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설

파투(破鬪) 2. 수상한 총알(2) 고향

fiction-google 2024. 3. 8.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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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가 떠난 후에 용수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오정철은 젓가락으로 식탁을 가볍게 두드리며 실눈을 하고 있었다. 왼쪽에 있는 순태는 턱을 주먹으로 고이고 시선을 아래에 두고 있었다. 건너편에 앉은 유시종이 용수를 향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눈을 찡긋했다. 결론이 아직 나지 않았다는 것 같았다. 오정철의 젓가락 소리가 멈추었다. 순태가 고개를 들어 좌우를 돌아봤다. 용수와 유시종은 젓가락에 시선이 쏠렸다.

"이렇게 된 마당에 별 방법이 없다. 아까 순태가 말한대로 서울 가서 똑같이 하나를 만들어오면 그보다 좋은 수는 없겠지만 시간이 없어. 그러니 롯드 남바고 지랄이고 모험을 하는 수밖에 없어. 가까운 도계에 총포사가 있지만 소문이 나면 안 되니까 순태 너는 지금 당장 영월로 가. 그곳 총포상에서 네가 갖고 있는 것과 최대로 비슷한 놈으로 사서 채우란 말이야. 제조사가 같은 지 꼭 확인을 해. 알어? 한발만 사면 의심할 테니 한 통을 사라고. 알어? 쓰벌, 그렇게라도 해야지 이제 와서 어쩔 거야? 안 그래?"

"아까 그 새끼가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왜 놔줬는지 지금도 모르겠다니까?"

순태는 진우를 그냥 보내준 오정철이 원망스러웠다. 제 말을 믿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오정철은 그런 순태가 또 못마땅한 것이다. 자신이 내린 결정을 무시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순태. 내 말이 우습냐? 아까 용수 친구라는 놈은 아니야. 척 보면 몰라? 그놈 눈을 봐. 비굴해 보이는 구석이 없잖아? 십 원 짜리 한 장이라도 감추는 놈은 눈깔에서 표가 나는 법이야. 알어? 그러니 넌 잔말 말고 얘들하구 어서 갔다 와. 시간 없어. 점심때까지 그걸 사장님 앞에 갖다놔야지 안 그러면 어찌되는지 알잖어?"

"가라니 가긴 간다만 그때까지 올 수 있을까?"

"지금이 5시가 못 되었으니까 밟으면 될 수 있어. 어서 가기나 해. 난 숙소에 있을 테니까. 이따 전화 때려."         

오정철을 뒤로한 세 명의 사내들이 우르르 나와 차의 시동을 걸었다. 출발과 동시에    핸들을 쥔 유시종의 뒷자리에서 상태의 불만이 터졌다.

"정철이 저놈은 눈깔만 보고도 안다네. 용수 네 친구라는 놈이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런 놈을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구 눈깔로 판단하다니 원 씨발, 미치겠네."

", 상태. 정철이가 사람은 제대로 보잖아? 아까 그 친구 말이야, 그 친구는 아닐 거야. 그 놈은 어릴 때부터 나 같은 놈하구는 달랐거든."

조수석의 용수가 백 밀러를 통해 순태를 힐긋 보며 말했다. 순태는 히죽 웃었다.

"씨발, 그놈은 어떻게 다른데? 너보다 불알이 한개 더 있냐?"

"그 게 아니라, 나는 못생긴 꼴통에 싸움 밖에 몰랐지만 그놈은 공부도 잘하고 잘 생겨서 여자애들 한테 인기도 많았고 게다가..."

순태가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핸들을 쥔 유시종도 새삼 용수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네 얼굴보면 그 말은 사실일 것 같다야. 내가 그 말은 믿어주지. 계속해 봐."

"이 새끼들 하고는. 순태 네놈 쌍판은 제대로 붙은 게 하나나 있냐?"

", 누가 뭐래? 계속하라니까?"

"좋아, 어쨋던 기분이 나빴던 나는 별 이유도 없이 그놈을 매일 두들겨 팻지 뭐야. 학교에서는 내가 왕초였거던. 그놈, 나 한테 숱하게 맞았어. 하루도 안 빠지고 코피가 터지고 눈탱이가 부었지. 그런데도 그놈은 한 번도 결석이 없었고 또 선생 한테 일러바치 질 않았어. 학교 끝나고 내가 때릴려고 부르면 도망도 안 가고 성큼 다가오고 말이야. 오히려 그놈하고 단짝이던 덕배란 놈이 오히려 몸을 사렸지."

"가만, 덕배라면 사북의 그 덕배 말이냐?"

"왜 아니겠냐, 그 둘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딜가나 붙어 다녔어. 헌데, 다른 놈은 한대만 맞아도 죽겠다고 엄살인데 이놈은 우는 법도 몰라요. 독종도 아닌 놈이 자꾸 그러니까 나중에는 내가 먼저 질려버리지 뭐야."

"맞아 그런놈 있어. 히힛."

운전을 하던 유시종이 맞장구를 치며 용수를 돌아보았다.

"그보다 내가 인정하는 건 그놈은 욕심이 없었다는 거야. 솔직하게 말해서 어릴 때 누가 맛있는 걸 먹거나 좋은 걸 가졌으면 나도 갖고 싶잖아? 헌데 그놈은 오히려 제가 가진 걸 주면 줬지 절대 껄덕대는 법이 없어요. 걔네 집도 우리처럼 못 살았는데도 말이야. 걔 아버지도 우리 아버지 처럼 광부였거던. 그만큼 자존심이 있는 놈이라는 얘기지. 그런 놈이 금덩이도 아닌 그따위 총알 한 발에 무슨 욕심으로다 감추고 말고가 있겠어? 안 그래?"

"네 말 듣고보니 예수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리나 마찬가지구만."

"새끼라고는, 여기서 예수가 왜 튀어나오냐?"

제 말을 못 믿는 순태가 못마땅한 용수가 백밀러를 노려보았다.

", 씨발, 예수가 그놈 처럼 그랬다며? 왼쪽 아구통 맞으면 오른쪽 아구통도 내 주라고."

그때, 운전석의 유시종이 짧게 크락션을 두세 번 울렸다. 라이트가 비친 보도에 진우가 얼굴을 찡그리며 돌아보고 있었다. 동시에 손을 들어 빛을 가렸다.

", 씨발, 예수가 나타났네."

유시종이 차를 진우의 옆에 세우자 창문을 내린 용수가 고개를 내 밀었다.

", 이진우, 너 지금 덕배 만나러 가는 길이지? 우리도 그 쪽으로 가니까 같이 타고 가자야."

"아직은 아니야, 우선 작은아버지한테 인사는 드려야지. 온 김에 산소도 찾아보고..."

", 그래? 참 너의 아버지 산소가 철암에 있지. 어쩔 수 없군. 그럼 우리 먼저 간다."

자동차는 불빛에 쌓여 순식간에 멀어져, 진우의 눈 앞에 아까보다 훨씬 더 짙은 어둠을 남겼다. 올때 보았던 여성옷 가게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유령이 설치던 가게 안은 여전히 캄캄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시간은 지난 듯했다. 얼굴이 하얀 마네킹은 여전히 눈도 코도 입도 없었다. 다만 표정을 잃은 플라스틱 바가지일 뿐이었다.

 

"상철암 갑시다."

역전으로 돌아와 탄 택시였다. 택시는 출발과 함께 텅 빈 도로를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시내로 들어서는 교차로에서도 그대로 직진하는 것이다. 오가는 자동차가 한 대도 없으니 신호따위는 무시하는 듯 했다. 황지교 사거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속력 그대로 좌측으로 핸들을 꺽어 단숨에 남부로에 올라섰다. 진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잡이를 꽉 붙잡고 있었다. 젊어 보이는 기사는 거칠게 없다는 듯 속력을 높였다. 산중턱을 깎아 만든 도로는 포장이 잘 되어 있었다. 속도를 유지한 차 앞으로 가로등이 재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진우는 라이트에 비친 길이 어디쯤 이라는 것을 대강은 알았다. 빠르게 달리던 차는 굽이 길에 이르자 결국 속력을 줄였다. 경사 길을 내려가기 위해서였다. 내리막 커브를 돌던 차가 평지에 이르자 실내등이 깜빡 켜지더니 꺼졌다. 그러더니 기사가 뒤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진우형. 에이, 진우형 맞네. , 나 진태예요."

마침내 범인을 검거한 형사의 환호성 같았다. 어둠에 쌓인 창 밖의 익숙한 실루엣을 보던 진우가 기사에게 눈을 돌렸다.

"상태 동생, 진태? 김진태라구?"

"그럼요, 진태 맞아요. 아까부터 긴가민가했드만 형이 맞네요이. 그런데 형이 갑자기 웬일이래요? 우리형 얘기 들으이까 형은 서울서 성공했다더군요."

"성공은 무슨, 나 혼자 먹고 살기도 바쁘다야."

"에이, 성공도 못한 사람이 부조돈을 백만 원 씩이나 낸단 말이예요? 다 듣고 있어요. 우리형 결혼식에 백만 원 냈다문서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상태는 진우가 처음 서울 올라가서 몇 달을 신세진 고속버스 회사 정비공이었다. 암담했던 시절, 취직이 될 때까지 있게 해준 고마운 친구였다. 첫 월급을 탓을 때, 거하게 한턱 쏘긴 했지만 축의금으로 그때의 고마움을 대신했었다. 벌써 삼 년 전의 그 일을 진태가 말하는 것이다.

"너의 형한테 진 신세가 그 열 배는 될 게다."

"헤에이, 세상이 어디 그래요? 잘 되면 입 싹 닦는 거이 세상이래요. 어쨋든 진우형 같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상태하고는 이따금씩 연락은 한다만, 너는 장가 안 가냐?"

"? 몰랐어요? 나는 벌써 애가 둘이예요. 스물다섯에 했으이까, 결혼한지 하마 오 년 됐네요. 애들만 아니면 내가 운짱을 하고 있겠어요?"

"네가 상태보다 먼저 결혼한 건 몰랐다야. 나는 혼자서도 힘든데 너는 더 힘들겠구나. 그래도 혼자 사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형은 왜 장가 안 가요? 고자래요? 아니면 처녀가 없어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 방금 백산역 지났구나."

", 이 시간에 상철암은 뭣하러 가요?"

", 아버지 산소에."

"이리 어두운데 뭐가 보이겠어요? 저랑 같이 밥이나 먹고 천천히 가시지 그래요?"

"말은 고맙다만 아까 태백에서 해장국 먹었다. 이까지 온 길에 잠시 인사만 드리고 날 밝으면 사북으로 갈란다."

"진우형이 설마 카지노 가는 거는 아닐 테이까 보나마나 덕배형 한테 가는 거지요이?"

"그래, 그놈 못 본지가 십 년도 넘었다."

"돈이라면 형 친구들 중에 덕배형이 제일 많이 벌었을 거예요."

진태는 운전 중에도 연신 백밀러를 통해 진우를 살폈다. 갑자기 고향에 나타난 진우의 사연이라도 알아내려는 눈치였다. 잠시 후, 창 밖에는 너무나 눈에 익은 산이 검은 형체를 우뚝 세우고 있었다. 내려야 할 곳에 다 온 것이다. 택시가 멈추었다. 진우가 지갑을 꺼내자 진태는 끝까지 요금을 사양했다.

"안될 말이지요. 형님한테 요금을 받다니요? 여기 계시는 동안 차가 필요하시면 연락만 주세요. 여기 제 명함이요."

진태는 내리는 진우에게 손을 뻗어 명함을 건낸 다음 손을 흔들며 재빨리 멀어져 가버렸다. 어두운 산길을 오르는 진우의 걸음은 무거웠다. 묘에 닿기도 전에 풀잎에 맺힌 이슬로, 바짓가랑이가 정강이에 척척 감겼다. 좌우엔 수많은 크고 작은 무덤과 비석이 검은 형체를 들어냈다. 진우는 아버지의 무덤을 한 번의 망서림도 없이 정확히 찾았다. 술잔과 포를 함께 놓았다. 그리고 업드려 두 번 절을 했다. 무릎과 손이 이슬에 흠뻑 젖어들었다. 8년만에 올리는 절이었으나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진우는 새벽에 들이닥쳐 고이 잠든 아버지를 깨우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다. 아들이 계집에 속아 완전히 빈털털이로 도망쳐온 것을 아신다면 뭐라고 하실까? 보나마나 아무런 말씀도 않으실 것이다. 아니, , '네가 알아서 해.' 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생전에도 아들에게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분이니까. 진우는 기억 속의 아버지를 회상해 보았다. 불우한 삶이셨다. 아버지의 그런 불우함이 유전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인가? 이대로 끝날 수는 없다. 어떡하던 이 난관을 타개해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계속 도망만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러려면 그 지긋지긋한 날강도 같은 캐시콜뱅크의 돈부터 갚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 뿐, 참으로 막막한 일이었다. 왠지 모를 눈물이 나려고 했다. 진우는 불끈 주먹을 쥐고 하늘로 눈길을 돌렸다.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새벽의 한기가 몰려와 몸이 으슬으슬 떨었다. 산을 내려가면 먼저 덕배가 있는 사북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꼴로 작은아버지 앞에 나타날 수는 없었다. 진우는 옷매무새를 살폈다. 혁대를 다시 조이고 이슬에 젖은 바짓가랑이를 털었다. 양말에 끼웠던 탄환이 손끝에 느껴져 진우는 그것을 꺼내 들었다. 쓸데없는 호기심에 묻어온 탄환이었다. 지금이라도 멀리 던져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 탄환 한 발로 용수 일행이 왜 그토록 난리를 치는지가 못내 궁금했다. 탄환을 편의점 비닐봉투에 넣어 이중삼중으로 묶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진우는 무덤 앞의 상석 틈에 그것을 깊이 감추었다. 작지만 갖고 다니기엔 불편한 물건인 것이다. 날은 빠르게 밝아오고 있었다. 산을 다 내려오기도 전에 안개가 피워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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