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가 사무실을 나서든 시간쯤이었다. 영월의 한 모텔에서는 수미가 부엉이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안 일어날 꺼야? 세 시가 다 됐단 말이야. 시작하려면 한 시간 밖에 안 남았는데 어쩔려구그래? 아 어서 일어나, 일어나라니까?"
부엉이는 채촉하는 수미의 말을 묵살하고 베게에 코를 박고 죽은 척 했다. 수미가 이불을 훌렁 재꼈다. 팬티도 입지 않은 최태식의 볼기짝이 들어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부엉이 최태식은 양손으로 베게를 움켰다.
"흥, 좋아, 좋다구. 안 일어나면 나만 갈 거야. 어차피 오늘 애들이랑 중간 정산하기로 했으니까 그 돈만 챙겨 나만 대전으로 갈 거라구. 혼자 잘 해보셔."
부엉이가 한쪽눈으로 수미를 째려보더니 단번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뭐? 간다구? 이게 그까짓 돈 몇푼을 벌더니 보이는 게 없냐? 그런 코 묻은 돈 천만 원을 가질려고 그 고생을 했냐? 이제 사오 일만 더 하면 오억을 쥘 판인데 그 깐 돈 천에 서방을 버리고 혼자 가겠다구? 좋아, 가. 가보란 말이야. 까짓, 돈 있는데 여자 없겠냐?"
그 순간 부엉이의 얼굴에 베게가 날아듬과 동시에 어깨가 화끈했다. 수미가 어깨 죽지를 힘껏 깨문 것이다.
"악, 이 이게...어, 어"
아픔을 이기지 못한 부엉이가 수미의 파마머리를 힘껏 잡아당겼다. 결과적으로는 어깨의 아픔만 배가 되었다. 어깨를 놓기는 커녕 수미가 더욱 이빨을 옥죄인 것이다.
"항복, 무조건 항복이다. 야, 야 수미야 내가 잘못했다. 어? 이, 이거 놓고 얘기하자고."
"보복하기 없기다."
수미가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한 말이다.
화가 난 부엉이가 수미를 잡으려고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축 늘어진 물건이 덜렁거렸다.
"킥, 쟤는 화를 안 내네? 제법 참을성이 있나 봐."
"뭐?"
수미가 한 손으로 입을 막고 한 손은 자신의 물건을 가르키자 어이가 없어진 부엉이가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슬그머니 주져 앉아 베게를 들어 덮었다.
"야, 조금만 더 참아. 그나마 우린 모텔에라도 와서 편히 자지만 김기동일 봐. 어제까지 잡은 수익이 육십억이 넘었어. 그 돈을 지킬려고 봉고차에서 저러고 있는 게 벌써 며칠 째냐? 애초에 보름을 한다고 공언을 했지만 그 전에 그만 둘 확률이 높아. 하루 이틀은 더 하겠지. 막바지에 들수록 판돈도 커지니까. 김기동이라고 욕심이 없겠어? 그러니 너도 참는 김에 이삼 일만 더 참아. 그럼 나도 최소 오억은 벌잖아? 그렇게 되면 우리도 형편이 쫙 필거란 말이야."
"잠깐. 그러면 현재까지 자기가 오억을 받는다는 거야? 더 벌면 더 받고?"
"물론이지 멍청아. 타짜 몫, 삼십오 퍼센트 중에 내 몫이 십 오퍼센트란 걸 모르냐?"
"어마마, 그러고보면 천만 원은 정말 코 묻은 돈이네."
"그래서 가득이나 게임 진행하랴 김기동이에게 신경 쓰랴 녹초가 된 서방을 이해는 못할 망정 네가 이렇게 막 물어뜯을 수 있는 거냐?"
"어머머, 자긴 왜 진작 액수를 말을 안 했어? 오억이 넘는다고... 역시 당신이 최고야."
"이건 돈 얘기할 때만 내가 하나님으로 보이지?"
"아니, 잘 땐 서방님으로 보여."
"뭐야? 이게.."
그제야 시계를 본 부엉이가 정신없이 옷을 챙겨 입고 수미와 차에 올랐다.
한편 카지노에서는 유명우와 장철규 남매가 바카라 게임에 붙어 있었다. 정오 무렵에 도착해 점심을 먹은 후 시작한 게임이었다. 게중에 미자가 시작한지 불과 삼십여 분만에 삼백여만 원을 땃다. 반면 유명우는 삼백을, 장철규는 백여만 원을 잃어 일행 전체로 보면 오히려 손해를 본 꼴이었다.
"돈벌기가 이렇게 쉬운데 힘든 일들은 뭣 하려 하는지 모르겠네. 아, 오빠도 좀 따 봐."
미자가 유명우가 들으라는 듯 오빠인 장철규를 놀렸다.
"이게 누구 염장을 지르고 그래? 조용히 해. 이제부터가 진짜야."
"진짜는 무슨....순 잃기만 하는구만. 어마, 그것 봐, 또 졌잖아?"
장철규는 물론 플레이에 걸었던 유명우의 돈도 날아가긴 마찬가지였다. 뱅커에 걸었던 미자가 다시 그 돈을 회수한 꼴이 되었다. 유명우는 순식간에 갖고 있던 밑천 오백만 원을 다 털렸다.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유명우는 로비로 내려와 전화를 걸었다.
"날세, 심심하면 여기 와 게임이라도 하지 그래?"
"원, 농담도 잘 하십니다. 전 내일까지 푹 잠이나 잘랍니다. 그러니 형님이나 많이 따세요. 대신 따면 이따가 한턱 쏘는 거 잊지마세요."
"하핫, 이미 틀렸네. 삼십 분 만에 홀랑 까 날렸으니까. 자네가 좋아하는 미자는 좀 따나보드구만서도 ....허허."
"예? 아무라도 따면 됐지요."
"그럼 이따 미자보구 한 턱 내라고 하면 되겠구먼. 미자도 덕배 자네라면 먼저 쏘구 싶어 할 테니까."
덕배는 더 이상의 말이 없었다. 유명우가 덕배와 통화를 마치자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철규와 미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미자 넌 왜 내려 와? 따는 김에 더 따야지."
"아, 오빠 땜에 짜증나 더 못하겠어요."
"뭐라고 내가 너보고 뭐라고 했기에?"
발끈한 철규가 동생을 쏘아보았다.
"날 따라오면 될 텐데 꼭 반대로 가서 잃기만 했잖아? 그렇게 눈치가 없어?"
"그림이 좋은 데로 따라가다보니 그런 걸 어떻허냐?"
"그림이 아무리 좋으면 뭘 해? 뒷장이 맞아 줘야지?"
"아, 서로 싸울 것 없어. 어차피 곽덕배의 말대로 시험삼아 한 것뿐이잖아."
유명우가 말싸움을 시작하려는 장철규 남매의 중재에 나섰다.
"허긴 곽사장 형님의 말이 맞았어요. 이 게임은 예측이 불가능한 것 같아요."
"그건 나도 인정해요. 덕배씨가 설명한 하우스랑 원리가 아주 다른 것만은 틀림없어요. 사실 내가 딴 건 순전히 운이예요."
"미자는 얼마 땃어?"
"천이요. 허지만 회장님이랑 오빠가 오백씩 잃었으니 간신히 본전을 한 거죠 뭐."
"좌우간 미자 네가 딴 건 딴 거니까 이따가 곽사장한테 한턱 쏴. 아까 전화 했더니 딴 사람이 한 턱 내라고 하더라."
"쏘라면 쏴야지요. 허지만 곽사장에게만 쏠 거예요. 두 분은 밑천까지 날렸으니 낄 자격이 없단 건 아실 테죠?"
"뭐야? 이건 이제까지 남자라면 질색을 하더니 이제 보니 순 쑈였구나?"
"이제까지 남자다운 남자를 못 만나서였지, 나는 뭐 여자 아닌가?"
장철규는 머쓱해진 얼굴로 입을 닫았다.
"허헛, 이제 곧 전설의 주먹 왕과 전직 태권도 국가대표가 부부싸움을 하는 걸 보게 생겼군. 장래가 촉망되는 부부 말이야. 철규, 넌 어떻게 생각하냐?"
"장래가 걱정되는 부부겠지요. 헌데 곽사장 형님이 저런 말 같은 걸 좋아하실라구요?"
유명우의 말에 즉시 장철규가 토를 달았다.
"헛. 넌 뭘 잘 모르는구나. 눈치를 보니 이미 둘이 서로 눈이 맞았더라. 그래서 내가 중매쟁이 노릇을 하기로 했다. 그리되면 철규 네가 손위 처남이 될 테니 곽사장과 맞먹을 수도 있잖겠어?"
"그게 그렇게 됩니까? 그럼 어서 곽사장이 기다리는 영월로 가지요?"
"그러자. 애들 불러라."
유명우와 장철규가 탄 승용차가 사북 오거리를 벗어나 영월로 향할 때였다. 반대로 영월 방향에서 세 대의 승용차가 사북 오거리로 진입했다. 나란히 붙은 세 대의 자동차가 사북역과 가까운 어느 식당 앞에 멈췄다. 곧이어 차에서 내린 중년의 스포츠머리의 사내가 귀에서 전화기를 떼더니 차에서 내린 십여 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얼룩무늬 군복에 팔각 모자를 쓴 사내가 들어 왔다. 빨간색 명찰을 단 그 사내는 식탁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뒤돌아 앉았던 중년의 스포츠머리가 뒤를 돌아보다가 웃음 띈 얼굴로 벌떡 일어나 해병 예비군 군복을 입은 사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자네가 우리 대대장님의 아드님이신가?"
"예, 태백지구 강철만 예비역 대윕니다. 선배님 말씀은 아버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래 아버님이 많이 편찮으시다니 자네의 걱정도 크겠네. 내가 문병부터 가는 게 순서지만 이번에 이놈을 놓치면 낭패겠기에 이러고 있네. 참, 자리에 앉아 얘기하세."
중년의 사내는 강철만과 마루 위에 따로 놓인 식탁에 마주 앉았다.
"자네 아버님이신 대대장님이 현역 시절엔 무척 엄하셨지. 뭐든 무조건 우리부대가 일등이 아니면 안 되었으니까. 사격이건 고공낙하건 뭐든 다른 대대를 이겨야지 그렇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어. 그러니 우리 대대가 항상 일등을 할 수밖에 없었지.'
"그건 선배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버님 말씀들으니 정팔봉 중사하면 죽었던 대원도 벌떡 일어설 정도로 무서운 교관이었다면서요?"
"그랬을 때가 있었지. 하지만 나이를 먹으니 마음은 뻔한데 몸이 옛날 같지 않아 활동이 뜸 해. 그 대신 고향의 해병 전우회에 기부금만큼은 꼬박 꼬박 잘 내고 있지."
"그러지 않아도 지난 시월 초에 청주와 증평의 전우회에서 협조 공문이 왔었습니다. 우선 사람을 많이 알고 있는 택시 기사를 상대로 탐문을 해서 그 사람의 존재는 알았지만 이진우란 이름만 가지고는 소재 파악까지는 어렵더군요."
"그래서 이번에 내가 사진을 갖고 왔네. 이 녀석이네. 딸아이하고 셀카로 찍은 걸 이놈만 확대했지. 그리고 어젯밤에 이곳에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았으니 이번엔 틀림없네. 자네의 협조를 바라네."
"선배님의 사위를 찾는데 전우회를 동원한다는게 명분이 없는 행동입니다만, 어쨋던 같은 해병으로써 어려움에 처한 전우의 일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일이니, 이번 한번은 적극 협조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대신 약속은 지키셔야 합니다. 중대장으로써의 제 체면도 있으니 말입니다."
"아, 그건 염려 말게. 이번 일만 해결나면 그까짓 유니폼 오십 벌이 문제인가? 거기다 축구화까지 오십 켤레를 보태지."
"예? 축구화는 비쌀 텐데요?"
"아, 걱정 말게 까짓게 비싸보니 얼마나 비싸겠나. 사위놈만 찾으면 그런 건 문제도 아닐세. 아, 참, 공도 있어야지?"
"저 사람들도 선배님이 데려 온 분들입니까?"
"눈이 많을수록 빨리 찾을 것 아닌가? 저사람들은 우리 회사 직원들로 전부 같은 해병대 출신이야. 나는 직원을 채용할 때 해병대 전역자만 뽑으니까. 이 기회에 사위도 찾을 겸, 단합대회도 할 겸 함께 온 걸세."
정팔봉 중사라 불리운 사람은 다름 아닌 정순복의 아버지였다. 말자가 준 정보를 순복이가 아버지에게 알린 것이다. 마침 이곳은 옛날 정팔봉이 대대장으로 모시던 예비역 중령의 고향으로 그가 말년을 보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아들 역시 해병 출신으로 태백 지구대 중대장인 것도 알았다. 정팔봉은 즉시 옛 상관인 대대장에게 협조를 요청했지만 그는 입원 중이었고 아들인 강철만이 대신 나온 것이다.
"내일이 일요일이니 내일 아침에 소집하는 걸로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그러세. 오늘은 어차피 늦은데다 퇴근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을 테니까. 그럼 시간 있을 때 자네 아버님 문병을 갔다 와야겠군. 괜찮겠나?"
"그러시지요. 병원은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영월 노인전문 병원에 계시거든요."
정팔봉은 직원들에게 예약된 모텔을 일러준 뒤 식사를 마치자 강철만과 함께 떠났다.
바로 그 시간, 신동산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는 십여 명의 등산객이 있었다. 등산객의 앞장을 선 사내가 손을 들어 뒤따르는 대열에게 정지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잘 훈련 된 군인들 처럼 일제히 대열이 몸을 낮추었다. 앞장 선 사내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방금 도착했다. 음, 이상 없어. 응? 그때 그 난로가 있을 테니 괜찮겠지. 그럼, 석유는 갖고 왔지. 뭐라고? 아 걱정을 말어."
대열은 다시 기슭으로 기어올라 조용히 철문을 열고 굴속으로 사라졌다. 리더는 안순태였다. 정오쯤에 신동산의 반대편을 출발해서 산길을 우회해 자신이 갇혔던 은광에 도착한 것이다. 지난여름, 김기동과 천태종에게 밀려 쫓겨났던 심복들과 함께였다. 예정 대로라면 내일인 10일에 올 예정이었으나 신동규가 윤치우와 오는 길에 일당을 다 몰아 온 것이다. 굴의 끝에 이른 안순태패는 각자 준비해온 방수 돗자리를 깔고 침낭을 꺼내 잠자리를 마련하고 난로의 불을 피워 먹을 것을 준비하기에 바빳다. 그 사이 안순태는 굴 밖으로 나와 망원경으로 아래의 하우스에 촛점을 맞추었다.
9일의 하루도 다 지나서 산골짝엔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불꺼진 난롯가의 의자에 앉은 진우는 손가락 하나 까닥 하지 못하고 보낸 오늘 하루를 생각했다. 덕배에 대한 손톱 끝만한 단서도 얻지 못하고 하루를 허비한 것이다. 신사장패가 덕배를 납치했다면 어느 외진 장소로 옮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옮겼을까? 추리를 해 나가려 해도 그 세계의 생리를 전혀 모르니 처음부터 막혀버렸다. 놈들이 덕배를 해칠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 맥없이 앉아 있는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이제 와 생각하니 천애의 고아인 자신이 고아라는 사실을 잊고 산 것이 형제 같은 덕배가 있었기 때문인 걸 알았다. 두손으로 얼굴을 감싼 진우는 뱃속으로부터 목구멍으로 커다란 덩어리가 울컥 올라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소리를 삼키며 오열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만약 덕배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안다면 어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럴 진데 노인들은 피를 토할 일이 아닌가? 그렇다고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까? 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 이 일을 또 어찌해야 할 것인가? 진우가 생각의 갈피를 못 잡고 헤메는 순간에 전화벨이 울렸다. 좁은 컨테이너 안에서 울리는 그 소리는 엄청 크게 들렸다. 화면에 나타난 번호는 낮선 번호였다. 순간 친구의 전화를 쓰겠다던 석호의 말이 생각났다. 정말 석호였다.
"형님, 석혼데요. 여긴 영월인데요. 방금 신사장을 봤거든요. 머리가 벗겨진 무슨 부장이라는 사람하고 같이 술집으로 들어가는 걸요."
"뭐? 신사장이란 사람이 정말 맞디?"
"설마 제가 신사장을 모르고 그놈들 쫄병을 했겠어요? 틀림없어요. 오정철이가 운전을 하던데요 뭐."
"오정철이 누군데?"
"아, 형님은 모르시겠네요. 과장급 깡패라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아, 나도 알것 같다. 그 바싹 마른...헌데 그새 곽사장의 흔적은 좀 찾았냐?"
"이제 신사장이 나타났으니 신사장 짓이던 김기동의 짓이던 곧 밝혀 질 겁니다. 형님은 너무 걱정 마시고 밥이나 많이 드세요."
이것도 정보라면 큰 정보였다. 신사장의 출현은 반드시 덕배와 관련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놈들이 어쩌면 사업장을 뺏기 위해 덕배를 이곳에 데려 올 수도 있을 것이었다. 사업장을 뺏던 정식으로 인수를 하던 본인의 얼굴과 사인이 필요할 것이었다. 진우는 당장 영월로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가서 어디서 어떻게 그놈들과 상대를 한단 말인가? 자신의 무능력 탓만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일이 급한 것이다. 진우는 드디어 결심을 했다. 문을 열고 밤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믐에 가까워 달도 없었지만 랜턴도 필요 없었다. 덕배를 구해야 한다는 오로지 한 가지 일념으로 발길에 익은 대로 자동으로 발길을 내 디뎠다. 덕배 아버지에게 알려 의견을 물어야 했다 어쩌면 지혜로운 노인인 덕배 아버지가 어떤 해결책을 내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집에 닿을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렸지만 진우는 숨도 별로 차지 않았다. 노인의 방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그때 방안에서 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덕배 아버지가 방문을 가만히 열었다.
"덕배냐?"
"아, 아닙니다. 진웁니다."
"네가 밤중에 웬 일이냐? 춥다. 이리로 들어오너라."
"아버님께만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그래? 잠깐 기다리거라."
옷을 걸친 덕배 아버지가 마루로 나와 신발을 찾아 신었다. 진우가 삽짝께로 물러나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진우는 지난 5일 저녁의 일부터 조금 전 석호의 일까지 비교적 소상하게 털어 놓았다. 그 사이에도 노인은 말없이 듣기만 했다.
"허, 내 항상 위태하게 생각했건만. 네가 그동안 내게 숨기느라 노심초사 했겠구나. 괜찮다. 그놈들이 노리는 것은 사람 목숨이 아니라 돈이니라. 항상 돈이 화근을 부르는 법이지. 늦었으니 너는 윗방에서 자거라. 군불은 둘 중에 누가 올지 몰라 넣어 놓았으니 뜨뜻할 게다."
"예. 아버님, 면목이 없습니다."
"덕배란 놈과 네가 서로 반씩만 닮았으면 좋았으련만, 에이 쯔쯔."
진우가 자리에 누웠을 때 노인의 방에서 한동안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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