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진우가 눈을 떳을 때는 정오에 가까운 한낮이었다. 서울을 떠날 때부터 쌓인 피로가 기절에 가까운 잠을 불러 온 것이다. 피로감이 조금 남았지만 싫컷 자고나니 정신은 맑았다. 밖으로 나오니 강렬한 햇볕에 눈이 부시고 막바지에 다다른 여름의 절규인 듯 후끈한 열기가 목구멍으로 빨려들었다. 덕배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 일어났니?"
호미를 든 덕배 엄마가 웃는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걸음이 눈에 띄게 느리고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아 예, 정신없이 자다보니 그만....좀 늦었습니다."
"밥 먹어야지? 잠깐만 기다려라. 내 곧 내 오마. 너한텐 아침밥이고 우리도 점심을 먹어야 하니까."
"덕배는 아침에 갔습니꺼?"
"아니야, 벌써 새벽에 갔어. 걘 밝을 때는 이곳에 안 온단다."
"아버님도 안 보이시는 것 같은데요?"
"그 양반은 벌통보러 갔지."
호미를 마루 끝에 놓은 덕배 엄마가 불편한 듯한 다리를 들어 부엌의 문턱을 넘었다. 그런 모습을 진우는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10년 전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진우가 알고 있기로는 덕배 엄마의 나이는 57세 정도였다. 97세라는 덕배 아버지보다 40여년이 젊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으니까.
"허, 저놈 일어났구나. 노독에 죽은 줄 알았더니...허허."
낡은 밀짚모자를 벗으며 마당을 들어서던 덕배 아버지는 말은 진우에게 하면서 눈은 부엌에 두고 있었다.
"허, 몇 번을 일러야 말귀를 알아듣겠는가? 밭에도 가지 말고 붴에도 들어가지 말라는데 또 들어갔구만. 나오소. 내가 할 테니까."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데도 그래요? 오랜만에 온 진우 밥상이야 내가 차려야지 영감이 어찌 차리겠소?"
"시끄럽네. 그만 나오소. 나와서 상하기 전에 이거나 얼른 드시오."
윗 주머니에서 작은 프라스틱 통을 꺼낸 덕배 아버지가 부엌 안으로 그것을 디밀었다. 그 소리도 못 들은 척 덕배 엄마는 한참을 부엌에서 달그닥 거렸다.
"밥 다 차렸으니 상이나 마루에 좀 갖다 주세요."
두 사람의 대화로 미루어 백세에 가까운 노인이 거동이 불편한 덕배 엄마를 대신하려고 다투는 것이었다. 진우가 얼른 부엌으로 다가가 밥상을 받아들고 마루에 갖다 놓았다.
"차린 건 없어도 많이 먹어라."
덕배 엄마가 반찬을 진우 앞으로 밀어 놓으며 또 다시 웃었다. 덕배 아버지는 프라스틱 통 뚜껑을 열고 히끗한 것을 숟가락으로 긁어모았다. 그리고는 덕배 엄마 손에 숟가락을 쥐어주었다.
"이건 왕유(王乳)다. 서양말로는 로얄 제리라 하더구만. 이 사람 병에 좋다고 해서 먹이고 있다만 아직은 차도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금년에 내가 이걸 다 먹어서 분봉을 몇 통 못 했다. 벌이 먹어야 할 것을 내가 다 빼앗아 먹었으니 뭐가 되겠니?"
"어무이께서는 어디가 편찮으신데요?"
시장하던 참이라 아예 국에다 밥을 말던 진우가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던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진우를 보며 웃던 덕배 엄마는 서글픈 듯한 눈으로 남편을 돌아보았다.
"소뇌 위축증이라던가 하는 병이라. 유전병이라 하더구먼."
덕배 아버지가 대신 대답을 했다.
"덕배하고 같이 큰 병원에 가 보시지요? 우리나라의 의술이 뛰어나다고 합니다. 웬만한 병은 다 고친다잖습니까? 암도 문제 없다던데요?"
"벌써 가 봤지. 벼라별 검사를 다 해 봤는데 힘든 병인 모양이라...약으로 버티고 있니라."
덕배 아버지의 설명과 분위기로 보아 완치가 안되는 병인가 보았다. 우울한 이야기였다. 진우는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맛을 느끼지 못했다.
다음날 진우는 이곳 저곳으로 돌아보았다. 진우 아버지를 따라 벌통이 있는 곳을 가 보았다. 열댓 개의 벌통에는 수많은 벌이 윙윙 소리를 내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아버님 요즈음은 벌들이 무슨 꽃에서 꿀을 갖고 올까요?"
"싸리꿀과 칡꽃 밖에 더 있겠나. 꿀은 싸리꿀이 쌉쌀한 게 좋지."
갑자기 덕배 아버지가 벌통 위에 있던 파리채를 집어 들더니 홱 하고 허공을 갈랐다.
"장수말벌이다. 이놈 한 마리가 나타나면 꿀벌 수백 마리가 도륙이 나고 마느니...벌이 사는 세상하고 사람 사는 세상하고 어찌 그리 똑 같은지 몰라. 악독한 놈 하나 만나면 벌이고 인간이고 수없이 당하니 말이다."
땅바닥에는 꿀벌보다 몇 배나 큰 벌이 허리를 꺽고 죽어 있었다.
진우는 집 뒤에 있는 태양열 발전기의 집열판도 구경했다. 어젯밤에 보았던 전깃불의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이런 첩첩산골에서도 전기와 전화를 쓸 수 있는 좋은 세상이었다. 다음날은 좀 더 먼 곳으로 돌아다녔다. 높은 곳에 올라 본 산은 중턱까지는 완만한 경사로 밭을 일구었고 윗 쪽은 산세가 사뭇 험해서 나무가 빽빽이 우거져 있었다. 덕배네의 집은 산의 7부 능선쯤에 있어 그런 곳에 집이 있다는 것은 상상 밖이었다. 산기슭을 따라 덕배네 집으로 돌아가던 진우의 눈에 낯선 구조물이 들어왔다. 멀리서 보니 이층집 높이의 원두막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망루 같은 구조의 집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나무와 흙으로 높게 지은 엉성한 원두막 형태였으나 다만 원두막과 다른 점은 창문도 없이 사방이 흙벽으로 막혔다는 것이다. 사용한지 오래인지 양철 지붕은 반 쯤 무너지고 흙은 떨어져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작은 컨테이너 박스로 된 집이 있었다. 진우는 밭을 가로질러 수풀을 헤치며 나아갔다. 십여 미터 쯤 갔을 때였다. 둥그런 흙무더기가 앞을 막고 있었다. 잡초가 잔디를 뒤덮었으나 그것이 작은 무덤인 것은 한 눈에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무덤 옆에는 사각의 기둥 모양의 목비가 세워져 있었다. 진우는 무덤을 돌아 목비에 쓰인 글을 읽어 보았다.
ㅡ사랑하는 애견 백구 주님 앞으로ㅡ
밭 가운데 개의 무덤이라니? 약간이나마 긴장했던 진우는 실소를 금하지 못 했다. 비목과 글씨의 상태로 보아 이삼 년 전에 세운 것 같았다. 진우는 다시 컨테이너 쪽으로 수풀을 헤치며 다가갔다. 이런 산골까지 컨테이너를 어떻게 운반한 것인지 진우로서는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주위는 온통 키가 넘는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라서 컨테이너를 거의 다 가리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컨테이너 뿐 아니라 다락같은 건물 앞의 넓은 빈터 역시 온통 잡초로 뒤덮힌 밭인 것 같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것이 확실한 일이라 진우는 풀을 헤치고 컨테이너 가까이 다가갔다. 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작은 창문은 비료 부대로 가려놓아 안은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진우가 낮에 본 것을 덕배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 넘어 원두막 같은 높은 빈 집이 있던데요...뭐 하던 집입니까?"
"허, 먼 곳까지 갔었구먼. 거기는 몇 년 전까지 연초를 쪄서 말이던 곳이라 지금은 아무도 살지를 않아서 다 허물어졌을 건데...네가 보기에는 어떻더냐?"
"지붕도 반 쯤 날아가고 벽도 허물어진 곳이 많던대요?"
"아마 그럴거라 싶었지. 이태 전에 가 보고 안 가봤으니까."
"컨테이너로 된 집도 있던데 사람은 오래 전부터 살지 않은 것 같더군요."
"그 집에 살던 사람이 죽은 후 부터지."
이어진 덕배 아버지의 얘기는 이랬다. 죽은 사람은 처음부터 그곳에서 담배 농사를 짓던 토박이가 아니었다. 토박이 농사꾼이 늙어 죽자 가족들은 땅과 연초 건조장을 외부인에게 헐값에 팔았는데 그것을 산 사람이 또다시 죽었다는 것이다. 원주에서 왔다는 그 사람은 전 주인이 살던 낡은 굴피집을 헐어버리고 작은 이동식 컨테이너를 옮겨왔는데 이십여 명의 인력으로 산 중턱까지 들어 올릴 때 인건비가 컨테이너 값을 능가했다는 것이다. 헌데 석 달도 되기 전에 무슨 일로 죽어버렸다.
"손발이 묶인 채 누구엔가 맞아죽었다더라. 조사나온 순경도 외면할 만큼 처참한 꼴이 더라지? 살인범을 잡는다고 한동안 형사들이 여기까지 와서 물어쌌터만 내가 뭐 아는 게 있어야지? 헌데 그렇게 설치고도 여태까지 범인을 잡았다는 소리가 없는 걸 보면 잡긴 틀렸지. 그 사람이 죽자 형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집이고 밭이고 꼴도 보기 싫으니 나보고 그냥 가지라고 하더구먼. 나야 늙어서 땅이 아니라 금댕이를 준들 소용없지만 혹시 덕배가 쓸까 싶어 받아놓긴했지. 그 사람이 나중에 딴 소리 할까봐 얼마간 돈을 주고 양도증도 받아 놨다. 허지마는 그까짓 땅이고 집이고 덕배란 놈이 거들떠나 보겠나?"
"그럼 밭 가운데 개무덤은 그 사람이 만든 거군요."
"엉? 개무덤? 개무덤이라니? 어디에?"
진우는 자기가 본 것을 자세히 말했다. 듣고 있던 덕배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삼사년 전까지만 해도 덕배 애미가 크게 아프질 않아서 나도 겨울이면 그곳으로 꿩사냥을 나가곤 했지. 거기는 사방이 툭 터진 밭자리라 겨울에는 꿩이 많았거던. 헌데 그때는 그런 무덤을 못 봤느니. 그러니 그 사람이 죽기 전에 묘를 썼나보다. 그사람이 개를 길렀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말을 마친 덕배 아버지가 슬그머니 부엌으로 들어가 아내 대신 저녁을 짓는 눈치였다. 백세에 가까운 노인네가 지어주는 밥을 먹어야 하는 진우로서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광경이었다.
"아버님 제가 하겠습니다. 아버님도 잘 아시다시피 제가 학교 다닐 때 자취를 해 봐서 문제없습니다."
부엌으로 뛰어든 진우가 덕배 아버지가 씻으려든 쌀바가지를 빼앗으려하자 노인답지않은 재빠른 동작으로 바가지를 자신의 등 뒤로 빼돌렸다.
"아니다. 이것은 내 일이다. 일에는 각자의 몫이 있거늘 누가 대신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너는 네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끌 생각을 하거라."
"예? 알고 계셨습니까?"
덕배 아버지의 말을 듣는 순간 진우는 나쁜짓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얼굴이 화끈했다. 자신이 서울서 쫒겨 내려온 사연을 노인네가 이미 알고 있는 듯하였기 때문이다.
"덕배 한테 대강 들었다. 계집에 속아 빚을 졌다며? 허허. 덕배나 너나 어쩌면 하는 짓들이 그 모양이냐? 한놈은 주먹질로 감옥이나 들락거리고 한놈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오발 사고나 저지르고...엥이, 내가 너무 오래 살아서 이꼴저꼴을 다 보느니....."
수미와의 일은 뒤통수가 가려울 만큼 창피한 일이었다. 게다가 캐시콜뱅크 놈들에게 쫒기고 있는 현실은 더욱 창피한 노릇이었다. 진우는 부엌에서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다. 덕배 아버지는 말없이 쌀을 씻어 작은 솥에 앉혀 불을 지폈다. 매케한 연기가 부엌을 가득 메우더니 어느 순간 아궁이 속이 밝아지고 불이 새차게 타올랐다. 그러자 가득찼던 부엌의 연기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별의별 시련을 다 겪게 마련이니라. 하지만 그 시련을 이겨내는 것 또한 사람의 몫이니 어쩌겠냐? 견뎌내야지. 진우 너도 견디거라."
"예. 아버님 말씀대로 견뎌는 보겠습니다만..."
"견뎌는 보는데?"
"빚쟁이가 그냥 빚쟁이가 아니라서...거의 원금의 두배를 갚았습니다만 아직 원금이 남았다니...저로서는 어찌 해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얘기도 들었다. 엉터리없는 놈들 돈을 썼다며? 그놈들이 바로 벌통을 도륙내는 장수 말벌 같은 놈인 거라. 벌이 죽자고 모아놓은 꿀을 날로 먹으려는 놈 말이다. 허니 그냥두면 벌도 꿀도 끝장이 나고 만다. 진우 너는 하나로 유혹해서 백을 뺏는 그놈들 돈은 더 이상 갚을 필요가 없다. 낮에 덕배한테서 전화가 왔더라. 네 돈을 대신 갚아줘야겠다고....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니라. 그만큼 갚았으면 됐지 뭘 더 갚아? 어쨋든 너는 걱정말고 당분간 여기 있으면서 생각을 해 보거라. 무슨 수가 생기겠지."
저녁을 먹은 후였다. 시난고난 하는 덕배 엄마는 위성 안테나로 보는 연속극에 빠져 있고 덕배 아버지는 옆에서 칼로 무엇을 다듬고 있었다. 무료해진 진우는 밖으로 나와 평상에 벌렁 드러누워 하늘을 보았다. 산골의 청명한 밤하늘엔 많은 별들이 눈을 반짝이며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우는 규폐로 쿨럭거리던 아버지와 새엄마라던 여자들 그리고 순복이를 생각했다. 다음은 당연히 수미가 떠올라 진우는 애써 생각 밖으로 그녀를 밀어냈다. 기차에서 줏은 탄약과 죽은 용수도 생각났다. 그리고 어쩌다 이런 곳까지 와서 누워 있는 자신의 생각에 이르자 새삼스레 초조함과 절망감이 온 몸을 조여 왔다.
"밤이라 밖은 추울 거구만 왜 나와 있느냐?"
기척도 없이 나타난 덕배 아버지를 본 진우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평상에 걸쳐 앉은 덕배 아버지는 물끄러미 진우를 돌아보았다.
"아, 예. 괜찮습니다. 오히려 시원한데요?"
"허허 이것저것 걱정이 많아 잠이 안 오는 모양이구나.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니라. 너는 아직 젊은데다 심성이 곧으니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다. 오히려 내 눈에는 덕배가 하는 일이 더 위태로워 보인다. 그놈은 하는 짓마다 주먹으로 돈을 벌 생각을 하는데 그런 돈이 오래 가겠나? 허허. 참."
"그럴리가 있습니까? 덕배 말을 들어보니 합법적인 사업을 하고 있던데요? 성격도 옛날보다 많이 신중해진 것 같구요."
"허, 그놈은 자나 깨나 떼돈 벌 생각만 하는 놈인데 합법으로 떼돈을 버는 방법도 있다더냐? 그런 방법이 있다면 복권이나 노름 밖에 더 있나 말이다. 복권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니 빼고, 노름이라면 일확천금을 노릴만 하겠지. 허지만 노름으로 번 돈으로 잘 사는 사람은 없느니라."
"노름도 복권 같은 요행수가 아닙니까? 노력으로 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허, 그건 그렇지 않다. 노름은 복권보다 이길 확율이 높고 이기는 기술을 배울 수도 있니라. 허기야 십년을 배워도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끝이다마는.... 노름의 최종 기술은 참을성과 끈기니라. 거기다가 욕심을 누를 줄 아는 힘까지 있어야 하느니."
"글쎄요. 제가 알기로는 강원랜드에서 전 재산을 잃었다는 기사는 여러번 봤습니다만 돈을 왕창 땄다는 사람은 없는 걸로 아는데요? 아, 참. 잭팟이 터져 큰돈을 땃다는 기사는 본 적이 있습니다."
"잭팟이야 복권 같은 요행수지 큰 기술이 필요 하겠나? 아, 잊고 있었구나.."
별안간 덕배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97세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몸놀림에 진우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세상에 어떤 노인네가 저 연세에 저렇 듯 정정할 수 있을까? 며칠 동안 지내보니 덕배 아버지의 정신과 육체는 젊은 진우와 전혀 다를 바 없었다. 특히 정신면에서는 기억력과 사고력, 그리고 판단력이 진우 자신보다 나아보였다. 참으로 놀라운 노인네였다. 부엌에서 나온 노인의 손에는 김이 무럭무럭나는 옥수수가 담긴 바가지가 쥐여 있었다.
"너 줄려고 이걸 쪄 놓고 깜박했구나. 늙으면 죽어야 된다는 옛말이 맞는 말이라. 허허."
"아니? 강냉이가 날 철이 한참 지나지 않았습니까?"
"늦강냉이를 먹으려고 일부러 한 달 늦게 심었지. 구수할 게다 식기 전에 먹어라."
바가지를 진우 앞으로 밀어 놓으며 노인은 평상에 올라앉았다.
"어머님께 좀 갖다드리고 먹겠습니다. 아버님께서도 드시지요."
"아니다. 저 사람은 이가 시원찮아 안 먹는다. 너나 어서 먹어라."
일어나려는 진우를 급히 손사래로 막은 덕배 아버지였다. 할 수 없이 진우는 주저 앉아 옥수수를 집어들었다. 말랑말랑하면서도 달콤한 찰강냉이는 어릴 때 먹던 그 맛 그대로였다.
"십 수 년 만에 먹어보는 맛입니다. 정말 맛 있습니다."
"그렇겠지. 머리는 쉽게 잊어도 입은 옛날을 잘 기억해 두니라. 허허."
노인이 손가락으로 몇 알씩 뜯어 입에 넣는 동안 진우는 벌써 두 번째 옥수수를 집어 들었다. 참으로 잊고 있던 맛을 씹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진우 너의 아버지 산소는 철암에 있지?"
옥수수에 정신이 팔려 있는 진우에게 느닷없이 묻는 노인의 말이었다.
"아, 예."
"허 그 사람 죽은지도 꽤 여러 해가 되었구나. 살아서는 고생 고생하더니만....쯧"
"..................."
"그러고 보면 진우 너도 애미도 없이 고생스럽게 자랐구나. 다 커서도 장가도 못가고 쫓겨 다니고...허허. 하기야 환갑이 넘어 살림을 차린 나 같은 사람도 있다만..."
"아버님은 어째서 결혼이 그렇게 늦으셨는지요? 어릴 때 애들이 덕배를 막 놀려댔었지요. 아버님이 할아버지 같다고요."
"허허 그랬겠지. 산다는 게 뭔지. 내 살아 온 날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이였느니. 이게 다 배우지 못한 소치로 막 살아 왔기 때문이니라. 그래서 덕배나 좀 가르쳐 볼까 했더니 그놈도 저 꼴인 거라...내가 어째서 혼인이 늦었느냐고 물었지? 늦은게 아니라 다른 것에 미쳐서 혼인을 못한 거지 안 한 것이 아니야. 한 때는 노름에 미쳤다가 다음엔 사냥질에 미쳤다가 나중에는 금광에 미쳐 돌아다녔었지. 아까운 젊음을 다 보내고 환갑이 되어서야 겨우 정신이 들더구나. 그나마 덕배 엄마를 얻고나서 였지. 허허 내 지난 얘기를 들려주랴? 그래. 이제껏 백 살에 가깝도록 누구에게도 안 한 얘기를 네게 들려주마. 덕배도 내가 어떻게 살아 온 사람인지 모른다. 허기야 그놈은 알려고도 않는 놈이다만… 진우 너는 내 얘기를 듣고 힘을 내어서 네 앞에 놓인 난관을 헤쳐보거라.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니라."
노인이 담담하게 자신의 과거를 진우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진우는 빈 옥수수대를 놓고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노인의 이야기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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