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설

파투(破鬪) 1.야간열차(3) 수미

fiction-google 2024. 3. 7.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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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이 열차가 도착할 역은 원주, 원주 역입니다. 원주역에서 하차하실 승객..."

정순복의 생각에 몰두했던 진우는 갑작스런 안내방송에 의자에 묻었던 몸을 벌떡 세웠다. 하차하려는 여자승객이 선반의 비닐봉투를 내려 들고 복도로 나오고 있었다. 순복의 생각을 채 떨치지 못한 진우가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날 밤만 생각하면 까닭모를 죄의식이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것이다. 기차가 멈추자 제법 많은 승객이 내리더니 몇 사람이 올라와 복도의 좌우를 두리번 거렸다. 반이나 빈 좌석을 두고 굳이 자신의 번호를 찾는 것이다.

"형씨, 나 좀 봅시다."

등 뒤에서 누가 진우의 어깨를 탁 치며 말을 걸었다. 가볍게 놀란 진우가 돌아보니 아까 화장실문 앞에서 본 콧대 휜 그 사내였다.

"아까 화장실에서 주운 거 내놓으쇼."

"화장실에서 줍다니? 뭘 주웠다는 겁니까?"

진우가 엉겁결에 사내의 말을 되받았다. 다짜고짜 내 놓으라는 사내의 강압적인 태도가 못 마땅해서였다. 사내가 피식하고 한번 웃더니 가소롭다는 얼굴로 진우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씨발, 어이 형씨, 좋은 말할 때 내놓는 게 좋을거요. 형씨 한테는 아무 소용도 없는 물건 아니겠어?"

"글쎄 무슨 말씀인지 알아야 내놓던지 말던지 할 것 아닙니까?"

"정말 이럴거야?"

"도대체 화장실에서 잃었다는 물건이 뭡니까? 무슨 물건인데 제가 주웠다는 거냐구요?"

사내가 객차의 실내를 얼른 둘러보더니 고개를 숙여 작은 소리로 말하였다.

"총알 말이야. 꿩 총."

"? 꿩 총이요? 엽총을 말씀하시는군요. 아니? 엽총 탄환이 왜 열차 화장실에.."

"쉬이이잇, 아니 왜 큰소리로 떠들구 야단이야?"

"난 또 지갑이라도 잃으신 줄 알았지 뭡니까? 내가 그런 게 왜 필요해서 안 내놓겠습니까? 게다가 보지도 못한 것을요?"

"정말이여? 잠깐 일어서 봐. 일어서 보라구."

여전히 못 믿는 눈치로 진우의 바지 주머니 쪽을 바라보던 사내가 일어서라는 말과 함께 손바닥을 위를 향해 까불었다. 진우가 천천히 일어나 양손을 앞으로 들고 맘대로 해보라는 시늉을 했다. 사내가 한 걸음 다가와 경찰이 용의자를 검거한 후에 무기를 찾 듯 진우의 아래 위를 훑는 것이다.

"나만 이용한 화장실도 아닌데,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좋아 씨발, 없다는 걸 믿지. 형씨, 미안하게 됐소. 다시 찾아봐야겠군. 내겐 중요한 거라서 말이요."

실망한 사내가 뒤돌아서자 진우의 목구멍에서 비로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사실 탄환은 창 밑의 좌석 틈에 끼여 있었다. 조금 전 화장실을 다녀와 자리에 앉았을 때 바지주머니에 넣었던 탄환이 몹시 불편했다. 그래서 티셔츠 주머니에 넣고 보니 이번엔 탄환의 형태가 밖으로 너무 뚜렸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좌석 틈에다 끼운 것이다. 태백에 도착하면 꺼낼 심사였던 것이다.

언제 출발했는지 열차는 다시 고른 엔진 소리를 토하고 있었다. 아까 화장실 바닥에서 엽총 탄환을 발견하는 순간 동시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부랄 친구 덕배와 그의 부친 곽순도씨였다. 어릴 때 그의 집에서 진우가 오발사고를 낸 것이다.

'이럴 때 덕배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그놈이 나를 반겨 줄 놈인데...'

'그 할배가 아직 살아계실까? 마지막으로 본 것이 내가 대학을 들어가던 해였지? 그럼 살아계시다면 지금 몇 살이실까? 가만, 오발 사고가 열두 살 때니까 에 또, 22년 전이군. 그 때 그 할배가 일흔 살이 넘었을 때니 그렇다면 지금은 얼추 아흔하고도 대여섯 살이 아닌가? 아이고 돌아가신지가 옛날이겠군. 한없이 좋은 분이었어...'

'이거 아직 늙지도 않았는데 별 일을 다 겪어보는군. 오발사고에 아, 그러고보면 그날 밤 순복이의 일도 오발사고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아니 그건 순복이가 오발을 유도한 사고였어. 아니야 좀 더 솔직하자. 그건 순복이가 오발을 유도하게끔 내가 순복이를 먼저 유도한 것이었지."

 

크리스마스와 년말년시를 앞둔 명동의 밤은 온통 불빛의 축제였다. 빛을 따라 사람들이 강물처럼 흐르고 상인과 손님들 사이에 한국어와 중국어가 허공에서 뒤섞였다. 인파를 따라 얼마를 걷던 진우와 순복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그만 집으로 가야했다. 열 시가 넘은 것이다.

"젠장, 썰렁한 집으로 가기 싫군. 확 외박을 해버릴까보다."

".................".

진우의 집은 장위동이고 순복은 마포였다. 같은 4호선을 타고가다 다음 환승역에서 순복은 5호선으로 갈아타야 했다. 열차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다음 역이군. 슬슬 문 쪽으로 나가지?"

"........."

전광판의 화살표가 깜박여도 순복은 움직이지 않았다. 열차가 환승역에 닿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릴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인인 듯 진우의 손을 더욱 힘껏 잡을 뿐이었다. 그녀의 그런 태도에 막상 놀란 것은 진우였다.

"아니? 안 내릴거야?"

"외박할 거예요."

진우의 어깨 위로 순복이 재빨리 속삭였다. 그리고는 재빨리 차창 위의 광고판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다. 결국 그날 그들은 돈암동을 지나자 다음 역에 내리고 말았다. 모텔의 객실에 닿을 때까지도 진우와 순복은 말이 없었다. 사실 말은 필요 없었다.   



이틀 후의 일이다. 월요일 치고는 업무가 빨리 끝나서 어학원도 약간 일찍 도착했다. 눈길을 발끝에 두고 천천히 2층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윗 쪽에서 또각거리는 힐 소리가 들렸다.

"어마, 진우씨. 일찍 오시네요?"

윗 쪽에서 순복의 목소리가 들리자 진우가 걸음을 멈추었다. 올려다보니 순복이 혼자가 아니었다. 밝게 웃고 있는 순복의 곁에 웬 여자가 함께 있었다. 순복의 인사에 미쳐 대답을 못한 진우가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무언가를 잠시 망서리던 순복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진우에게 옆에선 여자를 소개하였다.

"진우씨 서로 인사하세요. 이쪽은 여고 동창이예요. , 너도 인사해. 이진우씨라고 이 학원생이셔. 호호."

"어머머, , 잘 생기셨다아, 저는 윤수미라고 해요."

", . 이진웁니다."

계단 중간에서 대강 인사를 마친 진우가 휴계실로 들어섰다. 그가 들어갈 교실은 아직 강의중이었다. 잠시 후에 보온병을 든 순복이 진우에게 컵을 내밀었다. 컵을 받아든 진우가 애써 침착하게 그녀의 행동을 주시했다. 다른 날과 다르게 진우 자신이 순복에게 약간 어색했던 것이다. 그러나 순복의 표정이나 말투가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래서 진우도 약간은 마음이 가벼웠다.

"춥죠? 뜨거워요. 조심하세요."

컵에 차기도 전에 커피향이 먼저 피어올랐다.

"이거 커피 아냐? 웬일이야?"

"웬일은요. 그동안 건강을 핑계로 진우씨의 취향을 너무 몰라라했어요. 식사는 건강을 생각해야겠지만 커피까지는 아닌 것 같아요."

"이제야 좀 통하는군. 기호식품이란 단어가 왜 생겼겠어? 사람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 있기 때문이잖아? 내겐 율무차보다는 커피가 나아."

"알았어요. 진우씨가 좋다면 커피로 하죠. 참 그러고보니 아까왔던 제 동창애는 커피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글쎄 얼마나 좋으면 커피에 밥을 말아먹은 적도 있다잖아요. 호호."

"아무리 좋아한들 밥을? 엥이 진짜 그럴까?"

"요즘은 모르죠. 아까 그 애를 오륙 년 전에 한번 만나고 오늘 처음이니까요. 예전엔 진짜 그랬대요."

"오륙 년만이라면 그 친구는 아직 고향에 그대로 있었나보군."

"아니에요. 그 친구는 여고를 졸업하자말자 대전으로 갔어요. 그 애가 학생 때부터 사귀던 남자가 대전 사람이었다나 봐요. 요즘도 거기 산대요. "

"향이 맛보다 좋군."

"그럼 커피는 맛이 없다는 말씀이죠?"

", 그렇게 되나? 난 맛도 좋지만 향이 더욱 앞선다는 얘기였는데..."

"호호 알고 있어요. 어마 강의 끝났나 봐요."

9시에 강의가 끝나자 평소와 다름없이 순복이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들어가 쉬세요. 이따 전화해도 되죠?"

"내가 먼저 하지. 열한 시 쯤. 나 먼저 간다. 수고해."

"빙판에 조심하세요."



'어쩌면 빙판을 조심하라든 순복의 말은 진우에게 닥칠 결과를 미리 알고 경고를 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맞아, 순복이 말대로 조심했어야지. 빙판을 조심했어야지. 허지만 빙판이 땅바닥에만 있는줄 알았지 인간빙판이 있는지 누가 알았겠나? 그리고 만약 그날밤 그년 자체가 인간빙판인 줄 알았다치자, 그럼 과연 내가 조심했을까? 만약? 만약 좋아하네. 만약이란 변명을 위한 가정일 뿐이지. 그년이 인간빙판인 걸 미리 어떻게 알아? 그년의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빙판 위의 구르는 얼음처럼, 매끄럽게 진행된 연극인 걸 내가 어찌 아느냐고?'



의자의 팔걸이를 베고 누워 봐도 목만 아팠다. 다리까지 펼 수없던 진우가 짜증스러워 다시 왈칵 일어나 앉았다. 나올 것도 없을 터인데 또다시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발로 더듬어 신발을 찾아 뒷 굽을 꺽어 신었다. 복도로 나서니 바로 앞에 식품판매 수레가 오고 있었다. 그 수레를 보는 순간 오줌이 마렵다는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화장실을 포기한 진우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술이었다. 화장실에 꼭 가고싶었던게 아니라 술이 당기던 것이 왜곡되어 짜증과 뇨의(尿意)로 나타난 것이다. 허기야 그동안 마신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또 나올 것이 있겠는가?

"소주 있습니까?"

"소주는 없습니다. 대신 맥주가 있습니다. 드릴까요?"

열차 내에서 소주를 팔지 않는 것은 진우도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소주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말로 뱉어봤을 뿐이었다. 서둘러 캔을 딴 진우가 우선 한모금을 넘겼다. 목구멍에서 위장까지 짜릿한 기운이 내려갔다. 이어서 땅콩을 안주로 캔 맥주 둘을 천천히 비웠다. 소주보다는 못했지만 술에 대한 갈증은 다소 사라지는 것 같았다. 조금 더 마셨으면 싶은 순간 제천에 도착할 것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제천이면 한시간 반 쯤엔 태백에 닿을 것이었다. 열차가 플랫폼에 닿았으나 내릴 승객은 없는 듯 실내는 조용했다. 빈 캔을 스팀커버에 올리던 진우가 좌석 옆에 끼워두었던 탄환에 생각이 미쳤다. 검지로 탄환을 빼낸 진우가 슬며시 돌아앉아 바짓단을 들고 탄환을 양말목에 밀어넣었다. 바지주머니에 넣으면 밖으로 표가 날 것이었다. 열차가 미끄러지듯 스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빙판에 미끄러져 엉덩이나 찧었다면 모를까 이렇듯 내상, 외상에 뇌진탕까지 당하다니. 배신의 끝이 이렇지 뭐, 별 수 있나. 아니 배신이기 전에 인간적인 끌림 때문이었어. 나도 어쩔 수가 없더라고. 순복이와는 다른, 그 뭐랄까, 수미는 내가 찾던 타입의 여자였어.'



학원을 나선 진우가 횡단보도를 건너 지하철역 쪽으로 가고 있었다. 지퍼를 목까지 올려도 몸이 부르르 떨리는 추운 날이었다. 밤이 되자 더 추운것 같았다. 바삐 지하철역의 계단을 내려가며 주머니의 교통카드를 꺼내 들었다. 전철을 타려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진우가 단말기에 카드를 대려는 순간 등 뒤에서 누가 팔을 툭 치는 것이다.

"어머, 벌써 끝나셨나 봐요?"

돌아보니 순복이의 여고동창이라던 그 여자였다.

", . 이제 가세요?"

"이 근처에 볼일이 있었걸랑요. 이제야 끝났지 뭐에요."

", , 이리로 가신다면 먼저 나가시죠?"

진우의 뒤에 몇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진우는 옆으로 비켜서야 했다.

"가실 거면 지금 나가시지요?"

"그보단 우리 어디 가서 잠시 얘기를 나누면 안 될까요?"

"? 무슨 얘기를요?"

갑작스럽고도 생각 밖의 제의에 진우의 눈이 커졌다. 그러면서 아까 들은 이 여자의 이름이 뭐였더라는 생각을 했으나 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머머, 할 얘기가 없겠어요? 나하곤 얘기 할 마음이 없다는 말이겠죠."

", 아닙니다. 그럴리가요?"

"해 본 소리얘요. , 이진우씨랬나? 진우씨 저 술 한 잔 사주세요."

"? 술이요?"

", 안되요?"

"안될건 없지만 늦은 시간에 어쩌시려구..."

"이제 9시 반이예요. 술집으로봐선    초저녁이구요. 진우씨가 안 산다면 제가 사죠. 자 우리 가요."

학원 계단에서 처음 봤을 때 괜찮구나 하는 생각이 설핏 스쳤을 뿐이었는데 밝은 곳에서 보니 미인이기보다 매력 있는 여자였다. 또한 진우로서는 단호하게 거절하기가 어렵게 만드는 얼굴이요 말씨였다. 진우는 극히 짧은 그 순간에 수없이 망설였다. 결국 딱 부러지게 싫다는 말을 못한 잘못으로 끌리다시피 찾아간 술집이었다. 지하의 바에서 위스키 몇 잔을 홀짝거릴 때만 해도 둘 사이엔 별 말이 없었다. 학원은 언제부터 다녔고 회사는 어디며 고향은 어디냐라는 평범한 물음을 두서없이 묻고 답했을 뿐이었다. 그녀가 앞장서서 2차로 들어간 맥주 집에서는 윤수미 라는 그녀의 독백으로 시작되었다.

"순복이 걔 참 착해요. 학교 다닐 때부터요. 근데 나하고는 별로 친하지 않았어요. 아니 나는 걔하고 친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어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학생 때부터 가까히 하기가 웬지 내키지 않았어요. 고향에서 순복이네는 부자였어요. 걔네 아버지는 양조장 사장이었어요. 지금도 양조장을 하고 있다나 봐요. 땅도 많다고 들었어요. 동네사람들이 말하는 걸 들어보면 웬만한 논밭은 죄다 그 집거랬어요. 참 땅 이야기를 하려든 게 아니지. 양조장. 순복이네 양조장에서 우리 아버지가 일을 했거든요. 기술자도 아니고 막일이요. 막일꾼이 뭔지 아세요?"

맹물처럼 느껴지는 맥주잔을 내려놓고 붉게 칠한 그녀의 입술을 보고 있던 진우가 갑작스런 물음에 미쳐 대답을 못했다.

"어머머 내 얘기는 안 들으시나봐? 재미없는 얘기는 그만두라 이거죠?"

", 그럴리가요. 듣습니다. 그 쪽 얘기 듣고 있다구요. 계속하세요."

"피이, 거짓말, 안 들었잖아요. 그리고 그쪽이라뇨? 내 이름이 윤수미라고 말씀드렸으면 이름을 부르는 게 예의 아니예요? 저는 진우씨 라고 불러드리잖아요."

윤수미라는 그녀의 이름을 다시 들어서 진우의 기억을 깨운 것은 좋았다. 그러나 말끝마다 은근한 시비성이 깔린 그녀의 말씨에 오히려 신경이 쓰였다. 초면의 상대에게 제 멋대로 술집에 가자는 것부터 약간은 무례한 말씨까지 진우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벌떡 일어날 마음은 전혀 없었다.

"아까 막일꾼을 아느냐고 하셨지요? , 막일꾼을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어마마, 내 얘길 진짜 듣고 있었네? 어쩜, 진우씨 예뻐 죽겠어."

까르르 웃음을 날리던 윤수미가 진우의 어깨를 잡아 와락 자기 쪽으로 당겼다. 화장품 냄새가 진했다. 당황한 진우가 얼른 자세를 바로했다.

"학교로 오가는 길은 순복이네 양조장을 꼭 지나야 했걸랑요. 어릴 때에도 그랬지만 여고 다닐 때 쯤에는 그 길이 그렇게 싫더라고요. 우리 아버지와 마주칠까 봐서요. 쌀포대를 옮기거나 술통을 나르는 아버지가 그때는 왜 그렇게 보기 싫었는지 몰라요. 어쨋던 그 길에서 우리 아버지나 순복이를 만나는 것이 무서웠어요."

"그럼 부친께서는 아직 거기 근무하시는지요?"

"차라리 그랬다면 좋겠어요. 이제와 생각해보면 제가 바보였죠. 우리 아버지는 제가 여고를 졸업하고 얼마 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거던요. 술 배달을 가시다가 그랬다나 봐요. 그래서 저도 그 후에 대전으로 간 거죠."

"대전에 계시단 말씀은 들었습니다. 그럼 결혼은 대전에 가신 후에 하셨겠군요?"

"어마마, 제가 결혼했다고 누가 그래요? 순복이가 그래요?"

", 아니요, 제 짐작으로다..."

"무슨 짐작을 그렇게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엄연한 처녀예요. 처녀라구요."

화를 낼 줄 알았던 윤수미가 또 다시 까르르 웃었다.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진우씨 우리 나가요. 3차는 소주예요. 우리 소주 마시러 가요."

진우가 뭐라고 그러기도 전에 발딱 일어서 나가는 윤수미의 걸음이 약간 흐트러져 보였다. 계산을 끝낸 진우가 문 밖을 나서니 윤수미는 저만치 앞서 걷고 있었다. 큰길에서 골목으로 꺽어들자 좌우가 온통 술집이었다. 가게마다 고기굽는 연기가 자욱하고 냄새 또한 진해서 술꾼들을 유혹했다. 게중에 곱창집에 사람들이 제일 많았다. 둘은 이끌리 듯 그 집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곱창과 소주 두 병을 시켰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양주나 맥주보다 소주가 제 체질이예요. 맛이 깨끗하잖아요?"

핸드백을 열고 담배를 꺼내든 윤수미가 비밀을 알리 듯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한 개비를 뽑아 입에 물던 그녀가 진우의 코 앞에 담배갑을 내 밀었다.

", 윤수미씨만 피우세요, 저는 안 핍니다."

"뭐예요? 술은 마셔도 담배는 안 핀다? , 받으세요. 술에는 담배가 안주예요. , 얼른요. 그리고 앞으로는 윤은 빼고 그냥 수미라고 불러주시면 되요. 알았죠?"

다시 핸드백의 여기저기를 뒤지던 그녀가 라이타를 찾아 불을 켜서 내 밀었다. 할 수없이 진우가 담배에 불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곱창이 지글거리자 소주잔이 오고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진우보다 술에 대해서는 단수가 훨씬 높았다. 주량이 한 병인 진우가 그녀의 강권에 못이겨 두 병이 넘자 취기가 머리꼭지까지 올라왔다. 벽시계를 올려다보니 열두 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내일 출근할 일이 설핏 걱정이 되었지만 말로 뱉을 수는 없었다.

"? 내일 출근길이 걱정이세요?"

눈이 반 쯤 풀어진 그녀가 헤죽거리며 진우의 얼굴을 장난스럽게 올려다 보며 물었다. 술에 취한 줄 알았던 그녀가 진우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나 보았다.

"아니요. 저보다는 수미씨가 걱정되서 그럽니다. 이만하고 가시죠?"

"아니요. 우리 좀 더 마시다가요. 딱 한 병씩만이요."

"저는 도가 넘은 것 같은데요? 한 병이 제 주량이거든요."

"에이 그렇게 주량을 딱 정해놓고 마시면 술맛이 달아나거든요. 술이란 기분좋게 마시다보면 얼마나 마셨는지 모를 때가 가장 좋은 거예요."

"그렇기야 하지만 수미씨가 너무 취한 것 같습니다."

"아직은 괜찮아요. 그보다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져 해야지.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단 얘기는 아까 했었죠? 배달 가시다가요. , 맞아 했었지. 근데 우리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에 순복이네가 우리 가족에게 해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어요. 나중에 알고보니 산재보험이라는 것도 들지 않았더라구요. 그러니 사고차량 보험회사에서 얼마 나온 것 말고는 없었어요. 그때는 제가 철이 없을 때여서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괴씸한 사람이었죠. 순복이 아버지 말이예요. 그 후부터는 순복이가 더 미웠어요. 솔직하게 말할게요. 아까 미운 순복이를 찾아간 건 돈을 빌리기 위해서였어요. 친구들 말로 어학원에 취직해서 무슨 공부까지 한다더군요. 부잣집 딸이 취직은 뭐고 공부는 또 무엇하러 하는지 모르겠지만 좌우간 여윳돈이 있을만한 친구는 걔 말고 없으니 어떡해요. 결론부터 말하죠. 못 빌렸어요. 돈이 없다나요? 집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없대요. 허니 어떡해요. 좀 더 다녀보다가 저도 돌아가야죠. 서울엔 사촌언니가 살아요. 그 집에 당분간 있기로 했어요. 재미도 없는 제 얘기를 들어줘서 고마워요. 진우씨."

수미가 혼자 키들키들거리더니 다시 까르르 웃었다. 진우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사실 취기로 인해 수미의 말을 다 알아들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 자리가 어서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술병을 빨리 비워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수미가 권하는 대로 몇 잔을 넙죽넙죽 받아 마셨다. 그렇다고 조금 전보다 더 취기가 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꺼꾸로 선 소주병에서 한방울의 술도 나오지 않아서야 그들은 일어났다. 카드를 내밀어 계산을 마친 진우가 비틀걸음으로 화장실을 찾았다. 볼일을 마치고 술집 밖으로 나오니 찬바람과 함께 술기운이 후끈하게 명치 위로 오르는 것이다. 다리는 허공을 밟는 듯 휘청거렸고 머리 속이 하얗게 되더니 눈앞의 모든 불빛이 꼬리를 길게 끌며 돌고 있었다. 진우가 눈에 힘을 주어 몇 번 깜박거리며 사물을 주시했다. 가로등 밑에 수미가 쪼그려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눈앞에 있는 것 같은데 한참을 가야했다.

"어이, 수미씨. 여기서 이러면 어쩝니까. 집으로 가야죠. 택시 잡아 드릴테니 갑시다."

진우가 수미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나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휘청하더니 다리를 꼬며 스르르 무너져버렸다.

"수미씨. 이런, 어이 수미씨. , 이거 참."

진우는 난감했다. 본인 역시 본격적으로 취기가 오르고 있었다. 주저앉아 고개를 떨군 수미를 우두커니 내려다보던 진우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할 것인가? 경황이 없는 가운데서도 어떤 강렬한 욕망이 술기운과 섞여 혼란스러웠다. 가까운 곳에 모텔이 있었다. 겨드랑이로 양 손을 넣어 깍지를 낀 진우가 수미를 일으켜 세웠다. 자꾸만 땅으로 끌어당기는 수미의 몸뚱이를 세워 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할 수없이 한 팔을 잡고 간신히 등을 대어 업었다.    진우는 모텔 방향으로 한 발씩 비틀걸음을 놓았다. 그런데 무엇이 자꾸만 덜렁대며 진우의 아랫배를 치고 있었다. 내려다보니 수미의 핸드백이었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상태일 터인데도 용하게 팔을 굽혀 핸드백을 걸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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