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과거 시험
팔도가 기근에 신음하던 신해년에 허참봉과 송윤호 형제는 그 해를 무사히 넘겼으나 나락 한 톨 없는 백성들은 숱하게 죽어나갔다. 도성 밖은 물론이려니와 임금이 사는 도성 안에서 굶어죽은 송장이 시구문(屍口門)을 가득 메웠고 그나마 내다 버릴 힘이 없어 방치되거나 가족이 몰살하여 임자 없는 송장 또한 수천 구(軀)여서 승병(僧兵)들을 동원하여 도성 밖에다 한꺼번에 파묻고 말았다. 다음 해의 봄이 되자 죽은 사람은 죽고 산 사람은 또 살아야 하겠기에 논밭을 갈아엎고 씨앗을 뿌리니 다행히도 임자 년인 그해 가을에는 하늘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평년작은 되었다. 다음 해도 그 다음해 도 경신양년(庚辛兩年) 같지는 않아서 굶어 죽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재위 기간 내내 천재지변과 기근으로 백성들이 죽으니 하늘이 원망스러웠던 임금이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임금의 불행을 다 걷어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행했던 임금의 마지막을 장식할 더 큰 불행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종 15년(1674년)에 모후(母后)인 왕대비 인선왕후가 승하하였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때까지 살아있던 자의대비가 따지고 보면 죽은 인선왕후의 시어머니이니 상복을 입되 언제까지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자의대비 조 씨는 현종의 할아버지인 인조 임금의 계비(繼妃)이니 효종과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모자관계요, 죽은 인선왕후의 시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지난 기해년에 효종 임금이 승하했을 때도 자의 대비의 상복을 두고 지금과 똑 같은 문제로 남인과 서인이 그렇게나 싸우더니 본인의 의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또다시 주자(朱子)와 유교(儒敎)로 무장된 신하들의 말밥에 오른 것이다. 예조(禮曹)에서는 처음에 기년복(朞年服)으로 하는 것으로 왕의 윤허를 받았는데 송시열을 따르는 무리들이 이를 뒤집어 대공복(大功服)이 옳다고 주장함으로써 다시 당파싸움이 극으로 치달았다. 그까짓 상복을 일 년을 입으면 어떻고 9개월이면 어찌된단말인가? 가뜩이나 참혹한 기근으로 마음 편할 날이 없었고 몸에는 병이 떠나지 않던 임금으로서는 참으로 지긋지긋한 논쟁이요 신하들이었다. 주자가 도대체 무엇인데 주자의 말씀에는 눈꼽하나 더 붙일 수도, 뗄 수도 없다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자나 깨나 주자요 공자요 명나라 타령에 조선의 백성들은 죽거나 말거나요, 그 극심했던 경신 대기근 때에도 논쟁을 멈추지 않은 그들이었다. 조선은 왕의 나라가 아니라 신하의 나라인 것은 청나라도 아는 사실이었다. 송시열이 선왕(先王)이던 효종을 차자(次子)로 규정하여 예송논쟁으로 왕을 손아귀에 넣으려 한 것만 보아도 알 일이었다. 임금도 주자의 귀신이 붙은 서인의 우두머리인 송시열이 꼴도 보기 싫었다. 늙은이가 툭하면 낙향하여 자신을 찾을 때까지 상소로 괴롭히는 데에 이르러서는 아예 때려죽이고도 싶었으리라. 그러나 부왕의 스승이요 자신의 스승이기도 하니 어쩌랴. 힘없는 임금이라 때려죽이지는 못하니 우선 남인을 이용하여 서인 패거리라도 어떻게 손을 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이다. 하나 마음뿐이지 행동을 하기에는 너무 늦어서 산당(山黨)인 영의정 김수홍을 밀어내고 낙향해 있던 남인 허적을 불러 그 자리를 준 것이 다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승하하니 아까운 나이 34세였다. 갑인(甲寅) 년 한 해에 모자(母子)가 다 죽은 것이다. 왕위는 현종의 외아들이던 열세 살의 이 순(李淳)이 이으니 시호가 숙종이다.
왕이 승하하던 갑인년 8월에 송윤호는 금강산 유점사에서 과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재작년인 임자년에 과거를 보지 않은 것은 팔도가 기근으로 죽어나가던 뒤끝이라 과거고 벼슬이고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었고 벼슬살이 자체도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벼슬하는 자들을 보면 백성을 착취만 할 뿐 진정으로 백성에게 도움을 주려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그들도 처음엔 목민(牧民)의 도리를 다 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세월이 지나면 다 마찬가지로 흡혈귀가 되는 것은 벼슬을 유지하기 위한 윗 벼슬아치와의 흥정 때문이리라. 자신 또한 벼슬을 살게 되면 그들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지난 번 대기근 때 벼슬살이의 무력함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송윤호였다. 백성에게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벼슬은 결국 가문과 족보를 위한 벼슬일 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아니더라도 형이 이미 벼슬을 살고 있으니 그로써 가문은 일어난 것 아니겠는가? 마음속에는 벼슬에 대한 미련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니 과거 공부를 할 이유도 없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언젠가 형인 송수호에게 말했더니 대뜸 하는 말이 이랬었다.
"허허. 사흘에 피죽 한 사발도 못 먹다가 부잣집 사위가 되니 천하가 시들해 뵈는가 보구나."
"예?”
"아버님 생존해 계시든 그때는 하늘이 온통 노랗게 보였었지? 먹을게 없었으니까. 너는 그때도 벼슬이고 과거 공부고 다 부질없는 것으로 생각했었느냐?"
"......"
"벼슬이 끊긴 우리 집안이 결국에는 조석 끼니 조차 막막하던 그때에도 벼슬 따위엔 미련이 없었느냔 말이다."
"그때는 형님이나 나나 과거 말고는 생각할게 있고 말고가 없던 시절이었지요.”
"그렇게 잘 아는 위인이 좀 살게 되었다고 그새 잊는단 말이냐?"
"누가 잊었답니까? 벼슬을 사는 것들의 하는 짓거리를 보니 한심해서 하는 소리지요."
"지금 벼슬을 살고 있는 나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하나 나는, 지금이라도 백성을 위한 일이라면 손발을 놀리고 싶지 않다."
"누가 형님 보고 벼슬살이가 한심하댔습니까? 아, 형님도 아시지요. 삼년 전 김화 현감이 윗전에 올린 장계(狀啓) 말입니다. 벼슬사는 것들의 행태가 거의 그러할진대 벼슬할 마음이 나겠습니까?"
"그거야 그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것이지 벼슬살이라고 모두 그러하겠느냐? 그리고 벼슬할 마음만 있으면 언제라도 벼슬을 갖다 쓸 것 같이 말하는데, 누가 벼슬을 네게 그냥 턱, 내려준다더냐? 대과만 해도 30여 명 뽑는데 수만 명이 몰려드는 것을 너도 보지 않았느냐?"
벼슬이란 게 생각했던 것만큼 백성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을 말한 것인데 형의 잔소리만 들었다. 그리고 송윤호가 예를 들어 말한 김화 현감이란 관아에 몰려든 난민으로 겁이나서 쩔쩔매던 삼 년 전 그때 그 김화 현감을 말함이었다. 관할 고을에 유입된 난민이 오죽 겁이 났으면 사직할 마음 밖에 없었는데 뜻밖에 박일주와 허참봉이 나서 사태가 쉽게 수습되고 보니 생각이 달라졌던 것이었다. 이에 조정에 장계를 띄워 아뢰기를 유랑민 수백 명이 김화 지방으로 몰려왔는데 굶어 죽어가는 모습이 목불인견(目不忍見)이라 보다 못해 관아의 구휼미로 죽을 쑤어 먹이고 고을의 부자들을 설득하여 걷은 곡식과 관아의 환곡을 유랑민에게 나누어주어 고향으로 가서 농사를 짓게 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애초에 김화 현감을 천거했던 이조참판 심기태가 한 술을 보태어 임금에게, 김화 현감의 처사가 실로 아름다운 바이니 가자(加資) 함이 마땅하다고 아뢰었다. 임금의 생각에도 이런 일은 다른 고을의 수령들에게 본보기가 되겠기에 두 품계를 올려 종 5품 현령을 제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김화에 산다는 지방 유지 하나가 고변장(告變狀)을 올렸는데 관아로 굶주린 난민이 죽을 달라고 몰려왔으나 관아에는 구휼미 한 톨 없어서, 사실은, 난민에게 곡식을 나누어준 사람은 현감이 아니라 사곡 말에 사는 허 참봉이었고 환곡은 구경도 못했으며 그 자리에 사헌부의 관원이 있었으니 조사를 해보면 밝혀질 것이란 내용이었다. 곧이어 그런 일이 있었는지 사헌부의 대사헌을 불러 조사를 명하였다. 박일주의 보고를 이미 받고 있던 장령(掌令) 이헌조가 어전에 나아가 바른대로 아뢰었다. 당시의 김화 현감은 환곡은 푼 적도 없고 오히려 난민이 겁이 나서 도망할 궁리만 했던 것이 들어난 것이다. 게다가 사직상소를 올린 사실까지 있으니 김화 현감의 장계는 거짓임이 틀림없었다. 임금을 기만(欺瞞) 한 죄는 역모에 버금가는 것이라 김화 현감은 장(杖) 백에 천리 밖으로 내처지고 이조참판 심기태 역시 벼슬이 깎여 체직(遞職) 되었던 것이다.
"참, 그때 박일주가 데리고 온 사람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어찌 되긴... 잘있지."
"그 말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서얼들이었으니 말직 벼슬이라도 하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지요."
"음, 너 말 잘했다. 너는 양반이라 배부른 소리를 한다만 서얼인 그들은 아무리 문장과 경륜이 쌓여도 높은 벼슬은 꿈도 꾸지 못하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도 백성을 위해서 나와 함께 밤낮으로 뛰어다니느니라. 덕출이나 곽정일도 서얼이라 처음에는 군사로 있다가 지난번에 곽정일은 한복만이와 같이 소유가 되었느니라. 덕출이는 서리로 뽑히고."
"형님이 뒤를 봐 주셨나 보군요."
"헛, 정 6품 감찰이 누굴 봐주어? 그들이 그만큼 윗 분들 눈에 들었던 것이지."
"박일주라는 그 사람은 무예도 보통 아니던데 벼슬이 그대로인가요?”
"아니지. 박일주는 지난해에 이미 무관직(武官職) 감찰이 되었지. 그도 서출이라 품계가 더 오를 수 없었는데 부계(父系)에 당상인 병조참의가 있어 음서(蔭敍)의 혜택을 받은 것이야."
"잘 되었군요. 형님은 언제 품계가 오른답니까? 만년 감찰이니 말입니다."
"벼슬길로 들어선지 몇 년이나 되었다고 그러느냐. 올라갈 때가 되면 다 올라가겠지. 얘, 남의 말 하지 말고 너나 대과를 치룰 생각이나 하려무나."
"형님이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저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내년 식년시를 보도록 해. 어머님 소원이기도 하니까."
며칠 후였다. 송윤호가 장모의 생신을 맞아 처자와 함께 처가엘 갔다. 둘째 아이를 가져 배가 부른 딸을 본 허 첨지가 사위인 송윤호에게 말하였다.
"자네 집안엔 해마다 풍년일세 그려. 비결이라도 있는가?"
"자식 농사에 무슨 비결이 있을 턱이 있나요? 그저 하늘에 맡기는 것이지요."
그러니 하는 말일세. 하늘이야 늘 공평할 터인데 비결이 없고서야 한 하늘 아래 사는 누구는 풍년이요 누구는 흉년이니 말일세."
"글쎄요, 장인어른께서는 저 사람을 두셨으니 영 흉작은 아니질 않습니까?”
송윤호가 아들 없는 허참봉을 위로하느라 안채에 어른거리는 아내를 가리키자 무엇을 생각하는지 허참봉은 빈 장죽만 물고 마당을 내다보았다. 한동안 말이 없던 허참봉이 송윤호를 돌아보며 침통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다.
"자네는 벼슬할 생각 말게. 벼슬이요 관직이란 게 알고 보면 다 소용없는 것이야. 나를 보게나. 내가 지금 정승이라면 무엇하겠는가? 아들이 없는 나로서는 내 대에서 이렇게 대가 끊기고 마는 것을... 소용없는 족보도 이제 불태워 없애야겠네. 사람 사는 게 참... 만사휴의(萬事休矣)로세. 허허."
"그러고 보면 진작 양자를 두셨어야 하는건데... 지금도 늦지 않으셨습니다."
"양자는 양자일 뿐이지 이미 끊어진 내 대를 양자가 어찌 잇는단 말인가? 양자란 족보를 잇기 위한 속임수요, 봉제사(奉祭祀) 할 자식 아닌 자식으로 둔갑시키는 거지 무슨 양자가 필요한가? 내 딸과 내 사위와 내 외손주가 양자보다 훨씬 나와 가까운 핏줄 아니겠나?”
평소에는 아들 없는 섭섭함을 겉으로 들어낸 적이 없었던 장인이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하니 송윤호로서는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뭐라고 더 위로의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아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을 바엔 무슨 소리를 한들 장인에게 위로가 되겠는가 말이다.
"자네가 벼슬길에 나서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일세. 벼슬이 도대체 뭔가? 가문에 광영을 더하려는 건가? 후손들에게 자랑거리를 만들어 주려는 건가? 아니면 살아생전에 권력을 잡아 잘 먹고 잘 살다 죽겠다는 건가? 자네는 벼슬이 뭐라고 생각하나?”
"그야... 백성을 위해... 아니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장인께서 말씀하신 모두를 위해서겠지요."
"그러다 나처럼 대가 끊어진다면 그것으로 또 모든 게 끝이겠지?"
"벼슬을 한다면 자신의 대에라도 잘 살겠지요."
"나는 벼슬살이를 해 본 적이 없어도 잘 먹고 잘 살아왔네. 오히려 벼슬살이하던 사람들이 역모에 말리거나 당파싸움으로 죽거나 귀양을 가는 걸 많이 봐 왔지. 벼슬 잘못 살았다가는 비명횡사하기 알맞더구만. 여보게. 내 땅은 이제 모두 자네 것이니 자네는 평생 벼슬이니 과거 볼 생각 말고 한가히 책이나 보고 낚싯대나 드리우고 여생을 보내게나."
"허, 참, 남들은 급제요 벼슬 타령에 온 문중이 난리인데 장인께서는 거꾸로 가시니 모를 일입니다마는 지난 신해(辛亥) 년에 김화 현감을 생각하신다면 장인어른의 생각도 달라지실 테지요? 그때 그 형편없던 현감 대신 장인어른이 수령이셨다면 유랑민들도 덜 굶어 죽었을 테고 장인어른의 뜻대로 고을을 다스리셨다면 김화 백성들도 지금보다 잘 살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벼슬살이를 한다면 음풍농월(吟風弄月)로 한세상 보내는 것보다야 남아의 일생으로 보아도 보람된 일이겠지요."
"백성을 위해 일생을 보내는 것이야 생(生)을 허비했다고야 볼 수없겠지. 그러나 살다 보면 당파에 휩쓸리거나 역모의 누명도 쓸 수 있으니 그리되면 그 즉시 집안은 풍비박산(風飛雹散) 나는 것은 물론이요, 나처럼 대가 끊어질 터인데도?"
"맑은 날 길을 가다가도 벼락을 맞는 사람이 있는데 남아가 이것저것 따져서야 평생 벼슬 한번 해 보겠습니까? 그때는 그때 가서 생각해야지요."
"옳커니! 맞는 말이로세. 맞는 말이고말고. 암."
송윤호의 말이 떨어지자말자 허참봉이 기다린 보람이 이제야 나왔다는 듯 무릎을 치며 기뻐하였다. 송윤호로서는 급작스런 장인의 태도에 어리둥절하여 허참봉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역시 내 사위 다운 말이요, 남아의 기상일세. 암, 사내대장부라면 세상을 경영해 봐야 하고말고. 좋네. 마음 변하기 전에 과거를 보게. 벼슬을 살자면 대과에 급제부터 하고 봐야지. 가만, 과거 공부를 하려면 어디가 좋을까? 역시 금강산 유점사가 조용하니 거기가 좋겠지? 유점사에 가면 자네가 거처할 방은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일세. 절에서 가장 조용한 방을 골라 정갈하게 치워 놓으라 춘보에게 일렀으니까. 허니, 자네는 준비되는 대로 거칠이 대동하여 내일이라도 떠나게. 하루라도 빨리 떠나야 한 줄이라도 더 외울 것 아니겠나? 아니 그런가?"
<자네는 벼슬할 생각 말게> 할 때 이미 알아봤어야 하는데 송윤호 스스로 벼슬 허방에 빠진 꼴이라 누구에게 하소연할 곳도 없어, 며칠 후, 어쩌지 못하고 거칠이에게 책 보따리를 지워 금강산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열흘을 넘게 걸어 도착한 금강산은 진달래가 지며 철쭉이 막 피어나던 때라 푸릇푸릇 한 새싹과 연분홍 철쭉이 어우러져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우뚝 솟은 산봉우리와 천태만상의 기묘한 바위 사이를 굽이돌아 흐르는 계곡물도 좋고 계곡을 둘러싼 벼랑 사이로 보이는 작은 하늘엔 구름 한 조각이 떠있어 더욱 정겨웠다. 그러나 새벽부터 수십 리를 걸어온 데다 유점사에 닿으려면 이십 여리를 더 가야 했기에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곳에 이르자 송윤호는 다리에 쥐가 나서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얘, 거칠아, 쉬었다가 가자. 더는 못 걷겠구나."
"예, 서방님, 그럽죠. 물 좀 떠다 드릴까요?”
"아니다 되었다. 내가 마시마."
책 보따리에 길양식까지 얹어지고서도 도무지 피곤한 기색이 보이지 않는 거칠이와 달리 송윤호는 쌓인 노독으로 다리가 후둘거렸다. 엉금 걸음으로 물가에 간 송윤호는 갓을 뒤로 제치고 엎드려 한 모금 물을 마셨다. 목구멍을 넘는 시원한 감촉이 짜릿했다. 이번엔 양손바닥을 모아 물을 떠서 들이켰다.
"아, 시원하고나. 너도 마셔보거라. 가슴이 서늘해질 것이니라."
그 때, 짐을 벗어 바위에 올려놓던 거칠이가 무엇을 보았는지 쭈뼛쭈뼛거리며 말을 할까 말까 하는 표정으로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을 본 송윤호는 기가 막혔다. 물이 흐르는 계곡의 저 윗 쪽에 서너 명의 사람이 앉거나 서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계곡물에다 오줌을 누고 있는 것이다. 곧이어 고의를 여미는 것으로 보아 거리를 얼핏 재어보니 송윤호가 두 번째 마신 물은 약간이나마 오줌이 섞였을 것이 틀림없었다.
"저, 저, 저런..고오얀지고."
송윤호는 진저리를 치며 토하는 시늉을 했으나 한 방울도 넘어오지 않았다. 이쪽을 보지 않아 누군지는 모르나 갓을 쓴 것으로 보아 양반이요, 양반이란 작자가 하는 행동이 맹랑한 것이다. 갓 쓴 양반은 둘이 더 있었는데 바위 뒤에 상투가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것들은 하인들일 것이었다. 방금 오줌을 눈 갓쟁이가 그만 가자고 하는지 뭐라고 하니까 양반들이 일어서 가고 짐을 진 하인들이 따라붙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고의를 여미던 갓쟁이의 수염 없는 옆 모습이 영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영 생각이 나질 않았다.
"미꾸리 한 마리가 온 연못을 흐려놓는다더니 못된 양반 하나가 천리 물길을 흐려놓는구나. 쯧쯧"
"소인이 그 양반들을 빨리 보지 못해서 서방님이 욕을 보신 겁니다."
"허허, 그게 왜 네 탓이냐? 뵈지 않아서 그렇지 세상엔 별일이 많으니라."
한동안 다리를 쉰 송윤호가 유점사에 닿았을 때는 저녁 공양 때가 되어서였다. 송윤호와 거칠이를 본 춘보가 공양간에서 뛰어나와 인사를 하였다.
"아이고 서방님 이제야 오십니까? 소인 문안드립니다."
"그래, 잘있었는가? 한데 여태 이곳에 있었단 말이냐?"
"에, 쉰네는 명찰방 나으리의 명을 받잡고 김화의 곡식을 이곳으로 져다 날랐습지요. 서방님 드실 양식 말씀입니다. 이제 거칠이가 왔으니 같이 두어 번만 져다 나르고 가을에 추수할 때 다시 나르면 되옵니다."
"허, 나로 인해 고생이 많구나. 한데, 주승(主僧)에게 머문다는 인사는 해야 예(禮)가 아니겠나?"
"아, 주지승은 5년 전에 서방님이 유람차 오셨을 때 그 법우(法雨)라는 중이 지금 이 절의 주지가 되었습니다. 불러올까요?"
"아니다. 나는 나그네요, 그가 주인 격이니 내가 찾아가야지. 앞장서게"
과연 춘보의 말대로 주승은 5년전 그때의 법우라는 중이었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마치자 송윤호가 머물 것을 허락하여 고맙다는 말을 하였다.
"보살님께서는 조금의 걱정도 마시고 공부에 정진하십시요. 본 사찰은 참봉의 부친 대에서부터 도움을 받아왔습니다. 매년 곡식과 무명필을 시주하시지요. 춘보로부터 보살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곳에서 공부를 하시어 대과에 급제하신다면 오히려 이 절의 광영일 테지요."
"그리 말씀하니 고맙소. 그럼 염치 불구하고 신세를 지리다."
다음날부터 책을 가까이하더니 그만 책에 빠져, 춘보와 거칠이가 한양으로 갔는지, 갔던 춘보가 새 옷을 갖고 왔는지, 새 옷을 두고 다시 갔는지도 모르고 책에 매달리었다. 송윤호가 책에 빠지면, 하늘이 깨어져 땅바닥에 후두둑 떨어져도 모르는 벽(癖)이 있어,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세월을 보내다 보니 그 해 8월에 현종 임금이 승하하여 새 임금이 들어선 것도 몰랐다. 그러다 보니 그 좋은 풍악(楓嶽)의 단풍 구경도 건너뛰고 개골산의 눈 덮힌 만물상도 볼 여가가 없었다. 겨울이 되자 춘보는 아예 유점사에 내려와 지내는데 나무를 해다가 송윤호의 방을 덥히고 남는 나뭇단은 절의 공양간에 갖다 주는 일을 하였다. 개골산이 다시 금강산이 되는 삼월까지 송윤호는 오로지 사서오경(四書五經)과 부(賦), 표(表) 전(箋), 책문(策文)따위의 춘보의 눈으로 보면 쥐똥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학문에 매진(邁進) 하였던 것이다. 춘보가 방에 군불을 때는 횟수가 줄더니 어느덧 봄이 오고야 말았다. 어느날 송윤호가 개구리가 동면에서 깨어나듯 깨어나 밖으로 나오니 눈부신 봄볕이 그를 반기는 것이었다. 춘보도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송윤호가 반가워서 따라 나왔다. 먼 산은 은은한 연두색이요 가까운 곳은 아지랑이가 가물거리는 사이사이로 진달래가 점점이 피어 있었다. 지난해 철쭉이 피던 봄에 방에 들어갔다가 방에서 나오니 이번엔 진달래가 피는 봄이었던 것이다. 집 떠날 때가 어제인가 싶은데 일 년이 지난 것이다. 그때, 문득 배부르던 아내가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참, 지금쯤 해산을 했을 터인데? 여보게, 춘보, 해산은 했던가?”
"아이고 서방님, 해산이 뭡니까? 석 달만 있으면 작은 도련님 첫돌이옵지요."
"뭐라? 그럼 지난해에 낳았단 말인가? 그러면 그때 나에게 왜 알리지 않았나?"
"안 알리다니요? 소인이 그때 작은 도련님이 태어나셨다고 서방님 면전에서 말씀 올렸잖습니까요."
"허,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못 들은 것 같기도 하니 꿈 속에서 들었나 보군. 허허."
그러고는 손가락을 굽혀가며 산달을 꼽아보니 그쯤 되겠다 싶은 것이다.
본래 대과의 초시는 식년시 전 해의 9월에 치르고 복시는 식년 2월이나 3월에 치르는 것이 상례이나 지난해는 국상이 있어 초시를 미루어 초시, 복시, 전시를 한 해에 다 치르게 되었다. 게다가 농번기를 피하다 보니 6월부터 초시가 시작되게 되어서 송윤호도 하산을 준비하였다. 주승인 법우와 작별의 인사를 한 송윤호는 책 보따리를 짊어진 춘보와 함께 길을 떠나서 굽이굽이 산길을 내려와 유점사의 말사(末寺)인 보리암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부터는 발 빠른 춘보를 따라가느라 송윤호는 사타구니에서 누린내가 나도록 걸었건만 춘보는 느린 송윤호의 걸음에 맞추려다 보니 짚신짝에서 풀이 돋을 지경이었다. 죽도록 이틀을 걸어 김화의 새곡말 옛 처갓집에 닿았다. 송윤호로서는 그렇게 빨리 걸어보기는 처음이라 발에 물집이 잡히고 발가락이 부어올라 있었다. 막개 부부가 더운물로 씻기고 오소리 기름을 얻어다 발가락에 바르고 난리를 치르기를 며칠을 하니 상처가 한결 나아졌다. 마냥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다시 길을 떠나 첫날은 철원에서 자고 다음 날은 영평에서 자게 되었다. 그날따라 주막에는 길손이 하나도 없어서 주종(主從)이 한방에서 잠을 자는데 밖에서 나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이 깨었다. 늦은 시각에 여러 명의 길손이 들었나 보았다. 주막에 길손 드는 거야 당연한지라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이번엔 누가 문을 두드렸다.
"손님 주무십니까요? 안 주무시면 방을 좀 바꾸시지요. 이방은 저방의 하님들이 쓰겠답니다요."
주막의 중노미란 놈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저쪽 양반 일행을 수행하는 하인배들이 이쪽 방을 쓸 테니 이쪽 방 양반은 그쪽 양반이 있는 방으로 건너오라는 말이었다. 송윤호가 슬그머니 화가 나서 한마디 하려는데, 춘보가 벌떡 일어나더니 지게문을 벌컥 열고 중노미에게 낮게 을렀다.
"이놈아, 나으리 깨시겠다. 주무시는 우리 나으리를 그 방으로 모실 것이 아니라 차라리 내가 그 방으로 갈 테니 잠 안 든 그쪽 방 나으리들을 이방으로 뫼시어라."
마당에서 서성이던 저쪽 방의 하인들이 춘보가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중에 한 놈이 썩 다가오더니 춘보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놈, 말하는 주둥이를 찢어 놓을라. 우리 나으리께서 이쪽으로 오시라고? 우리 나으리가 어떤 분이신데 네놈이 오라 가라 주둥이를 놀리느냐? 우리 나으리께서는 김화 현감의 처남 되시는 양반이시다. 이놈, 그래도 안 옮길 터이냐?"
현감의 처남이란 말에 불현듯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송윤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춘보는 춘보대로 현감이란 말을 듣자, 상대의 끗발을 본 투전꾼처럼 얼씨구 신이 나서 자신 있는 목소리로 쥐고 있던 패를 까 보였다.
"이놈아, 그쪽 주인 양반이 현감의 처남이 되신다면, 이쪽 주인 나으리는 사헌부 감찰의 제씨(弟氏)가 되시니라. 흐흐."
저쪽 하인배들은 현감이라면 누구라도 껌벅 죽는 것만 보아서 큰소리를 쳤건만 사헌부의 감찰이 더 높은지 현감이 더 높은지 산술이 복잡하여 갈피를 못 잡는데 저쪽 방의 방문이 벌컥 열리며 마루로 나서는 양반이 있었다.
"이놈들, 왜 이리 소란스럽게 야단이냐? 그쪽 방 양반께서 주무신다면 잠 안 든 우리가 그쪽으로 가는 것이 온당할 터, 무슨 사설들이 그리 많으냐. 이보게들 저 쪽방으로 옮기세 그려."
춘보가 등잔에 불을 켜놓고 나가자 말자 우르르 셋이나 몰려오는데 앞장서 들어오는 수염 없는 갓쟁이를 보는 순간 송윤호는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송윤호는 눕지도 앉지도 못하여 엉거주춤 앉았는데 먼저 들어온 수염 없는 양반이 송윤호에게 먼저 인사를 청하였다.
"선객(先客)에게 후래자(後來者)가 인사를 청하오이다. 과천 사는 생원 정달문이 오이다."
"한양 사는 진사 송윤호라 하오만, 우리는 초면이 아닌 것 같소이다.”
"아니? 송진사께서 시생을 아신단 말이웨까?"
"정 생원뿐만 아니라 저 뒤에 계시는 김화 현감의 처남 되시는 분도 구면 같소이다. 초면일 때는 자형 되시는 분이 고성 현감을 지내실 때인 것 같소이다만."
"아! 그렇다면 사 오년 전의 일인데 우리가 어디서 만났단 말씀인지요?"
멀리서 보면 수염이 없되 가까이 보면 몇 가닥 털이 코 밑에 붙어 있어서 흡사 쥐 수염 같은 쥐 수염이 김화 현감의 처남을 대신하여 다가앉는 것이다.
"허허, 오래전 일이라 잊었었는데 두 분의 수염을 보고 알아보았지요. 저분은 그 때보다 채수염이 더욱 풍성해진 것 같아 보기가 좋소이다."
송윤호가 채수염을 칭찬하는 듯한 말을 하자 쥐 수염은 자신도 모르게 손이 코밑으로 가며 얼굴을 붉히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무안을 때우려는 것인지 풍성한 수염에 질투가 나서인지 채수염을 가리키며 말은 송윤호에게 하였다.
"저 사람은 학문이 율곡(栗谷)이요 수염은 관운장(關雲長)이요 관운(官運)은 백서익(白舒翊)이로소이다."
쥐 수염이 말한 율곡은 물론 구도 장원(九度壯元) 한 이이(李珥)요, 관운장은 당연히 미염공(美髥公) 관우다. 백서익이란 연산군 때의 인물로,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계속 학문을 갈고닦아 그와 겨룰 선비가 없었다. 그런데, 과거를 볼 때가 되면 반드시 일이 터져 시장(試場)을 가지 못하였다. 과거를 보러 떠나려고 하면 반드시 조모상을 당하거나 부모상을 당하거나 강물이 불어 과거 날짜를 놓치거나 심지어, 집을 나설 때 멀쩡하던 기왓장이 떨어져 머리가 깨어지는 일도 있었다. 요행히 과장엘 들어갔다면 배가 아프거나 자리를 찾다가 넘어져 코가 깨어져도 깨어져서 수 십 년을 그러다가 어쩐 일인지 환갑이 넘어서 난생처음으로 무사히 시험을 치루었다. 세월이 흘렀으나 문장이야 어디를 가랴? 장원급제를 하였는데 임금이 백서익의 나이를 생각하여 특별히 외직(外職)인 현령 자리를 주었다. 그러나 부임지로 가는 길에 하필 산도둑에게 잡혀 달포 뒤에 풀렸는데 그때는 이미 부임 날짜를 한참 넘긴 뒤라 이미 다른 현령이 부임해 있더라는 것이다. 백서익을 들먹이는 쥐 수염의 말은 채수염에게는 이보다 더 큰 욕이 없었다. 채수염도 백서익 처럼 늙어 죽을 때까지 벼슬운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 아닌가? 붉어진 얼굴로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채수염이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듯 송윤호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그러더니 쥐구멍을 찾는 송아지 마냥 허둥대다가 슬그머니 외면을 하였다.
"백서익에 비견(比肩) 하신 것은 무엇하나 관운이 없는 사람은 있기에 만년 낙방거자(萬年落榜擧子)란 말이 생겼겠지요. 대과 식년 시만 열다섯 번을 치른 선비도 있다지 않습니까."
"식년이 열다섯이면 마흔다섯 해인데, 부끄러운 말이오만 시생도 일곱 번을 낙방거자 노릇을 했었소이다. 저 사람이나 나나 관운이 없슴이지요. 한데, 송진사께서도 이번 대과에 나가실 작정이시오이까?"
"그럴 생각이외다만 세 분도 과거를 보러 가시는 길이오이까?"
"우리들은 이번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에서 공부를 하다가 내려오는 길이 올시다."
"지난 해 봄에 세 분이 금강산에 들어가시는 것을 멀리서 보았지요. 그때 일행 중에 누가 계곡 맑은 물에 황주(黃酒)를 쏟던데 설마 정 생원은 아니실 터이지요?"
"황주라니요?.......! "
송윤호가 보기에 쥐 수염은 오년 전보다 폭삭 늙어서 환갑이 훨씬 지나 보였고 채수염도 마흔은 되었을 것이었다. 뒤에 말참견 한 번 못하고 앉아있는 사람도 채수염과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환갑이 되도록 일곱 번 낙방한 쥐 수염은 그러고 보면 백서익보다 나은 점이 조금도 없는 불쌍한 늙은이였다. 일생을 과거에 매달려서 양반 체통을 유지하려는 한심한 양반인 것이다. 송윤호는 5년 전 금강산 마하연에서 쥐 수염이 빈정대던 일을 잊기로 하였다. 다 부질없는 일인 것이다. 밤이 늦어 이리저리 누워 잠들이 들었다. 첫닭이 회를 칠무렵인 새벽녘부터 밥을 재촉하는지 문짝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쪽 방에도 문틈으로 연기가 들어와 참다못한 송윤호는 일어나고 말았다. 밖은 채 날이 밝지 않아 어두운데 뒷곁의 측간(厠間)에서 볼일을 보려고 앉아 있었다. 한데 잠시 뒤에 인기척과 함께 오줌 누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거름을 하려고 측간 옆에 깨진 독과 아가리에 금이 간 항아리를 둔 곳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송 진사라는 저 양반이 5년 전 마하연 가는 길에 만난 사람이 적실합니다. 그때 사돈께서 양반이 걸어서 간다고 면박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그 양반이 우리를 알아보지요. 틀림없습니다."
"나는 통 기억이 없네. 마하연 유람이라면... 남여를 타고 올랐는데... 아! 생각이 나네. 앉은뱅이 어쩌고 하던 젊은 양반이... 그럼 그 사람이 송진사란 말인가?"
"이제야 생각이 나시나 봅니다. 저도 어젯밤 자형이 고성 현감일 때라는 말을 듣고서야 어디서 본 듯하다 싶었지요."
"그럼 낭패일세. 송진사의 형이 사헌부의 감찰이라 하지 않았나? 자네 자형이 환곡 문제로 꼬투리를 잡히는 게 아닌가 모르겠네."
"환곡이야 몇 섬 되나요? 그리고 송진사가 우리를 알아보고도 아무런 말이 없는 거로 보아 젊은 사람이 점잖고 악의가 없어 뵙디다. "
"허, 그렇다면 그런 다행히 없지만 면난(面難) 한 일일세 그려."
"한양 길에 동행하며 노비(路費)를 우리가 부담하는 게 어떨지요? "
"거, 좋은 말이로세. 흔연대접은 못해도 길양식은 대야겠지."
진작에 볼일을 다 본 송윤호가 일어서지도 못해 오금에 쥐가 날 지경이 되어서야 말소리가 그쳤다. 춘보가 들고 온 새벽밥을 먹은 송윤호가 쥐 수염 일행보다 한발 앞서 길을 떠나니 쥐 수염도 부지런히 따라나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춘보를 따라 죽기 살기로 걷는 송윤호의 걸음을 따를 수가 없는 쥐 수염 일행이 처지기 시작하더니 명덕천을 건너고부터는 보이지 않았다. 포천현에 이르러 잠깐 쉬었다가 내쳐 길을 줄여서 솔모루에 닿으니 근 백 리를 걸은 것이다. 솔모루 주막에서도 혹여 쥐수염을 만날까 하여 십여 리를 더 가서 민가에 들어 밥을 해 먹었다. 그래도 금강산 산길보다 길이 좋아서 송윤호의 노독도 덜하였다. 다음날은 다락원에서 자고 그다음 날에야 한양에 닿았다. 흥인문에 들어서자 곧바로 안국방 본가로 가서 노모와 형 내외를 찾아뵈었다.
"그래, 글은 좀 읽었느냐?"
저녁을 먹은 후에 사랑에 형제가 마주 앉자마자 송수호가 묻는 것이다.
"글쎄요. 글은 나만 읽은 것이 아닐진대, 운에 맡길 뿐이지요."
"대과를 보는 것이 어찌 운이란 말이냐? 운이라고 할 바엔 제비뽑기로 급제자를 뽑을 일이지."
"과거를 보려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게 탈이지요. 그 많은 과거자의 답안을 일일이 다 볼까요? 그러니 운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런 폐단은 있지. 이번 초시, 복시는 과거자가 엄청날 것이다. 지난 식년엔 기근에 시달려 과거장도 시들했었는데 그때 못 본 거자들이 이번에 다들 나오지 않겠느냐? 게다가 올해로 미뤄진 문과 초시 시험자까지 더한다면 과장이 미어터질 게다."
송수호의 말대로 을묘(乙卯) 년 6월에 치러진 초시 시험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송윤호는 한성시(漢城試)에서 40명에 뽑히었다. 8월의 복시는 팔도에서 모인 2백40명이 두 곳으로 나뉘어 시험을 치는데 1소는 예조, 2소는 성균관 비천당(丕闡堂)이라 송윤호는 2소에서 시험을 치루게 되었다. 시험날 숭교방(崇敎坊)에 있는 성균관 앞에 이르니 백 명이 넘는 거자(擧子)와 가족, 친지가 장마당을 이루었고, 엿장수와 수수떡 장수가 곡식이나 무명 자투리와 바꾸자고 소리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과거시험날 떡이나 엿을 파는 것은 흔한 일이나 어리전도 아닌데 닭을 사라고 소리치는 놈과 강아지를 망태기에 담아놓고 좁쌀과 바꾸려는 얼치기도 보였다. 시험장소인 비천당의 정청(正廳)으로 향하던 송윤호가 쥐 수염과 채 수염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허허, 두 분 다 여기 계신 것을 보니 반갑소이다."
"아, 송진사, 반갑소이다. 송진사도 2소였구려."
"정 생원도 한성시를 보신거외까?"
"아니지요, 우리들은 집이 과천이라 향시를 보았지요."
"두 분 모두 복시에서도 입격하시어 전시에서 다시 만나기를 바라오이다."
"말씀만으로도 고맙소이다. 송 진사께서도 꼭 급제하시기를 축원하오이다. "
문과 복시의 첫날은 경강시(經講試)라 장막을 사이에 두고 사서삼경의 훈석(訓釋)을 암송하였는데 막힘없이 좔좔 외워내리는 송윤호를 바라보는 시험관은 물론이요 둘러섰던 칠팔 명의 상시관(上試官)과 참시관(參試官), 그리고 양사(兩司)에서 나온 두 명의 감시관들이 모두 놀라 눈이 사발만큼 커졌다. 그러니 당연히 초장(初場)에서 통(通)을 받아 중장에 응시할 첩문(帖文)을 받았다.
"송진사, 송진사, 하하, 송진사가 첩문을 받는 것을 보았소이다."
성균관 문을 나서는 송윤호를 뒤를 급히 따라온 쥐 수염 정 생원이 온 얼굴에 주름을 지어 웃고 있었다.
"아, 정 생원, 정 생원과 저 분은 어찌 되었소이까? "
"하하하. 늦게나마 관수(官數가 터지려는지 난생처음으로 초장은 잘 마쳤소이다. 저 사람 김초시는 약(略)을 받고 시생은 조(粗)를 받았지요. 하하하."
"참으로 잘 된 일이외다. 우리 모두 내친김에 전시(殿試)까지 가보십시다 그려. "
"그러게나 말이 오이다."
쥐 수염은 평생의 소원을 푼 사람답게 연신 웃고, 채수염은 술 취한 사람마냥 붉콰한 얼굴로 감격에 겨워 먼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하루를 쉬어 회시(會試)인 중장(中場)에서는 부(賦)가 과시(科試)라 중국의 옛 시문의 한 구절이 출제되었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붓에다 먹물을 듬뿍 찍은 송윤호가 아는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총동원하여 1구(句) 6 언(言)으로 60구의 시(詩)를 단숨에 지으니, 보는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할 뿐아니라 일자 일획(一字一劃)이 모두 명필이라 참관했던 모든 시험관과 감독관의 눈과 입이 또 한번 벌어지게 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송윤호로 말할 것 같으면, 시경(詩經) 정도는 눈 감고도 달달 외우는 데다, 부(賦) 라면 굴원(屈原)의 초사(楚辭)에서부터 한 부(漢賦)는 물론이요, 진(晉), 원(元)에서 당(唐), 송(宋), 명(明)의 온갖 부를 훤히 꿰고, 김부식(金富軾)이나 이규보(李奎報) 등 고려나 조선의 과거시험으로 쓰였던 과부(科賦)까지 모조리 연구하고 공부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과목은 송윤호가 가장 자신이 있어하는 과목이기도 했다. 또 하루를 쉬어 종장(終場)에 이르니 시험 과목은 책문(策問)이었다. 시험관이 경서(經書)의 어려운 대목을 골라 그 뜻을 묻고 시무책(時務策)을 물어왔으나 송윤호가 막힐 사람이 아니어서 통(通)을 받으니 초, 중, 종장의 종합 분수(分數)가 단연 갑(甲)이라 복시 최종 합격자 33인에 들었다. 중장의 시제(試題)인 부(賦)에서 부(不)를 받은 쥐 수염은 조(粗)를 받은 채수염과 종장까지 가기는 갔으나 경서와 시무책에 막혀 둘 다 복시에 낙방하고 말았다. 송윤호는 그들의 나이와 벼슬에 대한 갈망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가슴 한구석이 찡하였다. 9월에 들어서 날씨도 선선해지고 도성을 둘러싼 산들이 온통 고운 단풍으로 물들 때를 맞추어 전시(殿試)도 치르게 되었다. 창덕궁 전정(殿庭)에서 흰색 창의를 입고 머리에 검은 두건을 쓴 송윤호도 거자들과 함께 멍석 위에 앉았다. 전정의 차일막(遮日幕)으로 소년 왕인 숙종이 임어(臨御) 하자 곧이어 국궁사배(鞠躬謝拜)를 하는 것을 시작으로 문과 전시의를 거행하였다. 독권관(讀卷官)이 불러주는 그날의 시제는 대책(對策)으로, 지난 경신양년(庚辛兩年)과 같은 흉황이 또다시 닥친다면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하는 생각 밖의 시무책이었다. 전시에는 대책(對策)과 표(表), 전(箋), 합해 모두 열 가지나 있고 그 가운데 대책이 가장 많이 출제가 된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제까지 독권관이 시제(詩題)로 냈던 모든 대책을 훑어 공부한 송윤호로서는 의외의 문제였다. 이것은 사실 부왕 시절의 기근 대책을 변호할 겸 앞날을 위해 좋은 생각을 들어보려고 임금이 낸 문제였다. 송윤호는 옷깃을 바로하고 단정히 앉아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지난 경신 대기근 때에 굶주린 백성들을 다시 떠 올리고 김화의 난민들과 무력한 고을 현감의 처사를 생각하였다. 피골이 상접한 아이를 업은 해골 같은 부녀자와 가슴뼈가 드러난 몸으로 솥단지를 걸머진 남정네들이 한 끼 풀뿌리 죽을 찾아 떠도는 것을 눈앞에서 수도 없이 본 송윤호였다. 그러다 장인 허참봉이 난민의 앞장을 서서 느릿한 걸음으로 집을 향하던 모습이 떠올라 슬그머니 미소를 띠었다. 그 당시에 조정이나 궁가의 왕족, 또는 팔도의 부자들이 조금만 베풀었다면 눈이 뒤집힌 어미가 아이를 솥에 넣고 삶는 참상은 없었을 것이었다. 결코 부자들 곳간에 곡식이 모자라 그렇게 죽어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몇 각(刻)이 지나 눈을 떠 좌우를 보니 콩인지 팥인지 모르나 부지런히 붓으로 밭을 가는 사람도 있고 밧줄에 묶인 돌부처인 듯 꼼짝 못하고 앉아 먹물이 다 말라가는 사람도 있었다. 숨을 크게 한 번 들어마신 송윤호가 붓을 들었다. 그리고는 그동안 보고 느꼈던 일들을 예를 들어가며 써 내려갔다. 먼저, 그 엄청난 대재앙을 그나마 그 정도에서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선왕이 대동법을 강력하게 시행했던 곳에서는 피해가 적었던 점을 말하고 수많은 토지를 가진 왕족과 양반 지주들이 죽어가는 백성들을 뻔히 보면서도 곳간을 열지않은 점을 성토하였다. 또한 평소에는 대감이요, 수령방백입네 하던 벼슬아치들이 굶은 백성을 구제 할 생각보다 난민들의 화(禍)를 겁내어 사직할 기회만 엿보던 것을 질타하였다. 특히 난민에 대한 변변한 구제책 하나도 내어놓지 못 하면서도 하늘의 모든 재앙이 임금의 부덕에서 온 것인 양 임금을 몰아붙인 죽은 송준길과, 살아있는 송시열을 매도(罵倒) 하였다. 국난을 만났을 때에는 네 탓 내 탓 죽어라 말로 따지기보다 왕과 신하들이 하나로 뭉쳐서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평소에 느꼈던 백성과 벼슬에 대한 생각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대책을 써 내려가는 송윤호는 이미 이 자리가 과거시험장인지도 잊었고 이 글이 급제를 위한 답안지라는 것도 느끼지 못하였다. 벼슬과 백성에 대해 생각했던 모든 것을 모조리 쏟아 놓은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굶주린 난민을 위해 있는 양곡 모두를 아낌없이 내어주는 허참봉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리며 끝을 맺었다. 굶주린 사람을 위해 부자라면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를 제시한 것이다. 아침에 시작하여 오정을 훨씬 넘겨서야 쓰는 것을 멈춘 송윤호가 이제까지 쓴 것을 대략 훑어보다가 아차! 싶었다. 너무 솔직하게 쓰다 보니 서인(西人) 집 안인 자신이 서인을 욕 한 것도 있고 왕족은 물론이요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백성에 행한 횡포를 너무 신랄(辛辣) 하게 헐뜯은 것이다. 이 답안을 보는 사람도 역시 고관대작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왕족을 나쁘게 말했으니 임금 또한 일족으로써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은 것이다. 이래서야 갑을 병과는 고사하고 벌을 받기가 십상이었다. 하나 이미 고칠 기회는 물 건너 간 노릇이라 그대로 시험관 앞에다 답안 뭉치를 내려놓고 말았다. 북이 두 번씩, 세 번을 울려 시험이 끝났음을 알렸으나, 아직도 뭉개고 있던 몇몇 거자가 할 수없다는 듯 붓을 던졌다. 그날로 장원을 가려 방(榜)을 붙였으면 좋으련만 다른 시제와 달리 책(策)은 답안지의 분량이 방대하여 채점을 하는데 이틀이 걸리었다. 시관들이 여러 거자의 답안 가운데 잘 된 것을 고르고 골라 돌려가며 채점을 하다가 결국 송윤호의 답안이 문제가 되었다. 종 2품 이상의 독권관들이 송윤호의 글귀를 왕실의 종친들을 능멸하는 불손한 언행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글의 내용이 좋고 나쁜 것을 따지기보다 정승 판서인 자신들을 욕하는 서인계의 송윤호를 밉게 본 것이다. 이때는 이미 남인(南人)이던 허적이 영의정이어서 조정을 장악한 뒤라 독권관들 역시 남인 일색이었다. 하나 대독관(對讀官)이던 김길후가 송윤호의 대책이 가장 잘 된 책(策)이니 단연 장원감이라고 주장하므로써, 설왕설래하다가 결국 종 3품의 김길후가 정 2품의 박원중에게 밀리어 송윤호 또한 을과(乙科)로 이름이 밀리고 말았다. 독권관 박원중이 각 과의 거자들의 명단과 장원랑의 답안을 어전에 바치니 이미 도승지로부터 시관들이 장원을 놓고 벌인 논쟁을 들어 알고 있던 임금이 송윤호의 답안도 가지고 오라 명하였다. 먼저 장원을 한 윤우명의 글을 본 임금이, 송윤호의 글을 읽어내리다가 차츰 용안이 밝아지더니 어수(御手) 마저 가볍게 떨리었다. 임금이 하고 싶던 말을 송윤호가 글 속에서 대신하고 있으니 속이 시원해 지던 것이다. 선왕의 치세에 유난히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으니 백성들과 열성조(列聖祖)에 내 세울 부왕의 업적이 없었는데 송윤호가 대동법을 들어 선왕을 옹호하였으니 기쁘기 한량없었다. 뿐이랴, 갖은 말썽을 다 부리는 복창군 형제들이나, 고모들인 네 명의 공주 가족을 비롯한 종친들의 횡포가 항상 눈에 거슬리던 차에 송윤호가 대신하여 그들을 질타(叱咤) 하여 주니 얼마나 고마운가 말이다. 거기다가, 임금을 은근히 깔아 뭉기려 한 송시열 같은 대신(大臣)을 대신(代身) 욕을 해 준 송윤호는 어쩌면 영의정 자리라도 주고 싶은 충신 중에 충신이었다. 내친김에 복시에서 치른 송윤호의 모든 답안을 가지고 오라 하여 하나하나 살펴 본 임금은, 송윤호가 지은 금강사계부(金剛四季賦)의 빼어난 구절구절에 감탄을 연발하였다.
"참으로 가경(佳境)이로다. 눈을 감아도 금강산이 보이는 듯하니 어찌 사람의 머리에서 이런 글이 나온단 말인가? 이 정도면 가히 구양수(歐陽脩)의 추성부(秋聲賦)나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에 비견할 만하지 않은가?"
임금의 송윤호를 극찬하는 말에 우의정인 권대운이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
"전하, 송윤호의 시재(詩才)는 훌륭하오나 언행에 가시가 돋치었으니 실은 을과에 둠도 과분한 처사인 줄로 아뢰옵나이다."
남인(南人)이던 권대운의 말에 언짢아진 소년 왕이 억양을 갑자기 높이었다.
"우의정은 어떤 말이 가시라 생각하시오? 선비의 기개로 그만한 말도 못한다면 언로가 막혔다 하지 않겠소?"
"하오나 그자는 왕실을 능멸하는 글귀를 넣어 상하(上下)의 질서를 어지럽히었으니 이것은 불충이 아니 옵니까?"
"과인이 보기에는 그 정도의 말은 취(取) 할 만하고 가납할 말이라 사료되오. 허고, 그 자가 지은 금강사계부만 하더라도 넉넉히 장원감이요, 허니 장원으로 고쳐 뽑으시오."
"전하, 아니 되옵니다. 그자는…"
"우상은 그만하시오. 지금 우상은 파당을 보는 것이오?"
"아, 아니, 파당이라니오? 그런 것이 아니오라..."
"아니면 되었소, 이 자리에 있는 여러 대신들은 들으시오. 앞으로 과인은 인재를 선발함에 있어서 당과 파의 구분을 두지 않을 것이니 그리들 아시오. 인재가 아니어서 뽑지 않는다면 모르되 파당이 다르다 하여 내친다면 그 또한 현명치 못한 처사라 할 것이니 경들도 차후로 명심들 하기 바라오."
비록 열넷의 어린 왕이라 하나 용상에 올라 한 해를 지내보니 왕으로서의 자신감도 생기는 데다, 그동안 늙은 대신들을 가만히 살펴보니, 사사건건 괴상한 논거(論據)를 들먹이며 자기들 마음대로 정사를 떡 주무르 듯하려는 것이 환히 보이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이런 능구렁이 같은 신하들에게 더는 끌려다니지 않겠다고 못을 박아 본 것이다. 범은 새끼라도 범이요, 개는 커서도 개인 것이다. 훗날 시호가 숙종(肅宗)이 되는 소년왕이 신하들을 길들이는 법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왕권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아가던 소년 왕은 세자로 보낸 세월이 있고 보고 들은 바가 있어서 선왕이 신하들에게 시달리던 것을 생각할 때 자신의 치세에서는 어떻게든 왕권을 되찾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던 일단은 왕의 권한으로 소년 왕답게 밀어붙이고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 송윤호의 일도 어린 임금과 늙은 신하가 하루 한나절을 밀고 당기다가 결국 중용(中庸)의 미덕을 취하기로 합의를 하여 장원랑은 양보를 하는 대신 갑과(甲科) 2등인 아원(亞元)으로 뽑은 것이다. 장원을 한 윤우명(尹禹明)은 그날로 종 6품직인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이 되었고 송윤호는 승문원에 자리가 나서 정 7품에 박사(博士) 직을 받았다. 그런데, 그날 저녁, 석수라를 들던 소년 왕이 밥그릇에 담긴 수라를 보다가 문득, 굶주린 난민을 위해 곳간의 모든 곡식을 풀었다는 참봉의 이야기가 생각난 것이다. 이는 왕족이나 고관들도 행하지 않던 일을 고을 수령을 대신하여 곡식을 내어놓은 시골 부자를 예로 든 송윤호의 글이지만 하여간, 갑자기 그 이야기가 생각이 난 임금이 그날의 직숙(直宿)인 홍문관 교리 이수창을 불렀다. 그리고는 그런 일이 경신 양년에 실제로 있었는지를 알아보라 일렀다. 이수창이 바삐 돌아가 신해년의 상소들 가운데 김화의 한 선비가 올린 고변 상소장과 거짓 상소를 올린 당시의 김화 현감이 유배되었음을 문서를 뒤져 알아내었다. 그러고 보니 이수창 또한 그 당시 사헌부에서 조사를 하여 올린 보고서를 읽은 기억이 있었다. 이수창이 수찬(修撰)이던 불과 4년 전의 일인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음을 아뢰자 임금이 알았다고만 하였다. 다음날 이조판서를 불러 허참봉의 일을 말하고 산직(散職)이나마 종 7품의 교지(敎旨)을 내리게 하였다. 실직(實職)도 아닌 종 7품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사람이 있을 수 없었다. 그날로 허 참봉에게 종 7품 직장(直長) 벼슬이 내려졌다. 종 9품 참봉에서 무려 네 품계나 오른 것이다. 당연히 가문의 광영이요 집안의 경사라 소식을 들은 송윤호가 허참봉을 찾아가서 하례를 하였다.
"장인 어른, 하례 드립니다."
"엉? 무엇을 하례한단 말인가?"
"그야, 직장(直長)으로 품계가 오르신 것을 하례 드린 것이지요."
"직장(直腸)이고 곡장(曲腸)이고 간에 자네가 쓸데없는 짓을 했네."
"네에?"
"허허, 이런 말을 하면 자네는 웃을지 모르나, 나는 벼슬이 싫네."
"벼슬이 싫으시다니요? 모든 사람들이 벼슬에 목을 매지 않습니까?"
"그건 세상 사람들의 얘기고, 나는 생각 없네."
"아니, 장인어른. 주상전하께서 친히 내려주신 벼슬이 싫으시다면 어쩝니까? 누가 들을까 겁이 납니다".
"내가 벼슬을 싫어하는 곡절이 있네. 들어 보려나?"
"네에? 곡절이라니요?"
"내가 참봉인 것은 젊은 날 정릉(定陵)의 능참봉을 잠시나마 한 적이 있어서 일세. 향시(鄕試)에 나가 초시나마 입격을 하고 보니, 왜 그런지 우쭐한 마음에 그때는 어떻게든 벼슬이 하고 싶어지데그려. 아니, 벼슬이 꼭 하고싶었다기보다는 아마, 돌아가신 조부께서 현감 벼슬을 하신데 비해 부친께서는 백두(白頭)이시던 것에 대한 불만과 실망 때문이었을 것일세. 하지만 막상 벼슬하기가 그리 쉬운 일인가? 능참봉이라도 해보려고 천리 밖의 함경도(咸鏡道) 함흥(咸興) 땅에 있는 정릉(定陵)에 자리가 비었다기에 무작정 내가 자청서를 올렸었네. 정릉은 자네도 알다시피 강헌 대왕의 부조(父祖)이신 환조(桓祖)의 능이지. 사실, 말이 능이지, 당시에는 석물(石物) 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귀주(歸州) 골 외진 산골짝이라 유배지(流配地)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곳이었지. 그 곳 산 밑의 오두막에서 두 해를 버티었네. 호랭이 우는소리에 잠 못 드는 밤이 태반이었지. 그런 곳이다 보니 외롭고 적적하여, 솔직히 말해서 날이 갈수록 벼슬이고 나발이고 만정이 떨어지데 그려. 다 팽개치고 집으로 돌아갈까 말까 몇 날 며칠을 망설였지. 그런데 말일세, 어느 날 능에 올라가 보니 어떤 놈이 능의 제실(祭室)옆에 서 있던 소나무 두 그루를 베어 가고 없는 걸세. 전날까지 멀쩡히 서있던 소나무였거든. 그걸 본 순간, 기가 탁 막히더니 아이고 이제 나는 죽었구나 하는 생각으로 눈앞이 아득하더구만. 결국에 어찌 되었겠나? 이튿날, 감영(監營)이 있던 영흥(永興)으로 끌려가 물고(物故) 나기 직전까지 매를 맞았네. 그리곤, 기절한 채 그대로 감영 밖으로 내쳐진 것이지. 정신이 들고 보니 사람들이 오가는 길바닥에 내가 누워 있더군.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오가는 사람들은 모른 체하고 그냥들 지나 치데. 허긴 피떡이 된 처참한 몰골을 누가 거들떠보겠나? 한참이 지나도 누구 하나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기에 지나가는 젊은 놈을 불러 말했네. 의원에게 업어다 주면 좁쌀 한말을 주겠다고. 그랬더니 이놈이 아문(衙門) 쪽을 힐끔거리더니 나를 들쳐메고 내쳐 의원에게로 달려가는 것이었네. 함부로 죄인을 도왔다가는 동당(同黨)으로 몰릴 것이 겁이나기도 하지만 흉년에 좁쌀 한 말이 어딘가. 의원이 너덜거리는 내 볼기를 헤집어 보더니 장독(杖毒)에 좋다는 풀뿌리를 한 동이나 찧어 붙이고도 살릴 자신이 없는지 한다는 소리가, '인명은 염라대왕 치부책에 있는 것이지 약사여래 손에 있지 않다' 하더군. 허허허. 약사여래라면 송장도 살리는데, 그깟 장독 하나 못 다스리겠는가? 그만큼, 의원인 제놈이 보기에도 상처가 심했던 걸세. 그날부터 죽을동 말동, 정신이 오락가락하며 몇 날 며칠을 엎드려 지내는데, 그때가 한 여름이라 엉치에 쉬가 슬어 구더기가 와글와글 했으니 그 참상이야 오죽했겠나? 목불인견이었지. 그렇게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있던 어느 날, 병자들끼리 서로 얘기를 나누는데 가만 들어보니, 그곳 향소(鄕所)의 좌수(座首)란 작자가 별감을 하다 떨려난 자기 처남을 정릉의 참봉으로 밀었다더군. 그제야 앞뒤가 훤히 보이데그려. 벼슬이 무언지, 참봉도 벼슬이라고 날 좇아내려고 그놈들이 정릉의 소나무를 벤 것일세. 며칠 후, 김화 본가로 내가 아파 누워 있다는 사연을 써서 보내었지. 죽어도 차마, 집에는 알리지 않으려 했으나, 의원에게 약 값도 줘야 하고, 업어다 준 놈에게 약속한 좁쌀도 주어야겠기에 할 수없이 사람을 사서 보네었네. 일삭 후에 우리 부친께서 손수 오셨더군. 죽게 된 자식의 소식을 들은 부친의 심정이 어떠했겠나? 천리가 넘는 머나 먼 길을 종놈에게 무명 짐을 지워 허위단심으로 달려오신 것일세. 자식이 그새 잘못되었을까 노심초사하시다가 처음 나를 바라보시던 아버님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네. 그때 아버님을 보는 순간 나는 크게 깨달았네. 나는 천하의 불효자라는 걸. 그렇지 않은가? 만약 내가 장하(杖下)에 물고가 났어도 불효요, 내가 잘난 능참봉을 하는 사이에 부친께서 돌아가시기라도 했다면, 임종은커녕 장례도 못 볼 뻔하지 않았겠나? 그 후부터 벼슬 살 생각은 깨끗이 잊고, 집으로 돌아와 치가 치산(治家治産)에만 힘을 쏟아서 논밭을 늘렸네. 부친께서는 다행히 천수는 하시어서 내 딴엔 효도를 한다고 하긴 했지만 아버님께서 보시기엔 어땠는지 모르지. 후에 천석 부자 소리를 들으니 사방에서 공명첩(空名帖)이요 납속첩(納粟帖)을 사라고 난리를 피웠지만 벼슬이라면 지긋지긋한 사람이라 다 소용이 없었네. 한데 지금 이 나이에 종 7품 직장이면 무엇하고 정 1품 영의정이면 무엇 하나? 직장이면 죽어서 비석에 계공랑(啓功郞) 아무개라 쓰는 게 다일 것이요, 영의정이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라고 비석에 새길 때, 석수쟁이들 귀찮게시리, 글자 수만 늘어 날 뿐이지. 그까짓 벼슬이 다 무언가? 내가 죽걸랑 비석에다 이런저런 글을 쓰지 말게. 이름 석자면 되네. 아니, 이름 석자는커녕 비석조차 필요 없네. 그냥 평토로 하게. 벼슬? 그거 다 소용없네."
오랜만에 긴 말을 한 허참봉이 길게 한숨을 쉬다가 긴 담뱃대를 찾았다. 재빨리 장죽에 담배를 재워 장인의 손에 쥐어준 송윤호가 부시까지 처서 불을 붙이니 허참봉이 길게 한 모금을 빨더니 갑자기 껄껄 웃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건 사주팔자에 없던 벼슬일세 그려. 내 사주 어디에도 참봉 말고는 없었는데 사주에 정해진 내 팔자를 자네가 바꾼 것일세."
"원, 장인어른께선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언제는, 옥황상제도 사주팔자는 못 바꾼다고 하시더니 제가 무슨 재주로 바꾼단 말씀입니까?"
"아닐세, 옛말에, 장강(長江)의 물줄기도 호미질 한 번에 흐름이 바뀔 수도 있다지 않았나? 지나온 것은 물론이요, 앞으로 닥칠 사주도 이미 윤근의 풀이로 다 알고 있는데, 벼슬 오른다는 말은 없었네. 허니, 이건 정해진 내 사주가 자네의 붓질로 바뀐 것이 틀림없네."
"허허, 그건 장인어른의 억지 말씀입니다. 저야 본래부터 사주고 오주고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만, 정해졌다는 사주가 그렇게 쉽게 바뀐다면 그거야말로 사주랄 것도 없겠지요."
"허기야, 자네 말도 맞는 것 같네. 의지(意志)가 팔자를 만든다는 말도 있지. 사주에 굶어죽을 팔자라고 해서 입 봉하고 가만히 죽기만 기다리고 있겠나? 안 죽을려고 남을 해치고서라도 입에 든 것을 빼앗아 먹겠지."
"장인 어른께서는 벼슬이 소용없다시면서 싫다는 제겐 왜 벼슬을 하라고 등을 미셨습니까?"
"그야, 조선 땅에서 살자면, 벼슬한 흔적이라도 남아야지 그러지 않고서는 살아서든 죽어서든 사람 취급도 못 받을 것 아닌가? 허고, 벼슬 싫다는 사람은 나지, 자네가 아니지 않나? 왜? 지금이라도 자네의 벼슬을 물리고 싶은가?"
허참봉은 빙그레 웃으며 사위의 얼굴을 느긋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한데, 정작, 사람이 산다는 것이 허망한 것인지 보람된 것인지 모르지만 살아가면서도 참으로 모를 것은 언제까지 사느냐 하는 것일 것이다. 언제까지 살 것인가를 인간의 힘으로는 알 도리가 없으니 흔히들, 사주팔자에다 핑개를 대는 것일 터였다. 허참봉이 자기의 수(壽)를 사주를 통해 알았었는지 몰랐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나, 허참봉이 허직장으로 품계가 올라 상감으로부터 교지(敎旨)를 받은 때가 시월 초인데 그 달이 채 가기 전에 갑자기 죽고 말았다. 평소에 아픈데도 없었고,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천하태평에 유유자적하던 사람이 하룻 밤 사이, 잠을 자다가 깨지를 않고 그대로 타개를 한 것이다. 그러니 물론 작별의 인사도, 한마디 유언도 없었다. 날벼락 같은 허참봉의 죽음은, 장모와 아내에게도 커다란 슬픔이었지만 송윤호에겐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송윤호로서는 스승 같던 장인이요, 친구 같은 장인이요, 아버지 같던 장인을 잃은 것이다. 장지는 허참봉의 조부와 부친이 묻힌 김화의 선산이라, 그 먼 길을 상여로 갈 수도 없어서 춘보와 거칠이를 비롯한 삯꾼 십여 명이 교대로 맞잡이를 하였다. 닷새를 길에서 보낸 후에야 장지에 도착하여, 장례를 치르고, 또, 닷새를 걸어 한양에 되돌아오니, 또 한 번의 초상이 송윤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번엔 장모였다. 춘보 마누라의 얘기를 들어보니, 어제 아침, 여러 번을 어지럽다더니 돌연 쓰러졌다는 것이다. 불행은 쌍으로 온다더니 그 말이 맞는다는 걸 증명이라도 한 듯한 일이었다. 어쩌겠는가? 또 한바탕 곡소리가 울리고 또 한 번 삯꾼을 사서 장지로 갔다가 돌아오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송윤호로서는 인생무상을 절실히 느끼는 순간이었다. 비석을 세우지 말라던 장인의 비석에는 허봉구지묘(許奉九之墓)라고만 간단히 새겨 무덤 자리의 표시만 해 두었다. 이듬해 봄에 춘보 내외는 김화로 내려보내 농사를 돌아보게 하고 주인 없는 명찰방의 허참봉 집은 팔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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