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에게 춥다는 생각이 든 것은 석호가 나간지 두 시간이 넘어서였다. 그러고보니 땔감 넣는 걸 잊은 난로는 식어가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두시에 가까웠다. 아침도 시원찮게 먹은 데다 점심도 먹지 않았으니 배가 고플만한데도 크게 고프지 않았다. 그래도 밥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진우가 일단 난롯불을 다시 지피기 위해 불 쑤시개를 찾았다. 그 순간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울었다. 덕배 사무실의 만기였다.
"형님, 형님이 복원한 사진 말입니다. 그 사진의 여자가 누군지 알았습니다."
만기의 생기 돋친 말에 진우는 깜짝 놀랐다. 의외의 일이었던 것이다.
"어, 그래? 누구래? 누가 알아보데? 그 여자의 정체가 뭐래? 지금 어딨데?"
"하하 원 형님도...한꺼번에 그렇게 많이 물으시면 어쩝니까? 가만 계세요. 구본웅일 바꿔 드릴 테니까요."
금새 구본웅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형님, 절 구해주셨는데 변변한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오늘 내려온다는 말은 들었는데 몸은 좀 어때요?"
"아유 휴가차 사장님이 입원을 시켰던 겁니다. 멀쩡합니다. 아, 참 말씀부터 낮추세요. 불공평합니다. 저도 같은 식구로 봐 주셔야지요."
폐일언하고 여자의 정체부터 묻고 싶으나 절차가 길어져 진우는 초조했다.
"좋아 그럼 그러지. 헌데 말이야. 사진의 얼굴이 확실히 아는 여자던가?"
"그럼요. 부천의 찐드기 파에 있는 여잡니다."
"뭐? 부천? 확실해?"
부천이라면? 아차, 석호의 말이 맞았었구나. 하고 진우는 생각했다.
"그럼요. 그래 봬도 부천의 투어 나이트를 맡고 있는 사장 급인데요."
"그런데 그 여자가 어떻게 곽사장을 알고 같이 갔을까?"
"찐드기파의 보스 유명우하고 저희 사장님은 옛날부터 서로 아는 사입니다. 제가 사장님 심부름으로 부천엘 다녀 온 적이 있거던요."
"그렇다면 결론은 나왔군. 우리가 괜한 걱정을 했던 거였어. 그러면 그렇지 덕배가 쉽게 당할 인물이 아니지. 가만, 그러면 그렇다고 연락을 했어야 할 곽사장이 왜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을까?"
처음부터 걱정스러웠던 것이 바로 본인으로부터의 연락두절이 아니었던가? 진우의 혼란스런 감정이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게 말입니다, 본사에 사장님이 오셨다는 소린 못 들었습니다. 이건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제가 본사에 들어가서 약간 이상한 정보는 얻었습니다. 본사에도 사장님을 따르는 얘들이 몇 명 있거든요. 며칠 전에 걔들이 어디로 출동을 했다가 아직 오지 않고 있답니다. 사장님이 아니면 걔들을 누가 불렀겠습니까?"
"어디로 말이야? 출동했다는 곳이."
"어딘지는 걔들이 돌아와 봐야 알겠지요. 헌데 출동과 함께 전 조직에 비상이 걸렸었답니다. 회장님 명령으로 비상이 걸렸다면 전쟁준비를 뜻하는 겁니다."
"전쟁? 이거 무슨 소린지 통 모르겠군, 전쟁이라면 누구와 전쟁을 한단 말이야?"
"우리가 전쟁을 한다면 캐시콜뱅크 밖에 더 있겠습니까?"
"뭐? 캐시콜?"
결국 얘기가 그쪽으로 다시 흐르는지라 진우는 찌릿한 전율을 느꼈다.
"부천 그 여자의 전화번호를 아는 방법이 없을까?"
"있죠. 알아봐 드릴까요?"
"그래주면 고맙지. 헌데 너도 본사에 너희 사장 얘기는 아직 하지마라."
"예, 만기 형에게 들었어요. 그럼 전화번호는 문자로 보내 드리죠."
구본웅과의 통화를 끝낸 진우의 가슴이 다시 답답해 왔다. 어딘가 잘못된 것은 확실한데 어느 부분이 잘못된 것인지를 모르겠던 것이다. 구본웅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곽덕배의 친구임을 밝히고 정중한 어조로 덕배의 행방을 물었다.
"곽덕배가 누군지 모르지만 그걸 왜 제게 물으시죠?"
"부탁합니다. 그 친구와 통화가 가능할까요?"
"아니 아까부터 그 사람을 왜 내게서 찾느냐고요. 난 그런 사람 몰라요. 끊어요."
맹랑한 여자였다. 이미 전화번호까지 알고 묻는다면 순순히 항복하거나 다른 방법을 택해야 옳았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는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었다. 다시 걸었다. 진우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물불을 가리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모른다는데 왜 자꾸 귀찮게 해요? 귀찮게 하길..."
여자의 날카로운 음성이 더 높아졌다.
"지난 5일 저녁 다섯 시 반에 사북에 있는 덕배의 사무실에 오셨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댁이 타고 온 렉서스 넘버와 댁의 사진도 확보가 돼 있습니다. 댁의 신원을 확보한 것만 봐도 아실 텐데요. 그래도 모르겠다시면 경찰에 수사를 의뢰할까요?”
진우가 말을 끝냈을 때까지 여자는 전화를 끊지 않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곽사장과 카지노로 갈 때 전화하신 분이군요. 좋아요. 솔직하게 털어놓죠. 그날 곽사장과 카지노엘 갈려고 했었지요. 그러다 생각이 바뀌어 태백으로 가서 같이 술을 마셨어요. 그리고 열두 시가 다 돼서 곽사장님은 택시로 돌아가시고 저는 술이 취해 다음날 아침에 출발했어요. 그게 다예요 됐죠?"
"곽사장과는 친한 사이십니까?"
"그렇게 친한 사이라고 할 순 없어요. 그저 누구의 소개로 잠깐 만났을 뿐이라구요."
더 이상의 질문은 불필요했다. 여자가 이미 오리발을 내 밀려고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그리고 더 이상의 정보를 제공할 태도가 아니었다. 통화를 끝내고 나니 약간이나마 가졌던 희망의 끈마져 끊어진 것 같아 더 답답했다. 그러다 문득 그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자의 말대로 그날 밤 덕배가 택시을 타고 사북으로 왔다면? 오는 도중에 누군가에 의해 납치의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술에 곯아떨어진 덕배라면 제대로 저항을 할 수 있었겠는가? 덕배를 납치할 사람은 신사장이나 김기동일 것이다. 신사장은 아직 내려 온 흔적이 없으니 그렇다면 김기동이 아니겠는가? 김기동이라면 애초에 총알을 찾기 위해 내려 온 인물이니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었다.
'아.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진우는 서둘러 컨테이너의 문을 나섰다. 그리고 정신없이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납치한 덕배를 안전한 곳에 잡아두려면 놈들이 아는 장소는 한 곳뿐일 터였다. 은광 이상 더 안전한 곳이 있겠는가? 소리를 질러도 고문을 해도 심지어 죽인다 해도 아무도 모르는 곳이 아닌가? 진우의 눈앞에는 사슬에 묶인 덕배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왜 진작 은광을 생각하지 못했던가? 진우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찬바람이 얼굴을 스쳤으나 오히려 시원해서 좋았다. 중간의 낙엽송 군락지를 지나 신동산 정상이 바라보이는 곳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쉬지 않고 달렸다. 멀리 은광 밑으로 돌무더기가 보였다. 그때서야 진우는 랜턴을 챙겨 오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랜턴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우선 굴 입구와 드나드는 사람부터 확인을 하고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굴 입구와 가까운 곳에 숨어서 동정을 살피기로 했다. 살금살금 몸을 숨길만한 곳으로 다가갔다. 그런 다음 굴 입구와 올라오는 사람이 있나 아래쪽을 주시했다. 은광 아래 공터에는 검은색 보온 덮개로 가려진 두 동의 커다란 비닐하우스가 있었다. 또 그 곁에 규모가 좀 더 작은 비닐하우스 한 채와 천막으로 둘러친 두대의 트럭이 보였다. 트럭은 포장마차 인 듯했다. 그 뒤에는 두 대의 봉고와 냉동차 모양의 차가 세워져 있었다. 좀 더 떨어진 공터와 갓길에도 백여 대의 차가 줄줄이 늘어서 있는 것이 환히보였다. 하우스의 스피커에선 계속 뭐라고 지꺼렸으나 알아들을 만큼 소리가 크지 않았다. 아마도 하우스 안에서는 게임이 한창인 모양이었다. 십 분이 지나고 또 십 분이 지나자 추위가 몰려왔다. 달릴 땐 몰랐는데 가만히 있으니 땀이 식어 더욱 추웠다. 인내심을 발휘해 십여 분을 더 견뎠으나 손발이 져려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은광의 입구에도 사람이 얼씬 거리는 기미가 없었다. 망서리던 진우가 벌떡 일어나 슬금슬금 굴 입구로 다가갔다. 사람을 발견하면 그대로 뒤돌아 도망할 준비를 했다. 잡히지 않고 뛸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진우가 입구에 도달할 때까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덕배를 생각하니 어느 곳에선가 용기가 솟았다. 철문을 열고 들어섰다. 굴 안으로 들어갈수록 불빛이라고는 전혀 없어서 칠흑 같았다. 그러나 굴의 구조가 직선으로 이어지다가 끝에서 약간 휘었다는 것을 아는 진우는 랜턴이 필요치 않았다. 오히려 불빛은 놈들의 눈에도 띌 것이었다. 발자욱 소리를 줄여 가능한 한 빨리 걸었다. 어둠은 더욱 짙어져 옆에 사람이 있다 해도 모를 지경이었다. 발로 더듬고 때로는 벽을 더듬어 굴이 휘어지는 지점에 이르도록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인기척이 없으니 오히려 기분이 으스스했다.
"덕배야, 덕배 여기 있냐?"
처음엔 작게 부르다가 진우는 목소리를 더욱 크게 높였다.
"덕배야아..."
예상 밖의 일이었다. 굴은 비어 있었던 것이다. 허긴 놈들이 있었다면 촛불이라도 켰을 것이고 석유난로라도 피웠을 것이었다.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진우는 마음이 허전하기 그지없었다. 곧바로 뒤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시 입구로 돌아 온 진우는 어금니를 물었다. 이제부터는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시계를 보니 네시 반에 가까웠다. 산속에 어둠이 급속히 내려앉고 있었다. 결심을 굳힌 진우는 하우스를 향해 산을 내려갔다. 오정철이란 사내와 기차에서 만난 콧대 휜 안순태 말고는 자신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란 뱃장도 작용했다. 오정철과 안순태가 없는 지금 캐시콜 측에서 누가 자신을 알 것인가 말이다. 김기동이 직접 코앞에서 본다 해도 몰라 볼 것이었다. 하긴 김기동의 얼굴을 모르기는 진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우스로 내려오는 동안에도 어둠은 쉬지않고 짙어져 전등 불빛이 상대적으로 엄청 밝게 느껴졌다. 진우는 약간 망서리다 하우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순간 후끈한 열기가 온 몸을 휘감았다. 안과 밖의 온도가 엄청나게 달랐다. 군데군데 난로가 놓인 통로를 마주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게임에 몰입해 스크린을 향해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었다. 앉은 사람의 등 뒤에도 차례를 기다리는지 구경만 하는지 모를 사람들이 많았다. 진우도 그들 곁에 서서 스크린쪽을 바라보았다.
"자아, 딜러에 국화 아홉 끗 플레이어에 목단 여섯 끗, 배팅 시작. 시간은 삼십 초. 다시 말씀드립니다. 딜러에 거실 분은 빨간색 바구니, 플레이어는 파란색 바구닙니다. 혼동하시고 엉뚱한 소리 해봐야 안 통합니다. 스톱, 배팅 스톱입니다."
마이크를 쥔 사내가 손발을 바삐 움직이며 스톱을 외치자 통로에 죽 늘어서 있던 십여 명의 덩치들이 바구니에 손을 대는 사람을 제지했다. 각자의 앞에 놓인 두 개의 바구니 중에 배팅하고 싶은 바구니에 돈다발을 던진 게이머들의 열띤 얼굴은 그야말로 볼만 했다. 눈에 불을 켠다는 말이 실감이 날 지경인 것이다.
"딜러 일곱 끗, 플레이어 아홉 끗. 프레이어 승."
마이크에서 말이 절반도 나오기 전에 이미 사람들은 스크린을 통해 승패를 알았다. 환호와 탄식의 소리가 하우스를 뒤 흔들었다. 여기서 진우는 인간이 지을 수 있는 희로애락의 모든 표정을 보았다. 덩치들이 재빨리 승자의 바구니에 배팅 액만큼의 돈을 더해주고 패자의 돈은 더 빠르게 걷어갔다. 진우가 몇 게임을 더 구경하는 사이에도 열기는 높아만 갔다. 더 볼 것도 없었다. 밖으로 나오니 현실을 일깨워 주듯 찬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똑같이 생긴 다른 하우스는 조용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기도 사람들로 빈틈이 없었다. 다만 하우스의 반을 갈라 한 쪽에선 서너 명씩 둘러앉아 화투에 열중했고 반은 휴식 공간인 듯 잠을 자거나 술들을 마시고 있었다. 다시 밖으로 나온 진우는 혹시 무슨 단서라도 얻을까 하여 사방을 살펴보았다. 두 대의 봉고차와 탑 차가 보였다. 봉고차 중에 실내등이 환히 켜진 봉고차로 다가가자 금새 문이 열리며 웬 사내가 내다보았다.
"어서 오십시요. 환전하실 거죠?"
"예? 아, 아니요. 전 화장실을 찾고 있는데요."
"화장실은 저깁니다. 게임을 하시다가 혹시 현금이 필요하시면 여기로 오십시요. 모든 종류의 카드를 다 현금화 해 드립니다."
카드를 현금으로 환전해 주는 곳인 걸 진우는 몰랐던 것이다. 얼핏 안을 들여다보니 또 다른 사내가 무슨 기계 앞에 앉아 있었고 그의 등 뒤로 엽총이 세워진 것이 눈에 띄었다. 현금이 많으니 총으로 무장을 한 듯했다. 봉고와 탑 차가 서로 붙은 것으로 봐서 탑차는 금고의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또 다른 봉고차는 안이 캄캄했다. 그때 하우스 쪽에서 웬 사내가 뛰다시피 봉고차로 다가왔다. 봉고차의 문이 다시 열렸다.
"환전 하시 게요?"
"여기 카드요. 얼마 남았나 확인 좀 해보슈."
카드를 건낸 중년의 남자는 연신 눈길을 하우스에 두고 있었다.
"천삼백이 남았는데요? 얼마나 뽑을 거지요?"
"다, 다 뽑아 줘요. 빌어먹을 아까 오천을 땃을 때 그만뒀어야 하는 건데..."
봉고차의 사내가 차에서 내려 옆에 붙은 탑 차로 다가가자 버스 문짝과 똑같이 생긴 문이 스르르 열렸다. 탑 차에 오른 사내는 금세 돈다발을 중년의 남자에게 건냈다.
"십삼만 원을 제한 천이백팔십칠만 원 입니다, 확인하세요,"
"아, 됐어요."
마음이 바쁜 사내는 그대로 하우스를 향해 사라졌다. 진우는 천삼백만 원이란 소리에 자신의 통장에 들었던 금액을 떠올렸다. 결국은 수미가 다 썼지만 천삼백만 원을 모으는데 꼬박 일 년이 걸리지 않았던가? 그런 돈이 여기서는 단 일 분만에 잃기도 하고 배로 불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진우는 입이 썼다. 발길을 돌려 하우스를 다 돌아보아도 덕배에 관한 어떤 단서도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진우는 포장마차로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두 대의 트럭이 마주보고 서 있는 위를 커다란 천막으로 덮어 그 안에다 간이 탁자와 의자를 놓고 장사를 하는 곳이었다. 천막의 입구에는 설렁탕 어묵 김밥 주류일체 등의 글씨가 붉은 페인트로 쓰여 있었다. 게중에 설렁탕이란 글씨를 보는 순간 진우는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꼈다. 점심도 거른 것이다. 천막 밖으로 안에 있는 사람의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진우는 천막자락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왼 쪽 트럭은 어묵과 김밥 같은 스낵 트럭이고 오른 쪽이 설렁탕이었다. 양쪽 모두 손님들이 많았다. 진우는 설렁탕 트럭으로 다가갔다.
"설렁탕 드려요?"
진우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벌써 그릇에 설렁탕 국물을 담으며 젊은 여자가 물었다.
"선불 만 원 입니다."
역시 진우의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진우는 지폐를 차동차 위에 고정된 바구니에 놓았다. 그리고 설렁탕과 깍두기가 놓인 쟁반을 들고 빈 탁자를 찾아 앉았다. 각자 셀프로 가져다 먹는 것을 눈치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맞은편의 스낵 트럭에서 접시에 김밥을 담던 여인이 갑자기 벼락에 맞은 듯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수미였다. 바로 코앞의 탁자에 앉은 진우를 본 것이다. 수미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바닥에서 맴을 돌았다. 그런 수미를 본 덕숙이 역시 놀라 황급히 다가왔다.
"어머, 얘 너 왜 그러니? 엉, 얘 수미야, 너.....?"
"쉿, 쉿, 조용해, 제발 떠들지 말어,"
덕숙이가 자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또다시 깜짝놀란 수미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왜 그래? 갑자기 왜 그러냐고?"
"야, 이년아, 조용히 해. 조용하라니까. 기집애가 눈치도 없어."
그제야 뭔가 이상한 눈치를 챈 덕숙이 수미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왜? 무슨 일이야?"
"아, 몰라. 이따가 얘기 할 게. 조용히 이대로 날 가만히 두기나 해, 넌 빨리 일이나 해."
덕숙이가 수미를 주져앉힌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듯 건너편 트럭과 탁자에 앉아 먹고 마시는 손님들을 훑기 시작했다. 좌우를 주욱 훑어보던 덕숙이가 혼자서 설렁탕을 먹고 있는 젊은 남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다시 수미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저기 혼자 설렁탕 먹고 있는 사람 맞지? 너 네 서방 몰래 바람 폈니? 아니면 빚쟁이냐?"
"기집애, 못하는 말이 없어. 조용해. 듣겠다. 가만 가만 얘기 하라니까."
"그러니까 저 사람이 맞냐고? 네가 놀란 것이 저 사람 때문이지?"
"아유 기집애, 좋아, 저 사람이 바로 순복이 애인이란 말이야. 순복이 애 아빠라구."
"뭐? 정말?"
놀란 덕숙이가 진우를 다시보기 위해 일어났다. 그리고 유심히 남자의 행동 하나하나를 점수를 매겨가며 관찰했다. 그러다 또 다시 수미 곁에 다가 와 앉았다.
"어마, 얘, 얼굴은 정말 잘 생겼다. 미남인 말자 신랑도 저기다 대니까 얼굴이 아니라 곰 발바닥이다 얘."
"누가 아니래? 순복이 고 기집애도 저 얼굴에 뿅 했지 뭐니?"
"이봐 손님 오셨잖아? 아, 손님 안 받을 꺼야?"
남편의 벼락같은 고함 소리에 놀란 덕숙이 후다닥 일어나 허둥지둥 설치는 동안 수미는 진우가 일어나 나갈 때까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아까부터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덕숙이의 행동이 못내 궁금하던 건너편의 말자가 바쁜 와중에도 수미와 덕숙이에게로 불이나케 건너왔다.
"너희들 나 빼고 무슨 역적질 하는 거야? 솔직히 말 해"
"킥, 얜 남은 게 눈치 밖에 없나 봐. 너 조금 전 그 남자 누군지 아니?"
덕숙이가 자랑 섞인 목소리로 말자에게 되물었다.
"조금 전 무슨 남자? 여긴 우리 말고는 다 남자 아냐?"
"요런 맹꽁이, 아까 혼자 온 젊은 남자 말이야. 네가 설렁탕 퍼 줬잖아?"
"어 엉? 어, 맞아 그 잘 생긴 남자? 그런데 그 남자가 왜?"
덕숙이는 다시 말을 아끼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옆에 있는 수미가 끼어들 기미가 보이자 한발 앞서 단번에 말을 쏟았다.
"그 사람이 바로 순복이 신랑이랜다."
"뭐? 정말이야?"
말자가 제대로 놀라기도 전에 건너편 설렁탕 차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야, 말자야, 너 빨리 안 와? 손님 밀리는거 안보여?"
"흥, 뭐 예쁜 이름이라고 많은 사람 앞에서 큰소리로 남의 이름을 부르고 그래. 챙피하게."
말자는 쫑알대면서도 부리나케 자기 차로 돌아가 설렁탕을 퍼 담기 시작했다. 아닌 게 아니라 다섯 시부터 지금까지 계속 손님이 몰리고 있었다. 밀려드는 손님들 사이에 김기동과 천태종이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포장을 들치고 들어섰다.
"어머머, 사장님 아직 식사를 안 하신 모양이죠?"
김기동을 먼저 발견한 수미가 스낵 트럭에서 내려 김기동에게 다가왔다.
"허,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습니다. 제수씨, 우리 설렁탕으로 주시요."
"예, 그러지요, 우선 자리에 앉으세요. 얘, 여기 설렁탕 두 개 있다."
수미는 손님이 더 몰리는 설렁탕 차를 도우려는 듯 말자가 듣게 큰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어머 사장님이네. 얘, 네가 갖다드려."
수미가 설렁탕 쟁반을 가지러 차로 다가가자 말자가 궁금한 듯 말을 꺼냈다.
"얘, 아까 그 사람 이름이 뭐니?"
"갑자기 그 사람 이름은 왜?"
"아, 순복이 신랑이라니까 궁금해서 지. 왜? 너도 몰라?"
"왜 몰라? 알지."
수미는 쟁반을 들고 김기동이 있는 탁자로 향했다.
"얘, 그까짓 이름 쯤이야 아르켜주면 어디 덧나니?"
등 뒤의 말자가 소리쳤다. 쟁반을 탁자에 놓으며 고개만 돌린 수미가 맞받았다.
"덧나긴? 쟤 말하는 것 봐. 이진우야, 이진우, 이제 속 시원하니?"
순간 김기동이 뜨끔한 표정을 지으며 고리 눈을 들어 수미를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수미가 돌아서자 급히 옷자락을 잡았다.
"잠깐, 제수씨, 방금 이진우라고 하셨나?"
"예? 예, 그런데요, 왜 그러세요?"
"아니 내가 아는 사람과 이름이 같아서요. 혹시 서울서 의료기 회사에 다니던 이진운가 해서지요. 지난여름에 회사를 그만 둔 후 지금까지 실종 상태거든요."
"어마, 그 사람도 지난 여름에 그 회사를 그만 뒀는데..."
"뭐요? 그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압니까?"
"조금 전에 여기 왔었어요. 밥을 먹고 갔다구요."
"뭐라구요? 어이 태종이 가지. 제수씨도 가시지요. 제수씨가 얼굴을 아니까."
"어마 전 안 돼요. 못 간다구요."
"예? 그럼 보고 그사람이란 신호만 해요."
김기동과 천태종은 영 내키지 않아하는 수미를 앞장세워 천막을 나갔다. 세 사람이 나가는 것을 본 말자가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찾아 순복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말자야. 말자라니까? 응 다름이 아니고 여기 네 신랑. 참, 네 애기 아빠, 이진우라는 사람이 방금 왔다 갔어. 어? 수미가 단번에 알아보던데? 얘, 너 왜 그러니? 얘 순복아...괜찮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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