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설

파투(破鬪) 6. 또 다른 음모(3) 김기동

fiction-google 2024. 3. 11.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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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십시요. 형님."

밀실에서 기다리던 천태종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꺾었다. 배일서의 안내를 받으며 김기동이 나타난 것이다.

", 오래 기다렸어?"

"아 아닙니다. 형님."

김기동은 먼저 자리에 앉은 다음 천태종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천태종은 조심스럽게 마주 앉았다. 그리고 문 앞에서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신일서에게 일렀다.

"술은 어제 그거 하고 아가씨도 왔던 애들 들여보내."

". 과장님."

", 천과장 잠깐. 아가씨는 조금 뒤에 부르고 우선 술만 갖고오라구 해."

"? 아예. 너 들었지? 우선 술만 보내."

", 과장님."           

신일서가 나가자 김기동은 밀실의 이곳 저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무리 시골이라 해도 그렇지. 인테리어가 형편 없구만. 문자 그대로 신장개업을 다시 해야겠군."

", 저도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만 아직 자금이 내려오지 않아서..."

"신사장이 하는 일이 그렇지 뭐, 꼼꼼할 땐 해야하는데 그런 게 좀 부족하지."

"그래도 서너 달 사이에 이곳에 자리를 확보한 걸 보면 우습게 볼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건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신사장이 다른 재벌집 자식과 다른 점이 바로 그런 거지. 틈새를 잘보고 잘 파고 들거던. 학생 때부터 공부는 안하고 조직에서 살다시피 했으니 그럴 수밖에... 그때 나 한테도 여러번 걸렸었지. 하하하."

노크 소리와 함께 웨이터가 술과 안주를 놓고 갔다. 천태종이 병을 들어 뚜껑을 땃다.

"한잔 드시지요. 형님."

"그러지. 너도 한잔 해."

", 형님."

둘은 잔을 가볍게 부딧친 후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래, 생각해 봤냐?"

김기동이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 형님."

"그래서?"

"형님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잘 생각했어."

천태종의 눈을 지긋히 바라보던 김기동이 짧게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형님, 우리가 사업을 따로 하는 걸 위에서 알게 될 경우엔 어떻하지요? 도박 사업은 몇 년 전에 원무현이란 놈 때문에 조직에서도 손 뗀 사업인데요? 몰래 한다고 해도 언제까지 숨길 순 없는 일이고 우선 조직에 대한 배신이 아닙니까?"

"원무현이 돈을 갖고 튄 건 나도 알아. 그때는 내가 경찰이었으니까. 그놈이 숨은 곳을 알아낸 것도 사실 나였거든. 내가 그놈이 숨은 원주의 장소까지 알려줬는데 병신 같은 너희들이 놓쳤잖아? 그리고 도박사업은 원무현이 처럼 속전속결로 해치우는 게 최고라구. 그러니까 우리도 단숨에 쇼부를 쳐야지. 조직에서 눈치 채기 전에 몇번 돌리고 자리를 옮기면 돼. 더도 말고 열번만 무사히 넘기면 목표치가 확보 될 거야. 너도 알다시피 원무현이 혼자서 50억을 먹었잖아? 그리고 경찰 쪽 정보는 내가 책임진다니까 그러네."

"참 그때 원무현 추적팀 중에 한 명이 지난번 사장님 차를 몰다 사고를 낸 하일이란 놈입니다. 그놈 말로는 원주서 도망친 원무현이 영월 부근에 숨어 있었답니다."

"영월 지방이라면 이 부근이잖아? 그건 나도 몰랐던 얘기군, 그래서 그놈을 어떻했데?"

"그자리에서 엄청 팻답니다. 그래도 안 불어서 결국 돈 찾는 것은 실패를 했답니다."

"? 돈을 못 찾아? 아니 조직에서 그놈 입 하나를 못 열었단 말이냐?"

"입을 열기도 전에 원무현이 죽었거든요. 애들이 초장에 너무 심하게 다루어서요."

"엥이, 병신들. 그럴땐 나한테 맡겼어야지. 그럼 서로 좋았잖아? 덕분에 나도 돈 좀 만지고 말야. 쯧쯧. 까짓거 우리도 그 정도 돈은 챙길 수 있겠지. 아무튼 넌 아무 걱정 말어."

"걱정하는 게 아닙니다. 영등포를 맡았던 제가 의정부에서, 다시 이런 곳으로 밀렸는데 여기서 잘못되면 더는 갈곳도 없습니다, 형님."

어젯밤 그렇게 계획을 일러주고 확신을 주었건만 또 다시 죽는 소리를 하는 천태종이었다. 김기동은 그런 천태종이 영 못마땅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나? , 천과장, 내가 널 처음 본 게 언제야?"

"10년 전 아닙니까. 덕분에 별이 하나 늘었었지요."

"그래. 바로 그거야.    네가 그때는 몸을 안 아꼈었지? 위에서 시키는 대로 사시미 칼을 들고 물불을 안 가렸으니까. 그러던 네가 어쩌다 이렇게 됐냐?"

"지금은 그때하고는 사정이 다릅니다."

"그때하고는 사정이 다르다?"

김기동의 입가에 비웃음이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이어서 특유의 고리눈으로 마주앉은 천태종을 천천히 훑었다.

"그동안 천태종의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는 건 나도 잘 알지. 셋방살이에서 어느새 돈을 모아 신길동에 집을 새로 사셨더구만. 현대 아파트 1101203호가 맞나? 혹시 영등포    업소 실적이 떨어졌던 이유가 그것 때문은 아니겠지?"

"아니? 제 뒷 조사를 했단 말입니까?"

". 그것 뿐 아니더군. 장가를 빨리 가서인지 필리핀 유학을 보낸 아들놈은 생각보다 크더군. 마침 여기 현지에서 보내 온 동영상이 있는데 아빠도 봐야겠지?"

김기동이 탁자 위로 스마트 폰을 밀어 놓았다. 재생되고 있는 화면엔 친구들과 함께 웃으며 걸어오는 아들이 있었다.

"내 친구들이 필리핀에도 몇 명 있지."

순간 천태종은 눈앞이 아득했다. 조폭 생활 16년에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던 지난날은 어디로 가고 갑자기 가슴 속에서 박격 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리고 눈에는 방금 화면에서 본 아들의 잔상이 남아 있었다.

"항복합니다. 김형사님, 아니 형님. 형님이 하자는 대로 하겠습니다. 대신 저를 끝까지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하,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동업자요 피로 맺어지는 형젠데 거기에 무슨 사족을 붙여? 네가 배신만 때리지 않으면 나는 무조건 네편이란 것만 알아둬."   

"감사합니다. 형님."

김기동이 형사질하다 짤려 캐시콜에 들어왔다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오냐 잘 걸렸다 싶었었다. 천태종 뿐 아니었다. 그동안 김기동에게 잡혀 감방간 놈들이 조직 안에는 부지기수였다. 저마다 끈 떨어진 김기동을 갈아먹겠다고 설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헌데 위에서 회장의 엄명이 내려왔다. 김기동을 패는 것은 고사하고 손끝하나라도 건드리면 그날로 제명이라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제명은 곧 죽음이었다. 게다가 경찰에서 짤린 이유가 알고보니 조직의 뒤를 봐 주다 걸린 것이었다. 물론 반대급부로 돈은 챙겼겠지만 말이다. 캐시콜뱅크에 들어와서도 여러번 공을 세웠다. 잠적한 채무자를 찾아내는데는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전 현직의 경찰 인맥을 동원해 전산망의 정보를 빼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김기동 과장은 본사의 회장 직속이었다. 그러니 같은 과장이라해도 급이 다른 과장인 것이다. 김기동은 기가 꺾인 천태종에게 술잔을 채워주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소리로 어제 했던 얘기를 천태종의 뇌리에 다시 한 번 입력시키기로 했다.

"이거봐, 태종이. 조직 생활 백년을 해 봐야 남는 게 없어. 깍두기도 젊고 철모를 때나 멋있지 나이먹으면 늙은 양아치일 뿐이라구. 더구나 가족이 생기고 자식이 크면 깡패 생활은 접어야 된단 말이야. 애비가 깡팬 걸 알면 자식이 어떻게 생각 하겠어? 나는 못 배워서 깡패가 되었을망정, 자식만은 의사나 판검사를 한번 만들어 봐야 않겠나? 안 그래? 그러니 이제 조직을 떠날 때가 된 거라구, 그러면 빈손으로 조직을 떠날 거야? 빈손으로 떠나면 처자식은 어쩌라고? 안 그래? 그렇다고 조직에서 퇴직금이라도 듬뿍 주냐? 조직을 위해 칼에 찔려 뒈져도 단돈 십 원 한 장 없는 것이 조직 아니냔 말이야. 그러니까 같이 크게 한탕해서 이참에 이까짓 조직을 떠나잔 말이야. 한 이삼십 억씩 챙겨서 필리핀으로 뜨자고. 그돈이면 거기선 평생 골프치면서 살 수 있단 말이다. 도박 기술자와 바람잡이는 내가 책임질 테니 넌 장소와 하우스를 설치하고 경호할 네 똘마니들만 풀어. 다시말해 너는 하드웨어, 나는 소프트웨어, 그럼 게임 끝나는 거야. 내가 회장에게서 받은 지시 사항으로 시간을 끌 테니까 그 사이에 한탕하는 걸로 하자고. 어때? 너도 동의하지?"

"조직에서 우릴 그냥두지 않을 텐데요?"

"모르는 소리. 그동안 신회장의 비리를 내가 몽땅 수집해 놓았는데 날 어떻게 건드려?"

"예 형님, 이 목숨 형님께 맡기겠습니다."

"자식,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 이제 아가씨 불러라."

김기동과 천태종의 주종 관계가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아가씨들이 들어오자 마시고 주무르느라 둘의 입과 손이 동시에 바빠졌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그들이 아가씨를 데리고 밀실을 나섰다. 그러자 밖에서 기다리던 신일서가 그들을 배웅한 후 밀실로 들어섰다. 그리곤 재빨리 탁자위의 커다란 두꺼비 라이터를 집어들어 배 쪽의 뚜껑을 열었다. 그 속에는 건전지 모양의 녹음기가 숨겨져 있었다. 신일서는 그것을 빼내 주머니에 넣고 아무일 없다는 듯 밀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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