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4일 밤이었다. 석호는 진우가 해 준 저녁밥을 먹자말자 등이 쑤신다며 개켜놓은 이불더미에 엎드려 있었다. 진작 설거지를 끝낸 진우는 밖으로 나가 장작을 한아름 가져와 난롯가에 쌓았다. 어제부터 진우는 자신과 석호의 밥을 컨테이너에서 해결하기로 했었다. 끼니마다 노인이 챙겨다주는 밥을 앉아서 받아먹기가 송구해서였다. 그렇다고 진우가 가서 가져 온데도 밥을 준비해야 하는 노인의 수고는 마찬가지인데다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날씨마져 추웠던 것이다. 컨테이너에 이미 그릇과 냄비가 있으니 쌀만 있으면 되었다. 그런 진우에게 덕배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없이 쌀과 찬거리를 챙겨주었다. 진우는 난로에 나무토막을 넣고 그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석호야, 자냐?"
"아 아니요. 안 자요."
"그럼 한 가지 물어보자. 너 그날 여기 뭐 하러 왔었냐? 여긴 그냥 빈 창고일 뿐인데?"
"그건 저도 잘 몰라요. 김기동 그 새끼가 가보자고 하기에 온 것 뿐이라고요."
며칠 같이 지내는 사이 석호는 진우에게 형으로써의 예의를 지켰다. 또한 진우도 마음 편하게 석호를 적에서 동생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그 사람이 무엇하러 여길 오자고 했는지도 모른단 말이지?"
"글쎄요. 눈치를 보니 무얼 찾는 것 같던데요? 이 안은 물론이고 컨테이너를 빙빙 돌면서 땅바닥을 살피는 걸로 봐서 뭘 묻은 흔적을 찾는 것 같기도 했구요."
"여기 뭐가 있다고 그랬을까? 너 혹시 날 찾아다니는 걸 잘못 안 건 아니냐?"
"그 새끼가 처음 여길 내려왔을 땐 눈이 새빨개서 형님을 찾아다녔지요. 헌데 형님이 연합파 곽사장에게 있다는 걸 눈치 채고부터는 갑자기 찾기를 단념했었어요. 그러더니 나보고 하우스 장소를 물색하라는 지시를 내리더니 보세요. 지금 잘 해먹고 있잖아요."
"그 하우스라는 게 그럼 캐시콜의 신사장인가 하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고 김기동이 하는 거란 말이냐?"
"제가 왜 이 꼴이 됐는지 말씀드렸잖아요. 결국 신사장이나 김기동에게 이용만 당하고 하마터면 쥐도 새도 모르게 땅에 묻힐 뻔한 거란 말입니다."
"그러고보면 의리가 어쩌고 하며 말만 근사했다는 말이군."
"그걸 나도 진작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당할 줄은 몰랐죠. 허지만 나도 당하고만 있지 않기로 작심을 했다구요. 김기동과 천태종이 이 새끼들 내가 배때기를 쑤셔 죽이기 전에는 나도 못 죽어요. 또 한 놈. 오덕이 이 새끼도 마찬가지구요. 시팔 놈의 새끼들."
"야, 그런다고 억울한 네 처지가 나아지냐? 이참에 아예 손을 씻고 백수인 나하고 노가다라도 뛰자. 그게 현명한 처사야."
석호의 귀엔 더 이상 진우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이불자락을 거머진 손만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진우도 입을 닫고 난로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창문으로 랜턴 빛이 스치더니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진우는 황급히 모퉁이에 세워두었던 엽총을 집어 들고 한 손으론 주머닐 더듬었다. 잠바 안 주머니에 든 엽탄을 약실에 밀어넣음과 동시에 낮은 소리로 물었다.
"누구요?"
어느새 엎드렸던 석호도 일어나 진우의 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
"나야. 문이나 열어."
"뭐야? 덕배냐?"
문을 열자 한손엔 랜턴을 다른 손으로는 비닐 봉투를 든 덕배가 씩 웃고 있었다.
"아, 녀석하곤. 최소 일 년은 감수했다. 올려면 진작 전화를 하던가."
문 안으로 들어서려던 덕배가 순간 무엇을 보았는지 우뚝 섰다. 덕배의 눈길을 따라 진우가 돌아보니 놀랍게도 석호의 손엔 날카로운 칼이 쥐여져 있었다.
"앗 죄송합니다. 오덕이 놈일 거란 생각에 나도 모르게 그만... "
석호가 황급히 칼을 등 뒤로 돌렸다. 연합파의 사장급인 곽덕배 앞에서 칼을 든 자신에게 먼저 놀란 것이다. 진우는 얼른 책상 쪽을 바라보았다.
"너, 그 칼, 네 등에서 뽑은 거잖아? 저기 서랍에 넣었는데 언제 갖고 있었냐?"
"어제요. 놈들이 오면 저도 무언가 방어할 게 필요하잖아요."
"네가 석호냐?"
덕배가 의자에 털썩 앉으며 비닐봉지는 진우에게 건네고 눈길은 석호에게 주었다. 봉지 안에는 과일이 들어 있었다.
"예, 사장님. 제가 석홉니다."
"음, 너 저기 은광에서 튈 때 보니까 몸이 제법 잽싸더구나."
"예? 사장님도 그때 거기 계셨습니까?"
"자식, 너 상구하고 동창이라며? 이 지방 놈이 어쩌다 캐시콜에 들어갔어?"
"학교 졸업하자말자 서울로 가서 웨이터 생활을 좀 했었거든요. 거기서 최상사 형님을 만나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7년 전 일입니다."
"아, 그래? 네가 최상사 밑에 있었단 말이지? 최상사는 남자다운 사람이지. 그 사람이 요즘은 송파에 있다는 소릴 들었는데 넌 어쩐 일로 김기동이 졸개가 되었냐?"
"이곳 지리에 밝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김기동이 절 불려 내린 겁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내 친구의 은광을 말없이 드나들었단 말이냐?"
"아, 아니요. 아닙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김기동이..."
"우리 애들 말을 들으니 김기동 그 자식 내일까지 해먹고 자리를 옮기려나 보더라."
"아, 어디로 옮길지 제가 압니다. 그 장소도 제가 찾았거든요. 바로 형님네 은광 아래 쪽 공텁니다. 거기가 하우스 해 먹긴 딱 좋은 장소지요."
아무리 적이라 해도 이 지방을 휘어잡고 있는 연합파의 사장 급이라면 석호로서는 감히 쳐다도 못 볼 위치였다. 헌데 곽사장이란 이 사람은 처음 본 자신을 스스럼 없이 동급으로 대하는 것이다. 석호는 김기동이나 오덕이 같지 않은 덕배에게 친근한 생각마져 들었다.
"석호 얘기는 조금 전에야 알았다. 헌데 진우 넌 왜 그동안 내게 말 안했어?"
"쟤가 쫓긴데서 누구에게도 말 안했지. 여기저기 광고할 필요 없잖아?"
"그건 그래. 석호 넌 놈들에게 잡히면 보나마나 즉시 사망이다. 신사장에게도 연락을 하지 말아. 놈들도 널 이용만 하려고 들 거니까. 알았냐?"
"예, 알고 있습니다. 사장님,"
"다 나으면 밥벌이 할 곳은 내가 알아 봐 줄 테니까 걱정말고. 알았지?"
덕배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너, 설마 이 일로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테지?"
그제야 진우는 묻고 싶던 말을 했다.
"음, 실은 여기 오려던 것이 아니었다. 노인네를 좀 만나볼까 해서 왔었지."
"그래? 갔었냐?"
"음,"
"그래서?"
"욕만 먹었다."
"무슨 일로?
"다음에 얘기 해. 나 그만 가야겠다. 석호 너도 몸조리 잘해라."
덕배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진우도 랜턴을 챙겨 그 뒤를 따랐다. 석호는 황송한 마음에 큰형님에게 하듯 허리를 꺾어 인사를 하려다 등이 당겨 아픈지 인상을 찌푸렸다. 어두운 바깥은 산골답게 기온이 뚝 떨어져 공기가 싸늘했다.
"웬만한 일에는 역정을 안 내시는 분 아니냐? 그런 분이 화를 내시더란 말이지?"
"말 말어. 열 마디 중에 세 마디도 꺼내기 전에 딱 거절을 하시더란 말이다."
"글쎄 네가 무슨 말을 했기에 거절을 하시더냐구?"
"그게 말이다. 거 왜 너도 알잖어? 김기동이 선수를 치는 통에 내가 하우스를 접었다는 걸 말이야. 그것도 있고 네 일로 캐시콜 놈들도 밉고 그래서 놈들의 돈을 싹 긁어 올 요량으로다 노인네의 기술을 좀 빌리려고 했었지. 물론 돈을 긁으면 한 푼 남김없이 좋은 일에만 쓴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헌데 노름의 노짜도 제대로 꺼내기 전에 욕만 먹었다."
덕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우는 걸음을 멈춰 어이없는 표정으로 덕배를 쳐다보았다. 덕배도 우뚝 서 뒤로 돌아섰다.
"왜? 내 말이 잘못됐냐? 놈에게 그 정도의 복수는 해줘야 할 것 아니냐구?"
"너의 아버지 앞에서 노름 얘기를 하고 욕을 안 먹는다면 그 게 이상한 거지. 넌 너의 생물학적 아버지의 얘기까지 들었다며 그런 소리를 한 거냐?"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오냐? 석호가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놈 말대로라면 신사장도 지금 쯤 김기동이 돈을 노리고 있는 게 틀림없어. 신사장이나 김기동이 돈을 갖고 튀기 전에 내가 먼저 정당하개 먹으려는 게 잘못이냐? 노인네의 협조만 있으면 가능한 얘기 아니냔 말이다."
"눈길 한 번 잘못 돌리는 통에 이꼴이 된 나를 보고도 모르냐? 제발 옆길로 새지 말란 말이야. 넌 나보다 열배는 심지가 굳은 놈이 아니냐? 그 깐 것 딱 잊고 합법적인 사업으로 돈은 벌 궁리를 해. 나도 너의 아버지 뜻과 같아. 너야말로 노름의 노 짜 옆에 가면 안 되는 걸 알잖아?"
"짜식이 우리 아버지하고 몇 달 지내더니 이젠 나보다 한 수 더 뜨네? 내가 할 충고를 네가 다 하면 난 뭐냐? 하지만 김기동일 저대로 부자 되게 둔다는 건 말도 안 돼."
"그건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허지만 어쩔 거야? 잘못하면 더 큰 탈이 날 텐데."
"허긴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검경이 이미 냄새를 맡고 준비 중이란 정보도 들어와 있으니까 말이다."
"뭐라고? 그렇다면 더욱 안 될 일을 생각한 거잖아?"
"그래도 노인네가 허락만 하시면 전광석화 처럼 해먹고 뺄 수도 있는 문제거든. 내게 정보가 왜 필요하겠냐? 틈새를 노리기 위한 것 아니겠냐? 잽싸게 해먹고 입 닦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단 말이다. 조직을 동원한 것도 아니고 개인이 정당하게 딴 돈 아니냐?"
덕배가 다시 걸음을 옮기며 아쉬운 듯 탄식의 신음소리를 냈다. 사실 지난여름 놈들에게 쫓기던 생각을 하면 진우 역시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긴 했다.
"그만 들어가라. 허고 석호 저녀석이 갖고 있는 칼에 신경 써라. 한 눈에 척 봐도 저 자식 눈빛이 아주 불량하더라. 참 엽총은 이제 필요 없잖아?"
"안 그래도 내일 쯤 너의 아버지에게 돌려 드릴 참이다. 아까 그 총에 든 건 공포탄이다. 설마 너의 아버지가 내개 실탄을 주셨겠냐? 오발 사고 전과가 있는 내게 말이다."
"헛 그건 그래. 사냥꾼 기질이 남으셔서 그런지 그런덴 아주 용의주도 하시거던,"
"내일 내가 한번 너의 사무실을 들리마. 뜨끈한 설렁탕도 생각나니까."
"그래라 점심 때 맞춰 내려 와라. 기다리마."
"그래 더 안 내려 갈테니 조심해서 내려가. 혼자 갈 수 있지?"
"허헛, 자식 저만 산길에 밝은 줄 아나 봐."
12월 5일이었다. 아침부터 장철규는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하필....'
납치할 대상의 이름을 듣는 순간부터 생긴 고민이었다. 야쿠자가 요구한 인물은 곽덕배였다. 장철규는 사실 곽덕배라는 인물을 잘 알지 못했다. 얼굴을 본 적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여러 사람에게서 들은 바 있었다. 게다가 보스인 유명우로부터도 수 차례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십년 전 지금의 보스 유명우가 범죄단체 결성과 폭력으로 원주 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때였다고 했다. 당시 유명우가 다른 조직의 수감자들에게 몰려 죽게 생겼을 때 곽덕배가 그를 구해주었다는 것이다. 혼자서 칠팔 명을 상대로 싸워 그 중 두 명은 중태로 만든 것이다. 연합파의 신입에 불과했던 곽덕배는 그 일로 출소를 불과 한 달 남겨두고 또 다시 형을 더해 청송 교도소로 이송되고 말았다는 얘기였다. 그 후에 유명우는 비록 노는 물도 다르고 파도 달랐지만 곽덕배에게 늘 호의로 대했고 열 살이나 아래이던 그를 의형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런 보스의 의형제를 납치하라니 고민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납치 제의를 거절하면 그걸로 그만일 터였다. 그러나 조직의 금전적인 사정이 썩 좋지 않은 지금 그만한 일거리도 쉽지 않은 상태였다. 보스인 유명우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자꾸만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느라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댔기 때문이었다. 최근엔 건설사를 인수하면서 무리하게 돈을 빌리다 심지어 캐시콜뱅크놈들의 돈까지 끌어넣고보니 비싸기로 소문난 놈들의 이자마져 감당하기가 벅찬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일단은 내색하지 않고 야쿠자의 요구를 받아들이긴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이 복잡해진 장철규는 끝내 그 일을 추진하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보스 유명우와 그 일에 대해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날 낮에 장철규는 영월을 향해 차를 몰았다. 장철규는 운전 중에도 연속해서 이곳저곳과 전화를 주고 받고 있었다. 오후 네 시쯤 영월에 닿은 장철규는 약속한 장소로 다시 이동해 일행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날 저녁 다섯 시 반경이었다. 12월의 해가 본래 짧은데다 산으로 둘러쌓인 곳이라 어둠은 벌써부터 짙어지고 있었다. 칠수와 만기에게 사무실을 맡긴 덕배가 문을 나서 계단으로 향했다.
"끝나고 문단속 잘 해. 술은 적당히 하고."
"예, 먼저 들어가십시요. 형님."
"그래, 내일 보자."
덕배가 계단을 내려가는 사이 자동차 라이트의 밝은 빛이 현관 유리를 비추었다. 이어 차가 멈추는 듯 하더니 불빛도 꺼졌다.
"손님이 왔나보다. 들어들 가."
뒤돌아 선 덕배가 칠수에게 손짓과 함께 일렀다. 또 한 번 가볍게 목례를 한 칠수와 만기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려다 호기심이 발동해 창 밖을 내다보았다. 덕배는 현관을 나서 걸음을 옮기면서도 방금 도착한 자동차를 유심히 보았다. 직업적으로 몸에 붙은 행동이었다. 어두워 잘 보이진 않아도 형태로보아 한눈에도 렉서스 L S 모델이었다. 그런데 덕배가 막 자동차를 스쳐 지나가려는데 운전석의 유리가 스르르 내리더니 웬 여자가 얼굴을 내 밀었다.
"저, 혹시 곽사장님이라고 아세요? 여기 계신다던데요."
갑자기 낯선 여인이 자신을 찾자 누구의 소개로 온 손님임을 직감한 덕배였다.
"접니다만, 누구 소개로 오셨는지 몰라도 사무실로 가시면 제가 아니어도 저희 직원들이 알아서 모실 겁니다. 들어가 보시죠."
덕배의 말이 끝나자 실내의 미등이 잠깐 켜지더니 찻 속의 여인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대출을 받으러 온 게 아니예요. 내가 여기 간다니까 우리 오빠가 곽사장님께 안부를 전해 달래서 온 것이라구요."
"예? 그럼 오빠분의 성함이..."
"유명우요. 우리 오빠 아세요? 오빠는 곽사장님을 잘 알던데..."
"아, 유명우 형님 말씀이군요. 오랫동안 못 뵜네요. 형님도 안녕하시지요?"
유명우라면 알고도 남았다. 그와의 인연이 깊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내려 온 이후 사업에 바빠 서로 연락이 없었다. 여하튼 유명우의 여동생이라니 반가운 마음도 있었다.
"저, 여기 카지노에 놀러왔거든요. 헌데 여긴 처음이라서요. 실롄 줄 알지만 곽사장님께서 잠깐만 안내를 해 주시면 안 될까요?"
"형님의 얼굴을 봐서라도 안 될 건 없죠. 그럼 객장 안까지만 모시지요. 제가 운전을 할까요?"
"어마, 아니예요. 네비따라가면 되니까 카지노 앞까지는 문제없어요."
"아, 예. 그럼."
덕배는 차를 돌아 조수석에 앉았다. 덕배를 태운 차는 어둠을 향해 조명을 쏘며 스르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이층 창문 안에서 밖을 내다보던 칠수와 만기는 사장이 그 차를 타고 떠나는 것을 보았다. 돈을 빌리려는 손님이 아니었던 것이다.
"야. 방금 그 차 말이다.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여자 같지 않았냐?"
"글쎄, 어두워서 뭐가 보여야지? 차는 렉서스 L S 클라스더구만...."
"미등이 깜박 했잖아? 맞아. 파마 머리였던 거 같애. 여자 맞어."
칠수는 여자라고 확신한 듯 사무실에 들어와서 실실 웃고 있었다.
"왜 웃냐? 여자면 네가 어쩌겠다고?"
"얌마, 사장님 나이를 생각해 봐. 장가들 나이도 됐잖어?"
"그런데?"
"혹시 그새 숨겨 둔 애인이 아닌가 해서지. 오늘따라 30분이나 빨리 퇴근하셨잖아?"
"에이, 여태까지 안하던 연애를 이제 와서 한다고? 웃기지 마라."
칠수와 만기가 제 나름대로의 추리를 할 때 차는 오거리를 직진해 금새 석탄 유물 종합 전시관 앞을 달리고 있었다.
"듣기론 카지노에서 밤을 새는 사람들이 많다던데요. 정말 자리가 없을 정도예요?"
마주오는 차의 불빛을 받은 여자의 얼굴을 보던 덕배는 아까부터 은근히 놀라고 있었다. 밝은 곳에서 본 그 여자는 적어도 덕배의 눈에는 대단한 미인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묘하게 끌리는 얼굴이였다. 성격상 여자에게는 곰살굽지 못한 덕배였다. 그래서인지 여태껏 여자를 사귀어 본 적도 없었다. 덕배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자 쪽으로 자꾸만 눈이 돌아가서 난처했다.
"그래도 요즘은 예전보다 덜하다고 하더군요. 웬만하면 슬롯머신도 자리가 있을 겁니다. 슬롯머신에 자리를 잡아 드릴까요?"
"아니에요. 전 포커를 좋아해요."
"아, 예. 그럼 그쪽으로 알아보죠."
덕배가 카지노 매표원으로 있는 정보원에게 막 전화를 하려는 찰라 벨소리가 울렸다. 낮에 점심을 같이 먹고 두어 시간 전에 헤어진 진우였다.
"진우냐?"
"어, 나야. 방금 도착했다. 오늘 네 덕에 잘 먹었다."
"잘 먹긴, 야, 나 지금 손님이 오셔서 카지노 가는 길이거든. 내일 내가 다시 전화 하마"
"음, 알았다. 그럼 끊는다."
통화를 끝낸 덕배는 매표원에게 전화를 걸어 입장권과 포커판의 자리를 부탁했다.
"곽사장님의 발이 넓으신가 봐요?"
"사업상 필요한 곳 만이지요."
"호호 그 말씀은 사업 이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말씀이군요. 저를 포함해서요."
"예?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닙니다."
덕배는 당황한 표정으로 급히 손사래를 쳤다. 차는 어느새 백운교 위의 커브를 돌아 눈 앞에 보이는 강원 랜드 가까이 왔다. 호텔과 가까워지자 편도 이 차선인 갓길에 수많은 차들에 길게 줄을지어 세워져 있었다. 카지노에서 주차장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얌체 주차들을 한 것이다. 이제 곧 좌회전을 하면 카지노에 닿을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리 좌측 차선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운전석의 여자는 그것을 모르는지 그대로 이 차선으로 가다가 직진 신호에 따라 카지노의 입구를 지나쳐버렸다. 분명히 네비는 좌측 길을 가르키고 있건만 그대로 직진한 것이다.
"어마,"
"어, 지나버렸네요. 뒤에 오는 차가 없으니 얼른 후진해 좌측으로 꺾어버려요."
"어머 그러다 뒤에서 차가 오면 어떻게요?"
"그렇다고 터널을 지나 한 바퀴 돌 수는 없잖습니까."
"그럼 뒤 좀 봐 주세요."
"그러죠."
덕배는 뒷 창문을 향해 돌릴 수 있는 만큼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뒷 목에 극렬한 충격을 받은 덕배가 풀썩 고개를 꺾었다. 운전석의 여인이 미리 감추고 있던 전기 충격기를 사용한 것이다. 이어서 여인은 가던길 그대로 터널 속으로 차를 몰았다. 터널을 경계로 입구쪽은 사북이고 출구 쪽은 고한에 속했다. 5백여 미터에 불과한 터널을 빠져나온 차는 연신 전방을 주시하며 고한에 닿았다. 운전석의 여인이 전화기를 들어 신호를 보내자 철길 밑 삼거리 주차장에 있던 차 한 대가 비상등을 깜박였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스키시즌이라 주차장은 차들로 가득했다. 콘도마다 턱없이 부족한 주차 공간 때문에 이곳까지 만차를 이룬 것이다. 여인이 길가에 차를 세우고 짧게 크랙션을 누르자 깜빡이던 차가 스르르 주차장을 빠져나와 앞장을 섰다. 앞선 차는 개천과 철길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가다가 샛길로 빠졌다. 여인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앞차가 서더니 문 밖으로 남자가 나왔다. 여인도 급히 문을 열고 나왔다.
"에그, 오빠는...힐 콘도 입구에서 기다린다더니 왜 엉뚱한데서 기다려? 나 저 사람 깰까봐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야, 스키 타러 온 것들이 그렇게 많을 줄 알았냐? 차를 댈 곳이 있어야 말이지. 좌우간 시간 없어. 빨리 주사 한 방 놔야지 정신나면 곤란해."
남자는 미리 마취주사를 준비한 듯했다. 운전석에 성큼 오르더니 기절한 덕배의 왼팔 윗부분에 주사기를 탁 꽂았다. 소매를 걷지 않은 옷 위였다.
"됐다. 차 바꾸자."
"가만, 차 안에 내 핸드폰, 참, 저 사람꺼도 .....됐어, 이제부터 오빠가 앞장 서."
"알았어, 제천에서 55번 도로를 탈거니까 중간에서 쉴 생각 말고 원주까지 그냥 따라와. 알았지?"
길이 좁아 차를 돌리지 못해 뒷차부터 후진으로 샛길을 빠져 나왔다. 그런 다음 아까 왔던 길을 거슬러 고한 대교 밑을 지나 38번 국도로 올라섰다. 지나는 차들이 많지 않아 속도를 높이기도 좋았다. 덕배는 옆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흡사 졸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사내는 덕배를 한 번 쳐다보더니 한손으로 핸드폰의 단축 버튼을 눌렀다. 이어폰에서 상대의 다급한 음성이 흘렀다.
"철규냐? 어떻게 됐어?"
"예. 형님 성공 했습니다."
"아, 그래? 잘했다. 그럼 나도 지금 출발할 테니까 거기서 만나자."
"예, 이따 뵙지요."
"그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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