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날인 7일 아침이었다. 덕배를 실은 장철규의 차가 원주에서 출발했다. 미자의 차도 그 뒤를 따랐다. 오전까지라고 했으니 서울까지 가는데는 시간이 충분했다. 장철규는 영동고속도로에 들어서자 고용주인 야쿠자 송길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 약속한 장소로 갈까요?"
"아니요. 일단 용인까지 오면 다시 연락 하시요."
약속 장소가 서울에서 용인으로 바뀐 후 거의 한 시간을 달려 용인에서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동수원 톨게이트를 통과하면 다시 연락하라는 것이다.
"야, 미자야. 내 차가 보이냐?"
"바짝 붙으라며? 바로 뒤에 있잖아?"
"어? 그렇구나. 헌데 이 자식이 또 바꿨다. 동수원 톨게이트로 빠지란다."
"오빠라면 안 그러겠어? 미행이 겁나니까 그러겠지."
"아무튼 잘 따라와."
"알았어."
동수원까지는 금방이었다. 톨게이트를 통과해 곧바로 전화를 했다.
"동수원 입니다."
"그 길로 직진해서 2킬로만 오십시요. 오른 쪽에 동공원이 있습니다."
동공원은 공원이라기보다 도심 속, 주택으로 둘러쌓인 작은 공터라고 해야 옳을 만큼 규모가 작았다. 장철규의 차와 미자의 차가 도로를 벗어나 멎자 공원 입구에 세워진 차에서 예의 송길천이라는 사람이 굳은 표정으로 장철규를 맞았다.
"물건을 볼 수 있을까요?"
"트렁크에 있습니다. 보시지요."
장철규가 재빨리 트렁크를 열자 손발이 밧줄로 묶인 덕배의 모습이 보였다.
"됐습니다."
송길천이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자 일행인 듯한 사내가 작은 가방을 장철규에게 건냈다.
"확인 했습니다."
지퍼를 열어 본 장철규의 대답이었다. 이어 덕배가 실린 자동차의 열쇠를 송길천에게 건냈다.
"우리가 떠난 후 5분 후에 가도록 하시요. 그럼 이만."
렉서스와 일행의 또 다른 차는 금새 멀어졌다. 처음부터 렉서스는 장철규의 차가 아니었다. 송길천이 납치용으로 빌려 준 것이었다. 덕배를 이 차에서 저 차로 옮기지 않고 곧바로 운반하기도 좋고 다른 사람에게 들킬 염려도 없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오빠가 운전 해. 아까 그 차는 기가막히게 부드럽게 나가드만 오빠 차는 이게 차야? 밟아도 잘 나가지도 않잖아?"
"야, 꿈 깨라. 아까 그 차가 얼마짜린데 그래? 그리고 우리 형편에 그랜져면 됐지 뭘 더 바라냐, 바라길?"
"오빠 형편이 어때서? 단 이틀 만에 삼억을 버는 형편이잖아?"
"시끄러, 그 돈이 다 내 거냐? 조직에 식구가 몇 명인데 그래?"
"하여튼 난 몰라, 이번 일도 반은 내 공이란 것만 알아 둬. 힝."
"좋아 이번 곽사장 일이 마무리 되는대로 새차 하나 뽑아주지. 대신 이제부터 계기판을 잘 보란 말이야. 놈들을 놓치는 날엔 곽사장은 죽은 목숨이란 말야. 알어?"
"알았어. 에그 오 분이 훨씬 넘었네. 신호가 안 잡히면 어떻하지?"
"걱정 말아. 그새 20 키로야 갔을라구? 20키로까진 문제없어."
차의 시동을 걸자말자 야쿠자가 떠난 방향으로 급히 차를 몬 장철규가 위치 추적기의 스위치를 켰다. 잠시 소음이 흐르다가 화면에 초록색 점이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어디냐?"
"장안 구청에서 의왕 쪽으로 가는데?"
미자의 무릎에 올려둔 노트북의 화면에는 지도 위에 점이 움직이고 있었다. 노트북의 지도에 나타난 점은 추적기가 알려주고 있었다.
"얼마 못 갔군. 보나마나 의왕 인터체인지에서 과천으로 가겠지만 혹시 안양으로 빠질 지도 모르니 잘 봐야 한다."
"알았어. 하지만 309번 도로를 탈거야. 신사장의 사무실이 송파라며?"
"야, 신사장인지 야쿠잔지 아직 모르잖아? 그리고 사무실보다 우리처럼 어디 별장 같은 곳에 데려갈 수도 있단 말이야. 그렇게 되면 미리 연락을 해야 안 늦지."
우연이겠지만 미자의 말대로 의왕에서 309번 국도를 탄 송길천의 렉서스는 과천을 지나 송파로 향하고 있었다.
"야, 이제 됐다. 위치 추적기를 켜라고 뒷차에 전화 해."
"내가 눌러줄 테니까 오빠가 통화 해."
상대방이 나오자 미자는 재빨리 장철규에게 휴대폰을 건냈다.
"예, 놈들은 송파로 향할 것 같습니다. 중간에서 만나시지요."
"이미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 누가 무슨 연락을 했다는 말씀인지?"
"원주에서부터 당신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바로 뒤에 있으니 한 번 보시지요."
정말로 그런 것 같았다. 검은색 에쿠스 두 대였다. 차 안엔 몇 명인지는 몰라도 남자들이 가득했다. 장철규는 연합파의 기민함에 은근히 놀랐다. 놈들이 덕배를 어디로 옮길지 모르니 아예 원주에서부터 장철규를 미행한 것이다. 차가 탄천을 건너자 장철규의 앞뒤로 두 대의 차가 더 붙었다. 부천에서 온 유명우의 심복들이었다. 가락시장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오빠. 추적기 안 보고 뭐 해? 저 앞에 렉서스 안 보여? 너무 붙였잖아?"
"어, 그렇구나, 허지만 우릴 볼 수가 없어, 이렇게 차들이 많은데 어떻게 보겠어? 뒷차에 인계할 때가 됐나보다."
장철규는 자신의 차에 한 명을 보내 달라는 전화를 했다. 이어서 차를 가락시장 쪽으로 붙여 세웠다. 뒷차에서 급히 한 명이 뛰어 왔다.
"저기 흰색 렉서스가 곽사장이 있는 차요. 이제 곧 어디로 들어가겠지요. 준비들 하라고 하세요."
가락시장의 코너를 돈 렉서스가 은행을 지나자 말자 왕복 2차선 길로 접어 들더니 금새 사라져 버렸다.
"오빠, 바로 저 빌딩으로 들어가는데?"
뒷자석의 사내가 총알 처럼 튀어나가 뒷차를 탔다. 사내가 탄 차를 따라 모든 차가 따라 붙었다. 장철규는 근처의 유료 주차장에다 파킹을 한 후 비로써 긴장을 풀었다.
"오빠 안 가볼 거야?"
"너, 미쳤냐?"
그제서야 행렬의 꽁무니에 붙었던 찐드기 유명우가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차에도 추적기를 달아 준 것이다.
그 사이에 송길천은 신사장 소유의 빌딩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빌딩이라고 하나 주차 공간은 불과 십여 대 밖에 되지 않는 규모였다. 이미 송길천의 연락을 받은 신사장 패가 기다리고 있었다. 신사장을 중심으로 좌우에 오정철과 안순태가 서고 그 뒤에 태백 지역에서 철수한 삼수를 대장으로 네 명이 나란히 서 있었다. 송길천과 그의 동료 차가 나란히 신사장 앞에 서자 성질 급한 신사장이 먼저 다가갔다.
"어딧어?"
"트렁크요."
"열어."
트렁크로 다가간 신사장이 막 뚜껑을 열려는 순간, 눈이 부실만큼 강렬한 라이트가 주차장 벽면을 스쳤다. 불빛은 꼬리를 물고 번쩍거렸다. 네 대의 자동차가 예고도 없이 들어닥친 것이다. 마지막 차는 아예 주차장 출구를 막고 있었다. 덕배가 부른 연합파 여덟 명과 찐드기파에서 가려 뽑은 여덟 명이 타고 온 차들이었다. 생각 밖의 사태에 놀란 오정철과 부하들이 신사장을 급히 둘러 싸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차에서 내리려던 야쿠자 송길천은 재빠르게 다시 운전석에 올랐다. 그리고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위급을 알리려는 것이었다. 그러자 연합파 사내 하나가 빠르게 다가와 운전석을 향해 야구 방망이를 쳐들었다. 유리창이 박살 날 판이었다. 깜짝 놀란 송길천이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두 손을 들었다. 사내는 송길천을 끌어내린 다음 전화기를 발로 콱 밟았다. 차에서 내린 사내들이 신사장 주위에 모여 들었다. 신사장은 기가 죽지 않았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너희들 뭐야? 어디서 온 놈들이냐?"
그러자 서른 서너살 정도의 호리호리한 사내가 하얀 이빨을 들어내며 다가왔다. 오정철이 급히 신사장을 가로막았다.
"여, 오정철이, 아직 신사장 보디가드 하냐?"
"아니? 너 이 새끼 휘대 아니냐?"
"누가 아니래냐? 이거 오 년 만이군. 헌데 머리가 돌아간다는 네놈이 어쩌다 우리 형님을 건드렸냐? 할 수 없다. 이제부터 너희들 모두 죽어줘야겠다."
"뭐야? 이 새끼가?"
휘대라 불리는 사내가 렉서스로 다가가 덕배가 갇힌 트렁크를 열었다. 그러자 묶인 줄 알았던 덕배가 흉내만 내었던 밧줄을 풀어던지고 밖으로 나왔다. 신사장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들이 꾸민 일에 오히려 당한 것을 알았다.
"어때 한번 해 볼 테냐?"
휘대가 오정철을 향해 주먹을 들어보였다. 오정철이 신동규를 돌아보았다. 신동규는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싸우라는 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때 덕배가 손을 들어 휘대를 제지하고 나섰다.
"모두들 잠깐 기다려. 신사장과 할 얘기가 있으니까. 신사장, 얘기 좀 합시다."
덕배는 신사장의 차로 보이는 에쿠스의 뒷좌석에 먼저 올랐다. 이어 신동규가 옆에 앉았다.
"우리끼리 있으니 편하게 말을 놓지. 신사장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나하고 경쟁을 하자는 거야 전쟁을 하자는 거야? 경쟁에서 졌으면 깨끗이 승복을 할 것이지 저런 놈을 시켜 날 납치를 하다니 우습잖아? 야쿠자를 시키면 내가 네 짓인 걸 모를 줄 알았냐?"
덕배의 말에 신동규는 심한 굴욕감을 느꼈다. 경쟁에서 지다니? 빌어먹을 교통사고만 안 났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이봐 신사장, 난 네 체면을 세워주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해 왔어. 그래서 지금 해먹고 있는 하우스도 눈감아주고 있잖아? 하우스만 해도 그래. 내 구역 안에서 허락없이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신사장 너도 알 거 아냐?"
"그건 우리 조직에서 하는 사업이 아니야. 그 사업은 이미 삼 년 전에 접었다고. 지금 하고 있는 놈은 전직 형사인 김기동이란 놈이 독자적으로 하는 거란 말이야."
"그럼 신회장이나 네가 왜 가만히 있는 거야?"
"그거야 경찰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우리 조직에서 나설 일이 아니잖아?"
"어이, 신사장. 솔직하지 못하군. 그냥 김기동이 돈을 쌓아놓을 때를 기다린다고 하면 좋잖아? 어때? 이제 곧 들이칠 거지?"
"우리가 그놈을 친다 해도 돈을 먹기 위한 건 아니야. 배신자를 응징하자는 거지."
"애초에 김기동을 내려보낸 건 너잖아? 아니지 신회장이시지. 그래서 김기동을 시켜 다이아를 넣었다는 총알은 찾았나? 애매한 내 친구만 쫓고 있었지? 허긴 그놈은 그것만 찾는 게 아니더군. 원무현이 감춘 돈 냄새를 맡고 다닌다니 말이야."
순간 신동규의 눈이 덕배의 눈에 멎었다. 총알 뿐 아니라 원무현의 일까지 알고 있다니 도대체 이놈이 어디까지 알까 싶은 것이다. 그렇다고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신동규는 어금니를 지긋이 물고 덕배를 노려보았다.
"넌 우리 조직의 정보력을 우습게 본 모양인데 그 총알로 윤치우 검사를 회유하려던 건 이미 알고 있었어. 지금 너의 아버지 신회장이 무슨 생각에 김기동을 그냥 두는지도 알아. 김기동과 하우스를 어떻게 할 건지 윤검사와 이미 얘기가 됐다는 것도 말이야. 윤검사가 곧 사표를 내고 변호사 사무실을 낸다며? 물론 사무실은 신회장께서 마련해 주실 테고 ...아니지. 김기동이 해주는 꼴이겠군. 너 이번 일은 신회장이 모르고 있지? 내가 직접 알려 줘? 그래서 너의 아버지가 우리 회장 앞에 무릎을 꿇는 걸 네게 보여 줄까? 어이 신동규. 나를 고자질이나 하는 그런 쫌팽이로 만들지 말아 줘. 너나 나나 남자 아니냐?"
신동규는 계속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 빛이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이제껏 마음만 먹으면 못하는 일이 없던 신동규의 자존심이 철저히 망가지고 있었다. 속대로 한다면 이놈들을 모조리 구덩이에 쓸어 넣고 싶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속마음일 뿐인 것이다. 이 일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는 건 상상하기도 싫었다. 보나마나 이번엔 정말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캐시콜뱅크의 전무로 있는 매형이 이 소식을 듣는다면 속으로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말이다. 고양이 눈으로 기회만 노리고 있던 누나와 매형에게 빌미를 줄 수는 없었다. 어쩌면 회장의 지시를 묵살한 자신을 아예 조직에서 손을 떼게끔 일을 꾸밀지도 모른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안 될 말이다. .
"좋아. 내가졌다. 조건을 말해 봐. 협상하자고."
"물론 네 전제 조건은 이제까지의 모든 일은 없었던 걸로 하자는 것일 테지?"
"알고 있다니 얘기하기 편하군. 그래, 네 조건은 뭐야?"
"간단해. 네가 몇 가지 약속만 하면 되니까."
두 사람의 대화가 길어지자 밖에서 서로 대치하던 주먹들의 긴장도 조금 씩 누그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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