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오일중
그날 밤이었다. 오일중과 노탁우가 마주 앉았다.
"분부하신 데로 일을 마쳤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돌아온 사람답게 노탁우의 우둥퉁한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다. 반면 오일중은 시종이 여의하게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몇이나 되던가?"
"남자 열하나에 여자 넷이 었습지요."
"천수는 확인했는가?"
"놈들을 베기 전에 천수가 맞는지 확인을 했습니다."
"음, 밝은 대낮에 기습을 하리란 생각은 못했을 테니 일이 쉬웠겠군."
"그러하옵니다. 배에서 내리자 말자 득달 같이 움막을 치고 들어가 베어 재끼니, 달아나고말고 할 사이도 없었습지요. 천수는 낮잠을 자다가 죽었고 부두령이란 곰보는 술을 마시는 놈을 베어 죽였습니다. 나머지 졸개들은 줄줄이 끌어내 천수와 곰보를 확인 시킨 뒤 찔러서 두엄 구덩이에 밀어 넣었습니다. 다만 천수의 아들이라는 꼽추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헛, 그놈이 어디에 숨어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면 낭패가 아닌가?"
"그럴 리가 없는 것이 천수의 아들은 근자에 산채에 붙어 있지를 않았답니다. 공교롭게도 부두령이란 자의 아들도 꼽추이온데 두 꼽추가 어울려 밤낮 어디를 쏘다니더랍니다. 그러니 숨어서 볼 턱이 없습지요. 다만 함께 없애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지요."
"음."
오일중이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다가 다시 입을 뗐다.
"어물 짐은 없던가?"
"그게.... 저도 그게 사뭇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점이 올시다. 모든 움막을 샅샅이 뒤졌지만 어디에도 어물 짐이 없더이다. 뿐만 아니라 졸개를 닦달했아오나 상선을 턴 건 죽어도 자기들 짓이 아니랍니다. 허니, 이게 무슨 조환지 모를 노릇이옵지요."
"뭐라? 어물 짐도 없고 놈들이 상선을 털지 않았다? 그렇다면 심첨지의 상선을 털어먹은 놈은 이 바닥 누구란 말인가? 아하, 낭패로세. 내가 애초에 천수패만 칠 요량이었으면 강화 유수가 토포하는 걸 구경만 하면 될 것을 뭣하러 자네를 시켜 선수를 쳤겠나? 일석이조를 생각했기 때문 아닌가 말이야."
오일중이 입이 쓴 듯 미간을 찌푸려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모아 가느다란 턱수염을 배배 꼬았다. 일이 안 풀릴 때 하는 행동임을 노탁우는 잘 알고 있었다. 오일중이 그러고 있자 노탁우 역시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어 고개를 떨궈 잠시 눈을 감았다. 두 간 작은방에 불을 밝히느라 켜 둔 등잔에서 아까운 들기름 타는 소리가 바직바직 들렸다. 게다가 방안이 조용하자 밖에서 풀벌레 소리까지 크게 들려왔다. 그 소리에 노탁우는 문득 속으로 손을 꼽아보다가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 처서(處暑)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번엔 마당가의 고목에 소쩍새가 앉았는지 소쩍소 소 쩍하는 소리까지 더해졌다. 노탁우는 속으로 소쩍새 소리를 몇 번 따라 하다가 그나마 무료해서 그만두고 슬며시 오일중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오일중이 노탁우를 향해 돌리는 눈길과 마주쳤다. 노탁우는 찔끔할 수밖에 없었다.
"근자에 다른 수적이 생긴 것도 아니고 천수 패도 아니라면 없어진 어물 짐은 누구의 소행이란 말인가? 분명히 숨어서 기회를 노리는 놈이 있다는 말이 아닌가? 이렇게 되면 마 포교를 죽인 것도 천수 패가 아닐지도 몰라. 마개출은 택껸의 고수가 아니었나?"
"그랬습지요. 주먹이라면 우포청에서도 알아주던 포교였습지요."
"그런 마 포교를 비수 한 자루로 요절을 낸 자라면 오늘 기습 때, 우리도 한 둘쯤은 당했어야 옳지 않나? 자네가 그자라면 전혀 저항 없이 잡히겠나?"
"회주님 말씀을 듣고 보니 실로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놈들일까요?"
"내일 아이들을 풀어 각 객주와 여각에 맡긴 어물 짐에 굴비가 있는지 알아보게. 허고 각 나루에 못 보던 왈짜들을 근래에 나타났었는지도 알아내고."
"예, 그리합지요."
그때, 이제껏 시끄럽게 울어대던 풀벌레 소리와 소쩍새 소리가 뚝 끊겼다. 이어 사이를 주지 않고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회주님 주무시는지요? 소인 행주나루에 나가 있는 주흥식 올습니다."
행주 산성의 주흥식이란 말에 오일중과 노탁우가 놀라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행주나루에서 이곳 두물머리까지는 물길로 얼추 백오십여 리였다. 그러니 배를 저어 물길을 계속 거슬러 오르자면 시간도 시간이지만 보통 힘이 드는 일이 아닐 터였다. 더구나 지금은 밤중이 아닌가? 이 야심한 시각에 달려온 것을 보면 화급을 다투는 일이 분명했다.
"음, 어서 열어보게."
노탁우가 방문을 열자 주흥식이 칠패에 나가 있던 남치원과 나란히 서 있었다.
"아니? 너희들이 이 시각에 어쩐 일이냐?"
"예, 회주님께 급히 고할 일이 있사와.…"
노탁우의 물음에 주흥식이 손을 비비며 황송한 듯 허리를 굽신거렸다.
"그럼 어서들 들어오너라."
서둘러 미투리 짝을 벗어던진 두 사람이 방안으로 들어오자말자 오일중 앞에 넙죽 엎드렸다.
"그래, 무슨 일이냐?"
절을 마친 사람들이 미쳐 자리에 앉기도 전에 노탁우가 물었다.
"예, 근자에 수적으로 인해 서해로부터 어물 짐이 줄어들어 위아래 여각이 모두 손을 놓고 있다시피 하는 것은 회주님께서도 들어 아실 겁니다. 실제로 저희들이 나가 있는 나루의 어물 객주는 근 보름 동안 새우젓 말고는 제대로 된 물종은 맡아 본 적이 없습지요. 특히나 굴비는 구경도 못하옵니다. 어쩌다 석수어가 오기는 합니다만 제철에 잡은 굴비에 비하겠습니까? 소인이 있는 객주에도 누원과 포천 쪽 상인들이 거래를 하자고 모여듭니다만 물건이 있어얍지요? 이렇듯 굴비가 품귀하니 도성 안에서 거래되는 굴비가 한 갓에 서른닷 푼하던 것이 지금은 반 냥이 되었다 하옵니다. 그러니 시전에서는 물론이고 칠패에서도 굴비를 확보하려고 난리가 났습지요. 혹여 값이 더 오르기를 기다리느라 감춰 둔 굴비가 있나 왈짜들을 시켜 객주를 돌아다니며 집뒤짐까지 하옵니다. 상인들은 강화와 교동 심지어 해주까지 사람을 보내기도 합니다만 아직 어물 짐이 삼개나 서강에 들어왔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굴비 하나로 뒤숭숭한 이때에 칠패에서 일을 보는 이 동무가 소인을 찾아오지 않았겠습니까?"
주흥식은 말을 하며 일편 옆에 앉은 남치원을 흘깃 돌아보았다.
"그래서?"
노탁우는 본론이 어서 나오기를 재촉했다.
"아, 예. 그런데 이 동무는 소인이 있는 행주나루의 김가객주에 굴비가 감춰있다는 얘기를 듣고 사실을 확인하러 소인에게 온 것이 옵니다. 허나 소인이 머무는 손가객주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김가객주에 어물 짐이 들어가는 것을 본 바가 없사오니 이상한 일이 아니오니까? 해서 소인이 아는 바 없노라고 하자 이 동무가…."
"가만, 주 포교는 잠시 멈추거라. 남 포교 너는 김가 객주에 굴비가 있다는 이야기는 누구에게 들었느냐?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물량이 얼마나 된다더냐?"
먼 길을 달려와 기껏 한다는 얘기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에다 옆길로 새려는 기미가 보이자 노탁우가 급히 주흥식의 입을 막고 남치원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다.
"소 , 소인이 말이옵니까? 말 재간이 신통치 못하옵니다만... 그게 사실은 소인이 평소에 알고 지내는 기생 년이 있사온데 그 년이 어젯밤 어떤 한량에게 수청을 들며 들었답니다."
"물주나 상인이 아니고 한량이? 그 한량이란 자가 남의 객주에 굴비가 있는지 밴댕이가 있는지 어찌 알아서 기생에게 발설을 했단 말이냐?"
노탁우는 이놈도 똑같구나 하고 생각했다. 똑 부러진 답을 듣고 싶은데 자꾸만 엉뚱한 얘기만 늘어놓는 것 같아서였다.
"그게... 실은 그 한량이 김가 객주인에게 물건을 맡긴 물주라 하옵니다."
"뭐라고? 아, 진작 그렇게 얘기를 할 것이지. 그래 그 한량이 누구관데 굴비라면 천세가 나는 이 마당에도 팔지를 않고 쌓아두고 있다더냐?"
"그게... 굴비만 거래되면 그 기생에게 옥지환을 해주마고 큰소리치다 나온 얘기라 하옵니다."
"헛 그놈, 한량이 허풍 치기 예사지. 한량에게 허풍 빼면 남는 게 무엇이냐? 그러니, 굴비 있단 얘기도 기생에게 환심을 사려는 허풍이 아니겠느냐?"
"그게... 허풍만은 아닌 것이 그 한량이란 자가 강화 부자 심첨지의 장자라 하옵니다."
남치원의 말이 끝나는 순간 이제껏 가만히 듣고만 있던 오일중의 눈이 번쩍 떠졌다. 이어 날카로운 눈길로 남치원을 쏘아보았다. 등잔 불빛에 비친 오일중의 칼날 같은 눈빛이 날아오자 남치원은 얼른 눈길을 피했다.
"물량이 얼마나 되는지도 아느냐?"
"예, 그게... 무려 이천 갓이라 하옵니다."
남치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탁우가 먼저 놀랐다.
"머시라? 이천 갓? 회주님, 이천 갓이면 수적이 털어갔다는 양과 똑같지 않습니까. 이거 어딘가 수상합니다. 아하아, 어쩐지 오늘 놈들의…."
"어-흠."
그 순간, 방안이 울릴 만큼 큰 기침소리를 낸 오일중이 노탁우에게 무서운 눈길을 보냈다. 순간 노탁우도 자신이 실언 직전이었음을 알아채고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낮에 있었던 일은 누구에게도 비밀로 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니 같은 상조회원이라고 해서 널리 광고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오일중이 남치원을 향해 물었다.
"심첨지의 아들이 칠패에 머무느냐?"
"그러하옵니다."
오일중의 눈길이 주흥식에게 옮겨졌다. 주흥식은 긴장했다.
"어물 짐이 있는 곳이 김가 객주라 했느냐?"
"예, 그러합니다."
"남포교의 말을 들은 다음 그곳에 가서 확인해 보았느냐?"
"소인이 직접 살펴본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터이라 객주의 아이 종을 시켜 보고 오게 했습지요."
"그래서?"
"짐꾼들이 마당에서 쌀섬을 묶고 있더라 하옵디다."
"쌀섬? 어물 객주라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달려온 것입죠. 아이의 말을 들어본즉 쌀섬에다 굴비를 넣어 묶더랍니다. 쌀섬에 굴비라니 분명 무슨 술수가 있을 터이나 소인들로서는 알아낼 재간이 있어얍지요. 머리를 쥐어짜 생각한 것이, 지난번 수적에게 털렸다는 굴비 짐과 혹여 연관이 있지 않나 생각하옵니다. 허나 물주가 심첨지의 아들이라니 거기서 그만 막혔습지요. 회주님, 이게 어찌 돌아가는 사단이 온지요?"
주흥식의 말이 끝나자 오일중은 다시 눈을 허공에 잠시 두더니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그만하면 어디 가서 포도청이나 상조회 욕은 먹이지 않겠다. 두 사람 모두 잘했다."
오일중에게서 칭찬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은 심장이 내려앉은 듯 감격했다. 포도청에 있을 때에도 좀처럼 못 들어 본 칭찬의 말인 것이다. 두 사람은 절로 넙죽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만 지금 다시 돌아들 가야겠다. 가거든 굴비가 든 쌀섬이 어디로 가는가를 뒤따르거라. 날이 밝기 전에 물건이 움직일 게다. 알아내는 즉시 쌍급주를 띄워서라도 급히 알리거라. 그러면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을 알려주마."
"예, 그럽지요."
주흥식과 남치원이 오일중에게 절을 하고 물러 나오자 노탁우가 그들의 뒤를 따라나와 엽전 꿰미를 내밀었다.
"올 때와 달리 물결 따라 내려가는 길이라 한결 쉬울 게다. 이건 혹여 가다가 기찰선을 만나거든 탁배기 값으로 건네거라. 앞으로 우리 하는 일에 서로 사귀어서 나쁠 것도 없는데다 그들도 먹고 살아야지. 허고 쌀섬을 따를 때 눈치 못 채게 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거라."
"여부가 있사옵니까. 부장님께선 마음 놓으시지요."
"어서들 가거라."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노탁우가 다시 방에 들어와 오일중과 마주 앉았다.
"회주님, 멀쩡한 굴비를 쌀섬으로 속이려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것보다 수적에게 털렸어야 할 어물 짐이 왜 심첨지의 아들 손에 있는가를 먼저 알아봐야 할 걸세. 내 생각엔 이 일이 간단치 않을 것 같네. 어쩌면 이번 소동은 심첨지가 꾸민 것일지도 모른단 말이야."
"예? 심첨지는 고깃배가 십여 척에 삼남을 오갈 수 있는 큰 상선도 세 척을 가진 부자이온데 그의 눈에는 하찮을 그깟 굴비 이천 갓을 수적에게 뺏겼다고 거짓말을 했겠사옵니까? 아차, 심첨지의 아들이 한량이라 하니 혹시 오입질로 돈이 떨어진 그놈이 제 아비의 어물 짐을 중간에서 가로챈 것은 아닐까요?"
"나 역시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수적에게 당했다는 그 이후가 문제란 말이야. 그 후에는 통어영(統禦營)의 사후선(伺候船)이 강화 앞바다를 지켜서 다른 배는 다 오가는데 유독 굴비 배만 도성으로 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나?"
"글쎄 올습니다. 굴비가 심첨지에게서만 나는 것이 아닐진대 그도 그렇군입쇼."
"옛부터 굴비는 저 남쪽의 칠산의 법성포와 윗 쪽으로는 연평도, 강화도가 주산지 아닌가? 법성포 굴비는 거의 광주, 남원을 통해 경상 내륙으로 흘러들어 사실 이쪽으로 오는 물량은 거의 없네. 반면, 연평 어장에서 잡은 석수어가 대부분 굴비로 엮여 도성 안팎의 백성들 입에 들어가지. 다행히 굴비는 곡식과 달리 흔해서 제법 사는 집이 아니어도 누구든 일 년에 한두 번은 맛을 보는 어물 아닌가? 헌데 경신 대기근 후에 그 흔하던 석수어와 굴비가 매년 줄어들어 값이 조금씩 오르더니 재작년부터는 농투성이나 아랫 천 것들은 구경도 못하는 귀물이 되지 않았나? 왜이겠나? 해가 갈수록 물고기가 줄어들어서인가? 아니면 고깃배가 줄어서인가? 내가 볼 때 둘 다 아니네. 이건 분명 누군가가 물량을 조절해서 가격을 올리려는 자의 소행일세."
"예?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고깃배 가진 부자가 한둘이 아닐뿐더러 지천인 고기를 눈앞에두고 잡지 않을 어부가 어디 있겠사옵니까?"
노탁우는 발 밑에 정말로 물고기가 지천에 깔린 듯 두 손의 손가락을 모두 펴서 그물질하는 흉내를 내었다. 그 모습을 본 오일중이 빙긋 웃었다.
"내 듣기로는 연평 앞바다에서 그물질하는 어부들은 모두 네 패라는 말을 들었네."
"아하, 예, 저도 들었습지요, 해주의 오부자와 교동의 한 부자 석모도의 권 부자 강화의 심 부자 말씀 아니 옵니까? 그러니 어부도 그렇게 갈렸겠습죠."
"맞네. 그중에 해주의 오 부자가 기중 고깃배도 많고 땅도 많아 제일 부자라 할 수 있지. 헌데 말일세. 해주에서 말린 굴비는 거의가 송상이 맡아 팔도 장시로 나가네. 근자에 유상(柳商)이 생겨 그중 일부가 평양으로도 간다지만 그 외는 아예 송방에서 도거리를 했다더군. 자, 그러면, 오 부자를 빼면 한양에 굴비를 대는 부자는 세 사람이 아니겠나?"
"그렇습지요. 세 섬의 부자들 입지요."
"그렇지. 허면 심첨지는 그렇다 쳐도 한 부자와 권 부자의 굴비는 왜 꼼짝을 하지 않고 고방(庫房)에서 묵히고 있겠는가? 심첨지와 입을 맞춘 것 같지 않나?"
"그럼, 회주님은 그들이 담합을 맺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그거야 이제부터 자네가 알아봐야 할 대목이지. 헌데 오늘이 며칠인가?"
"아, 오늘이 스무 사흘, 처서 아닙니까. "
"그렇군. 중추절도 스무날 남짓 남았구만."
"중추절 말이 났으니 말씀이온데, 그때까지 도성에 굴비가 끊기면 집집마다 차롓상에 왔던 조상이 비린내도 못 맡고 돌아서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집집 마다라니? 차례나 제사야 왕가나 사대부 집안에서 지내는 것이지 일반 상것 무지랭이들이야 무슨 글 아는 조상이 있어 진서(眞書)로 쓴 지방(紙榜)을 읽고 찾아온단 말인가? 아마 한양 땅 이만 팔천 호(戶) 중에 제사나 차례를 올리는 집은 삼천 호가 채 못될 걸세."
"예? 그 넓은 장안의 가호 수가 그렇게 밖에 되지 않을까요?"
노탁우는 고개까지 갸우뚱하며 오일중의 말을 반신반의하는 듯했다. 그동안 기근 때마다 죽이라도 타 먹으러 몰려든 백성만 해도 오만이 넘었던 것이다. 개중에 절반은 움막을 세우고 도성에서 굴러먹으니 움막도 집 축에 든다면 사만 호도 넘을 것이었다.
"지난해에 호조(戶曹) 좌랑(佐郞)이던 권 군의 말을 들으니 한양의 가호 수가 이만 팔천이요 입이 이십이만이라더군. 경신 년 이 후에 이만 명 정도가 늘었다고 보면 되네."
"허, 제가 보기에는 근자에는 자고나면 못 보던 집이 생기던데 생각보다는 적사옵니다."
"허허, 적어? 땅에서 좁쌀 한 톨 생산하지 않고 물에서 새우 꽁댕이 하나 건져 올리지 못하는 입이 도성에 이십만이 넘는다고 생각해보면 끔찍한 일 아닌가?"
"사실 그러합니다. 그러고 보면 한양에는 내로라하는 사대부가 너무 많습지요."
"그깟 양반이래야 스무입 가운데 하나 밖에 더 되나? 종실이나 벼슬하는 수천 명을 뺀 나머지는 죄다 의원이니 서리, 또는 짚신이니 삼아 파는 공쟁이요, 그도 아니면 군졸이나 잡살뱅이 상인이거나 한지잡류(閑之雜類)지. 그까짓 것들은 죄다 양반을 먹여 살리고 그 뒤치다꺼리나 하는 종들일 뿐인 셈이지. 허나, 그런 입도 입 아닌가? 그런 천 것들의 입은 일 년에 한두 번 굴비 맛을 보면 안 되는가?"
범죄자를 소탕할 때나 불의의 무리들에겐 칼날같이 냉정한 오일중이었다. 그리고 평소에는 늘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별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한가지 벽이 있으니 양반과 상놈의 이야기에 이르면 반드시 말이 많아지는 것이다. 이는 서얼이라는 신분이 자신의 야망에 한계를 긋는데 대한 울분이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본질과 별 무관한 얘기로 말이 많아지기 시작하니 이를 잘 알고 있는 노탁우는 얘기를 이 정도에서 본론으로 다시 끌어들여야 했다.
"허니, 어떡하던 중추절 전에 굴비가 도성에 들겠금 해야겠군요."
"그렇겠지. 늦어도 추석 열흘 전까지는 내외어물전에 굴비가 풀리도록 해야겠지. 그깟 양반들의 차례상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어쨌든 이 일은 우리가 조치를 취해야겠네. 송파 객주인의 아비인 문기수가 보낸 어음 값도 해야 하니까 말일세.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자네는 오늘 출동했던 아이들 중에 눈썰미 있고 붙임성 있는 놈을 두엇 데리고 강화로 가게. 가서 교동의 한 부자와 석모도의 권 부자의 근래 사정과 강화의 심 참봉이란 자의 내력에서부터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 굴비를 쌓은 고방이 몇인지 자식들 일까지 모조리 알아오게. 그래서 만약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다면 우리에게 기회가 오는 것일 수도 있네. 우리도 어서 자금을 모으고 세력을 키워서 우리들 일을 해야지 언제까지 남의 객주에 붙어 장사를 도와주고 산단 말인가? 아니 그런가?"
오일중의 마지막 말에서 노탁우는 속으로 역시라고 생각했다. 오일중이 상조회를 조직한 것이 불과 대여섯 달이건만 그 짧은 동안에 십여 개 경강 나루터를 모조리 휘어잡아 떨려난 포교들의 호구를 메꿔주니 그것만도 대단하다 싶었는데 이제 보니 그보다 훨씬 큰 야망이 있는 것이다. 일이 그렇게 돌아간다면 못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노탁우는 어깨가 우쭐할 정도로 힘이 솟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오늘 낮의 무자비한 살육이 생각나 갑자기 침통한 얼굴이 되었다. 어쩌면 그들 모두 죄 없이 비명횡사를 한 것일지도 모를 노릇 아닌가?
"회주님 말씀을 들으니 한편 힘이 나고 한편으론 굴비를 구경도 못하고 죽은 김천수가 딱하게 되었습니다. 마개출이도 분명 다른 작자의 손에 당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허니, 마개출의 일도 새로 알아봐야 할 것 같사옵니다."
노탁우의 말에 오일중이 미간을 찌푸려 허공을 응시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김천수를 친 것은 일생일대의 후회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네. 이제 와 생각건대 천수 패는 단지 호구만 했을 뿐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기에 오랫동안 토포를 면한 것일세. 그걸 모르고 우리들 앞길에 방해가 되리란 생각과 경강의 패권을 잡을 욕심에 그를 죽였네. 게다가 어물 짐까지 공으로 먹을 욕심을 부렸으니 나도 참 딱한 사람일세. 또한 마개출이 일도 애초부터 천수패가 했다고 보긴 틀린 일이네. 수적인 그가 송파를 노려 무엇하겠는가? 무엇이 씌워서 내가 미쳐 그 생각을 못했단 말인가? 이번 일을 귀감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 헌데 말일세. 왜 심첨지는 그런 천수패를 지목해서 관군을 동원했다고 생각하나?"
오일중의 말을 듣는 한편 천수패의 젊고 늙은 놈을 가리지 않고 칼로 등짝을 쑤셔 구덩이에 밀어 넣을 때의 광경을 떠올리던 노탁우가 갑작스런 질문에 미쳐 대답을 못하고 눈만 둥그렇게 떴다. 그런 모습을 본 오일중은 자문자답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심첨지의 농간일세. 천수패의 노략질 때문에 도성에 굴비 짐이 올라가지 못한다는 구실을 만든 것일세. 그래서 도성에 굴비가 떨어져 값이 치솟기를 바란 것이 적실하단 말일세. 그러면서도 관군이 움직여도 천수패를 토포하지 못하리란 것도 알았을 게야."
"헛, 그렇다면 더구나 천수 패로서는 억울한 죽음을 한 셈이옵니다. 쯧쯧."
"여하튼 가슴 아픈 일이로세."
강화도 남산 밑 심첨지의 집은 여든 여덟간의 큼지막한 기와집으로 한양의 웬만한 대갓집보다 큰 규모였다. 집의 구조 역시 법도를 따져가며 지어서 안채와 바깥채의 구별은 물론 사랑채는 아예 따로 지어 담까지 둘렀다. 그리고 잡인의 출입을 막으려 담장을 빙둘러 심은 탱자나무의 탱자가 요즈음 한창 노랗게 익어 볼만하였다. 이 집은 심첨지의 증조 할애비인 심상진이 중추원(中樞院)의 정 3품 첨지사(僉知事)를 끝으로 벼슬길에서 물러나 지은 집이었다. 집을 짓고 난 후 심상진의 직계 후손은 벼슬한 자손이 없었는데 지금의 심첨지의 첨지는 제 증조 할애비의 벼슬을 차용해 사람들이 아첨으로 씌워준 감투인 것이다. 그가 엉터리 감투인 것은 강화뿐 아니라 주위의 모든 섬사람들이 다 알면서도 감히 벼슬 없다고 백안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와 삼종질 간인 심후겸이 지난봄 남인을 축출할 때 공이 있다하여 병판에 오르고부터는 유수조차도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게다가 그의 집은 지난 병자년 난리 때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이 비빈 종실들과 함께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었다. 그 후 봉림대군이 시호가 효종인 임금이 되니 심첨지의 가문도 덩달아 족보에 금칠을 한 꼴이 되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금칠이기 전에 똥칠이 먼저였으니 그것은 봉림대군이 하룻밤을 묵기 전날 김경진이 첩을 데려와 그 방에서 먼저 묵었던 것이다. 세상 사람이 다 알다시피 김경진은 인조반정 때 공신인 김류의 아들로 무능하고 오만방자한 망나니에 불과한 놈이다. 그런데 이놈이 조상덕으로 강화도 감찰사(江都監察司)가 되어 강화도 수비를 맡았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이 또한 가관이었다. 고관 대작의 가족들을 죄다 밀어내고 자기 첩을 피난 배에 가장 먼저 태운 것이었다. 강화로 건너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제일 크고 번듯한 집을 징발해 첩이 묵게 하였다. 그 집이 바로 심첨지네 집이었다. 그 후 김경진의 어이없는 판단과 무능한 군사 작전 때문에 강화는 쑥대밭이 되고 대군들과 비빈 종실이 되놈들의 수중에 떨어진 것은 어린아이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4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심첨지는 김경진의 첩이 묵었었다는 얘기는 싹 빼고 임금이 묵었던 곳이라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이 난당이었다. 어쨌든 임금이나 대군이 사저에 묵는 일이 극히 드문 만큼 그것도 큰 자랑거리에 속해서 사람들의 기를 죽일만 했었다. 그런데 이제껏 거드럭거리며 잘 살아오던 심첨지에게도 근년에 이르러 망조가 들려는지 되는 일이 없었다. 그가 이제껏 축재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열 척의 어선에서 잡아들이는 어물과 천석 거리 논이었다. 그런데 매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기근이 찾아 드니 곡식 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 반면 어물 값은 날로 떨어지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좁쌀 한 톨 없어 굶어죽는 마당에 어물 반찬이란 언감생심이요 턱도 없는 소리였던 것이다. 그러니 해마다 어선에서 나오는 이문은 적어져서 조기가 잡히는 계절 말고는 쉰 명에 가까운 어부와 그에 딸린 식솔들의 양식 대기에도 빠듯하였다. 결국 논에서 나오는 소출로 이리 저리 써야하니 천석꾼이란 말뿐인 것이다. 세 척의 상선도 마찬가지였다. 하삼도에서 세곡을 나르자 해도 영악한 한양의 경상들이 호조(戶曹)의 당상관과 선혜청(宣惠廳)의 낭청(郎廳)들을 끼고 저희들이 다 해 먹으니 심첨지가 선적할 쌀섬이 있을 턱이 없었다. 해주 해창의 곡식이나 어염도 마찬가지였다. 천 석짜리 큰 배를 가진 경상과 오 부자의 배가 그것들을 도거리를 하다시피 하니 삼백 석 심첨지의 배는 어디에도 닻을 내리지 못했다. 겨우 간다는 게 남들은 험한 뱃길이라 가지 않는 부산포나 구룡포까지 가서 기껏 반가의 장토에서 나는 소출을 실을 뿐이었다. 그러다 작년 단오 무렵에 전라도 해남 울돌목에서 배 한 척을 잃고 난 심첨지는 아예 상선에 대한 기대는 접고 말았다. 역시 안전하고 가치 있기는 땅만한 것이 없었다. 강화엔 물이 흔한 편이라 가뭄 걱정도 적었고 땅이 기름져 쌀농사가 잘 되던 것이다. 선대 때부터 해오던 간척지를 만드는 일에 심첨지가 온 힘을 쏟기 시작한 지 오 년이 되었다. 돈이 들어오는 대로 방축을 쌓았다. 그러다 자금이 떨어져 독에 넣어 깊이 묻었던 굴비를 팔아 모은 돈 오천삼백 냥을 꺼내 그걸로 개펄에 흙을 메꿔 나갔다. 그도 모자라 지난봄에 상선 두 척을 경상 이만길에게 넘기고 그 돈도 모두 제방을 쌓고 흙을 메꾸는 데다 쏟아부었다. 모든 재산을 끌어다 선두포 개펄에 쏟아부은 것이다. 사오천 냥만 더 넣으면 육칠천 석 짜리는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러면 총 칠팔천 석 부자가 되는 셈이었다. 팔천 석이면 조선 팔도에 부러운 사람이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끝마무리 단계에 이르러 가장 필요한 이때에 돈이 바닥이 난 것이다. 남은 것은 열척 어선과 포구의 고방과 해창에 쌓아둔 굴비였다. 그러나 어선을 없애면 그나마 당장 수입이 끊기니 그것은 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굴비를 팔 수밖에 없었다. 두름으로 엮어 말린 굴비를 짐으로 꾸려 배에 실을 준비를 해두었다. 그 굴비를 값으로 친다면 대략 오천 냥 쯤되니 개펄이 완전한 논으로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마저 간척지에 붓고 나면 열 척 어선만 남으니 그야말로 엽전 한 푼 없는 거렁뱅이 처지가 될 것이었다. 당장 명절이 코앞이라 삼종질인 병판에게 돈 천 냥은 준비를 해야 하고 강화유수에게도 인사차 가려면 또 그 반은 있어야 했다. 게다가 심 씨 문중의 떨거지들과 아들과 딸, 그리고 며느리 손자까지 수많은 아랫것들이 모두 자신만 바라보고 있으니 심첨지의 심정이 편할 리가 없었다. 결국 심첨지가 사흘 동안 머리를 쥐어짜 이 문제를 해결할 꾀를 생각해 내었다. 당장 교동의 한 부자와 석모도의 권 부자를 불러 설득과 회유를 시작했다. 교동의 한부자나 석모도의 권부자 역시 땅 욕심은 마찬가지여서 그들도 제각기 섬의 크기를 늘리는데 전 재산을 들이붓던 차라, 어쩌면 심첨지의 제안이 꿀 같았을 것이언만 뒤탈을 생각해 처음엔 펄쩍 뛰는 흉내를 내다가, 말이 바뀔까 겁이 나듯 얼른 찬성들을 하였던 것이다. 담합의 내용은 간단했다. 먼저 심첨지의 배가 수적에게 당하면 그 일을 빌미로 굴비 실은 배가 도성으로 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수적이 완전히 토포가 될 때까지 미적미적 미루어 어물전에 굴비가 동이 날 때를 기다린다. 그러면 도성 안팎에 굴비가 귀해지고 추석이 다가와 값이 크게 뛸 것이니 그때 내자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심첨지의 꾀가 제대로 들어맞아서 추석 전에 벌써 값이 배로 올랐다. 며칠 전 아들을 시켜 수적에게 털렸다던 굴비 이천 갓을 시험 삼아 풀었더니 평소에 오백 냥 하던 것이 거의 천 냥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심첨지는 조금 더 욕심을 부려보기로 했다. 그러자 각 나루의 어물 객주에서 거간꾼들이 강화로 몰려들었다. 뿐만 아니라 시전 어물전의 상공원(上公員)인 도령위(都領位)란 자까지 심첨지의 사랑을 찾아왔었다. 그러나 심첨지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심첨지는 일이 생각대로 척척 맞아떨어지자 입맛까지 살아나 저녁을 거하게 먹고 사랑에 나와 목침을 베고 누웠다. 차츰 방안이 어두워지자 종놈이 들어와 등잔에 불을 밝히고 나갔다. 이어 계집종이 자릿끼와 함께 주먹보다 큰 깎은 순무를 들여 놓았다. 이 순무는 강화에서 나는 자랑거리라 맛이 좋았다. 게다가 순무는 심첨지가 속탈을 염려해 매일 밤 하나씩 먹기 버릇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불빛에 비친 둥그런 순무가 꼭 복어 배때기처럼 보이는 것이다. 복어는 웬만큼 솜씨가 있는 숙수(熟手)가 아니면 음식이 될 수없는 물고기였다. 게다가 잡히라는 고기보다 복어만 쓸데없이 많이 잡혀서 어부들의 원성을 사는 놈이었다. 심첨지는 무심코 이럴 때 저 흔한 것을 내다 팔 수만 있다면 금세 부자가 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무릎을 탁 쳤다. 굴비 하나로 며칠 사이에 값이 배가 된다면 다른 물종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꼭 굴비가 아니더라도 모든 어물을 무조건 도거리로 긁어모아 지금처럼만 하면 금세 부자가 될 터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 조선팔도에서 제일 부자라는 변승업이나 장현이 부러울 손가? 마침내 양반 입네 체통만 내세우던 심첨지가 매점매석의 원리를 터득하는 순간이었다. 심첨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고깃배를 부려 석수어를 건지랴 굴비로 엮으랴 돈 들고 골치 아픈 그런 짓을 할 게 아니라 한강 하구를 콱 틀어막고 도성 안팎으로 드나드는 모든 물종을 조종할 수만 있다면.... 아, 생각만 해도 숨이 콱 막히게 좋았다.
"나으리, 나으리를 뵙자는 분이 밖에서 기다리시옵니다. 어찌하올지요?"
이제 막 한양을 떡 주무르듯 하려는 찰나에 청지기가 나타나 심첨지의 꿈에 찬물을 확 끼얹었다. 깜짝 놀란 심첨지가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뭐라? 이 시각에 남의 집을 방문을 하다니? 이만저만한 비례자(非禮者)가 아니로군. 보나 마나 시전의 상공원이나 거간일 테지. 그래 이번엔 누구라더냐?"
"소인이 여쭈었으나 나으리께 직접 말씀을 올린다 하옵는 지라.…"
방문자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듯 청지기는 방 밖에서 연신 땅을 향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익명의 방문객이라? 거 한번 괴이한 인사로세. 좋다, 들이거라."
"예, 그러하옵지요."
청지기가 물러가자 심첨지는 목침을 구석으로 밀어버리고 위엄을 보일 양으로 안석에 비스듬히 팔을 기대고 앉았다. 밖에서 가볍게 헛기침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방 밖에는 대여섯이나 되는 사람들이 서 있는 가운데 갓 쓴 사람이 둘이 차례로 댓돌을 올라서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선 두 사람 가운데 옅은 옥색 도포를 입은 사람이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자리에 앉아 자신을 소개했다.
"전 포도청 종사관 오일중이라 하오이다. 첨지의 함자는 익히 들었소이다."
심첨지가 오일중이란 자를 보매 갸름한 얼굴에 눈매가 매운지라 속으로 뜨끔하였다. 게다가 전인지 후인지 포도청 종사관이라는 말만 들려서 혹시 굴비 배를 수적에게 털렸다는 거짓이 탄로가 난 게 아닌가 해서 약간 켕기기까지 했다.
"시생은 전 포도부장 노탁우라 하옵지요."
심첨지는 이크, 이놈도 포도청 놈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제는 자신을 소개할 차례였다. 심첨지는 목을 가다듬느라 헛기침을 두어 번 한 후 입을 열었다.
"심학구라 하오. 시임 병조판서가 시생의 삼종질 이오이다. 우리 심문에서 나온 상신(上臣)이 모두 열이 넘고 문과 급제자만 해도 일백오십인에 이르나 시생은 아직 벼슬에 뜻이 없는지라 앞에 내세울 관직이 변변치 못하오이다."
뜻이 없어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판서쯤은 떼 논 당상이라는 듯한 말씨였다. 제 말대로 내세울 관직이 없던 심첨지는 언제나 족보상의 구촌 조카와 죽은 조상의 관직을 자신의 이름과 함께 늘어놓는 버릇이 있었다.
"우리 문중에서 세분의 왕비가 나오셨고 네 분의 부마가 있으시니 이는 타 문중에서는 만고에 보기드문 일이지요."
오일중은 등잔에 비친 심학규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았다. 어딜 뜯어보아도 남고 처지지 않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교활해 보이거나 비굴하게 생긴 것도 아니었다. 하나, 벼슬 못한 자괴감(自愧感)은 엄청난 듯 보였다. 그러니 죽은 귀신까지 끌어대서 방패로 삼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일중은 심첨지의 집안 자랑이 더 나오기 전에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일전에 수적에게 환란을 당하신 적이 있삽지요?"
"아, 예. 헌데 시생을 보잔 연유가 그것 때문이오이까?"
"그 일 이후에는 어물 실은 배를 도성으로 보낸 적이 있사오이까?"
오일중은 심첨지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자기가 묻고 싶은 말만 했다.
"없소이다. 일 년 농사나 다름없는 어물 짐을 또다시 뺏긴다면 낭패가 아니겠소이까?"
"그때는 그랬다손 쳐도 근자엔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이 사후선을 띄워 수적을 감시를 하지 않소이까? 그래도 뱃길이 우려되오이까?"
오일중의 계속되는 질문에 심첨지는 쓴 입맛을 쩍 다셨다. 도대체 이놈들이 무엇을 캐려고 왔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심첨지는 침중한 표정을 지으며 오일중과 옆에 앉은 노탁우라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내 물건 내가 내지 않는 것이 죄가 된다면 스스로 의금부에 찾아가 매를 청할 일이나 형장께서 시생에게 곡절을 따지는 연유나 알고자 하오."
"먼저 두 가지를 먼저 안 후에 연유를 밝히지요."
"좋소. 무엇이오이까?"
"근자에 첨지께서 어물을 실어낸 적이 있소이까?"
"어허, 아까 묻고 대답한 일 아니오이까? 물론 없다 했소이다만."
"그럼, 한 가지만 더 묻겠소이다. 첨지께선 교동의 한 부자와 석모도의 권 부자를 만나 굴비를 낼 것인가 말 것인가를 의론한 적이 있사온지요?"
"어허, 큰일 날 소리를 뱉으시는구려. 담합을 했다는 말 아니오이까? 내 이제껏 손님 대접으루다 좋은 낯으로 대했더니 어찌 그런 망발을 입에 담는단 말이요?"
오일중의 물음에 심첨지는 몸을 벌떡 세우며 낯을 붉혔다.
"어허, 화를 내실 일이 아닌 것 같소이다. 의론한 적이 없으면 그걸로 그 뿐인 일을 화까지 내실 일이 무엇이오이까? 허고 설혹 그랬다손 치더라도 첨지 말씀대로 자기 물건 자기들이 내지 않는데 누가 뭐란들 대수오이까?"
심첨지는 그때서야 아차 했지만 늦었다. 제풀에 놀라 역정을 낸 것이다.
"그게 그렇지를 않소이다. 종사관께서는 흡사 우리가 입을 맞춰 물건을 내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물은 것 아니겠소이까? 허나 우린 그런 짓은 않소이다. 그 사람들 일은 그 사람들이 알아서 할 뿐, 시생은 그 사람들과 평소에 교유도 없소이다."
"시생도 세 분 국모를 배출한 명문가의 후손이신 첨지께서 설마 그러리란 생각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다만 중추절을 앞둔 작금의 도성 안 굴비 값이 심히 걱정이라 결례된 질문을 드렸소이다. 관용하시지요."
"도성의 굴비 값은 시생도 들었소이다. 허나 굴비라면 시생을 비롯한 한 부자나 권 부자가 아니더라도 법성포의 최 부자와 해주의 오 부자가 있지 않소이까? 그들로 말하면 우리들보다 두 배가 넘는 물량을 갖고 있을 거오이다. 그런 그들이 몇 척만 실어 도성에 푼다면 단숨에 값이 절반으로 꺾일 것인데 어찌 가만히들 있는지 모르겠소이다."
굴비 값이 치솟는 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누누이 변명하는 심첨지였다. 그러나 오일중은 그런 심첨지의 속을 꿰고 있었다.
"허허, 첨지께서도 이미 그 연유를 아시리라 믿사오나 부연해 말씀드리자면, 법성포 굴비는 하삼도에서 소모하기에도 모자라지요. 허고 해주 오부자의 굴비는 평양으로 들어가고 남는 물량은 송상이 맡아 일반 향시에 내다 팝니다그려. 그러니 한수(漢水)를 통해서 올라오는 굴비는 모두 강화와 교동 인근의 굴비뿐이 아니오이까? 그러니 이십만이 넘는 많은 입이 기다리는 한양에 세 분의 굴비가 오지 않으니 값이 천정부지일 수밖에 없지 않소이까?"
"아니? 포도청에 있던 분이 어찌 시중 상인들보다 상고(商賈)의 이치가 더 밝으시오? 설마 종사관께서 사농공상의 끝자락으로 호구지책을 삼으려는 것은 아닐 터이니 이제 그만하시고 예까지 오신 용무를 말씀하시지요?"
심첨지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놈도 다른 놈들과 마찬가지로 시종 굴비 얘기만 잡고 늘어지는 걸 보니 굴비 때문에 온 것이 틀림없구나 싶었다. 보나 마나 포도청에서 끈이 끊기니 시전 육의전에 붙어 호구하는 꼴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느긋할 필요가 있었다. 심첨지는 다시 안석에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 오일중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생은 뜻한 바 있어 포도청을 나와 작은 일을 도모하고 있소이다. 헌데 수일 전, 시생의 수하들이 지난번 첨지의 어물 짐을 강탈한 수적을 잡았소이다."
"엉? 뭐라 시었소? 시생의 배를 강탈한 수적이라니? 어물 짐을 털어간 수적은 천수 패가 아니오이까? 아니? 그놈들이 아직 토포가 되지 않았단 말이 오이까?"
심첨지는 놀란 척 하긴 하나, 가소로운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으로 입끝에 비웃음을 말아올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강화 유수로부터 이미 천수 패를 모조리 베어 죽였다는 전갈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새삼 무슨 얼어 죽을 수적 타령으로 수작을 붙인단 말인가? 하나, 오일중은 담담한 어조로 심첨지의 귀가 놀랄 말을 천천히 뱉었다.
"첨지의 어물을 노략질한 수적은 따로 있었소이다. 바로 자신이 모는 배를 노략질한 선두(船頭) 놈이지요. 그놈은 이미 자복(自服) 하였소이다."
엉덩이가 들썩하도록 놀란 심첨지가 말을 잊고 긴가민가 오일중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뭔가 묻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문을 열게."
오일중이 옆에 앉아 있는 노탁우에게 이르자 문이 열렸다. 밖에는 아까 그대로 서너 명의 사내들이 좌우로 나뉘어 시립하듯 서 있었다.
"데리고 오너라."
마루로 나온 노탁우가 사내들에게 일렀다. 그러자 두 사내가 문 밖으로 나가더니 웬 상투잡이를 끌고 왔다. 방 안에서 밖을 내다보던 심첨지의 눈에는 어둠 때문에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러나 불빛 가까이 끌려온 녀석을 보니 틀림없이 자신이 부리던 선두 놈이었다. 놈은 두 팔이 뒤로 묶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심첨지는 가슴이 뜨끔했다.
"저 자를 모르신다지는 않으실 터이지요? 첨지 앞에서 다시 한 번 실토를 게워 올리게 하리까?"
"저놈이 시생의 수하인 것은 맞소만 겁박(劫迫)에 못 이겨 거짓 자복을 했을 것이요. 어서 풀어주시오. 세상에 자신이 탄 배를 자신이 강탈한다는 게 말이 되오이까? 허고 저놈이 수적이란 증빙이 어디에 있단 말이 오이까?"
"매를 들기도 전에 제 입으로 자복했으니 믿을만하지 않소이까?"
"그렇다면 그런 일은 유수부에서 밝힐 일이지 전 종사관이 사매를 들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소이다. 내 이 문제를 소홀히 넘기지 않을 테니 그리 아시오."
드디어 심첨지가 병조판서의 팔촌 형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 오일중의 아래위를 흘겨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세를 꼿꼿이 세워 위엄을 보이는 한편 오일중을 꼼짝 못하게 할 묘책을 찾느라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아랫 입술을 지긋이 물었다. 처음부터 기껏 포도청 전 종사관이란 자가 자신이 하는 일에 초를 치고 나서는 자체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제놈이 자복을 받았노라지만 선두가 수적이라면 유수는 고사하고 이 세상 누가 믿을 것인가 말이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유수부에 들어가 고할 것이니 그리 아시오. 아니, 그전에 저 선두 놈부터 풀어주는 것이 좋을 게요."
하나, 오일중은 심첨지의 말을 못 들은 척 밖의 사내들에게 일렀다.
"데리고 가거라."
오일중의 말이 떨어지자말자 두 사내가 선두를 끌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제 말이 들어먹지 않아 심첨지는 심기가 몹시 불쾌했다. 삼종질인 병조 판서를 내 세울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순간 오일중이 먼저 입을 떼었다.
"저 선두는 수적의 하수이고 수괴는 따로 있소이다. 그 수괴란 자는 첨지의 배를 덮쳐 뺏은 어물 짐을 아랫강 행주나루 김가 객주에 숨겨 두었었지요."
"무어요? 행주나루?"
"그렇소이다. 거기서 세상이 잠잠할 때를 기다려 어물 짐을 쌀섬으로 속여 세곡선에 실어 삼개 최가네 객주에 넘겼소이다."
"종사관께선 옆에서 본 것처럼 어찌 그리 소상히 아시오이까? 하지만, 시생의 생각으론 아무래도 뭘 잘못 짚으신 것 같소이다. 그것이 시생이 잃은 어물이 적실하다는 물증이 있을 리 없지 않소이까? 또한 그렇다 하더라도 수괴란 자가 물건을 넘길 제 등시포착(登時捕捉)을 해야 한다는 걸 포도청 종사관을 지낸 분이 모르시니 말이외다."
"허허 시생이 그걸 모를 리가 있겠소이까? 첨지께서 뺏겼다는 굴비가 이천 갓이요 수괴가 숨긴 굴비 역시 이천 갓이로소이다. 여기 객주인 김가의 증언과 자복서가 있으니 보시지요."
말 끝에 오일중이 소매 속에서 김가의 수장(手掌)이 찍힌 자복서 한 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심첨지는 그것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것이 무슨 증빙이 되리오? 조금 전에도 얘기했다시피 매매 당시에 등시포착을 하기 전에야 누가 믿겠소이까? 이젠 그만 하시오. 모든 건 내일 유수 앞에서 밝혀 질 것이요."
수괴를 잡은 것도 아니요 잡았다 하더라도 물건을 넘기는 현장에서 잡아야지 어물은 이미 도성 안으로 흩어져 없어진 마당에 엉터리 자복서 한 장으로 무슨 수작을 부린단 말인가? 심첨지는 오일중이 자신에게 공갈을 쳐 굴비 짐을 풀도록 하려고 온 줄 알았다. 턱도 없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오일중은 한결 같이 담담한 표정에 담담한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내 놓았다.
"다행히 칠패 기생집에 숨어있던 수괴를 잡아 매매문서를 손에 넣었으니 그런 염려는 마시지요. 허고 수괴는 우리가 모든 증빙을 모아 포도청으로 넘길 터인즉 그리되면 아마 목이 붙어 있기는 힘들 것이오이다. 내일 유수에게 가신다니 우선 선두란 놈부터 넘기면 유수도 일이 쉽게 풀려 기뻐하시리다."
오일중이 수괴를 잡았다는 대목에서 이미 온몸의 맥이 쭉 빠진 심첨지의 귀에는 그다음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아니 포도청이란 말과 목이 떨어진다는 말은 똑똑히 알아들었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나타난 오일중에게 농락을 당한 것이다. 처음부터 단도직입으로 '당신이 한 짓을 다 알고 있소. 당신 아들도 내가 잡아놓고 있소' 이랬으면 빨리 항복을 했을 터인데 야금야금 체통을 무너뜨리다가 마지막엔 숯불을 확 끼얹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들이 저들의 수중에 있다니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심첨지는 마지막 안간힘을 쓰기로 했다.
"남의 물건을 뺏앗았다면 모르되 내 물건 내가 빼앗는 것이 무슨 죄가 되리까? 게다가 이 일이 시임도 아닌 전 포도청 종사관이 관여할 문제 이오이까? 설혹 수적이라 해도 병조판서의 관용이면 방면이 될 터이고 또 그통에 유수께서도 수적인 천수패를 토포하여 전하의 심기를 편케하신 일이 아니오이까? 뭐가 잘못되었단 말이오? 허고, 사처(四處)에 반명이 뜨르르한 심씨 문중의 장손을 멋대로 납치하고도 과연 무사하리까? 시생이 보기에는 그러는 종사관이 더 낭패를 보게 될 것 같구려."
오일중의 눈빛이 반짝하더니 입가에 냉소가 번졌다.
"과연 그럴까요? 먼저 첨지의 죄가 몇 가지인지 우선 그걸 들어보시면 아시리다. 먼저, 수적에게 당했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트려 민심을 흉흉하게 한 죄가 하나요,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고자 교동의 한 부자와 석모도의 권 부자와 입을 맞춰 상도의(商道義)를 어지럽힌 그 죄가 둘이요, 삼강오륜을 가르쳐야 할 아들에게 도적질부터 가르쳤으니 그 죄가 셋이로소이다. 또 있지요. 전하의 하늘같은 성은에 힘입어 천하가 태평한 이 시절에 수적을 만났다고 거짓을 고하는 통에 돈대(墩臺)를 지켜야 할 수많은 병력이 엉뚱한 곳에 동원되었으니 이는 국방이 흔들리고 국고가 낭비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오이까? 이 죄 한가지 만으로도 첨지는 무사치 못할 것이오. 그 뿐만 아니오이다. 걸핏하면 삼종질의 반연(攀緣) 있음을 믿고 관아의 연장들을 무시로 갖다 쓰고 문중의 위세를 내세워 백성들을 어물 손질에 동원한다는 것도 알지요. 더 있소이다. 더 듣고 싶소이까?"
암행어사가 탐학한 사또 꾸짓듯 하는 오일중의 말이 사실 틀린 대목이 없으니 심 첨지는 자신의 간이 바직바직 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들에 이어 심 씨 문중이 와르르 무너지는 광경이 떠올랐다. 이놈들이 도모한다는 일이 무엇이관데 이렇듯 속속들이 알고 있단 말인가? 의금부나 포도청에 이 일이 알려지면 멸문지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심첨지는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차올랐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이놈들에게 항복하고싶은 마음은 없었다. 대신 재빨리 타협을 모색했다.
"불궤(不軌)를 도모한 것도 아니언만 너무 과장되게 말씀하시는구려. 아랫것들이 시키지 않은 일을 저질러 그러지 않아도 마음이 어지럽던 차에 종사관께서 오셨구려. 그래, 공께서 시생에게 이러는 연유가 무엇이요? 연유를 알면 서로 간에 얘기가 한결 쉬울 것 아니겠소이까? 시생 역시 그리 마음이 편협한 사람은 아니니 말씀을 해보시지요?"
거드럭거리던 심첨지가 완전히 무너져 안색에 초조한 빛을 보이며 타협을 해오자 비로소 오일중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오일중은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좋소이다. 그렇게 선선히 나오시니 말씀드리지요. 시생은 사실 낮에 교동과 석모도에 가서 두 부자들과 이미 흉금을 털어놓고 얘기를 끝냈소이다."
"예? 한부자와 권부자를 이미 만나보셨단 말씀 이오이까?"
"그러합니다. 그분들도 시생의 안(案)에 동의를 하셨소이다."
"안이라니? 무슨 안이오이까?"
"그분들에게도 해롭지 않은 일이 올시다. 굴비 값은 예전대로 돌리고 이번 일도 없던 것으로 덮는 것이지요."
"그럼, 시생의 어물 값도 그리하겠다는 말씀이시오이까?"
"허허, 아직도 사단을 깨닫지 못하시오이까? 얘기를 처음으로 돌리리까?"
심첨지는 빼도 박도 못하게 된 이 마당에도 당장 필요한 돈 생각에 죽어도 굴비 값을 되돌리기는 싫었다. 그러나 이미 한 부자와 권 부자가 굴비 값을 예전대로 돌리기로 했다면 그도 이미 틀린 일이었다. 그러나 애초의 굴비 값에서 손해를 보는 것도 전혀 없는 일이었다. 에라 이렇게 되면 문중과 집안이나 살리고 봐야겠다고 생각한 심첨지가 드디어 밑바닥에서부터 우러난 항복을 게워 올렸다.
"좋소이다. 시생도 종사관의 뜻에 따르리다."
"잘 생각하시었소이다. 이제 와 말이오만 첨지께서 논을 푸느라 들인 돈이 누만금인 것을 시생도 아오이다. 이번 사단도 거기다 쏟아부을 자금이 달린 데서 일어난 일인 것도 알지요. 해서, 첨지께서 시생을 믿고 동사(同事)를 하시겠다면 기꺼이 시생의 힘도 보태드리리다. 그렇게 되면 첨지께선 만석꾼 소리를 들을 논을 가지실 것이오이다."
"포도청에서 일을 보시던 분이라 과연 남의 속 사정을 속속들이 잘 아시는구려. 아니할 말로 개펄에다 쏟아붓는 돈이 두꺼비 입의 파리 같아서 표도 없고 끝도 없소이다. 그러나 다행히 몇천 냥만 더 들이면 끝장이 나오이다. 그렇게 되면 만석꾼까지는 아니어도 칠팔 천석꾼은 될 터이지요."
"천석꾼 소리도 듣기 힘든데 칠팔 천석꾼이라면 하늘이 낸 부자가 아니겠소이까. 그리만 되면 심 씨 문중에 또 다른 광영이겠소이다. 허허."
"그리 말해주니 고맙소이다. 가만, 조금 전에 동사(同事)란 말씀을 하신 것 같은데 시생과 무엇을 동사하잔 말씀이신지 그걸 듣지 않았구려."
"아, 그 얘기는 여기 노부장이 첨지께 자세히 밝힐 것이니 들어보시지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시생의 제안이 서로에게 해롭지 않을 것이오이다."
말을 끝낸 오일중이 자리에서 선뜻 일어나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가볍게 목례만 하고 방문을 나서니 심첨지는 잘 가란 말 한마디 할 틈이 없었다. 주인과 객이 모두 예의가 아니었다. 그러나 주객의 상황이 아직은 애틋한 작별의 인사를 할 만큼 무르익은 것이 아니어서 어색함도 별로 없었다. 심첨지는 방에 남아 있는 노탁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둥실하게 생겨 마음씨가 착해 보이는 노탁우가 빙긋 웃음을 지으며 심첨지에게 의미 있는 공갈을 슬쩍 흘리는 것이다.
"천수패가 과연 누구 손에 죽었을까요? 첨지께선 참으로 운이 따르는 것 같소이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은 심첨지가 미쳐 말도 꺼내지 못하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 혼잣말이니 괘념치 마소서. 참, 회주님의 안을 말씀드리지요."
노탁우는 심첨지가 미쳐 뭐라기 전에 재빨리 소매에서 치부책 한 권을 꺼내 방바닥에 척 펼쳐 놓았다. 그리고는 일일이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경강 나루를 드나드는 배의 숫자와 싣는 물종을 줄줄이 엮어 나갔다. 그리고 여각과 객주는 물론, 송상과 경상이 다루는 물종과 거래량을 차례로 설파하다 오일중이 조직한 상조회에 대해 설명을 해나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노탁우가 하는 말을 개가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로 듣다가 상조회란 것이 자신의 고깃배와 논에서 나는 쌀섬과 연관이 지어지고 마침내 큰 돈이 붙었다가 떨어지는 대목에 이르자 심첨지는 그만 곰이 벌통에 주둥이 박듯 정신없이 노탁우의 말과 치부책에 빠져드는 것이다.
며칠 후였다. 추석을 꼭 보름을 남겨둔 서강나루와 삼개나루는 굴비 짐을 내리려고 몰려든 수많은 날품팔이 일꾼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특히 삼개 나루에는 한꺼번에 두 척의 중선(中船)이 닻을 내려서 몰려든 인부들과 그들을 노린 죽 장수와 수수떡 장수들이 서로 엉겨 북적대는 품이 오랜만에 보는 장관이었다. 일꾼들뿐이 아니었다. 짐을 얻어 실으려고 마소를 끌고 온 사람까지 섞이니 그야말로 쇠전이 따로 없었다. 그 사이로 새벽부터 삼개의 여덟 군데의 여각과 세 곳의 객주에서 주인과 내 외 거간이 모두 쏟아져 나와 물주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동안 새우젓 냄새 말고는 굴비는 냄새를 맡지 못하던 여각들로서는 가뭄에 단비 같은 이것들을 어떻게든 맡아서 거간을 해야 했다. 물론 굴비보다 떨어지는 것 많은 쌀섬을 맡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으나 대부분의 대동미는 경상이 맡아서 저희들 배로 싣고 와 저희들 창고에 들이니, 여각이 맡을 곡식이라고는 끽해야 여름 한철 보릿 섬이나 시골 토호의 쌀섬과 연초가 고작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물량이 쏟아질 때 맡지 못하면 언제 또 맡겠는가? 여각으로서는 기회일 수밖에 없었다. 객주도 근래에 형편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금년 흉년이 다른 해보다 특히 심한 것도 아니건만 나라에서 금주령을 내리고 도살 금지령을 내려서 윗 강을 따라 싣고 오던 누룩도, 신탄을 따라내려오던 쇠가죽도 뚝 끊겨서, 맡아서 거래를 성사시키는 물건이래야 겨우 솜이나 삼베 짐인데 그나마 늘 있는 물목이 아닌 데다 물량마저 적어서 그걸로는 죽도 먹기 어려우니 무슨 짐이 되었든, 작은 짐 하나 놓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두척의 배에 실은 어물 짐은 객주가 나서기에는 물량이 너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대신 널널한 고방과 마방을 마련해둔 여덟 여각 주인들과 거간들은 희망을 갖고 물주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배 주위를 살폈다. 그때 작은 갓에 주름진 철릭을 입은 사내가 뱃전에 나타났다. 여각 주인들은 재빨리 그에게 달려가 물었다.
"이 배의 물주가 어디 계시오?"
모여든 사람들의 행색을 유심히 살피든 철릭 입은 사내가 그들이 무엇 때문에 물주를 찾는지 알아차렸다.
"물주를 찾는 걸 보니 여각 주인이구려. 하지만 이 물건들은 오늘 해 안으로 도성 안으로 들일 것들이라 고방이 필요치 않소."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에 실망이 스치며 낯색이 변했다.
"그렇다면 거간도 끝났단 말이오?"
"이번 물건은 거간이 없소."
"원 참. 거간도 없이 어찌 매매가 된단 말이요?"
"여하튼 물건을 가져갈 임자가 따로 있으니 그만 물러들 가시오."
여덟 여각 주인과 그에 딸린 거간꾼에 따라온 하인들까지 어림잡아 서른이 넘는 입에서 일제히 한숨이 쏟아졌다. 구경 삼아 따라온 객주인들도 곁따라 호르륵 한숨이 나왔다. 내가 못 먹는 떡을 놈들도 먹지 못하는 꼴에 그나마 위안이 되던 것이다. 모였던 사람들이 힘없는 발걸음을 옮겨서 흩어지자 철릭 입은 사내는 다시 사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개미 떼처럼 모여 웅성이는 일꾼들과 그 밖에 별의별 장삿꾼과 구경꾼들 헤치며 오는 노탁우와 그 뒤를 따르는 십여 명의 동료들을 발견하고 훌쩍 뭍으로 뛰어내렸다.
"그래, 얼마나 실었느냐?"
노탁우가 불쑥 물었다.
"한 척에 이천 갓이 올시다."
"음, 그렇다면 모두 사천 갓이니 사백 짐이로구나. 한 사람이 두 짐씩 진다 해도 이백 명이 있어야겠군."
"한짐 씩이라면 모를까 두 짐이면 어른 몸무게가 넘는데 저 인부들 꼴을 보아 과연 도성 안까지 갈 수 있을런지요? 차라리 마소를 쓰시지요?"
"아니다. 때 거리를 구하려는 저들이 지게 해라. 지던 끌던 오늘 해 안에 도성 안에만 져다 놓으면 되느니라. 노임은 여덟 푼이니 야박하진 않을 것이야. 허니 주 포교 네가 우선 인부들을 가려 뽑도록 해라."
"예, 그럽지요."
대답과 함께 주흥식이 뱃전으로 훌쩍 뛰어올라 뱃머리에 우뚝 섰다. 이어서 이쪽을 향해 목을 빼고 있는 일꾼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굴비 열 갓짜리 두 짐을 지고 도성 안 종루까지 갈 수 있는 자는 이쪽으로 나서거라. 만약 나섰다가 힘이 딸리는 자는 기만죄로 귀쌈을 맞고 쫓겨 날 것이다."
주흥식의 엄포 섞인 한마디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더니 스물댓 명이 한꺼번에 앞으로 나와 섰다. 나선 사람들을 보니 제법 힘꼴은 있어 보였다. 나서지 않은 사람들은 두 짐의 무게가 얼마쯤인지 몰라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는 듯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목구멍을 채우기 위해서 꼭 짐을 지긴 져야겠는데 잘못 해 양식도 얻기 전에 귀쌈부터 얻을까 해서였다. 주흥식이 웅성거리는 무리들을 향해 다시 한번 소리쳤다.
"더 없느냐?"
두어 명이 삐쭉거리며 앞으로 나와 섰다. 저렇게 많은 사람 중에 선뜻 나선 자가 서른이 안되다니 하고 주흥식은 고개를 갸웃했다. 일거리가 없어 때꺼리도 없는 것들이 아닌가? 개 중에 어떤 자가 한발 앞으로 나오더니 주흥식을 바라고 큰소리로 물었다.
"한짐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데 어찌 나선단 말입니까?"
주흥식은 그제야 삸꾼들이 선뜻 나서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
"한짐은 곡식 반섬 무게가 좀 더 될 것이다."
한짐이 곡식 반 섬이 넘는다니 두 짐이면 한섬이 훌쩍 넘는 무게 아닌가? 그걸 지고 도성 안까지 가야 하는 것이다. 삼개에서 종루 어물전까지는 곧은 길로 가도 시오 리 길이었다. 웬만한 짐이라면 반나절 거리지만 한섬이 넘는 짐을 지고 가야 하니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그때 또 다른 사내가 목청을 돋구었다. 그 사내는 힘꼴이나 쓰게 생겼다.
"두 짐을 지면 품삯은 얼마를 치실라우?"
"두 짐을 지면 여덟 푼을 주지."
"그러면 한 짐에 네 푼이구랴."
"반 짐이면 두 푼 이란 소리를 하려는 게냐?"
"아니올시다. 힘이 없어 한 짐 밖에 지지 못하는 일꾼은 네 푼을 주면 된다는 얘기 올시다."
"뭐라? 저 자가.…"
주흥식은 공대도 하지 않는 놈의 말씨부터 고약해서 뛰어 내려가 귓쌈부터 올리고 싶었다. 한데, 노탁우가 소매를 털며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보았다.
"음, 듣고 보니 네놈 말이 근리하구나. 암, 양식을 구하려는 마음은 누구나 매 일반이지. 저기 마소를 끌고 온 자들은 그래도 형편이 나은 축일 테니 짐이 남으면 싣게 하고 우선 너희들이 먼저 져야겠지, 좋다, 그러면 한 짐에 네 푼을 줄 테니 힘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힘대로 지거라. 두 짐을 지면 여덟 푼이요 석 짐을 지면 열두 푼이 아니냐?"
노탁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지더니 너도나도 서로 짐을 지겠다고 생난리였다.
"주 포교는 도사공을 불러 짐 내릴 차비하라 이르게."
"예, 그럽지요. 자네들은 저들 중에 옆으로 새는 놈이 있나 감시들 해주게."
마침내 새카맣게 달려든 일꾼들에 의해 어물 짐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상조회의 군관들이 각자 스무 명의 짐꾼을 한 조로 묶어 차례차례 도성으로 출발했다. 두 배에서 내리는 어물 짐이 사백 짐이나 되니 힘 있는 자는 두 짐이요 허약한 자는 한 짐씩이라 모였던 일꾼이 다 짊어지고 떠났건만 쉰여 짐이 남았다. 주흥식은 그제야 마소꾼을 불러 짐을 싣게 했다. 소 잔등에는 좌우에 두 짐씩 합이 넉 짐이 실렸다. 짐을 실은 마소가 차례로 떠나니 쉰여 짐 중에 하필 두 짐이 남았다. 두 짐으로 마소를 부르기는 그렇고 남은 일꾼도 없으니 주흥식이 어쩔까 망설일 때였다. 웬 젊은 놈 하나가 저쪽에서 부리나케 달려오더니 숨찬 소리로 뇌까렸다.
"나으리 더 나를 짐이 없으신지요?"
주흥식이 놈의 행색을 보니 맨 상투에 소매 없는 등거리 차림이라 천한 상것이 틀림없었다. 보나 마나 남의 집 하인이나 산골 나뭇꾼일 터였다.
"다들 떠났는데 무얼 하다 이제 나타나 짐을 지겠다는 거냐?"
"삼개에 짐이 풀린단 소리를 조금 전에야 들었기 때문 입지요. 혹여 짐이 남았다면 쉔네에게 맡겨 주소서."
놈이 늘어놓는 말씨가 공손하고 태도 역시 고분고분해서 주흥식은 기분이 한결 좋았다. 아까 품삯 타령으로 뻣뻣하던 놈과는 영 다른 인간이 아닌가?
"좋다, 두 짐이 남았는데 질 수 있겠느냐?"
"아, 예. 질 수 있고 말굽쇼. "
놈이 시원한 제 말씨처럼 짐을 척척 포게더니 새끼 바를 휙휙 둘러 거뜬하게 지고 나섰다. 주흥식은 그놈을 데리고 먼저 떠난 노탁우의 뒤를 쫓아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주흥식이 성큼 걸음을 걷는 중에 이따금 돌아보니 짐 진 놈도 잘 따라오고 있었다. 반 마장쯤 가자 짐 실은 마소의 행렬을 만났다. 이어서 등짐 진 삯꾼이 떼를 지은 행렬도 따라잡았다. 주흥식이 다시 뒤돌아보니 짐 진 놈이 어느새 자신의 발뒤꿈치에 바짝 붙어 있었다. 그것도 두 짐을 지고서였다. 그제야 주흥식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빈몸으로 나는 듯 걷는 자신의 걸음을 짐을 진 놈이 빈몸처럼 걷는 것이다. 처음에 무심했던 주흥식이 그제야 이놈이 보통 놈이 아닌 것을 알았다.
"힘이 장사구나."
주흥식이 뒤를 흘깃 돌아보며 칭찬의 말을 던졌다.
"웬 걸입쇼. 쉔네의 아비에 대면 쥐 힘입지요."
"네 아비 이름이 임꺽정이더냐?"
"아마 임꺽정이 살았더라면 쉰네의 아비를 성님으로 모셨을 것이옵니다."
"헛, 그놈 허풍 하나는 알아줄만 하구나. 그래, 너는 어디 사는 누구인데 하찮은 등짐에 목을 매느냐?"
주흥식이 묻는 말에 갑자기 짐 진 놈이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던 주흥식이 다시 뒤를 돌아보니 놈이 생김새에 어울리지 않게 고개를 숙여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다. 괴이한 생각이 든 주흥식이 뒤돌아섰다.
"도망한 종이더냐?"
"아니올습니다."
"그럼 왜 우느냐?"
"마을을 지나던 사당패가 쉔네의 처를 업어가바렸습지요. 주인의 허락을 맡아 사당패와 처를 찾아 집을 떠난 지 하마 다섯 달이 지났사옵니다. 헌데도 사당이 간 곳조차 모르옵고 이렇게 호구하기에도 바쁘니 서러워서 웁지요."
"허, 끔찍히 아꼈던 처인가 보구나. 하나, 사당에 업혀 갔다면 찾아야 소용이 없을 것이니라. 어찌 보면 남의 집 종년으로 늙느니 분이라도 찍어 바르는 그 팔자가 나을지 모르니라. 혹여 찾아도 그쪽에서 너를 못 본 채 할 것이다. 자 그만 울고 가자."
주흥식이 늦어진 걸음을 보충할 생각에 아까보다 더 빠른 걸음을 놓았다. 허나 짐 진 놈은 잃은 마누라 생각 때문인지 조금 전의 걸음과는 영 다르게 느려지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떼를 지어 가는 짐꾼들의 무리를 여럿 만났다. 공덕리를 지나 만리창 어름에 이르자 벌써 힘 약한 사람들은 슬슬 처지고 있었다. 그리고 욕심으로 자신의 힘보다 무거운 짐을 진 자는 아예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인솔한 상조회의 포교가 그들을 일으켜 세우느라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난리였다. 주흥식은 같이 떠난 젊은 놈을 기다려 길에 우두커니 섰다. 십여 보 뒤에 놈이 오고 있었다. 이제껏 잘 걷던 놈이 칭찬을 하자말자 걸음이 느려지니 주흥식은 그만 짜증이 왈칵 밀려왔다.
"이놈아, 사당패를 찾으려면 장날을 따라다니던지 소문을 들어 그들이 겨울을 나는 곳을 알아봐야지 이런 도성 가까이에 누가 사당패를 붙여준다더냐? 그러니 여태 못 찾았지. 이제 그만 훌쩍거리고 나를 따라붙거라."
주흥식은 말을 마치자 뒤도 안 돌아보고 성킁성큼 앞서 걸었다. 젊은 놈이 머뭇거리다가 코를 팽 풀더니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채 사오십 보도 걷기 전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방금 지나오며 누구를 본 듯해서였다. 길가에 힘에 부친 한 사람이 짐을 벗고 주저앉아 있었는데 지나오며 얼핏 보니 뒷모습이 누구와 영판 흡사했던 것이다. 젊은 놈이 설마 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왔던 길을 몇 걸음 물렸다.
"악. 나, 나으리."
젊은 놈이 기절할 듯 휘청하더니 와락 짐을 벗어던지고 주저앉은 사람 앞에 고꾸라졌다. 앉아 있던 사람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너, 넌 거칠이 아니냐?"
주저앉은 사람은 바로 송윤호였다. 그 순간은 서로가 기가 막혀 말문도 막혔다. 주종이 서로 망연히 마주 바라보는데 거칠이는 눈물에 콧물이요, 울랴 웃으랴 정신이 없었다. 송윤호 역시 이런 곳에서나마 거칠이를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잠시 후 거칠이가 새삼 주인의 행색을 살펴보니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지난 3월 이후 옷 한번 갈아입어 본 적이 없는 송윤호의 행색은 누가 보더라도 완전한 거렁뱅이였다. 때묻은 고의는 너덜너덜 헤어져 무릎은 구멍이 났고 땟국물로 꾀죄죄한 저고리는 걸레가 방불하였다. 옷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넓고 번듯한 갓이 있던 머리는 낡은 삼베 쪼가리로 꼬아 만든 띠로 상투를 묶었고 역시 낡고 땀에 절은 베로 이마를 동였다. 다듬지 않은 수염은 제멋대로 뻣쳐서 예전의 얼굴을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어물 짐을 짊어진 일꾼들이 지나가며 두 사람을 힐긋거렸다. 거칠이가 벌떡 일어나 제 짐을 바로 세우더니 송윤호의 짐을 위에 올렸다. 그러자 송윤호가 자신의 짐을 움켜잡았다.
"내 잠깐 쉬었으니 됐다. 내 짐은 내가 지마. 내려놓거라."
"아니 옵니다. 쉔네가 기운이 센 거야 나으리께서 아옵지요. 걱정 마시옵소서."
"그래도 석 짐은 무리다. 이리 내거라."
"넉짐도 질 수 있으나 짐이 없어 두 짐 밖에 지지 못하였사옵니다."
"헛,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만 내가 어제부터 곡기를 입에 대질 못해 힘이 빠져 이렇구나. 그렇지 않았다면 한 짐쯤은 문제가 없으련만, 쯧."
새끼를 풀어 자신의 짐과 송윤호의 짐을 새로 묶은 거칠이가 바닥에 주저앉아 팔을 끼워 바를 어깨에 걸었다. 송윤호가 용을 쓰며 일어나는 거칠이를 도왔다.
"나으리께서 이런 짐을 지시다니요, 만고에 가당치 않은 일이옵니다. 이제부터는 쉔네가 나으리를 모시겠나이다."
"어허, 그럼 언년이는 누가 찾느냐?"
"나으리를 모시고 다니면서 찾으면 되옵니다. 큰 댁 도련님을 찾다 보면 자연 언년이도 찾아지겠습지요."
거칠이가 뚜벅뚜벅 앞을 걸으니 송윤호는 자연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참, 나으리. 쉔네가 달포 전에 김화에 다녀왔사옵니다."
느닷없는 거칠이의 말이었다. 송윤호는 그 순간 가슴이 뜨끔함을 느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거칠이의 다음 말이 궁금했다.
"날씨도 가문 데다 쉔네 마져 없으니 아비 혼자 짓는 농사가 걱정이 되어 가 봤습지요. 마님을 비롯해 두분 도련님과 애기씨 모두 강녕하시옵니다. 애기씨께서 나으리가 보고 싶으시다고 하옵더이다."
"........."
"나으리."
".............."
"나으리께서도 일간 한 번 다녀오시오 소서."
".............."
"나으리, 두분 도련님들도 말씀은 않으시나 나으리가.…"
"그만 되었다. 길이나 줄이거라."
"그래도 나으리.…"
"어허, 그만하라지 않았느냐."
송윤호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찔끔 한 거칠이가 목을 움츠려 말끝을 맺지 못했다. 송윤호는 굳게 입을 다물고 땅바닥만 보며 걸었다. 머릿속에는 온갖 상념이 무질서하게 오락가락하고 가슴 역시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지난 늦은 봄 광릉에서 아이를 데리고 있는 유랑민의 뒤를 거의 다 좇았다가 놓친 후 그 일대를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원일이는 만나지 못했다.
"나는 죄인이니라. 나 같은 죄인은 가족의 안부를 듣는 것만도 죄를 더하는 것이다. 어쨌든 너는 잘 다녀왔다. 그래 네 아비는 별 일 없더냐?"
다감한 거칠이의 속내를 잘 아는지라 송윤호 역시 목소리에 다정함이 묻었다.
"쉰네의 아비는 아직은 괜찮습지요. 농사도 생각보다 잘 되었더이다. 거기는 산골짜기에서 흐르는 물 덕을 톡톡히 봅지요."
"그래, 그건 네 말이 맞다. 춘보도 생전에 늘 그말은 했었니라."
무심코 춘보 얘기를 꺼낸 송윤호는 아차 싶었다. 춘보는 거칠이에겐 아비나 다름없는 장인이 아닌가? 춘보 얘기가 나옴으로써 언년이 생각도 날 터였다.
"참, 나도 잊은 게 있구나. 석 달 전쯤 축석 고개를 다시 들렸다가 갑자기 생각난 바가 있어 당시의 교군들의 행방을 물색한 적이 있느니라."
"예? 가마꾼들은 흥인문 옆의 가마 도가에서 온 자들 아닙니까요?"
"그래, 맞다, 그래서 내가 흥인문엘 가서 그때 그 교군들을 만나보았느니라."
"가마꾼이 모두 여덟이었습지요."
"그래, 게 중에 세 명은 그때 칼을 맞아 죽고 한 명은 낭떠러지로 구를 때 머리를 돌에 찧어 죽었다더라. 남은 네 명 중에도 혼이 난 두 명은 그 후에 가마채를 놨다더라. 당시에 교군들은 낭떠러지를 굴러 건너편 산기슭으로 치달아 살아났다더구나.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처음엔 칼잡이 둘이 나타나 춘보와 가마를 해쳤고 산 아랫녘에서 나타난 십여 명의 사당패가 또 덮쳤단다. 사당패는 내 눈으로 보고 당하기도 했으니 적실하고 그놈들은 나를 때려뉜 다음에 올라갔을 것이다. 그리고 사당패 놈들이 웬 치마 입은 여자를 매고 벌내 쪽으로 가더라니 그게 언년이가 아니겠느냐? 그놈들이 물러가기 전에 또 남녀 섞인 유랑패가 새카맣게 몰려들어 쓸만한 물건들을 걷어 가더란다. 언년이를 데려간 사당이라면 남사당은 아닐 것 아니냐? 허고 사내가 십여 명이면 여사당의 수도 그 정도 될 터이니 이는 사당패 중에서도 큰 사당 패니라. 그래서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느니라. 그리 큰 사당패가 궁핍한 촌 동네를 돌아다녀서야 밥을 먹겠느냐? 내 생각에는 그들이 연회를 하려면 도성과 가까운 번듯한 장시를 택할 것이라 본다. 하니, 이제부터라도 어느 장시에서 큰 판이 벌어지는지 소문에 귀를 기우리는 게 나을 것 같구나. 조선 팔도에 큰 장이래야 기껏 스물 안팎 아니겠느냐?"
"나으리...."
"왜 그러느냐?"
"큰댁 도련님의 뒤를 따르시기도 바쁘실 터인데 언년이까지 생각해주시니 황감하올 뿐이옵니다."
"언년이가 어디 남이 더냐? 언년이 등에 업혀 크지 않은 애가 없으니 내 아이들에게는 에미 같은 사람이니라. 더구나 춘보를 생각하면 어떻게 해서든 찾아야 하느니라. 내가 이럴진대 너는 더 할 것 아니냐?"
"아니 옵니다. 큰댁 도련님만 찾을 수 있다면 언년이는 못 찾아도...."
"시끄럽다. 찾아야 한다. 둘 다 찾아야 해. 언제가 되던 꼭 찾고 말 것이니 너도 정신 바짝 차려서 어느 하나 허투루 보지 말거라."
주종 간에 주거니 받거니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청파 언덕을 지나고 있었다.
"청파로구나. 아직 종루까지는 십 리나 남았다. 짐을 내려놓고 좀 쉬거라."
"아니 옵니다. 십 리쯤은 끄떡없사옵니다. 여기 청파엔 쉔네가 콩나물을 사려 자주 오던 곳이오니 길이 만만하옵니다."
"허, 처음 듣는 얘기로구나, 여기에 콩나물 도가가 있느냐?"
"그럼입쇼. 도가가 많습지요. 저기, 바로 끝집이 숸네가 자주 가던 집이옵니다."
거칠이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언덕 위에 초가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음, 그때는 식구들 모두가 다 있었건만.…"
송윤호는 눈을 질끈 내려 감았다. 거칠이의 빠른 걸음은 숭례문에 닿기도 전에 처음 출발했던 무리를 거뜬히 따돌리고 첫 등으로 시전 어물점 고방에 닿았다. 그러자 빈몸으로 나는 듯이 달려왔던 주흥식이 깜짝 놀라는 것이다.
"아니, 네놈이? 엉? 거기다 짐이 더 불었구나?"
"예, 고향 사람을 만나 대신 져다 주는 것입죠."
"내 보다보다 별 놈을 다 보는구나. 보아하니 아까 네 애비 얘기도 거짓이 아니겠다. 그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거칠이라 하옵니다."
"음, 거칠이라. 내 잊지 않으마. 내 이름은 주흥식이다. 만약 어려운 일이 닥치면 나를 찾아 오너라. 경강 어디서든 나처럼 입은 사람에게 물으면 가르쳐 줄 것이다."
"예. 그리합지요."
"이 사람에게 품삯을 받거라."
고방 앞에는 장책과 붓을 든 서기(書記)와 돈 궤를 앞에 놓고 짐 숫자에 따라 돈을 노나주는 서사(書寫)가 있었는데 그들 역시 거칠이의 힘에 놀란 듯 눈이 둥그래 있었다. 어쨌든 거칠이는 열두 푼을 받아 쥐었다.
"가만, 그리고 이건 내가 주는 상급이니라. 받거라."
돌아간다는 인사를 하려는데 느닷없이 주흥식이 손을 내밀었다.
"아, 아니 옵니다. 쉔네 이만 가옵니다."
"허, 그놈 끝까지 내 마음을 사로잡는구나. 받지 않겠다면 다음엔 너를 보지 않겠다."
주흥식은 거칠의 손에 열 푼을 쥐여주고 노탁우가 들어간 수령위의 방으로 가버렸다. 거칠은 생각지 않은 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불현듯 밖으로 뛰쳐나갔다. 숭례문에서 기다릴 송윤호가 생각난 것이다. 밖으로 나오니 그제야 짐꾼들이 하나둘 몰려오고 있었다. 거칠이는 숭례문을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어제부터 굶었다는 주인에게 무어라도 대접을 해야 했다. 마침 떼거리로 몰려드는 짐꾼들을 노린 떡장수들이 길가에 나와 앉았다. 도성에서도 이미 어물 짐이 온다는 것을 알았나 보았다. 기장떡을 사려다가 주인이 먹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얼른 수수떡 장수에게 다가가 서 푼어치를 샀다. 호박잎에 싸서 건네는 수수떡을 들고 부리나케 내달아 숭례문에 닿으니 성벽 그늘에 송윤호가 맥없이 앉아 있었다.
"나으리, 급한 대로 떡을 사 왔사옵니다. 물이 있는 곳으로 가시지요."
"음, 그러자꾸나. 양반은 버린지 오래라 어디서 먹어도 부끄러운 것은 없다만 혹여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저어된다."
주종은 성벽을 벗어나 왔던 길을 따라 걸었다. 마지막에 떠났던 마소에 실은 어물 짐도 지나갔건만 아직도 허덕대는 짐꾼들이 몇이 쉬고 있었다. 철릭 입은 상조회 포교 출신도 입씨름에 지쳤는지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주종은 결국 얼추 청파에 다 와서야 마춤한 장소를 발견했다. 언덕에서 흐르는 물이 있고 판판한 바위도 있었다.
"어서 드시오서서."
"너도 앉아라. 같이 먹자꾸나."
"쉰내는 먹었사옵니다."
"그 말을 믿을 내가 아님을 알 것이다. 자 너도 먹어라. 그래야 나도 먹겠다."
"허, 이러다 쉔네는 오늘 과식하옵니다."
"과식이라? 핫하, 네 덕분네 오랜만에 웃어보는구나."
주종이 수수떡 두 개씩 나눠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송윤호는 허기진 배에 그나마 요기가 되었다.
"이제 어디로 가면 좋을런지요."
"삼개로 다시 가자꾸나. 도성 안팎에서 그곳이 제일 물자가 흔하더라. 물자가 흔한 곳을 찾아 사람들이 모여드니 우리도 그 사람들을 살피면 될 것 아니냐? 배고픈 유랑민들도 연희를 하려는 사당패도 결국은 먹을 것 구하기가 용이한 곳에 모이는 것이 세상 이치 아니더냐."
"그럼 그럽지요. 삼개는 일거리도 있을 것이오니 쉰네는 일을 하고 나으리께서는 사람들을 살피시면 되겠사옵니다."
"아무려나 되는대로 하자. 이제껏 굶어죽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무슨 수가 있겠지."
두 사람이 삼개로 돌아왔을 때는 벌써 오정이 훌쩍 넘어 있었다. 나루에는 크고 작은 배가 엉겨 새우젓 독을 싣고 내리기 바빴다. 이제부터는 가을이라 겨울을 준비하려는 것이었다. 멀리서 통나무를 때리는 망치소리가 들려왔다. 강 가운데 떠 있는 밤섬에서 배 목수들의 망치소리였다. 섬은 불과 한마장 정도의 거리였다.
"나으리, 저 섬에서 만드는 배는 나라에서 만드는 것이옵니까?"
"나라에서 만드는 것도 있고 부자 상인들이 만드는 것도 있느니라. 저 섬의 이름은 밤섬이니라. 내가 어릴 때도 배를 만드는 것을 봤으니 저 섬에서 배 만든지는 아마 오래일 것이다. 근자에 만드는 배는 모두 경상에서 만드는 것이니라."
"경상이라면 송상 같은 보부상 말씀이시옵니까?'
"아니다. 경상은 같은 장삿꾼이긴 하나 근자에 부쩍 커진 상단이니라. 주로 나라의 세곡을 운반해 치부를 한 상단이라 대선(大船)만도 쉰여 척이 넘는다 더구나."
"듣자니 굴비 실은 배가 거의 달포만에 왔다 하옵니다. 그래서 도성 안에서는 한 갓에 반 냥이 넘은 적이 있었다니 원, 세상에 반 냥이면 쌀이 한 말 아니옵니까?"
"나도 들었니라. 그것은 누군가가 농간을 부린 때문이니라. 중간에서 누가 굴비를 틀어잡고 도성 안으로 들이지 않은 탓에 값이 오른 것이니라. 그것을 일러 매점 매석이라 하니라. 내 언젠가 네게 농단(壟斷)이 무엇인지 말해 준 적이 있지만 이것은 농단보다 더 나쁜 짓이니라. 이 짓을 하려면 우선 돈이 많은 부자여야 하는데 부자가 더 큰 부자가 되는 방법이니라. 그리되면 많은 사람들이 부자 한 사람 때문에 비싼 물건을 살 수밖에 없으니 가장 나쁜 장사 방법이 아니겠느냐? 장사란 물이 흐르는 이치대로 해야 하니라."
"나으리 말씀을 들으니 저도 언젠가는 장사를 해보고 싶사옵니다."
"그래, 언년이를 찾으면 부부가 장삿길로 나서도 좋겠지. 그래, 네가 언년이를 찾는 그날로 너희들 종문서를 불사르마. 또한 면천할 길을 알려주마."
"아, 나으리...."
송윤호는 강 건너 양화도(楊花島)를 망연히 바라보다가 그 앞의 밤섬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흐르는 강물에 눈을 돌렸다. 거칠이도 송윤호와 함께 강물을 망연히 내려다보고 섰다. 강물은 흐르는 듯 마는 듯 고요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 물 위로 참으로 죄송하면서도 보고 싶은 얼굴들이 함께 흐르고 있었다. 보일이, 어머님, 형님, 형수님, 장인, 장모, 춘보와 언년이까지 어느 누구 하나 그립지 않은 이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송윤호는 원일이에 대한 어떤 실마리도 잡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이 시각이 못내 안타깝고 서러웠다. 그러나 사실 그 시각에 원일이는 송윤호의 눈앞에 있었다. 불과 한마장 거리의 밤섬 춘월이네 술집 부엌데기 내촌댁 등에 업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식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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