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오시래요."
송비서가 인터폰을 귀에서 떼며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창가의 소파에 앉아 송비서의 가슴에서 눈을 떼지 않던 신동규가 벌떡 일어나 회장실 문을 열었다. 신회장은 들어서는 아들을 향해 눈동자만 한번 들었다 놓았을 뿐 보던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지난 여름 교통사고를 당한 이 후 아버지 신회장을 처음 방문하는 자리였다. 성질 급한 신동규는 다리의 고통보다 입원 기간 자체가 고문이었다. 조각 난 뼛조각이 채 붙기도 전에 억지를 부려 퇴원을 했고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면서도 나이트클럽을 들락거렸다. 신동규는 인사도 없이 사무실 가운데 놓인 소파에 털썩 앉았다. 잠시 후 신회장이 서류를 손에 쥔 채 아들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얼굴을 찌푸렸다. 신동규는 그런 아버지의 눈치를 살핀 후 슬쩍 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신회장은 들고 있던 서류를 탁자에 펼쳐 한 곳에 검지를 세워 툭 하고 찍었다. 신동규는 곁눈질로 슬쩍 보고서도 억지로 외면하고 있었다. 아들의 반응이 없자 신회장은 아예 손가락 모두를 구부려 서류가 놓인 탁자를 퉁퉁퉁 두들겼다. 신동규는 할수없이 아버지의 손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회장은 말없이 아들의 얼굴을 건너다보며 팔짱을 끼고 천천히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 순간부터 신동규는 관자노리에서 정수리까지 슬슬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신회장은 머리에 손이 올라가는 아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신동규의 손은 여러 곳을 긁고 있었다. 머리에 이어 목과 팔에서 손등까지 가려워지는 것이다. 신동규가 아버지의 꾸중만 들으면 몸이 가려운 것은 어릴 때부터 있던 증상이었다. 가려움 뿐만 아니라 얼굴에 열이나고 머리에 땀이 솟았다. 아버지의 태도로 보아 지금 단단히 화가 난 것이 틀림없어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눈빛을 마주치기가 무서웠다. 신동규의 머리에서 차차 김이 나기 시작했다. 긁다보니 머리칼이 자신의 손길에 마구 엉켰다. 머리를 긁는 두 손이 점점 더 바빠졌다. 곧 아버지의 입에서 벼락같은 꾸중이 터질 것이다.
"예, 제가 잘못했어요. 아버지. 제가 무조건 잘못 했다구요."
침묵으로 일관하는 아버지를 더 참을 수 없던 신동규가 큰소리로 항복을 했다. 근래에 없던 신회장의 태도였다. 삼 년 전 원무현을 꼬드겨 신회장 몰래 도박 사업을 하다 혼이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들을 바라보는 신회장의 눈빛이 스르르 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이 큰 재목감이 되지 못함을 일찌감치 알고 있던 신회장의 눈빛은 어쩐지 서글퍼 보였다.
"제가 잘못했다잖아요? 아, 인정 한다니까요."
신동규는 아예 넥타이 마져 풀어헤쳤다.
"동규야..."
팔짱낀 손을 풀어 서류를 짚은 신회장이 낮게 아들을 불렀다.
"예, 말씀 하세요."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백기부터 드는 것은 어릴 때랑 똑 같구나. 우선 확실히 해야할 것이 있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은 널 질책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괜히 겁낼 필요 없다. 알겠냐?"
"예,? 정말이세요? 아버지?"
신회장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거짓말 처럼 머리에서부터 열이 내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단번에 긁는 동작을 멈춘 신동규가 그제야 아버지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널 위하고 회사의 앞날을 위해서는 할 말은 해야겠다."
"............"
"네가 교통사고로 입원한 이후 나는 가능한 네 일에 관여치 않았다. 아니 그럴 정신도 없었다. 김기동을 내려보낸 것도 사실 다이아몬드를 찾자기보다 천태종을 통제하려고 보낸 것이다. 네가 나을 때까지 말이다. 이제 네가 이만큼이라도 회복이 되었으니 그곳으로 내려가기 전에 지난 일을 점검하고 내려가거라."
"............"
"자, 봐라. 지난 일 년 간 네가 회사를 위한답시고 설친 결과가 여기 나와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이너스 아니냐? 그 지역에 발판을 마련하려고 투자하는 것은 나도 찬성했었다. 그러나 투자한 건물과 업소에서 계속 적자를 냈다면 경영 능력의 부재 아니냐? 게다가 다이아몬드도 못 찾고 결국 너까지 사고로 잃을 뻔한 걸로 끝맺었으니 이제껏 이보다 더 철저한 손실은 본 적이 있니?"
"..........."
"그것 뿐이라면 말을 않겠다만 애써 야쿠자 애들의 자금까지 끌어다 놓고서도 그 지역의 금융권을 결국 연합파에게 넘겨 준 것은 너무나 큰 손실이 아니냐?"
"그건 제가 다치지만 않았어도 문제없이 해치울 수 있었던 일이었거던요."
죽은 척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신동규가 그 일만큼은 억울하다는 듯 강한 어조로 변명했다. 신회장은 아들의 초조해 하는 모습을 딱하게 생각했다.
"물론 일에는 변수가 있게 마련이고 너 또한 그런 경우였다지만 최고 경영자가 되려면 그런 변수까지도 예측이 가능해야 한다. 네가 조금만 더 침착하고 분별력 있게 행동했다면 교통사고 같은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말이다. 너는 추진력은 좋으나 너무 즉흥적이고 성질이 급한게 탈이야."
"그렇지 않아요. 저도 나름대로 계산을 해가며 한다구요."
"그래서 계산 없이 김기동을 무작정 없앨 궁리만 했냐?"
"그건...배신의 결과가 무엇인지 본때를 보여야 다른 애들도 그런 일이..."
"시끄럽다.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살인교사로 몰리는 걸 몰라서 그러냐?"
"그래도 놈이 찾으라는 총알은 안 찾고 조직 몰래 도박 사업을 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잖아요? 천태종 이새끼는 말할 것도 없구요."
이미 신회장은 아들로부터 김기동에 관한 정보를 들어 알고 있었다. 오정철이 갖고온 유에스비에서 김기동과 천태종의 모의가 고스란히 신사장에게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다른 것도 문제였지만 자신의 뒷조사를 했다는 대목에서 신회장은 김기동을 용서할 수 없었다. 신회장은 배신자를 응징하는데만 신경을 집중하는 아들을 대신해 이미 모종의 조처를 취한 상태였다.
"조직에서 배신자를 응징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너 처럼 물리적 방법을 쓰는 것이고 다음은 배신자의 인생 자체를 망가트리는 방법이 있단 말이다. 폭력을 쓰면 우선은 속은 시원하겠지만 뒤탈이 날 염려가 있다. 그러나 두 번째 방법은 당장 속이 시원하진 않아도 훨씬 철저한 응징 수단이 된단 말이다. 김기동이 총알의 행방을 수사하는 척 시간을 끈 것은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네 말대로 몇 십억 챙겨서 튀려는 수작 아니겠느냐? 아마 원무현 사건에서 힌트를 얻었겠지. 허나 너는 걱정을 말아라. 이 애비가 벌써 윤검사와 얘기를 끝냈다. 그러니 너도 며칠 후에 내가 지시하는 날 그곳으로 내려가 보도록 해. 날짜를 잘 맞추어야 하니까."
"아니, 아버지, 이번엔 윤치우에게 무얼 주기로 하신 거예요? 설마 또 엽탄에다 다이야를 넣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윤치우가 뭐냐? 윤검사님이라고 해. 버릇된다."
"하여간 또 뭘 주기로 하신 거냐구요?"
"돈이다."
"얼마나요?"
"액수는 말 안했다만 삼사십억 쯤 줘야 될 것 같다."
"예? 아버지. 갑자기 왜 이러세요? 삼사십억 이랴뇨? 그런 거금을 줘야할만큼 큰 사건이 회사에서 터진 거예요?"
"윤검사가 곧 사표를 낸다는구나. 사법 동기들이 모여 공동으로 사무실을 내고 윤검사가 대표가 된단다. 그래서 사무실을 내가 얻어 주기로 했다."
"예? 윤검사가요? 그래도 그렇지 삼사십 억짜리 사무실을...."
"몇 사람 분이라고 생각하면 비싼 것은 아니다."
"몇 사람이요? 또 누굴 삶으실려고..."
"말조심 하라니까. 이번 일은 윤검사 혼자되는 일이 아니다."
신회장은 사직을 앞둔 윤치우에게 협조를 부탁했다. 김기동 일당이 벌려놓은 불법 도박판을 열흘만 눈을 감도록 그 지방 검경에게 손을 써 달라는 청탁이었다. 도박판이 열리는 동안에는 어떤 신고가 들어와도 경찰이 출동하는 일이 없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열흘 후에는 몽땅 검거해도 좋다는 조건이었다. 검경의 입장에서는 전혀 손해 볼 장사가 아니어서 쉽게 타협이 되었던 것이다.
"아까 윤검사와 통화를 했다. 꿩 사냥을 핑계로 그곳 사법 동기를 만나 말을 끝냈나보더라. 검거를 해도 김기동은 우리 조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했다. 그러니 그사람들 몫도 있어야지. 게다가 장차 그들이 우리 회사의 고문 변호사가 될 테니까 말이다."
"아니 아버지 그래도 그렇잖아요? 어차피 검찰에 넘길 거면 한푼도 안 들이고 신고만 하면 끝날 일을 왜 하시냐구요?"
"허, 그 돈을 주고도 몇 십억 이상은 남을 텐데 손해는 아니지. 열흘의 말미를 왜 달라고 했겠냐? 김기동이 돈을 끌어모을 시간을 줘야 하지 않겠냐? 그 돈에서 윤검사의 사무실을 얻어주면 될 것 아니냐?"
"아하, 그렇군요. 그런데 말이지요. 아직 못 찾은 총알 건은 어떻게 할까요? 그냥 없던 일로 덮기엔 너무 아깝잖아요? 애들 기강 문제도 있구요."
"그건 네 설명과 안순태의 말을 종합해 보건데 이진우라는 그놈 짓이 틀림없다. 순태가 화장실에서 빠뜨린 게 아니라 그놈에게 소매치기를 당했을 거란 말이다. 그날 열차 화장실 앞에 두놈이 있었다지 않았느냐? 김기동에게 잡힌 한놈이 곽덕배의 졸개로 밝혀졌다며? 아마 그날도 한놈이 소매치기를 하는 사이 그놈이 바람을 잡았을 거야. 이진우라는 놈은 연합파의 곽덕배 친구라니 아마 감방 동기일 것이다. 소매치기 전과가 있는지도 알아봐. 전과가 있다면 그놈이 틀림없으니까. 그 담엔 그놈을 잡아 족쳐. 다이야가 아깝기도 하지만 조직에 전래를 남겨서도 안 되니까."
"그래서 말인데요, 아버지. 솔직히 말씀드리는데요. 제가 거길 내려가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곽덕배를 납치하려고 생각 중이거든요.?"
"뭐라고? 그러다 너 연합파와 전면전이라도 벌어지면 두 조직이 다 끝장난다는 사실을 모르냐? 곽덕배 단독으로 그 지역을 장악한 것을 보면 연합파에서도 기반을 굳혔다는 뜻 아니냐? 그러니 납치도 쉽지 않을 것이다만 설혹 성공해도 연합파와 백발백중 전쟁이 나고 만단 말이다. 아, 안 돼. 그건 너무 위험한 생각이다."
"제게도 생각이 있거든요. 우리 쪽에서 납치한 흔적이 없는데 누구와 전쟁을 하겠어요? 심증만으로는 안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쪽의 알리바이가 확실한 방법을 쓰려는 겁니다. 우리와 전혀 관계없는 애들을 풀려는 거라구요."
"아니, 이제 와서 곽덕배를 납치할 생각은 왜 했단 말이냐? 그 이유나 알자꾸나."
신동규는 갑자기 정색을 하고 자신의 발언에 무게를 더하기 위해 상체를 바로 세웠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행동으로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아까 아버지도 그러셨잖아요? 회사의 손실이 너무 크다고. 제가 본 손해를 만회 하려면 그 방법 밖에 없어요. 잃었던 상권을 찾아야지요 다시말해 금융권을 내놓게 해야지요. 설마 제 목숨이 걸려 있는데 싫단 소린 못하겠지요. 놈이 그 이권을 제 삼자에게 넘기기만 하면 우린 삼자를 통해 매입하는 형식을 취하면 되구요. 어때요? 아버지. 보너스로 이진우까지 내놓게 할 겁니다. 오정철이 사고나던 날 곽덕배가 이진우를 빼돌린 건 이미 아는 일이거든요."
"글쎄다. 섣부른 계획과 결정은 실패할 확률도 높은 법이다. 그 건은 더 생각 해볼 테니 일단 보류해라. 나도 그 문제로 많은 생각을 했었다만 아직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곽덕배 개인과의 문제가 아니라 연합파가 걸려 있으니까 무작정 일을 저지를 수 없기 때문이다."
"금융상권도 찾고 총알까지 찾으면 일석이조 잖아요? "
"어쨋던 충분히 생각한 후에 결정할 거니까 섣불리 먼저 행동하지 말아라."
"하실 말씀이 더 있으세요?"
"왜? 다른 볼일이 있냐?"
"아니요. 오랜만에 오정철 애들이랑 점심이나 먹을려구요."
"잘 생각했다. 어쨋던 그놈들은 네가 고등학생일 때부터 널 경호한 놈들 아니냐? 의리를 아는 놈들이야. 정도 들었고. 그만큼 따끔한 맛을 보여주었으면 깨끗히 잊어버려라. 보스란 때로는 관대해야 사람이 따른다."
"예, 알아요. 그래서 저도 그 정도 선에서 참았지요."
"너와 마주할 기회가 있을 때 조금만 더 말하마. 네가 처음 듣는 말이 있을 게다. 이 애비는 말이다. 말단 공무원으로 인생을 출발해서 오늘의 캐시콜 뱅크를 이루었다. 하찮은 세무공무원에 불과하던 내가 이런 성공을 거둔 비결이 넌 뭐라고 생각 하냐?"
대화가 길어지자 아까부터 엉덩이가 들썩거리던 신동규가 일어서려다 아버지의 표정이 의외로 엄숙한데 기가 죽었다.
"글쎄요. 아버지께선 시류 즉 때를 재빨리 간파하시는 눈이 있으시잖아요?"
"그건 부수적인 능력이고 나의 진짜 비결은 남의 약점을 재빨리 간파한데 있다. 약점 없는 사람이란 없는 법이다. 특히 기업하는 사람들에겐 말이다. 세무공무원이 아무리 말단이라 해도 돈을 긁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진작 깨달았다. 그 때부터 밤을 세워 기업의 재무를 조사하고 약점을 캐냈었지. 부정을 조사하고 악착 같이 탈세를 캐냈단 말이다. 약점이 클수록 수입도 좋더라. 그걸 밑천으로 돈놀이를 시작하고 그 종잣돈으로 일으켜 세운 게 현재 네가 물려받을 이 회사야. 약점을 보는 눈만 있으면 주먹은 전혀 필요가 없다. 약점만 잡으면 주먹까지 내가 부릴 수 있으니 말이다. 주먹 이전에 머리를 쓰고 머리를 쓰기 전에 상대를 자세히 살펴라. 네가 회사를 물려 받아 지킬려면 급한 성격을 고치고 생각을 하는 습관을 기르란 말이다. 동규야, 다시 한 번 말 하지만 네 누나와 매형은 욕심이 많은데다 야망도 크다는 걸 알아 둬. 알았냐? 알았으면 이만 나가봐."
신동규는 손아귀를 벗어난 참새처럼 재빨리 회장실을 빠져 나왔다. 연민에 젖은 신회장의 안쓰러운 눈길이 뒤를 따랐다.
"현관에 차 대기 해."
핸드폰으로 지시를 내린 신동규가 로비에 닿자 저만큼 떨어진 곳에서 김은애가 쪼로록 달려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생긋 웃었다.
"회장님 한테 많이 혼 나셨죠?"
"뭐야? 이건 순...내가 어린애냐? 허고...내가 혼날 일이 뭐가 있어?"
"호호, 회장님께 불려가서 혼 안 난 사람이 없다잖아요? 그래서 해본 말이죠."
"시끄러워. 이건 누굴 순....참, 알아보라는 건 알아봤어?"
"그럼요, 알아봤죠. 헌데 그 게..."
"가만, 차 왔군. 타고 가면서 말해."
"어디로 가시게요? 오후에 물리치료 스케줄 잡아놨는데요?"
"그거 어제 날짜로 끝났잖아?"
"오늘 최종 검진이 끝나야 끝나는 거라구요."
"그만 둬. 이것 보라구. 펄펄 날잖아? 넌 어젯 밤에 직접 보고도 모르냐?"
"어머, 그 얘기는 왜 해요? 본질과 관계가 없는 얘길..."
"본질? 그것보다 더 본질과 관계있는 테스트가 어디 있다구 그래?"
"그렇다구 꼭 그 소릴 해야겠어요?"
김은애는 신동규를 향해 눈을 살짝 흘겼다. 신동규는 그런 은애가 좋았다.
"좌우간 더 이상 병원으로 가는 일은 없을 테니 취소 해. 알았지."
"에이 참, 꼭 어린애 같이..."
"뭐야?"
현관 문에 대기하고 있던 수위가 신동규에게 거수경례를 올렸다. 신동규는 수위는 쳐다보지도 않고 순태가 열어주는 문으로 은애와 나란히 차에 올랐다.
"어디로 모실까요? 사장님."
백미러를 통해 오정철이 조심스레 물었다.
"오늘은 뷔페든 순대국집이던 너희들 좋다는 곳으로 가자. 오랜만에 밥이나 같이 먹잔 말이야."
"사, 사장님? 정말 입니까?"
조수석의 안순태가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화들짝 뒤를 돌아보았다. 웃고 있는 순태의 입 꼬리가 귀로 치닫고 가득이나 휜 콧날은 더 휘어 보였다.
"너희들하고 점심 한 끼 하겠다는데 뭐 잘못 됐냐?"
"아, 아닙니다. 우리들은 햄버거 하나면 충분 합니다."
오정철이 그럴 수 없다는 듯 신동규의 제안을 정중히 사양했다.
"이거 안되겠구만, 은애 네가 정해. 어디가 좋아?"
"제가요? 그럼 송전무랑 갔던 지난주 그 집이 어때요? 맛있다고 하셨잖아요."
"맞다. 그집 고기가 내 입에 딱이더군, 그리로 가자. 야, 정철이, 청진동으로 가자. 너희도 입에 맞을 거니까 가서 실컷들 먹어봐, 고생들 했으니 먹어야지."
오정철이 좌회전 신호를 받아 다시 차를 돌리는 사이 김은애는 식당의 위치를 자세히 알려주었다.
"이제 아까 하려든 얘기를 해 봐. 어디까지 말했었지?"
"참, 이진우라는 사람에 대해서죠. 그 사람의 본적지인 태백에서 시작해서 현재까지를 다 조사를 했대요."
"물론 우리 팀에서 한 거지?"
"그럼요. 주민번호만 알면 우리가 모를 것이 있나요?"
"말하는 걸 보니 캐시콜 사람 다 되었군. 그래서?"
"어머, 제가요?"
얼굴을 살짝 붉히며 훌기듯 쳐다보는 은애의 눈빛에 신동규가 움찔 했다. 다른 여자 같았으면 신물이나 진작 갈아치웠을 은애를 이래서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만큼 은애는 빈틈없는 비서업무와 붙임성 있는 말씨로 신동규를 사로잡고 있었다.
"가족관계는 부모는 오래 전 사망했고 독자예요. 그리고 지방대를 나와 육군 전역 후에 서울의 의료장비 제조회사에 취직을 했더군요. 입사 후 8년만에 사직을 했는데 사직한 진짜 이유가.....글쎄, 캐시콜 대출 때문이었다지 뭐예요. 캐시콜 추심팀이 회사로 찾아가 좀 심하게 했었나 봐요."
"뭐? 그놈이 우리 캐시콜에서 대출을 받았다고? 그럼 김기동은 그런 사실을 왜 나에게 보고를 안했지? 그놈이 모를 놈이 아니잖아? 그래서?"
"오천만 원을 대출 받아 이자만 거의 오천을 갚았는데 그 이상의 여력이 없자 사표를 내고 잠적한 것이죠."
"이거 말이되는 소리를 해야지. 캐시콜에서 돈을 떼먹고 도망치는 놈이 아무리 우연이라지만 순태와 같은 야간열차를 타다니? 게다가 많고 많은 승객 중에 하필 순태와 화장실에서 딱 만난단 말이야? 그것도 우연인가? 이거 뭔가 있어. 덕배의 친구라는 것만 봐도 알쪼 아니냔 말야? 순태의 주머니에서 총알을 쎄벼간 걸 보면 그놈은 소매치기가 분명해. 그놈이 회사원이란 건 잘못된 조사일 거라고. 야, 정철이 넌 어떻게 생각 하냐?"
"그.....그렇습니다 사장님."
오정철이 급히 얼버무렸다. 갑작스럽게 앞자리에 대고 소리를 지르니 오정철은 신동규의 말을 동조하는 것 외에 당장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진우는 지금까지 아무런 전과 기록이 없어요. 헌데 말이예요. 정말 이상한 점은 따로 있어요."
"뭐가 또 이상해?"
"이미 지난달에 이진우의 대출금이 이자까지 모두 변제가 됐다는 거예요."
"뭐? 이자도 제대로 못 내서 튄 놈이 원금까지 몽땅 갚다니? 이거야 모를 소리만 하니 원...그놈은 부모 형제도 없다며? 그런 놈의 빚을 갚아줄 정도면 ....그래 곽덕배겠군. 그놈이 갚았대지?"
"계좌 이체를 한 게 아니고 웬 사람이 직접 회사로 와서 갚았대요. 그것도 현찰로 말이예요."
"아 환장 하겠군. 이게 무슨 테레비 연속극인 줄 아나? 곽덕배가 아니면 이번엔 또 누구란 거야?"
"글쎄요. 창구 직원의 말도 그렇고 CCTV에 찍힌 사람을 확인해보니 장년의 남자였다고 하더군요"
"저, 사장님."
말을 할까 말까 망서리던 오정철이 신호에 걸려 잠시 차를 세운 틈을 타 신동규를 돌아보며 입을 뗐다.
"왜? 할말 있냐? 해 봐."
"혹시 이진우가 그걸 처분한 건 아닐까요?"
"응? 맞았다. 그 말이 제일 설득력이 있군 그래. 놈이 조용해질 때를 기다렸다 결국 처분한 것이 틀림없어. 그렇지 않다면 그런 돈이 어디서 났겠냔 말야."
이제야 모든 수수께끼가 풀린 듯 신동규의 얼굴이 단번에 펴졌다. 그러고보면 처음부터 이진우를 지목하고 나선 김기동도 조사는 제대로 한 것이었다. 그러고보면 김기동이 이진우의 행방을 모른다고 한 것이 더욱 수상한 일이었다. 이제까지 이진우의 행방을 모르고 있을 놈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론은 하나였다. 이진우건 곽덕배건 김기동이건 모조리 죽여 없앨 놈들 뿐인 것이다.
"너희들 잘 들어. 이진우는 물론 곽덕배를 며칠 내로 잡을 거니까 정신들 차리란 말이야. 이번 일은 너희들이 나설 필요는 없어. 다른 애들을 쓸 거니까. 너희들은 따로 할 일이 있단 말이야."
"예? 예. 사장님,"
차는 시청을 지나 무교 사거리에 접어들고 있었다.
"다 와 가잖어?"
"예, 사장님."
"좌우간 내가 이새끼들을 그냥 두나 봐라."
신동규는 신회장이 당부하던 말은 이미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때였다. 오정철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보니 석호였다.
"사장님, 석호란 놈 전홥니다.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어서 받아 봐. 어이, 개장을 했나 물어보라구."
"예, 아 , 석호냐? 말해...응...그래서"
잠시 후 통화를 마친 오정철이 백미러에 비친 신사장을 향해 뉴스를 전했다
"오늘 오후에 개장을 한답니다. 사장님."
"그래? 김기동 이 새끼 그동안 우리 몰래 준비를 철저히 했었군 그래."
"씨발, 그래서 우리가 떠나던 날 그 새끼가 밥값으로 삼백만 원씩이나 줬구나. 에이"
안순태가 참지 못하고 거들고 나섰다.
"야, 안순태, 숙녀 앞에서 그 욕하는 버릇 좀 고쳐라이."
"예, 죄송합니다. 사장님. 허지만 그 새끼만 생각하면 화가 나서요....."
"이제 곧 네가 화풀이 할 날이 오고 있으니 참으라고."
그 사이 종로 구청 교차로에서 직진한 차는 은애가 가르키는 장소 앞에 멈추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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