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시간쯤 되었을 때 도금동이 전화로 물어왔다.
"어, 중구냐? 너 또, 퇴근 안 하고 실험실에 혼자 남아 뭐 하냐?"
"할 일이 남았거든. 이것마저 끝내고 가려고...... 한데 넌 지금 어디냐?"
"방금 사무실을 나섰다. 낮에 동우에게서 전화가 왔더라. 이스프리에서 한잔하자고 말이다. 너도 꾸물거리지말고 얼른 나오는 게 어때?"
"아, 난 이 일을 끝내야 해. 내일 실장님께 보고해야 하는 일이거든."
"그래? 별다른 신약 프로젝트가 아닌 바엔 너 혼자 애쓸 필요가 있냐?"
"그렇긴 하지만 먹고 살려니 별 수 있냐? 그 건 네가 잘 알잖아. 동우에겐 다음으로 미룬다고 전해다오."
"알았어. 그럼 다음에 보자."
도금동과의 짧은 통화를 마친 조중구는 잠시 모니터 속의 복잡한 공식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이때의 조중구는 이제껏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을 이미 다 잃어버린 뒤였다. 동생 현구의 장가 밑천을 댄 그 이외의 것들은 모조리 투견 판에서 날려버린 것이다.
최후로 남은 재산인 삼억 원을 잃은 조중구가 다음 시합의 종잣돈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은 주택 담보 대출뿐이었고 그것을 잃은 다음엔 당연히 외제 승용차를 팔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엔 평소에 아는 인물들을 찾아다니며 소액을 빌리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지인에게 빌린 소액의 돈으로는 서 회장의 투견장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몇 억씩 베팅하던 그가 몇 백만 원으로 대세를 되돌릴 수도 없었거니와 자신의 몰락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꼴이었다. 그래서 조중구는 일단 서 회장의 투견장엔 얼씬을 하지 않았다. 대신, 삼 주 전부터 과천의 다리 밑 투견판을 얼쩡거렸다.
다리 밑 투견판이라고 해서 규모가 영 시원치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루에 출전하는 투견들이 대략 이삼십 마리로 열 게임 이상 되었고 판돈도 십여 만원에서 백여만원 사이로 몇 게임만 잘 맞추면 몇 천만 원의 수입은 될 것 같았다. 첫날의 조중구는 사태와 판세가 돌아가는 양상만을 본 뒤 집으로 돌아왔다.
조중구는 그날 밤 깊은 생각을 했다. 투견판에야 어디서든 장난질이 있게 마련이고 또 그런 정보가 없이 돈을 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 아닌가? 생각 끝에 조중구는 자신이 직접 근육 이완제인 톨페리아손과 안양의 실험용 개들을 미쳐 날뛰게 했던 에피네피린 계열의 약을 만들기로 했다.
근육 이완제인 톨페리아손의 제조법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것이었다. 또한 일종의 흥분제인 에피네피린 계열은 이미 프로젝트 자체가 파기되었지만 조중구는 일지 형태의 조합 법을 갖고 있었기에 큰 문제가 없었다. 다음 날부터 조중구는 출근과 동시에 직원들 몰래 소량의 약을 제조했다.
그리고는 주말이 되자 다진 쇠고기에 약을 섞어 잘 말린 다음 호주머니에 넣고 다시 과천으로 향했다. 그날도 투견 판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투견장으로 쓰이는 원형의 철망 밖에는 십 수 마리의 도사견들이 말뚝에 묶여 있었고 사람들의 신경은 온통 투견장 안의 개들에게 쏠려 있었다.
조중구는 묶인 도사견들을 바라보며 특징이 있는 개를 찾기로 했다. 조중구의 눈으로는 모두가 비슷 비슷한 도사들이라 만약 약을 먹인다 해도 시합이 시작되면 헷갈리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조중구는 개의 다리나 몸통에 점이 있거나 몸 어딘가에 깊은 상처 자국이 있는 개를 골라 호주머니를 뚫어 바짓 가랑이 사이로 근육 이완제가 든 말린 고기를 슬쩍 슬쩍 흘리고 다녔다.
그리고는 자신도 관중에 섞여 베팅을 시작했다. 물론 점이나 상처가 없는 개 쪽에 베팅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론을 말하면 그날의 조중구는 서 회장 네 만큼은 아니어도 대박을 쳤다. 다섯 판을 내리 이겨 본전을 빼고도 삼천만 원을 땄으니 말이다. 이에 조중구는 어쩌면 잃었던 돈을 도로 찾을 수 있겠다는 고무된 감상에 젖었다.
조중구는 구경꾼들로부터 다음 시합장이 어디에서 열리는지 알아냈다. 그러나 사실 당시의 투견 판은 전국 어디서나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져 주말의 웬만한 중소도시로 가면 항상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예이, 조중구는 투견에 빠져 판을 떠나지 못하는 허름뱅이 한 명을 알아 두었다. 허름뱅이로부터 투견 판의 모든 정보를 얻는 대신 조중구는 다만 술과 밥에 약간의 용돈을 쥐여주면 상하가 뚜렷해지는 관계였다. 조중구는 오늘은 아예 출근과 동시에 흥분제인 에피네프린을 만들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같은 효과의 약만을 쓰다 보면 쉽게 발각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두 가지 약이 모두 필요했다. 효과 면에서 정 반대의 약효로 이랬다저랬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다가 몇 억만 모이면 다시 서 회장의 투견 판으로 돌아가면 그만이 아니겠는가?
서 회장 네 투견 판에서 마찬가지 수법을 써 볼 작정이었다. 그것도 고달수의 손을 빌리지 않고 단독으로 실행할 계획도 세워두었다. 조중구는 모두 싫어하는 야간 당직을 자청해서 약의 조합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빨리 약효가 나타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약을 먹고 몇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약효가 나타나서는 승패를 장담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결국 단 일주일 만에 만족할 만한 효과의 근육 이완제와 흥분제를 만들었다. 조중구는 이 약들을 다진 쇠고기와 섞어 콩알만 한 크기로 말려서 준비를 해 두었다. 조중구는 일요일인 어제 낮에 군포의 한 폐 공장에서 벌이는 투견 판에 끼어들었다.
군포의 투견장에도 내기에 미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대개 부천이나 안양 시흥 과천 안산 용인 등 경기도 지방의 투견 판을 차례로 돌아다니는 전문 도박사들이었다. 또한 투견으로 나선 개들도 전국적인 기량을 지닌 도사견들이었다.
투견장을 둘러보든 조중구는 말뚝에 묶인 개들 중에 특징 있는 개들을 점찍고 우선 앞 쪽에 대기하고 있던 엄청나게 커 보이는 개를 노리고 근육 이완제가 든 말린 쇠고기를 한 알 바짓가랑이 사이로 흘리고 지나쳤다. 십여 미터쯤 지나 힐끗 돌아보니 바닥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던 개가 그것을 주워 먹었다.
이어서 조중구는 시치미를 떼고 시합장에 끼어들었다. 잠시 후에 약을 먹은 개가 출전했다. 개의 약력이 소개되고 맞싸울 개 역시 링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은 두 개의 덩치가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지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덩치가 큰 개에게 베팅을 했다. 조중구는 얼른 백만 원 뭉치를 꺼내 작은 개 쪽에 베팅을 했다. 약을 먹은 큰 개가 반드시 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십여 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아주 잠시 동작이 멈추는 순간 큰 개는 작은 개에게 급소를 내주고 말았다. 조중구의 승리였고 배당률도 높아서 여덟 배의 돈을 땄다. 다음에는 누가 보아도 왜소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도사를 택해 흥분제가 든 말린 고기를 흘렸다.
결론만을 얘기하면 이 또한 그 개에게 베팅 한 조중구가 엄청난 배당금을 받았을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그러나 조그마한 체구의 도사에게 어디서 그런 폭발적인 힘이 솟았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그 후에도 두어 번 그런 작전을 더 쓰자 조중구의 수중에 삼사천만 원의 돈이 쉽게 굴러들어왔다.
그날 조중구는 좀 더 강력한 약효가 나타나는 약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함께 약효의 지속 시간은 더욱 짧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흥분제의 경우 약효의 지속 시간이 길면 대형 사고가 날 위험이 있었고 종래엔 사람들이 눈치를 챌 것이기 때문이었다.
"학생, 여기가 양구택이란 사람의 집인가?"
배한열이 학교에 가려고 막 대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대문 밖에는 언제 왔는지 택시가 서 있었고 한열을 본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며 그중에 키가 작은 사람이 물었다. 그런데 배한열은 그 사람이 하는 한국말이 어딘가 약간 어색하다고 느꼈다.
"아, 아닌데요? 양씨 아저씨 집은 다른 곳에 있는데요?"
"뭐라고? 그럼 학생은 양구택씨의 아들이 아니란 말이군."
"우리 아버지께서는 이 농장의 관리인이십니다만 양씨 아저씨를 찾아오셨다면 한 시간쯤 기다리시면 여기로 오실 겁니다."
"오 그래? 그럼 일단 택시를 보내고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군."
키가 작은 사람이 옆에 있는 키가 멀쑥한 사람에게 무언가 중국 말로 중얼거리듯 빠르게 말을 하자 듣고있던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나타냈다.
"학생, 학교에 가는 길이지?"
"예, 그런데요?"
"그럼 이 택시를 타고 가게. 돈은 충분히 주었으니까 요금 걱정은 말고...."
"아, 아니요. 걸어가도 가까운 거리거든요."
"아, 그럴 거 없다니까. 어차피 저 차는 빈 차로 돌아갈 것 아닌가?"
"그래도...."
"거 고집이 있군. 그럼 택시는 그냥 보내지."
결국 키가 작은 사내는 택시 운전수에게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택시는 방향을 바꿔 빠르게 사라졌다.
"무작정 여기 길에서 기다릴 수는 없고..... 학생, 우리가 어디서 기다리면 좋겠나?"
배한열은 키 작은 사내의 물음에 대문 안 오른쪽에 있는 사무실을 가리켰다.
"저기 양씨 아저씨의 사무실에서 기다리시면 될 겁니다. 제가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릴 테니까요."
"오, 친절한 학생이로군. 그래 주겠나?"
배한열은 재빨리 대문 안으로 뛰어들어 아버지인 배철권이 있는 안 채로 향했다. 배철권은 아침식사 중이었다.
"아버지, 지금 대문 밖에 양씨 아저씨를 찾는 두 사람이 와 있는데요. 한데 두 사람 다 한국인 같아 보이지 않던데요?"
아들의 말에 배철권은 고개를 번쩍 들고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
"낯선 사람을 함부로 들이면 안 된다. 태산이나 동방불패를 보여서도 안되고..... 가만 이럴게 아니라 그들이 누구인지 내가 가 봐야겠다. 넌 어서 학교에 가거라."
배철권은 먹던 밥상을 뒤로 물리고 벌떡 일어나 대문간으로 향했다. 한열이 역시 아버지를 따라 두 사람이 기다리는 쪽으로 걸었다.
"누구를 만나러 오셨습니까?"
먼저 도착한 배철권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오, 이 학생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구려. 우리는 중국에서 온 사람들로 양구택이란 분을 만나러 왔습니다. 저는 이 분의 통역입니다."
"그 분은 아직 출근 전이십니다."
"아, 그건 방금 이 학생으로부터 들었습니다만 우리는 양구택씨를 꼭 만나야겠으니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키 작은 사내는 자신이 방금 한 얘기를 중국 말로 다시 한 번 재빨리 말 한 후 배철권을 바라보았다.
"그러시다면 사무실 문을 열어드릴 테니 기다려 보시지요. 제가 사장님께 전화를 하겠습니다. 참, 한열이 넌 어서 학교에 가거라."
배철권은 열쇠를 꺼내 컨테이너 쪽으로 향하며 한편 한열이를 돌아보았다.
"예, 아버지.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한열이 두 중국인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대문을 나섰다. 그러자 별말이 없든 키가 멀쑥하게 큰 중국인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무어라 중국 말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거, 근래에 보기 드문 자제를 두셨답니다. 공자의 나라인 중국에도 저렇게 친절하고 예의가 바른 학생을 보기가 쉽지 않은데 말이지요."
키 작은 사내가 얼른 배철권에게 통역을 했다.
"원 별말씀을..... 하긴 제겐 착한 아들입니다만...."
"부전자전이겠지요."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 배철권은 싸늘한 공기를 의식한 듯 먼저 석유난로를 켰다. 불은 윙 소리와 함께 화르르 타올랐다. 배철권은 난로 가로 의자를 당겨 두 사람에게 앉기를 권했다.
"제가 사장님께 연락을 드릴 동안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그러지요. 고맙습니다."
배철권은 사무실의 전화를 쓰는 대신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안채로 향하며 양구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이 시간에 자네가 웬일인가? 그곳에 무슨 일이 있나?"
평소와는 다르게 이른 때의 전화에 무슨 감을 잡은 듯 화들짝 놀란 양구택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그게 아니고요. 조금 전에 낯선 중국인 두 사람이 선배님을 뵙겠다고 찾아왔거든요. 그래서 그들을 사무실에 기다리게 했습니다. 어떡할까요?"
"우리말 억양이 조선족 같던가?"
"한 사람은 아예 우리말을 모르는 것 같구요. 통역이라는 사람도 서투르긴 해도 이북 말씨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거, 이상하군, 고달수 말로는 연변의 조선족이 동방불패를 찾아왔다고 하더구만.... 여하튼 내가 곧 갈 테니까 그 사이라도 그 사람들 눈에 태산이나 동방불패가 눈에 띠지 않도록 조처를 하게. 이거 아차하면 대형 사고가 날 판이군. 어쨌든 내 곧 가지."
양구택과 통화를 마친 배철권은 태산이와 동방불패가 있는 개장으로 향했다. 개장은 추위를 막으려고 보온덮개로 둘러져 있어 안쪽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배철권은 개장의 안팎을 다시 한 번 살피며 단속을 했다. 그리고는 두 중국인이 기다리는 사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안 채의 부엌에서 우람이란 놈이 후다닥 뛰어나오더니 좋다고 꼬리를 흔들며 배철권의 뒤를 따르는 것이었다.
"어? 우람이 네가 웬일이냐? 이거 한열이가 널 묶어놓지 않았구나. 이거 큰일이군. 누구 눈에 띄기 전에 다시 가자."
배철권은 혹여 두 중국인이 우람이를 보았을까 연신 사무실 쪽을 바라보는 한편 우람이를 번쩍 안고 부엌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리고는 아내에게 다짜고짜 말을 쏟았다.
"지금 양 사장을 찾는 중국인 두 사람이 사무실에 와 있소. 이 녀석을 여기다 묶어둘 테니 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우람이를 잘 숨겨요. 그러지 않아도 며칠 전부터 고씨나 박씨와 함께 양 사장도 태산이 문제로 전전긍긍하는 것 같습디다."
"한열이가 묶어둔 걸 제가 볼 일 보라고 잠시 풀어줬어요. 제가 묶을 테니 당신은 식사나 마저 하세요."
"아니요. 사무실로 가 봐야 하오. 양 사장도 곧 도착한 댔으니까...."
배철권은 우람이를 줄에 묶은 후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의 문을 열자 아까와는 달리 후끈한 열기가 넘쳐났다.
"덕분에 이렇게 뜨뜻한 곳에서 기다리게 해 주어 고맙다고 전해 달랍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묻지요. 조금 전 창밖을 보니 선생 뒤를 따르는 개가 있던데 크기는 큰데 영 못 보던 종자더군요, 게다가 아직 어린 것 같고 말입니다. 그 개는 무슨 종자의 갭니까?"
배철권은 가슴이 뜨끔했다. 이들이 조금 전 우람이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모습을 창문을 통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 아무 종자의 개도 아닙니다. 그저 제 아들이 키우는 강아지일 뿐이지요."
배철권은 덤덤한 표정으로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말을 했다. 그러자 배철권이 하는 말을 모조리 중국어로 옮긴 키 작은 사내가 이번엔 키 큰 자가 하는 말을 배철권에게 다시 한국어로 재빨리 쏟기 시작했다.
"강아지라면 그 개가 몇 달이나 된 강아지냐고 묻습니다."
"사 개월 정도 되었지요."
키 작은 사내는 손가락 네 개를 펴 옆 사람에게 무어라 말을 했다. 그러자 그 사내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새삼 배철권을 돌아보았다.
"센마?(什么) 티엔따(天大)...... 오.... 조이 자오갈러(终于找到了!)
"지금 이 분이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배철권은 알 수가 없다는 얼굴로 통역자와 키 큰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분도 놀라신 나머지 하신 말씀이니 깊이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가 제대로 알고 찾아온 것은 확실하군요."
"알고 찾아왔다는 건 또 뭡니까? 아니 그럼 두 분은 우리 아들이 키우는 강아지를 보려고 중국에서 이곳까지 왔다는 말씀입니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어쩌면 이곳의 양구택씨에게도 좋은 일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사장님께서 곧 오신 댔으니 와 보시면 아시겠지요. 그 사이에 뜨거운 보릿 차나 한 잔씩 드시지요."
배철권은 두 개의 컵에 보릿차 봉지를 넣은 후 난로에 불을 붙이는 동시에 올려놓았던 주전자를 들어 잔을 채웠다. 그리고는 먼저 키가 큰 사람에게 그 잔을 권했다. 잔을 받아 손바닥에 올린 그 사람이 코를 가까이해 냄새를 맡더니 입을 열었다.
"따 마에 차(大麥茶)."
"그렇군요. 보리차군요. 추울 때는 이것도 좋지요."
두 사람은 뜨거운 것을 조심스럽게 불어가며 천천히 차를 마셨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대문 밖에서 양구택의 낡은 트럭 소리가 들려왔다. 배철권은 사무실을 나와 대문 쪽으로 걸었다. 대문은 진작에 활짝 열어 두었었다. 양구택은 트럭을 몰고 대문을 통과한 다음 사무실 앞에다 차를 세웠다.
"날 찾는 사람이 아직 사무실에 있는가?"
배철권에게 먼저 양구택이 물었다.
"그럼요. 한데 말입니다. 제 부주의로 우람이가 저를 따라오는 것을 저들이 보았습니다. 그 후 별말은 없는데 선배님을 제대로 찾은 것 같다는 말들이 있었습니다. 괜찮을까요?"
"기왕 그들이 봐 버린 걸 이제 와 어쩌겠나? 하고..... 우선 그들이 누구며 나를 보자고 하는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봐야겠지. 자 들어가세."
양구택과 배철권은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난로 가에 앉아있더 중국인들이 황급히 일어났다.
"제가 양구택이란 사람입니다. 방금 얘기 들었습니다. 저를 만나려고 먼 길을 마다않은 두 분의 성의에 감복했습니다. 그래 저를 보자고 한 이유는 무엇인지요. 참 그전에 두분은 중국에서 무엇을 하시는 분이시기에 저 같은 사람에게 볼일이 있으신지도 알고 싶군요."
양구택은 기선을 잡기 위해 먼저 악수를 청하는 한편 의자를 불가로 당겨 앉았다.
"아, 바로 댁이 양 사장님이시군요. 여기 계신 분은 고위 관료로써 텐진(天津) 지부장이십니다. 그냥 이선생님이라 불러주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통역사로 따라온 마량(马良)입니다."
"오, 그래요? 그럼 그렇게 부르도록 하지요. 한데, 그 먼 곳에서 저를 찾아오신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 주셔야겠습니다. 다시 말해 서로간에 확실한 정체나 알고 대화를 하자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두 분을 마주할 필요가 없는 일일 테니까요."
양구택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마량이란 사람이 옆에 앉은 이 선생이란 사람을 돌아보며 한참 동안을 빠르게 중국 말로 설명을 하는 듯 했다.
"하오데(好的)."
이 선생이란 사람이 새삼 양구택의 아래위를 재빨리 훑어보더니 이번엔 마량이란 통역보다 더 빠르게 중국말을 속사포로 쏟아냈다.
"양 사장의 말이 믿음이 간답니다. 그래서 우리 쪽에서 먼저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서 말해도 좋다고 허락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중국의 삼합회이고 이분은 천진 지부의 책임자이시지요. 이것만 말했으면 우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알았을 테고..... 우리가 양 사장을 만나러 온 것은 이 년 전 양 사장이 옌비엔(延边) 조선족에서 사 온 개를 찾으러 왔다는 것입니다."
"찾으러 라니요? 아니, 내가 그 개의 몸값을 덜 주고 데려온 줄 아십니까? 그 개값은 보통 개값의 수십 배를 주었단 말이요."
"아. 제가 한국말에 서툴러 오해를 하셨나 봅니다. 제 말은 그 게 아니고 그 개가 움직인 루트를 따라왔다는 것일 뿐입니다."
마량이란 사내가 손사래를 치며 급히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그러자 여기에서 분위기를 감지한 이 선생이란 사내가 마량의 어깨를 감싸고 무언가를 다시 의논을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마량이란 사내가 양구택과 배철권을 아울러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서로 간의 말이 다르니 자칫 오해하기도 쉬운 법이니 욧점만 얘기하랍니다. 우리가 무작정 양 사장님을 찾아다닌 건 아닙니다. 양 사장님을 찾은 것은 옌비엔에서 따렌시 까지의 화물기 송장을 추적했기 때문이고 따렌시에서 인천 항만까지는 화물 주의 인적 사항을 알아냈기 때문입니다."
"그렇군요. 내 어쩐지 연변의 조선족하고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소."
"예? 연변의 조선족이라면 지금 검단 쪽에 나와 있는 그 아이들 말씀입니까?"
마량의 말에 이번엔 양구택이 깜짝 놀랐다. 고달수와 박철구로부터 들은 서 회장 네 사육사와 흥행사가 조선족이란 말은 불과 이틀 전에 들었기 때문이다. 이들 중국인이란 자들이 어떻게 벌써 알고 있을까?
"아니? 그럼, 당신들은 그들과 함께 온 것이 아니란 말이요?"
양구택은 미친 척 두 사람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량이 이 선생에게 무어라 중국어로 옮기더니 이 선생이란 사내가 양구택을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그러더니 다시 마량에게 몇 마디를 했다.
"이제부터 자신이 하는 말의 내용만 딱 얘기하랍니다. 제가 하는 소리는 빼고 말입니다."
"시간 끌 것 없어 좋지요. 욧점을 알아야 나도 거기에 맞는 답을 할 테니까요."
양구택이 말하는 사이 이 선생은 이미 마량에게 몇 마디를 하고 있었다.
"단도 직입으로 묻습니다. 조금 전 저분의 뒤를 따라오던 강아지를 낳은 개가 아직 이곳에 있습니까?"
언제부턴가 마량은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에 긴장감 마저 띠며 양구택에게 물었다. 순간 양구택은 망설였다. 이놈들은 삼합회에서 온 놈들이다. 아무리 무식해도 삼합회가 어떤 일을 하는 집단인지 아는 양구택은 실은 그들이 정체를 밝히는 순간 숱하게 보아 온 홍콩 영화가 생각나서 가슴이 뜨끔했던 것이다. 이놈들이 태산이와 동방불패를 내놓으라면 어찌되는가? 태산이와 동방불패는 고달수가 사십억 원에 이미 흥정을 하고 있는 상태가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아직 양도증서에 자신의 도장은 찍히지 않았다.
"있소."
"엇? 저 정말이오? 연변 쪽의 정보에 의하면 그 개와 어미는 양 사장의 친구분이 갖고 있다고 했소."
마량의 통역을 들은 이 선생이 즉각적인 대답을 하자 다시 통역으로 돌려주었다.
"잘 못 안 것이오. 그 개의 어미뿐 아니라 다른 형제 개도 지금 내게 있소."
"양, 양 사장님, 지, 지금, 보, 보여 줄 수 있냐고 묻습니다."
마량이 이 선생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 하며 자신도 흥분에 휩싸였다.
"좋지요. 이보게, 후배. 가서 태산이랑 모두를 데려와 보게나."
"예? 이 사람들에게 보여도 괜찮을까요?"
"괜찮네. 일단 데리고 오게."
"그러지요."
배철권이 밖으로 나가자 이 선생이 양구택을 향해 무어라고 했다. 양구택은 마량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틀 전부터 연변의 사업처에서 자금을 긁어 모은다는 소문이 있지만 그 돈이 모여서 한국까지 오기란 시간이 꽤 걸릴 거랍니다."
"무슨 말씀인지? 연변의 자금은 뭐고 그 돈이 한국에 오는 것이랑 내가 무슨 상관이오?"
"이거 왜 그러십니까? 친구분들의 말씀도 다 들었을 텐데..... 음, 사십억을 제안하셨다지요?"
"그건 개 주인인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 정한 금액이오. 나는 두 마리가 오십억의 가치는 하고도 남는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란 말이요."
두 사람이 말하는 내용으로 보아 이미 연변 쪽 정보는 쥐고 있는듯해서 양구택은 이때를 이용하여 좀 더 높은 금액을 은근히 끼워 넣었다.
"보기보다 장사 수완이 좋구려. 그러나 장사 수완과 달리 욕심이 많은 것은 장사를 오래 할 타입은 못 되지....."
"예? 제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틀렸다기보다는 조선족놈들이 제시한 삼십억을 동원하는데도 벌써 이틀이 걸렸다면 당신 친구나 당신이 요구하는 사십억이나 오십억 원을 어찌 쉽게 마련하겠소? 그것은 벌써 매매할 정당한 시간을 잃은 것이고 또 다른 상대가 있으니 어차피 못 살바엔 이제부터는 힘으로 뺏으려고 덤빌 것이란 말이요."
"아니? 연변의 조선족에게도 조직이 있다는데 그만한 돈이 없을라구요. 그리고 다른 상대란 누굴 말하는 겁니까?"
양구택의 말에 두 중국인은 마치 한 사람인 듯 작은 사내인 마량만 죽어라 빠르게 한국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서 회장의 아들인 서유석이 한국 땅 안에서는 일인자로 군림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한국은 다만 합법적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장으로써의 신분만을 내 세우지만 말이요."
바로 그때 창밖에서 앞장을 서서 걸어오는 태산이와 동방불패가 보였다. 우람이는 목줄 없이 배철권의 옆에 붙어 뛰어오고 있었다.
"아(啊), 주시 제거 (就是这个) 워 신차오 데 펜거(我寻找的风格) ."
"바로 이것이 자신이 찾던 놈이랍니다."
마량이 연속해서 이 선생이 하는 말들을 일일이 통역으로 중계해 주었다. 문이 털썩 열리며 찬바람과 함께 세 마리의 개가 컨테이너 안으로 뛰어들자, 가뜩이나 넓지 않은 사무실이 미어터질 판이었다. 태산이와 동방불패는 그동안의 한열이와 배철권의 교육으로 어느 정도 통제가 되나 아직 어린 강아지에 불과한 우람이가 문제였다. 우람이는 호기심이 가는 곳은 반드시 엎어보고 물어뜯어 보아야 했다. 그럴 때마다 마량은 다만 강아지일 뿐인 우람이를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이 선생이란 자는 태산이와 동방불패의 이모저모를 바라보며 점수를 먹이고 있었다. 그러다 통역인 마량을 시켜 개들을 나가게 했다.
"됐답니다. 개들을 밖으로 내치시지요."
배철권이 먼저 밖으로 나가며 휘파람을 가볍게 불자 세 마리의 개들은 바람처럼 문 밖으로 달려나가 마당을 뛰고 있었다. 배철권은 빠른 속도로 개장으로 돌아가 개들을 단속하고 돌아왔다.
"철창은 확실히 닫았나?"
"그럼이요, 눈이 오니까 개들이 반가워 해요."
"그새 또, 눈이 온다고? 올 겨울은 아예 눈으로 시작해서 눈으로 끝장을 보려 하는군."
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엉성한 바람탓에 네 사람은 처음의 당당함은 어디로 사라지고 각자 구명도생의 길을 찾아 난로 주위로 몰려 앉았다. 난로는 위력을 발휘해 사람들을 차차 자신의 주변에서 몰아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중국인 두 사람은 무슨 말인가를 끊임없이 주고받고 있었다.
"양 사장님, 우리 이 선생께서 물건을 확인한 이상 시간을 지체할 일이 아닌 것 같답니다. 고로 지금부터 제 말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물건이라면 방금 본 내 개들을 말하는 건가?"
"애초에 연변 조선족들은 대륙에서 활약하던 슈퍼 개의 어미를 찾아 한국으로 왔고, 우리 삼합회는 새끼를 밴 그 어미를 사간 한국인을 쫓았습니다. 결국 조선족과 삼합회는 같은 목적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견물생심(見物生心)이 생기기 마련...... 조선족이 어미 개와 함께 아들 개를 삼십억 원에 인수하고자 한다는 정보가 들렸었소. 그럴바엔 양 사장이 직접 내게 파시오."
"삼십억? 삼십억은 그쪽에서 제시한 금액이고 내 친구는 두 마리에 사십억을 불렀다고 하오. 물론 그 말을 들은 나는 불만이지만 말이오."
"사십억이 불만이다? 그럼 양 사장의 생각은 얼마를 받는 거요?"
"두 마리 합해 육십억 원을 받는 것이오. 아들 개는 당장이라도 충분히 돈을 벌 수 있고. 어미 개는 계속 그런 챔피언 개의 후손을 낳을 수 있다는 걸 당신들 눈으로 보지 않았소? 아까 그 넉 달 된 강아지 말이오."
"바로 그것이오. 사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바라는 것은 아까 본 그 강아지만 손에 넣었으면 하오, 왜냐하면 개의 어미나 큰 개의 상태는 이미 연변 조선족에게 정보가 드러났으니 또다시 백주에 쟁탈전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란 말이요."
이 선생이 잠시 추춤하며 생각에 빠지는 듯하자 통역기인 마량도 이 선생과 꼭 같은 흉내를 내고 있었다.
"좋소, 차라리 이렇게 합시다. 금일 내로 당신 통장에 입금을 시킬테니 서로 확인이 되는 데로 개를 싣고 떠나는 걸로 하겠소이다."
"가만, 성질이 급하시군. 개라면 어떤 개를 얼마에 사서 떠나겠다는 확실한 말씀이 없었소."
양구택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싱긋 웃자 두 사람도 덩달아 배철권까지 돌아보며 웃었다. 그렇다. 아직 아무런 결정적 약속이 없었던 것이다.
"당신 말대로 어미와 아들 개에 육십억을 주겠소. 대신 내게도 조건이 있소."
"무엇이오?"
"조금 전에 본 그 강아지는 아직 누구도 존재를 모르는 듯하니 그 강아지까지 우리가 사는 조건이라야 하겠소. 괜스레 경쟁 상대를 남겨서는 후회할 날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오."
"옳으신 말씀, 봉룡(鳳龍)을 살 바엔 봉추(鳳雛)도 함께 사시겠다?"
"허, 우리 중국인들의 마음을 조금은 아시는 구려."
"하지만, 그 강아지는 내 소유가 아니요. 이 사람의 아들이 그 강아지의 주인이오. 그러니 내 마음대로 그 강아지를 판다는 소리는 못 하겠소."
양구택의 말이 전연 예상 밖이어서인지 이 선생과 마량은 동시에 배철권을 돌아보았다.
"엇? 그래요? 아들이라면 아침에 본 그 학생을 말하는 것이군요. 그럼 당신 아들의 강아지이니 당신이 대답해도 좋겠소. 그 강아지 값으로 별도로 이십억 원을 주겠소. 내일 한꺼번에 모두 운반하도록 해 주시겠소?"
삼십억. 이십억이란 액수에 기가 질린 배철권이 무어라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슬그머니 얼굴을 들어 양구택을 바라보았다. 양구택은 그런 배철권에게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얼른 확답을 하란 말이었다.
"육십억에 따로 이십억 원이면 개 값으로는 엄청난 금액이오. 또한 일시불로 그렇게 많은 돈을 제안한 사람은 없을 것이오. 요즘 웬만한 사업하는 중국인도 선뜻 투자하기 무거운 돈이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베이징을 중심으로 상하 수천 킬러미터를 이미 투견판을 벌려놓은 천진파요. 한다면 하오. 어떻소?"
"오, 이 선생이 그러시다면 저희들은 일이 쉽지요. 분명 두 마리에 한국돈 육십억이라고 하셨지요? 그 돈이면 제 동료들의 입을 막을 수 있을 겝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양구택은 재빨리 사무실을 나와 자신의 트럭에 올라타며 먼저 시흥의 고달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도 양반 되긴 진작에 틀린 놈이다. 여긴 지금 서유석 패거리들이 들이닥쳐 개장의 안팎을 쑤시고 지랄났다."
"물론, 태산일 찾겠다고 염병을 하는 것이겠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제부터는 내게 없다는 걸 알았으니 철구에게로 가겠지....."
"철구에게 연락은 했냐?"
"당연하지....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한다며?"
"잘했어. 그 소동이 잦아지는데로 철구랑 둘이서 우리 농장에 얼른 와라."
"좋은 뉴스라도 있어야 가는 거지. 집구석이 쑥대밭이 된 놈이 무슨 기분에 거길 간다고 가냐?"
"내게 태산이를 사려고 중국에서 직접 바이어들께서 내왕해 와 계시다. 잔말 말고 빨리 와. 네놈들과 의논이란 것도 해 보아야 할 것 아니냐?"
"알았어. 곧 가마. 에라이 새끼들아, 실컷들 뒤져봐라. 우헤헤."
전화기 너머로 고달수는 통쾌하게 웃고 있었다. 서유석의 똘만이들이 농장 안을 돌아다니니 개들이 짖는 소리와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그야말로 개판인듯했다. 양구택은 박철구에게 하려 든 전화를 그만두었다. 고달수에게 같이 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양구택이 사무실로 다시 들어서자 배철권이 슬그머니 옆으로 왔다.
"사장님, 아직 이른 시간인데 사장님이나 저들이 아침을 들었을 리는 만무하겠지요?"
"응? 그러고 보니 그렇고만. 이 보시오들. 아직 아침을 먹지 않은 듯하니 무엇을 시켜 먹읍시다. 나 역시 여러분을 만나려다 보니 아침을 못 먹었소."
양구택의 제안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데, 후배, 지금이 아침인데 무얼 먹지?"
"글쎄요, 중국집에선 거의가 낮 장사고 또 실제로 한국 사람 입맛에 맞춰 장사를 하잖아요? 그러니 저런 중국인들이 먹을 만한 메뉴가 있을라구요?"
"그건 그래. 그럼, 어쩐다?"
"어쩌긴요. 이들은 어차피 우리들 손님이니 집에서 간단하게 김치볶음밥이라도 대접하면 되겠지요. 김치볶음밥이라면 저도 자신이 있으니까요."
"어, 그건 그런데.... 그건 먹을 손님에게도 물어보고 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야?"
"그럼 제가 물어보지요. 저, 손님들 아침밥을 시키기가 번거롭습니다. 그냥 저희랑 여기서 한끼 해결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배철권은 아예 우리말을 모르는 이 선생이란 사내를 제쳐두고 통역사인 마량에게 운을 떠 보았다.
"아까부터 당신들 하는 얘기는 다 듣고 있었소. 김치볶음밥이 무엇인 줄 몰라도 기대가 큽니다. 같이 먹는 영광을 우리에게도 베푸시기를....."
"그렇다면 되었군. 내가 가서 김치랑 재료를 얻어 오지요."
배철권이 안 채를 두어 번 뛰어다니자 사무실의 석유 불이 주방 화덕으로 변했다. 돼지고기가 익고 김치가 볶이며 밥이 들어가자 여러 사람이 휘 젖기 시작했다. 네 사람은 그대로 선 채로 식사를 했다. 그것도 김치볶음밥을 아침으로.…
"공동의 노력이 들어서인가 더 맛이 좋았던 것 같소. 한식을 우습게 봤더니 맛도 아주 좋았소, 조금 짠 것만 빼면 천하 일미였소."
이 선생의 논평이었다.
"우리 중국 사람은 배가 부르면 흥정과 거래가 더 잘 되는 민족이요. 자, 양 사장, 우리 아까 하던 거래를 마저 끝냅시다."
"아까는 흥정이었고 이번이 거래다? 좋습니다. 여기 필기류가 있으니 문서로 작성을 하시지요."
양구택은 배철권을 시켜 백지와 펜을 준비시킨 뒤 의자를 모조리 끌어다 책상에 붙였다. 서류는 마량이 한글을 함께 쓰기로 했다.
"자. 내 개의 어미 이름은 동방불패라고 합니다. 그 아들 개는 중국의 태산 같다 하여 태산이라 지었지요. 우선 동방불패를 얼마로 쳐 주시겠습니까?"
"이십억 원을 드리지요. 만약 작은 강아지를 보지 못했다면 십억도 큰 모험이겠지만..... 그리고 큰 숫캐는 솔직히 말해 정말 탐이 납니다. 한 푼 안 빼고 양 사장님이 달라는 사십억을 다 드리지요. 개중엔 조선족이나 한국계 조직에게 넘기지 않았으니 보너스의 성질도 있다고 봐야겠지요."
"좋습니다. 그럼 돈은 언제까지 확실하게 들어옵니까?"
"오늘 내가 본토로 연락을 해 보고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입니다. 양 사장, 우리는 조선족 아이들처럼 돈에 궁한 사람들이 아니요. 그때까지 서류와 개들의 경호를 그쪽이 책임지고 맡으시오."
"좋소. 그런 점에선 문제없소. 여기 후배인 배철권은 한국에선 그야말로 무적의 권투 선수였소. 잘 지킬 것이요."
이 선생과 양구택은 새삼 기분 좋게 악수를 했다.
"아까 본 강아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아, 우람이 말씀이군요. 그 강아지라면 확실하게 못을 박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강아지는 제가 이 후배의 아들인 한열 군에게 무상으로 주었습니다. 그러니 그 개에 대한 소유권이나 팔 수있는 모든 재량권이 이 후배의 아들에게 있단 말입니다. 저는 그 개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양구택은 양심상 자신의 손을 떠난 우람이가 자칫 이 흥정에 도매급으로 휩싸일까 겁을 냈다. 언젠가부터 고달수나 박철구가 은근히 우람이를 눈독 들이는 걸 볼 때면 더 했다.
"사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우람이는 한열이가 기르는 강아지지요. 그러나 그 녀석은 돈을 알기엔 너무 어린 나이라 팔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십억 원을 준다는 데도 말이오? 가만히 보니 한국에선 모두들 일억 원을 너무 우습게 아는 것 같습디다. 그 학생이 만약 이십억 원의 돈을 가진다면 부모가 어디서든 걱정 없이 살고 자신은 중국 최고의 명문 대학인 베이징 대학에서라도 공부를 마칠 수 있는 돈인데 말이오? 뿐만 아니라 하버드에서 박사까지 딸 돈이 되고도 남소. 허허허."
이 선생이란 자는 가소롭다는 듯 양구택과 배철권을 바라보았다. 이 선생은 개 장수에 불과한 이들이 무엇을 믿고 억이란 단위를 쉽게 입에 올리는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한마디로 가소로운 민족인 것 같아서였다.
"택시를 부르자면 어찌해야 하오?"
이 선생의 눈치를 살핀 마량이 어설픈 웃음을 웃으며 배철권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제가 이곳까지 불러드리겠습니다. 잠시면 됩니다."
배철권은 곧바로 콜택시에 전화를 걸어 주소를 불러주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 편히 말씀하시지요."
"우리 주인이 우람인가 하는 강아지만 판다고 했으면 그 강아지만 데리고 벌써 떠났을 겁니다. 괜스레 큰 개들을 인수하느라 아차 하면 연변 조직이나 한국 조직과 먼저 접전이 있으면 곤란하거든요."
"그렇기도 하겠습니다. 하지만 아들의 의사를 영 무시할 수도 없으니...."
"아아, 난 그런 건 모르겠소, 당신 아들에게 잘 얘기해서 작자가 나설 때 팔도록 해 보시오. 학생은 공부가 제일이지 개싸움이 뭐란 말이요?"
마량의 말에 이번엔 양구택이 대신 나섰다.
"마 선생 말이 옳소. 나 역시 자식놈은 공부를 좀 했으면 하오. 이 사람도 말해 보겠지만 한열군이 돌아오면 나도 타일러 보리다. 살 사람은 있을까요?"
"무슨 소리. 당장 우리 이 선생이 이십억 원을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조선족에게 흥정을 해 볼 생각은 마시기 바랍니다. 당장 삼십억을 못 구해 기일을 연장시키는 그들인데 더구나 강아지까지 돈을 주고 사려고 하겠습니까? 오늘 저녁 다시 한 번 연락드리지요. 그때 모든 흥정이 끝나면 내일 선생 통장에 입금이 될 것이고 이 서류와 개를 바꾸어 실어갈 것이니까요."
마량은 이 선생과 함께 택시를 타고 떠났다. 떠나기 전 누누이 당부하기를 내일 정오까지 송금액을 확인 하란다. 양구택과 배철권은 사무실로 들어와 앉았다.
"후배. 나는 말일세. 평생을 개를 기르고 잡아 보신탕용으로만 팔아봤지 투견은 난생 처음일세."
"예.…"
"그래서 그런지 투견 판이란 곳이 생각보다는 영 복잡하고 절차가 까다롭구먼. 게다가 생각지 않은 건달들까지 끼어드니 한마디로 힘이드네. 그러니 스포츠맨 쉽이 강한 자네는 더 견디기가 힘들겠어."
"그건 지난번 서유석의 사건으로 이미 각오한 바입니다만...."
"그래도 그렇지. 자네 나이에 한열이의 공부를 뒷바라지하려면 엄청난 돈이 들 텐데 무작정 몸을 앞 세워서 버는 것도 한도가 있는 걸세."
"저도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사실 그걸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벗어날 길이 없는걸요?"
"왜 없어? 조금 전 그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았나? 자네는 내 말 듣게. 우람이를 중국인에게 넘기게. 이십억을 준다지 않던가? 이십억이면 자넨 단 참에 부자일세. 시내에 건물을 사서 자네의 식당을 차린다면.....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일세."
"하지만.... 한열이란 놈이 우람이를....."
"시끄럽네. 아까는 그들이 있어 내가 차마 말을 못했네만 태산이도 동방불패도 다 팔려나가면 이 농장에서 자네가 할 일이 뭔가? 나 대신 식용 개라도 길러 볼 텐가?"
"예? 그, 그건....."
"보게나, 당장 내가 일을 그만두면 자네의 직장까지 걱정해야 하는 처지 아닌가? 한열이를 설득하게. 한열이를 기껏 개싸움꾼으로 키울 것인가? 만약 한열이와 우람이가 길거리 투견판을 누빈다고 생각해 보게. 그게 어디 될 말인가? 그리고 지금 상황으로선 학생이 그런 큰 개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도 본인의 신상에 좋은 점이 없어."
갑작스러운 양구택의 말에 배철권은 턱에 강한 크로스 펀치라도 맞은 듯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양구택의 말은 일일이 모두 맞는 말이요. 현실을 직시한 충고였다. 자신의 치매가 언제 또 재발할지 모르는 불안한 이 상황에서 언제까지 이런 직업에 만족해야 하나를 이미 여러 번 생각해 본 이후이기 때문이다. 양구택이 사무실을 나간 후 배철권은 점점 더 몸이 쪼그라져 몸을 의자에 동그랗게 말다시피 했다.
‘그렇다. 우람이도 처음부터 우리 개, 아니 한열이의 개가 아니었다. 우람이의 몸값이 엄청나게 뛰었다고 해서 한열이나 내가 좋아할 일이 아니지 않는가? 공부를 해야 할 한열에게 그런 엄청난 개도 필요 없지. 좋다. 이건 아비로서 독단으로 처리할 문제다.’
배철권은 사무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선배님."
배철권은 자신의 트럭에 올라 대문을 주시하던 양구택을 불렀다.
"추운데 올라 오게나."
배철권은 두 말 없이 조수석으로 올라앉았다.
"혼자서 생각 좀 하라고 나왔더니 보나 마나 스포츠맨답게 벌써 결론을 내린 것 같군."
양구택이 배철권 쪽은 바라보지 않고 말했다. 그의 눈길은 이제 곧 불쑥 나타날 고달수에게 있는 듯했다.
"예. 선배님. 선배님 말씀이 백 번 옳습니다. 제가 살고자 하는 것과 제가 일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한열이 한 녀석 때문이지요. 사실 그런 녀석에게 우람이를 주셨을 때만 해도 생각 좀 해 보고 결정하자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녀석이 워낙 강아지를 좋아해서.... 그리고 오늘날 같은 사태까지 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겁니다."
"그래서?..... 내 말대로 자네도 우람이를 팔 것인가?"
"예? 제가 팔다니요? 애초에 선배님의 강아지였지 않습니까? 그러니 일단 한열이에게 허락을 받은 걸로 치고 선배님께 돌려드리는 거지요."
"그건 안 될 말일세. 아무리 내것이었다 해도 한 번 주기로 약속하고 한 번 주었으면 이미 내 것이 아닐세. 특히나 산 생명을 주고 받는데는 더 엄격한 기준이 필요하단 말일세. 우람이의 주인과 보호자는 어디까지나, 한열이며, 자네일세. 자네가 팔게. 물론 돈도 두 부자가 알아서 할 일이고....."
"그, 그건, 안될 말입니다.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어찌...."
"뭐야? 자네는 오늘의 사태를 잘 알지 못하는군. 나나 내 친구들이 대망의 꿈을 안고 태산이를 투견판에 앞세워 돈을 벌려 했던 것은 사실이지. 그럴 때 자네 역시 내 뜻에 동조했어. 그런데 태산이를 투견 판에 내 보내기도 전에 국내외 조직들이 우리 개들을 노리니 자칫하다간 놈들의 알력에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공산이 크단 말일세. 다시 말해 우물쭈물 여기서 시간을 더 끌면 모든 걸 잃을 것이 뻔히 눈에 보여서 그런다고."
"아까 왔다간 중국인들이 다가 아니란 말씀입니까?"
"어제 검단지구에 갔다 온 내 친구들의 말을 들어보니, 중국에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든 태산이의 형 뻘인 괴물 개가 죽었다더군. 그러니 그 개를 낳은 어미를 찾다보니 나를 찾게 된 모양일세. 조선족은 동방불패를 사 간 사람을 무작정 찾아다녀서 고달수가 그 개를 사 온 사람인 줄 알고 있다네. 반면 본토의 삼합회는 화물 송장만 가지고도 진작에 나를 찾아서 관찰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우리가 그동안 남에게 태산이나 동방불패를 보인 적이 없는데도 말입니까?"
"자네도 기억하지? 태산이가 박철구네 개를 물어 죽이자 내가 쌍태란 놈에게 그냥 가져가라고 전화를 했었지."
"그럼요. 그 전날에도 두 마리를 그냥 주셨잖습니까?"
"음, 맞아. 바로 그 쌍태란 놈이 모든 개 장수들에게 뻥을 치며 내가 사자를 키운다고 소문을 냈지 뭐야? 그래서 도사가 한꺼번에 다섯 마리나 물려 죽었다고 말이야."
"그래서요?"
"그래서는 무슨.... 진작에 내가 있는 곳을 탐색하던 중국인들이 그걸 못 알아먹었겠나? 도사를 몇 마리씩 물어 죽일 만한 개를 내가 키우고 있다는 걸 알았겠지."
(양구택은 난로가 뜨거운지 의자를 조금 뒤로 밀었다. 배철권이 얼른 석유의 노줄을 약하게 돌렸다.)
"내일 통장에 입금이 되기 전에 중국인들과 다시 한 번 협상을 할 것이네. 이런 일은 사실 동업자인 내 친구들과 의논을 해서 해야 옳은 일이거든. 이럴 때일수록 서로가 돈 욕심에 사로잡히면 큰일을 망치기 십상이란 말이야. 돈으로 친구를 살 수는 없지 않나."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보잘 것 없지만 저 역시 선배님의 사업에 보탬이 되고자 하여 합류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람이도 선배님이나 다른 분들과의 공동 재산이 아니겠습니까?"
"뭐라고? 그건 그렇지 않네. 우리의 사업은 애초에 태산이 한 마리였고 자네는 단순한 고용인이었네. 그러니 그런 부담을 갖지 말게나. 내일 우람이를 그들에게 따로 팔게. 우람이를 따로 팔면 자네에겐 이득이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일단 우람이도 선배님께 맡기는 걸로 하겠습니다."
"사람 참, 고집하고는.... 그럼 모두들 모이면 다시 의논들 해보기로 하지."
"그게 좋겠군요. 끝이 좋아야 다 좋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양구택은 전화로 다시 고달수를 불러보기로 했고 그 사이 배철권은 개장을 청소하기로 했다. 배철권은 개장 안을 청소하고 개들에게 더운물을 새로 갈아주었다. 그리고 빗으로 개들의 털도 함께 골라주었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내일이면 이 개들과도 마지막인 것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손길이 자주 닿았다.
온다던 고달수의 트럭이 양구택의 농장에 들어선 것은 정오 무렵이 되어서였다.
"곧 온다더니 지금이 몇 신데 이제야 와?"
아침부터 기다리던 양구택이 볼맨 소리를 질렀다.
"너도 당해봐야 알지. 이것도 빨리 온 거다."
"철구는? 철구네 농장엔 놈들이 안 갔다며?"
"조금 전까지 통화했어. 이제 곧 올 거다."
"그래 네 농장에 서 사장 패거리들이 들이닥친 이유가 뭐야? 동방불패와 태산이 때문이냐?"
"그걸 말이라고.... 그 개들이 내 거라고 했더니 어제는 황 총무란 작자를 내게 보내서 십억을 줄 테니 태산이와 동방불패를 자신에게 넘기라고 하더군. 그저께는 태산이 한 놈을 십억에 사겠다던 놈이 말이야."
"죽일 놈. 주먹이면 세상이 모두 제 것으로 보이나 보구나."
두 사람은 사무실로 들어가 난롯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채 일 분이 못 되어 박철구의 트럭이 대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개장에 있던 배철권이 연속해서 들리는 트럭 소리에 사무실로 달려왔다.
"오, 두 분이셨군요."
트럭과 사람을 확인한 배철권이 반갑게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하, 우리가 여기까지 놈들을 달고 다닐 미련퉁이는 결코 아니니 걱정 마시오."
"그게 아니라, 선배님 말씀으론 연변 조직까지 가세를 했다고 해서요."
배철권의 말에 양구택이 대신 나서 고달수에게 물었다.
"그래, 네 농장에 쳐들어간 서 사장 패거리는 어떻게 됐어?"
"내 농장에서 자신들이 찾는 개들이 없자 협박을 하더구먼. 그래서 부산의 업자에게 팔았다고 했지. 물론 엉터리 계약서를 보여 주면서 말이야.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개를 판 것으로 계약서를 하나 만들어 두었거든."
"잘했다. 그래 그게 먹히는 것 같더냐?"
"먹히고 안 먹히고가 어딨어? 일단 주소를 따라 그리로 몰려가겠지."
"아, 내일 이때까지만 들키지 않으면 되는데..... 설마, 삼합회가 사 간 것을 알았다 해도 서유석이나 연변 조선족이 어쩌겠냐?"
"삼합회란 또 뭐냐? 아까 네 전화로는 본토에서 바이어가 왔다고 하지 않았냐?"
"그게 바로 삼합회에서 온 사람과의 흥정이었지. 자 다들 들어 봐. 너희들 의견은 듣지 않고 내 독단으로 결정을 내렸지만 어쩌면 계약은 잘 된 것 같으니까."
"자화자찬은 빼고 욧점만 정리하자고...."
양구택이 아침에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일 정오까지 그 돈이 들어오기만 하면 개들을 넘기면 끝이란다.
"사십억을 불러 삼십억이나 제대로 건지나 했더니 태산이와 동방불패를 육십억에 팔기로 하다니..... 아무튼 계약 하나는 잘 한 계약이다. 하지만 우람이란 놈은 팔지 말고 키워서 눈치를 보면 어떨까? 그러면 혹시 우람이도 사십억 짜리가 되지 않을까?"
양구택의 말이 끝나자 자신의 생각을 보태던 고달수가 눈을 반짝이며 한 말이다.
"내, 이래서 돈 앞에선 친구도 자식도 없다고 했지? 너, 달수, 너도 양심이 있으면 생각을 좀 해라. 우람이가 내 개냐? 아니면 우리의 공동 재산이냐? 우람이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이 후배의 아들 한열이란 말이야. 그런데다 어디서 침을 흘리냐? 침을?"
양구택은 고달수는 물론 침묵으로 일관한 박철구까지 노려보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약간은 억울한 박철구가 손을 흔들며 변명을 했다.
"나는 아니다. 솔직히 우람이가 한열이 개란 것을 몰랐을 때는 탐이 났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란 것을 알아다오. 그리고 달수도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 형편으로 봐서 여기 배철권 군까지 모두 한 멤버로 봤기 때문에 당연히 우람이도 우리 소속으로 착각한 것일 거란 말이다."
생각지 못한 박철구의 절대적 지지에 힘입어 고달수가 고개를 들었다.
"바로 내 말이 그 말이야. 사실 이 마당에 우리 모두가 동업자지 한 사람만 맡은 일이 비틀어지면 끝장 아니냐?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 여기 배철권을 동업자로 생각했기 때문이란 말이다. 며칠 전 우리가 뭐랬냐? 성사가 되면 우리끼리 돈을 모아 저 배철권군에게 식당이라도 차려 주자고 의견을 모으지 않았냐? 그때는 우람이 건을 생각해서였냐?"
고달수의 논리 정연한 반박에 양구택은 입을 닫았고 옆에서 듣던 배철권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 주는 이 사람들이 더욱 마음에 와 닿았다.
"그러셨습니까? 저를 그토록 생각해 주셨다니 할 말이 없습니다. 선배님. 이제 제 말대로 하시겠지요? 우람이도 공동 재산으로 되돌려야 합니다."
"좋네. 달수나 철구도 그런 마음이었던 걸 내 잠시 잊었었구먼. 자. 이렇게 되면 지금 당장 중국인들에게 연락을 해서 결정이 났음을 알려야지."
양구택은 전화를 꺼내 마량의 번호를 찾았다. 그리고는 동방불패를 비롯한 태산이와 우람이까지 팔십억 원에 팔기로 결정을 보았음을 통보했다. 간간히 이 선생의 통역을 보탠 마량은 성사가 이루어져 고맙다는 뜻까지 전했다. 어쨌든 그들은 그들대로 한국에 온 목적을 달성하고 본토로 돌아가서 기쁜 것이다.
"자. 다 끝났다. 이제 다들 배만 채우면 살 것 같을 것이다. 점심으로 무얼 먹을까?"
느긋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은 양구택이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아이고 그러고 보니 놈들에게 쫄리느라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했구나. 우리 또 짬뽕으로 먹을까?"
갑자기 허기를 느낀 고달수가 양구택을 바라보았다.
"짬뽕을 먹든지 짜장을 먹든지 아무거라도 먹자. 탕수육도 먹고 말이야."
고달수와 양구택이 또 중국집 배달을 시키려 들자 박철구는 못마땅한 얼굴로 두 사람을 흘겨 보았다.
"어째 이것들은 짜장 짬뽕에 질리지를 않냐? 맨날 그따위냐? 그런 것 말고 어디 감자탕이나 삼겹살 같은 메뉴는 없는 거냐?"
"중국집에서 무슨 감자탕에 삼겹살이냐? 네 손으로 한다면 또 모를까?"
"뭐? 내 손으로? 못할 것도 없지. 여기 이렇게 좋은 난로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 잠깐들 기다려라. 내 후딱 가서 삼겹살이랑 소주를 몇 병 사 올 테니까."
박철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람같이 문 밖으로 사라졌다. 곧이어 트럭의 시동 거는 소리가 들리더니 차가 멀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성질이 급하다지만 저렇게 급한 놈은 세상에 저놈뿐일 거라. 애구 못 말려."
고달수가 투덜거리며 의자에 앉은 채 길게 다리를 뻗었다. 배철권은 박철구가 사라지자 곧이어 안채로 향했다. 그리고 아내를 찾아 밥과 김치 그리고 간단한 반찬을 만들라고 했다. 결국 그날 점심은 모두들 무지하게 맛있게 먹었다. 삼겹살에 소주에 김치볶음밥까지 먹고나니 모든 세상 근심이 사라질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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