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오전 열 시 경이었다. 응급처치를 할 때 마취와 함께 잠이들었던 신동규가 눈을 떴다. 진통제를 놓았는지 아픈 곳도 없었다. 낯선 병실의 침대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간밤에 이곳에 올 때까지 정신이 멀쩡했던 신동규가 김은애에게도 연락을 했었는데 아직 콧배기도 보이지 않아 또다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일어나셨군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김은애가 들어서고 있었다. 화가 나 있던 신동규는 자신의 주위를 재빨리 둘러봤다. 그러다 집어 던질만한 물건이 없자 더욱 화가 치솟았다.
"야, 너 무슨일을 그따위로 해? 지금이 몇신데 이제 나타나는 거야? 엉?"
삿대질을 하려고 손을 들려다 오른 팔에 링거 호스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본 신동규는 다시 왼손의 식지를 마구 흔들었다.
"넌 내가 안중에도 없냐? 내가 죽어서 네가 좋을 게 뭐가 있냐? 왜 이제와?"
"고정하세요. 사장님, 이제 온 게 아니예요. 전화 받고서 곧바로 왔었어요. 도착하니까 응급처치가 끝났더군요."
"뭐야? 정말이야?"
"그럼요. 새벽에 회장님께도 알려드렸어요. 한 시간 전에 윤검사님께 자초지종도 말씀 드렸구요. 의사 선생님과 상의도 했구요."
"상의? 의사와 무슨 상의?"
김은애는 잠깐 부목을 대 붕대로 감은 신동규의 다리에 눈길을 주었다.
"사장님 다리는 말 그대로 응급처치만 한 상태래요. 대퇴골이 여러 조각으로 부서져 수술을 해야한데요."
"뭐야? 내 다리가 박살이 났다는 거야? 지금? 그래서? 그래서 의사와 무슨 상의를 했다는 거야?"
"수술을 하려면 사장님을 서울 큰병원으로 옮기는게 낫겠다는 거죠, 그래서 회장님께 말씀드렸더니 수술할 병원을 알아 본 후 곧바로 차를 보낸다셨어요. 여기서도 응급처치는 완벽하게 했으니 서울로 후송하는 동안은 걱정 안 해도 된데요. 한두 시간 안에 차가 도착할 테니 사장님이 좀 참으세요."
들어보니 은애가 이미 빈틈없이 일을 처리해 놓고 있었다. 신동규는 화부터 낸 자신이 약간은 머쓱하나 그저 그 뿐이었다. 신동규에게는 미안이나 사과 따위의 단어는 생소한 말이었다. 어젯밤 사고도 마찬가지였다. 하일이는 뇌진탕에 경추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었고 상대방 아반떼 운전자는 사망을 했다는 소리를 듣고도 별 느낌이 없었다. 용수와 시종이가 죽고 오정철과 순태가 팔다리가 부러졌다는 소리도 들었으나 역시 덤덤했다. 오히려 이 중요한 시기에 대형 사고를 이르킨 것을 생각하면 놈들의 부러진 팔다리를 또 한 번 부러뜨리고 싶을 뿐이었다. 하루 사이에 이게 무슨 일인가 말이다.
"참, 윤검사가 오면 어제 준비한 거 건네주고 고맙다는 말을 해. 나는 잠든 걸로 할 테니까. 그 양반 오늘 올라가겠지?"
"그러지 않아도 가시는 길에 잠깐 들리신데요. 제가 밖에 있다가 알아서 하죠,"
"내 전화기는 어디 있는 거야?"
"참 제가 챙겼어요, 여기요."
김은애가 병실 밖으로 나가자 신동규는 제 아버지인 신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부상 정도를 알리고 다친 경위를 말했다. 그리고 오늘 내려보낸다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다. 누군지 알만 했다. 전직 경찰 김기동이었다. 베테랑 수사관이던 그는 피의자의 돈을 받다 감찰반에 걸려 목이 잘렸었다. 그런 그를 캐시콜뱅크에서 불러 들였다. 대출금을 떼먹고 잠적하는 채무자를 찾아내는데는 그만한 사람이 없었다. 사라진 탄약을 찾는 것 역시 그가 적격일 터였다. 신동규는 자기의 치료 기간 동안 이곳의 업소를 맡을 중간 보스도 보내 달라고 했다. 사북과 태백 일대에는 세력 확장을 목적으로 십여 군데의 영업장이 있었다. 대출업과 호텔과 모텔, 그리고 바였다. 3개월 전 오정철 패가 먼저 내려와 자리를 잡자 신동규가 불과 한달 사이에 십여 개의 업소를 차린 것이다. 물론 서울의 대형 캬바레에 미칠 정도의 수입은 아니나 계획하고 있는 사업을 위한 전초 기지를 구축해 놓은 것이다. 신동규는 이삼 년 이내로 이곳의 대출업 80퍼센트와 호텔과 모텔의 반을 차지할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서울 강남보다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혹시 서울에서 다야몬드 탄환을 만들던 놈이 빼돌린 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그 탄환을 받아 가방에 넣은 놈이거나 그 가방을 순태에게 전한 놈이 비밀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심부름을 했던 순태가 그랬다면 그 상자에 다이아몬드 탄환이 든 줄 어떻게 알고 꺼냈겠어? 설사 알고 있었다 쳐도 한알을 꺼낸다면, 확률이 백 분에 일이 아닌가? 그건 점쟁이라도 불가능한 얘길 테지. 여기선 나말고 아무도 그 탄환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은애도 몰랐으니까. 그렇다면 역시 서울에서 일이 꼬인 것이 틀림없겠군. 헌데 오정철이 저새끼는 이제껏 일을 잘 하더니 갑자기 왠 교통사고를 내서 나까지 이꼴로 만드냐 말이다.'
신동규가 꼼짝도 못하는 다리를 내려다보며 오정철을 원망하고 있을 때 김은애가 병실에 들어섰다
"윤검사 갔냐?"
"예, 방금 떠나셨어요. 몸조리 잘하고 서울서 한번 만나자던데요?"
"그래? 어젯밤에 윤검사는 그 판에서 얼마나 땄어?"
"사장님이 자리를 뜨기 전까지는 땄었나봐요. 그 다음은 저도 모르죠. 사장님 사고 소식에 정신이 없었으니까요."
"윤검사 그 짠돌이는 배팅에 조심스러워서 큰돈은 못 땄겠지만 쉽게 잃을 사람도 아니야. 내가 몰아준 돈까지 하면 어쨋던 본전인 일억 원은 지켰을 거야."
"그럼 오늘 것까지 이억 원이군요."
"그 빌어먹을 다이야만 아니어도 하나도 아까울 게 없는 돈인데...허기야 이억에 기소 중지가 어디야? 아버지도 만족해 하셨고..."
"서울서 차가 올 시간이 되었는데 왜 연락이 없죠? 이곳 지리도 모를 텐데..."
"웃기고 있네. 어이, 은애 넌 똑똑한 멍청이구만. 아, 네비는 폼으로 달구 다니냐?"
"참 그렇지. 호호호."
"웃어? 여기를 보라고. 넌 이게 웃을 상황으로 보이냐?"
신동규는 인상을 쓰며 제 다리를 가르켰다.
정오가 가까울 무렵 경광등을 번쩍이며 구급차가 들이닥쳤다. 서울 의료원에서 보낸 차였다. 그 뒤에 검은 승용차 세 대가 따라 왔는데 검은 양복의 건장한 십여 명의 사내들이 우르르 내려서 차 옆에 나란히 섰다. 구급차에서 재빨리 들것이 달린 수레를 내려 병실로 향했다. 잠시 후 신동규가 실려나오자 검은 양복의 사내들은 아무 말 없이 일제히 고개를 꺾었다. 구급차 뒤에는 부상 정도가 가장 가벼운 오정철이 나와 있었다. 그는 기절 후에 깨어나 보니 팔이 부러져 있었는데, 깁스를 하기 전 임시로 싸맨 왼팔을 목에 걸고 있었다.
"야, 잠깐 기다려. 어이 오정철, 너 이리와."
구급차에 실리기 직전에 신동규가 오정철을 발견한 것이다.
"너 때메 나까지 이 꼴이 났다. 그건 그렇고 위에서 널 대신할 놈이 곧 내려 올 거야. 넌 순태하고 여기 남아서 그놈에게 확실히 인계하란 말이야. 알어? 그리고 또 김기동 과장이 올 거니까 네가 알고 있는대로 정보를 알려주고. 알아들어?"
"예, 사장님."
"내가 순태나 널 절대 의심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 그러니 김과장이 묻는대로 솔직하게만 말해. 쫄지말고. 알았지? 물건을 어떻케든 찾아야 하니까. 알아들어? 허고, 너희들은 업소에서 일단 손 떼고 당분간 병원에 엎드려 있어. 봐가며 내가 연락할 테니까. 알았지? 용수와 시종이 장례와 사후 처리는 얘네들이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덜 말고. 알아들어?"
신동규는 왼손을 들어 차 옆에 늘어선 검은 양복의 사내들을 가르켰다.
"예, 사장님."
오정철은 불같이 화를 낼 줄 알았던 신동규가 조용하고 다정하게 나오니 눈물나게 고마웠다. 하급자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최소한 중간 보스로서의 체면은 지킨 것이다. 그래서 떠나는 구급차의 꽁무니에 땅에 닿을 듯 고개를 깊이 숙였다. 따라왔던 세 대의 자동차 중 한 대가 그 뒤를 급히 좇았다.
"진우야 널 바꾸란다. 받아 보거라. 덕배다."
"예, 아버님."
진우는 양봉장에 와 있었다. 꿀따는 구경도 할 겸 덕배 아버지를 돕기 위해서였다. 전화기를 받아든 진우는 벌통을 벗어나 밀짚모자 위에 덮어 쓴 양파 자루를 벗었다.
"덕배냐? 음, 나다."
"음. 꿀 따고 있다며? 벌에 안 쏘였냐?"
"완전무장을 했지. 넌 별일 없냐?"
"별일? 별일 있지. 야, 용수 죽던 날 그날 밤에 말이다. 신동규도 교통사고를 당했다더라. 밤중에 영월 부근에서 그랬다니 아마 용수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가던 길이었겠지?"
덕배의 목소리가 밝지 못했다. 라이벌 신동규의 사고 소식보다 용수 얘기에 우울한 듯했다. 진우 역시 해장국 집에서 보았던 용수의 얼굴이 얼핏 스쳤다.
"야, 듣고 있냐?"
말이 없는 진우를 의식한 덕배가 물어왔다.
"으 음, 듣고 있어. 헌데 신사장이란 그 사람도 죽었다는 거냐?"
"어, 죽진 않았나봐. 서울로 후송됐다더라. 당분간 놈들이 내 일을 방해하지 못할 테니 일단 시간은 벌어 놓았지 뭐냐."
"너한텐 다행한 일이구나."
"글쎄, 다행인진 몰라도 놈들이 영 손을 놓은 게 아니니까 안심은 못하지. 절대 포기할 놈들이 아니거든. 어제 저녁에 상구란 놈이 전화가 왔는데 말이다...."
"상구?"
"네가 타고 왔던 택시 기사, 그놈 이름이 상구 아니냐? 그놈이 말하기를 못보던 사람이 기사들에게 너에 대해서 묻고 다니더래. 아직은 더 두고 봐야 겠지만 뭔가 기분이 찜찜해서 네게도 알려주는 거니까 답답하더라도 그냥 거기 꼼짝말고 붙어 있거라. 알았냐?"
"음, 알았어, 너도 조심해. 나야 오히려 너의 아버님이 계시니까 든든하다야."
"거짓말 마라. 노인네가 더 든든하게 여기실 거다."
전화를 끊은 진우는 잠깐 생각을 해 보았다. 아직은 캐시콜뱅크 놈들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지는 못했을 거였다. 수미의 전화를 받던 날, 곧이어 놈들의 전화가 왔을 때 밧데리를 뺀 이후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덕배가 말한 그 사람은 오정철을 대신해 탄환의 행방을 좇고 있는 자일지도 모를 일이다.
"왜? 누가 널 찾는다더냐?"
벌통군으로 돌아온 진우에게 덕배 아버지가 물었다.
"아니요. 답답하더라도 참으라더군요. 저는 오히려 서울 있을 때 보다 덜 심심한데요."
진우의 말은 사실이었다. 수 년간을 홀로 산 서울 생활보다 가족 같은 덕배 아버지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훨씬 나았다.
"허허, 옛 부터 고리대금업을 하는놈 치고 지독하지 않은 놈이 없느니라. 인간 말종들이 하는 짓이 고리대금업이 거든. 그러니 놈들도 언젠가는 너를 찾아올 거다마는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그땐 내가 감당해 보마."
"예? 아버님께서요? 안됩니다. 그건 놈들을 잘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이지요. 그놈들은 인정사정이 없는 놈들이라 어른 아이를 몰라볼 겁니다."
백세에 가까운 노인이 자신을 대신해 나서겠다는 소리에 진우가 손을 흔들며 말렸다. 그런 진우를 물끄러미 보던 노인은 빙긋이 웃고 있었다. 덕배 아버지는 고리대금업자를 혹평했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 역시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고 더 크게 하려고 계획하지 않는가? 노인은 아들이 떼돈을 벌려고 덤비는 줄만 알았지 하고 있는 일은 자세히 모르는 것 같았다.
"아버님 테레비에서 보니까 토종꿀이 더 비싸던데 그건 더 귀해서 그런가요?"
놈들의 이야기에서 분위기를 빨리 돌릴 필요를 느낀 진우가 화제를 바꿨다. 꿀이 든 소비장을 들어내던 덕배아버지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글쎄, 귀해서라기보다 꿀을 따는 꽃이 서로 다르고 꽃가루도 달라서겠지. 양봉은 주로 들이나 평지의 꽃을 찾느니...그래서 아카시아나 밤꽃, 사람이 심은 꽃밭에 앉느니라. 과수원에 꽃이 필 때, 벌들이 많이 모이지? 반면에 토종벌은 싸리나 칡꽃 도토리 꽃같은 산에서 피는 꽃에서 꿀을 갖고 오지. 그러니 맛도 다를 수밖에 더 있느냐? 그리고 양봉꿀보다 토종꿀이 좀 되느니라. 꿀 양도 적게 나오고...그래서 비싼 게지."
"그렇다면 이런 높은 산에서 치는 이 양봉은 토종벌과 같은 꽃의 꿀이 아닙니까? 그러니 꿀 맛도 토종꿀 같겠지요?"
"잘 봤다. 그래서 여기서 나는 꿀은 토종꿀과 비슷한 맛이 나느니. 허허. 토종꿀보다 약간 묽기는 해도 맛은 썩 좋으니라. 너도 채밀기에서 나오면 맛을 보거라."
연신 훈연기를 뿜어 벌을 쫓고 솔로 벌을 쓸어내는 노인의 손길이 바빴다. 진우는 꿀이 꽉찬 소비장을 받아 채밀기에 넣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몹시 낡은 수동식의 작은 채밀기였다.
"다 넣었으면 돌려 보거라. 빨리 돌려야 할 게다."
손잡이를 천천히 돌리다가 점점 빨라지자 함석으로 만든 채밀기의 안에서 드르륵 소리가 요란했다.
"허허 그놈도 나만큼 늙어서 그런다. 됐다 열어보거라."
통 안에는 벽에서 꿀이 흘러 바닥에 고이고 있었다. 빈 소비를 들어내던 진우는 손등에 묻은 꿀을 핥아 보았다.
"달군요. 엄청 답니다. 하하."
"허허. 네놈이 웃을 때가 다 있구나. 그래, 앞으로도 웃고 살아라. 산다는 게 별거 없느니라..허허."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던 진우는 깜짝 놀랐다. 웃어 본 기억이 까마득했다. 더구나 내 처지에 웃고 있다니? 꿀 한 방울에? 달면 웃고 쓰면 울 테냐? 진우는 자신을 자책했다.
용수와 유시종의 장례를 치른지 며칠이 지났건만 태백과 사북 일대의 업소를 맡을 중간 보스는 내려오지 않았다. 그날 내려온다던 김기동 과장 역시 이제껏 콧배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슨 연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정철은 인수 인계를 맡을 놈이 내려오지 않자 할 수없이 자기가 맡아오던 업소에 관리 차원에서 전화를 했다. 그런데 전화를 받는 졸개의 말에 기가 막혔다. 이미 새로 내려 온 보스의 지시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모텔과 술집은 물론이고 전당사와 대포차를 파는 놈도 똑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다. 일주일 전에 과장급인 천태종이 내려와 자신들을 통제한다는 것이었다. 천태종이라면 오정철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영등포를 관리하다 실적이 떨어져 의정부로 밀려 났던 놈이다. 신동규가 떠나면서 한 말을 생각할 때, 천태종이 인수를 받으러 오지 않은 것이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이 세계에서 인수인계 없이 관리구역 즉, 나와바리를 접수하는 일도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신동규에게 직접 전화로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이었다. 사북에서 술집을 맡고 있는 신일서란 놈이 오정철과 안순태가 있는 병실로 찾아왔다.
"어, 너 일서 아니냐?"
깁스한 팔뚝이 가려워 석고 틈 사이를 나무젓가락으로 깔짝대던 오정철이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오후에는 장사 때문에 아침에 왔습니다. 형님들 사고 소식을 듣고도 빨리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쓰벌놈, 사고 난 게 언젠데 이제 오냐? 헌데 너 혼자 왔냐?"
"예 저만 왔습니다."
신일서는 조심스레 손에 들고 온 비닐 봉투를 작은 냉장고 위에 놓았다.
"야, 뭐냐? 먹을 거냐?"
정강이가 부러진 순태가 두 손을 짚으며 윗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어 비닐 봉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야, 그만 둬. 쓰발놈아."
오정철이 매서운 눈초리로 인상을 쓰자 손이 거의 봉투에 닿으려던 순태는 멈칫했다.
"아 씨발, 갖고 온 놈 성의를 봐서라도 먹어줘야지. 야 일서, 안 그러냐?"
"쳐먹는 건 나중에라도 할 수 있단 말이다. 야, 일서 너 여기 잠깐 앉아 봐."
오정철은 한손으로 의자를 당겨 신일서를 앉게 했다.
"천태종이 나와바리를 관리한다며? 그 자식이 인수인계 절차를 거치지도 않고 그러는 걸 너도 알고 있었냐?"
"예? 인수를 받지 않았다고요? 정말입니까. 형님?"
"뭐야? 그럼 몰랐단 말야?"
"예, 몰랐습니다. 그런데 서울서 사장님이 제게 직접 전화를 하셨습니다. 천과장 지시를 따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형님과도 마무리가 된 줄 알았는데요?"
"씨발. 야 정철아, 이게 다 무슨 소리냐?"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무엇을 생각하는 오정철 뒤에서 순태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뭔가 자신들이 누워 있는 사이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낌새였다. 오정철이 다시 신일서를 돌아보았다.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너 김기동 과장이 내려 온 건 봤냐?"
"아 예, 어젯밤 저의 업소에 천과장과 함께 왔었습니다."
"그래? 너 전부터 김과장 얼굴을 알고 있었냐?"
"아니요. 처음보는 얼굴인데 천과장이 껌벅 죽던데요? 그래서 나중에 합석했던 아가씨에게서 알아냈습니다. 대화의 내용으로봐서 누구를 찾으러 내려 온 것 같더랍니다."
"쓰벌, 내 그럴 줄 알았다. 김기동이 스타일이 다른 놈 말을 잘 믿지 않는다더니 진짜구만. 좌우간 일서 너는 내가 다 나을 동안 꾹 참고 천태종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어라. 내 이대로 찌그러지지는 않을 테니까. 알았냐?"
오정철이 새삼 안순태와 신일서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형님, 아니 과장님, 과장님이 나을 때까지 못 갈 것 같습니다. 아가씨 말을 들어보니 천태종이 의정부에서 직속 애들을 데려온다고 하더랍니다. 그저께는 주류 납품하는 업체도 바꿨습니다"
"씨발 뭐야?"
옆 침대에 있던 안순태가 이를 악물더니 신일서를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신일서는 제 풀에 찔끔 놀라 얼른 외면을 했다.
"야 이거 잘못하면 우리 애들 밥줄 떨어지게 생겼군. 빨리 무슨 수를 써야겠구나."
일이 전혀 생각 밖으로 돌아가는지라 오정철의 눈은 다시 반 넘어 잠겼다. 신일서가 돌아간 후 오정철은 순태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야 순태, 잘들어 봐. 이거 일이 돌아가는 꼴이 어째 좀 이상하잖냐? 나하고 인수인계도 없이 우리 애들과 업소를 접수한 천태종도 그렇고 나한텐 전화 한 통 없던 사장이 직접 업소 애들에게 전화를 해서 천태종의 지시를 따르라고 했다는 것도 그렇고 말야. 이거 뭔 야로가 있는 것 같지 않냐?"
"아 씨발 나도 아까부터 찜찜하다고. 허지만 사장은 우릴 의심하지 않는다고 네게 말했다며? 그리고 사장을 십년 동안이나 모셔왔는데 설마 우릴 어쩌겠냐?"
"멍청한 소리 그만 해라 쓰벌, 넌 아직도 조직의 생리를 모르냐? 십 년 아니라 백 년을 모셔도 조직에 해가 되면 가차 없이 없애는 게 조직이여, 알어?"
"씨발, 우리가 조직에 무슨 해를 끼쳤냐? 이제껏 죽자살자 시키는 건 다 했구만."
"아 시꺼, 쓰벌놈아. 네가 잃은 총알 한 발, 그 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잖어?"
순태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교통사고를 당한 이 후 잊고 있던 문제였다.
"야, 정철아 이제 난 어쩌면 좋냐? 아 씨발, 재수 없이 하필 그게 거기 들어 있었다니. 참, 김과장이 우리를 의심할까?"
"김기동이 누구냐. 5년 전에 영등포에서 우리를 잡아넣었던 놈 아니냐? 넌 1년 6개월 동안 감방서 썩은 생각 안 나냐? 쓰벌. 그놈이 형사질하다 짤리고 캐시콜에 들어갈 줄 누가 알았겠냐? 게다가 이번엔 없어진 총알을 찾으러 내려왔다니 이거 잘못하면 우리가 덮어쓰게 생겼다."
"내 말이 그 말이야. 헌데 말이야. 우리가 한 개를 채워 넣은 걸 김과장이 알아낼 수 있을까?"
"네가 헛소리로 떠들지 않는 이상 어떻게 알어? 용수도 시종이도 다 죽었으니 그걸 아는 사람은 이제 우리 둘 밖에 없는데?"
"사장님이 너보고 솔직하게 김부장이 묻는 대로 털어 놓으랬데메? 너 정말 김과장이 물으면 다 털어 놓을 거냐?"
순태는 이그러진 얼굴로 오정철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설마하는 애원의 빛이 묻어 있었다. 그런 순태의 얼굴을 보고도 오정철은 웃지 않았다. 그리고 침울한 표정으로 한참을 말이 없었다.
"야 순태,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 애초에는 신사장 말대로 순순히 협조하려 했는데 이렇게 되면 오히려 우리에게 책임이 돌아오게 생겼다. 다이야를 우리가 빼돌린 걸로 된단 말이야 쓰벌. 넌 나하고 생사를 같이 한 친구다. 그러니 이번 일은 죽어도 모르는 일이야. 알어? 하늘이 두 쪽 나도 탄약은 서울서 받아 온 그대로란 말이다. 그러니까 김기동이 아니라 하나님이 물어도 우린 모르는 일이야. 알어?. 순태 너도 뒈지기 싫으면 끝까지 오리발을 내 밀란 말이다. 알어?"
"알아들었어. 죽어도 헛소리를 안 할게."
"사장이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면 앞으로 우리 입장도 곤란해지겠는걸?"
"그러게 말이야. 씨발. 이럴 때 우리가 그 총알을 먼저 찾아내면 좋을 텐데 말이야."
"또 병신 같은 소리하고 있네. 야, 이제 와서 그걸 찾으면 오히려 네가 잃어버렸던게 탄로나잖아. 병신아. 그렇게 되면 이제까지 사장한테 내가 거짓말 한 게 또 들통나고....아. 쓰벌놈. 대가리 하고는..."
"킬킬킬 그렇구나."
"웃어? 쓰벌놈. 만약 털어 놓지 않으면 우리가 죽게 될 경우 눈치를 봐가며 내가 먼저 항복할 테니 그때는 너도 두말없이 항복해. 알어?"
오정철에게 면박을 받은 순태가 배일서가 가져온 봉투를 집었다. 속에서 나온 것은 양주 한 병과 슬라이스 치즈 팩이었다.
"야 이것 봐라? 술이잖아? 일서 이 새끼가 내 맘을 어찌 알았을까? 히힛."
순태는 양주병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사타구니에 술병을 낀 채 치즈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술장사 아니랠까봐 문병 온 놈이 술을 갖고 오다니. 일서 그놈도 웃기는 놈이구먼."
오정철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 씨발, 쥬스나 과자 나부랭이보다야 열 배는 낫지. 야, 이따 밤에 한잔하자야."
"참 신일서가 맡은 업소에 주류 공급업자를 바꿨다고 했었지?"
"음, 아까 그랬지. 헌데 왜?"
치즈를 입으로 구겨 넣으며 순태가 되물었다.
"일서네 업소가 문을 연 게 한 달도 채 안 되잖냐? 헌데 그새 주류 공급업자를 바꾼다니 웃기잖어? 공급가도 싸다고 사장이 직접 얘기한 걸 말이야"
"씨발, 바꾸던지 말던지 그까짓 거 우리가 알게 뭐야. 안 그래? 어? 가만. 술 배달...그놈!......여, 여기 입 위에 꿰맨 자리.... 맞다 그놈이다."
갑자기 순태가 씹던 걸 멈추고 손가락으로 자기 입술을 가르키며 허공에 시선을 꽂았다. .
"뭐라고? 뭐가 맞아?"
"일서네 업소에 양주 박스 배달하던 놈 말이야. 일서네 업소에 갔을때 두어 번 본 놈이야. 그 땐 모자를 쓰고 있었고 기차에서 봤을 땐 맨대가리였을 뿐이야. 확실해."
"뭐? 기차? 용수 친구라는 놈 말고?"
"화장실에 용수 친구 다음에 들어갔다는 놈이 바로 일서네 업소에 술 배달하던 그놈이라니까? 내가 나올 때 그새끼도 복도에 있었단 말이야. 코 밑에 칼자국을 보고서도 몰랐네. 아 씨발 그걸 내가 왜 몰라봤을까?"
"확실하냐? 아 그러고보니 그러네. 용수 친구라는 놈도 자기 뒤에 들어간 사람이 있었다고 했었지? 그땐 순태 네놈이 흥분해서 나대는 통에 그놈을 잊고 있었군."
"야, 씨발 지금이라도 그 새끼를 잡아다 조지면 찾는 건 시간문제 아니냐?"
순태는 이미 잃었던 탄약을 찾기라도 한 듯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혔다..
"야, 야, 제발 정신 차려라. 쓰벌놈아. 조금 전에 내가 한 말은 코로 씹어 먹었냐? 이제 와서 그놈을 조져봐야 찾지도 못하고, 찾는다 하드라도 이미 늦었다니까? 허 참.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먹냐? 이제 와서 그 총알이 나오면 오히려 우리가 좆 된다니까 그러네? 오히려 그 총알은 영영 못 찾아야 된단 말이다. 쓰벌놈아. 애초에 총알을 빼낸 너는 생각 안 하냐? 까불다 잃어버린 건 또 어쩌고? 어이 쓰벌놈."
순태는 다시 가슴이 뜨끔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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