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설

파투(破鬪) 4. 한밤의 피신

fiction-google 2024. 3. 9.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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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결국 덕배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덕배가 경영한다는 호텔에서였다. 호텔은 깨끗하고 시설도 좋았다. 다만 객실 수나 규모면에서는 호텔이라기보다 모텔 급이래야 옳았다. 진우의 이야기를 들은 덕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갈 곳이 없더라. 도대체 태백 말고는그놈들을 피해 갈 곳이 없더란 말이다."

진우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 앞에서 못난 꼴을 보이는 자신이 한심했다. 사내가 오죽 못났으면 여자에게 홀랑 털린단 말인가? 게다가 강도 같은 놈들에게 쫓겨 막다른 곳으로 도망까지 친 것이다.

"생각보다 심각하구나."

말을 듣는 동안 덕배는 줄곧 미간을 찌푸리고 아랫입술을 지긋이 물고 있었다.

"진우 네가 처한 상황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단 말이다. 허나, 너무 걱정 마라."

"나도 알아. 하지만 없어진 돈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놈들의 돈은 갚아야지. 아무리 지독한 놈들이라 해도 갚겠다는 데야 어쩌겠냐?"

"네가 그놈들을 너무 쉽게 보는구나. 놈들을 몰라서 하는 소리지 앞으로 어쩌고는 없어. 무조건 지금 당장이야. 앞으로 벌어서 갚겠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단 말이다."

"허긴 신체 포기 하라는 소리도 듣긴 했다만..."

"대부업체 이름이 뭐였냐? 간판 말이다. 간판은 걸고 할 것 아니냐?"

"캐쉬콜뱅크라 하더군."

"? 캐쉬콜뱅크? , 이거 조졌네."

갑자기 덕배가 낭패한 얼굴로 진우를 바라보았다.

"? 너도 아는 곳이냐?"

대답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덕배가 문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핸드폰 벨이 울린 것이다.

"카지노? 누구누구? 알았다. 지금 사무실로 오너라."

덕배의 턱살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아무일도 아니란 듯 진우를 돌아보았다.

"넌 쉬어라. 난 가서 알아볼 게 있다. 내일 아침에 오마."

성큼 문을 나서는 덕배의 등을 바라보며 진우는 어떤 불안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쉴 틈없이 오는 전화의 분위기로 볼 때 덕배 자신도 무슨 문제에 부딧친 것 같았다. 그런 그에게 진우 자신의 문제까지 걱정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캐쉬콜뱅크라는 한마디에 덕배가 보인 반응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놈들이 그렇게 악랄할까?    하지만 이제와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자와 원금은 이 시간에도 계속 불어날 것이다. 하지만 갚을 능력은 진작 사라져버렸으니 걱정만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 미치겠네. 수미 그년을 그냥...'

진우는 침대에 풀썩 몸을 던졌다.

                                                                         

"나오셨습니까. 사장님."

사무실 문을 열고 덕배가 들어서자 칠수와 만기가 일제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구본웅이 오면 들여보내라. 그다음은 알지?"

", 사장님, 철저히 지키겠습니다."

사무실 옆에 딸린 작은 방으로 들어선 덕배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회장님, 성회장 아들이랍니다. , 신동규 그놈 맞습니다. , 그렇게 하겠습니다."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덕배가 탁자 위에 핸드폰을 거칠게 놓았다. 놈들의 꿍꿍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은 놈들의 감시를 맡긴 구본웅의 말을 들어 본 다음 결정할 문제였다.

"형님, 다녀왔습니다."

잠시 후, 덕배의 방에 구본웅이 나타나 깊숙히 허리를 굽혔다.

", 수고했다. 앉아라."

덕배는 탁자 위의 담배를 집어 구본웅에게 불쑥 내밀었다. 멈칫하던 구본웅이 덕배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본 후 한 개비를 뽑아 들었다. 덕배 역시 담배를 뽑아 불을 댕기더니 라이터를 구본웅의 앞으로 밀어 놓았다.

"이따가 피겠습니다. 형님."

"그냥 피워."

구본웅이 마지못해 불을 붙였다. 이어서 두어 번 뻐끔거리던 담배를 가만히 재떨이에 내려놓았다.

"형님, 성회장 아들부터 말씀 올릴까요?"

"아니, 처음부터, 그러니까 그놈이 만난 것이 누구라는 것부터 말해."

", 형님. 어제 아침차로 올라간 놈은 순태 혼자였습니다. 형님께서도 순태놈은 아시지요?"

"콧대 휜 그놈 말이지? 알지. 그런데?"

", 청량리에 내리자말자 기다리던 놈이 순태를 검은 승용차로 데려갔습니다."

"차로?"

", 잠시 후에 순태가 나왔는데 쇼핑백 하나를 들었더군요. 이놈이 역으로 다시 가서 열차 시각표를 보더니 전화를 하더군요. 어차피 순태는 제가 누군줄 모를 테니 아예 옆에서 들었습니다. 순태가 쇼핑백에서 작은 가방 하나를 꺼내서 이리저리 보더니 어, 받았어, 작아. 아니 무거워. 이러더군요."

"가방 크기가 어느정도야?"

", . 여행용 세면도구 가방 있잖습니까. 그 정도 입니다."

"그래? 내용물은 모르고?"

", 그때는 몰랐습니다. 아까 카지노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 카지노? 그속에 뭐가 들었더냐?"

"신동규가 그 부장검사에게 준 것은 돈이 분명합니다. 검사가 그 가방을 들고 곧장 바카라 테이블로 가서 앉았으니까요."

"돈을 꺼내더냐?"

"부장검사와 헤어진 신동규가 어디로 전화를 하더니 죽일 듯이 욕을 하기에...무슨 일인가 엿듣느라…미쳐 보지 못했습니다."

구본웅의 말을 듣던 덕배가 고개를 몇 번 옆으로 흔들었다. 이야기의 정리가 되지 않는 것이다. 세면도구 가방에 돈을 넣어봤자, 오륙천만 원 정도 일 것이다. 그걸 마련하려 서울까지 심부름을 시킬리가 없었다. 전화 한 통이면 은행이던 카드던 액수와 관계없이 쓸 수 있는 신동규가 그깟 돈으로 윤치우 부장검사를 매수하려고 하진 않았을 거였다.    윤치우 검사가 바카라에 빠진 것은 알지만 이번 일은 카지노에 놀러온 것만은 아닐 것이었다.

"돈이 들었다는 그 가방이 순태가 서울서 받았다는 가방이 확실하냐?"   

", 확실합니다. 순태가 가져온 그 가방을 오정철이가 오늘 낮에 신동규에게 주는 걸 봤습니다."

"어디서? 카지노에서?"

"아닙니다. 카지노는 밤에 갔고 낮에는 매봉산에서 사격을 했습니다."

"사격? 갑자기 웬 사격이야? 매봉산에 사격장 생겼냐?"

"정식 사격장이 아니고 임시 사격장인데 표적 날리는 기계도 두 대가 있답니다."

"그건 그렇고 가방을 매봉산에서 주는 것을 봤다는 얘기냐?"

"아닙니다. 매봉산 삼수령고개 주차장에서 주고받았습니다. 저는 거기서 차를 돌려 내려 왔습니다."

"가방은 거기서 주었다치고 신동규가 화를 내며 통화한 내용의 골자가 뭐더냐?"

"그게 이상합니다. 네놈들이 바꿔치기 했다고 욕을하고 화를 내고 생 난리를 치더군요. 그러더니 총알을 오늘 내로 찾아내라고 몇 번을..."

", 잠깐, 총알? 무슨 총알?"

"엽총 총알이 분명합니다. 사실 새벽 기차로 내려 올 때부터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원 무슨 소린지. 기찻간에서 어찌 됐다구?"

", 기차에서도 저는 순태만 살폈는데 원주 쯤인가에서 이놈이 가방을 꺼내 열더니 종이를 찟고 무엇을 하나 꺼내들더군요."

"그게 뭔지는 모르고?"

", 뭔지 작았습니다, 헌데 나중에 알고보니 엽총탄이 분명했습니다."

"못 봤다며?"

", 그게 어찌 된 일인가 하면 말입니다..."

구본웅은 자기가 본 것을 그대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순태가 열차 화장실로 들어가기에 밖에서 담배를 피는 척하며 기다렸지요. 그런데 순태가 나오자 말자 웬 젊은 사람이 들어갔습니다. 사실은 순태 다음에 내가 들어가 보려 했거든요. 할 수 없이 저는 그 사람이 나온 다음에야 들어가 보았습니다. 별 이상한 점이 없기에 다시 순태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찾는지 순태가 자기 주머니와 의자 밑을 더듬고 있더군요. 의자 밑 뿐아니라 온 통로를 미친 듯이 왔다갔다 하더니 다시 화장실로 가더군요. 화장실에서 무얼 빠뜨린게 분명합니다."

"그럼 그놈이 찾는 게 엽총 총알이었단 말이냐? "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화가 잔뜩 난 순태가 자기 다음에 화장실에 들어간 사람을 찾아 갔거든요."

"그래서?"

"저도 슬그머니 따라가 빈 의자에 앉아서 봤습니다. 그 사람보고 뭐라뭐라하니까    갑자기 그 사람이, 아니 엽총 총알이 왜 화장실에 라고 큰 소리로 말을 했습니다. 순태가 화를내며 그 사람 몸수색까지 하더군요. 나오는 게 없었는지 순태가 물러나더군요. 자리로 다시 돌아간 순태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습니다. 태백에 도착할 때까지요. 역전에서 오정철 패거리와 한참을 쑤군대다가 차를 타고 떠나는 것까지만 봤습니다. 민출이란 놈이 차를 늦게 갖다대는 통에 놈들을 놓쳤거든요."

"그럼 매봉산에서 그 가방을 준 건 어떻게 알았어? 놈들을 놓쳤다며?"

", 그건 민출이와 내가 새벽에 영업하는 식당과 모텔을 다 훑었거든요. 결국 시장통 해장국집 앞에 놈들의 차가 있었습니다. 헌데 말입니다 형님, 거기서 기차에서 본 사람을 또 봤거던요? 용수하고 무슨 얘기를 하는데요? 서로 아는 사이 같았습니다."

"뭐라고? 용수하고? 기차에서 본 사람이 확실하냐?"

"그럼요. 둘이서 식당 문 앞에서 얘기하던데요?"

덕배는 구본웅의 말을 듣고보니 무엇인가 집히는 구석이 있었다. 구본웅이 기차에서 본 사람이 용수를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이진우일 것이었다.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진우가 캐쉬콜뱅크에 이어 또 다른 일에 연루가 된 것이다. 진우의 행방은 용수가 알고 있으니 어쩌면 이번 일이 덕배 자신과 연결이 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된다면 더욱 큰일이었다. 오정철 패거리도 결국 캐쉬콜뱅크에 딸린 조폭 꼭지파의 하부조직 아닌가? 요즈음 들어 놈들의 행동이 수상했다. 몇 달 전부터 신회장의 아들인 신동규가 내려와 설치고 다니는 걸 보면 사북과 태백 일대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모텔이나 술집 따위의 업소를 사들이고는 있으나 그까짓 시시한 사업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닐 터였다. 덕배는 그것이 무슨 일인가를 알기 위해 모든 정보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어제 윤치우 부장검사가 내려오자 신동규는 순태를 급히 서울로 심부름을 보냈다. 이 정보를 받은 덕배는 구본웅을 시켜 순태를 미행케 한 것이다. 그런데 순태가 가지고 내려온 것이 기껏 엽총 탄약이라니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그나마 탄약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거기선 무슨 소리는 못 들었냐?"

"? 용수랑 그 사람이 하는 얘기 말입니까? 차 속에 있어서 못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정철을 계속 따라다녔다는 말이냐?"

", 오정철이 택시로 강원랜드 호텔에 가더니 신사장 차를 몰더군요. 그리고 다시 매봉산으로 간 것입니다. 제가 본 것은 거기까집니다. 형님."

"알았다. 가서 눈 좀 붙여라. 그리고 계속 얼굴 알리지 않아야 되는 것 알지?"

"물론 입니다. 형님."

구본웅이 나가자 덕배는 슬그머니 사무실 뒷문을 통해 계단을 내려왔다. 얼마 떨어진 동네 수퍼 옆에 공중전화가 있었다. 동전을 넣고 다이알을 돌리자 신호음이 울렸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자 덕배는 수화기를 놓고 천천히 사무실로 돌아왔다. 십여 분 후에 덕배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표시가 없었다. 용수였다.

"그러지 않아도 전화 때릴려 했었다. 진우하고 같이 있냐?"

"그것보다 엽총 탄약에 대해 말 해."

"아니 덕배 네가 어떻게?"

"시끄러 빨리 말 해."

"그것 때문에 전화하려 했다니까. 공중전화니까 빨리 말할 게. 윤검사에게 줄 선물로 준비한 탄약인데 순태가 기차에서 한 발을 잃어버렸어. 잃어버린 그 총알 속에 ...놀래지마라. 그 속에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었데. 돈으로 치면 5억이 넘는다더라. . 지금 신사장이 펄펄 뛰고 지랄지랄해서 우리 모두 죽게 생겼다. 그렇게만 알아라. 길게 얘기 못한다. 들어가 봐야 돼. 전화 하지 마. 내가 연락할게. 끊는다."

용수와의 통화를 마친 덕배는 구본웅과 용수의 말을 종합해 보았다. 그리고나서 자신과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짐작했다. 우선 신사장이 노리는 것은 카지노를 둘러싸고 생기는 금융거래의 독점이 확실했다. 이것은 이미 서울의 보스가 덕배에게 대강이나마 정보와 지침을 알려왔었다. 윤검사가 신사장과 모종의 거래를 위해 이곳으로 온다는 정보도 받았었다. 덕배에게 주어진 지시는 하나였다. 윤검사에게 건내는 뇌물이 무엇인지 물증을 확보하라는 것이었다. 그것만 알아내어 보스에게 올리면 끝나는 일이다. 그래서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구본웅으로 하여금 순태를 미행케 한 것이었다. 물론 용수의 귀뜸으로 안 일이었다. 그런데 신회장이 내려보낸 뇌물이 엽총 탄환이며 그 속에 5억 원 상당의 다이아몬드가 들었단다. 헌데 그 다이아가 든 탄환을 순태가 열차 화장실에서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구본웅의 말에 의하면 순태 다음에 화장실을 쓴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순태가 조사를 했으나 탄약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 사람이 용수와 아는 것으로보아 이진우가 틀림없다. 조금 전 용수도 진우가 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순태 다음에 화장실을 썼다면 진우가 탄약을 정말 갖지 않았을까? 탄약을 정말 갖고 있다면 궁지에 몰린 진우를 단숨에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모든 것을 알아낸 덕배 자신은 또 한번 보스의 신임을 받을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신사장과 겨루어 볼만한 지원이 보스로부터 내려오리라. 사북 일대를 장악할 수만 있다면? 덕배의 가슴이 뛰었다. 오정철패는 지금쯤 탄환을 찾기위해 눈이 뒤집혔을 것이다. 열차는 진작 떠나고 없으니 찾을 곳은? 아차, 이진우가 있었다. 보나마나 놈들은 진우를 의심하고 있을 거였다. 놈들이 진우를 납치라도 한다면 큰일 아닌가? 덕배는 진우가 묵고 있는 호텔로 향했다.

"아니? 지금? 지금이 몇 신데?"

"잔말말고 옷부터 입어. 시간 없단 말이다."

덕배는 작정한 듯 자고 있던 진우를 깨워 옷 입기를 재촉을 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코란도에 태워 조용히 사북 읍내를 벗어났다. 코란도는 영월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라이트 빛에 반사된 도로가 무섭게 빠른 속력으로 다가올 뿐 밖은 어두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진우에게는 낯선 곳이었다.

"한밤중에 무슨 일이냐?"

진우의 물음에 덕배는 대답이 없었다. 어젯밤부터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한 진우는 지쳐 있었다. 그러나 막 잠이 든 사람을 깨울 때는 무슨 일이 있을 것이었다. 덕배의 표정으로 봐서는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불안했다. 라디오에 붙은 시계를 보니 am    15분이었다. 덕배는 창 밖의 백미러를 계속 살피고 있었다. 덕배의 동작을 따라 진우 역시 오른 쪽 창밖의 백미러를 보았다. 짐승의 눈알 같은 두 개의 불빛이 보였다. 덕배가 차의 속력을 높혔다. 진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뒷차의 불빛이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뒷차의 불빛이 코란도의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다시 뒤에 붙은 것이다.

"어라?"

백미러를 힐끔거리던 덕배가 악셀에서 서서히 발을 떼는 듯 차의 속력이 줄었다. 그러자 뒷차 역시 속력을 줄여 그 간격 그대로를 유지했다. 덕배는 더욱 속도를 줄였다. 그래도 뒷차는 추월하지 않고 간격을 두었다.

"야아, 놈들 행동 빠르네. 어찌 알았지?"

덕배의 빈정거림이 섞인 감탄이었다.

"뒷차가 지금 우리를 따라온다고?"

"아직은 몰라. 좀 있으면 알겠지."

"설마, 캐쉬콜 놈들은 아니겠지?"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아닐거다. 이 차를 미행하는 거라면 저 차엔 보나마나 오정철 패가 타고 있을 게다."

"? 오정철? 용수네 행동대장이라는 그 자?"

"맞아. 네가 기차에서 다툰 놈도 오정철이 패지."

"그러지 않아도 해장국 집에서 그 패들과 만났었지. 용수가 그 패들과 함께 있더군."

"용수는 십 년 전에 그 패에 들어갔어. 헌데도 아직 한 구역도 물려받지 못하고 그 꼴이지 뭐냐? 나한테 오래도 오지도 않고.."

"그런데 내가 기차에서 순태라는 덩치를 만난 건 네가 어찌 아냐? 용수가 알려주더냐?"

"? , 용수 아니면 누구겠냐? 헌데 기차에선 순태가 뭣 때문에 네 몸수색까지 하고 야단을 떨었냐?"

"으음, 그건..."

갑자기 진우는 이상한 느낌이 닿았다. 기차에서 순태가 몸수색한 것은 또 어떻게 알까? 설마 그런 것까지 용수가 말했을까? 만약 그렇더라도 탄약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을리 없었다. 정보 한번 빠르고 정확하다 싶었다. 그 탄약이 뭐 길래 이렇듯 난리를 피울까? 이제 곧 탄약 얘기도 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가?

", 순태라는 그 덩치가 뭘 잃어버린 걸 내가 줍지 않았냐고 묻더군. 하지만 그게 뭔지 보지도 못한 걸 어떻게 내놔? 나 참 어이가 없더구만."

"용수 말로는 그게 엽총 탄약이라던데, 너 정말 못 봤냐?"

아니나 다를까 뭣 때문에 순태가 몸수색까지 했느냐고 묻더니 탄약 때문이라는 정답도 알고 있었구나. 부랄 친구마져 이런 식이라니? 십여 년 못 본 사이 이녀석이 변한 걸까? 진우는 실망과 함께 더욱 탄약에 얽힌 사연이 궁금했다. 그렇다면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리라.

"바로 그거야. 그놈의 탄환이 도대체 뭐 길래 어젯밤부터 이 시간까지 사람을 못살게 구는지 모르겠다. , 나대신 네가 생각 좀 해봐라. 그 탄약이 도대체 뭘까? 그걸로 어떤 놈을 죽이려는 걸까? 아니면 살인 사건의 증거품이라도 되는 걸까?"

"글쎄 난들 알 수 있냐? 어쨋든 그 탄약을 찾는다고 오정철이 패가 설치나 보더라. 저 뒷차가 나보다 널 미행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곧 알게 되겠지. 조금 더 가면 석항 인터체인지다. 이제 곧 다 와 간다. , 꽉 잡고 있어라."

갑작스런 가속으로 바퀴가 찟어질 듯한 소리를 내며 차가 돌진했다. 탄력에 가속이 붙은 차의 속도계는 바늘이 160km를 넘었다. 어둠이 짙은 창밖의 이곳이 어디쯤인지 진우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덕배에겐 너무나 익숙한 길인 듯했다. 속도계가180km에 이르자 차체가 부르르 떨렸다. 뒤를 돌아보니 뒷차는 결사적으로 따라붙고 있었다. 그 순간 차가 달리던 주도로에서 오른쪽길로 살짝 벗어나버렸다. 덕배가 순식간에 인터체인지로 빠진 것이다. 그러자 미쳐 생각 못하고 바짝 붙었던 뒷차는 관성을 유지한 채 주도로를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덕배는 속력을 약간 줄여 다시 한 번 왼쪽으로 급히 핸들을 꺾었다. 이어서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 차는 옛날의 구도로 위로 올라섰다. 진우는 창밖으로 뒷차의 불빛을 돌아보았다. 미행하던 차는 38번 국도와 31번 국도가 만나는 지점에서 방향을 돌리고 있었다. 불법으로 중앙선을 넘어 하행선으로 갈아타려는 듯했다.

"저놈들이 우리를 따라오는게 확실하네."

덕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진우를 돌아봤다.

"이게 무슨 소동인지 참 어이가 없구나. 그깟 총알이 뭐라고...에이.."

"글쎄 총알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너를 노리는 것은 틀림 없어. 좌우간 진우 네게 없는 건 확실한 거지?"

"너까지 왜 이러냐? 나는 캐쉬콜뱅크 만으로도 죽을 지경이구먼."

"가만...저놈들이..."

멀리 뒷쪽에서 불빛이 보였다. 뒷차 역시 구도로에 들어선 모양이었다.

"해보자 이거지? 좋아, 그럼 해보자."

코란도는 다시 속력을 높히기 시작했다. 31번 도로와 달리 구도로는 영월에 이르기까지 사뭇 구절양장의 꼬불꼬불한 커브길이었다.

"너무 달리는 거 아니냐? 뒷차가 보이지도 않는데?"

"일단 놈들을 떼놓고 봐야지. 언제 또 붙을지 모르잖아?"

"이러다 영월까지 가겠다야."

"여기가 연하니까 영월에 거의 다 온거나 마찬가지야. 여기서 승부수를 던져보자. 놈들이 어디로 빠지나."

덕배가 핸들을 꺾어 좌측의 샛길로 빠졌다. 왼쪽에는 커다란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 이거 남의 집 안에 들어온 것 아니냐?"

"남의 집? 누구 집이 저렇게 크냐? 여긴 병원이야. 노인전문병원."

덕배는 건물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시동을 꺼버렸다. 주차장 옆에도 집이 두 채가 있었으나 불빛 한 점 없이 캄캄했다.

"여기서 놈들의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자. 놈들이 우리를 따라온다면 영월로 가거나 38번 국도를 탈 수밖에 없을 거니까."

"그런데 놈들을 따돌린 다음에 우리가 갈 곳이 도대체 어디냐?"

자는 사람을 깨워 길을 재촉할 때부터 묻고 싶던 말이었다.

", 아무래도 너는 당분간 숨어 있는 게 좋겠더라. 우리 아버지한테 가 있어라. 거긴 아무도 모른다. 진짜 산속이거든. 그 곳은 노친네가 십수 년 전에 마련해 둔 거라더라. 나도 모르고 있었지 뭐냐. 내가 두 번째로 감방 갔을 때 아무도 몰래 그리로 이사를 하신 모양이더라."

"맞아, 너의 부모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아무도 몰랐었지. 나에게도 아르켜 주시지 않고 떠나셨으니까."

"챙피하셨던 거라. 진우 너는 대학생인데 아들은 감옥만 들락거리니...왜 챙피하시지 않았겟냐.? 사실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집 노친네들은 내가 이러고 사는 걸 영 못마땅하게 여기신다. 아직도 나는 그늘진 곳에서 밥을 먹고 있잖냐?"

"너는 네 개인 사업을 하는 게 아니었냐? 용수가 그러던데 너는 사업으로 돈 좀 벌었다며?"

", 그 게 다 뒷배를 봐주는 조직이 있다는 얘기지. 그렇지 않다면 이곳에서 나 혼자 무슨 수로 돈을 만지냐? 이익도 나 혼자 먹는 게 아니야. 절반은 올려보내야 해. 물론 옛날 같은 잔챙이 시절은 졸업했지만 아직 멀었다. 그래서 한건 하려고 하는 찰라에 신사장패가 내려 온 거지 뭐냐. 윤부장검사가 그놈 뒤만 봐주지 않아도 자신 있는 데 말이다."

미행하던 차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방향인 영월 쪽에서 디젤 배기음을 요란하게 뿜으며 트럭 두 대가 지나갔을 뿐이었다. 25톤 무연탄 수송차였다.

"신사장은 뭐고 부장검사란 또 뭐냐?"

"신사장이란 자는 캐쉬콜뱅크의 신회장 아들이지. 윤검사는 신회장과 가까운 사이라더라. 헌데 우리 쪽 정보에 의하면 이번에 캐쉬콜뱅크에 문제가 생겼나봐. 그래서 신회장이 아들을 시켜 윤검사를 뇌물로 매수하려고 카지노로 불러 내렸다더군. 윤검사가 좋아하는 바카라에 밑천을 대겠지. 따던 잃던 따로 준비한 뇌물도 줄테고 말이야.    헌데 신사장 이놈이 문제란 말이다. 이놈이 내가하려는 사업을 제가 먹으려고 하거든. 윤검사를 굳이 오게한 것도 뇌물과 함께 은근히 내게 겁을 주자는 수작이 뻔해."

"네가 새로 하려는 사업이란 무슨 사업인데? 신사장이란 자가 눈독을 들일만큼 이권이 큰가보지?"

"이권? 이권이라기보다 우선 매출의 액수가 크지. 연 매출로 보면 몇 천 억 단위니까. 너 전당포 알지."

"전당포 모르는 사람있냐?"

"그래. 그 전당포. 여기선 전당사라고 하지. 전당포보다 전당사가 규모도 커보이고 회사 처럼 듣기도 좋잖아. 내가 그 전당사 사업을 본격적으로 한 번 하려는 거야."

"낮에 보니까 너 아니래도 맨 전당포, 아니 전당사 간판이 사북 읍내를 덮었더구만. 뒤늦게 전당포 차려서 돈을 번다구? 난 이해를 못하겠다."

"전당사는 지금도 두 군데 하고 있어. 헌데 진짜 내가 하려는 건 그런게 아니야."

덕배의 말은 이러했다. 사북 일대에는 카지노를 둘러싸고 수많은 전당사가 난립해 있는데 거의가 개인 사업자였다. 유가 증권이나 카드깡도 하지만 주로 자동차나 귀금속을 담보로 하는 고리대금업이었다. 이들이 재미를 본다는 소문이나자 큰손인 조직이 덤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직엔 막강한 자금력이 있다. 만약 이 자금을 엄청나게 낮은 이율로 대출을 한다면 개인 사업자가 당할 수 없다. 전당포란 남의 돈을 빌려서 다시 빌려주는 영세업자들의 장사였다. 자본이 부족한 개인 전당사가 다 쓰러지면 다시 고리로 올리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십 개의 전당사를 혼자하는 셈이 되니 수지맞는 장사인 것이다. 신사장이란 자가 시작하려는 사업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반면에 덕배가 구상한 사업이란 이랬다. 수십 개의 전당사를 묶어 하나의 회사로 만들어 투자금과 실적에 따라 이익을 배분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본이 커지고 사업자 개인은 조직에 속하므로 외부 조직이 쉽게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개인 사업자 또한 안심하고 사업을 지속할 수 있다.    게다가 충분한 자본을 뒷받침 할 조직도 있었다. 덕배와 조직은 자본을 연합한 전당사에 빌려주는 것만도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미 신사장이란 자와 싸움이 시작되었네?"

"그동안 전당사들을 설득해서 간신히 묶어는 놨는데 신사장이란 놈이 내려와 설치니 골치가 아픈거라. 놈들의 조직이 워낙 막강해서 말이다."

"대출업 말고는 뭐 할만한 사업이 없는거냐?"

"왜 없겠냐? 이건 아무도 모르는 건데 너만 알아라. 이곳은 전국의 노름꾼이 다 몰려드는 곳 아니냐? 나도 이제 도박 사업을 할 거다. 그 방면에 전문가 놈을 감방 있을 때 사귀어놨거던. 이놈이 물건이라. 그놈이 지난 해 깜방에 또 들어갔다더니 얼마 전에 출소했다고 전화 왔더라. 여기서 크게 한판 벌리자고 연락했다. 대출업도 크지만 이거 한방만 터지면 나도 게임 끝이다."

그동안 20여 분이 지났건만 미행하던 차의 불빛은 지나가지 않았다. 이제까지 오지않을 리가 없었다. 아마도 미행을 포기한 모양이었다.

"놈들이 우릴 놓쳐서 김이 샛거나 연하 교차로에서 31번 도로 위로 올라섰거나 둘 중 하나 같다. 그렇다면 우리도 갈 길을 갈까?"

덕배는 의자를 당겨 바로 앉았다. 그리고 시동을 거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싸이렌 소리가 들리는 듯 하더니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곧 이어 찟어질 듯한 싸이렌 소리와 함께 경광등을 번쩍이며 구급차가 쏜살 같이 지나갔다. 영월 방향에서 오는 구급차였다.

"누구네 노인 하나가 또 가는구나. 저놈의 구급차만 보면 우리집 노친네들이 걱정이라. 거기는 차가 중간 밖에 못 올라가는데 말이다."

"요즘은 왠만한 시골도 차 못 들어가는 곳이 없다더만, 그렇게 산속이냐?"

"중간 정도 올라가는 것도 몇 년 안되지. 농삼물을 실어내리려고 만든 길이니까. 얼마나 산골인지 산돼지 고라니는 말할 것도 없이 곰과 산양도 있다더라. , 너 우리 아버지 엽총 알지?"

", 알다 뿐이냐? 그 고물 엽총에 혼 난 생각해봐라."

"허헛, 맞아. 그 고물을 아직도 갖고 계신 눈치더라. 백세 노인이 말이다."

"쏘실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겠지. 좌우간 건강은 하신 게로군."

"내가 말했잖냐. 우리 어머이보다 더 건강하시다고 말이야."

차를 출발시키며 덕배가 히죽 웃었다. 진우는 그런 덕배가 보기 좋았다. 또한 찾아갈 곳이 있는 그가 부럽기도 했다. 덕배는 차를 천천히 몰았다. 뒤따르는 차가 없으니 빨리 달릴 이유가 없었다. 커브 길을 2km 쯤 갔을 때 멀리 고가 도로 밑에 경광등 불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아까 본 구급차가 도로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사고 났나보다. ? 저 트럭은 조금 전에 지나간 25톤 그 차 아니냐?"

"두 대가 다 서있는 걸 보니 트럭끼리 추돌했나보군."

사고 현장에 닿은 덕배가 차를 갓길에 멈춰 세웠다. 길 위에는 트럭 한 대가 오른 쪽으로 틀어져 비스듬히 서 있었다. 또 한 대의 트럭은 그보다 멀리 세워져 있었다. 헌데 구급차 앞에는 부상자인지 시체인지 모를 물체가 셋이 눕혀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길가의 하천 아래에서 여러 사람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하천 바닥에 승용차가 쳐박혀 있다. 길 위에서 하천 까지는 불과 3m 정도였고 물도 얼마 없었다. 하천 건너에는 몇 채의 집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곳 주민들이 놀라서 나온 듯 했다. 트럭 기사인 듯한 사내들이 부서진 가드레일 사이로 줄에 묶인 사람을 끌려 올리고 있었다. 역시 생사를 알 수 없는 축 처진 모습이었다. 구급대원은 방금 올라온 사람을 눕혀 후레쉬로 부상 부위를 찾기 시작했다. 이 곳 저곳을 비추던 불빛이 얼굴에 비칠 때였다.

"!"

자신도 모르게 진우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름은 기억에 없지만 분명히 해장국 집에서 본 얼굴이었다.

"? 아는 얼굴이냐?"

덕배가 진우의 옆구리를 툭 치며 슬그머니 물었다. 진우도 가만히 대답했다.

"용수하고 같이 있던 사람이다."

"뭐야? 그럼 이건 오정철이 패라는 얘기구만. 그렇다면 용수도 여기 있겠구나."

부상을 살피던 구급 대원이 고개를 흔들며 일어났다.

"이 사람은 사망했다. 부상자 둘만 어서 싣자. , 좀 비켜주세요."

덕배와 진우가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구급대원은 트럭 기사들의 도움을 받아 들것을 차에 실었다. 이어서 구급차는 방향을 돌려 싸이렌 소리를 남기며 급히 떠났다. 길가에는 사망한 두 구의 시체가 뉘여 있었다. 덕배가 다가가 죽은 사람의 얼굴에 라이터 불을 켰다. 불빛에 비친 시체는 놀랍게도 용수였다. 그 옆의 시체도 보았다. 유시종이란 놈이었다. 덕배 역시 몇 걸음 물러났다.

"아니? 어찌된 겁니까?"

담배를 연신 빨아대던 트럭 기사에게 덕배가 다가갔다. 덕배를 힐긋 쳐다본 트럭 기사가 땅바닥에 침을 탁 뱉으며 돌아섰다. 꽁초를 발로 비비던 다른 기사가 역시 덕배의 얼굴을 멀건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자기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투로 웅얼거렸다.

"미친놈들이 죽을려고 아예 작정을 했지. 이 좁은 커브 길에 그렇게 빨리 달리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여? 제풀에 내차를 받고 튕겨져 나간거지 별 수 있겠소?"

"앞에 가던 트럭을 받지 않고 어째 뒤에 가는 것을 받았을까요?"

"낸들 알겠소? 앞차에 가려 내차를 미쳐 못 본 건지도 모르지요."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습니다. 재수가 없었군요."

"재수나마나 조사 받으려면 오늘 하루 공치게 생겼수다. 에이 썅."

하천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멀리 길을 돌아 몰려오고 있었다. 이어서 몇 줄기 광선이 밤하늘을 가로지르더니 또 한 번 싸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경찰차와 119 구급차였다. 차에서 내린 경찰은 먼저 후레쉬로 시신들을 비춰 보았다. 덕배와 진우는 슬슬 뒷걸음질로 차에 올랐다. 경찰은 트럭 기사와 무슨 말을 주고받았다. 경찰 한 명은 마을 사람을 상대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경찰 앞에서 손짓 발짓으로 크게 떠들고 있었다. 트럭 기사에게서 들을 만큼 들었는지 경찰이 덕배의 코란도를 향해 오고 있었다. 덕배는 창을 내렸다.

"사고를 목격하셨습니까?"

단도직입으로 경찰이 물었다.

"아니요. 못봤습니다."

"사망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아니요. 모릅니다."

"저 트럭 기사의 말로는 아는 것 같더라던데?"

"그럴리가요. 불빛에 비춰 봤지만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좋습니다. 그러시다면 면허증을 좀 보여주시지요?"

"아니? 사고를 낸 것도 아니고 목격자도 아닌데 면허증은 왜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후의 목격자로 참고 하려는 것 뿐입니다. 주시지요."

면허증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은 수첩에 옮겨 적은 후에 차의 넘버도 적었다.

"빌어먹을 좀 더 일찍 뜰걸."

사고 현장을 벗어나며 덕배가 한 말이었다. 오정철 패의 교통사고에 사후 목격자로 지목되어서 좋을 일이 없는 것이다.

"용수가 그렇게 되다니, 참 어이가 없구나."

덕배를 돌아보며 진우가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릴 때 진우를 못살게 굴던 용수였다. 좀 더 커서는 덕배 덕에 맞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용수란 놈은 싫었다. 그런 용수가 죽었는데 이렇게 마음이 언잖을 줄이야. 생각해보면 용수도 불행한 놈인 것이다.

"이제와 얘기지만 용수는 내게 가장 중요한 정보원이었다. 몸은 꼭지파에 있었지만 마음은 내게 와 있었지. 왜 안 그렇겠냐? 어찌되었든 우리는 부랄 친구 아니냐? 놈들에게 붙어 먹고 살지만 정이 들 수는 없었겠지. 좌우간 불쌍하게 됐다야."

"요즘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

이것 저것 생각하면 할수록 모든 일이 뒤죽박죽으로 얽혀드는 느낌이 들어 진우는 머리를 흔들었다. 어쩌다 내가 이 시간에 이곳에 있을까? 진우는 일이 꼬이기 시작한 때가 언제부터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순복이와 사귄 후부터일까? 수미와 가까워지고 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혼란의 잘못된 첫 단추는 역시 수미가 꿴 것 같았다.

', 끝까지 괴롭히는구나. 빌어먹을...'

얼마 후, 차는 왼쪽으로 돌아 작은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머리 위엔 고가 철교가 길게 놓여져 있고 하천은 희미한 달빛에 바닥을 들어내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자 말자 산길로 이어지는 경사로가 비쳤다.

"여기서 1km쯤 밖에 못 올라간다. 거기다 차를 두고 걸어가야 돼."

", 이 밤중에 들이닥치면 놀라시지 않겠냐?"

"나야 왔다하면 항상 밤인 걸. 일 끝나고 올려니 밤중일 수밖에 없지. 그리고 밤에만 오는 이유가 따로 있다. 이건 우리 노친네 아이디언데 말이다. 우리집 있는 곳을 아무도 모르게 하려는 게 진짜 이유지 뭐냐?"

오를수록 경사가 가팔라 보통의 승용차는 오르지 못할 길이었다. 그러나 사륜구동의 코란도는 굼실굼실 잘도 굴렀다. 길이 좁아 좌우의 빽빽히 들어찬 나뭇가지들이 차창을 긁었다. 덕배는 가속 페달을 밟아 계속 전진했다. 길이 끝나는 듯 라이트가 비추는 곳에 작은 공터가 있었다. 덕배는 간신히 차를 돌려 세웠다.

"진우 너 구두 신고 산을 타겠냐?"

"에베레스트도 아닌 산에 구두면 어때서?"

", 두고봐라. 큰소리치지말고."

산을 오르기 시작해 열 걸음도 걷기 전에 덕배의 말대로 되었다. 이슬이 맺힌 풀잎을 밟은 진우의 구두가 미끄러진 것이다. 반사적으로 두 손은 땅을 짚었으나 한 쪽 무릎을 바닥에 찧고 말았다.

"하하, 거 봐라. 헌데 괜찮냐?"

"에이, 말 떨어지기 무섭게 당하는군. 난 괜찮으니 계속 앞장 서."

후레쉬 불빛도 없이 오르는 산길은 생각보다 열 배는 힘이 들었다. 산 중턱이라고 짐작되는 곳에 이르자 숲이 보이지 않았다. 넓은 밭이었다.

"아니? 이런 산속에 이렇게 넓은 밭이 있다니? 이거 누구네 밭이냐?"

전혀 생각지 못한 광경에 진우가 놀라 물었다.

", 영월초란 말 들어봤냐?"

덕배가 오히려 되물었다.

"영월초? 담배 얘기 아니냐?"

"맞아. 저 밭이 영월초를 심던 담배밭이였다더라. 요즘은 고추밭이고."

"고추? 야 그럼 너의 아버지 밭이냐?"

"거참, 백세 노인이 무슨 농사냐? 꿀벌 몇 통 치고 텃밭에 채소나 조금 심으시는 게 다야. 저 고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저 아래에 서너 집이 모여 살지."

"고추밭이라니까 생각나는데, 고추밭에 숨긴 백억 원 얘기 들어봤냐?"

"언젠가 테레비에서 떠들던 그 얘기? , 그건 고추밭이 아니라 마늘밭이지."

덕배가 뒤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그러나 어둠 속이라 진우는 볼 수 없었다.   

"그러냐? 하여튼 내게 그 돈의 백분의 일만 있어도 이 꼴은 면할 텐데 말이다. 세상 참 알다가도 모를 노릇 아니냐?"

"캐시콜 빚은 너무 걱정 말어. 안 되면 내가 나설 테니까."

거의 삼사십 분을 더 걷고서야 덕배의 걸음이 멈추었다.

"다 왔다. 저 집이다."

덕배가 가르키는 곳에 작은 집이 있었다. 집은 길에서 벗어나 산 밑에 붙어 있었다. 집 주위엔 제법 큰 나무들이 둘러져 있고 마당과 텃밭이 이어진 듯했다.

"어무이, 나 왔어요. 덕배."

덕배가 가볍게 방문을 두드리자 곧 방안이 밝아지며 문이 열렸다. 전깃불이었다.

"어서 들어오너라."

밖을 내다보던 덕배 모친이 아들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흠칫하였다. 방안에서 덕배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 들어가자. 어무이 야는 진우래요. 진우 아시지요?"

"? 진우? 진우가 왔다고?"

놀라듯 반기는 덕배 모친의 음성이 약간 어눌하게 들렸다. 방으로 들어선 진우가 몸을 이르켜 앉은 진우 부친 앞에 넙죽 엎드려 절부터 했다. 노인은 엎드린 진우의 등을 물끄럼이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일어나는 진우의 얼굴을 다시 유심히 처다봤다.

"덕배 아버님, 오랫만에 뵙습니다."

노인의 눈빛이 빛나더니 빙긋히 웃었다.

"이놈, 쉰관이로구나."

노인의 말에 덕배가 크게 웃었다.

"좌우간 우리 아부지 기억력은 따라갈 사람이 없다니까...허허."

"어머님께서도 절을 받으시지요."

". 나는 됐다. 그동안 어찌 지냈니? 서울 있었니?"

덕배 모친은 절을 하려는 진우의 손을 잡아 주저 앉혔다. 덕배 아버지가 손을 저으며 아내를 말렸다.

"지금이 몇 신데 그래? 애들도 자야지. 얘기는 날 밝으면 듣기로하고 너희들은 윗방에서 어서 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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