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스치는 만남
현란한 색채를 뽐내던 단풍도 한차례의 서리에 빛을 잃더니 곧바로 겨울의 문턱으로 접어들었다. 막힌 곳 없이 터진 강물 위로 찬바람이 마구 몰려드는 삼개나루는 그래서 더욱 추웠다. 고인 물에는 벌써 살얼음이 얼고 겨우살이 준비가 안된 사람들의 발걸음은 더욱 바빴다. 삼개에는 사람만 바쁜 것이 아니었다. 오강(五江)이 얼어붙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실어 나르려는 세곡선과 신탄선들은 더욱 분주하고 바빴다. 연평 바다에서 잡은 어물을 실은 배들 역시 수로가 막히기 전에 한 행비라도 더하려는 듯 줄을 이어 오르내렸다. 경강의 수로가 얼면 모든 어물은 재물포를 거쳐 육로로 날라야 하니 태가도 비싸려니와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루에는 많은 사람들이 새벽부터 어물 실은 배가 닿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추 이백여 명에 달하는 그들은 한 쪽에다 지게를 벗어두고 십여 군데에 피워놓은 화톳불을 둘러싸고 추위와 싸우고 있었다. 불은 여름 홍수에 떠내려 온 나무들을 건져다 놓은 것들이라 크기나 모양이 갖가지였으나 잘 말라 있어서 불길이 세차게 타올랐다. 사람들은 연기에 눈물을 질금거리면서도 불 가까이 다가가려 애를 썼다. 동짓달에 접어들어 추위가 온몸을 에워싸건만 그들 중에 솜옷을 입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거의가 한 됫박의 좁쌀에 목을 매야 하는 형편들이다 보니 계절을 따질 처지가 아니어서 여름에 입던 삼베옷을 벗지 못한 것이다. 개중에 몇몇 사람들은 토끼가죽으로 만든 토시와 귀마개를 꼈으나 겨울을 몇 번이나 넘겼는지 대부분 낡고 좀이 먹어 털이 다 빠진 것들이었다. 오싹한 찬바람을 피할 요량으로 사람들이 서로 화톳불 앞으로 죄어드니 앞 쪽은 뜨겁고 등 쪽은 얼음이 얼 판이었다. 그래서 재빨리 뒤돌아보지만 이번엔 엉덩이는 뜨겁다 못해 델 지경이고 앞은 썰렁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개중엔 옷이 타는 줄도 모르고 불 가까이만 하려는 사람도 있고 자반 굽듯이 앞뒤로 연신 자신을 돌려 굽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라도 배가 들어올 때까지는 기다리고 볼 일이었다. 이제 곧 날이 더 추워져 강에 얼음이 얼면 일거리와 함께 때 거리도 살아질 것이니 이럴 때 한 푼이라도 벌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런 일은 있기만 하면 돈 푼 이나마 만질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랴. 한 겨울로 접어들면 서빙고에 채울 얼음을 떠내는 부역에 강제로 동원되어 돈 한 푼 안 생기는 생고생을 죽도록 할 터였다.
"에그, 추워 죽겠구만 이놈의 배는 왜 아직 안 오는 거야?"
춥고 뜨겁기가 짜증이 난 젊은 놈이 발을 굴렀다.
"와도 걱정이네. 일이나 할 수 있을지. 원."
"그건 또 무슨 소리유?"
낫살이나 먹은 자가 걱정을 늘어놓자 젊은 놈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저기를 보게나. 어제부터 냄새를 맡고 또 나타나지 않았나?"
"어디 누구 말이요?"
낫살 먹은 자가 가리키는 곳이 잘 보이지 않은 젊은 놈이 불가에서 한 발을 뺀 후 고개를 돌려보니 저쪽에서 낯익은 몇 놈이 모여 서서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어라? 저건 망태 패거리 아니요?"
"누가 아니래나. 상조회에 쫓겨 어디 가서 죽은 줄 알았더니 또 나타났구먼."
"이거 잘못하면 곱다시 닷 푼이 날아가게 생겼구만."
"그거야 일을 했을 때 말이지 그보다 나 같이 나이 먹은 사람은 일을 시키지 않을까 걱정일세."
"보나 마나 지난번과 같겠지유. 젊고 힘 있는 자만 계원으로 삼을 게유."
"그럼 큰일인데... 여기 말고는 다른 일거리가 없으니."
"여기라고 언제까지나 일거리가 있수? 어물 짐 말고는 없지 않소?"
"그러게. 새우젓 배가 끊기니 모든 배가 다 끊기는 구먼."
"배야 쉼 없이 들어오지유, 일꾼이 필요치 않은 배들이라 그렇지."
그사이 이곳저곳에서 불을 쬐던 사람들이 망태 패거리를 발견하고 술렁이자 바짓가랑이에 불이 붙도록 화톳불로 조여들던 사람들도 하나둘 망태패를 확인하느라 고개를 빼고 힐금거리기 시작했다.
"귀신들은 무얼 하느라 저런 것들을 살려주나 모르겠구만.... 엥이."
"조용하오. 듣겠소."
"이거 다시 대동계(大同契)에 들어야 일을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럴 것이오. 저놈들이 대동계가 아니면 무엇 하러 다시 나타났겠소?"
"이럴 때 상조회가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허, 상조회가 이제 와서 저런 왈짜들과 무엇을 두고 다투려 하겠소? 그들은 이미 장삿길로 돌아섰다는 소릴 못 들었소?"
"아, 그걸 알구서 저놈들이 나타났구나. 이거 삼개가 또 시끄러워지겠고나."
"꼴을 보니 그런 것 같소."
연방 곁눈질을 하며 저마다 한마디씩 지껄이는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날씨는 춥고 배는 보이지 않는데 망태란 작자까지 나타나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니 이래저래 더욱 몸이 움추려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시 불 가까이 몰려들었다. 개중에 어떤 자가 불쑥 나섰다.
"대동계에 든다고 마냥 나쁜 것만도 아니질 않소?"
"엉? 그건 또 무슨 소리여?"
"생각 좀 해보시오. 이곳 삼개로 들어오는 배가 많다고는 하나 일꾼들이 요즘처럼 늘어서야 어디 일이나 해 보겠소? 진작에 대동계에 있던 사람들은 오히려 손해란 말이요. 예전에는 일거리가 끊어지는 법이 없었는데 요즘에는 개나 소나 다 일을 하게 두니 대동 계원이던 우리 같은 사람들만 손해를 본 셈이란 말이요."
"대신 대동계에 매일 닷 푼 씩 바치던 걸 생각해 보시오. 하루 종일 뭐가 빠지게 일을 해서 받는 돈이 스무 푼인데 거기서 닷 푼이면 그 게 적은 돈이요오?”
"그래도 짐을 지자고 이렇게 남 먼저 나와 싸움박질을 하는 수고에 비하면 싸지요."
"헛, 결국 젊은 사람들끼리 벌어먹을 때가 좋았다는 말이로군. 그럼 우린 굶어 죽으란 예긴가?"
낫살 먹은 사람이 젊은 놈에게 눈총을 주자 몇몇 늙은이들도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화톳불의 불길이 서서히 사그러 들더니 잉걸불로 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누가 가서 나무를 더 가져오기를 서로 눈치를 보며 기다렸다. 너나없이 남 좋은 일 시키자고 불 곁을 떠나기 싫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배다. 배가 온다."
줄곧 강 아래쪽에 눈길을 박고 있던 사람의 외침에 이백여 명의 시선이 일시에 한 곳으로 쏠렸다. 정말로 아래 강으로부터 바람을 가득 안은 돛단배가 올라오고 있었다. 배는 서른 석 자 짜리 중선으로 쌀 삼백 섬을 실을 수 있는 비교적 큰 배였다. 죽어도 불 곁을 떠나기 싫은 몇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추위를 잊은 채 성급히 강가로 몰려들었다. 그들 틈에 밤섬의 동이도 끼어 있었다.
"동이, 자네도 나왔군."
옆으로 붙어 선 누가 말을 걸자 동이가 돌아보았다. 새우젓 장사 정서방이었다.
"아, 성님이였구려, 그러는 성님은 생전 안 하던 일을 하러 나오셨수?"
"허헛, 자네도 처자식을 거느려보게나. 그러지 않아도 날은 점점 더 추워져 걱정인데 마누라가 잔소리까지 해대니 골이 내려앉을 판이라 견딜 수가 있어야지."
"허긴 그럴 게유, 성님의 알량한 그 작은 배 하나로 새우젓이나 팔고 밤섬 가는 선객을 태워 본들 얼마나 벌겠수. 이런 일거리라도 있을 때 해야지요."
"그깟 배라도 내 배라면 얼마나 좋겠나? 자네도 알다시피 그 배는 춘월 네 배 아닌가? 게다가 새우젓도 가을까지라 겨울로 접어든 요즈음은 그나마 팔리지 않네. 그러니 이런 일이라도 하려는 걸세. 까짓, 힘은 들겠지만 몇 년은 더 할 수는 있겠지. 허고, 망태가 잡고 있을 때에는 사실 이런 일이나마 할 수도 없었잖나?"
"그러게나 말이유. 나도 그놈들 계엔 든 적이 없수."
"저 배가 과연 이 나루에 댈 것인가가 문제로군."
"십중팔구는 이리로 올 게유."
"가만, 뱃머리에 쪽빛 옷을 보니 저 배는 상조회 배로구만."
"어? 정말 그러네. 해주에서 퇴선을 사서 고쳤다더니 저게 그 배구려. 그럼 여기로 오는 것은 불문가지요. 아마 황가네 객주 고방으로 나르는 어물일 것이요."
"아무튼 잘 되었네. 상조회 사람들은 그렇게 까탈스럽지도 않다니까."
"배가 거의 다 왔수. 성님, 우리도 줄을 섭시다."
동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횡대로 마구 엉켜 서서 이리로 오는 배인가를 바라보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모래사장에 박힌 말뚝을 잡고 손을 번쩍 쳐들자 삽시간에 일렬종대로 줄줄이 들어붙기 시작했다. 처음엔 수월하게 척척 차례대로 줄지어 서더니 줄이 차츰 길어지자 뭉쳐 섰던 사람들이 갑자기 우르르 몰려가 늘어서려니 엄청난 경쟁이 벌어졌다. 힘 있는 사람은 앞사람의 허리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고 힘없는 자는 열 밖으로 밀려나니, 밀려난 사람은 중간에 낄 틈이 없는 고로 다시 뒤쪽으로 달려가 새로 줄에 붙으려고 아우성이었다. 한가하게 불가에 있던 몇몇 사람은 그제야 놀라 후다닥 무리 속에 뛰어들었지만 옆 사람이 내지르는 팔꿈치에 옆구리를 맞고 모래밭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결국 악착같은 자와 힘 있는 자의 순서대로 줄이 이루어졌을 때는 벌써 배의 닻이 내려진 뒤였다. 다행히 동이도 새우젓 장수 정서방과 함께 비교적 앞 쪽에 섰다.
"헛, 이거 새벽밥을 부실하게 먹고서는 줄도 제대로 못 서겠군. 새우젓 팔러 다니는 건 여기다 대니 신선 놀음이 아닌가 말이야."
정서방이 어이없는 얼굴로 투덜거렸다.
"내 이래서 대동계가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니깐, 날이면 날마다 이게 무슨 지랄인가 말이야? 일하는 것보담 줄 서는 게 더 힘이 드니 이거야 원."
아까 대동 계원이던 자신은 손해를 보고 있다던 그 자의 말이었다. 배가 뭍 가까이 붙자 뱃전에 중갓을 쓴 사람이 더 작은 갓을 쓴 두 사람과 함께 나타났다. 중갓을 쓴 사람은 노탁우요 작은 갓은 황구만과 부 방장인 기형도였다.
"이키, 웬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가?"
수백 명이 길게 줄을 선 것을 처음 본 기형도가 탄성을 터트렸다. 그는 이번에 처음으로 황구만을 따라 강화도를 다녀오는 길이어서 이런 광경이 생소했던 것이다. 기형도는 구불구불 일렬로 늘어선 사람들의 끝은 어디인가를 찾았다. 그러다 한 곳에 따로 떨어진 대여섯 명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저 작자는 마개출에게 맞아서 쫓겨났던 망태 아닙니까?"
기형도가 노탁우와 황구만을 돌아보며 망태를 가리켰다. 하나, 노탁우는 망태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대신 황구만이 눈을 깜짝 깜짝하더니 노탁우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이 사람 말이 맞사옵니다. 저놈은 죽은 마포교에게 쫓겨났던 놈으로 삼개 대동계의 대두였습지요. 아마도 우리 상조회가 삼개에서 손을 떼고 상고로 돌아선 것을 알고 또 나타났나 봅니다. 조만간 저놈들이 다시 대동계를 만들어 인부들을 통솔할 것이옵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방해만 않는다면 그냥 두세나. 회주님 말씀처럼 우린 예전과는 다르지 않은가? 말썽이 생기면 결국 장사로 먹고살아야 하는 우리만 손해니까."
"그야 그렇습지요. 어차피 얼음 얼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제놈들이 이 삼개를 어쩔라구요."
노탁우의 말에 황구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기형도가 다시 망태패가 있는 곳을 바라보니 그쪽에서도 이쪽 눈길을 의식한 듯 슬그머니 자리를 뜨고 있었다. 놈들에게 시선을 꽂던 기형도가 그제야 길게 늘어선 일꾼들에게 눈을 돌렸다.
"부 회주님, 몇 명이면 될까요?"
"황 방장에게 물어야지. 내게 물을 일이 아니지 않나? 황방장, 몇 명을 쓰려나?"
"이 배에 실은 어물은 염장이 된 것들이니 고방에 들일 것입니다. 허니 쉰 명이서 한나절 일거리 옵니다."
"그렇다면 점심때 오는 배도 쉰 명이 그대로 계속하면 되겠구만?"
"쉰 명을 쓰되 염 간을 한 것은 객주에 쌓고 점심 때 오는 배는 생물이라 시각을 끄느니 아예 도성에 들여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도성으로 운반하는 품삯은 어물전과 따로 셈을 하면 될 터이고 그러자면 점심때부터는 남은 사람들 모두를 써야겠습지요."
"음, 물건이 이곳에 도착한 이상 자네가 모두 알아서 하게나."
"예, 그럽지요, 여보게 형도, 자네가 저들 중 우선 쉰 명을 고르게."
황구만의 말에 기형도가 뱃전에 한 발을 올리고 목청을 돋우었다.
"앞에서 쉰 번까지는 한나절은 객주 고방으로 짐을 나르고 하오에는 도성 안으로 어물 짐을 나를 것이다. 뽑힌 쉰 명 이외의 나머지는 점심때 새로 오는 배의 짐을 지고 도성 안 어물전까지 갈 것이니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가 이따 점심때 오거라."
기형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첫 등으로 섰던 자가 재빨리 줄 선자들을 큰 소리로 헤아려 나가다가 마흔아홉 번째 사내 앞에 딱 서더니 그 뒷 사람들을 향해 턱짓 손짓으로 물러가라는 시늉을 했다.
"이런, 쉰 명을 쓴다는데 쉰 명에서 끊어야지 왜 마흔아홉에서 자르는 거여?"
쉰 번 째에 섰던 사내가 갑자기 핏대를 세웠다. 쉰이면 자기까지 포함이 되어야 할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러자 첫 등의 사내가 히죽 웃으며 쉰 번째 사내를 흘겨보았다.
"이런 사람을 보았나? 내가 나를 셀 필요가 있나? 그러니 나까지 쉰 아닌가? 쉰 번에 당신을 끼워주고 첫 등으로 줄을 선 내가 빠지란 말인감? 아, 억울하면 더 빨리 줄을 서면 될 것을 화톳불에 부랄을 굽느라 자기가 늦어 놓구선 내게다 시비를 걸다니, 원."
"아, 이런 넨장, 오늘은 반 품삯 밖에 못 벌게 생겼구나."
"집이 먼 데.... 들어갔다 또 나오라니, 이거야...."
"점심 때부터 한나절을 해봐야 열 푼이 아닌가? 그걸로 좁쌀 한 됫박은 될랑가?"
"그나마 조 한 됫박이 어딘가?"
쉰 명에 들지 못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섰다. 이백여 명 중에 종일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겨우 쉰 명뿐이라 사람들의 낙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실, 오강을 드나드는 배가 종일 끝이 없이 오가기는 하나 막상 이렇게 많은 일꾼이 필요한 배는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본시 오강 수로에 드나드는 큰 배의 대부분은 경강상인들이 부리는 세곡선들인데 그들이 닻을 내리는 양화나루에는 이미 하역계가 조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배에서 광흥창까지 쌀섬을 나르는 일 모두를 하역 계가 맡아서 해버리니 계원이 아닌 사람은 얼씬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가 똘똘 뭉쳐서 외부인을 철저히 배척하고 은근슬쩍 끼어들려는 눈치가 보이면 무자비하게 몰매로 다스렸다. 그러니 아무나 일할 수 있고 오만가지 물종이 닿는 만만한 삼개나루에 일꾼들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했다. 허기야 이곳도 반 년 전까지는 대동계가 있어서 새우젓이나 소금을 실은 배가 들면 저희들끼리 다 해 먹으려고 아무도 얼씬거리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오일중의 입김이 닿아 망태 패가 쫓겨난 후부터 사방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지금은 얼추 이백오십 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등짝에 짊어진 지게 하나만 믿고 삼개로 몰려드니 근래에는 강가와 언덕은 물론 둔지산 아래까지 움막이 즐비하게 늘었다. 헌데 하루를 벌어 하루를 먹고사는 이들의 움막이란 것이 허술하기 짝이 없어서 바람만 세게 불어도 뒤집혀 날아갈 판이었다. 그렇다고 목구멍을 팽개치고 움막 손질에만 매달릴 수도 없는 몸들이니 올겨울도 그 꼴로 지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들 중에는 경신 대기근 이후 십여 년을 계속 그렇게 살아온 축도 있었는데 여태 가족이 모두 무사한 움막은 한 곳도 없었다. 살아남은 자의 대부분이 젊은 남자들이었고 여자들과 늙은이가 이런 움막 생활로 버티기에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어린아이들은 한 해 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먼저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죽은 사람은 죽더라도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식량을 구해 또 한 번의 겨울을 나려 하나 앞날이 암담한 것은 죽은 자와 별반 다를 것도 없는 삶이었다. 쉰 명에 뽑힌 사람들은 누구의 지시도 없건만 벌써 발판을 연결하고 뱃머리에 밧줄을 걸어 배가 흔들리지 않게 땅 위의 말뚝에 묶었다. 그 모습을 뱃전에 서서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노탁우가 배에서 막 내리려는 황구만을 불러 세웠다.
"요즈음은 하루 품삯으로 얼마주나?"
"예? 아, 예. 스무 푼으로 정해져 있습지요. 헌데 어찌 그러시는지요?"
"음, 쉰 명에 들지 못해 돌아가는 저 사람들을 생각해서 일세. 지난번 굴비 짐을 도성 안으로 들일 때처럼 저들을 다 쓰면 어떻겠나? 집으로 갔다가 점심때 다시 오라느니 아예 이 배에 달려들어 짐을 객주 고방에 갖다 쌓고, 좀 쉬었다 점심때 오는 배의 짐도 모두 함께 져 나르면 일도 빨리 끝날 것 아닌가?"
"일리 있으신 말씀이나 그러면 품삯 정하기가 애매하옵니다."
"하루 품삯이 스무 푼이라면 열닷 푼 씩만 주면 될 것 아닌가?"
"글쎄 올습니다. 열닷 푼이면 머릿수와 시간을 셈해 보면 우리가 약간 손해 입지요. 허나, 어쩌면 상조회의 앞날을 위해서이니 해롭지 않은 일 같사옵니다."
"내 말이 그 말일세. 입소문에라도 우리 상조회 사람들이 야박하다는 소리가 없어야 장사하기에도 수월할 것 아니겠나?"
"하하하, 이젠 부 회주님께서도 상고가 다 되시었사옵니다. 하핫."
"허허, 그사이 자네가 부지런히 깨우쳐 준 덕분일세."
황구만이 작은 몸을 달싹이며 온몸으로 웃으니 그 모습이 또 우스운 노탁우도 따라 웃었다. 지난번 추석 무렵 도성으로 굴비를 나를 때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 짐을 지게 한 이후 상조회의 일이라면 서로들 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보게 형도, 자네도 들었지? 저들을 다시 불러 모으게."
기형도가 다시 뱃전에 서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저기, 저 언덕을 넘어가는 자들은 다시 돌아들 오너라. 다들 덤벼들어 일을 빨리 끝내버리고 쉬었다 한 짐씩만 도성 안으로 지고 가면 오늘 일은 끝이다."
"그러면 일이 수월하고 빠르긴 한데 품삯이 적지 않습니까요?"
쉰 명에 뽑힌 배 아래의 어떤 자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기형도에게 항변했다. 그러자 노탁우가 그 자를 내려다보며 일갈했다.
"다 같은 처지에 네놈만 입을 달고 있느냐? 품삯이 조금 적더라도 다 같이 벌어먹어야 할 것 아니냐? 고오얀 놈 같으니라고."
노탁우 뿐 아니라 황구만과 기형도까지 그 자의 머리통을 노려보자 품삯 타령을 하던 놈이 쥐구멍을 찾았다. 발판을 고정시킨 후 어물 짐을 내리려고 몰려들었던 사람들도 처음엔 노탁우의 제안을 듣고 속으로 불만이 약간씩 있었다. 애써 선착순으로 줄을 서서 뽑혔더니 이제 와서 개나 소나 다 일을 시킨다니 될 말인가? 하지만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노탁우의 말이 한편으론 고마운 말이기도 하였다. 쉰 명 모두는 두말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낙담으로 돌아가던 사람들이 배로 몰려들었다. 이미 배 위로 올라섰던 사람들은 선적된 광주리를 뱃전으로 끌어내고 그것을 받은 사람들은 연신 몰려드는 사람들의 어깨에 올려주었다. 황구만은 기형도에게 인부를 감독하게 하고 노탁우와 함께 배에서 내렸다.
"날씨가 차옵니다. 이만 객주로 가시지요."
"그러세나. 지금쯤 녀석들이 돌아왔으려나?"
"하하, 소인의 생각으론 진작들 돌아왔을 것으로 보옵니다."
황구만은 장사를 배워보겠다고 온 일곱 명의 전직 포교들을 생각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며칠 동안을 장사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입으로 가르치다 못해 굴비 열 갓씩을 들려 무조건 사흘 안에 팔아오라고 시킨 것이다. 하지만 생전 처음 해보는 짓들이라 제대로 다 팔고 돌아온 사람은 아마 없을 터였다.
"허, 육모 방망이나 주먹질을 하라면 잘 할 것들에게 장삿길을 가르치려니 자네가 힘이 들 것일세. 하지만 그 길 말고는 우리가 살아갈 방도가 없으니 익히고 배워야지 별 수 있나? 다행히 세상도 변해서 돈만 있으면 양반이 부럽지 않은 세상 아닌가?"
"그렇사옵니다. 십여 년 전과는 또 다른 세상이옵지요. 이제는 양반도 돈이란 물건이 어떤 것인 가를 알 때가 되었습지요. 앞으로는 가난한 양반보다야 돈 가진 중인이 나은 세상이 올 테니까요."
"내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더군. 어물전 수령위의 아들이란 자가 돈이 있어서인지 중인임에도 광주 관아를 제집처럼 들락거린다더군."
"아. 송파 객주의 문일평 말씀 입지요? 그자는 워낙 대대로 있는 집 자식인데다 상고의 묘리도 제법 아는 자이옵니다. 관아에 드나드는 것은 아마 사또에게 뇌물을 바치려는 것이겠습지요. 그자라면 앞으로 제법 그럴듯한 객주를 꾸려나갈 것이옵니다."
"지난 번까지는 제 아비에게서 받은 돈값으로 자네가 물주들을 몰아주었지만 앞으로는 그 자와 약간의 거리는 두게나. 송파 쇠전 거리에 그 자의 동생까지 덤벼들어 객주를 내려고 공사 중이라네. 우리도 송파에 객주를 짓고 있지 않나? 그러니 앞으로 자칫 그자 형제와 물량을 두고 다툴지도 모를 일일세."
"그 점이 염려되시오면 소인을 송파로 보내주시 오서소. 소인이 책임지고 일 년 안짝에 우리 객주를 송파에서 제일로 만들어 보입지요."
"글쎄. 그 문제는 회주님과 상의를 해서 정할 일이네만 송파만 잘 되어도 지금 자네에게 가 있는 놈들을 거기다 붙여놓을 수 있겠지."
"소인이 송파로 간다면 지금의 삼개 객주는 네댓 명을 붙이면 웬만큼 돌아갈 것이오나 아예 부 회주님께서 삼개로 오시는 것 이 어떠하올지요?"
"엉? 내가 말인가?"
의외의 말인지라 노탁우가 설큼 놀란 얼굴로 황구만을 돌아보았다.
"예, 이제 객주와 배를 사들이느라 강화 부자들에게서 나온 자금은 거의 바닥이 났으리라 사료되옵니다. 허니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서든 객주에서 이문이 나야 상조회가 살 것 아니 옵니까? 그러자면 장사에 미숙하기 짝이 없는 객주의 방장들을 그냥 두어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오이다. 해서, 부 회주님께서 중앙인 삼개를 꿰차고 앉으시어 아래 윗 객주들을 수시로 둘러보시고 닦달을 하심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그리고 장사는 신속한 결정으로 이문을 다투는 법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두물머리 상제벌은 너무 멀어서 연락이 빨리 되질 않사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 올시다."
들어보니 틀린 말이 없는지라 노탁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음이 얼어 뱃길이 끊기기 전에 송파쯤으로 내려오려고 오일중과 이미 의논했던 바이나 황구만의 말처럼 자신은 삼개에 와 있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도 그렇군. 자네가 송파로 가는 문제와 내가 이곳으로 오는 문제를 함께 회주님과 다시 상의를 하지. 송파의 주점과 객주는 첫눈이 내리기 전에 어떻게든 완공을 하라고 일렀으니 방인근이가 잘 해낼걸세. 좌우간 자네 문제는 며칠 내에 결정이 날걸세."
노탁우와 황구만이 서로 말을 주고받다 보니 강 언덕에 이르렀다. 황구만은 움막이 빼곡히 들어선 언덕길을 넘으려다 며칠 전 의원이란 작자가 불현듯 생각나서 노탁우를 인도해 그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언덕 넘어 산다는 양반이 한 말대로 약초를 갖고 오는 환자를 고쳐주고 있나 궁금했던 것이다. 그 사이 아침해가 훤히 밝아서 곳곳의 움막에서 사람들이 나와 움직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강으로 물을 길러 가고 어떤 사람은 새끼줄만 달랑 들고 땔감을 줒으러 사방을 쏘다니고 있었다. 아침꺼리가 있는 움막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솔솔 피워 오르고 있었으나 그나마 없는 움막이 절반 가까이나 되었다.
"움막이 이렇듯 많은데 도대체 무엇들을 해 먹고 산단 말인가?"
뒤따라오던 노탁우가 탄식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움막의 가장은 대부분이 나루의 짐꾼으로 때꺼리를 마련하옵지요. 나머지는 동냥질도 하고 삭정이를 해다 팔기도 하며 별의별 짓을 다 합지요. 심지어 도적질도 하옵니다."
"가난 구제는 나라에서도 못한다지만 이건 좀 심하구먼. 저 허술한 움막들을 보게. 이래서야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겠나?"
"봄까지 못 견딜 사람이 아마 열에 두셋은 될 겝니다. 허지만 이곳만 그런 것이 아니 옵니다. 도성 밖의 모든 움막도 이와 유사 하옵니다. 헐벗고 못 먹어 병들어 죽어나가는 사람이 여기서도 매일 대여섯이나 된다니 한겨울이 지나면 몇이나 살아남겠사옵니까?"
"아니? 여기는 의원도 없단 말인가?"
"의원이 있은들 좁쌀도 못 먹는 사람들이 약 값인들 있겠습니까?"
"허긴 그렇겠군. 그 돈이면 밥을 해 먹는게 약 먹는 것보단 나을 테지."
"소인이 보기엔 저기 저 움막에 있는 자가 제법 의술을 터득한 자 같사온데 돈 받지 않고 병자를 고치고자 제법 애를 쓰더군입쇼. 허나 의원이란 자 역시 다른 움막과 같은 처지라 지금은 어찌하고 있나 가는 길에 들러보려고 하옵니다. 잠깐이면 되옵니다."
"헛, 그러게나. 돈 받지 않는 의원이라니 별일이로세."
황구만이 송윤호가 있는 움막 앞에 서서 크게 헛기침을 몇 번 한 후 목청을 가다듬었다.
"의원 있소?"
잠시 기다렸으나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황구만이 다시 헛기침을 하며 거적을 들치고 가만히 고개를 디밀었다. 희미한 빛이 스민 사이로 희끄무레한 형상이 길게 누워 있었다. 황구만은 급히 밖으로 고개를 거두며 한걸음 물러났다.
"왜 그러나?"
황구만의 행동과 표정을 훑은 노탁우가 급히 물었다.
"송장 올시다. 의원이 되려 먼저 갔나 봅니다."
"뭐라? 잠시 물러나게. 내가 보겠네."
전직이 포도청 부장인 노탁우가 움막으로 들어섰다. 그에게 송장이나 변사체는 그저 푸줏간 칼잡이가 다루는 쇠고기만큼이나 친숙한 것이어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이보게 아직 숨이 붙어 있네."
송윤호를 살피던 노탁우가 움막 밖으로 나서며 한 말이었다.
"예? 송장이 아니 라굽쇼? 그렇다면 이제 어쩌면 좋사옵니까? 모른 채 두고 갈 수도 없고.... 이런, 이 일을 어쩐다?"
"어쩌긴 아직 숨이 붙어 있으니 손을 써보는 데까지 써 보는 것이 도리지. 가만 여기 그대로 두면 죽으라는 거나 진배없으니 우선 객주로 업고 가세나."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사옵긴 한데 소인이 업을 수 있을지도 문제 올습니다."
자신의 몸피가 보잘 것 없음을 인식한 황구만이 걱정을 앞세웠다. 노탁우가 새삼 그런 황구만을 바라보다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 내가 업어보지. 내게 업히게나."
"예? 부 회주님이 손수 업고 가신다굽쇼?"
"그럼 어쩌나? 객주까지 가서 아이들을 보내고 어쩌고 하면 늦을지도 모르지 않나?"
"허기야 그렇기도 합니다만.…"
노탁우가 송윤호에게 다가가 등을 돌려댔다. 송윤호는 그동안 굶기를 숨 쉬듯 해서 몸무게가 평소보다 두어 관(貫)은 빠진 상태였다. 그러나 워낙 보잘것없는 체구를 지닌 황구만으로서는 송윤호를 노탁우의 등에 들어 올리느라 죽을힘까지 써야 했다.
"앞장 서게."
"예, 소인이 인도 합지요."
송윤호를 업은 노탁우가 황구만의 뒤를 따라 언덕으로 넘어가자 그제야 이곳저곳에서 힐끔거리던 사람들이 서로 모여 쑤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달랑 새끼줄 하나로 땔감을 줒으러 다니던 사내가 송윤호의 옆 움막에 사는 사내에게 불쑥 물었다.
"업혀간 사람이 송 의원 아닌가?"
"왜 아니겠나?"
"자넨 바로 옆에 있으니 알겠구만, 의원이 왜 저런 거여?"
"이런 넨장, 의원인들 굶는데야 별 수 있나?"
"굶다니?"
"먹을 게 없으니 굶을밖에?"
"설마? 병 고치러 온 사람들이 조밥이나 죽이라도 갖다 주었겠지?"
"글쎄. 갖다 주는 밥을 마다하고 혼자서 조죽을 끓여 연명을 하더구만. 그리고는 종일 몇 번이고 나루터에 뛰쳐나가고 저녁엔 또 남은 죽을 먹더란 말일세."
"그래도 좁쌀 구할 돈은 있었던가보네그려."
"말 말게. 눈치를 보니 아마 감춰 둔 몇 푼이 있었나 보더구만. 헌데 의원이 나루에 나간 사이 그나마 어떤 놈이 홀랑 훔쳐가 버렸다네. 보나 마나 병 고치러 왔던 어떤 놈 짓일 테지. 게다가 그놈이 죽 끓이던 옹기솥까지 들고 가버렸지 뭔가? 송 의원은 아마 그때부터 내리 굶었을 걸세."
"저런, 그렇다면 그렇게 잘 아는 자넨 뭘 했나? 굶어 죽어가는 이웃을 두고서?"
"난들 입에 넣을 게 뭐가 있다고 남을 돕나? 아이 입에 든 걸 빼앗아서 주란 말인가?"
옆 움막의 사내가 발끈하고 화를 내니 상대하던 사내가 머쓱한 표정을 짓다가 송윤호의 움막 지붕 위에 올려진 마른 풀들을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저건 화살나무가 아닌가? 내가 지난번 종기를 고치러 왔을 때 갖고 왔었는데 아직 많이 남았군 그려."
옆 움막의 사내가 그 소리를 듣더니 힝 하고 콧바람을 날리더니 가래침을 탁 뱉었다.
"지난 번 윤 초시가 나타나 약초를 갖고 오면 진맥을 짚어 약을 주마했더니 자네처럼 병을 고치러 오는 놈마다 흔해빠진 화살나무나 엉겅퀴나 가져오고 아니면 죄다 만만한 엄나무 가지만 드립다 잘라오니 그걸로 무슨 약을 짓겠나? 맨 말려서 군불이나 때면 딱 좋은 걸 갖고 와 설랑 그래도 약을 지어 내라고 아우성들이니 견디다 못한 송 의원이 진땀을 다 흘리더구만. 그깟 화살나무 하나로 무슨 약을 짓나? 아, 하다못해 대추 한 알이라도 필요한 약재를 갖고 와야지 그게 다 무슨 지랄들인가 말이야. 자네도 마찬가지야."
"나야 윤 초시가 말한 다음날 첫 등으로 왔었으니 알 도리가 있나? 가만, 그럼 여기 와서 같이 진맥을 짚는다던 윤 초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오기는, 쥐뿔. 양반이 우리 같은 상놈의 손목을 그러잡고 진맥을 하리라 생각하는 것들이 미친 것들이지. 양반이 도대체 무어가 아쉬워 천 것들을 위해 손을 쓴단 말인가?"
"그러니 결국 여기 송 의원만 사람들에게 치였겠구만."
"말 말게. 죽 한술 입에 넣을 사이도 없이 몰려들 오데 그려. 제 병 고쳐 내라고 얼마나들 아우성인지 나중엔 나까지 짜증이 왈칵 밀려와서 놈들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어 쫓았다네. 어, 참, 나도 똑같은 신세지만 참 염치없고 미련한 종자들이더군."
옆 움막의 사내는 며칠 전 일을 생각하니 새삼 입이 쓴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시각에 송윤호를 업은 노탁우와 앞장을 선 황구만은 부지런히 객주를 향해 가고 있었다.
"부 회주님 무거우시면 잠시 쉬었다 가시는 게 어떠하올지?"
"어디다 내려놓고 쉰 단 말인가? 허고 이 사람이 엄장은 커 보이는데 보기보담은 몹시 가볍구만, 난 괜찮으니 어서 가기나 하세."
"그렇다면 이 사람은 병이 아니라 굶어서 이 꼴이 난 모양 올습니다. 객주에 닿으면 봉놋방에 군불을 짚이고 뜨거운 국물을 멕이면 어쩌면 깨어날 수도 있겠사옵니다."
"그렇게 돼야지. 남의 병을 고쳐주려다 자신이 넘어지다니 말이 되는 소린가?"
두 사람은 객주까지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열린 대문을 들어섰다. 마침 측간을 다녀오던 김시돌이 부 회주인 노탁우가 웬 사람을 업고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앗, 부장님 아니시옵니까? 이거 어찌 된 영문이시온지?"
"시끄럽다. 허고 부장이라니? 아직도 부장인가? 어서 봉놋방 문이나 열어라."
노탁우의 꾸중에 다시 놀란 김시돌이 황급히 방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굴비를 팔러 갔던 전직 포교들이 게으름을 부리느라 이리저리 흩어져 누워 있었다. 그들도 노탁우의 출현에 몹시 당황한 듯 황급히 일어나 인사도 잊은 채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그러자 노탁우가 방문에 등을 돌렸다.
"보고들만 있지 말고 이 사람을 좀 받아 눕히게들."
노탁우의 말에 그제서야 사태를 짐작한 포교들이 송윤호를 들어다 눕히느라 법석을 떨었다. 황구만은 그들 중 나이가 가장 적은 박이환을 불러냈다.
"자네는 이 방에다 군불을 좀 지펴주게. 허고 이따가 부엌 할멈에게 쌀로 미음을 좀 쑤어다 달라고 이르게."
"그러지요. 헌데 저 걸인이 누군데 데리고 오셨소?"
"난들 다 알겠나마는 의원인 건 분명하네."
"예? 의원이 제 병을 못 다스려 혼절을 하다니 우습구려?"
"아, 중이 제 머리 못 깎으니 의원이 제 병 못 고치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나?"
"헛, 참, 어찌 보면 옳은 말씀 같기도 하고.... 좌우간 구들이 들썩하게 불을 지필 테니 걱정 마시우."
황구만은 방으로 들어가 송윤호의 상태를 다시 살펴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움푹 들어간 눈과 볼을 보니 몇 날 며칠을 굶어 기진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안색을 보니 추위에 온몸이 언 것 같소."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려 송윤호를 내려다보던 하수오가 중얼거렸다.
"누가 이 사람의 팔 다리를 좀 주물러주게. 필시 굶은 데다 찬 바닥에 지내서 이 지경에 이른 것 같네. 나머지는 이제 곧 어물 짐이 닥칠 테니 밖으로 나가 고방을 치우고 물건 받을 채비를 서둘러주게나."
황구만이 송윤호를 둘러싼 포교들에게 이르자 개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임동추가 슬그머니 송윤호의 옆에 앉더니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방장님, 이 사람을 어디서 줒어 온 거요?"
임동추가 심드렁한 얼굴로 물었다. 황구만은 그런 임동추가 못마땅했다. 포교 출신 중에 가장 나이가 많으니 선임자로써 얼른 밖으로 나가 아랫사람들을 지휘해 이제 곧 닥칠 어물 짐을 받을 준비를 할 것이지 병자를 핑계로 따뜻한 방에 눌어붙는 꼴이 보기 싫은 것이다.
"줒어오다니? 땅에 떨어진 엽전인가 줒어오게?"
"이를 테면 그렇다는 얘기지요."
"언덕 넘어 움막에서 데려왔네."
"아, 그렇다면 괜스레 아까운 힘써가며 여기까지 업고 왔수. 듣자 하니 그곳 움막에 요즈음 명의가 와 있다던데 거기다 맡기지 그러셨수?"
"언덕 넘어 명의가 있다는 건 어디서 들었나?"
"나도 소문을 들을 귀를 가졌는데 나라고 왜 모르겠수? 온 마을이 다 알 게유."
"그럼 그 명의가 춥고 배고파서 혼절했드란 소문도 들었겠네그려."
"뭐요? 그럼?.... 이 사람이?"
"핫, 아직 그 소문은 못 들었던 게로구만."
황구만이 쓴 입맛을 다시며 방에서 나와 노탁우가 들어간 서사실로 향했다. 노탁우의 지시가 있었는지 마침 서사가 치부책과 필낭을 지니고 마루를 내려서고 있었다.
"염장 어물이 팔백 광주리고 건어물이 육백 짐이니 두 곳에 나누어 쌓되 각각의 숫자도 잘 헤아려야 하네.
"예, 허면 노임은 어쩔까요?"
"아, 그렇군. 열닷 푼에 약 이백삼사십 명이면... 에, 또.... 대략 서른대여섯 냥 쯤 준비를 하면 되겠구나. 허나 그건 나중 일이니 개의치 말고 짐부터 받게나."
서사에게 이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은 황구만이 고방으로 달려가 포교들에게 다시 한 번 물량을 일러주며 숫자를 확인하라 일렀다.
"방장님은 걱정을 마시오. 굴비 팔러 다니는 것보다 이런 일이 우리 체질에도 더 잘 맞는 일이니 말이요. 원, 굴비 한 갓 팔기가 그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포도대장 치질을 핥더라도 내가 포도청을 그만두지 않았을 거요."
천가이란 작자의 말에 모두들 따라 웃으며 맞장구를 치자 황구만도 슬그머니 웃음이 나려 하였다. 이미 황구만 자신은 예상했던 일인 것이다.
"아, 그 얘긴 이따가 부 회주님 앞에서 말할 기회를 줄 터이니 우선은 숫자를 헤아리고 염장 어물쟁이는 법을 먼저 익혀들 두게나. 앞으로 맡아야 할 객주를 위해서 말일세."
"그것보다 방장님께서 다음엔 뭘 팔아오라고 할 셈이오? 미리 좀 압시다."
"하하, 혼들이 나긴 났었나 보군. 다음엔 파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물건과 바꿔 오길세. 그것이 돈으로 바꾸는 거보다 이문이 훨씬 나을 때도 있는 법이거든. 하핫."
"뭐요? 물물교환일 바엔 엽전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요?"
"그건 나중에 가르쳐 줌세. 우선 어물이나 잘 받게나. 하하하."
장사를 배워보려는 젊은 포교들의 의욕이 느껴지는지라 황구만은 흐뭇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 서사방으로 향했다. 황구만이 방에 들어와 보니 목침을 벤 노탁우가 그 사이에 잠이 들어 있었다. 물때를 맞추려다 보니 한밤중에 배가 출발하는 통에 물 위에서 꼬박 밤을 새운 때문이었다. 적지 않은 나이인 쉰 살의 노탁우가 피곤을 못 이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리라. 그러고 보니 황구만 자신도 피로와 졸음이 몰려오는지라 목침을 찾아 베고 잠깐 눕기로 했다. 그러다 깜박 잠이 들었다.
그 시간에 밤섬 춘월의 집에 개동이가 들어서고 있었다. 어째 집안이 조용해서 부엌을 기웃 들여다보니 내촌댁이 아침밥 먹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히힛, 내촌댁. 잘 있었수?"
"에구, 이게 누구요? 총각 아니요?"
"왜 아니겠수. 고모님은 또 어디 가셨수?"
"아니요. 계시요. 저기 신발을 보면 모르오?"
개동이가 새삼 고모방의 댓돌을 돌아보았다. 내촌댁의 말대로 짚신이 얌전히 놓였다.
"히힛, 오늘은 마실을 가지 않으셨구랴."
"아침부터 마실은 무슨 마실이요? 헌데 이번엔 오랜만에 왔구려."
"그렇게 됐수. 그런데 내촌댁."
제 고모 방 쪽을 흘금 바라본 개동이가 말소리를 낮추자 영문을 모르면서 긴장이 된 내촌댁이 덩달아 대답 소리를 줄였다.
"왜 그러우?"
"그 뒤에 아인 어떻게 됐수? 버렸수?"
그제야 개동이가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춘 이유를 알게 된 내촌댁의 얼굴이 펴졌다. 어쩐지 한 달에 한 번은 들리던 개동이가 아이를 떨구고 도망친 후 이제껏 한 번도 오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왜? 버리지 않았으면 도루 갖다가 기를 작정으로 왔소?"
"농담이라도 그런 말 마시우. 고모님 말씀대로 총각인 내가 아일 데려가 어쩌겠수? 나는 내촌댁이 그 애를 길렀으면 해서 슬그머니 자리를 뜬 것이란 말이요."
"이제사 말이지만 그때 아일 두고 간 것은 총각이 정말 잘한 일이요. 내 그러지 않아도 총각이 오면 고맙다는 말은 꼭 하려고 벼루었소. 총각, 고맙소. 우리 복덩이를 내게 갖다 주어 정말 고맙소."
"복덩이? 힛. 거, 이름 한 번 복스럽소. 헌데 그 아인 어쩌고 내촌댁 혼자요?"
개동이의 물음에 내촌댁의 얼굴이 환해지며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킥하고 웃었다. 갑작스런 내촌댁의 행동에 영문을 모른 개동이의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아일 어쨌냐는데 어째 그러오?"
"말 마시오. 그 아인 지금 총각 고모님과 함께 있소."
"어랍쇼? 아일 갖다 버리라고 성화를 하시던 고모 아니요? 그런 고모가 정말 아이와 함께 계시단 말이요? 에이... 믿을 말을 해야지 믿지."
"정 믿지 못하겠거든 총각이 가보면 될 것 아니요?"
내촌댁이 앞치마로 물 묻은 손을 대강 닦고 그 손을 허리에 척 걸치더니 자랑스런 얼굴로 개동이를 바라보았다. 얼떨떨한 개동이가 부엌에서 머리를 거두어 춘월이가 있는 방으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그리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방안의 동정을 살폈다. 허나 방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댓돌에 짚신이 있으니 고모가 있는 것은 적실하고 아이와 함께 있다니 아이 소리라도 들려야 할 것 아닌가? 개동이는 할 수없이 다시 부엌으로 가서 고개를 디밀었다.
"어째 방안이 조용하우, 정말 고모와 아이가 함께 있는 거유?"
"이렇게 남의 말을 믿지 않다니. 가만, 갑시다. 날 따라오우."
부엌에서 나온 내촌댁이 내달아 춘월의 방 앞에 서더니 방문을 통통 두들겼다.
"복덩이 할머니, 간뎃말(中谷洞) 조카분이 오셨어요."
그러자 안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더니 외짝 미닫이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런데 문을 연 사람은 춘월이가 아니라 복덩이였다. 복덩이가 내촌댁의 음성을 듣고는 곧바로 문을 연 것이다. 생각지 않은 광경에 개동이가 놀라 뒤로 흠칫 몸을 젖혔다. 아이도 갑작스레 눈앞에 나타난 개동이에게 놀란 듯 멈칫하고 섰다.
"어라? 얜 또 누구요?"
"원. 총각도 참. 얘가 복덩이지 누구란 말이요?"
"엥? 설마? 이게 정말이면 참 대단한 일이유. 이거야 말로 놀랄 일이란 말이유."
이 아이가 정말로 지난여름에 자신이 안고 온 아인가 싶은 개동이가 새삼스레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 보니 도저히 그때 그 아이로 보이지 않을 만큼 달라져 있었다. 우선 몇 달 사이에 몰라보게 더 자랐을 뿐 아니라 강모기에 뜯겨 형편없던 얼굴은 달덩이처럼 훤해져 있었다. 내촌댁에게 오려던 아이가 낯선 얼굴에 주춤거리더니 춘월에게로 쭈르르 달려갔다. 그리곤 손으로 개동이를 가르키며 하머 하머 하고 웅얼 거렸다.
"오냐. 오냐. 못 보던 사람이 왔단 말이지? 아이고 할미에게 일러바치는 것 좀 봐. 얘, 개동아 애 춥단다. 어서 들어오너라."
밝은 춘월이의 음성에 더 얼떨떨해진 개동이가 내촌댁을 돌아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방에 들었다. 뒤에 남은 내촌댁은 그런 개동이의 모습에 웃음을 머금었다.
"얘 이리 앉아라. 바깥 날씨가 춥더라. 어제도 밤번을 섰느냐?"
"쩝, 힘없는 놈에게 낮 번이 차례가 닿기나 하우? 죽으나 사나 밤 번만 연거푸 안기니 집에 가면 눈 붙이기 바빠 그나마 손바닥 만한 조밭도 맬 틈이 없수."
"그래서야 어떻게 하니? 아비가 병자니 네 애미가 여간 고생이겠구나."
"말 마우, 나 대신 늙은 애미가 조밭 매랴 콩밭 매랴 남의 집 보리방아 찧으랴 여간 고생이 아니우. 이놈의 군역이 얼른 끝나서 새우젓 장사라도 해야 할 텐데 큰일이유."
"조금만 더 참아보려무나. 네가 군역이 끝날 때쯤엔 네 일자리 정도는 이 고모가 마련할 수 있을 게다. 어쩌면 이달 말이나 내달 초에 너희 집과 가까운 송파로 이사를 갈 것 같으니까 말이다."
"엉? 정말이우?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수? 헌데 밤섬이 벌어먹기엔 그만이라던 고모께서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내리셨수?"
"이제껏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한데, 지난번 송파엘 가보니 생각이 달라지더구나. 송파야말로 앞으로 볼만하겠더라. 너도 군역 마치면 두말 말고 무슨 장사던 송파에서 시작할 생각을 해라. 물론 밑천은 내가 대주마."
고모가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지난 몇 달 사이에 이 집에 알지 못할 어떤 변화가 있었음을 개동이는 어렴풋이 느꼈다. 우선 밖에서 본 내촌댁의 표정이 몰라보게 밝았을 뿐 아니라 지금 마주 앉은 고모 역시 목소리부터 정이 뚝뚝 묻어나고 살갑지 않는가? 개동이는 이것이 어디서 온 조화인가 하고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 원인을 너무 쉽게 찾게되어 오히려 맥이 빠져버렸다. 두 사람의 말씨와 표정을 바꾼 것은 다름 아닌 아이가 분명했다. 개동이가 가만히 보니 고모인 춘월이가 자신과 말을 하는 사이에도 무릎에 앉힌 아이를 연신 들여다보며 웃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강물에 버리라던 아이는 왜 끌어안고 그러우?"
개동이가 짐짓 제 고모의 의중을 찔러보았다. 그러자 춘월이가 단번에 뜨악한 얼굴로 개동이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얘, 말이면 다 말이냐? 그게 애 앞에서 할 소리란 말이냐? 아이고 복덩아 너는 못들었다. 그래 못 들은 걸로 해라. 아이고 착한 녀석."
"그것 보우. 내가 뭐랍디까? 씻기고 먹이면 귀공자가 된다지 않습디까?"
예상대로의 반응에 개동이가 싱글거리며 아이의 손을 잡아보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아이는 춘월의 가슴으로 얼굴을 돌려 숨는 시늉을 했다.
"에그, 네가 한 말을 알아들었나 보다. 그러니까 이렇게 숨지 않냐?"
"헛, 알다가도 모르겠수. 이럴 거면 처음부터 내게 고맙다고나 하실 일이지... 원."
"나도 처음엔 이러지 않으려 했었다. 허나 얘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세상 근심이 다 사라지고 지난 고생도 한낱 꿈인 듯만 싶으니 어째 빠지지 않겠니? 게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애인데도 내게 하는 짓이 그렇게 인정스러울 수가 없지 뭐냐? 그래서 종일이라도 이 아이 하고만 있으면 그렇게 맘이 편할 수 없구나."
"그래서 내가 애초에 고모 보고 그러지 않습디까. 눈이 시원스럽다고."
"원, 시원이란 말 갖구 될 일이 아니야. 아무튼 지금 와 생각하면 네가 내게다 좋은 일을 한 게다. 참, 너 아침은 먹었느냐?"
"원 고모님도, 밤을 꼴딱 세우구서 교대하자마자 이리로 달려 온 놈이 아침을 어찌 먹소? 목구멍에 물 한방울 넘긴 게 없구만서도..."
"에그, 그래서야 되겠니? 내촌댁을 불러서 아침 좀 차리라 해야겠구나."
춘월이가 아이를 안은 채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내촌댁을 소리쳐 불렀다. 그러자 부엌에서 냉큼 달려온 내촌댁이 눈물을 닦고 있었다.
"아니? 왜 우는 게야? 지금껏 부엌에서 울고 있었나?"
"참, 마님도, 매운 연기에 울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나요?"
"뭐야? 아침 먹고 설거지 다 끝낸 사람이 불은 어째서 또 피운단 말인가?"
"아, 마님 조카 분이 아침을 못 먹었다는데 남은 밥이 없으니 다시 할 밖에요."
"아, 그럼 진작 그렇다 할 것이지. 그러지 않아도 재가 아직 식전이라기에 밥 좀 하라고 자넬 불렀던 거네."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예요. 추우신데 문 닫으세요."
"흥, 내가 추울까 걱정하는 게 아니라 복덩이 고뿔 걸릴까 싶어 그런 줄 다 알고 있네."
"원 마님도.... 연세가 있으신데 종일 복덩이까지 보시니 혹 찬바람에 고뿔에 몸살이라도 나실까 걱정을 한 것을 달리 말씀하시다니요."
"그 마음을 내가 왜 모르겠나. 농으로 해 본 소릴세."
내촌댁이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자 춘월이는 다시 방문을 닫고 아랫목에 앉았다.
"얘, 좀 있으면 밥이 곧 된다니 기다려야겠다."
"까짓 좀 늦으면 어떻수? 아주 굶으란 것도 아닌데... 헌데 고모님이 하란 소리를 하지도 않았는데도 내 밥을 다 챙기니 별일이우."
"내촌댁이 내 집에 온 지 거의 한 해 반인데 두고 보면 볼수록 마음씨가 진국이더라. 여태껏 내게 해 온 것을 보거나 요즘 복덩이에게 하는 걸 보면 심성이 고운 사람이야. 게다가 복덩이가 들어오고부터는 더 열심히 하려는 게 눈에 보인단다. 제 딴엔 혹시 복덩이 때문에 일을 등한시한다는 소리를 들을까, 복덩이에게 아까운 밥 먹인다는 잔소리를 들을까 오죽하면 제 밥까지 줄이는 눈치지 뭐냐? 밥은 덜먹고 일은 더 하니 전들 언제까지 저러고 견디겠니? 그래도 내색 한 번 없이 저러고 있는데 산전수전 다 겪어 본 내가 그 눈치를 모르겠니? 그래서 저 여편네 짐도 덜어줄 겸 요즘은 이 녀석을 봐 주는데 어쩌다 보니 이젠 꺼꾸로 되어서 이 녀석이 오히려 날 위로하고 봐주는 꼴이 되어 버렸지 뭐냐."
"헛, 그러다 내촌댁이 아일 데리고 이 집을 나가면 고모님만 상심이 클 것 아니우? 지금이라도 아이에게 정을 주지 마시우."
개동이의 말에 춘월이는 한숨을 호로록 쉰 다음 아이의 어깨를 다독이며 뺨에다 입을 쪽 맞추었다.
"늦었느니라. 나도 네 말처럼 그런 걱정이 들어 정을 떼려고 했었다. 하지만 정을 떼야겠다는 생각부터 이미 수렁에 빠진 것인데 어쩌고 말고 하니? 이제는 이 아이하고 떨어지면 나는 못 살 것이야. 내 이 나이 될 때까지 숱한 사내를 겪어봐서 사내라면 신물이 난다마는 이제까지 이런 애를 점지해줄 사내가 없었음은 새삼 애석하게 생각할 정도니까 말이다. 얘, 개동아.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니? 하지만 말이다 내 술장사를 계속하더라도 이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는 살고 싶구나. 그러니 그때까지 얘하고 같이 있을 무슨 좋은 방법은 없겠니?"
고모가 얘기를 시작하는 거동이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봐서 이제 곧 자신의 신세 한탄으로 이어질 태세라 이 자리를 모면할 궁리에 골몰하던 개동이가 갑작스런 질문에 당장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생각 없이 툭 내뱉었다.
"내가 애초에 고모 손자하라고 갖다 준 애 아니우? 그럼 할미하고 손잔데 누가 갈라놓고말고 한단 말이우?"
그 소리를 들은 춘월이가 가만히 그 말을 다시 곱씹더니 눈빛이 반짝했다.
"얘, 네 말이 맞다. 다 늙은 내가 이 앨 직접 키울 수도 없는 마당에 할미로써 언제까지고 지켜볼 수는 있겠다. 저 내촌댁을 내 수양딸로 삼으면 될 것 아니냐? 그러면 서로 헤어진다는 소린 못 하겠지. 안 그러냐?"
개동이도 듣고 보니 열 번 옳은 말이라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 치고는 썩 괜찮은 결과를 낳은 셈이었다.
"내 말이 그 말이우. 그렇게만 된다면 어딜 가든 함께 할 것이고 언제 까지던 서먹함 없이 서로가 좋게 지낼 수 있겠수. 모녀간이니 말이우. 헌데 내촌댁이 나보다 위란 것은 아는데 도대체 금년에 나이 몇이우?"
"금년에 서른넷이라지? 넌 스물여덟 아니냐? 아이고 그러고 보니 네 장가가 늦긴 정말 늦었구나.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
"늦다 뿐이우? 내 동무들은 열 살짜리 아들이 있수."
"그러게나 말이다. 허나 너무 걱정 말아라. 군역이 끝나서 송파로 오면 아예 내가 참한 색시를 물색해서 네 장가부터 들이마."
"히힛, 말씀만이라도 고맙수."
"그럼 이제 네가 있는 자리에서 아예 내촌댁에게 수양딸 얘기를 꺼내야겠다."
"아, 그러시우, 쇠뿔도 단숨에 뽑으라지 않습디까?"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문이 열렸다. 내촌댁이 조밥과 된장국 그리고 절인 무우를 얹은 목판을 들였다. 개동이가 급히 목판을 받아들고 한 쪽에 가 앉아 숟갈을 들었다.
"흠, 자네도 들어오게. 잠시 할 말이 있으니까."
"예?"
춘월이가 내촌댁을 방으로 불러들이자 복덩이가 쭈루루 달려가 안겼다.
"헛, 저것 보지. 아무리 잘해줘도 할미는 애미보다는 못한가 보구나."
"에구, 그럴 리가요. 얘는 엄마 소리보다 할미 소리를 먼저 하지 않사옵디까?"
"호호, 그건 그래. 얘, 개동아 우리 복덩이가 글쎄 하머하머 하고 할미 소리를 먼저 한단다. 엄마 소리보다 할미란 말이 더 힘이 들 텐데 말이다."
춘월의 자랑스런 말에 내촌댁의 눈치를 얼핏 살핀 개동이가 조밥을 가득 퍼 들었다.
"쟤두 똑똑한 손자란 소릴 듣고 싶었던가 보우. 그럴 바엔 이참에 아예 내촌댁을 고모 수양딸 삼으시우. 그럼 저 복덩이도 할미와 엄마를 확실히 구분할 것 아니우?"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아, 그렇지 않수? 그냥 이렇게 정붙여 살다가 혹여 내촌댁이 개가를 하거나 이 집을 나가면 할미에게 정이 들었던 저 복덩이는 어쩌란 말이우? 아무리 애라지만 할미를 떨어지는 마음이 오죽하겠수? 그러지 않으려면 내촌댁이 딸이 되는 수밖에 더 있수?"
"가만, 네 말이 어제오늘 내가 마음에 두던 말이구나. 저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나 맘 붙일 곳 없는 나나 내촌댁을 위해서나 그 방법이 좋긴 한데.... 내촌댁 자네 생각은 어떤가? 아이를 위해서라도 자네가 내 수양딸이 되는 게 어떨까 싶네만.…"
갑작스럽게 방으로 불려 들어온 내촌댁이 전혀 생각도 못하던 일이 화제에 오르자 잠시 얼굴을 붉히며 생각에 잠겼다. 서방을 먼저 보내고 자식 둘을 끌고 유랑생활로 연명하던 지난날이 제일 먼저 머리를 스쳤다. 그때 같이 죽지 못한 죄로 죽을 고생을 하며 이곳저곳을 떠돌다 들어온 집이 여기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배만 곯지 않았을 뿐 먼저 간 자식들 생각은 지워지지 않았고 외로움만 더했던 세월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뜩 신령님의 조화인지 복덩이가 들어오고부터는 세상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다. 날이 가면 갈수록 복덩이에게 끌리어 이제는 헤어지고는 도저히 살지 못할 것 같았다. 만약 아이를 데리고 이 집을 나가라고 한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 아이까지 딸린 유랑민을 누가 써주랴? 복덩이만은 먼저 보낸 두 자식의 뒤를 따르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매일 주인의 눈치를 보며 오늘날까지 온 것 아닌가? 다행히 근래에는 주인도 복덩이를 귀여워하는 눈치라 한시름을 놓긴 했으나 언제 마음이 변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참이었다. 헌데 또 한번 신령님이 모녀의 인연을 맺어주신다면 앞으로 복덩이만은 굶주림을 면할 것이었다.
"근본 없이 떠돌던 쉔네를 거두어주신 것만도 황감하옵는데 이젠 복덩이까지 딸린 마당에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허나 부족한 쉔네를 딸로 받아주신다면 맘 변치 않고 평생을 부모로 모시겠사옵니다."
"그렇다면 되었네. 내일 새벽 냉수를 떠놓고 신령님 앞에서 언약을 하세나."
"그럽지요."
그때 밥주발 그득하던 조밥을 어느새 뚝딱 해치운 개동이가 목판을 물리며 두 사람의 말속을 파고들었다.
"이렇게 되면 내촌댁이 내겐 누님이 되는구먼, 이제부터는 고모님도 누님한테 말씀을 낮추슈. 모녀간에 하게 어쩌고가 뭐유? 누님도 쉔네라는 소린 집어치우슈."
개동이의 말에 춘월이 활짝 웃으며 복덩이를 내촌댁의 품에서 빼내었다.
"네 말이 맞다. 딸에게 자네란 말이 가당키나 하며 에미에게 쉔네가 어인 말이냐? 이제부턴 복덩이 애미 너도 내게 그런 말은 쓰지 말아라. 알겠느냐?"
"예, 조심하겠사옵니다."
"하하하, 이젠 모두 좋은 끝이 났구나. 그러고 보면 나도 어서 장가를 가서 좋은 끝을 봐야 할 테인데... 밤낮 노만 저으니 큰일 아니우?"
"장가는 내가 들여준대도 그러는구나. 얘, 그것보담, 우리가 송파로 이사 갈 때 네가 와서 좀 도와다오. 없는 세간이라도 몇 짐은 될 것 아니냐?"
"당연한 걸 가지고 그러시는구려. 내 짬짬이 자주 들리리다. 참, 고모 나 갈라우."
"또 뭐가 바쁜 일이 있냐? 좀 더 있다가 가지?"
"아니우, 집에 가서 눈 좀 붙이고 삭정이라도 줒어놔야 애미가 힘이 덜 드오."
"애그 그런 생각을 하는 네가 역시 네 애비보다는 낫구나."
"또 아비 얘기유?"
"그 인간은 내가 아홉 살 때 열다섯이나 처먹고도 기생집에 팔려가는 날.…"
"누님이 고모 말씀을 마저 들으시우. 자, 나는 가우."
고모의 사설이 더 길어지기 전에 개동이는 서둘러 방문을 나서 짚신 짝을 끌며 삽짝을 빠져나갔다.
"저, 저, 성질하고는... 엥이 저놈은 누굴 닮아서 저럴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춘월이는 개동이가 사라진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복덩이에게 눈길을 떼지 않고 있었다.
다음 날 낮이었다. 황구만 객주에 거칠이가 황급히 뛰어들었다. 김화에서 방금 도착한 듯 등에는 괴나리봇짐이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나으리, 나으리 어디 계시옵니까?"
송윤호가 있는 방을 알 길 없는 거칠이가 대문과 가장 가까운 방을 향해 다가갔다. 마침 서사와 함께 고방을 나서든 기형도가 그것을 보았다.
"뉜데 뉘를 찾나?"
등 뒤에서 나는 말소리에 거칠이가 흠칫 돌아보았다.
"여기 쇤네의 나으리께서 여기 계시단 말을 듣고 왔사옵니다만.…"
"뭐라고? 너희 댁 나으리가? 너의 상전이 뉘신데 여기 계시단 말이냐?"
그 순간 거칠이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양반임은 물론 예조의 좌랑이었던 신분을 감추기로 한 것을 급한 김에 깜박한 것이다.
"아니옵니다. 저 뒤 움막의 의원 나리를 찾는 것입지요."
"헛, 의원을 나리라니? 이놈아 나리는 아무나 갖다 쓰는 동구 밖 상여라더냐? 그놈 참. 아마 네가 찾는 의원이 굶어서 기진한 어제의 그 의원인가 보구나. 그 자라면 저 봉노에 있느니라. 어제 낮에 깨어나 미음을 먹었느니라. 아침에도 좀 먹는 것 같더니 내리 잠만 자는가 보더라. 헌데 네놈이 주인보다 입성이 나아 보이는 건 웬일이냐?"
기형도는 혀를 끌끌 차며 거칠이의 아래위를 못마땅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지금도 봉노방에 누워 있는 의원이란 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걸레보다 낡은 옷을 걸쳐서 불알이 드러날 판인데 그의 하인 일시 분명한 놈은 비록 삼베이긴 하나 올이 제법 촘촘하고 톡톡해 뵈는 베옷을 입은 것이다. 게다가 솜까지 두어서 얼음판에 뒹굴어도 끄덕없을 것 같았다. 기형도의 물음에 거칠은 잠시 망설이다 거짓을 말하기로 했다.
"쉔내가 혹시 길에서 얼어 죽을까 염려된 어미가 머리칼을 잘라 마련한 것이라 하오니 입지 않을 수가 있어얍지요."
"헛, 남의 하인 질하는 아들놈 걱정하는 애미가 있단 소리는 난생처음 듣는구나."
거짓말인 것이 뻔 한지라 기형도는 코웃음을 치며 서사와 함께 방으로 가버렸다. 거칠이는 기형도가 손짓으로 가르쳐 준 봉놋방으로 가서 방문을 살그머니 열고 머리를 디밀었다. 아랫목으로 보이는 곳에 누가 누워 있었다. 거칠이는 급히 짚신을 벗어던지고 방으로 들어서서 누운 사람을 들여다보았다. 정말로 주인인 송윤호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거칠이는 죽은 듯 누운 송윤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움푹 꺼진 볼과 솟은 광대뼈, 그리고 갈라터진 입술만 보면 도저히 주인이라고 믿고 싶지 않을 만큼 야위었다. 거칠이는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마구 쏟기 시작했다. 천석꾼 부자요 예조 좌랑이던 귀하신 몸이 이런 몰골로 기진해 있다니? 거칠이는 주인의 곁을 떠나 김화로 간 것을 후회했다. 아니 좀 더 일찍 되돌아오지 않은 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거칠이는 주인이 깨어날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송윤호는 시각이 흘러도 좀처럼 깨어나는 기미가 없었다. 오늘 아침에도 미음을 마셨다니 급한 변은 일어날 것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걱정스럽기 짝이 없었다. 시각은 자꾸만 흘러 어느덧 저녁때가 되었건만 주인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이런 지경인 줄 모르고 주인을 기다리는 김화의 도련님들과 애기씨를 생각하니 거칠이는 새삼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 거칠이 너였구나."
소매로 눈물을 닦고 있는 사이에 들린 말소리에 기겁을 한 거칠이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언제 눈을 떴는지 주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으리."
"음, 언제 왔느냐? 지금 오는 길인가 보구나."
"예, 조금 전에 닿았습지요. 헌데 나으리 좀 어떠하신지요?"
"나 말이냐? 괜찮다. 내 잠시 기진했었으나 곧 괜찮아질 것이니 걱정 말거라."
"쉔네가 죽일 놈이옵니다. 나으리 곁을 떠나지 말았어야 하는데...."
"괜찮다는데도 그러는구나. 그래 네 어미 아비는 모두 견딜만하더냐?"
"그럼입쇼. 쉔네가 갔을 땐 작인들과 아비가 이미 추수를 끝내고 나락을 섬으로 묶어 곳간에 넣고 있었사옵니다. 그래서 송상도 시일을 지체치 않고 곧장 떠날 수 있었습지요."
"잘 되었다. 헌데 김화로 간 송상이 몇이더냐? 지난번 피행수와 같이 있던 그 사람만으로야 그 많은 나락을 언제 다 나르겠느냐?"
"이번에 보니 솔모루에 송상의 송우점이 생겼사옵디다. 그곳에 닿으니 그러기로 약조가 된 모양인지 스무 필의 말과 함께 서른이 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 쉔네도 깜짝 놀랐습지요. 아마 금년이 인마가 제일 많이 붙었을 것이옵니다."
"허, 행렬이 장관이었겠구나."
"그렇사옵니다. 참, 안부를 전하는 것이 늦었사옵니다. 가내 모두 무고하시옵고 도련님들과 애기씨 모두 서책을 가까이하신다고 하옵더이다."
"됐다. 그만하면 더 듣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말득이 내외에겐 들렸었느냐?"
말득이는 형인 송수호의 집을 지키기 위해 안국동 집에 남겨두었던 늙은 종을 말함이다. 송수호가 폭사한 후 송윤호가 식솔들을 모두 끌고 김화로 내려갈 제 노모의 바램으로 안국동 집은 팔지 않고 말득이 내외에게 맡긴 것이다.
"아, 예. 그러지 않아도 쇤네의 아비에게 마님의 분부가 계셨다 하옵더이다. 송상에게 나락을 다 실어 보내면 다음엔 말득이 내외에게 일 년 양식할 돈을 전하라 굽쇼. 쉔네도 어제 말득이 내외의 겨울옷을 전하고 늦어서 그대로 안국동에서 잤습지요."
"잘했다. 참, 내가 누웠느라 며칠 나루에 나가질 못했다. 네가 대신 나가보거라."
"예, 그럽지요. 이제 곧 얼음이 얼 터라 도강하는 선객도 끊길 것이오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시옵고 기력을 돋우시옵소서."
"알았다. 여기가 객주라 하던데 내가 있을 곳이 못 되건만 어찌 이렇게 자꾸 졸립기만 한단 말이냐? 어서 일어나 움막으로 돌아 가야지."
"움막은 너무 춥사옵니다. 쉔네가 다른 방도를 찾을 때까지 그냥 계시옵소서."
"그건 안될 말이다. 남의 신세를 지는 것도 정도가 있으니."
"어쨌든 쉔네가 어찌 알아봅지요. 그리고 이 보따리에 마님이 손수 지으신 옷이 들었사오니 기력을 차리시면 갈아 입으시오소서."
"아무것도 갖고 오지 말라고 했거늘.…"
송윤호가 감으려 든 눈을 번쩍 떠 자신을 바라보자 이미 그럴 것을 안 거칠이는 눈길을 피해 슬그머니 일어나 방을 나왔다. 방문을 나서자 목판에 무엇을 받쳐 든 할멈이 봉노를 향해 오고 있었다. 거칠이가 그릇을 슬쩍 넘보니 쌀죽이었다. 할멈은 곁눈으로 거칠이를 흘깃 훑더니 그대로 봉놋방으로 들어갔다. 거칠이는 그제야 그 쌀죽이 주인에게 가는 것임을 알고 마음이 조금 놓였다. 거칠이는 나루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나루에는 이미 마지막 거룻배가 떠나서 몇몇 거동 느린 죽장사만 꾸물거릴 뿐 썰렁하기 그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종일 들락거리던 배도 보이지 않고 그 많은 짐꾼들도 일이 끝났음인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맥이 빠진 거칠이는 왔던 길을 돌아가려다가 강가에서 조금 떨어진 숯막 앞에서 네댓 명이 얽혀 다투는 모습을 보았다. 한데, 개중에 젊은 사람이 눈에 익었다. 좀 더 다가가보니 이름은 모르지만 언젠가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낸 적도 있고 함께 새우젓 독을 나르던 젊은이였다. 그런데 그 젊은이가 몇 사람을 상대로 치고박기 시작하는데 가만히 보니 사람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몇 번 후다닥 거리더니 어느새 발길질로 한 놈을 때려눕혔다. 그러자 남은 네놈이 신중한 자세로 젊은이를 싸고 빙빙 돌았다. 그러다 저희들끼리 은어를 주고 받는 듯하더니 네놈이 일시에 와락 젊은이에게 달려들었다. 젊은이가 그중 한 놈의 턱을 주먹으로 갈겼으나 늦어버렸다. 나머지 놈들이 목을 조이고 양 팔을 잡더니 발길질을 시작했다. 그것을 본 거칠이는 도와는 주고 싶으나 싸움을 해 본 적이 없는 데다 싸움판에 끼어들기가 싫어서 거리를 두고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젊은이는 비교적 자유로운 다리로 마구 버둥거렸지만 쓰러졌던 놈들까지 덤비는 데는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여보슈, 구경만 하기... 요.. 오... 오.?"
다섯 놈에게 잡혀 마구 두들겨 맞던 젊은이가 거칠이를 발견하고 울부짖 듯 고함을 질렀다. 그제야 자신에게 구원을 청한다는 것을 안 거칠이가 놈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다 다가가기도 전에 맨 앞에 놈의 발이 불쑥 솟더니 거칠의 가슴을 차 버렸다. 하필 발길에 차인 곳이 명치라 숨이 콱 막힌 거칠이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거칠이가 숨을 고르느라 애쓰는 동안에도 놈들은 젊은이를 에워싸고 닥치는 대로 짓뭉개고 있었다. 다시 일어난 거칠이가 놈들에게 성큼 다가가 자신에게 발길질 한 놈의 뒷고대와 고의춤을 움켜잡아 그대로 머리 위로 번쩍 쳐들었다. 그것을 본 다른 네놈이 일시에 놀라 돌아섰다. 거칠이는 쳐들었던 놈을 놈들의 머리 위로 힘껏 패대기를 쳐버렸다. 던져 진 놈의 몸뚱이에 맞아 두 놈이 일시에 꺼꾸러지자 남은 두 놈이 거칠이의 양쪽으로 갈라서더니 일시에 주먹을 내지르며 덤벼들었다. 거칠이는 들어오는 주먹을 피하지도 않고 개중에 한 놈의 팔목을 나꿔 채 다른 놈에게 힘껏 박치기를 시켜버렸다. 그렇게 되자 싸움은 단 두 수만에 끝나버린 꼴이 되었다. 땅바닥에는 주먹 한대 맞지 않고 자빠져 딩구는 놈들이 즐비했다. 싸움이라고는 해 본 일이 없는 거칠이였으나 타고난 힘이 워낙 장사여서 누구든 손에만 잡히면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아, 그 좋은 힘을 두고 아우가 맞고 있는데도 구경만 하는 성님이 어디 있소?"
눈탱이가 붓고 코피가 터져 엉망인 젊은이가 부스스 일어나 볼을 비비며 거칠이에게 투정하듯 중얼거렸다.
"성님이라니? 같이 벌어먹는 정리로다 도와준 걸세."
"성님이 새우젓 독을 요강 다루듯 들고 다니는 것을 보긴 했소만 웬 힘이 그리 세시우? 잘못하면 저놈들 다 죽이겠습디다?"
"그까짓 걸 힘이라고 할 것도 없네. 그럼, 나 먼저 가네."
거칠이가 나온 길에 움막을 살펴볼 요량으로 젊은이를 떼놓고 돌아섰다. 그러자 젊은이가 바쁘게 거칠이의 뒤를 좇아왔다.
"아, 뭐가 그리 바쁘시우? 고맙다는 인사도 하기 전에 그냥 가시면 내 맘이 좋겠수? 오늘 도와줘서 고맙수. 나는 동이라는 놈이우. 나이는 스물하나유, 성님은 올해 몇이시우?"
거칠이는 동이라는 젊은 놈과 말을 해보는 것이 처음이지만 녀석의 거실거실 하고 무람 한 태도가 왠지 싫지 않았다. 스스럼없이 나오는 성님이라는 말도 귀에 거슬리지가 않는 것이다.
"나는 스물 일곱이다. 이름은 거칠이고."
"장가는 들었수?"
"이 상투를 보면 모르느냐?"
"에이 그런 상투라면 나도 있수. 허지만 내건 헛상투요."
"뭐? 헛상투를 뭣하고 하고 다니느냐?"
"장가를 못 갔다고 날 어린애 취급하는 게 싫어서 그랬수."
"헌데 저 사람들이 누군데 다투었나."
"에그, 내가 그 말을 잊었구랴. 저놈들이 바로 반년 전까지 삼개나루의 짐꾼들의 왕초짓을 하던 망태의 졸개들 이우. 어디 가서 다 죽은 줄로만 여겼던 놈들이 어제 다시 나타나 설랑 대동계를 새로 이르킨다고 설쳐댑디다."
"대동계라니? 그게 뭐 하는 거냐?"
"한 마디로 자기들 계에든 사람만 새우젓 독이든 어물 짐이든 일을 시킨다는 소리유."
"그럼, 그 계에 들지 않은 사람은 아무 일도 못한단 말이냐?"
"그러니 죽일 놈들 아니우? 할애비 탁배기라도 한 병 사다 드릴까 해서 숯막엘 들렸더니 저놈들이 다짜고짜 날 보고 대동계에 들랍디다. 그래서 내가 그랬수, 댁들에게 줄 닷 푼이 있으면 지나가는 개에게 탁배기를 사주겠다고. 아 그랬더니 놈들이 달려들어 설랑.... 그 다음은 아까 성님이 보신 바와 같수."
"닷 푼이면? 매일 닷 푼을 그들에게 내놔야 한단 말이냐?"
"여부가 있겠수?"
"허, 하지만 이제 곧 강에 얼음이 뒤덮일 텐데 대동계를 해봤자 아니냐?"
"그건 성님이 몰라서 하는 소리유. 놈들은 겨울엔 투전판을 벌여서 더 짭짤한 몫을 챙긴단 말이유."
"거 참 알다가도 모를 소리뿐이구나. 참, 너는 강이 얼면 무얼 해먹고 사냐?"
"그야, 얼음 구멍을 뚫어 잉어를 낚아 팔기도 하지만 사실 별 신통한 일거리가 없수. 하지만 금년 겨울엔 어쩌면 저 넘어 황가네 객주에 가서 일을 할 것 같수. 성님도 알다시피 황가가 물에 빠졌을 때 내가 구하지 않았소? 그랬더니 겨울에 일거리가 없으면 객주 일을 하라고 합디다. 성님은 무얼 해서 겨울을 넘기시려우?"
"그래서 내가 네게 물었던 거다. 사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겨울은 미쳐 생각을 못했지 뭐냐? 혹 다른 일거리가 있나 그냥 물어 본 거다."
"성님은 의원 댁 하님 아니우? 의원이 집이 없어 뜨내기들과 섞였단 말이유?"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내가 일은 하긴 해야겠는데 큰일이구나."
"내가 객주 주인에게 말해서 성님도 같이 일을 시켜달라고 해볼 테니 너무 걱정은 마시우. 설마 이제껏 굶어죽지 않았는데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수?"
"그래 난 이쪽으로 가야 하니 다음에 또 보자꾸나."
"아까 일 고맙수. 성님."
동이와 헤어진 거칠이는 움막으로 향했다. 움막을 한 바퀴 돌아보니 지붕이 너무 엉성해서 이렇게는 도저히 겨울을 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움막 안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바닥이 차서 견딜 수 없을 것이었다. 움막 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의 말대로 구들을 놓아야 추위를 견딜 것 같았다. 거칠이는 발아래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구들돌을 구할 방법을 이리저리 궁리했다. 그때였다. 거적이 확 제쳐지며 어떤 놈이 쑥 고개를 디밀었다.
"아이코, 의원님 계셨구랴. 소인 덕구요. 우리 할애비가 갑자기 이상하우. 같이 좀 가주."
움막 안이 어두운 탓에 송윤호로 착각한 덕구란 놈이 무작정 소매를 밖으로 끌어당기니 영문 모른 거칠이는 어떨떨할 새도 없이 끌려 나왔다.
"엉? 의원님이 아니잖아? 여기 의원님은 어딜 가셨소? 당신은 또 누구요?"
거칠이가 아이놈을 보니 열서너 살 정도의 거지 아이였다.
"네가 찾는 의원은 지금 여기 안 계시다. 설혹 계시다 해도 병자를 돌볼 처지가 아니다. 그러니 급한가 본데 얼른 다른 의원을 찾는 게 좋겠다."
"아니오. 여기 의원이라야 하우. 그분이 우리 할애비 병을 콕 찍어 알아맞힌 분이란 말이우. 지금쯤 우리 할애비가 죽었을지도 모르겠수. 제발 의원을 만나게 해 주."
"허어, 참, 의원은 지금 아파서 누워 게시다. 의원이 병자란 말이다."
"뭐요? 설마 그렇기야 하겠소?"
"헛, 그놈 참, 거짓이 아니다. 그러니 급한 병이면 어서 다른 의원을 찾아가거라."
"다른 의원을 찾아간들 돈이 없는데 따라나 오겠소? 헛 참. 이 일을 어째?"
"너의 할애비가 어디가 아프시다더냐?"
"난들 아우? 동냥을 얻어서 움막엘 들어서니 벌써 뻣뻣합디다."
"뭐라? 그럼 돌아가셨더란 말이냐?"
"모르겠수. 불러도 대답이 없고 몸은 찹디다. 허지만 의원만 가면 일어나실 게유."
"허. 안되겠다. 같이 가보자."
"의원도 아니라며 가서 뭐 하겠소? 아니지. 댁이라도 어서 갑시다."
"어디냐? 앞장 서거라."
덕구란 놈이 달음박질로 백사장을 가로질러 쏜살같이 달리니 거칠이도 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데, 놈이 얼마나 빠른지 걸음 잘 걷는 거칠이가 감탄을 할 판이었다. 거의 오 리 길을 눈깜짝 할 사이에 닿아서 움막을 들어서니 먼저 온 덕구가 제 할애비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영감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입을 반쯤 벌린 것이 어째 산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맥을 보려고 팔을 드니 이미 굳어 있었다. 거칠이의 입에서 맥빠진 한숨이 절로 흘렀다. 오늘 하루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얘, 늦었구나. 이미 돌아가셨다."
"그럴리 있소? 의원이 가르쳐 준 은행 가루랑 더덕을 먹구설랑 요즘은 한결 기침도 덜하다고 좋아하셨는데?"
"가만, 여기가 좀 이상하구나. 더 밝게 거적을 확 제쳐봐라."
영감의 들었던 팔을 가지런히 모으던 거칠이의 손에 닿는 느낌이 이상했던 것이다. 영문을 모른 덕구가 일어나 거적을 걷어 재치자 움막 안이 한결 밝아졌다. 거칠이가 영감의 팔소매를 천천히 걷어 보았다. 느낌대로 영감의 손목과 팔꿈치 사이의 중간이 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밝지 않았으면 보지 못했을 목이 졸린 흔적을 발견했다. 목둘레에 피멍으로 생긴 검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이거, 그냥 돌아가신 게 아니구나. 누군가가 네 할아빌 해친 것 같다."
"뭐요?"
거칠이가 팔과 목을 살피는 것을 보아서 대강의 사태를 짐작한 덕구가 후다닥 밖으로 나가더니 옆 움막의 거적을 확 재꼈다. 그러나 그 안엔 아무도 없었다. 다음 움막도 마찬가지였다. 악에 받친 덕구가 눈에 불을 켜고 사방을 돌아보았다. 덕구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거칠이가 밖으로 나와 덕구와 나란히 섰다.
"이놈들 짓이오. 이놈들 짓이 분명하단 말이요."
"누구 말이냐? 이 움막에 살던 사람 말이냐?"
"지난여름에 여기다 움막을 짓고 살던 깍정이들이 있었소. 아침에 동냥 나갈 때까지도 있었소. 헌데 지금은 아무도 없지 않소? 그러니 이놈들이 분명하오."
"이제껏 아무 일 없이 잘 지내던 놈들이 갑자기 왜 그랬단 말이냐?"
"내가 아오? 아니, 알 것 같소. 이놈들이 요사이 낌새가 좀 이상하긴 했었소. 어쩌다 저희들끼리 쑤근대는 걸 들어보면 누구를 죽이려고 모의를 하나 봅디다. 일전에 줒어다 논 병신에게 뭔가를 매일 가르치느라 욱박지르는 소리가 들리더란 말이우."
"병신이라니?"
"일 삭쯤 전에 두물머리께서 흘러온 병신인데 웬일인지 깍정이들이 데려다 밥을 멕여주었소. 놈들이 아마 그 병신을 시켜 누굴 죽이려 했었나 보우."
"병신이 누굴 죽이며 죽이란다고 그 말을 듣겠니?"
"모르겠소. 어젯밤 얼핏 들으니 일만 끝내면 애는 자기들이 나서서 찾아 준다고 꼬십디다. 그 병신이 그 말에 넘어갔을 것이요."
"애라니? 병신이 자식을 잃었나 보구나."
"제 자식이 아니라면 왜 그렇게 애에게 목을 매겠소? 그 병신은 눈만 뜨면 애새끼 타령이었소. 나보고도 매일 하는 말이 동냥을 다니다가 혹, 귓볼에 점이 있는 두어 살짜리 애를 보면 득달같이 알려 달라고 신신 당부를 했었소."
"뭣?"
거칠이는 숨이 탁 막힐 만큼 놀라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귓볼의 점이 있는 두어 살짜리라면 주인과 자신이 여태껏 목숨을 걸고 찾고 있지 않은가? 당장이라도 아이를 찾는다는 그 사람을 만나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순간 거칠이는 아이에 대해서는 무심한 척 마음을 가려 앉혀야 했다. 아이를 찾으러 다닌다는 말이나 내색은 않기로 한 것이다. 더구나 귓볼에 점이 있다는 말은 절대 먼저 하지 않기로 주종간에 약속이 되어 있었다. 행여 세월이 흐른 후에 찾았을 경우 가짜를 가릴 방법 하나는 숨겨 두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그래서 그 병신이 너의 할아비를 해쳤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우리 할아비를 죽여 무슨 득이 있겠수? 이건 보나 마나 할아비가 놈들이 하는 말을 다 들었기 때문일 것이오. 병신을 데려가기 전에 할아비 생각을 못하고 죽일 놈 이름을 병신에게 아르켜 준거란 말이요. 그것이 염려되어 할아비 입을 막은 게 분명하오."
"그런 다음, 놈들이 어디로 갔다고 생각하느냐?"
"수표 다리 아니면 오간수문 아니겠소? 그 둘이 깍정이들이 가장 많지 않소?"
"얘, 오간수문 아래는 지난해부터 문둥 병자들이 모여 있다더라. 거긴 아닐 게다."
"그렇다면 수표 다리겠구려. 내 이놈들을 찾아내면 돌로 쳐 죽일 것이요."
저녁노을에 붉게 물든 덕구의 얼굴은 어린아이 답지 않게 야차처럼 이그러지더니 잠시 후 석류알 같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제 어쩌면 좋겠수? 내겐 아재 뻘이니 아재라 부르겠소. 염치없는 얘기지만 아재가 좀 도와주시우. 나 혼자서는 어째 볼 엄두가 나질 않소."
"여부가 있느냐? 오늘은 늦었으니 나를 따라가자꾸나. 내일 연장을 빌려와야 일이 될 것 같구나."
"아니요. 나는 할아비 곁에 있겠수. 아재나 가 보우."
"우선 저녁밥도 먹어야 하고 밤이 되면 몹시 추울 것 아니냐? 함께 가자."
"한 끼 먹지 않는다고 설마 죽겠소? 허고 정 추우면 불을 지피면 되오."
"허, 녀석 고집하고는. 그럼 내일 아침에 연장을 빌려서 오마."
"고맙수. 아재."
"아재라.... 반나절만에 동생과 조카가 한꺼번에 생겼구나."
거칠이는 덕구와 헤어져 나루로 돌아오는 동안 누워있는 주인 생각에 계속 마음이 울적했다. 그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후에도 주인이 거처할 곳이 움막 밖에 없어서 걱정이었다. 어디라도 구들이 제대로 놓인 방을 얻어 그리로 모셨으면 싶지만 돈이 없으니 어쩔 것인가? 사실 마님이 챙겨 주신 두 냥이 괴나리봇짐에 있긴 했으나 그건 양식이 떨어져 굶어죽기 직전까지는 쓰면 안 되는 돈이었다. 지금이라도 구들을 놓을 돌만 구하면 움막이라도 버틸만 할 것이었다. 거칠이는 그 방법이 가장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거칠이가 나루터까지 왔을 때는 어둠이 설핏 내려앉고 있었다. 텅 빈 나루에는 스산한 바람이 불어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거칠은 빠른 걸음으로 언덕길을 올라갔다. 한데, 위 쪽에서도 희끗한 사람이 바삐 내려오고 있었다. 거칠이는 한 켠으로 몸을 비켜섰다.
"엉? 성님 아니우? 어딜 다녀오우? 움막에 가니 아무도 없더구만.…"
"어라? 동이 아니냐? 넌 여태 집으로 가지 않았냐?"
"헛, 참, 그때가 언젠데 그러우, 밤섬에 건너가서 저녁 먹구 성님 생각에 이걸 좀 갖다드릴려고 갔더니 안 계십디다그려. 헌데 움막이 썰렁합디다. 의원도 안 보이고…."
동이는 손에 든 삼베 뭉치를 거칠이 앞으로 쑥 내밀었다.
"움막을 손볼 때까지는 비우게 될 게다. 헌데 이건 뭐냐?"
"시루떡 이유."
"뭐? 시루떡이 어디서 났단 말이냐?"
"그건 알아 뭐 하우? 다 생기는 수가 있수.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았을 테니 들기나 하슈."
"오냐, 고맙다. 내, 가서 먹으마."
"나는 가우. 참, 솔직하게 말하리다. 이 떡은 대갓댁 첩이 용왕님께 치성을 드리느라 강가에 둔 것이유. 하지만 도야지 대가리라면 모를까 용왕이란 놈이 시시하게 이딴 걸 먹겠수? 그러니 어쩌다 이런 별미가 걸리면 우리가 대신 먹어주는 것 아니우."
떡을 손에 든 거칠이가 부지런히 황구만의 객주에 닿아보니 봉놋방은 캄캄하였다. 거칠이가 인기척과 함께 방으로 들어서자 송윤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칠이냐?"
"예, 나으리. 등잔이 없사옵니까?"
"어젯밤에 불빛을 보았으니 어디 있을 것이다만 부시가 없구나."
"그럼 쇤네가 부엌에서 불씨를 얻어오겠사옵니다."
"음, 그래라."
거칠이가 다시 문을 더듬어 마당으로 나섰다. 그리고 아까 할멈이 나온 방향으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때 대문께에서 사람 소리가 나더니 몇 사람이 마당을 들어서고 있었다. 새벽 배를 타고 상제말 오일중을 찾아갔던 노탁우와 황구만이었다. 그들의 마중을 나갔던 기형도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부엌을 찾던 거칠이는 주춤하여 제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음? 누구냐?"
앞선 황구만이 물었다. 그러나 거칠이는 뭐라 대답할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쇤네는.…"
"아니 이자는 낮에 본 그 자 아닌가? 방장님 이자가 조금 전에 제가 말씀 올린 의원이란 자의 하인이옵니다."
"음, 그래? 그래 무슨 일로 마당을 서성이는 게냐?"
"쉰네는 등잔을 킬 불씨를 얻고저...."
"음, 부시는 줄 테니 잠시 나를 따라오너라."
"예? 쉔네를 말씀이 오니까?"
"부 회주님은 먼저 드시지요. 형도 자네가 먼저 들어가 불을 밝혀드리게."
황구만의 말에 웬일인지 노탁우가 먼저 나섰다.
"아닐세. 자네가 들어가고 내가 이 사람과 얘기를 좀 나눔세."
"예? 부 회주님께서 직접이 오니까?"
"그러하네. 내가 물어볼 것이 있네. 결과는 자네에게만 알려주지."
황구만과 기형도가 사랑으로 드는 사이 노탁우는 서사방에 들어가 부시를 쳐 등잔을 밝힌 다음 거칠이를 불렀다. 거칠이가 머뭇거리다 할 수없이 방으로 들어와 문 가까이 모로 꺾어 앉았다.
"편히 앉아라. 나는 양반이래도 반 쪽짜리 양반이요 그나마 이젠 상고니라."
"이대로 괜찮사옵니다."
"헛, 시키는 대로 해라. 그리고 내 네게 몇 가지를 묻겠다. 대답이 솔직하지 못하면 주인에 대한 대접도 달라질 것이니 그리 알아라. 알았느냐? 우선 네가 누군지부터 알아야겠다. 하인이냐 종이더냐?"
"....... 예. 종이옵니다."
"음, 그래? 너의 주인이 의원이 아닌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럼 묻겠다. 네 주인은 양반이냐?"
노탁우의 첫 번 째 물음에 거칠이는 뭐라 할 대답이 없었다. 맞다고하면 사는 곳과 내력을 끝없이 물을 것이고 아니라고 하면 곧이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답을 않는 것은 양반이란 얘긴데 그렇다면 벼슬을 한 양반이냐?"
그 또한 대답할 성질의 물음이 아니어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험한 일을 해보지 않아서 새우젓 독도 나르지 못하는 양반이라면 의당 서당에서 접장질이라도 하련만 돈 한 푼 생기지 않는 나루에서 온갖 천민에 섞여 남의 병이나 고쳐주려다 제 몸을 망치는 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내 듣자하니 나룻배만 닿으면 부리나케 나룻터로 달려간다니 혹 누구 잃은 사람을 찾느냐?"
더구나 대답을 못할 물음이어서 거칠이는 입술을 깨물고 자신의 무르팍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거짓이라도 고하고 싶으나 입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내 어제 업고 올 때는 몰랐는데 오늘 아침에 보니 내가 알고 있는 사람과 외관이 흡사하더구나. 뿐만 아니라 성씨까지 같으니 이것이 우연이겠느냐? 너도 듣다시피 아까 황방장이 네게 묻겠다는 것을 내가 대신한 것도 그걸 물어보기 위해 서니라. 내가 묻는다고 의심하거나 괴이하게 생각할 것 없느니라. 나는 이미 상고의 길로 들어선 사람이라 벼슬이나 양반 놀음에 끼어 말썽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 자 마지막으로 네게 묻겠다. 이것만은 대답을 해야 할 것이다. 네 주인의 형이나 동생이 전에 사헌부에서 지평(持平) 벼슬 살던 사람이 있느냐? 불과 일 년 전 일이니 너는 생각이 날 것이다."
거칠이는 가슴이 조여오는 듯한 느낌과 함께 무엇을 어떻게 해야 주인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도저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몰린 것이다.
"쉰네를 죽여주시옵소서. 저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진땀이 흘러 불빛에 번질거리는 거칠이의 이마와 콧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탁우는 가만히 한숨을 토했다. 생각 대로였던 것이다.
"죽을 죄가 아니다. 상전을 위하는 너의 심성은 오히려 상을 받아 마땅하느니라. 그만하면 대답이 충분히 되었으니 이만 가도 되겠다. 가 보아라."
굽신하고 절을 한 거칠이는 개미귀신에게 잡혔던 쥐며느리가 놓여나듯 얼른 방을 빠져나와 짚신을 꿰었다. 그러자 방 안에서 다시 노탁우의 말이 들려왔다.
"옜다, 부시를 갖고 가거라."
거칠이는 정신없이 문 앞에 떨어진 부시깃 쌈지를 들고 송윤호가 기다리는 봉노로 돌아왔다. 거칠이는 불을 켜고 주인에게 시루떡을 연방 권하면서도 방금 있었던 일은 입을 다물었다. 주인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쨌든 자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이다. 한편 노탁우는 사랑으로 나와 황구만에게 방금 있었던 얘기를 했다. 그러나 사헌부 얘기는 빼고서였다.
"그럼 저 송 의원이란 자가 누구를 찾기 위해 나루에 머문단 말씀이옵니까?"
"분명한 사실이네. 그렇지 않다면 왜 그 고생을 하겠는가?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송 의원이 겉보기엔 헐벗었으되 절대로 가난한 유랑민이나 천민이 아니라는데 있네. 움막에 사는 유랑민이 종을 부린다면 말이 되는 소린가? 아무튼 내게 어렴풋이 집히는 바가 있으니 당분간 저 송 의원을 상조회 이름으로 보살펴 주세. 내 생각이 맞다면 우리가 손해 볼 일은 없네. 그리고 우리에게 후의를 입고 나 몰라라 할 사람은 아닐 것일세."
"부 회주님께서 그러라시면 그럽지요. 허긴, 작은 적선이 때로는 나중에 더 큰 복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습지요."
이튿날 아침에 거칠이는 어제 움막으로 송윤호를 찾아왔던 덕구 얘기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깍정이들에게 죽음을 당한 노인의 장례를 도와주러 갔으면 한다는 뜻을 말했다. 뜻밖의 얘기에 놀란 송윤호가 눈을 감고 말이 없더니 거칠이에게 담담한 어조로 말을 했다.
"어린 아이치고는 대단한 아이구나. 깍정이 패가 제 할아비를 해친 연유를 추측한 것을 들어보니 적확한 추측이다. 게다가 외딴 움막에서 시체를 지키는 용기도 가상하구나. 그 애를 만나던 첫날에 눈빛이 총명하기에 그럴 줄 알았다만..... 암, 가서 도와줘야지. 왠만하면 나도 가 보련만... 어서 가거라."
주인의 허락을 얻은 거칠이가 기형도를 찾아 괭이와 가래를 빌려 객주를 나섰다. 그리고는 부리나케 언덕을 향해 달려갔다. 언덕을 넘자 다른 때 같으면 어물배를 기다리는 짐꾼들로 북적일 강가에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고 물가에는 살얼음이 얼어 있기까지 했다. 강에도 주낙을 걷는 서너 척의 작은 배만 보일 뿐 돛단배 한 척 보이지 않았고 닻을 내린 배도 없었다. 거칠이는 더욱 걸음을 빨리 재촉했다. 그런데 강물에 떠 있는 주낙배 중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거칠이 혀어엉. 어디가시우우."
목청을 돋궈 손을 흔드는 사람은 다름 아닌 동이였다. 거칠이도 동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동이가 탄 주낙 배가 거칠이를 향해 방향을 바꾸더니 살같이 다가오고 있었다. 거칠이는 할 수없이 동이를 기다리기로 했다.
"아니? 성님은 새벽같이 어딜 가우? 어라 괭이와 가래까지? 왜? 때 꺼리가 떨어져 칡을 캐러 가우?"
"틀렸다. 누굴 묻으러 가는 길이다."
"뭐요? 묻힐 사람이 누구요?"
"너는 모를 게다. 어제 덕구라는 아이의 할아비가 죽었더라. 날도 추운데 묻을 사람이 없으니 나라도 가서 도와줘야지."
"원, 성님은 밤낮 남 돕다 언제 일해서 양식을 장만하겠소? 헌데, 가만, 덕구라고 했소? 그 새카만 동냥질 다니는 아이 말이요?"
"너도 아는 아이냐?"
"성님이나 모를까, 그놈 모르는 삼개 사람 있소? 그러면 나도 같이 갑시다. 성님 혼자보다 둘이서 하면 일이 수월할 것 아니요?"
"그래도 넌 걷든 주낙은 마저 걷어야 할 것 아니냐?"
"힝, 일없소. 천천히 걷지요. 어차피 물이 차서 고기들이 더 깊은 곳으로 갔을 게유. 이 배로 갑시다, 강가로 붙어가면 힘이 들지 않으니까 말이우."
"이거 이러다 지난번 객주 주인 꼴 나는 건 아닌가?"
"걱정도 팔자슈, 물에 빠지면 내가 있지 않우."
"헌데 오늘은 어물 배가 왜 오지 않느냐?"
"오늘은 하오에 한 척만 들어온답디다. 성님도 일이 하고 싶으면 점심때 나오시우."
그 시각에 황구만은 서기방 앞 쪽마루에 걸터앉아 봉놋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거칠이가 대문을 나서는 기미를 알자말자 나왔으니 얼추 이 각이 넘도록 기다린 셈이었다. 황구만은 송윤호가 누운 방으로 들어가 보려다가 대낮에도 방안이 어둡다는 것을 느끼자 밖에서 송윤호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어제저녁 노탁우의 얘기를 듣던 중 무언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 아침이 되어도 떨쳐지지가 않아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하려 한 것이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는지 송윤호가 드디어 봉놋방을 나섰다. 보나 마나 측간에 가려는 것일 거였다. 송윤호가 후들거리는 자세로 짚신을 꿰는 것을 본 황구만이 잽싸게 달려가 팔을 잡아주었다.
"측간을 가시려오?"
"그러합니다. 이거 폐가 이만저만이 아니오."
"원 천만의 말씀이오. 송 의원이 우리 객주에 있어 폐될 일은 없소이다."
"말씀만은 고맙소. 이젠 됐소. 혼자 가리다."
황구만은 송윤호의 팔을 놓는 즉시 헝클어진 그의 뒤 머릿카락 사이로 드러난 두 뒷볼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그의 왼쪽 귓볼에 찍힌 파란 점을 찾아냈다. 황구만은 찌릿한 전율을 느꼈다. 내촌댁의 복덩이와 꼭 같은 곳에 찍힌 점이 아닌가? 찜찜하던 황구만의 마음이 눈으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헛, 그랬단 말이지.'
그로부터 닷새 후였다. 새벽에 희끗희끗 흩날리던 눈이 잠시 그치는가 싶더니 오정이 가까워질 무렵에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한 번 내리기 시작한 눈은 갈수록 눈발이 거세져 온 산하가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본래 이곳 삼개는 풍광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서 풍류를 제법 안다 하는 양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긴 하지만 오늘처럼 눈이 내리는 날은 지필묵은 고사하고 도공(圖工)도 필요 없는 그냥 한 폭의 산수화라 자연을 아끼는 시인 묵객이 보았다면 흠신 감격에 젖었으리라. 허나 지금 나루에 나와 배가 닿기만을 기다리는 춘월이 일행에겐 눈이란 성가시고 차기만 한 것이었다. 그리고 시각이 흐를수록 점점 더 굵어지는 눈발에 경치는 고사하고 백 보 밖에 서 있는 버드나무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얘, 개동아 아직 배가 보이지 않으니 지게는 내려놓아라. 무겁게 왜 그러고 있니?"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으우. 원, 눈에 가려 배가 코앞까지 와도 모르겠수."
"거 참, 시집가는 날 등창이라더니 하필이면 이사하는 날을 골라 눈이 쏟아지는구나, 엥이."
"그러게나 말이우, 누님, 복덩이 눈 안 맞게 하시우."
"잘 씌웠나 동생이 좀 봐주게."
내촌댁은 개동이가 볼 수 있게 아이를 업은 등을 돌려대었다.
"그럽시다. 음, 이만하면 됐수."
업고 다니기엔 다소 큰 아이였으나 눈이 쏟아지는 날씨에다 안거나 걸리면 그나마 작은 이삿짐 하나 들 수가 없기에 업은 것이다. 아이는 포대기로 머리까지 푹 씌운 데다 행여 눈을 맞을세라 그 위에 또 보자기로 덮어 씌웠다.
"원, 웬 눈이 이리도 많이 오누?"
머릿수건을 다시 여미며 춘월이가 중얼거렸다. 송파 객주의 공사가 예상보다 늦어져 일을 먼저 시작했던 살림집과 술청만 겨우 완공을 본 상태였다. 허나 웬일인지 며칠 전부터 황구만이 먼저 이사를 서두르니 춘월이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의 삼개 객주는 당분간 노탁우가 기형도를 데리고 꾸려나가기로 작정이 되었고 황구만은 송파의 객주로 옮기기로 한 것이다.
"아니? 같이 간다던 황주인은 어찌 코빼기도 안 보이나? 이러다 배 들어오면 어쩌려고."
춘월이는 황구만이 늦어지자 걱정을 앞 세웠다. 그러다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니 혹시 배까지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어머니, 저기 황 씨가 오시네요."
황구만을 먼저 본 내촌댁이 춘월의 팔을 잡았다. 춘월이 일행을 발견한 황구만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에그, 괜히 혼자서 걱정을 했구려."
"아니? 배가 올 시각이면 내가 오죽 알아서 오겠소?"
"그러게나 말이요."
"내촌댁은 복덩이 바람들어가지 않게 잘 덮으시요."
황구만의 말에 개동이와 내촌댁이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원, 남정네들이 늙은 할미 걱정은 없고 어찌 우리 손자에만 그리 관심일꼬?"
"하하하, 세상에나, 손자 투기하는 할미가 옆에 있는 것을 몰랐구려."
그 말에 개동이와 내촌댁이 킥킥거리며 웃자 춘월이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동생, 저기 저 나룻배는 어디로 가는 배이기에 타려는 사람들이 저리 많은가?"
아랫 나루에 눈길을 주고 있던 내촌댁이 개동이에게 물었다. 하나, 개동이가 입을 열기도 전에 황구만이 먼저 나섰다.
"양화진으로 건너가는 나룻밸세. 저렇듯 사람이 많은 것은 삼남으로 가기도 좋거니와 강화로 가는 길이 있어서일세. 그래서 도선객 많기로는 나루 중에 으뜸이네."
"에구, 배 크기로 봐서 저 많은 사람들이 다 타려나 모르겠수."
"헛, 저래 봬도 일백오십 명을 태우는 관선일세. 두 척이 있으니 삼백 명은 건너겠구만. 아마 오늘이 얼음이 얼기 전 관선을 띄우는 마지막 날일 게야. 음 저기 검은 철릭 입고 등채 든 사람이 바로 도승(渡丞)일세."
두 척의 나룻배 중에 한 배에 먼저 선객을 태우기 시작했다. 눈발은 휘날리고 건너려는 사람은 많으니 혹시 타지 못할 것을 염려한 선객들이 일제히 배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도승이 뱃전에 버티고 서서 등채로 하늘을 찌르며 한 사람씩 오르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래도 한 번 몰려든 사람들은 물러설 줄 몰랐다. 그러자 장교와 서너 명의 포졸이 창대를 거꾸로 잡고 엉킨 사람들을 마구 두들겨대기 시작하니 곳곳에서 비명과 아우성이 난무해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급기야 도승이 뱃전의 발판을 내려버렸다.
"조용하라. 이제부터 줄로 서지 않는 사람은 오늘 배는 태우지 않을 것이다. 새치기를 하는 자는 육모 방망이 맛도 볼 것이다. 자, 이제 다시 한 배에 한 줄씩 나누어 서거라."
처음엔 웅성거리기만 하던 사람들이 포졸의 지시를 받아 나룻배마다 한 줄씩을 만들자 이번엔 너도나도 줄에 끼어들려고 난리였다. 어쨌든 구불구불 길게 줄이 이루어지자 두 나룻배에 사람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도승과 장교는 각자 한 척씩 맡아 뱃전에 서서 눈을 부라렸다. 혹간 줄에서 빠져나와 먼저 타려는 자가 보이면 사정없이 등채나 방망이로 어깨를 내리치니 감히 새치기할 엄두를 내는 사람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많던 사람들이 두 척의 배에 모두 올랐다. 강변에 남은 사람들은 저만치 늘어섰던 죽 장수와 전송을 나왔던 사람들뿐이었다. 그중에 송윤호와 거칠이가 있었다. 선객을 가득 실은 나룻배는 한 척씩 물가를 떠나고 있었다.
"나으리 없더이다."
송윤호에게 다가온 거칠이가 하늘에 가득한 눈발을 바라보며 맥없이 고했다.
"음, 그렇더구나."
송윤호라고 힘이 날 리 없는 목소리였다. 나룻배가 차츰 강심으로 향하니 눈발에 가려 흡사 꿈속의 이별 장면처럼 흐릿하게 멀어져 갔다. 송윤호는 발길을 돌렸다.
"나으리 배가 한 척 옵니다. 그것도 돛 단 큰 배 올습니다."
거칠이가 가리키는 손끝에는 정말로 눈발을 뚫고 돛단배 한 척이 강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송윤호는 다가오는 배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배는 차츰 가까워지고 물가에는 그 배를 기다리는 듯 네댓 명이 서성이고 있었다.
"나으리, 저 사람은 객주 주인 아닙니까? 식구들을 대동하고 어딜 가려나 봅니다."
"아, 객주 주인이구나. 이사를 간다는 얘긴 들은 바가 없는데 웬일일까?"
송윤호가 눈을 머리에 이고 황구만에게 다가갔다.
"아니, 주인께서 어딜 가시오?"
방금 물가에 닿은 배를 쳐다보느라 송윤호가 온 것을 몰랐던 황구만이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황구만도 그새 눈을 맞아 갓 위와 어깨에 눈이 쌓였다.
"아, 송 의원이 나왔구려. 내 송 의원에게 변변한 인사도 못하고 떠나게 되었소. 송의원께선 객주에 그냥 계셔도 좋다는 회주님의 전언이 있었소. 허니 추운데 다른 곳을 찾지 마시고 그대로 머물러 주시오."
"이제껏 편의를 보아주신 것만도 은혜를 입은 것이오. 식솔과 짐이 함께하는 것을 보니 먼 곳으로 이사를 가시나 보오?"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곳이 올시다. 아, 발판을 내리는군."
황구만이 배에서 내리는 발판을 딛고 먼저 뱃전으로 홀짝 올라서더니 선원에게 개동이가 들어 올리는 짐을 받으라고 일렀다. 다음은 춘월이가 발판을 딛고 올라서 아이를 업은 내촌댁이 무사히 건너오도록 손을 잡아주었다. 그 순간이었다. 자연의 조화였을까 아니면 신령의 장난이었을까? 세찬 바람이 와락 불더니 내촌댁의 등을 덮었던 무명 보자기가 펄럭 걷혀버렸다. 그러자 포대기에 싸인 아이의 정수리 위로 눈발이 마구 내려앉았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그 모습을 본 송윤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른 다가가 아이의 머리 위로 보자기를 내려 덮어주었다.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원일이도 이만할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콧등이 시큰했다. 뱃전에서 그 광경을 내려보던 황구만이 뭐라고 하자 선원이 굽신거리며 급히 발판을 걷었다.
"송의원, 삼개는 내 고향이나 마찬가지요. 이따금 들리리다."
뭍을 떠나는 뱃머리에서 황구만이 한 말이었다. 배는 서서히 물가를 벗어나 강 위 쪽을 향해 멀어져 가고 있었다. 물가에 남은 송윤호와 거칠이는 쏟아지듯 내리는 눈발 사이로 멀어지는 배를 바라보며 오래도록 서 있었다. 헤어짐은 님이 아니어도 서럽고 님이면 더욱 서러운 것이라 그래서 더욱 서러운 것인지 몰랐다. 입을 꾹 다문 채 돌아서는 송윤호의 머리와 어깨 위에 무거운 마음만큼이나 눈이 쌓이고 있었다.
'오늘의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원일 제1장 유전(流轉) 10.장삿길 (1) | 2024.05.13 |
---|---|
송원일 제1장 유전(流轉) 9.절망 속의 희망 (0) | 2024.05.13 |
송원일 제1장 유전(流轉) 7.삼개 나루 (0) | 2024.05.12 |
송원일 제1장 유전(流轉) 6.황구만 (1) | 2024.05.11 |
송원일 제1장 유전(流轉) 5.오일중 (0) | 2024.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