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선가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진우는 소리의 진원지를 찾느라 주위를 돌아보다 그제야 그 소리가 자신에게서 나는 것임을 깨달았다. 어제 덕배로부터 휴대폰을 받은 사실을 깜박했던 것이다. 역시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생소한 신호음이 새어 나왔다. 물 묻은 손을 닦는 것도 잊고 급히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뭐하냐?"
덕배가 물어왔다.
"설거지 중이다."
"벌써 먹었다고? 네겐 아침밥이 아니라 새벽밥이지?"
헛 하고 진우가 맥 없이 웃었다. 여섯시면 어김없이 두 노인 분들이 아침 식사를 하시니 진우라고 나중에 먹을 수도 없었다. 처음 얼마동안은 그것이 고역이었으나 지금은 밥그릇을 깨끗히 비울 정도가 되었다.
"이젠 거의 습관이 되서 괜찮어. 헌데 새벽같이 왠 일이야?"
"음 너하고 어디 가볼 데가 있다. 너 어제 그 고추밭으로 좀 내려 와. 올 때 랜턴 챙기는 것 잊지말고."
"너 지금 거기 와 있단 거야?"
"아니, 난 다른 방향으로 올라가려는 거야. 날이 밝을 땐 집으로 가는 길은 피해야 할 것 아니냐. 여하튼 한시간 후에 밭 윗쪽에서 만나자."
"알았어. 그때까지 가마."
서둘러 설거지를 마친 진우가 방으로 들어가 벽에 걸어두었던 배낭을 내렸다. 가방을 열어 헤드램프와 랜턴과 몇가지 도구들을 점검했다. 램프는 충전이 잘 되어 있었다. 랜턴을 챙겨 오라는 걸로 봐서 덕배는 은광에 들어가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곳을 드나드는 침입자와 마주쳐 싸움이 날지도 모를 일 아닌가? 가능하면 덕배를 설득해 굴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진우는 생각했다. 어쩌면 은광이 아닌지도 몰랐다. 침입자가 있더란 말을 듣고서도 무턱대고 들어갈 덕배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쨋던 만나보는 수밖에 없었다. 진우가 마루로 나서자 덕배 아버지가 뒷뜰을 돌아 나오고 있었다. 장작을 패려는지 손에는 도끼가 들려져 있었다.
"왜? 어디 가려느냐?"
"아, 예. 덕배가 좀 나오랍니다."
"어? 그 올빼미 같은 놈이 훤한 대낮에 널 불러내다니? 무슨 급한 일이 생긴 겐가?"
"글쎄요. 랜턴을 챙겨 오라고 하던데요?"
"그렇다면 굴로 들어가려는 것이구나. 그래 어디로 간다더냐?"
"그건 아직 모릅니다. 저 아래 고추밭에서 만나자는 걸 보면 은광을 살피려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음, 아마 그런 것 같구나. 이미 드나드는 사람이 있어 자칫 부딧칠 수도 있으니 각별히 조심들 하거라. 무턱대고 들어가지 말고 범굴에 들어가듯 조심해야 하느니라. 먼저 주변을 살피는 것도 잊지말고..."
마치 맹수 사냥을 떠나는 사람에게 이르듯 노인이 주의를 당부했다. 진우는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삽짝 문을 나섰다. 쌀쌀한 날씨였으나 하늘은 맑았다. 숨을 들이 쉴때마다 찬 공기가 폐속으로 빨려 들어가 가슴이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고추밭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어서 서두르지 않아도 되었다. 진우는 느린 걸음으로 눈앞의 펼쳐진 풍경에 눈길을 주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단풍이 물들어 온갖 화려한 색의 잔치를 벌리던 산들이 어느새 흑백 사진 속의 풍경이 되어 있었다. 가까운 산과 차례로 중첩되어 멀어지는 산은 마치 농담(濃淡)을 달리하는 수묵화처럼 원근의 색이 달랐다. 쫓기던 가을이 그 모든 색을 걷어가는 대신 한방울 먹물을 남겨 하늘과 땅 사이에 기막힌 산수화를 그려놓은 것이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였을까? 그동안 왜 이런 광경을 보지 못했을까 하고 진우는 생각했다. 초겨울 햇살이 앞산에 퍼지고 있었다. 이제 곧 이곳 까지 햇살이 닿을 것이다. 산을 오를 때보다 역시 내려가는 길이 빨랐다. 진우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멀리 꿩사냥을 하던 옥수수 밭이 보였다. 오늘도 꿩들이 내렸을까 하고 진우가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한 발의 총소리를 신호로 십여 발의 총소리가 골짜기에 요란하게 울렸다. 엽총 소리였다. 공교롭게도 꿩 생각을 하던 순간에 터진 총소리에 진우는 더욱 놀랐다. 정확한 지점을 알 수 없으나 총소리는 대략 옥수수 밭 근처에서 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진우의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진우가 서 있는 곳에서 불과 열 발자국도 안 되는 억새밭에 수십 마리의 꿩들이 내려앉고 있었다. 내려앉는다기보다 쏟아져 내린다는 표현이 옳을 만큼 꿩들이 수풀에 내리꽂혔다. 꿩은 본래부터 몸무게에 비해 턱없이 빈약한 날개 탓에 사뿐히 내려앉지 못하는 날짐승이었다. 살이 오른 초겨울은 더했다. 방금 진우의 주위에 내려 앉는 꿩들이 바로 그랬다. 진우는 어이가 없었다. 건너편 산기슭에서 이산의 옥수수 밭으로 날아오는 꿩을 숨어서 기다린 엽사들이 일제히 자동 연발로 떼꿩을 쏘았을 것이다. 놀란 꿩들이 내리려든 곳에 미쳐 내리지 못하자 간신히 방향만 바꿔 진우가 있는 곳에 쏟아져 내린 것이다. 몸만 가벼웠다면 얼마든지 다른곳으로 날아갈 수 있었을 거였다. 진우 가까이 떨어진 꿩은 손에 잡힐 듯한 거리였다. 무심코 손을 뻗어 움키려는 찰라 이번엔 진우에게 놀란 꿩들이 다시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엄청나게 요란한 날갯소리를 남긴 꿩들은 방금 건너온 앞산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덕배 아버지에게 배운 지식대로라면 보나마나 건너편 산에도 몇 명의 포수가 대기하고 있을 터였다. 꿩들이 가진 지능의 한계였다. 아니나 다를까 건너편 산에서 방포 소리가 요란했다. 엽사들은 새벽부터 설친 보람이 있겠지만 꿩의 무리에겐 대재앙의 아침이었다. 드디어 이 산에도 사냥철이 시작된 것이다. 진우는 걷는 속도를 빨리했다. 옥수수 밭은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긴 했으나 가는 길에라도 혹시 사냥꾼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그 부근에서 얼른 벗어나야 했다. 뛰다시피 약속 장소인 고추밭머리에 이르러서야 진우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덕배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진우는 산 아랫마을과 통하는 좁은 길로 자리를 옮겼다. 다른 길로 오겠다고 했으니 덕배가 올 길은 이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몇 달을 이 산의 곳곳을 쏘다닌 보람이 있어 진우는 이곳의 지형은 훤히 꿰고 있었다. 서성이던 진우가 눈과 귀를 길 아래에 집중했다. 인기척이 나서였다. 덕배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진우는 반사적으로 나무 뒤에 몸을 가렸다. 잠시 후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역시 덕배였다.
"이제 오냐?"
"어? 넌 언제 왔냐? 오래 기다렸냐?"
"음, 조금 전에....너 혹시 저 아래서 총소리 들었냐?"
"총소리? 아니. 못 들었는데? 어디서 누가 쏜건데?"
"글쎄 누군진 알 수 없으나 저 위 옥수수 밭 자리에서 쏜 건 틀림없어. 총소리가 요란한 걸로 봐서 팀을 이룬 사냥꾼들 같더라."
"그래? 그렇다면 알만하군. 어제 낮에 윤치우 부장 검사가 내려 왔다는 소릴 들었거든. 사냥 복장에 엽총을 멘 일행과 함께였다니 윤검사 아니면 누구겠냐? 그 양반이 워낙 크레이 사격을 좋아한다더니 이번엔 살아있는 과녁을 맞히고 싶었던 게지?"
"가만, 윤검사라면 언젠가 네가 말한 신사장이란 자가 전하려던 뇌물 총알....그 사람 아니냐?"
"왜 아니겠냐? 그 윤검사가 이곳 지청 사람들과 사냥을 나선 것일 거야?"
"설마 꿩 사냥을 하려고 이곳까지 왔을 것 같지 않은데? 넌 그런 생각 안 드냐?"
진우는 윤검사의 목적이 꼭 사냥만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왠지 총알의 행방을 직접 수사하려고 내려 온 것 같은 생각이 든 탓이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덕배가 되물었다.
“그렇잖냐? 아직까지 총알을 못 찾고 있으니 자신이 직접 수사팀을 지휘하겠다, 뭐 그런 뜻으로 내려 온 것 아니겠냐 말이다."
푸풉 하고 덕배가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윤검사가 분실한 자신의 뇌물을 찾으러 내려왔다고? 야,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소설 그만 쓰고 어딘지 빨리 앞장이나 서. 어디냐? 거기가?"
"거기라니? 거기가 어디야?"
"어디긴, 은광 말이지. 너도 굴 안엔 못 들어가 봤다며?"
"뭐? 야, 안 돼. 굴속에 몇 명이 있을지 어떻게 알구 들어가?"
은광이 있는 방향으로 막 걸음을 떼려던 진우가 제자리에 다시 서서 덕배를 바라보았다. 덕배는 그런 진우의 등을 밀어 돌려 세웠다.
"가면서 얘기 해.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설마 내가 그것도 모르고 가겠냐? 게다가 너까지 데리고 말이다."
"괜찮을까? 야, 웬만하면 그만두지 그러냐. 그냥 밖에서 살펴보자."
"헛, 넌 언제까지 도둑놈이 안방을 차지하는 꼴을 보고 있을래?"
"그건....."
"거 봐라. 쫓겨난 주인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냐?"
"그래도 혹시 싸움이라도 일어나 사건이 커지면 당장 네게 불리하잖아?"
"내 걱정은 마라. 옛날의 내가 아니다. 요즘은 주먹보다 머리로 사는 세상인 걸 나도 알아. 그래서 머리가 안 되는 나는 정보로 먹고 살고 있잖아."
"정보?"
"음, 요 며칠 사이 다른 때보다 훨씬 많은 정보가 들어오더군. 이상한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야. 게중에 하나가 네 은광을 차지했던 놈들이 어제 저녁에 다 철수했다는 정보였어. 그러니까 널 데리고 왔지. 옛날 처럼 싸움판에 널 또 끌어들이겠냐?"
"내가 언제는 싸우는 틈에 끼었냐? 싸움이라면 질색인데."
"그새 잊어버렸냐? 신검 받으러 갔던 날..."
"맞다. 그날....허지만 그날도 나는 거기 끼지 않았다. 싸움이 나자 근처에 있던 이층 다방으로 재빨리 몸을 피했거든. 창가에서 네가 싸우는 걸 관람했었지. 내가 안 도와줘도 혼자서 잘 싸우더구만..."
"그게 날 도와준 거지. 네가 끼면 내가 싸움이 제대로 되겠냐? 방해만 되지."
"허긴, 학생 때도 싸움이 시작되면 넌 언제나 내게 하는 말이 있었지. 진우 너는 빠져라 하고 말이야. 자꾸만 듣다보니 그게 습관처럼 되어서 요즘도 싸움판은 얼씬 안 한다."
덕배를 폭력 전과자로 만든 그날의 패싸움을 진우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싸움의 결과로 덕배가 감옥엘 간 것이다. 그 당시의 상황은 진우로서는 견디기 힘든 날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유일한 친구요 형제로 붙어 다니던 덕배가 없으니 허전하다못해 공황 상태에 이를 지경이었다. 그만큼 당시의 상황이 진우로서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날의 연속이던 것이다. 어쨋던 진우의 상실감과 공허감은 그날 이후 입영해서 제대할 때까지도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참, 은광에서 다들 나갔다 했지?"
"음, 그게 말이다. 놈들이 여태 그곳을 감옥으로 쓰고 있었나보더라. 허허 미친 놈들..."
"뭐라고? 감옥이라니? 굴속에 누굴 가뒀단 말이냐?"
"너도 아는 사람들이지. 오정철과 안순태였다니까."
"뭐? 그 사람들은 용수랑 같은 차에 탔던 사람들이잖아? 당연히 병원에 있어야할 사람들이 왜 거길 갇혀 있었단 말이냐?"
진우는 덕배가 하는 말이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총알로 인해 알게된 그들이 또 다시 자신의 신변에 얽혀 있다니 진우로서는 놀랄 일이 아닌가?
"그걸 다 설명하자면 기니까 짧게 얘기할게 잘들어. 옛날부터 내 심부름하던 녀석 하나가 찜질방에서 이발사로 있거던. 그 이발사의 친구가 지난번 네가 굴 입구에서 봤다는 석호라는 놈이지. 둘 다 이 지방 출신이라 평소에도 자주 어울렸나봐. 그 석호란 놈이 이발사에게 한 얘기는 자동으로 내게 들어오게 되어 있지. 그래서 그 굴에 오정철이와 안순태가 있었다는 것도 알았고 어제 저녁 오덕이 패가와서 그들을 데려간 것도 알았지. 뿐이냐? 찜질방에 와서 이발에 목욕을 시켜 새옷까지 입혀 가더란다. 보나마나 오정철패는 오늘내일 중에 서울로 올라갈 게다. 어쨋던 애들을 풀어놨으니 곧 연락이 오겠지."
"원 이거야 무슨 조환지 알수가 있어야지? 총알 한 발이 이렇게 얽히고설킬 줄이야. 하다하다 이젠 굴속에 철가면과 에드몽 탄테스라니? 참, 나..."
"에드몽이라니? 몬테크리스토 백작 아니냐?"
"같은 사람이잖아? 그 책 같이 봤으면서 모르냐? 그건 그렇고 또 다른 정보란 뭐냐? 나와 관련이 있는 거야?"
"아, 있지."
"그래? 또 뭐가 있다는 거야? 이젠 겁난다."
"네게 관한 건 두 가지가 있지. 먼저 네 채무가 지난달에 캐시콜 뱅크에서 채권 추심업체로 넘어갔다는 거야. 이젠 김기동이가 네 뒤를 좇는 일은 없을 거라고. 대신 추심업체 놈들이 쫓겠지. 어찌 보면 이놈들이 더 악질적으로 덤빌지도 몰라. 왜냐? 얘들은 월급제가 아니고 빚을 받아야 수입이 생기거든. 또 다른 정보는...헌데 너 서울생활 얼마나 했다고 그렇게 원수진 사람이 많으냐?"
얘기를 하다말고 뒤따르던 덕배가 진우의 배낭을 가볍게 당겼다. 원수라니? 이게 무슨 소린가? 진우는 잠시 대답할 말을 잊고 뒤돌아서서 덕배의 표정을 살폈다.
"원수가 아니라면 전부 빚쟁이들인가? 요즘 태백에서 너를 수소문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늘었다더군. 두어 달 전에는 캐시콜 놈들이었다 쳐도 요즘 널 찾는 사람은 뭐냐?"
"허, 내가 묻고 싶은 말을 네가 하냐? 빚이라면 캐시콜 뱅크의 대출금 말고는 일 원도 남의 돈 쓴 일이 없어. 게다가 월급 받아먹고 산 내가 남에게 원수질 일이 뭐가 있었겠냐. 피해를 당했다면 내가 당했지 남에게 피해를 준 기억도 없고..."
진우는 뿌리까지 송두리채 뽑혀 내동댕이쳐진 지난날의 세월을 생각하니 캐시콜 놈들에게 새삼 화가 솟았다. 그 당시 최소한 본인의 의사를 물어보는 전화 한통은 있었어야 했던 것 아닌가? 달랑 위임장 한장으로 거액의 대출을 해준 캐시콜 뱅크의 작태가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수미 또한 새삼 괘씸했다. 옆에 있었다면 등짝이라도 한번 시원하게 후려쳤으면 싶었다.
"상태 동생 진태 알지? 택시 모는 놈 말이다. 그놈이 그러는데 태백지구 해병 전우회로 협조 전통이 왔다더라. 본적지가 태백인 이진우를 목격하면 알려달라고 말이야. 야, 넌 육군 쫄병 출신이잖어? 헌데 해병 전우회에서 왜 너를 찾어?"
덕배의 말이 끝나기 전에 이미 진우는 가슴이 뜨끔함을 느꼈다. 해병이라면? 그랬다. 분명히 들은 기억이 있었다.
ㅡ나는 돌려서 말 못한다. 해병대답게 말할 뿐이다.ㅡ
지난해 순복에게 이별을 통보하려던 그날 그녀 아버지라는 사람이 한 말이었다. 모욕적인 말끝에 나온 그 말은 진우에겐 지금도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때 들은 그말 이외에는 해병대에 관해서 아는 것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진우였다. 다소 무식하고 저돌적이던 그때의 말투로 미루어 자신을 찾는 사람이 어쩌면 그 사람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이미 순복과 헤어진지 오래인 진우를 이제 와 찾을 리가 만무한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다니던 회사에서? 그도 아닐 것이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결론은 역시 캐시콜 뱅크 아니면 채권 추심업체의 농간일 게 분명했다.
"하다하다 이젠 별 일을 다 보는군. 난 해병 전우회가 무엇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넌 그쪽을 모른다해도 그쪽에선 널 아니까 찾는 것 아니겠냐?"
"동명이인일 테지."
"야, 옛날이나 지금이나 태백에 다른 이진우가 있단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런 허접한 정보들 말고는 없냐? 정보란 실제적 가치가 있어야 정보지 넌 어째 맨 쓸데없는 정보만 수집해서 골치만 아프게 하냐?"
"허, 모르는 소리 마라. 실속 있는 정보일수록 쓰레기통에서 수집한 게 많단 말이다. 그 속에서 가치 있는 정보를 재빨리 알아보는 사람이 나 아니냐?"
"좋아, 그렇다면 네가 지금 은광을 가는 진짜 목적은 가치 있는 알짜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지?"
"음? 눈치 채고 있었냐?"
"그렇지 않다면 대낮에 나설 네가 아니잖아? "
"맞다. 실은 어제 저녁에 구본웅을 싣고 영월 쪽으로 갔다는 정보가 있었다. 그렇다면 납치되 죽은 줄로 알고 있던 놈이 살아있다는 얘기 아니냐? 이보다 더큰 정보가 어디 있겠냐?. 이건 김기동 주위에 심어둔 아가씨에게서 나온 정보니 믿을만 하잖아? 게다가 영월 방면이라면 석호란 놈이 드나든다는 네 은광이 있는 쪽 아니냐? 감이 딱 오지 않냐? 감옥으로 쓰이는 그곳 말이다."
"그렇군, 네 말이 맞을 것 같아. 지금도 있을까?"
"어제 오정철과 안순태를 데려간 다음 구본웅을 가뒀을 테니 있고도 남지."
"그렇다면 빨리 가자. 구본웅인가 하는 사람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공포스럽겠냐? 가만, 석호라는 놈이 지키고 있는 건 아닐까?"
"헛, 그까짓 녀석이야 열 놈이 지켜봤자지. 어서 가기나 하자고."
"야, 뛰어가도 따라올 수 있겠냐?"
"너까짓 게 뛰어봤자지. 촌놈 생활 좀 했다고 빠르면 얼마나 빠르겠냐?"
"그으래?"
경사가 심한 좁은 산길에선 보폭을 좁게 그러나 빠른 박자로 걷는 것이 유리한 것을 이미 덕배 아버지로부터 배운 진우였다. 진우가 처음엔 가볍게 걷다가 점점 속도를 높였다. 덕배가 문제없단 듯 바짝 붙어 오고 있었다. 그러나 두어 번의 오르내림 길을 빠른 걸음으로 뛰는 진우의 등 뒤에서 덕배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우는 은광의 입구가 보이는 산 구비를 돌 때까지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멀리 버럭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진우는 뜀박질을 뚝 멈추었다. 곧이어 숨찬 덕배가 뛰어와 허리를 꺽고 헉헉거렸다. 진우는 덕배만큼 숨이 차지 않았다.
"야, 진우 너, 진짜 촌놈 다 됐구나, 존경스럽다. 야."
"네가 봐도 그렇지? 내가 날 봐도 그렇다. 험."
진우가 손가락으로 앞 쪽을 가르켰다.
"저기 저 버럭더미가 보이냐? 바로 그 위가 입구야"
"음, 버럭이 제법 많은 걸 보니 갱도가 깊은 것 같은데?"
"음, 들어가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너의 아버님 말씀으론 저 굴은 5백 자 깊이라더군,"
"5백 자? 가만 오백 자면 몇 미터라는 거야?"
"삼오 십오니까 백 오십 미터구만."
"야, 여하튼 가까이 가보자."
진우가 앞장을 서서 지난번에 숨었던 곳으로 다가갔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무성했던 싸리나무는 잎이 떨어지자 엉성한 가지만 남아 있었다.
"입구를 좀 살피다 가 봤으면 좋겠는데 이거 숨을 곳이 없군."
숨을 만한 장소를 찾아 사방을 두리번 거리던 진우가 실망한 듯 덕배를 바라보았다.
"야, 망은 봐서 뭐하냐? 어차피 빈 굴에 들어가는데...."
"그래도 조심은 해야지."
"야, 괜찮어, 내려가자."
이번엔 덕배가 앞장을 서서 굴의 입구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진우는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입구에 거의 다가갔을 때였다. 앞섰던 덕배가 우뚝 멈추어 섰다.
"저, 저놈, 저 놈이 석혼가 하는 그놈 맞지?"
다급한 덕배의 낮은 외침에 진우가 더 놀라 옆으로 고개를 빼고 앞을 보았다. 그 순간 석호란 놈도 이쪽의 존재를 발견 했나보았다. 철문을 밀고 밖으로 빠져 나오자 말자 재빨리 아래로 튀고 있었다.
"야, 저 새끼 잡자. 잡아야 돼."
덕배 역시 아래로 몸을 날려 뛰기 시작했다. 덩달아 진우도 덕배의 뒤를 따라 마구 달렸다. 덕배와 석호와의 거리는 불과 사오십 미터쯤이었다. 달리던 석호가 뒤를 힐끔 돌아보더니 잡히겠다 싶은지 훌쩍 버럭더미에 몸을 날렸다. 좌르르륵 하는 돌과 자갈이 미끄러지는 소리와 함께 석호가 스키선수 마냥 버럭 위를 미끄러져 내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버럭더미를 벗어나 산 아래로 냅다 튀고 있었다. 산중턱 끊어진 도로에 봉고차가 있는걸로 보아 석호가 타고 온 차 같았다.
"야, 그놈 빠르네. 나도 느린 편은 아닌데 저놈은 완전히 다람쥐로구만."
덕배가 기가막히다는 듯 싱겁게 웃었다,
"야. 저놈은 두고 빨리 굴로 들어 가보자."
진우는 재빨리 배낭을 내려 랜턴을 덕배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광산용 헤드 램프를 어깨 고리에 걸고 밧테리가 달린 혁대를 허리에 둘렀다. 덕배가 철문을 활짝 열었다. 가까이서 본 철문은 문이라기보다 철근을 격자로 용접해 창살에 붙여 둔 것이었다. 굴로 들어서자 동발이 썩으며 풍기는 곰팡이 냄새가 오싹한 바람에 묻어 나왔다. 굴은 생각보다는 낮고 폭도 좁았다. 천정은 키가 큰 사람이라면 부딛칠 정도였고 폭은 역시 키 큰 사람이 가로로 누우면 머리와 발이 벽에 닿을 지경이었다. 오륙십 보를 더 들어가자 나무로 천정을 받힌 동발들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부터는 동굴 전체가 암석이라 붕괴의 위험이 없었던 것이다. 덕배는 들어설 때부터 랜턴 불빛을 춤추며 빠르게 걷고 있었다. 구본웅의 생사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
"구본우-웅, 어디냐-아."
덕배의 고함 소리는 마치 우레 소리 처럼 엄청나게 크게 울렸다. 그 소리는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굴 안을 맴돌아 귀를 막고 싶었다.
"야아, 구본웅 대답 해, 무사하냐아?"
덕배는 멈추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어디선가 덕배의 고함에 덧씌운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을 멈춘 덕배가 귀를 기울였다.
"맞군, 야, 진우 너도 들었지?"
"그래, 여기 있는게 분명하군, 빨리 가보자."
바닥을 비추며 뛰다시피 한 탓에 두 사람의 불빛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러자 흔들리는 불빛 사이로 창살을 움켜 쥔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다.
"본웅이냐?"
"예, 형님,"
"곧 꺼내주마."
덕배가 구본웅의 얼굴에 불빛을 비추다 깜짝 놀라 랜턴을 떨어뜨릴 뻔했다. 구본웅의 얼굴은 납치 전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이발을 못한데다 감은 지 오래된 머리는 엉망으로 엉켜 있고 맞아서 생긴 얼굴의 상처와 말라붙은 핏자국은 도저히 누군지 몰라볼 지경이었다. 그 사이에 진우는 자물쇠를 부술 돌을 찾아 바닥을 훑고 있었다. 주먹 두 개 크기의 돌을 주워 자물통을 내려치자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열려버렸다.
"그거...잠겨 있지 않은 자물쇱니다. 걸어만 놓았다구요."
구본웅이 진우를 향해 웅얼거렸다. 진우가 문을 활짝 열어 재끼자 덕배가 재빨리 들어가 구본웅을 부축해 이르켰다.
"자, 나가자, 가서 치료부터 해야지."
"혀, 형님, 저 저게 있어서요."
구본웅이 자기의 발밑을 가르키자 덕배의 랜턴도 그곳을 비추었다. 놀랍게도 구본웅의 발목에는 쇠사슬이 묶여 있었다. 그리고 그 끝은 주먹보다 큰 자물쇠로 쇠창살에 연결되어 있었다. 자물쇠는 돌로 때려서 열릴 크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문을 잠그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아아, 이 개새끼들이...."
덕배가 털썩 무릅을 꿇고 쇠사슬을 움켜쥐며 울부짖었다. 그 광경을 본 진우 역시 입만 벌릴뿐 할 말을 잊어버렸다. 사람 발목에 쇠사슬이라니? 이게 같은 인간으로 할 짓인가? 참으로 경악할 일이었다.
"누구냐. 널 이렇게 묶은 놈이?"
목이 잠긴 덕배가 쇳소리로 물었다.
"김기동이 시킨 겁니다. 고문은 천태종이 직접 했구요."
"이 인간 말종 같은 새끼들....두고 봐라. 내 이 새끼들을 어떻게 하나."
덕배가 창살에 묶인 쇠사슬을 힘껏 당겨봤으나 석벽을 파고 설치한 창살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진우는 빨리 사태를 수습할 방법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했다.
"야, 빨리 전화해서 네 직원들을 불러. 아니, 여기선 전화가 안 터질 거야. 전화기 이리내. 내가 나가서 할 테니까. 쇠사슬 풀 연장도 찾아보고."
"그래야겠다. 사무실엔 전화 하지 마. 혼선이 일어나면 곤란해. 차라리 택시를 불러."
"그럼 상태 동생을 부르면 어때?"
"그게 좋겠다. 단축 8번 9번이 걔들이니까 알아서 해."
"후딱 갔다 오마."
마음이 바쁜 진우는 뒤돌아서자말자 뛰기 시작했다. 도망을 친 석호란 놈이 벌써 한패에게 연락을 했을 것이었다. 이제 곧 놈들이 떼거지로 몰릴 것 아닌가? 그렇게 되면 이쪽이 불리할 것은 뻔한 일이다. 단숨에 굴밖으로 나온 진우는 전화기의 단축 번호를 눌렀다. 8번은 상태 동생인 진태였다.
"예, 덕배 형, 진태래요."
"아, 진태였구나, 나 진우다. 오랜만이구나."
"어? 형이 어쩐 일이래요? 언제 또 내려오셨어요?"
"음, 지금 좀 급하다. 여긴 신동인데 너 빨리 좀 올 수 있냐?"
"아이고 나는 지금 손님 모시고 장성 가는 길인데요. 갔다가 거길 가려면 한시간은 걸릴걸요."
"아, 안되겠구나. 급한 일이라. 다음에 보자. 수고해라."
"아, 참, 진우형, 진우형을 누가 찾던데요."
전화를 끊으려는데 진태의 숨가뿐 소리가 꼬리를 잡았다.
"음, 나도 들었어. 또 연락하마."
재빨리 다음 번호를 누르자 이 지방 출신이라던 김상구가 나왔다.
"예. 상구래요."
"덕배가 시켜서 전화 합니다. 여기는 신동인데 오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또 통화가 길어질까 진우는 거두절미하고 용건을 말했다.
"빈차로 돌아가기 싫어서 지금 영월 역전에 있어요. 그러이 15분이면 갈 수 있어요. 밟으면 십이삼 분이면 되고요. 신동 어디래요?"
"그럼 빨리 좀 와 주시요. 신동 교차로 전에 전화 주시요."
"가만, 덕배형 친구라던 그분 맞지요? 언젠가 제 차 타셨지요?"
얘기가 또 길어지려 하자 못 들은 척 전화를 끈 다음 진우는 굴 안으로 다시 들어가 덕배 아버지가 말한 창고를 찾았다. 동발의 기둥 사이에 판자로 만든 허술한 문짝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불빛 아래 벽에 걸린 안전모와 컴프레셔 그리고 몇 자루의 삽과 곡갱이가 전부였다. 진우는 그중에 곡갱이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곡갱이는 심하게 녹이나 있었는데 자세히보니 연장들 모두가 녹 투성이었다. 콤프레셔도 벨트가 끊어지고 녹이 슬어 작동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필요한 건 곡갱이였다. 곡갱이를 들고 다시 덕배를 향해 뛰었다.
"절단기도 함마도 보이지 않더라, 일단 이걸로 해보자."
"우선 창살에 연결된 한 고리만 끊어, 아니 내가 하지."
덕배가 진우로부터 곡갱이를 넘겨받아 창살에 연결된 자물통 고리 틈에 날을 끼웠다. 진우는 불빛을 곡갱이 날에 모았다. 곡갱이 자루 끝에 두손을 모은 덕배가 힘껏 뒤로 재쳤다. 그러자 어이없게도 곡갱이 자루가 툭 부러져 버렸다. 습기에 반 이상 썩었던 것이다. 마음이 급한 덕배는 부러진 자루를 내 던지고 아무 말 없이 다시 곡갱이 날을 자물쇠 고리에 끼웠다. 고리에 끼워진 날을 지레로 삼아 반대쪽을 잡은 덕배가 불끈 힘을 주며 눌렀다. 그러나 자물쇠는 끄덕도 없었다. 자물쇠는 보기만큼 튼튼했다. 은근히 열이난 덕배가 이를 악물고 온 힘을 다해 곡갱이 날을 비틀었다. 역시 고리는 끊기지 않고 반대로 창살이 조금 휘었을 뿐이다.
"야, 올라서, 올라서서 밟아보라고."
진우가 초조한 듯 말을 보탰다. 덕배도 작정한 듯 곡갱이 날 위에 두 발을 올렸다. 그리고 체중을 실어 아래로 크게 발을 굴렀다. 챙그랑 하는 쇳소리와 함께 덕배가 땅바닥에 나 뒹굴었다. 넘어진 덕배를 살필겨를도 없이 진우는 사슬에 먼저 눈이 갔다. 그러나 자물통 고리는 끊어지지 않고 오히려 자물쇠에 연결된 창살의 용접 부분이 부러져 있었다.
"됐다, 끊어지나 부러지나 그게 그거지. 가자."
사슬을 움켜 쥔 덕배가 구본웅을 번쩍 안고 철문을 나섰다. 덕배의 랜턴까지 든 진우는 덕배의 앞길을 비추며 바짝 뒤에 붙었다.
"안 되겠다. 아예 업혀라."
"걸을 수 있습니다. 형님."
"시간 없어. 빨리 업혀."
구본웅을 업은 덕배의 걸음은 빨랐다. 순식간에 굴 밖으로 나온 것이다. 때마침 전화가 울렸다. 신동 교차로에 도착한 김상구였다. 전화기를 건내받은 덕배가 도로에서 벗어나는 샛길을 알려주었다. 덕배는 다시 구본웅을 업고 버럭 더미를 우회하여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진우는 랜턴과 베터리를 풀어 다시 배낭에 넣어 짊어지고 철문을 닫은 다음 주위를 살폈다. 놈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그러나 구본웅의 구출이 신속했던 만큼 시간은 충분할 것 같았다. 저만큼 앞서는 덕배의 뒤를 따라 진우도 미끄러지 듯 뒤를 따랐다. 올 때는 맑던 하늘에 구름이 빠르게 몰려오고 있었다. 또한 산 밑으로부터는 바람이 계곡을 쓸며 올라오고 있었다. 찬바람은 목덜미를 훑고 소매 속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진우는 흡사 자신이 풀려난 듯 해방감마저 느껴져 가슴이 시원함을 느꼈다. 끊긴 도로까지 내려와 구본웅을 내려놓은 덕배가 잇 사이로 신음 소리를 냈다. 밝은 곳에서 본 구본웅은 몰골이 더 엉망이었다. 눈두덩에 난 상처는 꿰매지 않아 살가죽이 크게 벌어졌고 왼쪽 어깨도 쓰지 못하는 상태였다. 한팔로 구본웅의 어깨를 감싼 덕배가 물었다.
"그동안 어디 갇혀 있었냐? 거기서부터 이렇게 묶였었냐?"
"모릅니다. 기절한 상태에서 묶였기 때문에 말입니다. 어떤 캄캄한 지하실이었는데 술창고가 분명했습니다. 문을 열때마다 얼핏얼핏 술병을 꺼내가는 게 보였으니까요. 쇠사슬은 미리 준비를 해 놓았는지 눈을 뜨자말자 이랬습니다."
"음.....놈들이 운영하는 업소 지하실이군. 굴로는 왜 옮겼데냐?"
"그게 ....그동안 깡통에 제 대소변을 받아내야하니까 놈들이 죽을 지경이었거든요. 놈들은 그래서 저를 더 없애고 싶어 했습니다. 김기동이 허락했다면 저는 벌써 죽었을 겁니다. 대략 열흘 전쯤에 밤중에 다른 곳으로 또 한 번 옮겼었는데 어딘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엄청 넓고 큰 창고였습니다. 천태종이 함께 따라와 또다시 고문을 하더군요. 이 상처들은 천태종의 구둣발에 채여 이렇게 된 겁니다. 아픈 것보다 그곳에선 추워서 죽을 뻔 했습니다. 다행히 비료부대와 마대자루가 많아 그걸로 견뎠지요. 그러다 어제 저녁에 또 이리로 실려 왔습니다."
"총알의 행방은 끝까지 모르쇠로 버틴 모양이구나. 아직 살려둔 걸 보니."
"최후통첩이 오늘까지라고 했습니다. 오늘 밤까지 불지 않으면 내일은 파묻는다고 했습니다. 허지만 불어도 안 불어도 죽일 게 뻔한 것 아닙니까? 게다가 저는 총알이 누구 손에 있는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런데 그쪽에선 왜 이진우를 지목하고 쫓는 거냐?"
"안순태가 저분을 조사했다는 설명을 붙였지만 왠일인지 김기동이 믿질 않더라구요. 저분이 형님 친구 분이라는 걸 안 다음부터 말입니다. 두분이 이미 사전에 짰다는 거지요. 그래서 목격자인 내게 확실한 대답을 들으려고 납치를 한 겁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진우가 새삼 구본웅에게 미안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이 정도에서 그친 것이 다행한 일이기도 했다. 만약 구본웅이 놈들의 손에 죽었더라면 두고두고 진우의 양심을 괴롭혔을 터였다. 저 아래 구빗길로 택시가 달려오고 있었다. 김상구의 택시였다.
"형님, 어, 같이 계셨네요이."
덕배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상구가 진우에게도 아는체를 했다.
"빨리 왔네요."
진우도 인사치레를 했다.
"형님이 부르시이까네 쎄리 밟았지요."
"뒷문 열어라."
덕배의 말이 있기 전에 진우가 먼저 문을 열어 놓았다. 상구는 구본웅의 몰골에 눈이 팔려 있었다. 뒷자석에 앉히려고 구본웅을 안은 덕배가 문으로 다가가자 쇠사슬이 땅에 끌렸다.
"으앵? 저기 머래요?"
그제야 쇠사슬을 발견한 상구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나왔다.
"가면서 얘기하고 빨리 병원으로 빼. 시간 없어."
"어느 병원으로 모실까요? 형님."
"영월 쪽으로....아니, 아예 제천으로 가자. 영월은 너무 가까워."
"예, 알았어요."
택시가 산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내려가는 듯 하더니 지방도로에 올라섰다. 차는 서서히 속력을 높히더니 채 오 분도 되지 않아 38번 국도 위에 있었다. 국도에 오르자 말자 상구는 카 레이서 마냥 입을 굳게 다물고 악셀을 밟아대고 있었다. 과속 카메라 따위는 아예 무시하겠다는 자세였다. 순식간에 동강을 건너 터널을 통해 영월을 벗어났다. 동강 휴게소 안내판이 나타났다.
"가만, 휴게소에 잠깐 들렸다 갑시다."
진우가 말은 상구에게 하며 눈은 바깥의 휴게소 표지판에 두었다.
"예? 휴게소요? 형님, 급해요? 십오 분이면 제천에 갖다 댈 수 있는데요. 쪼꼼만 참으시면 안 되까요?
상구가 진우를 힐끔 돌아보았다.
"화장실이 아니요. 휴게소마다 공구상이 있는 걸로 아는데...."
"잘 생각했다. 야, 상구야, 쟤 말대로 해. 아예 철근 자르는 큰 놈으로 사야겠다."
진우가 무엇을 하려는지 재빨리 알아 챈 덕배가 상구에게 일렀다.
"아하, 그렇네요, 이놈의 대가리하고는 쯧"
상구가 휴게소에 차를 세우자말자 덕배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진우도 뒤를 따라가 보았다. 뽕짝 음악이 요란한 곳에 공구를 비롯한 만물상이 있었다. 덕배는 진열된 공구를 둘러보다가 작은 절단기 하나를 들고 진우를 돌아보았다.
"야, 틀렸다 큰 건 없다. 이까짓 걸로 잘라지겠냐? 어쩌지?"
"그럼 쇠톱이라도 사지 뭐. 어차피 한 가닥만 자르면 되잖어?"
"그래? 그럼 쇠톱으로라도 잘라 봐?"
덕배가 쇠톱을 사는 동안 진우는 자판기에서 생수를 몇 병 뽑았다.
택시로 돌아와 목들을 축인 다음 다시 제천으로 향해 달렸다. 달리는 차 안에서 덕배는 구본웅의 발목에 묶인 쇠사슬을 자르기 시작했다. 쇠사슬을 잘라내는 데는 몇 분 걸리지 않았다. 사슬을 제거한 발목은 살가죽이 벗겨져 벌겋게 부어 있었다.
"김기동과 천태종 이새끼들을 어떻게 조져야 속이 풀릴까? 이게 무슨 짓이냐 말이다."
"글쎄 그 작자는 정말 여러사람을 못살게 구는군."
"하우스 사업 선수 치는 것만 해도 속이 끓는데....가만, 네가 산에서 봤다는 놈도 김기동 그놈인 것 같다. 넓은 공터에 인적이 드문 곳. 그렇군. 그 새끼가 하우스 자리를 보러 다녔군. 틀림없어."
진우는 어쩌면 덕배의 추리가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넓은 공터에 남의 눈을 피해야 하는 곳이라면 그곳이야말로 최상의 장소였다.
"저...하우스라면 혹시...노름판 말씀하십니까?"
운전대를 잡은 상구가 백 밀러로 힐끗 뒷자리를 보며 물었다. 뜻밖에 상구가 끼어드는 눈치라 덕배는 얼른, 이녀석이 무언가를 알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 맞다. 상구 너 거기에 대해 아는 게 있냐?"
"머, 안다기보다 들은 말이 있어 그래요. 친했던 동창 놈 하나를 몇 년만에 만났거든요. 학교 다닐때부터 말썽쟁이로 소문났던 놈인데 얼마 전에 만나보니 아예 깡패가 되었더란 말입니다. 자기 말로는 조직 행동대에서 무신 남바 쓰린가 먼가라고 자랑까지 하데요. 그런데 그 자식이 얼마나 꼴통인가 하먼요. 어릴 적에..."
"아니, 하우스 얘기를 해 보라니까?"
"아 참, 그놈이 그러대요. 내일 모레가 개장일이까 길 묻는 손님 있으먼 끌고 오라고요. 두당 오만 원 준답니다. 그거 괜찮타 싶어 장소를 물었더니 절대 비밀을 지킬 것을 맹서하라고....추전역 아시지요? 거기서 얼마 안 떨어진 폐광 사무실이랍니다."
"네 동창이라는 놈 그놈 이름이 석호 아니냐?"
"예? 형님이 그놈을 우째 알아요?"
상구의 놀란 눈이 거울에 비치자 덕배는 빙긋 웃었다.
"네가 할 일이 한 가지 늘었군. 활약을 기대하마."
"허, 형님한테 도움이 될 수만 있으면 먼 일인들 못하겠어요? 안 그래요?"
상구가 환하게 웃었다. 얼마 후에 택시는 제천 시내로 들어섰다. 상구는 제천의 지리에도 밝은 듯 차를 곧장 시내 중심가로 몰았다.
"저 앞에 보이는 저 병원이 제천서는 제일 큽니다. 괜찮겠습니까 형님?"
"그래? 그럼 그러자. 상구 너는 우리들 내려놓고 먼저 돌아가라. 장사해야지."
"아이래요. 개인 택시 좋다는게 머래요? 놀고 싶으면 노는 거지요. 저는 주차장에 차 대놓고 한숨 잘 테이까 천천히 일들 보십시요. 형님."
택시에서 내린 덕배는 구본웅을 업자말자 곧바로 응급실로 들어갔다. 남자 간호사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상태를 살핀 후 침대에 눕혔다. 찟긴 상처보다 어깨가 문제였다. 얼마 후에 의사가 내린 결정은 이 주일간의 입원이었다. 입원실이 배정이되어 구본웅이 실려가자 덕배는 자신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진우는 구본웅의 병실까지 따라가 환자복을 갈아입는 것을 도와준 다음에야 대기실로 돌아왔다. 덕배는 윗 사람과 통화중인 것 같았다. 왜냐하면 상대가 보지 못할 것임에도 덕배가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덕배의 입에서 예, 회장님, 이란 말이 나왔다.
"저 친구를 그대로 두고 가도 되겠냐?"
"괜찮어. 곧 우리 애들이 올 거다. 일차 진료비와 입원실료는 냈으니 며칠 후에 와보지 뭐. 내가 여기 있으면 오히려 애들이 불편해."
"그나마 택시가 빨리 도착해서 다행이였어, 난 굴 밖에서 놈들과 마주칠까 겁이 났었거든. 지금쯤 놈들이 난리겠지?”
"그렇지 않을 걸? 모레가 하우스 개장 날인데 너라면 괜한 말썽을 이르키겠냐? 열흘만 버틴다면 아마 놈들은 이번 판으로 수십억 원은 만질 거야."
'뭐? 열흘에 수십억을?"
"성질대로 하면 검찰에 찔러 놈들을 모조리 쳐 넣고 싶지만 나는 다른 방법을 생각 중이다."
"다른 방법으로도 속 시원하게 처리할 수 있단 말이냐?"
"속만 시원하려면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 허지만 나는 실속을 챙기려는 거다. 아까 내가 굽실대며 통화하는 것 봤지? 우리 회장과 통화한 거다. 우리 애들만 데리고 하다가 안 될 때는 어쩔 수 없이 조직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무슨 소린지 통 알 수가 있어야지?"
"넌 모르는 게 날 도와주는 거야. 참, 진태랑 상구 전화번호를 네 핸드폰에 옮겨 놔라. 너도 필요 할 지도 모르니까."
덕배가 휴대폰을 건네주자 진우가 자신의 휴대폰으로 번호를 입력했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택시를 찾으니 상구는 입을 반쯤 벌린 채 곤히 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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