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설

송원일 서장(序章) 3.한복만의 죽음

fiction-google 2024. 5. 6.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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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한복만의 죽음

허견은 허적의 얼자(孼子)로 태어났다. 비록 서얼이긴 했으나 견의 경우는 다른 사대부 집안과는 대우가 좀 달랐다. 아니, 달라도 완전히 달랐다. 조선 땅에서 서출이야 어디 사람값에나 들 것인 가마는 허견만은 예외였다. 허적은 정실(正室)에게서 아들을 두지 못했다. 적자(嫡子)가    없고 보니 자연히 서자인 어린 허견을 가까이 두었다. 글과 글씨를 익혀주며 아이의 재롱을 보는 것이 큰 낙이었다. 그러다 그만 자식에게 빠지고 말았다. 허견은 자라면서 무소불위의 인간이 되었다. 무슨 짓을 해도 아비의 비호가 있었고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아비가 막아주었다. 열다섯 살에 술맛을 익혔고 열일곱에 장가를 갔다. 그 후가 고약했다. 기생으로 길을 트더니 집안의 반반한 종년은 다 건드렸고 그다음은 온 장안을 휩쓸고 다니며 과부와 유부녀를 가리지 않았다. 본래 허견의 사람됨이 무사분주하고 잡스러웠다. 아비인 허견도 대강은 알았다. 벼슬을 주면 좀 나아지려나 해서 고심 끝에 교서관 정자를 시켰다. 책을 가까이하는 직책을 준 것이다. 그러나 워낙 책보다 술과 계집에 맞는 체질이었다. 벼슬도 마찬가지여서 당상관이라면 모를까 그까짓 종 구품이 성에 찰 리가 없었다. 허견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한 가지 장기(長技)를 보탰다. 남이 가진 것을 배았는 것, , 강탈(强奪)이었다.

"아니 또 그자가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방금 보고를 마치고 앉는 장령(掌令) 어순재를 돌아보며 동관인 김동화가 볼멘소리를 했다. 영동 지방이 워낙 가물다는 장계가 여러 차례 올라오자 실정을 파악하고 목민관의 수탈을 알아보기 위해 암행어사로 나갔던 어순재가 돌아온 것이다. 임금 앞에 복명을 하기 전에 사헌부 내에서 조율(調律)을 거치는 관례가 있었다. 가뭄이 워낙 심해 그곳 백성들이 다 굶어죽게 되었더란 말 끝에 허견의 얘기가 나왔다. 대사헌을 비롯해 집의와 장령이 둘 집의가 둘, 모두 여섯의 대관이 다 모인 자리였다.

"지남 번에 한차례 혼이 났으련만 워, 그래 , 자네는 어사란 자가 그 골을 보고도 그 자를 가만두었단 말인가?"

"그 꼴을 보다니? 본 게 아니라 풍문을 들었다니까 그러네. 한양에서 눈독을 들였던 계집이었거든, 허허."

"좌우간 원주가 어디라고 거기까지 졸개를 보내 계집을 뺏어 와, 오기를?"

김동화는 자기의 첩이라도 뺏긴 듯 흥분해 언성을 높였다.

"어흠,"

듣고만 있던 집의 (執義) 이헌조(李軒祚)가 헛기침을 했다. 조용하란 뜻이다. 그는 옆 잘리의 대사헌을 슬쩍 돌아 본 뒤 손을 들어 서탁을 탕탕 두드렸다.

"그럼, 매듭을 짓도록 하지. 어장령(掌令)은 영동 지방의 가뭄과 수령들의 동태를 보고 들은 바대로 소상히 적어 내일 아침 어전에 나가 복명(伏命) 하게. 그리고 영상의 서자 견()이 원주로 낙향한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의 첩을 빼앗은 일도 빼지 말고 반드시 아뢰야겠지. 아니 그렇사옵니까? 대사헌 대감?"

대사헌 배호(裵鎬)의 얼굴은 무관심한 듯 말이 없었다. 눈을 지긋이 내리깔고 조는 듯 마는 듯 좌우로 몸을 흔들고 있었다. 배호는 허적과 같은 남인이요 이헌조는 서인이라 사헌부 내에서도 항상 껄끄러운 사이였다. 이헌조가 말을 이었다.

"대감 그렇지 않사옵니까? 이번 일은 반드시 공론화하여 문제를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서자 하나 감당 못하는 영상이 이번엔 웃전에 혼이 좀 나야지요."

기다렸다는 듯 말이 끝니기더 전에 대사헌이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식지를 뻗어 이헌조의 얼굴을 향해 흔들며 소리쳤다.

"뭐라? 혼을 내? 영상이 이 집의(李執義) 아들인가, 손자인가? 아니면 영상이 동네 강아지 인가? 말을 가려서 하게. 말을.... 혼을 내다니 에이잉 쯧쯧."

"실언 올시다. 말을 하다보니 그만..."

"시끄럽네. 사헌부의 대간이라면 임금의 잘못이라도 짚을 수 있어야겠지. 허나 자네는 지금 별것도 아닌 일로 영상을 능멸함이 아닌가 이 말일세."

"? 능멸이라 하셨습니까? 그건 아니 올시다. 다만..."

"다만 무언가? 견이 이런 소동을 한두 번 일으켰나? 견이 계집 문제로 말썽을 일으킬 때마다 무사타첩으로 방면이 되지 않았나? 왜이겠나? 그것응 영상의 집안 문제일 뿐이기 때문일세. 그런 사소한 남의 집안 문제를 아뢰어 임금의 심기를 흐리는 것이 신하의 도리인가? 아니지 않은가? 그런 줄 알면... 어 장령도 그 문제는 빼게. 그리고 이 자리의 누구도 차후로는 허견의 문제는 거론하지 말게."

미리 생각이라도 해 둔 말을 하듯 빠르게 말을 마친 대사헌이 위압적인 눈길로 장령들과 지평들의 얼굴을 쓸었다. 그리고 쐐기를 박았다.

"허견의 일을 들추어 영상을 욕보일 마음이 있는 사람은 지난 삼 월 한성부 좌윤이 어찌 되었나를 돌아보는 게 좋을 것이야."

허견이 남의 아내를 뺏은 일과 청풍 부원군의 첩을 때린 일로 당시 당시 한성부 좌윤으로 있던 남구만(南九萬)이 상소를 했으나 허견이 죽어도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함으로써 오히려 남구만이 원방에 유배를 간 것을 말함이다. 파직되어 귀양 가기 싫으면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공갈이었다.

"고변이 들어와도 묵살하오리까?"

이헌조가 냉랭한 표정으로 물었다.

"역모의 고변이 아닐 바엔 의금부로 돌리게. 의금부에서 알아서 하겠지."

역모. 일순, 역모라는 말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모두가 수많은 역모사건을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고변이 들어올 때마다 잡아다 주리를 틀고 곤장을 안겼다. 임금이 친히 국문청(鞫問廳)을 열었다. 그러나 역모 다운 역모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심지어 이런 일 까지 있었다. 장호원에 사는 백 첨지네 비부(婢夫)가 이백여 리 길을 달려와 의금부에다 역모를 알렸다. 어디서 주워들었은 지 역모를 고변하면 종도 양민이 될 수 있다는 소리에 종인 제 마누라를 속량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역모라는 이 한 마디에 더 들어 볼 것도 없이 의금부 도사를 보내 백 첨지를 잡아 올려 곤장부터 안겼다. 그러나 시원한 자백이나 물증이 나오지 않았다. 이번엔 고변한 비ㅣ부를 엎었다. 매 몇 대에 껌벅 죽어 실토하는 비부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실인 즉 이랬다. 다섯 살 난 백 첨지네 막내가 열 살 먹은 제 형과 놀다가 제 형이,

"에헴, 나는 대감이다. 너는 무릎을 꿇어라."

이랬더니 귀염만 받아 본 막내인지라,

"싫어 내가 대감 할래. 아니다 형이 대감 해. 난는 대감보다 높은 것 할래."

형놈이 동생을 달래려고,

", 대감보다 높으면 임금인데 임금을 한다고? 그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멍청아."

임금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멍청이란 말에 골이 난 막내가 쪼르르 제 아비인 백 첨지에게 달려가 어리광을 부렸다.

"아부지, 나도 할 수 있지? 나도 임금 할 수있지?"

문지방을 베고 벌렁 들어누어 빌려온 언문 필사본 삼국지에 한창 빠져 있던 백 첨지가 귀찮아서 한 마디 한 것이 화근이었다.

"오냐. 할 수 있지. 네가 우리 집안에서는 임금인데 왜 못 해. 해라 해. 내가 임금 시켜주마."

마당에서 일을 하던 비부쟁이가 듣고 옳다, 이거다 싶었던 것이다. 결국 자식 단속 못한 죄에다 망발을 뱉은 입으로 인해 물고가 난 백 첨지는 집이 있는 장호원에 도착하기 전에 죽고 말았다. 역모가 너무나 흔하든 시절이었다.

대사헌 배호가 화가 덜 풀려 입가에 수염이 푸들푸들 떨리더니 자리를 박차고 휭하니 밖으로 나갔다. 허견의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남인의 잘못만큼은 눈 감아주는 일이 없는 이헌조가 영 못마땅해서였다. 어순제와 김동화가 이헌조에게 웃는 얼굴로 목례를 했다. 급히 대사헌의 뒤를 쫓아 나가든 지평 허묵(許默)이 그들을 보더니 못 볼 걸 본 듯 미간에 주름을 잔뜩 지었다. 그는 허적의 종질(從姪)이었던 것이다.                                                    

"하하하, 오늘 도중 회의는 이것으로 파투가 났군."

언제나 진중한 언행과 몸가짐을 하는 어순제와 달리 서글서글한 말씨에 활달한 김동화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 말이었다 씁쓸한 얼굴로 앞서 나가던 이헌조가 뒤돌아보며 김동화의 말을 받았다.

"허허, 그러게나 말일세. 어 장령이 정말 어전에서 허견의 일을 상주(上奏)할 줄 아셨는지 원, 도둑이 제발 저린 꼴 아닌가?"

"그러게나 말입니다. 영감께서 허견이 남의 첩 뺏은 일을 어전에 아뢰라고 어장령에게 말씀하실 때 저도 웃음을 참느라 혼났습니다."

"좌우간 허견이 문제는 문제로세. 영상도 서자 하나 잘못 둔 탓에 허씨 가문이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네."

"어차피 적실이 없는 바엔 앞날 걱정하며 살겠습니까? 하하하."

김동화의 웃음소리에 찌푸렸던 이헌조도 빙긋 웃었다.

", 송지평, 나 좀 보세."

그들이 회의실로 쓰고 있는 동방(東房)이라 부르는 제좌청(齊座廳)을 나와 각자의 일을 찾아 흩어질 때, 이제껏 말이 없던 어순제가 송수호를 불렀다. 허나 머리속이 온통 역모니 허견이니 죽은 한복만의 생각으로 가득한 송수호는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러자 김동화가 송수호에게 얼른 다가와 어깨를 툭 치고 손을 자신의 등 뒤를 가리켰다.

". 나으리. 깜박 다른 생각으로 그만... 송구하오이다."

"허허, 아닐세. 허고, 나리 소리는 빼라니까. 도토리 키재기 같은 그깐 품계의 계차를 따져 무얼 하나? 아 참, 자낼 보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네 김원준이라고 알지? 거 군기시에 있던 김 판관 말일세."

"알다 뿐입니까? 지난 병오 년 식년시에 같이 등과를 했습지요. 그 사람이 장원을 했습니다.

", 나도 그렇게 들었네. 내 이번에 그 사람을 원주 관아에서 우연히 만났더니 자네에게 안부를 전하더군."

"아 예, 그 사람이 원주의 염초도회소로 품계를 깎여 좌천된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나으리 보시기엔 어떠했는지요? 지낼만하더이까?"

"행색이 많이 깎였더군. 그나마 도회소가 있는 주천현(酒泉縣) 현감이 뒤를 봐 주어 조금은 나아졌다고 부사(府使)가 그러더군."

"아 예, 주천 현감 이동익이 또한 같이 등과했었지요. 아마 그래서일 겁니다."

김원준(金元俊}은 식년시 문과에 장원울 할 만큼 문장에 뛰어난 자질을 지녔으나 성격이 좀 괴팍했다. 같이 등과한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했고 처음 배속된 춘추관에서도 일찌감치 눈 밖에 나버렸다. 기사관(記事官)인 그가 종 5품인 기주관(記注官)과 의견 다툼을 벌여 결국 군기시(軍器寺)로 밀려나고 말았다. 춘추관에서 군기시로 밀려난 것은 엄청난    수모였다. 그의 아까운 문장이 아무런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어쨌든 그 후론 크게 각성을 했는지 정 8품 봉사(奉事)에서 직장(直長), 주부(主簿)를 거쳐 종 5품 판관(判官)까지 올랐다. 그러나 더 이상 관운(官運)이 없었던지 하필 그가 숙직을 서든 날 밤에 군기시에 불이 났다. 불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데 숙직은 그와 봉사 한 명뿐이었다. 다행히 조총을 만들기 위해 쇠를 녹이느라 밤을 새우던 십여 명의 주장(鑄匠)들과 관노들이 있었다. 놀라 뛰어나온 그들이 불을 끄려고 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물 몇 동이로 꺼질 불이 아니어서 불길은 계속 번져 시장(矢匠)들이 만들어 놓은 수천여 대의 화살을 태우고 말았다. 결국 불은 온 도성 안에서 몰려온 군사들과 백성들이 달려들어 껐다. 주위의 사람들은 김원준이 이번만은 무사하지 못하리라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두 품계만 깎여 원주 염초도회소(焰硝都會所)로 쫓겨 난 것이다. 김원준에게 죄를 주자면 사실 파직은 물론이요 장() 쉰 대에 원방에 부처 됨이 마땅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처벌이 가볍게 끝난 것이다. 뒤에 송수호가 들은 바로는 영의적 허적이 남인인 김원준을 살려주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면 품계를 깎는 것만으로도 벌을 준 것으로 할 수 있을 터인데 왜 원주로 좌천을 시켰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참 안된 일입니다. 듣건대 그 사람이 군기시에 있을 적에 화약 제조법을 스스로 터득했사온데 그 사람이 시키는대로 만드니 위력이 배가 되었다 하여이다."

"허허, 사람됨이 반쪽이면 재간이 배가 된들 무얼 하겠는가?"

성정이 괴팍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김원준을 반쪽으로 본 것이다. 송수호는 어순제에게 목례를 하고 돌아서 방금 그가 한 말의 뜻을 곰곰이 새겨보았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볕이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래저래 답답한 날이었다. 송수호는 소유(所由) 한복만의 죽음을 떠올렸다. 부하 중 한 명인 그는 눈썰미가 좋고 몸이 재빠른 사내로 십여 년을 고락을 같이 한 사이였다. 그날 밤 한복만이 어이없는 죽음을 맞은 것은 오로지 허견 때문이었다.

'내가 그놈을 너무 얕본 것이야."

송수호는 참았던 숨을 깊이 들이켰다. 애초에 이헌조로부터 허견의 뒤를 캐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놈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 화근이었다. 장안이 좁다 하고 설치는 난봉꾼 말썽쟁이의 뒤를 캔들 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엔 졸개 몇을 붙이라고 박일주에게 일렀었다. 보름쯤 뒤에 첫 보고가 올라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난봉꾼 치고는 발이 넓었다. 물론 거의 대부분 기생집이요, 소실도 큰 소실 작은 소실할 것없이 여러 소실 집을 번갈아 들락거렸지만 놈의 푼수로는 지나치다 싶은 집도 무시로 드나든다는 것이었다. 웬만한 벼슬로는 문 앞에도 못 갈 집들이었다. 개중엔 삼복이라 불리는 복평군(福平君), 복선군(福善君), 복창군(福昌君)의 집을 드나들더니 장안의 거부(巨富)로 알려진 수두 역관(首頭譯官) 장현(張炫)의 집도 몇 차례나 들락거렸다. 그것도 야심한 시각에 말이다. 그들을 만난 다음 날은 어김없이 다방골 기생집에 윤우(尹禹), 허서(許舒), 허영(許永)을 불러다 술을 마시며 귀엣말로 소곤거린다는 거였다. 박일주의 보고를 받은 송수호는 일이 약간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계속 그들의 동태를 지켜보라 일렀다. 그날도 박일주는 그의 심복인 한복만을 시켜 허겨의 뒤를 다르게 했다. 그리고 그날 밤이 한복남에게는 불행한 밤이 되었다.

전동(典洞) 장현의 집으로 들어간 허견이 몇 각이 지나지 않아 가마와 함께 대문을 나왔다. 그런데 지난번에는 없던 키가 큰 사내 둘이 가마 뒤를 따랐다. 초이레라 달빛이 희미한 가운데서도 사내들의 손에 든 몽둥이가 보였다. 열흘 전에도 지금처럼 허견이 가마와 함께 나왔었다. 한밤중의 가마가 이상하긴 했지만 상대가 허견이라 기생이나 첩일거라는 보고를 받은 박일주의 생각은 달랐었다. 장현의 집에 있던 기생이나 첩을 허견이 데리고 다닐 턱이 없으니 가마 속으 인물부터 파악하라는 지시였다. 그러고 보니 한복만 자신도 가마 속 인물이 궁금했던 것이다. 달이 밝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었다. 어두운 담벼락에 가리며 허견 일행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 얼마 후, 가마는 철물교(鐵物橋)에 이르렀다. 허견의 집이 있는 교동과는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이제 곧 왼쪽으로 꺾으리라.'

그러나 한복만의 생각과 달리 허견 일행은 왼쪽 길을 버리고 곧장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허견이 자기 집으로 곧장 들어갔었다.

'어랍쇼? 집으로 가질 않으시겠단 말이지?'

알 수 없는 그들의 행보에 한복만 역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가마는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오른쪽 길로 꺾었다. 한복만은 어둠을 이용해 거리를 좀 더 좁히기로 했다. 이제 곧 수표교(水標橋)가 나올 것이다. 이어 희미한 달빛 아래 다리가 나타나고 벙거지 쓴 두 놈이 가마에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허견이 나서 뭐라고 잠깐 주고받더니 벙거지가 일행을 향해 군례를 쩔꺽 갖다 붙였다. 순라꾼들이 허견을 알아봤구나 싶었다. 아니라면 통행패를 보였거나 탁배기 값이라도 쥐여줬을 터였다. 가마가 떠나자 이번엔 한복만이 다리로 다가갔다. 어깨가 딱 바라진 포졸 하나가 이건 또 웬 놈이냐는 듯 육모 방망이를 솜씨 좋게 공중에 한 바퀴 빙글 돌렸다. 그리곤 한복만의 코 앞에 바짝 다가서 행색부터 쓱 훓어 보았다. 맨 상투에 이마를 베수건으로 질끈 동인 꼴이 천상 상놈이라 만만한 김에 방망이로 명치를 툭 내지르며 이죽거렸다.

"이놈은 사흘을 굶었거나 아니면 미친놈이 분명하렸다. 지금이 몇 각인데 통금의 금법을 어기느냐? 이놈, 포청에 끌려가 볼기가 터져보겠느냐?"

옆에 있던 포졸놈은 한복만이 튈세라 실실 웃으며 앞을 가로막고 처음 놈은 방망이를 앞으로 쭉 뻗으며 가래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놈이 입에 엿을 물었나, 왜 말이 없어? 천상 매를 지고 다닐 놈이로세."

"이 시각에 급히 가는 걸 보니 어디서 투전판이라도 벌어진 모양일세."

"아니면 사흘을 굶어 남의 집 담을 넘으러 가거나."

아닐세, 굶은 놈이 아니야. 이놈 얼굴에 개기름 흐르는 것 좀 보게. 노름꾼이 적실하네."

"그렇다면 노름 밑천이라도 넉넉히 지녔겠군."

", 그야 그나마 없다면 밤손님이 틀림없을 테니 치도곤 맛을 뵈 줘야지."

이놈들의 수작은 항상 뻔했다. 인정전을 우려내려는 것이다. 허견의 일행이 저만큼 멀어지고 있어 더 이상 지채할 수 없었다.

", 끼놈들. 사헌부 소유 소임이니라."

박일주는 사헌부의 통행패를 놈의 코 끝에    바짝 갖다 붙였다. 놈이 미쳐 보기도 전에 뜨끔하여 긴가민가할 사이도 없는데 한복만이 급히 물었다.

"누구의 가마더냐? 가마 속은 보았느냐?"

"영상의 자제분이었습지요. 가마 속을 어찌 보잘 수 있습니까?"

방금 전까지 기세가 등등하던 놈들이 코가 빠져 고개를 숙이는 꼴리 가소로우나 엽전 몇 닢을 쥐여주고 얼른 가마 뒤를 쫓았다. 앞선 가마는 장통방(長通房) 초입에 이르렀다. 한데 이제껏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가던 가마가 갑자기 골목길로 꺾어 들었다. 행여 놓칠세라 한복만은 걸음을 더욱 재게 놀려 골목길 흙담 모퉁에 몸을 착 붙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골목 안을 가만히 살폈다.

'어랏?'

골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벌써 어는 집으로 가마가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아주 짧은 시각이었으니 골목 초입에 가까운 집이리라. 조심스럽게 좌측 첫 번 째 집의 동정을 살펴보았으나 조용했다. 다음 우측의 집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찰나에 한복만은 헉, 소리를 뱉으며 꼬꾸라져버렸다. 어두운 대문 기둥에 착 붙어 있던 놈이 몽둥이로 한복만의 머리를 후려친 것이다. 엎어진 한복만의 등짝을 한 놈이 콱 밟고 섰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했던 한복만이 일어나려고 버둥대자 놈이 밟고 있던 발을 들어 다시 콱 찍어 눌렀다. 한복만의 머리에서 솟은 피가 귓가에서 턱을 따라 주르륵 흘러내렸다. 보통 놈들이 아니란 생각이 든 한복만이 엎어진 채로 손을 슬그머니 허리께로 내려 비수를 뽑았다. 그리고는 필사적으로 몸을 튀틀어 등을 밟고 있는 놈의 정갱이를 확 그었다.

", 이놈 보게?"

한복만의 기습적인 동작도 빨랐지만 놈도 빨랐다. 번개같이 다리를 든 놈이 펄쩍 뛰어 한 걸음 물러났다. 한복만이 비수를 긋는 것과 동시에 벌떡 일어나 골목 어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마음 뿐이었다. 미처 두 발짝도 뛰기 전에 다른 놈의 몽둥이가 한복만의 정강이를 후려 친 것이다.

""

재깍!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한복만이 뒹굴었다.

"이놈이 우릴 우습게 보았군."

"어차피 우릴 봤으니 아예 명줄을 끊어놓는 게 좋겠지."

"그러려면 나으리 나오시기 전에 어서 없애버리자고."

키 큰 놈이 몽둥이를 치켜들려는데 다른 놈이 한복만의 비수를 집어들었다.

"이보게, 몽둥이에 피묻네. 이놈 칼이 어떤가?"

", 제놈 칼에 제가 죽는 것도 괜찮겠지."

칼을 받아 든 놈이 쓰러진 한복만의 가슴을 노리고 다가갔다. 고꾸라지면서 땅바닥에 입을 찧은 한복만이 입 안 가득히 피를 머금고 칼 든 놈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어둠 속에서 인광(燐光)을 쏘는 듯한 눈빛이었다.

", 이놈 눈길 보게?"

눈길이 영 못 마땅하게 찜찜한 키 큰 놈이 한복만이 허리 밑에 발끝을 넣어 휙 둘러 엎었다. 그리고는 두말없이 등줄기에 비수를 콱 박아버렸다. 한복만은 울컥 한 덩어리의 피를 쏟더니 땅에다 얼굴을 박았다. 그가 개죽음을 한 원인은 열흘 전 장현의 집에서 나오는 허견을 미행할 때였다. 용의주도한 장현이 가마를 떠나보내며 미행이 있나 숨어보게 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복만의 꼬리가 그때 잡힌 것이다.

"저기 나으리 나오시네."

골목 어귀에서 멀지 않은 집의 대문이 열리더니 가마가 허견의 뒤를 따라나왔다. 대문이 다시 빠르게 닫치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온 허견이 흠칫 놀라 발 밑을 가리켰다.

", 이것이 무엇이냐? 주 죽었느냐?"

"이놈이 지난번부터 가마를 미행한 놈이 올 시다."

"그렇더라도 죽일 것까지 있었느냐. 잡아다 배후를 불게 했어야지. 에잉, 쯧쯧."

"죽일 생각까지는 아니었습니다만...."

"그래 이놈이 누구더냐? 호패가 있는지 뒤져보았느냐?"

미쳐 그 생각을 못한 놈들이 황급히 엎어진 한복만의 허리께를 더듬어 반 뼘 길이의 나뭇조각을 바쳤다. 흐린 달빛에 한참을 이리저리 비춰보던 허견이 깜짝 놀랐다.

"나으리 왜 그러시옵니까?"

', 일은 큰일이로세. 아니 이놈들아, 사헌부 관원을 도륙 내면 어쩌느냐? , 이거."

놀라기는 호위무사 두 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죽일 이유가 분명했다는 듯이 얼른 둘러 대기를,

"이놈이 가마에 은덩이가 실린 걸 알고 있기에 놀라서 빨리 입막음을 한다는 게 그만 이렇게 되었습죠."

"뭬야? 은덩이가 실린 걸 이자가 알더란 말인가?"

"그렇습지요. 이자가 사헌부의 관원이라면 더욱 뻔한 일 아닙니까?"

"그럴 리가 없느니. 이는 우리 말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야."

"나으리, 그건 나중에 생각하실 일입니다. 순라가 올지 모르니 우선 자리를 뜨시지요."

"옳은 소리로다. 어서들 가자."

허견이 가마꾼의 입단속을 하며 일변 빨리 갈 것을 닥달하였다.골목을 나와 왔던 길을 버리고 태평방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예 돌아서 가려는 것이었다.

그날 밤, 장통방에서 가까운 복처(伏處)는 영희전 (永禧殿) 못미쳐 좌로 저동(苧洞) 골목과 우로는 초동(草洞) 다리 옆이었고 위로는 수표 다리였다. 수표 다리에 있던 벙거지 두놈이 순라 교대를 하여 어슬렁거리며 영희전을 바라고 오고 있었다. 장통방 큰 길 사거리 못 미쳐 한 놈이 소피가 마려웠다.

"잠시만 기다리게. 볼 일 좀 보고 가야겠네"

'친구가 장에 간다니 그럼 나도 좀 뽑고 갈까?"

두놈이 골목길로 접어들어 고의를 까내리고 담벼락에 시원스레 볼일을 보는데 안 쪽에 선 놈의 바짓가랑이를 누가 잡아당겼다. 아니 누가 당기는 것 같아서 아래를 흘깃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심장이 덜컥 멈추며 정수리까지 화끈했다.

","

사람이다 싶은 순간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려는데 가랭이를 잡은 손이 놓지를 않아서 그만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방금 제가 눈 오줌 자리에 알 궁둥이를 박고는 손을 정신없이 내 둘렀다. 어둠 속에서 허연 물체가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다니 환장할 일이었다. 옆에서 같이 소피를 보던 놈도 놀라서 오줌발이 뚝 끊겼다.

"어이, , 이것..."

", 그게 뭐야? 사람이잖아?"

"이 이것이 내 바짓가랭이를 잡고 있네."

오줌을 누다 만 옆의 놈이 고의춤을 잔뜩 움킨 채 엉거주춤 고개를 숙여 허연 물체를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넨장, 이런 변이 있나. 등짝에 칼을 맞았네그려."

"살변 (殺變)났군. 재수 옴 붙었구만."

넘어졌던 놈이 바짓가랑이 잡은 손을 간신히 부리치고 일어나 고의 를 여미며 투덜대었다. 그러나 가까이 들여다보던 놈이 머리를 저었다.

"아직은 아닐세. 숨이 붙어 있네. 가만,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살범(殺犯)을 가르쳐 줄 모양일세. 잘 들어보게."

"가마 속에 은덩이, 가마 속에 은덩이가..."

등짝에 칼이 박힌 채 엎드려 죽어가던 한복만이 필피를 입에 물고 계속 같은 소리로 웅얼 거렸다.허견과 호위꾼 놈들이 하는 말을 정신 줄 놓지 않고 들은 것이다. 그러나 가마 속인지 아마송인지 알 수 없는 소리였다. 같은 말을 한두 번 더 뱉은 한복만이 조용했다. 절명한 것이다. 귀를 가까이 하여 엎드려 있던 놈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무슨 소리였는지 이리저리 궁리를 하더니 침을 탁 뱉었다.

"니미랄,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있나?"

"? 무슨 소리를 못 들었단 말인가?"

"개가 소 말하는 걸 낸들 어떻게 알아듣나?"

"대강이라도 알아들었겠지. 들은데로 읊어보게. 내가 새겨 봄세."

"대강이고 소강이고 없다니까 그러네. 그냥 아마송 엉덩이 아마송 엉덩이 이랬다니까. 이게 사람 소린가? 개가 여물 씹는 소리지?"

"아마송엉덩이 아마송엉덩이라....아마도 엉덩이에 깔려 죽었다는 말 아닐까?"

"시끄러워. 얼혼이 나가자빠진 주제에 농()이 나오나? 까짓, 우리야 알바없으니 가서 장교님께 적경이나 알리세. 범자(犯者)가 멀리 도타하기 전에."

이튿날인 초 이레 아침이었다. 우포청에서 죽은 자의 신원이 쉽게 밝혀졌다. 간밤에 살인 현장을 제일 먼저 발견했던 순라꾼이 날이 밝자 죽은자의 행색을 알아 본 것이다. 그들의 말을 취합해보니 죽은자는 사헌부의 관원이랬다하여 사헌부로 사람을 보냈다. 사헌부가 발칵 뒤집힌 것은 물론이라 감찰 박일주가 부하 두엇을 데리고 나타났다. 시체를 보니 한복만이 틀림없었다.박일주는 목구멍에서 뜨거운 기운이 울컥 올라왔다. 우포청의 종삳관(從事官)인 오일중(吳一中)을 만난 박일중이 수인사를 마친 후 말했다.

" 종사관, 현장을 목도한 병졸을 좀 만나보았으면 합니다."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허나, 만나보셔야 신통한 대답은 못 들으실 겝니다. 발견했을 당시까지 숨이 붙어 있어 무슨 말을 들었다는 놈들이 횡설수설하니 말입니다. 놀라 실성을 한 겐지, 허허, 외설(猥褻)만 늘어놓으니 원."

한복만 이 죽기 전에 말을 남겼다니 분명 중요한 단서나 유언 일시 분명했다. 허견을 미행하다 벌어진 일이니 그놈들 짓일 터, 찌른 놈이 누구라는 것을 말했을 것이었다. 그런데 횡설수설은 뭐며 외설은 또 무슨 소리인가? 종사관이 포교에게 두 졸개를 불러오라 이르고는 처으로 사라진 한참 뒤에 나타난 술레기들의 말이 이랬다.

"그게 말입지요. 아까 종사관님에게도 소인이 들은 그대로 고했습지요. 분명히 '아마송응덩이 아마송응덩이' 이랬다니까요. 틀림없이 그 소리였습지요."

"그 말 말고는 아무 말이 없었느냐?"

그러지 않아도 포교에게 고했다가 아마송인지 애미손인지 잘 새겨듣지 못했다고 엉덩이를 걷어 채이고 종사관에게 호령을 들은지라 놈이 삐딱하게 나왔다. 생각해보니 제 직속상관이 아닌 것이다.

"나리, 있었다면 고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지요. 아마송인지 애미손인지 엉덩인지 궁둥인지 소인이 어찌 알겠습니까? 벙어리 횟배 앓는 소리를 하고 죽은 망자나 알겠습지요."

"죽은 사람이 사헌부의 관원인 것은 어찌 알았느냐? 지닌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데?"

그건 .... 죽은이를 수표 다리께서 기찰을 했사온데 그때 봤습지요. 사헌부에 있노라며 통 행패도 보였습지요.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을 기찰하기 전에 분명히 가마를 앞세운 양반을 보았겠구나."

", 가마라 굽쇼? 소인들은 못 봤습니다. 가마는커녕 개미 새끼도 못 봤습니다."

박일주가 사헌부의 물을 먹은 세월이 있는지라 두 놈의 말하는 거조를 보니 틀림없이 숨기는 것이 있었다. 이놈들 하는 마음으로 슬쩍 찌러보기로 했다.

"여긴 아무도 없으니 말해도 될 것이야. 너희 종사관에게도 가마나 양반 얘기를 안 한 것이 내 눈에 다 보이느니라. 어떠냐?

두 놈이 다 흠칫 놀라는 것이 분명하나 겉으로는 끝까지 모르쇠였다. 어깨가 딱 바라진 놈이 팔꿈치로 옆엣 놈의 옆구리를 쿡 지르자 맞은 놈이 깜짝 놀라 목청을 높였다.

"못 봤다면 못 본 겁니다 나으리."

역시 숨기는 게 있다는 느낌을 받은 박일주는 말없이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불거진 광대뼈에 볕에 그을려 새카만 얼굴들, 추레한 벙거지에 더그레 자락은 쥐어짜듯 구겨졌고 걷어올린 저고리 소매는 땀과 콧물을 닦아 걸레가 다 되었다. 고의 또한 낡아 무릎이 얼비치고 맨발에 짚새기를 신은 모습이 후줄근하기 짝이 없었다. 차마 보고 있기가 곤혹스러울 지경이라 박일주는 눈길을 거두었다,

"됐다. 통행 패 없는 양반을 통과시킨 죄 때문이겠지. 어쨌든 우리 사헌부의 일로 간밤에 고생들 했다. 이만 가 보거라. 그리고 이건, 집에 들어갈 때 좁쌀이라도 사서 들어가거라."

허리춤에서 엽낭(葉囊)을 끌러 한 꿰미씩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문 밖에 있던 수하들을 불러 한복만의 시체를 인수하라 이르고 포도청을 나섰다. 한 냥이면 쌀이 서말이다. 얼결에 많은 돈을 받은 포졸들이 돈꿰미를 몇 번이나 들여다보다가 서로 눈길이 마주쳤다."이건 도리가 아니지 않나?"

"그러게 말일세. 이럴 순 없지."

"가세."

두 놈이 포도청을 나와 저만큼 걸어가는 박일주를 죽어라 좇았다.

"나으리 말씀 올립지요.돈을 받아서가 아니라 아무도 관심 없는 소인들의 살림살이를 나리께서 짐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봤습지요. 영상의 자제분이었습니다. 지나 간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겁을 주기에 그러마 했사옵니다. 죽은 나으리도 가마 속을 봤느냐고 물었습지요만 가마 속은 보지 못했습니다. 보잘 수가 있어얍지요."

"고맙다. 너희 종사관에게 나 역시 비밀로 하마."

한낮에 접어들자 다시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길가 느트나무에서 매미가 극설스럽게 울기 시작했고 그늘에는 갈비뼈가 앙상한 개 한 마리가 널부러저 헐떡이고 있었다. 하늘엔 구름 한 조각 보이지 않았다. 박일주는 소매 속에서 수건을 꺼내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아마송응덩이, 아마송응덩이라.... 무슨 말을 하려던 걸까?'

다시금 등짝에 칼을 맞은 한복만이 떠올라 괴로웠다. 시체는 부릅뜬 눈과 입이 피투성이로 벌어져 있었다. 앞니는 부러져 보이지 않았다. 부러진 앞니까지 생각하던 박일주가 문득 집히는 바가 있어 가던 길을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이빨 없는 입에 피를 가득 물었다면 말이 제대로 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아마송이란.... , 가마, 가마 속이로구나. 그렇다면 어젯 밤도 가마를 미행했다는 애긴데...가마 속하고도 응덩이라? 가마 속이 아마 송이면 응덩이는 은덩이란 말인데.... 가마 속에 은덩이가 실렸단 얘기가 아닌가? 이거 무슨 일이 있고나. 빨리 나리께 알려야겠군.'

무더위 속을 적선방(積善坊)까지 쉬지 않고 걸어온 박일주느 땀으로 목욕을 한 듯했다. 박일주는 송수호에게 일의 시말을 소상히 알렸다. 말없이 듣고만 있던 송수호가 눅눅한 음성으로 박일주에게 말했다.

"가마에 은자라.... 잘 알아 들었네. 자네는 관원들 데리고 한복만의 장례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힘을 써주게나. 집의 영감께는 내가 고할 터이나 사헌부 관원 모두가 나서 장례를 도울 것일세."

", 나으리. 그리합지요. 헌데 우포청에서 살범을 잡기 전에 우리가 먼저 손을 써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설령 대사헌 대감의 지시가 있대도 살인범을 추적할 생각은 말게. 따로 생각이 있네. 범인은 오늘 내로 각 처에 손을 쓸 걸세. 허면, 포도 대장도 종사관도 모두 남인 일색이니 포도청에서는 못 잡네. 아니, 안 잡네. 뿐인가? 사헌부 내에서도 적극 나서지 않을 것이야. 지금껏 아무런 지시가 없는 걸 보게. 대사헌도 영상 사람이 아닌가? 보나 마나 금일 새벽에 전갈이 있었거나 아니면 영상과 밀담을 나눌 게야."

"그래도 사헌부의 관원이 척살(擲殺)을 당했으니 상소(上疏)라도...."

"상소? 누가 상소를 올린다는 게야? 상소를 올려봤자 소용없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면 차라리 내가 직접 견이란 놈을 만나보는 게 나을 것이야. 허견이 지금 어디에 있나 졸개들을 풀어 알아봐 주게."



허견은 교동 자신의 집에 있었다. 사헌부 송수호의 내방을 알리는 청지기의 전갈에 흠칫 하긴 했어도 헛기침을 뱉으며 객을 맞았다.

"사헌부 지평, 송수호라 하오. 몇 말씀 나눌 일이 있어 왔소이다."

대개의 경우 손 윗사람이거나 자신보다 품계가 높은 객이 내방을 하면 상석을 양보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의건만 허견은 아예 그럴 생각이 없었다. 어젯밤 일이 어찌 이렇게 빨리 탄로가 났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사헌부 놈이 올 일이 없는데 하는 생각으로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볼 뿐이었다.

"지평 나으리는 알고 있소이다. 영상 대감의 옆집에 살고 있지 않소이까? 허허."

"간략하게 말하겠소. 우리 사헌부에서는 당신의 여자 문제에 추호의 관심도 없소. 또한 어디의 금송(禁松)을 베어 집을 짓는지 영남 배부자의 재물을 실어 어디로 오는지 알 바가 아니란 말이요. 우린 이미 그 일은 손을 뗐다는 말이외다."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새겨듣지 못하겠소이다. 허면?"

"어젯 밤 사헌부의 관원이 타살된 것 역시 상소로 괴롭힐 생각을 갖고 있지 않소이다."

"잠깐, 타살? 누가 타살되었단 말이오이까? 상소란 또 무엇이오이까?"

"그러니, 다만."

차분하게 말을 잇던 송수호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임과 동시에 한 손으로 방바닥을 탁 소리나게 내리쳤다. 동시에 가득이나 켕기는 바가 있던 허견이 움찔했다.

", 놀래라. 이거 어디서 누구에게 하는 행패요? 좋소이다. 다만 무어요?"

서로 간에 막말이 되며 갑자기 공기가 험해졌다. 막다른 골목에 쫓기고 있음을 재빨리 감지한 허견이 뱃포를 내보이자는 수작이었다. 그런 허견을 지긋이 노려보던 송수호가 말을 이었다.

"다만, 어젯밤의 살인자는 반드시 내 손에 넘경 할 터. 산 놈이던 죽은 놈이던 그건 상관 않겠소. 내 수하의 원수만 갚으면 될 터이니."

", 이거야 원, 귀신이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니    알아들을 재간이 있나?"

"귀신끼리 말이 안 통했을 리가 있나. 잘 새겨 들었을 테니 이만 가겠소."

허견의 집 대문을 나선 송수호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살인범을 잡겠다고 소란을 부려야 아무런 소용이 없을 터였다. 뚜렷한 물증이 없으니 오히려 허견을 미행케한 이헌조와 자신의 입장만 난처해질 뿐일 것이다. 설혹 살인자를 잡아 자백을 받는데도 허견은 모르쇠로 일관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복만은 어디까지나 허견의 축재나 여자문제를 캐다가 죽은 것으로 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한복만은 죽었다. 이제까지의 모든 일은 역모를 밝히는데 있지 아니한가? 더 큰 것을 밝히기 위해 한복만의 죽은은 감수하기로 하자. 한복만의 원수를 갚는 선에서 이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놈에게 이 정도 선에서 물러난 척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이제부터 허견은 바빠질 것이다. 영상인 제 아비는 물론이요 요로 요로 남인 세도가들을 찾아가 손을 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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