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오늘이 김기동과 부엉이 최태식이 벌여놓은 하우스가 개장하는 날이었다. 이미 전날, 점검에 점검을 했건만 또다시 하우스를 돌아다니며 다시 한 번 점검을 강요하는 김기동의 발길이 바빴다. 어젯밤 대구에서 올라온 참가자 이십여 명은 아직 모텔에서 머물고 있었고 오늘 오전에 창원에서 이십여 명이 버스를 대절해 온다는 연락이 있었다. 그들이 도착하는 즉시 게임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바깥 날씨가 생각보다 차더라. 미리 실내의 온도를 후끈하게 높혀."
"예, 사장님, 실내 온도는 30도 이상 올릴 수 있습니다."
"몇 도를 올리던 네가 책임지고 춥지 않도록 만 하란 말이다. 알았냐?"
"옛, 사장님."
김기동은 천태종의 지시를 받는 모든 조직원들에게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성과급을 지급하겠다는 큰소리를 쳐 두었다. 대신 철저한 복종을 강요했다. 이럴 땐 무엇보다 내부의 결속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휴게실 공간으로 쓸 작은 하우스까지 돌아본 김기동이 마지막으로 밥 차 앞에 섰다.
"제수씨, 준비는 완전히 되어 있겠지요?"
김기동이 수북히 쌓인 어묵 꼬지를 들어보며 수미에게 물었다.
"아이고 사장님, 저희들 걱정은 마세요. 호호, 백 명이 한꺼번에 온대도 겁나지 않는다니깐요. 장사 하루 이틀한 사람들이 아니걸랑요. 호호."
수미가 손으로 이쪽 차의 스넥팀과 건너편의 설렁탕 팀을 가르키며 눈웃음을 치니 묻던 김기동이 오히려 머쓱해서 할 말이 없었다. 어제부터 재료를 준비한 수미의 밥 차 팀은 완벽한 준비를 마치고 손님이 넘쳐 대박이 날 순간만 기다리던 것이다.
"오후 한두 시나 되야 몰려 올 거니까 그 전에 우리 애들 먼저 먹이도록 하세요."
"현재 여기 있는 사람이 모두 몇 명이죠?"
"설치 팀을 빼면 스물다섯 명에다 부엉이 팀 팔 명을 합치면 서른셋인가?"
"식대는 현찰로 주실거죠?"
"그건 부엉이, 아니, 태식이 한테 일렀는데 아무 말 없습디까?"
"하우스 끝나는 날 일시불로 정산한다는 얘기는 들었죠. 헌데 식대를 반값으로 계산하겠다니 하는 말이예요. 반값이면 오천 원인데 세상에 오천 원짜리 설렁탕이 어디 있어요? 안 그래요? 사장님, 호호."
"뭐요? 한식구끼리 꼭 그렇게 바가질 씌워야 속이 시원합니까? 꾼들이 왕창 몰리면 거기서 남는 것만도 상당할 텐데....에잉."
"물론 식구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다 받을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칠천 원은 되야겠어요. 오천 원은 너무한 것 같아요. 이제 곧 부자가 되실 사장님이 그깟 음식 값 몇 푼 가지고 그러세요? 그렇쵸? 사장님. 호호호."
입으로 웃고 눈으로 웃으며 살살대는 수미를 띵한 얼굴로 바라보던 김기동은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예뿐 제수씨가 그렇게 탁 터놓고 얘기를 하니 시작부터 기분이 좋네요. 그러면 이렇게 하기로 하지요. 식구고 나발이고 없이 누구나 만 원으로 하고 우리 식구의 식대는 사후정산 하기로 말입니다. 이제 됐습니까?"
"네에? 어머머머. 역시 우리 사장님이셔. 고마워요, 사장님. 호호."
수미가 기쁨에 넘치는 얼굴로 덕숙이 부부와 식당부부를 건너다보았다. 눈과 귀를 김기동과 수미의 대화에 집중하던 그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울리며 좋아했다. 수미의 말 몇 마디로 삼십여 명의 밥값 수입이 단번에 배로 불어난 것이다. 그들은 자리를 뜨는 김기동에게 두세 번씩 허리를 굽히는 걸로 감사함을 표했다.
'한 놈은 배당금을 올리고 한 년은 밥값을 올리고....아주 부부가 지랄들을 해라...'
하우스로 향하는 김기동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흘렀다. 사흘 전에는 부엉이가 기술자들이 불만이라는 걸 내세우며 배당금을 오 퍼센트나 올리더니 오늘은 그의 마누라까지 밥값을 올리는 것이다. 개장일을 앞두고 뱃짱을 부리는 심사가 뻔했다. 어쨋든 요구하는데로 배당금을 올려주기로 부엉이와 합의를 했듯이 방금 수미가 요구하는 밥값을 화끈하게 올려준 것도 김기동에게 다 생각이 있어서였다. 목표한 돈만 모이면 천태종이건 부엉이건 알바가 없는 것들 아닌가? 그들은 결국 돈 한 푼 구경 못 할 것이었다. 그러니 수미가 밥값을 열 배로 올린들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김기동은 한 곳에서 닷새 씩 세곳을 옮겨 하우스를 운영할 것을 팀 전원에게 공언했었다. 하우스를 딱 보름만 하고 배당을 나눠 각자 흩어지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김기동은 그들과 수익금을 나눌 마음이 애초에 없었다. 생각한 만큼의 돈이 쌓이면 그 돈을 몽땅 트렁크에 싣고 쥐도 새도 모르게 튈 생각이었던 것이다. 끝나기 전날 쯤 튈까도 생각했었지만 그건 너무 위험한 모험 같았다. 돈이 쌓일수록 그리고 막바지에 이를수록 팀원 간의 의심도 쌓이기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열흘 동안의 수익금만으로도 충분할 테니 그것만 가지고 중간에 새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손들 좀 풀었나?"
하우스로 들어서며 김기동이 부엉이를 향해 물었다. 그러나 제각각 바쁜터라 아는 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부엉이는 스크린에 비치는 화투장의 각도가 정면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카메라맨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오후 두시에 개장인데 이제 와서 뭣 때문에 야단들이야?"
그제야 김기동을 발견한 부엉이의 얼굴이 부어있었다.
"저 자식이 카메라를 낮게 달아 그림이 스크린에 정면으로 비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림의 각도가 틀어지면 꼭 속임수를 쓰는 것처럼 보여지거든요. 속임수라는 오해를 받으면 아차하면 대형 참사가 날 판이라구요. 야. 좀 더 위로 달아 봐. 어제 확인했을 땐 잘 보이더니 갑자기 왜 그런 거야?"
"일 센치만 틀어져도 그래요. 누가 카메라를 건드렸을 거라구요."
스물이 갓 넘었어 보이는 젊은 기사는 실내의 공기가 더운지 땀을 흘리며 카메라의 위치를 바꾸고 있었다. 카메라의 위치를 바꾼 뒤 다시 본 화면은 조금 나아 보였다.
"아까보단 낫군. 요 상태를 계속 유지 해. 야, 디카. 알았냐?"
"예, 알았어요. 시작되면 아예 제가 옆에 붙어 있을 거니까요"
"화면이 흔들리면 의심들 하니까 그것도 신경 쓰고. 알았냐? 알았냐구?"
"예, 알았어요. 참, 시작하기 전에 밥을 먹어둘까요?"
"지금 몇시야? 어, 열한 시군. 미리 먹어두는 게 좋겠다. 어이 기술팀, 다들 갔다 와."
젊은 카메라 맨이 앞장을 서자 대표 기술자 둘과 진행 보조 요원 넷이 뒤따라 우루루 몰려 나갔다. 김기동은 맥주 상자에 엉덩일 붙이고 앉았다.
"이봐. 부엉이, 어디서 오는 꾼들이 돈이 제일 많어?"
"예? 그야, 어디서 온들 특별히 돈을 많이 갖고다니는 꾼들이 있나요? 요즘에야 거의가 현금카드를 갖고 다니잖아요."
"이거봐,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잖아? 어디 놈들이 제일 부자 팀들이냔 말이야."
"원, 형님도...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허엇, 사장이라고 부르라니까."
"아, 둘이 있을 땐 그렇게 부르자구요. 사장 소린 좀 그러니까요."
"뭐야? 넌 내가 우스워 보이냐?"
"누가 우습게 본답니까? 좋아요. 사장님이던 회장님이던 시키는 대로 부르지요"
"짜식이 발끈하긴....좋아 우리끼리 있을 땐 형님이라고 불러. 헌데 어디서 오는 꾼들이 부자냐고 묻는 이유를 모르겠냐?"
"글쎄요, 어디 꾼들이 더 극성들인지는 알지만 돈이 많고 적고까지야 어찌 압니까?"
"극성? 공자 할애비가 아닐바에야 돈 먹자고 덤비는 놈들이야 하나 같이 결사적이지 더 극성스러운 동네가 따로 있겠냐?"
김기동의 공자님 같은 말씀에 부엉이가 히죽 웃었다.
"그렇지 않아요. 제 경험으로보면 남쪽 지방 사람들이 더 극성스럽게 덤벼요. 판돈도 그쪽 사람들이 훨씬 크게 올리구요. 좌우간 남쪽 사람들이 통이 더 크더라구요. 먹으면 먹고 말면 만다는 배짱이 그만큼 그쪽 사람들이 더 좋다는 거지요."
"이제야 말이 통하네. 그래서 어디서 오는 팀이 돈이 많으냐구 내가 물었잖아? 그런 꾼들이 좁은 이 바닥의 은행이나 현금 지급기에서 돈을 찾는다고 생각해 봐. 당장 우리 하우스 소문이 날 것 아니냔 말야. 그러니 그런 팀은 미리 전화를 줘서 오는 길에 현금으로 바꿔오도록 하면 좋찮어? 안 그래?"
"아이고 형님두 참, 이제 와서 그 생각을 하셨단 말입니까?"
".......... 뭐라고?"
"그래서 환전상이 필요한 거지요. 돈을 잃을 때마다 언제 지급기로 가서 돈을 빼 옵니까? 하우스를 따라다니는 환전상이 이따 올 거예요.. 현금 카드던 체크 카드던 갖다대기만 하면 현금으로 환전 해 주지요. 뿐만 아니라 뒤로는 꽁짓돈을 대 주기도 하구요."
"그럼 그 사람들이 이미 와 있었어야지?"
"원 형님도, 그 사람들이야 미리와서 할 일이 없잖아요? 오후 늦게 오겠다는 연락이 있었어요. 환전상은 함부로 안 움직여요. 몇 십억 단위의 현찰을 싣고 다니니까 그런지 몸조심이 대단하다니까요. 이따 보시면 아시겠지만 함부로 촐싹댈 사람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우스의 경험이 전혀 없는 엉터리 물주 김기동이 진정으로 놀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환전상까지 필요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수백 장의 카드를 현금으로 바꿔 줄 정도인 환전상 또한 만만치 않은 재력가 일 것이었다.
"음, 그런 걸 왜 여태 말 안했어?"
"저야 당연히 형님이 알고 계신 줄 알았지요. 기본 아닙니까?"
"쯥, 그럼 넘어가기로 하지. 그런데 환전 수수료가 있을꺼 아냐? 몇 프로야?"
"천만 원 이하 일 프로, 일억은 영점오 프로가 기본이지요."
"천만 원이면 십만 원을 뗀단 말이야? 일억이면 오십만 원을 떼구? 이거야 완전 날강도 같은 놈 들이구만. 신용카드도 아닌 현금 카드를?"
"그렇게만 생각하실 일이 아니지요. 노름은 타이밍인데 언제 가서 돈을 뽑아 옵니까? 게다가 지급기에 한도가 있는데다 한밤중에는 사용을 못하지요. 한마디로 게임을 하다말고 시내로 나가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거든요. 심부름 값을 받아도 그 정도는 받아야지요."
"쯥 너도 가서 밥이나 먹어 둬, 네 마누라가 그새 식구들 밥값을 두 배로 올려놨으니 부부가 쌍으로 곧 재벌이 되겠더라."
"예?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이런...이게 또 무슨 재주를 부렸나 보군. 에이, 이걸."
부엉이가 부리나케 밥차로 가는동안 김기동은 소형 발전기가 놓인 천막으로 발을 옮겼다. 그곳엔 만약의 고장에 대비해서 총 다섯 대의 발전기를 마련해두고 있었다. 발전기는 천태종이 의정부에서 데려온 부하 중에 극장의 전기기사였던 놈이 맡고 있었다.
"천과장 어디 있어?"
갑작스런 김기동의 출현에 놈이 깜짝놀라 얼른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에 이동 화장실 점검을 하시는 걸 봤는데 말입니다. 사장님."
"그런데? 누가 조금 전 일을 물었냐?"
"그게, 글쎄요. 아니, 저기 오시네요, 사장님. 저기..."
전기 기사 놈이 가르키는 곳을 보니 천태종과 오덕이가 석호를 앞세워 오고 있었다. 헌데 석호의 얼굴이 심상치 않아보였다. 입술이 붓고 약간의 핏자국도 있었던 것이다. 오덕이는 돼지를 몰 듯 석호의 엉덩이를 차며 욕을 하고 있었다.
"뭣 때문에 그래? 개장 시간이 다 되어가는 마당에?"
"아, 형님, 참 사장님, 이 자식이 말이지요. 야 오덕이 네가 본 걸 말해."
천태종이 자신을 지목하자 공을 세울 기회를 만난 오덕이 신이나 썰을 풀기 시작했다.
"요 쥐새끼 같은 놈이 저쪽 구석에서 오정철과 통화하는 걸 제가 잡았습니다. 무심코 들어보니 하우스 개장이 어쩌고 하더니 예 과장님하고 끊지 뭡니까. 수상해서 다그치니까 그런 말 안 했다고 잡아떼지 뭡니까? 그래서 제가 통화 목록을 뒤졌더니 그동안 오정철과 여러통을 주고받았더군요. 그러니 이 새끼는 이제껏 우리를 속인 스파이 아닙니까?"
순간 김기동은 가슴이 쿵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신사장이 알았다면 다음 수순은 뻔한 일이었다. 조직의 배반자로 찍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몰랐다. 도망을 하려면 지금밖에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돈도 없이 좁은 남한 땅 어디로 튄단 말인가? 배짱 좋은 악바리인 김기동의 이마에 진땀이 흘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일찍 조직에 알려진 것이다. 김기동의 머리 속에는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생각에 생각을 더하고 있었다.
"어이 천과장 저놈 데리고 나 따라와, 빨리 시간 없어."
"예? 어디로 가시게요?"
"잔말 말고 가자고. 오덕이 넌 여기서 삽을 준비하고 기다려. 곧 할 일이 있으니까."
"예, 사장님."
김기동이 한쪽 눈을 껌뻑하자 영문을 모르던 천태종이 뒤늦게 감을 잡고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대답했다. 석호를 가운데 세워 백여 미터쯤 걸어가자 한적한 숲길이 나왔다. 그순간 김기동이 갑자기 뒤로 휙 돌아서며 석호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댔다.
"넌 좀 죽어줘야겠다."
석호는 자신도 모르게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뒤에는 천태종이 막고 있었다.
"형님, 총소리는 곤란 합니다. 제가 이걸로 없애지요."
"음, 그러지. 주둥일 막고 찔러버려. 소리 못 지르게."
"예, 염려 놓으십시요. 형님."
김기동이 권총을 거둠과 동시에 천태종이 소위 사시칼을 꺼내 들었다. 김기동이 형사시절의 솜씨를 발휘해 재빨리 석호의 팔을 뒤로 꺾었다.
"어 엇, 왜들 이럽니까? 전 아무 말도 안 했다구요. 오과장님 한테 아무 말도 안 했단 말입니다."
"태종이, 이 새끼 입 좀 막아."
천태종이 장갑을 뭉쳐 입에 쳐 넣으려 하자 석호는 고개를 틀며 맹렬히 저항을 했다. 약이 오른 천태종이 명치에 주먹을 날리자 석호가 헉 소리를 내며 스르르 주저앉았다. 그러자 뒤에서 팔을 틀어잡고 있던 김기동은 손을 놓아버렸다. 석호는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했다. 천태종이 다시 석호의 허벅지를 걷어차며 이죽거렸다.
"뒈지는 것도 제가 사서하는 짓이니까 어떻게 죽여도 내 원망은 말아라잉."
천태종이 석호의 가슴에 한발을 올리며 칼을 목에다 갖다 댔다.
"잠깐만요. 잠, 잠깐만..."
한손은 방어자세를 취하고 한손은 명치를 움켜 쥔 석호의 눈이 천태종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석호는 죽음이 눈 앞에 닥친 것을 느낀 것 같았다. 공포에 사로잡힌 석호가 다시 허공에 손을 휘져었다.
"잠깐만 제 말을 들어주십시요. 개장일이란 말은 한 적이 없어요. 없단 말입니다. 저 오덕이 형이 지어낸 말이라구요. 하우스가 얼마나 큰지만 말했을 뿐이란 말입니다."
"그말이 그 말이지. 죽여 버려."
김기동이 차갑게 최종 판결을 내렸다.
"잠깐만, 잠깐만요. 시키는 일은 다 할 테니 죽이지만 마십시요. 사장님, 과장님 ...제발."
"개새끼가 뒈지는 마당에 더럽게 말이 많네. 에라 그만 가거라."
"이봐, 잠깐."
천태종의 마지막 말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찰라에 김기동이 짧게 외치는 소리가 석호의 귀를 파고들었다. 하나님의 목소리보다 훨씬 반가운 소리였다.
"방금 이자식이 시키는데로 다 한다는 말을 한 것 같은데 넌 못 들었냐?"
"듣기야 했지만 그걸 어찌 믿습니까. 어떤 놈이고 뒈지기 전에는 꼭 저런 소리를 씨부리더군요. 아예 못 들으신 걸로 하고 없애지요?"
"그럼 그렇게 해"
천태종의 칼이 다시 목에 머물렀다. 힘을 실어 확 누르면 끝이었다.
"사장님, 잠깐만요. 이진우, 이진우 아시죠? 이진우가 숨은 곳을 제가 압니다."
"응? 뭐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어?"
"택시 운전하는 제 초등학교 동창이 이진우가 있는 곳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럼 네가 직접 아는 것은 아니잖아?"
"지금이라도 알아내는 건 식은 죽먹깁니다."
"가만있자. 잘하면 너는 죽는 것은 고사하고 나하고 한편이 될 수도 있겠는데 그래? 너 나한테 충성을 맹세할 수 있겠냐? 다시 말해 살려주면 배신을 때리지 않겠느냔 말야."
"예. 물론입니다 사장님. 오과장이 자기 팀에 넣어준다고 하고선 저를 떼놓았습니다. 오과장과의 통화도 절 데려가 달란 전화 뿐이었습니다. 맹세 합니다. 사장님."
"그럼 좋다. 우선 네가 먼저 해야할 일이 있다. 전화기 꺼내라."
"과장님이 가지고 계신데요?"
"아니, 형님. 이 새끼를 설마 믿는 건 아니시지요?"
"넌 좀 가만있어. 원래 항복한 장수가 더 충성스러운 법이야. 난 석호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봐가며 내 오른팔로 키울 작정이야. 잔말 말고 전화기나 내 놔."
천태종이 알 수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석호의 핸드폰을 내 놓았다. 그리고 가슴을 밟았던 발을 떼자 석호가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당장 오정철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시키는 말을 하도록 해. 할 수 있겠냐?"
"예, 무슨 말을 하면 됩니까?"
"지금 하우스의 기술자들이 배당문제로 서로 싸워 한 패는 이미 떠났다고 해. 화가 난 김과장이.....나 말이다. 지금 하우스에다 석유를 들이붓고 불을 지르려 한다고도 하고....중계 방송 하듯이 잘 하란 말이야. 알어? 자 시작해. 이제부터 우린 한 팀이니까 엉뚱한 수작은 않겠지?"
"예."
석호가 큰 기침을 몇 번 한 뒤 목소리가 가다듬어지자 오정철의 번호를 눌렀다.
"과 과장님이세요? 저 접니다. 석호요. 지금 여기는 난리가 났습니다. 김사장이 아니 김과장이...예? 아니요. 맞아, 김기동이요. 예, 김기동이 지금 하우스에다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지를려고 생난리를...예? 아 예.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말입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기술자들이 배당 액에 불만을 품고 김기동과 싸웠거든요. 김기동이 계약 위반이라고 소리치니까. 화가 난 기술자 팀들이 엿 멕이느라 차를 타고 그대로 빼버렸다구요. 예? 그럼요. 개장이고 나발이고 다 조졌습니다. 그러니까 김기동이 저 지랄을 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 천과장이 김기동을 붙들고 있어요. 아니요. 아닙니다. 천과장은 조직에서 하는 사업인 걸로 알고 있던데요? 지금 다른 기술자를 부르면 된다고 천과장이 김기동이를 설득하는 것 같은데요? 예? 불이요? 아니요. 불을 지르기 직전에 천과장이 라이터를 뺏었으니까요. 과장님 저도 저기 끼여 있어야 겠어요. 하루에 한 번씩 몰래 알려드릴게요. 예? 연락이 끊기면 제게 무슨 일이 생긴 걸로 아세요. 이만 끊습니다."
전화기를 내리는 순간 천태종은 석호의 어깨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이새끼가 연기를 하라니까 겁 대가리 없이 김기동이 뭐야? 뭐? 생지랄? 사장님이 네 친구냐? 이 개새끼야. 그리고 뭐? 천과장이 어쩌고 어째? 내가 누구편인지 네가 어떻게 알고 씨부려? 엉? 이 새끼를 아예 파묻어버려야 하는 건데...."
천태종이 죽일 듯 팔을 걷어붙이건만 김기동은 옆에서 아무 말이 없었다.
"형님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 새끼를 죽여 파묻자니까요?"
"아니야. 그만하면 석호가 연기를 잘한 거야. 그만하면 저쪽에서도 믿었을 거야. 다만 하루에 한 번씩 하는 연락이 끊기면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라고 한 마지막 말이 문제야. 석호 저놈이 대가리를 쓴 거지. 전화기 뺏고 묶어서 어디 가둬 놔. 내일 오정철에게 다시 통화할 때 시키는 대로 잘하면 그때는 진짜 믿고 우리편으로 할 테니까. 야, 석호. 너는 아직도 날 못 믿어서 그런 소리를 했으니 하루 고생하는 걸로 때워라. 불만 있냐?"
아픈 어깨를 주무르며 부스스 일어나 앉은 석호는 다시 생사의 기로에 선 자신을 발견하고 나름대로 또다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렇게 얘기해야 제가 위험을 무릅쓰고 알려준다고 느낄 것 아닙니까? 한번 충성을 맹서 했으니 제 쪽에서 먼저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 새끼 말하는 것 봐. 오정철에게 붙었을 땐 충성을 맹서 안 했냐?"
천태종이 석호의 머리를 툭 치며 눈을 부라렸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쪽에서 먼저 저를 떼 놓았으니 사장님께 다시 충성을 맹세한 겁니다. 그게 제 잘못입니까?"
"네 말을 듣고보니 그것도 그렇군. 창고에 쳐 넣지 말고 애들 시켜서 모텔에 데려다 줘. 야, 석호야. 이진우 건도 있고 하우스 건도 있으니 앞으로 우리 잘해보자. 네가 하우스 일만 잘 협조해주면 일서가 하는 업소는 네게 맡길 테니까. 내 약속하마. 천태종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저도 형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석호 이놈이 알고보면 눈치도 빠르고 일도 잘하니까요."
"그럼. 그렇게 알고 석호를 좀 쉬게 하라구."
천태종이 석호의 등을 밀어 아까의 장소로 나와 오덕에게 지시를 내렸다. 오덕이는 다시 두놈을 불러 석호를 데리고 조직이 운영하는 모텔로 차를 타고 떠났다.
"저새끼 못 튀게 단단히 일렀지?"
떠나는 차를 바라보며 김기동이 말했다.
"예, 방 밖으로 나오게 못하게 철저히 지키라고 했습니다. 헌데 왜 살려 둔 겁니까?"
"다른 기술자를 데려오기로 했다는 것과 열흘 쯤 후인 12월 12일에 새로 개장을 하기로 했다는 전화를 하게 하려는 거지. 그 전에 우린 없을 테니까."
"묘안입니다. 헌데 그 말에 넘어갈까요? 내일이라도 당장 신사장이 내려오지 않을까요? 신사장 성질이 더럽게 급하잖아요? "
"내 생각은 달라. 석호 저놈이 오정철과 오늘 처음 통화를 한 게 아니잖아? 저놈이 그동안 우리 일정을 샅샅이 알렸을 것 아니냔 말야. 그러면 진작 내려왔어야 할 신사장이 왜 안 내려 오고 있겠냐? 네 말대로 참고 있을 신사장이 아니잖아? 이건 분명히 우리가 판을 벌릴 때를 기다린 거야. 확실하게 판이 벌어진 현장을 덮치고 싶을 테니까. 아니 그보다 끝날 때까지 모른척하고 둘 확률이 더 높아."
"예? 설마 그 성질에 판이 끝날 때까지 참을라구요?"
"아니야, 중간에 덮쳐봐야 너하고 나, 배신자 둘만 잡을 뿐이잖아? 허지만 기왕 벌려놓은 판이니 돈이 쌓인 끝판에 덮치면 수십억을 먹을 것 아니냐? 신사장 입장에서야 손 안대고 코풀기 아니냐? 그야말로 일석이조지. 원무현이 먹고 튄 돈을 고스란히 되찾는 것과 같을 테니까."
"아, 그렇겠군요. 허지만 형님, 형님 말대로 그런 머리를 신사장이 쓸줄이나 알까요?"
"신사장만 자꾸 생각하니까 그렇지. 회장이 있잖아. 회장이. 신회장은 달라. 우리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 사람이란 말이야."
"그럼 어쩌지요? 개장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요?"
"어쩌긴 뭘 어째? 밀어붙이는 거지. 이렇게 된 이상 신사장이건 오정철이건 다 우리의 적이야. 오면 타협을 해보고 안 되면 한 판 붙는 거지. 이제 와서 어쩔래?"
김기동이 권총이 든 가슴을 툭 치며 고리눈으로 째려보자 천태종이 찔끔 놀라 단번에 고개가 수그려졌다.
"좋습니다, 형님, 까짓 거 한번 해보지요."
"한두 푼 먹자는 게 아닌 마당에 그깐 목숨쯤은 걸어 볼만 하잖어? 허나 네 목숨은 내가 보증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내게 또 다른 생각이 있으니까."
김기동과 천태종이 하우스로 돌아오자 기다리던 부엉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엉이는 점심밥도 먹지 않은 듯 조금 전과 다름없이 부은 표정 그대로였다.
"왜? 밥 안 먹었냐? 아니면 마누라한테 쥐어 터졌냐?"
"하아, 나 저 여편네를 어떻게 하던지 해야지, 남편 망신을 혼자서 다 시킨단 말입니다."
음식값 올린 걸 따지려다 오히려 수미에게 설득만 당한 부엉이가 멋쩍은 얼굴로 비시시 웃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돈을 만질 기회가 있겠냐는 수미의 말에 반박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제수씨 아니었으면 밥 차가 없어 어쩔 뻔했어? 상을 줘도 모자랄 판에 그깐 밥값으로 왈가왈부할 것 없어. 오히려 끝나는 날 보너스로 오백쯤 생각하고 있으니까."
김기동이 부엉이의 존경심을 울궈내는 멘트를 날렸다. 어차피 부도 처리될 소리니 아낌없이 퍼주고 싶은 것이다.
"제 처지를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형님, 대신 하우스에서 최대한의 수익이 나게 노력을 하지요."
"수익이 많을수록 너도 배가 부를 테니 잘 해 보라고. 그보다, 모텔에 머무는 팀은 점심을 안 먹겠다는 건가 왜 아직 안 와?"
"태백 시내에서 먹고 온다고 아까 전화가 왔었어요. 아마 두 시나 되야 도착할 겁니다. 창원 팀과 얼추 비슷한 시간에 올 것 같네요."
"그래? 그럼 잘 됐네. 우리도 이럴 때 미리 먹어두기로 하지? 다들 가자고."
김기동은 천태종과 부엉이를 데리고 수미의 밥 차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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