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박일주
오일중이 애초에 끈 떨어진 포교들을 불러 모았던 것은 그들의 딱한 사정을 조금이라도 도와주려는 의도였다. 자신 역시 수년간을 포도청 포교로 지내봐서 그들의 배고픔과 고충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본래 포도청의 포교란 종사관 바로 밑의 종 6품인 포도부장을 일컷는 말이었다. 그러나 막상 포도청에 몸담고 있는 그들은 포도부장과는 별개로 겸록부장(兼祿部長)이나 무료부장(無料部將)을 포교라 통칭했다. 그런데 매달 녹미(祿米)가 얼마씩이라도 나오는 겸록부장과는 달리 무료부장은 실상은 품계도 녹미도 없었다. 본래 포교란 게 보기엔 그럴듯해서 붉은 술 달린 전립을 보란 듯이 쓰고 붉으죽죽한 허리끈과 오랏줄을 척 차고 나서면 죄 없는 사람도 찔끔하게 마련이라 제법 위엄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실상을 알고 보면 그보다 허무맹랑한 직업이 없었다. 닭 모이만큼 나오는 녹미에 목을 매는 겸록부장도 그렇지만 그나마도 없는 무료부장은 낱알 한 톨 구경을 못하니 그야말로 허무한 벼슬이었다. 포도청에 적을 두고 낮밤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녀도 나라에선 좁쌀 한 됫박 주는 법이 없으니 허무할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 년 열두 달을 뭐가 빠지게 일을 해도 급료가 없다는 말이다. 급료가 없으니 산목숨 계속 이어가자면 어찌해야 하는가? 별수 없었다. 도둑놈 와주든 장물아비든 아니면 왈짜에게 트집을 잡아서 뭐라도 뜯어내야 먹고 살 수 있었다. 포교가 이럴진대 포졸은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그들대로 또 등짐장수 건 송기떡 장수건 가리지 않고 뜯어서 목구멍을 채워야 사는 것이다. 그러니 포교뿐만 아니라 포졸은 그야말로 육모방망이 든 거지요 강도였다. 백성을 뜯어먹고 살라고 나라에서 허가를 내 준 직업이 포교와 포졸인 것이다. 그런데 좁쌀 한 톨 생기지 않는 포교도 벼슬 축에 드는지 하려는 자가 많았다. 남보기 그럴듯한 한량보다는 포교가 그나마 벌어먹기가 수월했던 것이다. 하려는 자가 많으니 자연 경쟁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또한 세도가에게 아첨과 청탁이 성행하고 모함과 고발을 일삼아 멀쩡한 포교도 떨려나기 예사였다. 더구나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들어선 금년 같은 환국(換局)이 되면 위로는 포도 대장에서 아래로는 포교까지 무사하기 어려웠다. 오랏줄 차고 기세가 등등하던 위세도 목이 떨어지고 나면 말짱 헛것이었다. 아무리 녹미 한 톨 없는 처지였어도 통부(通符)만 슬쩍 보여도 탁배기 값이라도 생기던 것이 그나마 끈이 떨어지고 나면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가족을 거느린 포교와 군관의 처지는 더욱 딱할 수밖에 없는 일 아닌가? 이럴 때 오일중은 그들을 불러 상조회를 조직한 것이다. 그리고 능력에 따라 생계를 마련해 주니 그들이 회주인 오일중에게 바치는 충성심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회주님 계시느냐?"
삽짝을 들어선 윤기출이 마당을 가로지르는 어린 종에게 물었다.
"사랑채에 계시옵지요."
"그래? 알았다."
윤기출은 곧바로 사랑채로 향했다. 오일중의 집은 작고 보잘 것이 없어서 안채라 해봐야 겨우 초가삼간에 싸리 울타리를 두른 정도였다. 본채와 십여 보 떨어진 곳에 일 자로 지은 사랑방 역시 두 간 초가였다.
"흐흠,."
가볍게 인기척을 내며 댓돌을 보니 갓신 한 켤레와 미투리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갓신은 오회주의 것이고 미투리의 임자 역시 누군지 짐작이 갔다.
"회주님, 윤기출입니다."
윤기출이 쪽마루 앞에서 두 손을 맞잡고 사랑방에 고하자 곧 문이 열렸다. 아니나 다를까 오 년을 직속상관으로 모시던 노탁우가 먼저 얼굴을 내밀었다. 노탁우야 말로 종 6품의 포도부장 출신으로 오일중이 종사관을 그만둘 때 함께 옷을 벗은 사람이었다.
"오, 윤포교 왔는가?"
"예, 부장님께서 예 계셨군요."
윤기출이 방으로 들어서며 부장에게는 목례를 하고 오일중에게는 깊이 허리를 숙여 절을 했다. 오일중은 둥실하게 사람 좋은 얼굴을 한 노탁우와 달리 마른 체격에 가느다란 세 가닥 수염과 날카로운 눈을 가진 무인이었다. 윤기출은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오일중은 웃는 듯 마는듯한 얼굴로 윤기출을 바라볼 뿐이었다. 노탁우가 오일중을 대신했다.
"편히 앉게. 그리고 갔던 일을 회주님께 고하게."
"예, 그럽지요. "
노탁우가 편히 앉기를 권했으나 윤기출은 대답만 하고 무릎은 그대로 꿇고 있었다.
"그래 어찌 되었나? 놈들의 근거지는 알아낸 게야?"
윤기출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결과가 궁금해 못 견딘 노탁우가 먼저 물었다.
"예. 놈들의 소굴은 파주 관미산성 아래에 있습니다."
"산 아래? 놈들이 마을에다 둥지를 틀었더란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관미산성 아래 십여 호의 집이 있사온데 그곳이 천수 패거리가 묵는 곳이라 하옵니다. 그리고 강화와 석곶 어딘가에도 임시 거처가 있다 하옵니다."
"관미성이라면 교하 물가에 있는 산성 아닌가? 이놈들이 여태 퇴락한 산성을 등지고 수적질을 했구나. 회주님, 이리 되면 제가 알아온 정황과 대충 맞아떨어집니다. 보름 전 강화 보구곶 해상에서 상선을 털어먹은 것도 천수패가 적실합니다. 빼앗긴 물종이 거의 말린 어물 등속이라니 도성 안팎에서는 이미 소문이 나서 처분하기 어려웠겠지요. 그래서 사통팔달한 송파를 노렸던 것 같습니다. 회주님, 이제 어찌하올지요?"
오일중은 여전히 듣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송파로 보냈던 마개출이 천수의 수하들에게 참살을 당한지 오늘로 열흘 째였다. 현장에 같이 있던 황구만이 한달음으로 달려와 소식을 전했을 때에도 오일중은 선뜻 조치를 취하지 않았었다. 천수패가 그랬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길 뿐이었다. 오일중은 천수가 누구인지 진작부터 잘 알고 있었다. 천수는 이십사오 년 전에 오일중과 함께 무과 준비를 하던 친구로 한량이었다. 안동 김씨 문중의 서자로 태어난 그는 기개가 남달랐으나 오일중과 함께 글로써 출세하긴 틀린 신분이었다. 오일중도 그도 매일 하는 일이라고는 사정에 모여 활이나 쏘고 누구네 잔치라도 있는 날이면 탁배기라도 얻어 마시는 것이 다였다. 그러다 오일중이 작은 벼슬이라도 해 볼 욕심에 세도가의 문전을 들락거리자 그 사실을 안 김천수가 단호히 한마디 말을 던지고는 자리를 떴다.
"친군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개로군. 평생 파락호 짓에 도적질을 해 먹고 살지언정 대장부가 연옹 지치(吮癰舐痔)를 어이하는가? 나는 가네."
그 후, 천수가 남긴 이 한마디는 소위 출세를 할수록 오일중의 마음을 괴롭혔다. 어쩌면 포도 대장이던 신여철이 총융사로 갈 때 따라가지 않고 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판세도 판세지만 실은 천수가 남긴 말이 맺힌 때문인지도 몰랐다. 잘난 벼슬을 유지하려고 이번엔 서인 쪽에 붙어 아첨을 하게 되었으니 이거야말로 개가할 짓이었던 것이다. 결국 천수는 제 말대로 파락호가 되어 갖은 망나니 짓을 하다 문중에서 쫓겨나 처가인 강화도로 갔었다. 그 후 강화에서도 왈자들과 어울려 주먹질로 세월을 보낸다는 소리는 간간이 들었다. 그러다 십여 년 전 오일중이 종사관으로 있을 때쯤엔 천수가 무리를 모아 한강과 임진강을 오가는 배들을 상대로 악행을 저지른다는 소리도 들은 바였다. 그 후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오일중이 하려는 일에 방해꾼으로 나타난 것이다. 노탁우 역시 오일중과 천수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수하인 마개출이 천수패의 손에 죽은 것은 문제가 다른 것이다. 노탁우는 오일중이 빨리 결정을 내려주기를 바랐다.
"회주님, 어찌 하올지요?"
오일중은 시선을 허공에 둔 채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노탁우는 더 이상 채근할 수도 없었다. 방안의 분위기는 숨소리마저 없이 착 가라앉아 있었다. 꿇어앉은 윤기출의 오금에 쥐가 나서 참느라 콧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때쯤이었다.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아뢰는 소리가 들렸다.
"회주님, 소인 최두수 다녀왔습니다."
최두수의 출현이 누구보다 반가웠던 윤기출이 벌떡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어, 자네로군. 어서 오게나."
저리다 못해 거의 마비 상태에 이른 참에 딱 맞춰 최두수가 나타난 것이다. 윤기출은 최두수가 오일중에게 절을 한 후 자리에 앉을 때까지 서서 다리를 풀다가 슬그머니 책상다리로 고쳐 앉았다. 노탁우가 의아한 눈으로 최두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최 포교는 무슨 할 말이 있어 온 겐가?"
"예? 강화엘 다녀오는 길입니다만.…"
"강화엔 왜?"
노탁우는 더욱 모를 일이라는 듯 오일중과 최두수를 번갈아 보았다. 그때 이제껏 말이 없던 오일중이 입을 열었다.
"내가 따로 알아볼 일이 있어 보냈었네."
"아, 예. 회주님 심부름을 갔었군 입쇼."
"그래, 알아보았느냐?"
"예, 김천수의 장인과 장모는 몰(歿) 한지 오래옵고 그곳에는 그의 처자가 살았사온데 이웃의 말로는 소인이 가기 나흘 전, 그러니까 지금부터 꼭 열흘 전에 어디론가 이사를 갔다 하더이다. 하옵고 천수의 스물다섯 난 아들이 꼽추이온데 이 아들이 제 아비와 함께 배를 타고 다녔다 하옵니다."
"옳거니, 얘기가 딱 맞아떨어지는구만. 보름 전에 상선을 털어먹고 열흘 전에 강화에서 관미성 마을로 옮겼구나."
노탁우는 제 생각이 어떠냐는 듯 오일중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일중의 시선은 윤기출에게로 가 있었다. 윤기출은 죄 없이 찔끔했다.
"관미성 아래로 옮긴 적도의 수가 대체 몇이나 되더냐?"
"예? 소인이 거기까지는 알지 못 하옵니다만....."
윤기출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오일중은 최두수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적도가 쓰는 병장기는 무엇이라 하더냐?"
"소, 소인도 거기까지는.…"
최두수 역시 고개를 꺾는 것 외에 달리할 말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오일중은 노탁우에게 눈길을 돌렸다. 노탁우의 우둥퉁한 얼굴에 긴장이 스쳤다.
"우리의 형세가 아직 보잘 것 없는 이 마당에 적의 숫자도 병장기도 모르면서 자네는 내가 어쩌길 바라나? 우리의 수가 부족하다고 경강의 무뢰배를 동원할 경우엔 자연 비밀이 샐 것이고 설혹 놈들을 소탕한다 해도 강화 유수가 우릴 탈 잡을 것일세."
"예? 그리되면 강화 유수나 경기 감사는 앓던 이가 빠지는 격이라 우리에게 상급이라도 주려 할 것입니다. 보름 전 털린 상선도 그놈들 짓이 분명하옵니다. 그러니 강화부에서 토포 말이 나오지 않사옵니까? 우리가 대신 소탕하면 당연히 공치사를 하겠습죠."
"쯧, 그렇지 않아. 대저 벼슬아치들이란 어쩌다 손톱만 한 공이라도 세울라치면 족보에 끼워서라도 후세의 자랑거리로 삼네. 하지만 남이 공을 세우면 어떻게 해서든 그 공에 흠집을 내려 애쓰지. 허고, 자신은 못하면서 남이 그 일을 대신해주면 그 공을 반드시 가로채서 자기의 공으로 만들고야 마네. 바로 그것이 벼슬아치요 양반이란 말일세."
"그렇다면 공은 제 놈들이 차지하더라도 우리에게 탈을 잡을 일이야 있겠습니까."
오일중은 노탁우가 하는 말을 듣더니 입가에 가느다란 냉소를 띠며 좌중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노탁우와 윤기출, 최두수 모두 말없이 오일중을 주목했다.
"그들이 볼 때 우리는 무엇인가? 이젠 우리 또한 강상의 무뢰배가 아닌가? 제 놈들 눈엔 또 한번 공을 세울 기회가 바로 우리들 아닌가?"
거기까지는 생각 못한 좌중의 세 사람은 동시에 찔끔했다. 자신들은 아직 포도청의 서슬 푸른 포교로 여겨 무뢰배로 전락한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오일중의 말을 듣고 보니 적의 숫자도 병장기도 모르는 것도 문제지만 이겨도 역시 문제였다. 세 사람은 이제서야 마개출의 복수에 적극 나서지 않는 오일중의 심경을 알 것 같았다.
"허면 마개출의 참변은 없던 일로 덮어야 합니까?"
노탁우의 물음은 윤기출과 최두수가 진작부터 하고 싶던 질문이었다. 세 사람은 다시 오일중을 주목했다. 그 순간 오일중는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 같았다.
"쳐야지."
"아하."
"어?"
"음."
오일중의 말이 끝나는 순간, 같은 소리는 아니어도 세 사람의 입에서 같은 뜻의 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치되 소리 없이 치고, 싸우되 속전속결로 싸우며, 뒤처리 또한 소문나지 않아야겠지."
"예, 잘 알겠사옵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놈들을 해치우라는 말씀 아니 옵니까? 그럼 언제쯤이 좋겠습니까?"
"우선 준비가 먼저 아닌가? 지금 당장 출동한다면 몇 명이나 나설 수 있겠는가?"
"십여 명 정도가 아니 올지요."
"상조회의 삼 분지 일이로군. 헛, 이런 일에 대비치 않은 나의 잘못이로세. 비상시를 위해 상비군을 새로 짜야겠군."
"여각과 객주에 나가 있는 인원만도 십여인이고 상단에 끼여 장사를 하는 인원이 또한 십여 명 아닙니까. 그러니 그 사람들을 불러다 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좋아, 됐네. 내일 당장 검술 조련관을 하던 자와 칼을 잘 쓰는 자는 여각과 상단에서 빼서 데리고 오게.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지. 검술에 능한 십여 명만 있으면 그쪽이 몇 명이든 어느 정도는 승산이 있으니까. 윤 포교와 최 포교도 교련관이었지?"
"예, 그러하옵니다."
"음, 그러면 너희 둘이 검술에 능한 놈들을 직접 뽑거라."
"예, 그리 합지요."
할 말을 마친 오일중은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 조는 듯 마는 듯한 자세로 돌아갔다. 세 사람은 일어나 말없이 선 절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부장님, 여각이나 객주에 나가 있는 회원들의 명부를 좀 보여주시지요. 칼 잘 쓰는 놈들이 어디에 박혔나 봐야 데려오든 말든 합지요."
윤기출의 말에 노탁우가 소매 속에 손을 넣어 얇은 장책을 꺼내 들었다.
"날 더운데 저기 나무 그늘로 가서들 보게. 허고 이것만은 알아들 둬. 천수패를 친다는 기미는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된다는 걸 말이야. 우리 셋만 알아야지 기밀이 새 나가면 만사 휴의란 말일세. 알았는가?"
"알고 있습니다. 부장님, 그동안 포교로 밥을 먹은 저희들 아닙니까?"
"암, 그래야지. 천수패를 쳐야 하는 회주님의 심중을 안다면 실패를 하면 안 되지."
관미성(關彌城)은 파주 오두산(烏頭山)에 있었다. 오래전 백제가 쌓았다는 이 산성은 지금은 다 허물어져 돌무더기만 몇 줄 남은 퇴락한 곳이었다. 그래도 병자호란 전까지는 오두산 꼭대기에 서해를 통해 한강으로 유입할지 모르는 왜구를 감시하는 초소가 있었다. 그러나 지난 병자년에 왜군보다 청군이 먼저 쳐들어와 한양과 강화가 쑥밭이 될 때까지 관미성 초소에서는 적군을 구경도 못했었다. 청군의 기마병이 바다가 아니라 육지로 쳐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강화를 함락할 때도 배를 타고 칠산과 당산으로 상륙한 것이 아니라 문수산성 남쪽의 갑곶을 건너왔던 것이다. 강화가 무너진 후 쓸모없던 관미성 초소는 아예 허물어 버렸다. 그리고는 사십 년이 넘도록 누구 하나 그곳을 거들떠보지 않아서 잊혀진 장소가 된 것이다. 그런 그곳에 지난해부터 집들이 은밀히 하나 둘 들어서더니 지금은 열두 채나 되었다. 집이래야 물론 용마루에 서까래 올린 그럴듯한 집이 아니라 움막에 가까운 띠 집이었다. 그런 가운데 조금 더 집 모양에 가까운 커다란 움막이 김천수가 기거하는 곳이었다. 그 움막에 천수와 곰보가 아침부터 여태까지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님, 우리 애들이 일을 못 나간지 벌써 며칠 째유? 이러다간 다 굶어 죽게 생겼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서로 얼굴만 보고 있을 작정이유?"
기다리기에 진력이 난 부두령 곰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조금만 더 기다리라지 않았느냐? 심부름 보낸 놈들이 돌아와야 앞뒤를 알 것 아니냐? 그 후에 대책을 세워도 늦지 않을 게다."
곰보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못마땅한 얼굴로 움막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천수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곰보의 뒤를 따랐다. 앞선 곰보가 조급한 걸음으로 잿간으로 향했다. 걸음을 빨리하는 곰보가 자기를 피하는 것으로 안 천수가 다시 한번 부드럽게 일렀다.
"그새를 못 참아 부두령이란 자가 자리를 뜨다니? 그러지 말고 너는 들어가 있거라. 내 잠시 소피 보고 오마."
"원, 나는 싸지 말고 묵혀서 뱃속에다 된장을 담그란 말이우? 그 된장 성님이 드실라우? 나도 싸러 가는 길이우."
"헛 난 또 네가 이마에 문자를 그리기에 내가 하는 일이 못마땅해서 도전을 하려는가 했지. 누가 똥이 마려운 줄 알았나? 그럼 같이 가자꾸나."
곰보는 잿간에 들어가기 바쁘게 고의를 내리고 쭈그리고 앉고 천수는 잿간 밖 깨어진 항아리에 다가섰다. 끙 소리와 함께 잿간에 앉은 곰보의 말이 들려왔다.
"도전을 하려면 좀 더 젊었을 때 했지, 이제 성님이나 나나 다 늙어 저승이 멀지 않은 마당에 그따위 두령 자리가 무얼 탐이 나서 도전을 한단 말이유?"
"그러게나 말이다. 말이 났으니 말인데 이참에 두령 자리를 네게 물려주고 나는 작은 섬에 들어가 조용히 남은 생을 마칠까도 싶다."
"언제는 죽을 때까지 함께 하자더니 이제 와서 성님 혼자 도망을 하겠단 말이우? 히힝, 그렇순 없수."
"말이 그렇단 말이지 나 혼자 그러기야 하겠느냐? 너나 나나 병신자식이 있는데 그걸 두고 어디를 가겠느냐? 얘기했다시피 이번 일만 해결되면 우리도 애들 데리고 아예 장삿길로 나서자꾸나. 그게 아들들을 위한 길이 아니겠느냐?"
"그거야 누가 몰라서 하는 말이유?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 화가 나서 그러지요."
"그게 어디 너만 그러냐? 영문을 모르고 숨어야 하는 나는 속이 좋은 줄 아느냐. 어찌 된 일인지 알아낼 때까지 너는 아무 말 말고 졸개들이나 단속하거라. 아차 하면 졸개들마저 동요가 될라."
"알았수. 그런데 명수와 번칠이 이 두놈은 또 어딜 가서 코빼기도 안 보이우?"
"그러게 말이다. 이럴 땐 좀 조심을 해야 할 텐데 말이다."
"좌우간 형님 아들놈이나 내 아들놈이나 장래가 걱정은 걱정이유. 이거 정말 이 짓을 그만두든지 해야지 원... ."
오줌을 다 눈 천수가 곰보의 말을 받아주느라 먼 산을 바라보고 섰다. 잠시 후 잿간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곰보가 고의를 여미며 나오고 있었다.
볼일을 마친 두 사람이 움막으로 돌아오는데 강가에서 졸개 한 놈이 그들을 향해 시적시적 걸어오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삼개로 보냈던 멍구미란 놈이었다.
"다른 놈들은 못 보았느냐?"
다가오는 멍구미를 향해 곰보가 물었다.
"배를 타고 오다 보니 행주 나루에 모여 있던 뎁쇼? 그러니 곧 오겠습지요."
"기약한 날짜와 시각에 딱딱 와야지 대체 뭣들하고 안 온단 말인가?"
움막을 향하던 곰보가 발길을 멈춰 강 쪽을 원망스런 눈길로 바라보았다.
"올 때 되면 어련히 알아서 오겠지. 그건 그렇고 멍구미 너는 갔던 일이 잘 되었느냐?"
천수가 곰보의 심기도 달랠 겸 멍구미가 알아 온 일이 궁금해 물었다.
"예, 두령님, 어물 짐이 수적에게 털린 일은 삼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더군입쇼."
"우리도 아는 일은 경강 왈짜나 상인들이 모르겠느냐? 그 물건을 턴 놈과 물건의 임자가 참말로 경상이더냐를 알아오랬더니 이놈이 엉뚱한 소리를 하는구만."
"그게 아니옵고 사실 그 대목을 알려고 지금껏 지채한 것 올시다. 털린 어물은 굴비가 무려 이천 갓이었답니다."
"뭐라고? 이천 갓씩이나?"
생각 밖으로 많은 물량에 천수가 놀라자 옆에 있던 곰보가 더욱 놀랐다.
"아니? 이천 갓이면 도대체 몇 짐이란 말인가?"
"열 갓씩 묶는다면 이백여 짐은 될 테지."
"아이고 두령, 그걸 우리가 먹었어야 했는데 먹기는 커녕 비린내도 못 맡은 우리가 수적(水賊)으로 몰려 이 꼴이 되다니 억울하기 짝이 없수, 하, 이거야 원."
"그러게나 말이다. 그래 물주가 경상이 적실하더냐?"
"아니요. 이번 일은 경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답니다. 삼개나루의 손가 객주와 거래를 해 오던 강화의 심첨지가 물주였답니다. 손가 객주의 거간 놈의 말을 들으니 숭례문 밖의 칠패와 이미 거래하기로 되어있던 물건이라 하옵니다. 그래서 강화 유수가 포청에 봇장을 띄워 장물이 경강에서 거래가 되는 것을 막아 달라고 했을 때 경상은 오히려 고소하게 생각하더랍니다. 경상들도 굴비에 진작 눈을 돌리고 있었거든요."
"니에미, 그런 걸 가지고 애매한 우리를 지목하다니. 이 빌어먹을 강화 유수 놈이 정작 수적질한 놈은 두고 우리의 뿌리를 뽑으려 덤비니... 두령, 무슨 수가 없겠수?"
"숨는 수 말고 달리 무슨 수가 있겠느냐? 물주가 강화의 심첨지였다니 굴비를 이천 갓이나 뺏긴 그놈이 가만있겠느냐? 우리는 관아 놈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이리로 피한 것만도 천행이었느니라. 좌우간 나갔던 졸개들이 다 돌아오면 사태를 알 수 있겠지. 그때 다시 의논을 해보자꾸나. 멍구미 너는 수고했으니 가서 쉬어라."
졸개를 보낸 천수와 곰보는 다시 움막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말이우. 굴비를 털어간 놈들은 그 많은 굴비를 어디다 쌓아두며 어디다 팔아먹겠수? 도성 안팎에는 이미 소문이 나서 장물 거래가 될 턱이 없지 않수?"
"다른 물목도 아니고 굴빈데 팔 곳이 도성 밖에 없겠느냐? 광나루나 삼밭 나루로 가서 그곳 보부상에게 넘기면 될 터인데."
"아니 성님은 말 같은 말씀을 하시우. 예서 송파까지는 이백여 리우. 그 먼 물길을 짐을 잔뜩 실은 배가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보시우?"
"여태 윗 여각까지 배들이 들락거렸는데 왜 못 가? 여울 많은 윗 쪽 양근까지야 못 간다 해도 물때를 맞춰 행주산성까지만 오르면 그까짓 송파야 오백 석 실은 조선(漕船)도 가고도 남을 게다."
"그럼 누군진 몰라도 그걸 털어간 놈들은 물건을 벌써 그쪽으로 옮겼단 말이우?"
"그거야 난들 아는 재주가 있나? 그러나 놈들이 멍청이가 아닌 바엔 물건은 털던 그날에 이미 도성에서 멀리 떠났을 것이야."
"그런데 나루로 나갔던 이놈들은 도대체 어떻게 되어서 여태 소식이 없단 말인가?"
곰보가 입맛을 쩍 다시며 갑자기 졸개 타령을 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탁배기 한 잔 마시지 못하고 졸개를 기다리자니 와락 짜증이 나던 것이다.
"나, 갈라우."
곰보가 벌떡 일어나 움막의 거적을 들쳤다. 보나 마나 자기 움막으로 돌아가 며칠 전 마누라를 시켜 담궈 둔 기장막걸리를 걸러 한 사발 하려는 것일 터였다.
"자네 어디 가나?"
천수는 곰보의 의중을 뻔히 들여다보며 짓굿게 물었다.
"성님은 졸개들이나 기다리고 계시우. 내 가서 탁배기 좀 마시고 올 테니."
"대낮에 왠 술인가? 술보단 낮잠을 한숨 자거라."
"히힝, 술을 두고 잠이 오우?"
곰보는 천수를 힐끗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부리나케 자신의 움막으로 가버렸다. 천수를 두고 혼자 마시는 것이 약간 미안했던 것이다. 천수는 술이라면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렇게나 마셔대던 술을 마시지 않게 된 것은 20여 년 전부터였다. 그가 술을 끊은 데는 사연이 있었다. 호구를 위해 처가인 강화로 내려왔을 때가 천수의 나이 한창 젊은 서른이었다. 그러나 막상 처가로 내려와 보니 할 일도 없고 또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처가도 넉넉한 살림이 아니어서 자신도 무슨 일이던 하긴 해야 했지만 고기잡이배를 타는 일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어쨌든 장인의 소개로 고기잡이배를 탔다. 하지만 배 위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노를 젓는 것도 그물을 꿰메는 것도 어느 것 하나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글을 몇 줄 읽은 것 외엔 매일 활이나 쏘러 다니고 싸움질이나 했지 이제껏 일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닷새도 못 채우고 배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파락호로 찍혀 문중에서 쫓겨나 강화까지 왔으나 이곳에서도 자신은 아무 쓸모가 없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양반도 아니고 상놈도 아닌 자신이 한심했다. 그리고 꼭 누구를 찍어 원망하기보다는 이런 세상이 원망스럽고 싫었다. 닷새의 품삯이라고 주는 조기 두어 갓을 숯막에 갖다 주고 시큼한 탁배기를 배가 터지게 마셨다. 술이 취한 천수는 처자가 있는 처가로 향했다. 삽짝을 들어서자 부엌에서 뛰쳐나온 장모와 마실에서 돌아오던 장인이 합동으로 천수를 몰아붙였다. 술김에 천수도 같이 누구에게 랄 것도 없는 욕과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비틀걸음으로 방으로 들어서려는데 이제까지의 소동에 놀란 다섯 살짜리 아들이 마루 끝에 서서 울고 있었다. 천수는 장인 장모에게 받은 설음을 털 듯 우는 아들의 뺨을 후려쳐버렸다. 불시에 뺨을 맞은 아들이 마루에서 떨어졌으나 천수는 못 본 채 방으로 들어가 쓰러져 잠이 들었다. 이튿날 한낮이 되어서 깨어난 천수는 누워 있는 아이와 울고 있는 처의 기색이 좋지 못한 것을 느꼈으나 다시 밖으로 나서고 말았다. 포구에 나가 건달들과 어울려 주먹질을 벌리고 투전판을 휘져어 술을 마시느라 닷새 만에 집에 들렀다. 아들은 그때까지도 자리에 누워 있었다. 아들은 먹지도 싸지도 못하고 하루하루 죽음을 기다렸다. 그러나 의원도 없지만 약 값으로 쓸 베 한필 없는 천수가 아들을 위해 할 수있는 일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천수는 그제서야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울었다. 그 후에 아들은 죽음은 면했으나 대신 마루 밑 댓돌에 찧은 등뼈가 낫질 않아 결국 꼽추가 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천수는 술을 끊고 이를 악물었다. 처가를 나와 해안가에 움막을 세우고 처자를 위해 본격적인 왈패짓을 하기로 했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호구를 하려는 것이었다. 포구의 어부들과 어물 객주와 외지에서 온 장꾼이 그의 먹이였다. 몇 년이 지난 후 싸움판에서 지금의 부두령인 곰보를 만났다. 공교롭게도 감나무에서 떨어진 곰보의 아들도 꼽추였다. 동병상련의 정과 의리로 뭉쳐진 둘은 이때부터 왈짜짓은 물론 때로는 수적질도 서슴지 않았다. 대신 처자는 더 이상 배를 곯지 않아도 되었다. 세월이 흘러 밑에 부리는 졸개도 여럿 늘었고 위로는 해주에서 아래로는 제물포까지 밥벌이 터도 넓혔다. 그동안 그들이 오랜 세월 동안 토포되지 않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를 꼭 지켰기 때문인지 몰랐다. 첫째, 천수패는 따로 소굴을 만들지 않고 철저히 어부로 행세하여 동네 사람들과 섞여 살았다. 누가 보더라도 고기를 잡아야 먹고 살 수 있게 보인 것이다. 둘째는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관선(官船)은 절대 털지 않는 것이었다. 따르는 식솔들이 겨우 먹고 살 만큼만 털어야지 욕심이 화를 부른다는 것은 다른 수적들의 끝을 보면 알았다. 그리고 관선을 털어 무사한 수적은 보질 못했다. 관선이 털리면 조정에서부터 난리를 부려서 집요한 추적을 받게 마련이라 결국은 토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천수패는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어부에서 수적으로 모습을 바꿔가며 이제껏 배곯지 않고 살아온 것이다. 헌데 보름 전 어떤 미친놈들이 강화도 달곶 해상을 지나는 상선을 털었는데 물주가 세력가였던지 이튿날 즉각 군졸이 쏟아져 나와 배들을 기찰했다. 관선이 털린 게 아니니 곧 흐지부지될 거라고 생각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의외로 삼엄한 조사를 계속해 나갔다. 배 뿐만 아니라 포구도 마찬가지여서 주막에서 얼쩡대는 술꾼들을 잡아 어르고 두들겼다. 그런데 하필 술꾼 가운데 천수의 수하 한 놈이 잡혔는데 매 몇 대에 그만 하지도 않은 짓을 불고 말았다. 유수(留守)의 불같은 호령에 득달같이 포졸들이 모여 병장기를 챙길 즈음 다행히 다른 졸개가 먼저 달려와 천수에게 알렸다. 천수는 즉시 곰보와 함께 처자를 싣고 평소에 마련해둔 은신처인 관미산성 아래로 피했다. 조심성 많은 천수가 그동안 봐 두었던 장소에 몰래몰래 움막을 지어 피난처를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숨겨둔 장소는 이곳 말고도 장단과 석곶에도 있었다. 천수는 상선을 턴 놈들이 누구인지 그것이 제일 궁금했다. 자신들이 이제껏 활동하던 곳에 또 다른 수적이 생겼다는 것이 몹시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화는 물론 경강의 각 나루와 도성 안까지 졸개를 풀어 놈들의 정체를 알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멍구미 말고는 한 놈도 돌아오지 않아 아직도 어물을 턴 놈들이 누군지 모르니 속이 탈 수밖에 없었다. 천수는 곰보의 타는 속도 알고 있기에 낮부터 술을 마시려는 그를 눈을 감아 주기로 한 것이다. 이래저래 속이 상한 천수가 졸개들이 돌아올 때까지 잠시 눈을 붙여보기로 했다.
바로 그 무렵쯤에 오두산에서 30리 정도 떨어진 김포벌 양촌에서였다. 이제 막 주낙배에서 내린 천수의 아들 명수와 곰보의 아들인 번칠이가 배를 물에서 끌어올려 갈대밭에 감추고 있었다. 밀물이 밀려오는 시각에 맞춰 오두산을 출발해 힘들이지 않고 이곳에 닿은 것이다. 그러나 만조가 되지 않은 개펄 바닥이라 그들은 걷어 올린 고의까지 흙투성이였다. 번칠이가 콧등에 튄 개흙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돌아섰다.
"이만하면 되돌아올 때까지 남의 눈에 띄진 않겠지?"
"그럼, 화약만 받으면 금세 돌아설 텐데 뭐."
"그 영감이 정말 화약을 만들어 놨을까?"
"설마 늙은이가 우릴 속이기야 하겠니?"
"그래도 그렇지. 화약을 만들려면 유황이 있어야 한다구 하잖았냐? 하면, 그 영감이 유황을 어디서 구한단 말이냐?"
"어디서 구하든 구할 자신이 있으니 만들어 준다고 했겠지."
"글쎄 난 아무리 생각해도 그 영감이 유황을 구했을 것 같진 않아."
곰보 아들 번칠이는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갈대를 헤치며 앞장을 섰다. 그는 어깨에서 허리께로 엽전 뭉치를 싼 전대를 두르고 손에는 좁쌀 자루까지 들었다. 같은 곱추라 해도 번칠이가 명수보다 등이 약간이나마 덜 굽어서인지 키가 두세 치는 더 커 보였다. 그 뒤를 따르는 명수는 상대적으로 더 왜소헤 보여서 땅을 향해 기역 자로 굽은 몸이 몹시 안쓰러웠다. 그러나 걸음을 걷는 그의 동작은 놀라울 정도로 민첩해서 성한 사람보다 오히려 나을 정도였다.
"야, 그 자루는 이리 내, 내가 들 테니까."
"저기 시냇가까지만 들어다 줄 테니 따라오기나 해."
"그럼 고맙지. 하지만 자루 정도는 내가 들 수 있으니까 이리 내."
"이깟걸 뭘 들고말고 할 게 있냐? 봐라 개울에 다 왔다."
드넓은 갈대 밭을 헤치며 반 마장쯤을 더 가자 작은 개울이 나타났다. 번칠이는 개울에 닿기도 전에 자루와 전대를 벗어던진 후 물로 뛰어들었다. 더운 날씨였다. 말복이 지나고도 열흘이 지났건만 더위는 고개를 숙일 줄 몰랐다. 더운 날인만큼 개울물은 더욱 시원하고 좋았다. 소금기와 뻘이 섞인 큰 강에 비하면 수정같이 맑은 물인 것이다. 명수도 옷을 입은 그대로 물에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그새 말라붙은 뻘을 씻어내기에 바빴다. 뻘은 다리와 잠방이뿐 아니라 등거리에까지 튀어 둘은 서로의 등에 물을 끼얹어주었다. 훌렁 벗어 빨면 말리기도 쉽겠지만 둘은 누가 보든 안 보든 언제나 옷 벗기를 꺼렸다. 뒤틀려 굽은 등을 서로에게 보이기도 싫고 보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둘은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벌렁 드러누워 하늘을 보았다. 물속이 아니면 똑바로 드러누울 수도 없으니 제대로 하늘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하늘엔 구름도 없었다.
"번칠이 넌 상선을 털어먹은 놈들이 누구라고 생각하니?"
뜬금없는 명수의 물음에 번칠이가 누웠던 몸을 일으켜 얼굴만 내놓고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하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나야 알 수가 있냐? 각 나루에 나간 애들이 돌아오면 꼬리가 들어나겠지."
"달곶 어름에서 일을 저지른 걸 보면 먼 곳에서 온 놈들이 아닐까?"
"지 지난해를 생각해 봐. 황해 감영과 경기감영이 병을 총동원해 무인도에 숨은 수적들까지 모조리 토포했잖아?"
"그래도 우리가 한 짓이 아니니 다른 수적이 또 있다는 얘기 아니겠냐?"
"그건 그래. 우리 아비 말로는 살아남은 황해도 수적이 있을 거라더라."
"아무튼 만일은 위해서 우리도 준비를 단단히 하긴 해야겠지."
"그래서 여길 온 것 아니냐. 그만 가자."
번칠이가 먼저 일어나 물가로 걸어나갔다. 명수도 따라 일어섰다. 그때 앞선 번칠이가 무슨 기척에 놀라 우뚝 섰다. 동시에 갈대를 헤치는 사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사내가 불쑥 나타나 다짜고짜 물가에 벗어 놓은 전대를 덥석 집어 들었다. 갑작스런 사내의 출현에 번칠이가 움찔하며 물러났다. 다가가던 명수 역시 우뚝 설 수밖에 없었다. 번칠이와 명수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제 물건처럼 전대를 움킨 사내가 돌아서려다가 문득 두 사람에게 눈길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번칠이와 명수의 행색을 살피기 시작했다. 젖은 옷이 몸에 찰싹 붙어서 두 꼽추의 꺾어진 등과 부실한 몸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 몰골을 지긋이 바라보던 사내가 들었던 전대를 다시 바닥에 툭 던지더니 말없이 돌아섰다. 명수와 번칠이가 서로 눈길을 마주쳤다. 사내의 행색을 보건대 걸인과 다름없는 몰골인 주제에 자신들이 불구라는 걸 알자 전대를 되돌려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던 것이다. 헝겊을 두른 막대기는 칼이 틀림없고 스스럼없이 남의 전대를 움키는 것을 보면 그 사내도 강도나 도적이 분명했다. 게다가 볕에 그을린 시커먼 낯바닥에 낡아빠진 패랭이를 빠딱하게 쓴 꼴이 자신들보다 별로 나을 것도 없었다. 전대를 거머쥔 번칠이가 사내의 뒤를 따라 뛰며 외쳤다.
"이보시요. 누군진 모르나 나 좀 보고 가시오."
명수도 물 밖으로 나오자말자 좁쌀 자루를 들고 번칠이를 따라 뛰었다. 우거진 갈대밭 사이로 난 노루 길을 키 작은 두 꼽추가 뛰니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다만 갈대만 와들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번칠이 자신은 뛴다 하나 성큼 걸음을 걷는 사내와 가까워졌을 땐 이미 갈대밭이 끝난 곳이었다. 사내가 마을로 가는 길 위에 올라 뒤따라온 두 꼽추를 내려다보았다. 높은 곳에 버티고 선 사내는 아까보다 훨씬 더 커 보였고 수염이 무성한 그의 얼굴은 어떤 위엄마저 있었다. 특히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형형해서 두 사람을 제압하기에 넉넉했다. 그러나 두 꼽추는 그런 사내에게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또박또박 말을 뱉었다.
"대장부가 한번 뺏겼으면 그걸로 그만이지, 아니, 우릴 동정해서 전대를 돌려준단 말이오? 이걸 도로 가져가시오."
"그렇소, 내가 보기엔 당신도 이걸 마다할 처지가 아닌 것 같소."
의외의 말인 듯 사내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명수와 번칠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번칠이 힘겹게 둔덕의 길로 올라서 사내와 마주 섰다. 그리고는 사내 앞으로 불쑥 전대를 내밀었다. 그러자 사내의 눈빛이 풀어지며 입가에 빙긋 웃음이 감돌았다.
"아까는 내가 허기 탓에 잠시 뵈는 것이 없었다. 허니 그 전대는 너희들이 챙기거라."
사내는 다시 한번 두 꼽추를 향해 싱긋 웃고는 뒤돌아 시적시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번칠이와 명수가 그 뒤를 따르며 말을 걸었다.
"허기가 져도 체면은 차려야 하오?"
"정 그러시다면 우리가 탁배기라도 살 기회를 줘야 할 것 아니오? 뺏겼던 돈을 돌려받은 이유가 뻔하니 그게 싫어서 그러오. 어쩌시려오?"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얼굴엔 웃음기도 없었다.
"술을 사겠다? 그렇다면 좋다. 기왕이면 밥까지 사거라."
그 말을 기다린 듯 사내의 말이 끝나자 두 꼽추가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히힛, 이제야 말이 통하네. 좋습니다. 우릴 따라 오시지요."
불구임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행동하는 두 꼽추의 기백이 좋아 보였는지 사내는 두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명수와 번칠이 역시 예사 도적과 다른 사내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말씨나 태도를 보면 몰락한 양반 지꺼기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도적이 아닌 변복한 포교나 무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척 보니 도적질이 처음 같습디다. 제 말이 맞지요?"
앞장선 번칠이 돌아보지도 않고 사내에게 물었다.
"뭐라? 척 보고 어찌 아느냐?"
"그야 뻔하지요. 이 사정 저 사정 다 봐 주는 도적 놈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도적질을 하다가는 굶어 죽기 십상이지요."
우뚝 걸음을 멈춘 사내의 얼굴이 굳어지며 미간을 찌푸렸다. 꼽추가 자신을 꿰뚫어 본 듯해서였다. 사내는 다시 걸음을 옮겨 그들을 뒤따랐다.
"도적이 아닌데 강가 갈대밭에 숨어 있었겠느냐?"
사내의 말에 이번엔 명수가 몸을 돌려 히죽 웃으며 받았다.
"그야, 도강할 곳을 찾는 도망자 거나 도망자를 잡으려고 변복한 포교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저 윗 쪽의 나루를 두고 왜 이곳을 헤매겠습니까."
"포교라면 너희들이 수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냥 돌아섰겠느냐?"
"엇, 수적? 무얼 보구 우릴 수적으로 모는 거요?"
"헛, 왜 몰라. 아까 개울에서 너희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으니 알지."
"우리가 하는 얘기를 다 듣고도 전대를 집었단 말입니까?"
"그야 허기를 이길 수적이 있겠느냐? 허고 도적놈 집에 화적 들기 예사 아니냐?"
명수와 번칠이 어이없는 얼굴로 마주 보며 웃음을 흘렸다.
"그럼 그쪽도 천상 죄를 짓고 도망치는 몸이겠구려."
"지은 죄도 없고 도망자도 아니나 세상에 떳떳이 나설 수도 없는 몸인 것은 맞다."
"거 어렵게 말하지 말고 쉬운 말로 해 주시지요."
"좋다, 말해주지. 집도 없고 지닌 돈도 없고 호패도 없단 말이다. 이러고도 나루에 가겠느냐? 아까는 사실 너희들이 가고 나면 배를 잠시 빌릴까 해서였는데 전대가 먼저 눈에 띄었던 게야."
"배를 빌리다니요? 그게 어찌 빌리는 겁니까. 훔치는 거지요."
"헛, 그러게 다 그만두지 않았나. 그러는 너희들은 수적질한 돈으로 벌건 대낮부터 술을 마시러 가는 길이냐?"
"우리의 정체를 알고 있다니 솔직히 말하지요. 얘 이름은 명수고 저는 번칠이라 하지요. 우린 사실 지금 화약을 얻으로 가는 길입니다."
"뭐라? 너희 패거리들이 조총을 가졌느냐?"
화약이란 말에 사내는 깜짝 놀라더니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우리를 무슨 나라를 엎을만한 대적으로 보십니까? 우리는 그냥 봇짐이나 털어 연명할 정도인데 무슨 조총들을 다 가졌겠습니까? 십여 년 전에 우리 아비가 우연히 얻은 조총을 내게 주어서 그걸로 이따금 노루나 잡아먹는 정도지요."
"허면 그동안 화약은 어디서 구했단 말이냐?"
"화약이 떨어져 조총을 못 쓴지 근 삼 년입니다. 그 후에 화약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봤지요. 강화 돈대(墩臺)에 화약이 있긴 한데 쥐가 고양이 부랄 훔치기가 쉽지 그걸 어찌 빼냅니까? 그런데 생각도 못한 이런 곳에 화약을 만들 줄 안다는 사람이 있지 뭡니까. 이 전대의 돈이 화약을 살 돈입니다."
"그런 돈을 내게 주려 했느냐? "
"그거야 아까는 병신 대접을 받아 잠시 화약 생각을 잊은 탓이지요."
"그럼 화약을 사고 나면 술값은 없겠구나."
"여기 좁쌀이 서너 되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저 길로 두 마장만 가면 길가에 주막이 있으니 먼저 가 계시던지 아니면 여기 나무그늘에 잠시 앉아 쉬시지요. 우리는 저기 보이는 외딴 집에 들러 화약을 받아 오겠습니다."
명수가 가리키는 외딴 집은 작은 언덕 위에 있었고 그리 멀지 않았다. 그러나 더운 날씨에 허기까지 더한 사내는 길가 나무 그늘에 펄썩 주져 앉아 쉬기로 했다. 두 꼽추가 외딴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뒤에서 보는 사내의 눈엔 그들의 굽은 등만 보일 뿐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딴엔 부지런히 걷는 둘의 걸음걸이도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부자연스러워 보는 사내의 눈길이 아렸다. 그러다 문득, 화약을 제조할 줄 안다는 인물이 누구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화약이라면 치가 떨리는 일이기는 하나 그럴수록 그것을 만드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은 것이다. 사내는 지친 몸을 천천히 일으켜 엉덩이를 턴 다음 헝겊으로 싼 막대를 어깨 위에 올리고 두 꼽추의 뒤를 따라 외딴 집으로 향했다.
"닷 냥으로 될까?"
집이 가까워 지자 번칠이 다시 걱정을 했다.
"글쎄, 닷 냥이면 쌀이 한 섬 반이 넘고 좁쌀로 치면 석 섬 아니냐? 닷 냥이 설마 화약 한 됫박 보다 못하겠니?"
"왜국이나 청국서 들어오는 유황 값이 그렇게나 비싸다니 하는 말 아니냐."
"그것까지야 우리가 알 것 없지. 어쨋던 이번에 화약을 조금이라도 구해야지 만약 관군이 들이닥치면 병장기 하나 없는 나는 큰일 아니냐?"
"그건 그래. 그러게 너도 진작 나처럼 활을 배울걸 그랬지?"
"넌 몰라도 내 몸으론 시위를 당기지도 못하겠더라."
"가만 다 왔다. 어라? 저걸 봐라. 삽짝이 닫혀 있잖아?"
번칠의 말대로 노인의 집 삽짝이 닫혀 있었다. 이런 외딴곳에 누가 오고말고 한다고 삽짝을 닫았을까? 게다가 화약을 가지러 오기로 서로 약속을 한 날이 아닌가? 가까이 다가간 번칠이 삽짝을 밀어보았다. 그러자 뒤를 받치지 않은 삽짝은 생각 밖으로 쉽게 열렸다. 둘은 봉당 앞으로 다가갔다. 댓돌 위에 짚신이 놓인 걸로 보아 노인은 방안에 있는 것 같았다.
"노인장, 계시오? 우리들 왔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외짝 지겟문이 벌컥 열리더니 못 보던 상투잡이 하나가 봉당으로 불쑥 나섰다. 이어서 또 하나의 상투가 나오는데 그들의 손에는 육모 방망이가 쥐어져 있었다.
"어엇, 포졸이다."
"헛."
번칠이와 명수는 자신들도 모르게 주르르 마당 가운데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잽싸게 뒤돌아서 뛰려 할 때였다. 삽짝 옆 잿간에서 키가 껑충한 놈이 나타나 앞을 턱 가로막았다. 놈의 손에는 방망이 대신 기다란 환도가 쥐어져 있었다.
"요놈들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목이 떨어지기 전에 순순히 오라를 받아라."
앞뒤가 막힌 명수와 번칠이는 눈앞이 아득했다. 그러나 놈의 말처럼 순순히 묶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눈을 굴려 좌우를 살피던 둘은 재빨리 갈라져 좌우로 뛰었다. 절구가 놓인 쪽으로 뛴 명수는 절굿공이를 잡고 울타리 쪽으로 뛴 번칠이는 지겟작대기를 움켜쥐었다. 그것을 본 포졸들도 좌우로 갈라져 한 명씩을 맡았다.
"허, 이놈들이 죽지 못해 용을 쓰는구나."
"거 좋지. 날도 덥고 끌고 가기도 귀찮은데 아예 죽여주마."
다짜고짜 육모 방망이가 불쑥 나오자 명수가 엉겁결에 절굿공이를 들어 막으려 했다. 그러나 왜소한 체격에 비해 절굿 공이는 너무 크고 무거워 미쳐 막기도 전에 명수의 어깨 위로 육모 방망이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 한 대에 명수는 마치 회초리를 맞은 개구리처럼 단번에 땅바닥에 쭉 뻗어버렸다. 다른 포졸 역시 번칠이가 가진 지겟작대기에 코 웃음을 날리며 다가들었다. 번칠이는 지겟작대기를 창처럼 꼬나 잡고 다가오는 포졸을 노렸다. 그 순간 삽짝께에서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놈들 멈추거라."
나무 그늘에서 기다린다던 사내였다. 소리를 지르던 사내가 마당을 들어서려다 우뚝 멈추었다. 키가 껑충한 놈이 칼을 쥔 채 자신을 향해 돌아섰기 때문이었다. 번칠은 그 틈을 이용해 잽싸게 삽짝께로 뛰었다.
"어라?"
허를 찔린 포졸이 방망이를 쳐들며 뒤를 따랐다. 그 순간 포졸의 눈에 번칠이 어깨에 두른 전대가 눈에 띄었다. 순간 욕심에 마음이 흔들린 포졸이 전대를 피해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어깨를 설핏 비낀 방망이가 하필이면 등짝에 내려앉아서 그대로 풀썩 주저 앉듯 무너졌다. 그것을 본 사내가 순간 낯을 찌푸리며 어금니를 지긋이 물었다.
"이놈들아, 상대가 되지 앉는 불구를 그렇게 다루다니 부끄럽지 않느냐?"
"너는 뭐냐? 보나 마나 너도 수적이로군."
칼을 든 놈이 사내의 아래위를 살피며 싱긋이 웃는 얼굴로 이죽거렸다.
"내가 수적이면 네가 날 벨 테냐?"
"어라? 나를 모르느냐? 내가 바로 수적들의 염라대왕인 황 포교이니라. 어떠냐? 많이 들어본 성함이렸다?"
"황 포굔지 황천길인지 가서 염라대왕 하고나 놀아라."
"뭣이라? 오냐, 죽여주마."
"헛, 그놈."
사내가 헝겊 속의 칼을 스르릉 소리가 나게 빼 들었다. 그리고 빼 든 칼 끝을 비스듬히 땅을 향해 뉘었다. 그 자세를 본 황 포교란 자가 콧바람을 힝 날리더니 봉두 자세로 칼을 고추 세웠다. 한데, 명수와 번칠이를 때려눕힌 두 포졸놈들의 행동이 수상했다. 두 놈 다 허릿춤에서 오라를 꺼내더니 슬그머니 사내를 에워싸고 투승(投繩) 자세로 줄을 돌리는 것이다. 보나 마나 두놈이 오라를 던지는 순간 황 포교란 자의 칼날이 날아들 것이다. 이놈들의 행동으로 봐서 서로 간에 손발을 제대로 맞춘 놈들이었다. 졸지에 세 놈을 감당하게 된 사내는 울바자를 등지기로 했다. 사내가 울타리로 다가가는 기미가 보이자 오라를 돌리는 포졸의 동작이 더 빨라졌다. 사내가 재빨리 칼을 거두어 자신의 코앞에 수직으로 세웠다.
"옛다. 받아라."
"끼놈."
예상대로 찰나의 순간도 두지 않고 두 줄의 투승이 날아들더니 동시에 머리 위로 쳐들었던 황 포교의 칼날이 번개처럼 내려왔다. 그러나 이미 그럴 줄 알았는 듯 사내는 자신에게 씌워진 올가미를 그대로 칼날로 밀며 칼끝은 황 포교의 가슴을 향해 쭉 뻗었다. 포승을 자르는 것과 가슴을 찌르는 것을 한 동작으로 취한 것이다. 극히 짧은 순간의 일이었다. 황 포교의 칼날이 미쳐 사내에게 닿기도 전에 승패가 갈렸다. 명치에 칼날이 박힌 황 포교의 눈이 흰자위로 뒤덮이며 목이 꺾였다. 포승을 자르는 순간을 노려 칼질을 하려던 황 포교가 제 꾀에 황천길로 들어선 셈이었다. 연이어 사내는 포교의 몸에서 칼을 빼는 것과 동시에 오른쪽 포졸을 향해 몸을 빙글 돌리며 획 그어버렸다. 서너 걸음 밖의 포졸이 단칼에 허리가 꺽여 풀썩 고꾸라졌다. 그러자 남은 한 놈이 삽짝을 향해 후다닥 튀었다. 그러나 삽짝과 더 가까이 있던 사내는 왼손에 쥐었던 칼집으로 뛰는 놈의 무릎을 강타했다. 딱하는 소리에 무릎뼈가 부서진 놈이 마당에 이마를 박고 딩굴었다. 사내는 쓰러진 포졸은 본체만체 두고 번칠이에게 다가가 상처를 살피더니 일으켜 앉혔다. 번칠이는 등을 맞긴 했으나 다행히 상처가 심하진 않았다.
"명, 명수는 괜찮은지요."
"글쎄, 아직 보지 않았다. 하지만 죽지는 않을 게다."
사내는 번칠이를 울타리에 기대어 준 후 명수에게 다가갔다. 명수는 번칠이보다 상처가 심한 것 같았다. 맞은 어깨는 그새 퉁퉁 부었고 시커멓게 피멍이 들어 있었다. 사내는 명수를 안아 봉당의 토방에 모로 뉘었다. 그리고 다시 번칠이에게 다가갔다.
"어, 어, 저, 저놈이 도망을.…"
번칠이가 삽짝을 나서는 포졸을 보며 외쳤다. 무릎뼈가 부서진 놈이 번칠이가 쥐었던 지겟작대기를 다리 삼아 도망을 치려는 것이었다. 성큼 다가간 사내가 놈의 상투를 잡아끌고 다시 마당으로 끌어들였다.
"한번 물어서 대답이 없으면 베겠다. 너흰 누구냐?"
"대답할 테니 제발 살려주오…."
"대답을 하랬더니 엉뚱한 수작을 하는구나. 다시 묻는다. 너희들은 누구냐?"
"소인은 졸개에 불과한 몸이 올시다. 칼 들었던 저 사람이 강화 유수의 명을 받아 진무영(鎭撫營)에서 나온 군관 올시다."
"이 집엔 무얼하러 왔느냐?"
"저 꼽추들을 잡으러 왔습지요."
"여기 올 것을 어찌 알고 기다렸느냐?"
"그, 그게 얘기하자면 깁니다."
"짧게 말해 봐라."
포졸 놈이 부서진 무릎을 두 손으로 붙들고 잔뜩 겁먹은 얼굴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사내에게 다짐을 받듯 물었다.
"얘기를 마치면 살려주겠다는 약조를 해 주실 수 있겠습지요?"
"한번 말했으면 그것이 곧 약조인데 무슨 잔말이 많으냐? 말하기 싫은 게야?"
"아 아니오이다. 말합지요. 보름 전 월곳 앞바다에서 어물 짐을 털어간 그 쪽 패거리를 좇던 중에 저 두 곱추가 포촉이 되었습지요."
"그 쪽 패거리라니? 이놈 봐라? 네 눈엔 내가 수적으로 보이느냐?"
"예? 수적이 아니라니요? 천수패가 아니란 말씀 이오이까?"
"아니니 아니랄밖에. 하나, 말은 계속하거라."
"아, 예. 그렇다면 말하기가 한결 수월합지요. 그게 그러니까... 강화 일대에서 수적질을 할 만한 패거리는 천수패 밖에 없다는 걸 유수영에서도 진작 알고 있었습지요. 알고도 여태 놈들의 뿌리를 뽑지 않았던 것은 그동안 천수패가 관선을 턴 적이 없는 데다 천수패가 있으므로 해서 다른 수적들이 발을 못 붙이기 때문 입지요. 그런데 보름 전 털린 어물짐이 하필이면 강화의 심첨지의 것이었습지요. 물주가 누군지 몰랐는지 알고도 털었는지는 모르나 어쨌든, 그걸 털었으니 사달이 날 밖에 없었습지요. 심첨지는 병판 대감의 삼종질이라 강화 유수도 어쩌지 못하는데 어쩝니까요. 포토를 할 밖에요. 하지만 동헌에다 군사를 모아 대오를 짜는 사이 기밀이 새서 놈들이 도타를 해 버렸습죠. 그래서 기찰 꾼을 다시 풀어 염탐을 한 결과 저 두 놈들이 오두산에서 이곳으로 드나드는 것을 알아냈습지요. 그런데 이 집을 조사해보니 이집 영감이란 자가 또한 맹랑하게도 군기시 관노로 있던 늙은이였습죠. 늙은이를 닥달해 오늘 화약을 가지러 온다는 걸 알구서 저놈들을 사로잡으려 했던 것 올시다. 더 이상은 말할 것두 없으니 나으리께서 그만 살려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요."
"꼽추를 사로잡아 무얼 하려 하였느냐?"
"그건 꼽추를 앞세워 놈들의 소굴을 들이칠 심사였습죠. 놈들이 반항을 하더라도 설마 제 아들놈이 우리들 손에 있으니 꼼짝 못할 것 아닙니까요."
"이 집 영감은 어떻게 했느냐?"
"저 방에 있습지요."
"죽였느냐?"
"아까까지는 목숨이 붙어 있었습지요. 지금은 모르겠소이다."
사내가 성큼 명수를 뉘여 놓은 봉당으로 올라서 방문을 열었다. 방이 어두워 밝은 곳에 있던 사내의 눈에는 잠시 동안 캄캄해서 보이는 것이 없었다. 잠시 주춤하던 사내가 눈에 힘을 주며 방으로 들어서니 코끝에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영감은 벽에 기댄 채 눈을 반쯤 뜨고 있었다. 사내가 다가가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노인장, 정신 차리시오."
노인이 꿈틀하더니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힘없이 물었다.
"..... 뉘시오?"
"꼽추와 같이 온 사람이오. 어찌 된 일이오?"
노인이 꺼져가는 눈빛을 들어 한참 동안 사내를 응시하더니 아무 말없이 손으로 구석의 삿자리를 가리켰다. 사내가 삿자리를 치켜들자 방바닥에는 손바닥만 한 구멍이 있고 그 속에서 호로 박과 작은 주머니가 나왔다. 크기에 비해 주머니는 꽤나 무거웠다.
"이게 무엇이요? 화약과 연환(鉛丸)이요?"
사내가 물었건만 노인은 답이 없었다. 사내가 노인의 기색을 살피다 목의 맥을 짚어보았다. 그 사이에 숨이 끊어져 있었다. 사내는 호로 박과 주머니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한데, 삽짝께에 있던 포졸이 가슴에 장검이 박힌 채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 번칠이가 숨을 헐떡이며 앉아 있었다. 번칠이가 죽은 포교의 칼로 무릎뼈가 부서진 포졸을 찌른 것이다.
"이놈을 살려줄 순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지. 자, 이젠 어쩌면 좋겠느냐? 네 동무를 한시바삐 의원에게 보여야 할 터인데 관군을 죽인 처지로 밝은 대낮에 의원을 찾아갈 수도 없으니 말이다. 어떠냐? 너희 소굴로 데려다줄까?"
"물때가 맞지 않아 혼자서 노를 젓기가 힘든 데다 이 꼴을 다른 배에게 보일 수도 없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여기서 시간을 보내다가 어두워지면 썰물에 맞춰 나간다면 문제없을 겁니다. 그때까지 명수는 제가 돌보지요."
"의원을 들이대야 할 것 아니냐?"
"글쎄요, 가까운 곳에 의원이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한 데다 의원이 옆에 있대도 별 수 없을 것입니다. 일단 상처를 싸 맨 후에 의원의 약을 받아 먹이는 것이 나을 겝니다."
"음, 네 말이 일리가 있다. 일단 어깨뼈가 상한 것 같으니 동여매고 볼 일이다."
사내가 포교와 포졸의 피 묻은 저고리를 벗겨서 성한 곳을 골라 북북 찢기 시작했다. 번칠이는 봉당에 뉘인 명수에게로 다가가 그를 일으키려 애썼다. 그걸 본 사내가 찢은 헝겊을 봉당에 놓고 명수를 일으켜 앉혔다. 그리고는 둘이서 상한 어깨뼈와 팔을 싸잡아 움직이지 않게 동였다. 사내는 마당의 시체들을 끌어 잿간에다 옮긴 후 화약과 연환 주머니를 번칠에게 주었다.
"이게 화약인가 보더라. 너도 조총을 다루느냐?"
"조총은 명수가 다룹지요. 저는 작궁(雀弓)을 씁니다."
"작궁이라니? 참새를 잡는 작은 활 말이냐?"
"그렇긴 한데 작다고 얕봤다간 큰일 납니다. 크기만 작지 엄청 세지요."
"활이 작으니 화살은 애기 살 같겠구나."
"애기살보단 서너 치 정도가 더 깁니다."
이때 바닥에 뉘였던 명수가 실눈을 뜨며 꿈틀거렸다.
"가만, 네 동무가 정신이 드나 보다."
"어, 그렇군요. 야, 명수야. 정신 차려라."
번칠이 명수를 부축해 앉히는 동안 사내가 부엌으로 짐작되는 곳으로 들어가더니 물바가지를 들고 나왔다.
"물을 마셔라. 정신이 날게다."
사내의 물바가지를 받아 든 번칠이 명수의 입에 대 주었다. 어깨의 통증을 간신히 참으며 몇 모금을 넘긴 명수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되었냐?"
"어떻게 되다니? 너나 나나 다 무사한 걸 보면 모르겠니? 여기 계신 분이 다 처치하셨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의 은인이신데 인사가 너무 늦었습니다."
번칠이 벌떡 일어나 고꾸라지듯 사내 앞에 엎드렸다. 간신히 앉은 명수도 한 손을 짚고 머리를 조아렸다. 당황한 사내가 번칠이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만 되었다. 내 어쩌다 이 일에 휘말렸으나 너희들을 알게 된 것은 기쁘게 생각하느니라. 비록 불구의 몸이나 비굴해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눈 깜작할 사이에 셋을 해치우신 걸로 봐서 보통 분은 아니신 게 적실합니다. 소인들에게 함자라도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박일주란 사람으로 이곳저곳으로 떠도는 보잘것없는 과객이다."
박일주라고 이름을 밝힌 사내는 사헌부의 감찰직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지난겨울 송수호와 함께 김경준에게로 가는 유황을 좇아 원주에 갔다가 관군과 함께 수십 명이 폭사했을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 후 생사를 모르는 송수호를 찾을 겸, 관의 눈을 피해 이곳까지 온갖 고생을 하며 온 것이다. 박일주가 그동안 거쳐 온 곳은 원주에서 여주로 여주에서 이천 용인 수원으로 거기서 다시 시흥과 부천을 거쳤으니 릿수로는 불과 4백여 리에 불과하나 근 여덟 달을 길에서 보낸 것이다. 행방이 묘연한 송수호의 행적을 찾아야 하고 밥도 빌어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나마 행색이 멀쩡해서 과객질로 버티었으나 겨울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자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한 번도 빨아본 적이 없는 때묻고 헤진 옷차림은 누가 봐도 유랑 거지였다. 결국 거지꼴로 변하고부터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헛간에도 재워주는 집이 없었다. 게다가 거지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어서 박일주의 솜씨로는 조밥 한 술 얻기도 힘들었다. 하도 굶다 보니 눈에 뵈는 게 없어 언젠가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벌건 대낮에 부잣집에 들어가 밥을 강탈하기도 했다. 또한 박일주는 애초부터 한양성 부근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아는 얼굴을 만나도 좋을 일이 없는 데다 송수호와 자신을 그 지경으로 만든 걸 보면 몸을 담았던 사헌부일지라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우상 김석주가 아직 건재하니 관원의 눈에 띄었다간 오히려 역도로 몰릴 것이 뻔했다. 오늘 낮에 강변을 헤맸던 이유는 도강을 해서 황해도 쪽을 더듬어 볼 요량이었는데 생각지 않게 두 꼽추를 만난 것이다.
"그러시다면 저희들이 있는 곳에서 며칠 유하다가 가시지요?"
"수적질하는 너희들 산채에 말이냐?"
"수적질을 하드라도 은혜는 아는 놈들이니 나으리께선 너무 꺼리실 건 없습니다."
"나으리라니 턱도 없는 말이다. 내가 해라를 하는 것은 너희들보다 십여 년은 위일 거라는 생각에서지 행세하는 집안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 같은 천 것이 아닌 것도 진작 알아챘었지요."
"됐다, 더 이상 반상을 따질 필요가 없다. 그깟 양반이 대수더냐?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란 말이 있지 않으냐? 내 지금 이틀을 굶었으니 양반 아니라 지금 당장 당상관을 준데도 조밥 한 사발과 바꾸지 않겠구나."
"참, 그러고 보니 몹시 시장하시겠습니다. 어차피 어두워야 움직일 터이니 아예 여기서 밥을 지어먹고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번칠이가 봉당에 던저 둔 좁쌀 자루와 명수가 마시던 물바가지를 집어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먹으며 굶으며 혼자 살던 노인의 부엌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어서 작은 솥단지 하나와 물독뿐 아무것도 없었다. 번칠이 아궁이의 재를 쑤셔보니 다행히 불씨가 남아 있었다. 불씨를 살리는 한편 좁쌀을 씻어 솥에 넣었다. 곧이어 매개한 연기가 부엌을 가득 채웠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밥이 되었다. 그러나 죽은 노인은 그동안 무엇으로 밥을 먹었는지 그릇은커녕 숟가락조차 없었다. 그리고 반찬이 될만한 것이라고는 선반 위에 있는 곰팡이 낀 간장 한 종지가 다였다. 바가지가 작으면 그것으로라도 밥을 푸련만 솥의 아구리가 작아 그도 어려웠다. 생각타 못한 번칠이가 부뚜막에서 솥을 떼어 솥 채 봉당에 갖다 놓았다. 숟가락이 없으니 천상 울타리에서 나무를 꺾어 젓가락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마저 헛된 짓이었다. 부슬부슬 한 매 조밥이라 젓가락 사이로 흘러서 떠지질 않는 것이다. 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밥 위에 간장을 끼얹고 꼬챙이로 휘저어 대강 식힌 후 맨손으로 뜨거운 조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무척이나 배가 고팠던 박일주로서는 그것도 감지덕지할 판이었다. 명수는 먹는 흉내만 내다 말았고 번칠이도 금세 솥에서 물러났다.
"왜들 물러나느냐? 나 혼자 이 밥을 다 먹지는 못한다."
"어서 드십시오. 우리들은 크게 시장하지 않습니다."
결국 박일주가 반 솥은 먹었고 남은 밥은 뭉쳐 베 헝겊에 싸서 두었다. 번칠이 떠온 물을 나누어 마시고 나니 이번엔 어디건 누워 한숨 잤으면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피로하고 졸려도 송장이 딩구는 이 집에서 잘 수는 없었다. 마당에 고인 핏물에는 이미 사방에서 날아든 파리가 새카맣게 모여 왕왕대고 열린 방안까지 날개 소리가 요란했기 때문이었다. 세 구의 시체가 있는 잿간도 사정은 같을 것이었다. 화약과 연환 자루를 전대 속에 넣은 번칠이가 밥 싼 헝겊까지 들고 박일주는 명수를 부축해 그 집을 나왔다. 외딴 집이긴 하지만 혹여 사람들의 눈에 띌지도 모를 노릇이라 부근에서 얼쩡댈 일이 아니었다. 세 사람이 다시 처음 만났던 개울로 가기로 했다. 사방이 갈대밭이어서 숨어 있기도 좋고 어쩌면 모기의 성화도 피할 수 있을 것이었다.
"너희들이 이곳과 산채를 오가는 것을 놈들이 알아냈다니 조만간 산채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아까 포졸 놈의 말로는 너희들을 사로잡아 산채를 칠 때 인질로 삼으려 했다는데 너희들 중에 누구 아비가 천수패 두령이냐?"
길이 좁아 박일주의 앞을 걷든 명수가 억지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소인의 아비 이름이 김천수입니다. 그래서 세간에서 보통 천수 패라고들 하지요."
땅으로 굽은 명수의 몸뚱이가 이제는 다친 어깨까지 한 쪽으로 기우니 그 걸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목불인견이었다. 박일주는 눈길을 돌렸다.
"너희들이 아까 잡혔다면 오늘 내로 강화 감영에 닿을 것이니 산채는 내일 새벽이나 늦어도 내일 저녁까지는 들이닥칠 것이다. 어두워지면 빨리 달려가 너의 아비에게 알려서 산채를 옮기도록 해라. 그것도 오늘 밤 사이에 해야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잡으려 든 놈들이 다 죽고 없으니 감영에서는 그놈들을 기다리느라 좀 지체가 되겠지요."
뒤따라 오던 번칠이의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박일주가 무엇이 생각났는지 우뚝 섰다.
"아차, 내일까지 기다릴 일이 아니로구나. 유수영의 군사와 중간에서 만나기로 했다면 어쩌면 오늘 저녁이나 밤에 급습을 할지도 모르겠구나."
"아앗,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아하 우리 때문에 산채가 큰일이구나."
명수가 비명 같은 소리를 토하며 발을 굴렀다. 그리고 번칠이를 향해 외쳤다.
"이렇게 되면 위험해도 할 수 없는 것 아니냐? 지금 당장 산채로 가자."
"아무래도 그렇게 해야겠다. 좋다 가자."
"나으리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강을 건너 드릴 테니 함께 가시지요?"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서 가서 너희 패나 피신 시키거라."
"아니요. 아무리 화급한 일이 닥쳐도 할 도리는 해야지요. 강을 건너드린 후에 가겠습니다. 그리고 가실 때 이 전대를 노자로 가지고 가십시오."
"좋다. 아무려나 되는대로 하자꾸나. 그럼 어서 가자."
세 사람이 갈대를 헤치며 부지런히 강을 바라고 걷기 시작했다. 발자국 소리와 갈잎이 스치는 소리에 놀란 오목눈이와 개개비들이 날아올랐다. 개울을 지나고도 한참을 더 나아가자 배를 감춘 곳에 닿았다. 배를 끌어내기도 전에 숨이 턱에 찬 명수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깨를 못쓰니 당연히 팔도 쓰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 박일주가 나섰다. 그새 수위가 높아져 올 때보다 배를 강으로 밀기는 쉬웠다. 박일주는 명수를 번쩍 안아 배에 태운 후 자신도 올라 노를 잡았다.
"노질을 할 줄 아십니까?"
번칠이 자신의 노를 놋좆에 끼우며 빙긋 웃었다.
"잘은 못하나 웬만큼은 하지."
"그러시다면 강을 건너는 것쯤은 금세 닿을 것입니다."
"아니다. 명수가 저러니 내가 너희들 가는 곳까지 대신해주마. 곧바로 가자꾸나."
"예? 목숨을 살려주신 것만 해도 그 은혜를 못 갚을 것인데 왜 위험한 불속을 뛰어드시려 하십니까? 그만 두시고 나으리의 길을 가시지요."
"따로 내 길이 없는 사람이니 걱정 말고 가기나 하자."
만류하던 번칠이 할 수 없이 노질을 시작하니 박일주도 그에 맞춰 노를 젓기 시작했다. 밀물은 아직도 강을 거스르고 있었으나 하류를 향해 두 사람이 젓는 배는 쉽게 나아갔다. 게다가 물 때가 맞지 않아 지나는 배도 없으니 마음 쓸 일도 없었다. 채 반시간도 지나지 않아 물가에 우뚝 선 오두산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선수에서 물길을 살피던 명수가 급히 외쳤다.
"세워라. 번칠아 세워. 배를 멈추란 말이다."
노질을 하는 번칠이와 박일주는 선수와는 반대로 돌아앉았으니 명수가 왜 배를 세우라는지 몰랐다. 그러나 다급한 명수의 외침에 즉각 노를 모로 세워 속력을 줄였다.
"왜 그러냐?"
"저길 봐라. 오두산 아래 배들이 보이지 않냐? 아무래도 수상하다."
박일주와 번칠이도 몸을 돌려 그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먼 거리이긴 하나 명수가 가리키는 산 아래 물가엔 확실히 배로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제기랄, 우리가 늦었구나."
"이제 어쩌지? 산채엔 다들 염탐을 나가고 너의 아비와 우리 부모만 남았을 텐데."
"그새 돌아온 얘들도 있을 것이다만 제대로 대항이나 해 보겠냐?"
명수와 번칠이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배를 저어 나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디로 도망을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일단 배를 저쪽 물가로 대자. 그리고 가까이 가보자."
박일주의 말에 따라 급히 배를 파주 쪽 뭍으로 몰아 갈대 사이에 배를 감추었다. 산채가 있는 오두산을 제하고는 어디에고 산이라고는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대신 오두산에 이르는 곳까지 갈대가 무성히 이어져 있었다. 세 사람은 갈대를 헤치며 산채로 향했다. 산채까지는 두 마장은 됨직한 거리였다. 노루길조차 없는 갈대밭을 한 마장쯤 나아가자 모두의 얼굴과 손등이 갈잎에 베어 피가 나고 쓰라렸다. 그렇다고 되돌아갈수도 없는 일이라 이를 악물고 나아갈 뿐이었다. 얼추 산채와 가까이 왔을 때였다. 산채 어름에서 연기가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보나 마나 놈들이 산채인 움막에 불을 지른 것이다. 명수가 놀란 소리를 내뱉었다.
"아차, 놈들이 산채에 불을 질렀구나. 우리 아비는 어찌 되었을까?"
"우리 부모도 마찬가지다. 아, 이 일을 어쩌냐?"
"내 조총은 움막에 있는데.…"
"내 활도 마찬가지다."
"너희들은 여기 꼼짝말고 숨어 있어라. 내 어찌되는 건지 보고 오마."
박일주가 칼을 움킨 채 자세를 낮춰 산채 쪽 기슭으로 재빨리 오르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간 산채는 이미 불길이 하늘을 찌르고 급습을 한 군사들은 물가로 철수를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복장이 벙거지에 더그레 자락이 아니었다. 모두가 한결같이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인 차림에 환도를 들었으니 포졸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렇다고 변복을 했다고도 볼 수 없는 것이 그들을 모두 헤아려도 십여 명에 불과 했기 때문이었다. 감영에서 군사를 동원했다면 적어도 쉰 명 이상이 출동했을 것이 아닌가? 겨우 십여 명이 수적의 산채를 치러 왔다면 한 명 한 명이 모두 검술 실력이 뛰어나다는 방증이 아닌가? 포도청이 아닌 유수영에 그런 군사가 따로 있을 리 만무였다. 그렇다고 그깟 수적 몇 명을 치자고 진무영에서 열 명이 넘는 군관을 데려오지는 않았을 거였다. 놈들이 배를 타고 떠나려는지 우두머리인 자가 인원을 점검해 나갔다. 박일주는 그 우두머리의 얼굴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 사내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박일주는 다시 그 사람을 주시했다. 틀림없었다. 둥글둥글, 사람 좋아 보이던 얼굴. 포도청에 들릴 때 몇 번 만나 말까지 나눠 본 우포청의 포도부장 노탁우였다. 그는 종사관인 오일중의 직속 부하였으니 그렇다면 이번 토포는 우포청에서 나섰단 말인가?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일이었다. 명종조에 날뛰던 임꺽정 패도 아닌데 수적 몇 명에 한양의 우포청까지 나설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노탁우가 우포청 소속이 적실한 이상 박일주로서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일중이 우포청을 그만둔 것을 박일주가 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탁우를 비롯한 칼잡이들이 일사불란하게 배를 나누어 타고 떠나고 있었다. 기습 시각을 밀물에 맞춘 듯 놈들의 배는 금방 아득히 멀어졌다. 명수와 번칠이 이쪽을 향해 허겁지겁 뛰어왔다. 세 사람은 눈치를 살피며 산채의 마당에 들어섰다. 띠로 덮은 오두막은 그새 다 타버리고 기둥에 붙은 불만 타다 말다 할 뿐이었다. 명수와 번칠이가 미친 듯 자신들의 움막이 있던 자리로 달려갔다. 박일주가 불탄 집자리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이상하게도 시체가 한 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어디선가 누군가의 비명과 함께 곡성이 터졌다. 소리를 따라가보니 커다란 구덩이 안에서 번칠이가 죽은 중늙은이를 안고 꺼이꺼이 울고 있었다. 부두령 곰보였다. 이어서 명수가 나타나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구덩이에는 열댓 구의 시체가 쌓였는데 여자들도 섞여 있었다. 놈들이 시체를 한 구덩이에 쓸어 넣고 철수를 한 것이다. 명수도 제 아비의 시체를 찾자말자 울음부터 내 지르니 박일주로서는 도와줄 일이 없었다. 상황을 살피건대 산채가 급습 당해 모조리 죽음을 당했음이 적실했다. 반항 한번 못하고 당한 것일 터였다. 어디에도 수적이 사용한 병장기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박일주는 잠시 자리를 피해 두 꼽추가 울 시간을 주기로 했다. 산채를 돌아 오두산 밑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지형이 산채를 숨기기에는 좋아도 물가와 너무 가까워 기습을 받기가 쉬운 장소였다. 오두산 뒤 역시 산으로 이어지지 않아 퇴로가 없었다. 천수패가 왜 이런 장소를 임시 산채로 삼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박일주가 구덩이로 돌아왔을 때는 명수와 번칠이가 나무 넉가래와 괭이를 들고 왔다. 박일주는 명수가 갖고 온 넉가래를 받아들고 구덩이에 흙을 덮기 시작했다. 번칠이도 콧물을 훌쩍이며 괭이질을 해 나갔다. 두어 각 후에 흙더미가 무덤 비슷한 형체가 되자 둘은 그 앞에다 절을 두어 번 하고는 박일주에게 말했다.
"내 이 빌어먹을 강화 유수의 목을 따고 나도 죽을 테요."
"그렇습니다. 아비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죽을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박일주가 자리를 비운 사이 말을 맞춘 듯 강경하게 나왔다.
"유수를 없앤들 세상에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겠느냐? 이번 일은 관군의 짓이 아니다. 관군이 닥치기 전에 다른 놈들이 먼저 친 것이야."
"예? 관군이 아니라니요? 아까 우리를 잡으려 든 놈들이 변복한 관군이 아니란 말입니까?"
"영감 집에서 만난 놈들은 변복한 군사가 맞지만 여기를 친 놈들은 유수영의 관군이 아니더란 말이다."
"나으리께서 어찌 아십니까?"
"내가 아는 얼굴이 우두머리였으니 알지. 그러니 이제부터 너희들 살아갈 궁리나 하거라. 산채가 여기 뿐이냐?"
"장단 쪽에 또 있기야 합지요."
"그럼 그리로 가서 세력을 키워라. 내 너희들의 처지를 보니 농사나 다른 일을 하란 말은 못하겠구나. 활이나 조총만 잘 다룬다면 굶지는 않을 게다."
"참, 내 조총."
명수가 갑자기 불탄 자기 움막으로 가더니 막대기로 사방을 헤쳐 나갔다. 곧이어 그의 손에는 기다란 쇠막대가 들려 있었다. 개머리의 나무는 다 타고 총통만 남은 것이다.
"너는 활이 있다며?"
"움막과 함께 다 타버렸지 남았겠습니까?"
"움막에 두었다면 그렇겠구나."
"어차피 제가 만든 활입니다. 또 만들지요."
"그런 재간도 있었구나. 그건 그렇고 자 이제는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나으리, 저희들과 함께 가시지요. 저희들을 이끌어 주십 사는 않겠습니다. 단 며칠만이라도 유하시다 떠나시지요."
번칠이 간절한 눈빛으로 박일주를 바라보자 명수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물끄러미 두 꼽추를 내려다보든 박일주가 입을 열었다.
"그러마. 어차피 바쁠 것도, 꼭 갈 곳도 없는 몸이 아니더냐."
세 사람이 갈대밭을 다시 헤치고 나아가 배를 탔을 때는 해도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그런데 산채 가까운 곳에서 박일주와 두 꼽추가 탄 배를 훔쳐보는 눈이 있었다. 두 놈이었다. 그들은 산채가 기습을 당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던 눈 들이었다.
"저 꼽추놈들이 살아남았군."
"그러게 말이야. 한데, 패랭이 쓴 놈은 또 뭘까?"
"그깟 것 알 것 있나. 천수 패가 사라졌으니 이제 이 물길은 우리들 차지 아니냐."
"그렇지. 여하튼 두령의 꾀는 누구도 당하지 못할 거다. 하하."
"나는 억만이 두령이 마개출을 죽일 때 벌써 일이 이렇게 돌아갈 줄 알았지."
"너만 알았냐? "
두 놈은 억수라는 자의 수하로 송파 문일평의 여각에 파송된 포교 출신 마개출을 죽일 때 같이 거들던 놈들이었다. 제 밥벌이 구역이 없어 도성 부근에서 얼쩡대던 억수 패가 이곳 강화와 한강 하구를 노린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이 천수 패를 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오일중을 이용해 천수패를 없애려 꾀를 낸 것이다. 마개출을 죽이자 계획대로 오일중이 움직였다. 천수 패라는 소리를 살인 현장에서 들은 황구만이 오일중에게 직접 알렸으니 의심할 바가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억수는 제 손을 대지 않고 코를 푼 셈이었다.
"자 우리도 가자. 두령이 몹시 기다리시겠다."
두 놈은 감추었던 작은 배를 끌어내더니 노를 저어 재빨리 상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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