이는 어디 가고 임자만 있는가?"
"어머나, 이 흉물스러운 남정네 말하는 것 좀 봐. 나만 있으면 어쩌겠다는 수작이오?"
내촌댁이 주위를 재빨리 훑어보다가 집을 만 한 것이 없자 아이를 업은 채 엉덩이를 받쳤던 한 손을 풀어 아궁이 앞의 불당그래를 집어들었다. 그러자 아이가 떨어질까 급히 내촌댁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 임자 지금 그걸로 날 치겠다는 건가?"
"헛수작을 하면 칠 수밖에 더 있겠소? 아이 놀라기 전에 썩 물러서시오."
"어허, 나는 춘월이를 만나러 왔다는데도 그러네. 그것 내려놓고 춘월이가 어디 있는지나 말하게."
"곧 오실 때가 되었소. 마루에 앉아 기다리시오."
"나도 바쁜 몸이라 늦어지면 곤란하겠는걸?"
마루에 앉은 갖쟁이가 깝신대는 몸짓으로 목덜미에 꽂아둔 짧은 담뱃대를 뽑아 물고 허릿춤에서 막초 주머니를 꺼내 곰방대에 재웠다. 이어 부시를 쳐 부시 깃에 옮은 불씨를 살리려 살살 불었다. 그때 부엌에서 머리만 내민 내촌댁이 불쑥 물었다.
"헌데 우리 주인마님은 왜 찾소?"
"그야, 찾을만 하니 찾는 것 아닌가?"
갖쟁이는 살리려던 불씨를 잠깐 잊고 대답부터 했다.
"그러니 그 찾을만한 이유가 무언지 묻지 않소"
"그걸 임자가 알아서 무얼 하나?"
"그만 두시요. 급한 일이면 내가 뛰어서라도 알려주려 했더니 심사가 꼬였구려."
"그 정도로 화급을 다투는 일은 아닐세. 허나 그 마음 씀은 고맙게 생각하네."
"알아주니 고맙소."
"헌데 아까 들으니 양민이라더니 남의 집 부엌일로 먹고 사는가?"
갖쟁이의 말에 밖으로 내밀었던 머리를 거둔 내촌댁이 잠시 말이 없다가 말소리만 부엌 밖으로 내보냈다.
"흉년에 농사 망치니 빌린 곡식 값에 농토마저 날렸지요. 서방은 홧병으로 죽고 자식은 굶어 죽으니 모진 목숨 타고난 내 팔자가 천상 남의 집 부엌대긴가 하오."
"그럼 업고 있는 그 아이는 뭔가?"
"얘, 얘는 우리 집 마, 막내요."
뜨끔한 내촌댁이 급히 얼버무렸으나 말씨는 흐트러졌다. 다행히 갖쟁이는 더 묻지를 않았다. 그 사이에 아이를 내려놓은 내촌댁은 우물로 나가 좁쌀을 씻어 솥에 안쳐 저녁밥 준비를 마쳤다. 다시 아이를 업은 내촌댁이 마당으로 나와 보니 갖쟁이가 담뱃대를 물고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째 처량하게 보였다.
"왜 그러고 있소?"
내촌댁의 물음에 화들짝 제정신이 든 갖쟁이가 깜짝 놀랐다.
"엉? 아 아무것도 아닐세."
"여기여서 망녕이지 삼개 나루에서 그러고 있었다면 그새 깍쟁이들이 속곳까지 벗겨 갔을 게요. 정신은 기생집에 보내셨소?"
"그 게 아닐세. 임자가 서방과 자식들을 잃었다는 소리를 들으니 나 역시 역병으로 보낸 자식들과 마누라가 생각 나서였네. 허, 그러고 보니 벌써 사년이 지났네그려. 참 이러고 있다니?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구먼, 춘월이가 오거든 옛날 양화 나루에서 객주하던 황구만이 왔었다고 전해주게. 다음날 내 다시 한번 들름세."
"알았소, 그리 전하리다."
마당으로 내려선 황구만이 내촌댁을 한번 돌아 본 후 삽짝을 나섰다. 황구만은 가벼운 풍신에 어울리게 가뿐한 걸음걸이로 배가 기다리는 물가로 향했다. 물가에 거의 다 왔을 무렵이었다. 물가에는 마침 나룻배가 닿아서 몇 사람이 짐과 함께 내리고 있었다. 황구만은 개중에 춘월이가 끼여 있는 것을 보았다. 배로 다가가려던 황구만이 걸음을 멈추어 춘월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춘월이는 작은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있었는데 한 손은 항아리를 잡고 남은 손은 치마를 여며 쥐었다. 춘월이 바쁜 걸음으로 황구만 쪽으로 다가왔다. 춘월은 황구만을 알아보지 못 하고 지나치고 있었다.
"이보게, 춘월이 오랜만일세."
"애그 깜짝이야."
황구만의 옆을 지나던 춘월이가 놀란 눈으로 오똑 섰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객주하던 황주인 아니요?"
"왜 아니겠나. 나 황구만 일세."
"소문 듣자니 그 일이 있구 나서 어물전에서 주릅을 한다던데 이곳엔 웬일이오?"
"요즘은 주릅도 그만두었네. 내 방금 자네 집에서 오는 길일세."
"아니? 뭐요? 아직두 나한테 볼일이 남았수?"
"자네에게 고마운 마음이야 잊을 리가 있나. 해서 자네에게 약간이나마 득이 될 일을 상의하러 왔네."
"상의라니 뭘 말이요?"
"길에서 할 얘기가 아닐세."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우리 집으로 다시 갑시다. 어차피 저녁때도 다 되어가니까."
"그럼 그럴까?"
춘월이는 황구만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황구만이 춘월이를 처음 본 것은 십오 년 전이었다. 양화 나루에서 객주집을 시작한 황구만이 물주를 데리고 처음 술을 마시러 간 곳이 춘월이가 하는 술집이었다. 당시에 이미 서른일곱 살이던 춘월이는 기생에서 적을 빼고 물러난 퇴기였다. 기생을 그만둔 후에 연초(煙草) 하나로 부자가 된 영감의 소실이 되어 살다가 영감이 죽자 자신 앞으로 돌려둔 논밭을 팔아 양화나루 윗 쪽에 술집을 차린 것이었다. 반면 황구만은 당시 서른둘의 나이였는데 십수 년을 죽도록 고생한 끝에 간신히 제 객주를 갖게 된 처지였다. 서로 사정은 달랐어도 결국 두 사람은 같은 해에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그 후 황구만도 춘월이도 운대가 들어맞아서인지 해가 바뀔수록 이문도 많아져 재산들이 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이 장사를 시작하던 그해부터 나라에서 마침, 매년 네 번으로 나누어주던 조정 대신들의 녹봉(祿俸)을 매월로 주었던 것이다. 그러자 와우산 아래에 있는 광흥창(廣興倉)에는 녹미를 타가려는 사람들과 배에서 내린 쌀을 창고로 운반하는 무리가 뒤섞여 항상 장시가 선 것 같았다. 내왕하는 사람이 많아지니 자연 춘월이네 술집에도 사람의 발길이 잦았다. 그러다 보니 차차 조정의 하급 관리들과 조운선에 관계된 왈짜 무리까지 춘월이 네로 몰려들었었다. 춘월이 또한 장사에 야박함이 없는 데다 반반한 퇴기들까지 여러 명을 들여놓으니 평소에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자들까지 술청을 기웃거리게끔 되었다. 황구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양화나루는 본래부터 조선팔도에서 거두는 조세미(租稅米)의 거의 대부분이 쌓이는 곳이라 조운선(漕運船)이 끊임없이 드나드는데 배에서 내려지는 세곡은 모두 쌀이었다. 그러나 배에서 내린 쌀은 모두 임시 강창(江倉)에 쌓거나 날이 좋으면 곧바로 광흥창으로 가므로 실제로 객주에서 맡을 물량은 없었다. 그래서 다른 나루와 달리 이곳에 여태 곡물 객주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던 황구만은 쌀 대신 다른 물종을 노렸다. 바로 조운선에 같이 묻어오는 잡곡과 담배, 그리고 솜이었다. 황구만은 나루의 책임자인 도승(渡丞)을 구워삶고 배가 닿을 때마다 행수 선원과 인솔 장교를 찾아가 온갖 수단을 발휘해 그들의 환심을 샀다. 그리고 춘월이 집에 가서 술을 대접하고 무명필을 안겨주었다. 그 짓을 얼마 동안을 계속하자 그들 스스로 물주를 설득해 잡곡과 담배 등속의 잡류는 모조리 황구만의 객주로 보내주었던 것이다. 황구만은 물건 보관료나 거간비만 챙기는 것보다 직접 매매를 하면 이문이 크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 그는 돈이 되는대로 물종을 사 모아 도성의 상인들에게 되팔았다. 황구만은 몇 년 사이에 한밑천을 거머쥐었다. 객주도 넓히고 삼개에도 객주를 새로 지었다. 객주가 번창할수록 이 사람 저 사람 대접할 일도 많아서 춘월이네 집에 가는 횟수도 많았다. 두 사람 모두 장사 시작한지 오 년 만에 논밭이 늘고 쌓아둔 무명필도 몇 동이나 되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한없이 잘 될 수만은 없는 법이다. 전 해의 대흉작으로 이듬해인 경술년(庚戌年)에는 조선 팔도에 굶어죽는 백성이 산을 이루었다. 춘월이도 황구만도 손님이나 물주가 있을 턱이 없었다. 날이 갈수록 물량이 줄어 마침내 고방이 텅 비어버린 어느 날이었다. 나루에 배 한 척이 닿아 황구만의 객주를 찾아들었다. 물주는 배에 실은 쌀을 황구만의 객주에 위탁하고자 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텅 빈 고방이었다. 얼씨구 고맙다고 모두 맡았다. 쌀이 사백 석이었다. 그날 저녁이었다. 유랑민 한 떼가 밥을 달라고 황구만의 객주 앞에서 소란을 부리고 있었다. 황구만이 하인을 시켜 좁쌀 두어 됫박을 내주게 했다. 하나, 놈들은 그걸로 만족하지 못했다. 하인을 두들겨 패더니 황구만이 있는 서기방까지 쳐들어와 마구 치고 밟았다. 가득이나 몸피가 형편없는 황구만이 단번에 쭉 뻗어버렸다. 황구만이 정신이 들었을 때는 다음날 새벽이었다. 먼저 깨어난 하인이 황구만을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황구만과 하인이 깨어난 곳은 객주에서 두 마장이나 떨어진 잠두봉(蠶頭峰) 아래였다. 고방이 걱정된 황구만이 황급히 객주로 달려갔다. 역시 걱정 대로였다. 고방에는 쌀 한톨 남아 있지 않았다. 황구만은 하늘이 무너지 듯 주저앉았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유랑민 몇 명이 덤벼들어 사백 석 쌀을 모조리 쓸어가다니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말이 되고 안 되고는 차치하고 쌀을 맡긴 물주가 문제였다. 며칠 후에 나타난 물주는 쌀이 없자 노발대발하며 황구만을 포도청에 넘겨버렸다. 황구만은 졸지에 미곡을 몰래 팔아먹고 유랑민 핑계를 대는 악질 주인으로 몰려버렸다. 장하(杖下)에 맞아죽지 않으려니 별 수 없었다. 사백 석 쌀값에다 거래를 못해 본 손해까지 몽땅 물어야 했다. 게다가 포도청에 매 맞지 않은 값까지 바치고 나니 수년간 애써 이룬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황구만은 술로 속을 달랠 요량으로 춘월이를 찾아갔다. 하지만 춘월이도 거의 장사에 손을 놓고 있었다. 이 엄청난 기근에 술을 마실 사람이래야 몇이나 되겠는가? 한데, 춘월이가 황구만에게 이상한 말을 했다. 며칠 전 대갓댁 청지기가 도사공과 속닥이는 소리를 들었는데 황구만의 객주에 있는 쌀을 배에 실을 의논을 하더라는 것이다. 황구만은 비로소 자초지종을 짐작했다. 어떤 작자가 자신의 재산을 노리고 벌인 굿판에 보기 좋게 당한 것이다. 누구 댁 청지기더냐고 춘월이에게 물었을 건 당연했다. 한데, 춘월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하필 장철기였다. 장철기는 수두 역관 장현의 종질(從姪)로 나이 불과 서른에 삼개와 삼전도에 여각과 객주를 여러 개 가졌을 뿐 아니라 오백 석 이상을 싣는 대선만도 대여섯 척을 가진 부자요 세력가였다. 이놈이 하루가 다르게 번창하는 양화나루를 노리고 황구만을 쫓아내려고 술책을 쓴 것이다. 장철기를 상대로 싸울 수도 고발도 할 수없었다.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황구만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러나 채 열흘도 되기 전에 또한번 유랑민이 떼를 지어 객주를 습격했다. 황구만은 맞아 죽을까 겁이 나서 집으로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객주로 나가보니 장철기네 청지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객주를 팔라는 것이다. 눈치를 보니 팔지 않으면 목숨 부지도 힘들 것 같아서 상목 스무 필을 받고 거의 강제로 객주를 뺏기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 춘월이도 술집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는데 그 사유가 황구만이 객주를 뺏긴 것과 흡사했다. 장철기네 서얼 출신의 청지기란 놈이 제 첩인 퇴기에게 춘월의 술집을 뺏어주려고 농간을 부린 것이다. 그 무렵 기근이 심해지자 금주령이 내려서 술청도 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좌포청의 포졸들이 다락에 있던 누룩과 함께 춘월이를 잡아가 엎었다. 밀주를 담그려고 누룩을 몰래 준비를 했다는 것이다. 술도 아니요 누룩만 가지고 밀주범으로 몬 것이다. 나랏 법에 밀주제조는 참형이었다. 춘월이 역시 돌아가는 판세를 번히 알면서도 그동안 모았던 토지 문서와 무명 동이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때 묻혀 일군 술집도 청지기의 첩년에게 헐값에 넘겨버렸다. 그 후 춘월이는 밤섬으로 건너와 십여 년의 모진 고생 끝에 이만큼이라도 살고 있는 것이다. 반면 황구만은 객주를 뺏긴 이후 처자를 벌어먹이느라 죽을 고생을 했었다. 등짐장수로 도성 바깥을 다니며 갖가지 물건을 팔아도 보고 남의 객주에 외거간 노릇도 했다. 그 뒤 종루의 어물전 거간을 하고부터는 약간이나마 생활이 안정이 되는 듯했다. 처자가 굶는 지경은 면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4년 전인 병진(丙辰) 년에 마마가 돌아 처자가 함께 구몰(俱沒 )한 것이다.
"그래, 그 후에 계속 이곳에서 살았는가?"
"그럼이요. 낯설지 않은 데가 이 근방 말고 있겠소?"
"그동안 자네나 나나 고생이 많았네."
"나보다야 황주인이 더 고생이 많았지요. 마마에 식구들 먼저 보냈단 얘기는 풍문으로 들었소만 아직도 혼잣 몸이요?"
"아이고 내 한 몸도 귀찮은 판에 무슨 재취를 얻겠나?"
"그래도 나보다 대여섯 살 아래니 아직 늦지 않았소. 홀애비는 늙을수록 딱한 법이요."
"일없네. 까짓 혼자 사는 게 편하네."
"참, 그 장철기 그 작자 소문은 좀 들었소? 근래에 삼개에서 코빼기도 안 보입디다."
"헛, 그놈은 한밑천 잡아서 안성에 터를 잡아 지금은 고을을 호령하고 산다네."
"천지 신명께 선 왜 그런 놈을 잡아가지 않고 두나 몰라."
"두고 보게. 그놈도 제 명에 곱게 죽게 되진 않을 걸세."
"왜 아니랍디까. 제발 그랬으면 내 속이 다 뚫리겠소."
두 사람이 삽짝을 들어서자 그때까지 아이는 마당에서 잠자리를 좇고 있었다. 일을 하면서도 연신 아이에게 눈을 떼지 않던 내촌댁이 춘월이와 아까 왔던 황구만이 같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부엌을 나왔다. 아이는 나타난 사람들이 늘 보던 사람과 아까 본 사람이어서인지 가만히 보고만 섰다. 내촌댁이 얼른 춘월이에게 다가갔다.
"항아리 이리 주세요. 아이고 뭐가 들어서 조그만 게 무겁네."
"새우젓일세. 정서방에게 배를 뺏어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 했더니 아 그놈이 손이 발이 되어서 비니 마음 약한 내가 당할 수가 있어야지. 결국 한번 더 두고 보기로 했네. 그놈에게도 올망졸망 식구가 매달렸으니 어쩔 수가 없더구만."
"애고 잘 하시었어요. 그 사람도 술만 아니면 심덕은 괜찮잖아요?"
"시끄러워, 그런 말을 누군 못해? 누구나 술 때문이지 사람 때문인가?"
춘월이는 머릿 수건을풀어 마루를 대강 훔치더니 황구만을 앉게 했다.
"저 아이 눈이 시원하게 생겼두만."
황구만이 눈을 아이에게 두며 말은 춘월이에게 했다.
"말 마시오. 어제는 내 저 아이 눈에 빠져 죽는 줄 알았소. 얘 복덩아 이리 온."
춘월이가 아이에게 눈을 돌리며 두 팔을 벌렸다. 그러나 아이는 잠자리에 눈이 팔려 있었다.
"저게 심심해서 종일 저러고 놀고 있습지요. 마님, 복덩이를 데려다 드릴까요?"
내촌댁이 춘월이의 대답도 듣기 전에 벌써 아이를 번쩍 안아 마루에 올려놓았다. 아이는 뜻밖의 상황에 내촌댁을 향해 가려 하였다. 그러자 내촌댁이 얼른 다가가 아이를 어루었다.
"우리 복덩이 괜찮아. 할머니께서 널 예뻐해 주시려고 그러신단다."
"그래 그래, 이 할미는 네가 예뻐서 그러니 무서워 말거라."
황구만과 춘월이는 아이의 얼굴과 눈을 들여다 보고 새삼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 놈 눈도 눈이지만 살결도 희니 꼭 계집애 같소. 어라? 귓볼에 점이 있네?"
황구만의 말에 춘월이가 아이의 귓볼을 살폈다.
"이건 점이 아니라 먹물 자국이요. 연비(聯臂)나 마찬가지지요. 만약을 위한 양반들 짓이지요. 보자 하니 자기 식구들만 아는 곳에다 이 짓들을 합디다."
"엉? 그럼 이 아이가 저 사람 아이가 아니란 얘긴가? 아하, 어쩐지.…"
춘월의 말을 들을 때 이미 내촌댁은 아이를 뺏어 안았다. 그리고는 부엌으로 달아나며 볼 부운 소리를 뱉었다.
"어떤 미친 양반이 아이를 버린단 말이요? 얘는 누가 뭐래도 내 새끼요."
"누가 내촌댁 아이가 아니라나? 아무도 뺏으러 올 사람 없으니 애나 잘 키워."
"허, 그 여편네 성깔 있네."
황구만이 부엌으로 모습을 감추는 내촌댁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촌댁이 저러는 데는 사연이 있소, 헌데? 어째 날 보자고 오셨소?"
"참, 이제껏 엉뚱한 말만 했었군."
"그러게 말이요. 황주인이 예까지 왔을 때는 요긴한 얘기가 있겠지요."
"그게 말일세.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동안 해오던 어물전 주릅을 그만두고 날 알아주는 사람에게 들어가 거기서 일을 보네."
"거기가 어데요?"
"자네 혹시 전에 우포청 종사관으로 있던 오일중이란 이름을 들은 적이 있나?"
"들은 게 다 뭐요. 삼개에 요즘 철릭 입은 사람들이 다 그 패가 아니요?"
"하핫, 잘 아는구만. 내가 바로 그 오회주 밑에 거행하네."
춘월이 황구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듣기로는 철릭 입은 사람들은 누구나 포도청 포교였다는데 체신이 형편없고 나이가 적지 않은 데다 촐삭대기까지 하는 황구만을 누가 써 줄까 싶어서였다.
"왜? 내 풍신을 보니 못 미더운가? 허나 내 말을 믿게나. 내 소문을 듣고 그들이 먼저 동사(同事) 하자고 찾아왔으니까. 그들은 내 경험과 이걸 사겠다는 걸세."
황구만은 말과 함께 검지로 자신의 갖 쓴 머리를 가리키며 히죽 웃었다.
"그래서요?"
"이번에 그 오회주가 하는 일이 잘 되어서 각 나루마다 여각을 내려 하네. 허고 날이면 날마다 번창하는 송파에다 팔도에서 제일 큰 술청을 내려 한다네. 지금 터를 닦고 있네. 이게 다 되면 정말 볼만할 걸세. 허니 그 술청을 자네가 맡아주었으면 해서 왔지. 옛날 광흥창 앞의 술청보다 대여섯 배가 더 클뿐 아니라 이젠 그걸 건드릴 놈은 세상에 없을 걸세. 어떤가? 자네의 심덕과 수완이면 불같이 일어날 것 아닌가?"
"말은 고맙소만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소."
"어허 내가 벌써 오회주에게 자네 말을 했으니 물릴 수가 없네."
"그거야 내가 알 바 아니지 않소? 내가 승락한 적이 없으니 말이요."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보시게."
"황주인이 권하는 일에 내게 해롭기야 하겠소만... 그럼 며칠 더 생각해 봅시다."
"그러구려. 아, 이거 너무 지체했군. 이만 나는 가야겠소. 일간 다시 들리리다."
"그러시오. 잘 가시오. 참, 찬은 없지만 저녁이나 들고 가시구랴?"
"일 없네. 물 건너서 먹으려네."
황구만이 발딱 일어나 마당을 가로지르며 부엌을 힐끗 쳐다보니 내촌댁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아마 이른 저녁을 지으려나 보았다. 황구만이 부엌에 고개를 들여밀며 가만히 말하였다.
"눈은 몰라도 아이의 살피듬은 자네를 닮았으니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간다면 누가 모자 사이를 의심을 하겠는가? 주인에게 이사를 가자고 말을 보태게나. 그리고, 모든 건 주인에게 맡기게. 잘 있게. 나는 가네."
"생긴 것보담은 심덕이 무던한 이구려, 잘 가시오."
듣고 보니 마음에 드는 말이라 황구만에 들으라고 내촌댁도 한마디를 뱉었다. 그러자 뒤에서 보고 있던 귀밝은 춘월이가 몇 마디를 보탰다.
"보자 하니 과부 홀애비가 벌써 눈이 맞아서 아귀가 척척 맞아떨어지는구나. 그새 남의 속살을 들여다 본 것처럼 말하는 걸 보니 말이야. 쯧쯧."
"아이고, 망칙한 말씀을 마시어요. 복덩이가 들어요."
"하, 아이라면 그저... 허기사 말조심해서 나쁠 거야 있겠나."
"헌데 마님, 방금 그 사람이 말하던 송파가 그렇게 장사가 잘 되옵니까?"
"왜? 황주인 말대로 아일 데리고 낯선 곳으로 이사를 가고 싶은가?"
"마님이 가신다면 쉔네도 따라가옵지요."
"그게 그 말이지. 결국 황주인이 자네에게 약을 멕인 꼴이구만."
"예? 무슨 약을요?"
"시끄럽네. 내 일간 송파를 두 눈으로 보고 나서 정할 것이니."
그 시각에 발 빠른 황구만은 벌써 물가에 닿아 타고 왔던 배의 사공을 찾아 보았다. 그러나 황구만이 지체하자 기다리기 진력난 사공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물가에는 대여섯 척의 배가 있었으나 삼개로 건너가는 배는 없었다. 황구만이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는데 늙은이 하나가 짧은 노 두 개를 매고 물가로 오더니 작은 주낙배를 풀어 물에 띄웠다.
"이거 보우, 노인장, 나 좀 건너주오."
"그러시지요. 소인도 건너려던 참이니까요."
황구만이 뱃바닥에 한쪽 발을 올리자 작은 배가 좌우로 몹시 흔들렸다.
"에구, 배가 작아 어째 불안하오. 괜찮겠소?"
"허허, 가만히 앉았으면 별 탈이 없을 겝니다. 평소에도 다 큰 손자와 같이 탑지요."
노인의 말에 다소 마음을 놓은 황구만이 가롯대에 앉자 노인이 배를 몰아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노인의 노 젖는 솜씨가 좋아서 빨랫줄 같이 쭉쭉 나아간 배는 순식간에 강심을 지났다. 그리고 이제 곧 나루에 닿을 판이었다. 나루에는 큰 배가 한 척 닻을 내렸는데 배가 워낙 큰지라 연안 가까이 붙지를 못해 뭍에서 대여섯 발 떨어져 있었다. 뭍에서 배까지 발판을 놓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인지 뭍에 있는 수백 개의 빈 새우젓 독을 작은 배들이 실어 큰 배로 옮기고 있었다. 노인은 그 배들을 피할 요량으로 큰 배를 비켜 그들과 떨어진 곳으로 배를 몰았다. 바로 그때 큰 배에 다 올라갔던 빈 독 하나가 기우뚱하며 밑으로 떨어져 작은 배의 사공이 맞고 말았다. 머리를 맞은 사공은 단번에 휘청 넘어져 물속에 처박혔다. 그걸 본 황구만이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발딱 일어났다. 황구만이 일어서자 가득이나 작은 주낙배가 그만 중심을 잃었다. 좌우로 마구 흔들린 배로 인해 황구만은 어어 하는 사이 물로 벌렁 넘어졌다. 황구만은 워낙 헤엄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몇 번 허우적거리다 곧바로 바닥으로 빠져들었다. 다급해진 노인이 노를 내밀었지만 정신없는 황구만의 눈에는 황천만 보일 뿐이었다.
"아이고, 사람이 물에 빠졌다."
누군가 뭍에서 소리를 지르자 사람들이 몰리는데 웬 젊은 놈이 옷을 입은 채 물로 첨벙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황구만이 가라앉은 곳까지 휘적휘적 헤엄질을 하더니 물속으로 잠수를 했다. 물가에 모인 사람들의 눈이 젊은 놈이 들어간 수면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사이에 노인은 배를 물가에 대었다.
"아앗, 나왔다."
"정말."
물 위로 젊은 놈의 머리가 솟고 이어 그의 손에 상투가 잡힌 황구만의 얼굴이 보였다. 황구만은 죽었는지 기절한 것인지 인사불성이었다. 젊은 놈은 일 같잖게 다시 휘적휘적 헤엄을 쳐 황구만을 뭍으로 끌어다 눕혔다. 곧이어 먼저 물에 빠졌던 사공이 다른 사공들에 의해 뭍으로 옮겨져 황구만과 나란히 뉘어졌다.
"이거, 의원을 불러와야 하겠는걸?"
"그러게 말이야."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웅성대기만 할 뿐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다시 젊은 놈이 나섰다. 먼저 배가 새우젓 독만큼 부른 황구만을 자신의 무릎에 엎어놓고 가슴과 배를 눌러 물을 토하게 했다. 황구만의 입에서 물이 쏟아지더니 마지막엔 아침에 먹은 콩나물 대가리까지 쏟아냈다. 한참을 쏟아내던 황구만이 문득 정신이 돌아와 캑캑대며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었다. 반면 옆에 뉘인 사공은 머리에서 피만 조금날 뿐이고 물도 먹지 않았건만 사공들이 모여 뺨을 때리고 가슴을 문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 사람들을 비집고 의식을 잃은 사공에게 다가온 거지 차림의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송윤호였다. 송윤호는 사공의 코 끝에 손을 대 본 후 머리와 이곳저곳의 상태를 살피더니 모여든 사공들을 향해 입을 떼었다.
"이 사람을 살리려면 어서 방으로 옮겨 젖은 옷부터 갈아입히고 몸을 문질러야 하오. 화급을 다투는 일인즉 서둘러야 하오."
"의원이시요?"
사람들 중에 누가 문득 물었다.
"의원은 아니나 의약의 묘리는 아는 사람이오. 이 사람은 지금 머리에 타격을 받아 기맥이 막혔소. 이대로 둔다면 소생하기 어려울 것이외다."
사공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하는 듯했다.
"좋소. 저 주막 봉로에 데리고 가리다. 허니 먼 곳에 있는 의원을 부르러 가느니 당신이 가서 좀 봐주시오."
"처지가 급한 듯하니 그러리다. 얘, 거칠아 저 사람들을 좀 도와주거라."
주인의 말이 떨어지자 옆에 있던 거칠이가 선 듯 나서 사공을 가뿐히 안아 들었다. 사공 하나가 급히 앞장을 서서 주막으로 향했다.
"여게, 의원. 나도 골치가 아프고 몸이 떨려 죽겠소. 나도 좀 데려가오."
황구만이 돌아서려는 송윤호를 애원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허허, 당신은 젖은 옷을 갈아입고 뜨거운 국만 한 대접 마시면 그걸로 끝이요."
"이런 제길, 옷을 갈아입재도 방으로 가야하고 국물을 얻어 마시드래도 부엌 딸린 집으로 가야 하니 하는 말 아니요? 그런 곳이 주막 말고 어디 있소?"
"그렇다면 당신이 알아서 따라오시오."
황구만은 자기를 구해 준 젊은 놈이 배를 얻어 탄 노인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까 배에서 말한 노인의 손자가 저 젊은이인 모양이었다.
"이보게 젊은이 자네도 젖은 옷을 말려 입어야 하지 않나. 그러니 나를 저 사람들 가는 곳으로 좀 데려다주게."
"나는 괜찮소. 할아비하고 집으로 가서 갈아입겠소."
젊은 놈이 돌아서자 노인이 손자에게 뭐라 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젊은 놈이 시적시적 다가와 황구만을 안고 송윤호의 뒤를 따랐다.
"자네 이름이 뭔가?"
안겨가는 황구만이 물었다.
"남의 이름 알아 무엇하오?"
"아따, 퉁명스럽게 나오는구만. 아, 생명의 은인인 셈인데 이름 정도는 알아야 나중에 보은이라도 할 것 아닌가?"
"은인이면 은인이지 은인인 셈은 또 뭐요? 허고 보은 그딴 것 소용없소."
"그래도 이름은 알아야지."
"이름은 동이요."
"무얼 해 먹고 사나?"
"닥치는 대로 해 먹고 살지요. 주낙으로 고기도 잡아 팔고 나루에 나와 쌀섬도 지고 오늘처럼 새우젓 독을 나를 때도 있소. 한데, 남이 하는 일은 왜 묻소?"
"음, 옛날의 나와 흡사하고만. 자네가 마음에 들어서 그러네."
"힝, 그런 소리 할 시각에 개헤엄이라도 배우시오."
"소싯적에 개헤엄질 못하는 사람 보았나?"
"그럼 아까는 강바닥에서 바늘을 찾고 있었소?"
"그야, 이 엽전 주머니 때문이지. 이 쇳덩이가 끌어당기는데야 이길 장사가 있나?"
"그럼 버리지 그랬소?"
"하, 모르는 소리, 죽어 염라대왕에게 가더라도 쇠푼은 있어야지. 이걸 놓으면 만사 끝장이네. 헌데 내 갓 못 봤나?"
"힝, 물에 빠진 놈 건저주니 내 보따리 내놓으라는 말이 이래서 생겼구려. 양반 갓도 아닌 손바닥보다 작은 그딴 걸 써서 무얼 하겠다고 찾소?"
"모르는 소리 말게. 그나마도 상것은 못쓰지 않나?"
"나는 얼치기 양반보다 상것이 마음 편하오."
"에고, 으슬으슬 추워지는구만, 말 그만하고 어서 가세."
"괜히 할아비 말 듣느라 예까지 안고 왔네. 옜소, 그만 내려서 걸으시구려."
"에게게, 젖은 옷에 흙 묻네."
황구만을 땅에다 엉덩이를 붙여 척 내려놓은 동이가 제 할아비의 배를 향해 가버렸다. 척척한 엉덩이를 털며 일어난 황구만이 버선발로 송윤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주막에 도착해 봉놋방에 들고 보니 독에 맞은 사공의 젖은 옷을 벗기고 있었다. 황구만도 구석에 쭈구리고 앉아 허리춤에 찼던 담뱃대와 엽전 주머니를 끌러놓고 옷을 벗었다. 잠시 후에 따라왔던 사공이 주막 주인의 여벌 옷을 빌려왔다. 그리고는 벗은 환자에게 그 옷을 입히는 것이다. 혹시나 하고 기다리던 황구만은 벗은 몸을 웅크리고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누구 하나 황구만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니 낭패였다.
"이보게. 내 옷은 없나?"
황구만이 사공에게 물었건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거칠이가 황구만을 돌아보더니 그의 젖은 옷을 뭉쳐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거칠이 다시 방으로 들어섰으나 빈손이었다.
"아니? 내 옷도 한 벌 빌려 올 것이지. 빈손이란 말인가?"
"없답디다. 여벌 옷을 두벌이나 가진 백성이 어디 흔하우?"
"저런, 춥기까지 한데 이걸 어째?"
"옷은 짜서 널었으니 금세 마를 게고 된장 푼 물을 데우고 있습디다. 조금만 참으시오."
"고마우이. 하, 이거. 일진이 사납구만."
윗 켠에서는 송윤호가 혼절한 사공의 손등과 발등에 원침(圓鍼)을 꽂고 있었다. 몸에 막힌 기를 흩으려는 것이다. 이어 사공의 머리를 살핀 송윤호가 참침(鑱鍼)을 꺼내 머리와 목덜미에 가볍게 시침을 하였다.
"됐다. 이제 두어 시각 후면 깨어날 것이다."
"나으리, 이 사람은 머리를 다쳤으니 힘들 것 같사옵니다. 그때 막내 도련님도...."
거칠이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지난봄 축석고개에서 언덕 아래로 구른 보일이가 깨어나지 못하고 하늘로 간 것을 생각한 것이다. 순간 송윤호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평상으로 돌아왔다.
"그때도 내가 혼절해 있지 않았다면 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사람도 보일이와 같은 증상이니라. 이 침은 화살 모양이라 전두침(箭頭鍼)이라고도 하는데 머리와 몸에 고열이 있거나 뇌로 가는 혈도가 일시 막혔을 때 쓰느니라. 이걸로 시침을 했으니 오래지 않아 깨어날 것이다."
송윤호가 침통에 침을 모아 넣으며 거칠에게 참침을 들어 보였다. 그러나 거칠이는 침은 보지도 않고 벌떡 일어나더니 황급히 말을 쏟았다.
"아이고, 참. 새우젓 독을 나르다 말았네. 나으리, 쉔네는 이만 가옵니다."
거칠이 문 밖으로 나가자말자 주막 주인이 된장국 뚝배기를 갖고 와 벌거벗은 황구만의 앞에다 놓았다. 황구만은 아랫도리가 쑥스러운 듯 히죽 웃더니 나무 숟가락을 잡고 국물을 퍼 넣기 시작했다. 반쯤 퍼 넣은 후 몸에 열기가 돌자 아예 뚝배기를 들어 후후 불어가며 마셔대더니 이마에 땀까지 돋았다.
"아, 이제야 살만하네. 헌데 이놈의 옷은 언제나 마르나? 갈 길이 바쁘구만... 에이, 쯧쯧."
황구만이 옷 타령으로 고시랑 거리는 중에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철릭 입은 사내 하나가 쑥 고개를 들이 밀었다.
"여기 황주릅 있소? 어? 황주릅께선 홀딱 벗고 지금 뭘 하고 있소? 물에 빠졌다더니 옷이 물에 녹아버렸소? 아니? 이제 보니 탱자도 녹아 없어졌구려."
"시끄럽네. 잔소리 말고 밖에 옷이 말랐나 그거나. 좀 봐주게."
"알았소."
황구만이 두 손으로 앞을 가리며 더욱 몸을 웅크렸다. 문이 또 열리더니 철릭의 사내가 옷 뭉치를 항구만에게 훌쩍 던젔다.
"에게, 젖은 그대로 아닌가? 주 포교 자네 이럴 텐가?"
"늦었으니 어서 입기나 하오. 내가 여길 들리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소?"
"같이 가자는 건 좋지만 이걸 입고서야 고뿔이 걸릴 것 같으니 그러지."
"고뿔 걱정까지 하다니? 옷이야 어차피 입고 갈 동안 다 마를 것 아니요."
황구만과 주흥식이 노닥거리는 사이 침을 맞았던 사공이 설핏 눈을 떴다. 따라왔던 사공이 눈 뜬 사공의 어깨를 흔들며 반가움을 표했다.
"아이고, 의원님, 이 사람 정신이 드나 봅니다."
"의식이 돌아왔다고 다 나은 것은 아니니 그대로 두시요."
"거의 죽은 사람을 살린 걸 보니 보통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요. 이 사람의 운수일 것이오. 깨어났으니 나는 이제 가겠소."
송윤호가 일어나자 그 사이 옷을 다 입은 황구만이 누운 환자를 내려다보며 한마디를 거들었다.
"의원님 말씀을 들었는가? 자네나 나나 그 운이란 것이 사람을 잘 만나야 오는 운일세. 그러니 잊지 말고 보은들 하세나."
송윤호가 먼저 방문을 나서니 황구만과 주흥식이 따라나왔다.
"이걸 신으시오. 주인에게 얻은 새 짚신이요."
"에그, 그나마 다행일세."
황구만은 주막 주인에게 국물과 짚신값으로 서 푼을 건넨 다음 주흥식과 함께 나루로 바삐 걸었다. 송윤호는 도선장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운 움막으로 향했다. 움막은 송윤호와 거칠이가 이틀에 걸쳐 지은 것으로 두 사람이 비바람을 간신히 피할 정도였다. 송윤호와 반대 방향인 나루로 향하던 황구만과 주흥식은 기다리던 남치원의 배에 올라앉았다. 둘이서 젓게 만든 날렵한 배로 기찰선을 닮았으나 선두가 그보단 높았다.
"원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생각해야지. 진력나 죽는 줄 알았네."
남치원이 주흥식을 바라보며 볼멘소리를 했다.
"아, 이 황주릅이 벌거벗고 있으니 난들 어쩌겠나?"
"하핫, 척 보니 그런 것 같구먼. 황주릅, 정말로 용궁 구경을 했더란 말이요?"
남치원이 황구만의 얼굴을 요모 조모로 살피며 이죽거렸다. 자세히 보면 쥐어짜서 구겨지고 젖은 옷에 갓도 없는데 물에서 끌어 올려질 때 풀어진 상투가 봉두난발이었다.
"이거, 벌써 삼개에 애 어른 모르는 사람이 없게 소문이 돌았나 보군."
"허, 소문엔 새우젓 독에 빠졌답디다."
"실없는 소리 그만들 두게. 한데 회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가 뭔가?"
"우린들 아오만 이번에 각 나루의 책임자를 새로 정한다는 소린 들었수."
"아니? 나 같은 경우는 삼개에 나온지 며칠 되지도 않는데 또 바뀐단 말인가?"
황구만은 고개를 갸웃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삼개를 맡은지 불과 보름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가보면 알겠지요. 그래도 황주릅은 회주님의 칭찬까지 들었으니 자리 보존에는 지장이 없을 것 아니요?"
"헛, 그런 일이야 자네들인들 못했을라고. 나 말고 주 포교에게 맡겼어도 그랬을 것 아닌가? "
"말 마시우. 그통에 보름 동안 행주나루엔 좁쌀 한 톨 맡은 여각이 없수."
행주나루에 나가 있던 주흥식이 황구만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문일평을 도와주라는 오일중의 명을 받은 황구만이 각 나루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러 온 물주를 구슬려 짐을 실은 배를 송파로 빼돌린 것이다. 황구만이 물주들에게 내세운 제안은 간단했다. 물종이 무어든 간에 반드시 열흘 이내에 거래를 성사시킬 뿐 아니라 보관료도 없고 그동안의 숙식도 무료에다 거간비도 다른 곳의 반만 받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만약 거래가 약속한 날까지 되지 않을 경우 전량을 여각 주인이 제값에 사주겠다고 했다. 마다할 물주가 있을 수 없었다. 곡식 실은 배는 물론 특히 어물을 실은 배는 황구만의 제의에 입이 벌어졌다. 소금을 뿌렸다고 하나 상하기 쉬운 물종이라 한시라도 빨리 거래가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단 며칠 사이에 송파 문일평의 고방은 물건이 가득 쌓였다. 문일평은 황구만이 약속한 기한을 지키기 위해 시전의 제 아비와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어물 따위는 그날로 즉각 즉각 처분하니 물주들이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황구만으로 인해 오일중은 문일평과 그의 아비에게서 받은 돈값을 한 것이다.
"옛날 사귀어 두었던 물주들이 내 안면을 보고 맡긴 것이지 내 수완이 뛰어났던 건 아닐세. 그러고 보면 이 일엔 신용이 제일일세."
"겸손이 지나치오. 우리야 포교 시절부터 남의 것 뜯어먹고 살아서 그런지 요즘도 돈냥을 지닌 놈들을 보면 그저 오랏줄부터 찾게 됩디다."
"히힛, 제 버릇 개 주겠는가?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져야 할걸? 이번 강화의 심첨지 일을 보자니 회주님께서도 상고(商賈)의 묘리를 터득하신 것 같더구만."
"그러실 게요. 불어나는 상조회 식구들을 먹여 살리자면 결국 그 길 밖에 더 있겠소?"
남치원이 한숨을 가늘게 쉬었다. 물을 거스른다고는 하나 둘이서 네 개의 노로 저어대는 배는 화살처럼 빨랐다. 벌써 서빙고를 지나 윗강에 이르렀다. 얼마 후 두뭇개에 이를 무렵이었다. 그들이 가는 방향 앞 쪽에 배가 한 척 올라가고 있었는데 선미에 앉아 몸을 잔뜩 기울여 전방을 살피던 황구만의 눈에 철릭 입은 사람이 보였다.
"앞의 배도 상조회 밴가 본데 멀어서 누군지 모르겠군."
뒤로 돌아앉아 노를 젓던 주흥식과 남치원이 동시에 노질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선두에 앉은 자는 최 포교가 틀림없군, 저 키를 보면 알지."
"그렇군, 앉아서도 다른 사람보단 머리 하나는 더 큰 걸 보니.... 이보게 따라 잡세."
"그럴까?"
두 사람이 박자를 맞춰 노를 저으니 배는 흡사 쫓기는 비오리처럼 빨라졌다. 그러자 후미 쪽에서 노를 젓든 윤기출이 이쪽을 보고 있었던 듯 배의 속력을 줄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도 최 포교 자넨 줄 알았네. 헌데 자네들 셋 뿐인가?"
"광나루에 나간 김포교 말고는 우리가 다 아닌가?"
"노량에 나간 신기림이 있지 않나?"
"아, 그 동무는 낮에 신탄을 실었던 빈 배를 타고 먼저 갔네."
"그럼 잘 되었군. 우리들도 어서 가세나."
두 배가 노질과 동시에 물을 거슬러 나아갔다. 최두수가 탄 배에는 윤기출과 서빙고 나루의 방 포교가 노를 잡고 있었다.
"이 쪽만 노를 잘 젓는 줄 알았더니 윤 포교와 방 포교의 솜씨도 보통이 아니구먼."
황구만이 최두수가 탄 배를 향해 칭찬의 말을 던지자 방 포교가 받았다.
"그야 이 몸은 애초에 강가에서 태어나 물에서 자란 몸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요."
"내가 보니 여기 주 포교와 남 포교도 노를 잘 젓던데 한번 겨루어보지 그러나?"
"그럼 그럴까? 어이 주 포교, 한번 덤벼 보려나?"
"좋네. 나중에 졌다고 아녀자처럼 질질 짜지나 말게."
"누가 할 소리. 그럼 아차산 밑 용바위까지로 하지?"
"진 쪽이 이긴 사람들에게 형님을 게워 올리길세."
"자네가 내게 형님 소리를 못해 안달이로군."
"헛 누가 할 소리."
두 배는 황구만의 신호가 떨어지자 전 속력을 다해 노를 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엇비슷하던 배가 반 마장쯤 가자 황구만이 탄 배가 윤기출과 방 포교가 젓는 배에 밀리기 시작했다. 주흥식과 남치원이 죽을힘을 다해 노를 젓건만 간격은 점점 벌어져 아차산 아래에 이르렀을 때에는 열 발도 넘게 벌어져 있었다.
"오, 아우들 이제 오는가? 자, 우리가 이겼으니 형님이라 불러 보게."
선두에 앉았던 최두수가 약을 올리자 주흥식과 남치원은 숨을 헐떡이느라 말을 못하니 황구만이 나섰다.
"주 포교와 남 포교는 형님 해도 되겠지만 내 나이 마흔일곱이네. 낫살이나 먹은 내게 자네들이 형님 소리를 들어 무엇 하나? 나는 그냥 넘어가세."
"아니 되오, 겨루기를 꼬드긴 당사자가 황주릅 아니오? 어서 호형하시오."
"이런 제길, 좋네. 졌으니 별 수 있나. 호형하지. 형님 이긴 것 감축하오. 쩝."
"하하하, 고맙네 아우, 헌데 잘 나가다가 끝에 쩝 소린 뭐유?"
"비상이라도 먹고 싶다는 소릴세."
모든 사람이 웃으니 황구만도 따라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탄 배가 삼패(三牌)쯤에 이르자 해가 지기 시작했다. 일행은 새삼 힘을 내어 노를 저었다. 상제벌까지는 아직 사십여 리가 남았으니 한밤중이나 되어야 도착할 듯싶었다. 게다가 이제부터는 물길이 가파르고 여울이 세 곳이나 있어 밤에는 위험하기까지 한 곳이었다. 얼마를 거슬러 오르자 첫 번째 여울이 나왔다. 그들은 가능한 한 배를 흐름이 약한 강가로 붙었다. 대신 얕은 곳이어서 물밑 바위를 조심해야 했다.
"황주릅이 앉은 가롯대 밑을 보시오, 회가 있을 게요."
황구만이 가롯대 밑으로 손을 넣어보니 싸리회가 잡혔다. 황구만은 회에 불을 붙이려고 부싯기가 든 주머니를 꺼내다가 아차 했다. 아까 물에 빠졌을 때 몽땅 젖어 연초와 함께 부싯깃이 아직 마르지 않은 것이다.
"누가 부싯깃 가진 사람이 있나? 내건 몽땅 젖었네."
"에이, 황주릅에게 불이 없다면 회를 밝히긴 그른 것 같소. 우리들 중엔 연초를 태우는 사람이 없소. 포도청에 있을 때부터 그랬으니까. 회주님이 피우지 말라 셨소."
"아니, 연초를 피지 말란다고 안 피우다니? 이거야말로 심심할 때 피는 심심초 아닌가?"
황구만의 말에 주흥식이 픽 웃었다. 이어 남치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헛, 주인 말을 듣지 않는 개를 길러 어디다 쓰겠소? 허고 상관의 말을 듣지 않을 바엔 어째 남의 밑에 있겠소? 우린 오회주님이 명령을 내리시면 죽음도 불사하는 사람들인 걸 여태 모르오?"
이어서 어둠 속에서 주흥식의 목소리가 들렸다.
"애초에 포교 출신도 아닌 황 거간을 우리 상조회에 받아주고 차별을 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소. 회주님이 황 거간을 같은 회원처럼 대하라고 하셨으니 명령을 받은 우리는 서로의 나이나 지체를 생각하지 않고 동무로 대하는 것이란 말이요."
황구만은 가슴이 뜨끔했다. 주 포교의 군말이 붙여지지 않았더라도 알만 했다. 황구만이 처음 오회주 밑으로 왔을 때부터 이제껏 누구 하나 나이 많다고 도외시하는 사람도 없었고 포교들의 밥인 일개 거간인 자신을 괄시하는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송파에서 죽은 마개출 포교만 하더라도 자신이 하는 말을 고분고분 잘 따르지 않았는가? 황구만은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이제껏 자네들 가운데 연초를 태우는 사람을 보지 못했네. 아, 잘 되었네. 이참에 나도 연초를 끊어야겠구먼."
"글쎄, 당신이 연초를 태운다고 핀잔은 주지 않을 테니 그냥 하던 대로 피우시오. 괜히 작심삼일로 스스로 망신을 사지 말고 말이요. 허허."
주흥식의 말에 황구만이 허리에 꽂았던 담뱃대와 연초 쌈지를 어두운 강에다 휙 내던져버렸다.
"두고 보게. 작심 삼십 년일세."
결국 그날 밤 세 곳의 여울을 거슬러 오르느라 여섯 사람은 죽을 고생을 했다. 급류를 피해 강가에 붙으니 배가 바닥에 닿아 몇 번이나 뒤집힐 뻔한 것이다. 그러다 얕은 곳은 아예 내려서 배를 끌고 올라야 했다. 그들이 상제벌 오회주의 집에 이르렀을 땐 거의 자시(子時 23-01시)가 되었을 시각이었다. 그러나 오회주의 사랑에는 그때까지 까무룩 한 불빛이 지갯문에 비치고 있었다. 인기척이 나자 안에서 문이 열렸다.
"이제들 오느냐? 늦었구나. 쇠돌이네 집으로들 가거라. 내일 아이를 보내마."
말을 마친 오일중이 문을 닫았다. 여섯 사람은 조용히 물러 나와 쇠돌이 네로 향했다. 쇠돌이네 집을 상조회 회원의 숙소로 사들인 것이다. 쇠돌이네 집으로 간 일행이 불 없는 방을 더듬으니 먼저 온 두 사람이 자고 있었다. 보나 마나 광나루의 김포교와 노량의 신포교일 터였다. 황구만을 비롯한 모두는 젖은 고의를 짜서 입고 눈을 붙였다. 다행히 먼저 온 포교들이 군불을 지폈는지 삿자리가 제법 뜨뜻해서 좋았다. 이튿날 날이 밝아 일어나 보니 부엌에는 아낙네 둘이 밥을 짓고 있었다. 오일중의 부인이 동네 아낙에게 시킨 일이었다. 모두들 밥상도 반찬도 없이 된장국에 밥을 만 뚝배기를 받아 아침을 먹었다. 그나마 간밤에 어두운 여울을 오르느라 혼이 난 사람들에게는 꿀맛이었다. 아침을 마친 얼마 후에 어린 종 아이가 그들을 부르러 왔다.
"나으리께서 모이시랍니다."
"알았니라. 자 다들 가세."
윤기출이 앞장을 서자 모두들 우르르 그 뒤를 따랐다. 오일중의 사랑에 이르자 마루에는 이미 노탁우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덟 사람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일제히 노탁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노탁우는 웃음띤 얼굴로 일행을 돌아보다 황구만의 꼴을 보았다.
"사랑이 좁으니 회주님께 선 절로 대신해라. 허고 황주릅 자네는 갓을 어쨌는가?"
"그게, 사고로다가... 그만."
"알았네. 자, 들어들 가지."
오일중의 사랑방이 두 간 밖에 되지 않아서 장정 여덟이 들어서니 방안이 그들먹했다. 그들은 선 채로 절을 한 후 비좁으나마 끼어 앉아 오일중의 얼굴에 눈을 쏟았다.
"간밤에 먼 길 오느라 고생들 했다. 이렇게 모이라고 한 것은 너희들에게 새로 소임을 맡기려 함이다. 그동안 너희들이 고생한 보람이 있어 이번에 여각과 객주가 여럿 생겼다. 허니 이제부터는 우리들이 직접 여각을 할 것이니라. 그래서 너희들을 책임자로 배치하려는 것이니라. 이보게, 노부장, 자네가 알려주게."
"예. 그럽지요. 에, 각 나루의 여각과 객주의 주인을 알려주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각자가 맡은 여각이나 객주에는 우리 상조회의 많은 식구들의 목구멍이 걸려 있다는 것을 각골명심해야 한다는 것일세. 그러니 자신의 능력과 수단을 모두 쏟아서 최대의 이문이 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야. 그러자면.…"
"가만, 노부장은 잠시 멈추게."
오일중이 갑자기 노탁우의 말꼬리를 자르며 황구만을 바라보았다.
"여각이나 객주가 주먹으로 해결 날 일이 아닌 바엔 객주로 치부를 해 보았던 황주릅이 이문이 가장 많이 남는 묘리를 이 사람들에게 말하게 하게."
"그럽지요. 황주릅, 말해보게."
갑자기 지명을 받은 황구만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물건을 맡는 방법을 바꿔야 합니다."
"방법을 바꾸다니? 무슨 말인가?"
노탁우가 모를 일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여각은 거간비나 보관료나 받아서는 이문이 별로 크지 않다는 말씀 입지요. 잘 팔릴 것 같은 물종을 맡기면 거간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사서 향시 상인에게 되팔면 이문도 크지요. 물주와 직접 거래를 하니 거간비도 없는 데다 빨리 사서 빨리 팔수록 다음 물건을 사고파는 횟수가 늘어서 이문 또한 많아집니다."
"옳거니, 그런 방법이 있었군. 그런 여각은 여태 보지 못한 것 같군. 또?"
노탁우가 무릎을 치며 호기심 어린 눈을 빛냈다.
"또 지금껏 여각과 객주는 맡는 물종이 달랐습죠. 여각은 부피가 큰 곡식이나 어물, 연초 등속을 맡고 객주는 좀 더 작은 물종을 맡았습니다. 허나 사실 여각이나 객주가 하는 일이 오십보백보 올시다. 그러니 우리들은 그 둘을 구별 말고 무슨 물건이든 맡을 수 있게 마방과 고방을 늘리고 봉놋방도 큼직하게 짓자는 말입니다. 그러면 물건을 맡기는 물주가 아니더라도 잘 곳 찾는 나그네가 꾈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들에게 술과 밥을 파니 주막도 겸하는 셈이지요. 술과 밥은 상조회원의 안식구들이 맡으면 그것만으로도 밥은 먹을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오, 그것 괜찮은 생각일세. 회주님. 저 사람 말이 근리한 바가 있사옵니다."
노탁우가 얼굴에 화색을 띄우고 오일중을 돌아보았다. 방안 가득 모여 있던 포교들도 눈을 껌벅이며 그런 수도 있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황거간은 계속하라."
오일중의 말에 황구만이 눈을 깜박이다가 하던 말을 계속했다.
"시전이 도성 안에서의 난전을 금하므로 근래에는 도성 밖의 장시가 훨씬 풍성합니다. 이제부터는 상조회에서도 작은 상단이라도 꾸려 장시를 찾아다니며 물건을 팔아야 합니다. 물건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팔면 되니 그것만도 유리합지요. "
"시전의 부탁을 들어주면 거기서도 돈냥이 들어오지 않는가?"
"시전과 거래를 하면서 한편 우리 장사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시전 상인과 거래를 하되 물건값만은 그들에게 휘둘려서는 안됩니다. 시전의 폐단이 바로 물주들을 갖은 협잡으로 골탕을 먹여 물건을 거저 뺏 듯 사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전에서 무슨 공갈이 들어와도 제값을 받는 버릇을 들여야 합니다. 그들과의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나 그들이 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졌으니 그럴 처지가 못되지요. 그러나 지난번 강화의 심첨지처럼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버티면 그들도 장사를 해야 하니 버릇을 고치겠지요."
"심 첨지와 한 부자, 권 부자 모두 그들 어선에서 잡히는 석수어는 모조리 우리가 맡아 처분키로 했으니 이젠 시전의 어물전도 우리의 눈치를 보게 될걸세."
"예? 그러다 시전에 밉보이면 어쩝니까?"
"밉 보이다니?"
"그들도 그 세 부자의 굴비를 도거리로 맡고 싶었을 것 아닙니까?"
"헌데?"
"그러니 그들은....."
"잠깐."
또 한번 오일중이 황구만의 말을 끊었다.
"황주릅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느니. 황주릅 말이 맞네. 우리가 그들의 물량을 도거리를 했다 해도 표를 내지 않는 것이 좋겠네. 우리가 굴비까지 도거리를 한 것을 알면 우리에게 부탁을 하기 전에 경쟁자로 알 걸세. 그리되면 또 조정을 움직여 우리에게 타격을 입힐 거란 말이야."
"소인의 말이 바로 그 것입지요. 가득이나 시전이 날로 쇠하여 나라에 역(役)을 지기도 버거울 지경이온데 우리들 손에서 어물이 통제된다면 보고만 있겠습니까?"
"잘 봤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했었느니. 이제부터 어물을 실어 낼 때는 그들 세 부자의 이름으로 거래를 하도록 하게. 그리고 값만 맞다면 어물만큼은 시전에 우선적으로 넘겨주게. 그래야 어물전 수령위인 문기수도 우리를 고맙게 여길 것 아니겠나."
"예, 명심합지요."
오일중의 말에 노탁우가 대답을 대신하자 모든 포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빛을 보였다. 다시 황구만의 말이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지난번 마포교와 같이 송파엘 들려 보니 앞으로 송파야말로 진정한 장시의 으뜸이 될 조짐이 보이옵디다. 문기수가 그의 아들을 왜 송파로 보냈나를 알았습지요. 허니 주점만 크게 짓지 말고 객주를 겸한 주점을 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것도 옳은 말이로세. 그러지 않아도 회주님께서 일간 한번 그곳에 가시려 하신다네. 허면 이제 여각 주인 될 자를 정할까요?"
"아닐세 잠깐만 더 기다리게."
노탁우가 여각 책임을 맞을 명단을 부르려 하자 오일중이 할 말이 남은 듯 또다시 일동을 돌아보았다.
"그보다 우선 황주릅의 말대로 여각과 객주를 구분하지 말고 그냥 객주라 칭하기로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허고. 객주의 주인은 고방(庫房)의 책임자이니 우리들은 방장(房長)이라 부르기로 하세. 이제는 포교란 말이 사실 어울리지 않는 말 아닌가?"
"저는 회주님 말씀에 동의합니다만 자네들은 어떤가?"
"예, 좋습니다."
이제껏 끽 소리 없이 듣고만 있던 포교들은 입을 뗄 기회를 만나자 노탁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참, 황주릅이 갔던 일은 어찌 되었나? 춘월이가 그러마 하던가?"
노탁우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은 말이었다.
"생각을 해보마라고 했지만 승낙할 것은 뻔한 일입지요."
"음 잘 되었군, 그럼 이젠 정말로 객주의 책임자인 방장을 정할 것이네."
노탁우는 미리 준비를 한 듯, 한지를 배배 꼰 심지들을 손에 펼쳐 들었다.
"복불 복일세. 각 나루마다 물종과 물량이 달라 이문도 다를 것이니 누구를 정하기도 뭣하니 제비 뽑기로 정하는 것일세. 마음에 들지 않는 나루가 걸리더라도 불평이 없어야 하네. 알았으면 한 사람씩 뽑게."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주흥식이 먼저 하나를 뽑았다. 다시 최두수가 기다란 팔을 뻗어 하나를 뽑았다. 그러자 너도나도 하나씩 뽑아 쥐었다.
"자 풀어들 보게."
"이런, 나는 광나루로군. 집 팔고 아차산 아래로 이사 갈 팔자를 뽑았군."
먼저 뽑았던 주흥식이었다. 이어서 윤기출의 볼멘소리가 나왔다.
"서빙고라니? 하필 서빙고라니...."
"불만은 없기루다 하지 않았나?"
"불만이 아니올시다. 처갓집이 그곳이니 이젠 마누라가 뻑하면 처가로 내뺄 것 아닙니까? "
"하하하, 처남들이 무서우니 앞으로 부부 싸움은 끝이로군."
노탁우의 말에 모두 웃는 가운데 남치원은 동작 나루, 최두수는 노량 나루, 김찬이는 서강나루, 신기림이 양화나루로 나왔고 방인근이 송파나루였다. 끝으로 황구만은 다시 삼개나루가 걸렸다. 방안이 잠시 소란했다.
"엇 흠."
오일중의 기침 소리에 모두들 입을 닫고 자세를 바로 했다.
"객주가 정해졌으니 각자는 맡은 바 소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참, 송파를 뽑은 방장이 누구냐?"
"소인 방인근이옵니다."
"음, 송파에 아직 우리 객주가 없는 것은 너도 알 것이다. 지금 터를 닦는 주점 짓는 일을 감독하라고 송파를 넣었으니 그리 알고 일꾼들을 잘 다독여 눈이 내리기 전에 완공을 하거라. 내 일간 가보고 객주도 함께 지을 것인가를 결정할 터이니라."
"예. 회주님. 명령 받자옵니다."
"음, 허고 황방장 자네는 삼개를 뽑았다고 했나? 삼개가 물동량이 많은 곳인 바 어차피 잘 되었군. 내 교대로 아이들을 자네에게 보낼 것일세. 워낙 포도청에서 거들먹거리기나 하든 놈들이라 장사의 묘리에 어두우니 상조회 애들이 가면 그들을 혹독하게 부려서 상고의 이치를 깨우쳐 주게. 그리고 모두 듣거라. 일간 상조회에서 부방장을 한 명씩 보내줄 테니 그들과 함께 객주를 잘 꾸리도록. 알았나?"
"예이."
소임을 맡은 여덟 명이 오일중과 노탁우에게 인사를 한 후 배로 향했다. 황구만이 타고 왔던 배에는 서강나루의 객주를 맡은 김찬이가 꼽사리를 껴 같이 가게 되었다. 신기림은 최두수의 배로 올랐다. 네 사람씩 탄 배는 뱃전까지 물이 찰랑거렸지만 올 때와는 너무도 다르게 잘도 흘렀다. 황구만은 많은 동료들의 틈에 끼이자 새삼 무리 속의 한 사람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이제껏 삶의 대부분을 혼자서 고군분투했었고 결국 재산도 객주도 혼자였기에 장철기의 손에 뺏긴 것이다. 지금이라면 과연 장철기가 뺏는 대로 뺏길 것인가? 어림없는 수작일 터였다. 황구만은 삼개라면 해볼만하다고 느꼈다. 이제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객주를 크게 키울 자신이 있었다.
'그래, 한번 해보자. 이런 사람들과 다 함께 잘 살 수 있다면 그 역시 좋은 일 아닌가?'
밝은 날 눈에 보이는 산하는 어젯밤과는 생판 다른 모습이었다. 단풍이 엷게 물들기 시작한 강가의 풍경이 보기에도 좋았다. 황구만은 숨을 깊이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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