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설

송원일 서장(序章) 5. 송윤호

fiction-google 2024. 5. 7. 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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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송윤호

"어머니, 편히 주무셨는지요?"                                                                                                                                                                                        ", 잘 잤네. 어젯 밤엔 늦었나 보더구나."

", 동료들과 술을 한잔하느라고 늦었습니다"

"그래 잘했다. 그 사람들도 고생이 많을 게야."

어미 한 씨가 송수호가 건네는 인사를 받는 한편, 자고 있는 손자에게 눈을 돌리며 한껏 웃음을 머금었다.

"아이고 이 녀석은 먹고자고 먹고자고 잘도 자는구나"

자는 아이의 포대기를 여미는 손길이 그렇게 애틋할 수가 없었다. 한 씨에게는 이제 겨우 여섯 달 지난 손자가 자신의 목숨보다 중했다. 자신의 나이 쉰일곱에 돌도 지나지 않은 손자인 것이다. 사실 손자는 일찍 봤었다. 열아홉 살에 낳은 아들인 송수호가 스물 둘에 장가를 가서 낳은 손자가 있었다. 그 후에 손녀도 하나가 있었으나 지난 정미년(丁未年)에 마마로 둘을 앞세운 것이다. 그러고는 그만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한 씨는 물론이요 송수호의 아내 또한 애가 타서 십여 년을 정화수 앞에서 숱하게 빌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송수호도 더 이상 자식이 없자 팔자려니 단념하고 동생 윤호의 장남을 양자로 들이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런데 아내가 덜컥 아이를 가졌다. 달이 차서 낳고 보니 아들이었다. 송수호나 아내의 기쁨도 컸지만 할머니 한 씨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절망적일 때 집안의 장손이 태어난 것이다. 게다가 며느리는 아들보다 한 살이 많으니 서른아홉에 순산을 했고 젖도 부족하지 않았다. 조상의 은덕이라 믿었다. 서른아홉이면 손자를 보고도 남을 나이 아닌가? 실낱같은 희망 끝에 얻은 손자가 혹여 잘못될세라 한 씨는 지극정성을 다했다

"어머님 밥상 들입니다."

마루에 올라선 송수호의 아내가 부엌 어멈에게서 밥상을 받아 방으로 들였다. 먼저 남편에게 외상을 들이고 시어미와 자신의 겸상이었다. 시어미 한 씨의 밥에만 몇 알 쌀알이 보일뿐인 꽁보리밥이었다. 푸성귀 김치에 된장국을 마주한 송수호는 달게 수저를 놀렸다.

"내겐 밥이 너무 많구나. 어멈아 이 밥 애비에게 좀 덜어라."

"아이, 어머님 그냥 드세요. 밥은 부엌에 더 있어요.

"아니다. 속이 좋지 않아 그런다. 어서 좀 덜어라."

송수호가 급히 손사래를 치며 어머니 한 씨에게 밥그릇을 얼핏 들어 보였다.

"저도 밥이 남게 생겼습니다. 어머니. 물 말아 천천히 드세요."

"아니야. 일하는 젊은 사람이 많이 먹어야지 노는 늙은 내가 많이 먹어서 무얼 해? 게다가 굶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데..."

밖에서 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이어 가노(家奴) 말득이가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님, 미동(美洞) 작은 서방님 오셨습니다."

방문 가까이 있던 송수호의 아내가 문을 열고 반갑게 시동생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작은 서방님."

"형수님, 안녕하신지요? , 형님도 안녕하시지요? "

"어서 오너라."

방에 들어서자 어머니 한 씨에게 절을 하려다가 크지 않은 방에 사람과 밥상이 있고 한 쪽엔 어린 조카까지 누워있어 사정이 여의치 않음을 알았다.

"어이구, 어머니 절 받은 걸로 하시지요"

"얘야 됐다, 밥상 받아놓고 절 받으면 그게 절이냐, 제사지."   

"우리 어머닌 농담도 잘하시네... 허허

"식전이실 터이니 제가 밥을 갖고 올테니 좀 드세요."

"아 아닙니다 형수님, 먹었어요."

형인 송수호의 옆에 조여 앉은 송윤호는 형수에게 손을 저어 말리는 한편 소매 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지난번 부탁하신 진하사(進賀使) 명부입니다."

"용케 구했구나. 그래 사신들은 언제 떠난다 하더냐?"

"칠 월 스무여드레라 하더이다."

"엿 새 남았구나."

밥상을 물린 후 급히 봉투 속의 명부를 훑어 내리던 송수호가 쩝 하고 쓴 웃음을 지었다.

"왜 그러시는지요, 형님."

"아니야, 내 이미 이놈이 갈줄 알았느니..."

"누구 말씀이신지요? 정사, 부사, 서장관이 모두 영상이 천거한 인물이라 하더이더만 이들을 말함인지요?"

"아니라니까. 너는 알 것 없다. 며칠 후에 여길 다시 한번 와야겠다. 엿새 뒤가 좋겠군. 그때 너와 의논을 할 일이 있다."

"엿새 뒤면 스무여드레 아닙니까? 진하사가 청나라로 가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요?"

"그렇지 않아. 그날이 비번 날이니 너와 술도 한잔 마실 겸 해서야."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어머니, 며칠 후에 다시 들리지요. , 애 애미가 어머니 드시라고 굴비를 몇 마리 쌌더군요."

"며칠 전에는 언년이 서방 시켜 닭을 보내더니만 오늘은 애비 손에 굴비를 보내다니 하늘 보기 무섭다. 보리죽도 고마운 시절에... 담엔 제발 그런 것 갖고 오지 말아라. "

", 효도하고 뺨 맞네. ! 그냥 갈 뻔했네. 우리 장손을 보고 가야지."

형과는 달리 활달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송윤호는 예조(禮曹)의 좌랑(佐郞)으로 있었다. 그는 형인 송수호 보다 두 살 아래인 갑신(甲申) 생으로 36살이었다. 그 또한 몰락해 가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죽어라 과거 공부에 매달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이어 몇 달 후에 또 형인 송수호가 대과에 급제하니 비로소 집안에 서광이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은 가족들에게 커다란 슬픔만 남겼다. 시묘(侍墓) 살이 하는 형의 뒷바라지와 집안의 식솔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그는 한양과 선산(先山)이 있는 용인을 수도 없이 오가며 삼 년을 견디었다. 이윽고 탈상(脫喪)이 되고 형이 벼슬을 살기 시작하자 어느 날 갑자기 금강산을 둘러보겠다고 하였다. 어미와 형이 객지의 고생스러움을 일깨우며 말렸지만 그냥 떠난 것이다. 그때가 꼭 십 년 전인 기유(己酉) 년으로 팔도가 다 가물어 큰 흉년이 든 해였다. 조선의 역사상 최대의 흉황으로 이어지는 경술(庚戌) 신해(辛亥) 년의 이른바 경신(庚辛) 대기근(大飢饉)의 전조(前兆)를 보여주는 해였던 것이다. 이런 흉년에 길을 떠났다는 것부터 송윤호의 험난한 고생을 예고하는 일인지 몰랐다. 흥인문(興仁門)을 나서 도봉(道峯)에 이르자 벌써 백성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추수를 시작할 때인데도 거두어들일 것이 없었다. 길가의 논에는 쭉쟁이 뿐인 벼 이삭이 고개를 들고 있고 배고픈 아이들이 메뚜기를 잡으려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길양식으로 챙긴 좁쌀 두어 됫박일망정 그런 아이들에 주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으나 그것으로 될 일이 아니니 외면하고 말았다. 다락원과 포천 영평을 거쳐 철원에서 김화를 바라고 걷던 어느날, 송윤호는 길을 잘못 들어 사곡이란 동리에 이르렀다. 마을 사람에게 들어서 잘못 된 길임을 알았지만 돌아 나오기엔 이미 해도 기울어 난감하였다. 할 수없이 한 집에 헛간이라도 빌리려 했지만 거절을 당했다. 이 동네는 산골이라 그나마 다른 지방보다 가뭄이 덜해서 논밭의 작황이 비교적 괜찮은 편인데도 인심만은 고약했다. 재워 줄 방도 헛간도 없다는 것이었다. 한두 집에서 툇자를 맞자 속에서 욕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이번엔 제일 크고 번듯한 집을 찾았다. 이십여 호가 모여 사는 촌구석 동리라 전부가 초가집이어서 그중 큰 집을 고른 것이다. 고른 집이 비록 지붕은 초가일망정 제법 사방에 토담도 두르고 대문도 큼지막하였다. 송윤호는 큰소리로 하인을 불렀다.

"이리 오너라."

이 동리 사람이라면 이 집 주인에게    감히 <이리 오너라>라고 말할 사람이 없는 것을 아는지 금세 달려온 계집아이가 대문 틈 사이에 눈을 박으며 물었다.

"뉘신지요?”

"날이 저물어 하룻밤 신세를 질까 하는 과객이니 안에 연통을 하거라."

"잠시 기다리세요

머뭇대던 계집아이가 쪼르르 달려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걸걸한 소리가 들려왔다.

"춘보야. 춘보 이놈 어디 있느냐? 아니? 네년 애비는 어디 가서 자빠져 있느냐?"

"애비는 논에서 아직 안 왔는데요."

"그래? 그럼 언년이 네가 가서 빈방이 없다고 해라."

"니예...."   

다시 쪼르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야무지게 들은 것을 토해 놓았다.

"나리께서 빈방이 없다 하라십니다."

이미 주인이 아이에게 이르는 소리를 들어 축객하는 것을 아는 송윤호는 발길을 돌렸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타향이라 갈 곳이 막막하였다. 마을 어귀를 향해 얼마를 갔을 때 앞에서 워낭 소리가 들리더니 소를 앞세우고 지게에는 마른 콩대를 산더미같이 짊어진 장정이 오고 있었다. 송윤호는 속으로 <이놈이 논에서 안 왔다는 하인이구나>생각하다가 달리 마음을 먹기로 하고 하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하인이 아까 그 집의 대문에 이르자 계집아이가 먼저 대문을 열고 소 고삐를 건네 받더니 외양간으로 가는 것이었다. 송윤호는 하인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열린 대문으로 들어가 사랑으로 짐작되는 방 앞에 섰다. 그리고는 큰 기침을 한 번 한 후에 낮은 소리로 말하였다.

"주인장. 조금 전에 축객을 당했던 길손이외다. 한마디만 하고 물러가겠소."

뜻하지 않은 말이 문 밖에서 들리자 깜짝 놀란 주인이 방문을 열었다. 방안을 얼핏 보니 중갓을 쓴 어떤 객과 주안상을 마주하고 있었던 듯 하였다. 나이 쉰이 될까 말까 한 주인이란 사람은 무명 창의를 입고 탕건을 쓰고 있었는데 풍성한 수염과 함께 틀이 제법 볼 만 하였다. 계속하여 송윤호가 주인에게 말했다.

"만약, 주인장이 한양의 내 집에 하룻밤 유숙을 청했다면 나는 차마 축객을 못했을 것 같소이다. 초가삼간인 내 집도 그러려니와 형편이 넉넉해 뵈는 집에서 축객이란 웬 말이오이까?"

뜨악한 표정으로 송윤호를 바라보던 주인이 방안의 객을 한번 돌아보더니 선선히 말하였다.

"축객이라니 당치 않소이다. 선객이 있어 그리 되었으니 해량(海諒) 하시지요."

"선객이라... 사정이 그래서 그랬다면 해량 뿐이오이까? 시생은 차라리 산에서 노숙을 하다가 범에게 물려 가지요. 실례를 범했소이다. 이만 물러갑니다."

송윤호의 말에 다시 한 번 방 안의 중갓을 쓴 객을 돌아보던 주인이 급히 손을 젓더니 급기야 마루로 나와 돌아서는 송윤호의 소매를 잡았다.

"축객으로 길손이 호랑이에게 물려 간다면 나는 또 어찌 되겠소이까? 이거야 원... 천하에 죽일 놈을 만들 길손이구려."

"그렇다고 어찌 배고픈 범의 밥을 빼앗으려 하십니까?”

"핫 하하, 피장파장에 재담(才談)이 또 보통 아니구려. , 안으로 드시지요."

송윤호가 비록 좋은 옷은 못 되나 소매가 넓은 무명 도포에 통영 큰 갓을 쓴 말쑥한 한양의 양반이라 시골의 어느 토호보다 모양새가 있었다. 게다가 나이는 젊으나 생김이 듬직하고 말씨가 점잖으니 누구든지 쉬운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래서인가 먼저 온 선객이란 중갓쟁이가 흘깃흘깃 눈치를 보더니 급히 자리를 송윤호에게 양보를 하고 아랫자리로 내려앉았다. 중갓을 이미 본 송윤호 또한 당연한 일인 양 말없이 그 자리에 앉았다.

"소인은 윤근(尹根)이라 하옵고 양주에 거()합네다."

중갓쟁이 윤근이란 사내가 싹싹하게 자기를 소개하더니 양손을 마주하여 손바닥을 싹싹 비벼대었다. 나이는 주인과 비슷한데 약간 아기뚱하고 가볍게 생겼으나 악한 곳이 없는 얼굴이었다.

"한양 사는 유학 송윤호라 하오. 아직 학생이지요. 금강산을 둘러볼 작정으로 집을 나섰다가 길을 잘못 들어 주인장의 신세를 지게 되었소이다."

송윤호는 자신을 소개한 뒤에 술상과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중갓쟁이인 나그네에게는 분에 넘치는 술상에 안주였던 것이다. 눈치를 모를 주인이 아니었다.

"허허 인사가 늦었소이다. 참봉(參奉) 허봉구(許奉九)라 하오이다. 내 이 사람과 사주를 논하고 있었지요. 아니지. 이 사람의 사주풀이를 듣고 있었다고 해야겠구만... 하여튼 내 평생에 이렇게 용하게 맞추는 사주쟁이는 듣도 보도 못 했소이다."

    주인장의 말인즉슨 윤근이 팔도를 떠돌아다니는 사주쟁이로 우연히 자신의 집에 하루 묵게 되어 사주를 보았는데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기가 막히더라는 것이었다. 이어서 부인과 딸의 사주를 보니 지난 일을 다 맞추어 혹시 집안의 내력을 어디서 듣고 온 것은 아닐까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엔 조부의 사주를 보였더니 그것도 본 듯이 맞추었단다. 이곳에서 살지도 않으셨고 4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조부의 모든 것을 말이다.

"살다 살다 이렇게 용한 사주는 처음이외다. 송유학이라 하셨지요? 어떻소이까? 송유학께서도 사주를 한번 풀어보심이?"

"허허 저는 워낙 점이나 사주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이라... 사양하오이다."

"보기 전엔 나 또한 그러했지요. 그러나 사주를 보고 나서는 믿지 못한다는 말을 못 하겠습디다그려."

"설령 홍계관(洪啓寬)이 살아온데도 사주는 사양하리이다. 사주로 무얼 맞추겠소? 설령 사주에 팔자가 맞다면 그 팔자대로 살면 그뿐, 그 또한 알아 무얼 하겠소이까?"

주인과 새로 온 객인 송윤호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윤근이 홍계관이란 말이 나오자 눈을 반짝이며 잔기침을 했다.

", , 방금 유학께서 홍아무게의 말씀을 하셨는데 만약 홍 아무개가 아들의 사주를 보지 않았다면 그 아들의 목숨을 보전했으리까?"

세조 때의 유명한 사주쟁이 홍계관이 자식의 사주를 보았더니 십 년 후에 참수형을 당할 팔자였다. 그 후 어느 자리에서 수양의 측근인 홍윤성의 사주를 보았더니 십 년 후에 형조판서가 될 팔자라 자식의 목숨을 미리 빌었다. 그 후 수양이 왕위에 오르고 홍윤성이 형조판서가 되니 홍계관의 사주가 다 맞았다는 얘기였다. 송윤호는 애초부터 사주나 점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이라 윤근이 무슨 소리를 해도 관심이 없었다. 다만 해는 저서 어두운데 인삿말로라도 저녁밥 먹어보란 말 한마디 없는 것이 괘씸할 뿐이었다. 게다가 가물거리는 등잔불만 켜 놓고 사주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주인을 보니 아예 저녁밥은 없는 것이 틀림없었다. 윤근이 송윤호에게 말을 걸어보았으나 대답이 없자 또다시 사주를 들먹였다.       

"유학 나리께서 조금 전에 호랭이 얘기를 하셨는데 나으리의 사주가 호환을 당할 팔자가 아니라면 산이 아니라 호랭이 굴 앞에서 노숙을 할지언정 죽지 아니할 것입네다. 또 호환을 당할 사주라면 그냥 당하느니, 당할 때 당하더라도 미리 몽둥이라도 챙기는 것이 나을 터이지요. 그래서들 사주를 봅지요. 사주란 미리 알아 나쁠 것이 없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 올시다."

듣고 보니 윤근의 사주를 믿지 못한다는 뜻으로 말을 한 것이 되어 약간은 미안한 심정이 되었다. 내가 안 믿으면 그뿐인데 사주쟁이를 폄하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사주로 무얼 맞추겠나란 말은 미안하게 되었소. 워낙에 점이고 사주고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그리되었소."

"하하하 유학 나으리께서 이리 선선히 사과의 말씀을 하시니 오히려 황공합네다.    소인은 여지껏 미안이니 잘못이니 하는 양반네는 세상에서 본 적이 없읍네다. 그래서 더욱 황송하굽쇼. ."

윤근으로서는 양반 체모의 송윤호가 한갖 중갓 짜리인 자신에게 시원스레 사과를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래서 그런지 연신 고개 방아를 찧으며 싱글거리던 윤근이 송윤호를 돌아보며 새로운 제안을 내었다.

"이러면 어떨까요? 유학 나으리의 사주를 제가 풀어 단 한 가지라도 틀리는 것이 있으면 소인이 금강산까지 길양식을 지고 나으리를 모십지요. 물론 길양식도 소인이 마련하겠습네다."

윤근의 갑작스런 제안에 무어라 할 말을 못 찾은 송윤호가 잠시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앞에 앉아 있는 허참봉은 무엇이 좋은지 빙긋이 웃고 있었다.

"오늘 어쩌다 길을 잘 못 들 때부터 내 사주가 꼬인 것 같소. 이제껏 사주 얘기 말고는 들은 말이 없으니 말이외다. 허허."

"유학께서 이곳에 앉아 계시는 것도 이미 사주에 들어있기 때문이겠습지요."

종일을 걸어와 피곤하고 배도 고픈 송윤호가 어디라도 좀 누웠으면 싶은데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인 허참봉은 기어이 사주 뿌리를 뽑으려 덤볐다.

"허허허, 술사(術士)가 송유학의 사주를 딱 맞춘다면 내가 상으로 베 한 필을 내지. 송유학이 만약 맞지 아니한다고 하면 그때는 술사 말대로 하면 될 터이고... 송유학. 송유학의 생각은 어떻소이까?"

"좋소이다. 다른 것이야 모르겠고 시생의 사주가 오늘 밤 과연 밥을 굶을 팔자인지는 알아보고 싶소이다."

"으앗하하, 자린고비 짓이 탄로가 났구려. 그러나 시생 또한 석식 전이니 밥은 곧 들일 겝니다."

그제서야 허참봉이 방문을 열고 저녁밥이 늦다고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야단을 맞은 종이 부엌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밥상 두 개가 들어왔다. 하나는 주인 허참봉의 것이고 하나는 윤근과 송윤호가 먹을 겸상이었다. 주인의 밥상엔 쌀이 나우 섞인 보리밥과 된장국에 나물에 북어무침이 올라있고 송윤호의 밥상엔 보리밥에 달랑 된장국과 간장 한 종지만 올랐다. 그러나 이것저것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보리밥을 된장국에 말아 맛있게 먹고 나니 더 부러운 사주나 팔자도 없었다.

"참으로 잘 먹었소이다. 과시 내 사주에 오늘은 인덕 있는 주인장을 만날 팔자였던가 보오이다."

"찬이 없어 면구하나 객이 들면 행랑에 잠잘 곳만 지시하는 풍습인지라... 아랫 것들도 으래히 그런 줄 아오이다."

"만 번 이해 하오이다. 사돈이 오지않은 바에야 금년 같은 흉년에 길손에게 밥 대접이 웬 말이겠습니까. 고맙게 생각하오이다."

"해량해 주시니 오히려 시생이 부끄럽소이다. 허허."

상을 물린 후에 허참봉은 장죽에 불을 붙여 물고 느긋하게 앉아 있고 윤근은 부지런히 괴나리봇짐을 뒤지더니 손바닥만 한 책자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허참봉에게 지필묵을 빌려 먹을 갈았다.

"하던 말은 끝내야겠습네다. 나으리의 생년월일시가 어찌 되시는지요?"

", 참으로 끈질기오. 좋소. 사주를 본다고 설마 탈이야 나겠소. 갑신(甲申) 생에 을유(乙酉) 월 병술(丙戌) 일에 시()는 정해(丁亥)시요."

윤근이 재빨리 붓을 놀려 받아 적고 작은 책자를 이리저리 넘기더니 손가락으로 마디를 새기 시작했다. 육갑을 짚는 것이다. 그런 다음 저만 알려는 것인지 언문도 초서도 아닌 괴상한 글자를 홱홱 그리더니 붓을 탁 놓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하더니 이럴 수가 없다는 듯 다시 손 마디를 세어 나가는 것이었다. 어느새 장죽을 내던지고 호기심이 그득한 얼굴로 다가앉은 허참봉이 먼저 물었다.                                                                                         

"그래, 송유학의 사주가 어떠신가?"

"... 괴이합네다."

"괴이? 괴이하다니 어디가 어떻게 괴이하단 말인가? 어서 말을 해야 알지."

윤근의 입에서 괴이하다는 말이 나오자 허참봉이 먼저 놀라 황급히 물었다. 송윤호 또한 사주에 관심이 없다고는 하나 괴이하다는 말에는 마음이 쓰였다.

"간지(干支)가 정말로 갑을병정에 신유술해가 맞으신지요?"

"조금 전에 말한 생년월일을 새삼 다시 묻는 곡절이라도 있소?"

송윤호가 정색을 하고 반문했다.

"있습죠. 삼십 년 동안 사주만 보아온 저로서도 이렇게 알 듯 모를 듯한 사주는 풀어본 적이 없습네다. 갑을병정의 천간(天干) 사주도 드문 법이온데 이렇듯 지간(支干)인 신유술해의 차례까지 맞아떨어지는 사주란 처음입네다. 그래서인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풀이가 나오니 괴이할밖에 없습지요. ."

오늘 낮까지만 해도 귀신도 놀라 자빠질 사주풀이를 하던 윤근이라 허참봉이 송윤호보다 더 궁금해서 바짝 다가 앉았다.

"생년월일시가 사람마다 다르니 팔자도 사람마다 다른 것 아닌가? 이 사람 윤술사, 도대체 괴이하다는 게 무언가? 말을 해 보라니까."

"좋습네다. 풀어서 아는 것만 말씀 올립지요."

"그래, 그래, 아는 것만이라도 말해보게. 무어가 괴이한 지..."

".. 우선 갑신생이면 금년에 스물일곱이라 혼인을 했다면 모를까 미 장가라면 노총각입죠. 하나 사주에는 내년인 경술년 삼월에 혼인하게 되어 있으니... 상투에 갓이 괴이하옵고..."

"하옵고? 또 있단 말인가?"                                                                                                                                                                      송윤호는 상투에 갓이란 말에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으나 허참봉은 대단히 놀란 듯했다. 상투를 튼 총각이란 말 아닌가?

"있습지요. , 또 부친은 이분이 소과에 급제하던 해에 별세하셨을 터인데 아직 유학에 학생이라 시니 괴상하옵고... ,,"

윤근의 이 말에는 송윤호도 대단히 놀랐다. 부친의 사망과 소과 급제까지 사주에 나온다는 말 아닌가? 허참봉은 이때 다른 의미로 놀라고 있었다. 송윤호가 소과 급제자라니 놀랐고 내년이 되어야 혼인을 한다는 것에 놀란 것이다. 윤근의 사주는 이미 증험한 바라 다 사실일 거였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 허참봉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는 오래 하나 관운이 있다가 없다가 하니 또 괴이합니다. 사주대로라면 정승은 떼어논 당상인데... 본인이 그 사주를 마다합네다. 말이 마다지 이것이 무슨 뜻인지 소생도 모를 소리라 정말로 괴이합네다. 어찌보면 일생 동안 무엇을 찾아 떠돌 것 같고 어찌 보면 부가옹으로 한 곳에서 편히 늙을 것 같은 사주인데...    도대체 이런 사주는 소인이 평생 동안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입네다. .. 이러니 어찌 더 이상 볼 수가 있겠습네까?"

윤근이 한숨을 쉬며 할 말을 마치자 송윤호는 반신반의하는 미음과 무시할 수도 없는 심정으로 허참봉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시각에 허참봉은 다른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송윤호는 실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생이 사주를 아주 허무맹랑한 것으로 보았었는데 달리 볼 것도 있소이다 그려. 우선 상투에 갓은 나이가 있으니 먼 길을 떠날 때 편리하고자 헛상투를 튼 것이고 갓은 가형의 것을 빌려 쓴 것이니 사주가 딱 맞았다 해야겠지요."

"그럼, 소과에 급제한 것도 사실이오이까?”

허참봉이 참지 못하고 나섰다.

"사실이오이다. 삼 년 전에 진사시(進士試)를 치뤄 백 패를 받았소이다. 그 해에 가형도 대과에 급제를 했었지요. 가친께서는 가형이 급제하여 홍패가 들어오던 날 돌아가셨소이다. 어쨌든 이것도 딱 맞힌 것 아니오이까? 시생은 이번에 삼 년 대상을 물리자 곧 나선 길이 올시다. 그러나 관운이 어쩌고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니 반만 맞춘 것으로 하지요."

"송유학의... 아니 송진사... 하여튼 부친의 일은 참으로 애석 하구려. 집안에 광영이 들 때에 말이외다."

"평생을 두고 가슴 아플 일이지요."

이튿날 아침에 일찍 일어난 송수호가 식전에 떠난다는 인사를 하려고 허참봉이 사랑에 나오기를 기다렸다. 윤근도 부스스 일어나 길 떠날 채비를 하였다. 두 사람이 한참을 기다려도 안채에서는 기척이 없는지라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는 중에 하인 둘이 마주잡이로 밥상을 들고 왔다. 보니 진수성찬이라 할 만 하였다. 반찬이 이것저것 십여 가지나 되고 거의 흰밥에 닭국에 닭볶음까지 올라 있었다. 새벽에 울어보지도 못한 닭은 이미 한밤중에 솥에 들어갔을 터였다. 윤근과 송윤호가 설마 우리 먹으라고 내 온 건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라 먹기를 망설이는데 허참봉이 사랑으로 나왔다.

"편히들 주무시었소?"

"밤새 안녕하신지요? 사랑방을 빌려주셔서 편히 잤습니다."

"소인 또한 오랜 노독이 다 풀어진 것 같사옵네다."

옆에 있던 윤근도 질세라 손을 마주 비비며 웃는 얼굴로 인사치레를 하였다.

"허허, 그렇다면 만분 다행이로고... 헌데 국이 식기 전에 어서 드지질 않구서... , 자 어서들 드시지요."

"과객에 불과한 시생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진수성찬이오이다. 재워 주신 것만도 고마운데 어찌 이러시는지요."

"허허, 별일이 아니니 마음 놓고 어서 드시지요. 어제는 초면이었지만 오늘은 구면 아니오이까? 게다가 대장부가 서로 마음에 맞으면 동무도 될 수 있는 게고..."

"동무란 말씀은 당치 않습니다."

"허허, 동무가 되고 안 되고는 식후에 따지기로 하고 어서 드시지요"

    영문 모르는 후한 밥상을 받은 송윤호와 윤근이 오랜만에 고깃국에 흰 쌀밥으로 배를 채웠다. 그 사이에 안방으로 건너갔던 허참봉이 다시 사랑에 나오더니 난데없이 장기판을 꺼내어 가운데에 놓는 것이다. 곧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나려는 송윤호와 윤근이 영문을 몰라 멀뚱히 서 있었다.

", , 금강산이야 여기서 이백삼십 리 길이라 노량으로 걸어도 사흘이면 닿을게고 윤술사는 본향으로 가는 사람이라 바쁠게 없을 터, 누가 나와 장기를 한 판 만 두고 가시지요."

밤 사이에 이 양반이 어디가 잘못 되어서 흰쌀밥에 고깃국을 주더니 아침 댓바람에 웬 장기를 두자는 것인지 영문 모를 일만 일어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허참봉을 바라보니 그의 표정은 느긋했다. 이럴 때는 역시 조선팔도를 다니며 과객질에 이골이 난 윤근이라, 주인장의 비위를 맞추어 장기판에 마주 앉았다.

"소인이 한 번 덤벼보겠습네다. 하룻강아지오니 살살 다루어 주시기 앙망하옵네다."

장기고 바둑이고 배울 틈도 없고 여유도 없이 자란 송윤호는 유희와 오락을 몰랐다. 두 사람이 장기 두기를 시작하여 서로 장이야 멍이야 하더니 몇 각 후에 하룻강아지가 범을 이긴 모양이었다.

"졌네, 다시 한 판만 더 두세, 살살 다루어 달라기에 그리했더니 콧등을 물렸네그려. 이번엔 인정을 쓰지 않겠네."

"하하하,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강아지가 본래 사나운 법 입네다."

두 사람이 장기에 몰입해 있는 사이에 무료하게 앉아 있던 송윤호는 밖으로 나와 측간으로 향했다. 그때 머리를 길게 땋은 처녀가 안채 마루에 앉아 있는 것이 얼핏 눈에 들어왔다. 이 집이 법도 있는 양반 집안의 구조와 달리 바깥채와 안채가 막힘이 없어서였다. 내외가 엄연한 지라 황급히 눈길을 돌려 볼일을 본 송윤호는 나올 때는 땅바닥에 눈을 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랑에서는 아직도 판이 이어저 어느덧 한식경이 넘었다. 이제는 더 기다릴 수가 없는 송윤호가 괴나리봇짐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막 작별의 인사를 하려는데 밖에서 계집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어제 축객의 말을 전하던 언년인가 하는 아이가 분명했다.

"나리, 다 되었다고 하옵니다."

", 그래? 다 되었으면 네 애비더러 어서 갖고 오라고 해라."

계집아이가 길게 대답을 하고 안채로 사라지자 때는 이때다 싶은 송윤호가 입을 떼었다.

"객지에서 뜻밖에 좋은 주인장을 만나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니 감읍(感泣)하옵니다. 시생은 갈 길이 멀어서 이만 물러가야 하겠습니다."

", 아니요. 잠시만, 오래 잡지 않을 터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송진사."

허참봉이 방문을 열고 안채로 목을 빼는데 마침 언년이 애비되는 춘보가 자그만한 보따리 두 개를 갖고왔다.

"채비는 다 되었느냐? 보따리 하나는 이리 다오."

허참봉이 춘보로부터 건네받은 보따리를 윤근에게 쑥 내밀었다.

"윤술사, 가는 길에 요기나 하라고 떡과 미싯가루를 좀 쌌네. 사줏값도 마다하니 이래라도 할 수밖에..."

생각 밖의 일이라 눈이 동그래진 윤근이 망설이다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보따리를 받아 들었다. 송윤호는 비로소 아침부터 장기를 두자던 허참봉의 행동에 의혹이 풀렸다. 안채의 여자들이 밤을 새워 쌀을 빻고 채로 쳐서 새벽부터 떡을 찌고 곡식들을 볶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닭 잡아 아침밥 하랴 볶은 곡식 채질하랴 모자란 시간을 장기로 때운 것이다. 송윤호가 마루로 나와 미투리를 신고 있는데 춘보가 두어 말은 됨직한 시겟자루와 보퉁이를 지게에 올려 동바로 묶고 있었다. 그리고는 윤근에게 준 것과 같은 작은 보따리를 새고자리에 달랑 매달았다.

"춘보 너는 한눈팔지 말고 진사님을 잘 모시거라. 벼는 열흘 후에나 벨 터이니    너는 갔다가 그 전에 회정하면 되느니라."

", 나리. 유점사(楡岾寺)까지 만 소생이 모시고 곧 돌아섭지요."

주종 간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보니 허 첨지가 춘보로 하여금 자신을 배종하여 금강산까지 갔다 오라는 것이라 송윤호는 심히 놀랐다.

"아니? 주인장께선 과객인 저를 어찌보고 아침부터 계속 놀라게 하시는지요? 후한 대접도 정도가 있을 터, 이러시면 아니 되오이다."

"옛 말에 백 번 만나도 남 같은 사람이 있고 한 번을 만나도 형제 같은 사람이 있다지 않았소이까. 내 어쩐지 송진사가 남 같지 않아서 하는 노릇이니 웃으며 받아주오 그려. 허허."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아오나 정성은 받을 터이니 저 사람과 물건은 거두어 주소서. 그래야 저도 마음 편히 떠날 것이오이다."

"무슨 말씀을...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씀 못 들으셨소이까? 이럴 때 쓰라는 말이외다. 송진사가 식후경 하셔야 내 마음도 편하니 제발 이 늙은이 정성을 뿌리치지 말기 바라오."

송윤호는 허참봉이 이미 마음 먹고 하는 짓이라 사양만 하는 것이 도리어 욕이 됨을 알았다. 허 참봉은 허참봉대로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춘보가 지게에 묶어놓았던 작은 보따리를 끌르게 했다. 그러고는 춘보에게 뭐라고 몇 마디 귀엣 말을 하니 춘보란 놈이 지게를 지고 나는 듯이 대문을 나서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걸음이 너무 빠른 놈이라 혹여 송진사가 저놈 걸음에 휘둘려 욱 걸음을 할 것 같아 먼저 보냈소이다. 걸음이 날랜 데다 금강산이라면 길이 익어서 나흘이면 갔다 올 놈이지요. 송진사는 노독 나지 않게 천천히 걸으며 산천경개를 두루 살펴보시구려."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다할 사이도 없이 떡과 미싯가루가 든 보따리를 송윤호의 괴나리봇짐에 찔러 넣어주었다. 이렇듯 허참봉 혼자서 북 치고 장고 치니 송윤호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다시 한 번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윤근과 함께 길을 나서니 허참봉이 대문께까지 나와 신신당부를 했다. 금강산을 구경하고 한양으로 회정할 때 꼭 다시 들리라는 당부였다. 허 참봉은 허참봉대로 송윤호가 다시 들리겠다는 약조를 하니 그제야 마음이 놓여, 그들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나는 듯이 안채로 가서 방문을 열었다.

"여보, 임자, 사위 될 사람이 방금 길을 떠났소. 옳지. 연지(姸芝) 너는 시키는 대로 네 신랑 될 사람을 보았느냐?"

"...."

"? 못 보았단 말이냐? 아까 그 사람이 측간엘 가던 눈치던데?"

신랑이란 말만으로도 부끄러움으로 얼굴울 붉게 물들인 딸은 말없이 뒤돌아 고개를 숙이었다.

"영감, 그만 좀 하시구려. 밤새 한 잠도 못 자게 그 난리를 치르게 하시더니 귀한 딸에게 먼 빛이나마 사내 구경을 하라시질 않나 원, 남이 알까 두렵습니다."

"? 어차피 신랑 될 사람 미리 좀 보면 어때서? 누가 욕을 하겠소?"

"신랑이 될지 구랑이 될지 어찌 알구요?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무남독녀 외동딸을 과객에게 준단 말입니까? 안돼요. 나는 그리 못해요."

"허어, 당신이 싫다고 연주 사주팔자가 바뀔까? 저 애 사주에 이미 한양의 진사하고 내년 봄에 혼인한다고 나와 있대도 그러네."

그 시간에 송윤호와 윤근은 동구 밖을 향해 걷고 있었다. 한 발 뒤처져 조용히 걷던 윤근이 무슨 생각을 드디어 찾았다는 듯 목소리에 생기가 묻었다.

"아하. 이제야 생각이 났습네다. 진사 나으리. 허참봉 말씀 입네다. 오늘 아침부터 대접이 싹 달라진 사단을 알 것 같습네다."

      송윤호라고 왜 그 생각을 하지 않았으랴. 허참봉이 지신에게 베풀어야 할 아무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러는 까닭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윤근이 알겠다지 않는가.

"그래요? 무슨 합당한 사유가 있다는 거요?"

"합당이라기보다... 사주이옵지요. 하하하."

"또 사주 타령이오? 그래 이번엔 누구 사주 때문이라는 게요?"

", 허참봉 나리의 외동딸 사주를 말 합지요. 그 딸의 사주를 봐 주었사온데... 혼인을 내년에 한양 사는 이와 하게 된다는 괘가 나왔습지요. 그래서 아마 허참봉이 지레짐작으로다..."

"... 오해할 만도 한 일이구려. 이거 큰일 났군. 내가 인연이 아닌줄 알면 여간 실망이 아니실 터인데... 미안해서 회정할 때 못 들리겠군."

", 아닙네다. 진사 나으리의 사주가 괴이하게도 풀 수없는 괘도 있었지만 다시 생각하면 몇 가지는 확실합네다. 나으리 혼인은, 임진생(壬辰生)처자와 하게 됩니다. 허참봉 나으리의 여식이 방년 십팔 세로 임진생이옵고 게다가 나으리께서는 한양 사는 진사 나으리 아니십네까?"

윤근의 말에 송윤호의 심장이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아침에 측간 길에 보았던 그 처녀 아니겠는가?

어제 잘 못 들었던 갈림길에서 송윤호는 금강산이 있는 동북쪽으로 윤근은 양주가 있는 남쪽으로 서로 작별을 했다.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저만치 가던 윤근이 무엇 때문인지 갑자기 되돌아 송윤호를 불렀다

"나으리, 하나만 여쭈어보겠습네다. , 어린 조카분이 있으신지요?"

"없소. 이태 전인 정미년 돌림병으로 둘 다 잃었소. 갑자기 그건 왜 묻소?"

"별 일은 아닐 터이나... 아들은 분명 아닌 어린애가 나으리의 사주 사이에 있는 것을 보았사온데... 이 걸 풀지 못하였기에 혹시나 해서 물었습네다. 마음 쓰지 마시오소서. 새삼 작별 인사 올립네다."

얌전하게 절을 하고 멀어지는 윤근을 바라보는 송윤호의 심사가 편치 못했다. 마음을 쓰지 말라는 그 말 때문에 더 마음이 쓰이는 것이었다. 조카와 나 사이에 무슨 일로 사주에 얽혀 있다는 말인가? 조카 둘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아이들이다. 별일 아닐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만약 조카가 살아 있다 해도 삼촌과 조카 사이란 부자지간과도 같지 않은가 말이다. 살아있을 때 조카들의 해맑은 모습이 떠올라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지더니 눈앞이 뿌옇게 보였다.

송윤호가 하루에 육 칠십 리를 걸어 이틀 만에 백야산 기슭의 산골 마을에 토방을 빌려 하룻밤을 잤다. 미싯가루로 요기를 하고 떠나려는데 골짜기 작은 시냇가에 엎드려 물을 마시던 사내가 벌떡 일어났다. 흠칫하여 돌아보니 같은 날 떠난 허참봉네 춘보였다.

"아니? 춘보 아닌가?"

"아이고 진사 나으리 아니십니까? 소인 문안드립니다."

"문안은 되었고 그새 유점사엘 갔다 왔단 말인가?"

"아이고 나으리, 종놈인 소인에게 하게 말씀이 웬일이십니까요. 이놈 저놈 해라 말씀으로 하십시오. 누가 들으면 소인은 맞아 죽습니다요."

"앞으로 그럴 연이 되면 해라 말로 하겠네. 그건 그렇고 자네 정말 걸음이 날래군그래?"

"어제 저녁에 이곳에 닿았습죠. 노량으로 걸어도 하루에 일백오십 리는 걷고 욱 걸으면 이백 리도 걷습죠."

"그래 아침 요기는 하였는가? 여기 참봉께서 주신 미싯가루가 있네. 들게."

냇가에 엎드려 물을 마시던 걸 본 송윤호가 떡과 미싯가루가 든 보따리를 내밀자 춘보가 화들짝 놀라서 뒷 걸음질을 했다. 연이어 손바닥을 앞으로 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까지 했다.

"나으리께서 드실 것을 소인에게 주시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허허 자네도 문자를 쓰는군. 괜찮네. 자 받게."

"아니올시다. 소인은 방금 조반으로 이걸 먹었습죠."

춘보가 허리에 찬 주머니를 툭툭 쳐 보이며 멋쩍게 웃었다. 아마 춘보도 미싯가루를 갖고 다니나 보았다.

"허허 같은 걸 미쳐 몰라봤군."

"아니올시다. 소인은 날콩에 솔잎과 소금을 먹습지요. 콩과 소금만 있으면 솔잎은 어딜 가나 있으니 길 떠날 때 아무 걱정이 없습죠."

"허허. 이른바 선식(仙食)이로군. 춘보 자네는 생식에 이력이 붙었나 보이."

", 진사 나으리께서 유점사에 가시면 법우라는 중을 찾으십시오. 주무실 방을 지소해 드릴 겁니다요. 공양미는 서말을 갖다 주었으니 보름은 유하실 수 있겠습죠. 부디 구경 잘 하시고 오소서. 소인은 주인 나리께서 기다리시니 이만 떠납니다요."

"수고가 많았네. 자네도 무사 회정하여 참봉 나리께 인사 말씀을 전해주고..."

". 나으리. 그리합지요."   

사실 객지에 나서면 먹고 잘 걱정보다 더 큰 걱정이 있으랴? 굶은 눈에 천하절경이 어디 있고 절세 미녀가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는가? 그러나 괴나리봇짐에서 떡을 꺼내 먹으며 걷는 송윤호의 눈에는 모든 풍광이 아름답고 신비해 보였다. 때는 구월 초순이라 눈길 가는 곳마다 오색 빛깔의 단풍이 온 산천을 불태우고 있었다. 회양을 바라고 가는 길이라 금강산이 가까워질수록 바위는 바위대로 더욱 기이하고 단풍은 단풍대로 더욱 고와서 참으로 가슴이 설레는 노정(路程)이었다. 허참봉 아니었으면 무슨 재간으로 이렇듯 느긋한 유람을 하랴 싶어서 송윤호는 무모한 길을 떠난 자신이 부끄러웠다.

사흘을 더 걸어 단발령을 넘으니 단풍은 고비에 이르러 현란(絢爛) 한 빛깔로 송윤호를 놀라게 했다.    과연 금강산을 풍악산이라 할 만한 절기였다. 유점사에 이르러 밤에는 절에서 자고 낮에는 신계사(神溪寺)나 표훈사(表訓寺) 등 이 절에서 저 암자로 다니며 구경을 하였다. 어쩌다 산세에 빠져 유점사로 되돌아 가지 못하면 잠은 그날 발길이 끝나는 곳에서 중들 틈에 끼어서 잤다.

금강산에 오른지 열흘 째 되는 날 송윤호는 안내를 맡은 사미승을 앞 세워 마하연(摩訶衍)으로 향했다. 한식 경이나 갔을까 싶은데 작은 폭포가 흐르는 곳에 갓 쓴 사람과 남여(藍輿)가 놓였고 중들이 몇 명 모여 있었다. 그 옆에는 벙거지를 쓰고 더그레를 입은 포졸 하나가 바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양반 둘에 중이 여덟에 남여가 두 채였다. 보나마나 양반이란 것들이 남여를 타고 예까지 온 것일 터였다. 송윤호는 못 본척하고 지나려는데 양반 하나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어디서 온 양반이신지 모르나 보아하니 마하연으로 가시나 보우."

"."

싫어도 대답은 해야겠기에 간단하게 말을 하고 가려는데 다시 말을 걸어왔다.

"양반 체모에 그 험한 길을 걸어서 어찌 가겠소이까. 차라리 마하연을 안 보고 말지. , 안됐소이다. 쯧쯧..."

지나는 사람을 붙들고 시비를 하는 꼴이 진정 꼴사납고 한편 가소로웠다. 젊은 혈기의 송윤호가 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측간 출입도 업어다 줘야 하는 앉은뱅이가 아닌 바엔 시생의 다리는 아직은 멀쩡하외다."

", 거 젊은 양반이 앉은뱅이를 빗대어 우리 욕을 하지 않나? 이거야 원, 봉변(逢變)이로세."

먼저 말을 걸던 수염이 몇 올 없는 쥐 수염 같은 양반이 송윤호를 향해 눈총을 쏘았다. 나이는 쉰이 넘어 보이나 수염이 쥐 수염이라 방정맞게 생겼다. 옆에 있던 보기 좋은 채수염을 드리운 양반은 서른 댓 살 정도인데 그가 오히려 연장자 처럼보였다. 그는 두 사람의 대화가 무료했던지 슬그머니 외면하고 먼산을 보았다.

"양반도 양반 나름인데 우리가 누군 줄 알고 그런 막말을 하는가? 젊은 양반?"

"글쎄올시다. 누군 줄은 모르겠으나 걸음을 잘 못 걷는 양반들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소이다. 경치란 눈으로도 보지만 발로 걸으며 봐야 제대로 본 것이지요. 허허."

"? 뭐라? 저 버릇없는 젊은 것이 도대체 무얼 믿고서.. 엥이..."

양반들 끼리 주고받는 말을 다 듣고 있던 중들과 포졸이 무슨 일이 일어 날 것인가 하고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때 외면하고 앉았던 수염이 긴 양반이 쥐 수염을 보고 가만히 뭐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쥐수염의 얼굴이 벌겋게 변하더니 송윤호를 향해 더욱 크게 말하는 것이었다.

"창피(猖披) 하다니? 무슨 창피를 더 해? 우리가 창피를 당했단 말인가? , 이거야."

동행한 채수염이 아마 쥐 수염에게 창피하니 그만두라고 말한 것 같은데 오히려 쥐 수염의 화만 돋구어 놓았나 보았다. 송윤호가 더 시비에 휘말려 들지 않으려고 돌아섰다. 그러나 쥐 수염이 송윤호를 놓아주지 않았다. 송윤호에게는 물론이고 중들과 포졸에게 다시 한번 자신이 어떤 양반인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를 쳤다.     

"증조부께서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를 지내셨고 조부께선 공조정랑을 지내신 우리 집안을 어찌 보고 젊은 것이 막말에다 우리를 가르치려 드는 게야? 비록 내 대에 관운이 없으나 우리가 남여를 타는 것은 그만한 근본이 있음인데, 우리를 업수이 여겨 그런 망발을 입에 담다니... 뭐야? 걸음을 못 걸어 남여를 탄다고? 우리가 누군 줄 아는가?    이곳을 관할하는 고성 현감이 내 삼 종(三從) 형님이시다. 게다가 옆에 이분은 현감의 처남이 되시니라. 현감이 절에 명하여 남여를 타기로 감히 젊은 것이 무어라?"   

쥐 수염이 집안 조상들의 자랑이 한창일 때 옆에서 소매를 슬몃슬몃 당기면서 작은 소리로 <그만 하시지요, 그만하시지요>를 연발하던 채수염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보였다. 그런 채수염을 팔꿈치로 밀어내며 할 말을 다 한 쥐 수염이 <이놈, 어떠냐?>하는 빛으로 송윤호를 거만스레 훑어 보는 것이다. 아무 말없이 쥐 수염의 장광설을 다 들은 송윤호는 더욱 대꾸할 마음이 없어져서 누가 뭐라거나 발걸음을 놀려 마하연으로 향했다. 한참 동안 뒤에서 <저놈, 저놈이...>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를 사려 물고 사미승의 뒤를 따라 걷기만 하였다.

"보살님, 너무 지체되어 오늘 저녁까지 유점사로 회유치 못할 것 같아옵니다."

"아니다. 마하연은 먼빛으로만 보더라도 회정하여야 겠다. 내 걱정 말고 가기나 하자꾸나."

사미승이 익은 길을 부지런히 걸으니 송윤호가 따라가기가 벅찰 수밖에 없어 바위투성이의 좁은 산길을 오르느라 땀을 뻘뻘 흘리었다. 오정이 가까워 절에서 싸 준 주먹밥을 사마승이 호로병과 함께 풀어 놓았다. 둘이서 주먹밥을 달게 먹고 산길을 한식 경을 더 가다가보니 멀리 맞은편에 마하연이 보였다. 석벽(石壁)이 햇빛을 받아 은빛과 금빛으로 되쏘는 마하연의 수많은 봉우리에 송윤호는 그만 넋을 놓아버릴 지경이었다. 정말로 장관이었다. 더 가까이 가서 보고 싶지도 그렇다고 더 뒤에서도 아닌 이 자리에서 보는 마하연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송윤호는 발길을 돌려 왔던 길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보살님, 가까이 가지 않고 그만 회정하시려구요?"

"네 덕에 좋은 구경 했느니라. 이만하면 됐으니 절로 돌아가자."

"이곳이 마음에 안 드시면 가시는 길에 좋은 약수가 나오는 곳으로 모실까요?"

"아니다. 이곳의 풍광에 빠져 가기 싫어질까 그런다. 어서 가기나 하자."

내려가는 길이라고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바위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미끄러지며 나뭇가지를 잡고 내려오자니 가는 길이나 오는 길이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얼마를 내려왔을때 저 아래에서 남여를 탄 아까 그 양반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길이 바위투성이의 가파른 길이라 남여를 맨 중들은 땀을 팥죽같이 흘리며 애를 쓰고 있었다. 송윤호가 보기에도 이런 경사의 길이면 잠깐 내려 걸으면 좋으련만 양반도 보통 양반이 아니어서인지, 남여에 타고 있는 것이 오히려 위태위태해 보이는데도 내릴 줄을 몰랐다. 두 양반을 호송차 뒤따라 오는 포졸은 빈 몸에 육모방망이 하나 밖에 없건만 숨을 헐떡였고, 쥐 수염의 양반은 남여가 조금만 기울어도 호령호령하였다. 고성 현감을 자형(姉兄)으로 둔 채수염은 겁이 나서인지 멀미 때문인지 얼굴이 허옇게 되어 남여의 난간 테두리를 죽어라 잡고 있었다.

", , 이놈들아 떨어지겠다. 앞을 더 낮추고 뒤는 더 들어야 할 것 아니냐."

그런 말을 안해도 양반이 떨어질세라 죽을힘을 써서 어깨의 살가죽이 벌겋게 부풀어 오르는데 쥐 수염은 연신 고래고래 호령을 해대는 것이다.

"아이고 이놈들이 양반 엎겠네. 이러다 떨어지기라도 하면 네놈들 절은 무사할 줄 아느냐? 오냐. 좋다. 돌아가서 주지를 잡아다 물고를 내 주고 말리라."

남여 위에서는 죽일 놈 살릴 놈하는데 남여를 맨 중들은 입이 없는지 말 한마디 없이 비탈길을 오르느라 버지럭 대었다. 입가에 버캐가 허옇게 낀 중 하나가 날이 끊어져 짚신이 벗겨졌건만 챙길 수가 없는지라 쩔쩔매었다. 남여가 가까워지자 그들이 지나도록 길을 비켜 바위 옆에 붙은 송윤호를 본 쥐 수염이 갑자기 돌변한 음성으로 말을 하였다. 역시나 고성 현감의 팔촌 동생다운 여유로운 소리였다.

"해동 금강이라더니 과연 풍악이요, 과시 절경이로다. 대장부가 천하를 내려다보는 것이 어찌 말을 탄 장수에만 비견 하리오. 이 몸은 천계에서 사바세계를 내려다보는 것 같도다."

방금까지 자지러지다가 송윤호가 들으라는 허풍이었다. 그런 쥐 수염을 본 송윤호는 문득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어찌 저런 좀벌레 같은 것이 양반이 되었단 말인가? 아무리 사농공상의 끝자리조차 차지 못해 팔천(八賤)으로 떨어진 중들이라지만, 저런 허깨비 같은 양반들을 태우고 허덕대야 하는 것인가? 양반이 도대체 무엇이관데 같은 인간을 저렇 듯 개처럼 부리는가? 이제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일이었다. 양반으로서 하천(下賤)을 개 부리 듯 하는거야 당연한 일이라, 당연한지 않은지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산을 내려오는 송윤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생각에 잠겨 말이 없었다.

다음 날, 조반을 든 송윤호는 주지와 사미승과 작별하고 금강산을 뒤로하였다. 올 때는 만산이 불타 듯 장관을 이루던 산천이, 그동안 두어 번 내린 서리로 가는 길엔 낙엽이 지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가랑잎이 휩쓸리는 소리가 스산하기까지 했다. 송윤호의 마음도 썰렁한 기운이 스며들어 올 때보다 여러 날을 길에서 보낸 다음에야 허참봉의 집에 닿았다. 허 참봉 딸의 사주라는 것을 떠 올리면 얼굴이 붉어질 노릇이나 온다고 약속을 했으니 오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송윤호가 대문께에 이르자 소리쳐 부를 것도 없이 문이 열리더니 춘보와 또 다른 가노인 듯한 못 보던 총각 놈이 코가 땅에 닿게 절을 하였다. 분명 먼 곳에서부터 송윤호가 오는가 망을 보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보나 마나 허 참봉이 시킨 노릇일 터였다. 허 참봉은 변함없이 송윤호를 귀한 손님처럼 대하였다. 떠나려는 송윤호를 하루만 더 하루만 더하고 잡아서 닷새나 잡아두었다. 참으로 난처하고 미안한 노릇이라 내일은 기어이 떠나리라고 말을 하였다. 그날 저녁에 바지저고리와 도포를 빨아서 말끔히 손질한 것을 언년이가 가지고 왔다. 하인 시켜 빨면 된다고 기어이 가져간 그동안 입었던 옷 들이었다. 헌데 옷을 갖고 온 열 살밖에 안 된 언년이의 말이 맹랑했다.

"나으리, 이 옷 다듬이질은 저희 아씨께서 손수 하셨습니다. 아씨는 바느질도 잘하시고요. 얼굴은 또 얼마나 예쁘신지 모르옵니다."

얼굴이 화끈해진 송유호는 묻지도 않은 말을 하는 언년이가 맹랑하다 못해 배후가 있지 않나 하였다.

"어린 것이... 누가 그런 말을 하라더냐? 아씨가 시키시더냐?"

"우리 아씨께서는 그럴 말을 시킬 분이 아니 와요."

"그래? 그럼 누가 시키더냐?"

"......"

", 알았다. 가 보거라. 옷 고맙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조반을 마친 송윤호가 봇짐을 챙겨 마루로 나오니 허 참봉이 안채에서 나오는데, 뒤에는 총각 놈이 짐을 잔뜩 지고 따라오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노독을 더 풀고 갔으면 좋으련만 본가에서 걱정들 하시겠기에 어쩔 수가 없구려. 잘 가시오 송진사."

허 참봉이 은근한 목소리로 작별의 인사를 먼저 하였다.

"시생의 처지로는 감당 못할 대접을 받고 가옵니다. 부디 강녕하십시오."

", 천만에, 송진사를 만나 참으로 기쁜 마음이오. 일전에 남 같지 않다 했던 말이 사실이외다. , 가시는 길에 이놈을 대동(帶同) 하시구려."

짐을 진 총각 놈을 데리고 가라는 말에 또 한번 실랑이가 벌어졌다. 백 번 사양하는 송윤호였으나 허 참봉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종일 실랑이만 할 수도 없어 총각을 데리고 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삼십여 보 떨어진 안채 쪽에서 서너 명의 여인들이 이쪽을 향해 서 있었다. 안 보는 것처럼 송윤호를 보고 있는 것이다. 얼핏 봐도 허 참봉의 처와 딸 그리고 여종 언년이 모녀일 것이었다. 난처해진 송윤호가 엉겁결에 그쪽을 향해 말 없는 인사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는 누가 잡을세라 대문을 나와 다시 한 번 허 참봉과 작별하였다.

    송윤호가 철원, 포천을 지나 솔모루까지 오는데 엿 새를 보내는 동안 뒤에서 짐을 지고 따르는 총각 놈으로부터 많은 것을 알았다. 우선 열일곱 살 총각 놈의 이름이 거칠 이란 것과 제 아비와 어미가 허 참봉네 외거노비(外居奴婢)라는 것을 알았다. 그 동리의 모든 논밭은 허 참봉네 것이며 이십여 호의 마을 사람 모두가 허 참봉의 땅을 부치고 산다는 것 등이었다. 논에서 벼가 천여 석 나오고 밭에서 조와 콩 등의 잡곡이 또한 이백여 섬이 나오니 이 중 절반이 허 참봉네 곳간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허 참봉네는 부자로구나. 마을 사람들도 그만하면 굶지는 않겠고... 그런데, 그런 동네의 인심이 왜 그리 사나운게냐?"

"나으리께서 오시던 날, 처음 들리신 집이 소인의 집이었습죠. 아비가 나으리께 방이 없다는 소리를 소인도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필 우리 마을이 금강산 길이라 길 잘 못 든 나그네가 한 둘이 아니니 어쩝니까요? 우리 마을은 철마다 나그네 뒤치다꺼리에 골을 싸맬 지경 올습지요."

다락원에 이르니 해가 저물어 한 집을 찾아들었다. 남은 길양식을 털어보니 쌀 반 됫박이 될까 말까 하였다. 거칠이가 주인에게 솥을 빌려 밥을 하였다. 사발에 밥을 담아 상을 들이는데 안방에서 밥 냄새를 맡은 아이들이 악마 구리 처럼 소란스러웠다. 송윤호는 수저를 차마 들지 못하였다. 거칠이란 놈도 눈치만 보고 밥을 못 먹더니 불쑥 밥그릇을 밖으로 내 보내는 것이었다.

"나으리께선 못 본 척 드시오 서서. 저걸로 죽을 만들어 나누어 먹겠습죠."

"아니다. 한 끼 굶는다고 어찌 되겠느냐? 내가 생각이 짧았다. 상을 물리거라. 이만 자자."

거칠이가 상을 들고나가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조금 후에 힘없는 사내의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었다.

"나으리, 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요."

곧이어 집주인의 보답인 듯, 매캐한 청솔가지 타는 냄새가 나더니 얼마 후엔 등짝이 댈 정도로 방이 절절 끓는 것이었다. 더운 방이 좋은 것을 보니 가을도 깊어가나 보았다.

이튿날 오정이 조금 지나 집에 닿은 송윤호가 사당(祠堂)에 들려 무사히 다녀왔음을 조상에게 고한 후 어머니 한 씨에게도 절을 하였다.

"그래, 바람을 쐬고 오니 가슴이 시원하느냐? 풍악산이 그리 좋다던데 마음 같아서는 나도 언제 한 번 가보았으면 싶구나."

"하하하, 좋기야 하지만 금강산을 유람했다는 여인은 조선팔도에 아직 없습니다."

"그러게나 말이다."

저녁이 되어 송수호가 퇴청을 하여 식구가 모두 모이자 송윤호는 금강산의 빼어난 풍광을 말로서 그린 듯이 이야기를 하였다. 그 다음에는 한참을 미적대다가 할 수없이 허참봉네 집에서 유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이 데리고 온 거칠이와 그놈이 지고 온 짐을 해명하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었다. 처음 길을 잘 못 든 때부터 사주쟁이 윤근의 이야기, 허참봉의 호의로 금강산을 잘 다녀온 이야기며 올 때 닷새를 묵은 얘기를 모두 털어놓았다. 그런 다음 마루에 두었던 짐을 방 가운데에 갖고 와서 풀어보았다. 짐의 맨 위에는 보자기로 곱게 싼 옷이었다. 감물을 들인 무명 두루마기로 솜을 두둑히 놓아 지은 겨울용이었다.

"어머나, 어쩜 무명이 이리 톡톡하고 고울까. 바느질도 얌전하구요. 어머님 좀 보세요."

며느리가 만져보라고 건네주는 옷은 물론이고 궁금은 하나 뜻 모를 물건이라 경계의 눈빛으로 가까이하지 않는 어머니 한 씨였다. 송수호의 아내가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놓았다. 펼쳐지는 보따리마다 온통 먹는 것이었다. 겨울에 화로에 구워 먹을 수 있게 말린 인절미며 꿀에 재운 약과, 목청 꿀단지, , 노루포, 오미자, 등속이었다. 모두들 놀랄 수밖에 없는 물건이었다. 송윤호가 금강산을 다녀오는 사이에 마련한 것일 터였다.

"허 이거야말로 진상 봉물짐이로군."

무덤덤하게 앉아 구경을 하던 형이 뱉은 말에 송윤호의 얼굴이 벌겋게 되었다.

"내 이럴 줄 알고 극구 사양했건만... 에이 이 걸 어쩌면 좋겠습니까? 형님."

"어쩌긴 어째? 네가 갖고 왔으니 받는 수밖에... 대신 너는, 너를 그 집에 답례로 보내야 될 것 같구나."

"예ㅡ에? 형님은 갑자기 무슨 말씀을 그리하세요? 내가 날 보내다니요?"

"허허, 어머니, 아마도 윤호가 장가들게 생겼군요. 사주 얘기에서 어쩐지 냄새가 나더니 돌아가는 판세가 말입니다. 허허허."

"도련님은 혼인이 늦었세요. 이참에 그리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머님."

아들들과 며느리가 웃고 떠드는 가운데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던 한 씨가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의 한숨소리에 모두 입을 다물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닌 것 같구나. 잘 생각들 해보고 정할 일이야. 혹여 그 집에서 정말 혼인할 의사가 있다 해도 서로 지체도 비슷해야 하고..."

나그네에 불과한 송윤호에게 허참봉이 어찌 보면 비례(非禮)에 가까운 선사품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호감이 가는 총각에게 인연이라도 맺고 싶은 것은 딸 가진 부모의 인지상정이라 이상할 것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후에 형 내외와 어머니가 송윤호의 혼인 일로 여러 번 의논을 하였으나, 진짜 일은 이 십여 일 후에 터졌다. 느닷없이 허참봉이 거칠이를 앞세워 송윤호의 집에 온 것이다. 허 참봉이 데리고 온 사람은 또 있었다. 춘보와 거칠이의 아비 막개였다. 또한 이들이 몰고 온 나귀와 노새의 잔등에는 짐이 잔뜩 지워져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이들로 인해 온 집안이 난리였다. 춘보와 거칠이 부자는 말득이의 옆방을 비워 쓰게 하고 허 참봉은 일단 송수호 형제가 쓰는 사랑으로 모시었다.

", 이번에 한양에 볼일이 있어 왔소이다. 기왕 온 길에 송진사도 만나볼 겸하여 왔으니 너무 괘념치 마시오."

퇴청한 송수호와 인사가 끝나자 송윤호를 향해 한 말이었다. 송수호가 동생을 대신하여 치사(致謝)의 말을 하였다.

"동생이 존장(尊長) 댁에서 입은 후의에 형으로써 다시 한번 감읍하옵니다. 보내신 물목을 보아도 저희들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것이더군요."

"아니올시다. 사람 사귐에 연분이 따로 있음인지 송진사를 대하여보니 남 같지 않은지라.... 약소한 것들로 치하 받기가 오히려 면구하오이다."

"저희 모친께서도 그런 말씀이 계셨습니다. 존장 어른 댁에서 겪은 일을 들으시곤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라구요."

", 자당(慈堂)께서 그리 말씀을 하셨다니 말인데, 기이한 인연이라면 깜짝 놀랄 일이 또 있소이다."

"아니?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이야기가 길어질까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인연이란 말이 나오자 갑자기 허 참봉의 마음이 바빠졌다. 사주쟁이 윤근이 온 날 저녁에 송윤호가 자기 집을 들린 것부터 시작해서 송윤호의 사주와 무남독녀 외동딸의 사주가 딱 맞더라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풀어놓았다.

"이러니 어찌 기이하다 하지 않을 수 있소이까?"

한데 송수호가 무엇이 생각났는지 허참봉에게 엉뚱한 것을 묻는 것이었다.

"혹시, 좌상대감과 같은 파()가 아니신지요?"

", 아니올시다. 그쪽은 양천(陽川) 허 씨이고 우리께는 본관을 양주(陽州)에 두었지요. 허기야 원줄기를 찾자면 같을지나 현금(現今)에는 남남이 올시다."

송수호가 갑자기 허씨성의 갈래를 물은 것은 요즈음 장안(長安)에서 말썽 많은 허견 이란 놈이 생각나서인데, 허참봉은 <이건 또 무슨 기이한 기회인가?>하고 생각했다. 당장 거칠이를 불러 푸른색 보따리를 갖고 오라고 하더니 부지런히 매듭을 풀어 책 한 권을 내 놓았다. 겉장에는 양주 허씨 세보(陽州許氏世譜)라고 적혀 있었다. 소위 족보 책을 갖고 온 것이다. 허참봉이 이리저리 책장을 넘기더니 한 곳을 찾아 펴 놓았다.

"여기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리 조부 되시는 명자 구자이신 분이 원양도(原襄道) 김화 현감으로 제수되시매 그때에 김화 인근에 장토를 마련하였소이다. 그리고 여기 이 사람, 허운길(許雲吉)은 무오(戊午) 생으로 나와 동갑인데 촌수로는 육촌 이오이다. 지난 정축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몇 해 전까지 경운궁(慶運宮) 수문장을 지냈는데 지금은 인제(麟蹄) 현감으로 나가있소이다."

허참봉은 자신의 가문이 남에게 뒤지지 않음을 누누이 설파(說破) 하였다. 급제자나 벼슬을 살고 있는 족척(族戚)이 다른 파의 허씨보다 적으니 혹시라도 송윤호 가문과 지체가 다르다는 말이 나올까 봐서였다.

"존장께서 먼 길을 행차하셨을 때는 어떤 소회를 품으셨을 터이고 시생 역시나 지난번에 동생의 말을 듣고 짐작은 한 바이올습니다. 하나 이렇게나 빨리 혼인 말이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어찌 이리 서두르시는지요?"

"소뿔 묵인다고 서각(犀角) 되며 염소 뿔 오래 둔들 녹용(鹿茸) 되겠소이까? , 그리고 쇠뿔도 단숨에 빼라는 옛 말도 있지않소이까? 허고... 이건 좀 다른 말이오만 금년 같은 흉황이 내년에도 이어진다면 혼인은 차제(次第), 팔도에 떼죽음이 날 것이오이다."

"천기야 미리 알 수없는 노릇이니 내년의 흉황을 어찌 알겠습니까마는 실로 금년의 흉작은 시생도 걱정이 되오이다."

"김화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굶는 백성들을 많이 보았지요. 그들이 우리를 보는 눈빛도 다르더이다. 노새와 나귀에 무명과 쌀을 실었으니 왜 그러지 않겠소이까? 해서... 여러날 밤길을 걸었지요."

"오실 때의 고초가 그리 크셧슴을 미쳐 몰랐습니다."

"별말씀을, 혼기에 찬 딸을 둔 부모로써 지옥불인들 마다하겠습니까. 허허허."

"어려운 혼사 문제를 솔선하시어 쉽도록 운을 떼어주시니 후생(後生)이 오히려 면구하오이다. 하나 이 문제는 모친께 여쭈어 정할 문제이오니 내일 가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모친과 상의하여 정하겠다는 말에 허 참봉이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자당께서 안 된다 하시면 없던 얘기가 되오이까?"

허 참봉의 말이 끝나는 순간 송수호가 뭐라 대꾸도 하기 전에 이제까지 한마디도 못하고 있던 송윤호가 번개같이 형이 할 말을 가로채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머님께서도 일전에 반 승낙의 말씀을 하셨고... 더구나 이 집안의 가장이 형님이시니 형님께서도 승낙을 하실 겁니다."

듣고 있던 형은 어이가 없어 장래의 사돈을 돌아보았고 허 참봉은 미래의 사위를 보며 크게 웃는 것이었다.

다음 날부터 허 참봉의 발길이 분주해져서 춘보와 거칠이를 대동하고 종일을 안 보이다가 늦은 저녁에야 송수호의 사랑에 들어왔다. 그러기를 열흘쯤 하더니 송수호 형제에게 불쑥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되었소이다. 집을 구했소이다. 이곳저곳 알아보다가 미동(美洞)에 아담한 기와집이 나와 그걸 샀소이다. 그곳에는 사위 될 이가 거허면 될 것이요, 거기서 두어 마장 떨어진 명찰방(明札坊) 끝머리에 또 한 채의 집을 구했소이다. 거기는 우리 내외가 살 집이니 서로 편하되 두 늙은이가 가까운 의지처로 삼으려 아예 혼사와 더불어 상경할 생각 올시다. 전장(田莊)이야 누가 떠메고 갈 것도 아니니 걱정 없소이다. 무남독녀라 데릴사위를 생각 안 해본 것은 아니오이다마는 솔직하게 말해서 누가 데릴사위를 원하리까? 그러니, 이번 일은 제발 이 늙은이의 뜻을 따라주시오. 형제 분과 한마디 의론의 말도 없이 독단으로 일을 벌여 할 말이 없으나 말을 하면 또 들어줄 형제 분이 아니질 않소이까? 하여튼 속대로 일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니 후련하기는 합니다. 허허. 너그러이 봐 주시오들."   

이틀 후에 허참봉은 나귀를 타고 노새에는 얼마 전에 따서 만든 곶감을 실었다. 송수호의 집에 흔한 것이란 곶감뿐이었다. 감나무가 워낙 커서 감도 많이 열렸던 것이다. 그리고 송윤호의 사주단자를 보내는데 이것은 혼인의 형식일 뿐 귀신같은 윤근이 이미 본 사주라 사실 소용이 없었다.

이듬 해인 경술년(庚戌年) 춘 삼월에 허 참봉의 딸 연지를 아내로 맞은 송윤호가 솔가를 하여 미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허 참봉은 춘보 내외를 데리고 명찰방 집에서 살고 언년이와 거칠이는 사위네 집에 주었다. 한데, 송윤호가 처가와 따로 사니까 처가살이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양식을 비롯한 모든 것을 처가에서 대어줄 뿐 아니라 미관 말직의 형 송수호의 집에도 음으로 양으로 시량(柴糧)을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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