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설

파투(破鬪) 1.야간열차(5) 뒷통수

fiction-google 2024. 3. 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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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자리에서 남자가 일어나더니 입을 한껏 벌리고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선반의 가방을 내렸다. 이어서 여기저기서 부스럭대며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우가 일어나 실내를 둘러보니 십여 명이 보따리를 챙기거나 윗옷을 걸치고 있었다. 화장실을 가려는지 통로를 지나는 사람도 있었다. 종착역인 태백에 가깝다고 판단한 진우가 신발을 신고 바로 앉았다. 짐이라고는 비닐봉투 하나 없으니 챙길 것도 없었다. 옷가지 하나 제대로 가져올 경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창 밖은 여전히 어두웠다. 진우는 미리 화장실이나 다녀올까 하다가 사람들이 많을 것이란 생각에 그만두었다. 기차가 경적을 길게 뽑은 후 곧이어 속력을 줄였다. 한 손으로 눈썹을 덮고 밖을 내다보니 거리의 네온 불빛이 밝았다. 헌데 익숙한 풍경이 아니었다. 태백이 아님이 분명했다. 진우는 다가오는 역사의 처마 밑의 글씨를 확인했다. 사북역. 강원랜드의 카지노가 있는 곳이다. 진우가 어렸을 때는 석탄을 캐는 광부들의 사택말고는 아무것도 없던 깡촌이었다. 당시에는 길게 지어진 스레이트 지붕들이 철로 밑의 산비탈에 간신히 붙어 있었고 평지라고는 개울의 이쪽과 저쪽에 지어진 몇 채의 집터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불빛부터 달랐다. 환락의 도시로 변한 깡촌에 호텔과 모텔의 네온들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수미와의 관계도 환락에 가까웠다. 순복을 떠난 진우는 수미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었다. 밥을 사 주고 싶었고 옷을 사주고 싶었다. 극장이나 커피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형편이 닿는 한 해주고 싶었다. 있을 곳이 마땅치 않던 그녀가 진우의 집으로 들어와 동거를 시작했다. 수미는 진우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 같았다. 적당히 애교를 부릴줄 알았고 새침해야할 때를 알았다. 잠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요구해야 할 때와 거절할 순간을 아는 것이다. 타고난 것인지 훈련된 것인지는 몰라도 진우로서는 수미의 그러한 행동까지 모두 좋게 보였다. 또한 수미와 있는 시간만큼은 즐거웠다. 누나처럼 느껴지던 순복이와는 또 다른 수미의 말이나 행동 모두가 매력으로 느껴졌다. 취사도구와 그릇을 사들인 수미가 진우에게 매일 아침밥을 차려주었다. 십 년이 넘게 식당 밥에 길든 진우에겐 행복한 순간이었다. 진우는 그런 수미에게 생활비로 쓸 카드를 넘겨주었다. 그동안의 저금이 고스란히 든 카드였다.



"자기야, 우리 이사 가자, ?"

동거가 시작된 삼 개월 후 쯤에 수미가 콧소리를 섞어 한 말이었다.

"? 우리 밝은 집으로 이사 가자아. ? 자기야."

수미가 다시 몸을 꼬며 진우의 팔에 매달리 듯 몸을 흔들었다. 사소한 것이라도 요구할 것이 있으면 반드시 평소보다 과장된 응석을 부리는 수미였다. 그런 애교와 응석이 진우에게는 이제까지 다 통했던 것이다.

"밝은 집? 아파트 말이야? 돈이 어딨어?"

"피이, 대출 좀 받으면 되지."

"대출을 받아 이사를 한다구? 얼마를 받을 건데?"

"오천만 받으면 되지 뭐."

"그럼 이 방 전세 값 하구 일 억 밖에 안 되는데 아파트 전세가 얼만데 그래?"

"아잉, 자기는 별 걱정을 다해. 모자라는 건 내가 해결할 테니 자기는 아무 걱정 마."

"네가 어디서 돈을 빌린다는 거야?"

"뭐야?"

뿌리치 듯 팔을 놓은 수미가 눈빛이 싸늘해져 진우를 노려보았다. 이제까지의 콧소리와 응석은 간 곳이 없고 아랫 입술을 깨물며 팔짱까지 꼈다. 이것은 좋지 못한 징조인 것을 진우는 경험적으로 알았다. 수습을 해야했다. 토라진 그대로 둔다면 또 일주일은 접근을 허락치 않을 것이다.

"내 말은,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돈을 빌려서는 안 된다는 거지. 그게.."

"그만 둬. 자기는 꼭 이런 식으로 사람을 무시하더라. 순복이만 능력이 있고 나는 없다는 거 아냐? 자기가 나 한테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아니, 내가 언제 순복이 얘기를 했다는 거야?"

"나는 돈 빌릴 데가 없다며? 그 말이 그 말이지 뭐야?"

", , 미치겠네. 알았어. 그렇게 느꼈다면 내가 잘못했다. 사과할 게."

"자기는 꼭 그런 식이더라? 남의 속을 뒤집어놓구선 사과만 하면 다야?"

그 후에도 수미가 몇 번 이사 타령을 했으나 진우는 중국 진출이 본격화 된 회사의 일에 바빠서 정신이 없었다. 마침 칭타오(靑島) 지점장으로 승진되어 나가는 과장이 진우에게 시장 조사차 같이 갈 것을 제의해 왔기 때문이었다. 체류 기간은 보름으로 잡았다. 일이 잘 되면 아예 지점에 합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퇴근 후에 중국 출장 이야기를 했더니 수미는 깡충거리며 좋아했다. 그리고는 이런 일은 축하주가 빠지면 안된다고 수퍼로 뛰어가 소주를 몇 병 사왔다. 오징어포를 안주삼아 잔이 오고가서 취기가 오를 무렵이었다.

", 자기 중국 가서 안 오는 건 아니겠지?"

"? 무슨 소리야. 내가 안 오다니?"

"아이, 자기는 너무 잘 생겼잖아. 혹시 중국 처녀들이 잡아서 안 놔주면 어떻게? 그럼 나는 뭐가 되겠어?"

몽롱한 진우의 코앞에서 눈을 동그랗게 뜬 수미가 웃고 있었다.

"설마, 그런 일이..."

"설마라니? 자기는 설마로 날 택한 거야?"

"또 시작이군."

"시작이 아니야. 난 자기 없으면 안 된단 말이야. 약속해. 딴 여자는 처다보지 않는다구."

"그러지 뭐. 백 번이라도 약속하지."

"아니야. 말로하는 약속으론 부족해. 각서를 써. 맞아. 자기야 각서를 써."

"지금? 취해서 못 써. 내일 써 줄 게."

"내일되면 잊어버리게? 그럼 쓰는 건 내일하고 말 났을 때 여기다 싸인만 해."

언제 준비가 되었는지 백지와 볼팬을 내미는 수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우가 트집이 나오기 전에 먼저 자수하는 심정으로 볼펜을 뺏어 쥐었다. 수미가 얼른 사인할 자리에 손가락을 짚었다.

"자기야, 여기도 해."

사인을 마친 진우에게 얼른 다른 종이를 내 미는 수미였다.

"했잖아? 사인."

"싸인이 너무 크잖아? 잘 좀 해 보셔. 서방님."

"갑자기 웬 서방님?"

"자기가 내 서방님이지. 그럼 아니야? 아이 또 삐뚤어졌네. 새로 잘 좀 해보세요. 서방님. ? 잘 된 것을 골라서 쓸테니까."



몇 장의 백지에 사인을 받은 수미가 그 후에 저지른 일은 진우의 삶을 단번에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보름 동안의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니 진우의 방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온통 방바닥이 뜯기고 욕실은 타일을 새로 붙이고 있었다. 영문을 모른 진우에게 집주인이 나타나 전세금이 반환 된 사실을 알려줬다. 부인이 찾아갔다는 것이다. 기절할 노릇이었다. 눈앞이 아득한 진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골목 입구에 있는 부동산에서였다. 진우의 방을 중개한 사람이었다. 부인이 맡긴 가방이 있으니 찾아가란다. 옷가지가 든 가방 하나가 진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우가 사태를 짐작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부동산에서 들은 말만으로도 자초지종을 알기에는 충분했다. 수미의 계략에 완전하게 당한 것이다. 반 지하 일망정 각고의 노력 끝에 장만한 오천만 원의 전세금과 순복이의 협조로 조금씩 모은 돈 천삼백여 만원이 고스란히 날아간 것이다. 주머니의 몇 푼 이외는 아무것도 없으니 모텔도 갈 수가 없었다. 지금의 진우로서는 회사 기숙사에 기대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수미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당연히 통화도 되지 않았다. 대신 몇 주 후부터 이자 납부 안내 메세지가 뜨더니 뻔질나게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납일 날짜가 오늘이란 것이다. 처음엔 잘못 온 문자로 무시하고 말았더니 전화로 이진우의 이름까지 대고 이자 독촉을 해왔다. 알고보니 진우 앞으로 오천만 원의 대출이 있었다. 물론 수미 짓이었다. 너무나 황당한 나머지 그 달은 월급의 태반을 이자로 물었다. 다음 달에는 미리미리 협박성 전화가 밤낮없이 울렸다. 이자 납입이 며칠 남았다고 매일 알려왔다. 그 달도 월급은 놈들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진우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계속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다음 달 연체가 된 날부터 진우의 생활은 더욱 엉망으로 꼬이고 말았다. 전화질과 함께 회사로 거구의 덩치들이 교대로 찾아왔다. 뿐만 아니라 다음 달엔 월급이 압류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당연히 회사 측에서도 싫은 소리를 시작하더니 결국 사직의 압력을 가해왔다. 사직과 함께 퇴직금까지 놈들에게 넘기고나니 갈 곳이 없었다. 하루 아침에 노숙자가 된 진우가 어금니를 물고 수미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수미를 찾아 가볼만한 곳도 없었다. 그동안 수미의 인적사항에 너무 무심했던 탓에 주민등록번호조차 몰랐던 것이다. 막연히 수미가 살았다는 대전에 내려가 시내를 배회해 보았고 언젠가 들은 둔촌동 사촌언니가 산다는 아파트 입구를 며칠동안 감시했을 뿐이었다. 그러는 중에도 대출금을 상환하라는 독촉의 전화질은 끊이질 않았다. 신체를 포기하라는 협박도 서슴치 않았다. 몸서리가 쳐지고 미칠 것 같은 상황이었다. 어느날이었다. 전화벨 소리에 화면을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수미였다.

"자기야, 나야. 미안해."

"그래, 미안은 됐고, 너 지금 어디 있어?"

"어디 있으면 뭘 할 건데? 내가 자기를 만날 것 같아?"

"좌우간 만나서 얘기하자. 다 용서할 게."

"용서? 자기가 무슨 하나님이야?    자기는 아무 소리말고 내가 하는 말이나 잘 들어. 다신 전화 안할테니까. 내가 자기한테 나쁜짓한 건 사실이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어. 솔직하게 말할게. 나 사실 미혼이 아니었어. 혼인신고까지 한 남편이 있었거던?. 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법적으로는 남편이지. 헌데 이 인간이 그때 감옥에 있었지 뭐야? 면회는 가야하는데 돈은 없지, 어떻게? 면회갈 때마다 영치금도 넣으라고 난리고. 그 인간이 한 성질 하거던. 그럴때 고맙게도 자기가 나타났지 뭐야. 그날 돈 빌리러 순복이 만나러 갔었다고 내가 말했던가? 사실 자기하고 살면서도 몰래 그 인간 면회 다녔어. 자기가 준 카드는 그때 잘 썼지 뭐야. 전세금하고 대출금? 그건 자기한텐 차마 못할 짓이었지만 그 당시엔 남편이 곧 출소를 하는데 아무것도 없으니 또 어떻게? 그 돈은 그래서 그런 거지만 솔직히 다른 이유도 있어.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보상금 한푼 안 준 순복이 아버지가 미웠어.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순복이가 더 미우면서도 부러웠어. 순복이가 가진 행복은 모두 내가 갖고 싶었어. 자기도 그래서 내가 뺏은 거고,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또 뺏으면 순복이에게 확실하게 이기는 것 아니겠어?    자기는 정말 내게 잘해줬지만 순복이를 만난게 죄지 뭐야? 아무튼 길게 말 못해. 곧 들어가야 해. 남편은 남들이 불법 도박사업이라는 걸 했는데 출소하자말자 또 그걸 시작했지 뭐야. 한 우물을 파야 물이 나온데나 뭐래나. 부엉이라면 그 바닥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큰소리 땅땅 치니까 언젠가 한번은 벌겠지. 하여튼 나중에라도 남편이 돈 벌면 갚을게. 자기는 날 찾을 생각은 마. , 자기가 준 카드는 어제 가방 맡겼던 부동산에 갖다 맡겼으니 찾아가. 남은 돈은 얼마 없겠지만 도망다니려면 차비는 있어야 하잖아? 이만 끊을게. 자기야 잘 지내."

", , 수미야, , , 이런 빌어먹을...."

이제는 더 알아야 할 것도 없었다.    잠시 후, 대출업체 놈들에게서 전화가 또 왔다. 받지 않았다. 베터리를 빼는 진우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전화를 받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놈들이 핸드폰의 위치를 추적할 것이다. 이 난관을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까? 절망감이 진우의 머릿속을 휘졌기 시작하였다. 어쩌면 좋을까? 카드를 찾은 다음 튀는 길 말고는 없었다. 부동산에 들려 카드를 찾은 진우는 청량리로 향했다. 헌데, 조회 결과, 천삼백만 원 가까이 들었던 카드에 달랑 삼십사만 원만 남기다니?    아무리 좋게 봐도 수미는 죽일년이었다. 그리고 불쌍한 년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불쌍하고 한심한 인간은 진우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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