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설

송원일 제1장 유전(流轉) 1.박살난 가문

fiction-google 2024. 5. 8.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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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유전(流轉)

1. 박살난 가문

"어서 오시오, 우상."

"대감,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허허 우상의 염려 지덕(念慮之德)에 아직은 견딜만 하오이다 그려."

인경(人定)이 울리고도 한참이 지난 깊은 밤, 전동(典洞) 장현의 집에 김석주가 찾아들었다. 이미 전갈이 있었던 듯 으슥한 별실에는 팔뚝같이 굵은 청국산 황초가 불빛을 일렁이며 잘 차려진 술상을 비추고 있었다.

"이리로 앉으시지요 우상."

", 천만의 말씀 올시다, 대감."

장현이 상석을 권하는 척하자 황급히 손을 내젓는 김석주였다.

"손님이신 우상이 이리로 앉는 것이 옳을 것인즉, 사양치 마시오. 허허."

"허어,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엄연하거늘 거 무슨 말씀 이오이까."

이때 장현의 나이 예순일곱이요, 김석주는 마흔다섯 살이었다. 결국 장현이 마지못한 듯 상석을 차지한 후에 일단 분위기를 술잔으로 풀어나가기 시작하였다. 청국을 제 집 드나들 듯하는 장현이라 술은 역시 청국의 명주였다.

"크아, 대감 무슨 술이온데 이리 입에 짝짝 붙습니까?"

"허허, 좀 독한 것을 염려했더니 우상의 입에 맞다니 천만다행이구려. 강소성(江蘇省)에서 나는 양하 대곡(洋河大麯) 이란 술인데 말년의 소식(蘇軾)이 즐겼다고 합디다. 좋으시다니 하인 시켜 몇 병 보내드리오리다. 허허."

소동파(蘇東坡)가 정말로 양허따취를 즐겼는지는 모르되 어쨌든 청국의 술이란 거의가 조선의 소주(燒酒)보다 배는 독해서, 청주나 탁주에 길든 조선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건만 김석주의 입에는 맞았나 보았다. 서너 순배 술잔을 돌린 장현이 긴장된 표정으로 김석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상, 그래 어찌 되었소이까?"

장현이 묻는 뜻을 알면서도 김석주는 뜸을 들이는지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 앞에 놓인 술잔을 입안에 털어붓더니 메주 같은 얼굴에 미간을 찌푸리며 솔잎을 거꾸로 꽂은 것 같은 눈썹을 곤두세우는 것이다.

"캬ㅡ, 역시 좋소이다. 한데 방금 대감께선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요?"

"사헌부 지평이라는 자가 어찌 되었는지 물었소이다."

", . 세상의 모든 일이야 사필귀정 아니겠습니까? 그 자는 잘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생각 밖의 막대한 손실을 보았지요."

"아니, 손실이라 시면?"

"허허, 일 년 적공(積功)이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지 뭡니까? 스물의 군사가 놈들과 함께 폭사를 하고 게다가 아까운 화약 2천 근만 하늘로 날아간 것이지요. 놈들의 조총이 염려되어 조련(調練) 된 기병을 보냈더니 결국 그놈들이 최후의 발악을 한 모양입디다. 그러니, 일이 끝나면 갖다 쓰려던 2천여 근 화약이 엄청난 손실이 아니고 무엇이겠소이까? 이리 되면 나라의 보장지지(保障之地)인 강화 돈대(江華墩臺)의 화포는 화약이 없어 당분간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소이다."

"아니? 그 많은 군사가 다 폭사를 했단 말이웨까?"

"그런가 봅디다. 원주 감영의 관노들을 동원해 수습은 했습니다만 온전한 시신은 몇 구 없더랍니다. 우리의 예상이 조금은 빗나간 꼴이지요. 궁지에 몰린 무리라 하나 설마 화약을 터트릴 줄이야 알았겠습니까?"

"허어, 나는 내 뒤를 캐는 사헌부의 송 아무개란 놈만 없애주십사 했건만 일이 쓸데없이 커져버려 우상의 입지가 난처하겠소이다."

"우리끼리 얘기입니다만 난처할 것도 없습니다. 군사들이란 전장터에서 흔히 죽기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허고, 어차피 대감은 송지평이 없어져야 하고 제겐 김경준이란 놈이 목구멍의 가시였으니 차라리 이참에 잘 된 일이지요. 우리가 도모하는 일을 아는 놈은 이제 없지 않습니까? 허허."

"허허, 허기야, 세상에 누가 우상과 내가 동사(同事) 할 것이라 생각하겠소, 이제 허적과 윤휴만 남았구려."

늙은 여우 같은 표정의 장현이 술잔을 들며 김석주의 얼굴을 흘깃 바라보며 웃었다. 이에 김석주 역시 두꺼비 같은 눈을 슬며시 들어 히죽 웃었다.

"이제 슬슬 그들의 역모 고변이 들어올 겝니다. 그 후엔 그들에게 뿌린 거사 자금이 이자에 새끼까지 쳐서 대감의 수중으로 되돌아오겠지요. 서인으로 환국(換局)이 되더라도 대감은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될 터이니까요."

"우상의 지혜는 제갈공명(諸葛孔明)이나 가후(賈詡)도 따르지 못할 것이오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면 탄복을 하겠습디다그려."   

"가후와 공명이라니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허나, 이 나라 종묘사직과 주상전하를 생각하면 장량(張良)이 되지 못하는 것은 한()이 올시다."

김석주는 공명과 가후를 사양하는 척하며 오히려 자신을 유방(劉邦)의 장자방(張子房)에 비겨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이를 눈치채지 못할 장현이 아니었다.

"보령 유충하시던 전하께서 오늘날 이렇듯 현명한 군주가 되신 것이 장자방이신 우상이 없었다면 어찌 가()한 일이었겠소이까?"

"송 우암(宋尤庵) 대감이 들었다면 기절할 말씀 이오이다. 우암은 전하께서 자신의 주자학을 익혔기 때문에 왕도도 익히셨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아니? 송시열(宋時烈)이 죽고 못 사는 그 주자학은 청국에서도 이미 쓰지 않는 낡은 학문이 아니오이까?"

"허허 누가 아니랍디까. 오죽하면 동당(同黨)인 시생이 산당(山黨)이고 한당(漢黨)이고 주자학만 들먹이는 그들을 질색하겠습니까? 우암을 보세요. 그들은 실천이라곤 없어요. 오직 입이 있을 뿐이지요. 정말 한심한 사람들이지요. 터놓고 말해서 그런 점에서는, 대감이 속한 남인당(南人黨)도 똑같은 무능(無能) 덩어리들이지요. 윤휴를 보면 알쪼아니겠습니까? 아니할 말로, 말로써 북벌(北伐)이 된다면 20만 여진(女眞)은 벌써 씨도 남지 않았을 겝니다. , 한심한 인간들.... ."

"우상의 말씀이 구구절절 다 옳음에랴 할 말이 없소이다. 해서... 이렇듯 내가 우상에 의지하는 것 아니겠소이까."

"의지라니 당치 않습니다. 앞으로 의지해야 할 사람은 시생이 올시다."

"그러시다면 지금은 물론이요, 앞으로도 우리 두 집안은 굳건히 손을 잡아야겠지요. 물론 양당(兩黨)의 어느 누구도 눈치를 못 채야 하겠지만... ."

"알고 있던 놈은 이미 원주 땅에 다 묻혔습니다. 김경준과 송수혼가 하는 놈 말씀입니다. 다만 이번 일이 성사될 때까지 대감과의 만남은 조심해야겠지요."

"헌데... 일이 어쩌다 이리 크게 되었소이까? 송 아무개는 내 수하에게 꼬리를 잡혔다지만 김경준이라는 놈은 어찌 우상의 계책을 알았을까 그것이 의문이외다."

장현은 모를 일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에 김석주는 거만한 몸짓으로 비대한 몸을 고추 세웠다.

"그러실 터이지요. 사헌부의 이집의를 대감도 아시지요? 그 사람이 하나만 아는 고집 센 사람이지요. 이 집의를 시켜서 송 지평이란 놈이 윤휴의 역모를 뒤쫓게 만든 것도 사실 시생이올시다. 그런데 송지평, 이놈이 대감도 알다시피 너무 깊게 파고들었던 것이지요. 허고, 김경준은 장원을 한 수재로 세상에 불만이 많은 놈인데, 화약 제조를 스스로 터득할 정도라 내 눈에 들었었지요. 그래서 책략을 써서 원주의 염초도회소의 책임자로 내려보내게끔 뒤에서 손을 좀 썼지요. 헌데, 시생이 부리던 군기시의 첩자에게 모모한 일을 시켰더니 머리가 비상한 그놈이 캐내고 말았지 뭡니까? 이럴 때, 송수호가 동과(同科)라는 그놈을 만나러 갔다니, 우리 일이 다 드러날 것 아닙니까?    대감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두 놈을 그냥 둘 수가 없었지요. 허니 따지고 보면 그자들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 아니겠소이까?"

"일이 그렇게 되었구려... , 상감께서도 군사가 상한 것을 아시오이까?"

"물론이오이다. 일의 전후(前後)에 즉시 아뢸 뿐 아니라 이 모든 일이 전하의 의중과 일치되는 일이니 대감은 심려치 마십시오."

"우상이 하는 일에 무슨 걱정거리가 있겠소? 허허."

"그것은 그렇고, 근래에, 대감의 여식인 장 상궁(張尙宮)의 전언은 들어보셨는지요?"

"궐내의 소식에는 어둡소이다. ? 그 아이가 우상에게 뭐라고 합디까?"

순간, 솟구치는 찌를 본 낚시꾼처럼 장현의 눈이 반짝하였다. 이제까지 대화의 주도권이 김석주에게 있어,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이가 아들 같은 젊은 놈에게 기를 펴지 못하더니, 상궁(尙宮)인 딸의 얘기가 나오자 드디어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피워 오르는 것이다. 보나 마나 김석주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이 짐작이 가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상감께서 요즈음 들어 대감의 종질녀(從姪女)를 어여삐 여기신다 하더이다."

드디어 대어가 미끼를 문 것이다. 종질녀 옥정이를 젊은 상감의 곁에 둔 것이 장현이니, 이제부터는 천하의 김석주라도 먼저 손을 내 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무릇, 오만가지 네발짐승 가운데 꾀가 많기로는 여우가 으뜸이고, 날짐승 중에는 까마귀가 제일이더라고, 천하의 꾀주머니 여우와 까마귀가 술상을 마주하고 조조(曹操)놀음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찌 되었습니까? 서방님."

퇴청을 하여 안방으로 들어서는 송윤호에게, 초조한 음성으로 아내가 물어보건만 굳게 다문 입술은 열리지를 않았다. 말없이 아내가 들고 있던 평복으로 갈아입은 송윤호가 사랑방으로 나갈 것도 잊은 듯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참을 꼼짝하지 않던 송윤호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원주에 가봐야 할 것 같소. 이렇듯 앉아 기다릴 수가 없게 되었으니 말이요."

"하오면... 사헌부에도 기별이 없었다 하더이까?"

"말은 하지 않으나 아무래도 형님의 일이 잘못된 것 같소."

"큰댁에서는 얼마나 애를 태우고들 계실까요. 서방님이 찾아가 뵙는 게 어떨까 합니다만... ."

"위로가 될 아무 말도 없는데 가봐야 소용 있겠소? 좀 더 알아보고 가지요."   

오늘이 섣달 초 닷새이니 형인 송수호가 집을 나선지 한 달이 지났다. 송수호는 사헌부의 관원이라 처음 20여 일은 그러려니 했는데, 일삭(一朔)이 가까워져도 종래 무소식이라 온 식구들의 애가 타기 시작하였다. 오늘은 등청과 아울러 상관인 정랑과 참의에게 각각 양해를 얻어 형의 직장인 사헌부에 들렸었다. 장령(掌令) 어순제를 만나 형의 일을 물었으나, 어사(御使)로 나갔다 엊그제 돌아온 그는 아는 바가 없었다. 다시 집의(執義) 이헌조를 만나 형이 언제쯤 올 것인가를 물어보았다. 송수호의 동생인 것을 안 이헌조가 황급히 송윤호를 자신의 행랑으로 데리고 가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송지평이 원주의 염초도회소에 공무로 내려간 것은 맞네. 한데 20여 일이 지나도 오지 않기에 파발(擺撥)을 띄워 주천을 관할하는 영월 현감에게 물었건만 송지평이 온 적이 없다는 회신이 오지 않았겠나. 여기 현감의 서신을 보시게."

이헌조가 소맷자락에서 내어 놓은 글을 빠르게 읽은 송윤호가 안색이 달라졌다. 그런 사람이 오지 않았다는 간단한 글이었던 것이다.

"그럼 형은 어찌 된 영문일까요? 영감."

"그래서 나 또한 노심초사하고 있는 중이네. 어제 다시 원주 감영(監營)에 파발을 띄웠으니 일간 답신이 있을 것이네. 꼭 찾아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으니 말이네."

"형이 원주 염초도회소로 간 것이 적실하옵니까?"

"아니? 송 지평이 그곳으로 간다는 말이 없었단 말인가?"

"글쎄 올시다. 들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럼, 송 지평이 아무 말도 하지않고 떠났단 얘긴데, 형제간에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근래에 송 지평이 하던 일을 자네는 알고 있겠지? 혹시, 누구를 만나러 간다는 말도 없었나? 아무리 입 무거운 송 지평이라 하나, 설마 동생에게까지 아무 말도 안 하고 떠났을려고?"

처음부터 약간 이상한 낌새를 느낀 송윤호가 말을 조심하기로 마음먹었다. 자꾸만 이쪽을 경계하는 듯한 느낌이 들던 것이다. 그리고 은근히 유도 질문을 시작하는 것도 이상하였다. 송윤호가 처음보다 더욱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형이 좀 고지식한 사람인 것은 영감께서도 잘 아시지 않겠습니까. 누구에게도 본인이 하는 일을 입 밖에 내는 법이 없는 형이라 저는 전혀 아는 바가 없사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형이 떠나기 전에 물어라도 볼 것을 후회막급 하옵니다."

"송 지평이 입이 무거운 것은 사헌부에서도 정평이 났지만 혹여 송 좌랑(宋佐郞)에게 무슨 말을 하였다면 단서(端緖)라도 될까하여 물어 본 것이네. 소식이 닿는 데로 송 좌랑에게 연락할 터이니 너무 염려 마시게. 별일 없을거니."

사헌부를 나선 송윤호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적선방에서 미동의 집까지 어떻게 걸어왔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형의 직속상관인 이헌조가 저렇게 나올 때에야, 누굴 믿을 수 있겠는가? 적인지 아군인지 도무지 모를 이런 아사리판에서 누구를 붙잡고 형의 행방을 수소문할 것인가? 더 이상 알아볼 만한 곳도 없었지만 있다 해도 맥이 빠진 송윤호는 집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집에 와서도 궁리를 하는데, 문득 홍문관 교리로 있는 형의 친구 김민세가 생각이 났다. 혹시 궐내(闕內)에서 떠도는 말이라도 있다면, 그가 우상의 조카뻘 이랬으니 혹시 아는 것이 있을까 해서였다. 그가 퇴청하는 시각에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동지가 지났다고는 하나 섣달의 해는 아직도 짧아서 금세 가까운 목멱산이 검게 보이더니, 손톱 끝보다 가느다란 달이 허공에 걸리었다. 저녁밥도 먹지 않은 채 대문을 나서는 송윤호에게 아내도 밥 먹기를 권할 수 없었다. 마음이 바뿐 송윤호가 넓은 길을 버리고 질러가기로 마음을 먹고, 사뭇 골목길로만 다동 어름에 왔을 때였다. 바삐 걷는 가운데서도 뒷통수가 자꾸만 근지러운 것이다. 골목을 꺾어들며 슬쩍 뒤돌아보니 어두워 얼굴은 확인할 수는 없으나 웬 맨 상투가 따라오고 있었다. 송윤호는 걸음을 더욱 빨리하여 골목을 바꾸어 걸어보기로 하였다. 이 골목 저 골목을 꺾다가 반마장 앞에 있는 광통교(廣通橋)로 향하였다. 다리를 건넌 후, 청계변(淸溪邊)을 따라 걸으며 슬며시 다시 돌아보니 그 자가 여전히 따라오고 있었다. 누가 시킨 미행인지는 몰라도 미행이 붙은 것이다. 큰길로 나와, 서너 마장만 더 가면 백탑(白塔)이 나오고, 그 근처에 김민세의 집이 있건만, 송윤호는 종각(鐘閣) 쪽 길로 돌아서고 말았다. 미행을 붙인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 송윤호가 형의 행방을 수소문하러 다닐 것을 예상하는 사람은 한 사람뿐일 것이었다. 사헌부의 이헌조가 아니겠는가? 형이 원주에 갔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말했건만, 무슨 일로 미행케 했을까?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가 그도 알고 싶었을까? 송윤호는 천천히 집으로 향하였다.

"빗장은 걸지 말거라."

", 나으리."

대문을 들어서며 거칠이에게 일렀다. 밤중에라도 형이나 함께 간 누가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루 끝에 나와있던 아내가 애타게 송윤호의 기색을 살피건만 의관을 벗은 송윤호는 쓰다 달다 말이 없이 사랑으로 나가는 것이다. 망설이던 아내가 언년이에게 밥상을 들려 사랑방 문을 열었다.

"안 먹겠으니 가지고 나가오."

"조금이라도 드셔야지요."

"멕히지가 않소. 그러니 가지고 가오."

밥상을 물리라는 송윤호의 말에도 아내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고 있었다. 그 사이 잠깐 딴 생각을 하던 송윤호의 눈에 아내가 들어왔다.

"밥상을 왜 물리지 않소?"

다소곳이 앉아 치마 끝에 나온 버선 코만 바라보는 아내에게 송윤호가 다시 약간의 음성을 높였다.

", 안 먹는다잖소? 지금 밥 먹을 정신이 아니란 말이요."

"................."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게요? 왜 그러고 있소?"

아내는 미동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이러한 행동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없던 일이라 송윤호가 오히려 당황할 지경이었다. 혼인한 지 십여 년에 남편이 무슨 소리를 해도 한결같이 복종했고, 아이들에게도 잔소리 한번 않던 아내였다. 그러니, 지금처럼 송윤호의 말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 임자가 이럴 때도 있구려. 왜 이러는 거요? 말을 해 보구려."

아내가 말없이 고개를 들어 송윤호를 바라보는데, 커다란 검은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일순간에 송윤호의 심장이 멈추며 마음이 서늘해졌다.

"내 언성이 높았던 걸 임자가 해량 하시오. 형님 문제로 얼이 나갔었나 보오."

송윤호는 목소리를 낮추어 달래 듯 미안함을 전하였다.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에요. 아주버님이 아무런 소식이 없으신데, 서방님의 입엔들 음식이 들어가겠어요? 하지만 어머님과 원일이 모자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이럴진대 두 분은 아마 피가 마르실 거예요. 서방님은 이럴 때일수록 드시고 기운을 내시어 어떻게라도 아주버님의 행소(行所)를 알아내야 해요. 그러니 드시랄 수밖에요. 서방님이 진지를 드시는 것이 여러 사람을 위하는 길일 테니까요."

송윤호가 어이가 없어 아내의 얼굴을 뻔히 쳐다보았다. 아내가 이렇듯 길게 얘기를 하는 것도 처음이지만 자기의 생각을 이렇게 뚜렷이 들어내어 말하기도 처음인 것이다. 불현듯, 돌아가신 장인, 허참봉이 떠올랐다. 아내에게서 장인을 닮은 무언가를 본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다시 한번 아내를 쳐다보니 닮은 데라곤 전혀 없었다. 송윤호가 말없이 밥상을 당겼다. 아내는 식은 국그릇을 들고 가만히 부엌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은 날 아침, 송윤호는 안국방 형의 집으로 향했다. 대문은 열려있었다. 마당을 쓸던 늙은 말득이가 땅에 닿도록 절만할 뿐 굳은 얼굴에 말이 없었다. 안채로 들어가니 마루에서 대문 소리에 귀 기울이던 형수가 기둥에 의지해 서 있었다.

"아니, 형수님, 추우신데 어찌 나와 계시는지요,"

"어서 오세요. 작은 서방님."

들어서는 사람이 시동생이라, 말은 안 해도 낙심천만이었을 형수를 보니 안색이 말이 아니었다. 방에는 노모가 조카 원일이를 안고 있었다. 아이는 제법 자랐다고 할미의 품을 자꾸만 벗어나려 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방바닥을 잘도 기어 다녔다.

"어머님, 진지는 좀 드셨는지요?"

"오냐, 먹었다."

며칠 사이에 더욱 늙은 애미가 담담하게 말하였다. 형수의 눈치를 보니 두 사람 모두 밥상을 제대로 대한 것 같지 않으나 따질 문제도 아니어서 말을 못했다. 무엇을 물어보고 싶은 기색이 역력한 형수가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있음을 눈치챈 송윤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사헌부에 들렸더니 형의 일이 좀 늦어질 것이라 하더군요. 허기야, 나뿐 놈들 꼬리를 잡자는 게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 집의 영감(執義令監) 말씀이 시일이 좀 걸릴지라도 근심하지 말라더군요. 게다가 형이 혼자 간 것도 아니요, 검술에 능한 수하를 셋이나 데리고 갔다니 무슨 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러니 마음 푹 놓으시고 진지 많이들 드세요. , 그래야 원일이 저 녀석을 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루가 다른 저 녀석은 지금도 된장독 같이 무거운데, 며칠만 더 지나면 어머님은 안지도 못할 겁니다. 허허."

송윤호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말에 조금은 위안이 되는 데다가, 손자 얘기가 나오자 이제까지의 근심은 뒤로 밀려나서, 손자를 바라보는 눈가에 주름이 많아지는 것이다.

"형수님, 원일이는 눈이 맑고 시원스러워서 좋아요. 이 녀석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만사가 잊혀질 듯하니까요."

"원 작은 서방님두... ."

송윤호는 조카를 안았다, 세웠다, 웃겼다 울렸다, 갖은 장난을 하다가 아이를 기어이 할머니 손에 뺏기고서야 형의 집을 나왔다.       

이틀 뒤의 일이다. 전날, 예조의 계제사(稽制司) 참의에게 병가(病暇)를 낸 송윤호가 거칠이와 함께 집을 나섰다. 파루 소리를 듣자말자 집을 나서 흥인문으로 향하였다. 한강이 얼지 않았다면 삼개 나루에서 배를 타고 물길을 거슬러 양평까지 갈 수도 있어, 거기서 걸어서 여주는 하룻길이요, 여주서 원주까지 이틀이 걸리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금년엔 한강이 일찍 얼기 시작하였다. 밤섬에는 가을에 배로 실어다 쌓아두었던 신탄(薪炭)을 겨울이 되면 도성으로 팔러 다니는 나무 장사들이 많았다. 이들이 쇠 잔등에 장작더미를 잔뜩 싣고 건너다녀도 끄떡없을만큼 두껍게 얼어붙은 것이다. 그러나 흐름이 가파른 상류는 얼지 않았을 터이라 걸어서 양평으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차라리 흥인문 밖에서 광나루 쪽을 택하는 것이 지름길이 될 터였다. 흥인문을 지나 제사터에 이르자 동이 터 오르기 시작하였다. 때는 섣달 초아흐레라 모진 추위가 온몸을 감싸고 바람까지 불어서 갓이 뒤꼭지에 붙을 판이었다. 송윤호나 거칠이 모두 솜을 두텁게 넣은 바지저고리를 입었건만 콧물이 얼 지경으로 추운 것이다. 두 사람은 더욱 걸음을 빨리하였다. 천장산을 지나 얼어붙은 중랑 내를 건너 언덕 위에 오르니 아차산이 길게 누워 있었다. 이곳까지 50리 길을 걸은 것이다. 여기서 북으로 가면 다락원과 포천, 김화 길이라 거칠이는 눈 감고도 훤한 길이지만, 초행길인 동남쪽 광나루까지는 아차산을 끼고 시오리는 더 가야 하였다. 송윤호와 거칠이는 신들메를 다시 조이고 느슨해진 행전도 다시 묶었다. 그리고 다시 떠나려는데, 말방울 소리가 딸가당딸가당 들리더니 이내 왱가당 댕가당 여러 필의 말들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말들은 한결같이 등짝에 커다란 부담이 실려 있고 고삐를 쥔 사람들도 등에 짐을 지었다. 모두 패랭이에 주먹만 한 목화솜이 달려 있는 것을 보니 보부상단이 틀림없었다. 말이 십여 필에 짐을 지고 행렬의 뒤에 따라오는 도부꾼이 또한 십여 명이라 인마(人馬) 합해서 삼십여 구()나 되었다. 길이 넓은 길이 아니요, 양반 입네 하여 많은 인마를 세우고 줄 곳 앞장설 수도 그렇다고 다른 길로 돌아가랄 수도 없어, 송윤호가 선뜻 길 옆으로 물러났다. 행렬의 앞장을 서서 오던 보부상이 앞에 큰 갓의 양반이 비켜선 것을 보자 멈칫하더니, 중도 절도 아닌 고개를 끄덕 숙이고 그대로 지나가는 것이다. 뒤를 따라 연이어 인마가 송윤호의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부담마가 다 지나가고 도부꾼들이 지나가는데 개중에 한 보부상이 거칠이를 보더니 아는 체를 하였다.

"아니? 이게 누구인가? 김화 땅에서 보던 하님 아닌가?"

"아이고, 누군가 했더니 송상이었구려. , 댁들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누가아니래나. 원수도 아닌데 외나무다리에서 만났군그래."

뒤따라오던 송상 가운데 거칠이를 아는 사람이 두엇 더 있어서 거칠이도 그들과 섞여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것이다. 송윤호는 맨 뒤에 혼자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김화 장토에서 나오는 볏섬은 팔 년 전, 송윤호가 송상과 처음으로 거래를 한 후에도 매년 가을이면 춘보를 시켜, 송상에게 벼를 넘겨 왔었다. 어차피 한양으로 끌어올 수없는 벼를 송상에게 넘기면, 송상은 원산포의 북어와 바꾸니, 거리상으로 훨씬 유리하여 서로가 좋은 거래였던 것이다. 게다가 송윤호가 그리 야박한 성품이 아니어서 벼값에 매달리지 않으니 송상 또한 셈이 똑 부러지는지라 속임이 없었다. 거칠이는 한양에 오고 나서도, 추수철이면 춘보와 아비인 막개의 일손을 돕고자 매년 김화로 내려갔었는데, 이때 송상과 낯을 익힌 모양이었다. 얼마를 갔을까? 저만치 송상과 같이 가던 거칠이가 송윤호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나으리, 광나룻길을 버리시는 게 어떨지요? 송상의 말을 들어보니 양평 여주 길이 강을 따라 산기슭을 걸어야 하니 사뭇 길이 험하다 하옵니다. 광나루보다 송파로 가서 고불산 골짜기만 빠지면 광주(廣州)라니 차라리 이천, 여주 길이 어떨는지요?"

"글쎄다. 송파 쪽이 나을 줄 알았으면 애초에 용산에서 등빙(登氷)을 했으련만, 너나 나나 초행이긴 마찬가지 아니냐? 어차피 뱃길이 아닐 바에야 팔도를 발섭하는 송상 말이니 그러자꾸나. 헌데, 송상 행수란 사람은 나도 얼굴을 아는데 어찌 보이지 않더구나. 아직 그만 둘 나이도 아닐 터인데?"

", 천행수란 분 말씀이시군요. 쉰네도 궁금하여 물었습지요. 그 행수는 지금 송파점 도행수를 거행한다 하옵니다."

"그래? 잘 된 일이구나. , 그럼, 우리도 송상을 빨리 좇아가자꾸나."

송윤호가 송상의 뒤를 따라 남으로 십여 리를 더 걸어 얼어붙은 한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는 동안에도 막힌데 하나 없는 곳이라 바람도 추위도 대단해서, 이가 딱딱 마주치고 소매 속에 든 손도 와들와들 떨리었다.

", 거칠아, 광나루로 가지 않은 게 차라리 다행이구나. 이렇게 추운데 일껏 강을 건너서 주막이 없다면 어찌할 뻔했느냐? 송파는 그래도 남북을 잇는 요처라 상인의 왕래가 빈번하니 주막은 여럿일 테지."

"내일이 송파 장날이라 하옵니다. 송상이 싣고 오는 것이 조기이온데 설날이 낼모레니 집집마다 차례를 지내려면 아마, 저 조기는 천세가 나겠습지요?"

", 네가 장사의 묘리를 터득한 것 같구나. 장사란 시세가 눅을 때 샀다가 값이 올랐을 때 되파는 것인데, 그것을 농단(壟斷)이라고 하느니라. 오로지 눈앞의 이익만 노린다는 말이다. 장사가 천하고 장사꾼이 하찮은 취급을 받는 것은, 농단을 부리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장사꾼 만큼 백성들에게 요긴한 것도 없느니라. 흔한 곳에서 귀한 곳으로, 싼 곳에서 비싼 곳으로 물화가 움직인다면, 물화가 흔해져 값은 내릴 것이니 백성들에게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 김화에선 흔한 쌀을, 논이 없는 함경도에 갖다 파는 송상 같은 장사꾼이 있기에 한양에 있는 우리가 큰 덕을 보지 않느냐?"

"나으리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로 그러하옵니다. 저 송상이 아니었다면 매년 김화의 볏섬을 어찌 한양으로 옮기겠습니까요. 그런데도 장사꾼이 사농공상의 끝자락에 붙어 있으니, 이것은 나으리의 말씀대로 농단이라는 그놈 때문이겠습지요?"

", 하나를 가르쳐 주면 둘은 몰라도 하나는 꼭 아는구나."

찬바람이 쌩쌩 부는 송파나루에 닿고보니, 주막이 두어 채 있기는 하나 강바람에 행인이 없어 썰렁하기가 그지없었다. 송상 패거리들은 저만치 앞서 우시장 터를 지나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송윤호도 그들을 따라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은 썰렁하던 나룻터와 사뭇 달라서 술집에는 추위를 면하려는 사람들로 북적 거렸다. 객주는 더욱 붐벼서 쌀섬과 생선, 과일, 무명 솜 등 가지가지 물건을 우마에 싣거나 지게에 얹은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송윤호는 술과 밥을 파는 집을 골라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에는 평상이 놓였건만 오늘같이 추운 날은 쓸모가 없는 것이라 방으로 들어가 구석자리에 앉았다. 방이 넓건만 십여 명의 손님으로 빈자리가 없던 탓이었다. 낫살이나 먹은 중노미 행색은 술과 밥 심부름에 정신이 없는 듯하였다. 중노미를 기다리던 거칠이가 할 수없이 부엌으로 나가더니 얼마 후에 밥과 국이 놓인 목판을 들고 왔다. 새벽부터 줄 곳 추위에 떨다가 오정이 지나서야 뜨거운 국물을 넘기니, 단번에 추위가 물러가는 느낌이었다. 거칠이 역시 뚝배기를 사타구니에 끼고 숟가락질에 여념이 없는 것을 보니 춥고 배가 고팠었나 보았다. 두 사람이 밥을 다 먹고 숭늉까지 얻어다 마시고 있는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패랭이 쓴 머리 하나가 큰소리로 말을 하는 것이다.

"여기 좌랑 나으리 계시오니까?"

송윤호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거칠이가 나섰다. 송상의 아는 보부상이기 때문이었다. 거칠이가 밖에 나가보니 도행수가 되었다는 천수돌이 서 있는 것이다.

"나으리 안에 계시는가?"

거칠이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짚신을 벗어던진 천수돌이 방으로 들어왔다. 한쪽에 앉아 있는 송윤호를 본 천수돌이 성큼 다가가서 넙죽 엎드려 절을 하였다.

"나으리, 송상 도행수 천수돌이 옵니다. 그간 무량하시었는지요?"

절을 하고 고개를 드는데 분명 수 년 전의 답삭 부리 수염의 천행수가 적실하여 송윤호가 반가워 손을 잡았다.

"반갑네. 여기서 천행수를 보리라 어찌 짐작이나 했으리. 그 사이에 도행수가 되었단 말은 들었네. 잘 된 일이고 반가운 노릇일세."

", 소인도, 진사 어른이 지금은 예조 좌랑이 되시었단 말씀은 들었사옵니다. 소인이야말로 감축드리옵니다."

"들으니 송파에 나와 일을 본다 하던데 이곳에도 송방을 낸 건가?"

"아니옵니다. 이곳은 송방에서 나온 쇠살주가 따로 있습죠. 소인은 이번 설 대목만 보고 일간 송도로 갈 것입니다. 나으리, 말씀은 저희가 묵는 객주에 가시어 하시고 이만 일어나시지요."

"아니네. 송상에 폐를 끼칠 의향이 없네. 아무 데서나 하루 유할 것이네."

"폐라니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몰랐다면 모르되 알고서야 어찌 나으리를 모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서 일어나시지요."

천수돌의 집요한 친절에 넘어가기로 한 송윤호가, 송상이 쓴다는 객주로 결국 따라나섰다. 객주 안마당에는 말짐을 부려 창고에 넣느라, 물목과 수량을 적고, 풀고 묶고 하느라 많은 사람이 북적대었다. 천수돌이 기중 깨끗한 방으로 송윤호를 인도하였다.

"나으리 곧 중화를 올리도록 하겠사오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요."

송윤호가 아까 먹었다고 손사래를 치자 그럼 술상을 보아오겠다고 나가는 것이다. 유람길도 아닌 송윤호가 대낮부터 술을 마실 기분도 아니어서 적극 만류를 하여 천수돌을 앉히었다. 그리고는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내가 이번에 길을 떠난 것은 원주에 긴한 볼일이 있기 때문일세. , 자네에게 알고 싶은 것이 있네. 원주로 가는 지름길이 있다면 좀 가르쳐주게나."

천수돌이 대답 대신 방문을 열더니 마당에서 바삐 돌아가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어이, 거기, , 임술이, 옳지, 임술이 너 이리 좀 들어오너라."

도행수가 부르니 쭈뼜쭈뼜 방을 들어선 임술이란 자는 스물댓 쯤 되어 보였다.

", 뭘 하구 있어? 나으리께 절 올리지 않구?"

임술이가 송윤호의 앞에 오더니 너푼 절을 하였다.

"나으리, 여기 임술이란 동패 올시다. 이 자가 달포 전까지 원주 제천으로 북어를 팔러 다녔드랬습죠. 허니 원주 길이라면 눈 감고도 다닐 사람이니 물어보시지요. 임술이 너는 나으리 물으시는 대로 소상히 아뢰도록 해라. 알았는가?"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도행수님. 쉰네가 원주 길은 손바닥같이 아니깝쇼."

임술이가 원주 가는 길을 가르쳐주기 시작하니 송윤호와 거칠이가 귀를 세워 듣다가 필낭을 꺼내어 미심쩍은 갈림길은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적고 하였다. 임술이가 지나치게 자상하여, 큰길 작은 길, 큰고개 작은 고개, 샛길과 돌아가는 길을 끝없이 가르쳐 줄뿐아니라, 동구 밖의 느티나무, 개울가의 버드나무에, 무슨 산 무슨 산 하니 송윤호와 거칠이가 오히려 헷갈리기 시작하였다. 옆에 있던 천수돌이 듣기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나는지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그만해! 그러다 고목에 있는 다람쥐 구멍까지 다 읊겠다. 나으리. 차라리 이 임술이를 대동하시는 편이 좋을 듯 싶사옵니다. 그리하시지요."

", 아닐세. 설 대목으로 바쁜 사람을 내가 빼 내서야 될 노릇인가?"

임술이를 길라잡이로 하라는 말에 송윤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옵니다. 소인에게 생각이 있사옵니다. 기왕 원주로 가는 길에 조기를 지고 간다면 임술이 동무도 설 대목은 놓치지 않는 셈이옵지요."

"허허, 역시 송상 도행수 다운 묘책일세."

"하옵고, 지난 추수 때부터 김화의 볏섬은 밖에 있는 피행수(皮行首)가 원산으로 실어나르 옵니다. 여보게 임술이, 피행수 좀 오라 하게."

임술이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더니 곧이어 건장한 사내가 들어와 송윤호에게 넙죽 엎드리었다.

"소인, 피천득(皮千得)이라 하옵고 행수 거행 하옵니다."

송윤호가 고개를 드는 사내의 얼굴을 보니 나이는 서른이 조금 넘은 듯하고 몸가짐이 의젓하면서도 상스럽지 않았다. 왠지 호감이 가는 인상인 것이다.

"이분은 예조좌랑이시며 자네가 지난해 원산으로 실어 간 벼의 원 주인 되시네. 앞으로 자네도 잘 알아 모셔야 할 것이네."

"아까 천한 소인들 일행에게 선뜻 길을 내어주실 때 남다른 분이신 것을 느꼈었습지요. 나으리의 도량에 새삼 감흡하옵니다."

"별 소리를 다 하는군. 짐 진 인마(人馬)보다 몸 가벼운 내가 피하는 것이 쉬운 일 아닌가? 괜찮네. 허고, 앞으로도 김화의 벼는 춘보와 상의를 하게. 여기 있는 거칠이가 매년 가을이면 김화로 내려가니까 그때그때 말을 전하겠네."

". 그리 합지요."

예조 좌랑이라면 품계로 따져도 고을 원님을 하고도 남을 나으리께서 하찮은 장사치를 대하여 길을 내어주시는 것도 모자라, 하게 말씀을 하시질 않나 방안에 마주 앉게 하시니 놀라고도 놀라운 일이었다. 길을 가다가도 양반만 보면 논바닥으로 내려서야 했고 양반의 기침소리만 들어도 절로 넙죽 엎드렸던 것이다. 한데, 조선팔도를 그렇게 싸 다녀봤어도 벼슬이 높은 양반이 이렇 듯 스스럼없이 자신들을 대하는 것을 본 적이 없던 송상들은 감복(感服) 하였다. 이튿날, 송윤호는 임술이와 그의 짝패 무동이를 앞세워 송파를 떠나 남한산성을 우회하여 고불산 고개를 넘어 광주(廣州)에 닿았다. 송파에서 이곳까지 편한 길로 백여 리가 되지만 임술이가 길을 줄이려고 고불산 산길로 들어서는 통에 송윤호는 그만 녹초가 되었다. 거칠이야 워낙 걸음 잘 걸으니 그렇다 쳐도 임술이와 무동이도 도붓꾼답게 등짐을 지고도 끄떡없었다. 이튿날부터 백여 리씩 걸어서 이천 여주를 거쳐 350리 길을 나흘 만에 원주에 닿았다. 송윤호가 처음에는 원주 감영으로 들어가 감사를 만나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형이 염초도회소로 곧바로 갔다면 감사에게 물어봐도 모를 것이요, 안다 해도 바르게 알려줄 것 같지 않은 것이다. 임술이와 무동이는 조기를 팔게 원주에 남기고 송윤호는 아직 해가 남았으니 계속 가기로 하였다. 임술이가 주천 가는 길은 토끼가 다니는 길까지 자세히 가르쳐 주며 작별을 아쉬워하였다. 송윤호가 거칠이를 앞세워 삼십여 리를 더 가니 해가 저무는데, 산골의 해는 산만 넘어가면 당장 어두워지는 법이라 부지런히 걸어 마을에 당도하였다. 임술이가 가르쳐준 초당골인 것이다. 네댓 채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좇아 첫 번째 집에 들어가 사정을 말하니 머슴 방이라도 괜찮다면 쉬어가란다. 머슴방에 든 송윤호가 의관을 벗고 행전을 푸는 사이에 거칠이는 길양식을 내어 군불 아궁이에 붙은 솥에다 밥을 하였다. 마침 머슴이 군불을 넣었는지 물이 설설 끓어 안성맞춤이었다. 주인집 부엌에서 밥을 먹고 나온 머슴이 관솔에 불을 붙여 자기방에 들어 올려다가 양반과 같이 있는 것이 영 켕기는지 이웃 머슴방으로 자러 가고 말았다. 밥을 먹고 절절 끓는 방에 누웠으니 노정에 지친 몸이 천근으로 무거워서 그대로 깊은 잠이 들었다. 이튿날 송윤호가 깨어보니 거칠이가 어느 틈에 밥을 지어 놓았다. 고마운 인사를 주인에게 하고 길을 떠나 40리쯤 걸으니 과연 길가에 제천 길과 주천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눈을 이고 있었다. 남으로 내려가면 제천이요 동으로 가면 주천인 것이다. 한데 예상 밖으로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이곳에서 40여 리만 더 가면 마을이 있어 오늘 해 떨어지기 전에 닿으려 했건만, 집 한 채 없는 눈 쌓인 갈림길에서 어찌할 것인가. 주천 길을 살펴보니 언제 지나간 것인지는 몰라도 말발굽이 찍힌 것으로 보아 역마가 오고 간 흔적이 있었다. 그러나 눈은 한자 이상 쌓였으니 40리 길 보행은 힘든 노릇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송윤호가 주천 길을 버리고 제천 길을 걷기로 하였다. 여기서 십여 리를 더 가면 화전민이 모여사는 마을이 있다고 임술이에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기도 눈이 쌓이긴 마찬가지여서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웬만하면 눈길에 나뭇꾼 발자국이라도 있으련만 임술이가 아르켜준 산비탈을 다 올라갈 때까지 토끼 발자국 밖에 보지 못한 것이다. 비탈길을 따라 얼마를 걸었을까, 좁은 골짜기를 지나자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밭에 눈에 덮여 설원(雪原)으로 보이나 골짜기 전체가 밭인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곳에 이런 별천지가 있을 줄이야 어느 누가 알겠는가? 밭 자락 끝에는 옹기종기 굴피 집이 대여섯 채가 있었다. 그때, 낯선이를 먼저 발견한 개 한 마리가 악을 쓰며 짖기 시작하더니 이집 저집에서 검은 머리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송윤호와 거칠이가 집을 향해 걸음을 빨리하였다. 이에 놀란 것은 화전민 들이었다. 사람은커녕 개새끼 한 마리 보기 힘든 마을에 낯선 외부인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갓을 썼으니 염라대왕 보는 듯하는 양반임에랴. 여자들과 겁 많은 사람은 번개같이 어디로 숨었고 낫살이나 먹은 늙은이가 허리를 굽혔다.

", 놀라게 하려던 생각은 없었소. 주천으로 가던 길에 해 안으로 닿지 못할 것 같아 이 마을에 하루 신세를 지려는 나그네요."

", 그리하시지요. 양반님의 분부신데 감히 항거 하오리까."

", 이거 고맙소. 골방 하나면 되리다."

"? 골방이라 굽쇼? 아니 올시다. 쉰네의 집을 쓰시옵소서. 쉰네는 이웃에 나누어 자면 그뿐이옵니다."

송윤호와 촌로가 사양을 하다가 결국 양반 대접을 받아서 굴피집이나마 편히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거칠이가 가마솥에 물을 데워 나무 함지박에 담아와서 젖은 버선을 벗고 발을 씻고 누웠다. 누워서도 형이 염초도회소에 들리지 않았다면 과연 어디로 갔을까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온 적이 없다는 주천 현감의 서신은 사실일까? 설마 이헌조가 이곳까지 미행을 보내지는 않았겠지, 끝없이 생각이 꼬리를 잇는데, 밖에서는 이른 저녁들을 짓는지 매케한 연기 냄새가 나는 것이다. 거칠이도 길양식 자루를 꺼내어 저녁을 지으려는데 노인이 다시 나타나 밥 짖기를 말리는 것이었다. 굳이 양반님께 저녁 한 끼 대접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거칠이도 항복을 하고 말았다. 이 집에서 밥을 하고 저 집에서 반찬을 해서 송윤호와 거칠이가 산골 별미로 배를 불리었다. 어둠이 몰려오자 관솔불을 들고 들어와 코클에 불을 얹던 노인을 송윤호가 붙들어 앉히었다.

"불시에 들이닥쳐 폐가 많소이다. 보아하니 낯선 이는 내가 처음인가 보오."

"언젠가 길 잃은 도붓꾼이 온 적이 있습지요. 그 외에 나으리가 처음이옵니다."

"화전으로 다솔식구를 거느리기가 고되겠소 그려."

"죽지 못해 사는 것입지요. 삼 년에 한번 씩 화전을 옮겨야 하니 오죽하겠습니까?"

"화전을 옮기다니? 잘 일궈 놓은 밭을 버린단 말이요?"

"삼 년이면 밭에 거름기가 없어져서 농사가 안 되옵니다. 화전은 재거름이... ."

노인의 이야기가 시작되려는데 어디선가 째지는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북상투 바람의 사내가 문 밖에서 소리를 외치는 것이다.

"촌장님, 큰일 났소. 우리 애가 다 죽아가오. 얼른 와서 좀 봐주오. , 어서요."

"양반님 기신데 어찌 이리 경망스럽게... 에잉. 어디가 아프다더냐?"

황급히 짚신을 끌며 노인이 물었다.

"낸들 아오? 배를 잡고 때굴때굴 구르오."

"가자."

한식 경이 넘어서 노인이 다시 나타났으나 얼굴이 어두웠다.

"그래 아프다는 아이는 좀 나았소?"

"어린 것이 거친 나물밥에 관격이 났사온데 산골에 약이 있어얍지요. 손톱 밑을 따고 배를 문지르는 것 말고는 없습지요. 밑으로 싸면 살 것인데 입으로만 게우니 아무래도 틀린 노릇 입지요."

"가만, 관격이라 했소? 그렇다면 이걸 갖다 멕여 보시오. 따뜻한 물에 게어 숟갈로 떠 먹이면 될 것이요."

송윤호가 급히 약낭(藥囊)을 끌러 먼 길을 떠날 때 갖고 다니는 비상약을 꺼내주었다. 깜짝 놀란 노인이 사양을 하다가 재차 권하자 약을 가지고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각 쯤 지나자 노인이 북상투를 데리고 오더니 두 사람 모두 송윤호에게 넙죽 절을 하는 것이다."

"나으리, 살았습니다요. 살았어요. 아이가 방금 밑으로 왈칵 쏟아 내었습니다. 새파랗던 입술도 핏기가 돌굽쇼. 나으리 세상에 이런 고마울 데가... ."

북상투는 말도 못하고 우는 듯 웃는 듯한 얼굴로 연신 이마를 찧고 있었다.

"천만다행이로고. 관격이 그쳤다면 이 약마져 갖다 먹이게나. 조금 전의 약은 천지환이고, 이 약은 장을 편하게 해주는 장일환일세."

양반이라면 누구나 의약의 묘리쯤은 익혀야 하는 법이라, 송윤호도 반 의원은 될 정도였다. 특히 돌아가신 가친은 의원 이상의 실력을 갖고 집안의 모든 병자를 가료하였었다. 송윤호는 가친에게서 보고 배운 대로 직접 약도 조제를 하였다. 송윤호가 몇 알씩 갖고 있던 천지환과 장일환이 든 약낭을 아예 노인의 손에 쥐여주니 노인은 또 한번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의원도 약도 없는 산골에 관격 같은 병이 난다면 큰일이 아니겠소? 많지 않으나 급할 때 쓰시오."

"이 은혜를 어찌 갚을지 모르겠사옵니다. 나으리 고맙사옵니더."

"되었소, 그런데 아까 하려던 말인데, 혹시 염초 도회소라는 곳을 아시오?"

"염초 도회소라는 곳이 무엇 하는 곳이옵니까?"

"그야, 화약을 만들 때 쓰는 흙을 모으는 곳 아니겠소?"

"? 화약 말이 오니까?"

화약이란 말에 흠칫하던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가 고개를 숙여 외면을 하였다. 송윤호가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산중에서 간혹 난리 때 주운 조총으로 사냥을 해서 먹고 산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소이다마는 나는 조총은 알바 없는 사람이요, 다만 염초도회소로 갔다는 사람을 찾아 나선 길이요. 혹시 길을 잘못 든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하여 물은 것이니 의심할 이유가 없소이다."

송윤호의 말에 두 사람이 약간 안심이 되는 듯 다시 눈을 마주치더니 노인이 북상투에게 턱짓을 하였다.

"걸구 애비, 네가 나으리께 들은 대로 아뢰거라."

"지가요? 말재간이 없어놔서... 어디부터 시작할까요. 촌장 어른."

", 그만 둬라. 네놈은 나으리께서 주신 이 약이나 걸구한테 멕이거라. 아까 본 대로 멕이면 되니라."

말재간 없다는 걸구애비가 나가자 노인이 송윤호를 향해 돌아앉았다.

"한 달.... 아니 달포쯤 전인가? 아무튼, 첫눈이 오던 날 입지요. 그때가, 오정이 못 되었을 때인데 천지가 떠나가는 천둥소리를 들었습지요. 가까이서 들린 소리가 아니었사옵니다. 허기야 그리 큰 소리를 가까이서 들었다면 귀가 다 멀고 말았겠습지요. 어디서 그리 큰소리가 났는지는 산이 첩첩이니 알 수 없었습지요. 그러하온데 아까 그 걸구 애비가 전날 놓은 올무를 걷으러 산등성이 너머로 가다가 큰소리를 들었고, 번쩍하는 빛까지 보았사온데, 그곳이 선바우골 어름이었답니다."

"노인이 말하는 곳이 주천과 가깝단 말이요?"

"아니옵지요. 주천은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도 70리는 더 가야 하옵니다. "

"뭐요? 40리가 아니고 70리란 말이요?"

"나으리께서 말씀하시는 도회소란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나 관아 가까이에 있다면 70리는 가야 하옵니다. 주천이 본래 영월계(寧越界)에 속하옵지요."

"그럼 큰소리가 났다는 곳은 이정표에서 얼마를 더 가오?"

"시오 리가 좀 못 될 것 같사옵니다. 갈림길에서 가까운 골짜기 입지요."

"아니 그런 곳에 무엇이 있었기에 여기서도 들릴 만큼 큰 소리가 났다는 게요? 설마 그런 산중에 화약창이야 있었겠소?"

송윤호의 입에서 무심코 화약창이란 말이 나오자 노인이 다시 경계의 눈빛을 띠는 것이다. 그리고는 굳은 얼굴로 말없이 앉았다가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노인의 태도에 일말의 의념을 품은 송윤호가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데 노인이 다시 방 밖에서 기척을 하더니 웬 떡거머리 총각 놈을 데리고 나타났다.

"나으리 이놈은 쉔네와 함께 사냥질을 다니는 놈이온데, 열흘 전에 원주장에 갔다가 이상한 말을 듣고 온 놈이 올습니다. 덕보야, 나으리께 사실대로 아뢰거라."

평생 처음 양반 앞에서 말을 하게 된 덕보란 놈이 조금 전의 걸구 애비 처럼 입이 붙어 말문을 못 열고 꺽꺽 대자 이번에도 노인이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 덕보란 놈이 제사꺼리를 장만하려고 원주장에 갔다가 제 고종사촌을 만났다 하옵니다. 이놈 사촌은 원주 감영의 관노(官奴)이온데, 덕보에게 이상한 말을 하더랍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감사의 지시로 원주 감영의 군사와 관노가 모두 동원되어 군관의 뒤를 따른 적이 있는데, 어느 골짜기에 이르니 죽은 시체가 그득하더랍니다. 게다가 팔다리가 제대로 붙은 시체는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살점으로 흩어져 있더라지요. 엄청나게 깊은 구덩이가 파져 있어서 시키는 대로 그곳에 쓸어 넣어 묻기는 했는데 죽은 이유는 모른답니다. 일이 끝나자 군관이 환도를 빼 보이며 입단속까지 시키더랍니다. 그놈이 갔다던 곳이 바로 우리가 들었던 우렛소리가 났던 곳이라 하오니 선바우골(立石谷)이 적실하옵지요. 하온데... 나으리를 믿어 이실직고 하옵건데 선바우 골에서 화약을 만든다는 것을 쉔네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지요."

"뭐시라? 군기시에서 만들 화약을 여기서 만들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어찌 알았다는 게요?"     

아연한 송윤호가 노인을 다그쳤다. 이 무슨 이치에 닿지 않는 뜬금없는 소리인가? 이런 곳에서 화약을 만들다니? 그것이 사실이라면 분명히 형과도 관계가 있는 일이지 아니겠는가? 송윤호는 더욱 초조한 마음이 되었다.

", 솔직하게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여기 있는 덕보의 할미가 선바우골 화약 만드는 곳에서 부엌의 밥 할미로 있었습지요. 이 할미가 지난가을에 이곳을 다녀가며 쉰네에게 화약 가루를 갖다 주어서 내막을 알게 되었습지요. 사실 이곳 사람들은 화전만으로 먹고살기 힘들고 사냥한 피물(皮物)을 장에 내다 팔아야 겨우 목숨을 부지 하옵니다. 쉔네에게 조총이 있사온데 화약이 필요한 것을 누구보다 잘 알던 덕보 할미가 몰래 갖다 준 것이옵지요. 할멈 말을 들으니 서너 달마다 유황이 실려 온다하옵디다. 그걸로 그곳에 있는 약장들이 화약을 만드는데 화약 자루가 많더랍니다. 한데 무엇 때문인지 이번에 화약이 잘못 폭발하여 그곳 사람들이 모두 죽은 것입지요. 덕보 사촌의 말로는 할미도 집채에 깔려 죽었더랍니다. 그런데 어디 군사인지 군사들이 더 많이 죽어있었다니 이상한 일이옵지요."

노인이 하는 말을 듣던 송윤호의 심장이 멋는 듯하였다. 아차, 형에게 무슨 일이 생겼구나 하는 직감이 머리를 스치는 것이다.    형이 염초도회소로 오지 않았다는 서찰이 사실이라면 이곳 말고 달리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송윤호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며 이명(耳鳴)이 울려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덕보 사촌의 말을 듣고는 우리게 누구도 그곳에는 가지를 않았습지요. 혹여 관군이라도 만나면 큰일이라, 얼씬도 말라고 쉔네가 엄히 신칙을 했습지요."

노인이 하는 말이 송윤호의 귀에는 한마디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가슴과 귓속과 머리에서 반복적으로 쿵쾅거리는 소리만 느껴질 뿐이었다. 다음날, 덕보를 길잡이로 하여 송윤호와 거칠이가 화약이 터졌다는 선바우 골로 향하였다. 이정표가 서있는 갈림길에서 주천 길로 눈을 헤치며 얼마를 가자 앞장섰던 덕보가 한 방향을 가리키며 자신은 더 가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 이 길로 쭉 두마장을 가시면 되옵니다. 쉰네는 이만 돌아가야 하오니... ."

덕보가 가리킨 길이란 것이 눈에 덮인 골짜기일 뿐 발자국 하나 없는 곳이었다. 폭발 후에도 눈이 몇 번 더 온 것이리라.    송윤호가 두말없이 앞장을 서서 길을 만들며 나아가니 거칠이도 말없이 뒤를 따랐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 위를 얼마나 갔을까 집터가 될만한 빈터가 나오고 불에 타다만 기둥이 두어 개가 서 있었다. 그러나 폭발의 흔적은 눈에 덮여 어디가 어디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송윤호는 만에 하나 형이 있었다는 어떤 단서라도 있을까 하여 이리저리 눈 속을 발로 헤치며 다녀보건만 아무런 보람이 없었다. 거칠이도 막대기로 눈바닥을 휘젓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온 마당 가득히 송윤호와 거칠이가 발과 막대기로 휘저은 자국이 빈틈이 없었다. 이리저리 다 헤치다가 산 밑 끄트머리만 남았다. 그동안 찾은 것이라고는 찢어진 더그레 한 자락과 돼지털벙거지 하나가 전부였다. 허탈한 송윤호가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나으리! 여기... ."

거칠이의 다급한 소리에 돌아보니 찌그러진 갓이 막대기 끝에 매달려 있었다. 갓은 찢어지고 구겨져 누구의 것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구슬 끈도 끊어져 구슬이 하나도 없으나 갓끈만은 멀쩡하였다. 갓끈을 만지던 송윤호가 무슨 생각에 황급히 그 자리에 엎드려 손으로 눈바닥을 더듬기 시작하였다. 그런 주인을 잠시 바라보던 거칠이도 무엇을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라 같이 바닥을 훑어 나가는 것이었다.

"있구나."

주운 것을 훅훅 불어서 자세히 들여다보던 송윤호가 손바닥으로 감싸더니 주먹으로 그러쥐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어금니를 지긋이 깨물었다.

"나으리 여기도 있사옵니다."

거칠이가 주먹을 펴자 서너 개의 작은 토막이 나왔다. 구슬 대신 끼우는 오죽(烏竹) 토막이었다. 쥐고 있던 것과 거칠이가 주운 것을 한참을 바라보던 송윤호가 눈을 감았다. 구슬 끈에 꿰는 이 오죽 토막은 형의 것이 틀림없었다. 5품 지평이 되어서도 남들 다 하는 옥구슬은 커녕, 곱돌로 깎은 구슬 한번 갓에 매달 형편이 안 되어서 검은 살대를 잘라 구슬 끈으로 삼은 형이었다. 송윤호의 눈이 질끈 감기는 것과 동시에 맺혔던 눈물이 주르르 떨어지며 털썩 무릎이 꺾였다. 형을 찾겠다는 희망은 이로써 말짱 헛것이 된 것이었다. 유황, 화약, 김경준, 그리고 형.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일이었다.

"형니임... 혀엉니임... ."

눈밭을 긁으며 오열하는 송윤호의 곁에 거칠이 역시 소맷자락을 적시며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안석에 기댄 김석주는 말이 없었다.

"대감은 송지평이 그리될 것을 아시고도 군사를 보내시었는지요?"

마주 앉은 이헌조가 또다시 묻건만 김석주는 손에든 장죽으로 재떨이를 땅땅 내려칠 뿐 여전히 입을 떼지 않았다. 송수호가 원주로 내려가던 날 이헌조는 김석주에게 윤휴가 역모를 꾀하고 있음을 알렸었다. 부연하여 장현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은자의 흐름과 역모를 모의하는 인물들을 망라하여 보고를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송수호가 유황의 흐름을 쫓아 원주로 갔다고 하자 그동안의 노고를 격려까지 해주던 김석주였다. 그 후에 보름을 기약하고 떠난 송수호가 한 달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 속을 태울 때, 훈련원 기병들이 포도청 복색으로 남행한 사실이 사헌부에 포착이 된 것이다. 이헌조가 날짜를 따져보니 송수호가 원주로 간 닷새 후였다. 걸어서 도회소까지 7일이 걸릴 테니 도착과 아울러 기병이 닿을 것이었다. 이헌조는 김석주를 만나 훈련원 기병의 움직임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간단한 대답이 돌아오는 것이다.

"역도를 치러 갔었지요."

"? 역도라니요? 역도는 도성 안에 있지 않습니까?"

"역모에 쓸 화약을 원주의 어느 골짜기에서 밀조한다는 고변이 있어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 무장된 병사를 보낸 것이외다."

"원주라면? 혹시 염초도회소를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왜 아니겠소? 이 집의(李執義)가 말하던 유황이, 염초를 만나면 무엇이 될 것 같소? 화약이 될 것 아니겠소? 행여 역도들의 손에 화약이 먼저 들어간다면 그다음 일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니 어찌 선수를 치지 않을 수 있겠소이까?"

"아니 대감, 그곳에 사헌부의 관원인 송지평이 내려갔다고 대감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송지평이 역도로 오인을 받는다면 큰일이 아니오이까?"

"큰일? 이 집의는 역도의 진압보다 큰일이 있다는 게요?"

아차 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송수호를 걱정하여 한 말이 건만 김석주는 입가에 비웃음을 물고 흰자위가 많은 눈을 들어 이헌조의 얼굴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이헌조가 김석주의 시선을 피해 황급히 손을 저었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 송 지평은 사헌부에서 꼭 필요한 인물이온데 혹시 무슨 불행한 사고라도 만날까 하여 한 말이올시다."

", 이 일을 어쩌면 좋소? 이 집의가 말하는 그 불행한 사고라는 게 벌써 일어나고 말았으니 말이요?"

"아니? 그럼 송 집의가 잘못되기라도 했단 말씀입니까?"

깜짝 놀란 이헌조가 김석주의 앞으로 몸을 굽혀 물었다.

"어전에 올라온 원주 감사의 장계를 보니 그곳에서 화약을 밀조하던 일당들이 모조리 폭사를 했답니다. 관군이 들이닥치자 놈들이 궁지에 몰린 쥐가 되어 화약에 불을 놓았나 봅디다. 밀조된 화약이 많았던지 군사고 뭐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다 결단이 났다고 합디다그려."

", 그럼 송지평도 결단이 났다는 말씀입니까?"

"그야 모르지요. 송 아무개가 원주로 내려갔다는 이야기는 집의(執義) 영감이 내게 해준 말이니 그가 유황을 좇아갔다면 그 자리에 있었을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무장된 군사를 보낼 때야 인명이 상할 것을 아시고 보냈을 것 아니오이까? 대감은 송지평이 그리될 것을 아시고 계셨던 것입니까?"

김석주는 말이 없었다. 이헌조는 형의 행방을 묻던 송좌랑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는 이헌조 자신도 송수호의 행방을 알지 못해 애를 태우던 시기였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송수호의 동생인 송 좌랑이 병()을 칭탈하고 휴가를 내어 형을 찾아 원주로 갔다는 것이다. 이것을 김석주에게 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를 망설이던 이헌조는 말하지 않기로 하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첨꾼들은 호랑이 상이라 치켜세우나 솔직히 메주 덩어리와 다름없는 김석주의 얼굴이 이헌조를 달래 듯 입을 열었다.

"송지평의 일은 참으로 안된 일이나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소. 아니할 말로 그 일로 인해 죽은 사람이 송지평 한 사람뿐이오이까? 허니 없던 일로 덮으시오. 송지평의 가족들에게는 적변(賊變)이나 호환(虎患)을 당했다 하시던지 알아서 하시오. 이건 다른 얘기 올시다마는 이제 영감도 대사헌 자리는 한번 앉아봐야 할 것 아니겠소이까? 윤휴나 허적의 역모는 이미 드러났으니 대사헌 배호도 얼마 남지 않았소이다. 그리되면 그 자리는 누가 앉아야 하겠소이까? 바로 영감 아니겠소? 이러한 때에 이것저것 따지고 캐기만 해서야 무슨 좋은 일이 있겠소이까? 아니 그렇소이까?"

이헌조의 뇌리에 송수호 형제가 연이어 떠올랐다 송수호의 동생이 찾아왔을 때만 해도 설마 하는 마음이 있었건만 이제는 다 틀린 노릇이었다. 원주까지 가서도 형을 찾지 못하고 돌아설 송 좌랑이 참으로 딱한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다 끝난 일이었다.

"하온데 송지평에게는 예조의 좌랑으로 있는 아우가 있사온데 그 사람이 내막을 알아낸다면 어찌하면 좋겠소이까?"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는 송 좌랑을 시생이 모르겠소이까? 허고 송 좌랑이 형을 찾아 원주로 갔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소이다. 나도 부리는 손과 귀가 있으니 말이웨다. 내막이라고 하시었소? 누가 말을 하지 않는 이상 설마 내막이야 알겠소? 허고 설령 내막을 안대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이다.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 말이웨다."

김석주의 마지막 말에 이헌조의 가슴이 철렁하였다.

‘하면? 송수호의 동생까지?’



섣달이 지나고 정월초하루가 되어도 송수호의 집에서는 조상에게 차례상을 올리지 않았다. 해가 바뀌어 경신년(庚申年1680) 이 되었건만 집안에는 무거운 적막만이 감도는 것이다. 한양으로 돌아온 송윤호는 입을 굳게 닫고 형의 사랑방에 틀어박혀 꼼짝을 하지 않았다. 송윤호의 노모는 식음을 잊고 정화수 앞에 손을 비비고 형수는 미쳐 슬플 여가도 없이 시어미와 시동생과 어린 아들을 챙기느라 바쁜 것이다. 송윤호의 처는 미동에서 안국방까지 10여 리 길을 오가며 시가(媤家)와 자신의 사 남매를 보살폈다. 죽음 같은 날들이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지나서 2월이 되었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대로 형의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가 주검을 보지 못했으니 끝까지 부정할 것인가? 정월의 모진 추위 속에서 군불도 때지 않은 사랑방에 앉아 절망과 고뇌에 빠졌던 송윤호가 2월도 다 가던 어느 날 봉두난발에 핏발 선 눈으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아내가 떠다 바치는 물로 소세를 하고 머리를 빗질하여 단정히 상투를 틀었다. 그리고는 안방으로 가서 어미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는 것이다.

"어머님, 이렇게 가족 모두가 무너지는 것은 형이 원하는 바가 아닐 겝니다. 이러다가 어머님이나 형수님까지 잘못되면 저 어린 장손인 원일이는 어찌합니까? 그래서 저 나름대로 결단을 내렸사오니 두 분도 제 뜻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임자도 두말없이 따라주기 바라오."

송윤호의 비장한 얼굴을 본 누구도 입을 떼지 않고 다음에 나올 말을 기다렸다.

"그래서 말인데 벼슬을 그만두고 우리 모두 낙향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낙향이래야 본향에는 조상들 무덤 말고는 밭 한고랑 없으니 갈 수가 없고 김화의 저 사람이 살던 곳으로 내려가려 합니다. 하니 준비들 하십시오."

"아니다. 나는 이 집에 남아 있겠다. 여기가 내가 살 집이고 애비가 찾아올 집이니라. 너희들이나 떠나거라."

송윤호가 갖고온 갓끈을 손에서 떼지 않는 노모의 말이었다. 혹여 죽지 않고 찾아올지 모르는 아들을 기다리겠다는 늙은 애미의 간절한 소망인 것이다.

"저도 원일이 데리고 어머님이랑 같이 남겠어요. 연로하신 어머님이 병환이라도 드신다면 어쩌겠어요. 작은 서방님 네만 내려가시지요."

"얘야, 원일애미야, 내 걱정은 말아라. 나는 말득이 내외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느니라."

"아니에요, 어머님 저도 원일이랑 남을래요."

고부 간의 실랑이를 듣고 있던 송윤호가 헛기침으로 두 사람의 말을 끊었다.

"김화로 가려는 것은 임시로 잠깐 가자는 것이 아니 옵니다. 이번에 내려가면 영영 이곳과는 이별입니다. 내가 조상 대대로 살던 집을 버리고 떠나려는 것은 저는 물론이고 후손들에게도 벼슬을 살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한양 땅을 떠나 시골에 묻혀 살아야겠지요. 만에 하나 형님이 살아계시기만 한다면 김화라고 못 오시겠습니까? 허니 어머님도 형수님도 다 같이 가십시다. 형님도 분명히 그러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송윤호 내외가 노모를 설득하는 데는 이틀이 걸렸으나 아무튼 가족 모두가 시골로 가기로 작정을 하였다. 송윤호는 사직상소를 올려 윗전의 허락을 얻었고 송윤호의 집은 급히 팔았다. 그러나 형의 집은 노모의 소망대로 말득이 내외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거칠이가 먼저 김화로 내려가서 사람들로 하여금 집을 손보게 하는 한편 춘보를 데리고 왔다. 짐은 옷과 이불 보따리 말고는 별로 없었다.

3월 중순 송윤호가 노모를 비롯한 모든 가족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일찍 길을 나섰건만 흥인문 앞에는 이미 문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지난달 허적이 탄핵을 받더니 남인들의 벼슬과 목숨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불똥이 자신에게도 떨어질까 재빨리 낙향하는 벼슬아치들 또한 많았다. 도망자를 찾는지 흥인문을 지키던 군관이 일일이 용모파기를 살핀 다음 문을 통과 시켰다. 세상이 바뀌는 것을 알아챈 군관 놈이 트집을 잡아 하인의 빰을 치고 양반을 아래 위로 눈을 흘기건만 평소 같으면 이놈 내가 누군 줄 알고 어쩌구 하던 양반들이 포졸 앞에서도 고분고분하였다. 송윤호 일행도 어른과 아이가 여럿이라 행렬이 자못 길었다. 가마가 세 채요, 나귀와 당나귀에 가마꾼을 빼고도 사람이 주종(主從) 합해 열둘이었다. 여벌 가마꾼까지 친다면 가마꾼이 여덟이니 사람만 스물인 것이다. 가마에는 노모와 원일이 모자, 그리고 어린 딸을 안은 송윤호의 처가 각각 타고 있었다. 옷 보퉁이를 인 언년이가 가마 뒤에 바짝 붙어 있고 그 뒤를 거칠이가 셋째를 태운 나귀를 끌고 있었다. 짐을 진 춘보는 길양식을 실은 노새에 둘째까지 앉혀서 고삐를 잡았다. 송윤호는 장남인 두일이와 함께 맨 뒤에서 걸어가는 것이다. 흥인문을 벗어난 일행이 부지런히 걸었건만 도봉에 이르니 해가 지려 하였다. 도봉은 주막도 없는 곳이라 민가에 돈을 주어 방 두 칸을 빌려 여자들과 어린애들을 들이고 어른들은 화톳불을 피워 노숙을 하였다. 스무 명의 밥을 짓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반찬이라고는 소금뿐이었지만 불평을 하는 아이 하나 없는 것이 신통하였다. 이튿날 서둘러 밥을 지어먹고 길을 나섰다. 저녁때까지 포천현에 닿는다면 오늘은 모두들 주막에서 묵을 수 있을 것이었다. 행렬은 다락원을 지나 삼거리에서 포천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는 내쳐 솔모루까지 갈 참이었다. 송윤호는 여전히 장남과 함께 앞서가는 행렬을 살피며 맨 꽁무니에서 걷고 있었다. 삼거리에서 시오 리쯤 걸었을까? 멀리 축석고개가 보이는데 길가에 서 있던 웬 갓 쓴 양반과 가마 한 채가 일행에게 끼어드는 것이 송윤호의 눈에 들어왔다. 보나 마나 축석고개에 적도들이 있을까 겁을 내어 일행이 많은 쪽에 묻어가려는 것일 터였다. 얼마 후에 고개를 만난 행렬의 앞을 춘보가 나귀를 끌고 앞으로 나섰다. 나귀에 탔던 수일이란 놈도 내려서 걷는 것이 송윤호에게도 보였다. 산천은 봄이 한창이라 산에는 산벛과 산도화가 연분홍으로 물들이고 물가의 버들도 싹을 틔워 연둣빛을 보태건만 송윤호의 가슴은 어둡기만 하였다. 산다는 것이 참으로 허무한 것이었다. 형의 대과 급제로 암울하기만 하던 부친의 생애에 처음으로 광명이 비치던 날 왜 하필 그날에 부친은 세상을 떠나셨을까? 죽을 고생을 다 해서 벼슬을 한 형은 왜 집안 형편이 좀 펴려는 순간에 비명횡사를 하였을까? 저 어린 장손을 두고 혼자만 세상을 등질 때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참으로 가슴 아린 일들이었다. 그리고 원주에 군사를 보낸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지금 조정에서 시작된 피바람의 진원지는 왕과 김석주로 비롯되었음이 분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군사를 보내 형과 김경준을 죽인 사람 역시 김석주 아니겠는가? 송윤호는 김석주를 조심하라고 형에게 이른 말을 떠 올리고는 입술을 물었다. , 그때 모든 것을 멈추게 했어야 했는데 그만 늦은 것이었다. 생각에 잠겼던 송윤호가 정신을 되돌린 것은 옆에서 말없이 따라오던 장남이 소매를 당겼기 때문이었다. 뒤가 마렵다는 것이다. 송윤호가 웃는 낯으로 냇가의 수풀을 가리키니 아이는 괴춤을 움켜쥐고 둔덕을 내려섰다. 송윤호는 그 자리에서 뒷짐을 지고 하릴없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데 길 아래쪽에서 십여 명의 사람들이 올라오는데 그 차림세를 보니 사당패 같았다. 얼핏 보아도 깃대와 등짐 진 놈과 장고를 맨 놈의 복색이 역시 사당패가 적실하였다. 송윤호가 눈을 돌려 앞서가던 가족의 행렬을 바라보니    가마는 고개를 향해 저만치 가고 있었다. 사당패에는 패랭이를 쓴 키가 큰 자가 앞장을 섰는데 아마도 모갑(某甲)인가 보았다. 그런데 이놈이 송윤호에게 시적시적 다가오더니 허리 뒷춤에서 짧은 곤봉을 꺼내들더니 미쳐 뒷걸음도 치기 전에 송윤호의 이마를 내려치는 것이었다. 갓이 부서지며 휘청하던 송윤호가 무의식적으로 뒤돌아서는데 놈은 사정없이 뒷머리를 다시 내려쳐버렸다. 그리고는 쓰러진 송윤호의 허릿춤에서 엽랑을 끌러내더니 발길을 내질러 쓰러진 몸을 둔덕 아래로 굴려버렸다. 정말로 짧은 순간에 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뒤를 보고 고의를 추스르던 송윤호의 장남 두일이가 이 광경을 보았다. 멈칫하여 그 자리에 우뚝 섰던 두일이가 제 아비를 부르며 달려들었다. 허나 사당패의 다른 놈이 발을 들어 그대로 내어지르니 가슴을 채인 두일이 역시 둔덕 아래로 굴러버렸다.

"어서 가서 덮쳐라."

모갑이의 한마디에 사당패가 등짐을 벗어버리더니 손에 손에 곤봉을 꺼내들고 저만치 가고 있는 가마 행렬로 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당패 보다 먼저 행렬을 노리는 놈들이 있었다. 가마와 인마가 고개의 꼭대기에 거의 닿아가는 순간 바위 뒤에서 두 놈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나귀를 끌고 앞장을 섰던 춘보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좌우로 스르르 벌려서는 놈들의 손에는 흰빛이 번쩍이는 환도가 들려 있었는데 그중에 한 놈이 번개같이 춘보의 어깨를 향해 칼을 그었다. 춘보가 비록 힘깨나 쓴다 하나 환도 앞에서야 어쩌랴? 게다가 말 한마디 할 시간도 뒤돌아 볼 틈도 주지 않고 빠른 동작으로 밴 것이다. 춘보를 베는 것을 신호로 한 놈은 맨 앞의 가마에 달려들어 그대로 환도로 가마를 쑤시고 베었다. 가마꾼이 놀라 가마를 내던지고 언덕 아래로 뛰어내리니 뒤따라오던 가마꾼들 역시 화들짝 놀라서 가마 끈을 벗어던졌다. 세 번째 가마도 마찬가지였다. 개중에 놀라 정신이 나간 가마 꾼이 언덕 아래로 내려 뛰면서 어깨에 맨 가마끈을 깜박하여 가마까지 딸려가 굴러버렸다. 그 와중에도 칼잡이들은 갓 쓴 양반을 베고 가마의 문짝을 발로 차서 칼로 가마 속을 찌르기를 계속하였다. 그 광경을 본 거칠이가 재빨리 나귀 위의 셋째를 번쩍 안아들고 언덕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언덕은 열길이 넘는 가파른 경사여서 그대로 굴러 냇가에 같이 처박히고 말았다. 놀란 것은 고개 아래쪽에서 달려들던 사당패도 마찬가지였다. 가마행렬에 거의 닿으려는 순간에 웬 놈들이 나타나 선수를 치는 것이다. 칼을 맞지 않은 가마꾼들이 개미 떼처럼 흩어지는 사이를 보니 칼질을 하는 놈은 단 둘이었다. 멈칫하여 구경만 하던 모갑이가 패거리들을 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팔매를 날려라. 썅놈의 종자들이 남의 밥그릇을 채고 있다."

꼭두쇠의 말이 떨어지자 십여 명의 사당패가 돌을 주워 팔매를 쳐대기 시작하였다. 주먹만 한 돌이 머리 위로 쏟아지자 이미 볼일이 끝난 칼잡이들은 산으로 튀어 올라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사당패가 난장판이 된 가마 행렬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맨 먼저 양반의 죽은 몸을 뒤져 묵직한 전대를 챙긴 꼭두쇠가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다른 놈들은 가마 속의 죽은 여인이 차고 있던 피 묻은 노리개를 끌러내고 이불 보따리와 옷 보따리를 풀어헤쳐 쓸만한 것을 찾느라 분주하였다.

"두령님, 여길 좀 보시지요. 살아있는 년이 있는뎁소?"

한 놈이 아이를 감싸고 웅크린 여자를 가리키며 키들대었다.

"저 팔푼이가 또 두령이란다. 야 이놈아 길에 나서면 모갑이라 부르라고 몇 번을 일렀느냐? 허고 지금 기집이 눈에 들어오느냐? 아까 보이던 나귀와 노새는 어디로 뛴 거냐? 찾아라. 빨리 노새나 찾으란 말이다. 값진 것은 보나 마나 거기에 실렸단 말이다."

꼭두쇠의 말 한마디에 몇 놈이 고개 저편으로 뛰기 시작하였다. 고개의 이쪽은 패거리가 있었으니 노새는 고개 저쪽으로 달아난 것이 분명한 것이다. 모갑이가 아이를 덮다시피 하고 웅크린 여자의 머리 채를 움켜쥐고 일으켜 세웠다. 언년이었다. 머릿채가 잡힌 언년이가 일어나면서도 아이를 등뒤로 돌렸다. 그런 아이를 흘깃 쳐다보던 모갑이가 옷에 붙은 검불 털어내 듯 발로 아이를 탁 차 버렸다. 아이는 단번에 둔덕 아래로 굴러떨어져 버렸다. 이를 본 언년이가 악을 쓰고 모갑이에게 덤벼들어 팔을 물고 늘어졌다. 아픔을 견디지 못한 모갑이가 턱을 후려치니 언년이는 눈자위가 뒤집히며 까무러쳤다. 모갑이가 아픈 팔을 문지르며 거사 놈들이 노새를 찾아 넘어간 고개를 바라보는데 이놈들이 노새도 나귀도 없이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것도 뒤를 흘깃흘깃 돌아보며 뛰어오는 모양새가 이상하다 싶은 순간 수많은 떼거지들이 우우 몰려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유랑민들이었다. 그것도 어림잡아 쉰 명도 더 될 것 같았다. 말이 유랑민이지 무리를 지어 다니며 약탈을 일삼는 떼거지들이라 손에는 몽둥이와 죽창을 들었다. 이것들은 노새가 도망쳐 오는 방향의 사태를 짐작하고 몰려오는 것이 틀림없었다. 모갑이는 이쯤에서 물러나기로 하였다. 나귀와 노새는 벌써 떼거지 손으로 들어갔을 터였다.

"짐들 챙기거라 이만 떠난다. 짝없는 후칠이 너는 저년을 업거라. 낯짝이 반반하니 양식 값은 할 게다."

모갑이의 지목을 받은 후칠이란 놈이 히죽 웃는 얼굴로 기절한 언년이를 얼른 어깨에 메고 나섰다. 입이 귀에 걸린 놈이 언년이를 메고 빠르게 고개를 내려가니 사당패가 줄줄이 뒤를 따라 뛰기 시작하였다. 그와 동시에 유랑민들이 죽음의 현장을 덮쳐서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였다. 이것들은 곡식 말고도 이불이건 옷이건 보이는 대로 서로 차지하려고 악을 쓰며 덤비는 것이다. 심지어 가마 속의 칼 맞아 죽은 여인들의 피 묻은 옷까지 벗기고 있을 즈음 고갯마루에서 망을 보던 한 놈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떴다. 떴다. 가자아아."

높은 곳에서 망을 보던 놈이 본 것은 다락원 쪽에서 달려오는 말이었다. 우선은 한필이나 먼지 뒤쪽은 알 수없었다. 유랑민들이 허겁지겁 광릉으로 통하는 샛길로 도망을 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광릉 못 미쳐 이곡 골짜기에 움막을 지어놓고 축석고개를 넘는 양반이나 상인들을 노리는 무리들이었다. 오늘은 재수가 없어 다른 놈들에게 선수를 뺏긴 것이었다. 멀리서 달려오던 말이 고갯마루 가까이 오다가 처참한 광경에 말이 갈기를 세우며 울부짖었다. 파발꾼 역시 벌어진 일이 일인지라 그만 넋이 나가고 말았다. 부서진 가마와 죽어 나자빠진 시체가 몇인지 모를 지경인 것이다. 적경을 만나도 이토록 도륙을 당할 정도의 적경은 드문 일이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려는 말을 몰아 파발꾼이 다시 달리기 시작하였다. 솔모루와 포천현에 어서 빨리 적경을 알려야 하는 것이다. 언덕 아래에서 먼저 정신이 든 사람은 거칠이었다. 냇물에 처박혔던 거칠이가 함께 굴러떨어진 셋째 도련님을 살펴보니 다친 곳은 없으나 기절을 하였다. 저만치 부서진 가마와 흰 치맛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얼른 다가가 보니 아씨 마님이 애기씨를 안고 있는데 모두 정신을 잃은 듯하였다. 아직 머릿속이 어지럽던 거칠이가 언덕을 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눈앞에 펼쳐진 기막힌 참경에 잠시 망연자실하던 거칠이가 가마 속을 살펴나갔다. 송윤호의 모친과 형수는 칼을 맞고 죽어 있었다. 이때 거칠이가 미쳐 생각하지 못한 것이 송수호의 처가 안고 있던 아이가 없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이것저것 살피고 생각할 경황이 없던 탓이었다. 장인인 춘보도 죽었고 가마꾼도 셋이나 죽어 있었다.    고개 아래에서 일행에 섞였던 양반 부부도 죽어 있었다. 둘째 도련님과 언년이만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거칠이는 고개 아랫길을 정신없이 달렸다. 뒤에 오던 주인 나으리와 큰 도련님이 생각난 것이다. 길에서 냇가를 향해 뛰어내리다가 큰 도련님을 보았다. 가슴을 채여 일시 기가 빠졌던 두일이가 쓰러진 아비의 머리를 무릎으로 고이고 있었다. 그리고는 저고리를 찢어 아비의 상처를 누르고 있는 것이다. 거칠이가 왈칵 다가가 눈물이 글썽거리는 큰 도련님을 감싸 안았다. 자신의 옷을 찢어 상처를 다시 싸맨 거칠이가 두일이의 도움을 받아 송윤호를 업었다. 언덕을 간신히 올라 송윤호를 눕히고 다시 고개 위로 달려가 언덕 밑의 작은 도련님과 애기씨를 차례로 안아 올렸다. 마지막으로 아씨 마님을 죽을힘을 다해 끌어올렸다. 힘이 다 빠져 주저앉은 거칠이가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였다. 조금 전에 올라왔던 언덕 아래에서 나뭇가지가 흔들리더니 머리 하나가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둘째 도령 수일이었다. 모갑이의 발길에 채여 떨어졌던 수일이가 정신이 들자 오르기 쉬운 곳을 골라 올라온 것이었다. , 함께 없어진 줄 알았던 둘째 도련님이 여기 있다면 언년이도 부근에 있으리라 싶은 거칠이가 벌떡 일어났다.

"도련님 언년이를 보셨는지요?"

거칠이가 급히 물었건만 눈이 동그래진 수일이가 고개를 젓는 것이다.

"뭐라구? 언년이가 없단 말이야? 아까 그 도적 놈들 손에 잡혔었는데...."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언년이는 없었다. 우두망찰하던 거칠이는 이 난감한 일들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늘을 우르러 통곡을 하였다.

             

파발이 포천현에 닿아 현감에게 적경을 알리고 현감은 병방을 불러 군졸을 축석고개로 몰아가게 하니 이들이 참사가 벌어진 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보름달이 훤히 비추고 있었다. 현장에는 죽은 사람들 뿐이었고 산 사람은 없었다. 파발의 고변에 고개 넘어 솔모루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다친 사람을 주막으로 업고 간 것이다. 솔모루 사람들이 몰려왔을 때까지도 깨어나지 못한 사람은 송윤호와 셋째 아들 보일이 뿐이였다. 의원이 송윤호의 상처는 돌봤으나 보일이의 증세는 알지 못하였다. 뇌진탕이라 겉으로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던 것이다. 송윤호의 처가 남편과 아들 보일이 곁을 밤을 새워 지켰지만 새벽녘에 아이는 결국 숨을 거두었다.

   

관철방 뒷골목 색주가의 외진 방에 중갓의 사나이가 들어서자 미리 와 기다리던 두 사람이 황급히 일어섰다. 서로 대강의 인사가 끝나자 중갓이 먼저 물었다.

"그래 분부는 잘 이행하였는가?"

", . 여부가 있겠습니까.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지요."

"혹여 잘못 알고 엉뚱한 놈을 벤 것은 아니렸다?"

"원 집사님도 농을 하실 때가 다 있습니다 그려."

"자네들의 눈썰미나 솜씨를 못 믿어서가 아닐세. 확실하게 하자는 것이지."

"흥인문에서부터 죽 뒤를 따르다가 다락원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앞서가서 기다렸는데 헷갈릴 리가 있겠습니까?"

"그 놈이 적실하더냐? 허고 죽은 것을 확인했느냐?"

"갓 쓴 놈은 하나 뿐이었으니 그놈이 적실한데다 목덜미에 칼을 맞고도 살아난 놈은 아직 보지 못하였지요."

"가마가 세 채가 떠났다던데 그것도 없애야 말썽이 줄 것인데 어찌하였느냐?"

"가마 세 채가 모두 어육이 되었습죠. 몇 번씩이나 찔렀으니깝쇼. 흐흐."

"잘 했느니. 우상 대감께서도 흡족해 하실 것이야."

우상 김석주의 집사(執事) 최만리가 전대를 끌러 엽전 뭉치를 두 놈 앞에 밀어놓았다.

"이건 대감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는 상급일세. 당분간은 전동의 장 대감 댁에 그대로 붙어들 있게. 이제 곧 자네들이 진짜 나서야 할 일이 있을 터이니."

"분부만 계신다면 저희들이야 물불을 안 가립지요."

최만리의 말에 두 놈이 엽전 뭉치를 움켜쥐며 굽신하였다. 이놈들이 송수호의 수하이던 소유 한복만을 죽인 장현의 졸개였던 것이다.

 

송윤호가 사흘만에 깨어났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이해하는 것만도 힘이 들었고 받아들이기는 더욱 힘이들었다. 차라리 깨어나지 않았어야 했던 것이다. 김화로 갔던 거칠이가 막개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야 일이 제대로 수습이 되었다. 집과 가까운 야산을 골라 장례를 마친 송윤호가 가족들을 모아놓고 결심한 바를 말하였다. 막개와 거칠이도 마루에 앉았다.

"나는 하늘 아래 가장 큰 죄를 지은 사람이다. 어머님과 형수님, 그리고, 셋째 보일이까지 모두 나의 고집과 잘못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야. 형님이 돌아가신 것 또한 나의 잘못이 컸으니 못 가시게 말렸어야 했느니라. 형님의 유일한 혈육인 원일이가 그 난리통에 잘못된 흔적이 없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다마는 그것을 다행이라 할 수도 없구나. 원일이는 문중의 장손인데 나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하여, 나는 집을 나서 원일이를 찾아와야겠다. 비록 백 년이 걸리더라도 원일이를 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두일이 너는 열 살이 넘었으니 아비가 없으면 능히 가장 노릇을 할 나이니라. 내가 없는 동안 집안을 살피고 책은 읽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절대 하지 말거라. 책까지 보지 않으면 무식한 인간이 되니 책은 보되 벼슬은 꿈에도 생각을 하지 말란 말이다. 수일이도 마찬가지니라. 형을 도와 어미와 집을 보살피는데 게으름을 부려서는 아니 되느니라. 당신도 소명한 사람이니 나의 뜻을 따르리라 믿소. 그리고 춘보의 처를 위로해 주시오. 농사는 막개 자네에게 맡길 터이니 잘 하리라 믿네. 언년이는 어미처럼 너희들을 보살펴주던 사람인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나는 원일이를 찾을 테니, 거칠이 너는 어떤 일이 있어도 언년이를 찾아서 꼭 데리고 오너라. 알았느냐?"

다음날 새벽닭이 울 무렵, 사랑문을 나서는 송윤호를 가만히 내다보며 눈물을 흘리는 얼굴이 있었다. 송윤호의 처와 장남 두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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