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광 안으로 발을 들여 보지도 못한 진우가 집으로 들어서자 마침 덕배 아버지가 마루로 나서고 있었다.
"아니? 그새 갔다왔단 말이냐? 축지술을 익혔더냐?"
"아, 예. 그게...그만..그렇게 됐습니다."
"그렇게 되다니? 굴을 못 찾겠더냐?"
"아니요. 쉽게 찾았습니다. 헌데..."
"헌데, 누가 굴을 들락거리더란 말이지?"
"아니? 아버님께서 그걸 어찌 아시는지요?"
"허허, 이상하게 생각할 건 없다. 사오년 전에 가 본 것이 마지막이니 그럴만도 하지. 자고로 사용하지 않는 동굴에 박쥐 살게 마련이고 캐지 않는 금광에 잠채꾼 붙기 마련이니라."
"그래도 입구에 철문이 있는데 그걸 따고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빈집에 도둑들기 예사지. 허나 도둑은 쫓아야지 잡자고 들면 안 되느니라."
"쫓는 것보다 우선 몇 명인지를 몰라서요."
덕배 아버지는 무언가 잠시 생각하는 듯 먼 산을 바라보았다. 진우는 그런 노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주름진 노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덕배 애미가 예전 같으면 내가 나서보겠다만 요 며칠 사이로 더 나빠져서 한시라도 눈을 돌릴 수가 없구나."
"저도 아침에 느꼈습니다만....아버님, 어머님을 병원으로 모시는 게 어떨까요?"
"쯧, 저 병엔 병원도 소용 없니라. 괜스리 부산을 떨어 환자만 더 고생을 시키지."
"그래도....
덕배 엄마가 며칠 전과 확실히 다른 것을 진우도 느끼고 있었다. 오늘 아침밥을 먹을 때 보니 손동작이 더욱 느려지고 말도 더 어눌했었다.
"진우야 이 문제는 덕배와 의논을 해라. 그러지 않아도 아침에 널 보내고 덕배에게 네 얘기를 했니라."
"덕배도 바쁠 텐데요. 사업 때문에요."
"아니다. 오늘밤에 들릴 것이다. 양식을 갖고 올 게다."
산골의 가을 해는 점점 짧아져서 저녁을 먹자말자 금세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진우는 밥상을 들고 부엌으로 나왔다. 노인이 지은 밥을 먹어야 하는 진우는 며칠 전부터 설거지만은 자신이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물론 노인이 반대를 했지만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충 설거지가 끝날 즈음 자신을 부르는 덕배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덕배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지금 출발했단다. 산 아래 찻길로 널 보내라는구나. 쌀을 지려는지 지게를 갖고 오라더라."
"예. 그러지요. 지게는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진우는 후레쉬를 챙겨 지게를 지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밤이되자 기온이 떨어져 써늘한 밤기운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진우는 놈들을 피해 처음 이곳으로 올 때를 생각했다. 갈곳도 피할 곳도 없던 절박한 순간에 덕배를 만난 것이다. 그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절망감과 위기감이 조금씩 잊혀지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자 진우는 자신의 안일함에 흠칫 놀랐다. 아직 자신은 위기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진우는 어둠에 묻힌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해결할 방법이 있긴 있어야겠는데...'
산 중턱의 넓은 고추밭에 이르렀다. 밭은 오래 전에 수확을 끝내고 앙상하게 마른 고춧대만 남아 있었다. 대신 밭모퉁이 어름에서 두개의 푸른 인광이 불쑥 솟았다. 진우는 그것이 후레쉬 불빛에 놀란 노루나 고라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밤이면 자주 보던 눈빛이었다. 놈은 진우의 기침 소리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 멀리 산 아래에서 자동차 불빛이 보였다. 불빛은 산으로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오는군.'
진우는 좀 더 빠르게 산길을 내려갔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달리 그새 산길에 익숙해진 걸음이었다. 진우가 한걸음 늦게 찻길에 닿았다. 헐렁한 바지에 빈 지게를 지고 선 진우의 꼴이 자동차 불빛이 비치자 덕배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여, 옷차림이랑 이젠 촌놈 다 되었네."
"네 옷이라 내겐 너무 커. 신발도 크고."
랜턴으로 자신의 바지와 신발을 비추며 진우는 멋적게 웃었다.
"어때? 지낼만 하더냐?"
차에서 내린 덕배가 빙글거리며 물었다..
"지낼만한게 아니라 좋아. 진짜로 산 체질인 가봐."
컥 하고 덕배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듯 웃음을 뱉었다.
"미친놈....."
"사실이라니까. 이럴줄 알았으면 서울로 가지말고 진작 입산할 걸 그랬지 뭐냐."
"헛, 그새 득도를 했구나..."
진우는 트렁크 쪽으로 다가가 지게를 벗어 놓았다. 덕배가 트렁크에서 꺼낸 쌀부대를 차곡차곡 지게에 올렸다. 쌀은 20kg짜리로 모두 네 포대였다. 거기다 꽁치와 고등어 통조림이 든 상자까지 올려 묶었다. 쌀과 상자의 무게를 합하면 100kg은 족히 될 것이었다. 물건을 싣는 동안 지게를 붙들고 있던 진우가 오히려 걱정이 되었다.
"야, 네 힘 좋은 건 안다만 산길에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 더구나 밤인데...."
"걱정 마라. 기껏 쌀 한 가마 무게밖에 더 되냐? 두 번씩 오르내리기 귀찮아서 언젠가 이거 두 배를 진적도 있다."
"뭐야? 밤에?"
"나는 낮에는 여길 안 와."
진우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덕배는 여전히 힘이 좋았다. 가파른 산길에 무거운 짐을 지고서도 뚜벅 뚜벅 잘도 걸었다. 진우가 오히려 문제였다. 10kg 짜리 소금 자루를 들고 후레쉬를 비추며 앞장을 선 것 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백여 미터도 못가 연신 이손에서 저손으로 바꿔 들더니 어깨에 올렸다 아예 머리에 올리는 것이다.
"야, 그 자루도 지게에 올려라."
뒤따르던 덕배가 보다 못해 지게를 진 채 걸음을 멈추었다.
"왜?"
"네가 무거워하는 것 같아서."
"10kg밖에 안되는데? 넌 이거 열배도 넘잖아?"
"그럼 왜 그렇게 낑낑 대냐?"
"허 참, 무거워서가 아니라 불편해서지. 가방처럼 자루에 손잡이가 있던지 멜빵이 있으면 나도 지금의 서너 배는 짊어질 수 있어."
"큰소리는 여전하구나. 내가 널 모르냐? 네가 날 모르냐? 잔소리 말고 어서 올려."
"아 괜찮다니까. 어서 가기나 하자고."
"쓸데없는 자존심도 여전하고....허허...변한 게 없어 좋긴하다만...."
덕배가 낮게 중얼거리더니 진우의 뒤를 따라 한걸음씩 산을 올랐다. 진우는 그동안 이 산을 쏘다닌 보람이 있어 산길에 익숙했다. 산중턱의 고추밭께에 이르자 진우가 먼저 자루를 내려놓았다.
"아이구 야 좀 쉬었다 가자. 자 너도 내려 놔."
"그러지 뭐. 마침 네게 할 얘기도 있고..."
"그래? 나도 네게 말할게 있는데..."
덕배가 지게를 내리는 사이 진우는 부지런히 밭으로 가더니 고춧대 묶음을 양손에 들고 왔다.
"땅바닥보다 여기 앉는 게 낫겠지. 안 그러냐?"
"촌놈 되려고 그동안 공부 많이 했구나."
둘은 나란히 고춧단 하나씩을 깔고 앉아 어둠에 묻힌 앞산을 바라보았다. 별이 총총한 밤하늘이 곡선을 그리며 어두운 산을 에워싸고 있었다. 싸늘한 밤공기가 몰려 왔으나 땀이 나려는 두 사람에겐 오히려 시원해서 좋았다.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덕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도 내게 할 얘기가 있다고 했지? 하지만 내 얘기를 먼저 듣는 게 좋겠다. 어떠냐?"
말을 어떻게 시작할까를 생각하는 사이에 그만 덕배에게 선수를 뺏긴 진우였다. 진우는 고개를 돌려 덕배를 바라보았으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진우의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덕배가 말을 계속했다.
"그동안 네 문제를 곰곰히 생각해 봤다. 아니 곰곰히 생각해볼 것도 없더라. 네 문제는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것 아니냐?"
"말은 쉽다만 내게 그런 돈이 어딨냐?"
"그래서 말인데 내가 그 돈 줄 테니 그놈들 빚을 갚어라. 그리고 넌 다시 서울로 올라가라."
"뭐? 네가? 네가 그럴 필요는 없어. 너의 아버님도 내게 갚을 만큼 갚았으니 그만 갚으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도 같은 생각이다. 반년만에 원금의 두 배가 훨씬 넘는 돈을 갚았어. 그 게 모자란다면 차라리 고소를 할 테다."
"우리 아버지는 나한테도 네 돈을 갚지말라고 하시더라만... 허, 참 너는 아직 세상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지. 네가 고소를 하게 놈들이 그냥 가만히 두겠냐? 놈들도 법을 연구한데다 법 이전에 주먹으로 먹고 사는 놈들인데....넌 아무말 말고 내가 시키는 데로 해라. 서울가서 지낼 곳도 마련해 줄 테니까. 물론 네가 다시 자리를 잡을 때까지 생활비 걱정은 말고....어때? 내 말대로 할 거지?"
"말이라도 고맙다. 솔직하게 말하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도 모르겠다. 일전에 너의 아버지께서 불쑥 내게 은광을 주겠으니 문제를 해결해 보라고 하시더라. 갑작스레 하도 뜻밖의 말씀을 하셔서 깜짝 놀랐지. 헌데 놈들의 돈 문제로 초조하던 때라 영문도 모르면서 일단 예하고 대답은 했다만 사실 웃기는 얘기 아니냐? 아들인 네가 있는데 왜 내가 너의 아버지 재산을 물려 받냐? 열번 생각해도 그건 아니잖아?"
진우는 가슴에 가득찼던 숨을 길게 뱉어내며 눈을 돌려 무수히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점 없는 밤하늘엔 정말 많은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낮에 아버지 한테서 은광을 네게 줬다는 말씀을 들었다. 광맥을 보는 눈이 확실한 노인네가 산 광산이니 틀림없이 좋은 은광일 게다. 헌데 말이다. 아버지 한테 그런 은광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여태 나는 몰랐어. 정말이야. 그것도 십여 년 전부터 있었다는 걸 말이다."
"그 은광은 네가 했으면 싶어 사셨다더라. 밭도 그렇고...."
"밭? 무슨 밭? 지금 사는 집 말고 노인네 한테 땅이 또 있단 말이야?"
"넌 몰랐냐? 이 고추밭을 지나 산을 돌아가면 연초 건조장이 서 있는 그 밭 말이야."
"뭐? 건조장? 건조장은 또 뭐냐? 난 그 쪽으로 가본 적도 없어. 허허, 참 노인네 준비성 하나는 알아모셔야 해. 어쨋든, 네게 그 밭도 주시데?"
"음, 거기 컨테이너로 된 집이 하나 있는데 유사시엔 그리 피하라는 눈치시더군."
"그럼 마침 잘 되었네."
덕배가 갑자기 진우 쪽으로 풀썩 돌아앉았다.
"뭐가 잘돼?"
"사업 할 은광 있겠다 집 지을 땅 있으면 됐지 그럼 안됐냐?"
"너, 갑자기 왜 그러냐?"
"갑자기가 아니야. 나는 나름대로 널 어떻게 도울까를 생각하던 중이었거던. 난 그저 돈을 보태 줄 생각만 하고 있었지 뭐냐. 노인네가 은광을 네게 준 것은 나도 찬성을 했다. 그걸 네게 왜 주셨겠냐? 노인네는 널 남으로 생각하지 않으신다는 뜻 아니냔 말이다. 그리고 그게 나보다 네게 더 필요하다고 판단하신 거 아니겠냐. 나는 광산이나 땅에는 관심 없다. 돈에 큰 욕심도 없고.....그러니 어떠냐? 캐시콜 돈은 내가 갚아 줄 테니 이참에 아예 여기서 광산일로 다시 시작해 보는 게? 너 장가도 가야할 것 아니냐?"
"장가? 지금 내 꼴을 보고도 그러냐. 허고 넌 돈에 욕심 없다는 놈이 그새 왠 돈을 그렇게나 모았냐?"
"돈? 삼년 전만 해도 빈손이었다. 조직을 믿고 사업을 시작했지만 처음엔 힘 들었어. 힘든 고비를 몇 번 넘기고 나니 그 다음은 쉽게 풀리더라. 허지만 난 솔직히 돈보다 내가 해보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좋아."
"해보고 싶은 게 뭔데?"
"글쎄, 막연한 소리지만 사업이라고 해두지. 참, 지난주에 드디어 전당 연합사를 결성했다. 이젠 신사장이 내려와 봤자 우릴 어쩌지 못해. 헌데 김기동이라고 짭새 출신이 아직도 널 찾아다닌다고 하더구만. 끈질긴 놈인가 봐. 캐시콜뱅크의 추심자 같지만 어찌 보면 지난번 총알 사건 때문이 아닐까 싶어. 지금 와서 말하지만 놈들이 그 총알에 왜 그토록 목을 매는지 나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 게 그냥 총알이 아니었거던."
"그냥 총알이 아니라니? 그럼 뭐야?"
총알 얘기가 나오자 처음부터 그 점이 궁금했던 진우가 귀를 세웠다. 도대체 그까짓 총알 한 발이 무엇이길래 모두들 그토록 야단들이였을까?
"이건 말이다. 용수가 사고나기 전에 내게 알려준 건데...사실 그 총알 속에는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다더라."
"뭐? 다이야?"
덕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우가 깜짝놀라 몸을 흠칫 떨었다.
"그렇다니까. 그날 밤 오정철 패가 우리 차를 미행했던 것도 그래서였나 봐"
"말도 안 돼. 총알 속에 다이야를 넣어 어쩌겠단 거야?"
"말이 안 되지.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그럴 이유가 충분히 있지."
"무슨 이유?"
"네가 열차에서 만난 순태란 놈이 서울까지 가서 받아 온 것이 탄약 상자였다더라. 그 탄약 상자가 바로 우리 조직에서 알아내려던 뇌물의 정체였을 거야. 내 생각에는 신사장이 윤검사에게 주려던 뇌물이 바로 다이아몬드 총알이였을 거라고. 네가 내려오던 그날 윤치우 검사가 크레이 사격을 했다는 정보도 있었으니 앞뒤가 딱 맞는 얘기 아니냐?"
"헛. 이거 당췌 먼 소린지 원."
총알 속에 다이아몬드라니? 이거야말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믿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진우에게는 이건 너무나 상상 밖의 일이었다. 진우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 총알이 자신에게 있음을 덕배에게 말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를 두고 진우의 뇌는 그 순간 만분의 일초를 다투고 있었다.
"야, 덕배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이제까지의 모든 일이 나 하나로 인해 생긴 것 같다. 용수가 죽은 것도 너의 직원이 납치된 것도 말이다."
갑작스런 진우의 태도에 잠시 멈칫하던 덕배는 어떤 느낌이 드는지 급히 물었다.
"너 혹시..."
"그래, 그 총알 내게 있다. 열차 화장실에서 주웠지. 별거 아니었지만 갑자기 어릴 때 우리들 추억이 떠올라 버리지 못했다. 오발 사고 말이다."
"설마 버리진 않았겠지? 그렇지? 아직 갖고 있지?"
"있지만 이곳에 없어."
"그럼 어디 있어?"
"우리 아버지 산소에..... 갖고 있자니 불편하고 버리자니 조금 아깝더라. 그래서 상석 밑에 넣어뒀거든. 헌데 이게 뭐냐? 결국 나 때문에 너까지 위험하게 되지 않았냐? 내가 이 문제를 끌고 오지만 않았어도 용수도 너의 직원도 그리되지 않았을 테고....."
이럴줄 알았으면 줍지 말 것을.... 아니, 기차에서 콧대 휜 그 사람이 다그칠 때 순순히 내 놓을 걸. 진우는 마음이 불편했다. 아니 몹시 괴로웠다. 쓸데없는 호기심에 간직한 총알로 인해 본의는 아니지만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 것이다.
"네가 미안할 일이 아니야. 죽는 것도 다치는 것도 각자의 운명일 테니까. 이건 어쩌면 네겐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지도 몰라. 아니 너뿐만 아니라 나까지 그 전화위복의 덕을 본거야. 따지고보면 그 총알 때문에 사고가 나서 신사장이 이곳을 떴잖아?"
"그래서 그게 너하고 무슨 상관이냐?"
"마침 그때가 내가 애써 엮어 놓은 회원들을 유혹하려고 신사장이란 작자가 막대한 자금을 풀기 직전이었거던. 그랬다면 지금의 통일된 연합사는 없겠지. 그놈이 없는 사이에 내가 먼저 조직의 자금을 끌어다 풀었어. 그러니 그놈 다리가 부러진 것도 알고보면 총알 덕 아니겠냐? 죽은 용수를 생각하면 정말 가슴 아프지만 너도 운명으로 받아들여라."
누구의 불행이 때로는 누구의 행복이 되기도 하는가? 진우는 모든 것을 운명에 돌리라는 덕배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 역시 운명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순복이, 수미, 캐시콜뱅크, 도망, 덕배, 덕배 아버지, 은광, 게다가 다이아몬드가 들었다는 총알까지.....그러나 냉정히 생각하면 이 모든 것이 수미라는 한 인간을 선택한 결과가 꼬인 것일 뿐 운명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운명이기 전에 모두 내 잘못이지."
"어찌 되었던 그 총알은 잘 간수해 둬라. 반드시 쓸데가 있을 것이다."
"야, 간수나마나 이젠 총알이라면 지긋지긋하다. 놈들에게 쫓기지만 않아도 좋겠다."
"그러니 하는 소리야. 그것만 있으면 빚은 물론이고 네가 다시 서울로 가던지 아니면 여기서 은광을 시작할 자금이 생긴단 말이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그냥 총알이라면 모를까 다이야가 들었다면 그건 내것이 아니잖아? 돌려 줘야지. 그것때문에 인명 사고까지 났는데...."
"허 참, 어째 넌 변하지도 않냐? 아 답답해. 그놈들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총알을 돌려 줘야 시원하겠냐? 그럼 총알은 돌려주고 아까 내가 말한대로 내가 돈을 줄 테니 빚을 갚고 서울로 가라. 가서 다시 시작해 봐. 그래서 안 되면 내려와서 은광을 해. 그러면 채굴 자금은 내가 또 댈 테니까."
"네게 갈 은광을 왜 내가 가져?"
"내게 상속이 안됐다면 아직은 노인네 재산 아니냐? 노인네 재산을 노인네가 마음대로 하는 걸 내가 어째?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너에게 주는 데야? 야, 너나 나나 형제가 있냐? 걸음마 겨우 하던 때부터 형제 처럼 자란 우리 아니냐? 거기다 무슨 다른 이유가 필요하냐? 너라면 내게 안 주겠냐? 여러 소리할 것 없어. 노인네가 주면 무조건 예 하고 받어. 줄 것이 또 남아 있는지는 모르지만. 허허."
얘기가 끝났으니 시키는대로 하라는 듯 덕배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진우도 덩달아 엉거주춤 일어나 랜턴을 잡으려고 바닥을 살폈다. 그러나 어두워 잘보이지 않았다.
"뭐하냐? 안 가고?"
어느새 지게를 짊어진 덕배가 랜턴을 비추며 물었다.
"어? 래, 랜턴..."
그 순간 진우는 이미 자신의 손에 랜턴이 들려 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헛, 미친놈, 비둘기 정신은 콩밭에 있다고 정신을 어디로 보내고서....여하튼 이번 일은 무조건 내말대로 해. 어때? 할거지?"
가능한 한 진우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덕배는 다짐하듯 자신이 한 말에 못을 박으려 했다. 진우도 소금 자루를 어깨에 메고 다시 앞장을 섰다. 그리고 뒤를 흘깃 돌아보며 약간 목소리를 높혔다.
"좌우간 난 네 말대로 못해. 아니 하더라도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아."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첫째로 너의 어머니 건강이 안 좋으셔. 요 며칠 사이에 더 나빠지신 것 같아. 병원으로 모시자고 했더니 소용없는 일이라고만 하시니 큰일이다. 네가 어떻게 말씀 좀 드려라."
"그러지 않아도 낮에 전화로 말씀 나눴다. 헌데 어머이 병은 노인네 말대로 병원에 간다고 나을 병이 아니야. 병원은 이미 숱하게 가봤지. 입원도 해봤고...나을 병이 아닌 걸 어머이도 아시는지 이젠 병원이라면 질색을 하신다. 그러니 난들 어쩌냐?"
"그렇다고 보고만 있을 수 없잖아?"
"그래서 입원하시라고 낮에 말했다니까? 그것말고 다른 이유가 또 있냐?"
경사가 차츰 가팔라지는 비탈길에 이르자 진우는 소금 자루를 옆구리에 꼈다. 뒤따르는 덕배의 숨소리도 거칠어지고 있었다. 둘은 그곳을 지날 때까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야, 또 다른 이유는 뭐냐니까?"
완만한 길에 닿자말자 숨을 크게 몰아쉬고 난 덕배가 지게 작대기로 앞서가는 진우의 소금 자루를 쿡 찔렀다.
"음, 지난번 너의 직원이 납치되었다는 말을 했잖어? 그 얘길 듣고나니 나 역시 약간 불안하더라. 그래서 캐시콜 놈들에게 노출이 됐을 때를 생각해서 피할 곳을 생각해 봤지. 아까 말한 컨테이너 아니면 은광이 가장 좋겠더라고. 그래서 오늘 은광의 내부를 살필 겸 위치를 알려고 갔더니...나보다 먼저 그 굴을 누가 들락거리더라. 그래서....솔직히 겁도나고 해서 도망치듯 쫓겨 오고 말았다. 허지만 그 자가 누군지 내가 꼭.."
"잠깐, 은광의 위치가 어디쯤이더냐? 여기서 멀어?"
진우의 말을 끊은 덕배가 다급히 물었다. 진우는 걸음을 멈추어 덕배를 향해 돌아섰다.
"뭐 별로 멀진 않던데. 산길로 칠팔 키로 쯤 되더군."
"어느 방향이야?"
"그러니까...저쪽이지. 신동산이라고 산이 특이하게 생겼던데?"
"신동산이라구? 신동산이라면 우리가 노리고 있던 곳인데.... 네가 봤다는 그놈이 어떻게 생겼는지 똑똑히 봤냐? 다시보면 알아보겠냐구?"
"봤지. 헌데 그놈이 너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 거냐?"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그놈 나이가 대략 몇 살쯤으로 보여?"
"글쎄...별로 큰 키는 아니고 나이도 많아 보이지 않던데? 서른도 채 안될걸?"
"음, 그럼 거의 틀림없겠군."
"엉? 틀림없다니? 뭐가 말이냐?"
"그동안 납치된 우리 직원 애를 찾느라 정보원들을 총동원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오리무중이긴 처음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갖혀 있지 않다면 십중팔구는 이미 죽었을 거야. 그런데 이번엔 은광에 침입자가 있다니 이게 모두 우연히 일어난 일이겠냐? 김기동이라고 캐시콜에서 내려온 그놈 짓 같아. 짭새 출신의 악질로 소문 난 놈이야. 진작부터 널 찾던 그놈이지."
"혹시 네 직원을 그 굴 안에다 가둔 것은 아닐까?"
"글쎄 그런지도 모르지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지...."
경사가 막바지에 이르자 진우의 힘도 한계에 이르렀다. 비탈길을 다 오르자말자 들었다 메었다를 반복하며 낑낑대던 소금 자루를 기어이 털썩 내려놓았다.
"그새 또 쉬냐? 야, 이러다 밤새우겠다. 그 자루는 내게 얹고 가면서 얘기 해."
"무거워서가 아니라니까. 그러고보면 지게를 발명한 조상들이 역시....에랏 차."
어쩔 수 없이 자루를 다시 어깨에 올린 진우가 덕배의 앞으로 나섰다. 아까 산을 내려 올 때보다 살갗에 닿는 밤공기가 한결 차게 느껴졌다.
"우리 애들의 정보에 의하면 부엉이라는 도박판 전문가가 이틀 전에 사북에 내려왔다더라. 부엉이라고 그 방면에선 알아주는 놈이야. 나는 그놈이 김기동과 함께 있다기에 캐시콜뱅크의 신사장이 새 사업으로 도박판을 벌리려는 줄 알았지. 그렇다면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냔 말이야. 나도 이미 전문가를 불러다 놨는데 말이다. 좁은 바닥에서 한꺼번에 두군데다 판을 벌릴 수는 없잖어? 그래서 즉시 우리 조직에다 사실을 알아봐 달라고 했었지. 그런데 연락이 오기를 캐시콜 쪽에선 도박판 운영하던 놈이 돈을 갖고 튄 사고가 있은 즉시 도박 사업을 접었다잖아? 그렇다면 김기동이와 그놈은 뭐야? 게다가 석호라는 이 지방 출신 쫄자가 근래에 온 산을 뒤지며 하우스 칠 자리를 물색하고 다닌다니 네가 본 놈도 석호란 그놈이 틀림없을 것 같단 말이다."
또 캐시콜 놈들이란 말인가? 덕배의 얘기를 듣고 있는 진우는 기가 탁 막혔다. 어째 자신이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캐시콜뱅크 놈들과 연결이 되는 걸까? 캐시콜 놈들을 피할 마지막 은신처로 생각하던 곳까지 놈들의 발길이 미치다니.
"하우스라면 비닐하우스 같은 것 아니냐? 은광이 하우스랑 무슨 상관이라고?"
"혹시 그 은광 부근에 공터를 못 봤냐? 천막을 칠만한 빈터 말이다."
"은광 부근은 경사가 심해서.... 허나 그 아래로 200m 정도 떨어진 찻길이 끝나는 곳엔 제법 넓은 공터가 있더군."
"얼만 큼 넓어?"
"글쎄, 대형 트럭 십여 대는 충분히 주차할 것 같던데?"
"음, 그럼 맞구만, 네가 봤다는 놈이 석호라는 놈이 틀림 없어."
"그렇다 치고 그놈이 무슨 일로 굴을 드나드는 걸까?"
"허헛, 그런 곳에 숨을 굴이 있다는 건 나부터 탐낼 일 아니냐? 며칠간 사용할 은신처도 되지만 현금을 안전하게 보관할 기막힌 금고 아니냐? 입구만 지키면 되니까. 하우스에선 하루에 이삼십억 원의 판돈이 깔린단 말이야. 게중에 절반은 놈들의 수중으로 들어가지. 헌데 그 돈을 은행에 입출금할 미친놈이 어디 있겠냐?"
"뭐? 이삼십억 원이라고? 그리고 그중에 절반이 순수입이라고?"
진우로서는 정말 깜짝놀랄 숫자였다. 보통 직장인이 일억이란 돈을 모으자면 한푼 쓰지 않아도 이삼 년이 걸린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죽도록 일해도 생활비를 쓰고나면 일 년에 천만 원을 모으기 힘이 들었다. 그런데 천만 원도 일억도 아닌 몇 십억 원을 단 하루 만에 번다니? 단위의 크기를 생각하던 진우는 자신과 너무 동떨어진 어이없는 숫자여서 오히려 덤덤해져 버렸다.
"먹자고 마음먹으면 기술자가 그날로 판돈을 몽땅 싹쓸이 할 수도 있어. 허지만 하루만 하고 말 장사가 아니잖아? 때로는 일부러 잃어 주기까지 한다고. 노름꾼이 땃다는 소문이 나야 노름꾼이 꼬이는 법이거든. 그렇게 열흘만 끌면 그 몇 배를 먹을 수 있는데 왜 하루에 판을 엎겠냔 말이야"
"그러면 거기 노름판이 있는 걸 노름꾼들은 어떻게 알고 모이냐?"
"그게 바로 전문가라는 자들의 몫이지. 전국의 도박꾼들을 끌어모을 그들만의 줄이 있고 방법이 있나봐. 보나마나 이곳 카지노에도 끄나풀을 풀 테고."
"세상에 원, 돈 벌기가 그렇게 쉬운 방법이 있는 걸 몰랐네...."
"뭐? 쉬워?"
웃기지 말라는 듯 덕배가 킹 하고 웃었다.
"그렇게 쉽다면 너도나도 다 하겠다야. 그게 말이다.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말 처럼 그리 쉬운 게 아니야. 진짜 솜씨 좋은 전문가를 구하기도 매우 힘들고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선 치고 빠지기 작전이라 조직의 손발이 잘 맞아야 돼. 돈도 좋지만 잡히면 그대로 영창 아니냐? 판이 끝날 때까지 단속반에 안 걸리고 철통보안을 하려면 윗선에 쥐약도 좀 쓸줄 알아야 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한심하고 딱한 진우에게 덕배는 더 이상의 설명을 않기로 했다. 가득이나 골치 아픈 친구에게 할 얘기가 아니었다. 대신 처음의 화제로 돌아갔다.
"그래, 넌 이제 어떻할 생각이냐? 내 말대로 빚을 갚고 서울로 갈래 아니면 여기서 은광에 메달릴래? 네가 하고싶은 걸 말 해?"
"다시 한 번 말하지만.....나도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니까. 통 대책을 세울 엄두가 나지 않는단 말이다. 그러나 이거 하나는 확실해,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 너는 너대로 바쁘고 두분은 연세가 많은데다 너의 어머니가 저러신데 나만 쏙 빠질 수는 없잖어? 형편 봐가며 움직일 테다. 까짓 거 어차피 더 잃을게 아무것도 없는 놈이 이제와서 놈들을 겁내서 뭐 하겠냐?"
진우는 자신의 최종 심중을 내 비쳤다. 말을 뱉고보니 실제로 자신은 잃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홀몸이었다. 까짓 거 뭐든 한번 부딧쳐보고픈 심정이기도 했다.
"알았다. 네 맘대로 해 봐. 나도 힘껏 도울 테니 너무 마음 졸이지 말고.... 그동안 네가 집에 있어 노인네는 물론 나 역시 든든하게 생각했다. 이번 연합사 일만해도 사실 너를 믿고 노인네들 일에 신경쓰지 않고 뛰어다녔다. 네 덕에 그 일이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지."
"든든은 무슨....노인이 해주시는 밥을 넙죽넙죽 받아먹기만 했었는데..."
"그거야...노인네 고집을 누가 꺽냐? 그건 그렇고 은광에 드나드는 놈은 내가 애들을 시켜 잡아 족칠 테니까 네가 직접 상대할 생각은 말아라. 석호라는 김기동이 졸개는 만만히 볼 놈이 아니라더라."
"가까이 할 생각은 없다. 몰랐다면 캐 보려 했지만 캐시콜 놈인 걸 안 이상 피신처로서의 가치는 없어졌잖아? 갱도 안에 은덩이가 있는 것도 아닐 테고..."
"잘 생각했다. 그럼 나도 그놈을 당분간 그냥 두지. 어쨋던 넌 가지 말아라. 놈들이 며칠 내로 거기다 하우스를 차릴 게다. 나도 대책을 세우마."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는 곳인지라 산길이 점점 좁아져 길인지 숲인지 모를 즈음에야 집이 가까워졌다. 그러나 집은 나무에 가려 불빛마져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봐도 절묘한 곳에 터를 잡으셨단 말이야. 야 덕배야 넌 그런 생각이 안드냐?"
"헛. 그게 다 사냥꾼 기질이 몸에 밴 노인네 안목 아니겠냐."
"힛, 네 말이 맞다. 여우는 드나드는 입구가 둘이요, 토끼는 세개라시며 내게 두 군데 은광과 컨테이너를 주신다더라. 나란 인물이 여우도 못되는 걸 진작 아신 거지 뭐냐?"
"뭐라고? 은광이 하나가 아니었어? 그럼 하난 어디 있냐?"
"음 아까 말한 은광 윗 쪽에 있지. 나도 아직 가보지 않았지만....멀지 않나봐.."
"음, 그 것만은 놈들이 모르면 좋을 텐데...."
"모르면? 뭐 할려고?"
"내가 언제부터 계획해 온 도박 사업인데....이렇게 되면 놈들과 반드시 부딪칠 테니 나도 그런 은신처 한 군데 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
"그렇다면 차라리 컨테이너를 쓰면 어때? 외진 곳이고 잡초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던데....산길로 가면 은광도 그리 멀지 않고 말이야."
"그래?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군."
"네가 쓴다면 내가 손을 좀 봐 둘 테니까..."
"그러던지...야, 다 왔구나."
울타리 가까이 이르자 둘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방에는 환히 불이 밝혀져 있었다. 인기척에 문이 열리더니 덕배 아버지가 마루로 나섰다.
"음, 왔냐....약은?
"예. 여기요. 주사약과 먹는 약을 같이 쓰라고 하던데요."
"알고 있니라. 김선생 전화 받았다."
"더, 덕배냐?"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자 반가워서인지 덕배 엄마는 환자답지 않게 일어나 앉았다.
"예, 어머이 저래요. "
그것을 본 덕배는 재빨리 지게를 내려놓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진우는 지게에 묶인 줄을 풀고 하나하나 물건들을 마루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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