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절망 속의 희망
"이놈 봐라?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 하구설랑.... 뭐? 안 하겠다?"
"아, 안 한다는 게 아니라, 그런 일을 내가 할 수 있으려나 하는 마음에...."
"이런 병신하고는.... 그 말이 그 말 아니냐? 너 오늘 죽어 봐라."
"아, 그 게 아니라니까요. 에구."
변명을 미쳐 꺼내기도 전에 수구리는 판덕이가 짚고 있던 지팡이부터 걷어차버렸다. 그러자 한 쪽 다리가 부실하던 판덕이는 단번에 한 쪽으로 철퍼덕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쓰러진 몸뚱이에 발길질이 시작되었다.
"에고고, 나 죽네. 아고 아고, 부 두령님, 하겠소, 하겠다고요."
"이놈아, 맞을 때면 늘 하는 그 소리는 이제는 더 듣지 않겠다. 아예 네놈 명줄을 끊어 줄 테니 그동안 처먹은 밥값이라 생각하고 원망은 하지 마라."
"부 두령, 아니, 부 두령님, 이번엔 정말이오. 결심했소. 정말 결... 헉."
수구리는 쓰러진 판덕이에게 닥치는 대로 발길을 내질렀다. 옆구리와 배를 걷어차인 판덕이는 고슴도치처럼 온몸을 꼬부리며 머리를 감쌌다.
"이놈, 그만큼 일렀건만....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해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제 와서 못한다니 말이 되느냐? 죽어라. 이놈, 어서 죽어."
"사, 살려주오, 정말 할 테니 날 살려주오."
"시끄럽다. 이놈아, 여봐라. 너희들은 구경만 할 셈이냐?"
한 곳에 몰려서서 눈치만 살피던 세 놈이 부 두령인 수구리의 말이 떨어지자 후다닥 일어나 일제히 밟고 차기 시작했다.
"아고고, 지금 보내주오. 시키는 대로 당장 해치우겠소. 아, 아, 정말 올시다."
"뭐라고? 이놈이 이제야 급한가 보다. 아예 죽여버려라."
수구리가 한발 뒤로 물러서며 발길질에 여념이 없는 놈들에게 일렀다.
"정말이오. 아구, 정말이요, 내가 못 해치우면 그때 날 죽이면 될 것 아니요. 헉."
"가만, 잠깐 멈추거라. 너 지금 당장 해치우겠다고 했느냐?"
"그러하오. 보내주시오."
"좋다. 네놈을 죽이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믿어주마. 하지만 죽는 것이 겁이 나서 그쪽에 붙거나 비밀을 까발리면 애새끼는 우리가 먼저 찾아서 똥통에 처박아 죽일 테니 알아서 하거라. 우리는 한다면 하고야 마는 것을 그동안 네 외짝 눈깔로 보았을 테니 잘 알고 있겠지?"
수구리의 말이 끝나자 세 놈이 달려들어 판덕이를 일으켜 앉혔다. 판덕이의 얼굴은 코피가 터지고 앞니가 부러져 피 칠갑이 되어 있었다.
"밤중에 시구문으로 들어가 수표 다리까지 가려면 복처마다 깔린 순라꾼을 따돌릴 방법이 없다. 그럴 바엔 차라리 밝을 때 흥인문으로 버젓이 들어가는 게 나을 것이다. 여기서 흥인문까지 시오리요. 흥인문에서 수표 다리까지 기껏 오릿 길이니 지금 떠나도 충분할 것이다. 너희들은 판덕이 얼굴에 묻은 피를 대강 닦아주어라."
사팔이란 놈이 목에 둘렀던 꼬질꼬질 때가 낀 수건을 바가지 물에 적셔 판덕이에게 건넸다. 판덕이는 콧등과 볼을 닦고 입술 주위를 닦을 때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부러진 앞니에 찬바람이 닿아서 깜짝 놀랄 만큼 시렸던 것이다.
"자, 다들 일어나 가자."
수구리의 한마디가 떨어지자 사팔이를 선두로 찌개미와 멍구가 벌떡 일어났다. 판덕이는 일어나려다 지팡이가 없어 허둥거렸다. 지팡이는 수구리가 발로 차서 어디로 날아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팔이 너 판덕이 지팡이 좀 집어다 주어라. 빌어먹을 놈 그러게 애초에 안 하겠단 말은 왜 한단 말이냐?"
판덕이는 입안에 고였던 핏덩이를 뱉고 말없이 수구리의 뒤를 따랐다. 판덕이가 이놈들에게 걸려든 것은 일 삭 전쯤이었다. 굶은 아이를 위해 암소의 젖을 훔치려다 되레 발굽에 채여 눈알이 터지고 허벅지가 뿔에 꿰인 판덕이였다. 그리고 장 첨지네 고방에 던져진 후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 목숨을 이어갔었다. 보다 못한 장 첨지가 하인을 시켜 상처를 돌봐주라 일렀다. 판덕이는 그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아이 걱정뿐이었다. 낮이나 밤이나 사라진 아이에게 온 정신을 쏟으며 고통과 싸웠다. 다행히 멀쩡한 음식도 마구 썩어나는 여름날임에도 약 한 첩 없이 상처는 썩지도 곪지도 않았었다. 뿐이랴? 두어 달 후 쯤엔 신령님의 조화로 상처가 얼추 아물어서 겉으론 멀쩡하게끔 되었다. 그러자 그동안의 고통을 이겨내게 한 것은 신령의 조화가 아니라 아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파서 죽기 직전일 때에도 아이 생각뿐이었던 것이다. 대략이나마 상처가 낫자 아이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간절해서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판덕이는 한 번도 아이가 남의 자식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난 몇 달 동안 죽을 고생을 하며 함께 떠돌다 보니 친자식처럼 정이든 것이다. 판덕이는 아이를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더구나, 죽어가면서도 개똥이를 부르던 마누라를 생각해서라도 아이를 다시 찾아야 했다. 판덕이는 아이를 뉘었던 배의 임자가 누구인지 장 첨지네 하인에게 물었다. 하나, 하고많은 배가 들락거리는 곳이니 어떤 배의 주인이 누군지 그 하인이 알리가 없었다. 아이를 두었던 배가 간 곳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여울 많은 양주나 양평은 아닐 터이니 아랫 강으로 갔으리란 추측뿐이었다. 어느 날 장 첨지의 하인에게 강 아래로 가는 배에 좀 태워 달라는 말을 했다. 그러지 않아도 병자 수발이 지긋지긋하던 하인이 재빨리 주인에게 아뢰었다.
"이런 놈을 보았나? 그런 일이면 한시바삐 신탄선에 실어 보내면 될 것을 묻긴 뭐 하러 묻느냐? 빨리 가서 실어 보내거라. 아이고, 시원하고나."
판덕이는 그날 밤 당장 신탄선에 얹혀 백여 리 물길을 타고 노들 섬이 마주 보이는 모래사장에 내려졌다. 사공이란 자가 사람들이 볼세라 인적이 뜸한 곳에다 내동댕이 친 것이다. 어쨌든 그때가 늦은 아침이라 판덕이는 어디 가서 동냥이나 해볼 요량으로 절뚝거리는 다리를 끌고 언덕으로 향했다. 그런데 저만치 산 밑에서 아까부터 판덕이를 보고 있던 웬 놈이 움막으로 쏙 들어가더니 금세 세 놈을 데리고 달려 나오는 것이다. 놈들은 불문곡직하고 판덕이의 팔 다리 하나씩을 잡아들고 자기들 움막으로 향했다. 영문을 모르고 잡혀가던 판덕이는 결사적인 몸부림과 함께 소리를 질렀다.
"이놈들아, 이것들 놓아라. 나는 가진 것도 없는 병신일 뿐이다. 놓아라, 놓아."
놈들은 끽소리도 하지 않고 더욱 걸음을 빨리했다. 결국 움막 안에 던져진 판덕이는 눈물을 질금거리며 사정을 해야 했다.
"제발 날 놓아다오. 나는 아들을 찾아야 하는 몸이다. 그러니 제발 날 놓아다오."
"아들이라....? 네 행색을 보니 저승 가기도 늦은 것 같은데 아들이 있었단 말이냐? 어찌 된 사연인지 들어나 보자꾸나."
개중에 제일 눈매가 불량하고 나이도 많아뵈는 놈이 나서 판덕이의 신상을 캐기 시작했다. 판덕이는 흉년에 아이를 데리고 유랑하다가 마누라는 병으로 죽고 남은 아들을 살리려고 소젖을 훔치다가 병신이 된 일을 거짓말 섞어 털어놓았다.
"그렇다면 너를 아는 사람도 불쌍하게 여겨줄 사람도 없겠구나."
부두령이요 이름을 수구리인 것을 나중에야 안 놈의 말이었다. 그리고는 그날부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공밥을 먹여주던 것이다. 공밥을 며칠 먹고 나자 슬슬 불안한 마음이 스며서 도망을 치려했으나 몸이 성치 못하니 뛰어야 벼룩이라 주저앉고 말았다. 놈들은 판덕이의 심중을 꿰고 있는 듯 도망을 가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리고 낮이면 어디로 사라졌다가 저녁때 나타나곤 하였다. 놈들의 꼴들을 보아 거렁뱅이가 분명했으나 부 두령이란 자의 생김새를 보면 화적 같기도 했다. 그 후, 보름쯤 같이 지내보니 놈들은 수표 다리 밑에서 놀던 깍정이 패였다. 판덕이가 하릴없이 움막에 머문지 스무 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부 두령님이라 불리는 수구리란 놈이 판덕이를 앉혀놓고 슬슬 까슬르기 시작했다.
"너는 우리가 왜 이런 움막에서 이러고 있는지 아느냐?"
"알지 못하오."
"그렇겠지. 얻어 온 밥이나마 그동안 한솥밥을 먹어 왔으니 같은 식구라 여겨 네게 솔직히 털어놓겠다. 우리는 사실 수표 다리 밑에서 삼 십여 명의 깍정이를 거느리던 설치 두목의 부하들이다. 한데, 지난여름, 못 보던 놈들이 수표 다리 밑으로 쳐들어 와 설랑 큰 싸움이 붙었었다. 그러나 그날따라 두목과 나는 전날 마신 술에 떡이 되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당했다. 놈들은 우리를 꽁꽁 묶어 개천에 처박아 죽이려 하더라만 그곳을 떠나는 조건으로 목숨을 빌었다. 떠날 때 부하들은 모조리 그놈들에게 넘기고 말았다. 부하란 본래 힘센 두령을 따르는 법 아니냐. 그곳을 떠날 때 설치 두목은 모아두었던 은붙이를 슬쩍 감추어 나왔는데 숭례문을 나서기도 전에 포교 놈이 달려들더구나. 두목이 은붙이를 가진 걸 포교가 어찌 알고 잡았겠느냐? 보나 마나 수표 다리를 가로챈 놈들이 미리 꾀를 쓴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두목은 하릴없이 도둑놈 와주로 몰려 전옥서에 갇힐 수밖에.... 그 후에 우리는 이곳에 움막을 세우고 오늘날까지 두목을 수발해 왔었다. 헌데 얼마 전에 전옥서에 갇힌 죄수가 너무 많아 일부를 방면한다는 소리를 듣고 그동안 모은 돈을 재빨리 서리들에게 먹여 놓았다. 해서, 두목이 수일 내로 방면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일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넌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니 네 도움이 필요하느니라. 절대 거절하지 말기를 바란다. 알았느냐?"
수구리의 장광설에 잔뜩 긴장했던 판덕이는 자기와 별 무관한 얘기 끝에 도움을 바란다는 대목에서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보나 저희들보다 훨씬 못한 병신을 무엇을 보고 할 수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이며 어디에 쓰려고 도움을 달라고 하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몰골로는 싸움판에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도우다니요? 이 꼴로 어떻게 당신네들을 돕는단 말이요?"
"하하, 미리 겁을 낼 필요는 없느니. 이 일은 힘으로 하는 일이 아니니 네가 우릴 돕자는 마음만 있으면 하시라도 우리들의 은인이 될 수 있느니라."
"그러니까. 그 일이라는 것이 무엇을 하는 일입니까.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다마다겠습니까."
"역시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군. 이번 일만 제대로 해내면 네가 찾는 아이는 우리들이 나서 찾아주지. 까짓 서른이 넘는 깍정이들을 풀면 보름 내로 찾을 수 있을 테지."
아들을 찾아준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인 판덕이가 제가 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득남을 바라는 삼대독자 며느리가 부처에게 하듯, 죽어라 수구리에게 절까지 해댔다.
"합지요. 우리 아들만 찾아준다면 도깨비 뿔이라도 뽑아 오지요."
"헛, 각오가 대단하구만. 그 정도로 마음을 모질게 먹으면 못할 일이 없겠지."
그날 밤부터 판덕이가 해야 할 일을 차근차근 일러주더니 다음날에는 나무로 만든 칼을 들려주며 찌르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산 닭도 못 죽이는 성격인 판덕이가 가만히 보니 자신이 할 일이 다름 아닌 사람 죽이는 일이라 속으로 겁이나서 그만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아이를 찾아야 하는 데다 절름발이 신세라 멀리 도망을 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한데 어느 날 옆 움막에 사는 아이놈이 해소 병 걸린 제 할애비를 위해 의원을 데려온 것 같았다. 해소 병 약을 처방해 주고 돌아가던 의원에게 통사정을 해서 자신도 좀 봐 달라고 했었다. 이리저리 다리를 살피던 의원이 걸음 걷는 조련을 부지런히 하면 한결 나아질 것이란 말을 한 것이다. 그 뒤부터 판덕이는 놈들이 다 나가고 나면 무작정 강변을 돌아다니며 다리 힘을 키웠다. 며칠이 지나자 의원의 말대로 걸음걸이가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밤이나 낮이나 들려오던 영감의 기침소리도 한결 줄어든 것 같았다. 판덕이는 자신의 다리에도 희망을 걸었다. 며칠 후였다. 아침이면 어디론가 사라지던 놈들이 그날따라 나가지 않았다.
"그 정도 습련을 했으면 실수 없이 단번에 요절을 낼 수 있겠지. 자, 모두들 당장 자리를 옮기기로 하자. 두령이 방면이 되면 만날 장소가 정해졌다."
"부 두령님, 그러면 저 자를 오늘 수표 다리 패에 박을 겁니까요?"
사팔이가 판덕이를 가리키며 수구리에게 물었다.
"잘 할 자신이 있다니 오늘 내일은 거기다 떨구어야지."
"떨굴 때 저자의 손에 돈은 얼마나 들려보내렵니까?"
"우리 때도 두 냥을 받았으니 두 냥이면 저놈을 자기들 패에 받아줄 것 아니냐?"
"하나, 저건 병신 아닙니까? 두 냥으로 받아 줄런지요?"
"빌어먹을.... 그것도 그렇구나. 할 수 없지. 석 냥을 준비해라."
판덕이를 향해 못마땅한 눈길을 건낸 수구리가 움막을 나서며 가래침을 뱉었다.
"수표 다리 패에 무사히 끼게 되면 이제껏 배운 대로 단 칼에 놈의 목을 찔러야 하느니라. 알았느냐?"
"예? 제가 죽야야할 사람이..... 깍정이?"
"어차피 알아야 할 것이니 가르쳐주겠다. 네가 죽여야 할 놈은 우리에게서 수표 다리를 빼앗은 땅개란 두목 놈이니라. 그러니 기회를 봐서 놈에게 다가가 한 번에 요절을 내란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재빨리 쳐들어 갈 테니까. 알아먹었느냐?"
"가까이나 갈 수 있을지. 허고 내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빌어먹을 놈. 또 지랄일세. 오냐, 이젠 아주 죽고 싶은 게냐?"
"아, 아니요. 할 수 있소. 가까이만 갈 수 있다면 찌르지요. 대신 우리 아들을 꼭 찾아준다는 약조는 지켜야 하오."
"염려 말아라. 우리는 한 번 지킨다면 지키고 마는 성미이니라."
수구리를 선두로 사팔이와 찌게미, 그리고 멍구가 판덕이를 에워싸고 움막을 나섰다. 그때 이제껏 소리가 들리지 않던 옆 움막에서 기침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어라? 저 영감이 있단 걸 생각 못했네?"
수구리가 뒤따르는 졸개들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안 되겠다. 우리가 한 말을 들었을 것이다. 나중에 골치 아파지기 전에 너희들이 가서 입을 막는 것이 이롭겠다. 가거라."
수구리의 한마디에 세 놈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거적을 들치고 영감이 있는 움막으로 들어갔다. 이어 영감이 어어 하는 외마디 소리를 몇 번 내더니 금세 조용해졌다. 잠시 후에 나온 놈들의 손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이거 봐. 판덕이. 봤지? 우리는 한 번 한다면 하고야 마는 성미란 걸? 네놈도 우리를 배신하는 날에는 어디라도 찾아가 저 꼴을 만들 것이다. 아니 네놈의 새끼부터 찾아내 패대기를 칠 것이다. 그러니 네가 맡은 일은 확실하게 해 치우란 말이다. 알았지?"
판덕이는 수구리의 말과 표정에 질려 끽 소리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일행은 강을 거슬러 서빙고에서 성저 십리(城底十里)길로 빠져 화경사(華鏡寺) 밑에 있던 빈집에 닿았다. 빈집 부엌에는 언제 준비를 해 놓았는지 무쇠솥이 걸려 있었다. 게다가 멍구란 놈이 감추었던 쌀을 꺼내와 밥까지 지었다. 판덕이는 언제 먹었는지 기억도 못할 쌀밥을 입에 넣으며 지난여름, 아이를 위해 한 줌의 쌀자루를 뺏으려다 엉치에게 매를 맞던 마누라 생각이 왈칵 밀려와서 눈앞이 흐렸다.
"두령이 방면이 되면 여기로 올 것이다. 그러니 판덕이가 땅개만 해치우면 우리가 곧바로 치고들 것이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졸개들을 두고 왔으니 땅개만 없어지면 놈들은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설 것이야."
일이 반 이상 이루어진 것으로 여긴 수구리가 일행을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다음날 사팔이와 찌게미가 판덕이를 데리고 성 안으로 떠나려 준비 중이었다. 수구리는 판덕이에게 수표교 깍정이들에게 섞이는 요령을 가르치기에 바빴다.
"누가 뭐라 해도 첫째도 둘째도 악바리처럼 굴어야 한단 말이다. 알어? 물렁해뵈면 넌 이미 죽은 목숨이란 말이다. 그렇게 되면 온갖 잡놈의 수발을 하느라 땅개 옆으로 갈 촌각도 없을 테니까. 이를 악물고 참아내란 말이다."
"이제 와 말이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소."
"뭐? 이제 와서 자신이 없다고? 다시 말해 보아라. 자신이 없어?"
또다시 수구리의 사정없는 주먹이 날아들었다.
"이런 빌어먹을 놈. 열흘 적공이 물거품일세. 얼마를 더 가르치고 일러야 할 수 있단 말이냐? 이 빌어먹을 놈아."
"그게, 할 수 있겠다 싶다가도 막상 떠나려니 자신이 없어지니 난들 어쩌오?"
판덕이 입장에서는 솔직한 말이었으나 사실 수구리에게 통할 말은 아니었다. 결국 수구리는 거사를 이틀을 더 미루고 다시 판덕이의 정신무장에 공을 들였다. 그리고 삼일 째인 바로 오늘 미적거리던 판덕이가 드디어 각오를 한 것이다. 아무리 버텨도 하지 않고는 못 배길 살인이라면 아이를 찾기 위해서라도 해야 했던 것이다. 애초에 판덕이를 사팔이와 찌게미가 데려가려던 계획이 모두 함께 가기로 바뀌었다. 수구리는 길을 가면서도 아이를 찾는 문제를 계속 되뇌이며 판덕이에게 용기를 불어 넣었다. 화경사 아래에서 흥인문까지는 겨우 십여 리 길이라 버티고개를 넘어 조금을 더 가자 무당들이 모여사는 신당(神堂)에 닿았다. 수구리는 다섯이나 되는 거지떼가 우르르 몰려다니면 남들이 이상하게 여길세라 시구문이 멀리 보이는 곳에 이르자 물가로 내려섰다.
"여기서부터는 사팔이가 데려가거라. 저기 보이는 시구문에서 흥인문까지는 두 마장 밖에 되지 않는다. 하도감(下都監) 뒷길로 빠지거라. 그 길이 빠르니라."
"판덕이를 데려다주고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시렵니까?"
"이런 미친놈을 봤나? 이 추운 개울에서 네놈 올 때까지 불알을 얼리고 섰으란 말이냐? 허고, 너는 판덕이를 데려다준 다음 부근에 숨어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나를 살펴야 할 것 아니냐? 판덕이가 네게 신호를 하면 즉각 내게로 달려오너라. 우리는 저 무당 년 숯막에 들어가 있을 테니까. 참, 판덕이에게 돈과 비수는 주었느냐?"
"수표다리께에 가서 주려 합니다."
"그래라. 그리고 판덕이 너는 네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결심이 흔들려서는 안된다. 괜스리 엉뚱한 짓을 하면 어찌 될지 네놈이 더 잘 알 테니 말을 않겠다. 자 가거라."
사팔이가 판덕이를 데리고 흥인문을 향했다. 판덕이의 걸음이 느려서 짜증이 났으나 어쨋던 흥인문을 무사히 지났다. 그리고는 첫 다리(初橋)를 건너자말자 왼쪽으로 꺽어 맑은 내(淸溪川)를 따라 수표 다리를 향해 걸었다. 계절이 한겨울이다 보니 한낮이어도 개울을 따라 부는 바람이 매섭게 차가웠다. 사팔이가 입은 옷도 부실했지만 판덕이는 더 부실해서 여름 내내 입고 있던 삼베옷 그대로라 찬바람을 막을 길이 없었다. 게다가 쇠뿔에 받힐 때 찢어진 고의는 시커멓게 말라붙은 핏자국과 함께 허벅지까지 드러나니 거웃이 어른거릴 정도였다. 판덕이는 지난날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추위와 맞서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소작이긴 하나 내 농사를 짓던 양민이요 아내와 자식을 거느린 어엿한 가장이던 자신이 졸지에 이 꼴이 되어 있는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내리 삼 년을 흉황으로 이어진 농사가 원인이요 나락의 길로 떨어진 시초였다. 흉년이 닥치면 토지가 적은 농민은 누구나 유랑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예외가 아니어서 세 식구 모두 유리걸식으로 나섰었다. 나선지 한 달도 되기 전에 아들이 먼저 굶어 죽었다. 아들이 죽자 마누라는 정신이 나가서 산 아이든 죽은 아이든 아이만 보면 달려들어 놓지를 않았다. 그렇게 버려진 아이를 줒어서 안고 다니다 또다시 굶겨 죽인 것도 몇이나 되었다. 그러다 지난봄 축석고개에서 변을 당한 양반 가마에서 마누라는 또 아이를 꺼내 안았다. 욕을 하고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후, 관군에 쫓길 때 아이를 안고 있던 마누라가 여강(麗江) 가에서 맞아 죽었고 그 품에서 아이를 꺼내든 자신은 강을 건너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 후, 죽은 마누라 생각에 아이를 살리려고 고생한 일은 말로 다 할 수없을 지경이었으나 그렇게 함께 지내다 보니 똥오줌도 더럽지 않을 만큼 정이 들었다. 아이만 먹이고 자신은 굶어도 그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배고픔마저 잊었다. 그때 비로서 자신은 세상 천지에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만 아이를 잃은 것이다. 소에게 밟혀 기절했다 깨어나니 이미 아이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찾아야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찾아야 한다. 이번 일만 처리하면 이놈들이 나서 아이를 찾아주기로 했으니 찾는 것은 문제없으리라.
"어? 잠깐, 뭔가 이상하구나."
한발 앞서 걷던 사팔이가 판덕이를 힐끗 돌아보더니 다시 개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수표 다리를 사오십여 보 남겨둔 곳에서였다. 사팔이가 다리 아래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급히 다리께로 다가가는 것이다. 판덕이도 절름거리며 뒤를 쫓았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다리 밑이 휭하게 비어 있었다. 바람을 막으려 둘러쳤던 거적이 한 장도 걸려 있지 않은 것이다. 사흘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움막이었다. 그리고 삼사십 명이나 되는 집단이 머물던 곳이어서 항상 시끌벅적했던 것이다. 게다가 얻어 온 음식을 끓이거나 추위를 피하려고 밤낮 불을 피워서 연기가 끊이질 않던 곳이었다. 그러던 다리 밑이 지금은 찬바람만 몰아치니 별일이었다. 사팔이는 궁금증을 못이겨 결국 강바닥으로 내려갔다. 봄여름에는 비가 조금만 내려도 피난을 가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물이 많지만 한겨울인 지금은 오줌 줄기 같은 물마저 꽁꽁 얼어서 개울 같지도 않았다. 놈들이 떠난 자리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어서 사방에 불을 피운 흔적과 구석진 자리는 모조리 똥무더기로 뒤덮혀 있었다.
"이거 오늘 아침 때 쯤 떠난 모양인데...."
불을 지핀 자리에서 재를 헤치던 사팔이가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없던 사팔이는 판덕이와 함께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누구에게라도 물어보고 싶은 사팔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추운 날이라 행인도 없었다. 그러다 마침 이쪽으로 오는 거지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야, 너. 말 좀 물어보자."
다가오던 아이놈이 사팔이와 판덕이의 몰골을 쓱 훑어보더니 더 이상 오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리고는 여차하면 튀려는 자세로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왜 그러우? 거기서 물어 보우."
"저 다리 밑에 있던 깍정이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
"난들 알겠소만, 아침께 좌포청에서 들이닥쳐 모조리 오간 수문으로 쫓겨났답디다."
"뭐라고? 이제껏 조용하던 좌포청에서 갑자기 왜 그랬더란 말이냐?"
"하, 그러니까 내가 처음에 말했잖소? 다시 말하리까? 난들 알겠소?"
"뭐라? 요 배라먹을 놈이 어른을 갖고 노는구나."
사팔이가 와락 놈에게 달려드는 시늉을 하니 그런 낌새를 미리 알고 있던 아이놈이 냉큼 뒤돌아서 달음박질을 놓았다. 그러다 멀지 않은 곳에서 홱 뒤돌아섰다.
"꼴을 보니 너도 거지면서 어른이 돼서도 빌어 쳐먹는 것이 무슨 자랑이냐? 그 게 자랑이면 네 손자 대까지 대대로 빌어 쳐먹으려므나."
"뭐라고? 내 저놈을.…"
따라가 봤자 아이놈을 붙들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사팔이가 발을 굴러 쫓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거지 아이는 번개보다 빨리 저만치 도망을 하더니 사팔이를 향해 혀를 날름 내밀며 팔뚝 엿을 먹이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흥인문을 괜히 들어섰잖어? 그냥 오간수 구멍으로 들어가고 말 것을.... 니에미, 날 추운데 이게 무슨 고생인가 말이야."
사팔이는 몸을 부르르 떨며 애꿎은 판덕이에게 눈을 흘겼다. 그러나 지금의 판덕이는 꼭 맞아야 할 매를 미룬 것처럼 마음이 가볍지 못했다. 차라리 죽던 살던 어서 결판이 나서 혼자라도 아이를 찾아 훌훌 떠났으면 하는 마음뿐인 것이다.
"거, 묘할세라. 수표 다리 밑에 깍정이 패가 모여든 것이 수십 년도 더 될 것인데 이제 와 못 있게 하다니? 그것도 한겨울에?"
사팔이가 이상히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다리가 생긴 이래 거의 이백여 년 동안 거지들의 소굴이 아닌 적이 없던 곳이 바로 수표 다리 밑이었다. 도성 안에 거지들을 들이지 않는다면 모를까 집 없는 거지들이 갈 곳이 어디이겠는가? 거적 몇 장으로 수십 명의 잠자리가 쉽게 해결되는 곳은 다리 밑 밖에 없는 것이다. 수표 다리는 한양의 중심에 있어 빌어먹기 좋은 데다 그 크기도 만만치 않아서 길이가 구십여 척이요 넓이가 스물다섯 척이라 깍정이 패들에겐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서른이 넘는 깍정이들이 매일 걷어오는 물건만도 수월치 않았다. 그것들을 팔아 돈으로 바꾸니 짭짤하기가 웬만한 객주보다 나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두목 땅개는 대감댁 청지기가 부럽지 않을 만큼 호사를 누리며 살았다. 그러나 그 호시절도 불과 대여섯 달로 끝이나 버렸다. 바로 오늘 아침에 성질 고약한 양반을 만난 것이다. 발단은 연기였다. 한겨울이라 워낙 춥다 보니 밤새 떠느라 잠을 설친 깍정이들이 아침부터 군데군데 불을 지펴 몸들을 녹이고 있었다. 그러나 장작은 없고 끽해야 물에 떠내려 온 나뭇가지에 주워 온 삭정이라 애초에 잉걸불이 될 수없는 것들뿐이어서 연기가 심하게 났다. 연기는 다리를 그슬리듯 하늘로 솟아올랐다. 하필 그때 사인교가 다리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사인교를 탄 사람은 다름 아닌 보사공신(保社功臣)이요 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인 김득주로 시임 이조판서였다. 그는 등청을 하기에 앞서 향골에 임시로 거처하는 우암(尤菴)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거제에 귀양가 있던 송시열이 환국으로 돌아와 지금은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로 있어 지난 시월에 승하한 인경왕후의 장례 문제를 의론 하기 위함이었다. 인경 왕후는 금상의 중전으로 이십 세의 꽃다운 나이에 마마로 승하하였으나 아직 장례를 거행하지 않아 지금도 상(喪) 중이었다. 사인교에 앉은 김득주는 다리 밑에서 피워 오르는 연기로 인해 눈물이 쏟아져 눈을 뜨지 못했다. 이때 만약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흡사 인경왕후의 죽음을 애도하는 충신으로 보였을 것이나 곧이어 재채기와 콧물까지 쏟는 것을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이날 아침, 김득주는 노기가 탱천했다. 사대문 안에서 이렇듯 다리를 그슬려 자신의 행차를 방해하는 무리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돌아라, 우측으로 돌란 말이다. 좌포청으로 가자."
다리를 건너 운종가로 나서자 내쳐 향골로 직진하려는 교군을 다그쳐 활 한바탕 거리에 있는 파자교(把子橋)로 향했다. 좌포청은 파자교 앞 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침 좌포장 김성주가 일찍 집무실에 나와 있었다. 그는 한성 부윤으로 있다가 얼마 전 김득주의 천거로 좌포장에 오른 인물로 같은 서인이요 먼 인척 형 뻘이였다.
"아이고, 이거 이판께서 손수 이곳까지 찾아주시다니 이야말로 광영이로소이다."
나이는 다섯 살 위나 종 이품인 김성주가 정 이품의 품계에 밀려 동생 뻘인 김득주를 공대(恭待)로 맞았다. 김성주는 기별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김득주가 무슨 일로 온 것인가 하고 눈치를 살폈다. 워낙 기묘에 능한 사람이라 무슨 일 때문인지 불안했던 것이다.
"그런 소리 듣자고 온 것이 아니오이다. 우암을 만나러 향골로 가던 길을 고쳐 이리로 들린 것이지요. 헌데 대장의 관할 안에 있는 저 수표교 깍정이 놈들을 어찌 생각하시오?"
"예? 어찌 생각하다니요? 대감 행차하시는 길에 혹여 그놈들이 행패라도.....?"
"암, 행패다마다요. 국상으로 온 조정이 근신하는 이 마당에 대궐이 멀지 않은 도성 한복판에서 불을 싸지르는 그놈들이 행패가 아니면 무엇이오이까? 그런 놈들을 여태 그냥 두다니 대장은 눈도 코도 없소이까? 눈이 있으면 보았을 것이요, 코가 있다면 냄새라도 맡았을 터, 그러다 혹여 전하께서 그 연기를 보옵시면 어쩔 겁니까? 포도 대장은 목이 여러 벌이오이까? 내 방금 그 위로 건너다보니 다리가 다 그을리게 생겼습디다. 이놈들이 코앞에 있는 좌포청을 이렇듯 무시하는 것을 보면 평소에도 포도청 알기를 우습게 여기기 때문은 아닐런지요?"
김득주의 출현에 막연한 불안감에 젖었던 김성주였다. 한데 김득주가 온 목적이 그깟 깍정이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자 안도의 한숨과 함께 큰소리마저 나왔다.
"아이고 그런 일이 있으셨사오니까? 그런 일이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군졸을 풀어 매를 안겨 도성 밖으로 쫓고 말겠사오니 심려 마소서."
"그러시다면 이렇게 하시지요. 소문에 듣자 하니 근자에 오간 수문에 문둥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백주에도 백성들이 기겁을 한다니 마침 잘 되지 않았소이까? 수표교 깍정이들을 그리로 몰아 그들로 하여금 문둥이들을 도성 밖으로 멀리 쫓아내고 그곳을 그놈들의 근거지로 삼도록 하면 어떻겠소이까?"
"아하, 역시 지낭(智囊)이란 별호가 그냥 생긴 것이 아닌가 하오이다. 그야말로 일석이조요 화살 한 대로 두 마리 새를 꿰는 격이구려. 허허."
김성주는 즉시 종사관 이철우를 불러 놈들을 오간 수문으로 내치라 일렀다. 명을 받은 이철우는 포교들을 시켜 군졸을 모아 즉각 수표 다리로 출동했다. 다리께로 우르르 몰려간 포졸들은 육모 방망이와 거꾸로 잡은 창대로 불문곡직 깍정이들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지며 이리저리 쫓겨 달아나는 깍정이들 머리 위로 다리 난간에 발을 걸친 포교가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오간 수문으로 가거라. 다른 곳으로 도망치는 놈은 박이 터질 것이다. 빨리 가지 않고 밍그적대는 놈도 가만두지 않겠다. 오간 수문이 너희들 자리니라. 거기서 살란 말이다."
깍정이들은 포졸에 쫓겨 달아나는 와중에도 악착같이 바가지를 챙기고 거적을 말아 등에 매었다. 서른 명이 넘는 거지 떼와 고함을 지르며 그 뒤를 쫓는 수많은 포졸과 포교는 그날 아침 천변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구경거리였다. 그렇게 오간 수문으로 밀려난 깍정이들이 그곳을 점령하기 위해 다시 한번 문둥이들과 석전을 벌려야 했다. 쌍방에서 날린 돌들이 핑핑 공중을 날아다녔다. 그러다 결국 숫자에 밀리고 자유롭지 못한 신체 조건에 밀린 문둥이들이 깨지고 터진 몸뚱이를 이끌고 수문 구멍을 통해 성 밖으로 쫓겨 달아났다. 하나, 엄동설한 찬바람 부는 허허벌판에서 갈 곳이라고는 가까운 시구문(屍口門) 밖에 없었다. 다들 바가지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쫓겼건만 다행히 그 와중에도 돌팔매에 머리가 깨질세라 솥단지를 뒤집어 쓴 문둥이가 있었다. 그거면 죽은 끓일 수 있을 터이니 패배한 문둥이들에겐 그나마 불행 중 다행한 일이었다. 어쨌든 십여 명의 죽지도 살지도 못한 문둥이들이 피를 흘리며 시구문으로 향했다. 헌데, 애써 당도한 시구문에도 이미 임자가 있었다. 이간수문(二間水門) 가운데 한 곳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문둥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한동안 쑥덕이며 의논을 했다. 혹시 성질 더러운 또 다른 깍정이들이라면 미리 포기를 하고 다른 곳을 찾아야 할 것이었다. 우선 수문을 먼저 차지한 사람들이 어떤 부류인지 알아보아야 했다. 개중에 늙은 문둥이가 솔선해 수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말씀 묻겠습니다. 수문을 선점하신 분들은 뉘시오?"
묻는 말에 한동안 아무런 대답이 없더니 어둠 속에서 웬 아이가 불쑥 나타났다. 하나, 얼핏 보아 키가 작고 수염이 없어 아이로 보였을 뿐 분명 아이는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생김생김이 볼수록 괴이하고 소름이 끼쳤다. 난쟁이를 겨우 면한 왜소한 몸뚱이에 머리는 흡사 털 빠진 낡은 쇠가죽을 뒤집어쓴 것 같이 머리털이 없었다. 야윈 잿빛 얼굴엔 수염 대신 짧은 몇 가닥의 털만 삐죽 삐죽 솟은 데다 눈썹 없는 눈두덩 밑에는 상대의 심장을 찌르듯 날카롭운 눈빛이 반들거렸다. 코는 낮고, 듬성한 이가 밖으로 삐져나와 얇은 입술을 물고 있어 더욱 기괴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주름이 가득한 그의 얼굴은 나이가 적지 않음을 말하고 있었다. 다가갔던 문둥이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문둥이를 무섭게 만들 정도로 섬뜩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키키, 뉘를 찾으시는가?"
웃는지 우는지 모를 주름 투성이의 얼굴이 수문 밑의 문둥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우리들은 오간 수문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문둥이들이웨다. 염치없는 부탁이나 선점한 분이 허락만 하신다면 다음 거처를 마련할 동안만이라도 구석 자리나마 빌렸으면 하오. 일행 중에 깍정이들이 던진 돌에 맞아 다친 이가 태반이요."
"흐흣, 보아하니 나귀(癩鬼) 들이로군. 하지만 나귀치고는 예(禮)를 아는 자로군. 좋네. 이럴 때는 서로 도와야지. 바닥에 물이 흐르지 않으니 한 간을 쓰시게."
괴상하게 생긴 조그만 사내가 다시 수문 안으로 들어가자 문둥이는 일행에게 오라는 손짓을 했다. 지척지척 몰려든 문둥이들이 하나둘 수문 안으로 들어섰다. 수문 안은 괴상한 사내가 피워 둔 불이 있어 그 빛으로 모두 쉽게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불빛이 비치는 곳에는 괴상한 사내 말고도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불 위에 작은 옹기솥을 올리고 입으로 바람을 불어 불길을 키우고 있었다. 잠시 후 어디선가 닭을 삶는 구수한 냄새가 수문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코를 벌름거리던 열 명의 문둥이들이 추위도 아픔도 잊고 일제히 냄새의 진원지인 불빛에 눈알을 고정했다. 밥 냄새만 맡아도 환장할 판국에 고기 냄새라니? 냄새만 일지언정 얼마 만에 맡아보는 고기 냄새인가? 문둥이들은 선망과 호기심을 넘어 살기 띈 눈빛으로 솥단지를 바라보며 두 사람에게 눈길을 꽂았다. 개중에 나이가 적은 문둥이 하나가 자신도 모르게 냄새를 따라 불 곁으로 다가갔다.
"하, 그거 무슨 고기요?"
문둥이가 묻는 말에 불 곁의 사내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대신 괴상하게 생긴 사내가 불빛에 매서운 눈빛을 반짝이며 이빨을 들어냈다.
"무슨 고기면 네가 어쩌겠다는 게냐? 우리가 닭이라도 삶는 줄 알고 껄떡이는 모양이로구나. 하나, 너희들 것은 없다. 이것은 이틀을 굶은 우리가 먼저 먹어야겠단 말이다. 정 먹고 싶으면 기다리거라. 먹겠다면 두어 마리 주마."
조그만 사내의 낮게 이르는 마지막 말에 눈이 번쩍 뜨인 문둥이가 재빨리 자기 패에 돌아가 방금 들은 말을 알렸다. 그러자 처음의 늙은 문둥이가 불앞으로 주춤주춤 다가왔다.
"굶어 죽어도 염치는 있어야 사람이거늘 사람이 아닌 문둥이들이라 저 꼴들 올시다. 저희들은 걱정 마시고 두 분이나 어서 드시지요."
"키킥, 우리라고 별로 나을 것도 없는 사람들이오. 허고 우리가 삶는 것은 닭이 아니라 뱀이요. 이것이 우리들 양식이란 말이요."
"아니? 한 겨울에 뱀을 어떻게?"
작은 사내의 말에 늙은 문둥이가 깜짝 놀란 듯했으나 그 표정을 보고는 알 수가 없었다. 이미 병이 깊어 코는 떨어져 나가고 눈꺼풀은 짓물러 한 쪽 눈은 감긴 것이다.
"키키키, 겨울이라고 뱀이 없겠소? 눈 뱀(雪蛇)이 아니래도 땅만 파면 나오게 되어있지."
냄새에 이끌려 늙은 문둥이 뒤로 슬금슬금 몰려들었던 다른 문둥이들이 뱀이란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침을 삼키며 번질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모여든 문둥이를 휘둘러 본 작은 사내가 바닥에 두었던 자루를 집어 들었다.
"끓일 솥은 있소?"
작은 사내가 늙은 문둥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그 뒤에 있던 자가 재빨리 늙은 문둥이의 대답을 가로챘다.
"있소. 솥이 있소."
"그렇다면 솥에다 물을 길어 오게나. 나무를 줒어오면 불씨도 주지."
갑자기 문둥이들의 행동이 빨라졌다. 돌팔매에 맞아 다친 상처 따위는 고기 냄새를 맡는 동시에 다 나은 듯했다. 초상집 같던 문둥이 동리가 순식간에 잔칫집으로 변한 것이다.
"다 된 것 같습니다. 형님."
이제껏 한 마디도 하지 않던 불가의 사내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불빛에 비친 사내는 놀랍게도 얼굴의 반 쪽이 불에 탄 듯 형체가 없었다. 그리고 눈도 귀도 없는 그 우둘두둘하고 번질번질한 피부는 너무나 끔찍해서 오히려 작은 사내보다 더 흉측한 모습이었다. 그는 코를 중심으로 오른 편은 눈도 귀도 형체가 없었고 심지어 입술의 반도 없어서 송곳니와 어금니가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멀쩡한 왼쪽만 본다면 나무랄 데 없는 미남자였다. 짙은 눈썹과 깊은 눈매, 그리고 알맞게 풍성한 구렛나루가 턱을 따라 내려와 턱수염과 어우러진 모습은 근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면에서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한마디로 괴물에 가까웠다. 한 쪽 얼굴이 아무리 멋지다 해도 한 쪽이 괴상하니 도통 어울리지 않는 그림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호랑이 머리 반 쪽과 불에 그슬린 개대가리 반 쪽을 붙여놓은 것 같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리라.
"그래, 나도 먹을 테니 자네도 어서 먹게나. 키키, 언제 맡아도 이 냄새만큼은 닭고기로 오해를 받을만 하이."
"허, 그러게나 말입니다. 어쨌든 우리에겐 요긴한 놈들이지요."
"그런 셈이지. 허니 먹고 힘을 내게. 이제 한양 땅을 밟았으니 내일부터는 내가 자네 본댁의 사정을 자세히 알아볼 테니까."
"괜스레 제가 고집을 부려서 형님이 하시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시니 죄만합니다."
"죄만이라니? 당치 않네.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이승에 남은 식구가 걱정되는 법 이어늘 산 사람이 어찌 식솔들의 안부가 궁금치 않겠는가? 허니 자네가 한양을 못 잊어하는 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이 게 다 제 쓸데없는 욕심 때문이겠지요. 어차피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면 과감히 잊어버려야 하는 것을.... 제 아집이 놓아주질 않으니 말입니다."
"이해하네. 나 역시 처음 얼마 동안은 미치도록 어미가 보고 싶었지. 그래서 어느 날은 밤을 새워 양화진까지 달려간 적도 있었다네."
"그러고 보면 형님께서도 그동안 숱한 마음고생을 하신 거군요."
"그래도 마음고생을 할 때가 좋은 때였을지도 모르네. 마음을 정리하고 나면 살아야 할 의미까지 없어지니까 말일세. 그런 면에서는 내가 자네에게 고맙게 여긴다네."
"원, 형님도, 제 목숨을 살려주신 것만도 어딘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닐세. 흙이나 돌처럼 무의미하게 남은 여생을 보내려 든 내게 자네가 나타난 것은 신령의 조화일세. 내게 새로운 눈을 뜨게 했으니 말일세."
"그리 말씀하시니 더욱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아, 국이 식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그러세. 자네도 얼른 먹게."
"예, 그러지요."
두 사람은 뜨거운 뱀탕을 각자 쪽박에 퍼 담아 먹기 시작했다. 잠시 후였다. 작은 사내가 바가지를 내려놓으며 화상 입은 사내에게 눈길을 돌렸다.
"여보게 아준이."
"예, 형님."
"식솔의 안부를 알더라도 절대 자네의 존재를 알리지 않기로 한 것 말일세. 노파심에서 다시 말하지만 자네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유혹을 누르게나. 이제 와 새삼 알려야 서로가 부질없는 일일세. 이미 식솔들은 마음이 정리가 되었을 터이고 나라에서도 종결된 사건일세. 자네가 새삼 나타난들 좋을 결말이 없을 것이야. 허고, 어차피 자네 동생이 남은 식솔들을 보살피고 있을 것 아닌가 말이야."
"염려 마십시오. 저 역시도 제가 죽은 걸로 치고 있습니다."
"나병에 걸린 저들을 보게나. 저들도 병이 걸리는 순간 식솔과 헤어져야 했을 것 아닌가? 병은 반상을 가리지 않으니 저들 가운데 양반인들 없겠는가? 그들이라고 왜 식솔들에게로 돌아가고 싶지 않겠는가? 하나, 나병에 걸린다는 것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니..... 자네나 나나, 또, 저들이나 다들 죽은 목숨들일세. 아.... 사람 사는 것이 어째 다 이 모양들인가?"
작은 사내는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내쉬었고 아준(雅峻)이라 불린 사내는 바가지를 든 채 묵묵히 불빛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흐르는 사이였다.
"불씨를 좀 얻겠습니다."
늙은 문둥이가 불씨를 빌리려 다가왔다. 작은 사내가 불붙은 막대기를 내밀자 늙은 문둥이가 재빨리 받아서 저희들 패로 돌아갔다. 이어서 땔감을 주으러 갔던 패와 물을 길러 갔던 문둥이들이 손에 손에 나무토막과 얼음덩어리들을 들고 와 솥에다 넣는 눈치였다. 그것을 본 작은 사내는 자루에서 삼실을 두어 올 뽑아서 올가미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자루를 열어 살모사 한 마리를 꺼내 올가미를 씌웠다. 이어 또 한 마리를 옭아매더니 모두 막대기 끝에 매달았다. 뱀은 날씨가 차거워서인지 구불거림이 느리고 빠르지 못했다.
"옜다. 누가 와서 가져 가거라. 두 마리면 한 사발 씩 돌아가고도 남을 게다. 허고 이 바가지도 가져가 너희들이 쓰거라. 우리는 다시 구해서 쓸 테니까."
작은 사내는 뱀 막대기와 바가지를 땅에다 내려놓더니 다시 불 쪽으로 돌아앉았다. 작은 사내가 보았을 때 마침 아준이란 사내는 멀쩡한 쪽의 얼굴만 보였는데 그 눈에서 눈물이 맺혀 불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작은 사내는 얼른 외면해 눈길을 불에다 두었다.
"형님."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아준이란 사내의 무거운 음성이 들렸다.
"내일 날이 밝으면 이대로 돌아가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형님 말씀이 옳습니다. 이제 와 식솔의 안부를 알고자 한 제가 바보지요. 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말씀이 옳습니다…."
".........."
"애초에 형님 말씀을 들어야 했건만..... 제 고집으로 예까지 따라오신 형님께 다시 한번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너그러이 봐 주십시오."
"아닐세. 식솔들의 안부를 알고자하는 자네의 심정은 극히 정상일세. 다만 아직 김득주가 세력을 떨치는 이 마당에 자네의 존재로 인해 남은 식솔들이 다칠 우려가 있다는 것이지. 더구나 자네의 그 모습은 세상이나 식솔이 알아서 이로움이 없는 것만은 확실하네. 그럴 바엔 죽은 듯 잊어버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한 말일세. 허나, 이왕 한양까지 왔으니 식솔들의 안부는 몰래 알아보세. 보아하니, 안다고 달라질 자네가 아니지 않나. 내일 내가 갔다 올 터이니 그 후에 떠나세."
아준이란 사내는 바로 송윤호의 형인 송수호였다. 송수호는 역모 사건을 밝히려 염초도회소에 있는 김경준을 만나러 갔다가 관군의 습격으로 피아 간이 모조리 폭사할 때 기적처럼 살아난 인물이었다. 당시 골짜기 전체가 날아가다시피한 폭발 현장에서 송수호가 깨어났을 때는 세상이 온통 아득한 꿈결같이 보일 뿐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어렴풋이 흰 눈이 쌓인 위에 연기가 피워 오르는 것을 본 것 같으나 여기가 어디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도 판단이 되지 않았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정신을 차리려 해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무의식중에도 손이 눈으로 향했다. 그 순간 얼굴 한 쪽이 화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곧이어 극심한 고통이 몰려오자 송수호는 어쩔 줄 몰라 눈밭에 뒹굴었다. 그럼에도 고통은 더욱 심해져서 일순간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길길이 날뛰었다. 송수호는 허둥거리며 방향도 모른 채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고통이 심해질수록 제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흰 눈이 세상을 덮어 어차피 없어진 길이어서 길인지 아닌지 생각할 여유도 필요도 없었다. 그저 넘어지고 눈 구덩이에 빠지면서 허둥지둥 뛰고 걸으며 어디론가 헤맬 뿐인 것이다. 얼마나 헤맸을까? 송수호가 기진맥진하여 촌보도 옮기기 어려운 지경이 되어서야 고통도 약간 줄어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불타는 고통을 이기려 계속 눈으로 얼굴을 감싸서 상처가 얼어 감각이 줄었기 때문이었다. 그때가 하루의 어느 때인지도 몰랐다. 더 이상 움직일 힘도 정신도 없어서 우두커니 먼 산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눈은 이미 그친지 오래여서 찬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때까지 송수호의 정신은 제자리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어느 쪽인지 모르나 귓속에서 끊임없이 무슨 소리가 울리고 눈앞은 촛점이 맞지 않아 사물이 뿌옇게 보였다. 그런 가운데 멀지 않은 곳에서 피워 오르는 한줄기 연기를 보았다. 그 연기를 본 순간 송수호는 본능적으로 구원의 손길이 필요함을 느꼈다. 죽을힘을 다해 연기만 바라보고 휘청거리는 발길을 옮겼다. 멀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엄청나게 먼 그곳에 도착하고 보니 대여섯 채의 움막이 눈에 띄었다. 송수호는 걷고 기어서 간신히 움막에 닿았다 그러나 말할 기운마저 없었다. 송수호는 눈밭에 무릎을 꺾고 앉았다. 그러다 앞으로 풀썩 무너져버렸다. 송수호가 정신이 든 것은 이튿날이나 본인은 알지 못했다. 전날 움막 밖으로 오줌을 싸러 나왔던 젊은 놈에게 발견된 송수호였다. 그런 그를 움막으로 끌어들여 가료한 사람이 바로 석기라는 괴물처럼 생긴 작은 사내였다. 괴물 사내는 송수호를 위해 온갖 약재를 구해 치료를 해주었다. 며칠 후 제정신으로 돌아온 송수호가 그동안에 있었던 사태를 곰곰히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그리고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알자 곧바로 작은 사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나타냈다.
"뉘신지 모르나 살려주신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런지 모르겠습니다."
"키키, 인사치레를 받자고 한 일이 아니니 그런 말 마시오. 사내대장부가 일을 함에 있어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는 것 아니겠소?"
"예?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누구인지 아신다는 말씀인지요?"
"당신이 뉜지는 모르나 닷새 전 산 넘어 선바우 골에서 폭음이 나는 소리는 들었소. 그때가 아침이었고 당신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 거의 저녁때니 서로 연관이 있음은 삼척동자도 알쪼 아니겠소. 해서 다음 날 발 빠른 놈을 보내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알아보았소. 산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합디다. 아마 당신이 산 것은 못 보았을 테니까... 키키."
"그래도 제가 그 일과 관계가 있다는 추측은 지나친 것 같습니다만...."
"그깟 것을 왜 모른단 말이요? 그대가 상민이 아닌 것은 망건 자국만 보아도 알겠고 찢어지고 낡았으되 입고 있는 옥색 도포만으로도 그대의 신분은 대강 짐작할 수 있지. 더구나 이런 걸 몸에 지니면 자신이 누구라고 떠벌리는 것이 아니요? 신분이 이런 자가 편한 한양 땅을 두고 여길 내려왔을 때야 그만한 일이 있기에 내려왔을 터. 무슨 긴 말이 필요하겠소?"
털 빠진 잔나비 같은 사내가 쥐고 있는 것은 송수호가 허리에 늘상 차고 있던 사헌부의 패찰이었다. 사내는 그 패찰을 송수호 앞에 던져 놓았다. 송수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후 두어 달은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고통과 싸워야 했다. 처음엔 귀가 반 이상 떨어지고 불에 익은 오른쪽 눈알이 쏟아지더니 입술과 볼에 붙은 살도 뭉그러져 버렸다. 더구나 상처가 나을수록 피부가 땅기는 고통은 말로 다 형용하기 어려웠다. 반 년쯤 후 송수호가 다 나았을 때는 지금과 같은 반 쪽 괴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털 빠진 키 작은 괴물과 반 쪽 괴물이 만나 짝패를 이룬 꼴이었다. 송수호는 한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박일주를 비롯한 덕출이와 곽정일을 잃은 데다 김경준과 수많은 군사들이 모조리 죽었는데 조정이나 사헌부에 가서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김득주가 있어 자신도 이미 죽은 것으로 해야 할 판에 더구나 이 꼴로 어디를 나선단 말인가? 송수호는 일대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죽은 사람이라 치부하기로 했다. 송수호가 본격적으로 키 작은 사내를 따라 산과 들을 쏘다니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였다. 작은 사내의 이름은 석기였고 땅꾼들의 대장이었다. 그의 밑에는 십여 명의 땅꾼이 함께 했는데 석기의 말이라면 죽음도 불사할 사람들이었다. 송수호가 처음 뱀을 만졌을 때는 끔찍한 느낌이 들었으나 몇 번 잡고 만지고 하는 사이 금세 이력이 나서 여름이 끝날 무렵엔 그도 한 사람 땅꾼 몫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가을을 지나 겨울의 문턱에 이르자 뱀 잡이도 끝이어서 한 곳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새로운 움막을 짓고 약초를 캐거나 월동하는 뱀굴을 찾는 일들을 하게 되었다. 송수호는 그동안 봄, 여름 가을 세 계절을 땅꾼인 석기와 지낸 것이다. 석기는 송수호에게 뱀을 잡는 방법과 물리지 않고 다루는 법 등을 쉼 없이 가르쳐주었지만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법이 없었다. 하나, 송수호가 그동안 겪어 본 바로는 그는 절대 천민이 아닌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송수호에게 무언중 쓰는 말씨만 들어 보아도 규범 있는 반가의 말이었던 것이다. 송수호는 그런 석기에게 몇 번인가 은연중 시험을 한 적이 있었다. 문자를 섞어 말을 걸어 본 것이다. 그러자 그 말 뜻에 맞는 문자 섞인 대답을 함으로써 송수호는 그가 상민이 아님을 확실히 알았다. 그러든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따라 잠이 오지 않아 전전 반측(輾轉反側)하는 송수호의 귀에 문득 석기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내 그동안 그대를 유심히 봐 왔었소.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으면 집으로 돌아가시오. 식솔들을 이끌고 낙향을 한다면 지금 같은 번뇌는 없을 것이오. 물론 남은 인생은 청맹과니의 삶을 살 테지만 처 자식은 챙길 수 있으리다. 허나, 돌아갈 수 없다고 판단이 되었으면 자신도 그날 함께 폭사한 걸로 하고 미련을 떨치시오. 다들 죽었다지 않소? 그것이 그날 죽은 사람들에 대한 작은 예일 것이오. 이렇게 쉽게 말하는 나도 실은 당신처럼 수 년을 마음고생으로 보냈소. 그래서 그대의 마음을 조금은 안다고 믿소. 어차피 나도 잠이 오지 않으니 내 지난날 얘기를 하리다."
석기는 무인(戊寅) 년 생으로 역관 장경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위로는 두 형이 있었으나 장남이던 형기는 일찍 요절했고 세 살 위인 철기가 실제적인 장남 역할을 했다. 장석기의 문중은 역관이 많이 배출되기로 이름이 높아서 조선 제일의 부자인 장현이 그의 당숙일 정도였다. 장현의 사촌인 장경 역시 청국을 오가며 모은 재산이 누만금이라 그의 아들인 석기는 금이야 옥이야 곱게 자랐다. 다섯 살에 천자문을 줄줄 외운다 하여 집안의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서당을 다니다 독선생을 두고부터는 학문에도 열성을 보여 칭찬이 자자했다. 물론 역관이 되기 위한 공부인지라 청국어도 부지런히 익혔다. 열다섯이 되자 그의 부모는 같은 역관인 변승우의 작은 딸과 혼약을 맺기로 했다. 아비를 따라 인사차 예비 처가에 간 석기는 먼 빛으로 장래의 아내감을 얼핏 보기까지 했었다. 석기는 형인 철기보다 부모의 믿음과 사랑을 훨씬 더 받고 있었다. 외모뿐 아니라 부모를 대하는 석기의 마음 씀이 형인 철기보다 나았기 때문이었다. 그 눈치를 챈 형이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할 무렵인 열여섯 살이 되던 해 봄에 장질부사에 걸려 버렸다. 진맥을 위해 내방했던 의원이 석기의 병증를 묻다가 이핑개 저핑개를 대며 도망을 가더니 오는 의원마다 도망을 가거나 지어보내는 약은 엉터리뿐이라 먹어도 낫지 않았다. 병이 옮는다 하여 아무도 곁에 오지 않자 그의 어미가 손수 병수발을 했다. 죽느니 사느니 두어 달이 지나자 머리털을 비롯한 몸의 모든 털이 빠져서 보기에 흉했으나 다행히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또 다른 괴질이 찾아들어 온몸에 콩알 같은 물집이 잡히더니 곪기 시작했다. 의원은 아예 얼씬도 않아서 약 한 첩 제대로 쓰지를 못했다. 아비의 판단으로도 틀렸다고 느껴서 어쩔 수 없이 석기를 외딴곳으로 피접 시키기로 작정이 되었다. 형인 철기는 석기가 피접할 곳을 알아 본 후 제 아비에게 알렸다. 그렇게 해서 가마에 실려 간 곳이 과천 청계산 석암사였다. 석암사에는 충분한 시주를 한 상태여서 외딴 승방에 있는 석기를 잘 돌보아주었다. 석암사에 온지 반 년이 넘은 어느 날 몸이 좀 나은 것 같아 개울로 나갔다가 고인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석기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뒤에 있는 어떤 괴물이 물에 비친 것으로 생각한 때문이다. 그러다 그것이 자신의 모습임을 안 순간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제법 훤칠하다는 말을 듣던 자신은 어디로 가고 낯선 괴물이 물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팔도 다리도 가늘어졌고 무릎도 다 펴지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얼굴이 제일 많이 변한 것 같았다. 몇 올 남지 않은 머리카락은 고사하고 얼굴은 주름이 주글주글해서 천벌을 받은 마귀가 이 꼴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천벌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는지 날이 가면 갈수록 더 쪼그라들고 더 작아지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어느 날 용기를 낸 석기가 동이에 담긴 물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예상보다 더 흉측한 작은 괴물이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석기는 절망에 울부짖지 않았다. 물동이도 깨지 않았고 세상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조용히 방에 들어가 한 벌 의복을 찢어 밧줄을 꼬았다. 그리고 뒷산으로 가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헌데 그곳에는 형인 철기가 와 있었다. 동생을 본 철기는 화들짝 놀라 몇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러더니 검지를 뻗어 석기를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괴물아, 다시는 집에 올 생각은 말아라. 네놈으로 인해 우리 장 씨 가문이 무너질까 무섭다. 죽어라. 제발 죽어. 아버님도 진작 너를 포기하셨느니라. 어머님도 네놈을 보신다면 금세 졸도를 하시거나 세상을 뜨실 것이야. 나는 오래전부터 너를 동생으로 생각치 않았다. 네가 스스로 강물에 뛰어들었다고 할 테니 제발 죽어다오. 만약 집 부근에라도 나타나면 종들을 시켜 단매에 때려죽일 것이야. 알았느냐? 내 말 명심해 들었길 바란다."
그 후 석기는 소리 없이 절을 떠나 스스로 땅꾼의 무리에 섞여서 세월을 보냈다. 세월은 유수와 같아서 그것이 벌써 27년 전의 일이었다. 땅꾼 석기의 얘기가 끝났다.
"아까 장철기라 하셨습니까?"
어둠 속에서 송수호가 물었다.
"그랬소. 철기가 내 형이요."
"세상이 좁군요. 대장의 당숙이 장현이요, 철기가 형이라니 말입니다. 그 후에 그들의 소식은 알고 있는지요?"
"없소, 처음 몇 년 간은 풍문에 귀를 기울였소만 언젠가부터 다 나와 상관없는 일입디다 그려. 다만 어머님을 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해 도성 가까이 간 적은 있소이다."
"그러시군요. 장철기는 역관이 되지 않고 나루마다 객주와 여각을 내어 세력가들의 자모전가(子母錢家) 노릇도 하였지요. 그렇게 모은 돈으로 땅을 장만해 재작년에 낙향했다는 풍문을 들은 바 있습니다. 허고 예나 지금이나 세도와 부가 절정에 달한 장현은 내가 뒤를 캐던 자이니 이게 우연이겠습니까? 참으로 기묘한 만남 같군요."
그날 밤 송수호는 그간의 얘기를 다 꺼내었고 작은 사내 또한 모든 흉금을 털어놓았다. 밤새도록 나눈 얘기 끝에 서로의 모든 것을 안 두 사람은 기가 막힌 우연을 인연 삼아 의형제를 맺어 끝까지 함께 하기로 했다. 송수호는 갓 마흔이요 작은 사내는 그보다 세 살이 많아 형이 되었다.
"형님께서 정히 그래주시곘다면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어머님의 안부만 알았으면 합니다. 제가 잘못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것을 생각하면...."
송수호는 끝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알았네. 그것만이라도 알아 오겠네."
그 사이에 문둥이들은 불을 피우랴 물을 끓이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 뒤에 또다시 닭을 삶는 냄새가 수문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시간 오간 수문 앞에 판덕이가 나타나 거적 앞을 얼쩡거리고 있었다. 이미 오정이 가까운 때라 깍정이들은 어느새 그럴듯하게 거처를 꾸며 놓았다. 문둥이들을 쫓아내자말자 있는 기둥을 이용해 얼기설기 거적을 치고 바닥을 골라 짚을 깐 다음 가운데에다 불까지 피워 놓아 밖으로 연기가 솔솔 새어 나오던 것이다. 판덕이가 거적을 들칠 용기가 나지 않아서 이럴까 저럴까 망서리는데 안에서 사나운 음성이 밖으로 새어 나왔다.
"이런 염병을 앓을 놈들을 보았나? 그런 일이 있으면 재빨리 내게 달려왔어야지. 겨우 이리로 쫓겨 와서 그나마 이제사 알린단 말이냐?"
"병장기를 든 수십 명의 포졸들이 갑자기 나타나 설랑 다리를 에워싸고 토끼몰이하듯 우릴 이곳으로 모는데야 언제 두령에게 알리고말고 할 틈이나 있어얍죠? 무작정 쫓기면서 생각하니 어차피 무당촌은 이곳과 가까운 곳인지라 두령님께 알리기 위해서라도 이리로 쫓겨와야했습지요. 네."
화가 난 두목 땅개의 말에 조장 격인 촉새가 나서 변명을 늘어놓았다. 땅개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듣고 보니 촉새의 말이 그리 틀린 말이 아니어서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좌포청에서 쏟아져 나온 포졸들에게 수표 다리가 쑥밭이 되던 시각에 땅개는 거기에 없었기 때문이다. 낮에는 다리 밑에 틀어앉아 두 눈을 부릅뜨고 깍정이들이 들고 오는 물건을 챙기기에 바쁜 땅개였으나 밤만 되면 부 두령인 설구와 함께 시구문을 빠져나가기 일쑤였으니 그것은 시구문과 가까운 무당촌에 막창 년을 숨겨 두었기 때문이었다. 어제도 예외는 아니어서 무당촌에서 밤을 보냈었다. 그리고 한낮이 되도록 뜨끈한 구들에서 게으름을 부리고 있던 차에 깍정이 놈이 달려와 급보를 알린 것이다. 그때는 이미 일이 다 끝난 뒤였고 끝나지 않았더라도 상대는 좌포청이라 땅개인들 별 대책이 있을 수 없었다. 하나, 지금은 일단 큰소리는 쳐 놓고 볼 일이었다.
"수표 다리를 차지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리로 쫓긴단 말이냐? 좋다, 차라리 이렇게 된 바엔 이번을 기회로 광통방(廣通坊) 큰다리(廣橋)를 쳐서 뺏어야겠다. 천하의 땅개가 성벽 끝자락에 몰리다니 말이 되는가 말이야."
"큰 다리에는 소대가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놈을 어떻게 친다는 말씀이오?"
감히 두령의 체면을 깎는 소리를 지껄이는 사람은 다름 아닌 부두령 설구였다. 허나 설구의 솔직한 말 역시 워낙 사실에 근거한 소리다 보니 땅개는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세상에 널리 쓰이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란 말이 사실 땅개가 소대가리 치기란 말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몇 해 전인가 세상 물정 모르고 날뛰던 땅개가 소대가리에게 도전했다가 뺨 한대를 맞고 이틀 동안을 기절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네 놈들도 잘 들어라. 내일부터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들고들오너라. 돈을 모아 칼잽이를 한 놈을 구해야겠다. 놈이 세다 한들 설마 칼날을 튕겨내는 뱃대기를 가졌겠느냐? 일단 스무 냥이 목표니라. 다시 말하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거라. 알았느냐? 큰 다리만 차지하면 네놈들에게 이백 근 짜리 걸구를 한 마리 내릴 테니까."
거적 밖으로 새어 나온 땅개의 흰소리가 판덕이의 새가슴을 더욱 옥죄었으나 이제 와 돌아설 수도 없었다. 멀리서 이곳을 감시하고 있을 사팔이도 문제지만 이 고비를 어떻게든 넘겨서 놈들의 손에서 풀려나고 볼 일이기 때문이다. 판덕이는 죽을 용기를 내어 거적을 들친 다음 머리통을 안으로 들이밀었다. 동시에 찬바람이 움막 안으로 와락 들어가자 불길이 펄럭이며 수십 개의 눈깔이 판덕이에게 쏠렸다.
"저 외눈배기는 또 뭐냐?"
땅개가 의아한 눈길로 판덕이와 설구를 교대로 바라보았다.
"저... 날은 춥고 갈곳이 없는데다 배도 고파서..... 어떻게.... 여기.…"
그동안 배우고 익힌 보람이 있어 판덕이가 처량한 소리를 제대로 내었다.
"그래서?"
설구가 흰 자위 많은 눈길로 판덕이를 노려보았다.
"병신이긴 해도 밥값은 하오니 소인을 좀 붙여주시면 어떠하올지요?"
"깍정이는 붙여도 미친놈은 안 붙인다. 맞기 싫거든 다른 곳으로 꺼지거라."
판덕이와 더 이상 말하기 싫은 설구는 어서 가라고 손을 획획 내쳤다. 그러나 옆에서 지켜보던 땅개의 생각은 달랐나 보았다.
"잠깐. 너 이리 들어오너라. 그리고 너희들은 이만 밥벌이를 나가 보아라. 이봐. 방금 온 네놈은 어서 불 가까이 오너라."
두령의 한마디에 서른이 넘는 깍정이들이 일시에 일어나 우르르 거적문을 나섰다. 그들이 다 나가도록 한 쪽에 비켜섰던 판덕이가 절름거리는 걸음으로 땅개에게 다가갔다.
"보아하니 낫살이나 처먹었고나. 허니,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이치도 잘 알고 있겠지? 톡 까놓고 묻겠다. 얼마를 내놓겠느냐?"
땅개는 설구를 힐금 바라보며 의미 있는 웃음을 빙긋 지었다. 그러자 설구가 맞장구를 치며 나왔다.
"두령, 이제 보니 머리통만 볼 때와 딴판이구려. 외눈깔에 다리까지 병신이니 불쌍해 뵈긴 우리 중 으뜸 올시다. 제 말대로 밥값은 하겠는뎁소?"
"밥값은 제놈 아가리에 들어가는 밥값이고 내게 올 것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
"저 나이 되도록 빌어쳐먹던 놈이 그만한 주변이 없을라구요. 내놓겠지요. 그래 얼마를 지녔느냐? 여기 있겠다면 어서 내 보이거라."
판덕이가 허리에 묶인 새끼줄을 풀더니 고의 속에 든 엽전 꿰미를 끄집어 내었다. 꺼내든 엽전은 모두 세 꿰미였다. 땅개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 석 냥이로구나. 그놈 보기보다는 제법 포실한 놈이구나. 이 돈이면 무당촌에서 보름은 질펀하게 딩굴 수 있는 돈이 아니냐? 이놈아, 이 엄동설한에 무슨 꿍꿍이가 있어 뜨끈한 구들을 마다하고 이런 찬 바닥으로 기어들려 하느냐? 게다가 돈까지 바치면서 말이다."
땅개의 말에 판덕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시골 거지가 한양 거지 노릇을 하고 살려니 사방에 이 돈을 노리는 놈들 뿐이라 목숨이라도 보존하려니 이 수밖에 없는지라...."
"어? 그래? 그렇다면 잘 생각했다. 내 너를 받아들이마. 나가보거라. 나가서 저녁거리를 얻어 오면 앞으로 여기서 지내게 하마."
판덕이가 굽신 거리며 고맙다는 인사를 올린 뒤 설구가 건네는 바가지를 받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둔덕에 올라 절름거리며 천 변을 따라 걸었다. 천변에는 오래된 왕버들이 시구문에 이르도록 주욱 늘어섰는데 잎 하나 없이 늘어진 버들가지들이 흡사 오월 단옷 날, 온 동네의 아낙네들이 개울가에 모여 앉아 머리를 감고 있는 듯했다. 판덕이가 그 길을 백여 보쯤 걸었을 때 저만치 앞에 있는 버드나무 뒤에서 사팔이가 빼꼼히 머리를 내밀었다. 판덕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말아 엽전 모양을 해 보였다. 그것을 본 사팔이는 시침을 따고 슬금슬금 제 갈 길을 가버렸다. 무당촌 숯막에서 기다릴 수구리에게 성공했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저녁이었다. 판덕이가 밥을 얻어 오간 수문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서 깍정이들이 불가에 둘러앉아 죽들을 먹고 있었다. 판덕이도 불가로 다가가 얻어 온 밥 바가지를 내밀었다.
"오나가나 빌어먹을 이놈은 왜 이제사 나타난단 말인가? 옜다. 저 구석에 가서 처먹어라."
촉세는 판덕이가 얻어 온 밥을 솥에다 붓고 그 바가지로 죽을 휘저어 찔끔 푸더니 그대로 판덕이를 향해 내밀었다. 판덕이는 끽 소리 없이 깍정이들 틈에 끼어 앉았다. 그리고 구멍을 뚫어 목에 걸고 다니던 나무 숟가락으로 죽을 퍼 넣었다. 종일을 물 한 방울 먹지 못했던 판덕이에겐 그 죽은 그야말로 꿀과 같았다.
"이놈들아, 처먹는 것도 좋지만 오늘 반 냥 짜리 놋대접을 들고 온 먹태를 본받아라. 먹태는 이달 들어 벌써 두 번 째니라. 옜다. 먹태는 고기 한 점을 먹어라."
숯불을 앞에 둔 땅개가 구운 고기 한 점을 건네자 조장들과 나란히 앉았던 먹태가 바가지를 내밀어 냉큼 받아들었다. 먹태는 자랑스런 얼굴로 깍정이들을 휘둘러 보았다.
"저런 먹 도둑놈. 도둑질로 칭찬을 받으니 좋은가 보구나."
판덕이 앞에 있던 놈이 조그만 소리로 빈정거렸다.
"쉿, 들을라."
옆엣 놈이 급히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나 귀 밝은 땅개는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방금 지껄인 놈 이리 나오너라. 내 누구 목소리 인지도 알고 있다. 밴댕이지?"
후줄그레한 밴댕이란 깍정이가 일어나 죽을 상으로 고개를 떨구고 섰다.
"이 쪽으로 오너라."
밴댕이가 두령 앞으로 나서자 주위의 깍정이들이 다들 뭉기적거리며 뒤로 물러나 공간을 만들었다. 두령 앞에 선 밴댕이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러자 부두령인 설구가 말없이 일어나더니 주먹을 들어 밴댕이의 목덜미를 단번에 내리쳐버렸다. 밴댕이는 그대로 폭 고꾸라져 두목 앞에 피워놓은 숯불에 머리를 처박고 말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온 움막 안에 진동을 했다. 그러나 땅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보고만 있었다. 이어 살이 타는지 역한 누린내가 머리칼 타는 냄새와 뒤섞였다. 그제야 설구가 쥐었던 돌멩이를 툭 던지고 밴댕이를 불에서 끌어냈다. 그 광경에 놀란 판덕이는 헛구역질을 하며 저도 모르는 사이에 벌벌 기어 밖으로 나와버렸다. 만정이 떨어진 판덕이는 일순간도 이곳에 있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곳을 떠나갈 곳도 없었고 가려 해도 어디선가 사팔이가 숨어서 보고 있을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판덕이가 옆쪽의 수문 구멍 뒤에 쪼그리고 앉아 어쩌면 좋을지 생각에 잠겼다.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쥐어짜도 자신의 머리로는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어서 빨리 결판이 나서 이놈 저놈의 손에서 벗어나 아이를 찾아 훌훌 떠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때, 누군가 판덕이가 쪼그리고 앉은 곳과 가까운 곳에서 고의를 내리고 소변을 보는 것이다. 어두운 곳에 앉아 있던 판덕이가 가만히 내다보니 달빛에 비친 사람은 옆으로 돌아선 땅개였다. 두령인 땅개가 달빛을 향해 오줌을 갈기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왜 그랬는지 몰라도 판덕이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땅개가 깜짝 놀라 오줌발을 뚝 끊었다.
"아이쿠 깜짝이야. 씨부랄 놈, 누구냐? 얼라? 넌 오늘 들어온 외눈깔 쩔뚝이 아니냐."
판덕이는 슬그머니 허릿춤을 더듬어 비수를 꺼내 쥐고 땅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두말 없이 땅개의 옆구리를 바라고 비수를 내질렀다.
"허엇."
짧은 외침과 함께 재빨리 몸을 튼 땅개가 판덕이의 가슴을 발로 차버렸다. 그 한 번의 발길은 땅개의 장기여서 허약한 판덕이가 견딜 성질이 아니었다. 판덕이는 바람에 짚단 쓰러지듯 단번에 툭 고꾸라져 찬 바닥에 이마를 찧고 말았다. 땅개는 쥐고 있던 고의춤을 대강 여민 후 판덕이의 비수를 집어 들더니 움막에서 설구와 촉새를 불러냈다. 그리고는 한동안 쑤근 거렸다.
"아직 죽지는 않았는데요?"
판덕이를 들여다본 촉새의 말이었다.
"그럼 두령 말씀대로 한 칼을 먹여 시구문에다 갖다 버리지요?"
설구가 뒤를 이어 안을 내었다.
"그럼 그렇게 해라. 내 진작에 이놈이 석 냥이나 되는 돈을 들고 나타났을 때 알아봤느니라. 그러지 않아도 아침나절에 기별을 듣고 황급히 나올 때 무당촌 숯막으로 다가오는 수구리란 놈을 얼핏 보았거든. 이놈이 그들과 연관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어렴풋이 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달려들 줄이야."
"힘 좋고 입 무거운 곰에게 업혀 갔다 제가 오지요."
설구가 직접 나서겠다니 땅개로서는 믿음직해서 좋았다.
"참, 어젯밤 시구문에 못 보던 뜨내기가 두 놈 있는 걸 너도 보지 않았냐? 놈들에게 들키지 않게 해라."
"아니요, 오히려 그놈들이 알게 할 작정입니다. 그래야 그놈들이 죽인 걸로 될 테니까요."
"옳거니 네 말이 맞다. 수구리란 놈이 제 꾀에 제가 넘어가서 그 꼴이 났으니 누굴 원망하겠느냐. 어서 가거라. 하도감 앞을 지날 때 극히 조심해야 하느니라."
"걱정 마시오. 이 시각이면 종사관도 기패관도 퇴청을 하고 문 앞에 지킴이도 다 들어갔을 겝니다. 추운 밤 허허벌판에 미쳤다고 서 있겠습니까?"
"여기, 이놈 비수도 갖고 가거라. 던지기 전에 요절을 내는 것을 잊지 말거라."
"걱정 마시지요. 한두 번 하는 짓이 아니지 않소?"
"허긴."
설구는 즉시 곰이란 놈을 불러내 판덕이를 등에 업혔다. 설구가 앞길을 살피며 앞장을 섰다. 그 뒤를 판덕이를 업은 곰이 따랐다. 오간 수문을 나서자 곧바로 하도감이 자리하는 곳에 이르렀다. 일종의 훈련원인 하도감은 삼백구십 간의 넓은 규모라 마당의 크기만도 엄청나서 그 앞을 지나려면 한 마장이나 되었다. 그러나 설구와 곰은 대담하게도 그 앞 길을 내달렸다. 그리고 성벽에 이르자 어두운 곳을 골라 슬금슬금 시구문으로 다가갔다. 시구문이(屍口門)란 말이 말해주듯 시구문은 그야말로 시체를 성밖으로 내치는 곳인지라 주위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허기야 한밤중에 어떤 미친 자가 시체를 구경하겠다고 얼쩡거릴 것인가? 판덕이는 그때까지 인사불성이어서 곰이 패대기치듯 땅에 내려놓아도 깰 줄을 몰랐다. 설구가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이미 죽은 목숨이라 칼을 쓸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설구는 얼핏 발을 들어 판덕이의 가슴을 뒷꿈치로 내려 찧었다. 와직 하고 갈비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판덕이의 입에서 피가 왈칵 뿜어져 나왔다. 설구는 수문 안쪽으로 판덕이를 툭 차 넣어버렸다. 그 순간 수문을 가렸던 거적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됐다, 가자. 저래서도 산다면 내가 없는 성을 갈겠다."
설구와 곰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왔던 길을 가버렸다. 그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말자 조심스레 수문의 거적이 들쳐졌다. 그리고 조그만 사내가 바닥에 처박힌 판덕이를 드려다 보았다. 그 사내는 땅꾼 대장 석기였다.
"동생, 이리 좀 나와 보게나. 이 사람이 아직 살아 있네."
기다린 듯 송수호가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판덕이의 팔다리를 들어 불가에 눕였다. 송수호는 찬찬히 판덕이의 상태를 살펴 나갔다.
"어떤가? 살아날 가망이 있어 보이는가?"
표정을 알 수 없는 석기의 주름진 얼굴 대신 목소리에 약간의 연민이 섞였다.
"힘들 것 같습니다. 놈들이 가슴을 찧었군요. 늑골이 모두 부러진 듯합니다."
"잔혹한 놈들이로군. 내 이래서 한양 땅에 정이 떨어지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일 형님이 오시는 대로 떠나기로 하지요."
"그러세나. 헛, 또 한 생명이 가는군."
그날 밤 송수호는 밤을 새워 불을 지켰다. 혹시 가슴의 상처로 죽기 전에 먼저 얼어 죽을까 해서였다. 새벽이 되자 석기가 일어나 교대를 해주려 했으나 송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죽었다 살아난 것처럼 만에 하나 이 사람도 그럴까 해서였다. 날이 밝자 문둥이들이 먼저 일어나 불을 피우고 꾸물꾸물 무언가를 끓이고 있었다. 보나 마나 어제 먹던 뱀탕 찌꺼기를 재탕해 먹으려는 것일 터였다. 송수호는 판덕이의 맥을 짚어 보았다. 가늘긴 해도 아직 맥은 뛰고 있었다. 석기는 길양식으로 챙겨온 좁쌀을 꺼내 죽을 끓였다. 얼마가 지나자 수문으로 햇볕이 조금씩 스몄다. 그러자 문둥이들이 일제히 들어왔던 쪽으로 몰려나갔다.
"그럼 나도 갔다 오겠네."
"안국방까지는 오리가 조금 넘는 거리이긴 하나 저희 집을 찾으실 수 있겠습니까?"
"걱정 말게 나도 한양 사람 아닌가? 북촌이야 내 놀던 곳인데 고샅길인들 모르는 길이 있겠나? 허고, 영상인 허적의 옆집 이랬지? 그런 집을 못 찾다니 말이 되는가?"
"글쎄요. 영상이 아직 그 자리에 있는지 지난 일 년 간의 조보(朝報)를 보질 못했으니 알 수가 없습니다만 제 추측으론 조정에도 큰 변화가 있었을 겝니다."
"조정 일은 잊게나. 그깟 조정은 임진, 병자, 양 년에 이미 끝장이 난 조정일세."
"옳으신 말씀입니다. 조정이니 종묘사직이니 다 관심이 없습니다. 참, 제 집을 찾으실 때 말득이라는 늙은 종에게 물으시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문안으로 들어가지 않고도 안부를 알 수 있겠지요."
"그러세. 어차피 이 얼굴로야 누굴 바로 볼 수가 있겠는가? 아마 도깨비도 날 보면 기절할 텐데... 이 방립(方笠)이 없다면 도성 안엔 촌보도 옮기지 못할 걸세."
"원 형님도. 별 소릴 다 하십니다. 오히려 제 얼굴에 기절할 사람이 많을 겝니다."
"실없는 소리 그만두세. 그럼 갔다 오겠네."
"예, 다녀 오십시오."
방갓을 손에 든 석기가 돌 틈에 발을 딛여 수문으로 오른 다음, 방갓을 눌러썼다. 그리고는 신교(新橋)를 건너 운종가로 들어서 큰 길을 따라 죽 내려가다가 대군방(大君坊)에 이르자 장교(長橋)를 건넜다. 석기는 내친 걸음에 쉬지 않고 광례교(廣禮橋)까지 건넜다. 북촌에 거의 다 온 것이다. 석기는 송수호가 가르쳐 준 대로 마당에 커다란 감나무가 있는 집을 찾아 사방을 살폈다. 한눈에 알아볼 만한 감나무가 저 편에 우뚝 서 있었다. 석기는 급히 그 감나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곳엔 솟을대문이긴 하나 세월에 찌든 듯 낡은 대문이 볼품없이 토담과 나란히 붙어 있었다. 석기는 좌우의 옆집들을 돌아보았다. 좌우의 집들은 모두 화초담에 대문의 크기부터가 엄청나서 가운데 집의 대문은 더욱 초라한 감이 있었다.
"이리 오너라."
헛기침으로 목을 다듬은 석기가 대문을 향해 점잖은 음성으로 객이 온 것을 알렸다. 그러나 집안은 조용했다. 다시 한번 불러보기로 했다.
"이리오너라."
역시 조용했다. 나이 든 말득이가 귀가 약간 어둡다는 것을 송수호가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이다. 두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자 급기야 석기는 대문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다시 큰 목소리로 이리 오너라를 외쳤다. 그러자 송수호의 집이 아닌 옆집에서 덜커덕 빗장 푸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문이 빼꼼 열렸다. 석기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거기 계신 분이 뉘신데 뉘를 찾소?"
석기가 방갓의 댓살 사이로 내다보니 맨 상투에 수염이 다부룩한 하인이 대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하오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 하인도 진작 석기의 차림을 훑어보아 지체 있는 양반이 아님을 알아 본 모양이었다.
"나는 이 집 나으리를 찾아온 사람이요만, 어째 나와 보는 하인이 없소?"
"그 집 하인은 귀가 어둡소. 그리고 하인이 나온데도 소용이 없을 것이요."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이요? 소용이 없다니?"
"그 집 주인인 집의(執義) 나으리가 원주 어디서 세상을 떴다 합디다. 그러니 하인을 만난들 소용이 있겠소?"
"뭐요? 아하, 그 말이 정말이었구나. 나도 그런 풍문을 들었소, 그래서 달려왔소만 그러면 그 나으리의 자당이신 큰 마님은 여기 계실 것이 아니요?"
"아무래도 댁이 풍문을 온전히 다 듣지 못한 것 같구려. 지난해 봄, 그 댁 큰마님 작은 마님 할 것 없이 일가가 구몰(俱沒)을 했소. 쯧."
"억. 방금 뭐라 했소? 구몰? 구몰이라니?"
의외의 말을 들은 석기가 깜짝 놀라 방갓을 들어 옆집 하인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진짜 놀란 사람은 옆집 하인이었다.
"억? 대낮에...... 이런."
이어서 대문이 와락 닫기는 소리와 함께 황급히 빗장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하인에게 얼굴을 보인 석기가 아차 했으나 이왕 틀린 노릇이라 발길을 돌렸다. 일가가 구몰했다는 말이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어찌 되어 그렇게 된 일인지, 마져 알아갔으면 좋으련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석기가 대문에서 서너 걸음쯤 걸었을 때였다. 방금 뒤돌아선 송수호네 대문이 삐그덕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기침소리가 뒤를 이었다. 석기가 재빨리 돌아서 보니 머리가 허연 늙은 노인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리고는 석기에게 두 손을 모으고 굽신 고개를 숙였다.
"혹시 조금 전 소인을 찾으신 분이신지요?"
"그러하오. 듣지 못한 줄 알고 가려던 참이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 잘 들리지 않사옵니다만 소인이 귀가 시원치 않아 늦었사오니 죄만하기 이를 데 없사옵니다. 조금 전에도 할멈이 알려주지 않았으면 모를 뻔 했습지요."
"아하, 하님이 말득이라는 사람이구려. 방금 저 옆집 하인의 말을 들었소만 이 집엔 정말 아무도 살지 않소?"
"예? 죄만하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그제야 서로 간에 딴 말을 하고 있었음을 안 석기는 노인에게 다가가 좀 더 큰소리로 물었다.
"나는 이 댁 나으리 마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오. 이 댁 나으리와 자당 어른의 안부를 알고자 하오. 가내 무고 하오?"
말이 끝나는 순간 흠칫 몸을 떤 말득이가 촛점 흐린 눈을 크게 뜨더니 석기가 쓰고 있는 방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의 짓무른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리고 처진 어깨 아래로 고개를 떨구었다.
"뉘신지 모르나, 너무 늦었사옵니다. 주인 나으리가 돌아가신지는 햇수로는 이 년이 되었삽니다. 그리고 여기 계시던 큰마님과 작은 마님께서도 애기씨와 함께 지난해 삼월, 작은 서방님을 따라 낙향을 하시다가 다락원 지나 솔모루 어디서 모두 참변을 당하셨삽니다. 옆집 대감은 역모라도 해서 죽었다지만 우리 서방님이야말로 효자요 나라의 충신이신데...... 우리 서방님과 식솔들은 세상에 무슨 죄가 있어 하늘이 부르셨는지 알 길이 없사옵니다. 쉔네는 이 집에 선대로부터 내려온 씨종이온데 이런 일을 겪고 나서 죽음보다 못한 목숨을 이어가고 있사옵니다. 아아,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한 처사 옵니다. 하늘이 이렇듯 무심한 줄은 나이 칠십이 되도록 몰랐사옵니다."
늙은 말득이의 눈에서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니 방갓 속의 석기도 비분에 젖은 눈물이 방울지어 떨어졌다. 석기는 아무 말 없이 노인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리고 뒤 돌아보지않고 왔던 길을 되짚어 가기 시작했다. 송수호 가족의 안부를 알려고 왔다가 일가가 구몰한 엄청난 소식을 알고 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석기는 이 사실을 송수호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돌아가는 석기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송수호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일이어서 이 사실을 솔직하게 말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시구문이 멀지 않았다. 바로 그 시각이었다. 시구문 안에서는 죽어가던 판덕이가 갑자기 외짝 눈을 번쩍 떴다. 옆에 있던 송수호가 놀라 판덕이를 바라보았다. 잠시 동안 송수호의 외눈과 판덕이의 외눈이 마주 보는 듯했다.
"정신이 좀 드오?"
눈은 떳으되 허공의 한 곳만 응시하는 판덕이는 말이 없었다. 어젯밤 사이에 숨을 거둘 줄 알았던 판덕이가 모질게도 아침까지 맥이 뛰더니 이제는 눈까지 뜨니 송수호가 놀란 건 당연했다. 눈을 뜬 다음에도 판덕이의 목에서는 여전히 가랑거리는 소리가 가늘게 새어 나왔다. 송수호가 볼 때 아무래도 죽기 전에 마지막을 잠시 정신을 찾은 듯했다. 그때 허공을 노려보던 판덕이가 천천히 사방을 둘러보더니 송수호의 얼굴에 시선이 멎었다.
"보아하니 여기가 우리 병신들이 모이는 저승 같구려. 내 방금 꿈을 꾸었소. 꿈 속이나마 굶어죽은 내 아들 개똥이와 마누라가 줒어 온 아들 개똥이를 다 만나 보았소. 죽은 아들은 이제 곧 다시 만나겠지만 이승에 두고 온 아들은 이제 영영 못 만나게 생겼소. 참 분한 노릇이요, 내 잠시 자리를 비워 소젖을 얻으로 간 사이 줒어 온 아들마저 없어졌으니 말이요. 내 병신 동무끼리 하는 얘기오만 이승에 두고 온 아이는 참으로 내게 힘이 되던 아이였소. 내 솔직히 말하리다. 나는 농삿군이었소. 연이은 흉년에 식솔이 모두 유랑 생활을 했소. 그러다 아들은 굶어죽고 마누라와 나는 유랑 난민들 틈에 들었소. 지난해 봄이었소. 솔모루 못 미쳐 축석고개란 곳에 양반 행렬이 산적들 손에 요절이 난 일이 있었소, 말과 가마가 여럿이고 어린아이들 또한 여럿인 걸로 보아 아마 시골로 낙향을 하던 행차였던가 보우. 마누라와 내가 유랑민들과 함께 그 행렬을 덮쳤을 때는 이미 남녀노소가 다 결딴이 난 뒤였소. 가마 안에든 반가의 부녀들도 다 죽은 걸 보았으니 말이요. 세상에 태어나 처음 목도한 끔찍한 살변이었소. 헌데 우리 마누라가 가마 안에서 죽은 여자의 품에서 산 아이를 찾아냈소. 허... 헛.... 이거... 숨이 차는구려. 그러다 다음날 관군의 토벌에 쫓겨 뿔뿔이 흩어질 때 우리 패는 여주 쪽으로 도망을 했소. 거기서 마누라가 포교의 방망이를 맞았소. 아이를 받아든 나는 강을 건너 무사했으나 그 뒤가 더 큰일이었소. 아이를 굶기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다 썼소. 이미 아들을 굶겨 죽여 본 적이 있어 차마 그 꼴을 되풀이할 수가 없었던 거요. 그렇게 그 아이와 거의 반 년을 함께 했소. 그 사이 정이 들어 한 시도 떼놓을 수가 없게 되었소. 허나 아까 얘기했다시피 소젖을 짜러 갔던 내가 되려 소에 밟혀 이 지경이 되어버렸소. 정신을 차려보니 며칠이 지난 후입디다. 그사이 작은 배 안에 뉘어 놓았던 아이가 없어진 것이오. 허... 헉. 이거 저승에 와서도 또 죽어야 하는 것인가보오. 허... 허... 헉."
"잠시 눈을 감고 쉬시오. 말을 해서 이로울 게 없소."
"아니요. 이제 곧 일어나 이곳 저승 어딘가에 있을 내 친아들을 찾아야 할 차례요. 잠시 쉬었다 아들을 찾으러 떠나리다. 불을 지펴주어 고마웠소. 후우...."
말을 끝낸 판덕이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주르룩 흘러 귓가에 떨어졌다. 그것을 바라보는 송수호의 심정이 몹시 언잖았다. 그 순간 거적을 들치고 석기가 들어섰다.
"아 형님, 오셨군요, 추운데 고생하셨습니다."
"흠, 그깟 추위가 문제가 아닐세."
"예? 혹 집을 못 찾으셨는지요?"
"찾았지. 소식도 알아왔고...."
"아, 그러셨군요."
"쯧, 할 수 없군.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 날 원망할 테니 차라리 지금 모든 걸 다 털어놓겠네. 대신 이제까지 얘기했듯이 우린 죽은 사람일세. 그러니 이를 악물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로 하세. 어떤가 자네가 내 말에 동의한다면 내 다 말하겠네."
"원 형님도, 어젯밤에 이미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스스로 죽은 걸로 친다고 말입니다. 안심하시고 말씀하세요. 무슨 소리를 들어도 들어넘길 준비가 되었으니까요."
"좋네. 자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허, 이거야.... 말하지. 자네가 원주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있고 나서 작년 삼월에 자네의 식솔과 자네 동생의 식솔이 함께 낙향을 했다네."
"아, 그랬었군요, 아마 동생의 처가인 김화로 간 모양이군요."
"아닐세. 그러지 못했네. 낙향하는 길에 산적을 만나 모두 참변을 당했다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참변이라니요? 어떤 참변을...."
"다락원 지나 솔모루 어디에서라고 하더구만. 말득이란 하인이 울면서 내게 한 말일세."
"억..... 솔모루? 작년 삼 월?"
그렇다면 두 집 식솔들을 이끌고 낙향하던 동생 윤호의 행렬이 아닌가? 설마 그럴 리가? 순간 송수호는 와락 판덕이에게 달려들었다.
"이보시요. 정신 차리시오. 이보시오. 그 아이... 그 아이의 몸 어디에 점이 없습디까? 이보시오, 제발 정신을 차리시오. 아이의 몸에 점이 있는 것을 보았소?"
송수호가 미친 듯 판덕이를 흔들건만 이미 숨이 끊겼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동생, 왜 이러나? 그 사람이 무얼 안단 말인가? 이보게 자네가 정신 차리게."
"아니요 이 사람에게 들은 말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그 행차에 대해 말했다니까요."
"뭐라고? 이 사람이 그 행차와 관계가 있다니?"
"이보시요. 이대로 가면 어쩌오? 제발 한 마디만 하고 가시오. 제발.…"
송수호의 절규를 들었음인가? 숨이 끊어진 줄 알았던 판덕이의 입이 무엇을 말 하려는 듯 우물거렸다. 송수호는 급히 성한 왼쪽 귀를 판덕이의 입에 갖다 대었다.
"귀... 귀... 귓불 뒤에 파란 점... 왼...왼.. 쪽.... 귀..."
"아. 아.. 아악."
외마디 짧은 비명과 함께 송수호는 스르르 무너져 혼절을 해버렸다. 자신의 가족이 적실했던 것이다. 석기는 송수호를 바로 눕히고 손발을 주무른 다음 옹기솥에 있던 물에 수건을 적셔 얼굴을 닦아주었다. 얼마 후 송수호는 길게 숨을 내쉬며 정신이 돌아왔다. 그러나 송수호는 굳게 입을 다물고 허공만 노려보았다. 하늘이 무너진 것이다. 얼마 동안 그렇게 있었을까? 모든 것이 하얗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공 어딘가에 매달려 있던 작은 희망이 흙덩이처럼 부스러지더니 절망의 고통이 다 사라져 버렸다. 머릿속이 텅 비워져 버린 것이다. 길게 숨을 토하는 송수호의 외짝 눈에서 무의식적으로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석기는 그런 송수호를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얼마 후였다.
"형님, 추태를 보여 면목이 없습니다. 용서 하십시오."
송수호는 진정 어린 태도로 석기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됐네. 생각보다는 자네의 의지가 굳어서 안심일세. 사람 사는 세상이 다 이런 걸세. 우리 그만 돌아가세나. 여긴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네."
"그러시지요. 떠나려면 지금 곧바로 떠나지요."
"그러세나. 지금 당장 떠나는 걸로 하지. 헌데, 동생."
방갓을 집어 들던 석기가 문득 송수호를 돌아보았다.
"예. 형님."
"자네 백두산에 가봤나?"
"예? 갑자기 백두산이라니요? 저야 가볼 리가 없지요."
"그렇겠지. 나도 가 본 적이 없네. 어떤가? 날이 풀리면 우리 백두산에나 가볼까?"
"허, 별안간에 백두산 얘기는 왜 꺼내시는 겁니까?"
"별안간이 아닐세. 언제부턴가 마음은 있었네만 혼자서는 엄두가 나지 않았을 뿐이야."
"그러시다면 저와 함께 가시지요."
"허허, 그러세나. 백두산 호랑이란 말이 있지만 우리야 이미 죽은 목숨인데 그깟 범 무서워 못 가겠나? 봄이 되면 같이 떠나세."
"그러지요. 백두산뿐 아니라 이왕이면 조선팔도를 다 둘러보면 좋겠습니다."
"그것도 좋겠지. 어차피 죽을 때까지 떠돌아다닐 팔자가 우리 같은 땅꾼 팔자 아닌가?"
"옳습니다. 그러다 어느 길에서든 죽으면 그뿐인 일 테니까요."
"죽어서라도 초목의 거름이 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렇게 될 터이지요."
한 시각 후였다. 해는 공중에 걸렸으되 삭풍이 몰아치는 중랑천 빙판 위를 두 사람이 가고 있었다. 바람에 놓칠세라 두 팔로 방갓을 꼭 끌어안은 석기와 외눈을 부릅뜨고 그 바람에 맞서 나아가는 송수호였다. 매서운 바람이었다. 세상 만물을 모조리 얼리려는 듯한 차가운 날씨였다. 송곳처럼 파고든 추위는 송수호의 가슴까지 얼리려 들었다. 송수호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벙긋 웃는 원일이의 얼굴이 하늘을 덮었다. 깜짝 놀란 송수호는 외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티끌 하나 없이 맑고 투명한 하늘이었다. 그리고 그 마알간 하늘 위엔 얼음처럼 차가운 태양이 높이 떠 있었다.
'오늘의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원일 제1장 유전(流轉) 11.흔적을 찾아서 (1) | 2024.05.14 |
---|---|
송원일 제1장 유전(流轉) 10.장삿길 (1) | 2024.05.13 |
송원일 제1장 유전(流轉) 8.스치는 만남 (1) | 2024.05.12 |
송원일 제1장 유전(流轉) 7.삼개 나루 (0) | 2024.05.12 |
송원일 제1장 유전(流轉) 6.황구만 (1) | 2024.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