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설

파투(破鬪) 8. 은광의 침입자(1) 수상한 그림자

fiction-google 2024. 3. 12.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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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웅이 납치되었다는 덕배의 전화를 받은 며칠 후였다. 진우는 랜턴과 간단한 연장이 든 등산용 배낭을 메고 산길을 걷고 있었다. 지도에 표시된 은광으로 가는 길이었다. 구본웅이 납치되었다면 자신에게도 언제 그런 화가 닥칠지 몰랐다. 그럴 때를 위해 만약을 대비해야 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덕배 부모에게도 화가 미칠 것이다.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진우는 벌통에서 필요한 몇 가지를 챙겼다. 가는 길은 덕배 아버지로 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었고 지도와 나침반이 있으니 걱정 없었다. 게다가 십여 km도 채 되지 않는 가까운 곳 아닌가? 시월 중순 밖에 되지 않았지만 고산 지대 인지라 단풍이 물들었던 나무에선 벌써 낙옆이 떨어지고 있었다. 스산한 바람이 일자 낙엽송의 작고 노란 바늘 같은 잎들이 잠시 허공에 머물다 일제히 땅 위에 내려앉았다.    진우의 발 밑엔 이미 쌓인 낙엽만으로도 카페트를 밟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은 유달리 키 큰 낙엽송이 많았다. 바람은 가지들을 가볍게 흔들고 노란 바늘잎 또한 계속 눈보라처럼 흩날렸다. 진우는 옷깃 사이로 바늘잎이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 목을 움추리며 바삐 걸었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무엇이 나무 사이로 껑충 솟구치더니 금세 사라져버렸다. 얼핏보아 고라니 같았다. 산속에서 예고도 없이 만난 짐승에 진우의 머리끝이 쭈삣했다. 그러나 산돼지가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진우는 서둘러 배낭을 끌러 챙겨온 낫을 꺼내 들었다. 낫이 비록 산돼지에겐 무용지물일진 몰라도 어쨋든 한결 마음이 든든했다. 진우는 더욱 발걸음을 재촉해 낙엽송 숲길을 벗어나려 애썼다.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숲길이 꽤나 길게 이어져 있었다. 한참을 헤메고서야 겨우 숲을 벗아날 수 있었다. 진우는 지도를 펴 가야 할 곳의 위치를 확인했다. 절반은 더 가야했다. 심호흡을 한 진우는 천천히 좌우를 돌아보았다. 낙엽송 숲길을 벗어났으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산을 돌아가자 멀리 골짜기에 지붕이 빨간 몇 채의 집이 보였다.

'저런 산속 골짜기에도 집들이 있다니...논도 밭도 없는 저런 골짜기에서 어떻게 살까? , 팬션이구나. 지붕이 어쩐지....'       

언젠가 구글 지도로 보았던 한반도에는 이미 오지가 남아 있지 않았었다.    아무리 깊은 산속이라 하더라도 확대를 해보면 반드시 집이 있었고 길이 있었다. 아니 오지일수록 오히려 집이 많았다. 무슨무슨 팬션이란 집들이었다. 산과 계곡마다 팬션과 별장이 지어져 위성으로 본 지도는 흡사 벌레먹은 배추 잎처럼 보였었다.

'나도 저런 골짜기에 팬션이나 하며 살았으면...'

진우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집들을 바라보았다.   

'아니지. 이번 일이 해결되면 다시 서울로 가야지. 가서 다시 한번 도전해 볼테다. 허지만 무슨 수로 돈을 갚지?'

진우는 우울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아 크게 발걸음을 내 디뎠다. 얼마를 더 가 산구비를 돌아서자 말자 눈앞에 신동산이 나타났다. 특이하게 생긴 산봉우리가 처음 와 보는 진우의 눈에도 낯설지 않았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덕배 아버지의 말씀대로 산 중턱 가파른 비탈에 돌들이 굴러 쌓인 곳이 보였다. 보나마나 은광에서 나온 돌들일 터였다. 버럭이라 불리는 그 돌들은 광산촌에서 자란 진우에겐 낯익은 것들이었다. 산 중턱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자 산죽이 무성했다. 산죽을 헤치며 중턱에 닿으니 이번엔 싸리나무와 칡덩쿨이 얽혀 길이 없어져버렸다. 진우는 길 아닌 길을 헤치며 나가야 했다. 들고 있던 낫으로 덩쿨을 치며 꾸준히 굴의 입구로 짐작되는 곳으로 향했다. 얼마 쯤 나아가자 굴의 입구인 듯 쇠창살로 된 문이 보였다. 진우는 주머니에서 챙겨 온 열쇠들을 더듬어 쥐었다. 열쇠는 모두 네 개였다. 그 가운데 두 개는 이 광산의 것이고 둘은 산 윗 쪽에 있다는 굴에 맞을 것이었다. 진우가 굴의 입구에 거의 다다를 무렵이었다. 굴 아랫 쪽에서 자갈돌이 좌라락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 밖의 소리에 놀라 진우는 움찔하고 멈추었다. 버럭이 쌓인 아래를 내려다보니 왠 젊은 사내가 돌 더미 위에 넘어져 있었다. 사내는 엉거주춤 일어나 손으로 무릎을 감싸더니 큰소리로 욕을 뱉었다.

"카아, 카아아, 씨팔. 카아, 시이팔."

사내는 넘어지면서 무릎이라도 호되게 찧은 모양이었다.

"니미 씨팔 다 와서 이 게 뭐야? 에이 썅."

사내는 무릎을 붙들고 연방 욕을 뱉으며 어쩔줄 모르고 있었다. 얼마가 지나자 통증이 조금 가시는지 바닥에 흩어진 무언가를 주섬주섬 주워 비닐봉지에 담았다. 진우는 이런 산속에 갑자기 나타난 사내를 보고 잠시 어리둥절했다. 게다가 하필이면 자신이 가려는 굴의 입구 부근에서 말이다. 그제서야 수상한 생각이 와락 들었다. 이어서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일단 숨고 볼 일이었다. 재빨리 싸리나무 밑으로 몸을 엎드린 후 사내의 동태를 가만히 엿보았다. 사내는 커다란 봉지를 양 손에 들고 버럭 무더기를 우회해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굴 입구에 닿자 봉지를 내려놓고 사방을 빙 둘러본 후 자물쇠를 아래로 확 당겼다. 그러자 열쇠도 없이 자물쇠는 마술처럼 쉽게 열렸다. 사내는 다시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본 다음 문을 열고 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싸릿대 사이로 지켜보던 진우의 심장이 그때서야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손에 쥐었던 열쇠 묶음을 새삼 들여다보았다.

'이 열쇠들이 아닌가? 아니면 굴을 잘못 찾은 것일까?'

그러나 또 다른 굴이 몇 개쯤 더 있다면 모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굴이 틀림 없었다. 그렇다면 조금 전 그 사내는 무단 침입자가 분명했다. 그러고보니 사내는 사방을 둘러보고 나서 굴로 들어갔었다. 사내가 광산의 주인이라면 주위를 경계할 필요가 없을 터였다. 그렇다고 내가 주인이요 하고 무턱대고 나설 수도 없었다.

'그럼 저 사람은 뭐지? 수상한 놈이로군.'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자 점점 더 수상하게 느껴졌다. 놈의 동태를 살펴야 했다. 진우는 몸을 낮추어 뒤로 물러나기로 했다. 굴의 입구와 자신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눈에 띌 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엇하러 남의 은광을 몰래 침입하는지, 다른 일당이 더 있는지도 알아야 했다. 굴의 입구보다 약간 높은 곳으로 자리를 옮긴 진우는 대강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사내가 굴 입구로 다시 나오기를 기다렸다. 진우가 앉은 곳도 싸리나무와 칡덩쿨이 어지럽게 엉켜 있었다. 싸리잎은 이미 절반은 떨어지고 남은 잎은 모두 진노랑색으로 변해 있었다. 진우는 칡덩쿨을 깔고 앉아 이따금 고개를 살짝 들어 굴 입구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머릿속엔 별별 생각이 가득했다. 위기에 처했을 때 피하려던 은광을 저놈에게 선점 당한 꼴이 아닌가? 저놈은 덕배 아버지의 은광에서 무얼 하려는 것일까? 몰래 은을 채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은 아닐 것이었다. 진우가 보기에 새로 덮힌 버럭의 흔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굴속에서 무슨 나뿐짓을 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설마 범죄를 저지르고 숨어사는 놈은 아니겠지? 이제 어쩌지? 무단 침입으로 경찰에 신고를 할까? 자신의 처지로 보아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럼 덕배 아버지가 신고를 한다면? 그것도 안 될 말이었다. 외부에 노출을 꺼리긴 덕배 아버지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다면 힘으로 쫓아내야 할 텐데 한 놈인지 또 다른 놈들이 있는지도 모를 뿐 아니라 설혹 한놈이라 하더라도 이긴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만약 싸움에서 진다면? 놈은 범죄를 감추려 진우 자신마져 땅에 파 묻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으스스한 기분마저 들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닥치는 일이란 어쩌면 모조리 이런 꼴이란 말인가? 진우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머리가 점점 복잡해지고 있었다. 한번 들어간 사내는 무얼 하는지 도통 나오는 기색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지루하기까지 했다. 머리를 들어 굴의 입구를 살짝 엿보았다. 그 순간 언제 나왔는지 아까 그 사내가 모습을 들어내 창살문 가까이 와 있었다.

'.'

진우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싸릿대를 헤친 틈 사이로 철문을 바라보았다. 잔가지가 시야를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머리를 들 수도 없었다. 잠시동안 가만히 엎드려 있기로 했다. 그러나 열을 세기도 전에 사내의 동태가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다시 머리를 들어 입구를 바라보니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새 내려간 것일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버럭 더미 쪽에도 없는 걸로 보아 굴 안으로 다시 들어간 것 같았다.

'왜 다시 들어갔을까? 뭘 잊었었나?'

다시 자리에 앉아 놈을 기다려보기로 했다. 막대기로 싸릿대를 헤쳐 그 사이로 입구를 노려보았다. 곧이어 사내가 나타나 철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는 자물쇠를 걸고 이번엔 주위도 돌아보지도 않고 산 아래로 슬금슬금 내려가고 있었다. 얼마가 지난 뒤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내는 도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도로 위에는 봉고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얼핏 보아도 자동차가 서 있는 앞 쪽은 도로가 끊어지고 없었다. 자동차에 다가간 사내가 운전석으로 들어가는 듯 하더니 곧이어 차를 돌려 왔던 길로 향했다. 진우는 자동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지? 이젠 들어가 볼까?'

진우는 난처했다. 다른 일당이 있을지 모를 굴로 들어가는 것은 무모한 짓 같았다. 그렇다고 마냥 밖에서 입구만 살피고 있을 수도 없지 않은가? 굴의 내부를 살피러 애써 이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서자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생각을 한 진우는 발길을 돌렸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은광을 드나드는 놈들의 정체를 확실히 알기 전에 섣불리 접근해서는 자신이 불리했다. 우선 사내의 정체와 굴을 드나드는 목적을 알아내야 했다. 진우는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 걷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쫓는 캐시콜뱅크 놈들과 은광을 드나드는 사내를 결부시켜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지나친 상상 같았다. 이진우라는 인물과 은광의 관계를 캐시콜뱅크 측에서 어찌 알겠는가? 캐시콜뱅크 측에서 자신을 찾고 있다면 아무래도 아직은 작은 아버지 댁이나 덕배 주변을 살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어쨋든 은광의 입구에서 본 사내로 인해 진우의 마음이 몹시 찜찜했다. 어느새 낙엽송 숲에 들어선 진우는 노오란 낙엽이 흩날리는 허공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뭐야, 이거? 경찰일까? 약초꾼 인가? 아니면?'

방금 은광에 들러 오정철과 안순태에게 취사도구와 담요를 갖다준 석호는 운전을 하면서도 영 찜찜 했다. 조금 전 굴 밖으로 나오다가 정체모를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들어갈 때는 몰랐는데 굴 밖으로 나오면서 무심코 앞을 보다가 수풀 사이로 무언가가 언듯 움직인 것을 보았다. 뜨끔한 생각이 드는 순간 재빨리 머리를 굴려 태연히 굴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곤 벽 쪽에 붙어 어둠에 몸을 숨겼다. 창살 사이로 가만히 내다보고 있으니 잠시 후 수풀이 흔들리더니 사람의 머리가 반 쯤 보였다. 이어서 머리통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그 머리는 자신이 굴을 들어갈 때부터 줄곳 지켜보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누군지 몰라도 자신이 굴로 드나드는 것을 본 확실한 목격자였다. 일단 아무 일도 없는 듯 산을 내려오고 말았지만 뒤통수가 가렵고 마음 한구석이 영 찜찜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설마 광산의 주인은 아니겠지.'

폐광인지 휴광인지는 몰라도 은광의 문을 닫은 것은 십여 년이 된다는 것은 누구보다 석호 자신이 잘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주인이라면 떳떳히 나타나 항의를 하던지 무단 침입으로 경찰을 출동시켰을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약초꾼인가?    차라리 아까 그 사람이 누군지 만나 확인을 할 걸 하는 생각 마져 들었다. 그랬다면 이렇게 찜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곳 사람이라면 웬만한 얼굴들은 거의 알고 있었다. 만약 석호 자신이 상대를 몰라본다 해도 상대는 석호를 알 것이었다. 좁은 이 바닥에서 온갖 나뿐 짓과 말썽을 부리며 자란 석호의 얼굴을 모른다면 이 지방 사람이 아닐 것이다.

'잡아서 일단 두들겨 패고볼 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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