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설

투견판 5. 추락의 길(6) 의심

fiction-google 2024. 3. 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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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말이었다. 어쩐 일인지 금요일인 어제까지 고달수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조중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밤늦게까지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연락이 없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어서 먼저 전화를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시합이 있는 토요일 아침이었다. 조중구는 이른 시간에 일어나 고달수의 전화를 기다렸다. 아침을 먹은 조중구는 초조해지기 시작하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먼저 전화를 걸었다.

"조중굽니다. 어째서 연락이…."

", 그러지 않아도 지금 막 전화를 하려던 차였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 게 말이요. 어제 밤늦게까지 황 총무나 서 회장을 기다렸소만 그들이 오지 않았지 뭐요. 그래서 나를 의심해서 거래처를 바꾸려는 줄 알았지요. 그런데 삼십 분 전에 황 총무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풍산개 한 마리를 골라 고기를 던져줍디다. 그러니 미쳐 선생께 연락할 틈이 없었지 뭐요."

"? 삼십 분 전이면 가만..... 아홉 시 사십 분 아닙니까? 그래서야 저녁때까지 약의 효과가 충분히 나타나지 못할 텐데요. 이번엔 아마 약이 든 고기가 아닌 것 같군요."

"일단, 고기를 먹였으니 내용물은 조사를 해야 할 것 아니겠소? 그래서 이제껏 개가 토한 걸 샅샅이 조사를 하고 맛도 봤지요."

"그래서요?"

"맛을 먼저 봤지요. 선생 말대로 떫은맛이 지독합디다. 땡감보다 훨씬 더 하더라니까요. 그래서 고기에 끼워서 주나 봅디다. 여하튼 고기를 헤집어 녹다 만 약을 찾아냈소. 한데 말이요. 약을 모아보니 대략 네 알 정도는 돼 보입디다."

"그래요? 약을 먹은 개의 체중이 얼마나 나갑니까?"

"글쎄요. 여덟 관 정도니 대략 삼십 킬로쯤 되겠지요."

"그렇다면 체중에 비해 과다 투여로 보입니다. 대게 십 킬로에 한 알 정도가 정량이거든요. 이는 아마 약효가 더 빨리 나타나기를 기대한 것 같군요."

", 어제 주어야 할 걸 못 주었으니 양을 늘렸단 말씀이구려."

"그런 셈이지요. 하지만 약을 다 토했다니 그들이 기대하던 반대의 효과가 나오겠군요."

"그렇지요. 뱃속을 몽땅 비웠으니까요. 가만, 이 고약한 걸 다시 퍼먹이느니 차라리 새로 쇠고기라도 먹여서 힘을 돋워주는 게 어떻겠소? 그래서 우리 개에 베팅하면 선생이 이기는 건 마찬가지가 아니냔 말이오?"

"질 거라고 생각한 개를 이기게 하자는 말이군요. 그럴듯한 말씀입니다. 이왕 약을 다 토했으니 그 방법이 좋겠지요."

"곧 쇠고기를 사다 먹이지요. 선생, 이번엔 성공하시오."

"그래야지요."

고달수와 통화를 마친 조중구는 서둘러 출근 준비를 했다. 그리고 차를 몰고 가면서 생각에 잠겼다. 서 회장이 자신을 특별히 의심하지 않고 있다는 건 확실한 것 같았다. 조중구 자신이 그럴 기미를 보일 행동을 하지 않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투견에 관해서는 초짜이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초짜가 언제 무슨 술수를 익혔겠는가?

미리 겁을 낸 자신이 우스웠다. 설혹 서 회장이 조중구를 의심해서 뒤를 캔다 하더라도 자신이 한 행동이 있으니 어쩌지 못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조중구 혼자 판돈을 몽땅 휩쓸어가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차라리 이렇게 된 이상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통 큰 베팅을 하리라. 단 기간에 큰 돈을 딴 뒤 투견 판을 벗어나면 그뿐이 아닌가?

조금 전 고달수로 부터 받은 정보 이상 더 정확한 정보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서 회장은 약을 먹은 개에게 베팅을 하는 자신을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꼬리가 길면 밟히는 판이니 이참에 태풍처럼 먹고 안개처럼 사라지리라.

서 회장의 수법을 보면 항상 패턴이 같았다. , 약을 먹인 개는 반드시 더 강해 보이는 개를 택하고 상대 견은 다소 약한 놈을 고르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딘가 모르게 강해 보이는 개에게 더 많은 사람이 베팅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실 결과는 반대가 되어 약을 먹이지 않은 개를 택한 사람들이 더 많은 배당금을 갖기 마련이다.

'좋다, 나는 두세 번 만에 승부를 보고 손을 떼야지.'

출근을 해서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끊이지 않았으나 애써 업무에 전념을 하려고 노력을 하며 지루한 하루를 보냈다. 여섯 시가 가까워지자 퇴근을 준비를 하는 사이 신동우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섯 시 반에 지난번 거기서 만나자. 그때까지 금동이도 오기로 했으니까."

"금동이와 통화를 했었냐?"

", 그저께 잠깐 통화를 했었지. 투견 동호회에 가입하려 한다더군. 그래서 계좌 번호를 알려줬다. 금동이 말을 들으니 회사엔 며칠째 결근이라며?"

"그 녀석 얼굴 본 지도 오래됐어. 요즘은 연구실에도 들리질 않으니까."

"그런가 보더라. 을동이란 놈과 싸우느라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쳤나 보더라."

", 그래서 기분전환으로 투견이나 보러 갈 생각을 했구나."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도 어디냐? 자칫 우울증에 걸릴 판 일 텐데."

"그건 네 말이 맞다. 그 녀석이 은근히 겁이 많고 감성이 섬세한 편이잖아?"

"그랬었지. 그럼 이따 보자."

조중구는 집에다 늦을 거라는 전화를 한 후 곧바로 신사동으로 차를 몰았다. 퇴근 시간이라 길에는 차들이 많았다. 그러나 서두른 덕분에 약속한 시간에 커피숍 주차장에 차를 댈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린 조중구는 주차된 차들을 훑어보았다. 낯익은 차들이 보였다. 현관을 들어서니 역시 도금동과 신동우가 먼저 와 있었다. 조중구는 도금동에게 다가가 악수를 나누었다.

"이거 오랜만이구나. 같은 회사 내에서도 얼굴 보기가 힘이 드니..... 이거야. ."

"그러게나 말이다. 중구 너 보기가 미안하다."

"내게 미안할 게 뭐 있냐? 네 일이 잘 돼야지."

"좌우간 앞으론 좀 여유를 가지고 살려고 한다. 마음의 여유 말이야."

"제발 좀 그래다오. 내가 바라는 건 너희들이 제발 집안싸움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야. 그야말로 아까운 청춘을 골육상쟁에 다 바쳐서야 쓰겠냐?"

"골육 상쟁이라니 생각나는데.... 난 말이야. 언젠가 을동이란 놈이 박박 기어오를 때 사실 카인 생각이 절로 나더라."

"뭐야? 그 정도였냐?"

조중구는 도금동의 표정에서 그 말이 거짓이 아닌 것을 느꼈다. 오죽했으면 모질지 못한 도금동이 그런 생각까지 했겠는가? 그런데 옆에서 묵묵히 앉아 있던 신동우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금동이 마음을 백 퍼센트 이해하고도 남는 사람이다."

신동우는 입가에 일그러진 미소를 띠며 천천히 말을 뱉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도 패륜아가 될 뻔했었지. 솔직히 말해, 동일이만 감싸고도는 엄마라는 여자를 죽이고 싶은 충동이 울컥 솟을 때가 있었단 말이야. 아직 아버지가 멀쩡하신데 무슨 재산 욕심을 그렇게나 부리는지.... 생각 같아서는 공장을 확 불살라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고."

신동우의 말에 조중구는 입을 벌릴 만큼 충격을 받았다. 십수 년을 봐 온 신동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뱉었기 때문이다. 동생에 대해 살의를 느꼈었다는 도금동 역시 놀란 눈으로 신동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 나는 못 들은 걸로 할 테다. 너희들의 고해성사를 들어 줄 만큼 내 마음도 평온하지만은 않으니까. 이왕 늦은 저녁밥은 이따가 게임 끝나고 먹기로 하고 그만 일어서자."

화제가 이상한 곳으로 흐르자 조중구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문을 받으러 왔던 종업원이 무슨 일인지 몰라 황급히 옆으로 물러났다. 도금동과 신동우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조중구는 종업원을 지나치며 급히 말했다.

"아가씨, 미안해요. 갑자기 일이 생겨서.... 다음에 들릴게요."

세 사람은 각자의 자동차에 올랐다. 조중구가 시동을 걸어 막 출발하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출발을 잠시 미룬 조중구는 폴더를 열어 발신자를 보았다. 고달수였다. 시합이 몇 시간 남지 않은 이 시간에 전화를 한 것을 보면 긴급한 연락일 터였다.

"이 시간에 웬일입니까?"

의아한 생각이 든 조중구가 급히 물었다.

"별 것 아니오, 이건 선생께 알릴 필요가 있으려나 모르겠소만 지난번 약을 먹었다던 도사견 주인 말이오. 그 사람 개가 오늘도 출전을 한다고 하는데 이번엔 이상하게 고기를 먹이질 않더랍니다. 지난번과는 뭐가 좀 다르지 않소? 선생이 참고하라고 전해드리는 것이니 알아서 판단하시오. 운전 중일 테니 이만 끊습니다."

고기를 먹이지 않았다는 말을 뒤집으면 약을 먹이지 않았다는 확실한 말이었다. 지난번 고기를 먹었다던 도사가 승리했던 사실을 생각하면 이번에는 아무 것도 먹이지 않은 도사가 이길 것은 확실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도사에게 고기를 먹인 것은 정보를 교환할지 모르는 견주들을 혼란시키려는 작전이 아니었던가? 만약 혼란을 주려 한다면 이번에는 왜 아예 고기 자체를 주지 않았단 말인가?

", 뭐 하냐? 왜 안 가고 그러고 있냐?"

신동우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소리치고 있었다. 조중구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와 핸들을 잡았다. 커피숍을 빠져나온 차는 곧바로 올림픽 대로를 달렸다. 이미 어둠이 짙어서 마주 오는 차들의 강렬한 불빛이 허공에 칼날처럼 춤을 추고 있었다. 조중구는 신동우와 도금동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백미러를 보았지만 전연 알 수없었다.

조중구는 다시 고달수가 말한 도사견에게 베팅을 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지난번엔 고기를 먹었다는 말만 믿고 약의 유무는 확인을 하지 않아서 실패를 했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고기도 약도 먹지를 않았으니 도사를 이기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조중구로서는 이런 정보라도 있을 때 크게 베팅을 해서 단숨에 지난주의 손해를 만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반의 경기에서 도사와 후반의 풍산개가 이겨준다면 잃었던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딸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이번에도 교활한 서 회장이 약을 먹인 개가 더 우위로 보이도록 기획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당연히 더 늠름하고 전력이 화려한 놈에게 베팅하게 마련이었다. 사람들이 그런 놈에 베팅을 많이 할수록 반대편에 베팅 한 사람은 더 많은 배당금을 받게 되는 게 아닌가?

조중구는 구로역이 가까울 때까지 수많은 생각을 하며 달려왔다. 그리고 뒤따라 온 친구들과 함께 서비스 공장에 도착했다. 일찍 도착한 탓인지 공장 안팎에는 지난주보다 주차된 차들이 많지 않았다. 실내도 마찬가지여서 빈자리도 여럿이었다. 그래서 조중구를 비롯한 세 사람은 중간에 위치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거 의자 숫자를 보니 백여 명이 넘겠는걸?"

지난여름 이후 처음 들린 도금동이 의자의 숫자에 놀란 듯 실내를 계속 둘러보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런데 개와 견주들이 드나드는 반대편 출입구에서 황 총무와 함께 서유석이 들어오고 있었다. 서유석을 발견한 조중구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쪽 출입구 밖은 투견을 실은 트럭이 세워진 장소가 아닌가? 황 총무야 그렇다 쳐도 서유석이 그쪽 출입구에서 들어서는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조중구는 그들이 또 다른 꼼수를 쓰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의심을 밝힐 재간이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 조 박사. 오늘은 나보다 일찍 오셨구려. 그러고 보니 친구분들도 함께 오셨구먼."

자리를 찾던 곽 사장이 조중구에게 다가오며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았다. 웃는 얼굴을 바라보니 지난주에 잃은 돈은 벌써 까맣게 잊은 듯한 얼굴이었다. 조중구는 물론 도금동과 신동우도 곽 사장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리저리 자리를 찾던 곽 사장은 아예 의자를 끌어당겨 그들 옆자리에 앉았다.

"세 친구가 나란히 앉아 있는 걸 보니 보기에 좋소이다."

"좋게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한데 지난주에는 곽 사장님께서 베팅을 크게 하신 것 같던데요?"

"아니? 조 박사가 그걸 어째 아시었소? 내 얼굴에 나타납디까?"

"그렇다기보다는 왠지 그런 것 같아서요."

"아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고 했더니 실패했구려. 사실 지난주에 이억을 잃었소. 근래에 제일 통 크게 베팅을 했더니.... 조 박사만 따라갔어도 십억은 챙겼을 베팅인데 말이요."

"이 억씩이나요?"

도금동과 신동우는 물론이고 조중구도 이억이란 말에 새삼 놀라웠다. 이제까지 봐 온 곽 사장이 그렇게 많은 액수를 베팅 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중구는 의아했다.

"아니? 무얼 믿고 그렇게 많은 액수를 베팅하신 겁니까?"

"믿는다기보다는 전반 경기에서 조 박사를 따라갔다가 실망을 해서 두 번째는 반대로 가기로 했지 뭐겠소? 게다가 우연히 회장의 베팅액을 슬쩍 살펴봤더니 삼억을 베팅하지 않겠소? 그걸 보니 속에서 와락 승부욕이 발동하지 뭐요."

"회장님이 정말 삼억을 베팅하더란 말입니까?"

"직접 본 사실을 거짓으로 말하겠소?"

조중구는 서 회장의 베팅액이 그렇게까지 높으리란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백여 명이 넘는 회원이 참가하는 요즘의 경기에서 서 회장의 배당금은 엄청날 것이었다. 조중구는 그제서야 서 회장에 이어 그의 아들인 서유석까지 투견장에 나타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두 부자가 합동으로 왕창 챙기려는 수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조 박사, 저길 보시오. 저 사람이 바로 회장 아들이오. 말로는 서 회장의 해공 건설 전무라고 하는데 사실은 강남에서 그렇고 그런 짓으로 돈을 번다고 합디다."

조중구를 향해 고개를 돌린 곽 사장이 귓속말 하 듯 볼륨을 확 줄이며 한 말이다.

"? 저 사람이 회장님 아들인 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고 그런 짖이라니요?"

", 왜 이런 거 말이요."

곽 사장이 말과 함께 자신의 주먹을 들어 조중구에게 슬그머니 내밀었다.

", ."

"한데, 어째 서 회장이 아직 나타나질 않는지 모르겠소."

"그러게요."

연방 시계를 들여다보며 쇠 울타리 주변을 서성이던 황 총무가 드디어 핸드 마이크를 거머쥐더니 사람들 앞에 섰다. 실내는 어느새 빈자리가 없을 만큼 사람들로 가득했다.

"시간이 되었으므로 첫 번째 시합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경기는 도사대 아메리칸 핏불의 경기입니다. 두 견종 모두 싸우기 위해 살아가는 개들인 것은 여러분들께서 잘 아실 겁니다. 우선 선수들을 보시겠습니다. 견주분들 입장하세요."

좌우에서 견주들이 개들을 앞세워 등장했다. 누런색의 도사는 밝은 불빛과 많은 사람 앞에서도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핏불 역시 온몸에 근육을 꿈틀대며 주인을 끌다시피 하며 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힘이 넘쳐나서인지 마구 허공을 긁으며 앞으로 돌진하려고 했다. 조중구는 크기가 보통 핏불보다는 훨씬 큰 그 개를 자세히 보니 어디선가 본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도사 대 아메리칸 핏불의 경기를 감상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바로 그때 도사와 싸우던 개가 바로 이 아메리칸 핏불입니다. 그때의 화끈한 경기를 못 잊어하시는 분들이 많기에 다시 한 번 출전시킨 것입니다. , 편의상 도사는 A, 아메리칸 핏불은 B라고 하겠습니다. 도사, 또는 핏불이라고 쓰셔도 무방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도사는 A, 아메리칸 핏불은 B입니다. 베팅들 하세요. 시간은 단 삼 분, 삼 분을 드립니다."

", 중구야, 내 눈엔 저 아메리칸 핏불인가 하는 개가 마음에 든다. 저 개가 보기엔 더 사나워 보이는데 실제로 싸움도 잘하는 견종이냐?"

도금동이 턱으로 근육질의 핏불을 가리키며 조중구의 의견을 물었다.

"나도 잘은 모르지. 하지만 지난번 시합 때 도사를 순식간에 제압을 하더라."

"그래? 그럼 난 저 핏불로 정했다."

도금동은 더 두고 볼 이유도 없다는 듯 B라고 쓴 뒤 이백만 원을 베팅했다.

"나는 중구 네가 가는 곳으로 갈 테다. 어떤 개에게 베팅할래?"

조중구의 베팅 성공률을 잘 아는 신동우는 커닝을 할 준비를 마친 듯 수첩을 펴놓았다. 조중구는 잠시 생각을 해야 했다. 지난번 도사와 아메리칸 핏불의 시합을 생각한 것이다. 그때는 덩치로 보나 싸움의 경력으로 보나 도사가 유리할 것 같은 경기에서 아메리칸 핏불이 승리를 했었다. 약을 먹인 도사가 맥도 추지 못하고 졌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메리카 핏불이 월등히 싸움을 잘하던 것을 기억하고 그쪽에 더 많은 베팅이 몰릴 것이 분명하리라. 그렇다면 서 회장은 반전을 위해 이번엔 아메리칸 핏불에게 약이 든 고기를 주었으리라. 조중구는 도사에게 고기 자체를 먹이지 않았다는 고달수의 말이 비로소 환히 이해가 되었다.

서 회장의 결석도 같은 맥락일 것이었다. 혼자서 너무 자주 베팅에 성공하니 주위의 눈치가 보인 서 회장은 그래서 빠진 것일 터였다. 대신, 저 서유석이 제 아비를 대신해 도사에 베팅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많은 돈을 배당받기 위해 베팅액도 분명히 크게 하리라.

'좋다.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겁을 낼 이유는 없다. 이 억쯤 베팅을 하리라.'

"나는 도사 쪽에 걸어 볼 테다."

조중구는 작은 소리로 신동우에게 말을 건넨 후 재빨리 A라고 쓰고 이억 원의 액수를 썼다. 곽 사장은 신동우의 수첩을 힐긋 돌아보더니 자신의 수첩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잠시 후 베팅 시간이 지나자 황 총무가 다시 중앙으로 나섰다.

"베팅이 마무리되었으므로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양 측 견주들은 수건을 잡고 링 좌우로 갈라서 주세요.."

황 총무의 구령에 따라 동시에 수건을 푼 견주들이 채 링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두 마리의 개들은 서로 맞붙어 물고 뜯기 시작했다. 본래 상대 개의 위를 덮쳐누르려는 습성이 있는 도사인지라 처음에는 닥치는 대로 이빨을 박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어느정도 상대의 동작이 둔해지는 순간 급소를 물려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도사는 규정된 삼십 분을 지구력으로 버티기 일쑤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도사는 처음부터 그런 작전을 쓸 사이가 전연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아메리칸 핏불이 워낙 빠르고 세차게 공격을 하는 통에 물고 버틸 여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조중구는 어느 순간부터 아메리칸 핏불의 동작과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핏불의 광폭한 행동이 어딘가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아메리카 핏불은 지난번과 동일한 개였으나 오늘은 확실히 지난번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다.

지난번과 달리 시종일관 자신의 행동도 주체치 못할 만큼 빠른 몸놀림을 구사하는 것부터 이상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핏발 선 핏불의 눈동자는 상대를 보는 것 같지도 않았고 눈에서 섬뜩한 푸른 안광이 비치기도 했다. 핏불의 미친 듯한 공격이 계속되자 드디어 도사가 쩔쩔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도사가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핏불의 이빨이 들어올 때마다 맞받아 물기를 반복한 것이다. 그러나 핏불은 자신이 물리는 것에 개의치 않고 미친 듯 공격만 할 뿐이었다. 그러자 도사는 급기야 쇠창살을 등지고 공격을 단념하고 방어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래도 핏불은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에 그런 에너지가 샘솟는지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결국 도사는 조금이라도 덜 물리려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싸우던 개가 주저앉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행동을 제약받기 마련이라 방어에 한계가 드러나는 법이다. 그런 허점을 핏불이 놓칠 리 없었다. 핏불은 광란하듯 도사의 목을 물고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더 두고 본다면 참혹한 결과만 기다릴 것이었다.

황 총무 겸 심판이 급히 아메리칸 핏불의 승리를 선언하고 견주들을 불러들였다. 핏불의 주인이 준비한 횃불을 개의 콧등에 들이댔다. 그래도 핏불은 푸른 안광을 뿜으며 입을 열지 않았다. 다시 횃불을 콧등에 들이대자 노리끼리한 개털 타는 냄새가 연기와 함께 물씬 피워 올랐다.

그 순간이었다. 도사의 목에서 입을 땐 핏불이 홱 돌아서며 주인을 향해 왈칵 달려들었다. 그 통에 견주는 뒤로 벌렁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핏불은 넘어진 주인을 사정없이 물어뜯기 시작했다. 놀란 사람들의 외마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처음부터 사태를 예의주시하던 조중구는 핏불이 흥분제를 먹었다는 걸 비로소 확신했다.

그때 도사견의 주인이 어디선가에서 재빨리 소화기를 갖고 와 소화 분말을 핏불의 눈과 코를 향해 마구 퍼부었다. 그제서야 입을 푼 핏불의 머리는 소화 분말에 뒤덮여 눈도 코도 보이지 않았다. 또한 링 안은 온통 소화기 분말 천지였다.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일어선 핏불 주인이 상처난 다리를 부여잡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도사견 주인이 들고 있던 소화기를 와락 뺏어들더니 핏불의 머리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눈도 코도 보이지 않는 핏불을 향해 수차례 소화기를 휘두르는 주인을 사람들이 밖으로 끌어냈을 때는 이미 핏불은 죽은 뒤였다.

많은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중구는 그 순간에서야 도사가 진 원인을 알았다. 약을 먹지 않은 도사이니만큼 반드시 이길 것이란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다. 그리고 핏불에게 근육 이완제인 톨페리아손을 먹였을 것이란 생각만 했지 그 반대의 효과가 나타나는 흥분제를 먹였을 거란 생각은 꿈에도 몰랐던 일이었다. 이겨야 할 개를 지게 만드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조중구는 지난주의 게임에서 진 원인을 비로소 알았다.

이제부터 서 회장은 어떤 견종이 맞붙던 승패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길을 찾은 것일 터였다. 져야 할 개에겐 근육 이완제를 주다가 이제는 져야 할 개에겐 아무것도 주지않는 대신 이겨야 할 개에게 모종의 흥분제나 스테로이드 같은 물질을 주는 방법까지 찾은 것이 아니겠는가?

다음 순간 조중구는 자신이 방금 거액의 베팅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서야 조중구의 가슴이 쿵 무너져 내렸다. 백 번 천 번 이긴 경기가 확실했는데 어째서 이런 결과가 되었단 말인가? 또 한 번 서 회장의 교활하고 교묘한 장난에 놀아난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아니, 자신이 죽기 전에 반드시 그의 음모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길도 없었고 이 일은 자신도 떳떳하다고는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보다 급한 일은 잃은 돈을 어떻게든 회수하는 일이었다.

"이 게 어찌 된 노릇이냐? 결국 우리가 베팅 한 도사가 지고 말았잖아?"

신동우가 어이가 없다는 듯 조중구를 돌아보았다. 조중구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럼 난 베팅에 성공한 것이네?"

도금동이 히죽 웃었다.

"이거 조 박사의 성공률이 점점 떨어지는 것 같구려. 시험 삼아 소액을 걸었기에 망령이지 조 박사를 믿고 거액을 베팅했더라면 큰 낭패를 볼 뻔했소. 허허허."

소화 분말로 엉망이 된 링 주변을 청소하는 것을 바라보며 곽 사장은 어설픈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 자리의 누구도 조중구보다 심한 상처를 받은 사람은 없었다. 조중구의 머릿속은 온통 이 위기를 기회로 전환할 무언가를 생각하기에 바빴다. 오억의 종잣돈 중 이제 삼억이 남았을 뿐이었다. 이 돈이 최소 팔억을 유지해야 다시 예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지 못 한다면 조중구의 집안은 천호동 빌라에서 살던 때보다 훨씬 못한 나락에 떨어질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대출금을 갚지 못하면 아파트는 경매로 넘어갈 것이니 무슨 돈으로 다시 빌라를 산단 말인가? 조중구는 다시 한 번 서 회장의 진화된 간교함에 가슴이 서늘했다.

조중구는 주위의 소란 속에서도 생각을 거듭하다가 지난주의 시합과 오늘 경기를 봤을 때 서 회장은 두 가지 패턴을 구사하는 것을 알았다. 먼저 져야 할 개에게 약을 숨긴 고기를 주는 것과 견주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약이 들지 않은 눈속임용 고기를 먹이는 것이다. 또 다른 형태는 오늘처럼 져야 할 개에게 고기도 약도 주지 않는 대신 이길 개에게 흥분제나 스테로이드 계의 약물을 투여하는 방법이었다. 그 이외의 방법은 아직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달수의 풍산개에게 약을 먹였다는 것은 져야 할 개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상대 개에겐 고기는 주되 약이 들지 않았거나 고기 자체도 줄 이유가 없을 것이었다. 이미 져야 할 개를 풍산개로 정했다면 상대 개는 그냥 두어도 이길 것이었다. 그리고 상대 개는 보나 마나 풍산개 보다 약해 보이는 개를 택했을 것이다. 그래야 강해 보이는 풍산개 쪽에 베팅이 몰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노리는 서유석은 반드시 풍산개가 아닌 상대 개에게 베팅을 할 것이다.

그러나 서유석은 고달수의 풍산개는 약을 몽땅 토해버렸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유석은 틀림없이 상대 개에게 베팅을 하리라. 그렇다면 이번 한 판으로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킬 찬스가 온 것일 터였다. 조중구는 얼른 장내가 정돈되어 다음 시합을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다음 시합은 핏불 같은 개가 또 나오는 건 아니겠지?"

도금동이 옆자리의 신동우에게 불쑥 물었다.

"? 그런 개가 나오면 거기다 베팅하려고?"

"에이, 무슨 소리. 그건 미친개지 투견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 말이지."

"투견의 첫째 조건이 뭐겠냐? 겁을 모르는 용맹성 아니냐?"

"용맹이 지나치면 광맹이 되는 거 모르냐?"

"광맹? 광땡도 아니고 광맹은 또 무슨 말이냐?"

도금동과 신동우가 대화를 하는 사이 황 총무가 링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예상 밖의 사태에 회원 여러분들의 동요가 있었으나 장내가 정리되었으므로 오늘의 후반 경기를 시작하기로 하겠습니다. 이번에 보실 경기는 불테리어 대 풍산개의 대결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미 풍산개는 몇 차례 보셔서 잘 아시리라 생각되어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대신 불테리어..."

"이거 보우. 황 총무, 신입 회원들은 풍산개가 어떻게 생긴 개인지 잘 모를 것 아니오? 그러니 간략하게나마 풍산개에 대한 설명도 좀 해주시오."

황 총무의 말을 자르고 재빨리 끼어든 곽 사장이 좌중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그러자 몇몇 신입회원들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옳소를 연발했다.

"좋습니다. 짧게 설명을 하겠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풍산개는 덩치가 좀 더 클 뿐이지 진돗개와 비슷합니다. 또한 풍산개는 사실, 사냥을 목적으로 한 개이지 투견은 아닙니다. 다만 산악 지방인 함경도의 험한 지형에서 각종 맹수들과 싸움을 벌이며 살아남은 견종이므로 전투력과 투지가 장난이 아니지요. 고로 그 특성을 이용해서 투견을 시키려는 것이지요. 곽 사장님 이 정도면 설명이 되었습니까?"

"그만하면 되고도 남소이다. 불테리어로 넘어갑시다."

"많은 사람들이 불테리어와 핏불 테리어를 혼동합니다만 사실 두 견종은 테리어 종의 피를 섞긴 했습니다만 전연 다른 목적으로 개량된 개입니다. 핏불은 여러 번 보셨을 테니 먼저 불테리어를 보여드린 다음 설명을 계속하지요. 불테리어 견주는 개와 함께 들어오세요."

마이크를 출입구 쪽으로 돌린 황 총무의 말이 떨어지자 개를 앞세운 견주가 들어섰다. 한데 호기심 어린 여러사람의 눈동자가 머문 곳에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개가 들어서고 있었다. 크기는 풍산개보다는 작아서 진돗개 정도인데 생김새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길쭉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듯한 머리통에 한 쪽 눈은 맞아서 멍이 든 것 같고 단춧구멍 보다 작은 눈은 건포도를 박아놓은 것과 별반 다름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긴 몸통에 비해 다리는 짧고 꼬리 역시 뱀 꼬리 같아서 보는 사람들이 실소를 금하지 못할 생김새였다. 한마디로 투견이라기엔 너무 허접하고 희극적인 외모였다.

"저 개가 투견이라고?"

누군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러자 황 총무가 다시 마이크를 고쳐 쥐었다.

"여러분은 불테리어의 외모만 보고 판단을 하시면 곤란합니다. 보기엔 이래도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불독의 피와 쥐보다 날렵한 테리어 종의 피가 섞여 있으니까요. 더 설명을 드리고 싶으나 베팅에 영향이 미칠 수도 있는 데다 시간 관계상 이만 줄입니다. 대기 중인 풍산개 견주는 입장하세요."

고달수가 풍산개를 데리고 입장을 하자 황 총무는 곧바로 두 견주를 동시에 링 안으로 들어서게 했다.

"빠른 진행을 위해 베팅을 시작하겠습니다. 불테리어는 A, 풍산개는 B 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불테리어는 A, 풍산개는 B입니다. 물론 불테리어, 또는 풍산개라고 쓰셔도 됩니다. , 시간은 삼 분입니다."

"난 두말없이 풍산개에 베팅이다. 금동이 넌 어디다 걸래?"

신동우가 수첩을 꺼내들며 도금동을 돌아보았다.

"난 저 코믹하게 생긴 불테리어에 기대를 해 보려는데? 어쩐지 허 속에 실이 있을 것 같지 않냐?"

"허허실실을 거기다 써먹으면 곤란하지. 저 풍산개의 늠름한 폼을 보란 말이다."

"그래, 그건 네 마음이고 중구, 넌 어느 쪽이냐?"

도금동이 조중구의 수첩을 흘깃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러나 조중구는 잠시 다른 생각에 젖어 있었다. 서 회장 측이 풍산개의 상대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불테리어를 내세운 이유를 알 것 같았던 것이다. 누가 보아도 두 견종의 싸움은 크고 늠름한 풍산개가 이길 것 같아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풍산개 쪽에 베팅이 몰리게 하려고 불테리어를 상대견으로 내세운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결국엔 사람들의 기대와 반대로 약을 먹은 풍산개가 쓰러진다는 시나리오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어림없는 수작일 터였다. 풍산개는 진작에 약을 다 토해서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할 것이다.

", 넌 어디냐니까?"

도금동이 조중구의 어깨를 툭 치며 다시 묻자 그제야 조중구는 급히 풍산개라고 쓴 다음 남은 공탁금의 전부인 삼 억을 베팅해 버렸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선 조중구는 이 한 판에 모든 것을 걸어 볼 작정을 한 것이다. 이번 판 만큼은 서 회장 측의 의도가 눈에 잡힐 듯 뻔해 보인 데다 설혹 두 마리 모두 약을 먹지 않았다는 가정을 하더라도 풍산개가 불테리어 정도에게 질 리가 만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 중구 넌 전반 경기에서 실력을 보여 준 나를 따라와라. 동우는 풍산개에 베팅했지만 나는 불테리어가 낫다고 본다."

"난 이미 풍산개 쪽에 걸었다."

", 아깝다. 딸 수 있는 기회를 발로 차버리다니...."

도금동의 과장된 제스처와 말투에 신동우와 조중구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조 박사, 나는 풍산개 쪽이 나아 보이는구려. 어떻소?"

곽 사장이 조중구에게 작은 소리로 말을 건넸다.

"글쎄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만...."

조중구는 무덤덤하게 곽 사장의 말을 받아넘겼다.

"가만, 마침 서 회장의 자리가 비었으니 저 서 회장의 아들은 어느 쪽에 걸었는지 한 번 가 봐야겠군."

곽 사장은 호기심이 그득한 얼굴로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 앞 쪽으로 가고 있었다.

"베팅 스톱. 베팅 시간이 지났습니다. 통들을 앞 쪽으로 건네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 사이를 릴레이로 돌아가던 플라스틱 통들이 앞으로 전달되자 숫자를 세어 본 황 총무는 다시 링 안의 견주들을 향해 마이크를 돌렸다.

"경기를 시작합니다. 견주 분들은 구령에 맞춰 동시에 수건을 푸시기 바랍니다. 자 준비하시고... 푸세요."

수건이 풀린 개들이 링 가운데로 왈칵 튀어나왔다. 그런데 두 견종의 행동은 서로 달랐다. 불테리어는 생김세와 달리 총알같이 뛰어나왔고 풍산개는 일단 앞으로 나오다가 급히 방향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긴 다리를 이용해 불테리어의 뒤만을 노리기 시작했다. 이는 맹수와 정면에 서는 것보다 후면을 공격하는 것을 몸에 익힌 사냥개의 특성 때문이었다.

반면에 불테리어는 어떻게든 상대를 물어보려고 전력을 다해 풍산개를 향해 돌진할 뿐이었다. 풍산개는 상대적으로 긴 다리를 이용해 불테리어의 뒤를 노리느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불테리어는 이 싸움이 놀이라도 되는 양 가느다란 꼬리를 신나게 흔들고 있었다. 대신, 풍산개는 숨 쉴 여유도 주지 않고 공격을 해대는 불테리어의 허점을 찾지 못해 난감한 듯 보였다. 불테리어의 후면을 공격하려고 해도 도대체 그럴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양상이 일이 분쯤 지나자 드디어 불테리어에게 기회가 왔다. 후면을 노리고 돌아가는 풍산개의 귀를 불테리어가 운 좋게 덥석 문 것이다. 불테리어는 방울뱀이 꼬리를 떨 듯 신이 나서 채찍 같은 꼬리를 마구 흔들며 풍산개를 땅바닥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위기를 느낀 풍산개는 몇 번이나 몸을 솟구쳐 불테리어를 떼 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물린 귀의 상처가 커질 뿐이었다. 불테리어는 결정적인 대미지를 입히려는 듯 풍산개의 귓부리가 잘려나갈 정도로 머리를 휘졌기 시작했다. 머리뿐 아니었다. 짧은 다리로 딱 버티고 서서 온몸의 반동을 이용해 풍산개를 휘젖고 있었다.

지칠 줄 모르는 불테리어의 공격이 계속되자 풍산개의 입에서 깨갱도 아니고 끙도 아닌 알 수없는 비명이 새어 나왔다. 마침 앞자리의 몇몇 사람과 황 총무가 그 소리를 들었다. 황 총무가 마이크를 손에 들었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풍산개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경기 끝, 풍산개가 항복을 의미하는 비명을 질렀으므로 규정에 의해 실격패를 선언합니다. 이번 시합은 불테리어가 이겼습니다. 양쪽 견주들은 어서 개들을 수습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조중구는 풍산개가 불테리어에게 귀를 물리는 순간부터 이미 패배를 예감하고 있었다. 불테리어가 그렇게 재빠르고 강인한 개였는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약을 먹지 않은 풍산개가 이길 것만 생각했을 뿐 불테리어란 견종에 너무 무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중구의 초조함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다. 이번 판 만큼은 다 이겨놓은 게임이란 생각에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잘못이었다. 이제까지 고달수의 정보 하나로 승승장구하던 조중구가 그 정보 하나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출발점에 들어선 것이다.

조중구는 황 총무가 불테리어의 승리를 선언하는 순간 심장이 툭 멈추는 것 같은 착각과 함께 정신이 혼미해서 쓰러질 것 같았다. 양손으로 의자 모퉁이를 꽉 움켜쥔 조중구는 입술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 아깝다. 풍산개가 지다니. , 중구 넌 오늘은 어찌된 거냐? 어라? , 중구야. 임마."

신동우가 놀란 소리로 눈동자가 풀린 조중구의 어깨를 흔들었다.

"중구가 왜?"

도금동도 한자리 건너의 조중구에게 눈길을 돌렸다.

", 중구야, 정신 차려."

조중구의 귀에 신동우의 말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이 자식이 갑자기 왜 이러냐? 베팅이 연속으로 빗나가니까 쇼크를 먹었나? 동우야, 얘를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하는 것 아니냐?"

도금동이 조중구의 안색을 살피며 신동우의 의견을 구했다.

"아니, 괜찮겠는데? , 정신이 드냐?"

친구들의 말소리에 정신이 돌아온 조중구는 공허한 눈으로 실내를 돌아보았다. 극히 짧은 순간이나마 잊었던 악몽을 도금동과 신동우가 현실 세계로 다시 끌어들인 것이다.

", 놀랐네. 야 인마. 게임에서 질 수도 있는 것이지 정신을 잃을 것까진 없잖아?"

"내가? 내가 언제 정신을 잃어?"

조중구가 간신히 항변을 했다.

"아직도 정신없는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정말 정신이 나갔었군."

도금동이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도대체 얼마를 베팅했기에 간 큰 네가 정신을 잃을 정도란 말이냐?"

"베팅액의 문제가 아니라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래."

"그래? 그럼 그만 일어서자. 배당금 발표는 들으나 마나 아니냐?"

"그렇긴 하지. 금동이 넌 두 게임 모두 맞추었으니 입금이 되겠지만 중구하고 난 완전 개털이 됐는데 더 앉아 있은들 뭐 하냐?"

신동우가 조중구의 눈치를 살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중구는 후둘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일어나 통로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차에 올라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 괜찮겠냐? 운전할 수 있겠냐고? 어디 가서 뭘 좀 먹고 헤어질까?"

"괜찮다는데도 그러네. 난 괜찮다고."

도금동이 쉴 사이 없이 무어라고 했지만 조중구는 그 소리가 먼 곳에서 들리는 바람소리 같았을 뿐이었다. 조중구는 무작정 시동을 걸어 차를 출발시켰다. 도금동과 신동우가 먼저 떠났는지 뒤를 따라오는지 전연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구로의 서비스 공장을 떠난 조중구가 서울의 강남까지 무사히 도착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댄 조중구는 운전석에 앉은 그 자세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문을 열고 내릴 힘도 없었다. 아니, 힘이 없다기 보다 그럴 정신이 없었다고 해야 옳았다. 운명이 그의 눈을 가리는 통에 엉뚱한 문을 노크한 것일까? 아니면 운명이 그를 바닥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가랑이를 움켜쥔 것일까? 조중구는 오래도록 그렇게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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