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허견
김민세를 만난 며칠 후였다. 송수호가 내리 닷새를 장번(長番)을 서고 나와 늦은 아침밥을 먹고 곤하여 사랑에서 잠깐 눈을 붙여 볼 참이었다. 막 목침을 베고 누우려는데 밖에서 노복이 연통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으리, 옆집 대감 마님께서 납시셨습니다."
"뭐? 옆집 대감? 헛 !"
옆집 대감(大監)이라면 영의정 허적(許積)아닌가? 깜짝 놀란 송숳가 의관을 갖추는 것은 고사하고 목침도 그대로 둔채 황급히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이 열리는 순간 멈칫했다. 영상 대감이 아니었던 것이다. 영상 대감의 아들 허견(許堅)이었다. 아니. 다시 말해 영상 대감인 허적의 서자(庶子) 허견이 뒷짐을 지고 버티고 있었다.
'이런 일이, 쯧.'
다시 생각해보니 어이가 없었다. 오도체찰사 겸 시임 정일품 영의정이 실성을 했다고 나를 보러 오겠는가 싶은 것이다. 영의정이라면 세상이 흔히 말하기를 일인지하에 만인지상이라지 않는가 말이다. 송수호는 경망했던 자신의 행동이 몹시 게면쩍었다.
'이런 놈을 대감이라니...'
그렇다고 당치도 않는 호칭을 고한 노복(老僕)을 나무랄 수도 없는 것이 그의 눈에는 옆집의 나으들은 모두 하늘 같이 높은 대감으로 보였을 터였다. 송수호는 입이 썼다.
'이 자가 혼자서, 그것도 대 낮에 나를 찾았을 땐...보나마나 지난 번 일로 내게 엄포를 놓겠다는 수작일 테지. 이놈을 어쩐다?'
잠깐 동안일 망정 송수호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나타났었나 보았다.
"하핫, 내가 와서 못마땅하십니까? 객이 왔는데도 들어오란 말이 없는 걸로보아 축객을 하시려나 봅니다. 이대로 돌아 가리까?"
그리고는 정말로 돌아 갈 듯, 돌아서는 시늉을 했다. 그래도 주인의 만류가 없자 길죽한 털을 돌려 히죽 웃었다.
"왜 왔는지 물어나봐야 주객간의 예의가 아니겠소이까?"
송수호가 굳은 얼굴로 말이 없자 그는 마루에 턱 걸터앉더니 갓신을 벗고서 방으로 성큼 들어서는 것이다.
"허헛, 주인이 잠시 출타 중인가보니 기다렸다 만나보고 가야겠군."
혼잣말로 털썩 주저앉는 이놈을 어찌할 것인가. 속대로 한다면 단번에 매를 쳐 내 쫒고 싶지만 안하무인의하고 개망나니인 이런 놈과 떠져 무얼하랴. 체념하고 차라리 이놈이 온 목적을 알아내는 것이 나으리라 싶었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보자는 겐가? 설마 지난 번 일 때문인가?"
"아니로소이다. 그 일이라면 의금부에서 열 번도 넘게 조사를 해서 내게 죄가 없음을 백일하에 다 밝혔는데 설마 시생이 그깐 일로 골사다망하신 사험부 지평 나으리를 번거롭개 할 리가 있겠소이까? 아니 그렇소이까? 지평 나으리."
허견은 연신 손을 휘저어 바람을 이르키며 고개를 과장되게 좌우로 흔들었다.
"그렇게 이죽대며 말 할 것 없네. 꼬리를 자르고 평소대로 말하게."
"좋소, 내 비록 벼슬이라고는 정 구품 교서관 정자(正字)로 끝났으나 지금은 다시 백두이니 품계 따져 공대할 필요야 있겠소? 허고 송지평과는 년배도 비슷할 뿐만 아니라 어릴 적부터 앞 뒷집에서 서로 보며 자랐으니 편한대로 합시다."
위인이 단번에 공대를 그치고 느물므물하게 나오니 어이가 없어진 송수호는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놈이 하는 꼴을 보면 당장 엎어놓고 물고를 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온 용건이 무언가?"
"좋소, 단도 직입으로 말 하리다. 이 집응 내게 파시요."
"뭐라고? 이 집을 어째?"
송수호는 대낮에 도깨비 소리라도 들은 냥 억양을 높혔다. 제 애비를 믿고 공갈을 치라라는 예상이 빗나갔다. 자신의 뒤를 캐지 말라는 공갈을 예상했던 것이다. 놈이 눈에 힘을 주고 송수호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꼭꼭 누르 듯 뱉었다.
"팔란 말이요. 내게."
"선대로부터 내려 온 이 집을...뭣이라? 팔아라?"
"시생의 집은 아시다시피 교동에 있는 지라 , 아버님 집과 거리가 멀어 자주 찾아뵙지 못해 불효가 막급이요. 해서, 이 집을 사서 옆 담을 헐어내고 아침 저녁으로 문안을 드린다면 자연 효행(孝行)의 근본도 생길 것 아니겠소? 하핫."
번들거리는 눈빛에 느물느물한 표정으로 송수호의 얼굴을 훓던 허견이 소매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내 이놈을...'
망연자실허여 넋을 놓았던 송ㅇ수호가 주먹을 그러쥐었다. 놈의 면상을 질러버리고 싶어 망서리는 순간 허견이 먼저였다. 소매 속에서 깨낸 종이를 방바닥에 손을 엎어 퍽하고 꽂은 것이다.
"자, 여기 팔백 냥 짜리 어음이요. 경상 이명길이에게 갖고가면 쌀이든 돈이든 바꿔 줄 것이요."
"이...이런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놈이 있나? 제 멋대로가 아닌가? 이놈, 돈이면 조상도 팔 줄 알았더냐?"
송수호는 옆에 놓인 목침을 움켜쥐었다.
"팔백 냥이 적은 돈이 아니요. 이런 집, 아니 이보다 나은 집도 삼사백 냥 밖에 더 하는 줄 아시요?"
다시 한 번 소매 속으로 들어갔던 손에 또 다른 종이가 나왔다. 놈이 그 종이쪽을 대강 펴더니 앞으로 쓱 내밀었다.
"자 매매 문서요. 내 미리 적어왔으니 수결만 하시요."
"그래도 이 자가? 안 팔아. 안 팔거니까 가지고 나가."
어음쪽과 매매문서를 뱀 본 얼굴로 외면한 송수호의 얼굴이 붉었다.
"정 안 팔겠다? 그냥 달라는 것도 아니고 시세의 곱절을 준다는데도 안 팔겠다 이말씀인 즉슨...지난 번 일에 미진함이 남은 게로군. 쩝...좋아."
허견은 어음과 매매문서를 휙 거두어 벌떡 일어나더니 도포자락을 힘있게 한 번 털었다.
"그 잘난 지평 벼슬이 언제까지 븉어 있을 줄 아나본데..."
"뭐? 뭐라구? 내 이놈을..."
목침을 움킨 손이 분에 못이겨 부들브들 떨고 있는 송수호의 눈에 안개가 끼었다.
'이놈을, 이놈을....참자, 참자. 어찌 할 수도 없고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 사이 마루로 나서 신발을 꿰어 신던 허견이 송수호를 돌아보며 씹듯이 뱉었다.
"허고, 아까부터 이놈 저놈 하는데 내가 네놈에게 호놈 소리를 들을 처지라더냐? 오냐 좋다. 오늘 일은 잊지 안을 것이니 그리 알아라."
"저, 저놈이 그래도...나도 오늘 일은 반드시 시비를 가리고 말리라."
"거 좋지. 명색이 서슬 푸른 사헌부 지평 나으리신데 시비는 가려야지. 암 가려야 하고 말고. 허나, 보다시피 나는 여길 온 적이 없으니 없으니 시비는 혼자서 잘 가려 보시게나. 나는 이만 가네."
송수호는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목이 말랐다.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당한 백주(白晝)의 봉변이었다. 그러나 잘 참아냈다 싶었다.
"흠, 저놈이 정말로 이집을 흥정하려든 것은 않을 터, 그렇다면?"
결국 지난 번 송수호가 자기에게 한 그대로 되갚음을 하고 간 것이다.
'살인범을 내 놓으랬더니 오히려 내 눈치를 보러 왔겠다? 그렇다면 역모의 기미를 모르는 것으로 하려면 한복만의 문제는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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