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설

투견판 6. 타락자(6)

fiction-google 2024. 3. 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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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을 마친 조중구가 막 탈의실에서 가운으로 갈아입고 연구실의 문을 열려 할 때였다. 조중구의 눈앞에 이른 나이에 이미 머리에 서리가 앉은 윤정수 실장이 딱 막아서고 있었다. 조중구는 얼른 목례부터 했다.

"안녕하십니까? 실장님."

"안녕은 됐고, 조중구씨 당신 나 좀 봅시다."

실장은 몸을 돌려 자신의 방인 실장 실로 조중구를 데리고 들어갔다.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단도직입으로 묻겠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조중구씨가 자청한 야간 당직 때 쓴 에스로테트라민과 에피네프린 계열의 약품으로 무엇을 했습니까?"

윤정수 실장은 자신의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두 손을 깍지 껴 턱밑에 고이며 안경 너머로 조중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 앞에 선 조중구는 갑작스런 실장의 질문에 잠시 당황했다. 자신이 그동안 만든 신경 이완제와 흥분제의 원료가 차이가 나기 시작하자 이상하게 생각한 직원들이 직접 실장에 보고한 모양이었다. 사실 그동안 그런 문제가 신경이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전에 채워놓으리라 했던 것이 이지경까지 온 것이다.

"회사의 프로젝트 이외에 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분야에 약간의 시간을 투자한 것은 사실이고 그러다 보니 에스로테트라민과 에피네프린을 좀 많이 사용한 점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실장님, 이것도 엄연한 회사적 차원의 일이라고 사료됩니다."

", 그만, 내가 지금 그 일이 개인 일 때문이었냐 회사 차원이었냐를 묻고 있는 게 아닙니다. 또 조중구씨가 개인적으로 행한 연구를 질타하는 것도 아니고요. 나는 다만 조중구씨가 연구실의 규정을 어긴 데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듣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연구실 규정 말입니까?"

"그렇소. 그 규정엔 나를 포함한 조중구씨도 예외일 순 없잖아요?"

윤정수는 콧등의 안경을 구부린 검지로 쓱 밀어 올린 후 새삼 조중구를 향해 정색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 가슴을 쭉 펴서 등을 의자에 천천히 기댔다.

", 그건 저도 압니다만, 그동안 제 개인적으로 쓴 시료들은 즉시 원상복구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회사에서 필요하다면 그동안 연구한 제 개인적 파일은 요점을 정리해서 연구실에 넘겨드리겠습니다."

"아하, 조중구씨에게 얘기의 본질이 잘 전달이 되지 않은 것 같군요. 본질은 그게 아닙니다. 조중구씨도 잘 알고 있겠지만 지난번 안양 시험소에서 탈출한 개들로 인해 무고한 인천 시민의 희생이 얼마나 컸습니까? 솔직히 말해 그때 그 개들이 우리 연구실에서 만든 약 때문이었다는 걸 세상이 알았었다면 동의당은 재기불능의 데미지를 입었겠지요."

윤정수는 그때의 일이 생각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번 일도 그래서 생긴 일입니다. 회사가 위기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던 어떤 연구원이 조중구씨의 개인적 실험을 지켜보다가 시료와 약제가 밖으로 유출된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회장실로 투서를 했다는 게 이 사건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회장님께선 장기 요양 중이라 서류가 잠시 계류한 사이 그 직원이 다시 상무님께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내 개인적 행동을 훔쳐보다니요?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굽니까?"

"내가 그런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도 잘 아실 텐데요. 여하튼 상무님께까지 보고가 되었으니 이제 곧 무슨 후속 조치가 있을 겝니다. 일단 자리로 돌아가 근신하고 있으세요."

조중구는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는 연구실 이곳저곳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십여 명의 직원이 저마다 자신의 맡은 일에 열중해 있을 뿐 고자질쟁이가 누군지 알 길이 없었다.

'까짓, 이미 수중에 약효를 마음대로 조종할 약을 수백 알 쯤 준비를 해 두었으니 문책을 받아도 어쩔 수 없지. 설마 시료를 좀 썼다고 해고야 시키겠나?'

조중구는 느긋한 마음으로 이번 토요일 밤에 검단 투견장에서 벌어진다는 180킬로 괴물 개를 연상해 보았다. 180킬로 짜리 개라니? 위압적으로 버티고 선 도사를 보면 엄청 크고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인간이다. 하지만 그런 도사라도 무게는 기껏해야 80킬로 정도가 아닌가? 그렇다면 180 킬로의 개는 어느 정도의 크기일까? 그리고 그런 개와 싸울 수 있는 개가 있을까?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몇 마리를 상대로 싸울 것인가? 모르긴 해도 도사견이 다섯 마리 이상은 덤벼야 희망이 있으려나?

', 바로 이거로구나. 어쩌면 내겐 이번이 최대의 찬스가 될지도 모르겠군. 사람들의 관심사가 온 통 거기에 매달려 있으니 판돈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 아닌가? 바로 이럴 때 상황을 지켜보다가 베팅이 왕창 몰리는 쪽에 약을 쓴다면? 그렇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가 없지. 게다가 검단에서의 시합에서는 번개같은 현찰 박치기로 한댔으니 나는 왕창 먹고 뛰면 그만 아니냐.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에 알아둔 심 사장 파의 박용칠과 문이수를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겠다.'

조중구가 생각에 빠져들려든 찰라에 여직원인 김양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 상무님실로 곧 오시라는 연락이 왔어요."

"절요?"

"."

조중구는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후 연구실을 나와 상무실이 있는 본 건물로 천천히 걸어갔다. 도금동이 자신에게 직접 전화를 해도 될 일을 공식 라인을 통해 호출하는 걸 보면 분명 그도 이번 일을 잘 알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할 말도 대강 짐작이 갔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지난 몇 주 동안 네가 야간 당직을 한다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은 가지고 있었어. 한데 그게 진짜일 줄이야. , 조중구. , 나까지 속여넘기려 했냐?"

상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도금동이 조중구에게 한 말이다. 그러나 조중구는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이미 마음을 굳힌 바가 있어 오히려 착잡한 심경이 되어 있었다.

", 설마 투견장의 승부를 조작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그런 약을 만든 건 아니지?"

도금동은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중앙의 소파로 나와 앉았다. 조중구도 도금동과 마주 앉았다. 그러는 사이 찻잔을 받쳐 든 비서가 들어와 도금동과 조중구의 잔에 차를 따르고 돌아갔다.

"네가 그동안 땄던 돈을 잃은 것도 알고 있어. 그렇다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네가 흥분제로 승부를 조작할 목적으로 약을 제조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

조중구는 그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가만히 두 손을 감쌌다.

"이럴땐 무슨 변명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사실 나는 그깟 무슨 시료인지 약품이 반출되었다는 보고서 따위는 관심이 없어. 더구나 중구 네가 쓴 시료가 어쨌다는 거야? 하지만 말이다. 지난번 안양 시험소의 사건처럼 그 약이 부작용을 일으켰을 경우를 생각해 보잔 말이지. 또다시 그런 사건이 일어난다면 우리 회사는 이번엔 진짜 끝장나는 것 아니겠냐?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것뿐이란 말이다."

조중구가 말이 없자 더욱 초조해진 도금동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홀짝 마셨다. 그런 도금동을 말없이 바라보던 조중구는 탁자에 찻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네게 걱정을 끼치게 되어 미안하다. 변명은 않겠다. 어차피 투견 판에서의 약물 사용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지. , 서 회장의 승률을 모르지? 서 회장이 그동안 그런 식으로 벌어들인 돈이 아마 엄청날 게다. 그래서 나는 나대로 더 정확하고 신속한 효과가 나는 약을 만들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기 위해서 야간 당직을 자처했던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아 둬. 이번에 내가 만든 약은 안양의 실험용 약과는 차원부터가 다른 거야. 내가 원하는 시간에 효력을 나타내고, 내가 원하는 시간에 효력이 소멸하도록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지난번 사건과 유사한 사고가 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래도 걱정이 된다면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사표를 쓰지."

"뭐라고? 우린 친구 사인데 그런 말로 사표라니? , 이제껏 내가 그런 뜻으로 말했냐?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서 그런 약을 만들었으면 너 혼자만 재미를 볼 게 아니라 나도 좀 끼워줘야 하는 것 아니냔 말이다."

"부자가 돈을 더 따서 어따 쓰게?"

"이거 왜 이러냐? 부자는 돈 쓸데가 없는 줄 아냐?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그야말로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 돈을 따 보고 싶다. 승부욕이랄까? 뭐 그런 거 말이야."

"배부른 소리다. 하지만 나는 널 이해하고도 남지. 한데, 고자질을 한 사람이 도대체 누구야? 연구실 안에서 나와 사이가 나쁜 사람은 별로 없는 걸로 아는데 말이야."

"이거 왜 그러냐? 진짜 몰라서 묻냐? 윤 실장이 아니면 누구겠어? 너와 내가 친구 사이인 걸 아니까 그는 항상 자신의 실장 자리가 불안했겠지. 그래서 직접 일을 꾸민 것 아니겠냐?"

"그렇군. 나도 윤 실장일 거란 생각은 했어. 어쨌든 회사에서 정식 보고서가 올라 간 이상 너도 회사의 임원으로써 나를 정식으로 조사 후에 파면을 시켜서 권위를 세우라고. 이미 난 각오를 한 상태니까."

"이거 왜 그러냐? 그깟 일로 널 파면 시키다니?"

"파면을 시키지 않겠다면 오늘 중으로 자진 퇴사를 하지. 그렇다고 날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러지 않아도 이제쯤 한 곳에 올인을 하려고 했으니까 말이야. 너도 알다시피 사실 월급으로 집구석을 일으키기란 요원한 일이 아니냐? 그러니 걱정 말아. 난 나대로 다 계산을 해서 내린 결론이니까."

"어라? 너 정말 각오를 한 거냐?"

"그렇다니까."

조중구의 확고하고도 침착한 말에 도금동은 오히려 자신이 초조함을 느꼈다.



수요일 아침이었다. 졸업반이라 일찍 방학에 들어간 한열이 게으름을 부리느라 늦게 일어나 세수를 마쳤다. 그리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제 일어났니? 방에서 잠시 기다려라. 곧 아침밥을 차려주마."

"아버진요?"

"지금이 몇 신데 여태 계시겠니? 아까 시흥에서 전화가 와서 차를 타고 나가셨다."

"시흥이면 고씨 아저씨 잖아요? 그분이 아버질 왜 보자셨을까요?"

"글쎄, 난들 알겠니마는 옆에서 들으니 안양의 박 씨와 여기 양 사장 문제로 의논하려는 것 같더라."

", 그렇겠네요. 아직 양씨 아저씨가 돌아오시질 않았으니까요."

한열은 엄마가 차려준 밥상을 들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첫 숟가락을 막 뜨려 할 때 안방에서 전화가 요란하게 울었다. 한열은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달려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한열이냐? , 기동이. , , 테레비 뉴스 봤냐?"

전화를 건 사람은 매일 만나는 친구 기동이였다. 한데 집으로는 좀처럼 전화를 하는 법이 없는 기동이가 오늘따라 호들갑을 떨고 있다.

"뉴스? 무슨 뉴스?"

", 인마. 지난번 고등학생 형들이 미친개들에게 당한 승학산 있잖아? 그 산에 또 미친개가 나타났댄다. 아니, 이번엔 어쩌면 개가 아니라 미친 호랑이란 말도 있어. , 지금이라도 얼른 테레비를 켜 보라니까. 방송국마다 지금 생난리니까."

기동이와 통화를 끝내기도 전에 한열은 TV를 켰다. 채널을 이리저리 바삐 돌리다 보니 기동이의 말대로 한 방송국에서 그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한데 뉴스가 진행되는 동안 갑자기 한열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시청자가 제보했다는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그 사진엔 흐리긴 해도 한열이라면 알아보고도 남을 개가 찍혀 있었던 것이다.

그 개는 두 번 볼 것 없이 태산이었다. 한열은 뉴스의 내용에 집중했다. 뉴스의 내용은 이러했다. 이틀 전 해외 반출을 위해 동물 검역소에서 건강 검진과 광견병 예방 주사를 맞던 개 한 마리가 수의사의 통제를 벗어나 탈출했다는 것이다. 탈출한 개는 하루가 지나도록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는데 어제저녁 검역소에서 직선거리 불과 6킬로에 불과한 인천시 남구 승학산에서 등산객이 보았다는 것이다.

한데 그 등산객이 보았다는 개의 크기가 문제였다. 마침 그가 휴대폰으로 찍어 제보한 사진에는 벤치도 함께 찍혔는데 개와 벤치의 크기를 비교 분석한 결과 그 개가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크다는데 있었다. 호기심을 느낀 한 방송국은 즉시 동물 검역소를 방문해 그 개의 실상을 알아보았다. 어깨 높이가 일 미터가 넘는 데다 체중이 무려 180 킬로의 개였다. 세상에 180킬로 짜리 개가 있다면 누가 믿겠는가?   

이에 놀란 기자는 즉시 방송국에 통보했고 취재가 시작되었다. 방송국마다 제일 먼저 관심을 가진 것은 역시 개의 크기였다. 과연 개가 그렇게 크게 자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전문가들이 나와 토론을 벌이더니 수의학 교수와 동물원 관계자까지 총 동원 되어 그런 개가 있다와 없다로 나누어 갑론을박을 한 것이다.

그 엄청나게 큰 개가 발견된 장소가 또한 문제였다. 인천의 승학산이라면 지난번 미친개들의 공격으로 고등학생들이 집단으로 참변을 당한 곳이기 때문이다. 검역소를 탈출한 어마 무시한 큰 개가 승학산에서 발견되었다는 첫 뉴스가 나가자 이번에도 어떤 감을 느낀 방송국의 취재 차량들이 검역소와 승학산 일대로 몰려들었다.

때로는 엽총을 든 사냥꾼도 보였다. 미친 개의 소동으로 전국적인 망신을 당했던 시장이 이번엔 무고한 시민이 희생이 나기 전에 보는 즉시 사살을 하라고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전대미문의 크기, 지옥의 개>가 나타났다. 이것은 어떤 지방 방송국이 내건 뉴스 타이틀이었다. 한데 다른 방송국에서는 그 개를 호칭할 때 전대미문의 크기는 빼고 그냥 <지옥의 개>라는 타이틀을 썼다. 그 후엔 방송국마다 그 개를 <지옥에서 온 개> 혹은 <지옥의 개>라고 했다.

TV를 끈 한열은 아버지인 배철권에게 전화를 했다.

"아버지, 지금 어디계세요? 지금 뉴스를 보니 태산이가 탈출을 했나 봐요. 총 든 사람들이 승학산을 포위하고 있나 봐요. 어쩌지요?"

한열의 다급한 마음과 달리 전화를 받는 배철권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이미 어제부터 알고 있었다. 그 중국인들에게서 연락을 받았었거든. 동방불패와 우람이는 이미 비행기를 탔다더라. 그러나 태산이가 탈출한 것은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중국인의 말처럼 태산이가 본능에 의해서라도 네가 있는 곳으로 갈 수도 있으니 넌 주위를 잘 살펴봐. 나는 고 사장 박 사장 형님들과 함께 양 선배를 구할 대책을 세울 테니까."

"알았어요. 태산이가 농장 밖으로 나가보질 않아서 길은 잘 모를 거예요. 하지만 어쩌면 제 생각엔 결국 이곳으로 올 것 같아요. 한데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테니 얼마나 배가 고풀까요?"

"괜찮을 게다. 이삼일 굶는다고 끄떡할 녀석이 아니거든."

"그렇긴 하지만 사람들 눈에 띄어 총이라도 맞을까 겁이 나요. 어서 이곳으로 돌아왔으면 해요."

"모든 것은 우리들의 손에서 떠났다는 걸 알아 둬라. 설혹 돌아온대도 태산이는 우리 개가 아니란 말이다."

"저도 알아요. 하지만 태산이가 잘못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잖아요."

"그건 네 말이 맞다. 너도 중학을 마칠 때가 되니 생각도 깊어졌구나. 고 사장 형님에게로 가봐야겠다. 끊는다."

맥없이 수화기를 놓은 한열이 먹으려든 밥상을 보다가 굶고 있을 태산이 생각에 더 이상 수저를 들지 못했다.

"아니? 밥엔 손도 안 댔구나? 너 갑자기 무슨 일이 있니?"

"나중에 먹을래요. 엄마, 나 잠깐 나갔다 올게요."

한열은 엄마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대문 쪽으로 내달렸다. 어디선가 갑자기 태산이가 달려올 것만 같아서 가만히 있지를 못 하겠던 것이다. 대문을 나선 한열은 아래쪽 밭 자리를 죽 둘러보았다. 12월의 밭이라야 무엇 하나 남아있지 않은 빈자리 뿐이었다. 한열은 산모퉁이를 돌아 찻길이 가까운 곳까지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열은 기동이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기동 네 집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그러나 걸음을 잘 걷는 한열에겐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는 거리였다. 한열은 가능한 한 지름길을 골라서 기동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한열은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현관으로 가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한열을 불렀다. 한열이 돌아 보니 생각 밖의 친구인 준석이 뛰어오고 있었다. 둔한 몸매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 내가 널 몇 번이나 부른 줄 아냐? 저기서부터 널 알아보고 불렀는데도 어째 대답이 없냐? 가만 너도 기동이한테 가냐?"

", 기동이가 아침에 전화를 했더라."

"? 여기서 모이자고?"

"아니, 승학산에 나타난 개가 테레비에 나왔다고...."

", 그거라면 나도 봤지. 그 정도의 크기면 개가 아니라 호랑이나 괴물에 가깝겠더라야."

"그건 그래. 한데, 넌 기동이에게 웬일이냐?"

"히힛, 졸업도 하겠다. 어차피 고등학교는 추첨이겠다. 우리가 지금 할 일이 뭐가 있냐? 그래서 기동이랑 영화를 보러 가려고... 어때? 너도 같이 가는 게?"

"돈도 없고, 또 그럴 정신이 없다. 사실은 테레비에 나온 그 개는 내가 데리고 있던 개거든. 그 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극장을 간데도 영화가 눈에 들어가겠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기동이네 집 앞에까지 와서도 영화를 볼 생각에 기분이 좋았던 준석이 갑자기 한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냐는 뜻이었다.

", 지난번 그 고등학생 형들에게 쫓겨서 혼이 난 것은 나도 잘 알아. 하지만 이번 승학산에 나타났다는 개는 그 형들을 물어 죽인 그런 개가 아니라 지옥의 개라고... 지옥에서 온 개만큼 크고 무섭게 생겼대잖아? 그런 개가 네가 데리고 있던 개라고?"

준석은 초인종을 누르는 것도 잊고 한열을 향해 연신 쏘아댔다. 한열은 대답 대신 기동이 네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안에서 기다린 듯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준석이냐? 들어와."

문을 열어주던 기동이가 눈앞에 선 한열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의외의 일이기 때문이다.

", 난 또 준석인 줄 알았네. 아침에 네게 전화를 했지만 이렇게 직접 나타나리라곤 생각 못 했지. 준석이 너도 그래. 한열이랑 같이 온다고 했으면 과자라도 준비했을 것 아니냐?"

"웃기고 있네. 지금이라도 피자나 치킨을 시키면 될 것 아니냐?"

"어엇, 내게 그런 정도의 돈은 없단 걸 알면서 왜 그러냐?"

"그냥 해 본 소리다. 돈이라면 역시 나 아니냐?    내가 있는 한 너희들은 돈 걱정은 말아라. 어제는 우리 할아버지께서 내 졸업 선물로 마음에 드는 시계를 사라고 또 거금을 주셨거든. 히힛, 우리 할아버지는 나라면 아까운 게 없으시다니까...."

준석은 자신의 안주머니를 손으로 툭툭 치며 싱글거렸다. 사실 준석이는 부자인 할아버지 덕분에 용돈이 궁해 본 적이 없는 친구였다.

", 잊을 뻔했군, 기동아 내 말 좀 들어봐라. 한열이가 글쎄 테레비에 나온 개가 자기가 데리고 있던 개라잖아? 넌 얘 말이 정말이라고 생각하니?"

준석이 잠시 잊었던 화제를 다시 꺼냈다. 그러자 기동이는 준석이와 다른 반응을 보였다.

"맞아, 지난여름에 너와 개 농장 사장이란 사람이 도사에 물렸을 때였지. 그때쯤 너의 집도 그 농장으로 이사를 갔었고 말이야. 그때 넌 커다란 강아지를 선물 받았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지. 그 강아지가 테레비에 나온 그 개냐?"

"에이, 그 강아지는 이제 겨우 오 개월로 접어든 강아지일 뿐이야. 그 강아지의 형뻘인 개가 테레비에 나온 바로 그 개야. 이름은 태산이고."

"뭐야? , 그게 정말이냐?"

다시 준석이가 끼어들었다. 준석은 태산이란 개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나타내며 한열에게 한 걸음 다가 앉았다.

"태산이랬냐? 그래, 태산이란 개가 정말로 그렇게 크냐? 무게가 180 킬로가 넘는다며?"

"그 정도 되지."

"어깨까지의 높이도 일 미터가 넘는다며?"

"그렇게 될걸?"

한열의 대답에 준석은 갑자기 손뼉을 치며 만세를 불렀다. 옆에서 그런 준석을 보고 있던 기동이가 한열이를 힐긋 돌아보았다.

", 한열아. 준석이가 왜 이러냐? 개가 엄청 크다는 건 사실이지만 여기서 만세는 또 왜 나와야 하는 거냐고?"

그러자. 준석이 신이나서 죽으려는 것 마냥 손을 내 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그 지옥의 개가 정말로 한열이가 데리고 있던 개라면 어쩌면 친구인 우리도 덩달아 테레비에 나올 수 있는 기회란 말이다. , 생각해 봐라. 지난번 승학산 사건은 전국이 떠들썩했었지. 우리는 어떡해서든 그 개와 함께 사진을 찍어야 돼. 그건 한열이가 있으니 문제없잖아?"

"그래서? 그 사진을 방송국에 보내면 우리를 스타로 만들어 준대?"

"스타까지는 아니어도 우리가 테레비에 나온다는 걸 상상만이라도 해 봐라. 얼마나 신나는 일이냔 말이다."

"그러다 그 개에게 물린다면 어쩔래?"

"뭐라고? , 한열아 그 개도 광견병에 걸린 미친개냐?"

"미치다니? 내겐 아주 온순한 친구 같은 개야. 투견이긴 하지만 말이다."

"투견? , 그 개가 투견이었어? 하지만 그 개를 이기는 개를 본 적이 있니?"

"글쎄, 우리 아버지 말씀으론 도사견 몇 마리쯤은 쉽게 물리친다더라. 하지만 나는 아직 태산이가 다른 개를 물어 죽이는 걸 본 적이 없어. 아니 한번 있긴 했지만… 어쨌든 사람에겐 순한 녀석이니까."

"사람에겐 순하다고? 그럼 잘 됐다. 그 개를 만나면 같이 사진을 찍는데 문제가 없을 테니까. 안 그래?"

"지금 태산이가 어디 있는 줄이나 알면 좋겠다."

한열은 정말로 태산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미친개로 오인되어 총에 맞을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준석이는 이미 태산이와 사진을 찍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집에 있다는 디지털카메라를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디지털카메라가 좋은 점은 크기가 작고 무게가 가벼워서 좋단 말이다. 내일부터 목에 걸고 다녀야겠다. 그 개를 언제 만날지 모르니까?"

"우리 같이 승학산에나 가 볼까?"

기동이가 문득 한 말이었다.

"그거 좋은 생각이다. 이럴땐 극장보다 햄버거를 먹으며 산을 오르는게 좋을 것 같다. 물론 햄버거는 내가 사마. 가만, 카메라. 내가 카메라를 갖고 오지 않았잖아?"

"카메라가 왜 필요해? 승학산에 간다고 그 개를 만날 수 있기나 하냐?"

기동이는 준석이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아냐? 그러다 진짜 태산인가 하는 개를 만날 수 있을지.…"

"꿈 깨라. 이미 경찰과 사냥꾼들이 여러 차례 그 산을 샅샅이 뒤졌다더라."

결국 세 친구는 기동이의 집을 나와 승학산 쪽으로 걸어갔다. 산이 가까워질수록 찬바람이 세게 불었다. 그러나 한열이가 앞장을 서서 모두들 승학산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그곳엔 사람도 없었고 개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 시간에 양구택은 검단에 있는 서유석의 투견장에 있었다. 서유석은 양구택을 납치한 날부터 시종일관 태산이를 데려와야 풀어준다고 공갈을 쳐 왔었다. 이미 회원들에게 이번 토요일에 괴물 개의 등장을 못을 박았기 때문이란다. 물론 다음날 중국인들 손에 개들이 넘어간 사실과 그날 밤 괴물 개가 검역소를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양구택을 풀어주지 않았다. 양구택을 구하려면 괴물 개를 스스로 검단까지 갖고 오라는 연락만 고달수에게 몇 차례 더 보냈을 뿐이었다. 괴물 개가 중국으로 빼돌려져 있다면 모르되 국내에 있는 한 자신의 손에 들어올 것이란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한데 공교롭게도 어제부터 모든 방송국에서 괴물 개에 대해 매 시간마다 전국에 뉴스를 흩뿌려서 이제는 괴물 개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처음엔 괴물 개의 존재가 알려진 것이 찜찜했으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게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 나쁘기는 커녕, 서유석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전 국민이 그 개를 보고싶어 한다. 이렇게 되면 그 개의 몸값은 얼마로 불어나겠는가? 전 국민은 아니더라도 전 회원이 목을 빼고 기다릴 것이었다. 이번 토요일에 반드시 대박을 쳐야한다. 서유석은 재빨리 양구택을 협박했다. 그래서 중국인들보다 자신이 먼저 산 걸로 매매 증서를 꾸며두었다. 이렇게 되면 중국인들이 설혹 그 개를 사고 판 매매 증서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중국인들이 양구택의 이중 매매 사기에 걸린 것이지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할 터였다. 서유석은 오늘 아침에도 고달수에게 전화를 걸어 괴물 개가 돌아오면 즉시 검단으로 싣고 오라고 공갈을 쳤다. 검역소를 탈출한 개가 어디로 가겠는가? 결국 자기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 뻔한 것 아니겠는가?

"어이. 양 사장. 지낼 만 하오?"

황백구 총무가 양구택에게 다가오며 웃음을 날렸다.

"맛있는 밥 먹어 가며 뜨뜻한 곳에서 지내니 어쩌면 내 집보다 낫소."

양구택도 지지 않고 황 총무를 향해 싱긋 웃었다. 그들은 양구택이 지내는 동안 덩치 큰 사내의 감시 속에 살지만 별다른 참견은 하지 않아서 지내기엔 불편함이 없었다.

"아까 태산이가 뉴스에 또 나왔습디다. 한데 말이요. 그렇게 큰 개를 어떻게 아무도 몰래 키울 수 있었소? 나는 그게 가장 궁금합디다."

", 옛말에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잖소? 바로 그거지요. 그 개는 지난여름 동안 이 창고 옆에 있는 공터에서 있었지요."

"뭐요? 그럼. 저 바닷가 쪽에 있던 컨테이너가 바로 그 개가 있던 곳이란 말요?"

"그렇소. 거기서 투견 훈련을 했었소."

황 총무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사무실로 사라졌다. 양구택은 창고를 나와 연변 조선족과 함께 들여온 오부차카가 갇힌 쇠창살로 다가갔다. 그동안 개들은 한 마리씩 갇혀 있었지만 무리 전체를 한 패로 만들기 위해 열 마리 또는 스무 마리씩 한 공간에다 두었다. 그래야 공동의 적을 만났을 때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과정을 거치느라 저희들끼리 서열 싸움에 한창이었다.

"어이, 진가구씨. 아직도 서열이 정해지지 않았나 보오?"

양구택은 품속에서 납작한 양주병을 꺼내 진가구의 손에 쥐어주었다. 양구택이 서유석의 사무실에서 반쯤 마시다 갖고 나온 술이었다.

", 추운데 이걸 갖다 주어 고맙소. 우리는 그저 보드카에 길이 들어서 기양 술은 먹질 못하오. 그래도 이건 보드카에 가까운 술이란 말이오."

"추울 때는 그저 독주가 제일이지요. 내 언젠가 겨울에 연변에 간 적이 있는데 아, 그 추위는 이곳과 비교해서 상상이 안 갑디다. 급히 털옷을 사서 입고도 죽도록 떨던 생각이 나오."

"그래도 그렇게 추워야 힘이 나는 것들이 있잖소? 저 개들 말이오. 저것들은 추울수록 더 신명이 나는 것들이란 말이오."

"내 개도 털이 길긴 하지만 저 오부차카보다는 짧소. 한데 그 개가 갈 곳이 없어 이 산 저 산을 헤맨다고 테레비 마다 떠드니 가슴이 아프오. 지금쯤 얼마나 춥고 배가 고프겠소?"

", 태산같이 큰 덩치에 며칠 굶는다고 죽기야 하겠소? , 개란 동물은 말이오. 눈을 가리고 백 리를 데리고 가도 돌아올 길은 알고 있는 법이오. 두고 보시오. 내 장담하리다. 반드시 당신 농장으로 돌아갈 것이오. 서 사장이 어째서 그 개가 결국엔 자기 수중에 들 거란 걸 아는 지 아오? 서 사장이 나와 함께 흥행사로 데려온 윤일수의 말을 듣고부터 저렇게 느긋하오."

"아니? 그럼 진가구씨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단 말이오?"

"알기만 하겠소? 당신과 거래가 되지 않았는데도 우리 조직이 나를 불러들이지 않는 이유를 모릅매? 히힛 이번 토요일까지 잘 지켜보기요. 그때까지 저 덩치 큰 사내의 감시를 받으며 맘 편케 지내란 말임매."   

양구택은 알 듯 모를 듯한 말의 해석을 하며 창고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덩치 큰 사내 하나가 멀찍이 서서 양구택을 감시하고 있었다.

목요일이 지나고 금요일이 되는 새벽 두 시쯤이었다. 배철권은 이상한 소리에 눈을 떴다. 컨테이너 밖에서 누가 문을 긁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태산이가 탈출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대문 옆 컨테이너 사무실에서 잠을 자는 배철권이었다. 혹시 태산이가 돌아오면 제일 먼저 자신이 돌보기 위해서였다.

배철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플래시를 더듬어 쥐었다. 그리고 문께로 걸어가 밖에 귀를 기울였다. 끄응 하는 태산이의 소리가 들렸다. 태산이는 좀처럼 짖지를 않는 개였다.

"태산이냐?"

배철권은 반가운 마음에 와락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엄청난 덩치가 문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역시 태산이었다. 배철권은 급히 전등을 켜고 태산이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태산이는 집으로 돌아온 것이 기쁜지 연방 꼬리를 설렁대며 배철권에게 머리를 밀어붙였다.

", 그래. 그래. 다친 데는 없냐?"

배철권은 태산이 곳곳을 쓰다듬으며 확인을 했다. 다행히 상처는 없었고 다만 그사이 털 손질이 되지 않아 엉긴 정도가 다였다.

"그동안 며칠을 굶은 거냐? 여기서 잠시 기다려라. 내 가서 사료와 물을 갖고 오마."

배철권은 급히 안채로 달려가 태산이의 사료와 물을 가지고 왔다. 태산이는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것을 만났다는 듯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모든 동물에겐 귀소본능이 있다더니 정말이었구나. 한데 검역소를 탈출한 뒤 왜 곧바로 이곳으로 오지 않았니?"

배철권은 자신이 궁금했던 점을 당사자인 태산에게 직접 물었지만 대답은 듣지 못 했다.

", 이렇게 되면 양 선배의 목숨은 이미 확보가 되었다만 태산일 또다시 지옥 같은 서유석의 투견장으로 보내야 한단 말인가? 아니면 중국인들에게 알려야 하나?"

배철권은 컨테이너 안을 걸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장 내일이 빅 이벤트 경기를 한다는 토요일 아닌가? , 이걸 어쩌지?"

배철권은 머리를 쥐어짜며 묘안을 생각했으나 가슴만 점점 더 답답할 뿐이었다.

"이럴게 아니라 잠시 뒤에 날이 밝으면 일단 고 사장 형님께 알려야겠군. 그래, 그게 좋겠다."

배철권은 이미 깬 잠이라 야전 침대를 접어버리고 태산이의 몸치장을 새로 하기로 했다. 우선 굵은 빗으로 털을 풀어준 뒤 점점 가느다란 빗으로 털을 다듬었다. 끝으로 수건에 물을 적셔 태산이의 얼굴을 닦았다. 한 시간쯤 걸린 노동의 결과로는 썩 좋은 성과를 내어서 태산이는 다른 때보다 더 멋이 있어 보였다.

"됐다. 이만하면 각 방송국에서 몰려든다 해도 걱정이 없겠다."

배철권은 청소가 잘 되어 있는 개장으로 태산이를 데리고 가서 쉬게 했다. 그런 다음 태산이의 털이 흩어진 사무실을 쓸고 닦았다. 벽시계를 보니 그제야 네 시 반이었다. 배철권은 잠을 자기는 늦었고 할 일은 없었다. 그래서 사무실 안을 서성이며 쉐도우 복싱을 시작했다. 운동에 몰입하다 보면 시간이 가장 잘 간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배철권이 혼자서 치고 빠지는 연습에 빠져들고 얼마가 지나자 창 밖이 부옇게 날이 새고 있었다. 그 사이 두 시간이 지난 것이다. 배철권은 그제야 밖으로 나와 다시 한 번 태산이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안채로 들어갔다. 부엌에는 이미 아내가 나와 밥을 짓고 있었다. 아내는 배철권을 보더니 혀를 툭 찼다.

"추운데 안에 들어와 잘 것이지 왜 하필 컨테이너에서 주무셔요?"

"난로를 약하게 틀어도 생각만큼 춥지는 않소. 한데 한열이 이 녀석은 방학에 졸업이라고 마냥 게으름을 부리는 구려."

"그냥 두세요. 이제 곧 고등학생이 되면 공부에 치일 것 아니예요?"

"그야 그렇지만.... 하지만 태산이란 놈이 찾아왔는데도 늦잠을 잔다면 찾아온 태산이가 섭섭할 것 아닌가 말이야?"

"? 태산이가 돌아오다뇨? 정말이요? 아이고 테레비에서 보이던 총든 사람을 다 피해서 무사히 돌아왔군요."

"그렇다니까. 그새 여러끼 굶었었나 보더군. 허겁지겁 사료에 매달리는 걸 보면....."

"한열이를 깨워야겠어요. 한열이가 말은 안해도 엄청 걱정을 하는 눈치였어요."

"그렇겠지...."

배철권은 부엌을 나와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탁자 위에 놓인 전화기를 들어 고달수 번호를 눌렀다.

"고 사장 형님, 새벽 두 시경에 태산이가 돌아왔습니다."

"? 정말이야? 됐다. 구택이와의 협상은 이제 우리가 유리하게 되었어. 내 안양의 철구에게도 알려서 같이 갈 테니까 그때까지 태산이를 잘 지키고 있게나."

". 그러지요. 고 사장 형님."

", 잠깐. 언제부턴가 자꾸만 내 성씨 밑에 사장이란 직함을 붙이는데 그거 영 귀에 거슬리는 말이야. 형님이면 그냥 형님이지 고 사장 형님이란 말은 사전에도 없는 말 아닌가? 당장 고 사장이란 소리를 빼고 대화를 하잔 말이야. 알겠나?"

", 그러지요. 형님."

"그래 그거야. 형님이란 얼마나 부드럽고 좋은 단어인가 말이야."

"그럼 안양 형님과 같이 오십시오. 기다리지요."

"그러세. 모여서 의논들 해 보자고.... , 그 전에 먼저 할 일이 있군."

"? 할 일이라니요? 무슨 일 입니까."

"태산이가 돌아왔다고 중국인들에게 알리는 일 말일세. 사실 태산이의 실제적 주인은 그들 아닌가? 그런 걸 모른 채 하고 친구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태산이를 이용한다면 그것도 불법이요. 우선 상도의에 어긋나는 짓이지. 안 그런가?"

"형님 말씀을 들어 보니 사실 그렇겠습니다. 저는 양 선배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만 앞섰지 뭡니까. 그럼 태산이를 그 중국인들의 손에 넘기는 것이 순서겠습니다."

"일단은 그게 옳은 일이지. 여하튼 내가 그들에게 태산이 소식을 알리겠네. 그런 다음 그들의 조언도 함께 구할 생각일세."

"좋으신 생각입니다. 그럼 저도 그들이 다시 태산이를 실어가도록 준비는 해 둬야겠군요."

수화기를 내려 놓은 배철권은 잠시 난로가에 그대로 앉아 생각에 잠겼다.

'중국인들이 와서 태산이를 싣고 가 버리면 양 선배는 어떻게 구할 것인가?'

'그 전에 중국인들의 동의를 얻어 태산이를 검단으로 싣고가 양 선배와 바꾼 후 신호를 보내 태산이를 번개같이 빼돌릴 수는 없을까?'

배철권이 골똘히 생각에 빠진 사이 한열이 벌컥 문을 열며 들어섰다. 한데, 혼자가 아니었다. 오는 길에 태산이를 같이 데려온 것이다. 태산이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 정말로 태산이가 집을 찾아 왔군요."

"그러게 말이다. 오늘 내로 중국인들이 다시 올게다. 와서 태산일 데려가겠지."

"저도 그럴 거라 생각은 했어요. 하지만 서 사장이란 사람도 태산이를 원하잖아요? 태산이가 없으면 양 씨 아저씨는 어떻게 되죠?"

"글쎄다. 나도 여태 그걸 걱정하고 있던 참이다."

"그래서 말인데요. 제게 한 가지 생각이 있거든요. 그러니 아버지도 한번 들어 보시면 어때요?"

"? 좋은 생각? 그래 그게 어떤 생각이냐? 태산이를 놈들에게 뺏기지 않고 양 선배를 구할 수만 있다면 그 이상 더 좋은 생각이 어디 있겠니?"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단 중국인들이 저희측 말을 따라줘야 하긴 하지만 말이예요."

한열은 아버지인 배철권을 상대로 자신의 생각을 모조리 털어 놓았다. 입을 다물고 가만히 듣고 있던 배철권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네 말대로 한다면 누구에게도 피해가 없어 좋겠다. 다만 중국인들이 우리측의 사정을 봐 주려나 모르겠다. 또 이런 일은 나 혼자서 처리하지 못한다. 고 사장과 박 사장이 곧 온댔으니 그때 새로 의논 하자."

배철권 부자는 안채로 들어가 아침밥을 먹고 사무실로 나와 고달수와 박철구가 나타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런데 그들보다 먼저 나타난 사람들이 있었다. 이 선생이란 중국인과 통역 마량이었다. 이 선생은 이번엔 택시를 타지 않고 커다란 리무진을 타고 왔는데 그 차에서 서너명의 양복을 입은 청년들과 함께 내렸던 것이다. 청년들은 누구의 지시도 없었건만 차를 둘러싸고 사방을 경계했다.

", 두 부자가 함께 우릴 기다려 주셨군요. 반갑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그러지 않아도 태산이가 돌아와 얼마나 마음이 놓이나 모르겠습니다. 태산이는 잘 있습니다. , 한열아 가서 태산이를 데려와라."

", 아버지."

배철권은 이 선생을 사무실로 정중히 모시는 한편 별 탈이 없는 태산이를 보여주기 위해 한열을 보냈다. 잠시 후 한열이와 태산이가 나타나 사무실로 들어갔다. 난로 가에서 보릿차를 마시던 이 선생이 태산이의 상태를 일별하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

"새벽에 돌아왔다고 했지요? 그 사이에 이렇게 털 손질까지 하신 걸 보면 이 개에 대한 선생의 애정이 눈에 보입니다. 대단한 성의 입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통역인 마량을 통해 들은 이 선생의 칭찬에 배철권은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었다. 한열은 다시 태산이를 데리고 나가려다 대문을 들어서는 고달수와 박철구의 트럭이 눈에 띄었다.

"아저씨들 이제 오세요?"

", 한열이구나. 게다가 태산이까지.... 하핫 이제야 일이 제대로 되려나 보다."

두 사람은 사무실로 들어가서 이 선생과 인사를 나누었다. 태산이를 우리에 갖다둔 한열이도 슬그머니 그들 뒤에 끼어들어 대화를 엿들었다.

"사실, 검역소에서 태산이를 잃은 것은 우리측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여러분들에게 또 한번 큰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태산이에 대한 진단서와 광견병 예방증서는 이미 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태산이를 싣고 갈 화물기의 예약을 오늘 했습니다. 고로 내일 오후 여섯 시에나 탑승이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지요. 그래서 지금 태산이를 싣고 갈 트럭이 오지 않은 겁니다. 이거, 참 미안해서 할 말이 없습니다만 내일까지 태산이를 가장 안전하게 둘 곳은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밖에 더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편의를 봐 주신 김에 한번만 더 우리를 위해 애를 써 주십시요. 물론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마량의 입을 통해 들은 이 선생의 말을 고달수와 박철구 그리고 배철권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쩔 것인가를 눈치로 살피고 있었다. 그러자 한열이 얼른 아버지인 배철권을 슬쩍 건드렸다. 배철권은 용기를 내어 여러 사람 앞에서 조금 전 한열에게 들은 생각을 그들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열이의 계획을 쭉 설명 해 나갔다.

"그렇게 된다면 이 선생님께서도 제 시간에 김포공항에 도착할 수 있고 우리는 결국 떳떳하게 양 선배를 구할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서유석이란 사람도 기자들과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더 이상 어쩌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배철권의 말이 끝나고도 사람들은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마량의 통역을 열심히 듣던 이 선생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한열을 돌아보았다.

"아주 간단한 계획이구려. 하지만 제갈량의 재치가 있습니다. 좋소.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보인 성의에 나름대로 보답을 하고 싶으니까요. 그럼, 조금 전 말씀대로 내일 오후 한 시에 어김없이 이곳으로 와 태산이를 싣고 가지요."

이 선생은 몇 번이나 태산이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차를 타고 떠났다.

"이거, 좋은 생각인 건 틀림없어 보인다만 그러다 구택이가 더 위험하지는 않을까?"

"아저씨. 우리가 약속을 위반한 건 아니잖아요? 어쨌든 태산이를 그 아저씨 코앞에 데리고 가니까요. 그리고 태산이를 찍으려고 많은 기자들이 몰려들 텐데 양씨 아저씨를 어쩌겠어요? 제 말을 믿어 주세요. 이제부터 친구들을 동원해 각 방송국에 알릴 거예요. 내일 낮에 검단 투견장에 태산이가 나타난다고요."

"네 친구들까지 동원한다고? 그럼 그동안 우리는 무얼 하면 좋겠니?"

"시청과 경찰에 불법 도박 신고를 하셔야겠지요."

"사실 투견이 불법은 아니란다. 그런데 출동하겠냐?"

"도박이 있잖아요. 경찰이 알아서 찾아낼 거예요."

"그래, 좋다 해보자."

내친김에 한열은 사무실의 전화기로 준석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 준석아, 빅 뉴스다. 태산이가 오늘 새벽에 돌아왔다. 그러니까 네 디지털카메라를 챙겨서 우리집에 와라?"

"어엇 정말이냐? 내 금방 가지. , 난 새로 이사간 너희 집은 모르는데?"

"어디쯤인지 기동이가 대충 알고있다.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거든."

"알았다. 내 지금 택시를 타고 기동이에게 들려서 같이 가마. , 지금, 지옥의 개와 함께 있다는 것에 맹세를 할 거지?"

"그렇다니까. 보고 놀래지만 말아."

전화를 끊고 채 삼십 분도 되지 않아 대문 밖에서 차 소리가 났다. 한 손에 카메라를 높이 든 준석이 기동이와 활짝 웃고 있었다. 한열은 제일 먼저 태산이가 있는 곳으로 친구들을 데려갔다. 기동이나 준석은 기절 직전으로 놀랐다. 세상에 이렇게 큰 개를 눈앞에서 생생히 보다니? 준석은 사진을 찍을 생각은 커녕 넋이 나가 입을 반쯤 벌렸다. 어쨌든 한열의 코치로 태산이가 얼마나 큰 개인지를 보여주는 갖가지 동작을 모조리 촬영한 준석이가 마지막으로 태산이와 자신만을 위해 또 한 장의 기념 사진을 남겼다.

", 네 말대로 태산이 이 녀석이 덩치에 비해 엄청 순하구나. 나는 오줌을 지릴 판인데 말이야."

기동이의 말에 준석이도 동의했다.

"그건 나도 그렇게 느꼈어. 태산이가 지옥의 개란 것은 잘못된 표현이야. 천상의 개라면 모를까... 가만, 이제 이 사진들을 각 방송국에 뿌려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러니까 기동이하고 네가 오늘까지 방송국으로 직접 좀 뛰어다녀야겠다. 그래야 내일 오후에 태산이를 취재하려는 방송국 사람들과 구경꾼들이 몰려들 것 아니냐?"

"좋았어. 네 덕분에 우리가 테레비에 나오게 됐으니 우리도 그만한 보답은 해야지. , 당장 인천 시내에 있는 지방 방송국부터 찾아가자. 가서 이 사진들을 보여 주자고. 택시비 걱정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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