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치 12주의 골절상을 당한 오정철과 안순태는 사고 후 열흘이나 입원해 있었건만 사장도 천태종도 연락이 없자 퇴원 해 숙소에 머물고 있었다. 삼주 쯤 지나자 깁스한 팔다리에 전혀 통증도 없고 순태는 목발을 집고 걷는 것에 큰 불편이 없었다. 그 사이 숙소의 생활비는 배일서가 대 주었다. 사장의 지시가 있었다는 것이다. 어느날 아침에 배일서가 숙소로 찾아왔다.
"네가 어떻게 아직 거기를 관리 하냐? 천태종네 애들이 아직도 안 내려왔냐?"
오정철의 물음에 배일서가 머리를 긁으며 머뭇거렸다.
"자식 묻는데 왜 대답이 없어?"
옆에 있던 안순태가 눈알을 부라리며 배일서의 뒷통수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며칠 전에 내려왔습니다."
"뭐? 며칠 전에 내려와 있다고? 그렇다면 너희들은 어쩔거래?"
오정철이 급히 물었다. 신동규 사장의 지시만 내려오기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판에 갑자기 동생들이 쫓겨나면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그, 그게 말입니다. 아직 아무 말이 없습니다. 천과장이 형님과 인수인계를 정식으로 끝낸 다음에 하겠답니다."
"뭐야? 이제와서 인수인계를? 씨발, 놀고 있네. 야, 정철아, 천태종 이 새끼가 무슨 야로를 부리자는 수작 아니냐?"
천태종의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나쁜 안순태가 주먹을 들어 방바닥을 쿵 찧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대로 있을지 모릅니다. 사장님의 수술 경과가 좋아서 한달 후에 다시 여기로 오실지 모른답니다. 그래서 일단 영업 실적만 인수인계를 하고 우리는 그대로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넌 어떻게 낱낱이 알고 있냐? 천태종이 너희들에게 그렇게 얘기하디?"
"아, 아닙니다. 천과장과 김과장이 하는 얘기를 들은 아가씨를 통해서 였습니다."
"알았다. 좌우간 몸조심들 하고 있으랬다고 네가 애들한테 전해라. 너도 상황 잘 살펴서 처신 해, 몸 다치지 말고. 알았냐?"
"예, 형님."
오정철은 성한 오른손으로 배일서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오정철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인 뒤 문을 나서려던 배일서가 무슨 생각에선지 돌아섰다. 그러더니 문 밖에서 계속 쭈삣쭈삣거리고 있었다.
"왜? 할 말이 남았냐?"
오정철이 물었건만 배일서는 계속 오정철의 눈치만 살필 뿐 대답이 없었다. 답답해진 오정철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왜? 무슨 일이야? 괜찮어 말 해봐."
일서는 말없이 손에 쥔 것을 오정철에게 내 밀었다. 그리고는 방안의 순태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형님, 유에스빕니다. 이걸 잘 간수 하십시요. 나중에 필요할 지도 모릅니다. 제가 형님께 해드릴 수 있는 게 이것 밖에 없습니다."
무심코 받아든 USB를 내려다보던 오정철이 금세 무슨 낌새를 알아챘다.
"천태종이냐? 김기동이냐?"
"둘 답니다 형님."
"그럴 것 같더라. 알았다. 고맙다."
다시 한 번 깊숙히 허리를 꺽은 배일서가 재빨리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날 저녁이었다. 오정철과 안순태는 저녁밥을 먹기 위해 단골 식당에 전화로 부대찌개와 공깃밥을 시켰다. 퇴원을 한 뒤부터 걷기가 불편한 순태를 위해 배달을 시켜 왔던 것이다. 얼마후 계단을 뛰어 오르는 소리가 들리고 잇따라 초인종이 울렸다.
"기다려."
오정철이 문을 열어주었다. 헌데 밖에 있는 것은 배달맨이 아니라 못보던 덩치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덩치의 눈길에서 찌릿한 느낌이 든 오정철이 순식간에 문을 닫았다. 그러나 상대도 빨라서 문짝 사이로 얼른 발을 밀어 넣었다.
"어? 너 누구야?"
성한 오른손만으로 도어 핸들을 당기는 오정철이 두 손으로 당기는 바깥의 힘에 끌려 비척비척 딸려가기 시작했다. 그걸 본 안순태가 일어서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야 임마, 너 어떤 새끼야?"
문이 조금씩 열리자 다급한 오정철이 악을 쓰며 물었다. 그러자 문 사이로 구두 대신 무릎이 쑥 들어오더니 위에서 놈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에이 이거 왜 이러는 겁니까? 천과장님 심부름 온 사람을 이렇게 쫓아서야 됩니까?"
"뭐야? 천과장? 그럼 넌 천태종이 동생이냐?"
오정철은 맥이 빠졌다. 빌어먹을 놈. 진작 얘기를 할 것이지. 아침에 배일서가 말한 대로 천태종이 인수인계를 하자는 것일 터였다. 오정철은 핸들을 놓아버렸다.
"우리 과장님께서 두분을 좀 보자십니다."
천태종의 조직원이 문 밖에 버티고 선 채로 용건을 말했다.
"뭐야? 지금 이 시간에? 좋아. 기다려. 옷 좀 갈아입게."
"밖에 차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대로들 가시지요."
옷을 갈아입겠다며 돌아서는 오정철의 소매를 덩치가 잡았다.
"그래 좋다. 그대로 가지. 헌데 쟤는 두고 나만 가도록 하지. 야, 순태 너는 여기 있어라."
"아니, 안 됩니다. 두 분 다 모시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저녁 시간에 나타난 천태종의 부하들이 못내 찜찜하던 오정철이 만약을 위해 순태를 남기려 했으나 거부를 당하자 더욱 수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 씨빨, 인수인계하는데 내가 가서 뭐 해? 야, 정말 나도 오랬냐?"
아까부터 속이 부글거리던 순태가 심부름 온 졸개의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그러자 밖의 덩치는 바닥에 침을 찍 뱉더니 안순태를 향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말조심 해. 너도 과장급이냐? 뒈지는 수가 있어. 새끼..."
"뭐? 저 새끼가..."
"안순태! 그만 둬."
오정철이 소리를 꽥 질렀다. 그때 서너 명의 검은 옷의 덩치들이 계단을 퉁퉁 뛰어올라와 문 밖을 둘러쌌다. 오정철은 말없이 그들을 노려 본 뒤 신발을 신고 나섰다.
"야, 저분도 정중히 모셔라. 과장님 지시다."
먼저 온 덩치의 말에 뒤에 온 덩치들이 우루루 달려들어, 안순태를 부축해 계단을 내려 갔다. 밖에는 소나타와 스타렉스가 한 대씩 있었고 철가방을 싣고 막 도착하는 오토바이가 있었다. 소나타가 먼저 떠나자 오정철과 안순태는 스타렉스에 태워졌다.
"어, 어, 아저씨. 어데가요? 배달 왔는데요. 부대 찌개, 부대...어,어.."
부대찌개를 주문했던 팔 다리 부상자들이 스타렉스를 타고 떠나자 배달맨이 당황해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좌우의 우람한 덩치들 사이에 오정철과 안순태를 끼여 앉혔다. 가을의 해는 짧아서 밖이 어두웠다. 게다가 창문엔 짙게 썬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차가 가고 있는 방향이 영월 쪽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천태종이 영월서 기다리냐?"
조직에서 뼈가 굵은 오정철이 이미 짐작하는 바가 있어 체념한 듯 물었다.
"예,"
간단한 대답이 돌아 왔다. 오정철은 입을 다물었다. 평소라면 이런 놈들은 문제꺼리도 아니었지만 순태도 자신도 부상 중이 아닌가? 그리고 조직이 움직이는 원리를 아는 이상 말도 힘도 필요 없었다. 순태는 화를 참느라 거친 숨소리를 내며 깁스한 정강이를 원망스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십여 분쯤 달리던 차는 어느 지점에 이르자 속력을 줄여 오른 쪽으로 급히 방향을 틀었다. 이어서 덜컹 소리와 함께 차체가 몹시 흔들렸다. 포장도로에서 비포장 길로 들어섰슴이 틀림 없었다. 차는 계속 춤을 추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오정철 일행은 운전석을 등진 상태여서 밖의 사정은 전혀 알 수 없었다. 나무 가지가 차체를 긁는 것으로 보아 몹시 좁은 길 같았다. 어느 지점에 이르자 한참을 덜컹대던 차가 멈추었다.
"내려."
조수석에 앉은 사내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바깥은 불빛 한 점 없이 캄캄했다. 먼저 문 쪽에 있던 사내가 안순태 팔을 부축해 내렸다. 오정철이 따라내리자 갑자기 앞에서 차동차 라이트가 이쪽을 향해 확 비쳤다. 먼저 도착한 소나타의 불빛이었다. 사내 하나가 챙겨왔던 목발 두개를 순태에게 내 밀었다. 불빛에 눈이부셔 주춤대는 순태의 등을 사내가 밀었다.
"아, 씨발, 밀지 마. 임마."
순태가 사내를 팔굼치로 확 내지르자 갑자기 당한 놈이 헉 소리와 함께 배를 움켜쥐었다.
"이 새끼가.."
사내는 이어서 순태의 멱살을 잡더니 주먹을 쳐들었다.
"그냥 둬."
불빛 뒤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사내는 더욱 거칠게 순태의 등을 밀어부쳤다. 소나타 가까이 왔을 때 라이트를 끈 차 안에서 웬 사내가 내렸다.
"따라와."
사내가 어둠 속에 웅크린 작은 집으로 향하더니 곧 안에서 불빛이 비쳤다. 오정철은 그것이 집이 아니라 비닐하우스라는 것을 알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후레쉬를 들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눈에 띄었다. 오정철과 안순태는 그가 김기동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5년 전 영등포 성인 오락실에서 두 사람에게 수갑을 채웠던 김기동 형사였다. 물론 지금은 그가 캐시콜뱅크에서 밥을 먹는 것도, 이곳으로 내려온다는 것도 신사장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들을 대하는 꼴이 같은 식구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어이 오정철이, 오랜만이다. 안순태, 너도."
한 녀석이 얼른 김기동 옆에 낚시 의자를 펼쳐 놓았다. 김기동이 다리를 포게고 앉더니 서 있는 오정철을 고리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둘러 선 덩치들을 향해 손을 까불었다.
"오덕이만 남고 나머진 차에서 기다려."
사내들이 빠져 나가자 오정철은 새삼 비닐하우스 안을 천천히 살폈다. 아무런 가구나 물건이 없는 좁고 작은 비닐하우스였다. 이런 골짜기에 있는 걸로 봐서 농사철에 임시로 지낼 농막 같았다.
"너희들도 앉아, 야, 오덕이, 저기 있는 의자 얘들 갖다줘."
오덕이라 불린 놈이 갖고 온 것은 물통으로 쓰던 양철 페인트 통이었다. 오정철은 두말 없이 그 통들을 뒤집어 순태에게 한 개를 밀어주고 자신도 앉았다. 머뭇거리던 순태도 불편한 다리를 끌고 간신히 앉았다. 그런 모습을 김기동이 비웃음을 물고 지긋히 노려보았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우리 서로 피곤하니 길게 끌지 말자. 그러려면 너희들이 협조적으로 나와야지 안 그러면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가게 된단 말이다. 이제부터 묻는 것은 딱 한번만이다. 대답도 예 아니오 뿐이다. 만일 거짓말로 대답하면 뒤에 따르는 고통은 전적으로 너희들 탓이다. 그럼 시작한다. 먼저 안순태."
"................예에."
안순태가 마지못해 대답은 할 망정 웃기지 말라는 듯 김기동의 눈길을 맞받았다. 그런 순태를 김기동은 잔인한 미소로 답하고 있었다.
"기차에서 네가 한 발 뺏지?"
김기동이 간단하게 물었다. 순태는 순간 망설였다. 정말 알고 하는 소린가? 아니다. 용수도 시종이도 죽고 없는 마당에 제놈이 어찌 알어? 순태는 오정철과 약속한대로 모르쇠로 버티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지체없이 대답이 쉽게 나왔다.
"아니요."
"그으래?"
김기동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싱긋 웃었다.
"안순태는 아니요, 라고 했고, 다음 오정철,"
"예"
"너는 순태가 뺀 것을 알고 있었지?"
"아니요."
"어라? 제법 머리가 돌아간다는 네가 그런 멍청한 대답을 할 줄은 몰랐다. 내가 누구냐? 아무런 정보도 없이 섣불리 나설 나냐? 해답은 이미 내게 있는데 거짓말을 해? 좋다. 사장님을 십여 년간 보필한 너희들이라 신사적으로 나왔더니 할 수 없구나. 내 맘 같아서는 벌써 한 달 전에 끝냈을 것을 팔다리가 나을 때까지 봐주라는 지시 때문에 참았더니 안 되겠다. 야, 오덕이, 애들 불러라."
오덕이가 문을 열고 손짓을 하자말자 산돼지 같은 네놈이 우루루 몰려오더니 다짜고짜 두 사람이 앉은 양철통을 차서 날렸다. 찌그러진 깡통이 요란한 소리로 구석으로 날자 둘은 엉덩방아를 찧을 수밖에 없었다. 그 위에 구둣발이 날아드는 꼴이 흡사 6기통 엔진의 피스톤 같았다.
"그만."
김기동의 말이 끝나자 말자 오정철과 안순태는 금새 걸레짝 같은 몰골이 됐다.
"특별히 재시험을 치는 기회를 주겠다. 이번에도 틀리면 너희들은 낙제다. 낙제 알지? 인생 낙제. 자, 이번엔 오정철 부터. 오정철. 너 순태가 빼돌린 걸 알았지?"
"아니요."
"음, 똑 같은 질문에 똑 같은 답이군. 정말 순태가 빼돌린 사실을 모른단 말이지? 그렇다면 순태 너는 빼돌린 것을 오정철에게도 비밀로 했다는 말이네? 엉? 그렇지?"
순간 오정철은 김기동의 비열한 질문에 자신의 대답이 잘못된 것을 알았다.
"몰랐다기보다 순태가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습니다."
"시끄러워. 대답은 예 아니오로 한번만 이라고 했다. 그리고 순태가 하지 않은 것은 네가 어떻게 알어? 네가 봤냐?"
"그건.."
"다음, 안순태. 너, 빼냈지?"
"내가 언제 빼돌렸단 말을 합디까? 소설 씁니까?"
구둣발에 입술을 채인 순태가 그새 부어오른 입으로 이죽거렸다. 맷집으로 버틸 망정 쉽사리 불지 않겠다는 각오와 함께였다.
"그말은 아니요를 길게 늘린 말로 해석되는군. 결국 둘 다 틀렸다. 얘들아."
또 다시 놈들의 씩씩대는 숨소리와 투덕대는 발길이 어우러져, 오정철과 안순태의 몸통 곳곳은 빈틈없이 피멍 도장이 찍혔다.
"오정철은 그렇다 쳐도 안순태까지 버틸 줄은 몰랐군. 그럼 할 수없이 마지막 수순울 밟아야겠군. 내가 아까 얘기했지. 인생 낙제. 인생반에서 영영 떨어져 나가는 거지."
"잠깐."
오정철이 고개를 들었다. 김기동은 의외라는 듯 오정철을 쳐다보는 고리눈이 잠시 좌우로 움직였다. 미심쩍다는 뜻이었다. 이어서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표시로 턱을 한번 앞으로 쑥 내 밀었다.
"털어놓지요."
"뭐? 정철이 너 이 새끼. 이럴거야?"
오정철의 가라앉은 목소리와 대조적으로 안순태의 흥분한 소리가 울렸다.
"야, 순태, 솔직히 털어놓자. 사실 그걸 우리가 먹은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그렇지. 말 안 하기로 했으면 안 해야지. 배신을 때려? 날 넘기고 너는 빠지겠다는 수작이냐? 남자 자식이. 더구나 네가?"
순태가 상체를 세워 오정철의 옷자락을 잡고 일어서려 허우적거렸다. 그러자 뒤에 있던 덩치가 재빨리 순태의 팔을 잡아 다시 주져 앉혔다.
"야, 순태, 내 말대로 해. 잃은 것은 너지만 내게도 똑같은 책임이 있는 거야. 그러니 널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고. 알어?"
실눈으로 변한 김기동이 입 꼬리를 치켜 올리며 흡족한 듯 두 사람을 지켜 보았다. 형사 시절부터 느껴 온 것이지만 조직이란 겉으로는 단단한 듯해도 배신자와 밀고자는 언제나 나오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쉽게 더구나 지독하기로 소문 난 오정철이 이렇게 빨리 항복할 줄은 몰랐다.
"오덕이, 애들 데리고 나가서 담배나 태워라. 조용히 들어보게..."
오덕이를 비롯한 덩치 큰 사내들이 빠져나가자 좁은 비닐하우스 안이 오히려 휑하게 넓어보였다. 오정철은 땅바닥에 앉은 채 옆의 순태를 돌아봤다.
"기차에서 있었던 일을 빼놓지 말고 얘기 해. 네가 알고 한 짓이 아니잖어?"
순태는 못마땅한 얼굴로 오정철을 힐긋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땅바닥을 한참 내려다보더니 결심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좋아 씨발, 말하지. 청량리에서 건내받은 가방을 기차에서 열어본 이유는...."
순태가 비교적 조리 있고 침착하게 전후의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호기심에 포장지를 뜯은 일과 총알 한 발을 꺼내 화장실에서 살펴 본 것을 말했다. 그리고 총알을 잃은 상황과 화장실 밖에 있던 놈을 조사한 얘기도 했다. 순태는 어차피 꺼낸 얘기라 그동안 속태웠던 사연을 속 시원히 털어놓기로 했다. 그놈을 태백에서 다시 만난 일과 누구라는 것도 순순히 말했다. 다만 복도에서 담배를 피던 놈을 미쳐 생각 못해 조사를 못했는데 나중에서야 그놈이 일서네 가게에 술을 공급하던 놈이란 걸 알았다는 것까지 말했다.
"그럼 없어진 한 발은 어떻게 채웠어?"
얘기를 다 듣고 난 김기동이 물었다.
"그건 내가 사다가 채우라고 말했습니다."
순태가 말하는 동안 줄곳 눈을 감고 있던 오정철이 대신 받았다.
"그래? 어디서?"
"영월에 있는 총포사 입니다."
"이거 봐, 이렇게 솔직하니 서로 좋잖어? 네놈들이 먹어치우지 않았다는 건 인정하지. 헌데 어쩌냐? 좀 더 일찍 자수했드라면 좋았을 걸, 이미 조직에 큰 타격을 입혔으니 말이야. 게다가 믿던 놈에게 속은 사장님의 배신감은 무얼로 보상할래? 일단 가서 반성을 좀 해야 쓰겠다. 그 뒤는 사장님이 조만간 내려오실 거니까 알아서 하실 테고 나는 네가 말한 그 두 놈을 잡아다 조사를 하지."
김기동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곧이어 사내들이 들어와 널부러진 오정철과 안순태를 들어 다시 차에다 실었다. 그리고는 소나타가 앞장을 서고 스타렉스가 그 뒤를 따라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다. 심하게 흔들리던 차가 포장된 도로에 닿았는지 바퀴가 부드럽게 구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몇 분도 되지않아 오른 쪽으로 커브를 돈 차는 다시 비포장 길로 가고 있었다. 또 다른 골짜기로 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조금 전의 골짜기와 달리 차는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나자 차가 더 심하게 출렁거리더니 갑자기 멈추었다. 앞에 가던 소나타가 웅덩이에 그만 빠진 것이다. 스타렉스에 탔던 사내들이 우루루 내려서 소나타의 바퀴 밑을 고이고 밀기를 한동안 하고서야 간신히 빠져 나왔다.
"도대체 어디 쯤이냐? 아직 멀었냐?"
김기동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이삼백 미터 쯤 가면 됩니다. 과장님."
한 놈이 스타렉스의 라이트 앞으로 나섰다. 놈은 이고장 출신으로 이곳의 지리는 눈감고도 훤하다는 이유로 김기동이 서울 최상사파에서 빼내온 놈이었다. 도박 사업을 하려면 하우스를 설치할 곳의 위치가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뭐야? 걸어서 말이냐?"
"예, 트럭이 다니던 길이 있었으나 쓰지를 않아서 곳곳에 무너진 곳이 많습니다. 과장님."
놈은 차를 타고 가지 못하는 것이 제 잘못인 양 굽신거렸다.
"할 수없지. 랜턴 준비들 했지? 가자고. 참 저기 안순태는 다리가 부러졌으니 부축들 해 줘. 한때는 같은 식구 아니었냐. 봐 줘야지. 야, 석호 앞장 서."
석호라는 이곳 출신이 랜턴을 비추며 앞장을 서자 안순태를 부축한 덩치들과 오정철이 그 뒤를 따라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맨 뒤는 김기동과 오덕이 따랐다. 좁은 길은 사람들이 전혀 다니지 않아서인지 산죽과 싸리가 길을 덮고 있었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자 산의 한모퉁이가 무너진 듯한 곳이 나타났다. 석호가 그곳을 비추자 광산의 갱도와 그 입구에 설치된 쇠창살이 보였다. 역시 창살로 된 작은 문엔 자물쇠가 잠겨 있었다. 늦게 도착한 김기동이 랜턴을 들어 입구 주위를 비춰 보았다.
"음, 석호가 제법이군. 외지고 조용한 곳을 잘 골랐어. 여기 임자가 누구야?"
김기동으로부터 칭찬을 들은 석호가 약간은 으쓱해서 앞에 나섰다.
"십 년 넘게 버려둔 광산입니다. 우리 동네에서도 주인이 누군 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굴속은 제가 전부 살펴봤습니다. 과장님."
"음 들어가 보지."
석호가 자물쇠를 밑으로 확 당기자 열쇠도 필요 없이 고리가 철컥 뽑혔다. 망가뜨린 자물쇠를 눈속임으로 걸어 둔 것이었다. 문을 열고 십여 보를 들어서니 왼 쪽 벽에 또 하나의 작은 철문이 있었다. 석호가 문을 열고 랜턴을 비추자 삽과 곡갱이들이 보였다. 굴 벽을 파서 작은 창고를 만든 모양이었다.
"뭐야, 야 여기냐?"
따라오던 오덕이 물었다.
"아닙니다. 형님. 여기서 백 미터는 가야 있습니다. 아니 백오십 미터쯤 입니다 형님."
"새끼라고는...확실히 해, 임마."
"아 예. 백오십 미터가 맞을 겁니다 형님."
석호 말대로 백오십 미터인지 아니면 삼백 미터인지 모르나 랜턴에 비친 굴은 어느 지점에 이르자 좌측으로 구부러지더니 다시 직진으로 뚫여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또 한번 쇠창살이 갱도를 막고 있었다. 이곳의 쇠창살은 더 굵고 촘촘해서 동물원의 맹수를 가두는 곳 같았다. 석호가 열쇠로 자물쇠를 열고 철문을 당기자 기름칠이 안된 문은 기분나쁜 소리로 끼긱 거렸다. 김기동이 또다시 쇠창살과 주위를 살폈다.
"좋아, 이만하면 됐어. 어이 석호 다른 것도 준비했겠지?"
"말씀대로 50미리 스치로폼과 열흘치 식량을 준비했습니다 과장님."
또 한 번 칭찬 비슷한 소리를 들은 석호가 신이나 지껄였다. 그러나 신이나기는 커녕 충격으로 절망에 빠진 사람들도 있었다. 덩치들에게 둘러쌓인 오정철과 안순태였다. 이리로 끌려올 때부터 어느정도 각오는 했으나 막상 와보니 이런 곳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집어넣어. 조직에 해를 끼쳤으면 참회할 시간을 줘야지."
반항해 봤자 쓸데없는 짓인 것을 아는 두 사람은 자세를 낮춰 좁은 문으로 들어갔다. 김기동은 자신이 들고 있던 랜턴을 오정철의 얼굴에 비추었다.
"자, 받아. 이게 필요할 거야. 그리고 내가 수사를 끝내는 동안 고생들 좀 해. 아니지 어차피 기브스를 풀 때까지는 일을 못할 테니 이참에 편히 쉬어 둬."
"정말 이래야 합니까?"
오정철이 낮으나 날이선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김기동 역시 비꼬듯 되받았다.
"새끼. 상황 파악 더럽게 못하고 있네. 파묻지 않는 것만도 고맙게 생각 해, 임마."
오정철이 갖고 있는 랜턴을 뺏은 안순태가 굴 안의 이곳저곳을 비추다가 벽에 기댄 스치로폼과 두 개의 라면박스를 발견했다. 박스 안에는 라면과 빵 종류가 들어있었다. 그러나 라면을 끓일 냄비와 부스터가 보이지 않았다. 물도 없었다.
"야, 석호랬지? 석호 너 이 새끼, 물도 불도 없이 어떻게 먹으라고 달랑 라면만 갖다놨냐? 어? 너, 이리 와."
가득이나 몰매를 맞은 데다 이 꼴로 갇히게 된 순태가 열불이나서 쇠창살을 마구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덜컹대는 소리만 조금 날 뿐 쇠창살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석호가 나섰다.
"물은 굴 안 쪽에서 공짜로 떨어집니다. 불은 화재도 문제고 굴속에 불을 피우면 산소가 없어져 목숨이 위태롭다고 과장님께서 못 주게 했습니다. 어이 선배 놈들, 이제 알았냐?"
"뭐야? 씨발 저 썅놈의 새끼. 너, 너 가만 안 둬."
상태가 길길이 날뛰건만 석호란 놈은 김기동의 눈치를 살피며 실실 웃고 있었다. 김기동 역시 말할 맛을 잃은 듯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며 뒤로 돌아섰다. 그 뒤를 따르는 불빛이 차츰 멀어졌다. 안순태는 손을 내 밀어 자물통을 당기고 비틀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자물통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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