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동안 얼이 나갔던 최포수가 감격에 젖은 듯 중얼거렸다. 곽순도의 가슴은 아직도 뛰고 있었다. 난생 처음 목격한 호랑이였다. 그것도 바로 눈앞에서 말이다. 호랑이란 짐승이 그렇게 늠름하고 위엄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은 곽순도에겐 상당히 충격적 감동이었다. 그런 감동이 심장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저 범을 꼭 잡고 말겠네. 저렇게 멋진 범이 조선의 마지막 범이라면 박제로 만들어 후손에게 남겨야지. 암, 남겨야 하고말고. 내가 잡은 한 마리는 일본에 있으니 조선에도 한마리쯤은 있어야 조선 포수와 조선범의 체면이 서지 않겠나 말이야."
최포수는 장비를 다시 챙겨 짊어졌다. 최포수의 얼굴은 어느 덧 결기에 차 있었다. 그러나 곽순도는 오히려 뒤쫓고 싶은 의욕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선생님, 그 범을 꼭 잡아야 할까요?"
"무슨 소린가? 범을 잡으러 왔으면 범을 잡아야지. 이제와서 포기를 하잔 말인가? 일생에 한번, 아니지, 일생에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를 버리잔 말인가?"
"그게 아니라 왠지..."
"그만 두려면 자네는 그만두고 돌아가게나. 나는 저 범을 놓칠 수 없네."
곽순도가 최포수를 스승으로 모시는 한 그의 곁을 떠난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범의 뒤를 쫓아 철길을 건넜다. 상거노리란 마을 부근에서였다. 그때부터 다시 본격적인 호랑이 추적이 시작되었다. 범을 목격한 이후부터 최포수의 눈빛은 변해 있었다. 언제나 탄약을 장전하고 뒤를 쫓았다. 엿새 후 석병산 밑에 이르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사냥꾼에게 눈이란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모두 갖는 것이었다. 발자국이 뚜렸해서 추적하기가 좋은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추적의 고삐가 조금만 늦어도 발자국은 눈으로 덮혀 영영 흔적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맨땅은 발자국을 발견하기는 어려워도 흔적은 오래 남는 법이다. 두 사람은 추적의 고삐를 더욱 옥죄었다. 산속의 화전민이나 절을 만나면 돈을 주고 식량을 챙기는 것 말고는 온 신경이 범으로 향했다. 앞선 범은 보라는 듯 며칠에 한 번씩 멧돼지나 노루를 잡아먹어 가며 일정한 속도로 북상했다.
범은 칠성산을 버리고 계곡을 타다가 제왕산을 우회하여 오봉리로 빠지더니 사뭇 골짜기를 따라 가고 있었다. 이번엔 험한 산을 모조리 피하는 것이다.
"범이 우리가 따라가기 쉽게 하자는 것도 아닐 텐데 왜 고산으로 들지 않을까요?"
"높은 산 겨울 눈밭에 잡아먹을 짐승이 없기 때문이지. 눈이 쌓이면 노루도 인가로 내려오지 않는가?"
"그렇군요. 그렇다면 민가의 사람까지 해칠지 모르겠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이놈은 이미 몇 번 사람고기 맛을 본 놈이라 안심할 수 없어. 빨리 잡아야 할 텐데, 눈은 내리고 날이 점점 추워져 큰일일세."
"차라리 바짝 붙어 승부를 지어버리지요. 어차피 이판사판 아닙니까?"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네. 겨울이 더 깊어지기 전에 승부를 내세."
범은 두 사람의 예상대로 남대천 상류를 건너 망재봉을 넘었다. 그리고는 사뭇 인가에 가까운 곳만을 골라 북으로 북으로 가는 것이다. 범이 주문진의 장덕리에 이르자 대담하게도 대낮에 마을을 가로질러 간 모양이었다. 빈 밭에 옥수수대를 걷으러 가던 마을 사람이 범을 보고 기절할 듯 집으로 쫓겨든 것이다. 이때 최포수와 곽순도가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사람들이 술렁이고 있었다. 마을 사람 누구도 범을 보았다는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범을 본 사람은 복장을 치며 했던 말을 되뇌었다.
"호랭이 였단 말이야. 호랭이. 허어, 미치겠네."
"얼마 쯤 되었소?"
최포수가 물었다.
"그게...반 시간 쯤 전이지요. 분명히 호랭이였습니다. 호랭이요. 아, 나 참, 미치겠네.."
"이 사람 말이 맞소이다. 우리가 쫓던 범이요. 바짝 붙었구먼. 가세."
최포수가 목격자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봉칠이 저놈이 사십 평생 처음으로 거짓말을 안 했구나. 허, 참 별 일이로세."
둘러섰던 사람중에 누가 큰소리로 외치자 모두들 와 하고 웃었다. 범과의 거리가 불과 반 시간으로 좁혀진 터라 탄약을 장전한 두 사람은 더욱 빠른 걸음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어두워질 무렵까지 40여리를 쫓아 입암리에 닿을 동안 범의 꼬리를 보지 못했다. 할 수 없이 그날은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범은 해발 100m 정도의 마을 뒷산을 타고 계속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며칠에 한번 마을의 돼지나 개를 잡아 먹고 또 북상하는 것이다. 범은 계획이라도 한 듯 뒤쫓는 두 사람과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이제껏 두 사람이 간격을 좁힌 것이 아니라 범이 거리를 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월천리에 닿을 때까지는 그랬다. 헌데 월천리 외딴 농가의 송아지를 물어간 뒤로는 서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만월산 거쳐 사뭇 고산지대로 빠진 것이다. 우암리에 도착한 두 사람은 망서렸다. 날은 점점 더 추워지고 눈발도 거세져 더 이상의 추적도 어려웠다. 얼음이 두텁게 얼고 손발에 가벼운 동상마져 걸린 것이다. 범을 계속 따라가려면 이제부터는 험준한 산길을 각오해야 했다.
"선생님 어찌 하시겠습니까. 저는 선생님 의향에 따르겠습니다."
"흠, 저 범은 내 일생에 다시 못 볼 범이네. 그리고 이곳까지 쫓아왔는데 어쩌겠나. 끝장을 봐야지. 자네에게는 강권을 않겠네만 나는 가겠네."
"그렇다면 여기서 준비를 좀 더 해서 떠나지요."
결국 두 사람은 가진 돈을 털어 마을 사람들에게서 양식과 헌 이불 한 장을 샀다. 그날부터 말 못할 고생이 시작되었다. 범의 발자국을 놓치지 않으려면 하루에 산길 백여 리를 걸어야 했다. 걷는 동안은 추위를 잊으나 움직이지 않으면 땀이 얼음으로 변하였다. 밤은 더욱 곤혹스러워서 불을 피우고 이불을 둘러쓰고 서로의 체온을 유지하려 등을 붙여야 했다. 그야말로 악전고투의 추적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범의 뒤는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어느날 아침이었다. 반합에 밥을 지어 아침을 먹고 있는 두 사람은 동시에 깜짝 놀랐다. 산모롱이 둔덕에 범이 우뚝 서서 이 쪽을 바라보는 것이다. 범과의 거리는 50여m 쯤 되었다. 최포수가 급히 숟가락을 놓고 나무에 세워둔 총을 잡았다. 장전이 된 상태였다. 직감적으로 치명상을 입히기엔 거리가 좀 멀다고 느꼈다. 눈밭을 헤쳐 몇 보 앞으로 나가야 했다. 재빨리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욕심 같아서는 30m내로 다가서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최포수가 범을 향해 겨냥을 하는 것과 동시에 범도 잡목이 성성한 골짜기로 몸을 날렸다. 미쳐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최포수가 허무한 듯 신음 소리를 내며 총구를 내렸다. 범이 최포수보다 빨랐던 것이다.
"아아, 다시없는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차라리 아까 그 자리에서 쏘고 말 것을..."
"쏘시지 않길 잘하셨습니다. 또 기회가 오겠지요."
"아니야. 기회는 다시없을 거네. 범이 내게 먼저 한 번의 기회를 준 걸세. 미련한 내가 그 걸 놓쳐버린 거네."
아침밥을 마져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추적을 위해서는 먹어야 했다. 이미 식어버린 밥을 물에 말아 억지로 삼켰다. 다시 추적이 시작 되었다. 어두운 하늘에서 또다시 눈발이 히끗히끗 날리기 시작했다. 최포수는 배낭에서 망원경을 꺼내 목에 걸었다. 눈에 범의 발자국이 덮힐 테니 이제부터는 망원경으로 살필 참이었다. 사흘 후의 이른 아침이었다. 온 산천이 하얗게 눈으로 덮혀 어디가 어디인지 모를 산등성이를 범의 발자국을 따라가고 있었다. 용케도 범의 흔적을 다시 찾은 것이다. 범은 능선을 따르다가 골짜기로 내려간 것 같았다. 두 사람도 골짜기로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반 쯤 내려 왔을 때였다. 골짜기 아래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나무 뒤로 숨었다. 최포수는 망원경을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골짜기 아래에는 제법 넓은 냇가를 끼고 길이 있었다. 길 위에는 트럭이 한 대 서 있고 총을 든 군인들이 보였다. 군인들은 뭐라고 고함을 지르며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게중에 권총을 든 군인이 골짜기 반대편 산을 향해 손을 휘졌고 있었다. 군인들이 얼어붙은 내를 건너 산을 기어 오르는 게 보였다. 최포수는 망원경으로 군인들이 향하는 앞 쪽을 바라보았다. 범이 보였다. 나무 사이 사이로 범이 눈 덮힌 산을 뛰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군인들을 멀리 따돌리고 등성이를 넘어가 버렸다. 최포수는 다시 트럭이 있는 길로 망원경을 옮겼다. 서너 명의 군인이 트럭 뒤에서 무엇을 끌어내고 있었다. 초점을 맞춰보니 사람이었다. 눈위로 질질 끄는 것으로 보아 죽은 시체 같았다. 시체는 둘이었다. 군인들이 범의 뒤를 쫓는 이유를 알만 했다. 야영 중이던 군인들의 진지를 범이 습격한 것이다. 최포수는 곽순도에게 망원경을 넘겼다.
"아니, 선생님, 저건 국방군이 아니지 않습니까?"
곽순도가 깜짝 놀란 소리를 내며 망원경을 내렸다.
''아차, 범에 정신이 팔려 그 생각을 미쳐 못했군. 맞네. 저들은 인민군일세."
"그렇다면 우리가 삼팔선을 넘어왔단 말입니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구먼, 가만, 지도를 보세."
지도를 펴들고 지나온 곳을 연필로 선을 긋던 최포수가 낭패한 얼굴을 들었다.
"삼팔선을 지나도 한참 지났네. 여긴 토성면에 속하네."
"이렇게 되면 범을 쫓기는 고사하고 우리까지 여기서 들고 날 수도 없게 되었군요."
"분하지만 어쩔 수 없지. 뒤로 빼세. 저놈들은 공산군일세. 총든 우리를 보면 사정없이 발포 할 거야. 헛, 참, 막바지에 이런 허무한 노릇을 봤나.."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왔던 길을 되밟아 뒤돌아 섰다. 다음날 다시 그들은 길이 막혔다. 능선에서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야 하는 곳에서 행군하는 인민군을 본 것이다. 이열 종대로 골짜기를 따라 구불구불 뱀 같은 인민군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며칠 전만 해도 텅빈 골짜기였던 곳에 저렇듯 많은 인민군이라니? 진퇴유곡이란 이런 것일까? 할 수없이 두 사람은 행렬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행렬은 어두워져서야 끝이 났다. 낮부터 굶은 두 사람은 비탈길을 내려가 인민군의 행렬로 다져진 길을 따라 걸었다. 눈에 푹푹 빠지지 않으니 밤중이건만 걷기는 편했다. 한 시간 쯤 걸었을 때 멀리 불빛이 보였다. 인민군이 머무는 곳일 터였다. 더 갈 수가 없는 두 사람은 다시 산기슭으로 붙었다. 여기가 어디쯤 인지도 모른 채였다. 한참을 헤매다 바람이 없는 곳에 이르러 밤을 세우기로 했다. 배도 고프고 몹시 추웠다. 그렇다고 불을 피울 수도 없었다. 그날 밤은 유난히 추웠다. 눈을 걷어내고 낙엽을 그러모아 깔았다. 서로 등을 붙여 누더기 이불을 두르고 팔짱을 꼈지만 발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발에 동상이 걸렸다. 나이 탓인지 최포수의 동상이 더 심했다. 어제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두 사람이었다. 이 곳을 벗어나려면 먹고 기운을 차려야 했다. 산 아래에서 연기가 보이지 않을 곳을 찾아 이동하기로 했다. 작은 골짜기 바위틈에 연기가 적게나는 싸리나무로 불을 피웠다. 눈을 녹여 밥을 지어 먹은 두 사람은 그제야 살 것 같았다. 다시 산을 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올 때는 범의 발자국이나 흔적을 따라왔지만 갈 때는 발자국도 흔적도 눈에 덮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온 산천이 눈으로 덮혀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니 무작정 남쪽을 향해 발길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의 눈에 띌 새라 계속 능선을 탈 수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험한 눈길에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그것뿐 아니었다. 골짜기로 내려가야 다음 산을 탈 터인데 내려가려는 곳마다 인민군들이 행군하거나 진지 공사를 하고 있었다. 도무지 없던 일이 생긴 것이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에게 더욱 끔찍한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양식이 떨어진 것이다. 총을 쏘아 짐승을 잡을 수도 없는 지금, 양식 없이 며칠을 버틸 것인가? 설상가상으로 최포수는 동상이 심해져 걸음도 자유롭지 못했다. 하루가 지나고 그 다음날 아침이 되자 최포수는 더 움직일 힘이 없었다. 두 사람 모두 배도 고팠다.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안 되겠네. 이러다 둘 다 죽네. 나는 남을 테니 힘이 남았을 때 자네는 어서 남으로 가게. 여기서 죽으면 개죽음일세."
"선생님을 두고 가다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힘을 내셔서 또 가 보시지요."
곽순도는 최포수를 부축해 한발 한발 등성이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산등성이 까지 오는 데는 두 시간은 걸린 것 같았다. 이제 막 산등성이를 넘는 순간 두 사람은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눈 위에 사슴의 사체가 있었다. 반토막 난 사슴의 윗부분이었다. 내장과 허리 아래는 없었다. 두 사람은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범의 발자국이 뚜렷했다. 이곳에서 사냥한 흔적은 없었고 아직 사체가 얼지 않은 것으로 보아 금방 왔다간 듯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발자국은 북서쪽에서 왔다가 남쪽으로 향해 있었다.
"지금 쯤은 함경도에 있어야 할 범이 왜 뒤돌아 섰을까요. 우리처럼 인민군에게 길이 끊겨서 일까요?"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까짓 포위망을 못 뚫을 범도 아니고. 개마고원에만 올라서면 제 세상인데 왜 안 갔겠나? 무슨 다른 의도가 있었겠지."
"그럼 이 고기는 우리를 위해 갖다준 것이란 말입니까?"
"그야 모르지. 하여간 범 덕분에 굶어죽는 것은 면했군."
두 사람은 칼로 고기를 잘게 썰어 날로 먹기 시작했다. 목살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곽순도가 남은 고기를 발라내 가죽에 싸서 배낭에 넣었다. 댓 근은 될 무게였다. 한결 힘이 난 두 사람이 범의 발자국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북쪽으로 올 때와 마찬가지로 범은 두 사람을 남쪽으로 이끌고 있었다. 범은 인민군이 머무는 골짜기를 알고 있는 듯했다. 반드시 빈 골짜기를 골라 길을 건너는 것이다. 며칠을 그렇게 범의 발자국만 보며 뒤를 따랐다. 고기가 있어 배는 곯지 않았지만 최포수의 발이 문제였다. 동상이 걸린 발을 방치해서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산으로만 이동을 해서 현재의 위치도 불명확했다. 걸어온 날짜를 꼽아보니 어쩌면 삼팔선을 넘은 것도 같았다. 그날 오후였다. 최포수를 부축한 곽순도가 범이 산 밑으로 향하는 발자국을 보았다. 그때 쯤에는 최포수도 더 이상 촌보도 걷기 어려운 지경이 되어 있었다. 이럴 때 범이 산 밑 길을 택했다면 인민군이 더 이상 없다는 뜻 아니겠는가? 곽순도는 싫다는 최포수를 배낭 위에 앉혀 업었다. 총 개머리를 지팽이 삼아 산을 내려가기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서너 발의 총성이 울렸다. 곽순도는 얼른 최포수를 나무 뒤에 내려 놓았다. 최포수는 망원경을 꺼내들었다.
"아직 인민군 소굴을 못 벗어 난 걸까요?"
"그런가보네. 저 총소리는 지난번과 같은 모신나강이란 총일세. 노서아(露西亞)제지. 그런데...엇, 저건.... 범일세. 범이 놈들에게 쫓겨 오는군. 게다가 앞발을 못 쓰네. 총에 맞았나 보군."
최포수가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낮게 외쳤다. 곽순도의 눈에도 이 쪽으로 치솟는 범이 보였다. 확실히 범은 왼쪽 앞발을 디디지 못하는 듯했다. 이쪽으로 곧장오던 범이 두 사람을 보았는지 오른쪽으로 급히 방향을 돌렸다. 망원경을 놓은 최포수가 대각선으로 매었던 총을 얼른 내려 맹수탄을 장전했다. 곽순도 역시 약실에 두 발의 탄약을 넣었다.
"저놈들 손에 범이 죽게 둘 수는 없네. 범을 잡겠다는 내 생각이 애초에 잘못이었네. 조선의 마지막 범을 잡겠다는 욕심이 나를 이꼴로 만든 것이야. 그런데도 범은 오히려 나 같은 놈을 살려주지 않았나? 저 범을 꼭 살려서 백두산으로 돌려보내야겠네. 나는 저놈들과 싸울 테니 자네는 두말말고 총소리가 나기 전에 뛰게나."
범이 쫓겨 온 아래 방향으로 총구를 겨냥하던 최포수가 비장한 얼굴로 선언했다. 곽순도역시 진작부터 범을 쏠 마음이 없었기에 어떻게든 부상당한 범을 살리고 싶었다.
"선생님이 그러시다면 저도 총알이 다 할 때까지 싸울 수밖에 없지요."
"아닐세. 어차피 나는 못 걷네. 내가 저놈들과 싸우는 동안 자네는 활로를 모색하게나."
최포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총을 든 인민군들이 숨차게 기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세어보니 모두 아홉 명이었다. 몰려온 놈들이 갑자기 산 옆으로 빠진 범의 발자국과 핏자국을 찾느라 서성일 때였다.
'탕, 탕'
한 쪽 무릎을 세운 최포수가 벼락 같이 총을 쏘았다. 곽순도 역시 두 발의 총탄을 쏘아댔다. 두놈이 쓰러지고 뒤이어 둘이 또 꺼꾸러졌다. 두 사람은 재빨리 총신을 꺾어 재 장전을 마쳤다. 그러나 겨냥을 하려고 보니 총에 맞지 않은 놈들은 나무 뒤나 눈밭에 납짝 엎드린 뒤였다. 뒤이어 놈들은 이 쪽을 향해 총까지 쏘아댔다. 두 사람도 엎드려 사격태세를 갖추었다.
'탕, 탕'
다시 최포수의 총이 불을 뿜었다. 눈밭에 엎드렸던 두놈의 머리 쪽에서 눈과 피가 함께 풀썩 튀어 올랐다. 사냥으로 다져진 최포수의 사격술이었다. 두 사람이 쏜 총에 순식간에 여섯 명이 요절나버렸다. 당연히 근거리에서는 엽총이 나았다. 나무 뒤의 남은 세 놈은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놈들은 두 사람이 숨은 나무를 향해 한발 한발씩 조준 사격을 했다. 곽순도는 대항 사격을 하지 않고 옆에 선 나무 뒤로 재빨리 기어갔다. 나무 옆으로 빼끔 내다보니 한 놈의 얼굴이 나무 밖으로 반 쯤 노출이 되어 있었다. 총구를 들어 얼굴과 나무를 싸잡아 한방을 갈겼다. 피가 튀며 날아가는 머릿통이 보였다. 그 순간 놀란 한 놈이 후다닥 몸을 이르켜 튀려고 하였다. 곽순도는 지체 없이 남은 한 발을 뒷통수에 퍼부었다. 놈이 강풍에 수숫단 쓰러지듯 산 아래로 나가 떨어졌다. 이제 한놈이 남았다. 곽순도는 번개 같이 탄약을 채워 놈이 숨은 나무를 향해 대담하게 돌진했다. 모습이 보이는 즉시 사격을 할 태세로 사오십 여 미터를 달리는 동안 놈은 기척이 없었다. 마지막 이삼 미터를 남겼을 때 놈이 벌떡 일어서며 무작정 총을 발사 했다. 동시에 곽순도도 방아쇠를 당겼다. 놈은 제대로 겨냥을 못한 듯 가슴에 왈칵 피를 튀기며 뒤로 사지를 뻗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흰 눈이 온통 피바다였다. 곽순도는 최포수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선생님, 다 처치했습니다. 다른 놈들이 몰려오기 전에 얼른 가시지요?"
이마를 나무에 기댄 최포수는 말이 없었다.
"선생님."
역시 말이 없었다. 곽순도가 어깨에 손을 얹는 것과 동시에 최포수가 옆으로 무너졌다. 가슴과 배에서 검붉은 피가 스멀스멀 눈 위에 떨어졌다. 인민군이 쏜 총알이 나무를 뚫고 최포수의 가슴과 배를 맞친 것이다. 어른 허리보다 굵은 잣나무였다. 엽총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모신나강의 위력이었다. 곽순도는 엄청난 슬픔을 느꼈다. 이제까지 부모처럼 생각하던 최포수였다. 난감하고 비통한 마음으로 망연하던 곽순도의 정신을 차리게 한 것은 범이었다. 삼십 여 미터 쯤 떨어진 나무 앞에 범이 앉아 곽순도를 보고 있었다.
"가거라. 가. 가란 말이다. 네 집 백두산으로 어서 가란 말이다."
곽순도는 범을 향해 크게 손을 휘져었다. 왠지모를 눈물이 주룩 흘렀다. 앞발을 다친 범이 조용히 돌아서고 있었다. 곽순도는 범이 무사히 개마고원에 닿기를 마음 속으로 빌었다. 자신의 총과 최포수의 총을 바꾸어 어깨에 맨 다음 망원경도 목에 걸었다. 스승을 잊지 않으려는 생각에서였다. 시신과 총 위에 눈을 그러모아 덮었다. 그리고 절을 하고 산을 우회하여 남쪽을 바라고 눈을 헤쳐 나아갔다. 구빗길에 이르자 마지막으로 한번 뒤돌아 보았다. 멀리 능선에 점이 움직이고 있었다. 망원경을 들어 점을 확인하던 곽순도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범이 가고 있었다. 범도 고개를 돌려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 가거라.'
곽순도는 서둘러 눈길을 해치며 나아갔다. 그러나 골짜기마다 인민군이 보였다. 인민군들은 행군을 멈추고 땅을 파헤쳐 진지를 만들고 있었다. 좀 큰 골짜기에는 야포도 있었다. 곽순도는 삼팔선이 가깝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러나 인민군이 모여드는 삼팔선이라면 국방군들 역시 경비가 삼엄할 것이었다. 국방군의 오인 사격이라도 당한다면 큰일이었다. 그날 밤부터 밤길을 걸었다. 불빛과 인기척을 알아차리는 것은 낮보다 밤이 나았기 때문이었다. 밤길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눈빛이 있어 걷기에 불편이 없었던 것이다. 산에서 산으로 밤길로 닷새를 걸어왔을 때, 아침에보니 멀리 낯익은 산이 보였다. 한천산이었다. 그렇다면 산 밑의 골짜기는 올때 들렸던 마을이 있을 것이었다. 드디어 삼팔 이남 땅을 밟은 것이다. 범도 무사히 개마고원 땅을 밟았을까? 긴장이 풀린 곽순도는 그 자리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그리고 두고온 최포수 생각에 눈물이 주룩 흘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날이 1950년 1월 25일로 6.25가 일어나기 5개월 전이었느니."
젊은 날 자신이 겪은 얘기를 마치며 덕배 아버지가 덧붙인 말이었다. 이야기에 도취되었던 진우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전쟁 통에 그 호랑이가 무사했을까요?"
"그야 모르지. 하지만 백두대간에서야 쉽게 당했겠느냐."
"전쟁이 끝나고서도 아버님께서는 사냥은 계속 하셨습니까?"
'"5.16 혁명이 나든 해까지 사냥을 했니라. 그러다 그 해 우연히 금맥을 찾아다니는 사람을 만나 나도 그만 금쟁이가 되고 말았지. 허허. 그러다 또 20년 헛된 세월을 보내고 나니 환갑 늙은이만 남았더구나."
"금이요? 황금 말입니까?"
"왜? 그 얘기도 마져 듣고 싶으냐? 허나 밤이 깊었다. 다음에 듣기로 하고 이만 너도 자거라. 진우야 다시 말하지만 사람이 산다는 것은 금방이니라. 너는 나처럼 인생을 헛되게 보내지 말거라. 허허."
덕배 아버지가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진우는 덕배 아버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못하고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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