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설

파투(破鬪) 12. 막다른 길(1) 숨겨둔 패

fiction-google 2024. 3. 16.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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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뭐 하냐?"

전화를 받자말자 덕배가 뱉은 첫마디였다.

"으음. 지금 컨테이너 경첩 고치고 있다. 헌데, 이거 너무 망가져 잘 되질 않는군."

"그럼, 새걸루 하나 사 둘 테니까 그건 아예 버려라. , 너 점심 먹었냐?"

"아직 열한 시도 채 안 되었을 텐데 무슨 점심 타령이야?"

"그럼 잘 됐네. 너 지난 번 내가 갔던 그 길로 지금 내려와라. 내 차 알지? 그 차로 우리 직원 보낼 테니까."

"뭐라고?"

다소 황당한 기분이 든 진우였다. 대낮인 지금 시내로 나오라는 덕배의 말을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해서였다. 이곳이 노출될 것을 꺼려 밤에만 몰래 다녀가는 덕배였다. 헌데 왠 일로 쫒기고 있는 걸 뻔히 아는 자신을 대낮에 불러 내는 것일까?

"? 너 갑자기 돌았냐? 한 낮에 나 보구 시내로 나오라구?"

"? 잡혀갈까봐 겁나냐? 아무 말 말고 형님이 나오라면 나와. 알았지?"

", 그새 잊어버렸냐? 내가 너보다 생일이 한 달씩이나 빠르다는 사실을?"

"그놈의 생일 타령 또 시작 됐군. 아무튼 산 아랫 동네로 슬슬 내려 와. 지금 차 보낼 테니까."

"잠깐, 대낮에 날 불러내는 이유나 알자고..."

"이유가 어디 있어? 목욕에 이발하고 밥 먹을려고 그러지."

"아니 그런 일루다 아차하면 너까지 위험해질 그런 일을 왜 해?"

", 그 자식 말이 많네. 그럴만 하니까 그러지. 고지식하게 따지긴...아무튼 만나서 얘기 해."

", , 일단 너의 아버님께 여쭤보고 갈 테니까 그리 알어."

", 노인네에겐 내가 이미 전화 했다. 그냥 내려 와."

이미 작정을 한 듯한 덕배의 말을 무작정 반대할 이유도 없는 진우는 대강 옷을 털고 손으로 머리를 빗어 넘긴 후 산 아랫 길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길은 덕배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과 동떨어진 길이었다. 밤에 덕배가 다니는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을 택한 것이다. 자동차가 사북 읍내에서 이곳 산 아래까지 오려면 30분은 걸릴 것이니 시간은 충분했다. 사람 많은 곳으로 가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헤아려 봤다. 거의 넉 달만이었다. 진우는 이제껏 아무런 관심도 없던 자신의 모습을 살펴봤다. 덕배가 사다준 잠바와 운동화는 그런대로 쓸만 했으나 그 사이 제멋대로 자란 머리가 귀를 덮었고 면도한 지 일주일이 넘은 수염은 꺼칠하기 짝이 없었다. 목욕도 마찬가지였다. 날씨가 춥기 전까지는 골짜기 흐르는 물로 대강이라도 씻었지만 요즘은 도저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뜨끈한 온탕에 몸을 푹 담궈보고도 싶었다. 삼십여 분쯤 내려가자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이라고 하나 집들의 숫자로보면 동네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었다. 불과 대엿 채의 집만 드문드문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마을 한 가운데로 찻길은 나 있었다. 요즘은 웬만한 시골길은 포장이 안 된 도로가 없는 것이다. 마침 때를 맞춰 덕배의 코란도가 그 길을 달려오고 있었다. 느티나무가 있는 공터에 선 코란도에서 낯선 사내가 나와 진우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곽사장님 친구분이시지요?"

"온다는 전화 받았지요."

"아이고 말씀을 낮추십시요. 몇 살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초면인데...."

"초면이고 구면이고가 어디 있습니까? 그냥 말씀을 낮추시죠."

사내는 뒷좌석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주었다. 차는 느티나무를 한 바퀴 돌아서 왔던 길을 다시 달리고 있었다.

"혹시 구 뭐라던 사람은 퇴원을 했나요?"

"? , 구본웅이요? 그저께 가 봤습니다만...글쎄요. 제가 볼 땐 다 나은 것 같은데...사장님께서 며칠 더 쉬라고 하셔서....아직 병원에 있습니다."

"아마 그래야 할 거요.. 그날 보니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합디다."

"그러지 않아도 구본웅이 선생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달라 했습니다."

"내가 뭘 했다고...그리고 선생이라니? 내 나이 겨우 서른넷이요. 선생 소리들을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에이, 전 겨우 스물아홉이거든요?    저보다 다섯 살이나 위가 아니십니까? 말씀을 낮추지 않으시니 제가 영 불편합니다. 참 제 이름은 강칠숩니다. 저도 형님으로 생각할 테니 형님께서도 그냥 칠수라 부르시면 됩니다. 형님."

"듣기 불편하다니 그럼 말을 놓지. 내 이름은 이진우야."

"? 이진우요? 형님 성함이 이진우란 말입니까?"

"그런데 왜?"

운전을 하던 사내는 백미러로 뒷좌석의 진우를 흘깃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어제 사장님 지시로 채권 추심하러 다니는 애들을 만났거든요. 게중에 캐시콜뱅크와 거래하는 추심사 놈도 있었습니다. 헌데 아무리 찾아도 형님 이름은 없던데요? 최근에 넘어 온 명단이라 거기 없을 리가 없거든요. 그러니 형님 대출금은 추심사에 명단이 넘어오기 전에 누군가가 갚았다는 결론 아니겠습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진우는 머리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채권 추심사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없다니? 게다가 대출금을 누가 갚았다는 건 정말 말이되지 않는 소리 아닌가? 이 세상에 덕배 이외에 누가 그 많은 돈을 갚아 줄 사람이 있단 말인가?

"네가 잘못 봤겠지. 내겐 덕배 말고는 빚을 대신 갚아 줄 사람이 없어. 게다가 누군가가 내 연고지를 뒤지고 다녔다는 소리도 들었거든."

"아닙니다. 명단은 몇 번이나 확인했고 이 지방에 나와 있는 추심사 애들에게 탐문도 했습니다. 형님 연고지인 태백을 최근에 뒤졌다는 애들도 없었고요."

"그래? 글쎄, 분명히 날 찾는 사람이 있었다던데....이거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당췌...."

진우는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천애 고아나 다름없는 자신에게 단돈 만원을 선뜻 갚아줄 사람이 없었다. 덕배 말고는 그럴 여력이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덕배가 갚았다면 숨길 이유도 없고 명단을 조사하라는 지시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 추심팀들이 이곳에 늘 상주하냐?"

"? 아 아닙니다. 걔들은 전국을 돌아다녀요. 이곳엔 카지노가 있잖아요? 대출은 전국 각지에서 하지만 때로는 카지노에 오려고 돈을 빌리는 사람이 있거든요. 이런 사람들은 돈은 못 갚아도 연고지에 숨지 않고 거의 카지노 부근에서 얼쩡대기 마련입니다. 정보로 먹고사는 추심팀이 그걸 모르겠어요? 이번에도 노름을 좋아하는 악성 채무자가 명단에 끼었나 보던데요?"

그렇다면 김기동이란자는 이제껏 채무가 아닌 총알의 행방을 쫓고 있다는 덕배의 말이 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채무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없다는 사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시내와 가까워질수록 진우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향해 누가 돈을 떼먹고 총알을 숨긴 놈이라고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추심사 말고도 나를 찾는 사람이 있단 얘기를 들었는데 혹시 아는 것 있나?"

", 그 얘기요? 태백 지구 해병 전우회에서 주로 택시 기사들에게 묻고 다니는 것 같습디다. 여기 기사들은 본바닥 사람이 많잖아요? 좁은 바닥이라 사람 찾는데는 택시 이상 없거든요."

"택시가 아니라 김기동이란 사람 말이야."

"? 캐시콜의 김기동이요? 그 새끼는 어제 개장한 하우스에 메달려 정신이 없을 걸요?    우리 사장님은 그 새끼 때문에 이번에 왕창 손해를 봤어요."

"손해?"

"그럼요. 손해지요. 데려왔던 기술자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잖아요? 위약금조로 큰 거 한 장 이상이 깨졌지요."

"큰 거라면 억을 말하는 거야?"

"그럼요. 계약상 위약금은 오천인데 우리 사장님이 배로 주셨지 뭡니까? 허기야 그러니 사람들이 사장님이라면 껌벅 죽긴 합니다만......"

"그러고도 남을 친구야. 뱃포도 크지만 의리 하난 지킬 줄 아는 친구니까."

"잘 알고 있어요. 저도 사장님을 모신지 십 년이 거든요."

", 그래? 그럼 앞으로는 우리도 서로 가족처럼 지내자."

"사장님과는 이미 가족처럼 지냅니다."

"그래, 앞으로도 네가 사장을 잘 도와 줘라."

"물론입니다. 형님, , 다 와 가네요."

차는 국도를 벗어나 남로를 달리고 있었다. 사북 교차로가 눈 앞에 다가오기 바쁘게 우회전으로 신교를 건너 목적지에 닿았다. 차에서 내린 진우는 사방을 둘러봤다. 이곳에 온 첫날 본 건물과 풍경이었다. 공터에는 수십 대의 자동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진우는 칠수가 안내하기도 전에 먼저 눈에 새겨 둔 덕배의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올라 이층 사무실의 문을 열자 서너 명의 사내와 여자가 보였다. 커피포트와 보자기를 보아 다방 아가씨가 커피를 배달한 것 같았다. 그들은 일제히 진우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뒤따라온 칠수가 진우 뒤에 나타나자 그중에 한명이 급히 일어나 진우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시지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내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칠수가 먼저 진우 앞에 나섰다.

"형님 저 방으로 들어가세요."

칠수가 가르키는 방의 문을 열자 손바닥으로 턱을 고이고 무엇을 내려다보던 덕배가 눈알만 치켜들어 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런 모습을 본 진우는 웃음이 나왔다. 어릴 때의 심술궂은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 뭐냐? 그 두꺼비 돌 맞은 표정은?"

", 왔냐?"

"오랜만에 하산을 하니 세상이 좀 이상하게 보이더라."

"미친놈, 도사가 되다가 말더니 헛소리를 지꺼리는군,"

자리에서 일어난 덕배가 문으로 걸어 나오며 이죽거렸다.

"아냐, 갑자기 여러 사람들을 보니 이상하더라니까?"

"이상할 것 되게 없군. 난 네가 추심사 명단에 없다는 게 더 이상하더라. 너 혹시 오는 길에 칠수에게 들었냐? 네가 추심사 얘들의 표적이 아니라는 것 말이다."

', 대강 들었지. 명단에 내 이름이 없다더군. ,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그걸 내가 알면 돗자리를 깔았지. 도사가 되다만 네가 모르는데 누가 알겠냐?"

아까부터 말은 농담처럼 하면서도 진우의 태도나 표정을 계속 살피는 덕배였다. 진우의 말과 행동에서 무엇을 찾으려는 눈치였다.

"난들 어떻게 알어? 이 넓은 세상에 너 아니면 기댈 곳이 없는 몸인 걸 몰라서 묻냐?"

"그래서 더 이상하다는 것 아니냐? 너 혹시 부자 애인 사귄 적이 있냐?"

"부자? 완전히 반대였지. 오죽하면 그게 나 같은 놈을 뜯어먹었겠냔 말이다."

"내 말은 그러니까. 그 여자 이전의 여자 말이다. 그 여자가 부자였었냐는 거지."

진우는 잠시 순복의 얼굴을 떠올렸다. 헤어지면 안 된다고 애원하던 순복의 얼굴이었다. 헤어진 이 후 밝게 웃는 얼굴이 생각 난 적은 없었다. 이상하게도 어쩌다 한번이라도 순복이를 생각할 때면 반드시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하던 눈빛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다. 아니, 웃는 장면이 있긴했다. 잇 사이에 고추가루가 낀 그녀의 입이었다. 얼굴 전체가 아니라 언제나 웃는 입만 커다랗게 크로즈업되는 것이다.

"직장다니는 여자가 다 그렇지. 부자는 무슨....가만, 그 여자는 아니래도 그녀의 아버지가 땅 부자란 말은 들은 것 같군."

진우는 처음 수미와 만나서 같이 술을 마시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 수미는 순복의 아버지를 원망하며 그가 땅 부자라는 말을 한 것 같았다. 아니다. 양조장 사장에다 땅 부자라고 했던가? 여하간 수미에게서 부자란 소리가 나온 것은 틀림없었다.

"그럼 그 양반이 대신 갚았나보군."

", 어림없는소리. 자기 딸에게서 떨어지라고 내게 모욕을 주던 사람이..., 말도 안 돼."

", 어찌됐던 당분간은 네가 누구에게 납치될 가능성은 줄었다. 총알을 찾던 김기동은 하우스에 메달려 꼼짝 못할 테니까."

"그래도 뭔가 찜찜해서 말이야..."

"나하고 같이 있는 이상 걱정하지마라. 아 참, 잔소리 그만하고 목욕부터 하러 가자. 밥은 좀 늦게 먹더라도 목욕을 먼저 해야겠지?"

"이런, 네가 목욕 소리를 하니까 갑자기 몸이 더 근지러운 것 같군."

"시끄러. 네가 근지럽다니 오히려 나까지 근지럽다. , 빨리가자."

사무실에는 여전히 사내들과 칠수가 탁자 위에 놓인 서류를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칠수가 벌떡 일어나 문 밖까지 따라나왔다.

"얼마나 달래?"

"대당 오천 씩 달랍니다."

"우리 쪽에선 얼마를 제시했냐? 서류는 깨끗하지?"

"삼천이요. 모든 서류는 일단 깨끗합니다."

"그럼, 원하는 대로 줘. 어차피 이자 따먹기 아니냐. 아까 보니까 년식이 오래된 것 같진 않더라."

"삼 년 된 겁니다. 팔면 억은 문제없습니다."

"그럼 네가 알아서 해. 우린 사우나에 간다."

". 염려 마시고 다녀 오십시요. 사장님."

칠수가 두 사람의 등 뒤에 허리를 꺽어 배웅을 했다.

"차를 잡혀 카지노에 가려는 사람들인가 보지?"

덕배가 하는 일을 알고 있던 진우가 물었다.

", 헌데 저 사람들도 카지노가 아니고 김기동이 하는 하우스로 가려는 사람들일 거야."

"뭐라고? 그걸 어떻게 알어?"

"개장 첫날인 어젯밤에 털린 꾼들이 아침부터 우리 사무실로 계속 오니까 알지. 이런 식이면 김기동은 며칠 내로 한 밑천 잡게 될 거야. , , 저기 봐라. 고급차들이 줄줄이 태백 쪽으로 가잖아. 저 차들이 바로 인솔 차를 따라 하우스로 가는 거란 말이다."

", 도박에 미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가 보군."

"그러니까 내가 해보려던 거지. ,"

사우나는 삼층으로 된 호텔의 지하에 있었다. 서울에서 본 것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규모의 호텔이요 사우나탕이었다. 옷을 벗고 들어가 사우나실을 열어보니 손님이라곤 그들 둘 뿐이었다. 시설은 깨끗하고 탕안의 물의 온도가 알맞았다. 진우는 서울에서 방 한 칸 없던 시절 기숙사까지 가기 싫어 한동안 찜질방에서 지내던 때가 생각났다. 탕에 몸을 담근 진우는 그때와 지금이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을 느끼고 가슴이 뜨끔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뿌리없는 생활도 마찬가지고 빈손인 것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럴줄 알았으면 너의 아버지에게 비법이나 전수해 달라고 조를 걸 그랬지 뭐냐?"

대강 샤워를 마친 덕배가 탕으로 들어오자 진우가 지꺼린 말이었다. 덕배는 이게 무슨 소린가 멈칫하더니 스르르 몸을 담그며 진우를 향해 손바닥으로 물을 훌쩍 뿌렸다.

", 산에 있으면 안 될 놈이 산으로 들어가더니 이젠 무협지 흉내를 다 내는군. 비법은 무슨 얼어죽을 비법 타령이냐?"

"넌 아직 모르고 있었냐? 너의 아버님이 이 시대 마지막 타짜이신 걸?"

"? 이 시대의 마지막? 거창하게 나오시네. , 우리 아버진 그냥 타짜이실 뿐이야. 아니 타짜였을 뿐이라고 해야겠군."

"? 너도 너의 아버지가 타짜였던 건 알고 있었단 말이지?"

"? 너만 아는 큰 비밀인 줄 알았냐?"

"나도 너의 아버님이 지난날의 얘기를 들려주시기에 알았지. 젊으셨을 때 노름과 사냥을 하시던 얘기들 말이다. 금광을 따라다니시기도 했다더라. 그러면서 나보고 힘을 내서 세상을 헤쳐 나가라고 하시더군.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니 나같은 인간은 흉내도 못 낼 일들을 하셨더라. 지금도 마찬가지 신 것 같어. 젊은 우리보다 더 대단한 육체와 정신을 지니셨잖아? 지난 번 꿩 사냥 때 보니 훨훨 날으시더라. 아무튼 나로선 상상할 수 없는 큰 어르신인 걸 이 나이 먹도록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지 뭐냐."

"헌데 비법 전수란 무슨 비법을 말하는 거야?"

", 그거야 타짜의 손기술을 말하는 거지. 진작 비법을 전수 받았다면 이럴 때 카지노든 하우스든 가서 한 몫 챙겨 올 것 아니냐?"

"겨우 생각한 게 그거냐?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기술이 좋으신데 왜 노름을 안 하시겠냐? 진작 돈을 따서 네 빚이라도 갚아주고 싶으셨을 텐데 말이다."

"아 그거? 그건 스승님이란 분과의 약속 때문일 거야. 난 그렇게 들었는데?"

"................"

덕배는 말없이 진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어서 미간을 찌프려 말하기 전에 잠깐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아무도 없는 욕실을 새삼 둘러본 다음 입을 열었다.

"노름에서 손을 떼신 건 순전히 나 때문이야. 노름 뿐아니라 금광과 사냥을 그만 두신 것도 마찬가지지. 그 것뿐이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너 놀라지 마라. 우리 아버지가 말이다. 우리 아버지가 사실은 내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더라."

"?"

정수리가 뜨끔할 정도로 놀란 진우는 갑자기 목구멍까지 콱 막힌 듯 아무 말도 할 수도 없었다. 진우는 혹시 잘못 들었나 해서 눈을 크게 뜨고 덕배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덕배는 여전히 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러고보면 농담으로 그런 얘기를 할 덕배도 아닌 것이다.

"그것이 다가 아니다. 두분에게 얽힌 기막힌 사연이 또 있더라고. 그 얘기도 삼 년 전에야 어머이한테 들었다. 내가 세 번째로 감빵에서 나왔을 때 어머이가 털어놓으시더라. 아무리 전과자의 씨앗이라도 아버지를 봐서 그러면 안 됀다면서 우시더라. 허헛, , , 전과자는 누구를 두고 한 말인지 이해하겠냐? 나 역시 듣고도 이해 못한 말이었거든. 미리 말하자면 어머이하고 내 생부라는 작자 모두가 전과자 출신이라는 거야. 그 얘기를 듣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두 분에 얽힌 얘기는 쇼킹 그 자체더란 말이다."

"뭐어야?.....이거야 원...."

"? 너도 쇼크 먹었냐?"

진우를 향해 덕배는 빙긋 웃음을 흘렸다. 세월도 지나 이제는 충분히 이해를 한다는 표시요 또한 그 일에 그만큼 초연해 졌다는 뜻일 거였다.

"두 분 연세가 40여 년 차이가 나는 것은 이미 어릴 때부터 알았지만 네가 너의 아버지 아들이 아니란 건....이건 내게도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네가 그럴땐 나는 어쨌겠냐? 말도 마라. 사실 놀란 것도 놀란 거지만 모든 사실을 듣고나니 우리 아버지 참으로 존경스럽더라. 나라면 그렇게는 못할 일을 하셨더란 말이야."

"대단하신 분인 건 짐작 했었지만 네가 감동할 정도란 말이야?"

"내가 너한테 뭘 숨기겠냐? 이 기회에 너도 들어 봐."

덕배는 의외로 덤덤한 얼굴과 차분한 목소리로 선선히 말을 시작했다.     

"나를 가져 배가 만삭이 되신 우리 어머이가 굶주림과 추위로 얼어죽기 직전에 우리 아버질 만나셨다더라."

"어디서?"

"그 얘기하기 전에 먼저 우리 어머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것부터 말해야겠다. 우리 어머이 이름이 신영옥인데 대여섯 살때 길을 잃어 고아원에서 자랐다더라. 그래서 이름은 알아도 지금까지 정확한 나이와 생일을 모르신다. 고아원에는 함께 자란 남자애가 있었데. 그러다 열두어 살 때 엄마를 찾으러 가자는 남자애의 말을 믿고 고아원을 도망쳤데. 하지만 엄마는 못 찾고 결국 부산에서 구걸을 했다더라. 그러다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꼬임에 속아 둘 다 소매치기 조직에 잡혀간 거라.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 그때부터 혹독한 수업을 받고 버스와 지하철에서 소매치기를 시작했다더라.. 한 달도 되기 전에 잡혔는데 처음 한두 번은 어려서 훈방이 되다가 몇 번 잡히니까 소년원에 들어갈 수밖에? 그때부터 또 감빵을 몇 번 들락거리니까 나이는 먹고 배운 기술은 없고...그러니 또 그길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지 뭐냐?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어머이가 젊었을 때는 기술이 기가막히게 좋았다더라. 조직에서도 어머이가 수입을 제일 많이 올려서 나름대로 대접을 받았다니까. 허나 이미 별이 다섯 개씩이나 붙은 다음이었다지."

", 그건 지금도 그러실 거다. 요즘도 손가락 운동은 계속 하시니까. 어제는 더 기막힌 운동을 하시더라."

"운동? 무슨 운동을 하셔?"

"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은 운동이야. 글쎄, 콩과 쌀알을 젓가락으로 집어 옮기시는데 얼마나 빠르고 정확한지....초당 두 개라면 믿겠냐? 이거야 원, 완전히 세상에 이런 일이더라. 지난번엔 젓가락으로 날아가는 파리를 탁탁 잡아내시더라니까..."   

"녀석하고는 ...과장도 정도껏 해야 믿지. 젓가락 운동? 그건 가만있으면 손발이 더 빨리 굳을까 하시는 거고... "

너무 심각한 분위기가 될까 미리 걱정이 된 진우의 농담에 덕배가 물을 튕기며 피식 웃었다.

", 말을 자르지 말어. 어디까지 했는지 헷갈리니까. 알았냐?"

",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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