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설

파투(破鬪) 12. 막다른 길(3) 한숨

fiction-google 2024. 3. 16.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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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와 덕배가 목욕탕에 있을 무렵, 김기동은 석호를 가두어 놓은 모텔에 들렸다. 석호에게 전화를 걸게 하려는 거였다. 적당히 석호를 구슬린 김기동이 오정철에게 전화를 걸게 했다. 재개장 날짜는 열흘 후인 1212일로 정했다. 귀를 기우려 통화 내용을 들은 김기동은 만족했다. 석호의 연기력에 그 쪽이 완전히 넘어간 듯 했기 때문이다. 김기동은 생각했던 다음 단계를 오덕에게 은밀히 지시했다.

"저놈을 당분간 굴에다 곽덕배 쫄짜와 함께 묶어 둬. 한 번만 더 써먹게 말이야. 도망 못하게 잘 묶어. 한번만 더 써먹고 그놈과 함께 묻어버릴 거니까."

오덕은 부하 한놈과 쇠사슬과 연장을 차에 싣고 석호를 태워 신동산 은광으로 향했다. 오정철과 안순태를 가두었던 그곳에는 구본웅을 묶어두고 있었다. 그제까지만 해도 구본웅의 감시와 식량 조달은 석호가 하던 일이었다. 그러던 석호가 이번엔 당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석호는 구본웅이 굴속에 없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며칠 전 굴 앞에서 만난 사내들이 구본웅을 구출해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석호는 굴에 도착할 때까지 그 사실을 감추었다. 애초에 그 사내들이 나타난 것을 알리지 않은 것은 자신의 잘못도 아닌 일로 욕을 먹기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이 자식이 어찌 이리 조용하지?"

구본웅이 갖힌 철창으로 다가가며 오덕이 중얼거렸다.

"어엇, 없잖아?"

랜턴 불빛을 이리저리 비춰보던 오덕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랜턴을 석호의 얼굴로 돌렸다.

", 이 이거, 어떻게 된거야?"

석호 역시 눈을 둥그랗게 뜨고 깜짝 놀란 시늉을 했다.

", 이 새끼, 네가 풀어 줬지?"

"? 내가요? 그놈은 연합파 아닙니까? 내가 그놈을 왜 풀어 줍니까?"

"가만, 이 곡괭이는 또 뭐야? ? 이걸로 사슬을 끊었나보다."

발로 곡괭이를 툭툭 차던 오덕이 다시 랜턴을 석호의 얼굴에 들이댔다.

"너도 그놈과 똑 같이 해두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놈이 튀고 없으니 어쩌냐? 어차피 뒈질 몸이니 너 혼자 며칠만 여기서 고생해라."

"내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단 말입니까? 시키는 대로 다 했잖아요?"

"히힛, 그 새끼 뭘 모르네. 임마 넌 이미 오정철 스파이 잖어?"

"뭐요? 이런 씨팔."

차에 태워질 때부터 이제까지 도망할 기회만 노리던 석호가 번개 같이 철문을 박차고 튀어나가 굴 밖을 향해 뛰기시작했다.

", 저런 쥐새끼 같은 놈이.....광수야아...네 쪽으로 가는 그 새끼 잡아라아."

오덕이와 같이 온 광수는 차에 실린 쇠사슬과 연장을 챙기느라 한발 늦게 오고 있었다. 달리던 석호가 마주오는 광수의 랜턴 불빛을 보았다. 광수도 석호를 봤으나 오덕이가 외치는 소리는 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오덕이의 큰소리가 메아리로 변해 웅웅거리는 소리로만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긴박한 외침에 사태를 짐작한 광수가 달려오는 석호를 향해 들었던 쇠사슬을 힘껏 휘둘렀다. 그러나 좁은 굴에서 쇠사슬은 너무 길었다. 석호의 얼굴을 치려던 쇠사슬 끝이 동굴벽을 철그렁하고 때렸다. 석호는 달리던 기세를 몰아 광수의 옆구리를 치며 그대로 굴 밖을 향해 돌진했다. 백여 미터 밖에 접시만한 굴 입구가 환히 보였다. 예기치 않은 기습에 놀란 광수가 쇠사슬과 연장을 떨어뜨리고 얼른 품안의 칼을 뽑아들었다.

"뭐하냐? 저 새끼 잡으라니까. 죽여 아예 죽여 버려."

석호의 뒤를 쫓아 거구의 몸뚱이를 뒤뚱거리며 오덕이 다시 외쳤다. 광수는 칼을 든 채 석호의 뒤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덕이에겐 못 미치나 거구이긴 마찬가지인 광수가 다람쥐 같은 석호를 따라 잡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에잇, 씨발놈."

몇 발짝 뒤를 쫓던 광수가 자신의 걸음이 느린데 화가나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앞 선 석호를 향해 칼을 힘껏 던져버렸다. 물론, 화가나서 던졌을 뿐이지 맞으리라곤 생각도 안 했다. 또 칼 던지기를 연습한 적도 없었고 애초부터 그럴 실력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묘하게도 광수가 던진 칼이 석호의 등짝을 명중했다. 엇 하는 소리가 나더니 석호가 휘청 넘어지려다 중심을 잡고 그 자리에 섰다. 옳거니 하는 마음에 광수가 제딴엔 날렵하게 뛰어가 석호를 움키려 했다. 깜짝놀란 석호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석호는 금새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굴 입구에 이를 무렵 석호의 걸음이 느려지는 것이 눈에 띄인 광수도 다시 희망이 생겼다. 뛰기 시작한 광수의 뒤엔 오덕이 숨을 헐떡이며 걸어오고 있었다. 입구의 철문을 빠져나간 석호는 도망칠 곳을 살폈다. 산 아래엔 그들이 타고 온 차가 있었고 그 길로 간다면 얼마 못 가 잡힐 것이었다. 그렇다면 뚱땡이들이 따라오지 못할 곳은 윗 쪽뿐이라 산 위로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등짝에 칼이 꽂힌 석호가 허겁지겁 풀뿌리와 나뭇가지를 잡고 산을 기어올랐다. 아픈 줄도 몰랐다. 그제야 입구에 닿은 광수도 석호의 뒤를 따라 곧바로 산을 기어올랐다.

", 광수야, 그 새끼 꼭 잡아야 돼. 놓치면 좆 됀단 말이야."

입구 쪽에서 오덕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힘이라면 모를까 광수가 산을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십여 분을 버지럭 대며 뒤를 쫓았지만 등짝에 칼이 박힌 석호의 그림자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광수가 나름대로 성의를 보여 이곳저곳으로 석호를 찾아 헤메다 산을 내려왔을 땐 기다리다 지친 오덕은 굴 입구에다 삭정이를 줒어모아 불을 쬐고 있었다.

"못 잡았냐?"

".........."

오덕은 석호를 쫓느라 나뭇가지와 가시에 긁히고 찟긴 광수의 얼굴과 손등을 보더니 입을 닫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사장이고 과장이고 간에 방금 일은 입을 열지 마라. 나중에 두놈이 합심해서 탈출한 걸로 할 테니까. 아니면 우린 좆 된다. 알았냐?"

석호는 석호대로 잡히면 죽는 길 밖에 없는지라 방향도 모르고 허겁지겁 산을 기어오르다 문득 돌아보니 광수는 커녕 따라오는 강아지 하나 없었다. 그제서야 등으로부터 극심한 통증이 머리까지 전해졌다. 우선 등에 박힌 칼을 뽑고 싶었다. 석호는 손을 등 뒤로 돌려 칼을 더듬었다. 그러나 이쪽저쪽의 손을 번갈아 돌려보아도 손가락 끝만 살짝 닿을 뿐 닿지를 않았다. 칼이 하필 묘한 위치에 박힌 것이다. 갖은 동작을 다 취해보았지만 별 수가 없자 석호는 죽음의 공포감이 왈칵 몰려들었다. 이 상태로 얼마나 갈까?    이러다 미끄러져 뒤로 넘어진다면? 이 생각 저생각을 하던 석호는 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병원을 찾는 것이 급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놈들이 있는 굴 아래쪽으로 갈 수는 없었다. 석호는 산을 우회하여 내려가기로 했다. 아까부터 피가 흘러 허리띠 부근이 끈적거렸다. 그래서 그런지 정신도 서서히 흐려오는 것 같았다. 석호는 길이 있던 없던 마구 숲을 헤치며 대각선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멀지 않은 곳에 텅빈 밭이 나타났다. 석호는 밭을 가로질러 산 아래로 통하는 길을 찾으려다 문득 이곳이 눈에 익은 곳임을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며칠 전에도 김기동을 안내했던 길인 것이다. 이제부터는 산 아래로 통하는 길을 훤히 알고 있었다. 석호는 길을 찾아 다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몇 걸음도 떼지 않아 자꾸만 졸립고 주저앉고 싶었다. 그리고 왠 일인지 등의 통증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간신히 백여 미터쯤 걸었을까? 전방에 웬 사람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순간 흠칫 놀라 우뚝 선 석호는 저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재빨리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오덕이와 한패 같아 겁도 났다. 그런데 저쪽의 상대도 자신을 보더니 재빨리 나무 뒤로 숨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덕이 패가 아닌 것이 확실했다. 석호는 그 사람이 숨은 쪽으로 휘청 휘청 다가갔다. 그 사람도 나무에서 머리의 반쪽을 내 밀어 이쪽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도와주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누군지 좀..."

석호는 주춤 주춤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하며 자신도 알 수 없는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길가에 스르르 주저앉아 한 손은 땅을 짚고 한 손은 허공을 저었다. 그 광경을 옅본 나무 뒤의 사내가 달려와 석호를 부축했다. 그 사내는 바로 택시에서 내려 집을 향해 산길로 올라오던 진우였다. 석호를 부축하던 진우는 등 뒤에 박힌 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진우는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혹시 쫓는 자가 있을지 모를 노릇이었다.

"살려 주세요. 쫓기고 있어요."

의식을 잃어가며 석호가 중얼거리 듯 한 말이었다. 진우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이런 일은 난생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상황으로보나 쫓긴다는 말을 들어보나 산 밑을 통해 병원으로 갈 수도 없었다. 119112는 자신의 처지로서도 별로 반갑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의 힘으로 어른을 업고 먼길을 내려 갈 자신도 없었다. 게다가 등에 박힌 칼을 빼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도 결정할 수 없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진우는 석호를 부축한 상태로 잠시 생각을 하기로 했다. 자기로서는 어찌해 볼 방법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진우는 석호를 반쯤 안은 상태로 끌고 길 아래로 내려섰다. 그리곤 낙엽이 쌓인 외진 곳에 이르자 석호를 엎드려 눕혔다. 주위의 낙엽을 모아 칼이 보이지 않을 만큼 그 위에 수북이 덮었다. 누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다시 주위를 둘러 살펴 본 진우는 그동안에 익힌 모든 재간을 동원해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를 달려 옥수수 밭 자리에 이르자 낱가리에 몸을 감추고 다시 자신이 온 길을 살폈다. 다행히 추적자는 없었다. 다시 뛰기 시작해서 숨이 턱밑에 이를 무렵에야 집에 닿았다. 진우는 곧장 덕배 아버지를 불렀다. 안방에서 노인이 내다보았다.

"왠 일이냐?"

평소와 다르게 침착성을 잃은 진우의 숨찬 모습에 덕배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마루로 나섰다.

"그게, , 오다가 칼 맞은 사람을 봤는데 어쩌면 좋을지 몰라서요."

"죽었더냐?"

"기절한 것 같습니다."

"그럼 빨리 병원으로 데려 가야지. 119에 전화부터 하지 그랬느냐?"

"그 사람이 기절하기 직전에 쫓긴다고 하기에 혹시나 싶어서요."

"어디냐?"

"컨테이너에서 멀지 않은 곳입니다."

"알았다."

덕배 아버지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 헌 배낭을 진우에게 던져 주었다. 그리고 진우 엄마에게 무어라 몇 마디 하더니 엽총을 들고 나왔다.

"사람을 칼로 찌를 놈들이면 우리 쪽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그걸 들어라. 자 가자."

덕배 아버지가 앞장서 빠르게 산을 내려갔다. 그 뒤를 쫓아가는 진우 역시 처지지 않았다. 옥수수 밭까지 온 덕배 아버지는 아까 진우가 한 것처럼 낱가리 뒤에서 잠깐 전방을 주시하더니 다시 성큼 성큼 걷기 시작했다.

"이젠 네가 앞장을 서거라. 어디 쯤이냐?"

밭 아래 산길을 내려 온 진우가 석호를 숨긴 숲으로 들어가 낙엽을 긁어냈다. 칼은 그대로 박혀 있었다.

"잘 했다.. 칼을 빼면 출혈이 더 심해 손을 쓸 수가 없느니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119에 연락을 할까요?"

"쫓기는 사연이 있을 테니 함부로 병원에 갈 처지도 아닌 것 같구나. 허고 보아하니 급소는 피해서 박힌 듯하니 이만한 상처로 사람이 쉽게 죽지는 않는다. 이 사람을 내게 업히거라. 우선 가까운 콘테나로 데려다 눕혀야겠다."

"아닙니다. 제가 한번 업어 보지요."

"허허, 넌 중학생이 될 때까지 열 관짜리 고추 푸대도 제대로 못 들던 놈 아니냐? 괜한 소리 말고 내게 업히거라."

"에이 아버님, 그건 어릴 때 얘깁니다. 이래뵈도 군대까지 마쳤는 걸요."

"네 힘은 다음에 빌리겠으니 어서 업히기나 해라."

할 수없이 석호를 덕배 아버지의 등에 업혔다. 노인은 석호를 업고 성큼 길 위로 올라섰다.

"너는 한발 앞서 나가다가 낯선 사람이 보이면 알려라."

진우는 엽총과 배낭을 메고 컨테이너가 있는 곳을 향해 앞장을 섰다. 다행히 컨테이너까지 가는 동안 별다른 징후는 없었다.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선 덕배 아버지가 석호를 내려 앉혔다.

"내가 칼을 뽑을 테니 너는 이 사람의 옷을 벗겨라."

칼을 뽑는 순간 석호가 꿈틀했다. 진우는 점퍼부터 벗기기 시작했다. 스웨타는 팔부분이 잘 벗겨지지 않았다. 그러자 덕배 아버지가 방금 뽑아낸 칼로 남은 내복과 런닝 셔츠를 단숨에 죽죽 잘라버렸다. 다시 장판 위에 석호를 엎은 덕배 아버지는 진우가 들고온 배낭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열었다. 그 속에는 응급 약과 상처를 처치할 도구가 들어 있었다.

"아버님, 생각보다 피가 많이 나오지 않는데요?"

정말이었다. 허리께로 흘러내린 피는 많아 보였으나 상처에서는 조금씩 밖에 나오지 않았다.

"등은 굵은 혈관이 많지 않은 곳이라 그렇다. 대신 중추신경을 건드리면 큰일이니라."

상처를 다루는 덕배 아버지의 솜씨는 외과 의사 못지않았다. 상처를 소독하고 꿰메기까지 순식간에 혼자서 다 해치웠다. 영화에서 수술 장면을 보면 의사는 끊임없이 간호사에게 이것 달라 저것 달라 손을 내 밀더니 덕배 아버지는 혼자서 일사천리로 치료를 끝낸 것이다. 노인의 나이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됐다. 옷을 많이 껴입어 그나마 상처가 깊지 않았으니 다행이로구나."

"헌데 아버님은 언제 의학을 공부하셨는지요?"

"뭐라? 의학 공부? 평생을 병원 없는 산속에서 살면 누구나 의사가 되느니. 짐승을 쫓다 다치면 혼자서라도 치료를 해야지 가만히 앉아서 죽겠느냐?"

"그렇겠습니다."

"문제는 밤이다. 전 주인이 쓰던 이불은 있으니 됐다만 그래도 환자에겐 추운 날씨다."

"뒤곁에 연탄난로가 있던데 그거라도 설치할까요?"

"그래라. 연탄이 없으니 토관을 들어내고 나무를 때면 될 게다."

"지금 당장 난로를 설치해 불을 피우겠습니다."

"안 된다. 연기를 보면 혹시 추적꾼이 꼬일지 모르니 불은 밤에 피워라. 나는 덕배 어미 때문에 그만 가야겠다. 만약 추적꾼이 닥치면 도망을 가거라. 도망을 갈 처지가 안 되면 이 총을 쏘아라. 옛다, 이건 공포탄이다. 웬만한 사람은 총소리만 나도 물러가느니라."

덕배 아버지는 엽탄 한발을 진우의 손에 쥐어 준 후 바삐 집으로 돌아섰다. 진우는 컨테이너 뒤에 덮혀있던 난로를 꺼내 대강 녹을 털어 연통을 한마디 끼웠다. 컨테이너 안으로 들여 온 난로를 설치한 후 부서진 경첩을 떼 내고 새 것을 달았다. 그때까지 환자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진우는 밖으로 나가 밤에 피울 난로의 땔감을 줒어 모았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 갈 무렵 덕배 아버지가 커다란 냄비에 밥과 반찬을 담아왔다.

"밥부터 먹어라. 이 사람도 정신을 차릴 때가 됐건만 어쩐일인지 모르겠구나."

"글쎄요. 피를 많이 흘리면 혼수상태가 된다던데 이 사람은 그런 것도 아닌데 이상합니다. 아버님, 혹시 이러다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일은 없을 게다. 급소를 피한데다 내장을 상한 것도 아니니 정신만 들면 회복은 빠를 게다. 마침 집에 항생제가 남았더라. 깨면 먹게 하여라."

", . 헌데 아까부터 이사람이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듭니다."

"어디서 말이냐?"

"글쎄요. 그 게 좀.... 하지만 언젠가 본 얼굴인 건 확실 하거던요."

"비슷한 사람도 흔한 법이니라. 그런데 사람을 이 지경으로 상하게 한 놈을 잡아야 하지 않겠느냐?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다, 어서 경찰에 전화를 걸어라"

"? 지금이요?"

"그래, 이 사람이 깨기 전에 어서 걸어라."

"쫓기는 사람인데요?"

"그러니까 신고를 해야지. 죄없는 사람이 왜 쫓기겠느냐?"

"119에 먼저 할까요?"

진우가 전화기를 꺼내 들고 덕배 아버지에게 묻는 순간 혼수상태의 환자가 신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잠깐만요. ,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제 말을 들어보세요. 전화 하지 마세요."

석호는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기를 든 진우에게 손을 휘져었다. 그러더니 몸을 이르키려는 듯 하더니 극심한 통증에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머리를 떨어뜨렸다.

"이제 보니 저 젊은이가 깨어 있었구만, 내 그럴 줄 알았느니. 허허."

아까부터 석호에게 눈길을 거두지 않던 덕배 아버지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눈을 감고 있는 석호의 눈꺼플이 떨리고 있는 것을 눈치 챈 것이었다. 석호는 석호대로 정신이 든 이 후 계속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절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석호라고 합니다. 칼에 찔린 건....얘기 하자면 깁니다."

"됐네. 우선 약부터 먹고 천천히 말하게나. 상처는 잘 꿰맸으니 곪지만 않으면 탈은 나지 않을 걸세."

진우가 약과 물을 갖고 와 석호를 돌려 앉혔다. 석호는 죽을 상을 하고 아픈 것을 참고 있었다. 상처가 등에 있어 엎드렸다 일어나기가 몹시 힘이 드는 탓이었다.

"좀 앉아 있겠습니다. 아픈 것보다 엎드려 있기가 더 힘이 드네요."

약을 삼키고 난 석호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벽돌 위에 올려 진 난로와 기다란 방안의 구조가 보통 가정집과 달랐다. 촛불에 비친 천정의 철판을 보고서야 석호는 비로써 이곳이 컨테이너 안이라는 것을 알았다.

"혹시 여기가 밭 가운데 잡초에 묻힌 그 컨테이너 입니까?"

석호가 그럴 것이란 확신을 깔며 진우에게 물었다. 미쳐 진우가 대답을 하기 전에 덕배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맞긴 한데...어찌 아는가? 와 본적이 있는 게로군."

", 아아 아닙니다. 짐작으로다가..."

"허허. 젊은이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네. 자네와 양복 입은 사람이 경첩을 뜯고 여길 들어오지 않았었나?"

"예엣? 그걸 어떻게..."

"내가 보고 있었으니 알지."

놀란 석호의 얼굴이 불안으로 젖어들었다. 이렇게되면 일단 무단침입 죄 하나는 제공한 셈이었다. 석호는 변명거리를 열심히 생각했다.

", 그때..."

진우는 그제서야 생각이 난 듯 석호와 덕배 아버지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 아버님 말씀을 듣고보니 저도 생각이 났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은광의 입구에서 본 사람입니다."

"그럴 게다. 본인 스스로 이미 밝힌 것과 같으니까."

"제가 언제?"

석호는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은광에서 본 사람들도 이사람들이란 얘기 아닌가?

"이미 알고 있소. 납치한 사람을 쇠사슬로 묶어 감금했던 사실도 말이요."

진우의 말에 석호는 일이 이미 틀린 것을 알았다. 변명도 거짓말도 통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단침입 죄도 억울한데 납치에 감금과 폭행죄를 더하면 최소 2년은 각오를 해야할 판이었다.

"그 광산의 주인이세요?"

"그렇소."

", 그렇다면 연합파의 곽사장님과는 어떤 사이신지요?"

약간 망서리던 진우가 덕배 아버지를 돌아 본 후 솔직하게 말했다.

"친구요."

", 이럴 수가? 그럼 형씨가 아니 형님이 바로 이진우란 분입니까?"

"나를 아는 것을 보니 틀림없군. 댁은 김기동이란 사람의 하수인이요?"

", 아니요. , 아니 사실은 맞기도 합니다. 좋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솔직하게 다 털어 놓겠습니다."

석호는 그동안 있었던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덕배 아버지가 난로의 뚜껑을 열어 나무토막을 넣고 그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난로는 기세 좋게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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