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설

파투(破鬪) 1.야간열차(4) 해병대

fiction-google 2024. 3. 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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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내가 돌았었지. 그때 눈치를 챘어야 하는 건데. 좌우간 여우는 여우였어."

맥주가 소변으로 변하는 시간이 이렇게 빠를 줄 몰랐다. 이번엔 정말 오줌보가 터지는 것 같았다. 화장실 문을 열기도 전에 지퍼를 내리고 뛰어들었다. 시원하게 나오는 오줌줄기를 바라보다가 변기 옆의 바닥에 눈이 갔다. 탄환이 있던 자리는 물론 아무 것도 없었다. 눈을 들어 창 밖을 보니 마침 석항역이라는 글씨가 스쳐 지나갔다. 석항이라면 영월을 지난 역이다. 기차는 영월역에서 분명히 정차했을 것이었다. 진우가 생각에 빠져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화장실을 나와 원주역 어름에서 만난 사내가 들어간 객차 쪽을 바라보았다. 탄환을 왜 화장실까지 가지고 왔을까? 무언가 모를 호기심이 꿈틀거렸다. 도대체 열차 화장실에 떨어뜨린 엽총 탄환이란 주제 자체가 호기심을 불렀던 것이다. 사냥철도 아닌데 사내는 왜 탄환을 갖고 다닐까? 그리고 잃었다면 그까짓거 얼마나 한다고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검문하듯 했을까? 탄환은 한 발 뿐일까? 도대체 모를 일이었다. 자리에 돌아와서도 이상한 생각은 떨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추리도 불가능했다. 다리를 최대로 뻗은 진우가 다시 천정의 뿌연 전등을 바라보았다.



수미를 업은 진우가 모텔로 들어서자 프론트에선 이미 사태를 다 꿰고 있는 듯 청년이 나와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삼층까지 따라와 객실 문을 열어주었다. 수미를 침대에 내려놓은 진우가 숨을 몰아쉬며 털썩 침대 모서리에 걸터 앉았다.

"손님, 지금 결제 하시죠."

시선이 침대 쪽으로 삐딱하게 돌아간 청년이 문가에 서있었다. 프론트까지 갈 자신이 없는 진우가 카드 대신 지폐를 건냈다. 침대 위의 수미를 바라보았다. 힐 한 짝이 수미의 발가락에 걸려 있었다. 주춤주춤 다가가 신발을 벗기려는 순간 구토가 밀려왔다. 욕실로 눈길이 돌아갔다. 문을 열자말자 바닥에 그대로 울컥 쏟아내었다. 한참을 토하고보니 전신의 힘이 다 빠져나간 듯했다. 손을 대강 씻고 욕실을 나오니 천정도 벽도 문도 마구 돌기 시작했다.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캄캄한 눈앞에는 온통 노란 금가루가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손을 휘져어 그것들을 쓸어 없애려 했다. 그러나 금가루는 여전히 허공에서 반짝였다. 더 세차게 손을 휘젓는 순간 진우는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바닥에는 더 많은 금가루가 쉴새없이 반짝이며 돌아가고 있었다.

   

"진우씨 그만 일어나. 여덟 시가 넘었잖아?"

낯선 목소리에 놀란 진우가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의 어깨를 어떤 여인이 흔들고 있었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여인은 수미였다. 그녀는 놀랍게도 알몸이었다. 당황한 진우가 침대 밖으로 나오려고 이불을 재켰다. 아차, 이럴수가? 진우의 몸 역시 팬티 한 장 붙어 있지 않았다. 잽싸게 이불을 당겼지만 화끈한 얼굴은 감출 수 없었다.

"어마, 부끄러워할 것 없어요. 자기만 부끄러운가? 나까지 다 벗겨놓구선..."

"? 뭐라구요? 내가 수미씨를요?"

"에이, 몰라요. 그러고 보면 자기도 엉큼한 사람이야."

돌아앉아 팬티와 바지를 입은 진우가 팔목을 보았다.    언제 풀어 놨는지 시계도 탁자에 있었다. 825. 회사에 이미 도착했어야 할 시간이었다. 욕실에 들러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니 자신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또 다른 바보가 있었다.

"진우씨 서둘러요. 이러다 회사 늦겠어."

윗옷을 거머진 진우가 밖에서 재촉하는 수미의 뒤를 황급히 쫓았다.

"자기 먼저 가요. 이따가 전화할게요."           

좀처럼 하지 않던 지각이었다. 지하철 열차에 오른 뒤에도 진우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젯밤 수미를 업고 모텔로 간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아니, 욕실에서 구토를 한 것까지 생각이 나는 것이다. 그 다음은 모를 일이었다. 수미의 말대로 그녀의 옷을 벗겼는지는 모르겠고 무슨 짓을 했는 지는 더욱 모를 일이었다. 헌데 조금 전 그녀의 말투가 새삼 귀에 거슬리는 것이었다. 진우랬다가 자기랬다가 존대와 반말을 뒤섞인 말이었다. 또 한 가지 생각이 미치는 것이 있었다. 어젯밤 욕실 바닥에 토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아까 세수를 하려고 욕실에 들렀을 때 토사물이 깨끗히 치워져 있었던 것이다. 수미가 새벽에 일어나 치웠을까? 어젯밤에는 아닐 것이었다. 어젯밤에는 그녀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취했었으니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의 꼬리를 물고 수미가 다시 벗은 몸을 들어내자 진우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날 수미에게서 전화가 다섯 번이나 왔다. 모텔에서 진우의 번호를 딴 것이 분명했다. 퇴근 후에 만나자는 장소까지 알려왔다. 학원을 가야한다는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어차피 순복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진우가 먼저 순복에게 전화를 했다. 회사 핑계를대고 며칠 결석할 것을 말했다. 약속장소에는 수미가 기다리고 있었다. 팔짱을 낀 그녀가 이끄는 대로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술을 마셨다. 다음 순서는 당연히 모텔 행이었다.   



며칠 후인 금요일이었다. 웬만해선 먼저 전화를 하지 않는 순복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일 어디에서 만나자는 전화였다. 진우는 난감했다. 그러나 어떤 결정을 내려도 내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진우는 다시 곰곰히 생각을 했다. 이제까지 순복이를 만나면서 느낀 것은 모성애를 충족시키는 편안함과 무엇인가 모를 규제의 불편함이 함께한 것이었다. 사실 지난 일 년간 순복에게서 받은 시혜는 채무자와 같은 심정이 되어 답답했었다. 반면 몇 번 만나지 않은 수미에게선 무엇인가 베푼다는 느낌과 떳떳한 감정이 앞서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순복이 앞의 진우는 조련받는 세퍼드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명령은 따라야 하고 규제는 지키는 것으로 지내왔었다. 다시 말해 진우는 순복의 무언의 통제 속에 길들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수미는 진우가 쥐고 있는 과자에 꼬리치는 강아지 같아서 시혜를 베푸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러므로 어쩌면 자신을 따르는 강아지를 택하는 것이 진우로서는 마음 편할 터였다. 다음 날 낮에 약속한 장소인 커피숍으로 나가니 순복이 먼저 나와 있었다. 한 낮이어서 인지 손님은 몇 명 없었다. 창가에 학생인 듯한 남녀 한 쌍과 구석진 자리에 나이 든 남자가 있을 뿐이었다.

"어머, 진우씨 오셨어요?"

언제나와 같이 활짝 웃는 얼굴로 일어서서 진우를 맞는 순복이었다. 그런 순복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기가 영 불편한 진우가 눈길을 창 밖으로 던지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오늘은 커피숍 안에서 만나는군."

"어마, 이제부터는 진우씨 취향에 따르기루 했다니까요?"

"내 취향에? 거 잘 됐군. 그러지 않아도 오늘 내 취향을 얘기하려했는데..."

"진우씨 취향은 대략은 알고 있어요."

"대략이 아니라 완전히 알려주려 나온 거야."

초록색 앞치마에 하얀 부라우스를 입은 종업원이 경쾌한 걸음으로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순복이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켰다. 진우는 순복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세요? 어마, 이걸 어째?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내 취향은 아메리카노가 아닌데?"

"? 이제껏 그걸로 드셨잖아요?"

"카프치노로 취향이 바뀌었어. 잘 변하는 것이 내 취향이거든. 몰랐어?"

"어마, 그럼 지금이라도 바꿔 달랠게요."

냉큼 일어나서 종웝원이 사라진 카운터로 향하는 순복의 팔을 잡아 다시 앉힌 진우가 목소리를 약간 높혔다.

"나에 대해서 다 안다는 그런 태도가 나는 싫어. 유치원생을 다루는 보모 같은 간섭도 싫고 환자를 대하는 간호사 같은 말도 싫어. 알겠어?"

"어머, 진우씨 오늘 무슨 일이 있었어요? 갑자기 왜 이러세요?"

"대략이 아닌 완전한 내 취향을 알려주려 나왔다니까?"

이제 냉정하게 말을 꺼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정말로 뻔뻔스럽고 낯간지러운 일을 어거지로 때워서라도 이 순간을 얼른 벗어나는 것이 상책일 터였다. 어차피 난 상처에 소금을 뿌려야 한다면 한번으로 끝내야 한다. 두번은 차마 못할 짓이다. 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영문을 몰라 낭패한 표정의 순복을 내려다보았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나는 말이야 순복이가 내 취향.."

그 순간 순복이 놀라 발딱 일어났다. 진우를 향해 대각선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서였다. 당황한 표정의 순복을 본 진우 역시 그녀의 눈길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에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나이 든 그 사람 같았다.

", 아빠."

아빠란 소리에 놀란 진우가 눈앞에 다가선 사람을 다시 보았다. 오륙 십 대로 보이나 사실 나이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은 얼굴이었다. 짧달막한 체구에 스포츠형으로 깎은 머리에다 한 눈에 봐도 강인하고 다부져보였다. 네모난 얼굴은 볕에 그을려 검붉었고 굳게 다문 입은 고집스러웠으며 진우의 눈을 꿰뚫을 듯한 눈빛을 쏘았다. 남자는 진우의 어깨를 소리나게 탁 치더니 의자를 끌어다 옆에 앉았다.

"네가 말한 사람이 이 친구냐?"

"아빠 이러시지 않기로 했잖아요? 아이 난 몰라."

순복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인 듯 진우에게 이해를 바라는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이별의 통보를 막 전하려던 진우 역시 이 황당한 상황에 당혹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것은 순복의 계략이 분명하였다. 며칠 전의 외박을 구실삼아 자신의 수족을 묶자는 작전인 것이다. 진우로서는 그런 생각만 들 뿐이었다.

"앉아. 다들 앉으라구."

"아빠, 제발이요. 멀리서 보기만 하겠다고....이러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진우씨 미안해요. 이건 사고예요. 정말이예요. 언잖게 생각 말아주세요. 부탁이예요."

순복의 말대로 어쩌면 사고를 당한 진우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시선을 돌렸다. 쟁반을 받쳐 든 종업원이 미소와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서성이고 있는 진우와 순복의 모습에서 분위기를 감지한 듯 가만히 커피잔을 내려놓고 재빨리 돌아섰다.   

"어이, 순복이를 어떻게 꼬셨나?"

의자를 당겨 앉는 진우에게 순복의 아버지가 돌을 던지듯 불쑥 말을 던졌다.

"?"

"아빠! 뭐예요? 그렇게 묻는 법이 어디 있어요. 아이 난 몰라. 이를 어째?"

"? 내가 잘못된 거라도 있냐?"

", 아빠..."

"시끄럽다. 나는 돌려서 말 못한다. 해병대답게 말할 뿐이다."

순복이 앞에 놓인 커피를 바라보던 그가 잔을 들어 훌쩍 한모금 마시더니 뜨거움에 깜짝 놀라 떨어트리 듯 잔을 놓았다. 그러나 역시 해병대 출신답게 비명은 없었다. 순복이 재빨리 손수건을 내 밀었다. 황급히 손수건으로 입을 닦던 그가 겸연쩍은 행동을 얼버무리 듯 헛기침을 하며 진우에게 눈길을 돌렸다.

", 좋아. 자네에게 다시 정중히 묻지. 우리 순복이를 어떻게 알게 됐나?"

", . 어학원에섭니다."

"꼬신지 얼마나 됐어?"

"아이, 아빠, 꼬시다니요? 일 년 전부터라고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네가 말하는 것하고 저 사람이 말하는 게 같냐? 어이, 얼마나 됐어?"

순식간에 당한 황당한 상황이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안정이 된 진우가 예의에 벗어나는 순복의 아버지의 질문에 입을 닫았다. 이미 순복을 통해 모든 것을 알고 나타났을 거였다. 헌데 새삼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왜 대답을 못해? 돈푼깨나 있는 집 딸인 걸 알고 꼬셨겠지? 순복이가 무남독녀 외동딸인 것도 진작 알고 있었겠고?"

눈을 치켜뜬 순복의 아버지가 진우의 얼굴에 시선을 꽂은 채 이죽거렸다. 그리고는 지구전으로 들어가려는 듯 두 팔꿈치를 탁자에 편히 올려놓았다. 눈물이 글썽한 순복은 아예 체념한 표정으로 진우를 향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벙어리가 되었나? 다시 몇 가지만 묻지. 부모님은 계신가?"

"안 계십니다."

"그래? 회사에 다닌다지? 계급은 뭔가?"

"계급? , 직급. 아직 평사원입니다."

"내 그럴줄 알았어. , 톡 까놓고 말할 테니 잘 들어. 이건 안되는 거래야. 거래 취소라구....지금 이 순간부터 순복이에게 손 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빠."

"넌 가만있어. 만약 다시 만나는 일이 있으면 그때는 어떤 불상사가 생겨도 내게 원망을 하지 말어. 알았나? 복창해. 알았나?"

"진우씨. 대답하지 마세요. 아빠, 정말 이러실 거에요?"

순복의 아버지가 진우의 팔을 잡으려는 딸의 어깨를 재빨리 눌러 주저앉혔다. 턱이 아플 만큼 어금니를 깨물었던 진우는 이 상황이 오도록 한 자신이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왔는지 참으로 딱한 일이었다. 죽도록 사랑한 것도 아니었다. 죽도록 외로워서도 아니었다. 꼭 결혼을 하려던 여자도 아니었다. 게다가 돈이나 재산 따위는 신경을 써본 적도 없었다. 그렇다면 누구 말대로 심심풀이 땅콩이었단 말인가? 맹세컨데 그도 아니었다. 이것은 순전히 우유부단한 자신의 성격과 생리적 욕망의 합작품이었다. 아니면 부모형제도 일가친척도 하나 없는 서울 생활의 외로움 탓일지도 몰랐다. 진우는 순복과의 이런 결말은 수미에게서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어쩔 거야? 헤어질 거지?"

이것은 모욕이지 사랑이 아니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이 사랑을 이끌어야지 굴욕적으로 이끌려 다니기는 싫었다. 어차피 이별을 하려고 나온 것이다. 어찌 보면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차마 입을 떼기가 어렵던 문제를 어쩌면 순복이 아버지가 대신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을 멈춘 진우가 고개를 들고 순복 아버지의 눈빛을 맞받았다.   

"그러지요. 다시 안 만나겠습니다."

"진우씨, 안 되요. 우리 아빠 말씀 듣지 마세요. 아빠, 취소하세요. 얼른요."

생각 밖으로 진우가 너무나 쉽게 백기를 들자 오히려 순복이 아버지가 당황한 듯, 기침과 함께 시선을 돌렸다. 죽어도 못 헤어집니다 가 예상한 답이었던 것이다. 진우가 일어서 꾸벅 머리를 숙였다.

"그럼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순복씨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정말로 미안하구요."

"안되요. 진우씨. 이러면 안 되요."

일어서는 순복의 팔을 억센 손이 제지를 하는 것을 보며 진우는 문 밖으로 나왔다. 그 후에 순복에게서 수십 번의 전화가 있었지만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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